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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리발생의 전제들

에반젤(복음) 2021. 7. 14. 02:37

교리발생의 전제들

구약성경의 교리적 근거

1. 유일신 교리 (dogma of monotheism)

구약 백성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이 여호와로서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주로 일하신다는 확신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어 자기의 백성 삼은 여호와임을 확신하고 섬겼다.
유대교는 유일신 교리를 유일한 교리로 삼았기 때문에 유일신을 강조하는 신명기 6:4을 암송했다. 모세의 글과 모든 선지자들의 글의 가장 기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이 “쉐마”이다. 쉐마는 기도가 아니라 신앙고백으로서 유일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쉐마를 암송하여 자기들의 거룩한 사명 곧 유일신 신앙을 고수할 것을 다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단지 일년에 두 번만 대제사장이 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화해절과 지성절에만 이 이름을 부르고 그 외는 “아도나이”(ינדא, Adonai), 주님으로 대치하여 불렀다. 여호와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견해는 예루살렘 성전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계시는데 그곳은 성전 내면에 축조되었으므로 모든 빛이 차단되었고 창이 전혀 없었으며 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게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접근불가하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표상되었다.
“숨겨진 하나님 사상”: 하나님은 처음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부터서 어두운데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밝은 빛을 내셨음이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숨겨지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말하고 강조한 선지자는 이사야였다(사 45:15). 어두운 곳에 계신 하나님의 표상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포함하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임의로 어찌 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유일신 신앙을 신약교회가 그대로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믿는 유일신 사상이 신약 교회의 기본 신앙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유일신 사상을 그대로 받았다(막 12:29-30). 여호와를 후기 구약 교회는 아도나이, 주님으로 호칭하였다. 그런데 칠십인경(LXX)의 번역을 따라 주님(kurioj)의 호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므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여호와와 동등하고 동일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유일신 사상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가 형성되는 기반을 이루었다.

2. 언약 관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소유가 되었다(출 19:5-6; 19:1-24:11). 언약은 하나님이 한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여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김과 경배를 받으시려고 하셨다(출 19:16-23:19).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 되는 길은 언제든지 언약 체결을 통해서 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막에 거처를 정하시므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백성들 각자 안에 거하셔야 하지만 아직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으므로 전체 위에 거처하셨다. 따라서 성전이 하나님의 거소요 임재의 표가 되었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 그들은 거룩해야 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이므로 죄 가운데는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출 19:6; 레 19:2; 신 23:14). 하나님은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고 또 거룩한 백성을 가지기 위해서 그들에게 율법을 베푸셨다.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로 주어졌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남고 존속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가나안에서 이방신들을 섬길 때도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갈 명분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출 20-24장)이 항상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매이게 하였고 여호와 종교를 버렸다가도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명분을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 언약 체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깊은 선민의식을 가졌다. 하나님의 선택되고 소유된 백성이라는 의식이 늘 그들을 지배하였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도 첫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셨고 이스라엘을 백성 삼고자 하실 때에도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새언약을 위해 존재하였다. 그 새언약은 모든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일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교회를 목표하고 이루어졌다.

3. 율법 제도

율법은 “언약백성의 생활규범”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사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다. 그리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베푸셨다.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신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므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 율법은 언약 백성이 의존해서 살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율법을 지킴으로만 언약 백성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율법은 언약 백성들의 생의 질서를 표현하였다. 언약은 약속된 거룩이고 율법은 이 거룩을 지키는 울타리로 그 훼손을 막는 일을 한다. 율법을 지키면 언약의 거룩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소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거룩해야 했다. 이 거룩에의 길은 언약의 법을 지킴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거룩의 요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유일신 교리가 구약 종교의 유일한 근거이고 “토라”(율법, 가르침, 교훈)는 언약 백성의 생의 법칙이었다.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백성 되었으니 그 백성으로 남 는 길은 율법에 매이고 그 율법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언약 체결을 통해 여호와만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작정되었고 이 하나님 섬김의 법으로 율법이 수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섬김은 그의 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들어야 했다. 과거 하나님의 큰 구원 사역을 선포 받을 뿐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약속으로 받았다. 이방인들이 신앙 대상을 보고 섬기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단지 말씀의 선포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상을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이나 짐승의 상도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계시의 말씀으로만 삶으로 신 6:4은 그 중에서 최고 계명으로 평가되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불순종하자,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 율법은 그 임무를 다하였다. 율법은 지킬 수 없고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지킬 수 없어서 멸망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율법의 완성자가 와야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가능하여 율법이 목표한 것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므로 그 기능을 다하였다. 구원은 구속 주를 믿음으로 되고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므로 율법은 그 사명을 다하였다.

 

4. 제사제도

제사제도는 율법을 어긴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이요, 백성들이 살 길이다. 백성의 임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제사를 하여 이루어졌다. 율법은 제사제도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한 법도를 제시하였다. 계시 종교이므로 경배 받으실 분이 예배의식을 정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도 하나님이 정한 예배의식에 합당하게 드려질 때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이 성전제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능을 하였다. 제사는 범죄한 자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기 때문이다.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은 자기들의 범죄와 계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 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하나님을 섬기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죄가 용서되는 길은 피 흘림으로만이 가능하게 정해졌다(레 17:11). 따라서 속죄를 위해 짐승으로 제사하므로 범한 계명과 범죄를 용서받고 다시 백성으로 살 수 있었다. 제사가 하나님의 호의를 입고 삶을 계속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제도는 속죄를 위해서 세워졌지만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업는 길이었다. 제사제도는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행되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곳으로 택정 하셨기 때문이다(신 12:5,11,14; 대하 7:12). 그러므로 성전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중심점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 거기에로 귀결되었다. 성전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단지 성전이 제사의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암재의 자리였다(신 12:5,11; 왕상 9:3; 대하 6:2).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엄재하심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스라엘의 삶과 모든 활동은 예루살렘 성전에로 집중되고 그곳을 목표하고 이루어졌다.
성전제사는 반복되고 계속 수행되었지만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범죄를 쉴 수가 없었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완전한 제사가 되지 못하여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이스라엘의 의식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스 9:6; 렘 5:25; 30:14). 포로기간을 빼고 성전제사가 중단된 적이 없었다. 제사는 계속되어도 속죄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범죄로 인한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제사는 속죄와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인식된 것이다(사 66:3). 이것은 바로 성전제사는 완전한 속죄제사를 가리키기 위해 세워졌음을 밝히는 것이다. 레위 제사제도는 완전한 제사로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는 참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바라보게 하는 임무를 했다. 그래서 레위 제사제도는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였다.

5. 유월절 경축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한 민족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근거들을 마련하셨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 출애굽을 축하하고 기념하였다. 출애굽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유윌절 행사는 속죄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제사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것이었다.성전제사는 유월절 경축이 그 절정을 이룬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구원 사역으로 축하되었다. 출애굽이 민족적 단위로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인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출애굽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하여 언약의 회복과 새 은혜 시대의 시작은 그 유월절 제사의 반복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므로 나타날 평화의 때를 바라보는 소망이 계속되게 되었다. 출애굽의 큰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이 더 크고 완 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으로 기대하므로 완전한 구속은 하나님의 미래 약속으로 남았다. 이 구원은 미래의 구속주가 이루신다.
유월절 식사에서 문이 열려져 있어서 구속주가 언제든지 들어오실 수 있다는 기대가 유월절 경축의 말씀에서 자라났다. 즉 처음 구속에 근거해서 미래의 완전한 구속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월절을 경축할 때마다 구원을 완성할 구원자 곧 메시아를 하나님이 보내실 것을 믿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게 되었다. 과거에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이 장래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불완전한 삶의 체계가 해소되고 완전한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살게 되었다. 미래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바라며 살게 되어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 이 일이 메시아 약속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메시아 시대를 앞당기는 길은 율법을 잘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키면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바른 율법의 준수를 위해 전력하는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메시아 대망이 팽배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는 자기를 메시아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도 예수의 행적에서 메시아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유월절 경축의 절정은 유월절의 속죄 제사에 있었다(출 12:1-36). 이 제사가 모든 이스라엘의 제사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출할 때 애굽의 장자를 대속물로 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구출하셨다. 그러므로 이 구출을 기념하여 감사 제사를 하였고 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사유하시기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 구속을 위한 제사 개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한 제물로 제시될 수 있었다.

6. 선지자 제도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부단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하는 것을 경고하고 다시 하나님 섬김에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셨다. 하나님의 법에 서 이탈할 때 첫 번째 계명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이었다. 백성들이 언약 파기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징계를 보내셔서 압제를 받고 또 국가적 존립이 위협되는 경우들을 만나게 하셨다. 이 국가적인 존립의 위험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벌하시기 위해 섭리적인 조치로 해석하게 하셨다. 돌이켜서 여호와만 섬기면 모든 국가적인 재앙을 돌이켜 없이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면 선한 해결을 주시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셨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역사의 진행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드러내었다
멸망의 위기에 선지자들은 민족의 회복과 회복 후의 큰 구원섭리를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로에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될 것임을 강조하여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였다. 선지자들은 위기의 경우에 책망과 위로와 깨우침을 베풀고 이적들을 행하여 하나님이 아직도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지키시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근본 사명은 백성들을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바로 섬기게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섬기는 것이 바른 섬김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고 제시하였다. 한 민족이 바로 서는 것도 중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구원의 전령으로 일함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모든 땅위의 종족들이 구원에 이를 것이다. 선지자들로 훈련받은 백성들이 예수의 출현을 그 선지자로 이해하였고 기대하였다(요 1:21-25). 예수도 이 선지자의 반열에 섰고 그 선지자로 이해되었다(마 21:11).

7. 메시아 대망

이스라엘은 노예로 출발하였고 포로와 노예생활로 끝났다. 주전 15세기 출애굽 후 8세기 말엽까지 이스라엘은 민족적, 독립적인 왕국을 이루며 살았으나 주전 722 북방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586에 남방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였다. 소수의 무리들이 바벨론 제국에서 게토를 이루어 살며 해방과 귀환의 날을 기다렸다. 그후 파사의 고레스에 의해 귀환령이 내려 4만 여명이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건축하고 살았지만 파사의 속국이었고 독립된 나라가 되지 못한 것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어 살지 못하고 속국이 되어 사는 것은 파사 제국의 시대를 지나 헬라제국에 매여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헬라제국에 매여 살다가 마카비 가문에 의해 나라가 처음으로 BC 165년경에 독립하여 백 여 년간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나 왕실의 내분과 사두개파의 반발로 BC 63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런 여러 세대에 걸친 노예와 속국으로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파사와 헬라제국에서의 독립은 사람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길 외에는 인간의 방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옛날 애굽에서의 구출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파사와 헬라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의 손으로는 안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길뿐임을 절감하였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길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는 길뿐이라고 모든 백성이 확신하였다. 그러다가 헬라제국 곧 시리아의 헬라제국에서의 해방과 독립은 마카비 가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대 역대 제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속박된 후에는 자유와 독립은 사람의 손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영화로운 다윗 왕국을 세워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길도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시는 길뿐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열망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므로 나타날 메시아 곧 하나님 자신의 구원을 기다렸다.
이런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메시아 대망이 온 백성들의 신앙이 된 영적 지반이 아니고서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등장과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는 자기를 구약 백성들의 지도자들 곧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보기 바란 그런 메시아로 자신을 제시하였다. 이런 메시아 대망의 상황에서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드릴 수 있었다. 바로 구약 백성들이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구속을 위한 그의 죽음을 말할 수 있었다. 메시아 대망의 열렬한 신앙에서만 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해하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지반이 조성되었다.

8. 고난의 종의 사상

이스라엘은 다윗 같은 영웅적인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이스라엘을 외부의 압제에서 구출하고 모든 민족들 위에 지배하게 해 줄 그런 메시아를 기대했다. 하나님의 통치는 메시아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메시아의 오심 없이 이스라엘이 강대국들의 압제를 벗어날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와야만 강대국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도 망하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들이 민족적인 수난에 동참 하며 민족의 구원을 간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물과 죄과가 아닌데도 고난을 받았다. 민족이 크게 범죄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는 과정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의로운 선지자여서 고난과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민족을 대신하여 고난받는 고난의 종들이 되었다.
이사야는 육체적인 고통과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을 예견하며 영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대신 고통을 당하며 민족의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들의 죄를 해결하는 고난의 종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고난의 종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공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이방에게까지 공의를 베푸는 자로 제시되었다(사 42:1-4). 고난의 종은 고난의 종이므로 메시아로 왔어도 풍채와 외모가 별로 흠모하고 사랑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위하여 일하려는 백성들에게 버림과 모욕을 받고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체휼하는 종이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당하였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해서 찔림을 당하고 몸을 상하여 속죄 제사를 하므로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출할 자이다. 고난의 종은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할 뿐, 여호와의 신으로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이다. 이 메시아가 고난받음으로 백성들을 회복하고 그들을 구원한다(사 61:1-3).
이사야의 이 예언과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지 않고 고난의 종으로 와서 고난을 받게 되었다(막 10:45). 그 고난은 구약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처참한 고통이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한 이스라엘에게 고난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해될 수 없었고 수납될 수가 없었다(요 3:14; 8:28; 12:32-34). 그러나 고난의 종이 예언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의 종으로 이스라엘과 세상을 구원하는 대속적인 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다 (요 11:51-52).
메시아가 절대적 권세를 가지고 와서 다윗 왕국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고난의 종으로 와서 죄과를 인해 죽음으로 백성을 구원해낸다는 사상이 준비되었다(사 53:2-12; 61:1-3).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와서 인류의 죄악을 위해 어린 양으로 죽으므로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메시아 사상이 준비되었다.

신약 성경의 교리적 근거

1. 예수의 메시아 주장과 수행

예수의 자기 증거
예수는 “자기를 메시아로 선포하고 증거”했다. 예수는 자기가 이스라엘이 바란 메시아임을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사 61:1-2)을 읽어 그것이 자기에게 성취되었다고 하므로 자기의 메시아 직임을 선포하였다(눅 4:16-21; 사 61:1-2).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보는 눈과 가르치는 것을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하므로 구약 백성들과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보고 듣기 바랐던 메시아임을 확실하게 하였다(마 13:16-17).
예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 하나님을 계시하고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아들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알고 의식하였기 때문에 구약 여호와에게 적용되었던 주님(Adonai, kurioj) 호칭을 자기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를 “주님”이라고 하였다: “주가 쓰시겠다”(마 21:3, o` ku,rioj auvtw/n crei,an e;cei\); “나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 Ouv pa/j o` le,gwn moi\ ku,rie ku,rie( eivseleu,setai eivj th.n basilei,an tw/n ouvranw/n)
예수는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라고 egw eimi로 했다. 요 8:28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를 지칭할 때 구약의 야웨 הוהי의 희랍어형인 egw eimi를 사용하므로 자신 이 구약의 여호와임을 간접적으로 지시하였다. 따라서 이 구약의 여호와 하 나님의 성육신이 자신임을 지시하기 위하여 인자란 호칭을 자기에게 전유적으로 적용하였다(막 2:10,28; 10:33,45; 13;26,29; 14:21,62과 공관복음의 평행절들). 예수는 자기가 성육신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성전보다 더 큰이”라고 자신을 지목하였다 (마 12:6). 성전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하므로 바로 자신이 그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간접 화법으로 증거하였다.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라고 말하므로 죽음에 이르렀다(막 14:61ff). 예수는 자기의 지상 생의 마지막 시간에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시하였다. 이 자기의 호칭이 그의 십자가 처형과 정죄의 근거이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의 말(verba ipsissima)이다.

예수의 전권 주장
예수는 자기를 메시아로서 의식하고 일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의 메시아 주장을 산상 수훈의 전권주장을 통하여 숨김없이 나타냈다. 그는 자신을 새 율법의 선포자가 아니고 옛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밝히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나타내었다. 옛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새 말씀들을 지켜야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그의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분명히 하여 자기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따라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기 때문에 병자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마 9:2-6)· 유대교에는 메시아가 사죄의 권세를 갖지 않는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면 충분하여 나라를 회복하여 그 직임을 다 수행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편히 쉬게 한다고 하여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을 가져다주는 메시아임을 강조하였다(마 11:28-30). 이스라엘이 바란 메시아는 정치적인 해방은 가져올 수 있었어도 죄와 율법의 질곡에서 해방은 할 수가 없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예수는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마 12:8). 자기가 창조주이고 안식일을 제정한 자임을 제시하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공생애 시작을 새 백성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가르침으로 시작하였다. 산상수훈에서 새 백성들이 지켜야할 법도들을 선포하였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새 백성을 세워야 했다. 제자들을 세워 기존 이스라엘을 대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마 10:2-7).
예수는 메시아로서 죽어 백성들을 구원해야 할 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전 경내에서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삼일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예수는 인자 칭호를 사용했다. “인자”란 자기 칭호를 하나님으로서 사람됨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인자 곧 사람으로서는 그는 전적으로 인간 세대에 속하고 따라서 고난과 죽음에로(요 12:34) 들어간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독생하신 아들 간에 독특하고 또 기술하기 어려운 일치가 성립한다. 즉 유일신에 자기를 포함시켰다. “유일하신 아들”(o monogenhj)이 하나님으로 하나님 편에 속함을 강조하였다. 예수는 유일신 신앙에 자기를 포함시켜 유일신 신앙 고백에 새 내용을 담았다.

메시야직 수행
예수는 자기가 온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라고 명시하여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고난의 종으로 왔음을 밝혔다(막 10:45; 요 10:11-15). 예수는 부활로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죽음, 속죄제사임을 밝혔다.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고치고 먹이는 사역을 맡았음을 밝혔다.

2.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주 예수: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이 방식으로 교리 형성의 시초가 되는 신학적 작업을 이루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행적과 구원 사역을 직접 목도하였으므로 그의 사역 이 하나님의 구원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았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인 줄 알았으므로 그에게 구약 여호와에게 적용되었던 주님(Kurioj) 칭호를 적용하였다. 예수가 주로서 천지의 대권은 부활로 받았으므로 부활 후부터 “주 예수”라는 고백과 호칭이 주저 없이 이루어졌다.

2. 예수 부활자를 신앙함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은 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였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서 그의 죽음에 구속을 결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로 주님이요 생명의 주로 고백되고 신앙되었다(행 23:6).

3.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예수는 구주로서 자원적인 죽음을 당하므로 세상을 구원하였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주 만물의 화해자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찬송시로 공식화하였다(빌 2:5-11; 골 1:15-20; 딤전 3:16). 이 찬송은 구속의 영역에서 주님의 권능과 주권을 표현한다. 이 공식들은 후에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들의 근거가 되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으므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주 예수의 희생 제사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러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율법 행함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롬 8:8-10).

5. 예수 하나님의 아들
“구속을 이루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된다. 복음서와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예수의 인격이 더욱 강조된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다윗의 자손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이 더욱 상세히 설명된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사상의 중심에 깊이 서게 되어 교리 형성의 제일 단계가 이루어졌다.

 

3. 바울의 신학
바울은 유대교도로서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다 버리고 즉 하나님은 성육신하실 수 없다는 생각을 고쳤다. 천상의 창조주이시고 창조 중보자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여 사람이 되시되 종의 형상으로 나타나시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바울은 초대교회의 증거들을 더욱 발전시켜 신앙이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도록 했다. 주요 신앙의 요점들 즉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서 구약에 의해 이해하고 정리하여 교리(dogma) 형성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의 인격
바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신적 대권자요 창조주로서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하늘에서 하강한 구속주이지 하늘로 높이 올리워져서 경배받는 이방 종교들의 설립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다. 바울은 만물 위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구주가 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한다(딛 2:13).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요 창조 중보자임을 명백히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공식을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재자로서 창조를 직접 이루신 분임을 분명히 한다.
율법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성육신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바울은 부활자를 직접 만나므로 선재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공식화한 것을 바울이 취택하였다. 바울은 희랍 세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을 입은 신적 존재자의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할 때 그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와 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인 일치를 전제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던 어법이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나님이 권세를 가진 것을 그가 가진 것으로 말하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간의 본질적인 일치 때문에 바울은 전권 공식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게 교차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만의 아버지인 것을 지시하는 호칭인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 예수 자신이 본래 신적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명백하게 하였다. 바울이 예수를 주라고 부름에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은 바로 그가 아람어로 된 호칭 “마라나다”(maranatha, 주여 오시옵소서)에서 잘 드러난다.
바울은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기원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화한 주(Kurioj) 칭호를 그리스도에게 아무 주저 없이 사용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때 그의 하늘의 영광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바울은 빌 3:29; 4:5에서 주께서 심판주로 하늘로부터 오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주는 예배 의식에 임재해 있는 영적 주가 아니라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호칭인 인자를 받아드려 둘째 아담으로 제시하였다. 바울은 참 아담은 그리스도이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하여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의 근거를 놓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희랍철학을 받지 않고 성경에 근거하여 세웠다.

그리스도의 사역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사역에 동참하시고 창조를 이루신 중보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롭다함으로 말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우주적이어서 모든 영적 세계를 정복하고 그것들을 무력화하였다고 선언한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바울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사 구속을 이루시고 창조를 완성하셨다고 밝힌다.

이신 칭의와 복음과 율법의 관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중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의에 이름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되게 작정되었다. 율법은 구원사적 섭리에서 도입되었다. 그리스도 믿음을 재촉하고 예비하기 위해서 율법이 도입되었을 뿐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율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바울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하고 하박국에서 의인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확립함으로 신약의 기독교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각 개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이미 구약 선언의 성취가 된다. 바울은 구원의 구원사적 섭리를 강조하였다.

세례와 성령 받음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롬 6:3-11).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연합함은 구속주 자신의 길과 연합함이어서 죽음과 영광의 길에 동참한다.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aparch)가 되고 성령의 내주가 그 보증(arrabwn)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은 확실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의 용서에 근거한 칭의를 받았다.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율법과 죄의 매임에서 해방이다(롬 6:10-11). 그것은 바로 새창조에 접붙임이어서 새창조물이 된 것이다.
신형상 회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와 연합하여 그의 형상을 닮으므로 신형상으로 회복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창조이고 그리스도는 몸이며 그 지체들은 개별 그리스도인들이다.

4. 요한의 신학

1.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동일성
요한은 영원한 아들의 성육신을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일치를 강조한다(=호모우시오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하나님 내에 위격적인 구분이 있음을 알았다. 성육신하신 이는 로고스 하나님이고(요 1:1-14)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말한다(요 1:18). 이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요한은 이에서 나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그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강조하므로 성육신하신 이가 바로 구약의 하나님으로 일치시킨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영광을 본 것을 (사 6:1-10)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으로 설명하므로(요 12:38-41) 삼위일체 신학에로의 길을 열었다. 요한복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으로 마친다: “나의 주 나 의 하나님”(O kurioj mou kai o qeoj mou).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가 된다.
성육신자와 로고스 곧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간에 등치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실체"(omoousion)가 귀결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선재하였음이 증거된다. 영원하신 아들이 바로 지금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것이다.
요한은 성육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가현설을 배척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인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한은 자기들과 함께 살 때의 경험을 그 증거로 들었다(요일 1:1-2). 그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육이 되셨음을 강조하여 영지주의의 가현설을 강력하게 배척하였다.

2. 성육신하여 인자가 됨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가현이 아니고 완전한 성육신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그 안에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의 연합이 통일성과 변증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할 때 육이라고 하므로 참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강조한다(요 13:4).
예수는 성육신하사 강림하였으므로 이전의 하늘에로 돌아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제시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반복적으로 고백되었다(요 14:9).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였으므로 본래의 영광을 갖지만(요 1:14) 성육신자는 본래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는 영광을 가지므로 자기를 비우셨음을 강조한다(요 12:41; 17:5,1). 예수 자신이 한 말들은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하신 것이다(요 12:49-50; 14:30).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므로 아들이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그 안에서 하는 것이다.
케노시스의 논리는 무엇인가? 지상 예수는 케노시스(kenosis)론의 전제들로부터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그의 인간적 형태에서도 세상을 능가하면서도 선재자의 영광보다는 못하나 비밀한 영광을 소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불가능함을 말한다. 요한이 대항해서 싸운 대상은 그노시스주의이다. 이 주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의 계시 현현은 단지 가상적으로만 인간의 형체를 입었고 실제로는 순수 영적 존재일 뿐이라는 가현설이었다. 이에 대해 요한은 말씀이 실재로 육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요 1:14; 요일 1:1-2).

3.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육신의 목적은 세상 구속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을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로 왔으므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을 그가 영광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로서의 직임을 다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시므로 이런 십자가에 죽는 일을 하여 사람을 구원하였다(요일 3:16).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여 믿는 자로 다 영생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요 3:15-16). 그러므로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이 구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제거되므로 영생에 이른다. 죄가 용서되고 제거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평안을 주셨다. 예수의 살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의 살과 피를 받으면 영생에 이른다.

4. 그리스도와 성령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세례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로 제시되었다(요 1:33). 그는 성령으로 세례받아 메시아로 임직되었고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이다(요 3:34).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 죄를 제거해야 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받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받게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보혜사로 제시되고 약속되었다.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므로 자기 자신이 원보혜사임을 전제한다. 성령의 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영이 예수의 메시지를 완성한다는 진술은 신앙의 교리사적 전개의 주초가 되었다(요 16:12-15).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구주로 죽으시고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령의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의 오심이다. 성령의 오심은 성령만의 오심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심이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내주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구분되는 인격으로 제시되므로 성령을 하나님으로 공식화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요한복음에 굳게 뿌리박고 있다. 성령은 예수의 신인 위격을 통해서 오므로 예수의 얼굴을 나타낸다(요 16:14).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영을 소유하면 현세에서도 죄가 없다는 영지주의의 사상에 반대한다.
신약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 교리화 되었지만 교회의 독자적 작성이 아니다. 요한의 신학으로 형성된 교회가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확립할 수 있게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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