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스크랩] 바울 교회 제자훈련 교재 1

에반젤(복음) 2021. 1. 24. 23:51

바울교회 제자훈련교재Ⅰ
서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근번 바울교회 제자훈련교재가 나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숙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어서 여러 교재를 참고하여 편집했습니다.

제자훈련의 필요성
제자는 훈련으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딤전4:5).

참된 제자의 표시(특징)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2:6).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주 예수께 드렸다면, 당신은 흥미 진진한 새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삶은 생기있고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당신의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셨다면 삶 가운데서 이러한 변화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1. 성경에 대한 욕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당신은 참된 제자로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기 원할 것입니다. 성경은 영적 양식입니다. 그것은 마귀를 쳐부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침서입니다. 참된 제자들은 성겨의 사람입니다(욥23:12, 렘15:16, 신6:5-7, 롬10:17, 벧전2:2).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거나 말씀을 몇 장 읽겠다는 것을 서약하십시오(전5:4-6).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약속을 하든지 그대로 믿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날마다 훈련하는데 왕과 함께 얼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를 결정하십시오. 서약을 하고 그것에 충실하십시오!

2.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참된 제자는 습관, 행동, 목적이 다릅니다. 말, 사고, 표준이 다릅니다. 언제든지 주님처럼 살고자 힘쓰지 않고, 또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편 길로 운전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새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습관화 되는 것을 배울 때까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고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은 훈련이 요구됩니다. 위기를 조심하십시오. 시련이나 갑작스런 유혹이 올 때, 당신은 옛날의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과거의 습관이 기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성경은 말합니다.

3. 자기훈련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만일 당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느슨하게” 지내던 예전의 영역들을 바싹 조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탐욕적이고 과분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음식과 음료를 좀 더 주의깊게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약과 해로운 자극제를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방식과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했던 욕망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밤늦도록 있는 것과 늦잠자는 것에 관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삶의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매일매일 더욱 좋은 방향으로 계속 변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변화시키기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제부터 1년 12달 하나님께 더 가까워 질 것입니다. 그는 계속 성장해 갈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날로 더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넓으며, 그 기준이 얼마나 높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얼마나 깊은지, 그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켜 드리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제자가 자기의 삶을 드리면 주님은 그 삶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삶이 그 아들의 삶과 닮아질 때까지 계속 그를 다루실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4.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19,20).
참된 제자는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당합니다. 이 고통은 새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해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로부터 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더 이상 이기적인 무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 사람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새로운 삶에 의한 빛으로, 형식에 얽매이고 죽어있음이 드러나게 된 미지근하고 타락한 교인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광적이고 이기적인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되고 온건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참으로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욕정의 노예가 아니며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이 빛이 이기적인 삶 위에 비칠 때 거기에 접하는 죄인들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그 빛을 끄고 파괴시키거나, 그 빛에 항복해서 자기들의 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면, 주위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이 올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5. 다른 제자들을 찾음(Seeking)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참된 교회를 찾으십시오. 죄에서 구원하며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을 높이는 것 그것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거짓 종교이며,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찾은 기쁨과 사랑을 서서히 파괴시킬 것입니다. 타고 있는 석탄이 불 속에서 활활 타오르듯, 하나님을 위해 불붙는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계속 불붙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진리가 열정적으로 선포되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주 예수님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일하십시오. 라디오나 T.V.를 통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는 것과 그분이 당신의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당신의 모범이십니다. 당신의 눈을 그 분에게 고정시키십시오. 군중에 “맞추기”위해 그 분의 기준을 낮추지 마십시오. 그들이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든지 말든지 당신은 그리스도와 군중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롬15:5,6).

6. 주님을 섬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주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종이었던 바울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증인입니다. 세계 복음화의 일은 설교자나 복음 전도자만의 평생 사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각자에게 평생 사역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매일 우리 주위에서 영원으로 사라져 가는 남녀와 소년, 소녀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전부와 우리 자신을 이 일에 바치고, 하나님께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가정에서)과 온 유대(가까운 이웃)와 사마리아(사회의 버림받은 자들)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입니다. 모든 죄인이 있는 곳은 선교지입니다. 제자 중에서 어떤 동료는 세계를 횡단할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단지 길이나 건널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주님을 섬기며 주님이 전 세계에 미칠 수(reach) 있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요일3:16-24).

7. 임무에 충실함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 중 어느 한 사람도 오르락 내리락(up-and-down) 되풀이 하는 생활을 하도록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완전 무결한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지속적으로 살아갈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시고 모든 외부의 위험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예수께 가까이 있는 한 세상이나 육신, 마귀는 당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뒤를 돌아 보아서는 안됩니다(눅9:62).
참된 예수님의 제자는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남아 있을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넘쳐나는 사랑으로 인해 죄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삶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유혹과 연약함, 실패의 가능성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습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계속 죄를 지어도 자동적으로 용서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더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십니다. 바울은 외쳤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방법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모든 예수님의 사람은 조만간에 바울 사도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려하여”(빌3:10)라고 말했을 때, 그가 느꼈던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전 시대에 걸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 예수와 그의 사랑을 전하려고 많은 방법들을 모색해왔습니다. 여기에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이들 착상중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가져다 주는 어느 것이나 또는 우리의 시선을 그분께 돌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것이나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열정을 피우는 연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십시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는 그의 초기 감리교인들에게 “만일 당신이 독서를 하지 않으면, 결코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가슴 설레이는 매우 많은 일들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 서적을 통해서 당신은 그것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이 배웠던 교훈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의 흐름을 통해 그들의 일이 가치가 있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들의 비결이 무었이었습니까? 그들은 무슨 실수를 했으며 하나님은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그들의 헌신을 통해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은 없습니까? 그들의 실수를 통해 당신이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언제 처음으로 그들을 들어 사용하셨습니까? 그들이 전도함으로 어떠한 대가를 치루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들의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습니까?
복음 전도와 신앙부흥의 거장들에 대한 책을 특별히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당신이 고르는데 도움이 되도록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영혼을 설득할 만큼 지혜로웠나?”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지혜를 가졌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이들의 언행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하는데 능숙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들의 환상(Vis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하늘 나라로 인도한 무리들은 그들이 몸소 하나님과 보냈던 시간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남아있는 과실입니다(요15:16).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참되고 견고할 때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행해진 한 인간의 전도의 특징입니다.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 지면 질수록 그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더 많이 데려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더 많이 알고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더 훌륭하게 그 성과는 지속될 것입니다.
여유가 있으면, 모든 좋은 기독교 잡지를 구독하십시오. 참 사랑으로 저술된 책들을 고르십시오.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묵상의 기독교 자료를 놓치지 마십시오. 새로운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되 조심스럽고 사려깊게 독서를 하십시오. 당신의 독서로 인하여 당신의 생각이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길로 접어들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의 모든 제자는 현대의 생활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을 앞서 내다보려면, 될 수 있는대로 독서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어떤 사건을 다루는데 어는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지 알 것입니다.

2. 주의 참된 종들의 메시지를 필기하십시오.
주의 제자들이 중대한 것을 전할 때마다 그 메시지를 필기해 두십시오. 메모지나 조그만 공책과 펜을 예수님을 위한 모임에 가지고 가는 것을 습관화 하십시오. 동시에 듣고 쓰도록 하십시오. 조심성있게 빠뜨리지 말고 주석을 달으십시오.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된 말이나, 주님께 더 헌신할 수 있는 말씀이나 사상들을 적어두십시오. 이것들을 주의깊게 잘 정리해서 철해 두었다가 당신의 마음을 분발하는데 이것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이 필기해 놓은 것을 읽을 때, 메시지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이 성령님께서는 당신에게 똑같은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두면 무미 건조함을 느낄 때, 당신의 마음은 빠르게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필기를 해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페이지를 빼고 끼우기가 편리한 바인더 공책을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 페이지를 더 끼우거나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주석을 컴퓨터에 저장하고 출력하여 공책 철을 정돈하고 간결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주석 철이 두꺼워 짐에 따라 다른 철로 분철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하고싶어 할지 모르는 또 하나의 일은 하루 하루의 믿음의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이는 매일 생활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배운 것들을 적어 놓는 조그마한 공책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당신이 체험한 어떤 것, 또는 궁핍에 처해 있을 때 또는 시련과 축복의 시간에 당신 심령에 말해주었던 성경구절을 그안에 적어두십시오. 성인들은 오래전에 이 일들을 했습니다. 그들의 일기 사본을 읽으면, 오늘날도 여전히 축복을 받습니다. 죠지 뮬러(George Mueller)와 요한 웨슬레(John Wesley)와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와 짐 엘리옷(Jim Elliot)의 일기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쓰임받는 성도들과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들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지 말고 만일 그들이 대화를 나누거나 또는 함께 있도록 권한다면 당신을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그의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있도록” 부름은 이러한 의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로부터 혹은 성경 말씀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 때에는 당신의 문제를 모두 그들에게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이제까지 쓰여진 적도 없고 설교된 적도 없는 문제들에 대해 그들은 깨닫고 있어 도움을 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그러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당신이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쓰시는 믿음의 성도들을 만날 기회를 열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4. 당신의 혀를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표시는 혀를 얼마나 잘 통제하는 가에서 나타납니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것, 분별없는 단어 사용, 경박한 언어사용등은 전부 어리석은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함부로 하는 말로 심판을 받으리라고 우리는 듣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혀를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말은 인격의 표현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원한다면,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5. 하나님과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한적한” 성경 학교 - 단순히 조용하고 고독한 장소 - 로 가십시오. 모세와 엘리야와 바울도 모두 그곳에서 위대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사막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쓸데없는 많은 말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사람들 속에 너무 자주 뒤섞여 있는 일 등은 당신의 영적 도끼 날을 무디게 합니다. 오후나 밤 늦게 또는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하나님과 한 두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일에 분주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란, 고요속에서 달콤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홀로 있을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드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성경에서 이름은 흔히 그 사람의 성품과 특징 및 신분과 그 맡은 바 사명 등을 나타내 주
는, 그야말로 그 인격 자체를 대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에게도 마찬
가지로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그분의 이름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 출3:13,14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1:3
여호와 엗 게믈로트(보복의 하나님) 렘51:56
여호와 나케(멸망시키는 여호와) 겔7:9
추 르(반석) 사44:8
데오스․데이오스(신) 행17:29
아도나이(주) 구약 성경의 일부
퀴리오스(주) 신약 성경의 전반부
데오테스(신성) 골2:9
데이오테스(신성) 롬1:20
엘리욘(지존하신 자) 시18:13
후프시스토스(가장 높은 곳) 막21:9
카도쉬(거룩하신 주) 시71:22
차디크(의로우신 하나님) 시7:9
깁보르(전능하신 자) 신10:17
압․아바(아버지) 막14:36;시88:26
파테르(아버지) 요5:17
샤파트(심판하시는 자) 창18:25
가알(구속자) 욥19:25
야샤(구원자) 사43:3
소테르(구주) 눅1:47
팔라트(건지시는 자) 시18:2
마겐(방패) 시3:3;18:30
에얄루트(힘) 시22:19
엘(전능하신 자) 시50:1
엘로힘(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 출18:11
엘 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 창16:13
엘리욘(지존하신 자) 시18:13
엘 엘욘(지고하신자, 가장 강한 자) 사14:13,14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17:1
엘 올람(영원한 하나님) 사40:28
엘로힘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렘11:20

하나님에 대하여

1. 하나님의 나타나심
① 자연의 모든 현상과 법칙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②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추호의 변론도 없이 아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수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신자로서의 절대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②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③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④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4:39)
⑥ 하나님은 그 뜻하신 목적과 인자하심과 공의와 축복하심에 있어서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리라”(약1:17).

3.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① 하나님은 인간을 특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② 다른 동물이나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③ 만물을 창조하여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④ 영생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 인간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실과를 따먹은 후에 영생을 상실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7-19).
⑤ 원죄로 영생을 잃고 복잡한 율법아래 있던 인간들에게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외아들을 인간의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⑥ 그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 행위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외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4. 하나님의 기대
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7).
②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기를 원하십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③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지으셨습니다. 그 분은 당신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또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두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배경과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이 삶의 최선의 것을 소유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십니다. 그 분의 사랑은 자신의 소유인 우주에 대한 선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최상의 이익을 택하신 비이기적인 선택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2.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란 실제로 이기심, 즉 “자기우선”의 마음과 생활태도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의 법을 깨뜨리고 행복에 대한 그 분의 지침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섬기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올바른 위치와 가치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3. 죄는 많은 대가를 치루게 하므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는 세상의 모든 비탄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불행도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원하십니다. 죄는 이 땅의 고통, 불행, 죽음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옳고 이치에 맞는 것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감정의 노예로 만듭니다. 또한 죄는 죄책감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4. 죄는 우주에서 가장 값비싼 것입니다.
그 값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즉 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생명을 빼앗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벌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죄를 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죄로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깨어지면,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은 반드시 그 죄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벌이 없는 법은 단지 충고에 불과합니다. 벌은 법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므로 그 법만큼 중요합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피조물들을 지도하고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이처럼 중요한 하나님의 법을 위해 그 분은 최고의 형벌을 설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 즉 그 분의 소유인 우주로부터,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히 살며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와 특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5. 당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당신은 그 깊은 내면을 압니다. 마땅히 당신은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이 옳은가를 알았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참으로 정직하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그러나 하나님은 위대하신 사랑과 지혜안에서 당신을 용서할 한 방법을 만드셨고, 만약 당신이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일려고 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은 실존하시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막연할 수도 있다. 내 눈 앞에 있는 부모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어야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에게 와 닿는 것이다.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교제이다. 동거동락하고 내면 깊숙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는 것이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 크리스찬은 거룩한 표정으로 포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Paper를 작성할 때 나의 이야기를 갖고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객관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에 나와 제일 가깝다. 느낌과 실제적으로 감정적으로 삶 속에서 다가와야 한다. 고민의 깊이와 넓이를 있는 그대로 다 알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부부는 딴 방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기에 지체의 아픔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잘 아신다. 제일 가까운 분이 성령님이시다. 과연 나는 성령님과 얼마나 친한가? 친하다. 교제를 나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내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고 그렇지 못할 때는 주님을 찾지 못한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교제는 쌍방향이다. 한 쪽에서 말하면 상대방은 듣고, 상대가 말하면 나는 듣는 것이다. 나만 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은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 친밀한 교제가 된다면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주관적 말씀이다. 객관적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리의 심령 속에서 주관적으로도 말씀하신다.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내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성령 하나님이 목사님를 도구로 사용하시어 나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성경을 펼칠 때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시기에 친밀함이 느껴져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질 때까지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에 우주적인 경외함이 있어야 한다. 우주적 경외감과 친밀감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our father in heaven)라고 하는데, ‘우리의 아버지’에서는 친밀감을, ‘하늘에 계신’에서는 우주적인 경외감을 느낀다.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 시편 119편 97절에 보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고 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종일토록 주의 법을 묵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인 다윗이 종일토록 묵상할 수 있는 비결은 시편 119편 98-100절에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서 원수, 모든 스승, 노인의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다윗은 이들보다 뛰어나야 했다. 노인은 경험이 뛰어나다. 하나님의 계명과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명철함이 세 종류의 사람보다 뛰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피조물인 사탄, 사람의 지혜와 경험은 비교할 가치가 없다. 원수를 물리칠 전략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도출한다면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더 좋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한다. 시편 119편 103절에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데 하나님께 상달이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순서이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말씀 읽는 것과 듣는 것이며, 곡조가 붙은 기도가 찬송이다. 찬송 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성도들간에 교제를 해야 한다. 성도간에 교제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균형 잡힐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똑같은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향후 우리는 똑같은 천국에서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다. 우리는 세속화되어 있다. 나만을 사랑한다. 이 세속화를 없애 버리는 것이 제자훈련의 목적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함

계명은 지키는 것보다 계명을 마음 속에 품고 간직해야 지킬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애매모호하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켜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많이 지키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설교 자체가 구체적이지 못할 때 애매모호해 질 때가 많다. 사랑에는 세가지 사랑이 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그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Double Blessing의 축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피조물적인 사랑 밖에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적인, 초자연적인 사랑을 하신다. 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보잘 것 없는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에게 대한 사랑은 메가톤급 사랑이다. 광야에서의 만나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상상이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다. 내가 성경을 안다는 것은 ‘I see'수준이다. 체험적이며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I know'이다. ‘기노스코’라는 단어가 ‘안다’는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성생활을 통해 아는 것이 기노스코인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속속들이 구석구석 깊이 아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기노스코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로 알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씀에 사로잡힐 때까지 묵상해야 한다. 말씀이 체험으로 내 것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적요되어야 한다. 깊이 알아야 한다. 나를 사로잡을 때까지 묵상해야 한다. 나의 삶 속에 체험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생명을 걸고 제자훈련에 임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려고 힘쓰고 들으려고 힘쓰고 지키려고 힘써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함

1.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첫 번째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오면 전적으로 그분을 의존합니다. 마치 호흡을 하기 위하여 매 순간 신선한 공기를 다시 필요로 하며, 태양이 매 순간 다시 빛을 내듯이, 나의 혼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살아 있는 교통 안에서입니다.
오늘 내린 만나는 내일이면 썩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선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얻어집니다. 날마다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기다림으로 시작하며 그분께서 당신을 만지시도록 하십시오. 시간을 드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2. 이를 위하여 당신의 헌신에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고요한 것입니다.
기도나 경배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자리에 계시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겸손한 믿음과 경배로 그분 앞에서 조용히 머리 숙이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친히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알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3. 하나님께 영예와 영광과 권능의 자리를 드리고 당신은 가장 낮은 겸손의 자리를 취하십시오.
그리고 겸손의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지도록 애쓰십시오.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당신은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머리를 숙이십시오. 성도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덮게 하십시오. 그리고 계속해서 더욱 낮아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그분 앞에 고개 숙이고 그분의 선하심과 긍휼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높이실 것입니다. 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아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4.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만을 기뻐하시며 오직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오는 자만을 만족해 하십니다. 피가 주는 담대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을 하나님께서 매우 만족해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휘장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심장과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위대한 목적으로서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얻게 하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보시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도록 하십시오.

5.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인격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인격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매일 당신의 인격적인 사랑의 응답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실지로 당신의 마음속을 비출 때까지 신뢰를 가지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림으로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격적인 구주로, 죄의 권능으로부터 지켜주시는 파수꾼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분 가까이 있으면, 정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묻지 말고, “그분께서 항상 가까이 계시면, 정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물으십시오.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우리 안에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한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그분의 형상과 그분과 같은 모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머리 숙이십시오.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아버지시여, 여기 당신을 위하여, 제가 받은 것만큼 제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기다리십시오. “아들아, 네가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연 것만큼 그리스도께 속한 많은 것을 너에게 주노라.” 육체 안에서 예수님을 들어내시고 완전케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그분을 드러내시고 그분 안에서 당신을 완전케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당신 안에서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어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바라고 그분과 교제를 가질 때, 당신 안에서 이 복된 일이 이루어질 것임을 기대하십시오.

7. 우리는 주로 두 가지에서, 곧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그분과 같은 모양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신 그분의 겸손과 순종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가 고개 숙여 겸손하게 의지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릴 때, 그분의 죽음의 권능이 우리 안에 역사하며,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됩니다. 그 결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 안에서, 곧 죄를 이긴 승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부활 생명의 모든 기쁨과 권능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 아침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분은 자신이 주신 생명을 지속시킬 것이며 부활한 자로서 살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8.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더욱 넘치도록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임재를 깨닫고자 기다릴 때, 당신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일들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매 순간 당신의 온 삶이 영적인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도록 애쓰십시오.

9. 당신이 이 놀라운 구원에 관하여 묵상을 하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추구하며,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그분을 의지한다면,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도록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직 성령님만이 친히 하나님께 온 삶을 완전히 드리는 것의 의미를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시도록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힘써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역사하시도록 그분께 새롭게, 절대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드림으로 그분과의 교제를 힘써 구하십시오.

10. 모든 성경기록을 통하여, 모든 영적인 삶을 통하여 “믿음으로”가 반드시 요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때, 가까이 계시고, 거룩하시며,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보이지 않는 그분을 믿는 깊고 고요한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 깊고 평온한 믿음 안에서 하늘에 속한 생명의 모든 복과 권능이 당신 주변과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성취되도록 오직 복되신 영원한 삼위일체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리하여 날마다 하루를 하나님과의 교제로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성경의 개관

1.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Above all, you must understand that no prophecy of Scripture came about by the prephet's own interpretation.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2. 성경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and th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 not by works, so that no one can boast.

3.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5:39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yet you refuse to come to me to have life.

4. 성경의 중심 약속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행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do you stand here looking into the sky? This same Jesus, who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will come back in the same way you have seen him go into heaven.

5. 성경의 중심 진리는 사랑입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6. 하나님과의 대화방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성경묵상

1. 관계회복에서 오는 지속적인 교제이다(요15:7, 요일1:3)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하는 교제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입니다(계21:3). 따라서 관계가 회복된 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분을 알아가고 그 분의 생각을 아는 데 성경묵상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만나는 교제의 시간입니다.
이 개인적인 시간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더 깊은 교제를 통해서 믿음이 성숙되어 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 관계가 무너지면 영적인 침체가 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결혼하려고 만나면 서로를 알려고 자주 만나서 그 사람 인품 성격 됨됨이를 알려고 교제의 기간을 통해 알아가는 데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해 깊이 이해하며 이런 사람이구나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예배이다(롬12:1-2)
교제하는 모습이 바로 예배로 나타난다. 예배에 실패하면 모두 실패한다. 주
일예배를 드리고 설교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주일예배의 목적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세상에서 바로 현재에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을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날마다 그 분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각 교회에서 정한 시간에 드리는 공동체예배와 공동체예배에서 주신 말씀을 개인이 묵상하는 개인예배, 그리고 깨달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삶의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는 이 세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룰 때 산제사(롬12:1)가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롬8:1-27, 요14:26)
하나님의 인도란 하나님의 통치에 주안점이 있습니다(시23:1, 마7:13-27). 나 자신과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그분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양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묵상과 명상의 차이점

세상에는 요가, 명상, 마인드 컨트롤, 최명 등 많은 정신적 수양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과 묵상은 차이가 있습니다. 명상이란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묵상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인품을 내게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1.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되는 이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해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2. 경건의 시간을 잘 갖지 않는 이유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신앙생활의 의미를 잘 모르기에, 순종보다는 불순종하고 싶은 즉 변화받지 않은 성품 때문에,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 않기에

3. 경건의 시간을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과 인격적인 친밀한 대화를 갖지 못하기에, 모범된 사람들을 보지 못했기에, 상처받은 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마음보다는 나의 유익된 말씀을 찾고자 하기에

4. 경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가질려면
구원의 의미를 잘 묵상해야 한다. 성숙 및 변화에 대한 당위성을 묵상해야 한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동료들과 연계성을 가져 소그룹을 통한 교제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되는 상처들을 치유 받아야 한다.

5. 경건의 시간을 갖는 방법
먼저 성령님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한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성품 및 뜻을 찾아내고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나에게 주시는 교훈을 묵상한다. 적용은 실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 With God)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창1:26-27).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할 수 있는 것입니다(창3:8-9).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두 사이에 존재했던 아름다운 교제는 처참하게도 파괴되고 말았으며, 마침내 모든 인간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난”(골1:21) 영적 미아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체적인 교제의 시간을 준수해야 합니다. 예배와 경건의 시간은 제자의 삶에 필수적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창3:9, 고전1:9)

2. 다윗이 간절히 소원했던 바는 무엇입니까?(시27:8, 시63:1)

3. 하나님과 모세와의 교제는 어떠했습니까?(출33:11)

4. 눅10:38-42은 당신이 주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몇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①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해 보십시오.

② 주님께서는 누구를 왜 칭찬했습니까?

③ 마르다처럼 당신도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의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5. 성경은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까?(요5:39)

6. 주님께서는 자기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약속을 주고 계십니까?
(요14:21, 요14:23, 요일3:24)

7.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눅24:32)

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행한 두가지 일은?(느9:3)

9.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히10:19, 엡3:12)

10.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기뻐하십니까?(빌4:6-7)

11.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구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히4:16)

12. 하나님은 자기에게 기도하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마7:8, 마7:11)

13.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약4:2-3)

14. 주님은 언제 말씀의 뜻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까?(막4:34)

15. 매일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언제가 좋습니까?(시5:3)

16. 예수님은 성부와 홀로 있기 위해 하루중 어는 시간에 어디서 보냈습니까?(막1:35)

17.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디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마6:6)

하나님의 말씀의 유용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다. 성경이 신앙 지침서 수준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말씀이다. 하나님의 감동이 성경에 있는 데 그 감동을 모르는 것은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나에게 다가와야 한다.
둘째는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아버지로서 훈계를 하는데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면 책망하신다.
셋째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바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바르게 폄을 당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힘들지만 바르게 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하다.
넷째는 의로 교육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어느 정도로 받기를 원하는가? 어는 정도까지 의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목표는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변한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변함이 없는 자들이 가는 곳은 세상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천국은 천국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활 중 33세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를 원하신다. 최선을 다해 제자훈련을 받아야 한다. 생명을 걸고 제자훈련을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나의 기쁨이고, 나의 면류관이다.”라고 했다. 훈련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메가톤급의 감동을 갖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꿀은 꿀을 먹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성경을 꿀보다 더 맛있게 느끼려면 성경의 참 맛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감동을 갖고 있는 말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한다. 우리는 육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영적으로는 어린이이다.

경건의 시간

경건의 시간을 읽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 아침에 하는 것이 QT이고, 밤에 하는 것이 성경 읽기인가? 성경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믿고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안다면 아무렇게나 해석할 수 없다.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는 주일에 왜 교회에 가는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회교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생명의 문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과연 그러한가’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지도자란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고,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약속된 시간에 QT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QT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마귀가 이것을 방해한다.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일정하고 규칙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빠른 QT는 빨리 잊어 버린다. 한 시간에 외운 것은 한 시간 내에 잊어 버린다. 적어도 한 시간은 QT하는데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긴 QT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친밀하고 우주적인 경외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죄가 먼저 생각나게 된다. 순종하고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필요하면 참고 도서를 구입할 필요가 있다.
묵상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나 중심으로 생각한다. 부부지간이나 자녀들에게도 나 중심으로,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내 중심으로 살아간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도록 노력하자. 내 현실에의 구체적 적용을 하자. “앞으로 성경을 읽겠다”는 것은 구체적이지 못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몇 시간 동안 기도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자. 기도 제목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구역, 자기가 소속된 남전도회, 여전도회, 자기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기도제목을 파악하도록 하자. 구체적인 것이 중요하다.

QT Workshop

성경은 한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졌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졌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작성되었다. 성경은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의 수종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겸손히 물어야 하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주어졌기에 구속의 관점에서 묵상해야 한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준 것이 말씀이다. 이것이 특별 계시이다. 반면에 일반계시는 자연현상 등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고 묵상해야 한다. 우리의 죄성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죄성이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에 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몇 번씩이고 반복해서 읽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2000년 전의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이해가 간다. 영어 성경은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려고 한 것이 NIV이다. 의미가 쉽다. NISD는 성경의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구속에 있기 때문에 구속의 주제 하에서 묵상해야 한다. 전체 숲에서 나무를 보아야 한다. 영어의 NIV와 현대인의 성경을 병행하여 보자. ‘시간을 아끼라’느 말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시간을 잘 사용하라’로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다.
QT의 실제적인 지침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역사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찾아내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영적 나이를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서 대하고, 영적으로 어른은 어른답게 대하신다. 나의 영적인 나이에 따라 성경을 보고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 한 살짜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한 살짜리의 묵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 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목표가 무엇인가? 목표는 명령형으로 끝난다. 미국인들은 분석을 잘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것을 잘 못한다. 서양인은 분석적 사고를 잘하고, 동양인은 통합적 사고를 잘 한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동일하다. 인간도 변하지 않고 다른 옷만 입을 뿐이다. 하나님이 똑 같고 인간이 똑 같기에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성경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QT적용은 4P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① Personal : 우리가 아닌 ‘나’가 되어야 한다.
② Practical : 현실적이어야 한다.
③ Possible :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④ Progressive : 영적인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이 점진적이어야 한다.

경건의 시간(QUIET TIME)

1.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생각, 손, 발,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방법은 QT인데, QT는 책상에서의 30분으로 제한될 수 없고 24시간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정의
성경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예배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는데 QT는 개인예배에 속한다.
① 개인예배
② 생활예배(롬12:1)
③ 공공예배

3. 왜 경건의 시간이 필요한가?
① 하나님의 명령(수1:8, 시1:2, 사55:6-7, 요4:23, 요15:4-7)
② 예수님의 모범(막1:35)
③ 하나님과의 교제(출33:11),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기 때문(히5:12, 엡4:13)
④ 항상 여호와를 모심으로 요동치 않음, 삶의 지시와 안내를 받음(시16:8-9, 시109:20, 시119:105)
⑤ 구원의 완성을 위해(딤후3:16-17)
⑥ 영적인 승리를 주기에(시119:9,11)
⑦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하기에(요10:27)
⑧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기뻐하시기에(요4:23, 시147:11, 시116:1-2)
⑨ 매일 영적 양식을 취할 수 있기에(벧전2:2, 렘15:16, 욥23:12)
⑩ 하나님과 교제를 통하여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도 QT는 필수이다.

4. 어떻게 하는가?
① 일정한 시간에(시143:8, 요23:12)
② 일정한 장소(눅22:39, 요18:2)
③ 성령의 인도하심(고전3:16, 출40:36-37)
④ 간절한 마음(시119:18)
⑤ 말씀을 듣는 것이 복됨(렘7:13-25, 전5:1, 마17:5, 사65:12)
⑥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QT를 위한 몇 가지 제언

1. QT의 생명은 지속성에 있다.
2. QT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3. QT는 말씀을 들은 그대로 이해한 수준에서 살면 된다.
4. QT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자
5. 예배이므로 속옷 차림은 피하도록 하자
6. 하나님은 일꾼인 나보다 자녀인 나를 만나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온 만물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 일체의 변명의 여지를 없앤다. 그것은 하나님 실존의 생생한 증거를 피조물의 자연 세계 속에서 너무 명백히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연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 울타리 안에 둘러 싸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눈이 나쁜 사람이 좋은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신다.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모든 지능과 지혜를 초월한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 율법이 공포되고, 이 율법의 해석자로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롬1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계시하신 이외에도 거짓된 일군(一群)의 신들과, 그들의 명백한 특징들을 말씀하여 참 하나님과 혼돈되지 않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아야 건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증거를 경건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3. 성경에서 떠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에 빠지고 날조된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고, 세속적 욕심에 빠저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며 인간의 잘못된 감정과 종교적 오류가 얼마나 그릇되고 방자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지 않았고, 자연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를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한 구원의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미혹하는 미신은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다윗은 말했다(시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권능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19:1-2)이라고 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19:7)라고 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이 우주의 우뢰, 바람, 소나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고”라고 말하고 나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말씀을 맺고 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93:1-5)라고 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라고 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다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공허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에 의해 확증된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교회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성은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복종 하시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어야 말씀의 신성한 권위가 살게 된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그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면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다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가공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주장을 말한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은 바울의 말 한 마디로 깨끗이 정리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 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기 전에 사도들이 있었고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말씀이 교회를 세운 것이지, 교회가 말씀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성경을 진리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하신 말씀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3. 성경의 증거는 모든 다른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적 증거를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최고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에서 보다 언제나 최고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순결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논쟁을 해서 성경 말씀을 판단하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좀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도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면 권위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적 증거를 가지게 하고, 사람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능력을 나타내신다.

4. 성경은 자증(自證)한다.
참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이성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을 성경에 예속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0)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오류도 없는 진리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사54: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내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2-14)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들만 안다”(사53:1)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13: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상고하여 은혜를 받자.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이는 성경을 보호하고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없다. 성경은 어떤 다른 외부적인 지원을 받아서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어떤 다른 것에 의해 권위가 세워진다면 성경의 권위는 늘 다른 것에 의해 흔들릴 것이다. 우리는 성경 자체에서 그 지혜의 배치가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완전한 말씀인지, 그리고 그 위엄을 스스로 지키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극히 평범한 언어로 기록이 되고 진리의 말씀들이 소박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의 기교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라고 하였고 그의 설교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이라고 했다. 사람의 저서가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만큼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더욱이 죄인을 회개케 하여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의 저서가 어디에 있겠는가?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어떤 선지자의 글은 그 문자체가 화려하고 명쾌한 어떤 사람의 글에도 손색이 없다. 하나님은 성경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기록을 하셨지만, 이런 선지자들을 통해 얼마든지 멋있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누구든지 보고 알고, 믿어 구원얻도록 쉽게 기록을 한 것이다.
사단은 복잡하고 교묘한 언어를 써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고상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나 그들의 이런 사기극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죄인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로 자기를 과시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성경의 고전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화를 주장하는 문서들도 사실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들이며, 모세 이전에 있었던 것은 없다.
그러나 모세가 고대의 문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이전에 있었고 애굽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나라와 문화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다.
모세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하신 것에 그 기초를 둔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만일 모세가 알아 듣지도 못한 것을 그 백성들에게 전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 모세의 전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으며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년이라(출12:40)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즉 모세는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를 다른 여타의 민족들이 주장하는 시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다른 어떤 문화권의 문서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주는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 사람들은 애굽의 기원을 창조 이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믿으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세속적인 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경이 다른 문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런 사악한 자들 주장을 봉쇄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신다. 야곱은 모세보다 300년전 사람이다. 야곱은 그가 죽을 때 그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을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49:5-6). 여기서 레위족은 모세의 가문이고 모세는 성경을 기록할 때 자기 가문과 자기 선조에게 치욕적인 이런 예언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상들이 잘못한 일을 숨김없이 말하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전혀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불쾌한 일들도 낱낱이 기록을 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민12:1). 이런 모세의 기록이 어찌 사람의 말이겠는가? 그리고 그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게 했는가. 이 모든 것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일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일들이다.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모세는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그 이적들은 모세가 말한 율법과 공포된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모세의 40일간의 하나님과의 교제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는니라(출24: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출25:1)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34:29). 제삼일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40:34).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민16:24).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11:9).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출16:1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고전10:3)”라고 되어 있다. 이 모든 이적들은 모세가 진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다.

6. 모세의 이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모세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이 모세를 반박하고 반대하여 군중들을 동원하므로 떠들썩한 분위기와 불유쾌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어떤 가증한 사람들은 모세의 이적은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모략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출7:11)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에 설 수 없었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출9:11).
모세는 박수나 술객들을 아주 싫어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추방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20:6) 그런 그가 어떻게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므로서 일체의 비난들을 일축해 버렸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출16:7) 그리고 어떻게 마술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신선한 음식을 백성들이 먹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19-20) 백성중에는 날마다 모세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서 모의를 하고 작당을 해서 모세를 제거시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마술로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마술로 그 백성을 기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3번씩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7. 예언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성취되는 일이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는 예언이 있다. 이 말씀은 야곱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하기 300년에 말씀된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엄격한 말씀은 400년 후에도 이루어지고, 2,400년 되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영원히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 유다의 왕권이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 이월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11:15) 그러나 사울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그 사람은 백성들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떼를 써서 세운 백성들의 왕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즉시 이새의 집을 찾아가 유다 왕을 따로 기름 부어 세운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이렇게 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히 이루어진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이와 같은 예언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확실히 증거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바벨론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는 그들의 나라와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공공연히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39:6-7)
그들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사건의 예언이었는데, 그 예언이 사실로 그들에게 닥친다. 이사야는 그들의 멸망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레스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 얻을 것도 예언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사45:1-2)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레스라는 메데 왕은 이사야 사후 100년에 세상에 나타나 이사야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여기서 고레스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쓰인데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예레미아는 그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이 되면 고향에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25:1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사실로 이루어진다.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42:9) 선지자들은 600년에 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그 후에 있을 일들도 이렇게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9. 율법의 전승
어떤 사악한 자들은 모세나 이사야의 글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의 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모세가 실제 인물이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어리석고 미련한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게을리 하여 한 때 하나님의 말씀이 유실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왕 요시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어 내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22:8)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대하34:15)
이렇게 발견된 성경은 대대로 계승되어 내려 왔다. 요시아는 그 성경의 원본을 성전에 보관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17:18-1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허락하셨다.

10. 하나님은 말씀을 기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마카비 일로 로마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 했는데 어떻게 성경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오늘의 성경은 모조품이요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본들은 박해가 가라않자 즉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개편되지 않은 성경이 경건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믿어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독한 핍박을 당했고 그들이 쓰는 히브리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계승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메시아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성경책을 보존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의 말씀을 죽도록 믿고 사는 유대인들을 통해 해 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킨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서적상(書籍商)이라고 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구약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히 서 있는지를 알게 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 평범한 문체에 경멸과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문체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구원의 진리를 볼 수만 있다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아주 쉽게 기록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할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은 눅1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교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이 간단히 기록한 그리스도의 강화는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을 치듯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트집장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 끌어내어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구경하자.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각성시키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회개하여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접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저작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 있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사로잡는다. 원래 마태는 이전에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 배를 몰라 고기를 잡던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7:15)했다. 그들이 말한 글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 등등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그가 반대하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성경이 공포된 후 장구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 자라듯 점점 더 자라나서 감히 공격할 수도 말살할 수도 없는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며 자랐다. 사실 탁월한 괴변가나, 웅변가나 사상가들 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무장했으나, 그런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들의 보호에만 의존되었다면 어떻게 사방으로부터 오는 그 강력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성경은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학대하고 말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데 일치한 것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전혀 공통성이 없는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크게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 적지않는 중요성이 이에 더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사람을 용감하게, 대담하게, 심지어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대한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순교를 했는가?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킬 때 광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게, 가장 진실하게, 가장 탁월한 믿음으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보존되어 내려 온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존되어 내려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더 확실하게 작용을 하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확실히 보존하도록 사람들을 사로 잡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성경암송의 유익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증가시켜 줍니다.

2.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도와줍니다.
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Like newborn babies, crave pure spiritual milk, so that by it you may grow up in your salvation.

3. 우리의 죄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도와줍니다.
시119: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맘에 두었나이다.
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that I might not sin against you.

4.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데 유익합니다.
시32: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I will instruct you and teach you in the way you should go; I will counsel you and watch over you.

5. 좀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해준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6.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도와줍니다.

7.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8. 효과적으로 복음증거를 할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행2:14-17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Then Peter stood up with the Eleven, raised his voice and addressed the crowd: Fellow Jews and all of you who live in Jerusalem, let me explain this to you; listen carefully to what I say. These men are not drunk, as you suppose. It's only nine in the morning! No, this is what spoken by the prophet Joel: 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주로서의 예수

1. 용어설명
주(헬라어로 퀴리오스)가 형용사로 쓰일 때에는 '힘있는', '권위있는', '합법적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에서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통제력을 뜻한다. 이 말이 법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하다는 뜻이고 사람에게 쓰일 때는 권위나 자격이 있다는 뜻이고 지배자의 경우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한편 '퀴리오스'가 명사로 사용될 경우는 두 가지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종이나 집, 신하 등의 주인을 뜻하고 둘째, 부인이나 여자 아이의 법적인 보호자라는 법률적인 뜻이 있다. 이 단어를 칭호로 붙이는 관습이 점점 발전하여 철학자, 의사, 남편, 아버지에게 사용되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퀴리오스'라고 부른 것은 70인역에서 발견된다.

2. 구약적 배경
70인역은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퀴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퀴리오스'는 하나님의 본성에 잘 어울리는 칭호이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백성들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만유의 주님이시다(미4:13).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주라고 증거하는 것은 창조주로서 인류와 우주에 대하여 홀로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주'라는 하나님 칭호는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말해준다.

3. 신약에서의 용법
신약에 와서는 구약적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주 예수'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롬10:13).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을 때(롬1:1), 거기에 부합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초대 교회가 하나님께 사용하는 칭호를 예수에게도 사용했다는 것은 유일신 신앙의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 확인이었다.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의 용례
복음서에서 예수를 '주'라고 부를 때는 주로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지나 제자 도마의 절규처럼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신앙의 절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요20:28). '주 예수'라는 명칭은 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는 '주 예수'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행16:31),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행8:16;19:5)라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행2:36).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표현이 초기 신앙 고백문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② 바울 서신에서의 용례
바울도 '주 예수'라는 칭호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순종하여 고난당하신데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예수께 주어진 칭호로서 '퀴리오스'를 사용하였다(빌2:8-11). 즉 이 용어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암시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라는 단어로 불리신 예도 여러 군데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는 모든 인류의 주가 되신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께 나아가 세례를 받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니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고전8:6)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

대속

1. 대속의 정의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공의의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되어 사탄의 수하에서 종노릇하고 있을 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사 사탄의 수하에서 종노릇하는 인간을 구해내어 하나님의 양자 삼으시려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하나님앞에 죄값을 대신 치루게 하셨다. 이를 대속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값지불을 마치셨다.

2.대속의 이유

①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또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대속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근거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말씀
출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maintaining love to thousands, and forgiving wickedness, rebellion and sin. Yet he does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e punishes the children and their children for the sin of the fathers to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②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모든 인간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대속하셨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성경적 근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근거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③ 하나님께서 대속을 원하시므로 그렇게 하셨다.
사53:10 -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 and though the Lord makes his life a guilt offering, he will see his offspring and prolong his days, and the will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3. 대속의 조건

① 죄가 없어야 한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ic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in every way, just as we are - yet was without sin.
② 모든 인간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For Christ's love compels us, because we are convinced that one died for all, and therefore all died.
③ 육신을 입은 인간의 대리자여야 한다.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For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 in that it was weakenedby the sinful nature, God did by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man to be a sin offering. And so he condemned sin in sinful man
④유월절 희생양을 상징해야 한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Get rid of the old yeast that you may be a new batch without yeast - as you really are. For Christ, our Passover lamb, has been sacrificed.

4. 대속의 은혜
대속을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감사하고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① 믿는 자마다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②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신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so that you through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③ 질병에서 해방을 주신다.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Isaiah: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eseases.
④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and in this one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by which he put to death their hostility.
⑤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신다.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who gave himself for us to redemn us from all wickedness and to purify for himself a people that are his very own, eager to do what is good.
⑥ 시험받는 자를 도우신다.
히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Because he himself suffered when he was tempt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mpted.

예수님의 현재사역

1. 하나님보좌 우편에 계시며 통치자로 계십니다.
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After the Lord Jesus had spoken to them, he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he sat at the right hand of God.
벧전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who has gone into heaven and is at God's right hand - with angels, authorities and powers in submission to him.

2. 영원히 계시고 항상 살아서 간구하십니다.
히8;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but beacause Jesus lives forever, he has a permanent priesthood. Therefore he is able to save completely those who come to God through him, because he always lives to intercede for them.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Who is he that condemns? Christ Jesus, who died - more than that, who was raised to life - 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is also interceding for us.

3. 항상 함께 하십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4. 구하는 것을 시행하십니다.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And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Son may bring glory to the Father. You may ask me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5.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And he is the head of the body, the church; he is the beginning and the firstborn from among the dead, so that in everything he might have the supermacy.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

1. 죄를 속한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 죄 사함을 얻게 한다.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3. 믿는 자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6.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7. 믿는 자에게 성소에 들어갈 담력,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주는 능력이 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8.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주는 능력이 있다.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라.

성령의 내주하신 증거들

성령의 임무 중 신자에 관한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일 수 있다.
즉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증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
령의 시대에 사는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는 반드시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하는 질문으로 생각
된다. 왜냐하면 증가하는 성경 지식, 수많은 교회, 교인 등으로 평가되는 외적인 성장에 비
하여 내적 성숙이 빈약한 현대 교회의 무기력증은 성령 부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신자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증거들을 열거함으로써 각자의 현주소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증거1.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의 사고 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2.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3.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
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4.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5.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6.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점점 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진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7.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경우는 )

증거8.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자신의 경우는 )
이상과 같은 증거들은 우리의 상태를 테스트 할 수 있는 신앙의 리트머스(litmus) 종이와
같아서 신자들로 하여금 매 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

1.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사람에게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 세상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요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3.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 즉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

4. 떠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만족을 주는 능력이 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5.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다.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6.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엡3:16 그 영광으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7. 우리를 거룩한 삶, 하나님의 아름다운 삶,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 신자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9.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심어 주신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0.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1.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4:14-16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1. 히브리 작가가 처해있는 상황의 부정적인 면
말씀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신앙의 균형감각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의 좋은 대로 포식하시가 쉽다. 말씀과 기도는 균형있게 섭취해야 한다. 말씀을 대할 때 QT할 때의 Form으로 해야 한다. 지도자는 홀로 서는 자이다. 혼자 길을 걸어가야 한다. 홀로서기의 Tool이 QT이다. QT를 모르고서는 홀로 설 수 없다. 14절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갖고 있는 Negative한 것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15절에서 Negative한 것은?
① 예수님을 체휼하지 못하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입으셨던 분으로 우리와 똑 같은 경험을 실제로 해 보셨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근심 걱정 스트레스를 다 알고 계신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라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어려움을 당하셨고 우리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② 히브리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도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다. 히브리 독자는 보통 시험을 받는 자는 죄가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③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았는데 예수님도 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④ 우리 연약함을에서 연약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시험을 받아 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히브리 독자들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볼 수 있다.
16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긍휼함이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라고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2. 긍정적인 면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큰’과 ‘대제사장’와 같이 두 번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승천하신’에서 단번에 죄의 문제를 굴복시키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의 중보기도를 하는 대제사장이시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은혜는 대가 없이, 공짜로 받는 거저 받는 선물이다.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받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용감무쌍하게, 당당하게,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Know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한다. 철저히 알아야 한다. 나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큰 대제사장이시다. 승천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은 분이다. 죄가 없는 분이시다.

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존재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사이시다. 대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하물며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갖고 나가면 해결될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라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 믿는 감격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대변인이고 그 대변인이 하나님께 내 문제를 대변하시는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16절에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보좌는 왕이 앉으시는 자리이다. 즉 하나님은 은혜의 왕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왕이기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모든 성공적인 관계는 대화를 전제로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활력있고도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누리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교회에 나오시기 전이나 예수를 믿기 전에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출석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기도하라고 강요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우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에서 살아서 활동하는 영혼에 의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면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신앙이 성장해서 기도를 드리지 못하면 마음에 답답함과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신아의 답답함을 느끼는데 이것은 호흡이 원할하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살아있는 영혼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적 호흡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사람의 영혼도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기 위해서는 그 영혼이 숨을 쉬어야 하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영혼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영혼의 호흡’인 것입니다. 기도는 아무런 대상 없이 일방적으로 하는 독백이 아니며, 또 아무 의미도 없이 반복하는 주문도 아닙니다. 시간이 길든지 짧든지, 소리를 내서 하든지 속으로 하든지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달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 메아리가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2. 왜 기도해야 합니까?
죤스라고 하는 신학자는 “사람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뻐꾸기는 밤에 울도록 되어 있고, 독수리가 창공 높이 날아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기도는 인간의 본성이다. 성경은 인간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①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② 기도함으로 새힘을 얻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이사야40:31).
③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3. 누구에게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를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신 것이다. 불신자는 절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열릴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4.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② 믿음으로 기도한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③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④ 소리내어 기도하면 도움이 된다.

5. 기도에는 무엇이 들어가나요?
대화에도 순서가 있듯이 기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들이 꼭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①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가를 명상하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시135:3).
②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나를 위해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③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고백하는 기도일수록 주님이 기쁘게 들으십니다. 죄를 드러내고 마음을 비울수록 성령님이 마음속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부끄러움 없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이사야1:15).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④ 바라고 원하는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자기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들을 위하여 믿고 구합니다. 성령의 충만, 은혜의 생활,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고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직접 구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로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 사용권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⑥ 모든 기도를 마치면 아멘으로 마칩니다.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동의합니다’, ‘참되다’는 뜻으로 나의 기도가 진실하며 응답하신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도 틀림없이 믿는다는 뜻입니다.

6. 왜 기도에 자신이 없습니까?(응답받지 못한 경우)
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의심하였기 때문)
② 기도의 내용이 분명하지 못하므로
③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서
④ 다른 염려가 마음을 가렸기 때문에
⑤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에(남을 미워하거나 가정불화 등)

7. 응답받는 기도를 하려면
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하려는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②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③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도중에 끝내지 말고 응답 받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 번씩이나 똑같은 것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④ 은밀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8.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어집니까?
기도의 응답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① YES : 곧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기도 즉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② NO : 이루어 주시지 않기도 합니다.
기도가 거절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가 되지 않거나, 기도할 때 마음에 기쁨이 없고 불안한 경우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거절은 더 좋은 길을 위한 방향 바꿈입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 문을 닫으실 때에는 늘 다른 한 쪽 문을 열어 두십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9).
③ WAIT : 기다리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거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더 기도하여 준비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지체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이도 안난 아이에게 갈비를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9. 아멘의 의미
① 소망의 표현 :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엡3:21, 계22:20)
② 동의와 확신의 표현 :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신27:26, 고후1:20)
③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현(계19:4)
즉 아멘은 참되다는 뜻으로 나의 기도가 진실하며 응답하신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도 틀림없이 믿는다는 뜻입니다.

10. 기도의 중요성
① 신앙생활에 방해하는 사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엡6:12-18, 약4:7).
②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고 믿음의 선조들이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막1:35, 마6:9-13, 롬1:9).
③ 기도는 성령충만을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눅11:13, 행21:1-4).
④ 기도는 하늘 창고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왕상3:12, 빌4:19).
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들기 때문이다(마26:41, 눅22:40).

기도의 10대 원칙

1.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9).

2. 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막11:24, 요일5:14,15).

3.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라(요일5:14,15).

4.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라(시1119:105-112, 요15:7).

5. 가난한 심령으로 기도하라(마5:2, 시51:17, 눅18:13,14).

6. 용서한 후에 기도하라(막11:25, 마6:12).

7.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눅11:8, 마15:21-28).

8. 끝까지 기도하라(눅18:7-8, 창32:24-28).

9.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삼상12:23).

10.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마7:7, 창24:12-14).

이 세상을 본받지 마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유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위성, 지구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 주위의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그리스도께서…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1: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세상은 사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마귀에 의해서 지배되고 지옥으로 향해 살아가는 삶의 개념들과 방법들로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참된 제자는 이러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으므로, 세상을 본받아 살기를 거절해야 하며 세상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하며 세상과 대결하며 살아 갑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을 본받아 산다는 것은 사물과는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세상의 삶이란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정신적인 굴복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살지 않고 없어진 사람들의 본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참된 제자는 자기 주위의 세상을 본받아 살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면 이기적인 우리 사회의 유행이나 방식을 모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표준을 예수님과 성경에서 찾을 것입니다. 당신의 시대에 “유행하는 것”을 따르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대중의 방법은 대개 나쁜 방법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군중과 맞서나가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를 따르기 원하신다면, 세상의 방법과 맞서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만일 이기적인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찬성한다면, 하나님은 대개 그것에 반대하십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그의 과업을 수행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녹음기, 텔레비젼, 영화는 모두 예수님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에게 데려오는 데 사용하여 왔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아무도 하나님이 원하신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에 자동차와 비행기 대신에 소가 끄는 달구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좀 더 쉽게 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방법도, 보다 더 쉽게 사람들의 생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켜 예수님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게하기 위해 하나님에게는 그의 아들의 희생이 있었고 예수님에게는 그의 생명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일하는 방법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값비싼 선물을 세상의 방법들로 값싸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예수의 제자들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방법들을 따릅니다. 어떤 새로운 것이 들어오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것을 찬성하신 것처럼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마약이 들어오면 “예수님도 역시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멋있게 현실도피를 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우리는 항상 길잃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멋대로 예수님과 그의 표준을 그분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의 특질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그에 의해 측정되어야 하는 표준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기분좋게 느끼는 것이나 문제를 뒤로 미루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장발이 유행하면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기위해 성경을 먼저 읽어 보지도 않고 예수님의 머리도 길었다고 모든 사람은 말합니다. 만일 대머리가 유행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세상의 변하는 유행에 얽어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지금 저는 독존(獨存)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군중에서 소외된 느낌을 갖는 것보다는 그들의 영혼을 팔고 싶어합니다. 의(義)를 지키기 위해서 고립이 불가피하다면 그들은 군중에게서 뛰어나오는 것보다 오히려 부패한 군중과 섞이는 것을 택합니다. 청소년 문화는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의 계속적인 변화와 하나님 없이 청소년을 함께 묶으려는 시도를 나타냅니다. 이 생각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청소년들이 집단을 이루어 할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이 생각들은 대부분이 그 당시에는 단지 “시대에 민감한”것이 되었을 뿐 분별력 있게 실행 되지는 않았습니다.

소속에 대한 욕구는 정말로 마약중독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약이나 색욕과 꼭같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사탄이 예수님 믿는 것을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 수 있다면 만일 사탄이, 마음 자세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욕구가 없는 채로 사람들을 모이기 위한 하나의 은폐물로 예수님의 복음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복음을 대적하기 위하여 복음을 사용하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만일 청소년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거나 말씀에 따라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사람들을 모으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위에 모인다면 사탄은 세상을 속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은 잘못된 동기로 팔리고 매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악한 생활에 대한, 또는 고삐풀린 현실 도피에 대한 하나의 위협으로가 아니라 “이 사악한 모든 것을 모이게 하는” 수단으로 소개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새겨 두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예수님을 따르려면 군중의 길을 가지 않아야 합니다. 군중의 길은 지옥과 죽음의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에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환난과 유혹을 이기는 방법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왜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을 받을까요?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다면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악을 바라는데 행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인형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등에 있는 줄을 잡아 당기면 “안녕하세요”라고 말합니다. 또 한번 잡아 당기면 “내 이름은 예쁜이예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잡아 당기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고 싶으셨으면, 우리를 말하는 인형 예쁜이처럼 만들어 놓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분이 줄만 잡아 당기면 그분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도록 우리를 만들어 놓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사랑일까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우리를 만드셨다면, 불순종하는 것도 역시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신뢰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에 죄속에 빠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두실 수 없습니다. 이 삶은 우리의 시험기간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면, 죄가운데 빠지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시련이 오면,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시험은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가를 입증합니다. 시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를 보여줍니다. “시험이 올 때에 항복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험이 끝난 후, 그는 인생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유혹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유혹은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나 느낌을 당신의 마음 속에 심어 주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매우 강한 유혹을 받고 그것을 거부하여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시험(유혹)은 세 가지 중요한 근원에서 옵니다.

1. 유혹은 우리 주위의 육의 사람들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옛 친구가 옛 생활 방법으로 우리를 끌어 들이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세상”이라 부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4:6-7).

2. 유혹은 우리가 죄 가운데 살 때, 한 때 가졌던 습성에 대한 옛 기억에서 또한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을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어떤 인물인가를 나타내 주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처리하실 더 좋은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옛 생각이나 감정이 살아 날 때는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야 하는 조짐으로 이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외로울 때 예수님 자신을 우리의 형제보다 더 가깝게 매달릴 수 있는 위대한 친구로 나타내 주실 것을 간구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했으면 그분을 우리의 훌륭한 대제사장으로 알아야 합니다. 혼동되었을 때는 그분을 우리의 지도자요, 인도자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목마를 때는 그분은 자신을 생명수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이런 방법으로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은 자신과의 아름다운 시간들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과 갖는 이러한 시간들은 옛 생각들을 덮고 새로운 행복한 생각을 갖는 새로운 장을 펼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분과의 이런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는 옛 진흙 바탕의 잘못된 과거로 파고 들어감이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길 건너 편으로 운전해 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올 때는 정말로 “진로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참된 예수님의 사람치고 종전에 살아온 것과 같은 진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이제는 예수님을 위하여 삽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그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의 새 생활 속에는 옛 생활에 대한 추억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옛 생활들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익힐 때까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3. 유혹은 마귀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마귀는 그가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을 불어 넣기 전에 우리가 오르막 길에 있을 때나 내리막 길에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시험받을 때는 과거에 습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만약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가기 전에 잘못했던 것에 대하여 너무 오래 생각하면 과거 나쁜 습관을 다시 행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나쁜 습관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험을 처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를 물리치는 방법은 강력하게 “안돼”라고 말하고 당신의 마음을 바로 예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죄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죄의 목록과 의미

로마서1장 28-31절에 나타난 죄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의미를 알아봅시다.

1. 불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의롭지 못한 행위
2. 추악: 바르지 못한 일 행하기를 즐기는 마음
3. 탐욕: 보다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열망. 이 단어는 이따금 엡5:3에서와 같이 성적인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만을 주장하는 데에 적용되기도 한다.
4. 악의: 남을 해하고자 하는 의롭지 못한 마음
5. 시기: 자기가 몹시 갖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을 때 느끼는 예민한 불쾌감
6. 살인: 악의나 시기가 유발시킨 결과.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창4:1-8;요일3:12). 또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 자들의 경우도 그러하다(마27:18;막15:10).
7. 분쟁: 싸우기를 좋아하는 기질과 그에 따른 결과를 의미한다.
8. 사기(詐欺): 교활함과 배반함
9. 악독: 앙심, 원한,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열망
10. 수군수군하는 자: 비밀리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
11. 비방하는 자: 공개적으로 타인을 욕하는 사람
12.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며 무시하는 자
13. 능욕하는 자: 자신만이 대단한 존재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무가치한 듯이 남을 경멸하는 자
14. 교만한 자: 자신을 과대 평가하여 타인 뿐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무시하는 자
15. 자랑하는 자: 교만한 자는 항상 자기를 '자랑하는 자'이다(고전13:4).
16. 악을 도모하는 자: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중상 모략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자
17. 부모를 거역하는 자: 불효자(출29:12;레위기19:3;잠20:20;엡6:2)
18. 우매한 자: 영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 자
19. 배약한 자: 약속을 멋대로 파기하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자로 신뢰할 수 없는 자,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자
20. 무정한 자: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자
21. 무자비한 자: 자비롭지 못한 사람, 잔인한 사람, 냉혹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와 제사장, 레위인 등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눅10:30-37).

이처럼 인간은 죄악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저희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결과로 임한 형벌의 한 모습이다. 본문에 묘사된 인간 죄악의 대참상은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말세의 인간상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의 성호를 오늘도 찬양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당신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아무런 흔적조차 없는 텅빈 궁창에 별을 던진 태초부터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거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셔왔으며, 그 목적의 조그마한 일부로서 당신의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셔왔습니다. 우리의 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삶의 기쁨이요 광채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 기쁨과 광채를 받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알고 그의 음성에 민감한 것은 패배와 승리, 성공과 실수, 목표와 방향 상실의 차이가 됩니다.
성령충만에 대한 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을 비우고 죄를 없애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항상 당신의 심령을 채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과 하나님께 정직하십시오. 진지하십시오. 당신의 죄를 자백하고 그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 다음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심령에 들어오시기를 요청한 것과 꼭같이 성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영혼을 가득 채우도록 간구하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안내자이며 하나님 능력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2.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시키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도받기 원하지 않는 생명은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뜻을 완전히 주관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의 일을 그분은 아십니다. 당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하나님 중에 누가 당신의 생애를 운영하는 채비를 더 잘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모든 지혜와 힘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같이 가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실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시며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이기적인 결정을 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때문에 당신은 그분께 굴복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지고의 행복과 성스러움을 갈망하는 사랑의 아버지, 친절한 아버지, 자비심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 굴복한다는 것을 마음에서 우러난 성실한 기도와 자성의 문제로 삼으십시오.
그 다음에 무슨 희생이 따를지라도 그분이 바라는 곳으로 가고, 그분이 바라시는 일을 하겠다고 그분께 아뢰십시오. 그러나 만약 진담이 아니라면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께 하는 약속은 어느 것이나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3. 희생을 각오하십시오.
미온적인 기독교 신앙은 힘과 기쁨이 없습니다. 전부 맡기든지 전혀 안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쉽게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신의 의도는 진실하십니까? 분명히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집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가정을 가질 권리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친구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가족은? 결혼은?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분명히 수지맞는 또는 명성있는 인생을 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이것들 어느 것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희생하라고 요구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조금이라도 사용하실 것에 대해서는 잊으십시오. 이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정말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정말 솔직하며, 그리고 그의 뜻을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비싸기 때문입니다.

4. 바보라고 불리울 각오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은 이기적인 세상의 개념과 상반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분의 뜻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완전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해야함이 분명할 때에 항상 하늘로부터 음성을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식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아주 자유롭게 일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생각을 차단하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게까지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이 성령에 이어질 때 직관으로부터 나오는 인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따르면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영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복종함으로 바보라고 불리울는지 모르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바보들일 것이므로 그의 능력을 볼 것입니다.

5. 과거로부터 결별한 맑은 양심을 가지십시오.
당신의 생활에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죄악된 요소가 여전히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은 차단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복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적마다 성령님의 손가락은 죄악된 것을 씻고 의로와져야 할 당신의 분명한 의무를 지적할 것입니다. 맑은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과 원수의 음성을 구별하는 데 필수요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심령이 청결한 자”입니다.

6. 매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기본이 되는 그분의 인도입니다. 성경은 거의 모든 계층을 위한 원리와 지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경의 원리는 생활에 직접 응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울타리를 벗어난 하나님의 인도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를 따를 때는 자유는 항상 의로운 편에 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의 음성이 어떻게 들리는가를 배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충분히 알만큼 오랫동안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을 알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에 관하여 간접적으로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직접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함으로 알아야 합니다.

7. 하나님께 그의 뜻을 보여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모든 해결책을 항상 열거해 주시리라고, 또는 당신을 위해 그가 예비하신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시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선택이 변함에 따라 하나님은 그가 역사하시는 방법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다음 5년간의 당신의 생애에 대한 일지를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화내지 마십시오. 당신은 선택의 자유를 지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짜여진 일정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린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우주에 새로운 여러 가지 창조를 낳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창조란 당신이 실제로 창조할 때까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당신 생에 대한 일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성서에서 계획이나 청사진과 같은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선택의 자유를 갖도록 태어났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당장 해치워야 할 일에 대하여 인도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년에 당신이 하게 될 일을 보여주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당신의 소임에 대하여 말이나 정의(定義)에 얽매여 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가 당신이 다른 과업을 수행하는 데 더 소양이 있다고 느끼실 때에는 본래 맡겼던 일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을 원하실 때에는 언제라도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과, 당신은 각 처지에서 그분이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보여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 너무 성급하게 서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한 번에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실 것이며, 그분은 그의 약속에 결코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신쪽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기 원한다면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진심으로 알기 원한다면, 실망이라든지 또는 그분의 뜻을 놓쳤다는 느낌은 결코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화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하나님이 역사를 바꾸는 데 사용하셨던 남녀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판단한다면 그들 중에는 현명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들의 계층에서 선천적으로 재질을 타고난 사람을 많이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공통적인 한 가지 것을 지녔는데 그것을 그들은 그들의 세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사용하셨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지각이 뛰어난 주님을 모시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큰 믿음의 챔피언은 아니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작은 믿음을 가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의 추진력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의 과업에 부르셨으며, 그들이 그 부름에 충성하는 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일하셔서 그들을 통해 싸워 이길 수 없는 적을 대적하여 승리케 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평범한 남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천사 모습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색동 저고리를 입은 겉치레 잘하는 요셉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모세는 타지 않는 가시덤불을 보았습니다. 불순종의 발람은 나귀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눈을 못뜨게 하는 빛을 보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늙은 요한은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전에 하셨던 것을 다시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당신은 그분의 음성을 인식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인도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충실하게 만족시켰습니까?
이것을 먼저 하십시오. 당신 마음 속에 죄가 아직도 있거나 내놓지 않는 권리가 있거나, 하나님이 벌써 명령하셨으나 아직 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먼저 그분 앞에서 정결하십시오.
하나님이 전에 사람들을 인도하신 방법들을 열거하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당신에게 확신시키려면 훨씬 더 장구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당신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정직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그분께 맡기십시오. 여기에 성령님의 참된 인도에 대하여 기억해야 할 간단한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결코 유령같지 않으십니다.
결코 산울림 형태의 목소리나, 무시무시한 환영이나, 공포를 자아내는 또 다른 무서운 장면이나 소리가 그분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항상 온유함과 사랑으로 평범하게 인도하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은 “눈에 띄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항상 친절과 사랑과 온유함으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준 선량한 목자의 음성 그대로입니다. 가혹하거나 긴장을 시키거나, 이상한 인도는 어느 것이나 경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방식에 있어서 매우 정상적이고 영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을 엘리, 즉 그의 영적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2. 결코 결정은 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떤 것을 당장 알아야 하는데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십시오. 압력으로 강요받은 것은 어떤 일이든 실행해서는 안됩니다.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을 것입니다”(사28:16)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또한 말이나 마음이 조급해서는 안됩니다(잠14:29).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죄니라”(롬14:23)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확신이 설 때까지, 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합리적이고 확고한 신념이 가져질 때까지는 결정하지 마십시오. 명령하거나, 두목 행세를 하거나, 또는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모든 목소리를 조심하십시오.
계속적인 실황 중계방송과 같이,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음성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당신의 결정에 마음이 놓일 때까지는 행동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27, 요일1:18).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행할 때에, 불안과 혼란과 두려움을 가지고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조급하게 결정을 하지 마십시오.

3. 하나님은 결코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것이 그분의 음성이라면, 당신은 명확한 지도를 기대할 수 있으며, 그분은 당신이 복종하기를 기다리신다고 암시하는 그분의 침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마음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솔직하셔서 바로 정곡을 찌르십니다. 만일 당신이 인도를 받음에 있어 마음에 혼동이 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시는 바를 당신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더 쉬운 방법을 찾고 있거나 그것을 하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성령님은 감각적인 면에서 당신을 결코 억압하거나 무디게 하거나 자극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머리가 일편단심이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당신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 “마음을 돌리시오”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지도를 구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동시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민첩하고 활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사실들, 즉 그의 말씀과 우리가 알고 있는 의와 진리에 기초를 둔 사실들과 대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괴벽한 의식주, 성생활, 또는 행동양식을 갖고자 하는 마음의 유발을 경계하십시오.
때때로 이 원수 괴벽한 마음의 유발은 어린 교인을 어리석은 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처음에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진짜 인도처럼 보이나 가짜인 강요에 그를 빠뜨려 지쳐 쓰러지게 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마음에 주입된 생각들을 경계하십시오. 만일 어떤 것이 당신이 평소에 생각해오고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과 전혀 관계없이 청천벽력같이 당신에게 다가오면, 그리고 그것이 괴상하고 이례적인 것이면 그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십중 팔구는 악마편에서 올 수 있습니다. 당신을 깎아내리거나 우쭐하게 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조심하십시오. 이것 둘 다가 자만의 유형들이며 하나님의 인도처럼 변장된 사탄의 공격을 초래하는 첫 단계들입니다.

5.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의 인도는 결코 그 자신의 법에 어긋나거나 그의 말씀(성경)과 대치되지 않습니다.
“마땋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찌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8:20).
인도받을 모든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페이지 속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는 성경에 복종한다는 광범위한 원칙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가 뜻한 바를 항상 정확하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거짓말과 도둑질을 해야할지에 대하여, 그리고 성적 타락의 여부에 대하여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성경에 쓰여진 내용을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하여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인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특별하게 취급되지 않은 어떤 것을 당신이 필요로 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완전히 그분에게 굴복하시면, 당신은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신 속에서 그분의 지시를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인 친구나 그외의 친구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으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예수 제자로서의 당신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적인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을 인용하여 당신에게 충고하고 교훈을 주어 돕는 것 뿐입니다.
성경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에 대하여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매일 성경을 읽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한 때 읽었던 성경 구절을 회상시켜서 어떤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것을 꼭 해야 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까 염려하여 행동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어리석게 돌진하는 것이나, 성경상의 원칙이 명약관화한데도 모든 동기와 결정에 대하여 걱정하고, 행동에 옮기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일 뿐입니다.
당신은 성경이 지지하는 것이면 언제나 어느 것이든지 해도 좋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특별한 인도가 결코 필요하지 않고 단지 평범한 복종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떤 특별한 결정에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또 그것이 마귀의 음성이 아니고 주님의 음성임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주님이 당신의 마음과 가슴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1. 당신 자신의 욕망들에 대하여 죽으십시오.
구체적인 대상, 예를 들면 한 권의 성경이나, 한 권의 책이나, 한 장의 종이를 취하십시오. 이것을 당신의 문제에 대한 당신 자신의 감정이나 착상의 상징으로 사용하십시오.
그것을 선반 위에 한쪽 끝이나, 방의 다른 모퉁이에 두고서, 주님께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주 예수님이시여, 이것이 제가 지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것들을 주님께서 처리해 주시도록 여기에 둡니다. 저는 이러한 착상이나 마음가짐이 옳든 그르든지간에 극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것들을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를 위하여 그것들을 소멸시켜 주십시오. 그것들을 주님께 내놓습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저를 위하야 소멸시켜주실 것을 믿음으로 간구합니다.”
욕망들에 대하여 죽기로 결심하십시오. 신앙으로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그것들을 진실되게 처리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이 문제에 대하여 당신은 죽은 듯이 자신의 모든 생각이나 감정이나 착상을 버리고 맡겨 보십시오.

2. 당신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자신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의 완전한 지도와 인도를 받기 위해 제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바칩니다. 저는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은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임을 지금 주님께 고백합니다. 지금 제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모든 죄로부터 저를 정결케 하여 주십시오. 저의 모든 권리를 주님께 내어 놓습니다.”
당신 스스로 완전히 주님께 복종하십시오.

3. 믿음으로 마귀를 물리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위치를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각 자녀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권세와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엡1:17-23, 2:1-7).
권세와 능력 안에서 생활을 하십시오. 당신의 의식 안에서 마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사용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사탄아, 성경에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나는 여지껏 그렇게 해왔다. 또 성경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쓰여져 있다. 이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에 그렇게 쓰여져 있다.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로 너를 대적하여 모든 너의 생각과 제안을 내 마음 속에서 가져갈 것을 명하노라.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라고 쓰여 있다.”(약4:7, 요일3:8, 4:4, 벧전5:6-9).
묻지 말고 단순히 그리고 분명히 이것을 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의 권세 안에 있는 명령으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이 그의 약속을 뒷받침하실 것입니다. 사탄의 압력과 제안들로부터 놓임을 받을 때 평화를 느끼고 긴장이 없어짐을 느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 이외에는 아무 음성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고전2:16).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부탁하신 것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자녀이고 아버지는 저에게 입술을 열어 해야 할 바를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지금 저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저를 위해 마음에 품고 계신 것을 저의 마음 속에 부어주십시오.”
처음의 분명하고 확고한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행하십시오.

예수께 가까이 거하는 법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기독교는 일련의 규칙들이 아니고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주님과 날마다의 교제입니다. 그것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과의 소망”(골1:27)입니다. 이 은혜와 믿음의 생활에서 우리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고” 혹은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으로(롬6:14) 특징지워 집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시며 진실하시고 마음에 평화와 능력을 가져다 주시는 그리스도입니다(고후3:18).

예수님 가까이 거하는 것이 그의 제자가 되는 비결이므로 다음의 세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사랑의 빛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1. 정결하십시오
항상 해롭고 죄가 되는 것은 피하십시오. 회개하고 자백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도록 하십시오. 생활 습관상의 죄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의 과거처럼 성경에도 늘 언급됩니다. 참된 제자는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눅9:23)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매일 아침 새 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새롭게 할 것을 의미합니다(롬6:11).
죄가 또한 우리를 우롱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사단은 심지어 추한 과거로부터도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 법을 압니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은 옛날 습관으로 다시 빠져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이기주의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거기에 굴복했다면, 웃음과 하나님의 친구로서의 위치를 잃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러므로 잘못한 가운데 해를 넘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과 그때 그때마다 청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지불할 것은 빨리 지불하십시오. 예수님과 가까지 하는 유일한 참된 길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2. 질식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는 어느 누구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죄가 많은 제자들로 하여금 옛 습관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사단은 개종한 하나님의 청년 남녀 누구도 고의적으로는 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이 아닌 좋은 것으로 그들의 주위를 돌리려고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하도록 이끕니다.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에서 다른 곁길로 돌립니다. 이를테면 쉬는 것은 중요합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사역의 압력과 긴장에서 떠나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로운 시간이 우리 마음을 그에게서 멀리 떠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세워주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T.V.와 함께 보내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비젼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의 음악이 라디오와 레코드에서 나오는 요란한 음악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화를 읽는 동안 그의 영호는 지옥으로 갑니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더욱 더 악화되었었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행동을 과감하게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왕국에 가치가 없는 일들을 피하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말합니다.

여가 시간으로 인해 더 훌륭한 남녀가 되도록 시간을, 계획을 세우십시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 섬기기를 즐긴다면, 여가 시간은 휴식 시간이거나 평상시 업무와는 다른 주님 앞에서의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쉴 때 즐기는 것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것들이 그 자체는 죄로 보이지 않으나,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첫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의미한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4:19).

로버트 프로스트의 짧은 시를 기억하고 있으면 이익이 됩니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하리라.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하리라.

3.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 힘, 지혜이십니다. 그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은 영적 승리의 비결을 말해 주십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질식당하지 않도록)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깨끗하십시오. 특별히 당신을 가장 강하게 유혹하는 죄의 형태로부터)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주 예수님 자신이 죄를 이기는 능력의 비결입니다. 어떤 제자도 자신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죄와 싸우면 싸울수록, 죄의 힘은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당신은 즉각적인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거대한 경주장의 으리으리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 세대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관중석에서는 과거에 주 예수를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들 중 몇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다. 노아와 모세, 다윗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죽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던 에녹이 있습니다. 엘리야와 사무엘 같은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또한 마지막 회개로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던 사람들 위에 신전을 무너지게 했던 삼손도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경주를 잘하는지 보고 있는 관람객들입니다. 관중석에는 이렇게 예수 안에서 죽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 모두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쪽에서만 볼 수 있는 T.V. 스크린을 통해 그들이 우리가 경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무어라고 말하며 어떻게 느낄까요? 그들이 갈채를 보내겠습니까? 아니면 울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어떤 이가 당신을 본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당신이 사모했던 분이 천국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이것이 당신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늘로부터 힘을 얻는 방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마음에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거하는 3단계를 대충 훑어 보십시오. 당신은 어떤 부분이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만일 당신의 삶을 그의 기준에 의해 측정해 본다면, 그리스도께 합당한 당신의 애정의 적절한 위치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친분 관계를 정말로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의 양을 봄으로써 어느 정도의 질적 농도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하루 계획표는 둘째 단계가 제시하는 것처럼 당신 자신을 “갈고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찾기에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는 가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바로 잡으라고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까?

매일 매일 생활의 목표가 있으며, 하는 모든 일에 목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나누기가 두려운 어떤 활동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염려”를 예수님을 위해 당장 벗어버릴 필요가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시간은 아닙니까?

충분히 이야기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리고 싶은 것을 지금 기록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가지고 기도드리십시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요소

1.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매일 기도하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성경구절에 밑줄을 긋도록 하라. 이 성경은 당신의 지침서이자 지도가 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기도할 때는 '구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함께 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시150:2)

2.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3.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교회의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4.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라.

5. 당신의 원수인 마귀와 악령들이 당신을 죄짓게 하려고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을 공격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6. 만일 당신이 죄 속에 빠지게 된다면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라.

7.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온전히 주관하기를 바라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나타내보이심으로써 당신을 통하여 이웃에게도 증거되도록 하신다.
성령께서 주관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능력이 없고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①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드리라.
②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③ 하나님께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하라.
④ 성령의 충만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감사드리라.

성경을 연구하는 4가지 흥미있는 방법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과 함께 연구를 겸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능숙해지기를 바라는 어떤 일에 시간을 보냅니다. 아마도 당신은 특출하기를 원하는 어떤 운동이나 오락 또는 재능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까지도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여지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당신 자신을 드리는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딤후2:15).

여기 성경을 공부하는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학자들이 성경을 읽기 위해 사용해 온 방법들입니다. 이것들을 당신도 사용해 보십시오.

1. 개관(분석적 방법)
이 성경 연구 방법은 전체 혹은 한 장이 무엇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짧은 장부터 시작하십시오. 또 요령을 터득하기 위해 성경의 쉬운 부분을 택하십시오. 그 다음에 더 어려운 것들고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부담이 없다면 쉬운 말로 번역된 성경으로 시작하십시오. 이 성경이 아마 연구하는데 필요한 개역 성경보다 더 읽기가 쉬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번역된 성경에는 새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이 있습니다.

정해 놓은 분량을 세 네 번 읽은 후에 시작하십시오(왜 짧은 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알 것입니다). 별개의 의미로 나누인 부분들을 찾도록 하십시오. 주로 보는 개역 성경이나 대부분의 다른 성경 번역들은 각 장을 몇 개의 단락이나 부호로 구분해 놓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당신의 말로 각 절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적어 보십시오.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각 소절에 대한 개괄적인 개념을 찾으십시오. 성경 연구를 위한 공책에 내용이 바뀌는 구획 표시를 함으로 도표를 작성하십시오. 아래의 도표는 당신이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합해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그 장이나 전체적인 멧세지에 대한 훨씬 폭 넓은 관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전체를 요약하는 문제를 두 세 단어로 문장 하나를 구성하여 그 주제로 써 넣으십시오. 다른 성경 연구 보조 자료에서 이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정독(귀납적 방법)

또 다른 짤막한 한 장이나 이미 공부했던 장의 일부를 택하십시오. 이번에는 자세한 내용을 찾으십시오. 또 그 부분의 중심 개념이나 사상을 쓰십시오. 각 절 또는 각 부문의 중심 단어도 찾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노트에 각 페이지를 4부분으로 나누십시오.

절을 표시하는 난 옆에는 질문란을 두어 왜? 무엇을?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십시오. 셋째 단에는 대답란을 두십시오. 연구하고 있는 절의 모든 중요한 단어의 뜻을 찾으십시오. 후에 더 많은 것을 첨부하고 싶으면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백을 남겨 두십시오. 정연하게 작성해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들을 첨가하기 위해 연구했던 것을 자주 되풀이 할지도 모릅니다.

3. 광범위한 고찰(총론적 방법)

이 방법은 실제로 성경에 표시를 하거나 많은 부분을 모두 옮겨 쓰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찾으려는 것은 어떤 단어가 성경 전체를 통해 또는 구약에서 신약에서 또는 한 책이나 한 장에서 몇 번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에 표시를 한다면 각 중심 단어에 상이한 색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색이 다 쓰고 없으면 별표(*), 밑줄(-), 물결형의 밑줄, 괄호, 원 등을 사용하여 단어 표시 방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17절).

또 하나의 방법은 용어 색인에서 어떤 단어를 찾아 성경에서 무슨 뜻으로 사용되는가를 아는데 도움을 주는 모든 절을 다 옮겨 쓰는 것입니다. 당신의 노트에 이 성경 연구 사항들을 철해 두십시오. 뒤에 사전이 부착된 색인표를 가지고 있으면 단어의 뜻을 찾을 때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Wisdom - Sophia - skill, wisdom
(역자주: 영어 성경의 경우)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눅2:40/10대의 예수)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10대의 예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6:10/순교자 스데반)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은총과 지혜를 주시매”(행7:10/애굽에서의 요셉)

이것은 노트를 사용하는 총론적 연구로서 중심 단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법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경우를 조사하고 예증할 대목을 뽑기 위해 색인표를 사용합니다.

그 대안은 성경 자체의 단어에 상이한 색을 사용하여 표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자와 펜을 사용하여 점선을 가지고 동일한 단어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두 가지의 또 다른 방법을 총론적인 연구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원리를 나타낸 가장자기에 색으로 부호화된 문자 사용법과 즉석 인쇄와 같이 도장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크기와 다른 색으로 별표들, 문자들, 숫자들 이외의 다른 부호들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문자나 부호는 도장 가게에서 주문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처음에는 비싼 투자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성경을 깨끗하게 흠없이 표시하는데 필요합니다. 몇 개의 도장만 있으면 성경 전체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표시할 때는 항상 깨끗하게 하십시오. 흘려 쓰지 마십시오. 후에 읽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성경은 당신에게 귀한 친구와 같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잘 간수하십시오. 제자 훈련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두 권의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연구용으로 집에서 사용합니다. 이 성경에는 조심성있게 써 넣습니다. 주간에 입증하며, 읽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버릴 수도 있는 더 값싼 것을 지니고 다닙니다.

4. 개성적 고찰(끼어 맞추기식 연구)
성경의 유사한 내용의 몇 부분들은 당황하게 하는 의문들을 일으킵니다. 어떤 부분의 진술은 똑 같은 부분을 묘사하는 기술과 세부적인 면에서 다릅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이 방법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찾아내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이 개성적 고찰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성령님은 성경을 기록했던 사람들을 개성이 다른대로 사용했습니다. 각 저자는 다른 저자가 역시 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조금 다른 면을 회상했습니다. 유대인인 마태는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음은 구약의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젊은 로마인인 마가는 그리스도를 신성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행적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인인 의사 누가는 예수를 인자(사람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인간적인 따뜻한 면을 그렸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신성의 아들, 장엄하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으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양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진술들(그리고 몇 부분의 유사한 성경 구절들)은 복잡한 조각그림 끼어 맞추기와 같습니다. 발생되었던 일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각 개별적인 그림 조각들을 취해 끼어 맞추어야 합니다. 어떤 저자는 자세히 서술했고 어떤 저자는 누락시켰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사건들을 올바른 장소와 순서로 배열하고 진술이 상이한 곳에서 새로운 세부 사건을 뽑아 끼어 맞추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되풀이된 구절들 중에서 하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빼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진술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는 너무 길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뽑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에는 이와 같이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가복음 12장 28절은 같은 이야기지만 몇 부분의 지엽적인 것을 빼고 다른 지엽적인 것을 첨가했습니다. 여기 마가의 진술이 있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끼어 맞추기식 분석 방법은 서기관이며 법률사인 이 젊은이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쉽고 풍부하게 그리고 빠짐없이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은 법률가이기도 했는데 와서 저희가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시험하여 묻되…”

나머지 각 구절(마22:36-40/막12:28-31)도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서로 끼어서 하나의 연속적인 진술로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들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연구 방법은 분명한 상반된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9절과 사도행전 22장 6-16절이 이러한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끼어 맞추기식의 분석방법으로 살펴보면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 빛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듣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의 개종 경험은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여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를 따라 가던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눈을 못뜨게 되었으므로 어디로 그를 데려가야 할 지 그들이 알았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의 가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당신은 참으로 당신의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를 사랑하십니까?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개인적인 우정과 사랑의 생활을 점검해 보십시오.

1. “하나님이 - ”
모든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위해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주 예수를 앞세우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기독교적 사랑은 진정한 기독교적 교제와 증거안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성스러워야 하며 하나님의 주권아래 신성한 것으로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생활 방법을 버려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전혀 사랑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의 쾌락과 이이기에 부응하게 되면, 그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하기 전에는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라도 그 참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절제, 인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언행의 배후에 깔려있는 배려인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단지 우리 자신의 이익에 기초를 둔 표면적인 우정이나 전적으로 정욕에 기초를 둔 성적 유익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정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친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이 우정이 싹텄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악마와 그의 군중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2. “이처럼 사랑하사 - ”
진정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합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랑보다도 더 깊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단지 감정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그 사랑은 주위의 모든 기쁨과 고통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단지 민감한 동정만은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성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 사람은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낭만입니다. 낭만적인 감정은 아름답고 가슴 설레게 할지 몰라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지탱해줄 만큼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사랑받은 자의 지고의 행복을 위한 현명한 선택입니다. 사랑은 의지의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당신쪽에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사랑은 매우 조심성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자매라면, 당신의 남자 친구를 주님께 인도해 주님의 허락을 받겠노라고 약속해야 하며, 그와 사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분별하는데 당신의 감정에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마음을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당신이 형제라면, 그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는 가장 우선된 동기가 그녀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기 위함입니까? 당신은 그녀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정은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 또는 당신에게 관심을 갖거나 주의를 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사람들과는 결혼하거나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의 감정을 향유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애정이 당신의 이성적 판단이나 의지를 앞서 가게 하지 마십시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작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감정을 믿는다면, 깊은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처럼 사랑하사”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십시오. 당신의 순결과 미래를 넘치는 정욕에 얽매여 헛되이 날려 보내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주신 육체과 애정을 값싸게 팔지 마십시오.

3. “세상을 - ”
사랑은 모든 사람이 그 행복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마음이 넓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의 친구를 사랑한다면, 당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을 알기 원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이 사랑하십니까? 천박한 거짓 애정을 당신은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지키며 자기를 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참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당신 친구의 감정을 독점적으로 통제할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보낸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를 신뢰함으로 질투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이 그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당신은 놓아 둘 것입니다. 참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고통을 끼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것은 정선된 소수에게만의 편파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색명도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겠습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알리기를 원합니까? 만약 당신이 당신의 데이트 때에 주님을 증거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신뢰합니까? 어떠한 상황이나, 어느 때 누구와 있을 때에도 그이가 당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정도로 그이를 존경합니까?

4. “주셨으니 - ”
참 사랑은 항상 무엇인가 주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항상 행복하게 해 줄 방법을 모색해 냅니다. 그것은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도우며, 그러면서도 가능한 모든 것을 합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현명할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랑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만 사랑은 그 본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개인의 쾌락이나 인기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다른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의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까? 선물들을 주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들지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그녀를 볼 때,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의 입장에서 생각하십니까? 그이가 부를 때 당연히 그를 위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이는 당신의 마음을 송두리채 줄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녀는 당신의 사랑의 수고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5. “그의 독생자를 - ”
참 사랑에는 항상 희생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사랑이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사랑이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지배할 때는 사물을 택할 때에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참 가치를 위해 합니다. 사랑은 그 희생을 치루지만 그 희생을 계속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당신의 애정 속에 자라온 사람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방해가 됨을 알 경우, 그 사람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간의 해를 입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하도록 그의 자녀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값비싼 시험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지상의 삶을 포기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시험에 통과할 때 당신은 행복한 사랑의 생활을 위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기쁨을 알 것입니다.

6. “저를 믿는 자마다 - ”
사랑은 절대적 신뢰를 포함합니다.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자신과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과 정직에 대해 신뢰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거의 주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실수와 약점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방을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한 기꺼이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가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그녀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할 수 있게끔 당신이 더 큰 일을 하도록 사랑이 고무하고 있나요? 어떠한 질문에 대해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이에 대하여 많이 생각합니까?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그녀에 대한 생각이 당신에게서 멀어질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또한 당시닝 사랑하는 사람을 안심하고 아무 곳, 아무에게나 놔둘 수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혼전성교를 제한하신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결혼 전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성교를 억제하는 것은 당신들 서로에 대한 신뢰의 증거입니다.

7.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는 어떤 희생을 치루게 될지라도 그에게 충성할 것입니다. 그를 항상 신뢰하며 그에게서 최선을 기대하며 항상 그를 변호하는 데에 당신의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참 사랑은 그것이 직면할 어떠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당신의 상대자를 서둘러 결정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항상 여유를 가집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자매들이여,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최대의 행복과 유용성을 가져다 줄 남자를 마련해 주실 것을 굳게 믿고 기다리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최종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기꺼이 기다리겠습니까? 당신의 데이트에서 그것을 매우 쉽게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도록 당신의 인생을 훈련할 수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져 가면, 당신의 관계에 시간의 서험을 해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상대방을 정말로 잘 알도록 하십시오. 인격적으로! 무슨 일을 하며 보내든지 당신들은 데이트 시간을 함께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냅니까? 함께 하는 많은 일에 있어서 서로 닮아 있습니까? 당신 둘은 그리스도와 또한 두사람 중 어느 한쪽에게 하도록 부르신 그의 일에 대하여 똑같은 근본적인 마음의 느낌을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은 그와 함께 할 장래에 대하여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되어 집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향해 서있을 때, 그녀가 당신과 함께 서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약혼할 만큼 충분히 진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없으면 스스로 헤어짐의 시험을 해보십시오. 약혼 기간이 긴 것은 두사람 모두에게 너무 많은 긴장을 주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이 서면, 곧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일정한 기간을 실제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보내십시오.
성경시대에는 한 남자가 한 처녀와 결혼하기를 원하게 되면, 그 의도를 공표하고 그의 미래의 가정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일년 동안 떠납니다. 그 일년이 끝날 때, 그녀에 대하여 사랑이 변함없으면, 돌아와 그 두사람은 그들의 모든 친구와 친척들을 초대하여 서로에게 공식적인 서약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연회를 베푼 후에 간략하게 그들은 부부로서 함께 살곤 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남은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면, 시간과 별거의 이 두가지 시험을 치룰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시간의 시험은 당신의 사랑이 진정이며 깊은 것인지, 아니면 더 아름답거나 더 멋있어 보이는 사람을 볼 때 스칠 수 있는 단순한 매력의 감정인지를 당신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

“네 부모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 …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출20:12/신5:16).

“아무리 천할지라도 내 집과 같은 곳은 없네”라고 하는 옛 노래가 있습니다. 가정이 과거에 지녔던 의미가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상실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에게 진정으로 가정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나는 살아 있기에 말할 뿐이다”라는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의 노래의 외로움을 동감합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는 좋은 곳이나 그 곳에는 가정이 없네. 뉴욕에는 집이 있으나 내가 쉴, 나의 집은 아니네”라고 노래합니다.
수 천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생지옥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들 때까지, 또는 미치어 되어 떠날 때까지 그 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만큼 잘 아시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이르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는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보고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벽이 투명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리 감쪽같이 감추어진 것일지라도 그 분에게는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그는 거짓말과, 악독과, 미덕이라는 너울을 쓰고 계속되는 탐욕을 보고 계십니다. 그는 부모의 것을 도둑질하는 어린이와, 잠자리에서 수음하는 청년과, 자기 집을 프리 섹스의 제단으로 사용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그는 싸움과 언쟁과 마약과 술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는 당신 가정의 현재를 아십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가정을 여전히 돌보고 계십니다.
설령 당신의 가정이 내가 묘사했던 것 이상으로 더 악화되었을지라도 그는 당신의 가정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이 언제 평화와 행복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지 그는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당신 가정의 모든 부패한 것과 잘못된 것을 바꾸어 깨끗하고 바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사탄이 당신의 가정을 파탄시킬 수 있다면, 그는 당신을 지옥으로 직행시키는 길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수 백, 수 천의 미묘한 방법으로 당신의 가정을 파탄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남녀가 결혼할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결합한다”고 말합니다. 결합이란 단어는 연고제나, 풀이나, 시멘트와 같이 “완전히 달라붙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붙은 자리가 찢어져 떨어지면 아픔이 옵니다. 사탄은 이 사랑의 이음줄을 잡아당깁니다. 그는 당신의 부모가 지치거나, 병들거나, 인습에 얽매여 있을 때 그들에게 역사하여 그들의 사랑을 뜯어내어 파탄에 몰아 넣으려고 합니다. 그는 크고 작은 어리석은 견해 차이를 가지고 형제들 간에, 자매들 간에, 부자 간에, 부모 간에 반목을 일으키려고 애씁니다. 사실 그는 너무 자주 이와 같은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들어와 우리의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나라도 국민 각자의 가정이 튼튼한 만큼 튼튼해지고 가정이 파멸되는 만큼 약화됩니다.
가정은 질서의 초석입니다.
가정이 붕괴되기 시작할 때는 폭동과 반란과 무정부 상태가 거리를 휩씁니다. 가정이 파괴될 때 문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수 십만의 어버지들이 가정을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어린아이들을 양자 알선 기관의 문에 떨구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습니다.
만일 세계의 안녕을 위한 어떤 일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가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정을 보셨을 때 어떻게 느끼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행복을 위하여 우선으로 가정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는 최초의 결혼을 출발시켰으며 그 첫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가정을, 그를 사랑하고 복종하는 방법의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가정이 행복되기 위한 원칙들을 세워주셨는데, 우리 세대는 이것들을 무너뜨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해 놓았습니다. 파괴된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만약 각 가정이 다만 네 명의 자녀를 두고, 그 네 명의 자녀들이 부모가 범했던 똑같은 과오를 범한다면, 백 년(이십 오 세의 네 세대)안에 육백 팔십만 이상이 엉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가슴에 생기는 상처를 아파하시며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유지하기 위한 그의 원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녀들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로서 계획하신 원칙들입니다.

1. 부모들은 그들의 입술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경험이 없는 수박 겉핥기식의 교인인 부모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참 믿음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려 버립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심지어 목사님들의 가정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타락한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들의 부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은 때가 자주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당신에게 일하고, 놀고, 사랑하며 웃는 예절을 가르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이 자녀의 활력과 지도의 원천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가정은 원래 평화와 사랑과 안전의 장소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가정이 그런 장소가 되기를 당신보다 훨씬 더 갈망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부모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의 중심에 오셔서 당신 부모의 생활에 영향을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돕고 있습니까?

구약 안에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거의 읽고 들은 적이 있는 일련의 지침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 개의 제안이라고 결코 불리우지 않고 열 가지 명령, 즉 십계명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리고 그 열 개의 계명중 단 하나의 계명에 아름다운 약속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을 위한 유일한 특별한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복종하고 공경하기 매우 힘든 부모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계명에 특별한 약속을 두셨습니다.
그 계명은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이고 그에 대한 약속은 “네 생명이 길고…복을 누리리라”(출20:12/신5:16)입니다.

이 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복종한다면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장수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복된 생활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계명을 어기면 심판의 법이 발동되며 두 가지 비극을 맞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부패한 일생이요, 둘째는 단명입니다. 즉 당신은 장수하지 못할 것이며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못할 경우 당신은 그들의 허물과 죄에 대하여 짜증을 낼 것입니다.
이러한 짜증을 내는 행위는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권위를 거부하도록 유인할 것입니다. 당신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지도나 통제에 대한 존중의 상실은, 모든 종류의 도덕적인 죄에 수문을 열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도덕적인 죄는 법률상의 죄를 유발하고 그와 더불어 존경심을 잃게 합니다. 어떠한 자기 존중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을 때 자살에로의 문이 서서히 열립니다.
성경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잠30:17)라고 말합니다.
부모에 대한 불공경과 짜증을 내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명과 불행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당신의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복종하십시오.

2. 우선 예수께서 당신 가정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순서에 있어서 아버지는 주님 다음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다음으로 주인이 되십니다. 나머지 가족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 가정을 이끌어가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 공급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된 자가 그의 부인과 자식들을 돌볼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아내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일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비된 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공급은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해 주며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도 포함합니다.
또한 그것은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부모된 자들이 가족들의 물질적 욕구와 동시에 영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가족들을 잃을는지 모릅니다.
부모들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바쳤습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희생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여러 해 고독하게 살았기에 집을 떠나고 있는 거예요”라고 비틀즈(Beatles)가 노래했을 때,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의 영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함의 중요성을 암시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단순히 물질만 제공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진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격려자(the inspir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 뒤에 서서 그의 일과 통솔에 용기를 주어야 하고, 위로와 충고가 필요할 때는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엡5:22-23/골3:18/벧전31-2/딛2:2,5).
만약 당신의 가정이 이와 같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의 가정이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바라십니까?
또한 당신의 가정이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시겠습니까?

3.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사랑하며 공경하며, 주님께 복종하듯 그들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바로 그 성령님이 하나님의 책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참고:엡6:1-3/잠23:22/눅2:51/골3:20).
그는 “부모가 너희에게 친절하면 공경하라” 또는 “네 부모가 항상 옳은 일을 하면 항상 공경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단지 “모든 일에 있어서…주 안에서 너의 부모를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만일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그들에게 강에 빠져 죽으라고 말해도 좋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들의 가정에서 사는 한, 하나님이 성경에서 금하신 것을 그들이 당신에게 하도록 요구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예수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당신의 부모를 당신과 대화하도록 사용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그들을 힐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결핍을 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사요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오로지 다를 사람들에게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부모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좋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변화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부모를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들이 행하는 불건전한 것은 어느 것이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보여줄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들에 대하여 당신이 창피함을 느끼거나 해를 받도록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가 당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요구되는 절실한 문제는 “그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설령 나의 계획에 맞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복종했는가?”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히 그들이 잘못되었거나 악한 일들을 할 때에도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이란 그들과 꼭같이 행하고 싶을 때에도, 즉 악에는 악으로 갚고 싶을 때에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아니,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의 자존심과 그들에게서 받은 해를 삼켜 버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라도 지고의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공경한다는 것은, 설령 당신이 그들보다 사리에 더 밝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위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설령 당신이 다른 것을 하고 싶을지라도, 그들이 당신에게 명한 바를 행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당신의 손에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두 가지 문제 - 즉 당신의 문제와 당신 부모의 문제 -를 갖게 됩니다. 그는 당신의 가정 안에 무엇인가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십시오. 그의 편에서 시작하십시오. 만약 당신의 부모를 예수님께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성결의 단계

기독교인의 삶은 여러 단계가 있다. 요한일서에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일2:12-15)라고 하여 저들의 신앙의 단계에 따라 자녀들(baby), 청년들(young man), 아비들(father)로 구분하고 있다. 또 고린도전서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고전3:1-2)라고 하여 젖먹이 신자가 있음을 말해준다.
웨슬레에게는 기독교는 곧 구원이요, 구원은 곧 성결(거룩)을 뜻하였다. 따라서 성결은 여러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결의 단계가 서로 다른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는 더욱 거룩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결의 단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의 신앙 성장 단계와 같다 하겠다.

1. 관계적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가 믿음으로 전에 원수되었던 사이가 부자관계로 회복된다. 이 때에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 관계적 성결이란 이와 같은 관계의 변화에서 본 것이다. 이는 주관적 변화라기 보다는 객관적 변화이며,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관계의 변화이다.
믿음으로 죄인이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신자된다는 말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연결되어지며 거룩하다 인정받는다. 신학적으로 의인(justification)이 바로 이 단계에 속한다. 의인은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죄의 용서를 뜻한다. 그는 용서 받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에게 전가(imputed)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그에게 뒤집어 씌워졌다는 뜻에서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라고 한다.
관계적 성화는 의식적 성결과 같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분된 물건이나 사람은 모두 거룩하다. 실제로 이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성별된 사물이 거룩하다는 구약적 의미의 성결이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들면, 성직자의 경우에 자신의 내적 변화 없이도 직업적인 종교인이 될 수 있다. 영적, 도덕적 변화가 없더라고 그가 성직에 종사한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성직자다. 그러나 관계적 성결만으로는 믿고 용서받은 신자는 이제 실제적인 영적, 도덕적 변화를 받아야 한다.

2. 초기의 성화(Intial Sanctification)
성별되었다는 것은 곧 영적 생활의 시작이며 실제적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즉 의인에는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사건이 있다. 중생과 양자됨이다. 중생은 거듭남이며, 양자됨은 자녀됨이다. 거듭났으니 부모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생아이다. 영적 중생후에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이적되는 것이다.
의인과 중생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의인과 중생으로 구분한다. 용서받은 후에야 거듭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적인 무죄 선언일 뿐이다. 실제로 의로워지는 내적, 영적 변화는 중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순간 죄인 자신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의인이 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동시적이라 할 수 있다.
웨슬레는 중생 이전과 이후를 어린아이의 출생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되어 해산을 기다리는 아이와 그 후 막 태어난 아이는 외모에서는 차이가 없다. 눈, 귀, 코, 입은 해산 전후의 모양이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중생도 마찬가지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보게 된다.
중생은 생명의 탄생이란 점에서는 하나의 완전이고 독립된 사건이지만 성결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 단계,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의로워지고 거듭나게 되며, 초기의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죄에서 용서받으며, 죄의 세력이 깨어지며, 성결 또는 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초기의 성화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구분점은 새 창조와 완전으로의 시작이라는 관점의 차이이다. 태어나면 완전한 사람이지만, 성장의 첫 출발인 것과 같다.

3. 점진적 성화(Gradual or Progressive Sanctification)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라고 불렀으나, 3장에서는 저들이 아직도 젖먹이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꾸중한다(3:1-3).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성장하여 온전한 성결을 이룬 자들이 있음을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라고 쓰고 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무언가 병들었거나 문제가 있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과 같이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점진적인 역사는 웨슬레에게 잘 나타난다. 구원은 ‘선행 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시키는 ‘깨닫는 은총’에서 신앙의 단계 즉 ‘확신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작에서 완전까지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적인 구원은 믿고 회개함으로 가능하며, 이 때에 의로워짐과 동시에 성장하게 되며, 성도의 마음이 온전히 정결해질 때에 순간적인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의인, 중생에서 온전한 성화까지의 과정을 점진적 성화라고 한다. 중생에서 성화에 이르지 못한 신자의 상태를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이 섞여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로는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장의 과정이다. 이 기간에 신자는 영적인 싸움을 무수히 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를 교대로 겪게 될 때가 많다.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중요하며,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4:23)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적 신앙의 외적 증거요, 열매로서 선행의 필수성과 중요성이 이 때에 나타나게 된다. 점진적 성화에 대한 웨슬레의 가르침은 개혁주의(Reformed)의 성화에 대한 교훈과 같다. 그러나 차이점은 개혁주의에는 완전 성화를 인정치 않고 있다.

4.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조종남 박사는 웨슬레 성화론의 특징을 당시의 여러 학파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그 당시의 모라비안파의 극단적인 순간적 성화의 개념을 지양하고 점진적 성화의 개념을 도모한 것이다. 모라비안파는 의인되고 중생하는 순간에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 즉 회심동시설을 주장하였다. 둘째,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순간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으로 끌어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즉 웨슬레의 성화론은 점진적 요소와 순간적 요소가 함께 있다.
성화론은 웨슬레 신학의 중심이요, 그의 목회와 설교의 중심 교리였다. 종교 개혁자들(루터, 칼빈)은 현세에서의 온전한 성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칭의의 순간적인 경험과 같이 성화의 두 번째 경험이 가능함을 주장했다. 두 번째 은총의 체험이란 뜻에서 “제2의 축복”, “제2의 은혜”, “두번째 변화”, “온전한 구원”,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불렀다. 온전한 성화는 바로 “온전한 사랑” 또는 “순수한 사랑”이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웨슬레는 완전의 내용 즉 무엇이 완전인가에 대해서는 1725년 경부터 테일러, 아 켐피스, 로의 책들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라는 방법에 대하여는 올더스케이트 이후(1738)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올더스게이트에서 체험한 수 페터레인(1739.1.1새벽)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완전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온전한 성화가 순간적이냐 혹은 점진적이냐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불확실했지만, 45년간의 목회 관찰에 의해 순간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고백하는 이들을 거듭난 후에, 이차적인 순간적 체험을 간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는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부분 순간적인 역사라고 결론짓게 되었다(commonly, if not always).
중생의 순간부터 성화의 역사는 시작되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만큼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받으며(소극적 의미의 성결), 성령의 역사로 순수한 사랑의 충만을(적극적 의미의 성결)얻게 된다. 비록 완전 성화되지 못한 신자라도 그가 지옥불에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이 바로 성결인 것이기에 신자의 신앙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성결)하심이니”(살전4:7)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그러므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성결)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5. 영화(Glorification)
기독자 완전이나 온전한 성화, 성결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대체로 구분되는 점은 성화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과정을 의미하여 체험적인 의미가 강하며, 성결은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정결케 된 결과적 상태를 뜻하며, 기독자 완전은 신앙인의 인격적 성숙을 주로 의미한다. 린드스트롬은 기독자 완전이란 인격의 완전이며 이은 곧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상의 차이로 볼 때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성결케 되어 기독자 완전의 보다 높은 정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완전은 끝이 아니다. 완전한 자라도 계속 은혜안에서 성장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최종적인 의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최종적인 완전(Final stage of Perfection) 또는 영화라고 한다.
현재 우리는 성결해도 연약성을 지니며, 무지나 실수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비록 육체가 죄는 아니더라도 육체안에 있는 동안은 죄의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 타락하고 부패한 연약한 인간성이 영화의 단계에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함을 얻을 수 있다. 현세에서의 완전은 이 최종적 완전을 얻는 조건이 된다.

구원의 확신론

1. 교리의 근원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는 웨슬레의 선교 초기부터 강조한 것 중의 하나였다. 비록 그가 나중에 자기의 입장을 약간 수정하였고 일반 법칙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였지만, 현재적 구원의 확신이 신자들의 특권이라고 계속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결여한 경우에는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웨슬레는 이 교리를 “메도디스트의 주요 교리”와 “기독교의 기반”으로까지 말하였다. 많은 신학자들은 웨슬레 신학이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성화론과 확신의 교리를 들고 있으며, 이는 “메도디스트가 교회의 생활과 사상에 준 근본적인 공헌”이라고 주장한다.
확신의 교리는 웨슬레 자신의 신앙 체험에 의해 분명해졌다. 그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을 기술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 다음에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죄 까지도 없이 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근거하여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중생이 아닌 확신을 얻은 경우로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이트(Arthur S. Yate)는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은 웨슬레의 확신의 도리 또는 영의 증거의 도리의 기초이다”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입장을 가진 학자는 스타키(L. M. Starkey), 터틀(Robert G. Tuttle), 그리고 조종남 박사가 있다.
웨슬레에 의해 강조된 이 교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그가 재강조하였다는 뜻이다. 재강조하였다는 말은 그가 이 교리를 다른 데서 배웠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서 이 교리의 자원은 가까이는 모라비안 교도였고, 멀리는 청교도였다. 그는 1738년 5월 초에 피터 뵈러로부터 참된 신앙의 열매 중의 하나는 속죄감과 거기서 비롯되는 영속적 평화와 확신이라고 들었을 때, 이 확신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든 웨이크필드(Gorden S. Wakefield)는 확신의 교리가 “독특한 청교도적 및 복음주의적 공헌”이라고 말하면서 웨슬레의 확신의 교리는 청교도의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 더 나아가 초대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웨슬레는 1756년 리챠드 톰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 멜랑크톤 및 개혁자들 중에(모두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든 신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의식과 이것이 초자연적 증거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빈번하게 그리고 강하게 주장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고대 교부들이 “그 문제에 관하여 침묵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신앙의 확신에 관하여 나는 초대 교회가 이 주제를 기쁘게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니케아 이전 교부들의 저술에서 이 주제에 관하여 명백하게 다룬 글들을 찾아 보기 힘든자 할지라도, 그러나 나는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폴리갑, 오리겐, 그 외의 교부들을 주의깊게 읽으면, 그들 자신이 이 확신을 소유했거나 이 확신을 가진 참 신자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리는 근원적으로 성서에서 출발한다. 웨슬레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이와같은 진리의 중요성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 계시된 이 진리는 단 한 번 만이 아니요, 또 불명료하거나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또한 엄숙하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한 특권의 하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논술하기를 아무도 성서에 역행하거나 진리의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고서는 성령의증거를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실상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진리를 그는 이성적 설명을 들어 확증하려고 하였다. 확신의 교리를 취급하는 웨슬레의 방법에서 우리는 그의 성서 해석법 또는 신학적 방법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성서 해석법은 성서의 진리를 이성의 빛에 따라 해석하고 그것을 교회 전통에 비추어서 이해하고, 나아가 신자의 체험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이성→전통→경험(삶)의 순환법에 의한 해석 원칙이 확신의 교리를 전개함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즉 성서에 증거된 이 교리가 이성에 의해 해석되어지며 초대 교회 시대부터 강조되어 왔으며, 최종적으로 오늘날 신자의 경험으로 확증된다. 이는 웨슬레 자신의 경험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 교리가 이처럼 성서적이요, 전통적이며, 경험적이기에 웨슬레는 이것이 성도의 공통된 특권이라고 계속 설교하였다.

2. 증거의 성격
성령의 증거에는 성령의 직접 증거(the direct witness of the Spirit)와 간접 증거(the indirect witness of the Spirit)의 두 종류가 있다. 웨슬레는 “성령의 증거”라는 두 편의 설교에서 성령의 증거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였다.

성령의 증거는 영혼 위에 나타나는 하나의 내적 인상(inward impression on the soul)인데, 하나님의 영이 이것을 통하여 나의 영에게 직접 증거하는 바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과 또한 나의 모든 죄는 도말 되었고, 나 아니,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위의 정의는 1746년에 출판된 “성령의 증거”라는 설교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그 후 거의 20년 뒤 1767년에 같은 본문으로 집필한 같은 제목의 설교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웨슬레는 자기가 내린 정의에 대하여 “나는 20년이상 이 문제에 관하여 고찰해 보았지만, 여기에는 어느 한 부분도 철회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성령의 간접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the witness of our own Spirit)라고 하였다. 이는 성령이 우리 영에게 증거하면, 우리 영이나 자신에게 같은 내용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는 우리 영의 증거에 선행한다. 웨슬레는 이를 선한 양심의 증거(the witness of a good conscience)라고보 불렀다.

아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거의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증거와 같은 것이니, 이는 우리가 우리 영 안에서( in our own souls) 느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여 행하거나 또는 이성적으로 추리한 결과에서 오는 확신이다. 엄격히 말해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체험 또는 내적 의식은 “나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말한다고 나는 이성적으로 결론 짓는다.

웨슬레는 롬8:15-16에 근거하여 성령의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는 예리하게 구별하지만, 이 둘은 공동으로 증거한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확신과 은총을 전달해 주는 은총의 수단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이 모든 것 배후에는 우리의 어떤 의식보다 선행하고, 어떤 형식이나 예식과는 별도로 성령의 직접적이고 본래적인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3. 증거의 내용
지금까지 성령의 증거의 성격을 살펴 보았는데 이제부터 증거하는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웨슬레가 확신하는 바는 사실상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성령께서 의심 가운데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확신의 결과는 “우리가 자녀되는 실제성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증거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것을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웨슬레는 이 증거를 계속적인 것으로 보아, 사람이 중생할 때, 평생에 단 한번 순간적으로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는 한 지속되며 우리의 신앙 생활의 성장과 병행한다. 즉 이 증거는 칭의와 성화를 포함한 우리 구원의 전 과정에 존재한다.
성령은 먼저 우리 영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증거한다. “우리는 그의 성령이 우리의 영혼에게 그의 속죄의 사랑을 증거하기 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성령의 이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성결을 선행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의 내적 의식이나 이에 대한 우리 영혼의 증거를 선행한다.”
또한 성령과 우리 영은 우리 자신의 칭의, 중생, 양자됨을 증거한다. 이미 언급한 성령의 증거에 대한 정의에 이 점이 잘 나타난다. 성령은 우리 자신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나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그의 보혈로 나의 죄를 씻어 주셨음을 증거한다. 즉 “성령의 직능은 자녀들의 양자됨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버지되신 사랑을 느끼게 하며, 우리의 영원한 상속에 대한 진실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됨을 증거한 성령은 나아가 우리가 성결케 되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기독자의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증거한 성령은 이제 이러한 삶의 정점에 이르렀음도 증거한다. 따라서 성령이 성화의 사역을 행했을 때는 성화된 자가 이를 알게 하시는 법이다.
웨슬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사람이 성결의 은혜 곧 내적 부패성으로부터 깨끗함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우리는 이를 성령의 증거와 열매에 의해 알 수 있다.

전도하러 갑시다

잭 하일즈의 전도지침
1. 전도할 시간을 정해 놓으라
2. 영혼을 의식하라
3. 깨끗하고 단정하라
4. 신약 성경을 휴대하라
5. 두 사람씩 가라
6. 다양한 사람들과 가라
7. 가기 전에 성령 충만을 구하라
8. 믿고 가라
9. 친절하게 대하라
10. 칭찬하라
11. 집 안에 들어가는 것에 주의하라
12.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라
13. 한 사람만 이야기하라
14. 주제에 머무르라
15. 상대방에게 자기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
16. 같은 성경책에 머무르라
17. 갖고 다니는 신약 성경 안에 지도를 그려라
로마서 3장 10절 옆에 3:23이라고 적고, 로마서 3장 23절 옆에 5:12이라고 적고
로마서 5장 12절 옆에 6:23이라고 적고, 로마서 6장 23절 옆에 5:8 이라고 적고
로마서 5장 8절 옆에 10:9-13이라고 적으면 지도가 완성됩니다.
18. 사람들에게 "지금 당신이 죽는다면 하늘에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라
19. "알고 싶습니까?"
20. "알 수 있는 법을 내가 가르쳐 준다면, 성경 말씀대로 하겠습니까?"
21. 상대방에게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라
22. 상대방에게 죄의 대가를 가르쳐 주라
23. 예수님께서 그 대가를 치루신 것을 가르쳐 주라
24. 요점들을 복습해서 상대방이 이해했는지 확인하라
25. 상대방에게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라
26. 그에게 기도하도록 권하라
27. 상대방에게 여러분의 손을 잡도록 권하라
28. 다시 기도하라
29. 상대방에게 물으라. "성경에 의하면 당신이 지금 죽는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30. 상대방을 인도해서 공개적인 신앙 고백을 하게 하라
31. 일요일 아침에 그에게 들러서 그를 데려가라
32. 예배 시간에 그와 함께 있으라
33. 그와 함께 강단 앞으로 나가라
34. 일주일 내로 그를 초대해서 식사나 다과를 대접하라

주제별성경요절암송

1. 핍박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5장10절).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디모데후서2장12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 39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4장12,13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전서4장14절).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언20장22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누가복음6장37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장5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복음5장44,45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언25장21,22절).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여호수아23장10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23편5절).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편5편11절).

2. 주님의 임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33:14).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시140:13).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15:2).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요엘2:27).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시146: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시3:8).

3. 소망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71:5)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시33:18-19)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3:3)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37:40)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6:18-19)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31:24)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48:14)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4. 지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2:26)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3:1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3)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여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2: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시16:7)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1:5)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19: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4-15)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12:13)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5. 성결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시85:13)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잠21:21)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시5:12)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사35:8)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1,2)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3:21)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37:1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119:1)

매일 새로와짐

매일 새 날을 맞을 때마다 만물의 생명은 새로워집니다. 태양이 다시 떠올라 빛과 온기를 주면, 꽃들은 피고 새들은 노래하며 생명은 어디서나 꿈틀대며 힘을 얻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 우리는 하루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공급되는 것을 느낍니다. 골방은 우리의 내적 생명도 나날이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매일의 고백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의 신선한 양육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나누는 신선한 교통만이 영적 생명의 활기를 유지시켜 주고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해도, 죄나 고통의 짐 그리고 일의 부담과 피곤함이 우리를 지치고 약하게 한다 해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경건 시간과 장소가 말씀, 기도와 함께 새로워지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골방과 그것이 대표하는 내적 생명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만약 복되신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바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불충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공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시작으로서 하나의 위대한 행위이며,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계속적으로 수행되는 사역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점진적인 변혁을 봅니다. 에베소서 4장 22,23절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라는 말(부정과거 시제)은 단번에 취한 행동을 가리치지만,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는 현재 시제로서 점진적인 작업을 가리킵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도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 새롭게 하심을 받는(?받은?이 아닙니다) 자니라?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는 골방에서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해 주시는 복된 성령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 시간에서 모든 것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분과 참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역사를 하실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는 믿음과 순종이라는 간단한 두 마디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믿음. 성경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침 경건 시간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자신에게는 축복이 될 기도드리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가장 연약한 자녀는 자신이 기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도움은 우리가 효과적인 기도를 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만 진리가 신령한 의미와 능력을 지니고 우리 안에 계시될 수 있으며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아침 시간에 실제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려면 묵상하고 경배할 시간을 가지고 여러분의 마음을 다해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 안에 계시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은 기도와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리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순종. 성령님께서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중보기도의 순서

1. 우리 속에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시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여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하십시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 무엇을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들, 소원들 그리고 이미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들을 내려 놓으십시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4. 성령께서 당신을 온전히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그렇게 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5. 이제부터 갖게 될 놀라운 기도시간에 대해서 믿음으로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며 그의 성품에 따라 변함없이 이 시간에도 크신 일을 하실 것입니다.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6. 기도를 방해하려는 악한 영들을 강력하게 대적하십시오.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이름과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십시오.
행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7.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 혹은 떠오르게 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말하십시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룹으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제목으로 다 기도하기까지 다른 기도의 제목으로 넘어가지 마십시오.

8.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기도를 인도하거나 확인을 주실 수 있도록 항상 성경을 펼쳐 놓고 기도하십시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9.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를 마쳤을 때는 놀라운 기도의 시간을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찬양으로 마치십시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BIBLE

성경을 영어로 Bible이라고 부르며, 그 철자 5개가 각각 성경이 어떤 책이며 또한 왜 우리 인간들이 꼭 읽어야 하는가를 쉽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B:BOOK OF BOOKS
성경은 책 중의 책이다.
명작, 걸작, 유명한 책 중에서 성경을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은 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일 많이 인용되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I:INSPIRED BOOK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딤후3:16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렘36:2 -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벧후1:21 예언(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다.

B:BEST SELLER BOOK
2,00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성경은 전권 또는 그 일부가 현재 거의 1,700여종의 국어와 방언으로 번역이 되어 전세계적으로 읽혀지고 있으며, 연 10억 권 이상 출판되어 배부되고 있다.

L:LIVING BOOK
살아서 역사하는 능력있는 책

히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렘5:14 -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렘23:29 - 내 말이 ……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겔37:7-10 - 생명을 주시는 말씀
롬1:16 - 구원을 주시는 말씀
엡6:17 - 검과 같은 말씀, 사탄을 대항하는 무기의 말씀

E:ETERNAL BOOK
영원히 존재하는 책

마5:18,24:35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벧전1:25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사40:8, 시119:89 -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내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3,24).

더 나가기 전에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말이 실제로 의미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십시오. 만일 이것이 하나님에 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지식의 근원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1.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어는 누구든지 어떤 신을 만들어 “나는 이것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은 당신을 마음내키는대로 살게 하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과 같은 무력하고 막연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God)은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그 분만이 우리의 에배를 받을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당신이 섬기는 신(god)은 과연 참 하나님(God) 이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거짓되고 가변적이라면, 우리도 또한 가변적이 될 것입니다. 참 하나님(God)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그 분을 만나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책(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계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계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전할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거나 보는 것은 모두가 어느 때에 어는 것 혹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것이 시작했던 곳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시작됐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창1:1).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계셨습니다. 우주 안과 우주 밖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 분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항상 계셨습니다. 그 분은 시작이 없으시기 때문에 끝도 없습니다. 그 분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영원이라고 부르는 무한한 시간 가운데 살고 계십니다.

3. 삼위일체의 하나님
하나님이 누구신가 추구해 가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경이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또 하나의 진리를 말해줍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한 분 안에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세 분이 연합된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놀랍고 위대한 분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본성에 있어 하나이시고 서로 일치합니다. 성경은 그들을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 교제에 대한 성경상의 이름 “신성(神性/the God-head)"입니다(행17:29).

이 진리의 생소함에 당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몇몇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제공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 안에는 서로 닮지 않은 것 안에 닮은 유형이 있고, 다른 것 속에 동일한 것이 있으며, 다양성 안에 통일성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늘 건넌 강은 어제 건넜던 강과 같은 것일까요? 대답은 「네」와 「아니오」 둘 다입니다. 그것은 동일하지만 또한 다른 것입니다. 몇몇 종교와 철학이 우리 주변 사물의 동일성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 주지만,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한 해답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것들은 다른 것에 대한 이유는 제시해 주지만 동일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동양의 범신론자들은 온 세계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통일성은 설명할 수 있었으나 그 안에 있는 차이점과 차이에 대해서는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서양의 합리주의자들은 우연과 무질서에서 오는 모든 차이와 다른 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우리 세계의 질서와 모형에 대한 설명은 못합니다.

성경은 서두에서 창조에 대한 것과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생명의 형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사물은 그분처럼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가 아니며, 현재는 미래가 아니고, 미래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셋은 다 함께 한 단위로써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동일하지만 다르며, 다양함 속에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숫자에 적용시켜서 1×1×1×1=1과 같다고 쓸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시간인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도 모두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고 혼자서는 실현성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삼위 일체로서 알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으로 아직도 하나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며 거기에 생명을 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자신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다. 우리의 지력은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분에 대해 더 배울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는 구절로 가득 차 있습니다(창1:26/3:22/11:7/신4:35,39/사46:5-11/45:5,21/마3:16,17/28:19/고전12:4-6/벧전1:2).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의 실책은, 그것이 자신들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혼란시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제공하는 참고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성경에서 각 구절을 찾아 주의깊게 읽으십시오. 단 단어들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는 각 구절에서 당신이 느끼는 것을 적어보십시오. - 창1:26/신4:39/사46:5-11/마3:16,17/28:19/요17:11/고전12:4-6/벧전1:2.

지금 하나님에 대한 것 중 답을 얻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더 읽어가기 전에 그것을 기옥하십시오. 이 질문들 중 어떤 것은 이 장을 계속 읽어가는 동안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였으며, 성령도 사랑하였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도 낯선 것이 아닙니다. 땅과 하늘과 별들 뒤에는 사랑 - 참된 사랑과 사귐 - 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우주의 고아처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 작고 우주는 거대하다는 것에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특별하다”고 표시된 우리의 작고 외로운 혹성(지구) 위에 있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 삼위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그분 들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 중 한 분이라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거부하면, 사랑의 근본을 거부하는 것으로 당신의 사랑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은 냉냉하고 굳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모독하는 종교적인 열심을 존중하지는 않습니다.

이 삼위의 교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성삼위가 함께 계셨다면 외롭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기적인 이유로 해서 우리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외롭지 않으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를 창조한 것에 대한 가능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행복에 동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놀라운 계시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이기심이 없이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를 돌보시고 계십니다.(렘31:3/스바냐3:17/요3:16/17:24-26/롬5:5,8/엡2:4/3:19/요일4:7-12,16).

성경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알맞은 곳에 적절하게 당신의 이름으로 대치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을 찾아 그 중에 있는 단어 중 중요한 것 하나만 바꾸고 그 귀절을 적어보십시오. 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너대신 당신의 이름을 대신 써 보십시오. 또 스바냐 3장 17절도 그렇게 해 보십시오. 로마서 5장 5절도 “우리에게”, “우리의” 대신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고, 요한복음 3장16절을 읽고, “누구든지” 대신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이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가지고 계신 감정들을 어떻게 요약하겠습니까?

요한복음 17장 24-26절을 주의깊게 읽고 다음의 질문들을 자신에게 해 보십시오.
●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 “아버지”는 누구인가?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떤 특징이 있나?
● 이런 관계는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나?
● 말씀하고 계시는 분은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 아버지가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기심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택하시고 그의 행복과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그의 형상대로 만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런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의 첫 11제자들의 말로 인해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 속합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 당신에 관해 무엇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이 구절들을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조사한 것을 기초로 해서 당신은 다음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한 단락 정도로 설명해 보십시오.

율법과 복음의 관계

바울에게 있어서 무엇이 바른 교훈이며, 건전한 교훈인가를 평가하는 시금석은 예수 그리
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맡은 바 되었으며 이것을 에
베소에서 충실하게 전파하였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적 정신과 가르침을 통해서 당시의 에베소 교인
들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바른 복음, 건전한 교훈의 특징을 역설하고 있다.
우선 율법주의의 오류와 그 결과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율법주의는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 율법 가운데 어떤 특별한 조
항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인 것처럼 강조하기 시작할 때 복음을 올바르게 이
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율법
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폐기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로, 율법주의는 율법 자체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떠나 계속 율법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며, 마침내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를 받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결국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거룩하며, 선한 것이다(롬7:12). 결국 바른 교훈, 참된 교훈은 율법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없는 복음만의 강조는 우리를 피상적인 회심으로 인도할 수가 있으며 반면에 복음이 강조되지 않은 율법만의 강조는 우리를 절망의 자리로인도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의 문제를 깨닫고 곧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사역의 진정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로, 율법주의자들은 선생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정당한 교사로 자처했고, 율법을 가르치기를 원했다.

둘째로, 율법주의자들은 헛된 말을 즐겼다. 그들은 유익이 없고 비생산적인 말을 위한
말, 토론을 위한 토론만을 즐기고 있었다.

셋째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깨달음과 확
신 없이 율법을 가르치는 무능하고 부정직한 교사였던 것이다.

넷째로, 율법주의자들은 매우 이기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위해서나, 학생들을 위해 가
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경받기 위해 가르쳤다. 율법의 해석가가 되려는 그들의 욕망은
좋았으나, 스스로 남들 위에 서려는 그들의 이기심은 그들을 패망케 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바른 교훈, 참된 가르침이란 생명의 문제와 직결된다. 영광의 하나님의 복음
을 따른 사도의 바른 교훈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으로서 그들에게 영양을 공급하
거나 그들을 치료하는 건강한 가르침이었다. 반대로 반대자들의 다른 교훈은 성도들에게
사망과 독의 씨를 뿌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데
서를 통해 성도들을 하나님의 경륜과 궁극적 목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다른 교훈을 제거할
것을 디모데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 사랑의 약점과 아가페

인간적 사랑(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다음과 같은 치명적 약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에로스가 아무리 건강하게 사용되어도 결국 그것은 자기실현을 위한 욕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리아는 자기 감정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스토르게는 자아사랑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유형의 인간적 사랑은 예외없이 이기심에서 출발해서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2. 감정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는 모두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생리를 지닙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거스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도덕의 소명 앞에 의지적 응답을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 사랑은 감정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3. 인간을 보편적(universally)으로 평등하게 다루지 못합니다.
필리아는 내 기호, 취미와 무관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스토르게는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에로스는 추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플라톤(plato)의 「공화국」은 군인, 시민들 특히 철학자들의 지혜와 힘을 근거하여 세워지는 에로스의 왕국입니다. 이 나라에는 힘없는 노예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예에 대한 착취와 공갈을 금합니다. 노예를 다루는 태도 여하에 따라 주인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가 따로 없이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적 아가페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사랑은 결국 불평등과 계급 균열에 빠집니다.

4.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기보다도 수단이나 방편으로 다룹니다.
성 테레사는 단순한 인간적 자선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속적 자선은 흔히 어떤 프로그램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여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아가페는 개선이나 치유의 희망이 없이도 그가 바라보는 한 인격을 향하여 머무는 사랑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사랑은 너무도 자주 자기의 기호, 욕구, 바램에 대한 실현의 방편으로서 인간을 도구화하는 병리에 빠집니다.

5.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필리아는 가장 집착의 농도가 약하지만 역시 인간은 우정의 끈끈한 끈에 때로 비이성적으로 매이게 됩니다. 에로스는 우리를 보다 강렬한 욕망의 포로가 되게 함으로 우리의 자유를 마비시킵니다. 스토르게는 운명의 사슬로 우리를 묶어 우리의 자유를 약탈합니다.

이제 이 모든 인간적 사랑의 결함과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희망을 기다리고 있던 인류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새로운 단어 아가페(Agape)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을 떠난 희랍 고전에서 불과 네 번 밖에 쓰이지 않은 주목받지 못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는 절대적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인류는 새로운 희망 속에 살고 있으며 이념 분쟁과 인종간의 갈등 속에서도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시간 사용

수면 부족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 동기 부족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 공급 부족으로 인한 영적 피로가 총체적으로 덮쳐 오면 무력한 체념에 빠지고 짜증이 늘며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건강치 못한 장기적 시간 사용의 단적인 예다. 그토록 인기 좋고 감화력 있고 창의적인 사역자가 몇 년 만에 짜증 많고 공허하고 기계적이며 피곤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교인들에게는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정작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되뇔 뿐이다. 교구의 희망이요 교단의 꿈이던 많은 사역자가 분노와 실망에 빠진다. 가정을 지키려 직위에 매달리는 이들도 있고 새 삶을 찾아 다른 분야로 떠나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이것은 다소 예외인 경우다. 이보다 훨씬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건강치 못한 단기적 시간 사용이다. 단기적 시간 사용이란 사역자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문제다. 사역자에게는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일하는 중인지 쉬는 중인지 분간이 어려운 생활 방식도 있다.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사역자는 어떤 면에서 보면 항상 사무실에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기에 한시도 업무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가장 엉뚱한 시간이 휴식 시간이 된다. 일하는 곳이 곧 먹고 자고 놀고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히 시간 개념이 아주 모호해진다.
그 결과, 사역자는 특별히 고되게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푹 쉬는 것도 아니면서 밤낮 없이 늘 바쁜 것 같은 기분에 젖게 된다. 미리 정해진 활동도 있지만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많다. 이런 사역자는 몇 시간 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알 도리가 없다. 이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에게 심한 좌절을 안겨 줄 수 있다. 만족감이 없다 보니 '더 잘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자투리 시간까지 바쳐 일에 매달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결과는 자신에 대한 실망만 커질 뿐이다.
낮과 밤, 일과 쉼, 의무와 취미의 구분이 흐려질 때 삶은 리듬과 방향을 잃는다. 이런 '건강치 못한 삶'은 사람을 시간의 주인이 아닌 피해자가 되게 함으로써 결국엔 영성과 창의력을 말살시킬 수 있다. 이런 사역자는 항상 바삐 뛰고 있을 뿐, 걸음을 멈추고 그 바쁜 삶의 의미와 효율을 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다.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다. 바쁘고 피곤한 삶과 유용하게 쓰임받는 삶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겁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특히 독신 성직자의 경우에 더 심하다. 일례로, 신부는 집을 떠나 출근하지도 않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퇴근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 입장에서 보게 해줄 사람이 없는 셈이다. 그는 언제나 집에 있으면서도 한시도 집에 있을 때가 없고, 언제나 일터에 있으면서도 한시도 일터에 있을 때가 없다. 시간이나 활동에 전혀 구분 없이 언제나 성의를 입고 있다. 이런 건강치 못한 단기적 시간 사용은 머지 않아 만성 피로와 만성 권태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마디로, 건강한 시간 사용은 사역자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사역자로서 그의 인생의 장기적 성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루하루 삶의 창의력과 영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기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라

1. 기도의 첫 번째 장애물은 야고보서 4:2에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너희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기도의 두 번째 장애물은 야고보서 4:3에 제시되어 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너희 정욕에다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목적은 기도로부터 능력을 제거시킨다. 대단히 많은 기도들이 이기적이다.

3. 기도의 세 번째 장애물은 이사야 59:1,2에 제시되어 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뉘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고 했다. 죄는 가장 강력하게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4. 기도를 막는 네 번째 장애물은 에스겔 14:3에 있다. 인자야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 속에 우상들을 세워 놓고 그들의 얼굴 앞에 그들의 죄악의 방해물을 놓았으니 그들로 내게 조금이라도 묻게 하랴고 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 즉 우리 마음을 가장 많이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 마음 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명성이나 사업을 우상으로 삼는다. 명성이나 사업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가 결정해야 할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첫째이신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아내나 자녀나 명성이나 사업이나 우리 자신의 삶보다 먼저인가 하는 점을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기도는 상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흔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가 우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시며 나아가서 우리의 기도가 왜 응답받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버리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5. 기도의 다섯 번째 방해물은 야고보서 1:5-7에 제시되어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주실 것이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 그 사람은 주께로부터 어떤 것이든 받으리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기도는 불신앙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주님을 의심하는 것은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가 우리의 사악한 불신앙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필요를 아뢰지만 실제로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보기도에 대하여

● 하나님의 부르심
① 예배자로 부르심
② 중보기도자로 부르심 - 주님이 동역자로 부르심
③ 영적전쟁하는 자로 부르심
④ Mission으로 부르심

1. 중보기도의 정의
①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지시를 받아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
② 성부 성자 성신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
③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2. 전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3. 의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즉 세계선교를 이루시는데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위탁이며 동역의 의미이며 우리에 의해서 스스로 제한 받으시기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중보기도를 사용하신다.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은 지연될 수 있다.
Prayer makes God's Power available!

4. 중보기도자의 위치
① In the gap 하나님과 결렬된 틈에 들어가서
② On the wall 멀리 바라보며 영적인 꿈을 안고
③ In the battle 영전전투장에서

5. 효과적인 기도
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위탁된 마음으로 믿음의 기도를 한다.
②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③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④ 연합하여 기도
⑤ 기도의 능력을 위해 거룩함을 힘써야 한다.
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⑦ 창조적으로 기도
⑧ 생명을 다해 기도

6. 기도의 영역
① 7가지 영역:정치, 경제, 가정, 종교, 교육, 언론, 예술
② 9가지 권역:공산권, 불교권, 힌두교권, 모슬렘권, 대도시권, 25세 미만의 청소년층,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미전도족속, 소외되고 가난한 층

7. 내용
위와 같은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듣도록 기도하며 타락한 그 부문과 그들이 어떻게 회복되기를 원하시는지 성령에 민감하여 기도하며 연구를 통하여 더욱 깊고 넓게 기도해야 한다.

중보기도의 싸이클

1. 기도의 출발점(point of start)
기도의 출발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머물러 있음으로 기도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백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출발하는 게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2. 필요를 보는 시점(point of needs)
이제 무엇이 필요한지를 하나님께 듣고 나면 비전을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가운데 부어 주시는 시간입니다.

3. 믿음의 시점(point of faith)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할 때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있는데 이를 믿음의 시점(point of faith)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 것에 대해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에 대한 확신과 평강과 기쁨이 있어서 더 이상 간구가 아닌 감사를 하게 됩니다.

4. 응답된 시점(point of answer)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하나님이 기도를 성취하십니다. 이젠 실제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뉴스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응답된 시점(point of answer)입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에 대해서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중보기도를 할 때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사이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내가 기도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국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중보기도를 시작할 때 높은 성벽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중국을 위해서 어떻게 행하실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떤 영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필요를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필요를 보았을 때 그때부터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느 시점에 그 기도가 응답되리라 믿어지게 되면 더 이상 간구하지 않고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역사 안에서 그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에게 그것을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중보기도 할 때에 나타나는 중요한 사이클이고 멀리 보기 위해 높은 성벽에 올라가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위한 원칙들

1.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히 그 분을 예배하는 노래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대하20:22 그 노래와 찬양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원수를 치게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2. 아직 고백하지 않은 숨은 죄가 있는지 보여 주시도록 성령님께 시간을 드림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앞에 정결한지를 점검하라.
시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139:23-2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3. 성령님의 도우심과 조명하심이 없이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4. 원수를 강력하게 대적하라.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이름으로 공격하라.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5. 무엇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담감이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버려라.
잠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지니라
시55:8 여호와의 말씀에 네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6. 이제부터 갖게 될 놀라운 기도 시간에 대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성품에 합당한 일만을 행하실 것입니다.

7.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를 갖고서 잠잠히 그 앞에 귀 기울이며 기다린다.
시81:11-13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미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8. 순종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생각대로 행하라.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시32: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기도의 방향을 인도하시거나 확신을 주시고자 할 때를 대비해 가능한 한 성경을 펴놓고 기도하라.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기도할 제목을 주시지 않으시면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기도를 마친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칭의와 성결

칭의는 구원의 첫 번째 순간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가 모든 지은 죄와 죄책으로부터 용서받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져 죄인이 하나님께 가납됨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하나님과 원수관계가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적 교제의 대상으로 용납된다. 그러나 죄인이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생이다.
루터나 칼빈의 신학에서는 칭의가 강조된다. 그러기에 믿는 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되었지(imputed), 아직 분여(imparted)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외래적 의(alien righteousness)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나 웨슬레에게는 칭의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이지만, 관심의 초점은 칭의된 자의 삶 속에 역사하는 성령에 의한 실제적 변화에 놓여진다. 이 변화는 중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결을 향해 성장한다. 이 둘은 모두 중요하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편파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와 카톨릭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의로와진다고 하는 교리를 루터만큼 잘 쓴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성화 교리에 대하여 루터처럼 무지하고 혼돈된 자가 또 있을까? 반면에 로마 카톨릭 저술가들이 성화에 관하여 얼마나 강력하게 성서적으로 썼던가? 그러나 그들은 칭의문제에 대하여 아주 무식했다.

칭의는 온전한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다. 웨슬레는 이 점을 감리교도들에게 분명히 주지시켰다.

사람이 칭의되는 동시에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될 때 그는 거듭난 것이며, 성령으로 낳기 때문에(어느 사람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성화의 전체과정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화에 들어가는 문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 일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메도디스트들에게 충분한 이해를 주셨다.

그러면 칭의와 성화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에 대하여 와일리(Orton Wiley)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홉 가지 점에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였다.

1. 칭의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for us)하신 사역과 관계되며, 성화는 넓은 의미에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in us)하신 사역과 관계된다.

2. 칭의는 하나님의 마음 속의 사법적 행위이며, 성화는 신자의 마음 속에 이루어진 영적인 변화이다.

3. 칭의는 상대적 변화로서 정죄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며, 성화는 죄로부터 성결로의 내적인 변화이다.

4. 칭의는 자범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며, 성화는 원죄 또는 타고난 부패성으로부터 마음이 온전히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5.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고, 성화는 죄의 세력을 파괴한다.

6. 칭의는 범한 죄의 형벌을 면제하고, 성화는 선행(덕)의 영광스런 상급을 준비하여 준다.

7.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는 것이요,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8. 칭의는 천국 시민의 자격을 주고, 성화는 천국 시민으로서의 적합성을 준다.

9. 칭의는 논리적으로 성화에 선행한다. 그리고 낮은 의미 즉 초기의 단계의 성화는 칭의와 동시적이다.

양자됨(Adoption)

1. 양자됨의 의미
로마의 양자법의 원리는
① 양자가 되면 그가 가졌던 옛 가정에서의 권리는 다 잃어버리며 그 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된다. 이전의 권리가 하찮은 것이든 굉장한 것이든 일단 다른 집의 양자가 되면 그 모든 이전의 권리는 포기해야만 한다.
② 법률상으로 입양된 양자는 옛 가정에서의 권리뿐 아니라 의무에서도 완전히 해방된다.
③ 양자는 이전의 종이었든 양반이었든 거지였든 부자였든 상관없이 새 아버지의 지위를 갖게 된다.
④ 양자는 새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새 권리를 누리며 동시에 새 의무에 매이게 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적용해보면 양자됨은
① 관계의 연결이다. 타락한 죄인인 우리들은 관계로 연결되게 된다.
② 본성의 연결이다. 본질로서는 여전히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짐으로써 관계 회복을 이룰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③ 사랑의 연결이다.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 보장되는 변치않는 사랑의 연결인 것이다.

2.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두려움을 느끼는 노예로 만드는 영이란 뜻으로 이는 실제로 이러한 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께서 양자의 영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양자의 영이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양자의 영은 다른 말로 말하면 신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러한 양자의 영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양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원수된 대역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법적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감히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버지란 뜻을 지닌 아람어로서 특별히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굳이 아바 아버지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이 예수와 같은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3. 양자의 특성 및 특권
①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진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② 이제 소속이 바뀌어 종의 신분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이 된다.
③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④ 하나님의 영은 우리들 속에서 자녀의 성품을 길러준다.
⑤ 하나님의 아들들은 더 이상 육신의 채무자가 아니다. 우리와 그것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이해 관계도 없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성령께 빚진 자이다.
⑥ 하나님의 양자된 우리들은 영의 부활의 특권을 누린다.
⑦ 미래의 영광에 대한 자격, 즉 육체의 부활을 누리며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점진적 성결과 순간적 성결

1. 점진적 성결
웨슬레는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성장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죽음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어느 기간동안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는 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그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느 기간 서서히 죄에 대하여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느 기간 서서히 죄에 대하여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그의 영혼을 떠나가는 그때까지는 그는 아직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죄가 그의 영혼을 떠나는 그 순간 그는 사랑이 충만하고 풍성한 생을 살기 시작한다…그러나 이와같은 변화 후에도 그는 은혜 중에 계속 자라가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계속 성장한다.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랄뿐 아니라 영원히 계속 자란다.

점진적 성결은 구원의 과정과 성장을 강조한다. 구원은 최후의 칭의(궁극적 구원)를 얻기까지 성장해 가는 과정이 있다. 즉 선행적 은총에서부터 깨닫는 은총(회개)으로, 칭의의 은총으로, 성화의 은총으로, 그리고 영화의 은총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은 현세에서는 성결을 목표로 그리고 궁극적 구원을 최종목표로 하여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성장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구원은 인간이 계속적으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정인데 각 단계는 상이하고 보다 높은 형편을 표시한다. 구원을 성화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적 성화(칭의), 초기의 성화(중생), 점진적 성화, 온전한 성화(성결,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순서로 성장한다. 계속적으로 발전할 여지가 없는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성화되었다 할지라도 계속하여 은혜 중에 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으며 퇴보한다. 신앙의 현상유지는 이미 침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점진적 성결은 또한 인간의 신앙적 응답과 순종을 강조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이 그 은혜에 호의적으로 응답할 때에 구원이 가능해진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빌1:6),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빌2:13),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한다(빌2:12).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앙의 투쟁기간이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과 말씀에 따라 사는 헌신이 특별히 요청된다. 신앙의 태만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상실할 수 있고, 불복종으로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인간의 응답과 협력은 구원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2. 순간적 성결
웨슬레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 중에 두 개의 순간적인 체험이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중생이며 이것은 초기의 성화이다. 다른 하나는 온전한 성화 즉 성결이다. 중생 이후에 성화의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죄성이 정결케 되며(소극적 성결),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사랑의 충만을 입으며(적극적 성결), 봉사의 능력을 얻어 승리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중생은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함을 얻으며, 성결은 죄의 근원, 죄의 뿌리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온전히 성화된 신자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이 두 단계는 모두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웨슬레가 완전 성화에서 순간적 단계를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점진적 성화와 달리 순간적 성화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대속적 공로가 되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시므로 완전성화는 이루어진다.
순간적 성결은 성결의 체험뿐만 아니라, 성결의 유지도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 가능함을 교훈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축적된 저장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순간 순간 주어진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순간 순간 의지함으로 성결의 상태를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결의 체험도 순간적이며, 성결의 유지와 성장도 순간 순간 주어지는 은혜의 역사이다.
웨슬레는 점진적 요소와 순간적 요소는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함께 강조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설교에서 이 두가지를 다 강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신자들이 점진적인 변화로 성장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인 변화도 강하게 주장해야만 합니다.” 터너(George Allan Turner)는 웨슬레가 후기에 순간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 영국에서 점진적 성화가 강조된 반면에 순간적 성화는 무시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분명히 웨슬레가 순간적인 성화를 더욱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동시에 점진적 성화도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린드스트롬(Harald Lindstrom)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중생과 성화는 그의 구원론에서 전반적으로 유기적 관련이 전혀 없는 두 개의 독립된 현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웨슬레는 중생도 완전 성화도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 순간적인 요소에만 주의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웨슬레가 구원을 또한 점진적인 발전과정으로 파악한 사실은 간과되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점진적인 발전에 대한 사상은 그의 구원관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의 전체사상에서 특출한 요소이다. 점진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는 결합되어 있는데, 이것이 웨슬레 특유의 구원의 순서이다.

성결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욱하라”(벧전1:16)고 하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하셨고,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3:10)가 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거룩(성결)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곧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성결이다. 웨슬레는 성결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문)‘성화된다’함은 무엇인가?
답)진리에서 나온 의와 성결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 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요, 마음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선물, 우리 영혼의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롭게 인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저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따라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e)은 하나님의 영광(glory)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고전11:7;고후3:18;8:30).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을 좇아 창조된 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요 면류관이었다. 인간은 피조물 중에서도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의 그림자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고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함과 함께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되었다(롬3:23).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이 땅에서는 다만 도덕적 형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형상을 셋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영-인격적, 지적, 불멸의 영-이심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런 영을 받음으로 지적이고 영원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둘째로 신적인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 통치권이 인간에게 이양됨으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게 되었다. 셋째로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이는 정결, 의, 사랑, 자비, 진실 등의 도덕적 성품이다. 타락과 함께 모든 형상이 상실되었으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해 자연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도덕적 형상은 성결의 은혜에 의해 회복된다. 도덕적 형상은 이 땅에서 온전히 회복되지만 나머지 형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영화의 은총에 의해 온전히 회복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종말론적인 주제이다.
도덕적 형상이 회복된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된다. 그의 마음과 영혼은 맑고 정결하며, 의로움, 거룩함, 사랑과 자비, 성실, 겸손, 정의로움 등이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그는 하나님과 계속적인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언제나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게 된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된다(창5:22-24;6:9;17:1;신18:13).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되며”(히11: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우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엡5:1).

구원의 순서

1. 선행은총(선재은총, 예비은혜, Prevenient Grace)
넓은 의미에서 구원은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한다.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첫 단계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우리 영혼에 처음으로 적용되는 은총의 첫 여명이다. 웨슬레는 “구원은 이른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술어인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원죄로 인하여 완전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을 전혀 받지 않은 순수한 자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의식하건 못하건 하나님의 은총은 이미 그에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회복해 주신 능력이다. 선행은총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속죄이며, 성령은 선행은총의 사역자이다.
선행은총의 영향으로
① 인간이 지닌 원죄의 죄책이 이미 사해졌으며
②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③ 어린아이의 구원이 가능해졌으며
④ 인간의 이성도 어느 정도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었으며
⑤ 따라서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과 요구를 깨닫게 되었고
⑥ 타락으로 부패되었던 양심이 회복되었으며
⑦ 의지의 자유도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웨슬레는 선행은총의 증거는 양심이라고 보며, 양심과 선행은총을 동일시 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적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된다는 의미에서는 자연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양심은 초자연적 은사이다. 초자연적 은사로서 양심의 기능은
① 우리의 기질과 생활, 사고, 언어 활동의 본성과 본질을 통찰하고
② 우리 행동의 기준을 깨닫게 하고
③ 그 기준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깨닫게 한다.
즉 양심은 선악에 관한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이 양심의 빛은 그것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까지 점점 더 밝게 빛날 것이다.
구원의 시작이 선행은총이라면, 선행은총의 목표는 구원이다. 그러나 선행은총은 어디까지나 넓은 의미의 구원의 시작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구원 사건을 일으키는 은총은 아니다. 그것은 죄인에게 최초의 각성(awakening)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각성은 죄인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여 준다. 이 점에서 선행은총은 구원과 관계된다. 구원의 과정에서 선행은총의 역할을 요약하면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자유의지의 참여 등이다.

2. 회개(깨우치는 은혜, Convincing Grace)
웨슬레에게 회개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회개는 칭의 이전의 회개요, 두 번째 회개는 칭의 후의 회개이다. 칭의 후의 회개는 성결을 얻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순서상 칭의 전의 회개를 살펴 보겠다. 웨슬레는 회개를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하였다. 선행은총에 의해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발견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회개이다. 그러나 동시에 악행을 중지하고, 선행을 행하는 것도 회개에 속한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두 단계가 있다.
① 율법적 회개(legal repentance):율법에 의하여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② 복음적 회개(evangelical repentance):죄를 때달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과 생활의 변화이다.
전자는 회개의 소극적 면이고, 후자는 회개의 적극적 면이다. 죄인을 이러한 회개로 인도하는 이는 선재은혜에서부터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율법과 복음을 사용하여 죄인을 회개케 하신다. 즉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을 통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을 희망하게 하신다.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며, 그러므로 회개를 “성령의 깨우치는 은혜”라고 부른다. 인간의 회개의 행위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회개의 행위가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웨슬레도 감리교회의 세 가지 큰 교리를 말할 때 회개, 신앙, 성결이라고 하여 회개를 제일 먼저 말하였다. 회개는 기독교의 대문이며, 신앙이라는 현관문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웨슬레는 “우리의 의가 되신 주”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회개가 없이는 구원의 문인 믿음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을 믿기 전에 회개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단절하고, 자신의 의에 대한 신뢰를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뢰를 가질 수 없다.
웨슬레는 회개와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하였다. 이것 때문에 그가 구원에서 선행을 강조하는 카톨릭적 입장으로 선회하였다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레의 주장은 신앙과 마찬가지로 회개도 그것이 참된 회개라면 그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열매를 맺듯이, 참된 회개도 자연히 열매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카톨릭과 구분된다. 동시에 신앙 지상주의를 주장하다가 도덕 무용론(율법 무용론, antinomianism)에 빠진 당시의 루터파와 칼빈파의 오류를 피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신앙이 구원의 단 하나의 조건이지만 회개와 회개의 열매로서의 선행은 구원의 신앙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선행은 칭의 이전 뿐만 아니라 칭의 후에도 계속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행은 신앙을 낳지 못하지만, 신앙은 선행을 낳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 웨슬레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우리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명령하신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고의적으로 배격하며, 우리가 칭의 받으리라는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와 이에 합당한 열매는 어떤 의미에서 칭의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과 같은 의미나 정도로 필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절대로 같은 정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열매들은 조건적으로 즉 그것을 위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는 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이 없이는 칭의 받을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즉 신앙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신앙은 성화를 위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필요하다.

3. 믿음
웨슬레는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믿음만이 구원(칭의, 중생, 성결)의 유일의 길임을 깨닫고서 일평생 이 원칙을 고수하고 전파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50여년 전에 나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도리에 대하여 그 전보다 더욱 분명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여기에 대하여 추호의 변함도 없다.…나는 지금 무덤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직도 그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신앙에도 여러 종류의 신앙이 있다. 그는 “신앙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신앙의 종류를 분석하였다. 최저의 단계의 신앙은 유물론자(materalist)의 신앙이다. 이는 우주에는 물질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다. 다음으로 이신론자(deist)의 신앙이다. 이는 이성에 기초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연신론자들의 신앙이다. 다음은 이교도(heathens)들의 신앙이다. 그 다음은 유대인의 신앙인데 율법 전수 이후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유대인의 신앙이다. 다음은 세례 요한의 신앙인데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아래에서 그에게만 주어진 신앙이었다. 다음은 천주교회의 신앙인데 이들의 신앙은 고대 유대인의 신앙보다 나은 것이다. 카톨릭의 신앙보다 나은 신앙이 바로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이다.
카톨릭의 신앙이건 개신교의 신앙이건 주의해야 할 점은 그 신앙이 단순한 지적 동의일 경우에는 회교도나 이교도들의 신앙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가룟 유다도 이런 정도의 신앙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종의 신앙일지라도 적어도 지적 동의의 수준은 넘어서야 하고, 더 나아가 아들의 신앙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이해해야 할 것은 종의 신아(faith of a servant)과 아들의 신앙(faith of a son)과 구원과의 관계이다. 부흥운동의 초반기에 웨슬레는 “거의 다 된 것 같은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란 설교에서 종의 믿음과 아들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종의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한 자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788년 임종 3년 전에 행한 설교 “신앙에 대하여”에서는 그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 정도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믿음이라면 진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께 용납된 자라고 하였다.
웨슬레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도 종의 신앙을 가졌을 때는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였으며, 영적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나와 자유인이 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율법의 멍에를 짊어진 율법의 종이었으며,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의 심령 즉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1738년 1월 29일 일기에 “나는 아직 회심하지 못하였다(was never converted myself to God) …나는 진노의 자식(a child of wrath)이다”라고 스스로를 판단하였다. 그러나 1777년 출판된 전집에서는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여 주를 달았다. 즉 “나는 이에 대하여 확실히 모르겠다.…나는 당시에 아들의 신앙은 아니지만 종의 신앙은 가졌다.…나는 그렇게(진노의 자식이라는 것) 믿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신앙에 대하여”에서 그는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악마의 자녀로 규정하여 그들을 슬픔 속에 빠뜨린 것은 메도디스트 설교자들의 잘못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종의 신앙이 구원이 신앙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는 동시에 구원의 확신(영의 증거)과도 관계되어 웨슬레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선물이므로 우리가 그 선물의 내용 또는 정도나 질에 관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신앙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선물로서의 신앙은 영적이 것이며, 고백으로서의 신앙은 인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 교제를 가지고 있다면 구원받은 자 임에 틀림없다. 신앙의 고백은 이러한 인격적 관계의 이성적 표현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신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고백의 미숙, 또는 구원의 확신의 유무가 구원의 신앙에 대한 판단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종의 신앙에 대한 웨슬레의 견해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되리라 본다. 중요한 것은 인격적 관계이며, 이는 성장하고 성숙한다. 그러므로 종의 신앙을 가진 자는 더욱 더 성장하여 아들의 신앙을 가져야 하며, 아들(자녀)의 신앙을 가진 자는 어른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롬1:17) 계속 나아감이 중요하다. 구원의 신앙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며, 인간의 논리적 기준으로는 가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4. 칭의의 은혜(Justifying Grace): 중생(초기의 성화)
칭의는 진정한 기독교인의 출발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구원은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실제로 죄인이 구원의 문 안에 들어서는 것은 칭의의 은혜부터이다. 따라서 웨슬레도 “구원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태어남으로 이 세상의 삶을 시작하듯이 칭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시작이다. 구원을 칭의와 분리할 수 없음은 삶이 출생과 분리할 수 없음과 같다. 그러나 구원은 칭의보다 훨씬 넓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웨슬레에게 구원은 칭의와 함께 성화의 개념을 전제한다.
신앙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게 됨과 동시에 신자는 중생하고 또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된다. 즉 칭의는 언제나 중생과 양자됨을 동반한다. 이 셋은 사실은 하나의 사건이고 동시적인 사건이다. 다만 논리적인 순서로만 구분하여 설명할 따름이다. 웨슬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칭의와 중생이 시간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지만, 이 둘은 대단히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아니다. 칭의는 다만 관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중생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를 의롭다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for us) 일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in us) 일하신다. 칭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외적 관계를 변화시키고, 중생은 우리 영혼의 깊은 속이 변화되어 죄인이 성도가 되는 것이다. 칭의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에 복귀시키는 것이다.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요, 중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칭의의 개념은 “죄의 용서”이다. 중생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인간 심령 속에 일으키시는 큰 변화이다. 이것은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 나는 것이다.”
웨슬레는 “성령으로 나는 것”(born of the Spirit)과 “양자의 영을 받는 것”(having the Spirit of adoption)을 동일시하였다. 양자됨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칭의되고 거듭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도 함께 소유함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잃어버렸던 자녀의 명분과 특권을 되찾게 됨을 의미한다.
칭의에서는 죄책이 소멸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고, 중생에서는 영적인 새 생명이 주어지면서 새 본성이 주어지고, 양자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법적인 신분과 함께 권한이 주어진다. 칭의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지고, 중생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사역하시고, 양자됨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칭의, 중생, 양자 이 셋은 곧 최초의 구원의 은혜, 최초의 구원의 축복, 그리고 최초의 실제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성결은 두 번째 은혜, 축복, 그리고 변화라고 한다.
신학적인 설명에서는 칭의가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신자의 신앙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서는 중생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의 사건이며 동시적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별 문제는 없다. 그리고 칭의, 중생, 양자됨 이 셋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는 회심(Conversion)이라고도 한다.
성결은 칭의되고 중생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칭의는 관계적 성화에 속하고, 중생은 실제적인 변화의 시작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 사실상 성화의 첫 단계이다. 이것을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라고 한다. 중생은 초기의 성화와 동의어가 된다. 우리가 진정한 신앙을 가질 때 의로와지고(칭의), 거듭나게 되며(중생), 그와 동시에 초기의 성화가 시작된다. 이것을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였다.
우리가 칭의되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순간에 성화가 시작되는데, 우리가 다시 나며, 위로부터 나며,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그 순간에 관계적 변화 뿐만 아니라 진정한 변화가 생기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5. 구원의 확신: 영의 증거
웨슬레는 우리가 구원 얻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칭의되고 중생하고 성화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 확신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에게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토대로 하여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많은 학자들은 웨슬레 신학이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성결론과 확신의 교리를 들고 있으며이는 “메도디스트가 교회의 생활과 사상에 준 근본적인 공헌”이라고 하며, 어떤 신학자들은 확신의 교리가 웨슬레 신학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영의 증거에는 성령의 증거와 나 자신의 영의 증거가 있다. 이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께서 먼저 나의 영혼에게 나의 구원을 확신시켜 주시면, 그 다음에 나의 영혼은 나 자신에게 구원을 확신시켜준다. 이와같이 성령의 증거가 언제나 선행한다. 성령의 증거를 영의 직접 증거라고 하고, 나의 영의 증거는 성령의 증거를 받은 후에 주어지므로 영의 간접 증거라고 한다. 또한 성령의 증거를 객관적 증거, 나의 영의 증거를 영의 주관적 증거라고 한다.
영의 증거는 우리가 칭의되었음을 확신케 하고 또 성화되었음도 증거하여 준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사람이 성결의 은혜 곧 내적 부패성으로부터 정결케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 우리는 이를 성령의 증거와 열매에 의해 알 수 있다. 우리가 칭의됨을 얻었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고 증거하셨듯이, 우리가 성결함을 받았을 때도 또한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의 (내적) 죄가 씻음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6. 은혜 안에서의 성장(growth in grace)
성경과 우리의 경험은 함께 구원은 즉각적이기도 하며 또한 점진적이기도 함을 보여 준다. 이 구원은 우리가 의롭다 함(칭의)을 받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점차로 성장한다.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성장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칭의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고, 중생에서 죄의 세력이 정복되고 억제되지만, 아직 완전 소멸된 것이 아니다. 옛 본성이라고 하는 죄의 뿌리, 죄의 경향성이 남아서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중생한 신자는 완전 성화(성결)의 은혜를 통하여 잔존하는 악의 성질을 완전히 몰라내어야 한다. 중생에서 성화가 시작하며(초기의 성화), 은혜 안에서 성장하다가(점진적 성화), 잔존하는 죄성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사랑의 충만을 얻는 완전 성화의 단계까지 계속 성장하여야 한다.
이와같은 성장의 과정을 웨슬레는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어린아이, 청년, 어른의 단계로 설명하였다. 즉
① 어린이들(little children)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며
② 청년들(young men)은 중생 후에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요
③ 어른들(adults,fathers)은 성결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한 성도들이라고 해석하였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장의 과정이지만, 이 기간에 신자는 무수한 영적 싸움을 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 또는 신앙의 고저, 기복 또는 현상 유지의 과정을 교대로 겪을 수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은총에 대한 의지와 응답”이다. 웨슬레 신학은 은총의 신학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어느 과정이든지 그것은 은총에 의하여 이르렀고,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은총에 대한 의지와 함께 인간의 적극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지의 복종이 중요하다. 처음 인간이 의지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사탄에게 복종함으로 타락하게 됨과 같이, 지금도 인간은 의지의 자유가 누구에게 순종하느냐, 그 대상과 방향이 중요하다. “은총 더하기 응답은 곧 성장이 된다. 이것이 웨슬레 신학의 공식이다”는 하퍼(Steve Harper)의 말은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있는 신자에게 꼭 필요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에 굳게 서서 항상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성장이 이루어진다. 웨슬레는 이러한 성장 과정 중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확실히 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가 지배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죄라도 허용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리스도는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죄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는 신자의 마음 속에는 그 마음이 아직 성전에서의 결례-그리스도인 완전-에 의하여 정결하게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그 안에 계시고 또한 머물러 계실 것이다.
여기서 미리 알아야 할 것은 “은총 안에서의 성장”은 완전 성화가 성장의 종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성화의 은총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완전 성화는 현세에세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이룬 단계이지만, 아직 궁극 구원(최후의 칭의)의 단계를 남겨 놓고 있다. 그 때까지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 성도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면서, 자기 결단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신자는 계속적인 주체적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한 순간이라도 떠나면 그의 완전은 유지될 수가 없다. 즉 믿음과 회개의 계속 결단과 은총의 동적인 역사로 성도는 성결의 상태에서 상승적으로 성장한다. 이는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을 향한 성장”(growth toward perfection)이다.

7. 성화의 은총(Sanctifying Grace)
죠지 셀(George Cell)은 성결론을 중심으로 한 웨슬레의 구원론에 관하여 “프로테스탄트 은총의 윤리와 카톨릭의 성결의 윤리의 필요한 종합”이라고 하였다. 피터스(John L.Peters)는 셀의 진술에 대하여 “셀보다 더 적당하게 진술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비록 카톨릭의 전통은 목표를 시사하고, 개신교의 역설은 동력(dynamic)을 마련한다는 말을 첨가할 수 있기는 해도 말이다”라고 하였다. 초대 교회부터의 목표였던 성결이 은총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웨슬레의 주장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현세 구원의 완성인 성화도 당연히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은총이다.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일반적으로 성령의 세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이해되고 있다. 윌버 데이톤(Wilber T.Dayton)은 완전 성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는데, 이것은 필자에게 가장 흡족한 정의이다. “완전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인데, 이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이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되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성결에 관한 또 하나의 명칭에 불과하며, 동일한 사실의 두 다른 낱말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결한 자는 완전한 자이다. 또는 이것은 사람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완전 성화는 사람의 속에 있는 죄의 뿌리, 내재하는 부패성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이다. 칭의와 중생에서는 속죄로 인한 죄책의 용서가 주어진다. 이는 인간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죄의 용서이다. 그러나 죄의 뿌리, 부패성은 변화는 시작되었고, 더 이상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신자 안에 남아 있다. 성화는 성령에 의해 이 악한 본성이 정결케 되는 사건이다. 완전 성화는 모든 죄(원죄, 자범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완전 성화는 죄로부터의 구원의 완성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완전 성화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엡4:24)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요, 마음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남을 얻은 사람의 마음의 거룩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서, 영안을 갖춘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모든 죄가 정결케 되고, 하나님의 형상(도덕적 형상)을 따라 새로워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이란 사랑에 배치되는 그릇된 성품이 그 영혼 속에 남아 있지 않으며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완전의 본질이다. 이 사랑의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웨슬레에게 구원의 순서는 바로 이런 완전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결, 성화, 또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가 말하는 현재적 구원의 최종 목표이며, 신앙생활에서 이보다 더 높고 귀한 것은 없다. 그의 구원관은 이와같은 목표를 향한 점진적인 상승이라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완전 성화는 웨슬레 신학에서 “모든 것의 핵심”이며, “웨슬레 신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창문”이다.

8. 영화(Glorifying Grace)
웨슬레의 목적론적인 구원관은 현세의 완전 성화로 끝나지 않는다. 성결한 성도는 은혜 안에서 더욱 성장하면서 최후의 칭의 즉 영화를 목표로 하여 나아간다. 이 점에서 웨슬레의 구원관은 종말론적이다. 영화는 성결의 최종 단계이다. 이것은 죽음 이후 부활의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활의 완전”(resurrection perfection) 또는 “최종적 완전”(final perfection)이라고도 한다. 이 때에 성도는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final justification)을 얻으며, 궁극적 구원(final salvation)을 얻게 된다.
영화의 은총에서는 아담이 낙원에서 누렸던 것보다 훨씬 탁월한 성결과 행복의 순수 상태를 이룰 것이다. 그 때에는 죄로 인한 모든 결과들-제한성, 연약성, 무지, 실수, 유혹-로부터 해방을 받으며, 다시는 죽음이 없는 온전한 삶이 계속될 것이다. 웨슬레는 영화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이 모든 것보다 엄청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과의 깊고 내밀하고 중단없는 연합이, 성령을 통한 성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끊임없이 친교가,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그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의 다함없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웨슬레의 구원론에서 성결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성결은 과거의 죄(원죄, 자범죄)에 대한 완전한 해결과 함께 미래의 구원의 조건이며 희망이다. 죄의 용서와 하늘나라는 모두 성결과 관련되어 있다. 웨슬레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용서, 성결, 하늘(나라)를 연합시켰다.…나는 성령으로 완전 성화되어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지체없이 올라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와일리(H. Orton Wiley)는 “칭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지만, 성화는 천국에의 적합성을 준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성결은 기독교인의 오늘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결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오늘, 여기”에서 이미 성결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이자 미래인 것처럼 성결도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적이다. “오늘, 여기”에서 성결의 은혜를 경험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자는 “내일, 저기”에서 영화의 은총 가운데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현재적 성결은 과거의 죄의 해결과 현재와 미래의 행복의 원천이다.

성결과 유지와 성장

성결한 성도도 신앙의 시련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영적 침체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연단하여 성장시키신다. 성도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시험(test)과 시련이 주어진다. 이러한 시련을 당할 때 성도는 잠깐 근심하게 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기 때문이다(벧전1:6,7). 성도들은 자신을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해야 한다”(벧전4:12,13). 이러한 시련과 징계를 통과하여 승리한 성도는 더욱 온전해진다.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성서는 약속하고 있다(벧전5:10).
또한 성결한 성도라도 마귀의 유혹(temptation)을 계속적으로 받는다. 그러므로 완전자라 할지라도 사탄의 덫을 무시할 수 없다. 사탄에게는 휴전도 없으며, 자비는 더군다나 없기 때문이다. 유혹은 우리 마음 속의 죄성도 아니요, 죄를 꼭 범해야 하는 필연성도 아니다. 그러나 성도의 신앙 생활에 적대적인 세력이요, 위험 요소이다.
이와같이 온전히 성결한 성도일지라도 시련과 유혹을 받으며, 심지어는 다시 타락할 가능성도 있다. 마귀의 유혹에 이끌려 항복하면 성결한 성도도 타락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의 연단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앙의 퇴보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어떤 때는 신앙의 위대한 승리 후에도 경계를 게을리하며 방심하거나 또는 자만하여 넘어지는 성도도 있다.
그러므로 성결한 성도에게는 성결의 유지와 계속적 성장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웨슬레가 고심하였던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결을 고백한 성도들이 그 신앙 안에서 계속 성장하거나 또는 그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시 퇴보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웨슬레는 “칭의나 혹은 성화에 도달하여, 그 은혜를 일년간 유지하는 자는 다섯 명 가운데 세 명도 안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완전을 얻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신앙의 유지가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성장은 퇴보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동적인 면에 있으며, 따라서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드(J.A.Wood)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앙 생활에서 정지 상태란 없다. 전진이 아니면 후퇴이다.…성결은 은혜 중에서 성장함이 없으면 보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거룩한 생활을 꾸준히 키워 나감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성결을 얻는 조건과 그것을 유지하는 조건은 동일하다. 성결을 얻고 보존하는 조건은 동시에 성결을 성장시키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성결한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는 조건들을 위반하면 곧 성결 그 자체를 저버리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며 현상 유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정체 즉 침체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퇴보의 전 단계이다. 본 장에서는 성결의 은혜 유지와 계속적 성장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신자가 도달한 성결의 상태가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항상 은혜 가운데 계속적인 성장의 여지가 있으며, 이것이 성결의 은혜를 보존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것을 위한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성결 유지의 중요성
웨슬레는 하나님이 메도디스트를 일으키신 목적이 성결의 도리를 증거하라는 데 있다고 믿었으며, 또 메도디스트회의 확장이 이 교리를 전파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이 차가워지고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저지될 수 없고, 그들에게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려는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결의 복음은 메도디스트의 존재 목적이었으며, 또한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성결의 복음이 강조되지 않거나 성결의 은혜와 신앙이 유지되지 않을 때는 웨슬레의 부흥운동도 약화되었다. 브리스톨(Bristol)에서는 실제로 이것이 증명되었다. 웨슬레는 “나는 브리스톨에 있는 신도회를 조사해 보고서, 지난 10월에 내가 거기를 떠날 당시보다 50명이나 회원이 준 것에 놀랐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조되지 않는 곳에서는 설교자가 아무리 능변이라 할지라도 은혜에서나 청중의 수에 있어서나 증가라고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도 다시 타락하는 실례를 보고서 웨슬레는 현세에서는 타락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결함이 높거나 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이들은 성령의 증거와 열매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하여 그것들을 모두 상실하였다. 이리하여 웨슬레는 성결의 획득도 중요하지만 성결의 유지도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1790년 아담 클라크(Adam Clarke)에게 보낸 편지에 이 점이 다음과 같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겨우 3명 중에 1명 정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유지는 완전한 사랑을 맛본 모든 자들에게 강력하고 분명하게 촉구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교회에 속한 설교자들이나 지도자들 중의 누구라도 이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다면, 그를 설교자나 지도자에서 면직시켜야 한다. 나는 그가 우리의 회중에 머무를 수 있을지 의심한다. 우리의 회중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결의 은혜가 유지되지 않으면 곧 신앙의 퇴보가 이어진다. 웨슬레의 구원관은 점진적인 성장의 과정 가운에 하나님에 의한 순간적인 변화와 고양이 강조되고 있다. 칭의(중생)와 성화의 전후에는 언제나 점진적인 성장이 있다. 성화 이후에도 성도는 궁극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성장은 은혜의 유지가 계속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의 성결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의존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유지가 신앙 성장에 필수적이다. 그것이 유지되지 못하면 성장은 정지되며, 이는 곧 퇴보를 뜻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은 동적이며, 구원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결의 은혜는 보존될 수도 있고 상실할 수도 있다. 성도는 이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경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금 옛 것에 얽매이고 정복당하고 만다. 웨슬레는 성결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위험한 바람이 작은 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작고 눈에 뜨이지 않는 사건을 통해 마귀가 가장 위험하게 침입해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 이전에 한번도 그러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성결 그 자체가 “굳세게 하는 은혜”(establishing grace)이기 때문에 성결의 유지는 당연하며 필수적이다. 성도는 자신의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사도바울은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라고 간구하였다. 웨슬레는 주님의 은혜가 성결을 보존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였다.
그것(성결)은 잃어버릴 수도 있으나 보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국 각처에서 그들의 견실성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약간의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는 결코 요동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은혜가 그대에게 풍족하다. 하지만 그대가 은혜의 유지를 계속 하고자 원한다면 성장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정지 상태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성장의 중요성
성결은 순간순간 받는 은혜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고, 또 성장한다. 우리는 신앙의 퇴보로 그 상태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신앙의 갱신으로 그 상태를 회복할 수도 있다. 성결의 상실을 방지하고, 성결의 유지를 가장 확실하게 하는 방법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미 완전을 이룬 사도 바울도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빌3:12,15)고 하였다. 사도 베드로도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성도들을 권면하였다. 웨슬레는 구원의 과정 곧 칭의와 성결 전후의 성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서는 물론이요 우리의 모든 경험은 구원은 순간적인 동시에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 하나님도 되시고 참 사람도 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룩하고 겸손하고 인자하고 참을성 있는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은 그 순간부터 하나의 겨자씨 모양으로 점차적으로 성장한다. 겨자씨는 원래 모든 씨앗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큰 가지들을 뻗치고, 큰 나물을 이룬다. 또한 모든 죄로부터 마음이 깨끗해지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순결한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이 구원은 성장한다. 또한 그런 사랑까지도 점점 장성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엡4:13).
성결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그 상태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은혜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결한 성도는 회개와 믿음의 계속적인 결단과 역동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상승적으로 성장한다. 이는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growth toward perfection in perfection) 것이다. 이것은 웨슬레 신학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동적인 면과 깊이 (또는 높이)를 잘 나타낸다. 웨슬레는 은혜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당신이 어느 정도 온전한 사랑을 가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심령에 할례를 행하셔서, 당신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 안주하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하며 당신은 정지할 수가 없다. 당신은 올라가든지 아니면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더 높이 올라가든지 아니면 더 낮은 곳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자녀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얻으려고 힘쓰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높이 부르신 그 상급을 위하여 목표를 향해 돌진하라.
은총 안에서의 성장은 온전한 성결 이후에 가장 현저하게 그리고 빨리 성장한다. “왜냐하면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내면적 적대 세력들이 마음으로부터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내재하는 죄성은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일에 최대의 방해물이다. 이 악의 원칙이…파멸될 때 우리의 성장에 대한 주요 방해물이 제거된다.” 웨슬레도 1764년 완전에 관하여 요약하면서 “그것(성결)은 성장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정점에서 머문다거나 진보할 수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 안에서 완전해진 사람은 이전보다 더 빨리 은혜 안에서 성장할 것이다”고 하였다.
온전히 성결한 성도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가에 대하여 우드(J.A.Wood)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설명하였다.
① 마음 속에서 성장을 대적하던 모든 요소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정원에서 잡초를 제거하면 화초가 더 빨리 성장한다.
② 정결한 마음은 그 이전보다 더욱 강한 신앙, 보다 밝은 빛, 생명의 근원에 보다 가까운 자리에 있게 되며 보다 정결한 분위기에 살기 때문이다.
③ 마음이 정결해진 이후에는 성령께서 보다 더 많은 사랑과 능력으로, 밝고 풍성하게 그 마음을 새롭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④ 죄의 소멸은 공의로운 생명으로 하여금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여유를 준다. 정화된 마음은 정결한 도덕적 터전이 되어 의의 나무, 성령의 은혜가 방해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
⑤ 온전히 성결한 마음의 기능과 능력은 전보다 빨리 성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장과 보조를 맞추어 성령의 은혜도 그 풍성함이나 능력에서 증가한다.
⑥ 성결은 영적 건강이며, 그것은 가장 무성하고 균형있게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기형적인 것이나 질병은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건강은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성결 이후의 성장이 성결의 미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결은 완결된 구원사건이다. 즉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되었으며, 온전한 사랑으로 충만함을 얻었다. 그러나 질에 있어서의 완전이 양에 있어서의 확대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정결이 더 이상 순결도가 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규모와 양에 있어서는 무한히 확대하고 성장한다. 사랑도 온전하게 된 후에 더욱 더 풍성해진다. 믿음, 소망, 인내, 겸손 등도 그 질에 있어서는 완전하지만 양과 능력에 있어서는 증가한다. 이처럼 성결은 질적인 면에서는 완전하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계속 성장한다. 따라서 성장의 개념은 양적인 면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3. 성결과 견인(궁극구원)
견인(궁극구원)이란 한번 구원의 신앙을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는 최후의 그리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의 보장은 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다. 구원의 보장은 구원의 확신과 관계되며, 신앙생활에 소망과 활력을 준다. 견인은 특히 칼빈신학의 5대교리의 마지막 항목으로서 중요한 교리이다. 견인은 칼빈 신학에서는 예정론의 논리적 결론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정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법(decree)으로서 그 법에 의하여 개개인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또 다른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변치않는 결정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또 다른 사람은 멸망으로 단번에 영원히 결정하신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예정된 자는 영원한 구원 즉 영생을 자동으로 보장받았다. 이것이 칼빈 신학의 견인의 교리이다.
웨슬레에게도 견인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예정된 자가 궁극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믿는 자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였다(perseverance of believers). 신앙은 현재의 구원과 궁극구원의 근원이 된다. 예정된 자가 궁극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칭의, 중생하여 현재 구원을 받은 자가 계속 신앙에 머무름으로써 궁극구원을 받는다. 이에 대하여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이 끝까지 예수를 믿으면 두 번째 사망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주와 같이 고난을 당하였으매, 주와 같이 살아서 영원토록 통치할 것이다.
진심으로 주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끝까지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랑에 넘친 신앙 생활을 끝까지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웨슬레는 궁극구원은 계속적인 신앙을 조건으로 하여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신자도 신앙에 계속 머물지 않으면 타락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견인 그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끝까지 믿는 자는 견인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견인에 대한 웨슬레의 입장은
① 견인은 성도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의해서 주어지는 은총으로서만 가능하다.
② 견인은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도들은 순종과 은혜의 수단 등을 통해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견인에는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웨슬레 신학의 한 특징이다.
웨슬레는 신자의 타락과 영원한 멸망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인이 계속 신앙에 머물러 있는 한 자기의 궁극구원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상실과 함께 구원의 상실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웨슬레는 신앙의 현재성 또는 계속성을 강조한다. 어제의 신앙이 오늘의 불신앙자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 믿는 자는 어제까지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가 계속 그 신앙에 머물면 궁극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하나님의 자녀 즉 참된 신자는 그가 계속 참된 신자일 때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가 신앙의 파선을 하였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그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 그가 계속 불신앙에 머문다면 그것이 확실하다.
웨슬레가 신앙의 유지와 성장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성도의 견인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견인의 가장 확실한 길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결 후에도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현재 소유한 것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고 성결을 향한 성장을 강조하였다. 신자들의 퇴보를 피하고, 궁극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성결의 유지와 성장이 중요하다. 터틀(Robert G. Tuttle)은 “웨슬레는 완전(성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견인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견인을 보장하기 위하여 완전을 향한 진보를 동시에 강조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성결은 웨슬레 신학에서 성도의 견인(궁극구원)과 연결되어 중요하다.
린드스트롬(Harald Lindstrom)은 그의 책 「웨슬레와 성화」에서 성화가 최후의 의인 즉 궁극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 노로 요시오 교수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노로 요시오 교수는 과연 웨슬레가 성화를 최후의 칭의(궁극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이라고 생각하였을까?라고 질문을 제기하고서, 자신의 판단에 의하면 웨슬레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웨슬레는 “최후의 심판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가 지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도 있었는가, 아닌가를 보는 것이 심판의 목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린드스트롬의 주장은 성화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신자는 지상 생애에서 성화를 이루어야 됨을 강조한 것이다. 노로 요시오는 구원(현재구원이든 궁극구원이든)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며, 성화는 믿음의 열매라고 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노로 요시오의 주장이 논리적 순서로는 옳다. 그러나 린드스트롬의 주장 역시 성서와 웨슬레의 신학에서 볼 때 옳다. “거룩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12:14). 그러므로 이는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성화를 가져오며, 성화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을 낳는다. 구원은 이것이 계속될 때 가능하다. 웨슬레 신학에서는 견인(궁극구원)은 하나님과의 산 신앙의 관계에서만 보장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견인의 은혜는 주어진다.

4. 유지와 성장을 위한 실천적 권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안에서 성장을 약속받고 있으며, 동시에 명령받고 있다. 우리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도 고저, 기복 또는 성쇠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좋은 날과 궂은 날은 있게 마련이다. 신앙생활의 침체와 후퇴를 막는 가장 좋은 길은 오직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다.
웨슬레는 성결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많은 충고를 하였다. 그는 메도디스트 회원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양자(하나님의 자녀됨, 롬8:15)의 영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일체의 위로를 부인하고, 소박함을 유지하며, 힘써 기도하여 게으름과 영적 나태에 물들지 않고, 잡 생각을 제어하여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를 위한 순종으로 통솔하며, 매일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개인의 신앙생활 훈련에 힘쓰라고 권면하였다. 특히 명상과 개인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임하므로 자주 명상하라고 충고하였다. 또한 복음적 순종과 생활의 성결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선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두라고 권고하였다. 그는 성도들의 신앙의 나태와 타락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주의하지 않은 사람은 실수하고 타락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대적들은 절대 나태하지 않고, 싸움을 멈추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기를 어찌 중단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설혹 그대가 은혜의 신비 가운데 굳게 섰다 할지라도, 그대가 나태함으로 받게 될 피해는 너무나 막심하기 때문이다.
은총 안에서의 성장은 자동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성장의 원칙들이 있으며, 그 원칙들이 준수될 때에 성장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응답이 있을 때 더욱 충만하고 강력하게 작용한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인간은 순응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간다. 성결의 유지와 성장도 마찬가지다.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며, 성령에 순종하여 빛 가운데 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딤2:12),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하며”(고전9:27),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며”(살전5:22),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약1:27), 그리고 날마다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롬12:1).
성결 신학자들은 성결의 유지와 성장의 원칙들을 자세히 정리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또 아주 특별한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장의 원칙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그러면 먼저 제솝( H.E.Jessop)의 교훈을 들어보자.
① 거하라(abide):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요15:4-10) 순간순간 빛가운데서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동행해야 한다.
② 순종하라(obey):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③ 깨어라(watch): 자신에 대한 엄격한 경성과 함께 언제나 예수님을 앙망하여야 한다.
④ 기도하라(pray): 주님과 계속 교제하고 대화해야 한다.
⑤ 증거하라(witness):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적절한 기회에 성결을 증거하라. 그러나 성결이 값싼 경험담이 되지 않도록 주제넘게 나서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드(J.A.Wood)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었다. 그의 교훈에는 ‘언제나’ 또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영적 성장의 원칙들은 일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준수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① 계속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성별하라 -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② 계속적으로 믿음 안에 거하라.
③ 성령의 증거를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하여 정결을 유지하라.
④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는 정신으로 살아라.
⑤ 항상 경성하라.
⑥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에 성실하게 순종하라.
⑦ 매일 성경을 읽어라.
⑧ 언제나 은혜 안에서의 성장을 목표로 삼으라.
⑨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며 생활하라.
⑩ 기도생활을 계속하라.
⑪ 다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라.
⑫ 죄와는 결코 타협하지 말고, 어떤 모양이나 이름이라도 죄를 피하여야 한다.

토마스 쿡은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한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①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② 단순한 믿음으로 따라 가라.
③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라.
④ 기독교 사업에 열심히 일하라.
⑤ 결코 현재 서 있는 자리에 만족하지 말라.

메쯔(Donald S. Metz)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지켜야 할 원칙들을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 다음과 같이 뽑아내었다.
① 의지의 순종 :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모든 내적인 저항은 분쇄되어야 한다. 자신의 자아(self 또는 self-Lood)는 유지되어야 하지만, 육적 자아(carnal self) 또는 자기 중심적 자아(self-centered self)는 죽어야 한다(롬6:6;12:1;고후7:1;갈5:24;엡5:26;살전5:23).
② 내적 본성(innert nature)이 정결해야 한다(엡5:24-26;고후7:1).
③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롬12:1-2).
④ 성령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갈5:24-25).
⑤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한다(엡5:18).
⑥ 육체를 쳐서 훈련시켜야 한다(롬12:1)

성장의 표적

1. 성결과 성숙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삶의 규범 가운데 행동하며, 원만하고 조화된 인격을 구비한다. 그는 삶의 여러 가지 현실적이 문제들을 신앙으로 잘 대응하며, 필요한 결단과 거기에 따른 책임을 완수한다. 그는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그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시간이 필요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중생과 성화의 경험 후에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각자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점진적으로 성숙해진다. 성결한 성도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성결과 성숙을 혼동하여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이 둘을 동일시하면 성결의 순간적인 면이 사라지게 되며,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인격적 원숙성이 되고 만다. 더욱 위험한 것은 기독교적인 성결사상이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성숙한 사람, 조화된 인격자는 기독교 밖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쿡은 “마음의 정결(성결)과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원숙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순간적인 온전한 성화의 교리에 대한 반대론의 대부분의 근거가 된다. 이 두 가지를 동일시 또는 혼동함으로써 성화 교리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혼란의 대부분이 야기된다”라고 말하였다.

성결과 성숙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결은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성숙은 성장의 결과이다.
② 성결은 성령의 역사이나, 성숙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③ 성결은 순간적이지만, 성숙은 점진적이다.
④ 성결은 도덕적 정결이며, 성숙은 도덕적 능력의 신장이다.
⑤ 성결은 질에 관한 것이고, 성숙은 양에 관한 것이다.
⑥ 성결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지만, 성숙은 조건이 아니다.

2. 성숙의 표적
애보트(Hollis F. Abbott)는 성결 후의 성장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표적이 따른다고 하였다.
①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롬8:4;갈5:16,25).
②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확실히 나타난다(롬8:29;고후3:18).
③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승리한다(고후2:14-16).
④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근심함이 없이 사역을 완수하며, 또한 성령의 열매가 계속 증가하여 나타난다(엡4:30-32;갈5:22-23).
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빌2:5-8).

퍼가이저(W.T.Purkiser)는 성결은 영적 건강이며,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실현(self-realization)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현(christ-realization)을 목표로 성장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장은 다음과 같이 표적이 나타난다.
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항상 복종한다(엡5:20-21).
② 사랑, 짓기, 총명이 풍성하여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빌1:9-10).
③ 사랑의 수고를 감당한다(살전1:3).
④ 성령의 이니도와 이웃의 요구에 대한 감수성이 증가한다.
⑤ 건강한 자아상(self-image)를 형성한다.
⑥ 능력있는 복음의 증인이 된다(행1:8).
⑦ 경건심이 깊어진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법

예수의 제자는 누구나 자기들이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게 자백하고 회복할 용기를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피해를 입혔을 경우는 그 분과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양편에 피해를 입혔으면, 당신은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과거를 축적하도록 당신의 기억력을 만드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악행을 했으면 당신의 마음은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고, 악행에 대해 유혹을 받을 때에는 그 악행을 했던 지난 날을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바로잡아지지 않을 때는 당신은 다시 그 유혹에 굴복할지도 모릅니다. 모든 악행이 바로잡아질 때까지는, 당신은 죄의식으로부터 항상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당신은 심각한 문제들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믿음을 갖고 유혹을 극복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항상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이 피해자들과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어디서 누군가가 당신을 사기꾼이라고 폭로할 것이 항상 두려워 주님을 증 거하는 데 대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양심이 불결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사귀기 힘듭니다. 그리고 절대로 완전한 용서의 기쁨 속에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배상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습니다. 자백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당신의 잘못을 상대방에게 인정하고 그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타인과의 관계를 바로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아직도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들의 전체 목록을 작성하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나는 죄는 두 세가지에 불과할런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이 당신의 행복을 차단합니다. 당신에게 그것들을 나타내실 것을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그 분이 당신에게 기억시켜준 모든 것을 필기해 두십시오. 목록에 들어가야 할, 당신이 아는 것은 어느 것이나 빠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그 일에 대하여 당신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십시오. 그 다음에 다른 사람과 그 문제를 올바르게 할 용기를 그 분께 간구하십시오.

2. 각 경우에 어떤 근본적인 죄가 있는가를 찾아내십시오.
죄의 결과에 대하여 아무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범했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비행의 결과는 바뀔 수 없는 것
이기 때문에 기록해 두지 마십시오. 성령님께 당신의 중심을 살피셔서 각 경우에 근본적인 죄를 당신에게 보여주실 것을 간구하십시오.

3. 피해자와 관계를 정상화할 시간을 정하십시오.
몇 분 동나 그와 단 둘이 있을 수 있으며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장소를 만드십시오. 만일 당신이 이것을 할 수 없으면, 그 대신에 편지를 쓰십시오. 상대방에게 있어 위험하거나 난처하지 않으면 직접 사과하십시오.

4.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미리 구상하십시오.
사과할 때는 반드시 그 근본적인 죄를 지적하여 당신이 사과하는 이유를 그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에 당신이 사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예를 보십시오.
“제가 당신께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죄(구체적으로 죄를 지접하십시오)를 지었습니다. 저는 이 죄로 당신과 하나님께 피해를 입혔음을 알고 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설교조로 하지 마십시오. 효과있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로 뉘우치는 태도로 두 세 마디만 하면 됩니다.

5. 올바른 자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우선 서두르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겸손하게 되어 당신이 했던 일에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고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당신의 이기심이 초래한 모든 해와 손실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그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악행이 사람들을 상하게 하여 지옥으로 보내놓은 생명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세계가 입은 손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생애에 초래한 고민, 불면증, 죄에 대한 기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그 죄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셧다는 것을,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가슴아파 하신다는 사실을, 정말로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꺾어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릴렀는가를 보여주시도록 하기 전에는 피해자를 찾아가지 마십시오.

6. 모든 책임을 질 각오를 하십시오.
설령 상대방 역시 정말로 잘못이었다 할지라도 마치 그것이 전부 당신의 잘못인 것처럼 모든 책임을 지십시오. 그에게서 아무것도 - 용서까지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올바른 정신으로 찾아가서 모든 책임을 진다면 많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부차적인 전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당신이 용서를 구한 사람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기 위하여 올바른 태도로 찾아가십시오. 씻겨져야 할 것은 당신의 양심입니다. 상대방을 잘못에 대하여 그를 다루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두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분의 일을 하시도록 하십시오.

7. 당신이 찾아가기 전에 어떤 친구에게 그 기간 동안에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이 편지를 쓰고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우편으로 부칠 때에 어떤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사과할 적절한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당신을 위한 길을 예비하고 상대방을 마음을 여는 데 당신은 그 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큰 문제들을 먼저 다루고 작은 문제들은 뒤로 미루십시오. 만일 당신이 배상할 것이 있으면 착수하기 전에 앞서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구상하십시오.

8. 당신에게서 책임을 완전히 회피시킬 말은 전혀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들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의 잘못이나 그로 인해 타인들이 입은 피해를 과소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과하는 일을 너무 오래 미루지 마십시오. 근본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때가 한 번 있습니다 - 그것이 성적 범죄일 때입니다. 사용하기에 알맞은 표현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당신이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성적 과오를 범했다면, “당신에게 품위있는 본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또는 “당신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본보기가 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마치 심판의 왕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처럼 철두철미하게 당신의 죄의 목록을 샅샅이 검토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결심을 끝마쳤을 때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즉시 하십시오.
이 간단한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자백의 대상은 범죄의 대상과 맞아야 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당신이 범죄한 사람들에게만 자백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당신의 범죄가 하나님에게만 거슬린 것이라면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 분만이 아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범죄가 하나님과 다른 한 사람에게 거슬린 것이라면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 분만이 아실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범죄가 하나님과 다른 한 사람에게 거슬린 것이라면 하나님과 그 다른 한 사람께만 사과하십시오. 그 이외에 아무도 알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당신의 범죄가 하나님과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슬린 것이었다면 처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음에는 공개적인 사과를 함으로써 그 집단의 사람들과 관계를 바로 잡으십시오.
개인적인 죄들을 공적인 모임들에서 사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이 드물며 어떤 사람에게는 난처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들 개개인에게 범죄했으면, 그 각 개인 앞에서 그 범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청결하게 하는 일을 끝마칠 때에는 당신이 죄의 목록을 불사르는 기쁨과 또 세상에서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아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높이 들고 활보할 수 있을 때의 당신의 환희와 평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원수가 당신이 한 때 범했던 죄에 대한 기억들을 당신에게 가져온다면 당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아, 너의 말이 옳다. 나는 한 때 그 일들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하나님과 청산했다. 그리고 내가 해를 입힌 사람들과 그 일들을 청산하고 관계를 바로 잡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할 때 나는 행복한다. 너는 내가 지금 청결하다는 것만 나에게 기억시킬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죄들을 하나님과 사람들과 청산하십시오. 당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십시오. 당신의 본을 필요로 하는 다른 젊은 사람들이 수천명이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당신의 본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개인의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공동체생활과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우리 교회는 성령에 대한 바른 관점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런 혼란들은 단순히 교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차원까지 곁들여져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잣대로 삼아 사물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을 관찰할 경우, 성경 본문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성경본문을 끌어대려고 한다. 이것은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교단의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라 소위 기성교회의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기성교회의 신자들은 오순절교회 신자들이 너무 개인의 성령체험에 의존함으로써 주관주의 또는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오순절교회의 신자들은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교리와 신학만을 붙잡고 있는 껍데기 신자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오해들은 성령세례, 윤리, 은사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에서 잘 나타나며, 이런 오해로 인해 공동체 내의 개인들 뿐만 아니라 교단과 교단이 분열되는 일도 허다하다.
성령의 사역과 관련하여 최근 교회에 존재하는 중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경험론적 이원론의 문제일 것이다. 오순절교회들이 주최하는 부흥집회에 가보면 가끔 기성교회에 다니던 신자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 이들 기성교회 신자들은 오순절교회의 예배나 그들의 부흥집회에 참석한 후에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고백하거나 은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식의 간증을 하곤 한다. 오순절교회로 개종한 이들의 극적인 간증을 들어보면, 그들의 이전 삶은 대부분 또는 전부 죄로 물든 삶이며 의심 많은 연약한 삶인 반면에 지금의 삶은 믿음과 권능이 충만한 승리의 삶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런 극적인 삶의 전환점은 보통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으레 기성교회에서 온 사람이나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성령세례를 받도록 유도되기도 한다. 오순절교회가 주장하는 성령세례에는 보통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들이 동반되는데 그런 은사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징표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세례란 처음 예수를 믿고 중생한 이후에 느끼게 되는 성령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오순절신학에서 ‘제2의 축복’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중생한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신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두 번째 축복, 즉 강력한 성령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문제점은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성령세례를 경험한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누는 구분방식에 있다. 이런 구분방식은 단순한 구분방식에 그치지 않고 무엇이 참된 교인이고 진정한 교회인지를 판단하는 경험론적 이원론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론적 이원론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1. 경험론적 이원론은 아직 ‘극적인 경험’을 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성령체험과 은사의 가능성에 관한 부정적 기대를 심어주게 되는 반면, 그런 경험을 하고 난 자들에게는 과도한 자긍심을 심어주게 된다. 따라서 성령세례론이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그런 경험을 하는 것 자체가 자기성취가 될 가능성이 많다.

2. 성령경험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의 성취로 생각하는 신자들은 자칫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될 뿐 아니라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3.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경험론적 이원론이 카리스마적 교단과 기성교단의 분열에 작용되어 소위 발전된 경험론적 이원론을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발전된 경험론적 이원론은 상대적으로 권능이 없으며 은사가 결핍되어 있는 기성교회들과, 풍부한 은사를 지니고 있는 카리스마적 교회들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후자의 교회만 참된 교회인 것처럼 간주한다. 회심 후에 성령세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경험론적 이원론에 기초한 것인데, 성령세례의 경험은 이 점에서 명목상의 형식적 교회들 가운데서 무엇이 참된 교회인가를 구별해내는 신학적 원리로까지 비약된다.
그러나 잘 검토해보면 이런 오해들이 기준이 되는 경험론적 이원론은 잘못된 근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기독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성령세례의 문을 통해 ‘초자연적인’ 기독교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은 이론은 있을 수 없다. 즉 은사 없는 기독교에서 벗어나 은사 있는 기독교로 들어가는 식의 이원론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어느 한 쪽을 절대화시키는 것, 즉 오순절교단의 경험을 규범화시키고 그것을 기존교회의 경험과는 종류와 영역이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입장을 취하게 되면 성령세례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2. 성령의 선물을 받는 사람이 소유하게 되는 은사들은 신자가 경험하는 새 언약 관계와 대치되거나 그것에 덧붙여진 성령의 또다른 사역이 아니다. 그것들 자체는 새 언약 관계 속에서 누리는 권리의 특별한 측면들이요 경험들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은 두 개의 축복을 구분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은 어떤 특정한 무리만이 은사를 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 역시 회심한 후에 주어지는 추가적 선물이 아니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교회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기초다. 고린도전서 12장 4-12절에서 그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것을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된 몸의 통일성, 즉 다양한 교회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국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성령세례를 언급하는 13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하나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를 모두 한 몸으로 통일시키는 것은 그들 자신만이 소유한 어떤 특징이나 성취에 기초할 수 없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것은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통일시키는 교회론적 기초이므로 어떤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종교적 경험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성령세례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제2의 축복을 경험한 교회 내의 영적인 소수 그룹들에게만 한정된 경험이라면 그것이 교회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할 때 소유하는 보편적 경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신자가 회심할 때에 경험한 성령은 그에게 주어진 새 언약의 관계 속에서 그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준다.

3. 신약의 기자들은 성령이나 성령세례에 대해 말할 때 이 경험을 자신의 개인적 성취로 간주하여 자랑하거나 자기선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한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각자가 처한 인종적, 사회적, 국가적, 종교적 배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 성령세례를 통해 ‘한 몸’으로 통합되고 한 형제요 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것은 이 점에서 철저하게 신의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과 야만인 사이에 공통점은 없지만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같은 십자가 사건에 동참한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겉보기에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에 고린도인들은 보다 현저한 은사들을 놓고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특기나 개인적 성취에서 비롯된 것처럼 시기하고 분쟁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성령세례를 통해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은사들은 이미 선물로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고전14:3)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은총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교회의 통일은 인간이 이룩해야 할 인간의 과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교회의 통일을 실제적으로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분열의 영이 아니라 화평의 영이시며 배경과 기질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분이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 신자들은 이미 하나된 것을 동일한 성령에 의지하여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통일은 이미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신자들에 의해 지켜져야 하고 성취되어야 할 ‘과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의 다양성을 시기와 분쟁들, 교회 분열의 기회로 삼는 것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사역에 크게 역행하는 것이다.

신약의 성경요절암송

1.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2.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4.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5.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6.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7.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8.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10. 눅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11.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12.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3. 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 눅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5.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6.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17.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18.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9.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0.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1.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2.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23.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24.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6.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7. 행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28.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29.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30.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31.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32.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33.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34.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5.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36.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37.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38.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39.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와 희락이라.

40.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41.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42.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43.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44.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 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45.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46.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47.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48.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49. 고후2:15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50.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51.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52.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53.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54.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리로다.

55. 고후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56.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57.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58.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9.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60.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61.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62.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63.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64.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65.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66.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7.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68.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69.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70.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71.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72.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73.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74.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말라.

75.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76.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77. 딤전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78. 딤후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79.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80.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남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주신 계명을 사람들이 어떻게 강압적인 율법주의로 만드는 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십계명을 공부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네 가지 원칙을 배웠습니다.

1.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춰줍니다.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계시하는 측면이 내게는 가장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소유욕이 강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출20:3).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상 숭배를 미워하십니다(20:4-6).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20:7). 우리가 예배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배우기를 바라십니다(20:8-11). 가정을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20:12). 생명을 귀중히 여기십니다(20:13). 경건한 자손, 성적 순결, 거룩한 백성을 원하십니다(20:14). 선물을 주시기를 좋아하시며, 주신 것을 빼앗지 않으십니다(20:15). 100%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20:16). 각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을 지켜보십니다(20:17).
여러분은 어떤 내용을 열거하셨습니까? 거룩함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할 때 십계명이 과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까?

2. 하나님의 계명은 참된 자유를 줍니다. 오늘날 사회는 엄청난 속박감을 줍니다. 탈피하고 싶다. 훌쩍 떠나고 싶다. 해방되고 싶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깨뜨리는 게 자유로 나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경험하는 건 훨씬 더 심한 예속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덕법만이 참된 자유를 줍니다. 이성 교제와 결혼 관계에서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의 계명은 철저한 보호를 제공합니다. 십계명을 자세히 읽고난 다음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그 계명들을 마련하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명들이 우리를 원수, 즉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 멸하려 하는 마귀로부터 영적으로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벧전5:8)?
사단이 우리와 전투하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울타리 한 곳을 기어올라가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일4:4).

4. 하나님의 계명은 참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십계명을 전부 읽고서 각 계명이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목록을 비교해 봅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내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내 인생에서 유일하고도 가장 높은 자리를 내드립니다(출20:3).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속성들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다(20:4-6). 재갈물리지 않은 혀로써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않습니다(20:7).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내 가족과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사귐을 갖는 데 사용합니다(20:8-11). 부모를 공경합니다. 이것을 요구한 하나님의 계명에는 결국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행복한 가정을 갖기를 바라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20:12). 생명을 존중하고,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줍니다(20:13). 성을 오락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20:14). 주님께 마음이 후한 것을 기뻐합니다(20:15). 신뢰를 받을 만하고 하나님께 영예를 드릴 말을 합니다(20:16).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자족할 줄 알고 성화되어 갑니다(20:17).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사랑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에 이를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그분께 순종하고 복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생각할 점
* 여러분은 십계명의 어느 측면이 가장 흥미롭습니까?
* 성경 공부의 토의 시간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비판한 다음 여러분에게 십계명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실천할 점
* 출애굽기20:1-17이 기록된 여러분의 성경책 여백에 다음과 같이 써 넣으십시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보여 주며 해방과 보호를 제공합니다.”

혼자서 성경을 공부함

여러분은 혼자서 성경 공부하는 맛을 즐기고 있습니까? 성경 진리를 매일의 생활에 적용하는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 게을러집니다. 그건 성경 공부를 실생활에 활력소로 삼는 단순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규칙적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어떤 기독교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내신 영원한 원칙보다는 편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 시대에, 성경 공부의 중요성과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성경 공부는 관찰과 함께 시작합니다. 성경을 포함하여 어떤 대상을 관찰하자면 자연히 공부할 대상의 본질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별은 밤마다 망원경을 통해서 바라봄으로써 관찰합니다. 동물은 그들의 서식지에서 오랫동안 그들의 활동을 지켜봄으로써 관찰합니다. 성경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주의깊게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관찰합니다.
저명한 성경학자 제임스 그레이 박사(Dr. James M. Gray)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성경 공부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건 성경을 읽는 것이다. 성경을 읽되 반복해서 읽고, 그런 다음 차분히 다시 한번 읽는 것이다. 그러면 차츰 성경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 가운데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는 부분을 단숨에 읽으십시오. 처음에 시작하기 좋은 책은 요한복음과 고린도후서입니다. 책 전체에 대해 분명한 인상을 가지십시오. 장절 구분은 일단 무시하고 읽는 게 좋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뜻이 잘 통하지 않으면 다른 여러 번역 성경을 참조하십시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이런 질문으로 읽은 내용을 검토하십시오. 본문을 관찰한 다음에는 해석이 따릅니다. 지레 짐작으로 엉뚱한 해석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께 조명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이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요일2:20,27).
여러분이 해석하는 본문의 문맥을 살피십시오. 본문을 병행 본문과 참고 구절들과 비교하십시오.
찰스 스퍼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람들이 간단한 성경 문장을 문맥에서 떼어 놓고는 마치 거거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는 듯이 ”발견했다! 발견했다!‘하고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진짜 다이어몬드가 아니라 깨진 유리 조각일 뿐이다.“
가장 좋은 성경 주석은 성경 자체입니다. 그러나 성경 핸드북과 성경 사전 그리고 좋은 성경 지도는 성경 시대의 지리, 관습,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필요할 때는 그런 자료들을 사용하십시오. 하지만 성경이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내용에 주의하지 않은 채 성경의 주변 사실을 아는 데에 너무 시간을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 공부는 반드시 생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읽은 성경이 여러분의 행동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한 게 아닙니다. 성경을 여러분의 강점과 약점, 태도와 행동 등 여러분의 모든 생활 영역과 연결지으십시오. 성경은 부모나 자녀, 남편이나 아내, 친구나 이웃, 고용인이나 피고용인의 입장에 선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함으로써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관찰, 해석, 적용, 이 세 가지 간단한 단계가 활기찬 성경 공부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생각할 점
*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한 단순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방법을 사용합니까? 그것이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실천할 점
* 성경을 그냥 읽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은 뒤에는 몇 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말씀을 꼭꼭 씹어 소화해야 합니다. 이 절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런 사항들을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경 구절들

성경 암기 계획을 세워둔 게 없다면, 아래 열거한 절들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나는 이 절들을 암기하고 묵상하고서 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 절들이 여러분의 삶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1. 거듭남
① 구원 -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② 새생명 - 고린도후서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③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 요한일서3: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④ 여러분 속에 사시는 하나님 - 고린도전서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⑤ 한 몸 안으로 세례 받음 - 고린도전서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 하나님
① 말씀이신 그리스도 - 요한복음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② 하나님의 성령 - 요한복음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③ 보혜사 - 요한복음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④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 에베소서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를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3. 가정
① 아내 - 에베소서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② 남편 - 에베소서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③ 자녀 - 에베소서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④ 부모 - 에베소서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4. 성장
① 유혹 - 고린도전서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② 자백과 신앙고백 - 요한일서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③ 기도 - 요한복음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④ 함께 모임 - 히브리서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⑤ 서로 사랑함 - 요한복음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⑥ 율법주의에서 벗어남 - 골로새서2:20,22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5. 하나님의 말씀
① 권위 - 베드로후서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② 목적 - 디모데후서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③ 정결을 위해 - 시편119:9,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6. 승리
① 성령 안에서 삶 - 갈라디아서5:16,18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② 헌신과 변화 - 로마서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③ 십자가를 통해 얻는 승리 -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④ 성령의 열매 -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⑤ 대사명 - 마태복음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⑥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함 - 로마서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7. 장래
① 영원한 정죄 - 요한계시록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② 하늘 - 요한복음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매주(원한다면 좀더 속도를 내서) 한 절이나 짧은 문단을 혼자서 공부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공부한 절을 확인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십시오! 묵상하십시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뜻을 생각하십시오. 그래 어쨌다는 건가? 이렇게 하면 내 생활에 무슨 차이라도 생긴다는 건가? 이 질문을 계속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에도 잘 간직하여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쓰셔서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시119:11).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하시는 내용을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구하십시오.

생각할 점
* 여러분은 성경을 몇 절이나 암기하십니까? 지금 당장 책을 들춰보지 않고서 몇 절이나 암기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6달 동안 조금씩 하는 훈련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천할 점
* 작게 시작하십시오. 이번 주에는 요한복음3:16을 (다시) 암기하십시오. 다음 주에는 고린도후서 5:17을 (다시) 암기하십시오. 이미 알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다시 검토하는 습관을 갖기 시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매주 한 절 이상을 암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죄를 경험함

제2차 세계 대전때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는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결국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나치 수용소로 끌려간 뒤 그곳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는 기쁘게 자기 삶을 그리스도께 드렸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섬기는 새로 발견한 기쁨과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로크마커는 전쟁이 끝나 수용소에서 풀려나자마자 즉시 교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누리며 교제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사죄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볼테르(Voltaire)의 희곡에 나오는 한 등장 인물은 “하나님은 사죄하실 거야. 그게 그분의 직업이거든”이라고 뇌까리며 죽었습니다. 사죄란 결코 그런 게 아니지만, 죄의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백이 사죄의 조건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원을 받을 때고 그렇고,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 때도 그렇습니다. 자백은 회개를 포함하고 필요할 때는 배상도 포함합니다.
회개 없는 자백은 거짓말입니다. 잠언 28:13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자백하려면 때로는 배상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출22:1-15). 자백을 가르칠 때 이 면을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 다른 사람의 소유를 가로챘다면(물건이든 돈이든 정직한 작업량이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사과해야 할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배상해야 합니다.
성경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자기 죄를 올바로 자백하는 자들을 값없이 용서하신다는 좋은 소식에 나타납니다. 므낫세는 유다 왕 가운데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을 뒤엎었고 하나님이 멸하신 족속들보다 더 큰 열심을 가지고 우상을 섬겼습니다(대하 33:1-9). 그러나 앗수르에게 함락당한 뒤 므낫세는 주 앞에서 크게 겸비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악한 왕이라도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백하고 회개할 때도 틀림없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자백은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이 말씀을 익히고 하나님께 자주 의뢰하십시오.
암기할 만한 또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10:17).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뿐 아니라 영원히 사하신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각할 점
*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되찾는 건 왜 그처럼 어려울까요? 되찾고 나면 왜 그리 해방감을 느끼게 될까요?

실천할 점
*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배상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십시오. 이름마다 그 사람을 찾아갈 날짜를 적으십시오.

정말 끝나기 전에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운동구장에는 좀처럼 데려가지 않던 아버지께서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에 “월드 시리즈 야구 경기표 두 장이 있는데, 나와 같이 가겠니?”라고 물으셨다.
나는 흥분했다. 나는 메이저 리그 야구 경기에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뉴저지의 집에서 뉴욕의 경기장까지 차를 몰았다. 나는 브루클린 다저(Brooklyn Dodger) 팀의 팬이었지만, 그날 오후 나의 팀은 1루에조차 진출 못했다. 글자 그대로 완전 봉쇄였다. 나는 완전히 의기를 잃고 집에 돌아왔다.
그후 20년이 지난 후, 나는 내가 어떤 경기를 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의 최고 팀이 완전히 패한 좌절의 게임은 놀랍게도 역사에 남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팀의 라이스(Don Larson)이 월드 시리즈 역사상 유일한 완전 게임을 투구했었던 것이다.
흔히 우리가 실패나 성공으로 바라보는 어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 상응하지 않을 때가 있다. 종국에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이 자못 분명할 때에 나는 그 득을 맛보며, 그것이 나의 영혼과 사역에 끼치는 영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짐

몇 년 전 어떤 의사가 영국의 연로한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5파운드를 달라고 기도하면 받게 될까요?
연로한 그 여성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선생님은 웨일스의 왕자를 소개받으면 당장 그에게 돈을 구하실 겁니까?”
“아니오 그 사람을 좀더 잘 알 때까지는요”하고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상당히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약간 안 터 위에서 감히 하나님께 이것 저것을 구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도는 두 친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화에서 하나님 측입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속으로 간구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내 영혼은 엎드려 경배합니다.
성경 해석가 그레이엄 스크로지(W. Graham Scroggie)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아뢴다.” 성경과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긴밀한 사귐의 줄을 이루는 두 가닥 선입니다.
모세, 느헤미야, 에스라, 다니엘의 위대한 기도를 읽어 보십시오.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서 그 말씀을 다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 기뻐하시는 기도 언어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에 맞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시 아뢰십시오.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 전에 그분의 말씀을 민감하게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마르틴 루터는 “기도를 잘 하는 건 공부를 잘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서 공부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조미 뮐러(George Muller)는 역사상 소수의 사람들이 늘 해온 대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그를 통해서 수천 명의 고아를 돌보셨습니다. 뮐러는 막대한 기금이 필요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재정난이 극심할수록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뮐러가 혼자서 하나님과 나눈 시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아침 일찍 신약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법칙과 같은 고정적인 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몇십 분간 묵상을 하고 나면 내 영혼을 자연히 자백을 하거나 감사를 드리거나 중보를 하거나 간구를 하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보기에 내가 기도에 전념하지 않고 오히려 묵상에 전념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묵상은 즉시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뮐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울려퍼질 때 자연스럽게 다시 기도로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렸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든 의사전달이 관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경배, 자백, 간구, 중보,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매일 그분의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깊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뮐러는 하나님께 나가 5파운드가 필요하다고 구할 수 있었고, 자기의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실 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그런 일을 구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하나님을 조금 아는 정도일 뿐입니까?

생각할 점
*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실천할 점
* 다음에 기도할 때는 먼저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그런 다음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을 읽음

아주 어렸을 때에 기억 가운데는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잠옷 바람으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린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잠언을 한 장씩 읽으셨습니다. 잠언은 31장으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달도 31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권하신 방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에 성경을 공부하고 읽는 것을 제외하고, 하루를 잠언 한 장을 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무릎을 꿇고 말입니다.
로버트 머레이 메케인(Robert Murray McCheyne)은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으로 내 인생과 사역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신 또다른 경건한 분입니다.
1813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난 메케인은 29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성결하고 겸손한 성품과 영혼을 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사회에 향구적인 인상을 남겨 놓았습니다.
메케인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러분은 경건하게 사는 만큼 성공할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가공할 무기입니다.”
한 사회나 국가에는 많은 요인들이 선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는, 특히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거룩함이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죄 - 거룩함이 없는 상태 - 는 성령을 근심케 하고 그분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반면에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건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시는 명령이요 의무요 특권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빛 안에서 살며 내주하시는 주님께 통제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삶을 변화시키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정신을 채워야 합니다(골3:16).
메케인은 자기 교인들에게 거룩하고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권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라는 제목이 붙은 성경읽기표를 작성하여 출판했습니다. 동료 신자들에게 “목숨을 다하여” 성경을 읽도록 권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배우고 순종하려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메케인의 「일용할 양식」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이 지침서는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성경을 읽게 하여 일년에 성경 전서를 다 읽게끔 편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매일 성경을 읽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시작하십시오! 제 아버지처럼 잠언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그런 다음 체계적으로 일년에 한 번 성경 전서를 읽으십시오.
왜 일용할 양식을 먹지 않은 채 하루를 덧없이 보내려고 하십니까?

생각할 점
* 요즘 여러분은 적어도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읽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주기로 읽고 계십니까?
* 매일 성경을 읽는 데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이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실천할 점
*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재정 문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재정 문제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는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중심을 두고 싶다. 일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든 선교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든 재정 문제에 관한 성경 진리들은 아주 중요하다.

원칙1: 돈 걱정을 하지 말라
성경에서 명령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명령은 도둑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명령이다. “두려워 말라” 혹은 그와 비슷한 구절의 말씀들은 성경 전체에서 백 번쯤 나온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특별히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우리가 듣는 것도 있고 못 듣는 것도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산상 수훈 중에서 그토록 많은 지면을 돈 걱정하지 말라는 명령에 할애한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의를 주신 세상 죄악들을 모두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짓는 잘못들과 실수들이나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양에 대해 관심을 쏟게 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적을 좁혀 우리가 돈 문제에 열중하고 걱정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셨다.
아마 당신은 현재 재정적인 위기에 맞닥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6:25-34).


어떤한 것도 이보다 더 명확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걱정하는 것은 사탄을 믿는 것이다”하고 간략하게 말한다. 시편 37편을 보라. 주제는 돈 걱정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시편 37편에서 세 번이나 “불평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8절에서는 불평은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경제 상태나 경기로 인해 돈 걱정을 하든지, 신용카드를 무절제하게 쓴 것 같이 자기 탓으로 인한 결과로 돈 걱정을 하든지 간에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한결같다. 돈 걱정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길을 보이시리라. 또한 돈 문제가 돈을 잘못 쓰거나 지혜롭지 못하게 써서 생긴 문제라면 재정적인 인도하심을 구하고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해서는 안 된다. 걱정하는 일은 잘못된 행동과 그릇된 행위를 낳을 뿐이다.


원칙2: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라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 의를 구해야 한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힘과 시간을 빼앗는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따라 결정을 내릴 것이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한 가장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솔직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때때로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올바른 자리에 계신다면 돈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돈이 있든 없든, 우리는 돈 장부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볼 것이다. 돈에 대해 걱정하는 정도에 따라 종종 우리가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드러난다.

원칙3: 부지런하고 책임감있게 행동하라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돈 문제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잠27: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잠12:24)고 한다. 각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돌보아야 한다(살전4:11-12, 살후3:10).
십계명의 제 사계명을 기억하라.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단지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나머지 육일 동안은 일하라는 명령의 또 다른 측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을 저주할 만한 것으로 여겨 일을 안해도 되었더라면 더 잘 살았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는 하나님이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아담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전적으로 저주의 말은 아니었다고 본다.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 각자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게으름이 진정한 저주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대가

아무도 우연히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아무도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한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스도께 헌신한다면 경건해지거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기울이는 영혼의 자세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1. 예수님께 대한 최고의 헌신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최고 우선 순위의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다. 예수님을 당신의 알파와 오메가 곧 최고의 소원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시간을 예수님께 드리며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을 따로 성별해야 한다. 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희생적으로 헌신하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부끄러움이 없이 표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의식 곧 “예수님이 첫째”라는 영혼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임재 안에서 기다림 곧 단순한 용의가 아니라 예수님과만 교제하는 실제적인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며 그 임재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그 분과 막힘이 없고 자유로운 교제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최고의 기쁨, 초월적인 열정 그리고 손색이 없는 우리의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예수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분을 닮아 변모(실질적인 헬라어 표현)할 것이다(고후3:18).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건을 좇으라고 말했던 사실이다(딤전6:11). 여기에는 계속적인 노력, 진지함, 열심 그리고 추구하는 데 있어서 불굴의 자세가 요청된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지라도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내가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노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바울은 육체의 연습과 영적 연습을 대조시키고 있다(딤전4:7).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는 “gynmasium”(체육관)이라는 단어의 어근이다. 그 말은 질서 있고 규칙적이고 고된 연습을 암시한다. 올림픽 선수들이 경기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훈련하며 밤낮으로 몸을 단련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힘과 시간을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경건의 연습과 영적인 훈련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삼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알아 그 분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그 분의 형상으로 변모되기 위함이다(고후3:18). 최고의 우선 순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닮는 데 있다. 주님을 닮게 될 때 주님을 위한 열심과 수고하려는 마음이 그 모든 헌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두 가지 단계가 더 요청된다.

3. 당신의 영혼을 말씀에 적셔야 한다.
당신 자신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그라. 특별히 신약 전체와 시편을 포함하여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설명에 유념하라. 이것은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편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마시라.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그라. 그 말씀을 읽고 또 읽어서 마침내 당신의 영적 존재의 조직 속에 그 말씀이 스며들게 하라.
말씀의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자가 되라. 다른 어떤 취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취미로 삼으라. 다른 읽을거리들이 많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 시간을 바치라. 말씀을 당신의 마음속에 간직하라. 그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암기하라. 그 말씀을 당신의 생활과 마음에 적용시키라. 매일 말씀과 더불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라.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을 먹이며 양분을 공급하고 강건하게 할 것이다. 그 말씀은 당신을 깨닫게 하며 인도할 것이다. 말씀을 우선적인 안내자와 최종적인 권위로 삼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16에서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기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모하게 하신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데 바치는 시간만큼이나 성경(단순한 말씀에 관한 책으로서가 아니라)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4. 기도 시간을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시간을 가장 위대하고 영원토록 유익하게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다. 기도는 모든 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영속적이며 상급이 많은 투자이다. 기도는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다.
모세는 우리가 아는 구약의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하여 그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가장 많이 가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위에서 40일을 지내고 내려온 모세를 보고 별로 특별한 인상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 위에서 80일을 보낸 후에는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보고 두려워했다.
세상과 교회를 위한 중보의 짐을 함께 나누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여러 해 동안 한 몸을 이루어 생활해 나갈 때 그들이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을 것이다. 부부는 태도, 몸짓, 그리고 어휘 등이 서로 닮아가며 어떤 때에는 얼굴 모습마저 닮게 된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우상화할 때에 그 몸짓이나 태도 그리고 말에서 부모를 닮아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 분을 더 사랑하게 될 수록 그 분과 더불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빈약한 기도 생활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주님께 열정적으로 헌신했다면 결코 맹목적이거나 무관심한 기도 생활을 할 수 없다. 주님과 더불어 오래 있을수록 그 분을 더 많이 생각하며 그 분처럼 말하며 그 분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제자훈련을 위한 성경요절

1. 나의 신앙고백과 간증
①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②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생활
①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② 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3. 경건의 시간
① 시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②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4.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
①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②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5. 무엇이 바른 기도인가?
①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②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 기도의 응답
①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②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 성경의 권위
①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②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8. 하나님은 누구신가
①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② 렘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9.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①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②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0. 삼위일체 하나님
①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②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11.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
①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②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②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①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②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14. 약속대로 오신 성령
①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②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5. 거듭난 사람
①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② 살전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16. 믿음이란 무엇인가
①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②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7. 의롭다함을 받은 은혜
① 롬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②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18.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①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②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과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9. 그리스도인의 성화
①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②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2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①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②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21. 순종의 생활
①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②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봉사의 의무
①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②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23.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
①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②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24. 말의 덕을 세우은 사람
① 눅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② 잠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5. 영적 성장과 성숙
①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②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26. 순결한 생활
①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② 딤후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27.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
① 엡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② 신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28. 신앙 인격의 연단
①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②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리스도의 주재권
①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② 계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0. 청지기직
① 엡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②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31. 영적 전투
①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② 엡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32. 새 계명:사랑하라
①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②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의 용서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도 그와 동일한 형편에 처한다는 사실을 주지하라. 마18:28-38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인색함과 원수갚는 것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메마르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손해를 입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잊기는커녕, 마음 가운데 분노를 계속 키워가고 있다. 투옥된 종은 평생 갚아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빚을 다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상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수많은 영혼들이 용서하지 않는 독한 마음을 간직한 채 죽어가고 있다. 형제여, 용서의 목적은 화해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부모는 당신이 용서를 구하거나, 혹은 그들이 사과하고 당신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친구들은 나라 안의 다른 곳으로 이사가므로, 당신이 서신이나 전화가 아니고는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는 배우자의 한편이 떠나거나 이혼으로 인해 생활비를 지급하기 위해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접촉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실질적인 방법, 즉 직접 상면하여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가 있다.
이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잊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분노의 영에 의해 갇히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잠시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체험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용서를 통해 제일 먼저 득을 보는 사람은 언제나 용서하는 편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 리는 자신의 마음에서 누군가가 볼꼽사납게 거기에다 쏟아놓은 분노를 제거하게 된다. 우리가 증오란 더러운 물로 가득찬 웅덩이에서 자신의 몸을 건져내며, 내적인 치료의 음 악에 맞춰 춤추게 된다. 우리는 한 죄인을 자유케 할 때, 그 죄인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 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과거의 고통 가운데 꽁꽁 묶어 놓았던 분노의 존재를 풂과 동시에, 자신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게 된다.

당신은 이러한 쇠사슬을 풀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과 함께 하는 자들이 당신의 행위를 보고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마18:31). 우리가 과거의 원한을 버리지 않은 채 계속 보복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것을 보고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전혀 보지 못한 채 원수갚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독한 자들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감옥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러한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의 마음에 매일 조약돌이 하나씩 떨어져 영안이 흐리고 어두워지므로 앞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된다. 용서는 하나의 약속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 때문이다.
첫째, 용서는 우리가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 대해 “나는 이 문제로 인해 내 마음이 더 이상 죄에 빠지지 않게 하겠어. 그것은 이미 다 해결됐어.”라고 최소한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하는 하나의 약속이다.
둘째, 용서는 자기가 입은 피해에 대해 그것을 다른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용서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입은 피해에 대해 그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가해자에게 다시 보복하고 위협한다거나, 또는 다른 문제가 일어날 때 그것을 시비삼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문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과거사로 돌려, 더 이상 절대 문제화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용서가 암시하는 셋째 약속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용서는 지난 날의 피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 당신이 그것에 계속 사로잡힌다거나 마음 가운데 분노가 끓지 않게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그러한 기억이 아무리 자주 떠오를지라도 그때마다 용서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자신의 눈이 신비하게도 사랑의 눈으로 바뀌는 것을 볼 것이다.

죄와 구원의 관계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과 거룩성을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원죄와 자범죄를 지닌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자녀를 삼으시고 거룩성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사의 내용과 목적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신다. 죄가 원죄와 자범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도 성화와 중생(칭의)으로 구성된다. 즉 죄의 이중성이 구원의 이중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간이 성결해야 되는 필연성이다.
칭의되고 중생한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의 죄책에서 용서함을 받았으나, 죄의 뿌리라고 하는 원죄는 아직도 남아있다. 이것은 생래적인 죄로써 자신의 본성이 부패한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성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고후7:1). 완전 성화는 중생한 신자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로서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두 번째 역사이다.
죄와 구원의 관계를 웨슬레 신학의 구조 안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중생(칭의) 이전의 사람은 원죄, 자범죄, 그리고 연약성을 가지고 있다.
2)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원죄와 연약성을 지니고 있다.
3) 완전성화된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마음의 연약성만 지닌다.
4) 부활한 성도는 현세에서 지닌 모든 연약성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된다.
조종남 박사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선행적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선행적 은총아래 있는 실존적 인간은 원죄의 부패성만을 지니고 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인간은 자범죄를 짓게 된다.
2) 여기에 자범죄로 인한 죄책은 칭의에서 용서받아야 한다.
3) 그리고 누적된 죄의 부패성은 성화의 과정에서 씻음을 받는다. 웨슬레는 이 성화가 중생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부분적인 씻음) 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성화(온전히 씻음)로, 그후에도 성장이 계속되어(continual sanctification), 마침내 영화(glorification)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4) 이 영화의 사건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limitation and infirmities)에서도 해방을 받는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설교에서의 관심)은 현재의 구원(칭의, 중생, 성화)에 있다.
성결의 필요성은 인간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부패성, 악에의 경향성 즉 원죄의 해결에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한 거룩한 형상을 은총에 의해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죄(자범죄와 원죄)로부터 해방되어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성결의 경험은 종점이면서도 동시에 출발점이다. 분명히 성결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목적이며, 성도가 도달해야할 목적지이다. 모든 죄로부터 해방됨으로 영혼 안에서의 육적 죄성과의 싸움과 혼미는 종식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성도의 마음이 충만해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변화시켜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다. 그러나 성도의 성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계속 성장해야 한다. 죄와의 싸움과 혼미의 종식은 사랑과 승리의 시작이다. 죄인을 성결케 하신 성령은 이제 성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사역하신다. 그러므로 성결의 경험은 하나의 정점이지만 종점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순례자에게 하나의 경계표(land-mark)이지 기념탑(monument)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Christ-likeness)이다. 이것은 감상적인 모방(sentimental imitation)도 아니고, 예수의 역사적 삶을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성결한 성도의 삶에서 요구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성령의 내주와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의 삶이다. 사랑은 성결의 본질이다. 이 사랑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가장 큰 은사요, 제일 좋은 길”이다(고전12:31). 그러므로 성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모형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충만을 입으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 빛을 발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의 힘은 유혹을 이기고 죄에서 벗어나는 원동력이 되며,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킴으로 기쁨으로 순종한다. 사랑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사셨다. 예수의 생애는 인간의 삶 속에서 성결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적 의로움과 거룩의 최상의 표상이다.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서 인간의 고뇌를 지닌 가운데 거룩함을 보전하시고 거룩한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를 닮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결을 위한 “위대한 모범”(grans exempler)이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음”(빌2:5)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탄이 나의 영혼에서 물러나고, 대신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과 빛과 사랑과 능력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나의 전부-영, 혼, 육-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에 흠뻑 젖어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요일4:16).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통해 기쁨과 봉사의 능력을 더해 주시면서 우리를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게 하시리라”(딤후2:21).
성결한 성도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굳게 서서, 하나님과 사람과 조화된(harmonizing) 삶을 누린다. 이러한 하모니는 천국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도 조화를 이룰 때까지 계속 성장한다. 아니 천국에서도 사랑의 하모니는 더욱 더 증가할 것이다. 그 날까지는 성도는 이 땅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러한 삶 속에서 성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여”(히12:10) “하나님의 인격”(벧후1:4)을 닮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성결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며”(벧후3:18),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하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며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엡4:13, 15). 우리는 “이제부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엡4:14),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고전13:1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5:1),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루어야 한다(갈2:10).” 우리의 삶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도우심을 통해”(엡5:18;3:16)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하여서”(살전2:10),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살전3:13). 이를 위하여 이 땅에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서”(고후7:1;골1:22)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한다(갈6:17). 그것은 사랑이요, 사랑의 흔적이다.

사도이후시대의 예배(100-300년)

2세기와 3세기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전 삶이 예배하는 일과 직결되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예전적인 행위의 중심은 매주 행하는 성만찬의 축제에 있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에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생활과 성경낭독을 중심한 정규적인 말씀중심의 예배에 참여와 말씀의 가르침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사도시대 이후의 초기 예배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1) 기독교의 예배는 총체저긍로 희생의 제물(Opfer)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먼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며, 특히 성만찬에 관련하여 더욱 분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성만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계속되는 기도와 감사는 마치 유대인의 성전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봉헌된 제사처럼(tamid) 계속 진행되는 희생제물의 성취로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2) 기독교의 예배는 처음부터 강한 종말론적인 차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퇴색되어 갔다고 본다. 이러한 경향은 하늘나라에서 있게 될 축제의 성찬의 선취행위로 보았던 그 성만찬에서 뿐만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인 준비는 부활절기와 계속되는 50일째의 성령 강림절기의 중심적인 입장을 밝혀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아직 년중의 기독교 축제로서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없었으며,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있음의 표현으로 매일의 규칙적인 기도 생활이 이 시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3) 기독교의 예배는 공동체적인 행위로 주목되었다.
한 지역에 있는 회중 전체는 주일에 성찬예배에 모이는 것을 중심하게 되었다. 질병이나 다른 특별한 이유로 예배에 오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서 그 성찬에 관여된 증거로 떡과 잔을 가정으로 가져가서 나누게 했다. 그리고 매일의 기도는 개인적인 자유로운 기도이기 보다는 강제성을 가진 것으로써 전 교인의 기도회에 참여로 이해되었으며, 4세기 경에는 적어도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에 회중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교회의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4) 기독교 예배는 통일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옛 시대의 신학자들은 신약시대에서 예배의 핵심으로서 기초가 될만한 사도적인 예배의 근원적인 형식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근년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실패되었으며, 벌써 사도 이후의 시대에 예배 실제는 얼마나 다양하게 이루어졌던가를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전적인 의식의 원천적인 모습과 근본구조의 공통성을 또한 보았다고도 한다.

5) 기독교의 예배는 사회적으로 공적화 된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행해진 예배였다(Arkandisziplin).
기독교의 예배는 처음부터 대중적이거나 사회적으로 공인된 공적 행사로서의 예배가 아니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은혜의 경험과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를 통하여 하나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매 주일에 모이는 성찬에도 이러한 조건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개방적이기보다는 특수한 모임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비밀리에 행하여 졌고 이방인과 세상 앞에서는 숨겨진 모임으로 특징 지워졌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 안에서 종교적 자유를 얻은 것은 4세기에 와서의 일이다.

성경의 무한한 다양성, 놀라운 통일성

우리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수집된 책을 소유하게 된다. 성경은 수백 년까지 서로 분리되며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고 흥망성쇠의 모든 상황아래 한 민족에게 보내진 책들로 되어 있다. 이제 단 한 사람의 동방의 왕족이 우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한 분이신 진실한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을 지키라고 부름을 받고, 한 입법자가 선택을 받아 황야에서 노예와 도망자와 같은 잘못된 백성에게 비할 바 없는 권위 있는 도덕률을 전하게 된다. 예언자들과 왕들은 백성이 정죄 가운데 또는 배교의 상태에 있거나 최고의 전성기 또는 패망 직전에 있거나 간에 그 백성들에게 진리를 전해 준다. 그리고 이 책은 제사장들과 포로들이 비참하게 추방당할 때 연약한 그들을 위로하거나 격려해주고, 학식이 없고 무지한 소수 사람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주며, 그리고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구세주의 참혹한 모습 등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어느 회심한 바리새인의 왕성한 지혜와 시적 영감을 통해 새로운 복음을 전해 준다. 갈릴리의 어느 한 어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문체로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광경을 간직한 채 요한계시록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은 책 한권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신성한 진리가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진리는 인간의 마음처럼 깊고 인간의 생활처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무한한 다양성은 자연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훨씬 더 놀라운 세계의 통일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왕과 용사, 예언자와 역사가, 시인들과 포로들, 양치는 목동들과 무화과 나무 열매를 수집하는 사람, 어부들과 세리들이 -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자신들의 언어로 전파하는 것을 성경에서 본다.” 우리가 어느 상처받은 갈대아인의 귀족이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를 읽거나 어느 유명한 메소포타미아의 마술사의 격조 높은 말을 읽거나 간에, 우리가 읽고 있는 것 이 속세에 물든 자들의 냉소적인 고백이든지 아니면 죄를 짓고 참회하는 어느 왕의 애절한 외침이든지 간에- 또는 영광스러운 구속하심에 대한 즐거운 감사의 기도이거나, 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정적인 비난이거나 아니면 어떤 찬란한 하늘의 환상이 깃든 장엄한 음악이거나 또는 무익한 종을 용서해 달라는 늙은 간수가 쓴 짤막한 편지이거나 간에,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성스러운 일관성과 온전한 통일성이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오랜 기간에 걸친 장구한 역사가 또한 상징과 예언으로 되어 있으며, 성경 각 책을 기록한 자는 때때로 자기 자신보다는 더욱 숭고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사용된 도구, 온전한 도구에 불과하였고 언어를 사용하는 자는 때때로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심오한 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구약 안에 신약이 미리 예시되어 있고 신약에서 구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늘 모든 역사안에 계시지만 이 민족의 역사처럼 중요한 역사를 가져본 민족이 없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존귀를 이들만큼 알거나 이들만큼 가르친 사람도 여지껏 없었다.
성경은 반드시 체계화되지 않은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순서나 배열같은 것이 성경에는 시도되고 있지 않다. 성경의 교리와 교훈들을 분류하고 정리 조정하여 체계화시키는 작업들을 의무라는 강령이나 규례로 조직화하려는 경향이 전혀 시도되지 않고 있다. 성겨의 교훈과 교리는 오직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만 나타나 있다.
성경과 자연의 구조 사이에는 단일한 유사성이 있다. 전체를 위하여 똑같은 질서와 조정이 필요하고 똑같이 깊은 조화가 이룩된다. 성경은 신학의 체계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하늘이 천문학의 체계를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진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성경의 진리는 처음에는 외견상 궤도가 사방에서 서로 교차되는 것 같이 유성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지도와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의 참된 중심을 발견하기만 하면 진리의 궤도는 하늘의 별처럼 자기의 위치를 정하고 그 중심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체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불러 일으켜진 사색적인 노력과 지적인 고심이 다른 어떠한 과학에 대한 열망보다도 더 강렬하다. 성경에 대한 의문이 단지 철학자의 정신만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윤리학의 체계를 갖는다. 그렇지만 성경은 지구가 지질학의 체계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학의 체계를 갖는다. 그런데 오랫동안 생기없고 비과학적인 독자가 성경의 윤리 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성경의 각 장을 눈으로만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인간이 거의 6천년 동안 땅을 밟고 다녀도 땅의 표면이 순서있게 나누어져서 지층이 규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복음성가에 대한 정의

“하나님이나 그의 3위중 일위가 이룩하신 어떤 역사나 그의 속성과 복음등 그에 관한 어떤 사실을 들어 그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노래를 「복음 찬송가」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의 간증을 노래하거나 성도들 또는 불신자들에게 교훈과 권면, 위로를 노래에 담아 부흥집회나 전도집회에 사용하는 것을 복음성가라고 김경선 학자는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음악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복음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기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복음의 내용이 강조된 찬송가를 원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복음찬미(Evangelical Hymn)였었다.
둘째, 신자들을 위한 부흥집회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구원사에 관계된 여러사건들, 내세에 관한 교리들, 이들외에도 다른 많은 기독교교리 및 윤리 등등의 내용을 노래로써 간증하여 설교하고 훈계하며 권면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Evangelical hymn 혹은 Gospel hymn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들 명칭들이 나중에는 Gospel Song이라고 불리워졌다.
이와 같이 「복음찬송가」와 「복음성가」의 명칭은 가사내용을 분석하여 결정된 복잡성을 띤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내용이 성격상 「복음전도가」 혹은 「복음선교가」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복음찬송가」의 명칭구별과 분류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복음찬송가는 낱말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의 면에서나 학자들이 내린 정의면에서 볼 때 「찬송가」유형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회회중이 노래 부를 수 있는 교회회중성가로는 「찬송가와 복음성가」만으로 대별하여 명료화함으로 명칭과 종류에 관계된 혼란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분류과 아울러 복음성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복음성가는 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업적
② 각 위의 속성과 업적
③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사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관련되었 던 모든 사물과 일들
④ 기독교 교리 및 기독교 도덕 윤리
⑤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체험하여 느낀 영적 경험들, 즉 ①②③④⑤ 이 모든 것들을 내용으로 한 신앙고백을 노래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음성가는 원래 부흥회나 전도집회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인 동시에 사람을 향하여 간증,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Only God Can Promote the Righteous

We must also remember that the prophet Samuel did nothing to exalt himself to the position of prophet-judge in Israel. As you read through the columns below, eval‎!uate the application of this principle to your own life and ministry.


SAMUEL TODAY'S CHRISTIAN LEADER
Samuel was chosen by God Do I sense a real divine call and
before ministry. destiny upon my life?


Samuel was dedicated to Do I realize that my divine calling
ministry in the temple by may have much to do with the way
his parents. my parents or other prayed for me
before I was born, or when I was
a young child?


Samuel ministered before Am I willing to believe that God
the Lord as a child. has so ordained my life that He can
and will (if I ask Him) use all of the
things in my younger years for His
glory in my ministry?


Samuel ministered unto the Am I striving to make a better
Lord under Eli's leadership. position for myself, or do I submit,
as unto the Lord, when those over me in the Lord make a decision
with which I disagree?


Samuel was sleeping when Am I so rested and content in my
God first called him by present ministry that God could call
His Spirit. me, as out of a sleep, to do the next
thing He wants me to do?


Samuel became a servant in Am I willing to do menial service
the temple, and was in charge in the house of the Lord, though
of opening and closing its I feel a higher calling upon my
doors. life?


Samuel did not try to exalt Do I tell everyone how great is
himself by freely proclaiming God's calling on my life, or do I wait
to everyone the prophecy for the Lord to bring it to pass in
that he had received about His timing and in His way?
his future exaltation.


From the points above, we can see Samuel did nothing to exalt his own ministry. May it be the same for all of God's leaders. If someone has a call of God upon his or her life, God will exalt that person in His due season.


삶의 시련


야고보는 성도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시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힘들게 살기로 결단한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주지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 매우 심한 박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해졌다. 약1:2-4절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시험'(2절)이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믿음의 시련', 즉 그들이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하는 시련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대답은 이것이다. '기쁘게 여기라'(2절). '여기라'의 헬라어 '헤게사스데'는 '평가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어떤 사람이 시련 중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는 내일에 되어질 나의 모습이다. 세네카(Seneca)는 "우리의 슬픔은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의견과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시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시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란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의 것 이외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내가 당한 시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이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믿음의 시련'이라는 단어는 3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본뭄에 기록된 것이고 나머지는 베드로전서1:7의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에, 그리고 욥기23:10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에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구절들과 비교해 볼 때 '시련은 연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련이 장차 우리를 어떤 자리로 인도할 것을 안다면, 비록 시험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야고보의 교훈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생각컨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는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인식이 전제된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야고보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옛 서양 격언에 "생각이 바꿔지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꿔지면 운명이 바뀐다"라는 말이 있다. 먼저 생각이 바뀌어져야 한다. 시련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정리될 때, 시련을 맞이하는 삶의 태도 즉, 행동이 바뀌게 될 것이며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갈 때 그의 삶은 바뀌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4절). "온전'(텔레이오이)이란 '성숙'을 의미한다. 헬라에서는 견습공이 훈련 기간을 다 끝내고 정식으로 일을 맡게 될 때 '온전'이란 말을 사용한다. 또한 '구비'(홀로클레로이)란 구약성경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서 '흠이 없다'는 뜻이다. 야고보는 이 두 단어를 합성하여 '모든 점에서 완전하게 되었다'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에게 시련이 임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시련 가운데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자녀로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련은 어떤 숨겨진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바로잡기 위한,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인 것이다.

능력의 필요

우리들은 설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절박하고 불가결한 필요성을 상기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우리들은 보기에 애처로운 오늘의 교회의 무기력함에 의해서 모두 압박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세계의 몇몇 곳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고 계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지역에서, 특히 전통 있는 더 오래되고 역사적인 교회에서 생명이나 능력의 자취는 사라졌다. 교인들의 수나 어떤 사회적 활동이나 바쁘게 짜인 계획들은 있을지 모르나 능력은 거의 잃고 있는 것이다. 영국 교회도 솔직히 말하면 전체로써 국가에 별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시대에 뒤떨어져서 적응성을 잃은 한낱 시대 착오적인 유물 정도로 보고 있다. 그들에 대해서 교회는 무기력하고 퇴폐적이다. 크게는 교회가 능력을 잃었는가 하면 우리들 자신의 목회활동도 또 어떠한가?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개심되고 있는가? 감정적으로 선동되거나 피상적으로 영향을 받음이 없이 성령의 은혜로우신 역사에 의해서 깊고 영원하게 중생하고 있는가? 만일 온 세계의 강단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히운'(눅24:49) 사람들에 의해서 점유있을찐대 우리들은 '이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롬1:16).
우리들이 능력을 받는 첫걸음은 우리들에게 능력이 없음을 겸손하게 시인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것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교회들은 지금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통계를 사용하는데 바쁘다. 우리들은 오늘의 교회의 연약성을 인정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 같다. 우리들은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외면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교회의 세속화와 죄의 확신의 결여와 하나님의 '비젼'의 결여, 예배 의식의 형식화, 성도들 간의 피상적인 교제, 전도 활동에 있어서 나타나는 불순종, 우리 앞에 설정된 산상보훈의 온유와 성결의 표준에 접근해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한 생활 등등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생활의 능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목회의 능력도 필요하다. 설교자로서 우리들이 인간의 연약한 힘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려는 것이 헛된 시도임을 볼 수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우리가 단순히 사람들을 계몽하거나 설득의 범위 넘어에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의 타락사에 대한 성서의 평가를 고려할 수 있을 때 나타난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비중생적인, 자연 상태 그대로 있는 사람은 눈이 멀어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생각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까닭입니다'(고후4:4).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보고 믿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사도 바울은 옛 창조와 새 창조와의 사이의 유추를 사용한다.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창1:2) 있을 때인 우주의 최초의 혼돈 상태에로, 수백 만년 뒤로 이끌어준다. 하나님의 창조력 있는 말씀이 빛과 따스함과 형체와 아름다움을 가져 오시기까지 모든 것은 형체가 없고 생명이 없고 활기가 없으며 어둡고 공허하였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연인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시기까지 자연인의 희미한 여명은 모두가 어둡고 공허하고 차가움 뿐이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을 비추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고후4:6).
사람들은 눈은 멀었을 뿐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었으며',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2:1,4:18). 예수님 자신도 이것을 가르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요5:24). 듣고 믿은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면 그들이 이전에 죽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는 보지도 못하고 생기도 없다. 눈멀고 죽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에게 손을 뻗칠 수 있는가? 어쨌든 우리의 설득이나 웅변으로 사람들 속에 영적인 깨달음이나 생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로 우리는 어리석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눈 먼 자에게 시력을,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우리의 권한 속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만이 빛과 생명의 창조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눈 먼 자의 눈을 여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셨던 주님은 오늘도 그와 같이 하실 수 있다. 오직 주님의 가르치심만이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비늘을 떨어버리실 수 있다. 오직 주님의 음성만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수 있다(요5:25).
하나님의 능력만이 눈먼 자로 볼 수 있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면 이 능력은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어떻게 설교자들이 다른 사람들로 믿게 할 수 있는 종들이 되며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통로 구실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장 7절로부터 2장 5절까지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된 곳은 없다. 이 구절은 다른 어느 구절보다도 설교자들이 읽고 연구해야 할 구절일 것이며 우리들은 이 구절에 의해서 우리의 목회를 판단하고 개혁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뒤나미스' 즉 능력에 대한 언급이 다섯 번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뒤나미스 데우'가 그러하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능력을 잃어버릴 까 두려워'했다(17절).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두 번씩이나 하였다(1:18,23,24). 더구나 바울은 이 멧시지를 '교묘한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말'로 전파하지 않고 '다만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하여 '사람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2:4,5).
이 신적 능역이 어디에 있는가는 이 구절의 첫절에서 벌써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인간의 지혜로운 말을 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7절).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멧시지의 기원(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그것이 알려지게 하기 위함이다)과 본질(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쁜 소식이다)과 전파의 양식(웅변적인 지혜로써가 아님)을 소개한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설교의 이 세 가지 국면에 관해서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살펴 보아야 한다.

마음의 정결(Purity of Heart)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실 때에 그 사역의 주체적인 대상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heart)이란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만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 정서, 사고, 지성, 목표 등을 모두 포함하는 속사람(inner man) 전부를 나타내는 성서적 표현이다. 성서에 사람(person)이라는 표현은 곧 그의 마음을 의미하며, 이는 전 인격적 총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죄인을 온전히 깨끗케 한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우선 도덕적 정결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정결한 마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동시에 당신의 자녀들을 정결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정결케 한다" "깨끗하게 한다" "씻어 맑힌다"등의 표현은 마음의 정결을 의미한다. 웨슬레도 찬송가와 성시 제3권의 서문에서 완전을 마음의 정결로 설명하였다.

완전한 자란 바로 '모든 더러움과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깨끗하게 하시며, 모든 불결에서 너희 를 구하겠다'는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이 성취된 자를 뜻한다.

또한 마음의 정결은 "의도의 순수성"(동기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 곧 한 마음을 뜻한다. 이는 웨슬레가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책 거룩한 삶과 죽음의 법칙과 실천이란 책을 1725년에 읽고서 얻은 성결의 개념이다. 웨슬레가 말하는 의도의 순수성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저서 메도디스트의 특성에 잘 나타나 있다.

메도디스트란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 그들의 마음은 순수하며,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정결은 성결의 순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내적인 죄, 생래적인 죄, 죄의 원칙 - 그로부터 모든 죄가 나오게 되는(막7:23) - 이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내재하는 죄로부터의 전적인 해방으로서 성결에 대한 소극적 표현이다.

회심의 결과

회심은 하나님을 떠나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시작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까지의 시작과 진행과 성숙을 말한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심을 통하여 회복이 된다. 이로 인하여 사람은 정체감을 되찾게 되어 삶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데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성품의 변화를 가져온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이다. 하나님과 소외되었던 관계에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이에 따라 하나님과 화해되며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 시작된다. 이 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생명을 되찾으며 삶의 차원이 현세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얻는다(요3:16). 그리고 잃어버렸던 정체감을 되찾아(고후5:17) 삶의 목적이 변한다. 삶의 목적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어 간다. 삶의 목적의 변화는 적극적 변화와 소극적 변화를 들 수 있다. 적극적 변화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기쁨과 소원을 가지고 산다. 소극적 변화로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닌 모든 죄를 매우 싫어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앞에서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람은 자기 중심적 사랑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중심적 사랑으로 사랑의 주체가 바뀌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성령은 사람의 지식과 의지와 사랑을 변형시킨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사람의 사고, 동기, 태도, 가치관 등 내면적 요소와 언어, 행동 등의 외면적 요소까지 바꾸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어 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학습자는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 깊어 가게 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회심의 결과, 즉 학습의 결과 학습자의 변화가 기독교 교육에 시사하는 바는 아래와 같다. 첫째, 학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시작되며,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자신의 정체감, 즉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되찾는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셋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 깊어 감에 따라 사람의 성품의 내면적 요소와 외면적 요소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제자직

제자란 말은 배우다라는 뜻의 동사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제자직'은 배우는 과정을 의미하나, 이 말은 통례적으로 선생의 교훈과 행실, 그리고 생활 방법을 따르는 제자의 직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1. 개념
제자직에 대한 관념은 구약 성경에도 나타나지만 그 본격적인 적용례는 신약 시대에 드러난다. 특히 '제자'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을 나타낼 때였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들을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의 열 두 제자이며 둘째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2. 필요 조건
제자라는 말 속에는 따르고자 하는 스승의 말씀과 교훈을 추종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 스승의 삶 자체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은 처음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을 때 자기들의 모든 생업과 가족까지 남겨 두고 예수를 좇았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필요시에는 인간 관계의 단절마저 불사해야 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의 강력한 요청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은 십자가에 자아를 못박은 삶, 즉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삶에로의 부름이다.
한편 이러한 제자직이 그 조건으로서 절대적으로 모든 인간 관계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에 의해 나타난다. 다만 예수를 따름에 있어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설령 자신의 부모, 형제나 소중히 여기는 여타의 어느 것이라 하더라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사명과 책임
예수이 제자된 자들의 사명은 복음 증거이며, 그 책임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함축되어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마감하신 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모든 제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사명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고별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으로 모든 제자들이 평생 동안 실천해야 할 제자도의 으뜸 강령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잊고서 복잡한 인간의 이해 관계와 몰인정한 세태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예수께서 주신 사명과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마7:21-23).

제자직

제자란 말은 배우다라는 뜻의 동사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제자직'은 배우는 과정을 의미하나, 이 말은 통례적으로 선생의 교훈과 행실, 그리고 생활 방법을 따르는 제자의 직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1. 개념
제자직에 대한 관념은 구약 성경에도 나타나지만 그 본격적인 적용례는 신약 시대에 드러난다. 특히 '제자'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을 나타낼 때였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들을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의 열 두 제자이며 둘째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2. 필요 조건
제자라는 말 속에는 따르고자 하는 스승의 말씀과 교훈을 추종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 스승의 삶 자체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은 처음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을 때 자기들의 모든 생업과 가족까지 남겨 두고 예수를 좇았다.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필요시에는 인간 관계의 단절마저 불사해야 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의 강력한 요청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은 십자가에 자아를 못박은 삶, 즉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삶에로의 부름이다.
한편 이러한 제자직이 그 조건으로서 절대적으로 모든 인간 관계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에 의해 나타난다. 다만 예수를 따름에 있어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설령 자신의 부모, 형제나 소중히 여기는 여타의 어느 것이라 하더라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사명과 책임
예수이 제자된 자들의 사명은 복음 증거이며, 그 책임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속에 함축되어 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마감하신 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모든 제자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사명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고별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으로 모든 제자들이 평생 동안 실천해야 할 제자도의 으뜸 강령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잊고서 복잡한 인간의 이해 관계와 몰인정한 세태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실로 예수께서 주신 사명과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마7:21-23).

주일

기독교의 예배는 근본적으로 유대 종교에서처럼 결정적인 장소나 공간에 결부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시 결정적인 시간에 결부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법으로부터는 자유라는 것과 의무규정이나 어떤 다른 날들에서 결정된 구별된 날을 예배하는 날로 지켜야 하는 일에서는 자유하다는 것을 안다(갈3,23-25;레23장과 비교).
원래 유대인들과 유대종교는 7일을 한 주간으로 계산하였으며, 다시 7일을 기준으로 무조건적인 안식일로 규정하여 십계명에 명시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안식한 날을 세상의 노동에서 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인의 예배, 즉 기독교의 예배는 한 날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예배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고 할 것이다(행2,46).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임에서 가장 중심적인 의미를 지닌 날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부활한 날을 기억하게 되었다(마28,1). 그리고 이 날에 제자들은 그들의 공동체와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는 날로 인식하게 되었다(요20,19;26). 또한 주간의 첫날에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여 온 것이다(행2,1). 이 날에 거룩한 성만찬이 특별히 시행되었던 것이다(행20,7). 그리고 요한계시록1,10에는 벌써 '주님의 날'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일요일"(Sonntage:Dies Solis)이란 이름은 이방 세계에서 이미 태양의 날로 불리워진 것으로, 그리스도와 관련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첫날에 빛을 만드신 날과 연관시켜 기독교의 날로 해석하였다.
주간의 첫날에 예배하는 일은 7일의 안식일이 주간의 첫날로 옮겨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유대종교의 모임 날을 피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임의 날로 약 4세기경까지 계속된 것으로 본다. 안식일의 계명(4계명)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일의 외형적인 의미를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영적인 의미 안에서만 이해하였던 것이다.
후에 321년 콘스탄틴 황제 때에 일요일이 기독교의 예배의 날로 명명되면서 동시에 국가적으로 노동을 쉬는 날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다시금 구약의 안식일의 계명의 의의를 되살리게 되었다.
중세 카톨릭교회로 발전하면서 안식일은 예배를 행하는 날로, 그리고 노동을 쉬는 날의 의미가 법제화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의무화 되었다고 하겠다. 이것을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새언약의 안식일로 불렀다고 한다.
중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은 근원적이며 복음적인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데, 일요일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기다리는 시가니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요일의 거룩성은 강요된 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의 들음을 통하여 거룩해 지는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서는 복음적인 일요일의 의미는 곧 법적이며 강요된 안식일의 의미로 변화되는 경향을 갖는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의 반복되는 주간의 리듬 안에서 예수의 부활의 사건을 기억되는 것이며, 동시에 부활의 주님이 말씀과 성찬을 통하여 그의 회중 가운데 함께 임하심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십일조의 신약적 의미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 제사의 유지를 위하여 드려졌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일조는 특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활비로 활용될 수 있게끔 바쳐졌다(민18:21-24). 따라서 십일조는 성전, 특히 레위인 및 제사장의 직무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된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성전과 그의 부속된 것들 곧 제사장, 레위인, 희생 제물 등은 그것들의 원형(Antitype)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무의미하게 되었다(히10: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희생 제사를 드리거나 스스로 제사장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전면 부정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의 십일조 역시 의무적 규정으로서는 강조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 제도를 인정하신 일이 분명히 있지만(마23:23;눅11:42) 이것은 십일조의 의무적 규정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런 규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 뜻을 이해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구속사적 변역을 인정치 않는다면(히7:12), 오늘날의 십일조 제도는 여전히 의식과 형식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 실례를 보면 구약의 십일조는
1.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18:21-24),
2. 절기 준수시 성전에 모일 때 사용되는 비용을 위한 십일조(신14:23-26),
3. 매 삼 년마다 드려졌던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신14:28,29) 등 세 가지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 성경은 성도들에게 3/10의 의무적 헌금을 요구한 셈이다. 그래서 느헤미야서와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단수인 '마아세르'가 아니라 '메아세림'으로 표기하고 있다(느10:37;말3:10).
따라서 만일 오늘날에도 구약의 십일조 제도가 의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1/10이 아니 3/10을 헌납 비율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십일조 제도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3/10을 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돌판에 율법이 새겨져 있는(렘31:33;히8:10)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옛 언약 아래서 지켜졌던 법적인 십일조 제도에 얽매이지 말고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신앙 양심에 따른 헌금 원리를 익혀야만 한다. 즉, 바울의 헌금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과(고후8:3), 이를 얻은 대로(고전16:2) 드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일률적인 헌납 비율을 정하지 않고 오히려 헌납자 자신의 신앙 수준과 형편을 고려하여 바치기를 의도했던 것이다.

신약 시대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사가 광범위하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주어진 때는 초기 기독 교회 시대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시에 한 곳에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던 사도들에게 주어지기 시작한 성령의 은사(행2:1-4)는 이후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행6:5-8;8:7) 및 사도 바울(행14:8-10;20:9-12) 그리고 온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어졌다(고전12:28). 그리하여 그들을 각종 방언과 예언을 하며(행2:4-11;11:28;21:11) 병을 고치고(행3:1-10) 귀신을 쫓아내며(행8:7;16:18) 죽은 자를 살리는(행9:40) 등의 능력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처럼 초대 교회에 집중적으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을 온 세계로 확산시키며 도처마다 교회를 설립하시려 한 하나님의 계획과 설립에 기인한다(행1:8). 그러기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복음을 증거하며 역사하는 곳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무수한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행2:41;5:12;8:5,6;16:33,34;28:23,24) 그 결과 유대와 사마리아, 소아시아, 유럽 등지에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방언과 신유,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시대보다 훨씬 복음이 널리 전파된 오늘날에 있어서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가르치는 직분과 봉사하는 직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은 은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곧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인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결과인 이웃사랑

웨슬리의 언급에 의하면(상호 인격적인 관계에 서 있는) 하나님 사랑이 이타적인 이웃사랑이 생겨나고 실천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면 믿음 안에서 인식되고 체험된 하나님 사랑의 결과로서의 실천적 이웃사랑 또한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거듭난 그리고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성화의 출발점인 믿음과 본질적인 내용인 사랑, 이 둘 모두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믿음이 없이는 사랑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적으로 전달하지 않는 믿음도 없다.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아들을 아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하늘과 땅의 아버지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인간을 사랑하도록 요청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어느것 하나없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분리될 수 없이 상호 결합적이다.
이웃사랑의 특징은 무아성과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는 어떤 한계도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미움도 한계가 되지 못한다. 국적이나 인종의 차이, 사회적인(소외된 자의) 위치나 종교적 혹은 사상적인 차이를 가진 인간은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웨슬리의 신학적 윤리의 맥락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웨슬리의 윤리에서는 어떤 인간이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치를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받는 존재라는데 근거하여 갖고 있다. “모든 인간, 아담의 모든 자녀”,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웃이라고 웨슬리는 반복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간에게 유효한 것처럼 이웃사랑도 그렇다. 이웃사랑을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준다면 그것은 보편적 사랑이라른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로마서 15:2에 관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이 흘러가는 손님처럼 당신을 방문하게 하지 말고 당신 영혼에 항상 함께하는 분위기가 되게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순전하고 가식없는 선한 뜻으로 충만해지도록 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제한하지 말고 모든 인간을 포괄하게 하십시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당신의 선한 뜻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몇사람에게만 빚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시며,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또 형제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회를 갖는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계명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웨슬리는 이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들의 논증방식으로 말하여 자신의 윤리적인 원리의 정당성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가 철학적 상대자들과 논쟁을 버리는 현실적인 동기에서 그의 윤리 안으로 받아들이 부수적인 측면일 뿐이다. 다른 사람 안에서 상응하는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랑은 이해타산에서 전적으로 자유하여 인간을 본래적인 행복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지식의 결과로써 우리는 창조된 바로 그 행복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화는 가장 심호한 성취, 곧 행복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웨슬리는 바울 신학의 전통에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됨을 인간의 인격중심인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소급시킨다. 이때 기독론이 비록 배후로 물러나기는 하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일차적으로 창조주에 대한 감사로부터 생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이 그리스도의 계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스스로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오직 믿음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에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이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행위는 본질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의의는 비단 의롭다하심 속에 있는 사랑의 출발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 속에 그리스도의 자세를 생생히 살아있게 하며 또 그로 하여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힘을 주는 그러한 그리스도 관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랑의 지배는 현세적인 삶 동안에 늘 위협을 받는다: 부, 이성과 감정의 굴절, 연약함, 유혹, 특히 죄가 믿는 사람들에게도 있어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 정신을 퇴행시키거나 파괴시킨다: 회개와 갱신을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를 다시 소성하게 할 수 있다. 성화의 유일한 내용이며 타락 이전의 아담과 천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사랑 안에서의 완전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생 동안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성화 또한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며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아마도 도달할 수 있르지도 모르는 완전의 정도(원칙적으로 보아 이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에 관한 공상 보다도 웨슬리의 윤리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성장의 가능성과 필연성이라는 견해이다. 웨슬 리가 루터의 동시라는 전체측면(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다-역자 주)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에게는 부분측면이 그만큼 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렇다. 당신이 어느 정도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했다면…결코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계속 올라가든지 아니면 떨어져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원칙적으로 선하고 완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의 신앙적 결합을 통하여 늘 새로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 속에서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또 그럼으로써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강화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의 성장은 이 사랑이 전체 행위의 규범적인 동기와 척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과제이다. 먼저 믿음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며 “살아있는, 구원하는 원리”이다: 이 믿음의 목표는 인간들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삶 속에 있는 최고의 목표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하라”고 외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사회윤리와 무수한 사회활동들을 위한 초석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사랑은 성화의 기본 동기이며 본질적인 내용이며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 속에서 일어나는 동료적인 행위인 사회윤리의 토대가 됨을 우리는 확실하게 보았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사랑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야 하는냐이다. 달리 물어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그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가 보편적인 사랑의 계명에 일치하려 한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가? 많은 경우에 사랑에 의해서 지배되어 실행되어지는 자발적인 행동들이 이러한 물음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지만 또다른 경우에는 윤리적인 행동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좀 더 정확한 척도들이 필요할 것이다.
웨슬리는 내용적으로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하나님의 뜻, 곧 개개인과 사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있어서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세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계명들, 예수와 다른 사람들의 모범 및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한 자기 자신의 통찰이 그 셋이다.

아브라함 - 모든 믿은 자의 조상

1. 인적사항
셈의 후손
우상 숭배자 데라의 아들
갈대아 우르 출신
이복 누이 동생 사라와 결혼
존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개명됨
적자 이삭과 기타 많은 서자들을 둠

2. 시대적 배경
그가 출생한 B.C.2166년경 당시 갈대아 우르에는 우르 왕조가 번성했으며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가 흥왕했다. 또한 그가 2091년경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주한 가나안 땅에는 이미 여호와를 모르는 토착 정착민들이 도시 국가 체재 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여도 이것이 꼭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3. 평가 및 교훈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아가 결국 하나님의 가나안 땅 기업 약속과 자손 등 축복을 받았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있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정착시 나그네와 같이 정착민 가운데서 장막 생활을 하였는데,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이 세상에는 영원한 성이 없음을 알고 나그네로서 천성을 보고 나아가야 하겠다.
아브라함은 늙었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자녀 약속을 받고서 비록 도중에 육신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끝까지 참고서 적자 이삭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바람으로 그 약속의 성취를 받는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하겠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이방인이 아내를 욕보일 지경에 까지 이른 경우가 두 번 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서의 잠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방 땅에 내려 갔을 때이다. 이것은 성도는 약속된 땅 안에 즉 신앙 생활 안에 거해야만 수치와 시련을 당치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아무리 잠시 이방 땅에 거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현명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고 약속의 땅을 떠난 것은 죄이다. 또 역으로는 하나님은 성도가 약속의 땅을 떠났을 때에는 시련을 주셔서라도 다시 데리고 오심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낯설은 손님일지라도 대접하기를 힘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천사를 대접한 일이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에 의해 확증된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교회에서 생긴 것은 아니다.
성경의 권위와 신성은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당신의 신성한 진리를 영원히 신성하게 복종 하시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어야 말씀의 신성한 권위가 살게 된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 승인을 얻어야 그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큰 잘못을 범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면 성경에 약속하
신 모든 말씀이 다 교회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가공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주장을 말한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들은 바울의 말 한 마디로 깨끗이 정리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엡2:20). 이 말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기 전에 사도들이 있었고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말씀이 교회를 세운 것이지, 교회가 말씀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성경을 진리로 인정해야 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하신 말씀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3. 성경의 증거는 모든 다른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적 증거를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복종시키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한 최고의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에서 보다 언제나 최고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순결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들이 마땅히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논쟁을 해서 성경 말씀을 판단하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 보기에 좀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도 성경 말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다면 권위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적 증거를 가지게 하고, 사람이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능력을 나타내신다.

4. 성경은 자증(自證)한다.
참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이성에 종속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을 성경에 예속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게 효과적으로 절대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0)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오류도 없는 진리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며"(사54:13)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내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2-14)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유대인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여호와의 팔이 나타난 사람들만 안다"(사53:1)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13: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도록 은혜를 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상고하여 은혜를 받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온 만물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은망덕한 죄에 대해 일체의 변명의 여지를 없앤다. 그것은 하나님 실존의 생생한 증거를 피조물의 자연 세계 속에서 너무 명백히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얻은 것보다 훨씬 더 명백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자연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 울타리 안에 둘러 싸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눈이 나쁜 사람이 좋은 안경을 쓰는 것과 같다. 혼란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신다.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모든 지능과 지혜를 초월한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믿음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도록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시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 율법이 공포되고, 이 율법의 해석자로 선지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 율법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롬10:4)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만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계시하신 이외에도 거짓된 일군(一群)의 신들과, 그들의 명백한 특징들을 말씀하여 참 하나님과 혼돈되지 않도록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빛을 받아야 건전한 종교적 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증거를 경건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가능한 것이다.

3. 성경에서 떠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에 빠지고 날조된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고, 세속적 욕심에 빠저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며 인간의 잘못된 감정과 종교적 오류가 얼마나 그릇되고 방자한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한 계시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지 않았고, 자연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를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부패한 판단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순수한 구원의 말씀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미혹하는 미신은 추방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시는 분"이라고 다윗은 말했다(시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권능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19:1-2)이라고 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19:7)라고 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이 우주의 우뢰, 바람, 소나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고"라고 말하고 나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도다"라고 말씀을 맺고 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93:1-5)라고 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도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4:22)라고 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다 말씀 밖에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공허와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단질문

1. 성경과 나와의 관계성은 어떻게 맺고 있는가?

2. 성경에 대한 확신은 언제 드는가?

3.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진리가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오는 묵상

말씀 묵상의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 있다면 여호수아일 것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이 짧은 한 절을 묵상하면, 말씀 묵상의 비결을 깨닫게 된다. 모든 승리와 형통의 비결을 깨닫게 된다.
말씀 묵상의 시작은 우리의 입에서부터이다. 말슴이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성경을 읽는 것이 말씀 묵상의 출발이다. 처음에는 성경의 짧은 한 권을 본문으로 택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건이나 비유를 읽어도 좋겠다. 거룩한 상상력을 사용해서 말씀을 읽으라. 그날 읽은 본문 중에서 핵심이 되는 구절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묵상은 되새김질이다. 소가 풀을 뜯어 먹은 후에 하루 종일 입으로 다시 끄집어 내어 잘게 씹어서 위로 내려 보내는 되새김질, 그 작업을 우리가 해야 한다.
많이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화된 음식만이 체내에서 에너지가 되는 법이다. 소화되어야만 생명이 된다. 홍수 났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홍수가 나면 온통 사방이 물 천지인데도 정작 먹을 물은 없다.
이 시대를 가리켜 흔히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들 말한다. 설교, 세미나 테이프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런데 생명수는 말라 있다. 말씀을 많이 들어서 귀는 커졌는데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들을 말씀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들은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묵상을 시작하는 분들게 아주 적은 양의 말씀을 입으로 읽는 데서 묵상을 시작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적은 양의 말씀을 붙잡았다면, 그것을 암송하라. 암송은 말씀을 생각에 새기는 것이다. 묵상 이전에 암송이 있어야 한다. 암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비결은 사랑하는 데 있다. 사랑이 무엇인가? 관심이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시간을 낸다. 말씀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된다. 관심을 갖게 되면 저절로 암송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번에 외우지 못하더라도 반복해 보라. 안 외워질 수가 없다. 반복은 암송의 또 하나 비결이고 학습의 원리이기도 하다. 반복을 통해서 사고의 틀이 형성되고 거룩한 사고의 습관이 길러진다. 그리고 그 습관은 행동을 만들어 낸다.
말씀을 암송할 때는 머리를 사용해야 한다. 지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씀 암송의 단계에서 말씀 묵상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이때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다. 말씀 묵상의 목표는 비우는데 있지 않고 채우는 데 있다. 말씀으로 채우고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이다. 자신을 진리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셨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계속해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고 증언하고 있다.
죄악을 비우고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내려 놓은 다음에, 주님의 충만한 데서 받아서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말씀 묵상이다. 마음에 진리를 채우는 작업, 머리에 암송한 말씀을 마음에 채우는 작업이 말씀 묵상이다.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들 교육 헌장에 나오는 교육의 원리였다(신6:6-9).
말씀을 묵상하게 될 때 그 말씀은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다. 말씀을 감정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이내 내 삶의 한 부분이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깨달음을 주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깨달은 진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축복은 깨달음의 결과만은 아니다. 깨달은 말씀을 순종할 때 오는 결과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부분적으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말씀 묵상은 입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행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영생을 추구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영생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필수 요건이 갖춰야 한다.

1. 완전한 포기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기사는 청년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물러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영생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근심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무능력과 자격없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 행위로써 율법의 지향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온전히 포기하고 절망의 바닥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역사하기 만을 간구해야 했으며 제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했다(롬12:1).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인간이 절망할 때가, 곧 하나님이 역사하실 기회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2. 하나님 제일주의
부자 청년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적 계명들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재물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듣고서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탐욕이 곧 우상 숭배라 하였거니와(골3:5)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곧 우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재물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심지어 생명마저 기꺼이 내어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신앙 인격을 분열시키는 두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마6:24), 그 무엇보다도 비길 수 없는 천국 복음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마13:14).

3. 이웃 사랑
어떤 계명을 지켜야 영생에 이르겠느냐는 청년의 질문에 예수는 십계명의 일부를 나열하신 후 결론적으로 이웃 사랑의 대계명을 계시하셨다(마19:19). 기실 이 청년에게 부족한 점은 곧 이웃 사랑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무리 율법적 규례에 충실하다해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그 모든 노력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일 뿐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요일4:20). 가장 큰 계명은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막12:29-31).

점진적 성화(Gradual or Progressive Sanctification)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라고 불렀으나, 3장에서는 저들이 아직도 젖먹이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꾸중한다(3:1-3).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성장하여 온전한 성결을 이룬 자들이 있음을 “너희 중에 이와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리라”(고전6:11)라고 쓰고 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무언가 병들었거나 문제가 있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과 같이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점진적인 역사는 웨슬레에게 잘 나타난다. 구원은 ‘선행 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시키는 ‘깨닫는 은총’에서, 신앙의 단계 즉 ‘확신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작에서 완전까지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적인 구원은 믿고 회개함으로 가능하며, 이 때에 의로워짐과 동시에 성장하게 되며, 성도의 마음이 온전히 정결해 질 때에 순간적인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웨슬레에 의하면 칭의와 중생은 그 자체가 완전 성화는 아니며, 이것은 성화의 문이요, 입구이므로 완전 성화까지는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는 물론 성화된 자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죄가 그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며, 또 정죄 받음도 없으나 그에게는 죄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자는 비록 성화되었다 하나, 이것은 부분적일 따름이요, 그 속에는 죄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육체은 성령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의인, 중생에서 온전한 성화 까지의 과정을 점진적 성화라고 한다. 중생에서 성화에 이르지 못한 신자의 상태를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이 섞여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로는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장의 과정이다. 이 기간에 신자는 영적인 싸움을 무수히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를 교대로 겪게 될 때가 많다.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중요하며,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3:23)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적 신앙의 외적 증거요, 열매로서 선행의 필수성과 중요성이 이 때에 나타나게 된다. 점진적 성화에 대한 웨슬레의 가르침은 개혁주의(Reformed)의 성화에 대한 교훈과 같다. 그러나 차이점은 개혁주의에는 완전 성화를 인정치 않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에는 “하나님의 자유 은총의 역사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격적으로 새로워지며, 점차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지게 된다”고 하여 점진적 성화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배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모든 성경 공부는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려면, 마땅히 그리스도께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교과서이고, 그리스도는 교사이십니다. 사람의 지각을 여시고, 마음을 여시며, 인봉을 여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눅24:45, 행16:14, 계5:9).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영원한 말씀이시며, 기록된 성경 말씀은 그분에 관한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가르치심은 모든 참된 성경 공부의 비밀입니다. 우리를 살아계신 말씀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누구도 구약의 말씀을 경시했다는 이유로 우리 주님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구약의 말씀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삶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항상 구약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로 그리고 당신의 증거자료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주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으로 당신 자신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확실하게 이루어졌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숨을 내쉬며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성령을 받은 다음(요20:22),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자세히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과 그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분 사이의 가장 큰 장벽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회의 권위 혹은 성경 공부 모임이 그것을 승인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우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됩니다.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선 우리의 마음과 생활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의 유일한 교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성경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당신 내면의 가장 깊은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가져오신 것, 그분을 교사와 구주로 적합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주시며 또한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 이 모든 것이 이 한 구절,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한 가지 덕목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고, 우리의 고난받는 구속자가 되시며, 우리의 천국 교사와 지도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배우러 나아갈 때,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유일한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서 진실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도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의 교사, 곧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그분처럼 변화시키고 싶어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제자로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곧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께 나아와 그분께 배우고 그분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으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러면 왜 이것이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관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선과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땅한 태도, 곧 하나님께 끊임없이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인자(the Son of Man)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마음이 겸손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심령으로 천사들도 얼굴을 가리우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하나님을 그들에게 모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받고 모든 것을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이것,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 오직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사랑하며 배우는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며, 또한 성경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에만 그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는 겸손, 즉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을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연약함과 열매 없는 상태가, 많은 경우 바로 이것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들을 가르쳐 주실 수 있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각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러한 심령을 제자되는 첫 번째 조건,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틀림없이 가르쳐 주실 첫 번째 교훈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성경 공부는 그리스도께 배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너그러우며 인자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처럼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우리의 아침 경건 시간은 날마다 친교와 축복이 가득차고 넘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태도와 성품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태도와 성품 가운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씨와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없다면, 성경 공부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 안에서 이것을 찾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신중한 마음과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골방에 들어갔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현재 나의 마음은 나의 선생님이 원하시는 상태에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는 내 안에 그러한 심령이 생길 수 있도록 그분께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아닌가?”

홀로 있음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복음서는 자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홀로 외딴 곳으로 가신 사실을 말합니다. 누가는 그분의 기도를 열한 차례 언급합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첫 장에서, 저물어 해질 무렵 온 동네가 그분을 뵈러 왔을 때 그분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신 뒤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라고 말합니다. 그분을 열두 사도를 택하시기 전에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6:12). 완전히 홀로 계셨다는 이런 생각은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했고, 마태도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완전히 홀로 계실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겸비한 마음으로 살펴봅시다.

1. 홀로 있음
온전히 홀로, 오직 자기 자신과만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얼마나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며 그 결과 우리를 지치게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도 이 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고귀한 사명과 자신의 인간적인 약함과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할 필요와 자신의 힘을 모아야 할 필요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얼마나 더 더욱 이런 필요를 느끼는지 모릅니다. 세상 일들의 혼잡이나 신앙적인 일 가운데,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든지,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력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든지 모든 신자에게는 그 주인의 발걸음을 따라 그분과만 함께 있을 시간과 장소를 찾으라는 긴요한 요청입니다.

2. 영적인 실재와 함께 홀로 있음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의 권세들에게 드려 그 권세들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들이나 일시적인 것들과 접촉을 모두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맞서 싸워서 정복해야 할 어두운 왕국의 권세를 인식하고 자신이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 사람의 필요를 인식하며 자신이 그 뜻을 행하려고 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와 권세를 인식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당히 규칙적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에서 그보다 더 필수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영적인 실재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적으로는 영적인 실재를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이 마음과 생활에서는 종종 그것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존재에 대한 진리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무력하게 보입니다. 홀로 있음 - 이것이 유일한 열쇠입니다.

3.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홀로 있음
흔히 일이 곧 예배요 봉사가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만약 홀로 있는 시간과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우리 복되신 주님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경건 시간이 없이는 충만한 능력으로 자신의 사역을 하거나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사람으로서 특별한 사귐의 시간에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모든 사역을 가져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놓고 하나님의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의식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분이 “아들이…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단순 명료한 진리를 나타내고 계셨습니다. 즉 그분의 홀로 계심을 필수적인 일이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이 복된 기술을 깨닫고 실행하며 교회가 자기 자녀들에 대해 이런 높고 거룩한 특권에 대한 의식을 갖도록 훈련시키는 법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신자는 참으로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유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그분의 것으로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4. 말씀과 함께 홀로 있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사셨던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은 말씀을 섭취하여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홀로 계시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자신에 대해 하신 모든 말씀과 그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신, 자신이 행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해 의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그가 배워야 할 가장 깊은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는 말씀은 거의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요 말씀의 축복은 그것이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데려갈 때 온다는 사실이며 하나님의 입에서 얻은 말씀이 그것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할 힘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하고도 개인적인 사귐이 말씀을 생명과 능력이 되게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5. 기도 가운데 홀로 있음
기도는 사람의 모든 삶을 열어 하나님께 향하게 하며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능력을 구하게 합니다. 잠시 기도가 예수님께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사모하는 경배이자 겸비한 사랑이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간구였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르는 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따르는 법을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은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홀로 있음. 이 말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삶과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삶의 비밀을 보여 줍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시는 그분의 삶의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는, 홀로 있음이라는 이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밝혀 주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다루는 법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허물과 죄로 찌들어 있다. 물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겠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모두가 허물과 실수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상대의 허물을 꼬집고 밝히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기질이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아들 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한낱 조롱섞인 화제거리로 삼아 아버지의 권위와 인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떠벌임으로써 아버지를 모독하고 가정의 질서를 혼란케 했으며, 나아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신 하나님께 패역하는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결국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치졸한 성품과 경박하고 못난 마음을 공개했던 것이다.
반면에 함의 형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 그 허물을 가림으로써,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이 더 이상 실추되지 않게 했다. 즉 그들이 지닌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버지의 허물을 넉넉히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의 허물에 대한 비판과 조롱은 상대의 마음과 명예를 상하게 하고 자신을 천한 감정의 노예로 전락시키지만, 남의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행위는 남과 자신을 유익되게 한다. 본문(창세기9장)도 아비의 실수를 함은 자신의 저주로 삼았고, 셈과 야벳은 자신들의 축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허물과 죄를 용서받은 자이다(엡2:1). 성경은 이런 자를 참으로 복되다고 하였다(시32:1). 적어도 이렇게 큰 복과 사랑을 받은 자이면서도, 그 일이 진리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 아닐진데, 사소한 이웃의 허물에 흥분하며 파헤쳐 즐기기를 힘써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는 예수의 말씀에 조용히 귀기울여야 한다.

성도의 푯대(히12:1-13)

본문은 성도의 삶을 푯대를 바라보며 달리는 경주에 비유하면서(빌3:14;딤후4:7), 그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경주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믿음의 삶은 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힘든 경주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거한 자들이(11:2,4,5,39) 우리를 격려하고 있으며, 바라보고 달려갈 그리스도가 있음을 인지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그들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연단임을 피력하고 있다.

1. 경주의 자세
성도는 장거리를 뛰는 경주자와 같으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① 경주의 자세
성도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막5:35;눅5:18,19). 방해물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이다(1절). ‘무거운 것’이란 헬라 문학에서는 지나친 몸무게나 귀찮은 짐보따리 등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경주에 거추장스러운 죄나 경주자의 주의를 흩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달리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어둠의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1세기의 경주자는 경기장에 나설 때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달렸다고 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단단히 밀착하여 얽매는 죄이다. 죄는 우리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에 휘말려들기 쉽다. 죄의 증상은 아직도 계속되는 자신의 성격적 결함, 쉽게 저지르는 죄, 끊을 수 없는 습과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우리를 머나먼 경주에서 탈락시키거나 좌절케 한다.
② 경주자의 푯대
경주자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하기에 너무나 많은 제한과 연약성을 지니므로 인내의 표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가? 그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기 때문이다(2절). 그의 ‘즐거움’이란 이기주의적 기쁨이 아닌 자기 백성의 구원의 완성 때문에 가지시는 기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10:7,9) 낮아지고(2:14,17), 순종하는(5:8)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인 성도는 인내로써 아픔, 고난, 배신을 경험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열심히 좇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그가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상에 있는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고난받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으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계속 고난 받으신다. 본회퍼(Bonhoeffer)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당하기 아홉 달 전에 감옥에서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예수의 이름중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1:23)는 뜻이다. 그런데 ‘임마누엘’의 의미는 그의 언약 백성과 나누는 고난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예수는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셨으며 가난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출2:24;사63:9;마1:23;25:34-40). 이러한 예수를 바라보며 행장을 가볍게 하고 먼 길을 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기 개인의 믿음을 위한 인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도리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고난을 인내하는 적극적 차원으로 상승되어야 할 것이다.

2. 고난의 의의
본 서신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하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된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에 불과하다. 징계는 형벌적인 면과 교육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의 징계는 후자에 속한 것으로 성도들은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낙심하지도 말아야 한다. 도리어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사63:9;살전3:3).
로마의 부권 제도에 의하면 아버지는 자기의 가족에 대해 절대권을 가졌다. 만일 아들이 자라 결혼하여 자녀를 두면 아버지는 손자들에게까지 절대권을 가졌다. 아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그 아버지가 생존하는 한 아들은 역시 부권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를 언급했을 때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았다. 까닭없이 그 자녀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아버지가 없듯이,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징계 과정은 우리의 유익이 그 목표이다. 아버지의 훈계가 없다면 자녀들은 철없고 미숙한 상태에 머물 것이다. 징계는 자녀의 교훈과 훈련을 위한 질책이다. 이런 모진 과정을 이겨낸면 점점 더 성화의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더룩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게 된다.

3. 상황에 대한 권면
본 서신의 독자들은 ‘피곤’과 ‘연약’ 및 ‘어그러짐’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12, 13절). 그들은 모진 박해 가운데서 낙심과 좌절로 자포 자기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 35:3을 나름대로 인용하여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독자들에게 믿음에 굳게 설 것과 주위의 연약한 형제들을 도우라는 권면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당시 팔레스틴(Palestine)의 가정 교회들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흐려져서 유대교에 복귀하려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숙하고 훈련된 믿음의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또한 저자는 잠언 4:26을 인용하여 성도들이 목표를 향해 행진할 것을 촉구한다. 먼저 앞서서 나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그들 중에 낙심한 자들이 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 다시 전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각기 주변의 성도들에게 대한 책임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12, 13절을 성도들이 몸소 바로 행함으로써 일변 믿는 듯하면서 의심하는 다른 사람들을 교정시켜 주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어그러짐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아픔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만 내맡기고 있지 않는가? 그 당사자는 말없는 눈빛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징계에 대하여

징계는 히브리어로 ‘무사르’이며 헬라어로는 ‘파이데이아’로서 ‘훈육’, ‘징벌’, ‘교정’, ‘훈련’이라는 뜻이다. ‘징계’는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사람의 죄나 허물을 바르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스라엘의 가정과 사회에서 ‘징계’는 중요한 교육 방법이었다(잠13:24). 그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훈계를 위해 자주 채찍을 들었다(잠22:15). 신약 시대에도 같은 사상이 교회 및 신자에 대하여 적용되었다(고전11:32;고후6:9). 본고에서는 구약성경에서의 징계, 유대교에서의 징계 및 신약성경에서의 징계에 대하여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약성경에서의 징계
구약성경에서 ‘징계’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이스라엘과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11:2;시50:17;렘17:23;32:33). 이러한 교훈적인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그의 선택된 민족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레19:2). 이 거룩함이 깨지면 하나님께서는 가르침과 형벌과 보상으로써 계약 백성들을 지키신다. 율법은 특별히 하나의 교육적인 힘이다(시119편). 당시는 아버지가 어린 세대를 가르칠 책임이 있는 율법의 수호자였기에 아버지는 때때로 육체적인 징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육체적인 징벌은 사랑 가운데서 행해져야 하며 분노로 행해져서는 안 되었다.

2. 유대교에서의 징계
유대교의 회당은 경건의 훈련을 제공한다. 회당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덕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삼중적인 관점에서 바른 것을 선택하도록 가르친다. 필로(Philo)에 의하면, 영혼은 덕으로 훈련됨으로써만 선한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 ‘징계’는 구원의 뜻을 가진 샘 또는 근원이다. 물론 이것은 궁극적인 근거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요세푸스(Josephus)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가르침과 실천을 포괄하며 종교는 그 목표이다. 그는 율법이 가르침과 실천의 가장 훌륭한 융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헬라의 문화 규범을 받아들여 구약의 징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후기 유대교 신학에서는 고난을 통한 징계가 나타난다. 랍비(Rabbi)들은 하나님의 교육 방식이 본질적으로 교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향은 마카비 시대에 나타났다. 훈계는 징계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랍비 문헌에 있어서 징계는 죄를 전제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질책이며 교정이지만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3. 신약에서의 징계
바울은 율법은 제한된 효력을 가질 뿐 율법의 시대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끝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율법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율법을 교육적인 역할을 하는 몽학 선생으로 보았다(갈3:24).
히브리서 12장은 고난의 훈련을 언급한다. 고난은 아버지의 책임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징계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아들됨의 보증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이다. 이것은 훈련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다 준다. 징계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 참고 인내해야 한다. 징계는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후에는 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징계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도는 징계에 처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서 증명된다.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그의 복음적 메시지를 이렇게 서술했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처음 제자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불타는 마음으로 나갔을 때, 그들의 전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는주이시다!"라는 것이었다. 복음 전도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가장 큰 호소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매력인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하고, 교인들의 허식을 경멸하고, 헌신적인 자들의 고지식함에 대하여 공손한 듯이 대하지만, 예수님을 비판하거나 경멸하거나 공손히 못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별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대다수 처음 제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에게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가 그들이 만났던 가장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와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그들이 그를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만 그 후의 일이다. 그는 그들을 그렇게 깊은 단계까지 데리고 갔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 전도는 그 진전을 신뢰할 수 있다. 사람들을 이끌어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그에 대하여 잃게 하고, 그를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있게 한다면, 많은 사람이 그를 자기의 주님으로 모시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종교에서 구하는 것을 주신다. 그에게서부터 그 알 수 없는 세 글자 "하-나-님"은 내용을 가진다. 절망적인 예감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표명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에 두셨다. 지고한 존재(the Supreme Being)에 대한 생각은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추상적이 아니면 명확한 하나님을 너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보다 구체적인 면이 결여하면 그들은 가증한 우상을 숭배하거나 심지어는 가증한 독재자를 숭배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으로, 참된 분으로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낼 때,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기도할 때, 그들 앞에는 어떤 추상적인 신성(Deity)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사랑하게 된 그분(the One)을 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갈릴레오(Galileo)가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놓으므로 천문학에 혁명을 일으켰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작은 어린 아이 하나를 가치관의 중심에 놓으므로 인류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가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마18:2),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아무도 그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 당신에게 그리고 수소 폭탄의 모든 가능한 희생자들에게 - 무한한 가치를 부여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시었다"(요17:18). 그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우리 삶의 모범인 것이다.
복음 전도는 예수님을 삶의 안내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에게는 헌신을 통하여 우리는 그와 같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돈을 얼마만큼 쓸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에 대한 특별한 경향이다. 그는 율법 수여자로서보다는 하나의 친구로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그가 원하는 바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그를 내려 오시게 했는지를 알고 있다. 교회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구하고 있는 실제적인 안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일꾼의 자세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한 일꾼이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는 것이었다(딤전4:6). 따라서 본문은 '선한 일꾼' 즉 참된 지도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로, 그는 깨우치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 바울은 이 편지를 단지 디모데 한 개인의 유익과 인도를 위해 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을 깨우쳐야 할 것들이었다.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선한 교훈이 자주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깨우치면'이란 말의 원뜻은 어떤 명령을 내린다기보다는 '충고하다', '권고하다', '제의하다'이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어떤 지식을 주입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억시키고, 성경에 입각한 바른 교훈을 제시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이것이 참된 권위를 소유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둘째로, 선한 일꾼은 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다른 이에게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위해 말씀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 그의 생명도 규칙적으로 영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가 오늘 받아 누리는 양식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추구하는 진리이다. 위선자가 되지 않고 남을 올바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려면, 말씀을 읽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 말씀을 직접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선 전인격적으로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교만한 자세는 버려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잠16:18).
셋째로, 지도자는 본이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예수의 말씀 그대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모범삼아(히12:2) 그분으로부터 받은 믿음과 지식을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을 보이는 삶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
넷째로, 지도자는 진리 안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영성을 계발해야 한다(딤전4:7). 그 당시 교회 주위에는 바울의 메시지만 있던 것이 아니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교인들의 삶 속에 멸망을 조장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점점 더 늘어가는 종파들이 비성경적인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 이때 신자들은 무엇이 참되고 유익한지, 무엇이 그릇되고 해로운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참된 분별력을 가지고 공동체에 대해 그릇된 교훈을 경계시켜야 한다. 성경을 확고히 신뢰하고 그 가르침대로만 따라가는 지도자는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여기 여러분이 의지할 만한 참말씀이 있습니다"(딤전4:9)라고 확실히 제시할 수 있다.
다섯째로, 지도자는 영원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지녀야 한다. 물론 '오늘'이라고 하는 날에 최선을 다해 일관된 증거와 열정적인 사역을 해나가야겠지만 '천국'을 기억하면서 목회에 임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시각은 현실 도피주의가 아닌 현실에서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소망에서 나온다.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지도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경건해질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며 현재와 미래에 신령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선한 일꾼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특별히 선택된 고도의 지식인들이 아닌 '모든 사람'(딤전4:9)에게 해당된다. 하나님은 넉넉히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참된 지도자는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진지한 배려를 기울이며 지도해가야만 한다.

교회의 본질과 모습

성경에는 교회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 앞에 붙여지는 형용사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교회', '영광스런 교회', '거룩한 교회'가 그것이다. 교회 앞에 붙여지는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 믿을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영광스런 교회요, 거룩한 교회기 때문에 결코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세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은 이 타락한 교회와 역사 가운데서 남은 자들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거룩한 교회는 대조사회다. 세속과는 다른 사회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면 교회도 돈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권력을 좋아하면 교회도 권력을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이 파벌을 이용하면 교회도 파벌을 이용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본받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며 대조사회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너희는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한다.
죤 브라이트(John Bright)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 교회가 할 일은 무엇보다도 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참여 이전에 교회가 할 일은 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할 첫번째 과제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하기 이전에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교회가 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다.

성결을 얻는 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성결함을 얻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성결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과 협력함이 필요하다.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칼빈주의 신학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교리를 배격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는 인간의 협력 여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구원의 전체과정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이의 수용이나 거부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책임을 지게 된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협력자이다.
회개도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내가 회개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나 대신 회개하시지는 않는다. 성서에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하였지만, 우리에게도 “회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마3:2;행2:38).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엡2:8), 우리에게도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막1:15;행16:31;요3:16,36).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믿음으로 사역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지만, 그러나 우리 대신 믿어주시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분명히 믿음은 “우리의 내적인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창시적 주체자시고 시여자이시며, 인간은 믿음을 수용하는 주체자이다.
성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결을 얻는다 할지라도 단순히 수동적 태도로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성결케 하시지만, 우리도 “우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한다(롬6:19). 그리고 믿어야만 성결함을 얻을 수 있다(행26:18). 중생을 위해서 회개와 신앙이 요구되듯이 성결을 위해서도 회개, 신앙과 함께 성별 또는 헌신이 요구된다.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하며(롬8:4), “빛 가운데 행해야”하기 때문이다(요일1:7).
웨슬레는 우리가 성결함을 얻기 위하여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되는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등한한 무관심이나 게으르게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음이 아니라, 활방한 전적 순종과, 모든 계명의 열성적 준행과, 경성과 애씀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면서 기다리는 동시에,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모든 은혜받는 방법들을 엄수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만일 누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변화(성결)를 꿈꾼다면(이런 변화는커녕 이미 최대한 이룬 것을 지속하기만이라도 꿈꾼다면) 그는 제 영혼을 속이는 것이다. 단순히 믿음만으로 그것(성결)을 받는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가 정하신 방법을 따라 아주 열심히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줄 생각도 않으신다. 이러고 보니 그런 축복(성결)을 얻는 사람이 왜 그리 적으냐고 묻는 이들에게 답변을 한 셈이다. 몇 사람이나 이러한 방법으로 그것(성결)을 추구하고 있는지 조사해 보라. 그리하면 충분한 해답을 얻을 것이다.
성결을 얻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원칙들을 이해하고 확신해야 하며, 그 위에 우리 자신이 실천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1. 중생 후에는 성결을 사모해야 한다.

2. 남아 있는 죄성을 인식하고 회개해야 한다.

3. 기도로 구해야 한다.

4. 자신의 삶을 성별하게 바쳐야 한다.

5. 믿음을 활용해야 한다.
힐스(A.M.Hills)는 성결의 은혜를 받기 위한 믿음의 활용에 관하여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오늘(지금) 내가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고백하라(say, today, I must be filled with the Spirit).
② 내가 성령충만할 수 있다고 고백하라(I may be filled with the Spirit).
③ 내가 성령충만을 사모한다고 고백하라(I would be filled with the Spirit).
④ 내가 반드시 성령충만할 것이라고 고백하라(I sha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당신의 이러한 고백은 믿음으로 얻는 순간적인 성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성결을 위한 영적 훈련에 관하여 패커(J.I.Packer)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권고하고 있다.
① 내적 훈련: 명상, 기도, 금식, 성서 탐구
② 외적 훈련: 검소, 퇴수, 복종, 봉사
③ 공동 훈련: 고백, 예배, 지도, 찬양
웨슬레는 자기 부정과 신앙적인 노력과 애씀이 없이 성결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위선자라고 하였으며, 그들의 소망은 헛된 소망이라고 하였다. 성결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성도는 마땅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하며(마7:13),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딤전6:12).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성결의 은혜를 주실 것이다.

바울의 성만찬 이해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수한 성만찬 규례가 그들에게 잘못 이해되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성만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본주제 강해에서는 바울이 성만찬 전통에 부여하고 있는 신학적 해석들을 분류해 봄으로써 그의 성만찬 이해에 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바울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이며 선포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주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라는 것과(고전11:24), 반복하여 실시하라는 것을 명한다(고전11:26).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셔서 현존하시는 분이시며 교회는 성만찬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다. 즉 성만찬은 단순한 의미의 기념(memory)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구원과 화해를 선포하는 기념 축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한 현재적 구원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 사건이 주의 만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바울은 성만찬을 ‘새 언약’이 맺어지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고전11:25). ‘새 언약’이란 구약의 ‘옛 언약’과 대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법조문으로서의 언약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속에 율법을 새겨 넣는 언약을 의미한다(렘31:31-34). 그러한 ‘새 언약’이 바로 예수의 죽으심을 배경으로 한 성만찬에서 실현되었다. 그는 포도주 잔을 언약의 잔이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옛 언약’에서 ‘염소의 피’가 대속의 기능을 감당하였듯이 ‘새 언약’에서는 ‘예수의 피’가 속죄 기능을 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은 옛 계약을 갱신하고 새 계약을 보증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주의 만찬은 그것을 현재화시키는 성스러운 의식이라 하겠다.

3. 바울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와의 사귐과 동시에 성도들과의 사귐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란 우상의 배후에 있는 악귀와 교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다(10:16-21). 이와 마찬가지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사귐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성례전에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사귐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의 만찬으로 인하여 성도들간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다. 새 언약의 공동체란 그리스도의 잔을 함께 마시며 함께 떡을 떼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4. 성만찬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의 식탁이다(고전11:26).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대속적 의미를 현재화하여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며 동시에 종말의 미래를 선취한다.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 완성의 표징(sign)이며(막14:25) 또한 종말론적 희망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는 성만찬을 통하여 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

시험들게 만드는 요소의 마지막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참 생각하기도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 성경은 내면의 영적인 병이 우리를 전염시킬 수 있으며,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란 참 모순덩어리이다. 우리는 언약과 사랑과 질서의 열매를 기뻐한다. 그러나 우리 맘속의 어두운 쪽은 또 한결같이 반언약적이고, 미워하고 무질서하다. 우리는 이것들을 받기를 좋아하며, 잘 배워서 고의로 남에게 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이 내면에 악이 있다는 근본적인 증거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야만인이 들어있다는 얘기도 한다. 그 야만인은 최상의 환경에서는 일시적으로 길들여지기도 한다. 서구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보여지는 타락하는 도덕을 보고 있으면 그 야만인이 팔팔히 살아있다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한다.
최짓게 만드는 많은 유혹은 우선 이 내면의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바울이 나열해 놓은 것들을 보자.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갈5:19-20) 물론 예수께서도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나쁜 행동의 동기와 목적은 마음에서 나오며 공적 세계가 그것에 동조한다고 하셨다(마15:16이하 참조)
이 말씀을 주의깊게 들을 때, 우리도 결국 개인의 세계를 산산조각내버릴 가장 지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안전한 기반 위에 서 있게 된다. 인간 마음 속의 어두운 면과 악한 일을 촉진할 수 있는 그 능력보다 더 심술궂은 환경은 없으며, 그것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없다.
알렉산더 화이트가 번연을 인용한 것을 보자:

물이 연못에서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게 자연스럽듯 죄와 부패도 내 마음 속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끓어올랐다. 나는 나보다 더 못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와도 마음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변덕스러웠다. 이 내면의 악함과 마음의 더러움은 마귀하고나 대 봐야 대등해질까. 나는 나 자신의 야비함을 보고 깊은 절망 속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 있가가는 은혜의 삶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야 말았구나, 마귀에게, 타락한 마음에 지고 말았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인용문을 쓸 때 나는 심지어 컴퓨터 디스켓에 저장해 놓은 이 장을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이 주제는 정말 우울한 것이고, 다음 장의 방어와 재건에 대한 소망이 없이 남겨질 것이었다. 영혼은 주눅들게 만드는 내용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쁜 소식의 한가운데서도 가끔씩 좋은 소식이 있는 법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또 안에 잠재한 악의 상태가 나쁜 소식이라면, 좋은 소식은 바로 우리가 그들에 대해 깨어 주의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방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침울한 종교가 아니다. 다른 침울한 것들에 반하는 능력있는 ‘전략’의 종교인 것이다.
영의 왕국 안에서의 이 전쟁은 진짜이다. 분명히 인식하고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 환경에서 눈을 돌리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우리는 이 영적 전쟁을 언제 가장 쉽게 느끼게 되는가?
다음은 영적 전쟁이 우리의 개인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일어나기 쉬운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그중의 하나를 “울타리를 넘어서”라고 불러본다.

당신의 삶 속에 예수님께 바쳐야할 권리

당신의 삶 속에 예수님께 아직 드리지 않은 권리들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 권리들이 도전을 받을 때마다 당신은 염려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어떤 것을 버려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계속 사건들을 일으키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주위를 환기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섯 가지 기본 권리에 대하여 염려합니다.
● 인정받음(Acceptance) - 소속감, 존경받음, 사랑받고 돌봄을 받는 느낌, 모든 사람은 사 랑받기를 원합니다.
● 성취(Accomplishment) -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능력으로 가치있는 일을 할 권리
● 소유물(Possessions) - 우리들 모두는 의식주나 필수품들을 사거나 세금을 지불하는 데 필요한 돈과 같은 어떤 소유물들을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 안전(Safety) - 누구든 손해를 보거나 위험을 만나거나 재난, 또는 질병이나 능력 상실로 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원합니다.
● 안전(Security) - 이것은 중요한 욕구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하여도 자신감을 가지기 를 원하며, 미래에 대해서 안전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전부는 이들 다섯 가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을 예수님께 드릴 때, 우리의 권리는 그 분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종들이 됩니다.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거나 권리를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소유로 됩니다. 우리는 “값을 지불하고 구입된 존재들”입니다(고전6:20).
당신이 차 한 대를 어떤 친구에게 팔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그 차를 좋아하지만 그것을 팔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는 당신으로부터 그것을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합니다. 당신은 매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당신에게 댓가를 지불하고 차를 가져갑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 차를 판 후에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빼앗아 가거나 도둑질해 갈까봐 주야로 염려하겠습니까? 정말로 팔아 버렸다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하여 집요하게 염려한다면 그것은 “당신은 어떤 권리를 아직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드리지 않은 분야가 아직도 있습니다”, 또는 “이미 주님의 소유가 된 것을 당신이 자진해서 찾아가서 그것을 도로 가져오려고 하는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더 이상 당신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소유권을 도로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염려의 속박에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으면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1. 당신이 아직 주님께 드리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당신의 권리일 수 있습니다. 혹은 건강하거나, 현명하거나, 행복해지고자 하는 당신의 권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확신하고자 하는 권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왜 내가 염려를 하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님께 드리지도 않고 아직도 붙잡고 있는 그 권리는 무엇인가?”

2. 종이 한 장 위에 당신의 권리를 기록하십시오.
그 종이 쪽지로 그 권리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대신하도록 하십시오. 그 다음에 붉은 색연필을 가지고 그 글 위에 커다랗게 다음과 같이 쓰십시오.
“성부, 성자, 성령님께 팔아버렸음.”
그 다음에 그 종이를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마땅히 그의 것인 것을 그 동안 쥐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그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 다음에 성냥으로 종이를 태우십시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당신에게서 옮겨져서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되어 영원히 사라졌음을 보십시오.

3. 하나님의 것을 가져가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다음 두 주일 안에 당신이 드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시험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도전받을 때, 당신이 그것을 이미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그것은 염려해야 할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어떤 것을 갖기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빌려올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가 그것을 요구하실 때는 언제나 가져갈 수 있으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태도가 되어야 하며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염려에 대한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당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드리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꼭두각시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자기가 당신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을 당신 대신에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권리들만을 드리십시오. 권리들이란 누구나 필요로 한 것들이기 때문에 당신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들입니다. 책임이란 당신이 꼭 이행해야 하며, 또는 하기 힘들기도 한 의무를 말합니다.
하나님게 이렇게 말씀드리지는 마십시오.
“오 하나님, 저는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지금 저의 권리를 내어 놓습니다. 저는 당신께 기도하고 당신의 말씀을 읽고 그것에 순종할 권리를 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말씀에 대하여 염려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말씀을 가져가 주십시오.”
이것은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어떤 권리를 바치지 않음으로 생긴 염려로부터만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오는 염려는 솔직한 회개와 용서와 회복에 대하여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로부터 오는 염려는 권리를 주님께 드린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은밀함의 필수 훈련

산상 강화의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지배당하는 것을 눈의 노예가 된다는 뜻의 아이서비스[eye-service, 오프탈모둘리안(ophthalmodoulian),골3:22;엡6:6]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물론 여기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과 남이 볼까 두려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똑같이 해당된다. 행동이든 무행동이든 결정적 동기는 하나님 나라를 존중하는 마음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사람들로서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이다.
행동이든 무행동이든 인간의 인정이 동기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나와 무관한 것으로 밀쳐 내고 스스로 인간 나라에 종속되는 것이다. 악을 피할 때에도 선을 행할 때에도 오직 하나님을 존중하여 그리해야 한다. 누가 볼까 두려워 악을 피하는 것도 어쨌든 악을 피하는 것이므로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만 없다면 그분께 불순종할 우리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양쪽 경우 다 기본 원리는 똑같다.
은밀함의 훈련은 우리의 영혼과 행동에 대한 인간 의견의 지배력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훈련이란 당장의 노력으로 안되는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주어진 능력 안에서 스스로 힘을 길러 가는 과정이다. 예수는 여기서 우리를 은밀함의 훈련으로 인도하고 있다. 우선 우리의 종교 단체에서 인정된 일들-헌금, 기도, 금식, 예배 참석 등-을 하되 이따끔씩 아무도 모르게 해본다. 행위의 동기와 보상을 인간에게 두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눈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면 남이 알든 모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간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이 부분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특히,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의를 특정 행동으로만 이해하는-의 위험을 감안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선행과 기도와 금식을 반드시 은밀한 중에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율법화하지 않으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성경의 실상과 예수 자신의 행동을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율법이 아니다.
예수께서 종종 잘못 굳어진 관습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마태복음6:1-18의 전제가 되는 굳어진 관습은 분명 선행, 기도,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런 관습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희는 구제(기도, 금식)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너희 선행(기도, 금식)을 절대로 아무도 보게 하거나 알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이 산상 강화의 앞부분에서 주셨던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는 명령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분의 가르침은 율법이 아니라 훈련으로 이어진다. 그 훈련이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 사랑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자로 준비시켜 준다.

전반적인 부흥의 필요성

만일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합당한 기도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전반적인 부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과 똑같은 말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사람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으므로 지금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이다(시119:126). 기록된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음성이 세상과 교회 바로 가까이에 있다. 이러한 때는 낙심할 때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 사람은 결코 낙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일하실 때이다. 시온의 벽 위에 서서 빈틈없이 경계하는 파수꾼인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옛날 시편 기자와 같이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119:126)라고 부르짖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날 크게 요구되는 것이 전반적인 부흥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반적인 부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부흥이란 생동력을 갖게 만들거나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때이다. 하나님만 홀로 생명을 부여하실 수 있기 때문에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 가셔서 그의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그들에게 새 생명을 나누어 주시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범죄와 죄악 가운데서 죽은 죄인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때이다. 우리는 교묘한 수단에 의하여 그리고 단순히 직업적인 부흥사의 최면술적 작용에 의하여 종교적인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흥이 아니며 필요하지도 않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것이 부흥이다. 전반적인 부흥은 산재해 있는 개개의 지역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온 기독교계와 세계 전반에 걸친 모든 지역에 해당된다.
전반적인 부흥이 필요한 이유는 영적인 기근과 황폐와 죽음이 전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역에 따라서 다른 어떤 곳에서 보다 어느 한 곳에서 더 많이 나타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 곳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국내 선교지에서뿐만 아니라 외국 선교지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국부적인 부흥만 해왔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이 목사와 저 목사 위에서, 이 교회 위에서 그리고 이 집단과 저 집단 위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광범위하고도 전반적인 부흥이 절실히 요구된다.
부흥의 결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결과들은 교회의 목사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난다.

1. 목사들에게 있어서 부흥의 결과는
a) 목사들은 영혼을 위한 새로운 사랑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 목사들은 대체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정도의 영혼을 위한 사랑을,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영혼을 위한 사랑을 그리고 바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영혼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가실 때 목사들의 마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 뜨겁게 불타오르게 된다. 그들은 동료 인간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들은 위대한 설교를 함으로써 명성을 얻겠다는 야망을 잊어버리고 다만 인간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것만 보고 싶어 한다.
b) 참된 부흥이 왔을 때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다. 그들은 성경과 신조에 대한 그들의 의심과 비판을 날려 보내고 성경과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하고자 한다. 부흥은 교리에서 이탈한 목사들을 정통 교리로 되돌아오게 한다. 진실하고도 광범위한 부흥은 지금까지 구성되었던 모든 이단 재판 이상으로 그 이단들을 뒤엎어서 바로 잡아 놓을 것이다.
c) 부흥은 목사들이 설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자유와 능력을 가져다 준다. 설교 준비가 더 이상 한 주일간의 고역이 되지 않으며 또 설교가 준비된 후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더 이상 신경을 소모하는 노동이 되지 않는다. 설교하는 일이 오히려 기쁨과 원기 회복이 된다. 부흥의 때에 설교 속에는 능력이 있게 된다.

2.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흥의 결고도 일반적으로 목사들에 대한 결과와 같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a)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뛰쳐나와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 세상과 짝하며, 카드놀이와 춤추는 일과 극장가는 일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어리석은 행위에 탐닉해 온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일들을 버린다. 이런 것들은 생명과 비치을 풍성하게 키워가는 일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b)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의 영을 받게 된다. 기도는 이제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갈급함과 마음의 소원을 채워가는 일이 된다. 개인적인 기도가 새로운 묘미로 부각되어 온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 소리가 밤낮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c)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을 위한 일을 하게 된다. 그들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을 찾아서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집회에 참석한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가게 안에서, 그들의 가정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천국과 지옥 등이 계속적인 대화의 주제가 된다. 정치와 일기와 새 모자와 최근의 소설 따위는 모두 잊어버린다.
d)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얻는다. 삶은 기쁜 것이며 새로운 삶은 또한 새로운 기쁨이 된다. 부흥의 날은 기쁨의 날이요, 이 땅 위에서의 천국의 날이 된다.
e)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사랑을 갖게 된다. 그들은 말씀 공부를 밤낮 사모한다. 부흥은 술집과 극장을 위해서는 나쁜 것일지라도 서점과 성경 판매점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다.

3. 그러나 부흥은 또한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a)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을 가져다 준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16:7,8). 방금 우리는 부흥이란 성령이 임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는 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반드시 수반되고, 항상 수반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만일 여러분이 부흥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거기에 죄에 대한 각성이 수반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유의할 만한 일이다.
b) 부흥은 또한 회개와 중생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실 때는 언제나 죄인들도 함께 회개시키신다. 오순절의 첫 번째 결과는 다락방에 모인 백 이십 사도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능력이 임한 것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단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한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기 저기서 부흥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항상 읽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회개는 없었다. 나는 그와 같은 부흥회에 대해서 회의를 느껴왔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새로워진다면 그들은 기도와 말씀 증거와 권면으로써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전도할 것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제사 속에 담긴 예배 정신

구약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다. 각기 독특한 특징과 규례를 가진 이 5대 제사들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많은 인간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구약의 5대 제사 규례는 히브리서 곳곳에 명쾌히 지적되고 있는 바대로 옛(첫) 언약 하의 규례로서(히8:7;9:1)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적용되는 모형적이고 예표적인 규례였다(히8:5). 따라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 성취된 구약의 제사 규례들은 더 이상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그 문자적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구약의 제사 규례들이 가지고 있는 그 법 정신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각 제사 규례 속에 담긴 법 정신은 오늘날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 정신 속으로 복합 승화되어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어떠한 삶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밝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 번제에 나타난 바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자신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죽이는 온전한 희생과 헌신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롬12:1,2;고전15:31).

2. 소제에 나타난 바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늘 감사하는 마음과 죽도록 충성하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살전5:18;계2:10).

3. 화목제에 나타난 바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기를 원하신다(마22:37-39).

4. 속죄제에 나타난 바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깊이 통회하고 진정 자복하는 겸허한 심령으로 오직 당신의 보혈만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마11:28).

5. 속건제에 나타난 바 주님은우리 성도들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하는 빚진 자의 심령. 즉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마18:21-35;롬1:14).

Your Preparation as a Leader

Take a moment now to eval‎!uate your own preparation as a leader. Remember, again, that you need not be called to a positional, governmental ministry to be one of God's leaders. You also may lead in a congregational ministry in a major, temporary, or more limited capacity. In fact, it may be easier to eval‎!uate your preparation for such a focused ministry.
Work through this series of questions, which may also stimulate other questions and issues for your own development.
CALLING
It is worthwhile to review the "Ministry Calling Eval‎!uation" at the end of Chapter Four. Focus on the area of confirm‎!ation to your calling. Has your calling been confirm‎!ed by leaders and the Church at large? These people have watched you grow into your calling, and they can confirm‎! the outward evidence of your calling.
STUDIES
Most leaders who are truly called can't wait for classes to begin;they study on their own. What have you done to study God's Word in preparation for leadership? Under whose authority and guidance are you studying?
RELATIONSHIP
Most leaders are launched into their ministries through significant relationships with other leaders. Do you have a teacher, a leader, an example to follow? How faithful are you as a disciple? Have you begun to develop solid relationships with younger Christians, so that you can help them grow?
PRACTICAL LEARNING
What have you learned today? Do you see daily progress toward functioning in your ministry--even if it happens in the school of hard knocks? What are you doing to build on your successes, and to avoid repeating your mistakes? What can you learn in that regard by watching other people?
SERVICE
Have you already begun to function in your unique calling? Ordination or the assignment of responsibility only confirm‎!s that you are already functioning in your ministry. What are you doing to minister to the needs of the Church, with or without receiving a formal ministry title?
PROMOTION
Has recognition of your calling and preparation reached the point of your promotion in the Church? At any point, have you made yourself less available for promotion through pride, or any other damaging attitude or sin? How have you responded to promotion--have you kept the Lord and your ministry in focus throughout this process?

요한 웨슬레

요한 웨슬레는 월살(Walsall)에서 설교하다가 죽을 고비를 만난 적이 있었다. 1743년 10월, 한 성난 불한당이 그를 끌어 내어 십자가에 매달고 옷을 벗기라고 고함쳤다. 그는 그들에게 조용히 대답하였다. “만약 내 옷이 필요하다면 가져라”고 말하였다. 한 불한당의 구타에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나중에 말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불한당의 괴수에 의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괴수는 “선생님, 내가 당신을 위하여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웨슬레를 어깨에 번쩍 들어 올려 매고 강을 건너 안전한 지대로 피신케 하였다. 핍박은 받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복음 사역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뉴버리(Newbury) 항구에서 1770년 9월 30일 주일날 운명했다.
그는 53년간 부흥 운동을 인도하였고, 1790년 그가 인도하던 종교단체는 117곳에 세워져 77,000명의 회원이 되었고 313명의 설교자가 생겼다. 그 회원들은 성공회나 자유 교회의 교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웨슬레는 교단을 세우려는 어떤 욕망도 갖지 않았었다.
그는 15년간 250,000마일을 여행하였고, 40,000번의 설교를 하였으며, 15권의 책을 펴냈다. 두 형제에 대해 사람들은 ‘천국의 쌍둥이’(Heavenly Twins)라고 말했고, 어거스틴 버들(Augustine Birrdle)은 요한 웨슬레의 공헌에 대하여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힘’(the greatest force of the 18th century)이라고 극찬하였다. 그의 동역자인 휫필드와 비교할 때 휫필드는 회심을 일으켜 유지시키는 것에 허술했지만 요한 웨슬레는 휫필드의 부족을 충분히 채워 주었다. 또한 그는 한 팀의 가장 탁월한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메도디스트 단체는 구원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고, 만약 그들 중에 더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홀(Hall)에 초대하였다. 거기에서 회원이 되기를 원할 때 준수할 사항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새벽5시 예배에 초대되었다. 회원이 되는 데 필요한 사항은 닥쳐올 진노를 피하고자 하여 죄에서 떠나고자 하는 그것으로 족하였다. 그리고 회원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규범으로 다음의 사항을 제시하였다.
① 악을 행하지 않고 피함.
② 모든 방법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③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의 수단에 가까이 하고자 함.
메도디스트 펠로우쉽은 하나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었다. 그들은 경건의 능력을 구하고 기도하며 남을 사랑했다. 그들은 구원을 이루는 데와 남을 돕는 데 힘썼다. 그 펠로우쉽은 12명씩으로 구성하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지도자를 두었다. 그것은 모라비안이 단원을 5명씩으로 구성한 것과 비슷하다. 그 펠로우쉽은 연합, 회합, 사랑의 잔치(love feast)의 활동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 경성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졌는데 9시부터 12시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성공의 원인을 열거해 보면 이렇다.
① 충성된 설교.
② 조직력.
③ 세계에 복음을 두루 전하겠다는 동기.
그의 사역은 심령 부흥 뿐 아니라 사회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웨슬레는 말하기를, “나는, 사자이던 자가 양이 되고, 술꾼인 자가 침착한 자가 되고, 매춘부가 깨끗하게 되는 모습을 여러분에게 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회적인 삶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칼빈 콜리지(Calvin Colidge)는 이런 말을 하였다. “미국은 종교의 부흥 가운데 탄생하였고 그것의 배후에는 요한 웨슬레와 조지 휫필드가 있었다.”

훈련은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 과정의 근본 진리 하나가 나온다.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가장 기본적 습관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훈련은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삶이든지 만족을 얻으려면 자신을 넘어선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영적인 삶도 그렇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의 잘 알려진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그분을 떠난 삶’이라는 통찰과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한다.
분명, 어느 영역에서든 훈련의 결과란 타인에게서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입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외국어를 배워 줄 수 없고, 내 근육을 키우려 남이 아령을 들어줄 수도 없다. 우리의 깊은 도덕성도 남이 대신해 주는 일로 개발될 수 없다. 다른 이들이 도와줄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가 행해야 한다. 오랜 기간을 두고 지혜롭게 꾸준히 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힘으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을”수 없다. 전환과 변화는 우리의 내적, 외적 노력과 더불어 몇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빌립보서2장의 놀라운 본문에 이 점이 분명히 나와 있다. 바울은 예수의 “마음” 혹은 내면 깊은 성품을 설명하면서 우리도 그 “마음”을 품도록 부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나 태도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하는 종의 마음이다. 이것이 천국의 삶이다. 예수는 자원하여 종의 자리까지, 심지어 다른 이들을 위해 죽으시는 자리까지 자신을 버리셨다. 그것을 통해 그분은 하나님의 삶과 인간의 삶에 최고의 하나됨을 이루셨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때가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시인할 것이다(빌2:11).
바울은 계속하여, 우리가 복음의 말씀과 예수의 인격을 통해 천국의 삶을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삶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받은 후에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되어질 인격은 타인의 행위의 결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2:120). 여기 사용된 카테르가제스테(katergazesthe)라는 말에는, 뭔가를 다듬거나 발전시켜 본래 의도된 온전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삶이 전적으로 우리의 일인 것처럼 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신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13절). 이렇듯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우리의 일을 한다.

가진 것에서 자유로와지라

신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자기 가진 것들을 - 재산, 직업, 안전, 마침내는 그들의 생명까지 - 버리고 주를 따르기 전까지는 거의 연구할 존재가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마치 대여해 온 것처럼 보았고, 부르실 때 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겐 이의라는 게 없었다.
그런 행동은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 갈등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말에 암시되어 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눅18:28) 다른 비슷한 말들로도 보아 처음에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함으로 어떤 수지맞는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보상은 그들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갚아졌다.
세례 요한은 무리들이 자기를 떠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보았고, 원한을 품은 한 여인의 요청에 의해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시몬 베드로는 직업을 버리고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유대 최고 의회의 좋은 자리를 버리고 소아시아와 유럽에 교회를 세우는 데 남은 생애를 바쳤다. 그는 분명 돈 한푼 없이 죽었으며, 그가 한 노력이 계속될 것인가 의문도 가지고 있었을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구세주께서 사역하시는 동안에 빈민이나 다름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집도, 옷도, 소득도, 아무것도 없으셨다. 우리의 믿음도 그 가진 것에서 자유하고 예고도 없이 그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도전 외에는 재물에 대해서 별 말할 것이 없다.
이런 생각은 현대 기독교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반대를 받고 있는 것 같으며, 또한 그것이 성도들을 무너진 세계로 이끄는 주요 원인일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곤란한 상태로 끝을 맺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구가 소유, 소득, 또 다른 형태의 재산을 쌓기 시작할 때 그들을 쉽게 분쟁에 빠지고 무너진 세계로 이끌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경쟁을 하고, 지키고 부정하게 탐을 낼 정도로 재산을 붙들게 될 때 죄는 급증하게 된다. 그리고 소유를 습득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초점이 믿음에서 재산으로 옮겨가 버릴 때도 죄는 만연한다. 그 초점을 바꾸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수백가지 악한 영에 자신을 열어주게 된다.
이 물질적인 문제로 인해 무너진 세계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함정은 무엇인가? 빚이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는 재정적인 속박을 당하기가 쉽다. 자만심, 그것은 스스로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우쭐대게 만든다. 탐욕,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불만족이라는 위험한 감정을 야기시킨다. 우리는 이 개인 방어 개시 규율을 잘 사용하여 빚 없이, 소득의 내에서, 또 빈곤한 이들에게나 교회 사역에 쓸 때는 성경의 기준에 입각한 관용을 베풀며 생활해야 할 것이다.

웨슬레의 교회론

로버트 차일스(Robert Chiles)는 그의 학위 논문에서 “웨슬레가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점은 교회를 개혁했거나 변질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새롭게 한 교회 갱신(church renewal)에 있다”고 하였다.
웨슬레의 갱신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갱신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역사 속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큰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웨슬레의 갱신 운동은 18세기의 부패하고 무기력했던 교회에 활기를 주었고, 활기찬 신앙 생활을 다시 불붙였으며, 나아가 선교에 새로운 동력(dynamic)을 제공하였다.
웨슬레의 교회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국국교회를 성서적 교회로 존중하는 전통주의적 교회관을 가졌다. 이 점에서 그는 고교회주의자이다.
2) 그러나 그의 교회관은 모라비안 교단과 청교도적인 요소가 성공회적인 바탕 위에 조화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교회관은 건전한 나아가 독창적인 종합을 이루고 있다.
3) 교회의 본질에 대한 견해는 그가 철저히 고전적 개신교의 전통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교회관을 가진다. 즉 교회는 형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활동과 기능이며, 세계 속에 선교기구라는 것이다.
5) 교회는 성결하며 성결을 이루는 수단이요, 성결한 성도들의 모임이다. 객관적으로 성결한 교회가 신자들을 주관적 체험적 성결로 이끌어 가야 한다.
6) 그의 신학의 관용성은 교직과 교회제도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7) 그의 운동은 분파운동이 아니라, 갱신운동이었으며, 갱신운동은 영적 갱신이며, 이는 교회 안의 작은교회인 각종 소그룹운동을 통하여 더욱 활력을 얻어 유지되고 확장되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갱신을 위한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

누가 남을 “바로잡을”수 있는가

솔직히 처음부터 이런 완전한 배척을 의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이 실제 나타나는 결과이다. 배척하지 않고서도 남을 바로잡아 준다는 것은 영적, 인격적으로 깊은 성숙을 요하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1-2).
바울의 말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는 아주 깊은 것이다.
첫째, 우리는 상대의 죄가 절대적으로 확실히 드러나기 전에는 바로잡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한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이 여기에 적용된다. 범죄 발생 여부가 조금이라도 불확실해 보이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라. 적어도 바로잡는 일에 착수하지 말라.
둘째, 아무나 다른 사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잡는 작업은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정된 일이다. 그 능력은 또한 지혜일 뿐 아니라 인간의 수준을 단연 능가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신령한 자”란 바로 그런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삶이 합당한 자만이 “바로잡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셋째, “바로잡는”일이란 상대를 “고쳐 주는”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일 그것을 고치지 않을 경우 치르게 될 대가로 상대에게 엄포를 놓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회복의 문제이다. 범죄가 “드러난” 자를 대하는 목적은, 오직 그가 예수의 길로 다시 돌아와 견고히 섬으로써 천국 생활과 성품 개발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 구체적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남의 회복을 돕는 자는 자신도 상대의 “드러난” 범죄나 혹 그보다 악한 일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상대를 대해야 한다. 당연히 자기의나 우월감은 추호도 발붙일 여지가 없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남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다. 회복을 돕는 자는 회복되는 자가 죄에 빠진 상태에서 느끼는 부담, 즉 “짐”을 함께 공감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런 가르침은 교회 모임에만 적용하도록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 교훈의 중요성은 가장 가까운 관계, 즉 배우자와 자녀, 친척과 이웃, 직장 동료 등에 적용될 때 가장 큰 진가를 발하게 된다. 왜곡되고 전복된 이 세상에서 이런 관계야말로 친밀함이 멸시를 낳을 위험이 가장 큰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서로를 대할 때 초면의 손님 대하듯 존중하는 마음만 품어도 대부분의 가정은 훨씬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가족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에 대한 C.S.루이스의 말은 이 점에 대해 깊은 교훈을 준다. 행복한 가정 생활을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할 글이다. 그는 “부모를 대하는 자녀들의 나쁜 매너보다 자녀을 대하는 부모들의 나쁜 매너에 훨씬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부모들은 “다른 아이들을 그렇게 대했다가는 곧바로 관계가 끝장나고 말 그런 무례한 태도로” 자기 자녀들 대한다. 아이들은 이해하지만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독단적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무례하게 말을 끊고, 뻔한 모순을 내세우며, 아이들이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를 비웃고, 자녀의 친구들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한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왜 아이들은 항상 집에 붙어 있질 못하는 거지?” “왜 아이들은 자기 집만 빼고 다른 집은 다 좋아하는 거야?” 루이스는 묻는다. “야만보다 문명을 좋아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는가?”
13세기에 천주교의 위대한 도미니크 수도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크는 예수가 모본의 되신 친절한 삶의 방식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많은 이들 중에서 그의 형제 베니스의 폴은 이렇게 증거했다. “그 [도미니크]는 다른 이들에게 바라는 만큼 자신도 [도미니크 수도회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려했다. 아무도 그의 교정과 처벌에 반감을 품지 않을 정도로 그는 위반자들을 공정하게 애정으로 징계했다.”
프푸게리오 수사도 도미니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스스로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했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해주기를 원했다. 위반자들을 향한 그의 지적과 교정은 매우 온유하고 친절하여 때로 속죄의 과정이 아주 혹독했음에도 아무도 반감을 품지 않았다.” 정죄 없는 마음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은 분명 통상적인 인간 대우와 너무 다르다. 지금도 간혹 특정 대상을 가리켜 “울 밖에” 있다는 말을 쓸 때가 있다. 고대 부족들이 사람을 소속 집단에서 축출하던 관습에 기원을 둔 옛스런 표현이다. 축출 대상자들은 부족의 합의에 의해 어둠 속에서, 즉 부족의 불과 빛이 미치지 않아 사물이 거의 분간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했다. 울 밖에 살았던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정죄와 축출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문둥병자였다. 성적으로 부정한 자와 이혼한 여자도 똑같이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복음서의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예수께서 그런 사람들을 대하신 방식이다. 그분은 그들을 받아 주고 만져 주고 그들과 함께 먹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하셨다. 교육용이나 전시용으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그렇게 대하셨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집 없는 노숙자들과 에이즈 환자가 마치 문둥병자와 부정한 자를 합해 놓은 존재라도 되는 듯한 시선을 받고 있다. 예수라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딪치는 대로 이들과도 얼마든지 함께 지내실 것이다. 그분이 자기의에 빠져 깊이 타락한 지도자들을 정죄하신 것은 분명하지만(마23장;눅11:29-54) 그 밖의 상황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분이라면 그런 이들에게 적절하게 정죄를 표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거의 어렵다. 복수와 마찬가지로 분노와 정죄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안전하다. 정죄의 내용이 옳은 한, 정죄해도 좋다는 생각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절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라면 성전에 들어가, 종교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쫓아내실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내가 그러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 모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4:16).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15:10).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10:12).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시편145:20).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한복음14:21).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린도전서8: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복음15:9).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마가복음12:3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9: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14:1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한복음14:14).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에베소서3: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17: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태복음18:1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2:13).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시편37:39).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에베소서3:16).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로새서1:11).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기17:9).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2:10).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121:1,2).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잠언16:23).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역대하7:14).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1:22).

마음과 명철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잠언서의 주된 목적은 우리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가르치고, 우리를 지혜와 명철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잠언의 교훈은 의와, 주를 경외함과, 선한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 자신의 명철이나 분별력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지혜, 즉 분별력 있는 마음을 의뢰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고 인생을 계획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능력에 의존합니다. 첫째는(본성과 우리가 만들어 낸 여러 가지 개념들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사물을 인식하는 명철 혹은 분별력입니다. 둘째는 사물들을 의지와 감정으로 통합함으로써, 경험을 통하여 그것들을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그토록 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지식이 거의 완전히 무익하게 되고, 교회에서 거룩함과 헌신과 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한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에게 정신을 주셨고,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물론, 이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십시오.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은 총체적으로 어그러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예속되었고, 감정도 변질되었으며, 정신도 암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앞의 두 가지 면에 대해서는 타락의 결과를 인정하면서도, 세 번째 면에 대해서는 실제적으로 그 결과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자들은 자기들이 거룩한 의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날마다 예수 그리시도의 은혜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그들은 성령의 끊임없는 도우심이 없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감정을 품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이 완전히 타락하여, 영적인 진리를 분별하는 데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때에 금하신 방법으로 지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우리의 지혜가 부적당하며, 자기 확신과 이에서 오는 자기 기만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는 교훈의 긴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섬기며 사랑합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신령한 말씀이 활동하는 장소도 바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마음 속으로 당신의 아들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마음 - 소망, 사랑, 의지, 그리고 순종의 내면 생활 -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교훈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명철을 조금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영적인 진리의 관념과 개념만을 줄 수 있을 따름이고, 그것의 참 실체는 줄 수 없습니다. 명철은 정신으로 받아들인 진리가 틀림없이 마음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켜서, 여러분을 속일 것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성경을 읽고 주일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실제로는 겸손해지지도 거룩해지지도 또한 신앙이 깊어지지도 않는, 이 두렵고 흔한 체험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모두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골방에 들어갈 때면 언제든지 좋은 교사가 되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령한 명철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스스로의 명철을 활용하지 않고도 성경을 공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저 자신도 누누이 곱씹어 보았던 질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도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명철을 활용해서는 안되는 일에 그것을 활용하는데 있습니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명철은 여러분에게 영적인 진리의 상 혹은 관념만 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명철을 통해 이러한 관념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즉시 여러분 안에서 이러한 말씀을 생명과 진리로 바꿔 주실 주님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지적인 자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스스로의 명철을 의지할 위험성은 늘 상존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지속적으로 성령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이러한 위험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살리실 때에만, 비로소 그분은 우리의 명철을 섭리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1:7).
여러분이 스스로의 명철을 활용하여 성경에서 어떤 지식을 깨달았다면, 언제든지 의지하는 마음과 신뢰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지식을 진리로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심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지식이 마음 속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명철을 다스리시고, 이 명철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빛을 비추실 때가 올 것입니다.

열린 문 - 열린 보상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7,18).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4:13).
“모세가…시내 산에서 내려오니…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니…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34:29,30,33).

하나님과 아침 교제에서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로 옮겨 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 있는 아침 식탁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주변환경은 갑자기 돌변합니다. 사람들과 주변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우리는 방금 깨달았던 진리들을 차츰차츰 잊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깨달음들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곤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자유로운 토론에 부칠 문제로 생각지 않거나, 그렇게 할 만한 적당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 단체에서도, 열성이나 대담성의 부족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가장 큰 유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인간 관계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에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던 모세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그리고 지속적인 교제는 머지 않아 그 표를 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모세는 자기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발산되는 하나님의 빛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질그릇일 뿐이라는 의식을 심화시킬 것입니다(고전2:3,4;고후4장).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에게 불안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참된 신자는 얼굴을 가리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로 깨닫고, 자기도 주변 사람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임을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또한 그 곳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늘 자기 안에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금식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와 똑같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우리는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과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하늘 아버지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자녀답게, 그분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심정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빛이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기기 위해 사람들을 대할 때, 은밀한 중에 우리를 보셨다가 공개적으로 그것을 갚아주시며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도 같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뿐만 아니라 승천하신 후에도 늘 그분과 동행했고, 그분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적들까지도 그들의 대담한 행동을 본 후에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너무 깊이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받은 축복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골방에서 가졌던 마음을 종일토록 유지하기 위해 거룩한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이 어느 시간에 침투해 들어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침 경건 시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본성에 굴복하지 않는 내심의 자제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는 영적인 대화를 좀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도록 아침 식사 시간에 가족들끼리 서로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다면, 아침 경건 시간을 계속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겸손을 체득하고 주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는 것 -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23:17) -을 아침 시간의 귀중한 목적으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매일의 일과 속에서 그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누리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누리는 일도 또한 위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삶이 주는 부담이 너무 클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이 없이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목적에만 전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로 가득차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다음 한 가지 문제, 즉 질그릇에 하늘의 보화를 채우는 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하루종일 지속시키는 일에 귀속시킬 것입니다.

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어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