신구약중간사 : 시대의 개관
■ 연대표(BC)
- 334년 : 알렉산더가 헬레스포트를 건넘
- 331년 : 알렉산더가 바사인들을 물리침
- 323년 : 알렉산더가 32세로 바벨론에서 죽음
- 320년 : 톨레미왕조 예루살렘 함락
- 260년 : 히브리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됨(70인역)
- 197~142년 : 헬라이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다를 지배함
- 175년 : 외경이 완성됨
- 169년 : 에피파네스가 성전의 보물을 노략함
- 166년 : 마카베오 가문이 반란을 일으킴
- 165년 : 성전 청결
- 146년 : 로마에 의해 가르타고가 점령되고 포에니 전쟁이 종식됨
- 134~104년 : 그리심산 성전,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BC. 134~104)에 의해 파괴
- 63년 :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함
- 44년 : 율리우스 케사르가 암살당함
- 37년 : 헤롯이 예루살렘의 본봉왕으로 다스림
- 20년 : 성전 재건 시작
말라기 선지자 이후 그리스도가 강림하기 까지의 400년간을 침묵의 시대, 또는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시기 역사적으로는 지배자들의 변화속에서 이스라엘의 정세는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Ⅰ. 페르시아(바사,Persia) 시대
페르시아 통치기간중 유대인들이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왔습니다 고레스(Gyrus)황제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의 귀국과 성전재건을 허락함으로 이를위한 유대인 재건 인력들의 귀국이 이어졌습니다 팔레스틴 주민들의 방해속에서도 다리오 대제(Darius the Great) 기간중에 성전재건을 완공하였습니다 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다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유대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 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 이후, 1세기반 동안 페르시아 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종교는 통제받지 않았습니다 유대통치자는 대제사장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자율성을 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제직분과 정치적 공직 겸임은 이러한 정경일체와 분리의 문제로 암투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직을 놓고 시기와 음모,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느헤미야12:22)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의 형제들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얏두아 동생 므낫세가 사마리아의 통치자인 산발랏(Sanballat)의 딸과 결혼하고 사마리아 성전이 그리심산에 건립되었습니다 므낫세가 이방여인과의 결혼으로 제사장직에서 해임 요구에 직면하자 그의 장인 산발랏이 그리심산에 새성전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산보다 그리심산이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심산의 성전은 하스몬 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BC. 134~104)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리심산은 여전히 사마리아의 성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들의 성역에 예배처소가 복원될 것이라고 예수께 말씀드렸으나 예수께서는 예배처소보다 예배자의 영적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요한복음4:20)
페르시아가 그리스 침략전쟁에 실패하자 이집트 등 피정복민들은 독립쟁취로 동요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3세(Artaxerxes Ⅲ)시대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대한 투쟁에 참여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 연안으로 유형을 보내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이집트 거주자들은 그곳에 정착을 하였습니다 그랴다가 살해 된 후 예레미야 선지자는 망명을 선택하였고 나일강 동쪽 평야인 다바네스에 피난하였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주하였습니다 BC. 5세기까지 이주민의 행렬이 계속되었고 현재의 에스완 근처인 엘레판틴 섬에는 유대 용병들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조상 여호와의 신앙과 이방적 요소를 혼합한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였습니다
Ⅱ. 알렉산더 대왕 시대
헬라문화의 전성기를 가져온 마게도냐왕국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제국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알렉산더는 헬라문화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확신으로 BC. 333년, 소아시로 진군하여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시리아와 팔레스틴 남부를 점령하고 이집트로 향하였습니다 두로와 가사가 저향하였으나 의미없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얏두아시대에 헬라군대가 승리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8장)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의 율법을 승계시키고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는 특혜를 주었습니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건설때에는 유대인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특혜를 부여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인도의 편잡지방까지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마다 신도시를 건설하고 헬라문화를 전파하였습니다 생활문화와 양식을 헬라적으로 채택하고 헬라식 웅장한 건축물과 체육관, 야외극장을 건설하고 헬라식 이름과 헬라어와 헬라식 의복을 빠른 속도로 전파시켜 나갔습니다
헬레니즘의 물질적 문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이고 현실감있게 다가왔습니다 교역과 상업이 신경제적 부유층을 형성시켰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습니다 높은 수준의 주거방식과 식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도 헬라문화의 화려한 외형에 매료되었고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벨론 유수이전에는우상숭배가 장애물이었다면 바벨론 유수이후의 가장 큰 장애물은 헬레니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와 마게도냐의 지배과정에서 많은 전통적인 유대관습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헬라식 이름과 헬라철학을 수용하고 자기 조상의 신앙과 헬라식 지혜를 혼합하여 제3의 종교적 문화가 도래하였습니다 일부 반대계층은 보수의 길을 지키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하였지만 그 세력은 미약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근동의 정세가 불확실하였으나 이미 뿌려놓은 헬레니즘의 물결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시민사회에 스며들었습니다 헬라는 네명의 장군들이 나누어 지배하게 되었으며 애굽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쿠스왕조는 영토와 권력을 위해 전쟁하였으나 그들의 사회문화적 사명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여 왔습니다 역사가 타른(W.W. Tarn)은 "알렉산더가 세상을 너무 변화시켰으므로 그의 후대에 가서는 아무것도 그 이전처럼 될 수가 없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Ⅲ. 톨레미 왕조 시대
알렉산더 사후, 유대는 안티고누스(Antigonus)장군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자"라는 의미의 "소테르"로 불리우는 톨레미 1세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톨레미1세는 BC. 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집트에 왕국을 둔 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고 이 도시는 수세기동안 유대사상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톨레미2세(필라델푸스,Philadelphus)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번역은 훗날 70인역(LXX)이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 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대에서 왔다는 70인에서 유래하였지만 실제로는 12지파로부터 각 6명씩 72명이 참여하였습니다(BC. 260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애굽정부에 조공을 바쳤지만 지방행정면에서 대제사장 책임하에 자치권을 사용하였으므로 톨레미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대제사장인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이었습니다 그는 톨레미 1세때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주도하였으며 가뭄과 포위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할 수로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몬1세로 알려진 대제사장은 BC. 3세기 중엽에, 시몬2세는 BC. 200년경의 인물로서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톨레미 시대 제사장 가문이었던 오니야가(家)와, 친이집트파이며 상류계층을 대표하였던 도비야가(家)는 느헤미야를 괴롭혔던 암몬사람 도비야와 연관된 가문으로(느헤미야2:10,4:3,6:1~19)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했습니다 톨레미 2세의 한 파피루스 문서에는 도비야는 요단 동편 암몬지역에 주둔하였던 톨레미 군대의 기병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고고학자들이 중앙 요르단의 아락 엘엠밀(Araqel Emir)에서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은 BC. 3세기때의 거대한 능묘를 발굴한 바 있습니다 도비야가는 신약성경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행하는 수세관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오니야2세가 톨레미4세에게 대제사장이 바쳐야 할 조공 20달란트를 거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도비야 출신 요셉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세관을 맡아 알렉산드리아 자격권 공무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티오쿠스3세와 셀류쿠스왕조 시대의 20년간 영향력있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Ⅳ. 셀류쿠스(Selucus) 왕조 시대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알렉산더제국을 계승한 국가들이 셀류쿠스1세(니카톨, Nicator)에 의해 건립된 원인으로 셀류키드(Seleucids)라고 불렀습니다 초기의 지배자들은 셀류쿠스, 또는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으로 오론테스강의 안디옥을 수도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3세 대제는 BC. 199년까지 이집트와 전쟁을 통하여 요간강 발원지인 파니온전투의 승리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역사를 크게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전의 톨레미 왕조가 유대교에 관용적이었다면 셀류쿠스 왕조는 유대인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압하였습니다 친헬레파 유대인과 동맹을 맺은 안티오쿠스4세(에피파네스,Epiphanes)는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의 대제사장 오니야3세를 축출하고 그 형제 야손(Jason)의 주장을 지지하였습니다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직 임명을 받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는 대제사장직을 정치적직임으로 생각한 반면 유대인들은 신성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것을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야손은 헬라문화를 장려하며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건설하고 헬라식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메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더 큰 뇌물공여로 대제사장직을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베냐민지파의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자 크게 반대하였고 야손은 군대를 일으켜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이에 메넬라우스도 안티오쿠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등 팔레스타인은 일시에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쳤습니다 이집트와 대치하고 있던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유리한 입장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이용하여 안식일에 예루살렘 공략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시리아 군대는 메넬라우스의 적대세력을 대량 학살하였습니다 도시의 성벽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요새 아크라가 성채에 건조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정통적 유대신앙의 자취를 일소해 버릴 결심으로 제우스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일시 하였고, 턱수염을 기른 이방신상들을 건립하여 돼지를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안식일과 유대절기와 성경필사 작업과 율법준수를 금하였고, 탄압의 강도를 높여 갔습니다 엘르아살이란 서기관은 돼지고기를 거부한 죄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군대의 힘으로 대제사장직을 유지한 메넬라우스와 친헬라파 유대인들은 옛 질서를 폐지하고 타락의 길로 빠르게 진행하였습니다 정통파들의 씨를 말리려는 듯 대부분의 이스라엘 정통파들은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으나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숨어버리는 자들도 존재하였습니다
Ⅴ. 마카비 혁명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예루살렘 인근 24km지점 모딘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전례대로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려 유대백성들에게 본을 보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맛다디아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두려움에 떨던 많은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격노한 제사장은 제단에 다가가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의 사자를 살해하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맛다디아는 5명의 아들과 함께 이방제단을 파괴하고 체포를 우려해 고원 산악지대로 피난을 하였습니다 정통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맛다디아 일가에 합세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헬레니즘과 결합한 유대인들을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쟁을 하거나 방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반복되었습니다 이에 맛다디아는 안식일의 자기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교전을 허용하는 새로운 규칙을 반포하였습니다
지도자 맛다디아가 혁명초기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자신의 3남인 마카비(Maccabee,쇠망치) 유다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종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 후 마카비의 추종세력은 맛다디아를 능가하였고 시리아군을 대항할 자체 군대를 보유할 정도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유다는 기습전을 감행하여 엠마오 전투에서 시리아군과 친헬라파 유대인을 격퇴시켰고 노획물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마카비는 그후 아크라를 제외한 전 도시를 점령하게 되었고 성전에 들어가 이방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동시에 병행하였습니다 제우스 제단을 헐고 에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한 새 제단을 세웠으며 제우스의 신상은 모든 지역에서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기슬래월 25일에 시작하여 8일간 계속되는 이 봉헌 축제는 하누카(Hanukkah)라는 히브리 광명제(the Festival of Lights)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성전모독 3년만에 모든 것을 되찾은 평화는 너무도 짧았습니다 시리아 장군 루시아(Lysias)가 예루살렘 근처 전투에서 마카비군을 격퇴시키고 예루살렘을 공략하였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앞에서 바람이 고요해지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시리아 본국에 큰 위기가 발생하여 루시아 장군은 회군을 해야만 했습니다 루시아는 유대주의 제한법을 철회하고 내정간섭을 중단하기로 화친 제안을 하였습니다 메넬라우스는 제거되고 온건파 헬라주의자인 알키무스(Alcimus)가 대제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루시아는 유대추종자들을 징계하지 않는 대신 예루살렘 성벽은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마카비 장군들과 존경받는 서기관, 장로들의 회의가 소집되어 마카비의 반대가 있었지만 화친이 최선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알키무스는 대제사장이 되고 메넬라우스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마카비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시를 떠났습니다 마키비의 예견대로 알키무스는 정통파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학살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에 다시 마카비에게 전향하였으나 무기도 장비도 거의 없는 800명의 군대는 시리아의 정예군앞에서 대패를 당하는 참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마카비의 형제인 요나단은 마카비 군대 수백명과 함께 요단강을 도하하여 도망 하였습니다 그들은 군대를 갖지는 못하였으나 외교적 성과는 취할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 왕좌를 노리는 두 경쟁자가 도움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군을 일으킬 지도력이 요나단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요나단은 승세를 보이는 후보를 지지하며 다른 쪽에서는 스파르타와 로마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전쟁종료전 요나단은 유대인의 대제사장과 시리아 귀족에 임명되었고, 동생인 시몬은 팔레스타인 평야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유다의 내적 번영을 이룩하였고 사후에는 동생 시몬이 대제사장직을 승계하였습니다 시몬의 탁월한 정치수완으로 시리아의 데메트리오를 합법적 왕으로 승인함으로서 유대인들은 세금 면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독립을 쟁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몬은 아크라를 점령해 왔던 시리아 주둔군을 굶어죽게 함으로서 욥바와 벳술의 도시들을 장악하였습니다 맛다디아의 막내 아들인 시몬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이라는 호칭을 받으며 하스모니안(Hasmonaean) 왕조를 새롭게 건설하였습니다 BC. 134년, 야망에 찬 사위에게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는 겨우 도망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Ⅵ. 하스몬 왕조 시대
시리아는 유대의 시리아 종속관계 유지와 시리아 연합군대 출정에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요한 힐카누스 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요나단과 시몬이 병합하였던 욥바와 벳술은 다시 시리아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힐카누스의 통치술로 이두매지역(에돔)과 연안도시들이 유대영토로 귀속되어 지면서 상인계층들에게 예전의 무역로를 회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힐카누스는 이두매인들에게 할례를 장려하고 유대신앙을 지킬 것을 강요하였는데 이는 후기 유대교가 반대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맛다디아의 손자가 정복인에게 종교적 일치를 주장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 힐카누스는 사마리아에 출정하여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는 등 유대군은 승리하였으나 초기 종교적 열성은 명확성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BC. 104년 힐카누스가 사망하기 까지 영토는 매우 확장되었습니다 그후 과거의 헬라주의자들은 배척당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은 사두개인들 가운데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마카비 시대의 정통파들은 기독교이전과 신약시대에 바리새인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힐카누스 자신은 율법 고수주의자였으나 그의 자녀들은 히브리 사상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귀족으로 간주하였으며, 바리새인을 경멸하였습니다 마카비의 후손이 헬라화되는 패역현상이 목격된 것입니다 힐카누스의 사망으로 자녀들의 분쟁이 가속화하였지만 형제 중 3명을 옥에 가두고 감옥에서 두명을 굶어 죽게하는 등 잔인성을 보여주며 장자인 유다가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감옥에 투옥되지 않은 다른 한명도 궁전에서 살해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헬라식 이름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ulu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습니다 통치 1년, 그는 레바논산 북편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치세를 보였지만 생애 내내 불안한 심경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아리스토볼로스가 사망하자 감옥에 갇혀있던 요나단이 왕위를 승계하였습니다 역사속에서는 헬라식 이름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는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이집트 국경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다윗왕과 솔로몬시대의 영화를 모두 되찾았습니다 하스몬왕국에 병합된 지역들은 유대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어 갔고 이두매가 유대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갈릴리 또한 유대주의자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저항하였고 아볼로니아와 스구디아(벧산)는 비유대적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바리새인들을 멸시한 사건을 계기로 당파적 분쟁이 내란으로 확대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얀네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바리새인들은 시리아와의 화친을 파기하였으나 얀네우스는 주모자 800명의 바리새인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죽기전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고 아내 샬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에게 사두개인의 충고를 멀리하고 바리새인을 가까이 할 것을 명하고 통치권을 그녀에게 이양하였습니다
전전(前前)왕인 아리스토볼로스와 전(前)왕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하였던 알렉산드라는 하스몬 왕가 두 통치자의 미망인인 동시에 현재의 왕으로서 7년을 치세하였습니다 그녀는 장자인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에, 차남인 아리스토볼로스를 군 총수로 임명하여 각각 정권을 양분하며 통치하였습니다 특히 그녀의 오빠인 바리새인의 지도자 시므온 벤 세타(Simeon ben Shetah)를 활용하여 유대 적대당파들의 화친을 도모하였습니다 알렉산드라의 통치기간중 바리새인들은 유대건설에 공헌할 기회를 가지며 교육적인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시므온 벤 세타가 산헤드린(유대국가회의)공회의 의장일 때, 모든 젊은이들은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광범위한 초등교육 제도의 성립과 실시로 유대의 모든 대소도시들에서 히브리성경 중심의 교양과 학자들을 배출하는 기능을 갖게 하였습니다
당파분쟁의 상처는 집권자의 정치철학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만족하는 시대에 사두개인들은 분개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얀네우스가 일으킨 자기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사건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계획이 실현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두개인들이 살해되면서 내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군권을 쥐고 있는 차남 아리스토볼로스를 알렉산드라의 계승자로 추대하였고, 제국의 팽창을 바라는 무리들의 지지 또한 함께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장자권 승계를 바라며 형제의 대결을 예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라가 사망하자 힐카누스2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왕위를 승계하였으나 아리스토볼로스가 사두개인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그후 아리스토볼로스의 장자와 힐카누스의 외동딸의 결혼으로 짧은 평화가 있었지만 힐카누스가 도망하고 이두매의의 총독인 안티파터(Antipater)가 지지함으로서 또 다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폼페이(Pompey)가 유대의 평화를 유지하고 로마제국 군단을 이끌고 세계속으로 등장하였습니다
Ⅶ. 로마시대
폼페이는 아르스토볼로스가 로마를 반역할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포위 3개월만에 요새를 함락시키고 1만2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며 점령을 완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과 지성소에까지 침범하였지만 고가의 비품과 성물들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으며 그들의 예배 또한 존중하였습니다 유대는 로마의 시리아 행정구역으로 부속되었고, 해안도시와 사마리아와 요단 동편의 도시 모두를 잃게 되었습니다 힐카누스는 갈릴리와 이두매와 베레아의 유대지배자인 대제사장으로 인정되었지만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아리스토볼로스는 포로들과 함께 로마고 끌려가다 도주하여 폭동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힐카누스에 의해 진압되고 폭동은 싱겁게 끝나버렸습니다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안티파스)는 아리스토볼로스에 대해 매우 반감이 있었으나 힐카누스와는 화친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힐카누스의 안티파터에 대한 두터운 신뢰로 사실상 유대의 권력은 안티파터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만큼 안티파터 세력을 혐오하였습니다 이두매지역은 행정상으로 유대에 귀속되어 힐카누스가 치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결코 유대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오랜 적대감도 변한것이 없었습니다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이사)가 암살되고 위기가 닥치자 안타파터와 그의 아들들은 세금을 열성적으로 거두어 들여 카시우스(Cassius)의 새 정권에 바침으로서 충성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Herod)은 왕위보장 밀약서를 받고 유대지방 수세관의 직위에 임명되었습니다 안토니(Anthony)가 부루터스와 카시우스를 빌립보에서 패퇴시키자 아시아는 또 다시 새로운 정권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안토니에게도 뇌물을 주며 새로운 충성을 맹약하였습니다
한 때, 페르시아제국이 지배하던 동부지역은 로마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Parthians)족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BC. 41년, 그들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아리스토볼로스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를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헤롯은 힐카누스의 사후 자신이 계승하려 했던 왕위를 눈앞에서 강탈당하자 로마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로마에서 안토니의 환심을 얻은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파르티아인이 로마군에 의해 쫒겨간 후, 헤롯은 로마군대와 함께 승전고를 울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좌에 취임하였습니다
헤롯은 BC. 37~AD.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예수 탄생시기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영아를 모두 살해함으로서 역사적으로도 악명이 높아 있었습니다 헤롯의 영아살해가 성경고증외에 특별한 증거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잔악성 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구스도(Augustus)황제는 열명의 아내를 거느린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 보다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논평할 정도로 헤롯은 친족살해가 많았습니다
헤롯의 번영기인 BC. 25~14년, 로마(가이사)와 유대인의 관계에서 중도적인 노선을 취하며 유대신하들의 호의를 얻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전 국토에 걸쳐 도시를 건설하고 요새와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와 헬라문화의 사치스러운 문화시설을 건립하였습니다 사마리아를 아구스도 기념 세바스터라는 새 이름으로 명명하고 스트라톤 망대에는 열개의 망대를 가진 성벽과 제방으로 보호되는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가이사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습니다 헤롯왕 18년(BC. 20~19),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자재는 제사장들이 1년반 동안에 걸쳐 건축하였으나 성전의 복잡한 제건물과 구조는 알비누스(Albinus, AD.62~64)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완공 10년후 AD. 70년 디도(Titus)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죽기전에 그가 누렸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에 도전하는 한 분이 세상에 탄생하였습니다 아무도 애곡하는 이 없는 헤롯왕의 죽음으로 신구약 중간시대의 막은 내려가고 신약시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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