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

살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이동원목사

에반젤(복음) 2021. 4. 2. 00:31

살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6:1-11)

 

성경본문로마서 0601~ 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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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교회 시절의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남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제일 먼저 한 일의 하나가 부고장을 돌린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사망"이렇게 써서 자기 마을에 돌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반신반의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버젓이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가 성경책 가지고 다니며 전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익두가 사기쳤다고 생각한 마을 불량청년이 지나가는 김익두에게 "죽기는 뭘 죽어"하며 물바가지를 씌웠더니 김익두 목사님이 물을 털면서 가라사대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김익두가 살았다면 넌 벌써 요절났다"고 말했답니다. 옛 사람 김익두가 죽음으로 새 사람 김익두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살기 위해선 참으로 죽어야 한다는 복음의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 6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4절의 말씀처럼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 살아있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3장에 보면 예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보내신 편지 가운데 당시의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우리는 정말 산자답게 생명이 충만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지 못해 사는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까?

 

오늘은 주께서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고 일어나신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 한분의 사건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사는 그의 제자들이 또한 동일한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근거가 되기 위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이라는 삶의 장에서 여러분과 제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새 생명안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비밀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에 이 비밀을 풀 수 있는 세 가지 열쇠 단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위한 열쇠들이 있습니다.

 

첫째 열쇠는 무엇입니까?

1.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실패를 말할 때 "제가 아직 죽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죽어야 하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2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라고 말했고, 3절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3절을 읽어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세례의 의미는 동일시(identification)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죽었을 때 우리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대신 우리의 자리에서 죽으신 것이라면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그의 제자들은 모두 한사람 예외 없이 다함께 그와 더불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라는 복수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 아직도 죄짓는 일에 살아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성자가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죄와의 싸움에서 갈등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필리핀 섬들의 정글에 숨어 있었던 여러 일본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줄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군인중의 한 사람인 히로 오나다 중위가 1974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30년간 정글에서 숨어 지냈던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을 때 우리도 다시 살아남으로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에 매어 살 필요가 없음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6절의 선언을 읽어보십시오.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는 둘째 열쇠는 무엇입니까?

 

2. 우리를 계속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죽은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긴다'는 단어는 본래 회계학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계산한다' 는 뜻입니다. 계산은 정확해야 합니다. 계산은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늘 의식화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화하고 생활화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세례를 왜 받습니까? 세례는 장례식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주와 함께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식입니다. 주와 함께 다시 산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4-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일회적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기억하고 적용하는 것은 날마다의 일상적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미에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후에도 한동안 노예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노예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 노예의 신분에 있었던 사람들이 노예생활에 익숙해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들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인으로서의 새로운 자기 신분에 대한 의식화인 것입니다. 그는 노예의 행동이 나올 때마다 그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노예는 죽었어. 넌 이제 자유인이야" 바울사도는 아마도 이런 경험을 가르쳐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이 사실을 확인함으로 다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음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죄의 충동이 우리를 괴롭힐 때마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죽은 자는 유혹받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욕심내지도 않습니다.

죽은 자는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죄가 고개를 들거든 자신에게 소리치십시오.-"넌 죽었어, 네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때 넌 이미 죽은거야"라고. 그렇습니다. 죄에 속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을 날마다 선포하며 사십시오.

 

생명으로 충만한 인생을 사는 셋째 열쇠는 무엇입니까?

 

3. 우리를 다시 산자로서 드리고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1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자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의 교훈을 단순한 의식화의 권고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12절이하에서 전달합니다. 이 승리로운 삶의 지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드리라'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제부터는 우리의 몸을 죄의 목적에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에만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죄짓는 일에 쓰여지면 죄의 도구요, 의로운 일에 쓰여지면 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이유-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자 의도하신 것입니다.

 

중국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기차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 사람이 한 그룹이 된 이들과 한 의자에 앉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긴 여행이어서 무료함를 달래기 위해 옆에 앉은 이들이 카드놀이 게임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네 명이 해야 하는 게임이어서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같이 합석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중하게 사양하겠다고 하니까, "카드 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라고 묻더랍니다. 그가 할 수 없이 "할 줄은 알지요"했더니, 그중 한 사람이 "그럼 손 가지고 있다 무엇을 하시게요" 반문하더랍니다. 이때 이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이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아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묻는 그에게 자기가 최근에 예수 믿게 된 신앙간증을 하고 이제는 그의 몸이 주의 몸이 되고, 그의 손이 주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형제의 대답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적인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손으로 입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려 열중해 보십시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서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전도해 보십시오. 영혼을 돌보십시오. 기도와 찬양으로 주 앞에 나오십시오.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섬겨보십시오. 그때 당신은 세상이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그런 기쁨의 인생을 다시 사시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싱싱한 장미꽃처럼 새롭게 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시고 다신 사신 이유입니다.

 

저는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미국의 후버 댐을 방문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본래는 불더 댐이라고 불리워 졌다고 합니다. 이 댐의 공사는 건축사상 랜드 마크로 불리운 대 공사였습니다. 이 공사로 미드(Mead)호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호수가 생겨났고, 남 켈리포니아 일대에 집집마다 전력을 공급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거친 사막에 라스베가스라는 세계적인 오락도시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댐을 방문했을 때 저는 댐 입구에 세워진 게시판에서 인상깊은 한 문장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공사가 진행 중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희생당한 이유-사막에 장미꽃이 피어나고,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 위해서였다". 저는 그 글을 읽는 순간 갈보리 언덕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부활절 여러분을 모시고 할 수만 있다면 성지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게시판을 세우도록 저에게 허락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새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그가 여기에서 생명을 희생하신 이유- 허다한 인생의 사막에 다시 장미꽃을 피어내고, 사망의 골짜기에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 위해서였다"라고.

 

참으로 살고 싶으십니까? 십자가 앞에 오십시오. 거기서 당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와 함께 죽은 당신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그가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때문에, 그 예수 때문에, 그 십자가 때문에 당신도 새 인생을 사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출처 :이 동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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