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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엘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송재근 교수)

에반젤(복음) 2021. 4. 27. 07:39

 

요엘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송제근 교수(웨스트민스터 신대원)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요엘 2장 28~32절의 주해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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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엘서의 구조1
짧은 예언서인 요엘서는 다음과 같은 비교적 규칙적이고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심판예언
a 1:1~20 심판예언 1
1:2~7 심판묘사
1:8~20 회개와 하나님께 해야 할 기도

b 2:1~17 심판예언2
2:1~11 심판묘사
2:12~17 회개와 하나님께 해야 할 기도


2. 회복예언
c 2:18~32 회복예언 1
2:18~27 이중약속 (대적을 향하여(대적 사라짐)/ 유다를 향하여(농사풍성)2
2:28~32 특별약속
d 3:1~21 회복예언 2
3:1~16 첫 번째 약속 성취(대적이 물러감)
3:17~21 두 번째 약속 성취(유다의 회복)


여기서 각 단락이 거의 18~20절로 이루어진 균형잡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선지서의 전체적인 메시지의 성격을 따라서 심판과 회복의 순서로 이루어졌고, 그 양에 있어서도 각각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것 같다.

요엘서의 특이한 점은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심판을 받는 중에 회개를 외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과 지도자가 해야 할 기도를 소개한다는 점이다 (1:8~20 / 2:12~17).

 

이것은 아마 심판이 아주 임박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재빠르게 입에 넣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요엘서의 저작연도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양한 견해가 소개되나 가장 적당한 연대는 이스라엘이 언급되지 않고 남조 유다와 예루살렘만 언급되고 있고, 아직 최후의 붕괴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아서 바벨론의 예루살렘 일차함락인 597 B.C.와 관련되는 메시지인 것 같다. 이 상황은 일차적인 멸망과 바벨론 포로는 이미 경험하였고 이제 남은 이차적인 심판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런 기도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두 번째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다른 선지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별약속이 오늘의 본문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과 그것의 회복을 전체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과 다르게 심판 받은 내용을 훨씬 뛰어 넘는 회복과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선지서 속에서 그렇게 많지 않다.3 선지서 전체를 통하여 심판했던 내용을 넘어설 뿐 아니라 구약적 메시지의 한계를 넘는 아주 특별한 메시지를 꼽으라면 이사야 60장 이후, 예레미야30~31장, 에스겔 36~37장 정도인데, 요엘의 이 본문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Ⅱ. 요엘 2장 28~32절의 전체적 메시지


1. 2장 18~27절과의 관계


앞에서 보인 요엘서의 구조에서 다른 단락들은 균형을 이룬 메시지의 모습을 보이나, 세 번째 단락인 2장 18~32절에서는 앞에서 보인 균형이 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2장 18~27절의 메시지인 이중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그 다음의 네 번째 단락인 3장 1~21절에 나타나고, 2장 28~32절은 별똥별이 갑자기 위에서 떨어지듯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어떤 파격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요엘서의 메시지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즉 2장 18~27절에 이미 예고되어진 미래에 회복될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적 한계를 벗어난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축복의 전조가 되는 2장 18~27절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언약적 관계의 근본선언을 활용한 것으로 마무리 한다(2:26~27).4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전쟁 없어짐, 기근대신 풍년, 병대신 건강)은 사실상 어떤 내적인 것이 회복되는 외적인 결과에 불과한 것인데, 이 내적인 것이 언약관계의 근본적 회복인 것이다. 이제 이 회복이 이루어진 기초 위에 예상치 못한 더 근본적인 축복이 쏟아 부어질 것이다.

 


2. 2장 28~32절의 구조


이 본문은 세 개의 짧은 연(strophe)로 이루어졌고, 각 연은 세 문장(line)으로 이루어졌다 5 :

2:28~29 :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 (3+3 / 3+3 / 3+4)
2:30~31 :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 (4+4 / 3+2 / 3+2)
2:32 : 이스라엘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 (3+3 / 3+3 / 3+3)

 


3. 2장 28~32절의 메시지


이 예언의 특이한 점은 다른 부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 것인데 그 내용은 위의 세 연(strophe)을 따라서 나타난 내용들이다. 첫째는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신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진다는 것이고(2:28~29),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나타날 때가 있으리라는 것이고(2:30~31), 셋째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을 온 세상도 누릴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는 점이다.


(1) 2장 28~29절의 메시지


먼저 하나님의 신이 만민에게 부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물론 여기서 만민(개역)은 모든 육체(kol basar)의 직역이다. 여기서 모든 백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과, 영혼 혹은 사람(nefesh)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육체(basar)라고 표현한 것이 아주 특이하다.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라기보다 육체가 된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에 부어진다는 표현은, 신학자들이 설명하듯이, 소위 ‘하나님의 신의 부어짐의 민주화’(democratization)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다.6 즉 과거에는 일시적으로(민 11:29, 12장), 혹은 직분에 제한되게(모세, 오홀리압과 브사렐, 제사장들) 부어진 것이 모든 백성에게도 부어진다는 의미 정도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구속역사의 먼 과거에서 퍼부으신 하나님의 저주를 이제 푸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창세기 6장 1~4절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1~4)

하나님은 인간이 동물과 다름없는 단순한 육체(파)로만 전락해 버리는 것(basar)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ruah)을 떠나게 하고, 인간 수명을 단축시키고, 마지막으로 그 시대의 육체(basar, 창 6:17)들을 홍수로 멸하시는 저주를 부으셨다. 그러나 요엘 2장 28~3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좌절하시고 포기하신 것을 회복하시는 선포를 우리는 본다.7

 

모든 육체(basar)에 ­ 그 때에는 엄청난 진노로 ‘영원히’(leolam) 떠났다고 선포된(창 6:3) ­ 하나님의 영(ruah)이 오시는 것, 엄밀히 말하면 다시 돌아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출애굽과 시내산언약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원역사를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태고의 저주를 푸시고 인류의 원역사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근본적인 것이다.8 이 축복은 모든 육체에 열려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육체들 중에서 진정으로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받을 것이다.


부어진다는 것은 2장 23절에서 표현된 적당할 정도로 내려진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부어진다(shapak)는 의미이다(비교 : 시 133). 이것은 이스라엘 증거막의 거룩한 관유가 보통은 찍어 바르나 제사장 임직에서는 부어 바르는 것과 관계된다(출 29~30). 즉 다섯 가지를 혼합한 기름인 이 관유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에게만 부어졌는데 이제 그 부어짐의 축복이 모든 육체에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영이 부어짐으로 모든 사람들이 예언을 하는 현상을 경험할 것이다.여기서 예언은 예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이 구약에서 현현하는 아주 대표적인 모습으로서 소개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지도자들만이 그 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그렇게 소원했고, 아론과 미리암 그리고 고라와 다단이 오해했던 것이었다(민 11~12,16장).

 

그런 의미에서 또한 이 예언은 단순히 태고의 행복의 회복에서(창 6장) 더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속은 단순히 창조의 회복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르고 더 나은 차원으로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더 강조하는 것은 2장 29절에 나타난 남종과 여종에게도 부어진다는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9)

여기서 종이라는 것은 존귀한 의미의 종이라기 보다 노예라는 의미인 것 같다. 즉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으로 예속되어서 사는 이방인조차도 이것을 경험하는데 거기에 남녀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2장 28절에서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다. 구약의 관점에서 노예에까지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의 표징인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2장 30~31절의 메시지


여기서도 또 한번 더 놀랄만한 메시지가 선포된다.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현현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그것을 나타내고 해와 달이 그러할 것이다. 피와 불과 연기기둥으로 나타날 것이다.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할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유다가 경험한 심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1:2~7, 2:1~11), 우주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날은 여러 번 언급되었다(1:15, 2:1,11, 3:14).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기대하던 여호와의 날은 이방을 향해 승리를 경험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선지서에 선포되는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었다. 이 두 날들의 특징은 자연현상을 동반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연현상을 동반한 하나님의 현현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갱신에서 하나님이 언약당사자인 이스라엘과의 만남에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타났던 것이다.9언약당사자인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그대로 현현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보호와 심판의 이중기능으로 적용될 것이다. 즉 언약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외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이 현현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치는, 또 이스라엘이 배신할 경우 이 현현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치는 언약전쟁을 수행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바로 이런 날일 것이고,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여호와의 날도 어떤 점에서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선지서에 선포된 것만이 여호와의 날의 전부는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그것보다 한 차원 더 나간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다. 그것은 우주에 총체적인 대파국을 예상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신약의 사도행전 2장에서 언급되는 경우라도, 그 완전한 실현이 아직 먼 미래로 투사된 것이었다. 신약조차도 기다려야 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호와의 날의 세 번째 의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방과 이스라엘을 구분할 것 없이 모든 호흡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할 날들을 보일 것이다(계 6:12). 모든 우주가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짧은 요엘서 속에 압축적으로 포함된 엄청난 메시지인 것이다.

 


(3) 2장 32절의 메시지


여기서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었다. 먼저 이런 상황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예배하는 것, 즉 신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자신의 언약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길 밖에 구원을 향한 다른 탈출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또 그 구체적인 도피처는 언약의 역사에서 핵심이 되는 시온산/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오바댜 17절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거기서도 주요관심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에서 시작되던 남은 자의 모습이 명확하게 요엘서에서도 자취를 보인다. 그런데 그 남은 자 중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 내용과 대응을 이루는 언어유희(word­play)이다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2:32a) ­ 여호와가 그 이름을 부르는 자(2:32c)

결국 이 둘은 같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10 언약적 성실과 인자로 여호와를 향해서 태도를 가진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구원의 반열에 참여할 것이다.11

 

 


Ⅲ.선지서 메시지의 수수께끼: 이스라엘의 무조건적 회복과 발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선지서에 나타나는 메시지는 정죄와 심판, 그리고 소망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내용이 어떻게 서로 상관하는가는 언약적 기초로만 설명할 수 있다. 즉 언약법을 어김에 대한 정죄요, 언약적 저주로서의 심판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언약이 가진 일반조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요소가 바로 회개를 전제로 한 용서 그리고 회복의 요소와 함께 갑자기 나타나는 소망의 요소이다.

 

만약에 일반조약에서 회개를 전제로 한 용서와 회복의 요소를 넣는다면 그것을 이용해서 수많은 배신이 일어날 것이므로 실제 이 조항을 포함한 조약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은 이 점에서 특이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언약은 한 걸음 더 나가아 회개를 전제로 한 용서와 회복뿐 아니라, 그 회복에서 훨씬 더 나가는 발전과 완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12

 

그런데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구약적 상상을 초월하는 약속을 주실 때가 드디어 된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몇몇 선지서 속에서 나타났고 이제 이 요엘서 속에서도 짧지만 아주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우주를 동반하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모습을 보이실 때가 이를 것이고, 그 동안 선지서에서 열방의 심판으로 소개되었던 것의 무한정한 확대를 경험할 것이다.

 

이것 역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 앞에서 역사 전체를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 무조건적인 회복과 발전은 역시 언약의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언약적인 원리인 자비와 진실하심(chesed weemet)을 당신의 백성에게 보이신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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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근/서울대와 고신대신대원(M. Div.)을 나와 화란 캄펜신학교(Drs)와 영국 첼튼헴&글로스티대학(Ph. 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한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구약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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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1. D. Stuart, Hosea­Jonah (WBC), 1987, pp.226f.


2. 이중약속이나 사실상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의 언약전쟁의 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광야에서 진을 칠 때 이스라엘의 진영이 이중으로 증거막을 둘러싸게 되었다. 레위인과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내진(內陣)은 이스라엘을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요, 나머지 지파들로 이루어진 외진(外陣)은 바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것이다. 소위 거룩한 전쟁(holy war)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사실상 이중성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언약적 성격 때문이다.그러므로 이것을 거룩한 전쟁으로 부르는 것을 본질이 아니라 상태를 파악한 설명이고 오히려 이것을 언약전쟁(covenant war)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한 이스라엘이 위협을 받을 때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외부와의 언약전쟁을 수행하신다.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께 배신할 때 이스라엘 자신과 즉 내부와 언약전쟁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요엘서의 메시지의 이중성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언약적 전쟁의 성격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물론 각 예언서 속에서 회복되는 소망의 메시지가 주로 마지막 부분을 이루고 그 회복은 전대미문의 것임을 나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러나 요엘 2:28~32절처럼 구약에서 예상할 수 있는 회복과 축복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은 거의 많지 않다.

4. L. Allen, The Books of Joel, Obadiah, Jonah and Micah (NICOT), 1976, pp.97f.

5. L. Allen, ibid.; 비교 D. Stuart, op.cit., p.261.D. Stuart는 2:32을 산문으로 보고 있으나 L. Allen의 분석과 같이 내용적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6. 비교 L. Allen, op.cit. p.99; D. Stuart, op.cit., p.260; R. Dillard, Joel, The Minor Prophets, ed. by T.E. McComisky, 1992. p.294;

7. 비교 J. Ridderbos, De kleine profeten II (KV), Kampen, p.152.

8. 그래서 이것이 정작 실현된 행전 2장의 사건은 인류의 원역사(창 6:1~4)의 회복이라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9. 본인의 “출애굽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시내산 언약”, 「목회와 신학」, 1996년 9월호.

10. D. Stuart, op.cit., p.262.

11. 이것을 인간의 의지/노력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로 압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12. 이점은 필자가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인내와 갑자기 열정적으로 언약의 백성을 회복하시는 특별한 조치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신명기 4장과 20장에 예견되어 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