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사순절 설교

[스크랩] 사순절 설교 모음

에반젤(복음) 2021. 3. 1. 00:25

사순절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 싸움에 흔들리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1. 정영택 목사 사순절에 갖는 신앙의 각성 마태복음 26:69-75
2. 최성규 목사 예수님의 고난 마가복음 15:21-27
3. 진희근 목사 십자가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4
4. 최낙중 목사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마가복음 15:20-27
5. 주금용 목사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이사야 53:4-9




사순절에 갖는 신앙의 각성


마태복음 26:69-75
정영택 목사(이문동교회)

우리는 철학을 얘기하면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의 영역을 세계 시민적 의미에서 요약해서 얘기했습니다. 그 요약은 이렇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모든 철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철학의 요약은 세계시민이 똑같이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철학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네 번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근본적 차원에서 고찰되어져야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결국 철학이나 인간의 문제도 이런 인간학에 귀착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 조차도 인간의 문제에 풀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생각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누구인가? 베드로는 무엇을 알았으며 그는 무엇을 해야만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도대체 베드로라는 그 인간은 누구인가? 어떻게 이렇게 비참하게 비겁하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장담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면 점층적으로 점증적으로 점점도 확실하게 분명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죠. 6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렇게 말할 때 베드로가 부인합니다.
70절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니깐 처음에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징집 모른 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아∼그 무슨 쓸데없는 말하고 있어!" 쉽게 말하면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맞지도 않아, 그렇지 않아" 그러면서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앞문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절에서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처음에는 부인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내가 한말은 진짜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은 진짜다! 거짓이 아니다!"
처음에 부인은 징집 예수님을 모른 채 했다고 할 수 있지마는, 두 번째는 내가 지금 그를 모른다고 하는 말은 "진짜다 맹세코 진짜다" 이것은 법정에서 증거 하는 그러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두 번째 부인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나다 하거늘" 74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생각해보십시다. 첫 번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습니다. 여기서 저주라고 하는 말은 악담을 한다는 것입니다. 매도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함부로 불경스러운 말을 쏟아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저주했다고 하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고 자신의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얘기가 종종 나옵니다. "만일 이 일이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바로 그 얘기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면은 , 내가 예수를 안다면 내가 저주를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 May God strike me dead if I am lie."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하나님이여 죽음으로 치소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벼락을 맞아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진짜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열정과 신앙고백과 폐기와 용기, 이런 것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장담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생각지도 못하고 이렇게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기대를 너무 크게 하는 걸까요? 베드로만은 "아니오 내가 예수와 함께있었소"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알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지 못하는 불신의 사람이요, 부정의 사람이요, 실패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실패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 속에서 희망을 갖게됩니다. 왜 희망을 갖게될까요? 베드로가 이렇게 처참하게 됐을지라도 그에게 믿음의 각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각성을 우리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의 회개의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있습니다. 75절을 보십시오"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희망이요, 우리에게 용기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요,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곡이 가능케 하는 것을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닭이 곧 울더라." 닭이 우는 소리 때문에 그가 회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닭 우는 소리 때문에 회개했을까요? 마가복음 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닭이 두 번째 울더라."그러면 첫 번째 닭 우는 소리도 들었지 않겠습니까? 그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어디선가 멀리서 아니면 가까이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부인했습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 정신차림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에게 회개의 통곡이 있게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닭 우는 소리가 바로 주님의 경고요, 회개의 촉구요, 죄인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깨우치고있습니까?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깨우침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있을 때마다 진정한 통곡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바로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버클리는 베드로의 회개에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주님께서 닭 우는 소리를 듣게 해 주시고 베드로 자신이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깊은 곳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배반자를 봅니다. 하나는 가롯유다입니다. 그는 책임을 졌습니다. 돈을 갖다 집어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앞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완전하게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에게 돌아가 봅시다. 그는 멀리서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겁쟁이 인 것 같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야바의 법정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겠습니까? 공포의 자리입니다. 재판의 자리입니다. 숨죽이는 자리입니다. 원수들이 득실대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지적을 당했습니다. "너도 그 사람이다. 그 당이다. 내 말씨가 그렇다." 세 번씩이나 다그치는데도 그래도 겁은 났지만 베드로는 물러서지 않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냥 한 새벽에 울리는 닭소리가 닭소리로 들리지 않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가 사랑의 자리에 있기를 원했고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회개하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회개하고 진정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그 부모를 생각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때로 부족한 것도 많습니다. 혹 우리들이 부인했던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염치가 없지마는 "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내용과 또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가운데 귀한 찬양이 생각이 나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찬양이 생각이 나서 소개해드립니다.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가야바법정에 제자 베드로 예수님 모른다 부인했을 때 예수님 얼마나 슬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가시에 찔린 예수님 얼굴에 피와 땀방울마저 흘러내릴 때 예수님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 마음 십자가 그 사랑 감사 드릴 때 예수님 얼마나 기뻐 하실까?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때 주님은 슬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사랑합니다. 회개합니다" 할 때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성찬의 참여가 이러한 주님의 용서와 위로가 우리가운데 넘치는 그러한 은혜로 다가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4월 8일





예수님의 고난


마가복음 15:21-27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고난", 네 번째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002년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주일마다 계속해서 우리가 같이 생각하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 삶의 흔적이 남습니다. 어른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손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나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흔적들을 각자 자기 얼굴과 자기 손에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얼굴에, 여러분 손에 어떤 흔적이 있는지.
우리의 어머니들을 보면, 어김없이 자녀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굳은살이 박힌 발, 트고 갈라진 손, 껄껄한 손, 또 약간 휜 허리, 깊게 골패인 주름살, 하얗게 새어 가는 흰머리, 그뿐이 아닙니다. 자녀를 볼 때마다 미소짓는, 피어나는 사랑의 얼굴들, 미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어머니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 어머니 앞에 존경심이 생기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로 16절 상반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그랬습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렇게 말합니다. 손에 새긴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몸 전체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우면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매맞으신 예수님, 가시관 쓰신 예수님,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계신 예수님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그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란 겁니다.
사순절 기간입니다. 특별히 오늘 또, 이 시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도 새기고, 그 예수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그 은혜를 우리는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기간에,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다시 찾아지고,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첫째로, "가시관 쓰신 예수님", "가시관 쓰신 예수님." 여러분, 찔려보셨어요? 찔리니까 아파요? 안 아파요? 안 찔려봤어요? 바느질하다가 손끝 안 찔려봤어요? 일하다가 가시에 안 찔려봤어요? 찔리면 "엄마,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이 찔리신 가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한 5cm, 7cm, 10cm 되는 긴 가시, 얼마나 예리한지 몰라요. 그것으로, 가시로 관을 만들었어요. 그것을 머리에 얹어만 놓아도 아플 것인데, 확 박았습니다. 생살이, 이마가, 머리가 찢깁니다. 피가 막 흐릅니다.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가시는 저주를 상징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 상반절을 보니까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에덴 동산에는 이 말씀을 본다면 가시가 없어요. 가시와 엉겅퀴가 없다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 값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죄의 상징인 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범죄한 인간이 써야 할 죄의 대가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허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죄를 짓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느냐? 내가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여러분이 져야 할 가시 면류관을 우리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수많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 19장 12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그랬습니다. 피조물 된 인간은 만왕의 왕에게 황금 면류관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황금 면류관이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관을 예수님께 씌워드렸습니다. 씌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내가 써야 할 가시관을, 여러분이 써야 할 가시관을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겁니다. 가시관을 써야 할 내가, 예수님이 대신 가시관을 쓰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제 가시관은 벗어지고 의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엄청 큰 축복 아닙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주님을 기다린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할 것은 뭐냐? 세상의 금 면류관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와 찬양의 면류관을 우리를 위해서 가시관 쓰신 예수님께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가시관 쓰셨사오니, 이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립니다. 찬양을 받으시고, 존귀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늘의 면류관을 또 구하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 자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들을 우리가 전도하고, 양육하고, 제자를 삼고, 제자로 살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2절로 4절에 보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양육하고, 열심히 성도를 돌아보고, 열심히 예수를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가서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온갖 시험과 환난 중에도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면류관을 또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두 번째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큰 대못이 박히셨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들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내가 지은 죄, 여러분이 지은 죄,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큰 대못에 손과 발이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 27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사용된 못은 길이가 약 13㎝부터 18㎝입니다. 한 뼘이에요. 그 굵기가 얼마나 굵으냐? 1㎝ 내지 1.5㎝, 그러니까 보통 장정의 검지 손가락, 아니면 엄지손가락 정도예요. 지금처럼 못이 기계로 빠져나와 아주 매끈한 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쇠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드는 못, 꺼끌꺼끌한 길이가 13㎝부터 18㎝까지, 굵기가 1㎝ 내지 1.5㎝, 이 무지막지한 쇠못이 예수님의 손, 발에 박힙니다.
못을 박은 자리는 우리는 흔히 그냥 손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손목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목은 팔이 아닌 손의 일부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쇠 대못이 손목과 발등에 박힙니다. 이제 뼈가 막 으스러집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정맥과 온갖 신경계를 또 다 뚫고 지나갑니다. 힘줄이 끊어집니다. 살이 찢어집니다. 그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벌어진 양팔과 탈골된 어깨 때문에 극도의 호흡장애가 옵니다. 숨을 쉬려고 움직이면 발목뼈는, 그 손뼈는 으스러지는 고통이 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움직일 때마다 매를 맞아서 찢긴 그 등의 살이 십자가 기둥에 긁히면서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이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은 군인들이 무릎을 꺾기도 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커도 예수님의 사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족과 친구로 대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그 전에 많이 받았으니, 우리도 누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내가 그 모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주는 겁니다. 내가 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못을 박았다고 상대편 마음에 대못을 박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시편 109편 4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나 너는 나를 대적하니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예수의 흔적은 이웃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할 때,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흔적인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가 생활보호대상자, 독거노인을 돕는 것,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까워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나타내는 흔적인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흔적은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한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영이 죽었던 우리들의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 받게 하기 위해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흔적을 위해서는 이 복음을 나가 전할 때, 핍박받을 때가 있습니다. 조롱받을 때가 있습니다. 업신여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럴지라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때로는 물벼락도 맞고, 때로는 불벼락도 맞고, 많은 고통과 죽음도 당했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 당하신 것에 비교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물벼락 맞는다, 욕을 먹는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그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견디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때로는 그것이 영광 밖의 그 길이라도, 혹시 배고픈 그 길이라도, 멸시, 천대받는 그 길이라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성령님을 모시고 기쁨으로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제자가 됩시다.

셋째,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세 번째입니다.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시관만 쓰신 것이 아닙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만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로마 군인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물과 피는 가슴 주변과 심장이 터져서 나온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신 지,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22편 14절로 15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6절에서 3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죽는 순간과 죽은 후에도 말씀대로 사신 것입니다. 말씀을 이루어드린 것입니다. 고통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과연 나는,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조금만 물질이나 내 형편이 어려우면, 헌금부터 줄이려 하지는 않는가? 언제나 교회 일보다 내 일이 우선하지는 않는가?' 제가 이번에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신앙심을 회복하자" 그러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 먼저, 그 다음 하나님',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랬어요. 건강한 신앙은 어떤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열심히 예배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와 예배만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순서가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할 때, 그 신앙은 건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이 건강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의 신앙이 생활로 나타날 때, 그 신앙이 건강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먼저, 너 먼저, 그리고 나."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볼 시간은 있어도 구역예배 드릴 시간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온 몸에 사랑의 흔적을 예수님이 남기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축복하시겠다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삽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몸 드리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헌신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말씀대로 살면, 부활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고난이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말씀대로 행함이 없이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구원은 공짜, 축복은 심은 대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냐? 상대를 위한 희생입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를 위한 희생, 희생. 희생이 사랑입니다. 또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노는 게 아니라, 사랑은 일하는 거다. 왜?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즐겁게 해주려니까, 상대를 풍요롭게 해주려니까, 상대에게 모든 걸 베풀어주려고 하니까, 사랑은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과 3절에 말씀하십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지으실 때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사랑 많으신 부모님들은 연세가 많으셔도 또 움직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시는 부모님은 활동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활동하시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치매도 안 걸릴 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치매 걸리셨어요? 안 걸리셨어요. 왜요? 하나님이 자녀를 사랑하시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니까 지금도 일하십니다. 일하십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뭐냐고요?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는 겁니다. 사랑은 뭐냐고요? 일하는 겁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은 노는 게 아니고 일하는 거다." 여러분, 그저 사랑한다고 둘이 방에 앉아 가지고 여행이나 다니고, 놀러만 다니고,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는 게 무엇입니까? 자기 처자를 풍요롭게 잘 살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땀흘리고, 일하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아멘. 따라합시다. "사랑은 수고하는 거다", "사랑은 일하는 거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거 없는 사랑은 다 가짜, 가짜, 가짜. 삼류소설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입니다. 삼류만화에 나오는 사랑은 다 가짜. 왜요? 그 사랑에는 일이 없으니까. 희생이 없으니까. 주는 게 없으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하지 말자고요. 말만하지 말자고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하고,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함 받아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이 산 믿음이요, 건강한 신앙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요새 은혜가 안 되요. 은혜가 없어요." 왜 그래요? 받기만 하려고 하니까 은혜가 없지요. 예수님처럼 주려고 해봐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그 매맞음, 예수님의 가시관에 찔림, 예수님의 손발에 못 박히는 그 아픔,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시는 것,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메마를 수가 없어요. 은혜가 안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못 받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고난만 생각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죠.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나태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2002년 사순절 기간에 계속해서 주일날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해요.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잃어버린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하는, 감사하고 감격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3월 17일





십자가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4
진희근 목사(승리교회)

지금은 교회 절기로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 이라는 의미죠. 부활절 전 40일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2.13부터 3. 30까지가 사순절 기간입니다. 실제로는 40일이 조금 넘죠. 왜냐하면 주일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기쁨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 전 40일간을 사순절이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오락을 멀리하고 경건한 생활하기를 힘쓰고 전도와 사랑의 삶을 살기에 힘쓰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한국선교학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회장님 아들이 대학생인데 급성 백혈병이 걸려서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비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 합니다. 회장님이 잠깐 설교하면서 간증 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도 나는 내 아들의 치료비를 댈 것입니다. 빚을 얻어서라도 내 아들을 치료할 것입니다.'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것은 그를 위해서 얼마만큼 대가를 치를 수 있느냐에 따라서 증명이 됩니다. 내가 저를 위해서 100만원까지 줄 수 있으면 100만큼 저를 사랑하는 거죠. 그를 위해서 내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때 그 때 생명처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얼마만큼 대가를 치렀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이만큼 사랑한다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그 희생만큼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잠시나마 십자가 속에서 주님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주님이 치른 희생은 바로 비하인 것입니다.
낮아지셨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모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게 고시공부를 합니까. 신분의 상승을 노리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졌다면 그야말로 참사랑이 증명이 되는 것이죠.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왕위 계승자였습니다만 미국의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위를 포기하고 평민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것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죠. 아무런 다른 희생하지 않고 단지 신분이 낮아진 것, 그것만으로 온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와, 굉장한 사랑이구나, 진실한 사랑이구나' 놀랬습니다. 그런데 왕족이 평민이 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운 비하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절대자가 유한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하 속에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가장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키로는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선 십자가는 양손과 양발의 사각에 못이 박힙니다. 이 부분에 못이 박히는데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죽는 것은 아니죠. 그 다음에 다가오는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두통과 갈증이라고 합니다. 온 몸에 피가 흘러나오게 되면 견딜 수 없는 갈증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양손과 양발의 고통 때문에 소리친 적은 없습니다만 목마름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죠. 그만큼 견딜 수 없는 갈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바로 단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에 제 이 위로써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 하나님 간에 긴밀한 사랑의 교류 속에서 지내셨는데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만은 그 교류가 끊어진 것입니다. 너무나도 견딜 수 없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께서 절규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수치와 비하와 고통과 버림당한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함인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우리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십자가밖에 다른 길이 없었기에 주님께서 잠잠히 그 모든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수 믿지 않는 농부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농부가'목사님, 여기 나와보세요.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하고 목사님을 닭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암탉이 한 마리 앉아있는데 '잘 보십시오' 보니까 암탉 품속에서 병아리들이 삐약삐약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병아리들이 움직이는데 암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암탉 뒤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으니 농부가 대답합니다. 족제비라는 놈이 밤중에 몰래 와서 이 어미 닭의 머리를 물어뜯고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 암탉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지만 자기가 품고 있는 병아리들을 위해서 자기가 피를 다 뺏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지만 저와 당신의 죄 때문에, 저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고 그 닭 앞에서 농부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 놀라운 희생은 내 죄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순절을 아무렇게나 보낼 수 없겠죠. 바로 나 때문에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는데 그 사랑이 과연 얼마만한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40일간의 시간을 정했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너무너무 커서 그 사랑은 너무 광대해서 하루 이틀 생각해도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40일간 집중적으로 십자가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이며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높아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 지은 모든 죄의 대가가 치러지고 용서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영접 받으며 환영받으며 다시는 이별 없는 영원한 사랑의 삶을 천국에서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좀더 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성경지식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3, 24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위대한 인류의 예수그리스도, 사랑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기적을 행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내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이것을 믿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어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세상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께서 내 대신 죽으셨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장 귀한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장벽을 뚫고 흐르는 사랑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미국에 알래스카주가 있죠. 사실 미국 본토와 많이 떨어져있습니다. 그 중간에 캐나다가 있죠. 소련으로부터 그 땅을 샀죠. 처음에는 그냥 얼음 땅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압박을 당해서 그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미국에 알래스카를 사라고 했습니다. 안 사겠다고 안 사겠다고 하는 것을 사라고 사라고 졸라 가지고 억지로 미국이 그 땅을 샀죠. 그런데 얼음 땅, 쓸데없는 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속에 갖가지 보화들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역사 가르치는 선생님이 농담 삼아 이렇게 얘기한 게 있습니다. 지금도 겨울에 바람이 불면 북쪽에서 불 때 가만히 들어보면 뽀드득 뽀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답니다. 소련이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팔아 넘긴 것 그것 원통해 가지고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는데 이 알래스카 속에는 많은 진귀한 보석들이 있는데 고기도 있고 갖가지 많은 것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요. 엄청난 양의 원유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속에 있는 원유를 어떻게 미국 본토로 끌어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혜롭죠. 지혜로워서 송유관을 만들어 가지고 알래스카에 있는 기름을 지금도 수백만 배럴씩 본토로 가져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얼음벽을 뚫고 그 산을 뚫고 송유관을 통해서 원유가 미국 본토에 올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많은 죄의 장벽들을 뚫고 십자가의 송유관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나그네가 아주 추운 겨울날 먼길을 걸었습니다. 너무 배고프고 추워 죽을 지경이에요. 친절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자기 집에 초청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음식과 새 옷과 따뜻한 목욕물과 침대를 준비해 두었으니 이 열쇠를 받아 들어가셔서 씻고 드시고 주무십시오.' 그런데 만약 나그네가 '아, 지금 당장 배고픈데 빵을 주지 이런 열쇠가 무슨 소용이 있소' 하고 열쇠를 던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쇠를 받지 않으면 이 사람을 위해서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열쇠를 받는 것은 다 받는 것이요, 열쇠를 거절하는 것은 다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축복과 그 모든 능력이 십자가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지 못하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만 믿을 수 있으면 십자가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강습회에 다녀왔는데 랄프 데이브라는 박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담이 어떻게 하와를 얻었습니까. 갈비뼈에서 하와가 나왔죠. 바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여인이 아이를 낳는 그 과정과 같다고 보는 것이죠.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그 산고로 인해서 부르짖죠. 그리고 마침내 양수가 터지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렀습니다. 그 순간에 교회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자기 옆구리에서 나온 하와를 가리켜서 아담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했습니다. 내 몸이라는 얘기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인 것입니다. 나는 깨끗한 자인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까.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쓸모 없는 존재다 그런 생각 들 때 있습니까. 그런 생각 들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는 가끔 드는데 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알게 됩니다. 여러분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수백 만원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물건을 위해 천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만 원의 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어 주실 정도로 나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바라볼 때 깨닫게 됩니다. 이 온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신데 바로 주님께서 나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때로 범죄할 때 있죠.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내 죄보다 더 큽니다. 때문에 범죄 했지만 십자가의 그 피가 내 죄를 씻어주었기에 나는 정죄받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합니다만 즉시 회개하고 그 범죄 때문에 더욱 더 십자가로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주저앉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죄의 세력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도 어떻게 사랑하기가 힘든지 부부 자식간도 한번 틀어지면 굉장히 어렵죠. 고부간 관계 어렵습니다. 직장에서 인간 관계 어렵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속에서 부글부글 증오가 끓어오를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이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CNN에서 사형 당하기 직전의 여인을 잠깐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터너라는 이 여자는 남편과 정부를 살해한 죄로 사형집행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정부가 간통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도끼로 남편과 정부를 죽입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살인범으로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언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불같은 여인이, 미움과 증오의 여인이 온순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사형 당하기 전날 인터뷰에서 지극히 온유하고 기쁨이 가득찬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여러분 저는 내일 우리 주님을 뵈러 갑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성격의 사람도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속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문제를 당하고 있던지 십자가를 바라보면 다 해결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집중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그리하여 십자가 속에 담겨져 있는 그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 능력을 다 공급받아서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가장 행복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능력 우리가 어찌 다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 마음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번 사순절 기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십자가의 능력을 공급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죄와 세상과 사탄을 물리치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사람들이, 용서의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2월 24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마가복음 15:20-27
최낙중 목사(관악교회)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0∼27>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 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 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 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 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 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 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 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런데 새 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굽신 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월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월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막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 만큼 얻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눅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렘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 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엄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 두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 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 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2월 17일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


이사야 53:4-9
주금용 목사(남서울교회)

어느 아리따운 용모를 가진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용모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보기에도 흉칙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누가 볼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딸의 당부를 깜박 잊은 채 도시락을 갖다 주려고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딸의 반을 찾아 물어서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당연히 그 얼굴 흉칙한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당황해서 그만 우리 집 식모라고 대답하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방과 후 이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느냐고,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다고. 그때 그 어머니 가 딸의 울먹이는 등뒤에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머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었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란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그만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 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단다. 사람들이 소리질러 그 사실을 안 나는 앞뒤를 가릴 겨를도 없이 집안으로 달려들어갔고 안 방 에 누워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나왔단다. 나는 너를 안은 까닭에 뜨거운 불길 앞에서도 내 얼굴을 가릴 수 없었단다. 그 후 심한 화상을 얼굴에 입고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그나마 생명은 건졌지만 얼굴 은 이 모양이 되었구나" 이 여학생은 분이 나서 울먹이다가 어머니의 이 사연을 듣고는 돌아서서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어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기쁜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신만 생각하셨다면 얼마든지 고난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모든 관심이 바로 골고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도 저 음부의 마귀와 사탄도 숨을 죽인 채 이 골고다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 인류의 운명을 바뀌어 놓는 최대 의 사건인 사순절을 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영적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훈련을 받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 싸움에 흔들리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 의 300용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결코 군대의 숫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합지졸이 아닌 훈련된 정예부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두려워 떠는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2만2천명이 돌아가고 1만 명이 남았습니다. 남은 1만명은 용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족하지 안았습니다. 그래서 물가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는 자세를 보고 손으로 먹는 자만 남기시고 무릎 꿇고 입대고 먹는 자는 다시 보내셨습니다. 남은 수는 3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된, 훈련된 병사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을 지나면서 기도 제목이 기드온의 용사 300명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신 분은 이 사순절 기간 에 철저히 신앙생활 하십시다. 성수주일을 못했으면 이번 기회에 성수주일을 철저히 하고, 말씀 읽는 데에 게을리 했으면 이번 사순절에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물질생활에 헌신하지 못했다면 이번 사순절에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를 그동안 못했으면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봉사를 열심히 한다든가, 이 사순절은 훈련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동안 나태한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게으름의 신앙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영적으로 준비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간의 반목질시하면서 용서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다 용서하고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로 승리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허물과 죄를 인한 대리적 고난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체험 라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절대 가치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의 삶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그리고 그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에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사랑,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그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그의 낮아지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섬김의 삶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는 이 땅에 아주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는 약하게 살았던 것 같았으나 끝까지 비굴하지 않으셨으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몸소 나타내 보이신 가장 강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매맞고 고난의 쓴잔을 마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고난이 십자가는 2000년 전 예루살렘 근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을 조롱하고 그의 말씀을 무시할 때, 애통하는 형제 의 아픔을 외면할 때, 십자가의 승리를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좌절하며 낙심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로 인해 한 번 더 못박히 십니다. 무죄 한 자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자기를 못박는 자를 위해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비신 주님을 감상적으로 생각하며 눈물만 흘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우리들은 이 사순절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간으로 삼읍시다.
형제의 아픔을 자매의 아픔을 함께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귀한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목말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곁에서 생수를 약속하신 전능자의 거룩과 위대함이 치욕을 당하는 모순된 순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시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역사 속에 오신 주님의 거룩함과 신성이 진정으로 계시된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 대신 욕먹기를 각오할 때 빛 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로서 약한 자에게 당하는 아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매를 맞아 죽은 것이나 그의 방법은 악한 무리들을 동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으로서 악한 자에게 당하신 고난 이였고 , 강자로서 약자에게 당하신 고난 이였습니다. 여기에 최대의 순종의 표본이 되셨고 인내의 본이 되셨습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약한 자에게 맞으면서 끝까지 견딘다고 하는 것은 갑절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순복 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짖지 않고 안들을 말을 한마디만 들어도 억울하다고 펄쩍 뛰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 서도 최고의 형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의하여 일보도 양보할 줄 모르고 현재를 위하여 한발자국도 옮기기를 아까워 하나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지옥의 형벌까지 받아주셨으니 그 고통과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내 힘만 못한 사람을 억누르고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아부하는 세대에 예수님께서는 강자로서 약자에게 굴욕을 참아 주셨으며,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참아주셨으니 이 고난의 위력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말을 만들고 말을 돌리고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습은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아니해도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서 말없이 묵묵하게 헌신하시는 그 모습, 교회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자신을 감추는 모습들, 교회건축을 하고 나서 교회가 혹시나 어렵지는 않은가 없는 물질을 모아서 드리시는 성도님들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모습입니다.
말없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섬기려고 하시는 많은 분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의 나 자신들을 돌아보는 귀한 사순절이 되십시다.

2.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를 향하는 순례의 기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활절의 새로운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순절은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을 배우는 때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기 전에 통곡해야 합니다.살기 전에 죽어야 하고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을 배우는 때가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양이 성전에 들어 올 때는 살아서 들어오지만 제단에 올라 갈 때는 죽어서 올라갑니다. 아직도 섬김에 있어서 내가 살아서 마치 교회를 내가 부흥이라도 시키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우리의 교만이 다시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함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단지 교회성장의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화 된 다면 그것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목사님이 권면 하는 말에 이유를 달고 순종치 못한 우리의 모습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분의 모습을 이 사순절에 보면서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지만 의로운 자의 고난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의로운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시기 위해서 무죄한 짐승을 잡아 피 흘리심으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 주신 이후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법으로 흠 없는 양과 소를 잡아 피 흘리는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짓고 죽기는 죄 없는 짐승들이 죽은 것입니다.(창3: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것과 그로 인한 구원의 역사를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 값으로 피 흘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흠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 단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의 그분을 우리는 감상적이 아닌 진정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내 죄 값은 사망인데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정죄를 받으신 속죄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 값을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절망에 빠져만 있는 것은 십자가의 효험을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진노의 저주 아래 떨어진 자리에서도 예수님 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십니다. 칼빈은 주님의 이 외침이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영혼과 한 묶음으로 묶어서 하나님께 위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순간을 긍휼의 은총을 힘입는 순간으로 전환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정진과 성취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 가 되었으며 우리를 죽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당하셨으니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케 된 고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3. 우리로 하여금 변화에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선교사는 구한말 제너럴 셔어만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토마스 목사 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쇄국정책에 의해서 그만 타고 온 배가 불에 타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도 조선 땅에 힘을 다해서 성경책을 던졌다고 합니다. 왜 토마스 목사님께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가 죄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일을 보고만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죄도 없고 오직 복음을 이 땅에 전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토마스 목사님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바로 조선 백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민족을 복음으로 구원하려는 선교사의 죽음은 즉 우리를 변화시켜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려는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의 운명에 사로잡혀 인생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르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알게 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에 달리심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보람이 바로 성도들의 변화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 죠지뮬러 목사님께서 나이 80이 넘어 어느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어떻게 돈 한푼도 없이 만 명의 고아들과 10만명의 교회학교 아이들과 800만불이상의 돈을 쓸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때 죠지뮬러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조용히 일어서시더니 앉고있던 의자를 마주 보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 위에 두 손을 깍지끼어 얹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있더니 일어서시면서 "이것이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하신 그 분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다시금 새롭게 변화하는 귀한 계기가 이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망친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것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 비전의 상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 사업가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폭풍을 만나 추락했다. 아버지는 수색대를 조직해 며칠 동안 사막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디가 추락 지점인지 또 아들이 생존해 있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며칠 뒤 추락 지점을 발견했지만 비행기의 잔해 와 비행사의 시체만 있고 아들의 시체는 없었다. 아버지는 일단 아 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아들을 구출할 작전을 구상하며 기도 드렸다. "하나님, 내 아들이 살았는지, 살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와 제 아들을 도와주시옵소서." 기도 가 끝난 후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사막에 뿌리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전단에 무엇이라 쓸 것인가,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쓸 것인가, 무엇을 잡아먹고 사나운 짐승을 어떻게 피할 것인 지를 써야 할 것인가 난감했다. 고심을 하던 아버지는 결국 "My Son, John, I Love You"라고만 써서 뿌렸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하고 좌절감으로 죽어가던 아들이 이 전단을 받아보 게 되었다. 아들은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버티자" 하고 용기를 내었다. 후 에 아들은 수색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메마른 사막 같은 세상 주님의 피 사랑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독일 튀백교회의 어느 낡은 돌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제목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2월 24일

 

출처: 한국교회 독서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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