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사순절 설교

[스크랩] 사순절 설교모음

에반젤(복음) 2021. 3. 20. 06:13

사순절 설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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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 싸움에 흔들리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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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희 목사 사순절의 절제 잠언 14:14-17, 베드로후서 1:5-7

2. 이병각 목사 십자가 지고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6:21-25

3. 류철랑 목사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7-25

4. 김동호 목사 십자가와 구원 요한복음 3:16

5. 조봉희 목사 비참한 십자가의 위력 마가복음 15:33-41

6. 정봉규 목사 고난의 종 예수 마가복음 8:31-38

7. 김홍도 목사 고난을 당할 때 의심치 말라 마태복음 14:22-33

8. 이철신 목사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6:40-46

9. 곽선희 목사 자기 십자가의 의미 마태복음 10:34-39

10. 김동호 목사 진리를 버린 빌라도 마태복음 27:11-26

11. 정영택 목사 사순절에 갖는 신앙의 각성 마태복음 26:69-75

12. 최성규 목사 예수님의 고난 마가복음 15:21-27

13. 진희근 목사 십자가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4

14. 최낙중 목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마가복음 15:20-27

15. 주금용 목사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이사야 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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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절제

잠언 14:14-17, 베드로후서 1:5-7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사순절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절제입니다. 원래 초기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엄격한 절제 생활을 요구했습니다. 절제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금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구제와 경건 훈련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생선이나 육류뿐만 아니라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연극, 무용, 오락 등도 금지하였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대신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기도를 권장하였습니다.

 

절제의 의미는 사전적으로는 알맞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윤리학적으로는 방종하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통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정결하여 우리의 행위를 알맞게 조절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가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기독교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인의 경제적 궁핍을 걱정하여 근검절약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건강저해 요인으로 술과 담배 그리고 도박 등을 지목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기독인들에 대한 금주와 금연의 규율을 권면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 절제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24년 8월 28일에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연합회"가 이화학당에서 창설되었습니다. 초대회장에는 우리 교회의 유각경씨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가운데서도 우리 교회는 절제회와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절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그리고 썩지 않게 보전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절제란 모든 육체적 기쁨과 인간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을 살면서 절제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빕니다.

 

첫째, 절제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우선, 절제란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덕목의 하나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으로 지켜야 하는 "4대 덕목"이 있었습니다. 지식, 용기, 정의, 그리고 절제가 바로 네 가지 덕목입니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두 가지를 경고하였습니다. 첫째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절제의 미덕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성을 흰말로, 욕망과 본능을 검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성의 흰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조상인 제논의 제자 중에는 허영이 심하고,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늘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살기에 제논은 그를 불러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제논은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에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고 하였습니다. 절제란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에가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4:25에는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라고 합니다. 바울도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당시의 권력가인 벨릭스에게 절제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세라고 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얘기하면서도 절제를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3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요즘 사람들의 절제하지 못함을 이미 예견했고 아마 그 당시인들도 절제하지 못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운전은 현대인의 필수적인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운전은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말해주며 운전자의 인격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점잖던 사람이 운전석에 앉기만 하면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난폭 운전은 예사이고, 법규위반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인격과 권위도 차 안에서는 무너져 내립니다. 보통 때는 하지 않던 거친 말도 욕설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말리지만 어느 듯 합세하여 운전자보다 더 거친 욕설을 마구 해댑니다. 자신은 수없이 다른 운전자에게 방해가 되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도무지 참지 못합니다. 경적을 울려대고, 전조등을 번쩍이며 저돌적으로 진격합니다. 조금만 아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여 끼어 들게 하지만 나와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틈을 주지 않습니다. 시비가 붙어 감정이 격해지면 삿대질 끝에 멱살을 잡고 더 발전하면 격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월 시비 끝에 살인을 한 비극적 사건도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 앞차가 비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전자를 끌어내 때려 숨지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더욱 참담하게 두 차 모두에 가족인 어린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조급함과 성냄은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절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 가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잠 16:32). 절제하는 마음은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법칙입니다.

 

둘째,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절제는 인간에게 필요한 성품이지만 인간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절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3에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절제는 그냥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고린도전서 7:9에는 절제를 육체적 욕망에 대한 극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5에는 절제를 "악덕에 대한 극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성경에도 절제란 5:21의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대조되는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제는 인간의 의지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열매가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절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문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는 절제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우리 스스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도, 돈도, 성질도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솔직히 인정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절제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과장하고 자신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벌써 다 해봤는데 나는 안돼. 이번에도 또 실패할거야"라는 자기 포기가 절제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의 실패의 이유는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가 살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그때그때 기분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고,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감정의 노예로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제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절제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절제는 신앙의 성숙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미 믿음이 있고,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율법이 필요합니다. 율법은 절제하라고 주신 절제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21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라고 합니다. 자신은 얼마든지 괜찮지만 남을 위하여 절제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남을 위한 자기 통제인 절제는 신앙이 성숙한 자만이 가능한 덕목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일꾼들의 자격을 보세요. 감독의 자격을 기록한 디모데전서 3:2에는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하여 절제를 말합니다. 같은 내용의 디도서 1:8에도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여성 직분자의 자격을 기록한 디모데전서 3:11에도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절제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덕목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절제는 필요합니다. 먹는 것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입는 것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관리하는데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전 삶에 절제는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먹는 시험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먹는 시험에 승리하셨습니다.

 

아무리 필요하지만, 아무리 많이 있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나무에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이 너무 많으면 나무가 죽습니다. 약이 건강을 보살피지만 약을 남용하면 해가 됩니다. 사람에게 주신 본능을 적절히 사용하면 선물이지만 지나치면 인간의 파멸이 오고 동물적으로 사는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면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결론

 

칼 J. 프린스(Carl J. Prints)는 오랫동안 스웨덴과 캐나다 오가며 행정관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그는 99세 생일을 맞이하는 날 텔레비전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사회자가 "그렇게 오래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그는 "한가지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절제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일 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절제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절제는 장수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삶을 알맞게 조절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방종하지 맙시다. 우리의 감성적 욕구에 이끌려 살지 맙시다. 우리의 말을 절제하여 우리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달되게 하세요. 우리의 음식을 절제하여 우리의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 되게 하세요. 우리의 의복을 절제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삶이 되게 하세요. 우리의 힘을 절제하여 우리의 남은 힘을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사용하게 하세요. 우리의 시간을 절제하여 우리의 시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익한 시간이 되게 하세요.

 

이런 삶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절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것, 잡수신 것, 말씀하신 것, 사신 모든 것은 절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순절이 됩시다. 그리고 사순절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늘 절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6:21-25

이병각 목사(예담교회)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고난 당하고 죽으시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다혈질이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조금 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시던 주님이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세상 사람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십자가를 아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고 주님의 편이 되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1.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펄쩍 뛰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여기서 붙잡고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입니다. 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가로막고 그 말씀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에는 예수님을 위한 인간적인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안위에 대해 이 정도 열정을 갖는다면 칭찬도 할만한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는 왜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유대인의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독립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그 나라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으로 모든 민족와 열방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으로 다스리고 율법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통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입니다. 현세적이지 않고 현세와 함께 내세를 포함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입니다.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 받고 죽으셔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나라 백성으로 세움 받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십자가 없는 복음은 가짜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더욱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천둥번개를 무서워하고 간밤의 악몽을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고 지옥 백성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의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읍시다. 이것이 수준 높은 신자입니다. 참 신자입니다. 신령한 신자입니다. 세상에는 돈이나 지식이나 교양이나 여러 가지로 서로를 알아보고 구분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구분은 십자가 오른편에 있는가, 십자가 왼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실한 신자가 됩시다.

 

2.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당하심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알고 신앙으로 키우겠습니까? 예라도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지금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변해서 나의 소유로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홍콩에 사스(최근에 유행하는 중증 호흡기 전염병)를 피해서 들어온 교민들이 많다고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소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장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 다 신자가 아닙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분이 신자입니다. 욥을 아십니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시험으로 자녀와 재산을 일시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 욥은 분명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신자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다 주님이 잠시 맡긴 것으로 자기를 부인합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옛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큰 고통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기 좋으면 다 좋고, 자기 나쁘면 다 나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남이 나를 알아주면 우쭐댑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몰라주면 섭섭해하고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사람의 몸무게는 100 킬로그램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이기심과 자기애는 얼마나 무거운지 지구 덩어리 보다 더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도장이 찍혀야 통과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버리는 병을 앓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다 보니까 남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예민합니다. 그러나 남이 불편한 것은 둔합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세차를 합니다. 혹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밀고 들어옵니다. 옆에 사람이 지나가는데 침을 "퇘" 하고 뱉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핸드폰을 받고 큰 소리로 할 말 다 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루살이와 같고 지렁이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면 얼만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할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느니 없으니, 하나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호기심이나 논쟁거리로 삼아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져야지 불평하거나 거역하면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쁜 일을 주셨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힘으로 어려워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맡기며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고, 교회 일을 봉사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는 무익할 종일뿐입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움직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내가 보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영광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는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충성과 겸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5-36)."

 

저는 요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 목회 비전에 대해 공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일산의 복음화,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범, 북한과 세계 선교라는 3대 비전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목회비전이나 사명 선언문은 공백으로 남겨 두고 지내왔습니다. 그 세월이 8년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저의 성격으로는 너무 오래 빈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만 구체화되지 않은 확신되지 않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의 사명 선언문을 베끼기는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려 왔는데, 이제 그 빈칸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 권능과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구역이나 소그룹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모든 교인이 구역장이 되고, 구역이 또 다른 구역을 낳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기도와 성령 충만, 그리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것입니다. 삶의 변화와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은혜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삶이 변할 것입니다. 그 힘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불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저도 92년부터 약 3년간 대학부 전문 사역을 하였습니다. 수백명의 학생들과 소그룹에서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수년 동안 소그룹의 역동성과 비전을 완전히 잃고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나 기도, 전도 같은 활동적인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할 것입니다. 이전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새 것은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인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친구도 친척도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도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할 때 가나안 복지가 그 앞에 주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성도 감정도 의지도 엉망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허물어집니다.

 

3.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면 다음 단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죄수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십자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까?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십자가를 왜 지라고 하십니까?

 

십자가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조심하고 인내하지 않습니다. 온전치 못하고 속 썩이는 자녀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자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물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잘못도 없고 게으르지도 않는데 물질에 곤고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 번이나 그 병이 떠나기를 기도해지만, 하나님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질병으로 겸손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로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혈기왕성하고 방종합니까?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물질, 질병, 명예의 손상, 중상모략, 그리고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섬기도록 부탁받은 직분입니다. 저도 목사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토요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쁜 일이 생겨도 예외 없이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아파도 안 됩니다. 강단에 서야 합니다. 기도회나 예배 전에 더욱 긴장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가로막는 일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우리 장로님이나 찬양대원이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돈 받고 고용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신 주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십자가로 알고 잘 감당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삶에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고 능력을 얻고, 기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전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은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 생각하고 선교사님 생각하고,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광 중에 만날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세계선교의 사명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지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구역으로 소그룹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나누는 것을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고, 우리 교회와 이 시대에 주신 비전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신자는 자기 십자가 벗어 던진 신자라고 하고, 인기 있는 교회는 십자가 벗어 던진 교회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멍에는 벗어 던지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지십시다. 힘이 부족하면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단회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7-25

류철랑 목사(부천동광교회)

 

어떤 미국 사람이 소형 비행기를 조종하고 애틀랜타에서 버밍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일기가 나쁜데도 무슨 일이라도 날테면 나라지 하고 쉽게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눈보라를 만나 무전을 쳤습니다. 긴급 구조요청을 보낸 거지요.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지금 있는 위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짙은 눈보라 때문에 사방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환하게 빛나는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앞에 커다란 십자가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수련장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였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비행기 위치를 파악하고 가장 가까운데 있는 비행장으로 안내하여 비상 착륙에 성공했습니다. 눈보라 치는 캄캄한 밤에 십자가 때문에 구조를 받은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없었다면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는 대형 십자가를 찾아가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밤에 보여준 십자가가 그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십자가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하여 수풀에 걸려 있는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나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내 죄를 대신 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속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2:32,33). 땅에서 들린다는 것은 사람을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세우면 발이 땅에서 들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림으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사랑의 힘입니다. 누구라도 저항 할 수 없는 사랑의 힘입니다. 자석이 쇳가루를 이끌 듯이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교훈은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능력은 지속적입니다. 또한 광범위합니다.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사람을 이끄십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힘이 있습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동안만 힘이 있습니다. 그것도 정권 말기가 되면 그 힘이 아주 약화됩니다.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무력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살아 있을 때 보다 돌아가신 후 더 많은 사람이 따릅니다. 가롯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도들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장 수치스런 죽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헌신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높이는 찬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분을 칭송하는 문학과 그분의 덕을 기념하는 사업과 행사가 사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교양이 넘치는 사람도, 살인 강도까지도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이끌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십자가에 이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따르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을 통해서 죄인이 구원받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의인을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했습니다. 무엇이 죄일까? 죄는 하나님을 떠나서 혼자 살아가겠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무관심하는 것이 죄입니다.

 

속죄의 제사는 흠 없는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피흘림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히 9:22). 죄 없으신 어린 양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이를 믿는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전도자 무디가 연합 집회를 막 끝내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한 젊은이가 달려왔습니다. 벌써 끝났습니까? 끝났다고 하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무디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셨으니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일세"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어린 아들이 장난을 치며 놀다가 아버지가 귀중히 여기는 벼루를 깨트렸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보로 여기는 벼루를 깨었으니 큰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할머니에게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했습니다. 할머니는 걱정말고 가만히 있기라고 하셨습니다. 저녁때 아버지가 돌아오자 할머니가 아버지 방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자네 방을 치우다가 실수로 벼루를 깨었으니 어쩌면 좋을까?"라고 하자 아들이 말하기를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벼루야 다시 사면되지요 어머니가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손자가 잘못한 것을 할머니가 벌 안 받게 잘 처리해 준 것입니다. 할머니의 지혜가 손자를 구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 바울이 받은 사명은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십자가 자체를 전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나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체험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꼭 해야할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실패했어도 또 다시 도전하고 또 실패하면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제플리 웰슨은 그의 저서 "뒤틀린 복음"에서 엉터리 복음, 싸구려 복음, 편의주의 복음을 말합니다. 엉터리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데 그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며 헌신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엉터리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도란 길을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21-23)

 

어떠한 조직도 재생산되지 않으면 쇠퇴합니다. 전도해야 개인도 살고 교회도 부흥합니다. 교회는 씨를 뿌리듯이 예수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빵을 훔치다 들킨 노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빵을 훔친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왜 빵을 훔쳤습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재판관은 벌금 5달러를 선고합니다. 그리고 5달러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죄가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소문이 많은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우리가 퍼트릴 소문은 벌금 5달러를 내준 판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우리말에 "이영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여럿이 한 가지 일을 할 때 기운을 돋구려고 함께 지르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 "이영차!"라고 외칩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가 합심하여 "이영차!" 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성전을 짓는 일을 위해서도 "이영차!" 합시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전파하십시다. 전하지 않으면 듣지 못하고 듣지 않고는 믿지 못합니다. 다음 주일은 총동원 주일로 지킵시다. 결석자 없는 주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전도인이 되십시다. 전도는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이요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십자가의 도를 전파합시다. 우리도 예수의 하신 일을 전합시다.

 

 

십자가와 구원

요한복음 3:16

김동호 목사(높은뜻숭의교회)

 

요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와 구원"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다시 말해서 그가 어떠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멸망치 않고 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를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한 존재라는 사실과 구원 얻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욕심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욕심이 없습니다. 욕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보다 좋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91년도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때는 중국이 이제 막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때 같아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활발하였지만 아직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아니하였을 때입니다. 백화점엘 갔었습니다.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물건은 거의 없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이 중국도 많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저희들을 의류와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것이 그분의 실수였습니다. 많은 가전제품들과 의류들은 있었지만 하나도 욕심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이 당시 몇 십 년을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벌써 그 백화점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디자인과 성능이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건방지게 말하자면 거저 주어도 가지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중국보다 조금 앞선 한국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백화점에서 욕심 없는 마음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욕심 없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욕심에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처럼 중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개인과 세상의 모든 사망은 그 원인이 죄에 있고, 모든 죄의 원인은 욕심에 있습니다. 욕심이 없다면 죄도 없고, 죄가 없다면 사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욕심은 사람을 비굴하게 합니다. 욕심은 사람을 잔인하게 합니다. 강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잔인해집니다. 약한 자를 공격하고 없는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약한 사람이 욕심을 가지면 비굴해 집니다. 강하고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서 앞에서는 아부하고 뒤에서는 욕을 합니다. 아무것이나 주워 먹는 땅거지가 됩니다. 욕심은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당당하게 합니다. 약해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기죽지 않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절대로 땅에서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않습니다. 약해도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의 당당함과 여유 있음처럼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은 사람을 근사하게 합니다. 강해도 거만하지 않습니다. 냉랭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따뜻합니다. 자신의 강함과 부함을 가지고 약한 사람과 세상을 섬깁니다. 정말 낮은 자리에서 섬깁니다. 강하고 부한 자들의 겸손함과 따뜻함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강한 약함, 부함과 가난함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욕심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욕심 없는 마음"은 믿음에서 옵니다. 자신이 구원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옵니다.

 

둘째, 절망과 불안이 없어집니다.

절망과 불안과 초조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병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그와 같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더 불안해 집니다. 부자들이 돈을 벌었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담 쌓고 철망 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평민으로 살 때는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있지만 대통령이 되게 되면 자유롭게 아무데나 다닐 수 없습니다. 경호원이 따라 붙어야만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소망과 평안은 믿음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참 소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처럼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할 수 없습니다. 불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때 그가 승리한 게임의 녹화 테입을 보는 것이 즐거운 낙 중에 하나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3승인가 5승인가를 올린 게임을 아이들이 녹화해 주어 어느 한가한 시간에 그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게임을 박찬호 선수가 승리한 게임이었지만 초반에는 박찬호 선수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1회에 볼은 19개나 던졌습니다. 어느 회인가는 만루의 핀치에 몰리기도 하였고, 또 어느 회에서는 홈런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여유만만이었습니다. 저는 그 게임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긴 게임인데 1회에 볼을 19개 아니야 29개를 던진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홈런을 맞고 핀치에 좀 몰린다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긴 게임인데...!!!

 

저는 그 날 그 녹화게임을 보면서 나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세상에 사는 동안 좀 어려움을 겪고 환난을 만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 날 그 녹화 테입을 보면서 그 테입 속의 아나운서와 해설자와 같이 절망하고 낙심하였다면 사람들은 저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9회말은 승리라는 말씀입니다. 살다보면 일이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핀치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홈런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낙심한다면 미친 사람 아닙니까? 구원받았는데, 인생의 게임은 우리가 이긴 것인데, 그 과정 중에 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과 병듦, 높아짐과 낮아짐에 차이가 없습니다. 환경과 상황에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경을 기회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내합니다. 박찬호의 승리를 알고 있었던 저는 중간에 텔레비전을 끄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여유 있게 그 게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다보면 사람이 강해집니다. 연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소망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1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시 27:1-13)

 

마지막으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세상과 사탄이 가장 겁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협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혹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 망신을 당하지 아니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용기는 믿음이 줍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용기는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을 줍니다. 평안과 안정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운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연습할 때는 잘 되던 것이 막상 경기를 하면 잘 되지 않습니다. 패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안정이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신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는 "누가 빨리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평안과 안정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과 안정은 용기에서 나오고 그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의 성공과 승리는 평안과 안정의 능력에서부터 나왔고 그의 그와 같은 능력은 믿음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1-6)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 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 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1-8)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이루신 구원이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음으로 약하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고 강하고 부해도 거만하지 아니하는 근사한 사람이 되십니다.

 

구원의 확신 때문에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그리고 평안과 안정을 누리며 세상과 사탄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비참한 십자가의 위력

마가복음 15:33-41

조봉희 목사(지구촌교회-서울)

 

어떤 법관의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와보니까 담당 판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흠, 우리 아버지야 나를 용서해주겠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 체도 않고 엄숙한 얼굴로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의 이름을 대시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철없는 그 아들이, '아버지 ! 저예요, 저!' 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여기는 법정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어서 피고의 이름을 대시오.'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예, OOO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고의 주소는 ?' '아니, 아버지 주소하고 똑같아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다시 호통을 치면서 '어서 주소를 대시요'라고 다그치셨습니다. 할 수 없이 주소를 다 댔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꾸며서 낭독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벌금 500만원"

 

그때 아들은 너무나도 상심하고 허탈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냉엄한 처사에 서글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새 아버지는 법복을 벗고 깨끗한 신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들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느냐?' '나는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될 법관인데 내 아들이라고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 법을 어길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벌금을 물 수 있도록 500만원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교통계에 가서 벌금을 내면 너는 나갈 수 있다' 그제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깊으신 뜻을 깨달았습니다. 법을 살리기 위해서 아버지가 재판도 하고, 벌금도 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 값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살리기 위하여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안셀무스는 'Cur Deus Homo'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방정식을 잘 설명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인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알래스카에서 에스키모인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은 착한 사냥꾼과 같으시다"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옛날 에스키모인들이 거대한 알래스카 곰을 사냥할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즉 사냥꾼 중의 한 사람은 곰 앞에 바싹 다가가서 곰을 화나게 합니다. 그러면 곰은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벌리고 가슴을 노출시킵니다. 그 순간 창이나 활로 정확하게 심장을 명중시켜야 곰을 잡습니다. 이때 치명상을 입은 곰은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사냥꾼을 덮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곰 자신도 얼마 못 가서 쓰러지고 맙니다.

이처럼 곰을 잡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시키는 사람을 『착한 사냥꾼』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니?'

노인의 대답이 멋집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핵심입니다. 공자, 맹자, 석가, 마호메트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1.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

 

밤새도록 혹독한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사형언도를 받고 곧바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됩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 십자가는 180근이나 되는 통나무 십자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심문을 받느라 한잠도 못 잔 생태에서 로마 군인들의 채찍과 발길질, 그리고 십자가의 무게에 못 이겨 자꾸만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무겁고 힘든 십자가였던가요?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건장하게 보이는 시몬이라는 한 흑인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도록 했습니다(21-22절).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신 지셔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져야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그 무거운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다 져주시는 예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그처럼 주일 예배가 기다려집니까? 또 다시 내 인생의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의 모든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원해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일 때,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2. 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 사건보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침 9시에 재판을 받으시고, 정오 12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죽으신 재판보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이처럼 비참하게 죽으셔야 했던가요?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담당시키셨습니다. 떠넘기신 것입니다).』(이사야 53:5-6)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양으로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가, 죄인의 신분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점이 강조됩니다.

 

1) 죄인들 사이에 끼여, 죄인들과 함께 죽으십니다(27절).

완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낮아지셨음을 각인시켜 줍니다.

 

2)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쓸쓸하게 버림을 받습니다(33-34절).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아들이 심판 받으셔야 하는 사실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는 아들의 애원을 외면하십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셨으면 중천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어두워졌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3:15)

예수님은 왜 이처럼 혹독한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가요?

『그는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다 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의도적으로 십자가 곁의 두 죄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누가복음 23:39-43)

 

하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는 회개하지 않음으로 정죄를 받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므로 사죄를 받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믿음을 거부하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고, 다른 하나는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됩니다.

 

파스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사람인데,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인간은 이 두 가지로만 구분될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 것 같습니까?

"희망이 없는 죄인, 희망이 있는 죄인"

 

십자가는 사람을 두 종류로만 구분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와 구원받은 자,

용서받지 못한 자와 용서받은 자,

회개하지 않는 자와 회개하는 자,

거듭나지 못한 자와 거듭난 자,

정죄를 당하는 자와 사죄를 받는 자,

버림을 당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지옥에 떨어지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는 자,

실락원의 인생과 복락원의 인생,

왼편에 선 자와 오른편에 선 자,

영벌에 들어갈 자와, 영생을 누릴 자!

골고다 언덕 예수님 곁에서 두 사람의 죄수가 함께 죽게 되었는데, 하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하나는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한 여인은 버림을 당하고 한 여인은 들림을 받습니다.

두 사람이 들에서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휴거됩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누워서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하고 한 사람은 주님께로 올라갑니다.

 

너무나도 가까웠던 이 두 사람,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만날 수 없는 차이! 이 좁힐 수 없는 간격!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결정!

 

그때 십자가 곁에 섰던 한 죄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예수님은 너무나 황홀하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가 여기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택함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십자가상에 여섯 시간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비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매우 생생한 전도체험을 합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2) 전도는 마지막까지 해야 합니다.

십자가 곁의 강도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아침에는 마귀하고 조반을 먹었는데, 저녁에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서 식사를 즐깁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받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3. 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37-38절). 예수님께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시니,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여기 "큰 소리를 지르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는 한 마디입니다. 테텔레스타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던 한 그리스도인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그 하늘을 날던 새들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며 다 이루었다고 조아립니다. 그 구름은 더 높이 있는 구름에게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다시 그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그룹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방금 그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쏟으시므로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비참하게 지셨던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신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놀라운 확신을 표명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심판해버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시는 것도 마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는도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셨을 것이다."

 

M. Luther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 중의 본질입니다. 이 짧은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세상을"… 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입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주셨으니"… 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입니다.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입니다.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지셨던 비참한 십자가를 통하여 너무나 황홀한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가 묻혀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용서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W. Cooper는 십자가의 구원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이신론자가 무어라고 떠들든, 무신론자(이런 비열한 노예가 땅에 있다면 말이다)가 무어라고 헛소리를 하든 거기에만, 오직 거기에만 구원의 능력이 있다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요, 사랑의 증표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믿으며, 그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십자가를 사랑하며, 그 십자가를 기뻐하는 복된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의 종 예수

마가복음 8:31-38

정봉규 목사(은성교회)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단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죄 짓고 받는 고통이야 자의라도 가능하겠지만 죄 없는 고통은 참으로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42년 전에 논산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는 훈련병으로 입소해서 훈련받다가 대표로 매를 맞아 본 일이 있습니다. 수요일 밤 교회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다녀온 사람 모두를 다 불러서 매를 주려고 할 때 "제가 대신 대표로 맞겠습니다"라고 자진했습니다.

물론 다 허락을 받고 갔지만 그걸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를 실컷 맞고 기절을 하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의무실이었습니다. 젊은 청년으로서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죄 짓는 나, 죄 지은 우리 때문에 주님은 고난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하면서부터 말구유에서 겟세마네 언덕까지 예수님의 생애는 고난의 생애다 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버린바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장로들과 세관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여기부터는 장로, 제사장, 서기관들 모두가 다 법정의 최고 의원들입니다.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 모인 모든 백성들과 많은 군중들도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를 죽인 죄의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달라고 그렇게 원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빌라도는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를 죽일만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가지고 와서 손을 씻으면서 너희들이 죽이길 원하고 밖의 민중과 유태민족, 장로와 대제사장이 죽이길 원하는 예수, 이 다음에 예수 죽인 다음에 그 피 값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겠냐며 내 책임이 아니라는 무죄함의 표시로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때에 그 안팎에 있는 유태인들 모두가 일어나서 예수 죽인 피 값이 있다면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도성은 크게 함락되고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110만명 이상이 불에 타 죽었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본 영상이 한 시간 분량인데 몇 장면만 보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나라 국경과 맞대고 있는 폴란드지역에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곳에 끝도 보이지 않는 큰 감옥을 만들고 유태인 600만을 가스로 모조리 다 죽였습니다. 그런 비참한 현장을 지난 8월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그 현장을 둘러보고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죄짓지 않고 살아야겠다" 저를 크게 따라하세요. "죄 짓지 말고 삽시다"

어떤 경우든지 죄짓지 말고 살아야 됩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비참한지 그 처절함, 그 역사의 현장을 가서 둘러보면서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히틀러를 통해서 그 조상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자손에게 돌리라고 그렇게 원하더니만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말이죠.

어린 갓난아이부터 시작해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모두다 벗겨서 비참하게 방에다 몰아넣고 가스를 넣었습니다. 그 가스를 담았던 빈 통을 보았습니다. 산더미처럼 있습니다. 안경알과 테를 모아 놓은 것만 봐도 너무너무 비참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6톤이 넘습니다. 어린아이 신발, 어른신발 따로 모아 놓았습니다. 세상에 역사 속에 이런 비참한 것이 있는가 전쟁에 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저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가 한 정욕적으로 순간적인 말 한 마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주님 다 용서해 주세요"

 

마태복음 27장에 백성들이 모욕하는데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빌라도에게 자신 있게 말한 것이 다 이루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들은 모두가 다 철저히 예수를 버렸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 버린 그 민족의 후예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그 현장을 보면서 너무너무 두렵고 떨림 속에서 그 현장을 보았습니다.

 

가서 보면서 어떤 경우도 나와 함께 교회에 몸을 담아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자 했어요. 애원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도 죄짓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아멘입니까? 사람이 한 번 나서 죽는 것이야 누가 막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죽으라고 하나님이 세상에 내보낸 것입니까?

너희 조상이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죽으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축복의 조상을 모시고 대대손손이 구원을 얻는 후손으로 살아야지 어떻게 하여 어느 날 순간적으로 잘못된 죄를 지음으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그런 무서운 죄 값으로 받는다고 할 때 얼마나 두렵습니까?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로 그 후손들은 후에 히틀러의 손에 의해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지만 이스라엘 나라조차 없이 2000년 동안 세계지구촌에 흩어져 유랑민족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사실을 역사 속에서 공부하고 잘 알고있는 터입니다.

 

쉽사리 우리가 순간적으로 유혹을 받거나 순간적인 죄로 끝나는 줄 알지만 그 죄 값은 대대손손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볼 때 어떤 경우에든지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 십자가에 못박는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를 따라하세요. "죄짓지 맙시다 거짓말하지 맙시다 예수 버리지 맙시다"

어떤 경우도 예수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 버린 민족, 예수를 거절하고 마다하고 싫어하고 져버렸던 민족들은 저 모양이 되었다 이겁니다. 그 죄 값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요즘에 사담 후세인을 비롯해 이라크 민족을 봅니다. 알라신을 섬기며 고개를 쳐 박고 한 지도자가 우상이 되어서 말이에요. 역사 속에 비참하게 몰락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이 예수를 버려서 그런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 버린 김정일을 보세요. 어떤 모습으로 되어 가는가 잘 보세요.

 

오늘 신앙생활 잘해서 영원한 구원과 영생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적인 실수와 죄로 인해서 비극적인 심판에 쓰러지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죽임을 당하고 나의 길 되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 믿는 사람, 참되게 주님말씀 순종하고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토퍼라 합니다. 그 뜻은 주 예수를 업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나의 죄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 이제 내가 고난 받을 차례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모시고 주님 다시는 모욕되지 않게 영광의 주님을 업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십자가, 장로는 장로의 십자가, 권사는 권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다 십자가를 벗어 내던져 버리고 구원과 영광과 영생만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함께 영광을 당하는 겁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려고 많은 고난 당하시고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3일 아침,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 로마서 8장 17절에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도 하고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로 향할 때 영광의 부활의 아침에 주님을 만나고 고난의 종 예수와 함께 일어나라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믿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과 영생의 아침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의심치 말라

마태복음 14:22-33

김홍도 목사(금란교회)

 

기독교인들에게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금보다 더 귀하고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상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버린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제법 있는 것 같다 가다 환난과 고난의 폭풍이 몰아 닥칠 때에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셨는데도, 폭풍을 만났을 때에 제자들이 무서워 떨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부르짖을 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꾸짖으신 다음에 곧이어 바다 와 바람도 꾸짖어 잠잠케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장에서도 예수님이 분명히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라고 말씀하셔서 건 너 가는데도 폭풍을 만나니까 모두 죽는 줄 알고 무서워 벌벌 떨고 예수님이 도와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데도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모두 무서워 떨었습니다. 두려움은 영안을 어둡게 해서 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외칠 때에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바다 위로 뛰어 내려 걸어가다가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길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게 될 때 에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바다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칠 때 주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꾸짖었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는 제법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환난과 고통의 폭풍이 몰아 닥칠 때에는 그만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의심의 바다에 빠지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1. 왜 의심합니까?

 

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데 왜 의심합니까? 예수님의 탄 배가 뒤집히겠습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해서 건너가는데 그 배가 뒤집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육지에 있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폭풍 가운데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인생 항해가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 뜻에 순종해도 폭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② 주님이 기도해 주시는 데 왜 의심합니까?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가시고 제자들을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 하시는데 그 배가 뒤집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34절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탄 배가 결코 뒤집히지 않습니다.

 

③ 주님이 구하시려 찾아오시는데 왜 의심합니까? 우리가 폭풍을 만날 때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주님이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바울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다(God is nowhere)"고 하더니 질병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God is now here)"라고 고백하더랍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④ 믿음이 성장케 하시려 고 폭풍을 보낸 것이므로 의심해선 안됩니다. 이 무서운 폭풍으로 제자들을 연단 시켜서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시키려고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의심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2. 고난 날에 의심하지 말 것들

 

성도들에게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운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마귀는 조롱하듯이 비웃으며 우리에게 의심을 집어넣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금식하며 고생하실 때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 님의 아들이어든....."하면서 의심부터 주입시켰습니다. 사단이 아담과 이브를 찾아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느라고 "정말 하나님이 이 모든 실과를 다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의심부터 집어넣었습니다.

욥은 인간이 당하는 최고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욥기 13장 15절에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 지라도 나는 저를 의지하겠노라(Though he slay me, yet will I trust him)"

 

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환난과 고통의 폭풍이 밀어닥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왜 이런 실패와 고통을 당하겠는가?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봐 예수님이 극심한 고통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절규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절규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지극히 사랑하는 자라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자 일수록 더 고난과 환난을 당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날에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정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욥기 5장 17절에 "볼지어다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연단 하시려고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 주시고 치료하십니다.

 

②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고난의 풍파가 닥쳐올 때, 하나님이 멀리 떠나시고 광야에 혼자 내던져 진 것같이 느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부터 담대히 물리쳐야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지어져 죽을 뻔도 했고, 머슴살이 하다가 오해받아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생활 속에서도 빈번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더욱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해선 안됩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성도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기도하다가 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면서 "지금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한 증거니라"하시더니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는 발자국 이 둘이 아니라 하나만 보이더랍니다. "주님 이 어려운 때에는 나를 홀로 가게 하십니까?"했더니 "그것은 네가 홀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안고 갔기 때문에 발자국이 하나만 보인 것이란다."하고 말씀해 주시더랍니다.

 

③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 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어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당해도 반드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시고 이기게 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눈으로 환경을 볼 때에는 칠흑같이 캄캄하고 사방이 막히고 도저히 헤어 날 수 없을 것 같아도 반드시 하나 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을 든든히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얼마 안되어서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요란하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추격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왜 이런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모두 다 이제는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며 울었습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왜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내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여기서 죽는 것보다 났지 아니하냐?"고 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에 지도자 모세는 믿음에 굳게 서서 외쳐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 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들어 홍해 바다를 칠 때에 육지같이 갈라져 모두 무사히 건너갔고 뒤따라 들어온 애굽 군사들은 물이 합치면서 모두 수장 지내고 말았습니다.

 

절망은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꼭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환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나라에는 거듭 난 신자 참된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신자가 1200만 신자 중에 아마도 500만은 넘을 것입니다. 우상의 나라 잡신 섬기는 나라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반드시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레이놀드 W 그린씨가 말하기를 "인생에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고난과 슬픔이라는 보자기 속에 쌓여서 온다(The very best things that happen in life are often wrapped in packages of difficulty an sorrow)"

 

④ 기도의 응답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너무 큰 시험을 만나고 기가 막힌 시험을 당하면 기도도 안되고 기도해 보았자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큰 문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열 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 33장 2-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 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IMF가 문제겠습니까? 하나님께 직장이 없겠습니까? 병 고칠 능력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께 신랑감, 신부감이 없겠습니까? 하나님께는 해결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호텔의 마스터키와 같습니다. 마스터키는 그 호텔의 모든 방을 다 열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바사 나라의 모든 유대인의 하만의 간계로 한 날에 다 살육 당하게 되었을 때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각오로 에스더와 온 국민이 금식하며 지도 할 때에 하만이 모르드게를 메어 달아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고 유대인들은 다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고 그 기도의 위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도 의심하지 말고 어려울수록 더욱 기도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6:40-46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가. 고난(36-38)

 

1. 평화의 왕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왕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을 기뻐하고 환영했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대단한 행진 행렬이 형성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온 성안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마 21:10). 많은 사람들이 옷을 깔거나 흔들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깔거나 흔들면서 그 왕을 환영하였고, 어린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15)" 노래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모두 다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음모를 꾸미는 중에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과 접선이 되었습니다. 그 제자는 자기 선생님을 배신하고, 선생님을 돈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는 이제 결정적인 기회를 맞게 되었고, 이제 예수님을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밤이 십자가를 눈 앞에 둔 마지막 밤인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도로 준비하기 위하여 겟세마네에 가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도하러 자주 가시던 곳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도 잘 아는 장소였습니다. 겟세마네란 말의 뜻은 기름 짜는 틀, 맷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몸부림치며, 온 몸과 마음을 쥐어짜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기도만큼 힘든 사역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세워 가면서 온 몸이 다 쥐어짜지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민을 갖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그 고민이 심했던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38)"고 제자들에게 심경을 토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학생들은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하다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의 답답한 것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고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학업 성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직장생활 하다가 실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 고민이 얼마나 큽니까? 사업하다가 그 사업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에 그 고민이 얼마나 큽니까?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인간관계의 갈등 때문에 고민을 겪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 중에 가장 큰 고민은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입니다. 그 고민은 말할 수 없이 가장 큰 고민일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은 얼마 밖에 살 수 밖에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내 앞에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내 존재가 밑바닥에서부터 무너지는 현상을 두고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고민을 하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죽음,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고민을 하셨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끔찍했고, 내가 죽어지고 나를 포기하는 마음의 고통도 너무나 컸습니다.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는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 고통을 혼자서 외롭게 짊어지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슬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있자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이 많이 나옵니다만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예수님의 가장 연약한 점을 드러내는, 연약함 속에서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3.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자들도 불안하고 낙심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점점 가까이 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할 것, 고난 당하실 것,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26:31). 제자들은 내심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은 왕이 되시고, 자기들은 높은 자리에 앉고,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런 기대는커녕, 그만 엄청난 고난이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그들 가운데서 점점 커졌습니다. 낙심과 좌절, 패배주의가 그들 속에 만연되었고, 그들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들 속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피곤하였습니다. 하루종일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하고,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쉬지 못한 채 밤늦게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왔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나. 깨어있어 기도하라(39-44)

 

1. 이렇게 낙심되고 좌절된 상태 속에 빠져 있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탄의 계교에 말려들어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41).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거듭 거듭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38,40,41).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뜻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있지 말고 거기서 벗어나서 정신차리라는 말씀입니다. 게으름과 피곤에 빠져 있지 말고 깨어서 정신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사로 잡혀서 주저앉지 말고 정신차리고 그것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연약함에 빠져있지 말고 "정신차리고 깨어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향해라, 하나님께로 향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라,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고민 중에 빠졌던 것으로부터 정신차리고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제는 하나님께로 향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2. 그러나 제자들은 깨어 있는데 실패했습니다. 기도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피곤과 잠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낙심과 좌절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피곤과 게으름에 그냥 빠져 버렸습니다. 인간의 비겁함과 좌절함에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말뿐인 신앙이요, 마음뿐인 신앙이었습니다. 자기 말대로 믿음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다 아셨습니다. 인간의 무능력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 탄식하셨습니다. 깨어있는데 실패한 제자들, 기도하는데 실패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곁에서 예수님을 기도로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홀로 예수님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똑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거듭거듭 기도하셨습니다.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인간의 연약함이 앞섰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을 마신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을 피하고 싶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39).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인정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렸고 이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거듭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에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그 고난과 고통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 욕심은 전부 내려놓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내 맡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큰 뜻과 계획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전부 다 내 맡겼습니다.

 

4.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웠지만, 그러나 기도가 거듭되면서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점차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십자가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또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고 부활로 가는,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영광을 거두게 하시는 한 과정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3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리라는 확신, 그를 다시 높이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는 고난이 닥쳐와 있지만, 이 고난을 넘어서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것들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일에 빠져 삶을 살아갑니다. 돈에 빠져 삶을 살아가고, 지위와 성공에 빠져서 삶을 살아갑니다. 또 많은 분들이 유흥과 부패하고 타락한 일들에 빠져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에, 혹은 마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컴퓨터 게임, 인터넷 메일, 채팅, 포르노에 빠져 살아갑니다. 온 국민이 스포츠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도 봅니다. 또 우리는 자주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을 느끼면서 거기에 빠져 살아갑니다. 고민과 근심과 염려 가운데 빠져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피곤에, 또 어떤 때는 게으름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말씀하십니다. 고민에 빠지고, 일에 빠지고, 세상 속에 빠지면 마귀의 시험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에게 권면하고 명령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민하고, 중독되고, 빠져 있는 데서부터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에 빠져있던 데서부터 깨어서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어디에 빠져 있습니까? 일에 빠져 있습니까, 고민에 빠져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 주님의 권면을 받아들여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빠져있던 데에서부터 깨어서 정신 차리고 벗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구원하시려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게 될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45-46)

 

우리 예수님께서 확신을 얻은 다음에 고난을 향해 담대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6절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다음에 고난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신 다음에 확신을 얻고 고난을 향해서 담대하게 일어나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전사같이 고난을 마주 대하여 정면대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향하여 정면으로 당당히 마주 대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기도로 이미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기도로 이미 고난을 이겨낸 것입니다. 기도로 이미 승리하였고, 이제는 담대하게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캐롤 버리스라는 부인이 근육 무력증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근육이 점점 무력해져서 활동을 못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죽게 되는 아주 희귀한 병입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약물을 과다하게 투여하다 보니까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온 몸과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니까 한심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낙심이 되고 좌절이 되었습니다. 때로 심장과 호흡에 장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주변 사람의 짐이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비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벽을 높이 쌓고, 혼자 고립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성가대원들이 찾아와 같이 찬송하며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가대원들이 같이 통성 기도할 때에 이 부인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간절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는 속에는 이런 능력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 "기도하고 믿었으면, 이제는 실천하고 행동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좌절과 어두움의 그림자를 다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 가운데 놓여 있지만, 그러나 휠체어 타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다른 어려운 사람, 혹은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점점 기도한 대로 실천하고 삶을 살아가다 보니까 처음에는 힘들고 괴로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병이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린대로 실천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삶을 살아가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구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사람은 앉아 있지 않습니다. 일어납니다.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나가서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실천하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 주간이 끝나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고민에 빠져 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일에, 고민에 빠져 있던 데에서부터 깨어서 정신차려서 일어나시고 하나님께로 향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확신하고, 그리고는 담대하게 세상 속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의 의미

마태복음 10:34-39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 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 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964년 그러니까 꽤 오래 전 이야기가 됩니다. 제가 미국 유학시절에 YMCA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여름캠프에 회목으로 잠시 참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나름대로 미국 젊은이들의 세계에 또 그들의 신앙 구도, 이런 것을 많이 보고, 깨닫고, 공부를 많이 할 기회가 되었습니다만은 특별히 그 일주일 동안에 캠프 생활 을 끝내고 마지막에 촌극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각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일주일동안 이렇게들 준비해 가지고 몇 팀으로 나누어서 맨 끝날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연극 중에 한 장면은 제게 많은 교훈을 주고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무대 위에 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수십 개의 십자가라!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 또 보기 좋게 만든 십자가 어떤 것은 흉하게 아주 흉물스럽게 만든 십자가, 그리고 어떤 것은 아주 화려하게 장식물로 만든 것 뭐 이런 것들 저런 것들이 수십 가지가 널려 있습니다. 이제 그 학생들 하나 하나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색채의 옷을 입고 나와서 십자가 하나씩을 고릅니다. 큰 것을 찾아보다가 "아이고 이것은 너무 크다!" 좀 작은 것을 하였다가 "이것은 내 몸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는 들었다 놓고 들였다 놓고 하다가는 맨 마지막에 고르는 것이 뭐냐하면은 가장 작은 것, 화려한 것, 목걸이 십자가, 십자가 반지, 그리고 모자 위에다가 이렇게 장식으로 만들어 놓은 면류관 같은 그런 십자가 이런 것들만 하나씩 다 들고 나가더란 거예요. 아무도 그 크나큰 십자가는 진 사람이 없어요.

 

맨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분장한 청년 하나가 나와서 돌아보고 가장 흉물스럽고,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님이 다시 지고 그리고 갑니다. 그것으로 연극은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지고 있는 십자가가 못 마땅해 합니다. 너무 무겁다고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내 분수에 넘친다고, 때로는 이건 내가 져야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져야될 건데, 이게 무슨 팔자가 잘못 되어 가지고 내게 왔다고 뭔가 운명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분명 내 것이 아니라고, 내가져야 될 것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건 벗고, 다른 것, 또 가벼운 것, 또 작은 것, 또 작은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안 지면 좋겠다. 그렇게 그렇게 부르짖으며 한 평생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으면, 땅에다 묻고 거기에다 비석 대신에 십자가를 거기에다 딱 박아 놓습니다.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여기 시체가 있다. 뭐 그런 뜻입니다. 또 때로는 자비에 상징으로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십자가 뭐 공산주의자들도 국경 없이 봉사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적십자사, 청십자, 뭐 이런 얘기가 또 역시 십자가는 자비에 표식으로 사용되는데 대한 인식이올시다. 그 다음에 십자가가 보이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에 몸 된 교회가 거기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본질은 아주 원초적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는 십자가입니다.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십자가 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뜻을 바로 깨닫기만 하면 그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올시다. 예수의 십자가 그것은 속죄에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은 바로 대제사장에 재물이라는 것이지요. 속죄의 재물이요.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나가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속죄의 재물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죄인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지불하는 하나님 자기 자신의 희생에 대한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고통, 하나님 자기 자신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계시가 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공의와 사랑이 완성을 이루는 바로 그 결정체가 십자가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주는 총 주제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또 그리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그 누구를 위해서 대신 지는 그런 십자가에 성격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십자가라는 것은 죄 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손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 가지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양자택일 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술꾼에게 묻기를 "술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하고 물었더니 "술에 밥 말아 떡 안주해 먹겠다."고 그건 안 되는 것이에요. 어느 것 하나만 택해야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도적인 결단을 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남하는 데로 따라가는 게 아니고, 타인 지향적인 그렇게 물거품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리도 생명도 없습니다.

 

주도적으로 나 스스로 하나를 선택합니다. 선택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딸 하나를 앞에 놓고 아버지는 "동쪽 사람한테 결혼해라." "어머니는 서쪽 사람한테 결혼해라." 이 외동딸을 놓고 자꾸 괴롭히니까 딸이 마지막에 하는 말입니다. "동가식 서가숙하겠다." "동쪽 사람하고 먹고, 서쪽 사람하고 가서 자겠습니다." 그 되는 일입니까? 여러분, 연애 해보셨으면 알지요. 언젠가는 부득이 결단을 해야 됩니다. 한 사람 좋게 하면 나머지 사람 슬프게 만들어요. 어느 순간에는 끝맺는 결단이 없이는 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일이 진짜로 있습니다.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옛날에 애인하고 전화 걸다가 들켜서 이혼 당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런 여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 동안에 애인이 몇 이 되었던 간에 결혼식 날 ‘땡' 하고 다 잊어버려야지 거기에 대고 몰래 전화 걸다가 맞아 마땅하지요. 비행기장 앞에서 두들겨 맞고 있더래요. 얘기 듣고 아무도 안 말려요. "잘했다." 그래요. 제주도 가면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까? 진리를 찾기 위해서 거짓을 버리고 참 사랑을 위해서 나머지를 다 버려야 그게 바로 그 아픔의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 가운데는 밭에 감춰진 '보화'란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 유명한 얘기지요.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 소유를 다 팔아서 샀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 요. 다 팔 때 아까웠겠느냐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요. 크나 큰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저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것 파는 것 어렵지 않아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절대적 가치에 것을 찾았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거지요. 또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에요. 미래적 가치가 분명하다면 현대적 가치는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에요. 신령한 세계를 바로 포착한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것이란 초월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영원한 가치에 것을 찾았다면 사실로 현재적인 것이란 꾸벅꾸벅 지나가는 건데 그것 뭐 별 것 아니잖아요. 거기에 그렇게 마음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어차피 가는 길이요.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이요. 결국은 참된 가치, 절대적 가치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아 그걸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0장 전장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열둘을 불려놓고 제자를 임명하고, 그에게 훈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되는 길, 그의 제자됨에 대하여 그 조건과, 비상한 각오와, 결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아주 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 자세를 요구합니다.

 

한 교육학 학자가 자기 아이들을 놓고 시험을 해봤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벌벌 기어다닐 때 그 아이들 기어다니는 앞에다가 장애물을 놓아 봤대요. 어떤 아이는 장애물만 딱 앞에 있으면 기어가다가 멈추는 거예요. 그건 체념형이래요. 한 평생 그렇게 살더랍니다. 또 기어다니는 아이 앞에 장애물을 놓았더니 어떤 아이는 비껴 가더란 말입니다. 이건 도피형이요. 어떤 아이는 장애물을 놓으니까 딱 치워놓고 직행하는 거예요. 가고 싶은 데로 가요. 이것 이 진취형이요. 그거 하나가 쓸만한 아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장애물이 있다고 거기 앉아서 팔자신세 타령하겠습니까? 비껴 가겠다고 비겁하게 이리저리 피하겠습니까? 정면대결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제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보면 우선 세계관을 바꿔라. 세계는 오늘 34절에 보면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고 검이로라. 세상을 너무 안일하게 보지 마라. 화평, 안일, 평안, 무사 이것만 기대하지 마라. 나는 그런 것을 위해 오지 않았다. 많은 독재자마다 평안과, 번영과 자유와 안일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만은 준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 전쟁 상황을 말씀하시고요. 또 가정에 대해서도 가정에 화목, 그래요 가정에 '평화 가정이 잘되는 것, 아이들 잘 되는 것' 이것만 열심히 위합니다 만은 그것도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가정, 화평, 잊어버리라 이것이에요. 그보다도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

 

"현세적인 출세, 또는 세속적인 것, 욕망 다 잊어버려라. 이런 포기가 있고서야 주님에 제자 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사랑에 문제입니다. 자, 사랑을 놓고 보세요. 이거 양자택일이요. 주님을 사랑하려면 버릴 것이 많아요. '아가페'적인 절대적 사랑, 그건 단독적이고 독단적이에요. 그런고로 참 사랑을 위해서 끊어 버려야 되요. 자기 사랑, 자기 명예, 자기 지혜, 자기 판단, 인간적인 지식도 다 버려야 됩니다. 미련 없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야 예수에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 말씀은 지기 십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내 몫에 대한 십자가요. 누구나 지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가끔 개혁을 한다는 분들이 뼈를 깎는 아픔. 뭐 그런 얘기합니다만은 깎는다고만 하지. 안 깎더라구요. 뼈를 깎는 아픔이 없어요. 그러니까 개혁이 없는 것이에요. 정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 개혁은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에게 좋게, 모두에게 이것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내 포기를 요구합니다. 큰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오히려 미워해야 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덜 사랑해야 된다는 거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 순교해야 될 시간에 이 가족 때문에 순교 못하는 사람 있어요. 뭐 아내가 과부 된다고 슬퍼하고 아이들이 고아가 된다고 하니까 자식사랑 때문에 그만 순교해야할 결정적인 시간에 순교 못했어요. 그 다음에 보니까 본인은 부끄러운 삶을 살지요. 아이들도 잘될 수가 없지요. 오히려 그럴 때에 자식들을 놓아두고 순교했던 사람들이 그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는 순교자요." "내 남편은 순교자요."

 

오히려 그들이 더 활발하게,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전쟁 상황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이 사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근심하면 돌아가리라." 성경은 이렇게 유감스럽게 설명합니다. 정말로 영생의 생을 얻는 것이란 그까짓 재산이 뭐 문제입니까? 어차피 버려야 될 건데 이걸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했다.' 그것입니다. 전쟁 상황이에요.

여러분, 혹 일선에서 그런 고생을 해 봤습니까? 저는요. 전쟁 때 한 번 겪어봤는데요. 보세요. 총 소리가 "땅"하고 포 소리가 쿵쿵 날 때 그 일선에서도 잠이 잘 와요. 얼마든지 잘 수가 있는데 총 소리가 나면 아내가 정신이 아찔합니다. 그때는 군화가 어떻게 가벼운지 그 배낭이 총이 얼마나 가벼운지 몰라요. '펄펄' 납니다. 왜 사느냐? 죽느냐? 하기 때문이에요. 전쟁이란 "잘 산다. 못 산다." 뭐 "마누라 생각이 사느냐? 여보, 내 생각납디까?" 그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나밖에 없어요. 생명, 오로지 생명, 오로지 영생,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는 바로 전쟁 상황이에요. 이것 예수님의 말씀이요. 그런고로 여기에 가족 자기 생명, 이 세상에 평화, 번영,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다 잊어 버려요. 그래야 참으로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순교 상황입니다. 순교자가 순교하려고 할 때 가족 생각하고 할 수 있습니까? '아내 사랑', '아이들에 사랑' 이것 다 효도해야 될 부모가 계시는데, 순교상황에서는 이런 것들이 다 원수요. '원수' 오늘 성경에 가족이 원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원수예요. 가족이 내 출세에 길을 막는 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님께 사는 순교 상황에서는 가정이 원수요. 그런가 하면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것이올시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한 번 보십시다. '바야바'에 음모가 있지요. 빌라도에 정치적 그 만행이 있지요. 바리새인 교인, 사교도 교인들, 가롯유다의 배반, 많은 것들이 엉키고 엉켜서 예수의 십자가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잡한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풀었어요.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고 그가 얻은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하는 예수님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비록 작은 십자가요. 내 목에는 작은 십자가로 되어지는 자세는 마찬가지요. 누구도 원망하지 마세요. 누구 때문도 아니요. 세상을 탓하지도 말고 오로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십자가 내게 주시는 잔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것이요.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리라. 여러분 마음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그리고 나서야 주님을 만날 수 있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모든 근심은 '십자가를 안 지겠다'는 거지요. 십자가가 내게서 비켜가기만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능하면 '십자가 조그만 것, 목걸이 정도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여러분에게는 참 생명력 참된 구원에 능력을 체험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령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내 몫에 대인 십자가, 오! 이것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주에 뜻입니까? 이것이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 길로 가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하면서 갈 것이에요.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의 영혼은 무한히 자유할 것입니다.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 빌라도

마태복음 27:11-26

김동호 목사(높은뜻숭의교회)

 

지난 8월 14일에,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광복57주년을 맞이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자성'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이광수 등 일제강점(日帝强占) 하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하였던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름을 다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습니다.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최남선, 김동인, 유진오, 유치진, 이무영, 정비석 등의 이름이 눈에 띄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왜 이미 지나간 과거 역사의 오점을 지금에 와서 들추어내고, 굳이 그 명단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선배문인들의 친일 부끄럽습니다"고 사과했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한 이유는, 광복 57주년을 맞이하면서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친일문학작품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단죄나 혹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반성과 용서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국어의 참된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좀더 속 깊은 마음을 표현한다면, 선배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있는 과거역사의 부끄러움과 같은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다시 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왜 42명의 유명한 문인들이 친일문학 활동을 했을까요? 왜 그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문학작품을 썼을까요? 그들은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한 것뿐입니다. 어디 문학하는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왜, 그들은 민족의 역사의 오점을 남기는 부끄러운 친일문학 활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자기 앞에 던져진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주어진 그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죄인이 되고 만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이 저주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입니다. 빌라도의 죄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때 그의 신분은 예수를 재판한 재판관이었고, 유대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궁극적인 관심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의 문제보다 그 결과를 가져오게 한 원인의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불의한 재판관이 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가 정직한 재판을 하지 못했는가? 바로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죄인인 빌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도, 빌라도처럼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우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유대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보고서에 관심가지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빌라도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사람인가? 그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십자가 처형 현장의 지휘관이었던 로마의 백부장 이름)가 말한 것처럼, 저는 진실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가이사 황제에게 보고한 빌라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불순종합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방황합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압니다. 수도 없이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빌라도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본문을 좀더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마 27:11)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 총독 빌라도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 가질 말씀은,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질문이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세워 놓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14:6)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면(對面)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빌라도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인생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빌라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슨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을까요? 이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지금 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으신 예수님이, 병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던 예수님이,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시던 예수님이, 지금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 그 사건이 빌라도에게, 전에 없었던 중대한 인생의 고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빌라도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은, 빌라도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없는 인생의 기회(機會)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위기(危機)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마주하고 서 계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에서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기회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신고 있던 자기 신을 벗고 맨발로 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 찾아오신 주님과 대면했습니다. 두 눈을 보지 못하면서, 거꾸러지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처음으로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 대답을 듣고는, 다시 질문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만남을 통해서, 핍박자(逼迫者) 사울의 인생은 선교사 바울의 인생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빌라도에게는 그의 앞에 서신 예수님은, 기회가 아니라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역사적인 죄악을 범하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가장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가장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사실은 지금 하나님 만나면 큰 일 아닙니까? 주님 만나면 큰일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어야 할 내 인생의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운 겁니다. 주님 만나기가 싫은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저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빌라도에게 마주 서 계시던 그 주님이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 앞에 서 계신 주님을 기회로 삼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주님을 내 인생의 위기와 절망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차선책을 찾는 빌라도(마 27:17)

 

명절이 되면, 로마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전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고소한 대제사장, 장로들,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즉, 빌라도는 차선책으로 죄 없는 예수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정치범 '바라바'가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빌라도 생각에는, 자신이 죄를 찾지 못한 무죄를 확신하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서,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흉악한 정치범, 살인범인 '바라바'와 '예수'를 흥정하면, 그래도 대제사장들, 장로들, 무리들이 '바라바' 대신 '예수'를 놓아주자고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도리어 무리를 선동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는, 거짓과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요, 나중도 진리입니다. 비진리가 상화에 따라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거짓과 흥정해서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같이 놓고 흥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영접하는 겁니다. 거짓된 것을 처음부터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는 겁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을 비교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진리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리임을 알 때, 바라바의 거짓됨을 아는 겁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때로는 법이 불의한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미국의 행동들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지나간 미국 역사에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은 합법이었습니다. 노예들이 주인에게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았건 깨닫지 못했건 피부가 검다고 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린 백인들이 범죄한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하고, '노예제도'를 불법(不法)이라고 선언한 다음부터 노예제도가 잘못된 제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노예제도는 늘 잘못된 제도인 겁니다. 결국에는, 법이 노예제도를 불법이라 인정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노예제도나 나치학살, 힘에 의한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입니다. 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의 문제도 아닙니다. 시대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에 속한 겁니다.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흥정의 대상도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이고, 나중도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바와 비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대적인 제도나, 상황이나, 전통이나, 비진리인 법과 흥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예수님'과 '바라바'가 있을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진리를 버린 빌라도(마 27:24, 26)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론은, 빌라도가 왜 불행한 인간인가? 왜 역사적인 죄인이 되었는가? 그는 왜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였는가 입니다. 빌라도는, 아무 성과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합니다. 그러고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24, 26절).

 

빌라도가 드디어 예수님을 포기한 겁니다. 진리를 버린 겁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포기했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결론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내 인생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에스라 성경학교에서 성경공부하는 젊은 교우 한 분이 최근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직장은,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수백억원의 자산과 수십억원의 현금을 운용하는 작지 않는 회사였습니다. 진급이 되어서, 그 회사에서 회계업무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월급도 더 많이 받게 되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게 되어 처음에는 굉장히 기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가 하면, 회사의 일반회계업무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회사의 회장님과 사장님을 위해서 매월 3,000만원 규모의 비자금을 만들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처음에 진급해서, 몇 달은 전에부터 해오던 관행이라 생각하고 죄의식 없이 능력 있게 그 일을 잘 처리했는데, 저와 같이 비유복음말씀을 공부하면서부터 그 일에 대한 고민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셨는데, "목사님, 저 회사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았습니다. 그런 후에, 저는 회사 그만 두지 말고, 말귀를 못 알아들을 분들도 아니시니, 회장님과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그 회사 회장님과 사장님은 서울의 유명한 모 교회에 출석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고민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장님, 사장님 저는 이 회사 절대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직한 방법으로 이 회사가 운영되도록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투명한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경계하고, 의심하고, 곱지 않는 눈초리로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로부터 두 달을 더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왔습니다. 그 회사의 회장이나 사장은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과 비자금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버린 빌라도와 같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빌라도가 왜, 진리를 포기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그는, 정치적인 욕망이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보다는 거짓된 무리들의 여론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무리들이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니니이다"(요 19:12). 이 한 마디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빌라도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준 말입니다. 끝없는 정치적인 욕망을 가진 빌라도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匕首) 같은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 한 마디 말에, 서둘러 진리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리도 헌신짝처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가이사에게 잘 보이는 일이라면, 거짓된 군중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좋아하기만 하면, 진리를 포기하는 그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한국에서 26년이나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 씨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한국?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쓴 내용 중에, 그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전과자가 떵떵거리는 나라라고 비판했습니다. 전과자라고 해서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창기와 세리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또 국회의원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당선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겁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국회의원 가운데 전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만큼 높은 나라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연세대학교 안용식 교수님이 쓴 논문 가운데,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의 일제관련 경력분석'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어보면, 기가 찹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행정의 실제 집행자였던 국장, 과장의 55.2%가 일제시대 관료를 지낸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랏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맞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좀 생각하는 분들은, 우리나라가 일제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 57주년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광복은 되었지만 아직 진정한 해방은 얻지 못했습니다. 식민통치라는 구속에서는 풀려났지만 진정한 자유는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평화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직, 거짓, 사기, 교만, 이념적인 싸움, 지역갈등, 부정직한 권력,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욕망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랏일이라고 언제나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내 일이 곧 큰 나랏일이고, 큰 나랏일이 곧 나의 작은 일입니다.

 

빌라도의 정치적인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의 욕망은 진리이신 예수를 버리고 마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 말입니다.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의 그 욕망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치(政治)하고, 교회 일하고, 직장 다니고, 기업경영하고, 공부한다면, 우리와 우리나라는 언제나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해방과 자유와 평화는 진리로부터만 옵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고, 포장되어 있는 온갖 빌라도의 욕망을 버리고 진리를 택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다 죄의 종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광복 57주년 맞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새로운 부르심과 기대라고 믿습니다. 아멘

 

사순절에 갖는 신앙의 각성

마태복음 26:69-75

정영택 목사(이문동교회)

 

우리는 철학을 얘기하면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의 영역을 세계 시민적 의미에서 요약해서 얘기했습니다. 그 요약은 이렇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모든 철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철학의 요약은 세계시민이 똑같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철학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네 번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근본적 차원에서 고찰되어져야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결국 철학이나 인간의 문제도 이런 인간학에 귀착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 조차도 인간의 문제에 풀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누구인가? 베드로는 무엇을 알았으며 그는 무엇을 해야만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도대체 베드로라는 그 인간은 누구인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비겁하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장담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면 점층적으로 점증적으로 점점도 확실하게 분명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죠. 6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렇게 말할 때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70절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깐 처음에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징집 모른 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아~그 무슨 쓸데없는 말하고 있어!" 쉽게 말하면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맞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 그러면서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앞문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절에서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처음에는 부인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내가 한말은 진짜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은 진짜다! 거짓이 아니다!"

처음에 부인은 징집 예수님을 모른 채 했다고 할 수 있지마는, 두 번째는 내가 지금 그를 모른다고 하는 말은 "진짜다 맹세코 진짜다" 이것은 법정에서 증거 하는 그러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두 번째 부인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나다 하거늘" 74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생각해보십시다. 첫 번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여기서 저주라고 하는 말은 악담을 한다는 것입니다. 매도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함부로 불경스러운 말을 쏟아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저주했다고 하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고 자신의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얘기가 종종 나옵니다. "만일 이 일이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바로 그 얘기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면은 , 내가 예수를 안다면 내가 저주를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 May God strike me dead if I am lie."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하나님이여 죽음으로 치소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벼락을 맞아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열정과 신앙고백과 폐기와 용기, 이런 것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장담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이렇게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기대를 너무 크게 하는 걸까요? 베드로만은 "아니오 내가 예수와 함께있었소"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알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지 못하는 불신의 사람이요, 부정의 사람이요, 실패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실패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속에서 희망을 갖게됩니다. 왜 희망을 갖게될까요? 베드로가 이렇게 처참하게 됐을지라도 그에게 믿음의 각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각성을 우리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의 회개의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있습니다. 75절을 보십시오"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희망이요, 우리에게 용기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요,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곡이 가능케 하는 것을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닭이 곧 울더라." 닭이 우는 소리 때문에 그가 회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닭 우는 소리 때문에 회개했을까요? 마가복음 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울더라."그러면 첫 번째 닭 우는 소리도 들었지 않겠습니까? 그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어디선가 멀리서 아니면 가까이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부인했습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정신차림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에게 회개의 통곡이 있게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닭 우는 소리가 바로 주님의 경고요, 회개의 촉구요, 죄인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깨우치고있습니까?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깨우침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있을 때마다 진정한 통곡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바로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버클리는 베드로의 회개에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주님께서 닭 우는 소리를 듣게 해 주시고 베드로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깊은 곳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배반자를 봅니다. 하나는 가롯유다입니다. 그는 책임을 졌습니다. 돈을 갖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앞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완전하게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에게 돌아가 봅시다. 그는 멀리서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겁쟁이 인 것 같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야바의 법정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겠습니까? 공포의 자리입니다. 재판의 자리입니다. 숨죽이는 자리입니다. 원수들이 득실대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지적을 당했습니다. "너도 그 사람이다. 그 당이다. 내 말씨가 그렇다." 세 번씩이나 다그치는데도 그래도 겁은 났지만 베드로는 물러서지 않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냥 한 새벽에 울리는 닭소리가 닭소리로 들리지 않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가 사랑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고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회개하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고 진정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그 부모를 생각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때로 부족한 것도 많습니다. 혹 우리들이 부인했던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염치가 없지마는 "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내용과 또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가운데 귀한 찬양이 생각이 나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이 생각이 나서 소개해드립니다.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가야바법정에 제자 베드로 예수님 모른다 부인했을 때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시에 찔린 예수님 얼굴에 피와 땀방울마저 흘러내릴 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 마음 십자가 그 사랑 감사 드릴 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때 주님은 슬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할 때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성찬의 참여가 이러한 주님의 용서와 위로가 우리가운데 넘치는 그러한 은혜로 다가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

마가복음 15:21-27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 네 번째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주일마다 계속해서 우리가 같이 생각하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 삶의 흔적이 남습니다. 어른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손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나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흔적들을 각자 자기 얼굴과 자기 손에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얼굴에, 여러분 손에 어떤 흔적이 있는지.

우리의 어머니들을 보면, 어김없이 자녀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굳은살이 박힌 발, 트고 갈라진 손, 껄껄한 손, 또 약간 휜 허리, 깊게 골패인 주름살, 하얗게 새어 가는 흰머리, 그뿐이 아닙니다. 자녀를 볼 때마다 미소짓는, 피어나는 사랑의 얼굴들, 미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어머니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 어머니 앞에 존경심이 생기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로 16절 상반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그랬습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렇게 말합니다. 손에 새긴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몸 전체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우면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매맞으신 예수님, 가시관 쓰신 예수님,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계신 예수님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그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란 겁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또, 이 시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도 새기고, 그 예수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그 은혜를 우리는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기간에,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다시 찾아지고,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첫째로, "가시관 쓰신 예수님", "가시관 쓰신 예수님." 여러분, 찔려보셨어요? 찔리니까 아파요? 안 아파요? 안 찔려봤어요? 바느질하다가 손끝 안 찔려봤어요? 일하다가 가시에 안 찔려봤어요? 찔리면 "엄마,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이 찔리신 가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한 5cm, 7cm, 10cm 되는 긴 가시,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요. 그것으로, 가시로 관을 만들었어요. 그것을 머리에 얹어만 놓아도 아플 것인데, 확 박았습니다. 생살이, 이마가, 머리가 찢깁니다. 피가 막 흐릅니다.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가시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 상반절을 보니까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는 이 말씀을 본다면 가시가 없어요. 가시와 엉겅퀴가 없다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 값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죄의 상징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범죄한 인간이 써야 할 죄의 대가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허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죄를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느냐? 내가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여러분이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수많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19장 12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그랬습니다. 피조물 된 인간은 만왕의 왕에게 황금 면류관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황금 면류관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관을 예수님께 씌워드렸습니다. 씌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내가 써야 할 가시관을, 여러분이 써야 할 가시관을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겁니다. 가시관을 써야 할 내가, 예수님이 대신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제 가시관은 벗어지고 의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엄청 큰 축복 아닙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주님을 기다린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뭐냐? 세상의 금 면류관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와 찬양의 면류관을 우리를 위해서 가시관 쓰신 예수님께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가시관 쓰셨사오니, 이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립니다. 찬양을 받으시고, 존귀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늘의 면류관을 또 구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자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들을 우리가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를 삼고, 제자로 살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2절로 4절에 보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양육하고, 열심히 성도를 돌아보고, 열심히 예수를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가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온갖 시험과 환난 중에도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면류관을 또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두 번째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큰 대못이 박히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들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내가 지은 죄, 여러분이 지은 죄,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큰 대못에 손과 발이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 27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사용된 못은 길이가 약 13㎝부터 18㎝입니다. 한 뼘이에요. 그 굵기가 얼마나 굵으냐? 1㎝ 내지 1.5㎝, 그러니까 보통 장정의 검지 손가락, 아니면 엄지손가락 정도예요. 지금처럼 못이 기계로 빠져나와 아주 매끈한 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쇠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드는 못, 꺼끌꺼끌한 길이가 13㎝부터 18㎝까지, 굵기가 1㎝ 내지 1.5㎝, 이 무지막지한 쇠못이 예수님의 손, 발에 박힙니다.

못을 박은 자리는 우리는 흔히 그냥 손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손목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목은 팔이 아닌 손의 일부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쇠 대못이 손목과 발등에 박힙니다. 이제 뼈가 막 으스러집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맥과 온갖 신경계를 또 다 뚫고 지나갑니다. 힘줄이 끊어집니다. 살이 찢어집니다. 그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벌어진 양팔과 탈골된 어깨 때문에 극도의 호흡장애가 옵니다. 숨을 쉬려고 움직이면 발목뼈는, 그 손뼈는 으스러지는 고통이 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움직일 때마다 매를 맞아서 찢긴 그 등의 살이 십자가 기둥에 긁히면서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이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은 군인들이 무릎을 꺾기도 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커도 예수님의 사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과 친구로 대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그 전에 많이 받았으니, 우리도 누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가 그 모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주는 겁니다. 내가 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못을 박았다고 상대편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시편 109편 4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나 너는 나를 대적하니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예수의 흔적은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할 때,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흔적인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가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을 돕는 것,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까워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나타내는 흔적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은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한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영이 죽었던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 받게 하기 위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흔적을 위해서는 이 복음을 나가 전할 때, 핍박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롱받을 때가 있습니다. 업신여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때로는 물벼락도 맞고, 때로는 불벼락도 맞고, 많은 고통과 죽음도 당했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당하신 것에 비교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물벼락 맞는다, 욕을 먹는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그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견디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때로는 그것이 영광 밖의 그 길이라도, 혹시 배고픈 그 길이라도, 멸시, 천대받는 그 길이라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성령님을 모시고 기쁨으로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제자가 됩시다.

 

셋째,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세 번째입니다.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시관만 쓰신 것이 아닙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만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로마 군인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물과 피는 가슴 주변과 심장이 터져서 나온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신 지,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22편 14절로 15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6절에서 3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죽는 순간과 죽은 후에도 말씀대로 사신 것입니다. 말씀을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고통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과연 나는,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조금만 물질이나 내 형편이 어려우면, 헌금부터 줄이려 하지는 않는가? 언제나 교회 일보다 내 일이 우선하지는 않는가?' 제가 이번에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신앙심을 회복하자" 그러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 먼저, 그 다음 하나님',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랬어요. 건강한 신앙은 어떤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열심히 예배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와 예배만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순서가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할 때, 그 신앙은 건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이 건강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의 신앙이 생활로 나타날 때, 그 신앙이 건강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볼 시간은 있어도 구역예배 드릴 시간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온 몸에 사랑의 흔적을 예수님이 남기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축복하시겠다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삽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몸 드리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헌신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말씀대로 살면, 부활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고난이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말씀대로 행함이 없이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구원은 공짜, 축복은 심은 대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냐? 상대를 위한 희생입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를 위한 희생, 희생. 희생이 사랑입니다. 또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노는 게 아니라, 사랑은 일하는 거다. 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즐겁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풍요롭게 해주려니까, 상대에게 모든 걸 베풀어주려고 하니까, 사랑은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과 3절에 말씀하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지으실 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많으신 부모님들은 연세가 많으셔도 또 움직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시는 부모님은 활동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활동하시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치매도 안 걸릴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치매 걸리셨어요? 안 걸리셨어요. 왜요? 하나님이 자녀를 사랑하시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니까 지금도 일하십니다. 일하십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는 겁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일하는 겁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은 노는 게 아니고 일하는 거다." 여러분, 그저 사랑한다고 둘이 방에 앉아 가지고 여행이나 다니고, 놀러만 다니고,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게 무엇입니까? 자기 처자를 풍요롭게 잘 살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땀흘리고, 일하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아멘. 따라합시다. "사랑은 수고하는 거다", "사랑은 일하는 거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거 없는 사랑은 다 가짜, 가짜, 가짜. 삼류소설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입니다. 삼류만화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 왜요? 그 사랑에는 일이 없으니까. 희생이 없으니까. 주는 게 없으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하지 말자고요. 말만하지 말자고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하고,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 받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이 산 믿음이요, 건강한 신앙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요새 은혜가 안 되요. 은혜가 없어요." 왜 그래요? 받기만 하려고 하니까 은혜가 없지요. 예수님처럼 주려고 해봐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그 매맞음, 예수님의 가시관에 찔림, 예수님의 손발에 못 박히는 그 아픔,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시는 것,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메마를 수가 없어요. 은혜가 안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못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고난만 생각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죠.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2002년 사순절 기간에 계속해서 주일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해요.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잃어버린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하는, 감사하고 감격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4

진희근 목사(승리교회)

 

지금은 교회 절기로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 이라는 의미죠. 부활절 전 40일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40일이 조금 넘죠. 왜냐하면 주일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 전 40일간을 사순절이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오락을 멀리하고 경건한 생활하기를 힘쓰고 전도와 사랑의 삶을 살기에 힘쓰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한국선교학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회장님 아들이 대학생인데 급성 백혈병이 걸려서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비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합니다. 회장님이 잠깐 설교하면서 간증 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나는 내 아들의 치료비를 댈 것입니다. 빚을 얻어서라도 내 아들을 치료할 것입니다.‘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것은 그를 위해서 얼마만큼 대가를 치를 수 있느냐에 따라서 증명이 됩니다. 내가 저를 위해서 100만원까지 줄 수 있으면 100만큼 저를 사랑하는 거죠. 그를 위해서 내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때 그 때 생명처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얼마만큼 대가를 치렀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이만큼 사랑한다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그 희생만큼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잠시나마 십자가 속에서 주님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주님이 치른 희생은 바로 비하인 것입니다.

낮아지셨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모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게 고시공부를 합니까. 신분의 상승을 노리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졌다면 그야말로 참사랑이 증명이 되는 것이죠.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왕위 계승자였습니다만 미국의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위를 포기하고 평민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것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죠. 아무런 다른 희생하지 않고 단지 신분이 낮아진 것, 그것만으로 온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와, 굉장한 사랑이구나, 진실한 사랑이구나‘ 놀랬습니다. 그런데 왕족이 평민이 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운 비하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절대자가 유한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하 속에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가장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키로는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십자가는 양손과 양발의 사각에 못이 박힙니다. 이 부분에 못이 박히는데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죽는 것은 아니죠. 그 다음에 다가오는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두통과 갈증이라고 합니다. 온 몸에 피가 흘러나오게 되면 견딜 수 없는 갈증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양손과 양발의 고통 때문에 소리친 적은 없습니다만 목마름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죠. 그만큼 견딜 수 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바로 단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에 제 이 위로써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 하나님 간에 긴밀한 사랑의 교류 속에서 지내셨는데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만은 그 교류가 끊어진 것입니다. 너무나도 견딜 수 없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께서 절규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수치와 비하와 고통과 버림당한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함인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우리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십자가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에 주님께서 잠잠히 그 모든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 믿지 않는 농부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농부가‘목사님, 여기 나와보세요.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하고 목사님을 닭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암탉이 한 마리 앉아있는데 ‘잘 보십시오‘ 보니까 암탉 품속에서 병아리들이 삐약삐약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병아리들이 움직이는데 암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암탉 뒤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으니 농부가 대답합니다. 족제비라는 놈이 밤중에 몰래 와서 이 어미 닭의 머리를 물어뜯고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 암탉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지만 자기가 품고 있는 병아리들을 위해서 자기가 피를 다 뺏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지만 저와 당신의 죄 때문에, 저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고 그 닭 앞에서 농부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 놀라운 희생은 내 죄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순절을 아무렇게나 보낼 수 없겠죠. 바로 나 때문에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는데 그 사랑이 과연 얼마만한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40일간의 시간을 정했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너무너무 커서 그 사랑은 너무 광대해서 하루 이틀 생각해도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40일간 집중적으로 십자가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이며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높아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 지은 모든 죄의 대가가 치러지고 용서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영접 받으며 환영받으며 다시는 이별 없는 영원한 사랑의 삶을 천국에서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좀더 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성경지식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3, 24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위대한 인류의 예수그리스도, 사랑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기적을 행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내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이것을 믿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어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세상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께서 내 대신 죽으셨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장 귀한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장벽을 뚫고 흐르는 사랑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미국에 알래스카주가 있죠. 사실 미국 본토와 많이 떨어져있습니다. 그 중간에 캐나다가 있죠. 소련으로부터 그 땅을 샀죠. 처음에는 그냥 얼음 땅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압박을 당해서 그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미국에 알래스카를 사라고 했습니다. 안 사겠다고 안 사겠다고 하는 것을 사라고 사라고 졸라 가지고 억지로 미국이 그 땅을 샀죠. 그런데 얼음 땅, 쓸데없는 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속에 갖가지 보화들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역사 가르치는 선생님이 농담 삼아 이렇게 얘기한 게 있습니다. 지금도 겨울에 바람이 불면 북쪽에서 불 때 가만히 들어보면 뽀드득 뽀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답니다. 소련이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팔아 넘긴 것 그것 원통해 가지고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는데 이 알래스카 속에는 많은 진귀한 보석들이 있는데 고기도 있고 갖가지 많은 것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요. 엄청난 양의 원유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속에 있는 원유를 어떻게 미국 본토로 끌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롭죠. 지혜로워서 송유관을 만들어 가지고 알래스카에 있는 기름을 지금도 수백만 배럴씩 본토로 가져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얼음벽을 뚫고 그 산을 뚫고 송유관을 통해서 원유가 미국 본토에 올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많은 죄의 장벽들을 뚫고 십자가의 송유관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나그네가 아주 추운 겨울날 먼길을 걸었습니다. 너무 배고프고 추워 죽을 지경이에요. 친절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자기 집에 초청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음식과 새 옷과 따뜻한 목욕물과 침대를 준비해 두었으니 이 열쇠를 받아 들어가셔서 씻고 드시고 주무십시오.‘ 그런데 만약 나그네가 ‘아, 지금 당장 배고픈데 빵을 주지 이런 열쇠가 무슨 소용이 있소‘ 하고 열쇠를 던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쇠를 받지 않으면 이 사람을 위해서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열쇠를 받는 것은 다 받는 것이요, 열쇠를 거절하는 것은 다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축복과 그 모든 능력이 십자가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지 못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믿을 수 있으면 십자가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강습회에 다녀왔는데 랄프 데이브라는 박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하와를 얻었습니까. 갈비뼈에서 하와가 나왔죠. 바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여인이 아이를 낳는 그 과정과 같다고 보는 것이죠.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그 산고로 인해서 부르짖죠. 그리고 마침내 양수가 터지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렀습니다. 그 순간에 교회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자기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를 가리켜서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했습니다. 내 몸이라는 얘기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인 것입니다. 나는 깨끗한 자인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까.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쓸모 없는 존재다 그런 생각 들 때 있습니까. 그런 생각 들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는 가끔 드는데 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알게 됩니다. 여러분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수백 만원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 위해 천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만 원의 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 주실 정도로 나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바라볼 때 깨닫게 됩니다. 이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신데 바로 주님께서 나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때로 범죄할 때 있죠.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내 죄보다 더 큽니다. 때문에 범죄 했지만 십자가의 그 피가 내 죄를 씻어주었기에 나는 정죄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합니다만 즉시 회개하고 그 범죄 때문에 더욱 더 십자가로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주저앉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죄의 세력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도 어떻게 사랑하기가 힘든지 부부 자식간도 한번 틀어지면 굉장히 어렵죠. 고부간 관계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인간 관계 어렵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속에서 부글부글 증오가 끓어오를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CNN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의 여인을 잠깐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터너라는 이 여자는 남편과 정부를 살해한 죄로 사형집행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정부가 간통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도끼로 남편과 정부를 죽입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살인범으로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언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불같은 여인이, 미움과 증오의 여인이 온순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사형 당하기 전날 인터뷰에서 지극히 온유하고 기쁨이 가득찬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여러분 저는 내일 우리 주님을 뵈러 갑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성격의 사람도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문제를 당하고 있던지 십자가를 바라보면 다 해결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집중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그리하여 십자가 속에 담겨져 있는 그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 능력을 다 공급받아서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가장 행복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능력 우리가 어찌 다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 마음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번 사순절 기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십자가의 능력을 공급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죄와 세상과 사탄을 물리치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사람들이, 용서의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마가복음 15:20-27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0~27>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 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 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 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 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 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 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 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런데 새 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굽신 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월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월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막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 만큼 얻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눅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렘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 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엄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 두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 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이사야 53:4-9

주금용 목사(남서울교회)

 

어느 아리따운 용모를 가진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용모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보기에도 흉칙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누가 볼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딸의 당부를 깜박 잊은 채 도시락을 갖다 주려고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딸의 반을 찾아 물어서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당연히 그 얼굴 흉칙한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당황해서 그만 우리 집 식모라고 대답하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방과 후 이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느냐고,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다고. 그때 그 어머니 가 딸의 울먹이는 등뒤에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었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란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그만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 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단다. 사람들이 소리질러 그 사실을 안 나는 앞뒤를 가릴 겨를도 없이 집안으로 달려들어갔고 안 방 에 누워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나왔단다. 나는 너를 안은 까닭에 뜨거운 불길 앞에서도 내 얼굴을 가릴 수 없었단다. 그 후 심한 화상을 얼굴에 입고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그나마 생명은 건졌지만 얼굴 은 이 모양이 되었구나" 이 여학생은 분이 나서 울먹이다가 어머니의 이 사연을 듣고는 돌아서서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어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신만 생각하셨다면 얼마든지 고난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모든 관심이 바로 골고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도 저 음부의 마귀와 사탄도 숨을 죽인 채 이 골고다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 인류의 운명을 바뀌어 놓는 최대 의 사건인 사순절을 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영적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훈련을 받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 싸움에 흔들리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 의 300용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결코 군대의 숫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합지졸이 아닌 훈련된 정예부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두려워 떠는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만2천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았습니다. 남은 1만명은 용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족하지 안았습니다. 그래서 물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는 자세를 보고 손으로 먹는 자만 남기시고 무릎 꿇고 입대고 먹는 자는 다시 보내셨습니다. 남은 수는 3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된, 훈련된 병사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을 지나면서 기도 제목이 기드온의 용사 300명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신 분은 이 사순절 기간 에 철저히 신앙생활 하십시다. 성수주일을 못했으면 이번 기회에 성수주일을 철저히 하고, 말씀 읽는 데에 게을리 했으면 이번 사순절에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물질생활에 헌신하지 못했다면 이번 사순절에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를 그동안 못했으면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봉사를 열심히 한다든가, 이 사순절은 훈련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동안 나태한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게으름의 신앙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영적으로 준비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간의 반목질시하면서 용서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다 용서하고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로 승리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허물과 죄를 인한 대리적 고난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체험 라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절대 가치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의 삶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그리고 그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에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사랑,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그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그의 낮아지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섬김의 삶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는 이 땅에 아주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는 약하게 살았던 것 같았으나 끝까지 비굴하지 않으셨으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몸소 나타내 보이신 가장 강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매맞고 고난의 쓴잔을 마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고난이 십자가는 2000년 전 예루살렘 근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을 조롱하고 그의 말씀을 무시할 때, 애통하는 형제 의 아픔을 외면할 때, 십자가의 승리를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좌절하며 낙심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로 인해 한 번 더 못박히 십니다. 무죄 한 자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자기를 못박는 자를 위해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비신 주님을 감상적으로 생각하며 눈물만 흘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우리들은 이 사순절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간으로 삼읍시다.

형제의 아픔을 자매의 아픔을 함께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귀한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목말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곁에서 생수를 약속하신 전능자의 거룩과 위대함이 치욕을 당하는 모순된 순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시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역사 속에 오신 주님의 거룩함과 신성이 진정으로 계시된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 대신 욕먹기를 각오할 때 빛 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로서 약한 자에게 당하는 아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매를 맞아 죽은 것이나 그의 방법은 악한 무리들을 동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으로서 악한 자에게 당하신 고난 이였고 , 강자로서 약자에게 당하신 고난 이였습니다. 여기에 최대의 순종의 표본이 되셨고 인내의 본이 되셨습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약한 자에게 맞으면서 끝까지 견딘다고 하는 것은 갑절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순복 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짖지 않고 안들을 말을 한마디만 들어도 억울하다고 펄쩍 뛰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 서도 최고의 형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의하여 일보도 양보할 줄 모르고 현재를 위하여 한발자국도 옮기기를 아까워 하나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지옥의 형벌까지 받아주셨으니 그 고통과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내 힘만 못한 사람을 억누르고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아부하는 세대에 예수님께서는 강자로서 약자에게 굴욕을 참아 주셨으며,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참아주셨으니 이 고난의 위력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말을 만들고 말을 돌리고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습은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아니해도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서 말없이 묵묵하게 헌신하시는 그 모습, 교회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자신을 감추는 모습들, 교회건축을 하고 나서 교회가 혹시나 어렵지는 않은가 없는 물질을 모아서 드리시는 성도님들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모습입니다.

말없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섬기려고 하시는 많은 분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의 나 자신들을 돌아보는 귀한 사순절이 되십시다.

 

2.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는 순례의 기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절의 새로운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순절은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을 배우는 때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기 전에 통곡해야 합니다.살기 전에 죽어야 하고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을 배우는 때가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양이 성전에 들어 올 때는 살아서 들어오지만 제단에 올라 갈 때는 죽어서 올라갑니다. 아직도 섬김에 있어서 내가 살아서 마치 교회를 내가 부흥이라도 시키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우리의 교만이 다시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함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단지 교회성장의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화 된 다면 그것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목사님이 권면 하는 말에 이유를 달고 순종치 못한 우리의 모습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분의 모습을 이 사순절에 보면서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지만 의로운 자의 고난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의로운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시기 위해서 무죄한 짐승을 잡아 피 흘리심으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 주신 이후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법으로 흠 없는 양과 소를 잡아 피 흘리는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짓고 죽기는 죄 없는 짐승들이 죽은 것입니다.(창3: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것과 그로 인한 구원의 역사를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 값으로 피 흘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흠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 단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의 그분을 우리는 감상적이 아닌 진정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내 죄 값은 사망인데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정죄를 받으신 속죄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 값을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절망에 빠져만 있는 것은 십자가의 효험을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진노의 저주 아래 떨어진 자리에서도 예수님 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십니다. 칼빈은 주님의 이 외침이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영혼과 한 묶음으로 묶어서 하나님께 위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순간을 긍휼의 은총을 힘입는 순간으로 전환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정진과 성취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 가 되었으며 우리를 죽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당하셨으니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케 된 고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3. 우리로 하여금 변화에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선교사는 구한말 제너럴 셔어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토마스 목사 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쇄국정책에 의해서 그만 타고 온 배가 불에 타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도 조선 땅에 힘을 다해서 성경책을 던졌다고 합니다. 왜 토마스 목사님께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가 죄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일을 보고만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죄도 없고 오직 복음을 이 땅에 전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토마스 목사님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바로 조선 백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민족을 복음으로 구원하려는 선교사의 죽음은 즉 우리를 변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려는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의 운명에 사로잡혀 인생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르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알게 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에 달리심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보람이 바로 성도들의 변화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 죠지뮬러 목사님께서 나이 80이 넘어 어느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어떻게 돈 한푼도 없이 만 명의 고아들과 10만명의 교회학교 아이들과 800만불이상의 돈을 쓸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때 죠지뮬러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조용히 일어서시더니 앉고있던 의자를 마주 보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 위에 두 손을 깍지끼어 얹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있더니 일어서시면서 "이것이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하신 그 분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다시금 새롭게 변화하는 귀한 계기가 이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망친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것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 비전의 상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 사업가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폭풍을 만나 추락했다. 아버지는 수색대를 조직해 며칠 동안 사막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디가 추락 지점인지 또 아들이 생존해 있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며칠 뒤 추락 지점을 발견했지만 비행기의 잔해 와 비행사의 시체만 있고 아들의 시체는 없었다. 아버지는 일단 아 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아들을 구출할 작전을 구상하며 기도 드렸다. "하나님, 내 아들이 살았는지, 살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와 제 아들을 도와주시옵소서." 기도 가 끝난 후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사막에 뿌리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전단에 무엇이라 쓸 것인가,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쓸 것인가, 무엇을 잡아먹고 사나운 짐승을 어떻게 피할 것인 지를 써야 할 것인가 난감했다. 고심을 하던 아버지는 결국 "My Son, John, I Love You"라고만 써서 뿌렸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하고 좌절감으로 죽어가던 아들이 이 전단을 받아보 게 되었다. 아들은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버티자" 하고 용기를 내었다. 후 에 아들은 수색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메마른 사막 같은 세상 주님의 피 사랑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독일 튀백교회의 어느 낡은 돌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제목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 자 은 동 부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지영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