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스크랩 바울교회 제자훈련교재 Ⅲ

에반젤(복음) 2021. 1. 24. 23:45

바울교회 제자훈련교재 Ⅲ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우리의 대속자는 단지 그리스도만도 아니고(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제 삼자가 될 것이므로), 또한 단지 하나님만도 아니라(만약 하나님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훼손시킬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서 동시에 신이시면서 인간이신 분, 또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을 모두 대표하면서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시는 독특한 자격을 가지신 그 분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성부의 주도적 역할을 간과하게 된다. 또한 만약 우리가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성자의 중보를 간과하게 된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속죄를 그리스도에게만 돌림으로써 그를 성부로부터 분리시키거나, 혹은 속죄를 하나님께만 돌림으로써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일을 결코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의 전적인 찬동하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 증거를 개괄함에 있어서, 메시야 탄생에 대한 고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메시야께 주어진 이름들은 예수(“하나님의 구원자”, 혹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탄생 안에서, 그의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즉 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마1:21-23). 또한 이와 유사하게, 누가에 따르면,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그리스도, 즉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이것이 익숙한 표현이다-가 아니라, 실제로는 “주 그리스도”, 곧 그 자신이 메시야요 주님이었던 것이다.(눅2:1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그의 인격적인 자의식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요8:29)과 그에게 “순종하는 것”(요15:10), 그리고 그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성취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긴 했지만, 이런 복종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뜻과 성부의 뜻은 언제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요한에 따르면, 예수는 상호 “내주”(內住), 즉 그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그의 안에 있는 것을 말했으며, 심지어 그 두 분 사이의 “연합”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부와 성자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이 확신은-특히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일하신 속죄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할 때에-화해에 관한 바울의 몇몇 위대한 진술 속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 예를 들면, “모든 것(고후5:17-18의 재창조의 일을 가리킴)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18-19절). 희랍어 원문을 번역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를 어디에다가 위치시키느냐하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화목을 성취시키는 일에 있어서 함께 일하셨다는 것이며, 실로 하나님게서 화목을 이루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이라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 서신의 다른 두 개의 중요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두 구절은 모두 그의 안에 거하시며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골1:19-20,2:9). 이것은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충만에 돌려지고 있다-그 일이란, 만물을 그와 함께 화목시키는 것,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는 것,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는 것,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 우리를 대적하는 기록된 의문를 폐하고 없이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것, 정사와 권세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 “그것(십자가)에 의하여”, 혹은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정사와 권세를 이기는 것 등이다.
법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므로, 그 잘못을 배상해야 하는 것도 오직 사람이어야 한다는 안셀름의 말은 정당한 것이었다. 또한 그 배상을 요구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필요한 배상을 마련하실 수 있다고 한 점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정당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속에서 “해야 한다”와 “할 수 있다”를 동시에 결합시키는 유일한 인물로서,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이다. 안셀름의 설명방식의 약점은-이 약점은 아마 중세 봉건제라는 그의 문화적 배경에서 주로 연유한 듯하다-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이 그가 진 그 빚을 갚아야 하며, 그가 야기한 손상을 복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주도적 행동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그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낸”, 혹은 “주신”, 혹은 “내주신” 분이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아들의 고난 속에서 자신도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죠지 버트릭(George Buttrick)은 이탈리아의 한 교회에 걸려 있던 그림에 대하여 썼다-비록 그가 그것을 그린 사람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언뜻 보기에 그 그림은 다른 십자가상의 그림과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그림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당신은 거기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예수의 모습 뒤에 거대하고 희미한, 또 한 인물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손을 찌른 그 못은 또한 하나님의 손을 찌르고 있으며,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그 창은 또한 하나님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매력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놀랍고도 굉장한 일이다. 특별히 그 당시 초대 교회가 처해있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성도들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아직도 생생하게 성도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다(7:54-60). 바울은 적대적인 헬라파 유대인들을 겨우 피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9:28-30). 대살육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의 교회는 ‘평화를 누리며’ 갈수록 그 수가 많아졌다.’
또한 그들은 당당하고 단호하고 원기 왕성했다. 그들은 자주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으나, 두려움없이 그 일을 계속해 나갔다. 협박과 경고와 매질과 그 밖의 다른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마음은 여전히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정으로 기뻐했는지 상상해 보라!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무리는 늘어만 갔다. 괴롭고 부정적이고 경직된 긴장으로 겁에 질려 위축된 무리가 되는 대신, 그들은 매력적이고 위엄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나는 종종 초대 교회의 사람들을 전염성의 매력을 가진 자들로 그려 본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볼 때마다 통찰력 있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기억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의무감을 강조하면서 최소한의 기준을 가지라고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영적 성취는 미는 것에 있지 않고 당기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의로움이라는 매력에 끌리게 마련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언제 이것을 배우려는가? 얼마나 더 우리는 밀고 요구하는 데에 의존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그 매력을 회복할 수 있는가? 그것을 철을 깎아서 훌륭한 자석을 만들 듯이 우리에게서 의를 생산하는 놀라운 은혜이다.
어쨌든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랑이 넘치는 환경과 긍정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의 평화를 깨지 않고 많은 압박을 주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이었다.
성도들은 만나는 장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성도들의 모임은 그들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였고, 자기 자신이 되는 장소였으며, 슬픔을 나누고, 질문을 하고, 필요를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는 곳이었다. 마음을 열기에 세상에 이 보다 더 편안하고 더 완벽한 장소가 그 어디에 있었겠는가?
맹인 음악 작가 켄 메데아는 이러한 글을 썼다.

만일 이곳이 눈물을 이해하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러면 내가 어디 가서 울겠소?
만일 이곳이 내 영이 날개를 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러면 내가 어디 가서 날겠소?
내가 얼마나 선하고 고결한지 당신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나는 다른 곳이 필요치 않소.
항상 최상의 자리에 있을
다른 곳이 나는 필요치 않소.
나는 항상 미소를 짓고 있을
다른 곳이 필요치 않소.
비록 내 감정과 맞지 않을 때라도
나는 다른 곳이 필요치 않소.
오래된 같은 상투어를 말하더라도
나는 다른 곳이 필요치 않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오.
그래서 만일 이곳이 나의 질문이 응답되는 곳이 아니라면
그때는 내가 어디 가서 찾겠소?
만일 이것이 내 마음의 울부짖음이 들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말해 주시오. 내가 어디 가서 말해야 겠소?

미래의 언젠가 어느 역사가가 우리의 시대를 돌아보며, 이렇게 기록한다면 먼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한한국 한반도 전체에 걸쳐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수가 더 많아지니라.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성품을 위한 추적이 그들을 더 굳건하게 세워 주었다.

이렇게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매력이다.

** 적용 **

초대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는 자석과 같이 끄는 힘이 있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는 능력이 있었다. 줄 때는 관대함이 있었고, 포옹할 때는 사랑이 있었다. 말을 할 때는 진실성이 있었고, 떠날 때는 눈물이 있었다.
19세기 후에도 교회는 지속되고 있다. 과거보다 우리 성도들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아졌고 더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까? 오늘 하나님 전에서 잠시 멈추고 이에 대해 숙고해 보라.
사도행전4장을 읽으라.

늙은 떨기나무가 어떻게 해낼 지를 깨달음

“최선의 기회든 최악의 기회든 이게 우리가 얻은 유일한 기회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사들이 새겨 들어야 할 좋은 말입니다. 지금이 역사에서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시간 동안 매일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주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승리를 할 수 있을까요? 충직하고 성공적인 그리스도의 대사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봉사하고 오래 기도하면 성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의 핵심입니다. 율법주의자가 아무리 진실하더라도 만약 자기를 의지하면 두려운 구렁텅이를 향해 가고 있는 셈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히브리 노예를 구타하고 있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의도는 진실했지만 자기 힘 곧 육체의 무기를 의지했습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꿈이 컸고, 그 꿈을 빨리 이루고 싶었습니다. 조급한 나머지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내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경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강사는 영국 횃불회(the Torchbearers) 설립자 메이저 얀 토마스(Major Ian Thomas)였습니다. 메이저 토마스의 설교 제목은 “늙은 떨기나무라도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해낸다”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메이저 토마스는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 사실을 깨우쳐 주시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떨기나무도 고도의 교육을 받은 떨기나무도 웅변력이 뛰어난 떨기나무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만약 너를 쓰려고 하면 나는 너를 쓸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이다.”
메이저 토마스는 광야의 떨기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덤불이었지만 모세는 그 앞에서 신을 벗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곳은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거룩한 곳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떨기나무 속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을 읽고 질문을 하고 훌륭한 사람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사역하는 모든 것도 무가치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좌절 속에서 지낸 게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어떤 일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서 2:20로 설교를 마칠 때, 환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한 성공적인 대사가 되는 비결이 내주하시고 부활하시고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데 있고 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 떨기나무를 장악하셨습니다!
엄청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각고면려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모든 걸 해보겠다고 인생 중 8년을 허비한 게 참으로 아까웠습니다.
어쩌면 이게 오늘 여러분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승리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자원은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골2:9-15). 이러한 깨달음에서 자신의 가치에 대한 경건한 의식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순례자다!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대사다!
이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참 짧지만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기를 그만두고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하고 말하게 된다면, 짧은 인생을 영원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점
* 여러분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느낍니까? 왜 그렇게 느낍니까? 또는 왜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 자신을 하나님의 대사라고 여기면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어떤 일을 이루어 놓으셨습니까?

영육과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영과 육의 대조를 통하여 성도가 육적 원리가 아니라 영적 원리에 의해서만 살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롬13:14과 롬8:3-17 그리고 갈라디아서 5:16-24등에서 바울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그의 구원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본 주제 강해에서는 영육의 개념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바울의 구원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영육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우선 이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인간이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데에서 비롯된다 하겠다(창2:7).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영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어떤 것일까?
① 혹자는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고대의 세속 철학에 기반을 둔 것으로 철저히 잘못된 이원론(dualism)이다. 성경은 분명히 영도 육도 하나님이 지어 주신 것으로서 본래는 둘 다 선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33:4-6).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후 영육이 동시에 오염되었음을 가르친다(롬5:12).
② 인간의 영육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유기적 결합체이다. 따라서 영육은 상호 긴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육신의 일거수 일투족은 영혼의 지정의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 역으로 육신을 단정하게 처신하느냐 아니면 방탕하고 추하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겠다.
③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육신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아 선하고 즐겁게 활용하되 방탕과 무절제로 흐르지 말고 정절과 근신으로 행함으로써 육신을 통하여 영혼의 신실함을 더욱 잘 드러냄과 동시에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고후7:1).

2. 바울 서신에서의 영육의 개념
바울 서신에서 영과 육이란 단어가 사용될 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영과 육이 문자 그대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롬13:13,14절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기서 만약 본문의 육이란 말을 인간의 실제 육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육체는 무조건 악하니 금욕, 나아가 육체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비성경적 극단론에 빠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흔히 바울 서신에서의 ‘육신’은 인간의 신체 발부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인격에 상존하고 있는 죄성’(롬7:17)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영’도 인간의 오염된 영혼이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께서 인간의 전인격 안에 보내 주신 생명과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킨다.

3. 영육의 개념과 바울의 구원론
앞에서 언급한 영육에 대한 개념과 바울의 구원론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은 육적 속성으로 인하여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성령의 은혜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이제는 그저 감사할 뿐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② 과거 육신에 속했던 시절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따를 수도 없었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육신의 죄악된 일을 따르면 안 되고 또 따를 수도 없다.
③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과 기쁨 속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되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꿋꿋한 신앙의 장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러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1. 엘(EL,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의 뜻) ; 2. 야(Jah,야웨의 어미만을 표기한 것) ; 3. 야웨, 여호와(Yahweh, Jehovah, “스스로 계신 이”[출3:14],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신 이”[요5:26]의 뜻) ; 4. 엘로힘(Elohim, 복수로는 신들과 재판장들을 가리켰고, 단수로는 하나님을 가리켰다) ; 5. 엘솨다이(El Shaddai, “나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눅1:49]) ; 6. 엘엘리욘(El Elyon,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뜻[창14:18]) ; 7. 아도나이(Adonai, “주”라는 뜻) ; 8. 야웨 체바옷(Yahweh Tsebaoth, “만군의 주”의 뜻[롬5:29 ; 약5:4]) 등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품성과 인격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름은 그 분의 전체를 나타내는 외적 표현이기도 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의 한 사람의 이름은 단순히 가족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단지 소유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의 인격전체를 가르켜 사용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사용은 다른 문화에서 있었던 것처럼 마력을 소유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이름은 심각하게 생각되어졌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이름들에 대한 진실된 관심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 사람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말할 때에 같은 심각성을 띠었다.
셈(Sem)문화에서는 이름들이 명명된 그 사람의 성격을 가리킬 때 주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런 형식의 이름 사용은 야곱(Jacob)의 경우를 예를 들 수 있다. 초기의 야곱은 “사기꾼”(supplanter)이란 뜻이다. 실로 그는 교활하고 자기 유익만 추구한 자였다.

1. 하나님의 이름:일반적 고찰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은 엄격하게 구별되어 불렸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는 비교적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이같은 원칙은 구약 성경 안에 있는 십계명에 나타나 있다. 즉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20:7,KJV)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 사용에 관한 포괄적인 언급이 있고, 또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어떠한 부정한 용어나 경박한 말들은 엄하게 배제했다.
십계명 중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돌고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 이름들의 전체 형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부분적이나마 원활하게 한다는 입장에서 쓰여졌으며 그의 계시된 본성이 경솔하게 다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름이 어디서 파생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름의 사용 그 자체를 강조했고 또 구약 성경에서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여겼다. 반면에 어원학은 이것과 가장 관계 있는 연구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이해를 어원학 자체로서 결론 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또 히브리인들(Hebrews)이 구약 성경 안에서 계시로서의 특별한 이름의 사용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고대 세계에서 통용했던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다루어져야 하는 또 한 가지는 구약 성경의 신성을 지칭하는 명명법 내에서 “초월성과 내재성”(transcedence-immanence) 문제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신성을 나타내는 복합적인 칭호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것은 히브리인들(Hebrews)의 하나님 이해는 감추이신 분인 반면에 현존하신 분임을 시사해 준다. 환언하면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신 반면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질에 관심이 있는 한 신인동형적인(anthropomorphic) 양태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이름과 본성에 대한 신약의 이해는 계속되었는데, 구약적인 사용을 단순화하였다. 신성을 호칭하는 이름들은 줄어들었고 하나님의 본성을 시사하는 것보다 이름 자체는 덜 강조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적 사용의 뉴앙스(Nuances)와 복합 동사 구조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데 쓰여졌는가 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돕기 위한 성격의 묘사들이(characterizations) 많이 나타나 있다.

2. 구약 성서 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이름들
구약 비평학에서는 특히 자유주의 계통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이름을 다루었다. 즉, 엘(El)과 야웨(YAHWEH)이다. 이 두 이름이 합쳐진 아도나이(Adonai)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칭호들은 어떤 그룹(group)을 나타내는 복합적인 이름들과는 대조적으로 보통 단순한 이름들이다.
그 이름 엘(El)은 고대 세계에서 신성을 지칭하는 가장 오래된 칭호들 중의 하나이다. 또 엘(EL)은 바벨론(Babylonia), 아라비아(Arabia)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Israelitish)에게까지 불려졌던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였다. 고대 세계에서 엘(El)의 개념은 성경 속에 자명한 하나님만큼 가치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런 말은 중동의 인종적인 근거에서 나온 용어의 출현의 의미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오래된 용어다. 또 많은 학자들은 원계시(a primeval‎! revelation, an Uroffenbarung)를 보유하기 위한 용어라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엘(El)이란 힘(power)과 권위(authority)를 나타내 주는 용어이다. 이와 관련해서, 죤 P. 랑게(John P. Lange)는 말하기를:
엘은 힘, 위대함, 광활함, 높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창세 기에 있는 이름들과 합류된 명칭들의 어원학상의 적합성을 나타낸 것이 바로 엘(El)과 엘로힘(Elohim)의 개념이다.
이와 같이 엘(El)의 원래 의미는 다음과 같다:(a) 강한(to be strong) ; (b) 통제의 영역이 넓어짐(to have extended sphere of control);혹은(c) 구속력을 가지다(to possess binding force). 아히롯(Walther Eichrodt)은 그의 저서 구약신학(Theology of the OT, p.17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우리가 받아 들이는 어떤 의미이든 간에 그것은 신 인(God and man)의 거리감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식으로 이름들 은 셈족의 하나님 개념(the Semitic concept of God)의 기본 특성으로서 기초적인 적합성이다. 즉 그것의 일차적인 중요성은 신성에 대한 근족 감정(feeling of kinship)이 아니라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대성 앞에 떨며 두려워하는 것이다.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셈 족(Sem)은 하나님을 어떤 자연물과 결코 동일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Nature)의 이면에 서 있는 힘, 혹은 자연 안에 나타난 결정 적인 의지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불러진 그 이름 엘(El)은 일반적이며 총괄적이고, 또 권력 혹은 능력에 대한 일차적인 의미성을 포함하고 있다(창17:1;28:3;35:11;수3:10;삼하22:31,32;느1:5;9:32;사9:6;겔10:5).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즉 이 이름에는 범신론을 없애기 위한 원초적인 유일신 사상(primeval‎! monotheism)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후기에 구약 성경에 나타난 복수형 엘로힘(Elohim)의 빈번한 사용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현대에 와서 엘(El)은 위력의 함축된 의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성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름(El)이 고대 중동과 성지의(Bible Lands) 사람들의 사고 안에 신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면 그 이름 야웨(Yahweh, 음역으로 여호와[Jehovah])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이 용어의 기본적인 의미는:“자존다”(He which is) 혹은 “진존자”(He who is trely present)이다.
우리는 이 이름들이 어떻게 해서 족장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는지, 아브라함 당대에도 유행했지만,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창세기12:8절에 아브라함이 벧엘(Bethel)과 아이(Ai)사이에서 제단을 쌓을 때 이해한 사상으로 새로운 관심과 의미성을 모세에게도 부여한다(출3:15,16;6:3,6 참고. 창12:8). 야웨(Yahweh)는 강력하게 개인적인(인격적인) 이름으로 계시되었다. 정통한 철자법으로 네 개의 문자 즉 YHWH로 표시했고 현대에 와서 음역으로 여러 형태로 모음을 첨가하였다.
만일 그 이름이 창세기 4:26절에 나오는 에노스(Enosh)가 출생했을 때 만큼이나 일찍이 알려졌다면 아브라함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연유로 해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에게 나타난 계시는 그 전 쓰던 그 이름를 더 심화하고 더 인격화된 이름의 사용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전 단계의 이름의 계시는 감추어졌으나 완전히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짙다.
모세의 그 이름 사용은(새로운 의미성을 포함한) 히브리인의 사상에 수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모세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것을 획득하여 구체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생활 깊숙이 그리고 친밀하게 연합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특별한 민족에게 보여 준 특별하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표시인 것이다. 출애굽기 안에 이스라엘인들이 한 민족임을 자각한 것과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가 밀접하게 연결된 계시다. 이러한 행동은 실로 이스라엘인들이 시내 산에서 야웨와의 직접적인 참여의 길을 준비한 셈이다.
이와 같이 그 이름 야웨(Yahweh)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자각과 불가분 연결되었고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유일한 계약관계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강조하면, 야웨(Yahweh)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셨고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거사에 개입하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이 이름을 사용하게된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유일성이다. 그의 셈(Sem)계통 민족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고 히브리 민족과 교제가 있어서 그들의 관심을 끌지않는 이상 적어도 하나님을 지칭하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계약 민족의 특별한 유산이었다.
또 역시 의미심장한 일은 필경사들이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피하여 그 이름의 의미를 높였다는 사실이다. 필경과정에서는 선택적인 이름들을 사용했는가 하면 구실을 붙여 썼다. 이런 것은 민족적인 감정의 기초로서의 이름의 깊은 의미를 증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의 초자연적인 근원에 대하여 느낀 것도 증거가 될 것이다.
다른 뜻으로는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 속에 야웨(Yahweh)의 이름은 순수한 자연적인 만유 위에 군림하시는 이름 이상의 것이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출애굽기3: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한 내용에서 그 이름이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발견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본질은 존재와 동일하다”는 형식처럼) 그들은 오히려 야웨(Yahweh)께서 현존하시고 지금 여기에 활동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아히롯(Eichrodt)은 그 이름 야웨(Yahweh)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야웨라는 이름은 돌입적인 하나님의 실존과 구체적으로 가까이 계심에 대해 강조해 온 신성의 이름 사용보다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 다. 또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의 일반화된 설명(초기의 이름들) 즉 규칙 과 지침 및 신의 영원함과 신을 높임 등에 관한 설명과 매우 신랄한 대 조를 이룬다.

하나님(엘, 엘라, 엘로힘, 엘로아)
여호와(JHWH, 야웨)
하나님(ts u-‘반석’)(사44:8)
하나님(데오스, 신약)
주(퀴리오스, 신약: 아도나이, 구약)
신성(데오데스, 골2:9; 데이오스, 행17:29)
신성(데이오데스, 롬1:20)
지극히 높으신 자(엘리온, 시18:13, 등)
지극히 높으신 자(훕시스토스, 마21:9, 등)
거룩한 자(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카도쉬, 시71:22, 등)
전능자(엘, 시50:1; 깁볼, 신10:17, 등)
신의 신(신10:17)
주의 주(신10:17)
빛을 주시는 자(Light giver, Maor, [마오르] 창1:16)
아버지(압, 구약: 시89:26, 등)
아버지(파테르, 요5:17, 등)
심판하시는 이(사파트, 창18:25, 등)
구속자(가알, 욥19:25)
구원자(야사, 사43:3, 구약)
구주(소테르, 눅1:47, 신약)
건지시는 자(파랕, 시18:2, 등)
방패(마겐, 시3:3, 18:30[Buckler], “방호물”
힘(에얄뤁, 시22:19)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이, 창17:1, 등)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 창16:13)
의로우신 자(차디크, 시7:9, 등)
만군의 여호와(엘로힘 체바옽, 렘11:20)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계시와 야웨(Yahweh)의 이름에 대한 이해는 영적인 각성과 범국민적 종교경험에 있어서 경점을 이룬다. 해방시키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신(mentality)안에 자기 자신의 한 구체적인 구속적 역할을 생각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구원하는 행위였고 또 그렇게 이해되었다. 홍해(Red[or Reed] Sea)에서의 구원은 야웨께서 자연의 힘을 은혜의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도록 하셨고 또 국민이 역사적 출현과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히브리인의 케리그마(kerygma)의 핵심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의 케리그마의 핵심이란 출애굽기 20:2절에 나오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나타난 특수화된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 시사한 특유성에 관한 아무런 반대 이론의 재기도 없디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더글라스 클라이드 매킨토쉬(Douglas Clyde Macintosh)와 같은 사가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히브리 민족에게 특별하게 한정되이 계시하셨는데 이 행동은 한 민족에서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을 택하여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약 성경의 통찰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존재한 지식의 결속력(knowledge-bond) 즉 인간의 타락시에 깨어진 결속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도원을 행사하시는 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야웨(Yahweh) 혹은 여호와(Jehovah)의 이름하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기를 통하여 구속역사의 전개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이름을 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하는 것은 성경 전체 구조에 있어서 최고의 의미를 지니게 한다.
또 다른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자주 나온 신성에 관한 기본적인 이름들 중 하나는 아돈(Adhon) 혹은 아도나이(Adhonay)인데 주로 아도나이(Adonai)로 발음한다. 아돈(Adon)이란 어형의 근원은 일반적으로 셈계통 민족들에게 주로 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에 의해서만 쓰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구약성경 안에서는 권위가 주어진 사람에 관하여서도 쓰여졌다.
여호수아 3:11절에 하나님은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불려졌고 아도나이는(문자적으로 “나의 주”임) 복수형으로 가장 자주 쓰여졌다. 이 단어의 최초의 사용은 확실히 더 초월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만유 위에 높이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표시하는 칭호였다. 광범위 사용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인격적이고도 친근한 관계를 표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단어는 관계의 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책임과 임무와도 관계있는 칭호이다. 그 이름은 자주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야웨와 같이 쓰여지기도 했다. 이 단어의 후기 사용은 야웨가 실로 그의 백성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 가는 것처럼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며 하나님은 어느 구체적인 장소의 하나님으로 간주되거나 지역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성을 지니고 있다.

3. 구약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
구약 성경에는 야웨(여호와) 외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와 있는데 엘, 엘로하 그리고 복수형의 엘로힘이 있다. 엘로아(Eloah) 혹은 엘로하(Eloha)의 이름 형태는 욥기에서 주로 사용된 것으로서 40회 이상 나온다.
복수형 엘로힘은 (철저한 복수형이라 자주 불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구약에서 2,000회나 쓰였다. 그 이름은 주고 정관사(하-엘로힘[ha-‘elohim])를 붙여서 빈번히 사용하였는데, 이는 유일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이름 사용의 주된 의미는 아마도 셈족의 보통 이름 엘을 넘어선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부르기에 꼭맞는, 여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분으로 간주한데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복합적인 이름들 중에 엘 솨다이는 족장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명확한 발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엘 솨다이(El Shadday)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the almighty God)으로서의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지탱하시는 이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주도권자와 계약들을 지키는 자로 나타나셨다. 그 분은 분명히 인간의 영역에서 확실히 역사하시고 자연적인 힘을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쓰시는 분이셨다.
그 이름은 아마도 바벨론 사람과도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히브리어 삿두(sadu)는 고대 셈족 말로 산이란 뜻이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엘 솨다이(El Shadday)를 지탱자로 이해했다. 이것은 아마도 삿두(sadu)란 말을 가슴, 혹은 품이란 뜻으로 부적당하게 번역한 70인역 의역자들 간에 혼동이 있는 듯하다.
그 이름의 바른 이해는 “산”이란 뜻에서 유래 했다는 이해다. 그리고 이 말은 힘, 안정, 영원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명백히 시사한 것은 그 이름이 기본적으로 시적이란 것이다. 이와 같이 장엄한 안정, 믿을만한 피난처, 움직이지 않는 기둥의 뜻을 나타낸다. 이 이름이 계시하는 것은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계약의 부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점과 연관된 사건들은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람들, 즉 이삭의 출생-할례제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갈(Hagar)과 이스마엘(Ishmael)을 위하여 세운 약속이 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이름이 족장 시대에 통용하는 말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즉, 히브리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주로 밀접하게 또한 유일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시대에 그 이름 엘 솨다이는 히브리인들의 교육에서는 중요한 단어였다. 이 이름은 아마도 엘로힘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주된 용어였던 시대와 강렬한 개인적이고 구속적인 이름 야웨 혹은 여호와에 대한 재강조했던 시대 사이에 쓰여졌던 것 같다.
또 다른 이름들 엘 올람과 엘 엘리욘 즉 둘 다 원래 셈어의 엘을 형성한 복합적이고 또 여러 가지 강조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원래 “옛적부터 늘 계신 하나님”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1:33절에서 이 이름의 주된 사용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변화무상한 시간 위에 높이 계신 분을 나타낸다. 그는 자연 현상 위에 군림하시는 분으로 생각되어졌다. 이런 사상들은 특히 예언자들 시대에 주로 있었는데 바벨론 포로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엘 올람(El Olam)과 엘 올로암(El ‘oloam)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그의 무한성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반면에 엘 엘리욘(El ‘Elyon)은 창세기 14:18절과 민수기 24:16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지극히 높으신 분 그리고 최고의 존재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 이름 사용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의 특유성에서부터(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표현했지만) 최고권에까지 표현했다.
이 이름은 아주 오랜 고대 히브리 역사에 나타났었는데 아마도 B.C. 1000년 경까지 사용되다가 없어진 듯하다. 그러다가 구약 성경의 시가서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전능하신 하나님(omnipotent God)이 강조점으로 되어 있다. 또 포로 후기에도 역시 나타났는데 다니엘 7:25,27절에 주로 나타나 있다.
엘로힘 체바옷(Elohim Seba‘ot)-안식의 하나님(God of Sabath)은 문자적으로 “만군의 하나님”(God of Hosts)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모든 창조물을 통제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사무엘상 4:4절과 사무엘하 6:2절에 보면 언약궤와 연관되어 있고 예언자들에 의하여 빈번히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용사이신 하나님(Warrior God)과 같이 불려졌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250회 가까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 용어는 한 국민 혹은 종족신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인근 국가를 심판하시는 야웨 체바욧(Yahweh Seha‘ot)과 연결지어서 예언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만군의 주”(Lord of Hosts)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만군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로 이해되었다. 그 이름은 고귀함, 초월과 전능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주적 특성을 나타낸다. 아이히롯(Eichrodt)은 그의 저서 “구약신학”에서 이스라엘의 고귀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기 개념은 그 후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부언해서 군주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숭고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기 개념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제의적 이름 사용(cultic usage)과 국민적 혹은 종족적인 정조(sentiment)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관념을 가진 야웨이스트(Yahwist)의 신앙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
츄르-“반석‘Rock'"이란 이름은 모세의 노래(신32:4,15,18,30,31)에 나와 있다. 그리고 시편과 이사야서에 여러 번 나와 있다. 이 이름의 쓰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즉 그 이름은 성 혹은 방패(fortress of shield)로 나타났다. 또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로 나와 있다. 또 같은 의미로 시편 92:15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다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라고 나와 있다.
신명기 32:15절에서 모세는 “여수룬아!”하고 꾸짖는 부분이 나온다(여수룬은 “정직한 이”란 뜻으로 물론 이스라엘을 비유적으로 가리킨 말이다). 츄르(Tsur)를 신명기 32:31절에는 이스라엘의 반석은 적군의 “반석”과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 참고 성경귀절에서 하나님의 힘, 적을 혼란시키고 무수히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 즉 이스라엘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시사해 주는 이름이 나온다.
카도쉬(“거룩한 분”, “거룩한 자”)라는 뜻을 지닌 이 이름은 시편에서 나타나 있고 또 특히, 이사야서에서는 30회 이상이나 나오고 있다. 이 이름은 가치없는 것과 불의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며 역시, 힘 그리고 인간과 세상으로부터의 거리감을 나타내며 어떤 의미로서는 냉혹한 거리감과 접근 불가능을 나타낸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the Holy one of Israel)로 선포되었다. 이와 같이 이 용어의 주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초월성의 주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 이름이 특별한 뜻이 부여되어 있다.
성경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두 명칭이 있는데 하나는 아빌(권능자 “Mighty One”)이고 다른 또 하나는 가볼(권능있는 “Mighty”)이다. 첫째 이름은 이스라엘, 혹은 야곱과 관계있는 이름인데 적절하게 선택된 이름으로서 권능에 관한 시적인 주제다. 둘째 이름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엘과 야웨라는 명칭과 관계가 있다(사9:6;42:13;렘32:18).
창세기 49:24절에 나타난 아빌(Abhir)이라는 이름은 선택받은 자의 손에 힘을 주시는 권능자로 시편 132:2-5절에도 나타났듯이 주의 법궤에 의해서 하나님의 현존이 상징 되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또 이사야 49:26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 이름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의로운 자”로 번역되는 챠딕은 자신에게 진실하신 분, 역할로서 계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이름이다. 이 이름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명확히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바로(Pharaoh)가 출애굽기 9:27절에서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말하여 이 사실을 인정했고 또 시편 129:4절과 145:17절에서 시인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두 이름, 즉 단 한 번 밖에 사용된 기록(문헌)이 없는 이름은 엘로이와 엘 브릿이다. 전자는 창세기 16:13절에 나오는데, 사라의 성화에 못이겨 네겝으로 도망간 하갈과 관련해서 쓰여진 이름으로 목격하시는 하나님(God of Vision) 혹은 감찰하시는 하나님(God of Seeing)이시다. 문맥으로 보아 후자도 창세기 16:13절에 해당된다.
엘 브릿(‘El Berit)은 사사기 9:46절에만 나오는데, 그 기본적인 의미로는 “계약의 하나님”(God of the Covenant)으로 사사기에는 세겜(Shechem)에 있는 지성소의 이름을 엘 브릿이라고 했고 이곳은 세겜(Shechem) 거민의 보고(Treasury)가 있는 곳으로 세겜 사람들이 이 보고에서 은 70세겔을 꺼내어 자기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아비멜렉에게 주었던 곳이다. 이 지방의 지성소와 계약의 주지와의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야곱의 자손들과 세겜 사람들간의 계약체결을 검토해 보면 아마도 야곱이 세겜 사람들에게 땅을 요구했던 것을 암시해 주는 것 같다(창33:19).
전술한 바와 같이 구약에서의 이름 사용은 비록 본래적이고 또 심지어 형이상학적인 의미들이 전부 없어지지 않았지만 이름들이 하나님의 기능과 활동을 묘사하고 있음은 명확하다. 더욱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름들이 점진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단계를 보여 주는 상황들을(특히 중대한 상황) 계시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전체 계시의 경로는 십계명의 제3계명에 의해서 보장되고 있다. 즉 제3계명은 하나님의 명칭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섭리 뿐만 아닐 이름 사용에 관계된 진리의 규범에 대한 신중한 규정을 지은 것이다.

4.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이름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이름 사용은 구약에서의 명칭들을 단순화한 경향이 있다. 보통 쓰는 이름은 물론 데오스이다. 이 이름은 엘(El)과 엘로힘(Elohim)과 같은 복합적인 이름들을 하나의 이름 형태로 나타냈다. 또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 이름은 자족(self-sufficiency), 자결(self-determination), 그리고 절대의(absolute righteousness)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명칭 데오스의 신약적인 사용에 있어서는 구약에서 쓰여진 하나님의 개념들과 당연히 친밀성을 지니고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데오스는 만유의 깊음 안에 현존하시나 피조된 우주와는 독립된 존재이시다. 반면에 하나님은 낯설은 존재가 아니시다. 그 분은 본질상 초월적인 존재이시며 피조된 실존들과 혼합된 존재는 아니시다.
또 주님을 부르는 명칭으로 퀴리오스(주님[Lord])라는 명칭이 여러 차례 나온다. 아마도 구약의 하나님의 명칭들, 즉 아도나이(Adonai) 야웨(Yahweh) 혹은 여호와(Jehovah)와 같은 이름을 통칭해서 사용한 듯하다. 그 이름 퀴리오스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모두를 가리키며 자주 예수 그리스도에(Jesus Christ) 대한 주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었다. 복음서에서는 구약의 명칭 아도나이(Adonai)와 직접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데오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용되었다(요20:28). 예수님의 부활 후에 설화를 보면 특히 이 이름은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눅24:34;요20:18;21:20).
이와 같이 신약의 말씀들을 살펴보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의 풍부성과 다양성이 전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데오스와 퀴리오스가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그 명칭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지존자(Highest, Most High), 전능자(Almighty)와 같은 이름인 엘론(‘Elyon), 아빌(Abhir)과 솨다이(Shadday)와 비교적 상응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표현했다(눅1:35,76;계4:8;11:17;21:22을 보라).
신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의 가장 현저한 발전은 성부 하나님을 소개하는 이름이다. 반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구약에서 특히 야웨(Yahweh)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한 관계(특히 시문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시68:5;103;13)에 많은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친밀하게 우리 주님게서 사용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이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셨다(마7:21;10:32;눅2:49;11:13;요12:49). 또 특기할 만한 사실은 누가복음 2:49절의 기록된 그의 첫 말은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자각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설교인 누가복음 24:49절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중점으로 다룬 설교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 5:18절에 보면, 유일하게 자신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주장하셨고 또 하나님의 부성(fatherhood)은 마태복음 7:11절과 누가복음 11:13절에 보면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되어 있다(타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구속자로서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셨다. 또 예수께서 사용하신 그 이름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불리어졌다. 여기에 부언해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철학적이 아니고 친 부자 관례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데오스나 퀴리오스라고 불렀을 때 보다 더 가깝고 깊은 의미가 있다.
신약서신서에 나타난 예수께 대한 칭호는 몇 가지 없지만 하나님을 창조자와 통치자 구속주 그리고 만민의 아버지로 보았다.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중생한 사람들의 아버지를 뜻한다. 이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상황내에서만 그 이름 “아버지”가 가장 완전한 의미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5. 이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자세한 논쟁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특이한 사실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이름들이, 앞에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하나님의 활동과 기능들을 묘사한 이름들이다. 또 복수형으로 나타난 이름에서 기능들, 함축된 의미들과 본성을 찾을 수 있겠다.
이것은 물론 히브리인들과 기독교시대의 남녀 종들에게 부여된 근본적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이해와 다양한 명칭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왜곡될 가능성은 전혀없다. 영성(spirituality)과 인격(personality)의 이중 성질은 구약 전체에 나오는 명칭들을 통하여 더욱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구약으로 되돌아 가면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 관한 더 기초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계시된 이상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 하셨으므로 선재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의존하여 증명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I will be that I will be).
전능자로서의 주님은 자유의 본질 안에서 유일하시다. 이 유일성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존재의 유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신명기 6:4절의 쉐마(Shema)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이다. 이런 생각은 포로귀환 시기에 히브리인들의 마음 바탕과 유대인의 신관의 총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만유의 주권자이신 아버지로 나타나 있다. 이후에 개념이 왕으로서의 여호와 이해와 나란히 전개되었고 신약에 와서는 결정적인 주지가 되었다. 이들 개념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기초되었다는 말이 없어도 필연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전능자로서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항거할 수 없는 능력이시오 거룩한(holiness) 분임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레11:44;삼상2:2). 이러한 하나님의 품성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피조물에게 거룩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제사장들, 법궤, 성막과 백성들의 거룩함이 실례로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정결은 제의적 성격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레위기 17장에서 26장까지를 거룩한 법령이라고 하는 심오한 제의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법령은 강력한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복종에 해당하는 축복을 다룬 부분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악으로부터 분리할 것을 요구하셨다.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칭호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에서 밝혀질 수가 있다. 반면에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된 것같이 보이나 하나님은 한 민족의 사랑을 넘어선 우주적 사랑을 실행하신 분이다. 또한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분명히 전인류에게로 확장됨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요한일서 4: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의 분명한 함축된 의미이다. 물론 이것의 최고 증거는 말씀(Word)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잘 나타나 있다(요한일서 4:9,10).
그러므로 피조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과의 관계에서(특히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 사용을 통하여 계시된 이상) 부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초월 대 내재(transcendence versus immanence)라는 가장 예민한 형태의 논쟁점을 낳는다. 힘이라는 강한 특징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 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또 그 곳에 대한 요소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세상에 대한 관계에 모두 해당된다. 구약적 사용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위엄(느9:32;시68:34,35;겔10:5)에 있고 신약에서는 사랑과 구속의 역할로서의 역사의 주와 만유의 창조자와 영원한 통치자가 강조되었다(딤전1:17).
야웨라는 이름 하에는 초월과 내재라는 두 주지가 결합되어 있다. 한편 그는 힘과 능력의 하나님이셨고(출3:14;20:2) 또 동시에 인간의 사건들 안에 활발하게 역사하신 분이었다. 그의 가까이 계심은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접근과 유효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여 졌다(예를 들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관계와 같음). 계약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법과 사랑이라는 두 범주 안에서 관계되어진 것 같다. 왜냐하면 능력있는 구원자는 역시 법을 주시는 자시오 동시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의미깊은 문제는 신 이해(understanding of Deity)인데, 특히 신구약 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바는 유일신 사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그의 관심을 선포하셨는데 특히 인류의 구속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을 영으로 호칭한 것은 그 분의 품성을 나타내고 복수형 엘로힘(Elohim)으로 부른 것은 삼위 일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제자

고대의 선생들에게는 모두 제자가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제자직에 대한 관념은 매우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제자에 대해 드물게 언급되었지만(대상25:8;사8:16;50:4), 헬라 사람들 중에서는 일반적이었으며 또한 후기 유대교의 한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모세(요9:28), 세례 요한(눅11:1;요1:35), 그리고 바리새인들(막2:18)에게도 제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항상 선생-학생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었다. 제자란 말은 “배우다”란 뜻의 동사들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제자직은 배우는 과정을 의미하나, 그 말의 용도는 선생의 교훈과 행실, 그리고 생활방법을 따르는 제자의 직분을 덧붙여 기술했다. 육체적으로는 수세기 전에 살았던 분을 스승으로 모실 수도 있었다(요9:28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했다).
제자직은 신약에 잘 나타나 있고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세례 요한도 그의 제자들이 있었고(마9:14), 바리새인들(22:16), 그리고 바울도 자기의 제자들을 두었었다(행9:25).
그러나 “제자”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나타낼 때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12제자 2.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증거한 사람들(눅6:13;19:37;요4:1;6:60,67). 제자라는 말의 가장 넓은 의미로는 그를 믿었던 사람들(요8:30,31), 또는 그에게 배우러 왔던(마5:1,2) 모든 사람들을 가리켰다. 한 때 이러한 제자들은 무수하였고(눅6:17), 죄인들에서부터 서기관들에까지 다양하였다(마8:18-22;막1:16-20;2:13-15;눅6:14-16;요19:38). 이들 중 대다수가 갈릴리 출신이었으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자라는 말은 또한 좀 더 좁은 뜻으로 쓰여서 예수님의 친밀한 교제권의 일부 또는 모두를 가리키며(마10:1;11:1;눅9:54;요6:8), 종종 12제자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할” 배우는 자들이었다(요8:31,32).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만 할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자기들의 생활 방식에 적용하기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눅6:40;요15:7,8).
주님의 교훈은 여러 말씀 중에 나타나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한 계명 안에 요약되었다(요13:34). 제자직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 한 개념인 계명에 순종이라는 말 속에 요약되어 있다(요13:35).
예수님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마5-7장;13장). 그 말은 육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특히 예수님 자신에 관한 말씀이 많았기 때문에(요6:60), 대다수의 제자들이 물러 갔다(요6:66). 그 결과로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마16:21), 그 시대의 종말에 대하여(막13장), 사랑과 성부,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요14-16장)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가르쳐 주셨다(요6:68). 그리고 천국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셨는데(마4:19,한 예외가 눅9:57에 있다), 그 분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이었고[막2:18,23,24] 그 선생을 버리는 것은 곧 그 제자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막14:27,50]).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개인의 모든 일과 재산과 가정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었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그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그의 권위 때문이며, 그들은 주님을 증거할 책임이 있었다(고전15:1-3).
제자라는 말 속에는, 따르고자 하는 분의 말과 교훈과 추종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을 친히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순회 랍비처럼 예수님을 끊임없이 활동하셨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문자적인 뜻대로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따르다”는 동사는 복음서에서 약80회 나타나며, 전적으로 지상의 예수님과 그의 동료들간의 관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제자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모든 제자가 자기 소유(막1:18,19),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마10:29)등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마10:38). 왜냐하면 제자는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이며(10:24), 선생에게 일어난 일은 또한 그 가르침을 받은 자에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10:25;눅6:40).
“예수의 제자”라는 표현은 또한 덜 엄격하게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비밀리에 그의 제자들이었던 사람들을 가리키고(요19:38), 신체적으로 전혀 그와 가까이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암시적으로 말하기도 한다(참고. 막9:38-40;5:18,19). 이러한 제자의 개념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가 제자라는 말을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할 수 있었다(행9:25과 19:1은 유일한 예외이다).
놀랍게도 “제자”란 말은 신약에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주로 나와 있다. 또한 제자의 동의어로서 복음서에서 자주 쓰인 “따르다”란 동사가 복음서 밖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그의 지지자들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 오직 2회 나타나 있다(계14:4;19:14). “제자”와 “따르는 자”라는 의미 속에는 따라야 할 분을 높이고 그 분을 위해 내 모든 소유를 맡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서 그 후에 이 말의 의미로 많이 쓰이지 않다가 사도행전과 속사도시대에 와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그 말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자가 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데에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음 성경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마10:1-4;참고. 마12:1,49:15;15:23,32;막8:27;눅8:9;요11:7;12:4;16:17).

성경 읽기

왜 성경을 읽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면, “구하라, 그리고 주님의 책에서 배우라.” 잠언서의 저자는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했다. 다윗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그의 마음에 두었다고 하면서 주님을 찬양했다. 이러한 명령들을 하신 세 가지 기본적인 이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성경적인 지식의 결핍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성경적인 지식의 결여와 능력의 결여는 영적인 메마름의 두 가지 증상들이며, 이러한 증상들은 대개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려면, 우리는 필수적으로 성경에 대한 명백한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와 같은 두 사람은 에스라와 아볼로이다. 에스라는 주전 400년경에 살았다. 그는 “주의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할 때, 에스라는 모든 유대 백성들을 소집해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꾸준히 읽어 왔던 에스라는 대중 앞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아볼로는 그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헌신한 신약성경의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불리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데 사용하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그의 삶의 지침서로 삼으셨다. 구약성경에서 그는 자신이 메시야적 하나님-인간이었음을 확인하셨다. 사단을 물리치실 때도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해서 전쟁을 치르셨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하나님의 신탁에 매우 익숙하셨다. 예수님은 소년이었을 때, 많은 율법학자들을 무색케 하셨다.
성공적인 성경읽기를 위한 4가지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
(1) 지속성 (2) 소리내서 읽기
(3) 체계적인 복습 (4) 말씀에 대한 순종

1. 지속성
역사는 우리에게 지속성에 관한 몇 가지 좋은 사례들을 제공해 준다. 유명한 발명가로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은 이상스럽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실패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만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그는 그의 실험작업을 구경하던 사람에게 “자! 이제 전등을 만들 수 없는 만 가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뛰어난 조각가에게 위대한 조각품을 만드는데 요구되는 재능이 무엇인지 물었다. “재능은 값싼 것이지만, 헌신은 값비싼 것이네:즉 자네의 전 인생을 드려야 하네”라고 노련한 조각가는 답변했다.
벤 프랭클린은 단순한 지속성을 통해서 많은 것을 성취했다. 로버트 딕 윌슨 교수는 꾸준하게 적은 시간을 투자해서 47개의 언어들을 정복했다.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작곡을 마칠 때까지 한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음악 지도자가 말했다. 데렉 프린스는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는 매일의 성경 묵상을 통해서 평생 동안 성경을 백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조지 뮬러 역시 헌신된 매일의 성경 묵상가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사례들을 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필요한 두 가지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다.
첫째로, 성경 읽기는 한 번에 많은 분량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매일 단순하게 적절한 분량만큼만 읽는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매일 일정한 분량을 읽는 것이다-그 분량이 한 문단이거나 반 문단일지라도-그러나 하루도 빠지지 말고 읽어야 한다.
두 번째로, 성경을 읽는 시간을 그 말씀을 부지런히 적용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라. 로버트 딕 윌슨 박사는 앞장의 문법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에는 결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데 부지런해야 되지 않겠는가?
변호사인 젠 네일은 10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일정한 분량의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은 결과, 성경을 70회 이상 통독했다.

2. 소리내서 읽기
효과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두 번째 제안은 소리내서 읽는 것이다. 오늘날 비록 속독에 대해서는 많이들 제안하고 있지만, 소리내서 읽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가 성경을 조용하게 읽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버거 거하드슨은 이렇게 썼다. “한 유명한 사례는 암브로시우스가 조용하게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한 어거스틴의 평범한 충격과 그 현상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신약시대에서 사실로 입증된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소리내서 읽을 때 전도자 빌립이 그 앞에 가서 그에게 메시야에 관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의 말씀은 언제나 그들의 입술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랍비적인 전통에서 랍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훈련시키는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강요하고, 부추겨서 가르치는 내용을 소리내서 읽게 하고, 기억하게 했다. 따라서 랍비들은 그들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학습을 인정했다. “이와 같이 학생의 의무는 그의 스승의 말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었다.” 시편에서 책임감 있는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듣는 앞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성경 구절들의 위치를 기억하느냐고 물어 왔다. 일반적으로, 비법은 성경을 소리내서 읽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소리내서 교재를 읽는 것이 조용하게 눈으로 읽는 것보다 200-300퍼센트 정도의 기억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단순하게 적용하고, 소리내서 성경을 읽어라. 처음 두 가지 제안들(지속성과 소리내서 읽기)에 첨가해서 우리는 ‘매일’ 성경을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3. 복습
나는 미션 스쿨인 고등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던 기간중 해 온 교육방법 중 복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학생들에게 지난 6주간에 했던 성경공부 내용을 복습하도록 했다. 이러한 복슴이 몇몇 학생들에겐 특별하고 집중적인 시련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열매는 풍성했다. 나는 사실 나의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결코 나의 경험을 복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었다.
하루를 마칠 때, 그날 당신이 읽었던 내용을 신속하게 머리 속으로 요약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반복은 복습의 한 중요한 국면이다. 할렐이라는 랍비는 “백 번 반복하는 사람과 백한 번 반복하는 사람은 결코 비교될 수 없다”고 말했다. “랍비의 삶은 지속적인 반복의 삶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가 ‘하나님의 뜻은 버려지지 않는가’라는 진리를 내포한 요한일서를 어떻게 철저하게 공부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방법은 하루에 한 번, 한 달 중 하루 동안 그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하는 데 하루에 2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는 그 책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내가 어떻게 성경을 공부했는지, 성경 말씀이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되었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요한일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자리에 앉아서 5장 전체를 한꺼번에 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통독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성경은 몇 절씩 분류되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문맥의 흐름 가운데 쓰여진 것입니다). 다음 날 나는 자리에 앉아서 요한일서를 다시 통독했습니다. 셋째날에도 역시 요한일서를 통독했습니다. 넷째날도 다섯째날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 일을 30일 동안 했습니다. 30일이 지난 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요한일서에 내포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G. 캄벨 몰간은 1900년을 전후해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의 시기에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D.L. 무디와 찰스 스펄전과 앤드류 머레이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과 함께 사역했다. 몰간은 성경을 가르치기 전에 그 부분을 50번을 소리내서 읽었다.
복습과 반복은 성경 읽기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앞장에서 언급한 지속성과 소리내서 읽기와 병행되어서 현재 우리가 매일 읽고 있는 방법에 반영되고, 역시 그날에 읽었던 부분을 복습하도록 해야 한다(잠자리에 들기 전, 한 문장으로 요약된 분량을 소리내서 복습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은 우리를 마지막 요소로 인도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읽는 자는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4. 말씀에 대한 순종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다윗 왕은 말씀에 대한 이해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이해력은 순종보다 선행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력을 갖고서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유다 백성들은 에스겔의 가르침에 불순종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그들에게 노래하며” “그들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연예인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유다의 백성들은 비록 흥겨웠지만, 에스겔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에스겔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그들에게 죄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 그에 대한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왕 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의 생애의 마지막에 주어진 평가는 “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을 축복하셨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순종한 노아는 물 위에 떠올라 생존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실 때는 단순하게 그분께 순종하라.

본문 읽기

설교를 위한 성경 본문은 가장 믿을 만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의 해석에 기초한 번역본을 가지고서 여러 번 소리 없이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큰소리로 읽어야 한다. 물론 능력이 있으면 원어로 읽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금은 나사로보다도 더 오랫 동안 죽어 있었던 원어를 부활시키려고 애쓰거나 양심적으로 원어를 봐야겠다고 고집해야 할 때가 아니다.
처음 본문을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어떤 면에서는 순진하다고 할 정도로 본문과 만나야 한다. 머리와 가슴의 모든 문을 열어 놓고, 후에 설교에서 무엇을 말할까 하는 것은 물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하는 염려를 다 떨쳐 버려야 한다. 이 때는 그저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질문하는 때이다. 모든 반응들을 다 적어 두어야 한다. 기억을 신뢰하지 말고 떠오른 생각이 유용한 것인지 재보느라고 시간을 들이지 말자. 그 과정은 가장 즐거울 테지만 그 즐거움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심각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어떤 다른 책이나 연구 자료가 이 시점에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후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적합한 연구를 하지 않는 것 다음으로 잘못된 일은 참고 자료 준비를 너무 빨리 시작하려 드는 것이다. 참고 자료가 적당한 때에 사용되면 아주 필수적인 것이 되지만 만약 너무 일찍 개봉되면, 그것이 모든 절차를 지배하게 된다. 즉 설교자를 억압하고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바로 그 책상 위에 여섯 명의 국제적으로 알려진 성서 학자들의 글이 있는데 누가 생각을 진전시키거나 해석을 하려 들겠는가? 그들이 본문과 설교자 사이에 끼어들어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할 것이다.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설교자들 중 어떤 분들은 자기들이 준비과정에서는 읽어 보지도 않았던 본문을 설교한 적도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처음 본문을 읽는 동안에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본문과 만남을 통해서 후에 설교될 메시지를 얻게되는 과정이 시작된다. 게다가 설교자는 단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욕구 이외에는 아무 참고 자료의 도움도 받지 않고 본문을 대하게 될 청중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본문을 읽는 목회자는 학자들 사이에 보다는 교인들 사이에 더 많이 앉아 있게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담임 목회자이자 설교자로서 그 본문을 읽게 된다. 나중에는 그가 박사들 틈에 앉아서 질문하고 대답하기 위해서 주석들과 사전들에 둘러 싸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해결해야 할 의문들은 아마 처음 본문을 읽었을 때 그 본문 자체에 의해서 제기된 것들일 것이다. 또한 자신의 설교도입 부분의 절반 이상은 이러한 초기의 노트가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어쨌든 그것이 설교자가 그 본문을 알기 시작하게 된 방식이며 교인들도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이다. 설교자가 여러 시간 동안 연구하고 생각한 후에 도달한 결론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함께 생각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서로 부분에 있어서 아주 뛰어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후에 참고 자료들을 참조할 때 상당한 유익이 될 것이다. 본문은 이미 그러한 자료에서 찾아보아야 할 문제들을 제기해 주었고 따라서 그러한 책들은 주인된 입장이 아니라 종된 입장에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미 그 본문을 알고 또 그것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만일 그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참고 자료들을 사용하고 대하는데 더 자신이 차 있게 된다. 이제 그 목회자는 그 대가들 틈에 동료로서 앉아있는 것이며 그들 밑에서 단지 “네 맞습니다, 박사님” 하거나 “아니지요 선생님”하는 것 외에는 아무말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바로 이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독자들이 다른 성경 본문 중 생각나는 것이 없다면 다음의 세 개의 짧은 구절들을 읽고 응답해 보라. 물론 이 구절들은 즉각적으로 아주 다양한 반응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선정된 것들이다. 최소한 그것들은 몇 번의 설교학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본문들은 그렇게 생동적이지 않고 그 본문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이 본문들은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제안이나 가이드 라인이나 즉각적인 질문들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다. 독자들에게는 본문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대상11:15-19, 고전7:32-35, 눅9:57-62).

지파

영어의 “tribe”란 단어는 라틴어 트리부스(tribus)로부터 직접 또는 프랑스어를 거쳐 유래한 말이다. 그 단어는 보통 (1) 비교적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인 사회에서 한 우두머리 아래 모여 있는 집단, 또는 (2) 이스라엘 민족의 기본적 구성단위인 12지파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본항목에서는 후자의 의미만을 다룬다. 세벹은 이사야서 19:13절에서 단 한 번 애굽 방백에 관련된 비이스라엘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마타는 그러한 용례가 전혀 없다. 헬라어 풀레는 요한계시록 1:7;5:9;7:9;11:9;13:7;14:6절 등에서 보다 폭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KJV는 그 단어를 “kindreds”(친족)로 옮겼다. 풀레는 마태복음24:30절에도 나온다. 이 경우는 직설적 또는 상징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지파를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사도행전26:7절에서는 그 단어가 12라는 수사와 결합되어 있다. 완전히 동의어로 사용되는 두 가지 히브리어 단어는 “막대기”(rod) 또는 “지팡이”(staff)를 뜻한다. 그것은 특히 권위의 상징으로서 족장의 지팡이(참고. 영어의 scepter[홀])를 가리켰는데 의미가 확대되어 족장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헬라어 풀레는 “낳다”를 뜻하는 동사 푸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1. 이스라엘 지파의 기원
초기의 인문학적 연구는 불가피하게 B.C.2000년대 초반에 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지파를 의인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실상 그 이야기 중 일부는 분명 개인적 차원을 넘어 서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이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당시 비옥한 반달의 옥토 지대(the Fertile Crescent)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극히 소규모의 여러 반(半)유목민 집단이 그 지역 내에서 이동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비옥한 반달의 옥토 지대의 행정단위는 요새화된 취락이나 성읍이었으며 그것은 한 성읍이 행사할 수 있는 통치권의 범위가 아무리 크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상태는 훨씬 후기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고고학적 평가에 따르면 B.C.2000년대 중의 가나안 지역 인구는 5,000명을 넘은 적이 거의 없으며 대개는 그보다 적은 숫자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집안에서 난 318명의 노예를 거스린 아브라함은 상당한 세력의 보유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멜기세덱과 이비멜렉이 그를 자신들과 동격으로 대했던 이유(창14:17-20;21:22ff.), 그리고 헤브론의 장로들이 그를 “방백”(a mighty prince, 창23:6)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와 비슷하게 야곱을 만나러 세일 땅에서 온 에서는 수하 400인을 거느리고 있었다(창32:6). 한편 야곱 역시 싸워서 땅을 탈취할 만큼 세력이 강했다(창48:22).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한 집단의 지도자는 절대적 통수권을 지녔던 반면 그와 운명을 같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의 가족이나 노예 등의 가속들은 단지 그의 인격의 연장(延長)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한 족장(가부장) 집단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야곱이 하란으로 피신할 때는 자기 혼자였다-창세기는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문제의 결정자를 어김없이 그 우두머리로 나타내고 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야 했던 경우에 나타나듯이 반(半)유목민 집단은 정착하여 토지경작 생활을 하지 않는 한 일정 규모이상으로 커져서는 안된다는 제한이 있었다(창13:1-13).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 가지 않았더라면 야곱의 가족도 틀림없이 동일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실상 야곱은 자신의 양떼를 분배해야 했었다(창37:12,17). 애굽에서는 야곱의 아들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설사 분리를 원했다 해도 그들의 애굽 입주를 허락한 애굽 당국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때 이미 애굽사회는 반(半)유목민 집단을 수용할 여지가 없었다. 성경의 언급(출3:22;11:2)에 비추어 볼 때 최소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 중 다수는 애굽 사람들과 뒤섞여 살았던 듯하다. 열 두 지파의 각 집단은 자신들을 독립단위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같은 혈통과 같은 처지, 같은 수난 및 같은 소망에 의해 결합되어 있었다. 역대상 7:20절 이하는 당시에 어느 만큼의 독립된 활동이 가능했는지를 보여 준다.
여러 지파의 역사와 발달에 관해서는 각 지파 명칭에 해당되는 항목을 참고하라.

2. 지파의 조직
무정부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삼는 지도력과 조직의 부재상태는 가장 원시적인 종족집단 사이에서도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스라엘 장로들”에 관한 언급(출3:16;4:29;12:21, 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결코 어중이 떠중이의 노예집단이 되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과거의 선조로부터 내려 온 살아 있는 전통과 행동규범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내산의 사회 및 종교 율법이 고대의 비옥한 반달의 옥토 지대의 법형식에 입각해서 그것을 변형시키고 세련시킨 것이라는 사실은 종종 지적된 바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해에 대한 부정적 전거를 제공하는 구절들도 있다(예, 출18:13-16;신1:9-18). 이드로의 권고에 따라 모세가 도입한 조직의 대부분은 분명 군사적인 것이었으며 미지의 험난한 광야 지대를 통과할 때 각 지파의 일관성 있는 통솔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사법적 측면에서는 아마도 서로 다른 지파와 소속 지파가 없는 사람들(“중다한 잡족”, 출12:38)이 새로운 불가피한 상황에 닥쳐서도 함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데 주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지파를 구성하는 기본적 구분 단위는 광야 유랑 시절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세벹 또는 마타(지파)는 무수한 미스파하(씨족, 족속)로 나뉘어졌고 각각의 미스파하는 또한 무수한 벹압(가족, 세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 “아비 집”(father's house)이라고 번역되는 벧압의 참뜻은 “가장과 그 부인 또는 부인들 및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뿐만 아니라 결혼한 아들과 그 식구 및 노예까지 모두 포함하는”(R.de Vaux) “가족”(family, NEB)이다. 가족 내부에서의 율법과 관습의 갈등문제는 보다 단위가 큰 공동체에 하나님의 진노를 몰로 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의 독점적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다. 사무엘하 14:4-11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장이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을 때에만(신18:21) 성읍 장로들에게 그 책임이 위임되었다. 기드온의 아비는 그 아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받았다(삿6:28-32).
무수한 가족들이 모여 미스파하를 이루었다. KJV에서 그 명칭을 “가족”(family)으로 번역한 것은 옳지 않다. RSV에서는 때때로, NEB에서는 보다 빈번히 “족속”(clan)이라는 더욱 적절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다수의 족속들이 모여 지파를 이루었다.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수7:14,NEB). 족속의 구분 단위 중 한 가지는 역사서 편찬시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서 알뤂(삿6:15;참고.미5:2, RSV,NEB)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체로 한 성읍의 주민을 포괄하는 명칭이었던 듯하다. 그 수는 지파 병력 중 약 1,000명 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명칭은 후기에는 주로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각 성읍과 족속 및 지파의 통치자는 장로들이었다. 아울러 각 지파에는 RSV에서 “족장”(leader)이라고 번역한 우두머리 인물이 있었던 듯하다(민1:16;34:18;수9:15, 등). 장로들의 역할은 일반적 관심사를 제외하면 주로 성읍이나 씨족 또는 지파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해결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라는 명칭은 그들에게 적합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왕국시대 이전에는 장로들의 판결에 대해 하등의 상소가 행해졌다든다 하는 증거는 없다. 출애굽기 22:8절이하에서 시사되고 있는 종류의 소송(RSV를 KJV와 대비)은 출애굽기 18:22절 및 신명기 1:17절의 언급과 일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신명기 17:8-13절 및 19:16절 이하에서 시사되고 잇는 유형의 종교 또는 세속 문제를 담당한 사사는 왕국시대 이전에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무엘상 8:1절 이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브엘세바 주변 지방은 여전히 반(半)유목생활이 대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대립 집단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었다.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을 지녔다는 특별한 증거를 보여 준 사람들에게 의뢰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전장에서 건져 낸 “사사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간청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입증할 만한 증거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단순한 제도는 가나안에서의 처음 몇 세기 동안의 이스라엘 생활방식에 적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그 제도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결함이 있었다. 자기 지파의 경계선 밖으로 나간 사람은 그 지역에서 외인 거류민 달에게 주어지는 권리 이상의 권리는 가지지 못했다. 사사기 19-21장의 비극적 이야기가 지니는 힘은 베냐민 지파 족장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20:12f.) 그 부당한 일을 당한 레위 사람이 올바른 대가를 찾을 길이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길은 오직 공개적인 악행이 판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에 맞서 싸우는 두 가지뿐이었다.

3. 지파 상호간의 조직
말틴 노트 교수(M. Noth)rk “이스라엘 12지파의 제도”라는 책을 펴 낸 1930년이래 대다수 구약학자들은 이스라엘 초기의 지파조직을 일종의 인보동맹(amphictyony)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 관해서는 노트 교수의 견해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인보동맹이란 명칭은 헬라 역사에서 빌어 온 것이다. 그것은 여러 별개의 부족이 공동의 성소를 수호 보존할 목적으로 연합을 맺는 헬라와 이탈리아 식의 동맹체제를 가리킨다. “초기 이스라엘은 종족 단위도 국가 단위도 아니었으며 다만 야웨와의 언약으로 맺어진 씨족 동맹체였다. 언약은 이스라엘사회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결속시켰다”(Bright). 이스라엘 동맹체의 중앙 성소는 사사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실로(Shiloh)에 있었다. 아무런 중앙 성소도 없었다는 과거의 비판적 견해는 결정적으로 논박된 바 있지만 그것만이 배타적인 유일한 성소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각 지파의 대표들은 세 번의 순례 절기와 추측컨대 또 한 번 별도의 언약 절기에 그 성소에서 회동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수준에서 생겨난 각 지파 사이의 분쟁은 바로 그러한 기회를 빌어 해결되었을 공산이 크다.
사사기 19-21장의 이야기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당한 일을 당한 레위 사람에게 응분의 보상을 거절했다는 것은 바로 베냐민 지파가 인보동맹에서 탈퇴하려 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의 사람들은 그것이 분명 야웨에 대한 부인이며 배교에 해당되는 죄라고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지파 동맹체가 운영되어 나간 방식은 사사기 5장에 가장 잘 예시되어 있는 듯하다. 시스라(Sisera)와의 전투는 종교적 투쟁으로 묘사되고 있다. 동시에 이탈자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할 방도는 전혀 없었다. 전투소집에 응하지 않은 지파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라기보다 야웨에 대해 의무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메로스(Meroz)에 관한 언급에서는(5:23) 혹독한 저주가 행해지고 있다. 그 까닭은 메로스가 전투에 참가한 한 지파(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구역에 속해 있으므로 그 불참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속 지파에 대해서도 배신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4. 후기의 지파 발달과정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실로의 성소가 파괴되면서(렘7:12, 그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이라는 명시적인 설명은 없지만 고고학에서 밝혀 낸 파괴연대는 그 시기에 속한다) 공동의 성소를 잃은 인보동맹은 자연히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성소 파괴 이후 동맹의 상징이었던 언약궤의 간수를 소홀히 한 것도 동맹폐기의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이 나하스에 대적해 민병을 불러 모은 방식(삼상11:7)은 과거 인보동맹에서 사용한 방식(참고. 삿19:29)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그 밖에도 사울이 자기가 과거 인보동맹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언약궤를 소홀히 한 것으로 보아 그는 과거의 동맹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울의 사후 유다 지파의 일방적 행동(삼하2:4)과 이스보셋과 아브넬에 대한 북부 지파 사람들의 충성심의 결여(2:8f.)는 사울의 기름 부음으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그들이 하등의 의무를 느끼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스라엘 각 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택했다는 이야기(5:1)는 그들이 여전히 각각 별개의 집단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다윗은 언약궤를 중시하여 인보동맹을 재건하려 했지만 그가 이룬 통일은 그 자신의 인격(person)을 중추로 한 것이었다. 솔로몬이 죽은 직후 북부지파들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전적으로 합법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왕과 왕실의 권력이 줄곧 증대되면서 각 지방 및 지파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세벨은 그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거와 같은 재판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왕상21:8-14). 그렇지만 그 방식은 왕실 권력에 비하면 한갓 무의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각 지파의 독자성은 솔로몬이 왕국을 12행정구역으로 분할하면서 소멸되기에 이르렀다. 그 구역은 각 지파의 경계와 크게 상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무시한 것이었다(왕상4:7-19). 지파의 독립성이 상실된 그 밖의 원인으로는 지방의 생활양식이 파괴된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선지자들이 그토록 비난한 부유층의 권세에 기인하며 또 한편으로는 왕실 사법제도의 발달에 기인한다(참고. 대하19:4-11). 바벨론포로들의 귀환 때에는 에스라서 2장의 명단에 나타나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족보를 잊어버리고 단지 그 선조의 출신지만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는 조직으로서의 지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수의 노예들이 점차 이스라엘 민족 중에 흡수되었는데 그들에게는 과거의 지파 전통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5. 신약에 나오는 지파
신약시대 유대인의 상당수는 요한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로Ⅰ세에 의한 강제 개종자들 및 다수의 유대교 개종자들의 자손이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족보를 올바로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요세푸스가 한 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 그 두 자기 경우에 그는 제사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안나(눅2:36)와 바울(빌3:5)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출신 지파에 관한 지식은 소중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또는 12지파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약1:1)나 모든 사람(행26:7) 또는 종말에 이르러서의 이스라엘 민족(마19:28;눅22:30;계7:4;21:12)에 관해 사용되고 있다. 신약은 “잃어버린” 열 지파의 운명이나 행방에 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란 명칭은 유대인의 동의어로서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함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유대인 중에서도 영적으로 참된 일부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롬9-11장).
지파(tribe)라는 명칭이 비유대적이거나 비그리스도교적인 문맥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단지 더 이상 분명히 나누어지지 않는 인종적이거나 정치적인 하위 구분을 뜻한다.

6.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의 지파
랍비문서는 전반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 유다 지파 사람들 및 무지파 사람들을 구별하고 있다. 표준 유대 백과사전(The Standard Jewish Encyclopedia)의 다음 설명은 정확한 표현이다. “오늘날 어느 유대인 가문이든 중세 후기 이후로는 정확한 족보를 밝힐 수 없다.” 제사장 가문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추정적일 뿐이다.
일반적 정설은 여전히 “잃어버린” 북부지파가 다시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은 종말론적 기대에 불과하며 그들이 어디에서 발견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다.

성령의 증거

1. 본 교리의 성서적 근거
“성령의 증거”는 성령께서 신자의 의식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계시해 주는-하나님에게 열납되었다는 일에 대한-내적인 증거를 말한다. 성서는 성령의 증거를 향수한 수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 중에는 아벨(히11:4), 에녹(히11:5), 욥(욥19:25), 다윗(시32:5, 시103:1,3,12), 이사야(6:7) 및 다니엘(9:23)의 기록이 있다. 신약성서에도 한가지로 이 교리에 관한 인조가 많이 나타난다(행2:46,8:39,16:34). 이 교리를 증명하는 성구(Proof text)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안에 증거가 있고(요1서5:10).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1서5:7).” 이 성구들은 성령께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관계에 대해서 증거해 주시는 사실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2. 성령의 이중적 증거
이 제목에 관한 일반적인 성구는 로마서8:16에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라고 하는 이중적 증거를 가르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직접적 증거로서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는 간접적 증거로서 알려진다. 이 성구는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한다”의 대신에 우리의 “영에 대하여 증거하신다”라고도 번역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를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도 전자의 입장을 강화해 주는 것이다. 본절의 헬라어 구문 자체는 성령과 우리의 영과 공동증거(σμμαρτυρει수마르투레이)를 의미하고 있다.
① 하나님의 영의 증거
요한 웨슬레는 성령증거에 대한 강조점을 두는 근대부흥에 비상한 책임을 갖고 있는데 그는 “성령증거는 영혼에 주어지는 내적인 납득인데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령은 직접적으로 내영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하는 일, 나의 모든 죄는 도말되었으며 나 같은 것까지도 하나님과 화해되어졌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신다”고 주장했다. 영혼의 영원한 구원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확실성의 가치는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최고형태의 증거를 가져야만 한다. 만약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면 모든 일은 다만 추론적인 일로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암흑 중에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그저 값없이 우리들에게 주신 일들을 우리가 알도록 자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웨슬레는 감리교 신도들에게 “성령의 증거가 없다면 성령의 열매인 듯이 가상되는 일에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중에 그 증거를 가지기 오래전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예수의 보혈중에 있는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고 증거해 주시기 전에 기쁨, 화평, 사랑 및 망상적이 아닌,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시식할는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아버 아버지여”라고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에게 부르짖기를 계속해야겠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며 이것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일을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이것없이는 우리가 흔들림없는 평화를 획득할 수가 없으며 우리를 난처하게 하는 의혹과 공포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양자의 영을 받을 때에는 “이 지각에 뛰어나는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웨슬레는 계속 말하고 있다.(웨슬레 설교 제2권 p.100)
② 우리 자신의 영의 증거
이것은 성령의 간접적 증거인데 우리들 개인개인이 하나님 자녀의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성립된다. 웨슬레 선생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증거와-비록 정확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거의 동일한 것이며 우리가 자신의 심중에 느끼는 일에 관한 추론과 반성에 대한 결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일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또 다른 일부분은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가지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진술하고 있다. 경험이나 내적 의식은 내가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고 내게 일러준다. 그리고 그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 증거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이 우리들중에 행하신 일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적절하게(Properly) 직접적인 또다른 하나의 증거와 구별하기 위해서 때때로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 간접적 증거는 기본적이라고 하기보다도 차라리 확증적인 증거이다. “따라서 성령의 증거는 우리들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성결에 선행해야만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모든 성결에 관한 우리들이 내적 의식이나 혹은 우리의 영의 증거보다 선행해야만 한다.” 자녀로서의 사랑(Filial love)은 자녀로서의 관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직접적 증거는 간접적 증거보다 선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간접적 증거가 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 증거와 마찬가지로 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서 성령의 직접적 증거가 충분히 견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성령의 음성을 잘못 듣지 아니하였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요한 웨슬레는 말을 계속하면서 “내 자신의 영의 증거에 의해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대답에 의해서 자기가 미혹받지 아니한 일, 자기가 자기의 영을 속이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일을 알게 된다. 마음속을 지배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긍휼의 마음, 마음의 겸손, 온유, 자비, 오래참음이다. 그리고 외적인 열매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인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한결같이 복종하는 일이다(웨슬레 저작집 제1권 p.92)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증거는 한가지로 모두 구원의 확증을 확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후자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양자가 같이 되어질 때에 그것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3. 신자의 공통된 특권
우리는 성령증거에 대해서 믿을만한 성서적 근거를 주의깊게 조사해 왔다. 그리고 그 증거는 양자된 자의 영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 그것은 참으로 자녀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는 일, 또 그 때문에 그것은 양자가 되는 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구원의 한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설명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증거가 모든 신앙인의 공통된 특권임을 단언해도 무방하다. 이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일은 이 성령의 증거가 단절되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관찰한 결과에 의하여 신앙인의 영적 경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확증은 다양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J.G. 굴드박사는 구도자 자신의 마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와 성령의 내적 조명과를 구별하고 있다. 그는 먼저 오는 두가지는 변치않고 보존되어질런지도 모르나 마지막 것은 그 명쾌함이 때때로 의식중에서 변화할런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Gould, 성령의 역사 p.8-17) J. 웨슬레는 이 주제 전체를 황야의 상태라고 하는 제목의 설교중에서 여전히 영적 통찰력을 갖고 관찰하고 있다. 성서가 이해의 충분한 확신(골2:2), 소망의 충분한 확신(히6:11) 및 신앙의 충분한 확신(히10:22)에 관한 이상을 말해주고 있다는 일이 명심되어져야 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의 완전한 납득, 하늘나라 기업의 약속 성취 및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전적 신뢰를 말해주고 있다. 이 성구들로부터 우리는 이해, 신앙, 소망의 충분한 확신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기의 고귀한 소명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안심할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있다.
우리가 양자되는 일로써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일을 하들의 의심도 없이 알수 있는 것은 인간이 속죄 계획에 있어서 놀라울 뿐 아니라 은혜로운 준비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일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님 자신이 말씀해 주셨다.(눅10:17-20) 신자는 누구나 자기가 살아 숨쉬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령께서 친히 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하나님의 가족중에 입양되어졌다고 증거해 주실 때는 언제든지 그는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계시

1. 정의
계시란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 인간의 양심과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다. 이 계시는 어떤 사건과 말씀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계시에 대한 전문적 용어는 없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해지고 있가. 두 가지 말이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계시”로 번역되어 있는데 아포칼룹테이에-(αποκαλυπτειη)와 파네룬-(φανερουν)이다. 이 두 단어 뜻의 엄격한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약간 다른 것은 볼 수 있다. 아포칼룹시스는 “폭로하다” 혹은 “베일을 벗기다”등의 뜻으로 말하고, “파네루-운”은 위의 뜻도 있는 동시에 “베일을 벗긴다”는 말에서 조금 더 나아가며 “뚜껑 등을 연다”는 등의 뜻으로 말한다. 이 두 가지 단어의 뜻을 미루어 볼 때 계시란 “베일을 벗기다” “뚜껑을 연다” 또는 미리 베일을 씌우든지 덮어놓았던 어떤 사실이나 어떤 사람을 나타낸다는 뜻이 된다고 할 수 있다.

2. 이중적인 양상
신학자들은 보통 일반(자연)계시 혹은 특수계시 등의 용어를 쓰면서 신적계시를 묘사한다. 일반 계시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역사와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요 이에 대한 성구는 대개 아래와 같다(시19;행14:8-18,17:16-34;롬1:18-32,2:12-16등).
일반 계시 가운데 어떤 기본적 관점에 대해서는 주(註)를 가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논할 수 있는 것은 로마 카톨릭교 입장의 관점이다. 이에 대해 신교에서도 동의하는 이가 많다. 이 관점을 채택하는 이들은 일반계시는 자연신학의 구성에 바탕이 된다고 주장한다(자연신학은 신앙이나 특수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이성과 경험만을 갖고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신론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 관점은 신학이 두 단계로 되어 있다. 첫 단계는 자연신학이 이성에 의하여 일반계시로 접합된 벽돌로 형성된 자리에 고착시킴으로 세워졌다. 이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성에 관한 증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구속의 지식을 갖게 하는데는 불충분하나, 그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으로써 이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신앙을 통해서 이른다. 그럼에도 그러한 합리적 접근의 이론적 가능성이 주장되는 것은 엄연한 것이다.
둘째 단계는 특수계시로 접합된 벽돌로 형성된 자리에다 신앙을 세운 계시신학(revealed theology)이다. 이 계시신학은 기독교신앙의 모든 뚜렷한 제목을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적 구속, 삼위일체론 등이다. 이 단계에서만이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구속적 만남이 있게 된다.
이 접근은 합리적 변증론으로 나가게 되었고 대체로 알미니안(Arminian)신학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음으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칼 발트(Karl Barth)의 입장이다. 그는 자연신학도 일반계시도 부정한다. 그에 의하면 계시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에만 나타났었다. 성서는 유오(有誤)하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권위적 지침이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발트는 자연신학의 해석자들에게 지나친 행동을 하여 영아를 목욕시켜 내던진 격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발트로 하여금 일반계시에 관하여 말하는 성경구절을 해석하도록 강요하게 되었고 그의 친구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셋째는 죤 칼빈의 입장이다. 일반계시란 특수계시의 렌즈를 통해서만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로마서1장에서 바울이 인도하는 데로 가보면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20절에서 자연신학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바울은 계속하여 타락한 인간은 진리를 삭제하고 진리의 대용품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고 말하였음을 들어 강력히 주장한다. 소위 “자연시”(Nature Psalm)라 불리우는 시편에 관해서 말할지라도 그 시편은 경건한 사람의 표현이며 특수계시의 조망을 통하여 자연을 본 사람들이 기록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계시적 변증학으로 발전을 보게 되었고 대체적으로 개혁신학 위에 세워졌다.
특별한 계시란 구원의 역사(현실적인 계시)와 성경의 해석적인 말씀(말씀의 계시)에서 하나님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양적으로 말하면 특수계시는 성경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신 정통주의 신학은, 계시는 서술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계시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사건 가운데서만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만 계시의 기록에 지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 역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증거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발트는 계시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믿음으로 응답될 때만 일어난다고 한다. 성경은 이 체험에 대한 권위있는 지침이긴 하나 계시 자체는 아니다.

3. 계시에 관한 성경적 개념의 특성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계시는 신조의 공식 표식도 아니며, 교리적 진술도 아니라 그의 계시의 궁극적 목표를 뚜렷하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진리에 대한 성서적 개념은 단순한 비판적인 반성을 첨가한 것도, 주관적인 것도 아니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성적 관여도 아니라는 것이다. 계시는 타락한 인류의 이중적 곤경에 대해 해답을 준다. (1)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무지와 그로 인한 자신에 대한 무지. (2)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죄성.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자기자신을 계시하셨다.
성경적 계시는 역사안에서의 신적행위에 의해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특수적, 임시적 사건의 관련속에서 자기 계획을 이루신다. 불트만(Bultman)의 역사적 회의론은 믿음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역사적인 예수없이는 믿음의 그리스도가 있을 수 없다. 성경역사의 전 과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주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록이다(미6:5). 그리스도는 이 구원 역사의 핵심이며 그 안에서 사람을 중시하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온 것이다.
성경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 극에 달한다. 말씀이 몸을 입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낸 최고의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중심이다(롬1:3,16;고전15:1-4;갈4:4;히1:1,2등).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기하는 면에서 하나님의 계시이고 신약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계시이다. 칼 발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자신을 나타내신다고(christomnism) 주장한 것은 오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유일한 구원에 대한 사실을 가지고 그리스도안에 만이 계시가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성경은 그것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1:1-2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로도 말씀하심이 나타나 있다. 이 구절은 비록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아들안에서 “온전히”(fully)나타나기는 했을지라도 아들안에서 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히브리서 구절을 첨부하여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에서, 역사에서, 사람의 양심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일반계시].
성서적 계시는 또한 뜻에 대한 신적 설명(말씀안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그러한 구원에 대한 사건의 뜻을 신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신약 말씀의 토대는 구원의 사실을 해석한 말씀이다. 신약에는 그 사건이 주로 복음에서만 기록되어 있고 그 사건의 해석은 주로 서신에 나타나 있다(여기 두 가지 요소, 즉 역사적 사건과 설명된 말씀에 대한 예를 주의해 보라;고전15:3,4).
구원의 사건에 대한 신약의 기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구약과 완전히 관계를 지워 놓았다. 고린도전서15:3-4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 등의 사실에 있어서 “성경대로”라는 말로 구약과 연결시켰다. 이 “성경대로”란 말이 두 번 나타나 있음을 주의하라. 바울은 두 언약의 연결성을 빈틈없이 의식했다. 그는 신약의 구원의 역사적 선포(케리그마[kerygma])를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의 과정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한 모든 계시의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집약되어 있다. 미래의 하나님은 자신을 아들 안에서 나타내셨는데 히브리서1:2에는 모든 날 마지막에 몸을 입으신 아들안에서 보이셨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는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계시된 미래의 개념으로 잘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계시는 성경에 의해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하나님이 설명해 주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기록해 두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직접 계시를 주신 성령의 내적증거와 함께 성경은 다가 오는 세대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에게 계시가 된다. 성경은 계시에로의 안내서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경 그 자체가 계시이다.
계시는 다음의 3대 요인의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1) 계시자-여기선 하나님이시다. (2) 계시의 도구-이에 대해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환상, 꿈, 깊은 잠, 우림과 둠임, 제비, 하나님의 현현, 천사, 신적의 말, 역사적 사건, 몸을 입으심 등이다. 이러한 것은 그 산물로서 결국 하나님, 말씀(성경) 기록의 수단임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계시를 받는 사람-이 경우에는 모든 말씀이 증거하는 분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주관적으로 생각한 계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역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타락한 인간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이루어지려면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할 때만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계시를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계시의 신적 사역 중 객관적인 면(기록으로만 끝나는)은 성령의 내적 주관적 사역으로 보충되어져야 한다. 성령의 내적 사역은 언제나 조명(estimonium)이라 일컬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은 사무엘의 체험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삼상3:7). 본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세 번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네 번째 가서야 객관적으로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이던 것이 사무엘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별을 말한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데살로니가의 목회결과를 말할 때 한 말이다.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여기에서 이들은 들은 바의 듣는다는 뜻은 귀로서 외적으로 듣는다는 뜻이며, 마음으로 응답한다는 뜻이 되는 “받다”는 말과 대조적이다. 알려진 진리는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인 진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에서 확증되었다. 이 하나님의 영감 때문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17). 다시 말하면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이란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할 때 사람을 사용하셨지만 그 메시지는 전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감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정확한 계시관을 지니는 정황에서만 얻을 수 있다.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도 인정할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에는 적합한 방법론이 이용되어야 한다. 성경 해석학은 오늘날 중요한 관심사인 어려운 분야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 해석학은 적절한 성서 연구와 역사적 문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소위 “신 해석법”에서 해석자의 첫째 과업은 성경 메시지를 어떤 때는 성경의 근본 메시지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현대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시에 대한 시종여일한 성경관점은 융통성이란 말을 빙자하여 성경 해석자가 책임성 있게 성서의 텍스트를 해석할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을 용서치 않는다.
성경 메시지 확인을 위해 성경을 대할 때마다 첫째 목적은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먼저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을 읽을 때 독자의 실존적 괴로움을 담은 관점을 지니고 성경을 읽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위험을 계속해서 막지 않으면 거짓된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지식이나 체험은 성경 해석상의 도움이 되지 못할뿐아니라 오류의 요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를 주의깊게 확인한 다음 그 메시지가 자기자신과 또다른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관계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신약이 말하는 신앙을, 곧 우리 자신의 신앙으로 받을 때라야 겨우 성경주석의 “궁극적” 목표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둘째 계단이지 첫째 계단은 아니다.
계시는 다른 두 가지의 개념, 즉 감동과 조명(illumination)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위해 하신 말씀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데 관계된 것이고 “감동”은 하나님께서 그 정보를 권위있게 기록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사람을 쓰시는 행위에 관계된 것이다. 계시가 무엇이냐 할 때 모든 성경은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혹 모든 성경이 다 계시는 아니다라는 말로써 계시의 정의를 세우기도 한다. 인간의 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그 정보를 인간에게 주고 계시한 것이 성경의 전부라고 보는 견해가 오히려 더 나은 것이라 보여진다.
밝힘(엡1:8), 빛을 받음(히10:32) 등은 성령의 사역에 관계된 말인데 이로써 독자가 기록된 말씀(고전2:13-14)을 이해하게 된다.
계시가 객관적인 반면에 조명, 혹은 비췸은 주관적 이해와 관계된 것이다.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진리를 열어 보이시고, 조명에 있어서 신자가 그 진리를 이해하는데 이른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인간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귐에 있어 꼭 필요한 단계를 형성한다. 즉 계시는 전달된 것에(what) 관한 것이고, 감동, 영감은 어떻게(how) 그것이 전달되었는가에 관한 것이며 조명은 왜(why) 전달되었나에 관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

“능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능력을 각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져다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신자들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상속권 때문이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3:21). 그러나 상속권에 의해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셔야만 실제적, 경험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알고 주장하는 정도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에 있어서의 능력 충만을 얻는 정도는 서로 비례한다. 교회의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의 극히 일부만을 알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과 우리를 위해 하기 원하시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공부하여 성령께서 사람 안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을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공부를 하게 되면 곧 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고 했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엡6:17)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뿌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씨이다(눅8:11;벧전1:23).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1장에서 본 것과 같이 성령께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말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말씀만으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께서 친히 말씀을 사용하셔야 한다. 성령께서 친히 자신의 검을 사용하실 때 비로소 그 검의 성질과 예리함과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말씀을 통해 성령에 의해서 성취된다. 효과적인 삶의 비결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아는 데 있다. 효과적인 섬김의 비결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사용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은 강조하면서 말씀은 무시한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광신, 근거 없는 열심, 광적인 열심 드이앋. 또 어떤 사람들은 말씀은 강조하면서 성령은 거의 무시한다. 이것도 역시 바르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죽은 정통 교리, 생명과 능력이 없는 진리이다. 올바른 길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인 말씀의 도구적 능력과 말씀을 통해 행하시는 성령의 살아 있고 인격적인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 장의 주제인 성령의 능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고린도전서 12:3을 보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사람에게 보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실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따라서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실 때만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지식에 이를 수 있다. 당신은 사람들이 말씀에 접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도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하셔서 말씀을 밝혀 주셔야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산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당신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지식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성령께서 증거하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간증이나 말씀의 증거를 성령께서 사용하신다 해도 간증이나 말씀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의 간증을 택하셔서 친히 증거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순절에 유대인들을 감동시킨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말만은 아니었다. 성령께서 직접 증거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기 원한다면, 당신 자신의 설명과 설득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성령께 맡겨 성령께서 증거하시기를 구하라. 당신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참되고 산 지식을 알기 원한다면, 말씀을 통한 성령의 증거를 찾으라. 말씀 공부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인격적 지식은 살아 계신 성령께서 그것을 증거하여 주신 이후에나 얻게 된다.

2. 요한복음 16:8-11을 보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께는 세상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광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보여 줌으로써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죄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는 구절과 함께 주목하라. 이 사실은 사도행전2:36-37에서 보듯이, 오순절에도 그러했다. 당신 스스로 어떤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조리있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일을 당장 하실 수 있다. 당신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가? 당신은 성경을 이곳저곳 보여 주었을 것이고, 그런데도 사람이 감동하지 않아서 왜 그가 깨지지 않을까 하고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찌하여 나는 나의 무능함을 능하신 하나님의 영께 맡겨 성령께서 이 사람이 죄를 깨닫게 하시도록 하지 않고 나 스스로 이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려고 애를 썼던고.” 그리고 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영께 맡겨서 그 분이 이 일을 하시도록 하여 당장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경험을 통해 거듭거듭 확인되듯이, 성령께서는 아무리 무관심한 자라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일을 하신다. 요한복음 16:7-8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오순절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통해 3천 명을 회개하게 했던 분은 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로 보냄받은 성령이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고 성령께서 회개를 일으키도록 구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행2:4-37 참조).

3. 디도서 3:5을 보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 즉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중생하도록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죄로 향하고 있는 사람, 악하고 추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변화시켜 그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어, 그가 하나님의 생각을 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원하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만드실 수 있다.
나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생각하면서 어떤 사람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나는 이런 일이 가장 완악하고 가망 없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거듭거듭 목격해 왔다. 그런데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수단이 바로 우리이다(고전4:15). 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말씀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설교를 한다 해도, 아무리 바른 교리를 가르친다 해도, 아무리 말씀 공부를 한다 해도 중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중생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한다.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날 때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다(고전3:16,6:19).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롬8:9). 우리는 이 내주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삶을 충분히 굴복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매우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난 것이 사실이라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완전한 그리스도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고린도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엄숙한 사실이다. 만일 나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4. 요한복음 4:14에서도 이 성령의 능력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구절이 성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단번에 알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요한복음 7:37,39과 비교해 보면 여기서의 물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떠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만족을 주는 능력이 있다. 세상에는 결코 만족이 없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대해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게 된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는 영혼의 모든 갈급함을 만족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오직 성령만이 인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을 성령의 흐르는, 아니 솟아나는 샘에 맡기면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극장이나 무도장, 오락실, 또는 세상의 이익이나 명예를 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 성령께서 그의 생수와 함께 부어 주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표현할 수 없는 만족이여! 당신의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샘이 있는가? 당신의 샘은 막히지 않았는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가?

5. 로마서 8: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가는 앞장에서(7:9-24) 찾아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주의하여 읽어 보기 바란다. 우리는 모두 이 죄와 사망의 법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법에 얽매여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 법에 묶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길은 바로 성령의 능력을 통한 길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을 정복하려고 애쓰는, 즉 우리 자신의 힘과 육신의 능력으로 바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승산 없는 투쟁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성령께 맡겨 그가 우리를 위해 일하시게 하면, 다시 말해서 성령을 좇아 살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오늘도 로마서7장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끊임없는 패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 자신만을 의지한다면 이것이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하려다 실패한 것을 대신 담당하신다(롬8:2-4).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을 본다. 그 삶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삶이다. 그 삶은 7장에서처럼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한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순종과 승리가 있는 삶이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육신이 있지만 우리는 육신 안에 있지 않다(로마서8:12-13,9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다. “성령을 따라 산다.” 우리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한다.” 그리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갈5:16).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 매시 아니 끊임없이 육체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도 우리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떠나 혼자 남게 된다면, 우리는 이전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걸으려 한다면 당장 넘어지고 말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셨는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하지 않겠는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 모든 자기 노력을 포기하라. 그리고 당신을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당신 자신을 그 분께 맡기라. 그러면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실 것이다. 그때 당신은 바울처럼 승리의 함성을 지를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6. 에베소서 3:16에서는 이 성령의 능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면서 보다 폭넓은 생각을 볼 수 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성령께서는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렇게 강건하게 한 결과가 17-19절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주는 것 외에도 (1)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 (2)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 (3)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하는 것”등이 있다(엡3:17-19).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7. 로마서 8:14에서도 성령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삶, 하나님의 아름다운 삶,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거룩한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발견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 능력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을 붙잡고 그 삶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전부는 단순히 우리 자신을 성령께 굴복시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빚으시도록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만이 단지 신의 소생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신의 소생이다(행17:28)-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8. 로마서 8:16에도 새로운 사실이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께서는 신자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영에게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신다고 했음에 주의하라. “우리 영과 더불어”(together with our spirit)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두 명이 증거한다. 첫째는 우리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둘째는 성령께서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이 사실을 증거하실까? 이 질문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6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 마음 가운에 들어오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것이다. 로마서8:2,4,13,14,16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순서를 주목해 보자. 우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킨다”(2절). 그러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4절).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13절). 그러면서 나는 성령의 인도에 굴복한다(14절). 이렇게 되면 아니 반드시 이렇게 굴복되었을 때에만 나는 16절이 나의 경험으로 실현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며,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시는 성령께로부터 오는 나의 아들됨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이러한 증거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굴복시키며,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하는 조건으로 성령의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 됨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루어진다.

9. 갈라디아서 5:22-23에서도 성령의 능력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심어 주신다(로마서5:5,14:17,15:13과 비교하라). 인격의 참된 아름다움, 즉 우리 안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형상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맺으신 것이지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을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단수형을 사용한 것에 주의하라. 나타난 모습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의 기원은 하나이다. 또한 성령께서 온전히 통치하시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들의 일부만 나타나지 않고 모두가 다 나타난다.
이 말씀에 제시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다.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이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진지하게 연구하고 깊이 묵상할 가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갈망하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삶이 아니며 “육신”이나 본성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삶도 아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삶은 앞에 있는 19-21절에 나와 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을 완전히 다스리시게 되면, 우리 육신이 절대적으로 악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선한 무엇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단념하면, 다시 말해서 자아를 죽이고 우리를 합당한 모습으로 만드는 일을 모두 내주하시는 성령께 맡기면, 그 때에 아니 그렇게 했을 때에만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당신의 인격과 삶에 이런 열매가 맺히기를 원하는가?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또 거룩해지려는 자아의 모든 노력을 버리라. 그리고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완전한 통치를 하셔서 그의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으시게 하라. 우리가 지금 살펴본 것은 갈라디아서 2:20의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육신을 결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그리고 끝까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런 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오늘날 우리는 “윤리 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은 보통 육체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육체를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시 덤불이 무화과를, 엉겅퀴가 포도를 맺지 않는 한 이 일은 불가능하다(마12:33;눅6:44). 또한 “인격 계발”에 대해서도 많이 듣는다. 성령께서 계발하시도록 한다면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 때에 계발은 열매 맺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그러나 벧후1:5-7참조). 또한 “인격의 미덕 배양”에 대해서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항상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인격의 참미덕을 배양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굴복시켜 성령께서 일하시돌고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벧전1:2;살후2:13)이라고 한다.

이제는 다른 각도에서 성령의 능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0. 요한복음 16:13을 보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는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다. 이 약속은 일차로 사도들에게 행해진 것이었으나 사도들은 이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시켰다(요일2:20,27). “하나님께 배우는 것”은 우리 모두의 특권이다. 모든 신자는 인간 교사를 의지하지 않는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물론 이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요한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서신을 써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가장 잘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들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배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 학생들을 이끌어 가시는 곳이 말씀이요,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도구가 바로 말씀이기 때문이다(요6:63;엡6:17,5:18-19;비교,골3:16).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해도 사람에게 의지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교사인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결코 진리를 바로 알 수 없다. 인간의 가르침이 얼마나 되든, 우리의 스승이 누구이든간에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없다. 말씀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원어로 공부한다 해도-진리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른다 해도,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물론 그 동족어까지 모두 알지만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잘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을 하루나 한 주일 또는 1년 동안 아니라 한 단계 한 단계씩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특별한 방향이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1) “그가……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장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모든 생각은 추측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 배운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보다는 잘 안다. (2) “그가 내(그리스도)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방향으로서, 신자든 불신자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평판에 손상을 끼칠까 봐 성령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성령만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는 없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설교나 강의를 듣는 것, 또는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볼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보여 주셔야 하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를 애타게 원하신다. 내 생각으로는 성령의 최대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일 것이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있게 하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취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그리스도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11. 요한복음 14:26을 보면 성령의 가르치시는 능력 외에 다른 사실까지 나타나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약속은 사도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그들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일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일을 행하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치미과 말씀이 우리의 삶이나 섬김에 필요한 순간 생각나게 해주신다.
우리 영혼이 큰 고통 중에 있을 때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몰라 방황할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거나 돕기 원하는 사람에게 할 말에 대해 곤란을 겪고 있을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그 성경 말씀이,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이런 방식으로는 연결시켜 보지도 않았던 본문이 갑자기 생각이 났던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해보았던가!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기대할 때면 언제나 행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 중대한 약속을 하신 후 그 다음 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신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성령께서 적당한 말씀을 적기에 생각나게 하실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당신이 필요할 때 필요한 성경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다.

12. 고린도전서 2:10-14 말씀도 앞 두 항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성령의 능력을 말해 주고 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 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 두 가지를 볼 수 있다-(1)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러나 자연인에게는 감춰져 있어 미련하게 보인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은 주로 사도들에게지만 이 성령의 사역을 꼭 그들에게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2) 성령께서는 그의 계시를 해석하며, 그가 가르치신 것을 분별하고 알며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계시-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것을 해석하시는 분도 되신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그 책의 저자가 옆에서 직접 그것을 설명해 준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하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늘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성령-께서 옆에 계셔서 해석해 주신다. 그 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를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난해한 부분이라도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시편 기자같이 기도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기록된 말씀에 있는 객관적 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계시를 육적인 이해력으로 소화하려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등 비평이라는 이런 늪에 빠져 있다. 색맹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미안이 없는 사람이 모나리자를 감상하려고 하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글의 어휘와 문법을 안다는 이유로 육에 속한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저 회화를 이해한다 해서 미술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헬라어 또는 히브리어 문법을 안다 해서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임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義)의 전적인 무용성과 무가치성-이것은 로마서 전반부의 주제이다-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의 전적인 무용성과 무가치성-이것은 고린도전서, 특히 1-3장의 주제이다-도 인정해야 한다(고전1:19-21,26-27참조).
유대인들은 성령의 계시를 받았지만 성령께서 그것을 해석해 주시도록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빠졌다. 복음적인 교회라면 어느 교회든지 최소한 신학적으로라도 인간의 의의 전적인 무용성을 인정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혜의 전적인 무용성을 가르쳐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지나치게 지적 자만에 빠져 있는 현 세대에 가장 필요한 교훈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지혜를 철저히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철저히 의지하여 말씀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도록 해야 한다(마11:25).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를 버릴 때,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빌3:4-7,9;롬10:3).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혜를 버릴 때,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마11:25;고전3:18;고전1:25-28).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버릴 때,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님의 힘을 얻을 수 있다(사40:29;고후12:9;고전1:27-28). 비우는 일이 채우는 일에 선행되어야 한다-자아을 쏟아 버리면 그리스도가 부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나는 성령께서 어제 내게 가르쳐 주신 사실을 오늘까지 의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각의 말씀과 접할 때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본문에 대해 성령께서 한 번 깨우침을 주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본문을 대할 때마다 성령께서 새로운 깨우침을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매우 잘 설명한 사람이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 공부, 설교 또는 신앙 서적 읽기 등을 통해 말씀과 접할 때마다 당신은 어떤 외부적 수단과 접촉할 때처럼 명확하게 단호한 자기 포기 행위, 즉 당신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믿음으로 하늘의 교사를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The Spirit of Christ, p. 221).

13.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능력뿐 아니라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능력도 갖고 계신다. 이 사실은 우리가 거듭 체험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배운 진리를 “능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에게는 첫째로 진리를 계시하시는 성령님이 필요하다. 둘째로는 그 계시된 진리를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성령님이 필요하다. 셋째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석해 준 그 진리를 우리가 효과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과정에 성령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역과 각종 봉사에서 성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매력적인 말”, 즉 논리학, 수사학, 웅변 등으로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 즉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이 실패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령께서 말씀 속에서 가르쳐 주신 메시지가 아닌 다른 메시지가 가르쳐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책 성경에서 발견되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과학, 예술, 철학, 사회학, 역사, 경험 등을 가르치고 있다. 둘째, 성령이 주신 메시지인 성경을 공부하지만 성령의 조명하심 없이 인간의 힘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이 주신 메시지인 말씀, 즉 성경을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공부하고 이해하지만 “성령의 나타나시미과 능력으로” 하지 않고 “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매력적인 말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과정 내내 성령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할 것뿐만 아니라 말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셔야 한다. 성령께서 메시지는 물론 능력도 주셔야 하는 것이다.

14. 성령께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능력이 있다. 유다서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또 에베소서 6:18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기도를 이끌어 주신다.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주여……기도를……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하였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하나”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돕는 또 다른 분이 계신다(요14:16-17).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롬8:26)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진정한 기도는 “성령 안에서”하는 기도, 즉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고 이끌어 가시는 기도이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의 연약함과 기도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올바른 기도를 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의식 가운데 성령을 의뢰하고 의지하여 우리 기도를 이끄시고 우리 소원을 인도하시며 기도시 할 말까지 가르쳐 주시도록 해야 한다. 무턱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생각나는 대로 간구하거나 사람들이 생각 없이 기도 부탁한 것을 구하는 행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며 진정한 기도도 아니다. 우리는 잠잠히 성령님을 기다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굴복시켜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기도가 성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다. 로마서8:26-27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는 갈급함이 종종 너무도 깊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배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일하시는 사람 편에서 명확한 이해를 하기에는 분명히 너무 심오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사” 이들 입으로 표현되지 않고 또 표현할 수도 없는 갈망들 가운데서 “성령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아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주신 갈망들을 아시며(우리는 모를지 몰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갈망임을 아시고 허락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3:20)이시다. 어떤 때에는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가 너무 분명하여 우리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기도”(고전14:15)한다.

15. 성령께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감사를 드리도록 우리 마음을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법도 가르쳐 주신다. “성령 충만한 삶”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사이다. 진정한 감사는 “성령 안에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16.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영감을 주어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예배를 드리게 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기도는 예배가 아니다. 감사도 예배가 아니다. 예배란 피조물이 하나님께 대해 하는 어떤 구체적인 행위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고백과 묵상 가운데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열중합니다. 감사에서는 우리가 받은 축복에 열중합니다. 하지만 예배에서는 하나님 그 분께 열중합니다.” 성령께서 자극하시고 이끄시지 않는 예배는 결코 참되고 받으심 직한 예배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육체는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려고 한다. 육체는 정욕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도 가지고 있다. 육체가 가르쳐 주는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진지하고 정직한 예배라 해서 모두 성령 안에서의 예배는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정직한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지 않아서 그 예배가 육체의 예배가 되는 경우도 있다. 말씀에 매우 충실한 곳에서라도 “성령 안에서의” 즉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는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육체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즉, 우리의 본성적 자아는 내주하시면서 신자들을 빚어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성령과는 상반됨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 육체 즉 자아가 우리의 예배에 침투할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철저한 자아 불신과 자아 부정 가운데 자신을 성령께 맡겨 성령께서 우리를 바른 예배로 인도하시게 해야 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모든 공로를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생활과 기도와 감사와 예배 및 기타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서도 선을 행할 능력이 우리 안에 없음을 시인하고 온전히 성령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의지해야 한다.

17. 성령께는 인도하시는 능력이 있다. 사도행전 13:2-4를 보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리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성령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특정한 일을 하도록 보내신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불러 사역에 참여하게 하기도 하시지만, 구체적인 일을 택하여 그것을 지적하기도 하신다. “저는 중국, 아프리카, 인도 중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많은 사람이 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이 해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도 해결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바로 결정해 줄 수 없는 것이 이 문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중국이나 아프리카 또는 다른 해외로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기꺼이 당신에게 알리기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부르시는가? 앞의 본문에서는 알 수 없다. 혹시 우리가 성령께서는 항상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부르셔야 한다고 생각할까 봐 이 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킨 것 같다. 성령께서 들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어떤 희귀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다는 암시도 물론 없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갑작스런 경련, 또는 무조건 성경을 펴서 손가락으로 짚은 말슴(그러나 그것은 미안하게도 영감을 받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일 수도 있다)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알리셨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리기 원하신다. 현대 기독교 사역에서 크게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부르시고 보내시는 사람이다. 사람이 부르고 보낸 사람은 많이 있다. 스스로 부른 사람은 훨씬 더 많다. 또한 사람이나 어떤 기관에 의해 보냄받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보냄받은(이것은 전자보다 말할 수 없이 나쁘다)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방법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을까? 그것을 바라고 찾으며 그것을 위해 주님께 아뢰며 기대해야 한다. 성경에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고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역에 참여하지 않거나 국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 머무는 것에 대해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나는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 보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는 자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보내시라고 자신을 명확하게 하나님께 드렸는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부름을 받기 전에는 중국이나 아프리카로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 자신을 명확하게 하나님께 드리고 부름받을 준비를 하여 부르실 때 분명히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을 명확하게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기까지는 국내에서 편히 쉴 권리가 없다. 사실상 사람들은 아프리카로 가든, 보스턴이나 뉴욕 또는 시카고로 가든 동일하게 분명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18. 성령의 인도 능력을 좀더 살펴보자. 첫째, 사도행전 8:27-29에서 우리는 빌립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둘째는 바울의 선교에서 볼 수 있다(행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성령께서는 매일의 삶과 섬김의 세세한 부분, 즉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전환점에서 성령의 틀림이 없는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일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들인 시간으로 하나님께 보다 영광을 돌리는 일에 들여야 할 시간이 뺏긴 셈이 된다. 분명히 빌립은 성령께서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사로 가는 도중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물론 삶의 모든 영역-사업, 공부, 사회 생활 등 모든 일-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야고보서 1:5만큼 이것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은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도 야고보서 1:5-7이 대답한다. 이 방법에는 5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 :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는”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혜롭게 판단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육체의 죄뿐만 아니라 육체의 지혜도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 : 진정으로 하나님의 길을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려 해야 한다. 이것은 구하는 것이 진지한 경우 그 구하는 것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25:9).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알게 된다”(요7:17).
셋째 단계 : 구체적으로 인도를 구해야 한다.
넷째 단계 : 인도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절).
다섯째 단계 : 인도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씩 따라가야 한다. 성령의 인도가 어떤 방법으로 제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제시된다. 한 순간에 한 걸음만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그것-바로 다음 단계-만 알면 족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주, 다음 달, 또는 다음 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다. 당신은 다음 단계를 알고 있는가? 그거면 충분하다.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성령께서 또 다음 단계를 보여 주실 것이다(민9:17-23 참조). 하나님의 인도는 분명한 인도이다(요일1:5). 많은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인도인지를 몰라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그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당신이 그것을 행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뜻을 분명하게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실 때까지는 그것을 행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는 길을 어는 특정한 것으로 제한한다든지 표적을 요구한다든지 또는 손가락으로 짚은 본문을 택한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여 주시는 방법을 강제할 권한이 없다. 지혜를 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지만, 그것을 보여 주는 방법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고전12:11).

19. 성령께는 이 외에도 증거시 담대함을 주는 능력이 있다. 사도행전 4:31(또한 13:9-10 참조)을 보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어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겁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 하기를 갈망하지만 겁을 내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성령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을 담대하게 하실 수 있다. 겁쟁이 베드로를 변화시켜 산헤드린 앞에서 담대하게 그들의 죄를 책망하게 한 분이 바로 성령이셨다(행4:8-12 참조).

이상에서 살펴본 바로 신자에 대한 성령의 능력들 가운데서 두 가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이 삶과 섬김의 모든 영역에서 얼마나 철저히 성령을 의뢰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이 얼마나 완벽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겸손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적,도덕적,영적, 또는 신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성령께 무엇을 하시게 하느냐이다. 성령께서는 종종 본래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택하여 본래부터 탁월한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사용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리의 본래적 성품의 한계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되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우리의 본래적 재능으로 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져야 한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시기를 갈망하신다.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도록 하는 모든 것을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신다.

성결과 동의어들

하나의 사실이나 사건을 표현할 때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될 때가 많이 있다. 관점을 달리할 때 또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 표현법이 등장한다. 종교적인 것을 표현할 때는 더욱 다양한 용어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종교는 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하나의 상징인데, 제한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신비의 여러 면을 하나의 상징어로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성서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들면 하나의 사건이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회심을 말할 때 죄의 용서(칭의, 의인), 거듭남(중생), 하나님의 자녀됨(양자), 성결의 시작(초기의 성화)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의 네 용어는 말만 다를 뿐이지 그 의미하는 내용은 같다. 즉 회심을 표현하는 동의어들이다.
성결을 표현할 때도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용어가 다양한 것은 진정한 성결의 깊고 넓은 진리를 한마디 혹은 몇마디 말로써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앙 체험이나 신학 이론을 각자가 제각기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용어로 표현한다. 요점은 용어는 다를지언정 그 내용이 같으면 된다. 웨슬레도 성결을 표현할 때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그것이 오히려 이해를 쉽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는 자기의 성결의 개념과 약간 다른 개념에 대해서도 웨슬레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도 좋다. 오늘은 그들의 전부가 사랑뿐이다”라고 하면서 용인하는 자세를 가졌다.
힐스(A. M. Hills)는 성결의 다양한 표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결한 사람들이 이 경험을 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였다. 사도바울은 황홀한 기쁨에 충만하여 이를 ‘하나님의 충만하심’(The fullness of God)이라 하였고, 요한 웨슬레는 사도요한을 따라 ‘온전한 사랑’(perfect love)이라 하였고,…마한(Asa Mahan)목사는 풀무불로 정케 하고 죄를 죽이는 영으로 충만하여서 감격에 사무쳐, 오순절적 표현에 따라 ‘성령세례’(The bapti느 of the Holy Ghost)라 하였으며, 피니(Charles Finny)목사는 이를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라고 불렀다.…어떠한 모양으로 표현하였던간에 이 역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다양한 용어들은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때로는 오해를 낳기도 하고, 나아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19세기 미국의 성결부흥운동에서는 성결의 체험을 가리키는 대표적 용어였으나, 오순절파나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웨슬레안들이 성결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 용어들에 대하여 그 개념과 본질에 관하여 정리하려고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성결의 본질과 그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확신한다.

1. 성결(거룩,Holiness)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결은 한문번역이고, 우리 말로는 거룩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성결이나 거룩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 사실은 같은 말이다. 성서에 많이 나오는 ‘거룩’은 곧 ‘성결’이다. 사실 거룩이란 말은 종교적인 단어이며, 이는 신적 존재에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성서에서도 ‘거룩’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특성에 사용된다. 그러나 인간과 다른 사물에도 사용되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결이 전달되고 분여되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결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가진다.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서적 용어이다. 성결의 성서 어원적 의미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광휘(radiance, brilliance)이다. 이는 영광과 같은 뜻이며 빛의 충만, 영광의 충만을 의미한다. 우리말 성서에는 광채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광이 충만하고 빛가운데 계신다. 둘째는 성별(separation)이다. 이는 구분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다른 존재이시다.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과는 비교될 수 없다. 우상을 금지한 기본 사상도 여기에 근거한다. 셋째는 정결이다. 이는 깨끗함을 뜻한다. 하나님은 죄와 악이 없으신 분이시다. 정결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뜻한다.
그런데 성결이란 단어를 하나님께 사용할 때와 다른 피조물에게 적용할 때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성결을 의미할 때는 위의 세 가지 개념 즉 광휘, 성별, 정결 모두를 의미하지만,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광휘의 개념은 없고 성별과 정결의 개념만 있다. 타락한 피조물에게 빛과 영광의 충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이외에 다른 피조물(동,식물,기타 여러 사물들)에게 사용할 때는 성별의 개념만 적용된다. 이는 인간 외의 다른 피조물이 회개하고 용서받아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구분되어졌다는 의미에서만 거룩하다. 하나님의 성결을 절대적 성결(absolute holiness)이라 하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의 성결을 상대적 성결(ralative holiness)이라 한다.
상대적 성결은 의식적(ceremonial or ritual)성결과 실제적(윤리적,ethical)성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의식적 성결은 주로 구약에서 많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분되어진 사람이나, 물건, 동물, 장소, 시간 등이 거룩한데 이는 이들이 실제로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되기 때문에 거룩하다. 실제적 또는 윤리적 성결은 주로 신약에서 강조되는 성결의 개념이다. 이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즉 신자가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받아 참된 성도가 되는 것이다. 구약적 개념인 명목상의 성별은 점차 신약적 개념인 내적 정결의 사상으로 발전하여 간다. 인간의 성결은 성별과 정결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즉 성별의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정결의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된 자, 신자로서의 적합성이 강조되고 있다.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 용어이며, 성서에 다른 용어들은 거의가 파생어이거나 동의어들이다.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서 성결은 주로 “거룩한 상태”(state)를 의미한다. 구별되어진 상태나 정결해진 상태를 의미할 때는 주로 성결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따라서 성결은 형용사적(holy)또는 명사적(holiness)용법으로 사용된다. 사람이나 사물이 구별되어진 상태에 있거나, 사람이 정결한 상태에 있을 때 ‘성결’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

2. 제2의 은총(축복, 변화)(The Second Blessing)
이 말은 칭의, 중생과 비교할 때 주로 사용된다. 칭의, 중생이 첫 번째 은총과 축복의 경험이고 변화라면, 성결은 그 후 두 번째로 경험하는 은혜와 축복이요, 또 다른 온전한 변화가 자신 안에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이 은혜의 체험을 “두번째 축복”, “두번째 변화”, “또 하나의 변화”(a farther change), “축복의 변화”( a blessed change), “제2의 각성”(the second awakening), “은혜의 두 번째 사역”(the second work of grace), “순간적 축복”(the instantaneous blessing)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배세트(Paul Bassett)는 “중생 이후에 순간적으로 얻는 은혜의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신자는 위대한 사랑의 계명(The Great Commandment)에 일치하는 본성을 가지며 그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이것이 웨슬레의 확신이었다”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두 번째로 축복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은혜를 주신 것이 틀림없다.…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강을 또 다른 사람은 두 번째의 축복을 갖게 된다”고 말하였다.
성결을 반대하는 이들은 바로 “두번째”라는 용어를 문제 삼고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왜 하필 두 번 뿐이겠는가? 제3차, 제4차, 나아가 1000번의 은혜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웨슬레안들이 두 번째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에 대한 이해에 기인한다. 죄는 내가 범한 죄, 즉 자범죄와 내가 범하지는 않았지만 나면서부터 타고난 죄, 즉 원죄가 있다. 자범죄는 구체적 행위의 죄이고, 원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과 영혼의 죄된(sinful)기질 또는 본성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할 때 첫 번째로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선언하신다. 이것이 칭의이고, 칭의와 동시에 중생이 일어난다. 칭의와 중생은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는 순간적인 체험이다. 중생한 신자가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뿌리 즉 악한 본성을 발견하고, 두 번째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정결함을 받는다. 이것이 성결이다. 요약하면 행동으로 범한 자범죄는 칭의에서 용서받고, 타고난 악한 본성으로서의 죄 즉 원죄는 성화에서 정결함을 받는다. 이와 같이 죄의 이중성이 구원의 이중성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은총, 축복, 그리고 변화이다.
하나님께서 왜 자범죄의 용서(칭의, 중생)와 원죄의 정결(성화)을 동시에 하시지 않는가? 물론 이론상으로는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사실상 칭의와 중생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가 동시에 시작된다. 웨슬레도 “내적 성화는 언제 시작되는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하였다. 이를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라 한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는 아니다. 초기의 성화의 단계에서는 “그 사람 안에 아직도 죄가 머물러 있다. 그렇다. 그가 “철두철미 성화되기”까지는 모든 죄의 씨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라고 웨슬레는 말하였다. 칭의, 중생과 성화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두 다른 차원으로 구분된다.

3.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구원의 모든 사역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죄인을 각성(awakening)시키고, 회개시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칭의되고 중생케 하셔서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적인 성결도 성삼위 하나님의 제3위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수행하신다. 조지 셀(George C. Cell)은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 중의 제 삼위의 표현이다.…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거룩하다고 하는 칭호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거룩하다고 하는 본성에서 유래할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웨슬레도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하였다. 즉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역사이며,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하이다.
성결을 강조하는 대부붑의 웨슬레안들은 성령세계를 온전한 성결의 체험과 동일시하여 왔다. 대부분의 웨슬레안들은 오순절적인 체험을 신자가 중생한 후에 이차적으로 체험하는 온전한 성화와 동일시하였다. 대표적으로 미국성결증진전국협호(National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의 총재였던 파울러(Charles J. Fowler)는 1900년에 「오순절로의 회귀」(Back to Pentecost)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신약 성서에서 오순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메도디스트에서는 항상 오순절이 무엇을 의미해 왔는가? 그것은 사람이 중생한 후에 받아야 할 은혜의 역사로서 신학에서 완전한 성결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성화를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견해는 웨슬레의 동역자요 감리교회 최초의 조직 신학자라 불리우는 플레쳐(John Fletcher)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웨슬레는 성화를 성령세례로 설명하는 플레쳐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성화의 한 면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콕스(Leo Cox)는 “웨슬레에게 암시적이던 것이 플레쳐에게는 명시적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레가 주창했던 성결운동은 주로 기독론적이었으나, 19세기 미국에서 성결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령세례가 강조되었다. 이것이 “미국에서 이루어진 완전주의”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성결-오순절 운동으로 발전하여 성결을 성령세례로 확정짓게 되었다.
성령세례를 성결과 동일시하는 해석상의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성령세례와 성결의 체험은 모두 순간적이다. 2)둘 다 이차적인 은혜의 체험이다. 물세례 받은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으며, 이미 중생한 신자만이 성결할 수 있다. 3)성령세례는 정결케 하는 세례이다. 물세례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면, 성령세례는 악한 본성을 정결(성결의 중요개념)케 하는 역사이다(마3:11-12;눅3:16-17). 4)성령세례는 봉사를 위한 능력을 주신다(행1:8). 이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성결의 개념과 일치한다.
성령세례는 성결케 되는 구체적 방법을 뜻한다. 어떻게 성결해지는가? 그 경험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세례의 순간 그는 완전한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된다.

4. 악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음(The Crucifixion of Carnal Nature)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사람에게는 죄가 없는가? 그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는가? 이 말은 중생한 자가 다시 범죄하느냐 않느냐라는 질문과는 다른 질문이다. 의롭다 함을 얻어 중생한 자 안에 아직도 죄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초대교회의 어거스틴부터 아퀴나스, 루터, 칼빈, 그리고 웨슬레 모두가 일치하는 것은 중생한 자 안에 아직도 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 본성의 교리”(two nature theory)라고 한다. 즉 은혜로 인하여 거듭난 사람에게 거룩하고 의로운 새 본성이 주어진다. 하지만 악한 옛 본성은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는 죄 없는 새로운 본성과 부패한 옛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새 본성이 그를 지배하지만, 남아 있는 옛 본성은 항상 신자를 괴롭힌다.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은 이 옛 본성은 일생동안 사람에게 남아 있다고 주장하낟. 이 두 본성의 갈등과 긴장은 일생동안 계속된다. 신자는 1)자신의 옛 본성에 굴복하든가, 2)아니면 성령께 순종하여 새 본성에 의하여 살든가를 선택행야 한다. 이러한 양자택일에서 성령은 “육체” 또는 인간의 옛 본성과 평생동안 내적인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옛 본성은 사망에 이르러서야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성화는 사망때 혹은 사망 후에야 가능하며, 그 이전까지는 점진적인 성장의 과정만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때까지는 “우리의 육체 곧 옛 사람을 극복하는 일과 성령에 의하여 활기를 주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
성서에는 옛 본성이 “육신의 생각”(롬8:6-7;고전3:1-4) “사망의 몸”(롬7:24), “옛 사람”(엡4:220, “죄의 몸”(롬6:6), “죄의 법”(롬7:23,25;8:2), “쓴 뿌리”(히12:15), “육체”(갈5:19,24), “육체의 소욕”(갈5:17)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웨슬레도 갈5:17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중생한 자 안에 “비록 극복은 되었다 하나 우리 속에는 악한 성품의 씨인 ‘육’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성령을 거스려 싸운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죄성 곧 원죄와 동일시 했다.
그러나 웨슬레는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과는 달리 남아 있는 옛 본성이 살아있는 동안에 온전히 사라지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모든 내적인 죄가 제거되어 “모든 더러움에서 구원되었으며”(겔36:29), “모든 부정함에서 구원되며”(겔39:25,29), “모든 죄악에서 구속함을 받으며”(시130:8), 이 땅에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할 수 있다”(고후7:1)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성결의 한 내용이다. 즉 성결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멸해지는 것”(롬6:6)이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갈5:24)이다. 그리하여 내적인 죄, 타고난 죄, 생래적인 죄, 부패성, 악에의 경향성, 죄의 뿌리, 죄의 모태, 육적 마음등으로 불리우는 원죄가 사라지거나 변화되어 성령에 의한 새 본성만이 내 안에 존재하게 된다.

5. 마음의 할례(Circumcision of Heart)
웨슬레는 1733년 1월 1일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대학교 전체를 상대로 “마음의 할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그 설교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이상과 목표로서 성결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서에서 “성결”이라고 하는 마음의 상태는 죄로부터 즉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씻음을 받아,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녔던 고귀한 성품을 덧입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편으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져서 마침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마음의 참된 할례를 의미한다. 너희는 너희 영혼을 감정과 함께 전폭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라. 이는 마치 강물이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바로 이 마음의 산 제사이지, 그 외의 제사는 원치 않으신다. 거룩한 사랑의 불꽃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게 계속적으로 그 마음을 헌신토록 하라. 당신들이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너희 영혼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게 하라.

성결을 마음의 할례로 표현하는 것은 신자들의 마음에서 무엇인가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래적인 죄를 제거하고 거기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위에 서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으로만 기뻐하고, 하나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의 새 출발이 곧 마음의 할례이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이 끝까지 추구할 목표는 오직 한가지-현세나 영원에서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이 일에 도움이 되는 한 추구하라.…모든 감정, 생각, 말, 행동보다 이 목적을 앞세우라. 무엇을 요구하거나 무엇이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무엇을 추구하거나 기피하거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행하든지, 모두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이시며, 총 목적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복이 되도록 하라.

6. 마음의 정결(Purity of Heart)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실 때에 그 사역의 주체적인 대상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heart)이란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만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 정서, 사고, 지성, 목표 등을 모두 포함하는 속사람(inner man)전부를 나타내는 성서적 표현이다. 성서에 사람(person)이라는 표현을 곧 그의 마음을 의미하며, 이는 전 인격적 총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죄인을 온전히 깨끗케 한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은 우선 도덕적 정결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정결한 마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시24:3,4;마5:8). 동시에 당신의 자녀들을 정결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딤전5:22;약4:8;요일3:3;1:7-9;히1:3;9:13-14;12:14). “정결케 한다” “깨끗하게 한다” “씻어 맑힌다”등의 표현은 마음의 정결을 의미한다. 웨슬레도 「찬송가와 성시」제3권의 서문에서 완전을 마음의 정결로 설명하였다.

완전한 자란 바로 ‘모든 더러움과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깨끗하게 하시며, 모든 불결에서 너희를 구하겠다’는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이 성취된 자를 뜻한다.

또한 마음의 정결은 “의도의 순수성”(동기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는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 곧 한 마음을 뜻한다. 이는 웨슬레가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책 「거룩한 삶과 죽음의 법칙과 실천」이란 책을 1725년에 읽고서 얻은 성결의 개념이다. 웨슬레가 말하는 의도의 순수성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동기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저서 「메도디스트의 특성」에 잘 나타나 있다.

메도디스트란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그들의 마음은 순수하며,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한다.…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정결은 성결의 순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내적인 죄, 생래적인 죄, 죄의 원칙-그로부터 모든 죄가 나오게 되는(막7:23)-이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내재하는 죄로부터의 전적인 해방으로서 성결에 대한 소극적 표현이다.

7. 온전한 사랑(Perfect Love)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에 대하여 오해와 비난이 일어나자, 웨슬레가 그를 설명하기 위하여 가장 즐겨 사용한 말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용어들-악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음, 마음의 할례, 마음의 정결-이 주로 성결에 대한 소극적 설명이라면, 완전한 사랑은 적극적 설명이다. “온전한 사랑” 혹은 “순수한 사랑”은 성결의 본질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문)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답)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그릇된 기질이 그 영혼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다(요일4:18). 이것이 그 본질이다.

온전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웨슬레가 자주 인용한 성경은 요한일서이다. 그 중에서도 요일4:16-18절을 많이 인용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하고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요 기쁨이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자기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선으로 여겨 사랑하고 이웃사랑은 이 최고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웨슬레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완전한 사랑에 의하여 우리의 생활이 전적으로 지배된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때에는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죄이다. 연약한 인간이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자신에게는 없다. 인간의 의지, 도덕심, 교양, 양심의 힘으로는 범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의 힘은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추방하는 사랑”(love expelling sin)이다. 이것은 성결의 소극적인 면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 말씀대로 사는 삶, 선행, 봉사, 이웃사랑 등이다. 이것은 성결의 적극적인 면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으로서의 성결은 죄를 추방하는 사랑인 동시에,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사랑이다. 성결은 죄에 대한 승리와 전도와 봉사의 능력의 원동력이다.
사랑은 정적(static)이 아니라 언제나 동적(dynamic)이다. 사랑은 실제적인 힘(positive force)이다. 그러므로 성결은 자라고 동시에 활동적이다.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있다. 웨슬레는 사랑은 복음의 목적이라고 논하면서 사랑으로 성숙하는 신앙의 활동을 강조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faith that works through love)은 크리스챤의 사회윤리의 신학적 형성과 기초이다. “믿음만”은 주로 개인적이지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강렬하게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 못한다.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없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이다.

8.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성결과 성화는 그 어원이 같다는 점에서 가장 가까운 동의어들이다. 구약성서에 있는 히브리어 “카도쉬”와 신약성서에 있는 헬라어 “하기오스”(하기오스는 카도쉬의 헬라어 번역임)를 영어로 번역할 때 흠정역 성서에는 성결(holiness)과 성화(sanctification) 두 단어을 사용하였다. 성결은 게르만족 어원에서 온 영어로서 동사는 깨끗하게 하다(to hallow), 거룩하게 하다(to make holy), 명사는 성결(holiness), 형용사는 거룩한(holy)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화는 라틴적 어원에서 온 영어로서 동사는 성화케 하다(to sanctify), 명사는 성화(sanctification), 형용사는 성화된(sanctified)등으로 번역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성결과 성화는 동일한 사항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다.
학자들은 이 두 용어를 약간 다른 관점에서 사용한다. 즉 성화는 인물이나 사물이 거룩하게 되는 행위 또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성결은 성화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상태로 정의한다. 성화는 내적인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강조하여 경험적인 면을 나타내고, 성결은 성화를 경험한 사람의 상태 혹은 상황에 관계되는 도덕적인 면을 강조한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이라면, 성결은 그 결과로서 거룩해진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어를 사용할 때 ‘성화를 경험했다’ 또는 ‘성화의 은혜를 체험했다’라는 것이 보다 올바른 표현이 된다.
성화라는 말이 거룩하게 하는 행위나 과정을 강조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전 과정에 적용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루우커(E.L.Lueker)는 “성화란 용어는 미치는 온갖 효과를 포함하고 있는데, 먼저는 영적인 사망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중생하여, 그로부터 영원한 생명 중에 있는 영적 완성에 도달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웨슬레안 신학자들은 웨슬레의 가르침에 따라 성화의 과정을 초기의 성화, 점진적 성화, 완전 성화로 구분하며, 완전 성화에 가장 강조점을 둔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성화라는 말은 완전 성화를 의미하며, 이 말은 웨슬레 신학의 특수한 강조점을 부각시킨다.
성화가 일반적으로 구원의 전과정을 의미하고, 또 성서에서도 중생한 성도들에게도 사용되고 있으므로, 웨슬레는 거기에 “완전히”(entire) 또는 “전적으로”(whole)등의 낱말을 덧붙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구원이라는 것보다 보다 완전하고 높은 구원의 단계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 어원이 같기 때문에 성화도 성결이 가지는 의미-광휘, 성별, 정결-를 동일하게 가진다. 다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사역에 강조점이 있다. 하나님은 성화의 사역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 완전 성화를 정의하면 “완전히 헌신한(consecrated)성도에게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 그 마음을 정결케 하고, 성령에 의하여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9.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웨슬레의 성결 운동에 대한 가장 큰 오해와 비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용어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완전”이라는 단어에 걸림돌이 되고 만 것이다. 웨슬레는 완전이 성서적이라고 확신하였기에, 이 도리가 웨슬레 자신의 교리라기보다는 “주님의 교리, 주님의 독특한, 그리고 주께서 강조하시는 주님의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다.…완전은 사도 바울의 교리요, 사도 야고보의 교리이며,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교리이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한다.
웨슬레의 말처럼 성서에는 “완전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창17:1;신18:13;왕상8:61;마5:48;고후13:11;히6:1;고전2:6;빌3:15;딤후3:17;창6:9;대하15:17;욥1:1;시37:37;레22:21;삼하22:31). 그러므로 웨슬레가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한 가장 큰 원인은 이것이 성서적 용어였기 때문이다.
완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성서가 의미하는 완전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히브리어 샬렘과 탐이나 탐밈, 그리고 신약에서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모두 목적 또는 목표(goal or en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떤 물건이 처음의 의도나 계획에 일치할 때에 씌여지는 단어이다. 맥도날드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는 어떤 물건이 계획된대로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될 때, 그 물건을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 물건이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쓰여지지 않을지 모르나, 그 물건을 고안한 사람의 목적대로 일을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그 물건은 완전한 것이다.
웨슬레는 “완전은 성결의 다른 말일 뿐이므로 같은 사실의 두 다른 낱말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결한 자는 완전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조점의 차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신앙인의 인격적 성숙을 주로 의미한다. 린드스트롬(Harald Lindstrom)은 기독자 완전이라 곧 인격의 완전이며, 이는 곧 사랑이라고 정의하였다. 사랑안에서 완전(perfected in love)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이념에서 형성된 완전하고 조화된 인격을 뜻한다. 우드(J. A. Wood)도 “완전이란 말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웨슬레는 “완전에 관하여”(On Perfection)이라는 설교에서 완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2)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 3)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장의)를 맺음, 4)하나님의 형상의 회복(도덕적 형상의 회복)인데 여기에는 의와 참된 성화가 포함된다, 5)내적 외적 의, 이것은 마음의 순결에서 오는 생활의 성결이다, 6)하나님께서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성화시키는 것, 7)하나님께 대한 완전 헌신, 8)예수를 통하여 찬미와 감사의 하나님께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계속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 9)모든 죄에서의 구원.
조종남 박사는 웨슬레의 기독자 완전론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1)이것은 종교의 진수이다. 2)이것은 동기와 사랑 안에서의 완전이다. 3)이것은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4)이것은 전도와 봉사의 원동력이 된다. 필자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5)이것은 절반의 크리스챤이 아님을 뜻한다. 6)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뜻한다. 7)이것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상태를 뜻한다.

10. 완전한 구원(Full Salvation)
이 용어는 성서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성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살후2:13;딛2:11-14;롬15:29;엡2:5,8;딤후1:9;고전1:18;고후2:15;롬13:11;벧전1:5-9). 가장 중요한 두 구절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라는 것과, 또 하나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이다. 위의 두 구절에 나타나는 “온전히”라는 단어는 “완전히”, “전부”, “끝까지”(entire, wholly, complete, sound)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온전히”라는 말은 첫째 윤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모든 죄(내적, 외적)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단순히 자범죄의 죄책을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속에 거하는 악한 죄성까지도 정결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말은 구원의 정도 또는 단계를 의미한다. 즉 이제는 현세에서 그의 구원이 가장 성숙한 정도에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웨슬레의 구원관은 궁극구원 즉 영화를 향한 종말론적인 목표(teleological aim)을 향하여 계속 상승하는 점진적인 성장과정과 그 중에 중생과 성화라는 두 순간적인 요소가 있다. 이 과정 중에 완전한 성화는 현세 구원의 가장 정점이라는 뜻에서 완전한 구원이라고 한다.
학자들 중에는 위의 두 구절의 “온전히”라는 단어가 기간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성도의 견인과 관련되어진다. 웨슬레안 학자들은 이 말이 기간이 아니라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not duration, but degree). 즉 영원구원을 보장하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과 구원의 최대한도의 성숙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숙한 신앙을 지닌 자는 최종구원의 가장 확실한 데까지 이르렀다. 그가 계속 그런 신앙 안에 거하는 한 그의 구원은 현세에서 이미 보증받고 있다.

11. 가나안의 안식(The Canaan Rest)
이 용어는 복음적 안식, 신앙의 안식, 그리고 뿔라의 안식(사62:4,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맛보는 지상낙원같은 세상)등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웨슬레가 성서적 성결의 경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한 데서부터 이 용어는 유래하였으며, 옛날 감리교도들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며, 현재도 영국감리교회 찬송가 562장에 그대로 수용되어 있다.

나 지금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당신의 말씀이 확실히 보증하네, 나 이제 언약하신 안식에 들어가네, 완전한 사랑의 가나안 땅에!

이것은 시적이요, 상징적 표현으로 첫째는 신앙의 두 번째 경험 즉 성결의 경험을 확실히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은 사탄의 종, 죄의 종된 신분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곧 중생의 경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서 곧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요단이라고 하는 또 한 번의 강을 건너서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신앙의 두 번째 체험 곧 성화의 경험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나로 하여금 제2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라고 찬미가를 불렀다.
두 번째로 이 용어는 신앙의 광야의 시련 상태가 끝나고,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가리킨다. 중생한 신자가 점진적 성화의 과정 중에 겪었던 유혹, 시련, 때로는 실패화 후퇴는 끝나고, 이제는 복음이 약속한 평안과 화평을 누리는 승리의 단계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성결한 신자가 죄에 대하여 늘 승리하면서, 영생을 미리 맛보고 사는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모든 유혹과 고난이 끝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언제나 승리하였다. 마찬가지로 성결한 자에게 유혹과 고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할 때에 승리가 주어지고, 성결이 유지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를 사용함에 문제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요단강을 건넌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서적으로 바른 이해는 아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이 죽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은 이 땅에서 성도가 미리 맛보는 천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성결한 자가 이 현재적 천국을 가장 확실하게 맛보는 자이다. 그는 “이미, 여기서”(here and now)가나안의 삶을 누리며 영생을 맛보고 산다.

12. 성령 충만(Fullness of the Holy Spirit)
성령 충만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성령 세례와 사실상 같은 말이다. 행1:5에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고 하였고, 행2:4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세례는 주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이고, 그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는 성령 충만으로 표현되었다. 즉 하나의 사건이 다른 표현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성화를 의미하는 동의어로 혼용하고 있다.
그러나 개념상의 구분은 있다. 성령 세례가 성결케 되는 체험적인 방법이라면, 성령 충만은 그 성결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어떻게 성결의 삶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면 된다. 사도들도 성령 세례는 단 한 번 오순절에 받았지만, 성령 충만은 거듭 반복된 일이었다.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적 충만과 봉사의 능력으로 승리의 생애에 들어가는 입회식이었고, 성령의 충만은 그것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토마스 쿡은 이 둘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 보는 것도 매우 필요한 일이다. 사도들은 성령 세례는 단 한번 받은 것이요,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은 거듭거듭 반복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결혼식과 결혼생활도 같다. 결혼식은 단 일회의 사건이며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단 일회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영속되는 관계이다. 결혼식은 예식을 마치면 끝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결혼식은 둘 사이의 사랑과 신뢰의 최초의 공식 확인이요, 결혼생활은 결혼식의 맹세와 약속이 거듭 반복되어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가정파탄은 결혼식 대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생활의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인데, 이는 결혼식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 세례를 통하여 성결해진 성도가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하면 성결의 삶이 지속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결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
요약하면 성령 세례는 성령을 주셔서 내적 성결과 사랑의 충만을 주시는 최초의 경험이고, 동시에 성령 충만이 이루어진다.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를 통해 얻어진 성결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다. 즉 성령 세례는 성령 충만의 최초의 순간이요,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가 지속되는 상태을 뜻한다.

** 결론
지금까지 성결의 동의어들 12개의 대한 개념을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성령의 불세례(baptism of fire), 보다 높은 삶(The higher life), 보다 깊은 삶(The deeper life), 승리의 삶(The victorious life), 성별된 삶(The consecrated life), 열매맺는 삶(The frutiful life), 풍성한 생애(The more abundant life), 보다 나은 길(The more excellent way), 이중의 치료(The double cure), 축복의 충만(The fullness of the blessing),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ideal christian life), 오순절의 충만(The fulness of pentecost), 죄에 대하여 죽음(death to sin), 죄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sin), 가나안의 체험(The canaan experience)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12개의 용어들과 함께 이 모든 용어들은 관점을 약간 달리할 뿐이지, 모두가 동의어들이다. 우드(J.A.Wood)는 이렇게 말했다.

이 용어들은 모두 동의어들이며, 모두 은총의 귀중한 상태를 가르키고 있다. 동일한 종교적 상태를 의미하면서, 각각 어떤 본질적 특색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이 용어들은 완전한 구원에 관하여 다각적으로 현저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필자는 12개의 대표적 용어들을 의도적으로 배열하였다. 성결에 관한 동의어들을 순서적으로 잘 연결하여 이해하면 성결에 대해서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성결이란 중생한 후에 이차적인 은총을 받아 변화되는 것이며, 이 은총은 성령 세례의 경험이다. 이를 통하여 육체의 소욕 곧 악한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마음의 할례를 행하며, 그 결과로 더러운 마음이 정결하게 된다. 내적 외적 모든 죄가 사라진 빈 마음은 동시에 성령이 주시는 온전한 사랑의 충만을 이룬다. 이것을 완전 성화의 순간이라고 한다. 이 완전 성화를 경험한 성도는 이제 성결한 상태에 있게 되며, 온전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인격을 갖추게 된다. 그는 현세에서 구원이 가장 온전한 데까지 이르렀으며, 가나안의 안식을 누리며 산다. 이러한 삶을 계속하기 위하여서 언제나 성령 충만한 신앙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결이요, 성결인의 모습이요, 그리고 성결인의 삶이다.

지상적 의무로서의 예배

경건에 관한 모든면을 결합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형성된다. 이것은 인간 최고 의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일과 더불어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미의 제사를 그에게 적극적으로 드리는 일을 포함한다.
예배는 묵상과 명상을 기도와 더불어 혼합하는 것인데 이일들이 성령에 의해서 되어질 때는 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위해 영혼을 굳세게 해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윤리적 의무의 완성을 표시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과 영적인 합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에 의해 드려진 대제사장적 기도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정해주신 목표이다.
주께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사”(요17:21). 이것은 개인적 영적인 합일이며 그중에서 개인의 주체성이 보존되어진다. 그것은 애정과 생각의 일치이며 목적의 동일화이다.
맥일베인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일이며 또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영광스러운 것, 모든 사모할 만한 것을 주님께 돌리는 일이다. 예배드리는 자가 예배받으시는 분의 모양에 동화되는 일이 모든 참된 예배의 필연적인 경향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공적인 예배나 사적인 예배는 우리들의 속죄에 있어서의 주요한 작인(Agency)중에 하나로 되어 있다. 마음의 사상과 감정은 그것들이 내면적으로 완전한 것이 되는 일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내적인 것과 일치되는 외적인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신앙은 교회예배와 그리스도인 생활의 의무중에서 그러한 표현을 찾아보게 된다.

성도의 영원한 축복

성서는 악인의 종극적 상태보다 성도의 영원한 축복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별로 논쟁적이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신학에서 보다 좁은 스페이스를 차지해 온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악인에게 진노의 날에 대비하여 경고를 주시며 의인에게서는 그 영원한 축복을 보증하고 있다.

1. 천국은 하나의 장소이며 상태이다.
천국이 영원한 축복의 상태라 함은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천국은 동시에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은 의인들이 자기의 종극적인 영화상태에서 거할 처소이다. 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성서는 하나님이 계시는 삼층천에 관해 말씀하며 바울은 이 최고의 하늘에 올라간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공간을 멀리 여행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거리는 우주공간적 조건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상태로서 고려되어야 하겠다. 천국은 베일의 바로 뒤에 있는 것인데 그 베일은 종종 바로 ‘엷게 개입(thinly intervenes)'해서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게 한다.
apocalypse란 어휘는 베일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망하는 의인은 그 베일을 통과하여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앞에 나가게 된다. 이것이 구속받은 영혼을 향한 천국이며 대대에 구속받은 자의 영원한 거처이다.

2. 성도의 축복
미래의 받을 행복의 성질을 이 세상에서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해 예배해 놓으신 일에 관하여 성경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천국은 모든 죄와 불의가 영원히 추방된 장소이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21:27) 거룩지 않는 것은 복받은 자의 거처에 들어갈 수가 없다. 성도는 더 이상 마귀와 악인의 사악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거기는 죄에 대한 형벌의 결과들이 온전히 제거된 곳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천국은 성도가 모든 적극적 선의 소유를 향유하는 곳일 것이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서믹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22:3-5) 이와같이 천국은 모든 정결한 소원에 대해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피곤한 자에게는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이고 슬퍼하는 자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다 닦어 주시는 곳이며 고통 당하는 자에게는 그곳에서 다시 고통이 없으며, 성실하기는 하지만 불완전한 봉사 때문에 오는 잘못과 큰 실수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데 그의 종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찬성하시는 미소중에서 모든 것을 행하며 하나님을 섬긴다. 삶의 불확실성이나 실망 때문에 고민하고 당황하는 자들에게는, 그곳에는 밤이 없다고 약속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며, 그들이 주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누리는 또 다른 축복의 원천은 성도지간에 피차 교제하며 또 공통된 주님과의 교제를 보유하는 일이다. 구속받은 성도 개개인의 특유한 개성은 침해받지 않고 잘 보존되리라고 확신한다. 또 지상에서 그들에게 특성을 부여한 교제의 본능은 소실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히12:22-23, 마8:11 참조)믿을 수 있다. 또 성서말씀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성도는 지상에서의 사랑하는 자들을 인식하며 우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한가지로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가팅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기억은 남아 있고, 우리 노래의 주제는 속죄임으로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인물들이나 장소, 환경에 관한 지식들도 보유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다(살전2:19 참조). 그러나 최고, 최선의 것으로써 그들은 희미한 베일없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4)고 약속된 것이다. 요한도 이와같이 환희의 격조로 외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3. 천국에서 종사하는 일
천국은 안식의 장소이기는 하지만 무활동의 장소라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그 활동은 첫째로 영적인 것이리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이 하나님은 구속받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대양중에서 끊임없이 확창할 수 있돌고 해주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새로운 조망(New Views)과 하나님의 존숭되어야 할 인격의 신선한 비젼이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끊임없이 부어질 것이다. 그들의 지적능력은 확대되며 순화된다. Dr. Graham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들의 눈앞에는 피조물의 전체집단, 섭리의 체계, 하나님의 특성과 제속성이 놓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그들은 자연과 섭리의 비밀중에서 알아내게 될 것이다. 천국 축복의 대부분은 마음의 희열임에 틀림없다. 해방되고 확대된 이성은 물질적 우주의 법칙과 또 그것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최고 지혜와 하나님의 지배를 구성하고 있는 제왕국 제국, 국가, 인종의 기원과 발전을 추적해서 알아내는데 기쁨을 가지는 것은 물론 땅위의 벌레로부터 천상보좌앞에 있는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 사랑, 자애를 알아내는 기쁨을 가질 것이다. 아, 아! 지성을 위한 분야의 광대무변 함이여!(Graham「에배소서에 관하여」p.72)

4. 천국은 영원히 기쁜 곳
하늘나라에 관한 무상의 우월성을 논하자면 끝없는 기쁨일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11:16)이라고 불려진다. 또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히11:16)이라고 불려진다. 또 “진동치 못할 나라”(히12:28)라고도 말씀된다. ‘영원’이란 말과 그러한 류의 몇몇 어휘들은 자주 천국과 관련된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후5:1), “영원한 영광”(벧전5:10), “영원한 처소”(눅16:9)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후1:11)이다. 성도들이 그 영원한 영광중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은 끝없는 생애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말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연령은 끝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주요 개념들

1. 생명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요한의 주요한 관심은 중생과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요, 일정한 조건들 하에서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명을 주는 그 기본적인 조건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이다. 이렇게 이 복음서의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관심은 그 첫 구절에서 맨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까지 이 복음서를 지배하고 있다. 이 저자는 누가와는 달리 실제적인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려는 데에는 주요 관심사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건들을 선택하는 면에서 매우 선별적이다. 그의 선택은 어떤 교훈적인 목적으로부터 엄숙한 명령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의 관심사가 사건들에만 있지 않고 그 사건들의 의미에도 있기 때문이다.

2. 증인
제4복음서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들 중의 하나는 증언이나 증인에 대한 강조이다. “증언한다”는 용어든 동사형으로 34회 나타나고 명사형으로 13회 나타나며, 다른 세 복음서들에서 모두 16회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요한복음에는 모두 47회나 된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우선 자신을 증인으로 언급하고 있다(1:14,16;19:35;21:24;참고. 5:30-47). 그의 증언 방법은, 자기의 독자들에게 확신을 끼쳐 주기 위하여 잘 집합된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한 것을 인격적으로 선언하는 방법도 사용하는 것이다. 그 핵심을 요약하면, 신앙이란 일차적이든 이차적이든 증거 자료들에 기인된 것이며, 증거 자료에 기인된 신앙은 좋은 것인데 반하여 감각적인 증거 자료에 의존하지 않은 신앙은 더 나은 것이다(20:29).

3. 신앙
증언을 하는 것은 신앙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여기서 신앙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적인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주장하신 예수를 믿는 신앙이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명사 “피스티스”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고 그 동사 “피스튜에인”에만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신앙이나 신념은 히브리인들의 경우에서처럼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확신이 아니며 바울에게서와 같이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신뢰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자신을 내맡기는 위탁(Committal)이다(6:29;참고. 10:32;17:3). 그 신앙은 제안된 내용의 유효성에 관한 증언의 용납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 하나님과 세상, 진리와 과오 사이에서 실존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신앙의 장애 요소들은 증거 자료의 결핍이 아니라 교만과 자기 존중 등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들이며, 세상의 영광에 대한 욕망과 자신의 완고함이다(5:44;8:43;9:22;12:39).

4. 영광
베드로전서와 바울 서신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영광”(독사)이, 수치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치 자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수치를 변화시키고 있다. 영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이다. 이 영광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 광채는 구약의 광채와 대조적인 것이다(1:14-18). 구약성서에서는 쉐키나(shekinah,영광)가 성전에 거주하는 반면에 요한에게서는 독사(영광)가 참된 성전이신 예수 안에 거하고 있다(2:19).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영광이 독특한 현상은 영광이 죽음의 수치로부터 나타난다는 사실이다(11:4;12:33;21:19).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여기서는 한 사건으로 여겨져 있다(7:39;12;28-33). 이 영광은 이사야가 증언한 영광과 본질적으로 동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확신하고 있다(요12:41).

5. 중생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요한이 강조적으로 전개시키는 온유 하나는 “중생”이나 “신생”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밑바탕에 흐르는 이러한 저류는 1:12,13;3:1-10;8:39-45절에서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울은 의인화(justification)라는 주제 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에 관하여 말하고 법률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에 반하여, 요한은 “중생”(다시 태어남, new birth)이라는 생물학적인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크리스찬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 이외에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여겨졌다(1:12). 니고데모와의 회견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적으로 진술하였다(3:5). 여기서 대조된 것은 육체적인 삶과 영적인 삶으로서 이것은 요한복음서의 특징적인 주제이다. 육체적인 삶이 인간의 부모에게서 오는 것과 똑같이 영적인 삶은 아들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이러한 영적인 출생의 문제는 8장에 매우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지닌 것에 대하여서 규탄하고 참된 유대인이란 자기의 조상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의 영적인 계보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8:39-58). 이 계보는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시될 수가 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 사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요한의 태도가 독특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 나타난 중생의 계보는 베드로전서1:3,23:2:2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개념은 후대의 기독교 신학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6. 세상
요한복음서에서는 도덕적인 이원론에 대하여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하나님과 악한 자, 성도와 세상. 이 주제는 요한복음서 전체에 흐르고 있으나 특별히 그 서곡에서 탁월하게 나타난다(1:5,10-12). 이 주제는 요한복음서의 핵심 구절들 중의 하나에서도 나타난다:“빛이 세상으로 들어 왔으되 사람들의 행동이 악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빛보다 오히려 어둠을 사랑한 것은 정죄였다”(3:19). 이것은 다시 예수가 자기의 형제들과 논의를 하는 중에 나타난다. 거기에는 그 구속자와 세상 사이의 근본적인 적개심이 진술되어 있다:“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나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일들은 악하다고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7:7). 빛과 어둠의 이러한 적개심은 소경이 치료를 받은 다음에 다시 표현된다(9:38-41). 이 주제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에 제자들과 광범위한 대화를 하는 곳에서 특별히 많이 나타난다. 세상의 증오는 그 제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생의 기본적인 사실이다(15:18-16:33). 그에 따르는 대결에서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옹호자로서 성령의 도움이 보장된다(16:7-11; 참고. 눅12:12).

7. 사랑
사랑의 주제가 비록 크리스챤의 모든 기록에서 탁월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적개심에 가득 찬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도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관계이다(요3:16). 예수의 제자들을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구별시키는 특성도 사랑이다(13:34,35). 예수의 중보적인 기도의 절정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들을 연합시키는 사랑에 대한 요청이다(17:26).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에서 소중하게 여겨진 관계의 특성은 사랑이다(21:15-19). 이 주제는 요한복음과 한 편을 이루는 요한일서에서 훨씬 더 강조되어 있다.

8. 진리
헬라 문화에 의하여 지배된 세상에 대한 요한복음의 호소는 아마 진리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와 동시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서곡이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전달된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중의 축복을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히브리적인 은혜의 유익과, 헬라적인 진리의 유익 그리고 히브리적이고 헬라적인 영적의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게서 수렴된다. 그 후에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보장하여 주기를, 자기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들을 해방시키는 진리를 보장하여 줄 것이라고 하였다(요8:31,32). 예수는 진리의 구현이다(14:6). 이 진리는 회의적이고 괴로워하는 세상 속으로 투영되었는데 빌라도도 진리에 대하여 알고자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18:38)라고 물었다. 이 세상 자체는 진리에 속한 사람들과 죄와 과오 속에 빠진 사람들로 갈라져 있다(18:37). 결국 복음 자체는 자기가 진리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서를 끝마치는 장엄한 확인에 의하면 여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사실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21:24).
이러한 것들이 요한복음서의 구조를 이루는 주요 개념들 중의 몇 가지이다. 요한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의 몇 가지를 실증하기 위하여 선택한 사건들에서 선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주제들은 위대한 교향곡들의 주제들과 같다. 그것들은 대부분 서곡이나 종곡에 소개되어 있으며 이 책 전체의 구조 속에 얽혀져 있어서, 어떤 주제는 여기서 탁월하게 나타나고 다른 주제는 저기서 탁월하게 나타난다. 요한의 사상은 자주 선회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원통형의 계단이나 나선형과 같은 것이어서, 여기서는 어떤 주제가 나타났다가 후에 더 높은 차원에서 나타나기 위하여 현재는 곧 후퇴하고 있다. 요한은 한 곳에서 한 주제를 다룬 다음에 다른 주제를 다루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설화 전체에서 그 모든 주제들을 미정의 상태에 남겨 둔다. 예를 들면 그 저자는 신앙의 장애 요소들을 지적하려고 관심을 기울인다. 동료들의 존중에 대하여 때에 맞지 않게 감사를 하는 태도나(5:44),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들이 대중의 압력에서 받는 공포 때문에 신앙을 택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다(9:22).

교회의 신자로 이끄는 문제

바로 여기서 우리는 주저하게 될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이러한 고상한 목적이 영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인 차원으로 미쳐야 할까? 우리는 확실히 회심자들에게 교회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은 항상 교회 활동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오르간 음악이나, 예배 의식, 설교 혹은 단체 활동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그의 제자로 인정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결코 활동적인 신자가 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결혼함으로써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다시는 과거의 자신들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지식 안에서 행복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기 위하여 교회에 출석한다. 시험을 거쳐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확실하고 그의 충성스런 제자가 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신임장을 주는 것이 더 나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후 예배에 참석하며 시간과 돈을 바친다는 약속과 함께 신자 명부에 올리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복음 전도의 최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크리스천의 생활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교회의 한 사람 신자됨을 약속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이 2차 목표가 되어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이 교회의 신자가 될 때까지는 전도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세우셨다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교회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람이 예수가 어디에 있음을 알며 그리고 그에 대한 신앙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것인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것을 알고자 원하면 자신을 의지하여도 안 되며, 반드시 교회로 가야 하며, 교회를 방문하고 질문을 하여야 한다. 이제 교회는 나무나 돌의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그들의 생활 양식, 교육, 그리고 삶을 배워 알아야 한다.
교회는 인간적인 기구가 아니라는 것이 역사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대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은혜를 주시는 하늘의 전초 기지로서 그의 교회를 세상에 두셨다. 나는 언젠가 한번, “복음 전도를 하나의 ‘교회 입교’(join-the-Church) 프로그램화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신약성서에 그렇게 되어 있다”라고 지면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교회사를 가르치는 한 교수는 어떤 종교 잡지에서 “우리는 가볍게 몇 세기를 초월하여 교회의 특별한 조직 형태는 신약성서의 교회라는 주장을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신중한 무제를 다룸에 있어 너무 되는 대로 하는 것은 교정의 필요는 있으나 그 교수가 말하는 만큼이나 그 세기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고린도 교회나 혹은 폴리갑(Polycarp)의 서머나 교회 안에 있기를 원했으며, 통상 그들의 출신 교회에서 교제를 발견할 수 있기를 원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신자들의 교제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천국의 거류지는 여전히 여기 지상에 있는 것이다.
교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전도의 주요 장벽이다. 신자들은 없어도 상관없는 한 종교 그룹으로 그들의 이웃을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열성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상이다. 가시적인 교회에서는, 어디서든지 항상 존재하는 영적 실제들이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 물질적 세계에서는 형체를 떠난 종교는 불가능하다. 교회에서 신적인 완전이 불완전한 것을 통해서 선포되어진다. 가시적인 교회는 불가시적인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로 개입해 오는 장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 나라와 같은 실제들은 어떤 지상의 조직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아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며 또한 자리를 찾게 된다.

1.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가 확실히 알려졌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도저히 미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실재를 나타내시고자 지상에 오셨다. 가시적 교회는 이 성육신의 사건을 계속 반복 유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 오신다. 우리 스스로가 결코 그를 알 수 없으나 교회를 통하여 그를 알게 된다. 우리는 예배, 성례전, 그의 교훈,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우리는 그의 임재의 느낌을 가지며 이를 통하여 그를 안다. 우리는 타인의 생활 속에서 우리를 통하시고,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범위와 교회 안에서 예수를 발견한다. 그는 교회 안에 계신다. 이 같은 특별한 방법에서 교회의 교인이 그의 지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성서는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있다. 모든 물질적 염려 가운데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이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영적으로 소생된다.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성서의 계시가 교회에 자주 출석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유지되며, 그리고 거기서(교회) 사람들은 성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마다 교회는 정규적인 예배 의식과, 봉사와 자기 희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한 체제를 마련하고 공급해 준다.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은 항상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는 가지고 있다.

2.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신약성서는 고립되어 있는 개인들을 위한 기독교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함께 나누는 자들은 불가피하게 서로 사랑과 후원의 친교로 결속되어 있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간직하신 가장 큰 많은 축복은, 이러한 친교와 사랑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다. 유아독존의 그리스도인들은 무력하게 되며 가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없다. 우리가 홀로 가질 수 없는 영적 경험들이다.
밀턴 잉거(J. Milton Yinger)는 그의 저서 「종교의 과학적 탐구」(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에서 이렇게 말한다:“개인적인 종교가 있을 수 있는가? 신앙과 행위의 개인적인 체계에 대한 종교적인 국면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완전한 종교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그것은 오로지 집단의 상호 작용 속에서만 자체의 가장 중요한 면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교인들의 생활 속에서 경험한다. 우리는 큰 집회에서 우리가 이전에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이상하게도 놀라울 정도의 친밀감을 느낄 때 그것을 경험한다. 또한 온 세계를 통틀러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국가”를 초월하여 기독 신자들로서 하나가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났으나 죽음도 파괴할 수 없는 그 교제 안에서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가까이 있다는 지식 안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사람들이 거리 어귀에 있는 작은 교회에 참석할 때, 그들은 즉시 교회 신자의 명부에 오르지도 않고 회의에서 투표할 자격도 없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와 위대한 그리스도인 영웅들을 포함하는 모임에서 자기들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 안에서 그들의 새로운 동료들과, 사도들과, 그리고 그들 모두를 사랑스러운 가족으로 이끄시는 주님과 더불어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3. 교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이다.
여러분이 거리 어귀의 작은 교회에 참석할 때, 도시에 있는 다른 모든 교회의 문을 동시에 통과한다. 당신이 교회 외부에서 교회의 무리 속으로 들어갈 때, 동시에 카톨릭교인도, 감리교인도, 감독파 교인들이 된다. 세계 어느 도처에서 기독교회(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지금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 교파의 신자가 되는 것은 다른 교파의 신자들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한가지로 연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의 찬송가 중 어떤 것들을 좋아하지 않거나 그들의 견해와 같은 의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당신은 같은 성서 안에서 알게 된, 동일한 구원을 주시며 동일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동일한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데이빗 스토우(David M. Stowe)는 그의 저서 「초교파와 복음 전도」(Ecumenicity and Evangelism)에서 역사는 “사회적 사자, 즉 선교에 있어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어떤 사회적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에 대한 필연성과, 이것은 역시 영구적 형태의 구현, 즉 모든 세대의 교량 역할과 사회 전반에 축적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음”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러나 사회적 조직체이다. 교회는 또한 현재와 과거, 미래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켜 주는 가시적 조직체이다. 기독교 신앙은 20세기의 미국인의 현상이 아니며, 복음 전도는 신자들을 가정 성경 공부반이나 사업인들의 조찬 기도회에 고착시켰을 때 그 목적을 달성해 오지 못하였다. 그러한 것들은 일면 유용한 것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국가와 전세기에 걸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믿음의 한 공동체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진부한 것에는 신성한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중세 독일 농부들에게 적격이었던 음악과 기도의 형태가 우리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과거 세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던 자들이 행했던 예배와 앞으로 다가올 세기에 행해질 예배를 우리 서로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깊고도 지속적인 교우 관계가 유지되며 자손들과 선조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영적인 집으로서 일생 동안 우리를 유지시켜 줄 하나의 정립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제도상의 교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매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다른 인정될 만한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제도적인 교회(the institutional Church)는 한정된 교회이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적인 성례전을 갖춘 실제적인 교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존재(the divine Being)가 나약한 육신으로 성육신되었다. 그러기에 교회는 육체적이며 하잘 것 없는 물질을 통하여 전달되는 거룩한 은혜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성례전은 교회에 속한다. 성례전은 교회를 통하여 전해 내려왔으며 교회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자신이나 가족의 세례를 위하여 교회로부터 성례전을 받기 원하여 교회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성례전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통하여 성례전이 주어지는 교회로부터 사람을 분리하고자 하는 복음 전도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복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복음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은혜는 복음의 약속 가운데 있다.

4. 교회는 천국이다.
천국에 대한 신약성서의 설명은 단순하지 않으나 그 설명들 중의 한 부분은 명백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가시적인 공동체를 뜻한다. 교회의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 되시는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 왕국은 자체의 법과 삶의 특별한 길을 가지고 있다.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었을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비록 자신이 신자임을 공개하는 것은 순교당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자신이 교회의 신자들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왕은 가이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천명하였다. 그것은 여전히 그의 교회의 신자가 된다는 데 대한 이유이며 왜 교회가 여전히 순교자들을 갖고 있나 하는 데 대한 이유이다. 복음 전도 운동이나 대학의 친교단에 가입한다는 것이 그러한 증인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에 대하여 보다 우위에 있다. 제도적인 것은 제도적인 것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 신앙의 확신을 하나가 되어 표현하는 것은 여러 개인들이 따로 분리되어 노력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있다. 복음은 조직된 교회와 그 교회들이 가질 수 있는 통제력 없이는 오늘날의 사회에 영향력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과 싸움에 있어서 신앙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다. 만일 복음 전도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회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여금 전적인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어려운 질문을 갖게 된다. 만일 우리가 남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땅위에 교회를 두셨으면, 만일 복음 전도가 사람들을 교회의 신자가 되기까지 인도하기 전에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신성한 조직체가 어디서 발견될 수 있어야 하는가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마치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처럼 “교회”를 말하지만, 우리가 우리들의 주위를 살펴볼 때 보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제도의 혼란한 만연과 사치이다. 당당한 대성당과 눈에 띄는 회합 장소가 있다. 거기에는 또한 고대의 성직 계급제도도 있고 조야한 종파들도 있다. 깨어지지 않는 연속체(continuum) 위에서 “교회”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종교적 모임이 교회로서의 자격을 갖추려면 어떤 것이 있어야 하겠는가? 집회소(lodges)는 예배 의식 때 성서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일 수가 있겠는가? 가정교회가 교회일 수가 있는가? 기숙사의 기도 모임이 타당한 세례 예식을 가질 수 있는가? 경건한 친구들이 레스토랑에서 포도 소다수와 함께 썬 감자 튀김을 시켜놓고 성찬식을 거행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아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며 또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해를 걸쳐서 “참된 교회”의 명확한 특징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성직자를 통하여서 교회를 구분지으려고 노력해 왔다. 즉 올바른 성직자가 있는 곳에 올바른 교회가 있고, 사도시대와 마침내는 그리스도 자신에까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연속적인 성직 수임식이 존재하는 곳에서만이 올바른 성직자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이 자격을 부여하는 물질적인 계속성을 제공해 준다. 사도의 역사가 성경에 의해 목사에게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회중에게 양도되기 때문에 사도적 계승은 평신도를 통해 그 추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지론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명한 일을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행하는 곳에 참된 교회가 존재한다. 그 명칭이 의미하듯이 정통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도와 교황을 통하여 변함없이 오늘의 교회로 전해 내려온 곳에서만 참된 교회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르쳐 온 가르침으로부터 감할 것도 가할 것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교회들은 올바른 성례전의 준수를 통해 그들 자신을 구별해 왔다. 거기에 칼빈파 교회들은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설교를 추가해 왔다. 주교회(州敎會)들은 정치적으로 구분되어 왔다. 선택을 받은 교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표시를 보여 주는 생활로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았다. 다른 파들과 함께 그 증거는 교회에 약속되어진 성령의 은사를 소유함에 있다.
“오직 우리만의” 교회들과 덜 배타적인 교회들과의 차이점은 중요하다. 오로지 자신들의 교회에서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약속하신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기독교회들이 있다. 미국 개척자들이 부른 노래처럼:

네가 우리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을 안겨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며,
너는 지옥에 속한 자니까.

이것은 확실히 만족스런 긴박감을 갖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와 같은 은혜에 대한 독점이 증명되는 것은 볼 수 없다.
다행히도 성서는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성서는 부분적으로 취급할 뿐이다. 교회는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다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선한 행실에 부요한 서머나 교회에서부터 죽은 교회인 사디스까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미온적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락적인 규모로 등급이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낫다고 하는 교인들을 보았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교회라면 가져야 할 것을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이는 교회는 없으며, 성령의 능력의 확증이 없는 교회는 없다. 지상의 교회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나 그 단편은 참된 교회이다.
만일 비행기로 하여금 진로를 유지케 해주는 라디오 전파가 비행기의 기관에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전파의 범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참된 교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벗어난 그릇된 교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교회의 대부분은 여러 세기를 걸쳐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지도와 능력의 이런 전파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올바르게 인도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잘못 진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전통과 신자들의 헌신은 교회를 지시 전파로 올바르게 인도하게 할 것이다. 회중들이 잘못 그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갈 때에도 하나님의 전파는 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전도자에게는 참된 교회가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 그는 역사가에게서도 신학자에게서도 해답을 얻어낼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야 하는 가를 말해 줄 수는 있으나 어디에 교회가 존재하는가는 말해 줄 수 없다. 그 대답은 결국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교회(congregation)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여러분의 교회에 주어졌다는 어떤 증거라도 있는가? 당신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가? 당신의 교회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도움을 주었는가? 다른 교인들에게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사랑과 선의 특징을 발견했는가? 당신의 교회에서 과거의 교회와 앞으로의 미래 교회와의 연속성을 깨닫기나 하는가? 의심할 나위 없이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서 많은 비위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세상의 어떤 교제 가운데서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부수적인 것이 없다면, 당신이 당신의 교회에 결코 가본 적이 없었다면, 오늘날 상당히 부유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하나의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당신 자신의 영혼의 이익을 위해 당신은 즉시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 위에 존재하거나 당신의 삶을 부요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지상에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전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후 약 250년경, 키프리안(Cyprian)은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통상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번역된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키프리안이 믿었고 그가 가르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바다. 그러나 라틴어의 ‘salus'는 역시 “건강”을 의미할 수 있다. 전도자는 오로지 교인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끊임없는 친교를 통하여 그의 임재의 경험과 사랑의 친교,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위대한 삶의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교회에 입회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조직을 강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처럼 더 많을 수도 있다”라고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만일 처음의 강조점이 교회에 입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로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호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입교하는 것은 항상 기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없이는 교회에 입교할 보다 좋은 이유는 결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면 교회 밖에서 지체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교회와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져오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방문자가 한 늙은 노파를 초대하여 일리노이주 도시의 교회에 참석토록 했을 때, 익살스럽게 그녀는, “나는 80년 동안을 교회 없이 살아왔으니 교회 없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주제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인지하고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당신은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얼마 동안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자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교회의 신자가 되겠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5. 기독교인의 관습과 교회에의 참여를 시작하도록 돕는다.
복음 전도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단계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교회에 참석하려는 큰 결심을 한 이후에 나타난다. 사고와 생활에서 온 오랜 습관의 지배력은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일반적인 경향은 새로운 클럽 회원들이 원하는 것과 같은 적은 변화를 평상시대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어떤 다른 단체와도 다르다. 교회가 그것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다는 행동과 태도를 지니고 세계로 나갈 것을 요구한다. 교회의 신자됨은 하나의 소속만이 아니고 생활의 방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개심자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그것을 명백하게 하고자 결심한 사람들은 더욱 많이 변화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의 공개된 고백과 교회 신자로서의 자격이 진실된 것이라면, 시간과 돈의 사용, 행동의 열매, 대인 관계는 변화되어야만 한다. 다른 교회에서 전입하여 온 신자들은 불안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새로운 교회는 떠났던 사랑스러운 교회아 같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 대한 모든 일들이 그릇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낯선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다. 만일 새 교회가 이 어려운 기간 동안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행복하거나 교회 안에 있을 때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완전한 복음 전도의 가장 큰 죄는 새로운 신자들을 침체되거나 방황하게 방치해 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많은 신자들이 침체되는 이유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의 생활을 건전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이제 막 교회의 문턱을 들어선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주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기까지 그들과 함께 지내야만 한다.

영적 혁명의 촉진

당신은 세계 역사상 가장 두려운 시대를 묻지 않았지만 이미 그 시대가 와 있습니다. 전에는 결코 지금보다 전략적인 시간이 없었습니다. 전에는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조직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이러한 요구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마지막 연대에 들어서기 전에 단지 두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세태가 바뀔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한 번의 마지막 각성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국가적 각성 작업을 위해 동원된다면 긍정적입니다. 또한 만일 하나님을 대신하여 각 중요 계층의 사회에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즉각적으로 개입한다면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담대히 믿는다면 긍정적입니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얼마나 신속하게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폭력이나 현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은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정곡을 찌를 어떠한 정치적, 교육적, 혹은 과학적 대책들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조직은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요청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모든 혁명은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매우 잘 하실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사람들을 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을 복종하고 누구나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다음 다섯 가지 방법으로 영적 각성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1. 복음 전도에 의하여
영적 혁명은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가 복음 전도의 과업을 어깨에 걸머질 때에야 비로소 십 년 이내에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은 소수의 재능있는 종교적 거장들의 과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각 자녀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이 일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길 잃은 자들은 행복이나 평화를, 어쩌면 종교적 경험까지라도 갈구하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길을 잃었습니다. 인류시조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은 인간을 찾고 계시는데 인간은 일이나 언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자들을 찾아 회복시키는 그의 전도에 사람들이 그와 합류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전도는 희생이 많은 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위해서 하나님에게는 외아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샘영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생명의 희생이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종류의 영향을 달리 줄 방법은 없습니다.

2. 자백과 회복에 의하여
죄는 항상 상처를 입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우리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자백과 회복은 죄로 말미암아 끊긴 것들을 다시 결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상처를 입혔으면 진심으로 남김없이 그에게 용서를 구합시다. 그러나 만일 그 분에 대한 우리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거기에서 중단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니미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사도행전24장16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백이란 사람들에게 입힌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복(restitution)이란 인간으로 할 수 있는데까지 기꺼이 그들과의 사태를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입니다(레위기6장1-6절/잠언28장13절/에스겔18장27-28절).

3. 책망과 견책에 의하여
사회가 범죄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형태의 사회 운동이 있습니까? 당신의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악의 길은 어떻게 막습니까? 이것에 대한 대답은 성경적 책망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진정한 기독교적인 사랑은 정에 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인정이 많고 돌보는 것임과 동시에 지혜롭고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에베소서4장26절)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평판에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죄가 하나님께 어떠한 상처를 주는가를 확고한 언어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댓가는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진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분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조용히 곁에 앉아서 말 한 마디도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이 지옥으로 돌진해 가는 것을 묵인해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사회개혁에 의하여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쓸모없다는 소리높은 비난의 외침을 듣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 변화에 어떠한 유용한 공헌을 하는 기구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달리 말합니다. 사회에 있어서 개선을 위한 거의 모든 중요한 변화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에 대한 성경의 명령으로 돌아온 데서 시작했습니다.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urforce)는 어린이 노동을 불법화하기 위해 투쟁하여 그 일을 해냈습니다. 키어 하디(Kier Hardy)는 노동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는 초기 구세군을 강력한 사회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찰즈 피니(Charles Finney)는 노예 제도가 수락되었을 때 흑인들과 백인들간에 인간의 평등을 위해 강력히 설교했습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노력은 영적 자각을 일으켜 불란서를 거의 파멸지경을 끌고갔던 것과 같은 유혈 혁명으로부터 영국을 구해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5. 기도와 금식에 의하여
어떤 영적 자각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연합입니다. 이 세대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진정한 연합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해야 하며 이 일은 진리를 따를 때에만 일어날 것입니다. 공통된 비이기심이 이 기본적인 통일성의 둘째 역할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말로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기에 있어서 정당해야 하며 하나님과 복음을 우리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목적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연합의 양면을 개혁(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로 돌아가는 것)과 부흥(예수 제자의 진정한 동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 둘 모두는 이룰 수 있는 것이나 기도가 없다면 각성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것을 원하며, 우리 세계와 하나님의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정말로 염려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입증할 수 있는 하나의 수련입니다. 여러 나라들이 전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적이 있었으나 하나님 백성편에서 이들 성경의 원칙으로 돌아옴으로써 국가적 재난을 면했습니다. 그 분의 약속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역대하7장14절).

하나님과 만남

영적 리더십은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는 생생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삶이 변화될 만큼 깊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영적 리더가 될 수 없다. 찰스 피니는 그리스도와 독특한 만남을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대열에 들었다. 변호사 시절, 젊은 피니는 집 근처 숲에 들어가 회심을 체험했다. 또 같은 주간에 법률 사무실에서 다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은 만남이었다.

내 모든 감정이 끌엉 올라 분출되는 것 같았다. 내 영혼을 전부 하나님께 쏟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되어 나는 사무실 뒷방으로 급히 들어갔다⋯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뵙는 것 같았다⋯그분은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그윽이 바라보시는 눈빛에 나는 그만 그분 발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분이 실제로 내 앞에서 서 계신 것 같았다. 나는 그분 발치에 엎드려 내 영혼을 쏟아놓았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목멘 소리로 고백했다. 내 눈물로 그분의 발을 다 적신 것 같았다⋯나는 성령의 강한 세례를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런 것이 있는 줄 생각조차 해 본 일도 없었다. 세상 누구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어 본 기억도 없었다. 그렇게 성령님은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는 것처럼 내게 임하셨다. 그 감화는 나를 훑고 지나가는 전기 파도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도 같았다. 그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호흡 자체 같았다⋯내 마음 가득 밀려오던 그 놀라운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기쁨과 사랑으로 목 놓아 울었다. 흘러넘치는 말 못할 마음을 문자 그대로 엉엉 울음으로 쏟아 냈다. 그 물결은 쉬지 않고 계속 나를 덮쳐 왔다. 결국 이렇게 부르짖던 것이 기억난다. “이 물결이 계속 저를 덮치면 죽을 것 같습니다. 주님, 더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후 피니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고, 그는 당대 최고의 전도자가 되었다. 한편 드와이트 무디(D.L.Moody)는 시카고 YMCA 대표로 큰 성공을 구가하고 있었다. 또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였다. 무디 주변에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 재능이 뛰어난 가수 아이라 생키(Ira Sankey)도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무디는 성공한 복음사역자였다. 1871년 6월, 사라 앤 쿡(Sarah Anne Cooke)과 헉스허스트(Hawxhurst)는 교회 맨 앞줄에 앉아 예배 시간 내내 열심히 기도했다. 무디는 그들에게 다가가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무디의 삶과 사역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느꼈기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무디의 내면에 변화가 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영혼에 깊은 갈급함이 생겼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몰랐다. 나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 능력을 받지 않고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무디는 두 여인에게 자신이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도록 금요일마다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무디는 주님께 자기 삶과 의지를 전부 드렸다. 갑자가 그는 이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넘치는 임재를 느꼈다. 무디는 급히 하나님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호텔을 찾았다. “방 안이 하나님의 불꽃에 휩싸인 듯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하나님께 흠뻑 젖었다. 변화산과 같은 이 만남에 대해 무디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생생히 느껴져 나는 그분께 손길을 거두지 마시라고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후 무디는 영국에서 헨리 발리(Henry Varley)로부터 이런 도전을 듣는다. “무디, 세상은 아직 하나님이 온전히 구별된 사람을 통해 하실 일을 보지 못했스니다.” 바로 무디가 그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19세기 말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들어 쓰셨다.
빌리 그레이엄은 서른 살 때 인생의 고비를 맞았다. 그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찰스 템플턴(Charles Templeton)이 신앙을 버린 후였다. 템플턴은 그레이엄의 신앙을 비웃었다. 그레이엄은 대학 총장이자 순회 전도자로 훌륭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은 흔들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마당에 혼자 어릴 적 신앙ㅇ르 고수한다는 것은 너무 순박한 이링 아닐까?

밤이 깊어 갈수록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로스앤젤레스 전도 운동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반드시 답을 찾아야 했다. 성경을 믿을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학교 총장도 그만두어야 했다. 전도자의 강단도 떠나야 했다. 내 나이 서른, 농부가 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내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으리라 전심으로 믿었다⋯“오, 하나님! 이 책에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도 많습니다. 현대 과학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척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철학적 비판을 저는 풀 수 없습니다.”⋯마침내 성령에 힘입어 나는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 믿음으로 이 책을 아버지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지식적 의문과 회의보다 믿음을 더 앞자리에 두겠습니다. 성경이 아버지 영감의 말씀임을 믿겠습니다.” 그 8월의 밤, 포레스트 홈에서 무릎을 일으켰을 때 내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지난 몇 달 간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느꼈다.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영혼의 영적 전투에서 싸워 이겼음을 나는 머리와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이 국제적 전도자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 사건 직후이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이런 의식은 위대한 영적 리더들의 삶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런 순간은 하나님 뜻을 구하려는 뜨거운 각오라기보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했을 때 찾아온다. 믿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려 하나님을 믿고 그분 뜻을 행하는 것이다.
영적 리더로서 피니나 무디, 그레이엄의 두드러진 성공은 뛰어난 언변이나 조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대한 총체적 순종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회심 때 헌신보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모든 것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리라고 결단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쥐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겸손을 기뻐하셨고 그들의 삶을 통해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다. 대다수 리더들은 이 깊은 순종의 차원에 끝내 이르지 못한다. 헌신하는 이들은 많지만 절대 순종하는 이들은 적다. 하나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철저히 당신께 드리는 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며, 그들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성품/온전함(integrity)

과거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리더의 사생활을 몰랐기 때문에 업무 실적 평가에서 리더의 사생활 결함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다. 직장에서만 술을 안 마시면 가정에서 주사는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유명 정치가들이 부도덕한 삶을 살아도 그런 허위는 알려지지 않았고 리더십 능력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리더십 전문가들은 성품 혹은 온전함이 리더십 성공의 기초라는 데 동의한다.
카우지스와 포스너는 미국 전역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리더의 특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세월이 지나도 언제나 수위를 차지한 특성은 바로 정직성이었다. 사람들은 리더의 정직성을 비전, 능력, 업적, 감화력보다 더 중시했다. 우리 역시 이 책을 쓰면서 비공식적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유수한 회사의 CEO들에게 직원 채용에서 중시하는 조건을 물은 것이다. 거의 만장일치로 도덕성을 첫째 자격으로 꼽았다. 베케트 주식회사의 존 베케트는 “제가 제일 중시하는 것은 도덕성입니다.⋯도덕성이 내면화돼 있다면 정직함, 근면, 건전한 직업 윤리 같은 다른 특성은 당연히 따라온다고 믿습니다”고 말했다. 사장도 직원도 똑같이 서로에게 도덕성을 원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리더십은 결국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리더를 따르기 마련이다. 리더를 믿을 수 있으려면 기초가 있어야 하는데, 그 기초가 정직함이다. 카우지스와 포스너는 리더의 온전함을 ‘신빙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리더십의 기초는 신빙성이다. 그게 전부다.” 또 그들은 “리더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궁극적 테스트는 언행일치 여부다”라고 말했다.
영적 리더들은 누구보다도 정직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 사실 대중의 마음속에는 유명한 영적 리더일수록 위선자요 사기꾼이라는 냉소적 의혹이 있다. 언론 보도에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재정 문제와 부도덕한 삶으로 대중을 속였다는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최대한 멋지게 보이려고 터무니없이 진실을 미화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목사들은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들은 진실을 과장해 사람들을 감동시켜 기독교를 믿게 하면 되지 않냐는 잘못된 정당화 논리를 들이대기도 한다. 리더가 진실을 과장하거나 전략상 얼버무릴 때 사람들은 신뢰를 잃는다. 사람들이 리더에게 기대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리더의 삶에는 온전함이 돋보여야 한다. 이는 세상 리더와 그리스도 리더 모두 공히 깨닫는 바다. 맥스 드프리는 “매사에 온전함이 다른 모든 것에 선행된다. 온전함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리더의 온전함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공인의 삶을 사는 리더는 보여지는 모습이 곧 삶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전은 온전함(integrity)을 ‘도덕적 또는 미적 원리를 고수하는 것, 정직함과 진실성, 올곧음, 통전적이고 완전한 것, 흠이 없고 더렵혀지지 않은 상태, 본래의 이상적인 상태’로 정의한다. 온전함이란 불시의 순간을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성 있는 행동을 뜻한다. 평소에는 안정돼 있고 매너도 좋지만 일이 틀어질 때마다 과격한 성질이 폭발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공중 앞에서는 정직하고 도덕적이라더 사생활에서 그런 기준을 버린다면 그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사람들이 온전한 리더에게 기대하는 행동 양식은 전혀 모호하지 않다.
로버트 리는 “적의 추적과 전투가 아무리 맹렬해도 그리스도인 군인의 모스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 자칭 그리스도인 선수들이(일부 팬들도) 분노 폭발로 명성을 망치는 사례가 많다. 그런 틈에 달라스 카우보이 팀의 수석 코치 톰 랜드리(Tom Landry)는 단연 보석 같은 존재다. 그가 해임되었을 때 스포츠 언론은 이 유명한 그리스도인 코치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 기자는 카우보이 팀이 굴욕적인 참패를 당한 후 랜드리와 인터뷰했던 일을 자세히 회고했다. 그날 경기로 수모를 겪었음데도 불구하고 랜드리는 기자들의 모든 질문에 친절하고 침착하게 답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카메라 장비를 챙기면서 기자는 인터뷰가 녹화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방송에 내보낼 자료가 날아간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기자는 복도를 걸어 나가는 랜드리를 허겁지겁 쫓아갔다. 기자의 딱한 사정을 들은 랜드리는 피곤한 중에도 그만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인터뷰에 응했다. 비그리스도인인 기자는 랜드리를 기념하는 전국 방송에 그 사연을 소개하면서 팀이 이겼든 졌든 똑같이 친절하고 품위 있게 행동한 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온전함이다. 성경은 이렇게 온전한 자들을 위한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2:7).
⋆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잠10:9)
⋆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라(잠20:7).
⋆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26:1-2).

그리스도인의 완전

1. 이 완전은 복음적 완전이며 율법적 완전과는 상대적인 것이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히7:19). 그리스도인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현재의 시대(economy) 밑에서 완전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죄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웨슬레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한 말이다. 칭의된 자는 죄들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전적 성화된 자들도 여전히 원죄가 초래하는 운명밑에 있는 인류에 속해 있으며, 이 시대의 마지막까지 이 죄의 결과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완전이라고 하는 용어는 적절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는 영혼으로부터 추방되며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부어지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상대적인 용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완전과의 관계에서 보면 지상 생애에 있어서나 내세에 있어서도 결코 도달할 수가 없으나 현재의 시대(economy)와의 관계에서 볼 때 영적 본성을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석방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의 구극점을 표하는 완전이다. 과연 이 속량받고 온전하게된 영은 죄깊은 인류의 지체인 육체안에 거하고 있으나 인간의 영은-그 육체가 구령되기 전과 동일한 “진흙이 묻은 더러운 옷”임에도 불구하고-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질 수가 있다. 그 결과 영혼은 물질적 사물의 영향밑에 있고 피조물 자체가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 것을 입을때까지는 같은 상태에 존속한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 여전히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다.

3. 기독교인의 완전은 시험적인 것(probationary)이다. 그것은 언제나 윤리의 법칙밑에 있는 상태이며 따라서 언제나 깨어 있어 지켜져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존되어져야만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아무리 경건(devotion)하며, 혹은 열성적인 종교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들중에는 위험성의 씨가 잔존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성질속에는, 그 본질적인 요소로서 욕구, 애정(affections) 그리고 정열(passions)이 있다. 그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이 현재의 존재상태에서 부적당한 것으로 되어야만 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무죄한 것이지만 끊임없이 이성, 양심 및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제어되어져야만 한다. 위험과 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들의 기능을 그릇된 목적을 위해 오용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인간성에 관한 본질적 요소를 파괴하든가 근절한다고 주장하든가 혹은 이 인간적 요소들이 잔존하는 동안에는 인간이 영적 완전을 향수할 수가 없다고 믿는 일은 이 경험의 성질을 완전히 오해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것이 행하는 일은 이들 경향성이나 애정, 정열을 조정하여 인간성질의 보다 높은 법에 복종시키는 은혜를 주는 일이다.

4.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중보적(mediated)이다. 그것은 인간노력으로 인한 승리가 아니고 예수의 피에 대한 단순한 신앙에 대응하시는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성취되는 역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주적인 중보에 의해서 보존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시편

1. 명칭
① 내용
시편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칭은 “찬양”을 의미하는 테힐림이다. 이 용어는 시편 내용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참고. 시편145편 표제).
② 형식
대부분의 시편이 갖고 있는 문학 형식 유형을 동일시하는 히브리어 명사는 “노래”(시르)와 “멜로디, 시”(미즈모르)이다. “노래”라는 말은 스물 아홉 구절이 나오며, “멜로디” 또는 “시”라는 용어는 쉰 일곱 구절에 나온다. “멜로디나 시”는 “악기를 연주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 제모르에서 생겼으며, 이러한 사실에서 “악기의 반주에 맞춰 노래부르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시편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칭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하지만 헬라어, 라틴어 및 영어 성경에서는 시편이 악기의 현이나 하아프의 현을 “켜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살모스에 따라 명칭이 붙여졌다. 즉 하아프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의 복수가 시편(호이 살모이)인 것이다. 이 마지막 어귀가 70인역에서는 시편의 명칭이 되었으며 그것은 신약에서도 인증되고 있다(눅20:42;24:44;행1:20). 이 어귀는 시편의 시 형식을 반영한다. “하아프 노래의 수집”을 의미하는 시편의 부제인 살테리온도 마찬가지이다. “시편집”(Psalter)이라는 영어 용어는 위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2. 저자
시편은 시이다. 그것만으로 시편은 여러 가지의 시 형식 내에서 시편의 저작 상황을 힘들여 고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① 표제
시편의 대부분은 산문체의 설명적 표제를 앞에 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시의 유형과 음악의 방향(아래 제3부와 제6부 및 제7부를 보라)은 물론 시편을 쓴 사람과 때때로 시를 쓰게 된 동기를 가리킨다.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윗의 시”(미즈모르 르다윋)라는 어귀이다. “~의”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전치사 라멧은 저작자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하박국 3:1절에 기록된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테필라 레하바쿡 하나비)는 분명히 선지자 자신을 저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하지만 라멧은 또한 소유를 가리키거나(예, “땅이 여호와의 것이로다”(르야웨 하에레츠)[시24:1]), 또는 봉헌이나 지정을 가리킨다(예, “성가대 지휘자에게”(르마나챠). “다윗의 시”가 때때로 단지 “다윗의 성격에 관한” 것이나 “다윗이라는 표제가 붙은 글에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을 해석된 반면에 시편에 기록된 이 어귀의 실제적인 용법은 다윗이 저자임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의 표제를 보자. “여호와의 종 다윗의(레다윋)시,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참고. 시7편).
150편의 시편 중 일흔 세 편은 다윗의 시이며, 두 편은 솔로몬의 시(시72,127편)이고, 그 중 두 편은 현인 헤만과 에단이 썼으며(시88,89편, 참고. 왕상4:31), 한 편은 모세가 썼고(시90편), 스물 세 편은 노래하는 레위 지파의 아삽(시50,73-83편)과 고라(시42,42,44-49,84,85,87편)가 썼다. 시편 88편의 표제에서 헤만과 함께 “고라의 자손들”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저작성보다도 편찬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나머지 마흔 아홉 편의 시는 작가 미상이다.
② 비평
부정적 성서비평은 일관적으로 시편의 표제를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 파이퍼 교수(R.H.Pfeiffer)는 “개개인의 시편에 관한 연대 측정에 있어서 헤만과 에단을 예외로 하고 표제에 언급된 저자의 이름은 전혀 부적절하다”(Introduction to the OT,629)고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인은 성서가 B.C.1000년 시대로 돌리는 진보된 영적 개념을 다윗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진화론적 편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별한 것은 써틀(J.W.Thirtle)의 비평(The Titles of the Psalms[1904])인데, 그는 제목을 정하고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제목이 없이 쓰여진 시를 후에 제목을 써 넣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 널리 거부되고 있다.
하등비평의 견지에서 볼 때, 구약성경의 원본에는 시편 표제의 확실성을 부인할 만한 어떠한 암시적인 증거도 없다. 모든 히브리어 사본들은 이러한 표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고대 시리아어를 제외한 초기 번역본들은 번역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 중 일부들을 잘못 전하고 있는데, 이 의미들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감소되었다. 현대 번역본들 중 일부는 물론 히브리어 성경도 영감으로 기록된 원본의 한정된 구절들에 일정하게 표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시편에 한 두 숫자로 구절 수를 증가시키고 있다.
고등비평의 견지에서 볼 때, 현대의 모든 학자들은 시편 형식의 시들이 다윗 시대 훨씬 이전의 구약 시대에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한다(참고. 출15장;신32-33장;삿5장). 특히 바벨론과 에집트에서의 고고학 조사 활동은 아브라함 수세기 전에 진보된 찬송가가 있었음을 밝혀 냈다.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가나안 문헌의 발견은 시편과 유사한 모세 시대의 시와 찬미가를 제공했는데(cf. J. Patton, Canaanite Paralles in the Book of Psalms), 이것은 다후드(M. Dahood)의 주요한 연구 결과이다(Anchor Bible, Psalms). 시편 104편 20절부터 30절 사이의 구절은 14세기 에집트의 “아톤에게 바치는 찬미가”(Hymn to Aton)와의 관계를 가리키며, “시편 29편은 분명히 바알에게 바치는 우가리트 시의 뒤를 이었으며, 야웨는 가나안 신을 대신했다”고 한다(O.R. Sellers, in H. Willoughby, The Study of the Bible Today and Tomorrow, 142;cf.H.L.Ginsberg in BA, 8[1945],53,54). 셈어 알파벳으로 된 글자의 순서가 우가리트어에서 드러났는데, 이것은 시편9,10,25,34,37,111,112,114장 및 119장에 나오는 여덟 개의 “아크로스틱”(acrostic) 시가 고대의 시임을 확증해 준다. 이 중 첫 네 시는 다윗이 쓴 것이다. 패튼(Patton)은 150편의 시 가운데 120편은 우가리트어 형식에 의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요컨대, 히브리인들은 팔레스틴으로 이주했을 때 가나안 언어를 상당히 차용하였다(창31:47의 암시). 만일 그와 같은 이론이 자료의 정확성이나 저작에 대한 성경의 주장을 의문시하지 않는다면 성경 내의 전거 자료의 혼성에 대하여 어떠한 반대도 제기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서의 역사성과 고대성은 그 정당성이 이미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학자들은 추정된 아람어 어풍 때문에 여러 가지 시를 후기에 돌리기를 점점 주저하고 있다. 다윗은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삼상16:16-18;암6:5). 다윗이 사무엘하1:19-27절, 3:33절, 34절과 또한 22장(시18편)에 쓴 시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 준다. 만일 성경 자체의 가르침을 인정한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예배시 개발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발휘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며(삼하6:5,16;대상15,16,25;대하7:6;29:30), 자신이 “이스라엘에서 시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삼하23:1,2;막12:36;행1:16;2:30,31;4:25, 다윗을 보라)으로서 영의 능력을 깨달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윌슨(R.D.Wilson)의 철저한 분석은 다윗에게 표제가 붙여진 각 시의 내용과 다윗의 저작성과의 일치를 증명했다. 유사한 방법이 다윗의 저작이 아닌 다른 시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 시들을 초기의 시 편찬에 돌리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44편(제2권의)은 마카비가 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대의 속박하에 있던 다윗 시대에서 유래된 것으로 똑같이 이해할 수 있다(참고. H.C.Leupold, Exposition of the Psalms,344,345).
신약성경은 몇몇 시의 저작성을 다윗에게 돌리고 있다. 시편16편(행2:25),32편(롬4:6),69편(행1:16;롬11:9),110편(마22:44;막12:36;눅20:42;행2:34)등이 그것이다.
위의 언급에서 신약성경은 “다윗”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윗 자신의 저작성을 의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참고. 눅20:44). 이사야의 마지막 부분의 정확성을 손상시키려는 자유적인 비평가까지도 이를 인정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님에 의해 시편110편에서 인용된 구절의 다윗 이름의 경우와 같이 만일 논쟁된 시편의 일부와 함께 이사야의 이름 사용이 의론에 포함된다면 이사야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실로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G.A.Smith, The Book of Isaiah, 11:6).
저자 불명의 표제가 붙은 시편 중 몇몇 편도 역시 신약성경에 의해 다윗의 저작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그것은 시편 2편(행4:25)과 95편(히4:7)이다. 신약성경이 후자의 구절에서 소개하는 구절은 “다윗의 글에”(레고엔 다비드)라는 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을 “ ‘다윗의 책에’가 아니라 전체 시편의 저자로 간주된 다윗이라는 사람의 말에”로 해석했다(B.F.Westcott, The Epistle to the Hebrews,97). 웨스트코트(Westcott)의 마지막 견해는 중요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윗이 시편을 썼다는 신약성서 저자들의 가르침을 인정한다면 시편이 다윗 후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오류를 범한 것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델리취(Delitzsch)가 비평한 바와 같이, “엔 다비드가 ‘시편 책에’를 의미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그러한 경우에 그는 적어도 엔 토 다비드라고 말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시편집(Psalter)은 이와 같이 인용되는 법이 없으며 70역이 실제로 토 다비드로 표제를 붙이고 있는 시에서도 절대로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Comm. on the Hebrews, Ⅰ:196). 다윗의 인격에 대한 이와 같은 절들의 언급은 시편95편에 대한 위대한 왕의 책임을 가리키지만 웨스트코트의 전술에서처럼 결코 “전체 시편집”에 대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4:7절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확증하여 준다. “일반적인 어법을 따르는 이 표현은 그것만으로 시편의 저작성을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반대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말들은 적어도 완전 권위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비록 시기는 구약에 속할지라도(대상16:8-36) 시편 96편, 105편 및 106편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의한 다윗의 말로 인정된다. 데이비슨(W.T.Davison)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경고했다. “KJV에서 7절의 번역이 ‘그 날 다윗은 여호와께 감사드리기 위해 아삽과 그 형제의 손으로 먼저 이 시를 드렸다’를 의미하므로 시편은 다윗의 직접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 이 어법은 다윗이 감사드리는 일에 대하여 특별히 주의했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이다. ‘그 날 다윗은 아삽과 그의 형제들의 손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그의 주요한 일로 삼았다.’ ” 그러나 시편 105편1-15절과 96편과 106편의 몇몇 구절(1,47,48절)로 되어 있는 시가 뒤따른다. 그러므로 분명히 역대기 기자는 그가 저술을 할 때 그의 앞에 이러한 시들을-이러한 시들을 포함하는 모음집을-갖고 있었다고 한다. 역대기 기자는 틀림없이 이러한 시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대상 16:36절은 다윗의 동료들도 저들 앞에 시 모음집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때 다윗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들은 (시편106:48절에 마지막 송영을 계속 읊으면서)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데이비슨은 이렇게 자인하고 있다. “역대상16장에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운반하는 이야기에서 기자는 그와 같은 경우에 적절한 시를 다윗의 입에 삽입시켜 읊게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의 입에 시를 삽입시키는” 사람이 성서의 저자일 때 그와 같은 시는 실제로 왕의 시였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저자 불명의 표제가 붙은 대여섯 편 이상의 시들도 역시 다윗의 시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이 시편을 썼다고 주장하는 곳도 없고 또 다윗 후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암시도 없으며, 몇몇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 위대한 왕 다윗이 썼다고 되어 있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3. 시기
시편은 대다수의 장들이 통일 왕국 시대(B.C.1043-930년)에 쓰여졌다. 시편은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서 창세기와 룻기에 의해서만 예상된다. 시편이 쓰여진 연대와 시기를 정하는데 있어서 꼭 이 시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① 표제
다윗의 시 중에서 열 네 편의 표제는 특별한 저작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들은 다음과 같은(연대 순) 성경의 역사적 이해에 차례차례로 도움이 된다.
59편은 사무엘상 19:11절에 기록된 사건으로 쓰여지게 되었으며, 다윗의 투기가 심한 동료들의 성격을 밝혀 준다(시59:12).
56편은 가드 왕 아기스에 대한 다윗의 두려움(삼상21:10)은 믿음의 원인이 되었다(시56:12).
34편은 하나님의 후속적 선을 설명한다(6-8절;참고. 삼상21:13).
142편은 다윗이 엔게디(아래 시57편)에서보다도 아둘람 동굴(삼상22:1)에서 경험한 것을 묘사(6절)하고 있다.
52편(참고. 3절)은 도엑의 상관(삼상22:9)인 사울의 사악함을 강조한다.
54편(참고. 3절)은 십 사람들을 심판한다(삼상23:13).
57편은 엔게디 동굴과 관계가 있다. 사울은 이 곳에서 자기가 판 함정에 빠졌다(6절;삼상24:1).
7편은 중상모략하는 구스인을 소개한다(3절과 8절은 삼상24:11,12와 일치한다).
18편은 사무엘하22절에서 전체적으로 반복되며 연대적으로는 사무엘하7:1절에 속한다.
60편(참고. 10절)은 위험한 에돔 원정을 조명하고 있다(삼하3:13,14;대상18:12;왕상11:15에도 언급되어 있음).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죄한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삼하12:13,14).
3편(참고. 5절)은 압살롬의 모반 때 다윗이 간직했던 믿음을 묘사하고 있다(삼상15:16).
63편은 다윗이 이 무렵에 요단강 동편으로 피신한 사실을 밝혀 준다(삼상16:2).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유다 광야에 피신한 적이 있었다(시63:11).
30편은 짧은 역병이 발생하기 전의(삼하24:13-17;대상21:11-17), 군사력에 대한 다윗의 자만심과 그 죄(5,6절;참고. 삼하24:2)와 그의 회개와 여호와의 제단과 “성전” 봉헌(대상22:1)을 언급하고 있다.
표제에 저자가 표시되어 있는 나머지 시 중에서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들이 지어 부른 스물 세 편은 각기 독립된 배경을 보여 준다. 이 레위 지파 사람들은 바벨론 유수 이후 시대에도 계속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스2:41). 그들 중 대부분은 다윗 시대 또는 솔로몬 시대에 속한다. 그러나 시편 83편은 B.C.852년 아삽 자손 야하시엘의 사역과 일치하지만(참고. 5-8절과 대하20:1,2,4), 시편 74편과 79편 및 88편과 89편의 마지막 절은 B.C.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 분명히 살아남은 아삽 자손과 고라 자손에 의해 창작되었다(74:3,8,9;79:1;89:44).
② 연대
표제가 없는 작자 미상의 시 중에는 바벨론 유수 때(137편)와, B.C.537년 유다 귀환 때(107:2,3;126:1)와, B.C.444년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때(147:13) 쓰여진 것이다. 비극을 묘사하는 기타의 시들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무질서와 다윗의 유사한 불행과 관계가 있다(참고. 시102:13,22;106:41-47). 해리스(R. Laird Harris)는 다음과 같이 훌륭한 비평적인 경고를 표명하고 있다.
작자 미상의 바벨론 유수에 관한 시(시편137편)를 제외하고는 시의 역사적 인유가 다윗 시대를 넘지 않는다는 것은 흥미롭다. 수 개의 시는 개괄적인 말로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한 시절과 성전의 황폐 기간(예, 80,85,129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은 상당히 일반적인 시적 묘사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들은 예루살렘이 한 번 더 유린 당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은 궁전에서 두 번이나 반역을 당했다. 비록 위의 시 가운데 일부가 다윗 시대의 것이나 그 직후의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다윗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cf. H. Henry, ed. , The Biblical Expositor, Ⅱ,49).
자유주의 학자들은 시 표제에 대한 저들의 회의론은 별문제로 하고 시편을 후기 연대의 것으로 단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와 같은 해석자들은 수많은 마카비(B.C.2세기) 시편에 대하여 자신 있게 언급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파이퍼 교수(R.H.Pfeiffer)는 “시편집에 대한 진정한 의문은 그 안에 2세기의 마카비 시편이 포함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가 바벨론 유수 이전의 시인가를 밝히는 것이라 했다. 분명히 단 두 시(24:7-10절과 45편)만이 바벨론 유수 이후의 유대교의 사상과 표현의 특색이 전혀 없으며 연대은 아마 B.C.7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Introduction to the OT,629,631). 추상명사에 대해서(시110:3절에서와 같이) 끝나는 히브리어 “우트”와 같은 문법적 형식은 아람어 어풍이며, 따라서 비록 정확한 설명이 “단지 후기 책에서만 좀 더 보편화되고 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언급할지라도 그것은 후기 연대에 속한다고 주장되었다. 시편2편과 110편은 “얀네우스 알렉산더와 그의 아내”(B.C.103년의 그들의 결혼시에)와 “시몬”(B.C.143-135)과 같은 하스몬가 통치자들을 찬미하기 위해 각각 “아크로스틱”(acrostics) 형식으로 쓰여졌다고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바로 마카비 시대에 속하며 두 편의 경전 시편과 감사기도서 사본과 성경의 시편에서 수집된 자료를 통합하는 다른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 사해 두루마리의 발견 전에 제기되었다. 게다가 크로스(F.M.Cross)는 “마카비 시대의 시편은 구약 시편 중 최후의 시편에서 많이 드러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페르샤 시대가 영감받은 시편이 쓰여진 가장 최근의 가능한 시기임을 입증한다. 쿰란 증거는 에스라가 에스라서와 역대상하(구약성경에서 마지막 일부)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B.C.424년(느12:22에 언급된 다르우스Ⅱ세)직후 시편을 포함한 전체 유대 경전을 편찬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복음주의적 가설을 강화하고 있다.

4. 편찬
총 시편은 150편으로 되어 있다. 시편9편과 10편은 하나의 “아크로스틱”시를 형성하며 70인역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시편9편으로 간주되고 시편42편과 43편은 똑같이 하나의 원문을 형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42:5,11과 43:5의 반복구를 참고하라), 이 시편집은 148편의 개인시를 구성한다. 10편이나 43편은 별개의 표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두 편은 특별한 예배 의식 때문에 9편과 42편에서 분할되었는지도 모른다. 시편서의 장 순서는 최초로 편찬되었던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현재의 순서는 70인역의 순서에 의해 확인된다. 70인역의 시편 번역은 B.C.3세기 말 이전에 완성되었으며, 그것은 신약성경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바울이 사도행전 13:33절에서 “시편 둘째 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참고하라). 쿰란에서 발견되었으며, 1965년과 1967년 사이에 발간된 A.D.1세기의 정경 시편의 단편들은 비록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맛소라 본문(MT)의 순서에 가깝다(예, 109,118,147편은 101-105편에 삽입된다. J.A.Sanders, the Dead Sea Psalms Scrooos,156).
시편 9편과 10편 위에 또 70인역은 두 편의 할렐(Hallel) 시편인 114편과 115편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만 “예배형식 때문”이다. 그 결과 시편115편은 70인역의 목록에서 시편 116편과 147편을 각각 별개의 두 편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총계 150편으로 끝났다. 70인역의 소위 151번째 시편을 쿰란 제2동굴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원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헬라 원본조차도 이 부가물이 “열외”라는 경고를 삽입하고 있다. 70인역의 변형의 실제적인 중요성은 내용이나 배열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열거와 관계가 있다. 라틴어역 성서(Lat. Vul.)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어 번역본에 술어를 결정해 주는 것이 70인역이기 때문에 후자의 시편에 수록된 장 수는 시편1-9편과 147-150편을 제외하고는 다른 성경보다 숫자가 하나 적다.
150편의 시편은 다섯 권으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및 107-150편이다. 더욱이 주어진 시나 시의 한 부분이 다른 권에서 재차 나기도 한다. 제1권의 14편과 40편의 일부가 각기 제2권의 53편돠 70편에 재차 나온다. 제2권의 57편과 60편의 후반부는 제5권의 108편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그러므로 각 권의 편찬은 적어도 최초의 독립적인 존재 기간을 경험한 것 같다. 더구나 각 권의 마지막 시는 전체로서의 각 권의 완결을 한정하기 위해 의도된 마지막 송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시41:13;72:18-20;89:52;106:48, 제5권의 150편 전체), 이 다섯 편의 마지막 완결 시의 발단은 각각 다섯 권의 편찬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① 다윗 시대
시편 41편은 다윗에 의해 쓰여졌다. 그리고 제1권의 서문을 구성하는 1편과 하나의 연속적인 아크로스틱 시를 형성하기 위해 9편과 결합되어 있는 10편과 표제가 없는 33편을 제외하면 제1권의 나머지 시도 역시 다윗의 저작이기 때문에 다윗은 B.C.970년 죽기 얼마 전에 최초의 수집물을 모았던 것 같다. 제1권은 주로 왕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시들로 되어 있다.
다윗은 그 밖에 106편도 썼다(대상16:34-36을 참고하라). 따라서 제4권도 역시 B.C.970년 이전에 다윗의 손을 거쳤음에 틀림없다. 제4권은 모세의 시(가장 오래된 90편)와 다윗의 다른 시들(96편, 101편, 103편, 105편) 및 그 밖의 작자 미상의 장들로 되어 있다. 시편 1-41편의 좀 더 개인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제4권의 성격은 예배 의식을 위한 것이다.
② 솔로몬 시대
제2권과 제3권은 좀 더 민족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83편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주님의 개인적인 이름인 “야웨”보다도 신의 이름인 지존자 “하나님”(엘로힘)에 대한 저들의 상대적인 편애를 주목할 수 있다. 솔로몬왕(B.C.930년에 사망)은 72:18-20절의 송영에 공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제2권의 역사적 편찬자가 되었다. “다윗의 기도”(72:20)라는 그의 마지막 언급은 그의 부왕이(표제없는 “고아” 시66편과 67편을 제외한) 시편42-72편을 구성하는 장들의 반 이상, 즉 51:70편을 지은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시편 42-49편은 고라의 노래하는 자손들이 지은 것이며, 50편은 아삽의 자손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위에서 주목한 바와 같이 시편14편이 53편에서 신의 이름 엘로힘을 제외하면 53편과 거의 정확한 복사판이라는 사실은 제2권이 다윗의 제1권과 제4권의 편찬으로부터 본래 독자적인 존재였음을 시사한다.
③ 바벨론 유수 시대
그러나 제3권은 B.C.586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저들의 언급과 더불어 시편 74편, 79편 및 89:38-52절을 포함한다. 더구나 89편의 마지막 부분에는 제3권의 편찬 시기를 정하는 마지막 송영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시편88편과 89편의 본문에 솔로몬의 현인이며 전통적인 저작자인 에스라인 헤만과 에단에 의해 쓰여진 “마스길”(maschil'm; “교훈시”)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을지라도 전자(88편)에는 헤만이라는 이름 앞에 “고라 자손의 찬송 시”라는 어귀가 부가되어 있다. 히브리어 시르는 일정하게 즐거운 찬양의 노래(참고. 시30,45편등), 또는 적어도 확신에 찬 노래(83편과 120편)를 동일한 것으로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88편을 다루는 모든 주석가들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 완전히 의견을 같이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침울한 시이다”(H.C. Leupold, Exposition of the Psalms, 626).
그러나 시편 88편을 위한 묘사로서 시르의 부적절성은 시편 89편(참고. 1,2절)에 대한 적용성에 의해 부족이 메워진다. 그러므로 88편은 아마 “시편 88편과 89편으로 되어 있는 전체의 첫 부분에 불과하며 첫 부분에 나와 있는 표제는 두 편에 속한다”(Jamieson, Fausset, and Brown, A Commentary Critical, Experimental and Practical on the OT and NT,Ⅲ,289).
더욱이 솔로몬 시대의 에단은 시를 즐겁게 지었으며(89:1-37), 여기에 바벨론 유수에 관한 시를 추가했다(38-52절). 이 시에는 고라의 표제가 부가되어 있지 않다. 고라의 자손들은 시편 89편의 마지막 절에 궁극적인 공헌이 있다. 그들은 시편 88편의 정신을 89편의 끝에 첨가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제3권 전체가 B.C. 586년 직후에 이 무명의 고라 자손들에 의해 완성되고 수집되었을 것이다.
이 제3권에는 여러 사람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 86편은 다윗이 쓴 것이고, 73-83편은 아삽이 쓴 것이며, 84편, 85편 및 87편은 고라가 쓴 것이다. 제1,2권과 제4권 사이에 삽입되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시편집을 완성시켰다. 시편이 이 중요한 때에 가졌던 거룩한 편찬 과정이 마지막 마흔 네 편 외에는 전부를 포함하게 되기 때문에 “두 번째 성전의 찬송가”(예, S.Terrien, The Psalms and their Meaning for Today,32)로서의 시편에 대해 흔히 사용된 묘사의 부적절성이 명백해진다. 그와 같은 묘사는 시편집의 목적과 연대에 편견을 갖게 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많은 시들이 공공 찬송가로 의도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 유수 이후의 성전 시대에 모든 시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면 최초의 성전 시대에도 대부분의 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④ 회복 시대
마지막으로 제5권을 예배 의식의 중요성에서 다윗의 제4권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제5권에는 다윗이 쓴 열 다섯 편의 시와 솔로몬의 시(127편)는 물론 바벨론 유수 이후에 쓰여진 수 편의 시(예, 107편;참고.2,3절)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B.C.537년의 유대 귀환이후에 생겼음에 틀림없으며 한 때는 앞의 네 권으로부터 독립된 책으로 존재했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시편 108편은 본래 57:7-11절과 60:5-12절의 결합이며 이 세 편의 시에는 모두 다윗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율법학자는 제5권을 제1-4권과 결합시키기에 이르렀으며 영감으로 쓰여진 시편146-150편은 제5권의 말미로 장식되었는데 이 시들은 시편 전체를 위한 장엄한 할렐루야였다. 이 마지막 시들은 B.C.444년(시147:13)에 쓰여졌기 때문에 에스라가 성문법과 성전 예배의 개혁을 선포했을 때(느8-10장), 그가 에스라서의 마지막 편찬을 완성했다는 것은 당연하다(스7:10 참고).
에스라 시대 이래, 필사자의 몇몇 사소한 변조가 시편의 원본으로 흘러 들어 갔다. 예를 들면, 시편9-10편의 아크로스틱 구성에 나타나 있는 위치 변경 등이다. 맛소라 본문을 70인역과 다른 고대 번역본들과 비교해 보면 원본은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실제적인 교리 요소의 변화로 말미암아 후대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를 “내 수족을 사자같이”로 해석함으로써 시편22편의 메시야적 예언을 회피하려고 했다. 이 주요한 수난 시편의 다른 구절들(예,22:7,8,18)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5. 정경성
구약성경에 수록된 150편의 시편은 모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저작이다(딤후3:16;눅24:44 참고). 이러한 결론은 사도의 전거에 근거를 둔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시편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미리 말씀하신 성경”(행1:16)이라고 언급했다. 더욱이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23:2)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있는 “표준이며 규례”이다. 시편은 구속적 계시로서의 원천의 효력을 가진 정경성을 소유하고 있다.
① 경전 인정
따라서 정경 인정은 인간에 의해 취해지는 시의적절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리고 마치 “거룩한 것으로 의도되지 않은 것이 거룩해진 것처럼” 주어진 책이 인간의 행동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근본적인 잘못”이다. 만일 책이 인간의 합리적인 행동이나 사상에 의해서만 쓰여진다면 그것은 정경이 될 수 없으며 책에 부여되는 정경성을 간직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견지에서 볼 때, “만일 어떤 저술이 과연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면 그것은 저작 순간부터 정경에 속할 것이다”(E.J.Young, An Introduction to the OT,33).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는 정경이 거룩해지는 것을 의도함이 없이 거룩해지는 모든 성문서의 원천적인 특성 안에 있다”(Green,op.cit.,26)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문서로 된 거룩한 전거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러한 정경인정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행위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시편 중 일부는 기자의 저술이 영감을 받은 생활 표준으로서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백한 의식이 없이 인간 정신의 발로로 쓰여진 것 같다(참고. 시42,130편). 이러한 경우에 “정경 인정”이 필요해졌다. 이것은 “지극히 감동을 받은 책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미 본래부터 간직되어 있는 자질-우수성-의 인정 문제”로 이해된다.
시편집 제1권과 제2권 및 제4권에 대한 그와 같은 정경 인정이 아주 신속하게 행하여졌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시편 18편은 다윗이 죽은 지 50년 이내에 정경 사무엘서에 포함되었다(삼하22장). 그리고 시편 96편과 105편 및 106편은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 시기에 공공 예배의 표준으로 다윗에 의해 “지정”되었다(대상16:7-36).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지도하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주요한 음악인의 임무 부여는 다윗의 의식적인 정경 인정의 증거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생존시에 시편 제1,2권과 제4권을 계획적으로 편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저들이 쓴 89편의 시편에 대한 그 당시의 권위 인정을 입증해 준다.
고라의 노래하는 자손들이 이전 책들이 송영을 모방했고 시편 89편을 송영으로 끝냈을 때(89:52), 그것은 제3권에 대한 유사한 정경서의 의식을 암시한다. 제5권의 다섯 시편의 송영(146-150)은 다섯 권의 모든 책에 대한 대등한 권위 뿐만 아니라 일백 오십 편의 이 시들이 정확하게 정경의 독특하면서도 완결된 한 부분으로 독립되었다는 개념도 암시한다.
시편의 정경 용인에 대한 외적 증거가 신구약 중간 시대까지는 결여되어 있다. 외경은 “여러 왕들과 선지자들에 관한 책들”(마카비하2:13)과 비교하여 “다윗의 책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시편 79:2,3절을 정경(마카비상7:17)으로 직접 인용하고 있다. 시편은 B.C.3세기에 있었던 성경의 70인역의 일부였으며, B.C.2세기의 쿰란사본은 “정경 시편집이 마카비 시대에 결정되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Cross, op.cit.,165). 다른 다섯 단편과 함께 쿰란 제11동굴에서 발견된 주요한 시편 두루마리는 제4권과 제5권의 여러 장들 중 마흔 한 편의 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무엘하23장과 예레미야10장으로부터, 그리고 벤시락의 지혜서51장을 포함한 8권의 외경 저술로부터의 삽입구를 소개하고 있다. 샌더즈(J.A.Sanders)는 “시편 두루마리에서 한 두 가지 방법으로 순서의 유동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유일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용인된 순서와 일치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부적인 원본“으로서 한정적이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시편 전승을 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라고 시사했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고 잇으며 제11동굴의 두루마리를 “시편의 많은 양상을 띤 정경 인정의 역사에 나타난 길잡이”로 간주하고 있다(The Dead Sea Psalms Scroll,13). 그는 다른 경우에 이 두루마리가 “유리된 조그마한 기도문 조각”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하며, 그의 결론은 제4권에 나타난 다윗의 간결성을 찬성하는 위의 유명한 성경 자료에도 아랑곳없이 비약하고 있다. 제11동굴의 두루마리는 구약의 정경으로보다는 일종의 예배 성구집으로서 가장 훌륭한 것 같다.
② 배열
옛 히브리어의 배열에 따라 구약성경의 전체 경전 내에서 시편은 “율법서”와 “예언서”의 다음에 오며, “기록된 것들”이라고 부르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부분을 연다(참고. 눅24:44). 요세푸스가 A.D.1세기에 설명한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전체가 22권으로 되어 있다. 모세오경은 5권으로 되어 있으며 예언서는 13권으로 되어 있다. 8권의 “이전 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서, 에스겔서 및 욥기 등의 역사서이며 5권의 “이후 예언서”는 이사야서,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서, 다니엘서 및 12권의 소선지서 등이다. 나머지 4권의 정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가와 인간의 생활지도를 위한 조언”을 포함하고 있다. 즉 시편, 잠언, 전도서 및 아가서가 바로 그러한 책들이다. 4세기 무렵에 예배의식의 중요성은 옛 히브리식 배열을 현재의 랍비식 순서로 변경시켰다. 이로 인하여 많은 예언서들이 두 번째 부문에서 세 번째 부문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정경의 옛 배열은 헬라어와 영어 성경에 나타나 있다. 시편은 현재 요세푸스의 다른 3권의 시집과 함께 이전 예언서와 이후 예언서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주님의 증언에 의한 신약성경의 뒷받침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마태복믕23:35절에서 창세기와 스가랴(및 말라기)를 증언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분하였다.

6. 내용
시편은 히브리 성경에서 예레미야 다음으로 가장 길며 가장 인상적이며 고무적인 여러 주제를 간직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시편을 더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도 시편을 가장 많이 애독하며 애송한다. 시편은 개인적이며 인간적이고 정서적이며 감정적이다. 사실 150편의 시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더없이 숭고하고 유려한 문학 작품이다.
각 시편은 히브리 시의 형식상의 특색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로 운이나 운율이 있는 조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되는 어귀가 반복되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앞 줄을 다듬는 사상의 대귀법에 있다. 시는 내용이 다양하다.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은 여러 가지 범주를 제시했는데 모두가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시편의 유형은 히브리어 표제나 주제에 의해 뚜렷해진다.
① 표제
정경 시편의 표제에는 모두 다섯 요소가 나타난다.
● 지정
● 음악
● 문학적 유형과 목적
● 저자
● 시기
시편 60편만이 다음과 같은 다섯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1)노래 지휘자에게, (2)수산 에둣에 맞춘 노래, (3a)믹담, (4)다윗, (3b)교훈하기 위하여, (5)다윗이 아람나하라임과 아람소바의 연합군과 싸울 당시, 요압이 돌아 오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군 일만 이천 명을 죽였을 때에 부른 노래.” 시편은 대부분 각 장에 이와 같은 한 두 개 이상의 요소를 포함하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지정과 음악은 본문의 “시편의 용도”라는 제목하에서 토의되지만 문학적 유형에 관한 것은 시편의 내용에 대한 머리말이다. 어떤 장의 표제에는 정확한 언외의 뜻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장 탁월한 시는 서정적이며 음악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시”(미즈모르)라 불리운다. 이 시는 현악기의 반주에 맞춰 노래로 불려진다(시편에는 “시”라는 말이 57번 나온다.) 또한 즐거운 음율을 강조할 때 “노래”(시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시편에는 이 말이 모두 29번 나온다. 저들의 찬양은 일반적(예, 시145편)이거나 또는 특수한 것(예,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시19편)이다. 실제적인 표제 “찬양”(테힐라)은 시편 145편에서만 나올 뿐이다.
“기도”(테필라)도 역시 다소 서정적인 특성을 소유한다. “기도”는 시편 17편,86편,90편,102편 및 142편의 내용을 동일시하는 표제이다. 이들 몇몇 장에는 비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예, 86:1-3). 그러나 기도의 성격은 다양하며 상당히 많은 시편이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표현된다.
“식가욘”은 아마 만가(輓歌)인 것 같다. 이것은 슬픔의 감정을 시사하며민족적 내지 개인적 비탄에 대한 궁켈(Gunkel)의 범주가 정당함을 인정한다. 79편, 83편과 같은 몇몇 시편과 44편과 74편의 일부 및 89:38-51절 등은 사무엘하1:19-27절, 3:33절,34절과 예레미야 애가 또는 “비가”(키나)라는 말이 사용된 구약의 다른 구절들의 애수적 성격과 비슷하다.
“믹담”이라는 이름은 “속죄”(?)로 번역된다. 이것은 시편16:56-60절을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감춰진 죄를 가리키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믹담 시편은 애가이다.
시편의 여러 부분(예, 34:11-16)은 잠언과 아주 비슷한 현저한 격언 또는 지혜 성격을 보여 준다. 시편37편,49편,73편,128편,133편 및 특히 솔로몬의 137편을 참고하라. 격언적 문학유형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지만 같은 방향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은 “마스길”이라는 표제이다. 이 용어는 교훈적 또는 적어도 명상적 특징을 암시한다. 이 말은 표제에서 13번 나온다. 그러나 격언 시는 진정한 시편으로 간주되기보다도 오히려 구약의 지혜 문학 항목에서 좀 더 적절하게 분류된다.
② 주제
표제는 별문제로 하고 시편은 주제 내용을 기초로 하여 매우 만족하게 분류되어 있다. 궁켈을 따르는 많은 현대 비평가들은 좀 더 객관적인 관점을 모색했으며 일정한 형식상의 특색에 따라 시편의 시들을 분류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청원 기도로 되어 있으며 뒤따라 시편 기자의 비탄이 묘사되어 있고 여호와에 대한 신뢰 표현으로 끝나는 시를 “애가”라고 부른다(G.Fohrer, Introduction to the OT, 261,262,267). 이와 같은 몇몇 형식이 분리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에서 보면 전체로서의 이러한 방법은 부적당하게 선정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편 시편에 의해 나타나는 다양성 때문에 상당히 넓은 범위가 식별력이 의문시된 주어진 형식상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시의 형식이 그 내용으로부터 거의 예언할 수 있는 기준을 뒤따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기도와 문제에 대한 묘사와 다음에 하나님게 맡겨 버리는 것 외에는 애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다음의 범주들은 내용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범주들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하여 시편에 나타나는 좀 더 의미심장하거나 좀 더 식별할 수 있는 주제 중 일부를 망라하고 있다.
● 찬양
모든 성경의 중심 인물은 하나님이시며 성서의 시들은 거룩하시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에 대한 찬양을 고취하며 그렇게 하기를 즐겨한다. “찬양”(테힐림)이라는 말은 흔히 야웨를 찬양하자는 호소로 시작된다(예, 시33:1-3). 이 찬양의 바로 뒤를 이어 호소의 이유를 말하는 시의 본문이 전개되는데 흔히 다음과 같은 말들로 소개된다. (1)“때문에”(키,예,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기 때문에”), (2)“…하신”(아사르, 이 말은 인칭 관계 대명사 주격임. 예, 16:7, “나를 훈계 하신”), (3)“부분”(예, 147:2,3, 하르파 보나 예루살렘, 의역하면 “예루살렘을 세우시며…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참고. 103:3-6). 종결은 글 앞머리의 호소로 끝나지만(예,103:20-22)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예, 위의 언급한 33편과 147편). 후자는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나이다!)로 끝난다. 히브리의 찬미가는 하나님에 관한 증언에서든 또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기도에서든 어떤 일관적이며 형식적인 성격에 의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한 묘사에 의해 구별된다.
전체적인 성서로서 뒤지지 않는 시편은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지 않으려 한다. 시편10편,14편,53편(예,10:4,14:1)은 소위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들은 “하나님이 없다”와 같은 이론적인 부인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무시로 끝나는 실제적인 부인과 관계가 있다(14:2,4, 참고. 10:4 KJV).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은 때때로 과격하게 신인동형론적으로 나타나는 등 사실적인 말로 묘사되고 있다(예, 2:4). 이 모든 것은 당신의 피조물의 안녕과 행복에 관심을 가지시는 참 인격자로서의 주님의 실제적인 존재하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73:26).
시편19편과 119편은 일반적(사실상19:1-6)이며 특별한(하나님의 역사적인 발표 19:8-14) 계시의 시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다는 사실과 인간의 대면에 한정되어 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3절 ASV).
그러나 후자는 특히 모세율법을 통하여 인간을 영원히 회복시키며 하나님 앞에 열납되게 한다(7,9,14절).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긴장이며 가장 많은 절을 갖고 있는 시편119편(176절)의 일관성 있는 주제이다. 이에 상당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엘(하나님), 또는 엘로힘(지존자 하나님)으로부터(19:1) 개인적인 이름인 “야웨”(Yahweh)로 옮겨 간다. 7-14절에서 구속자로 묘사되고 있는 “야웨”는 “주님이 임재하신다”라는 뜻이다(참고. 출3:14;J.B.Payne, Theology of the Older Testament,147,148).
모세오경의 성문 계시(신4:35,39)에서와 같이 시편 115편은 일신론을 주장한다. 이방 신들은 단순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4-7절). 후자가 시적으로 언급될 때(예, 86:8), 그것은 다만 어떤 사람들이 우상 가운데 놓여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시편에는 “여호와만 하나님이시니이다”(10절)라고 묘사되어 있다(참고. O.R. Sellers, in H.R. Willoughby, The Study of the Bible Today and Tomorrow,139). 엘로힘은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인물을 묘사하는 나머지 구절에서 이 말은 천사(시8:5 KJV: 히2:9)나 하나님의 사람 대표들에게도 쓰였자(즉 재판장들, 시82:1ASV난외, 참고. 7절;출21:6ASV난외).
시편에서 크게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원래 주님의 불변성(참고. 102:27)의 속성이 아니라 주님의 관용성(또는 적응성, 18:25,26)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속성을 다음과 같이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주님의 무한성. 이것은 시편139편의 몇몇 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 명시는 주님의 시간적 무한성(참고. 90:2;102:12)보다도 오히려 공간적 무한성을 강조한다. 주님의 편재(139:7-12).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 자체이다(11:4).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초월적 권능으로 어느 곳에든 임재하실 수 있다. 그는 역사 가운데도 계시며 시내광야에도 계셨다(68:7,8;참고.신33:2;삿5:4,5). 그는 예루살렘에도 계셨고(시20:2;27:4), 개인과도 함께 계셨다(139:18;145:18). 하나님은 지식-주님의 전지(139:1-6)-에도 무한하시며 힘-주님의 전능(139:13-18)-도 무한하시다(야웨의 영원한 왕권에 대해서는 시93-99를 참고하라).
(2)주님의 공의(의로우심). 이것은 시편5장, 특히4,8절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두 용어가 설명적이다(86:11). (A)주님의 진리(에모트). 좀 더 축어적으로, “확고 부동”을 의미하며 원칙에의 충실을 말한다. (B)주님의 공정(체데크). 이것은 주님의 진리와 수단의 표명이며, 좀 더 축어적으로 “정직한” 행동을 의미한다.
(3)주님의 선(인자하심). 이것은 시편103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찬양의 주제이지만 다른 시편에도 많이 나타나 있다. 여호와의 긍휼(17:7;86:15)과 그의 부권(27:10;89:26;참고.57:1;63:7)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헤쎄드)이 있다. KJV에서는 이 말을 “자애”로 번역하고 잇다. 그러나 헤쎄드는 본래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주님의 성실에 있다.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은 “정의”(미스파트, 33:5)를 일으키며 “화평”(살롬)을 가져다 준다. 이 화평은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평강”이다. 그래서 RSV은 헤쎄드를 “불변하는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다. 시편85:10절의 표현법을 참고하라. “언약의 사랑”(헤쎄드)과 “신실함”(아모트)이 만나고, “의로움”(체데크)과 “화평”(살롬)이 서로 입맞출 것이다.
시편의 찬양은 근본적으로 주님에 의해 “구별된”(참고. 레20:26) 하나님의 “거룩”(코데쉬)에 집중하며 한 가지 이상의 속성을 구성한다. 시편99편의 세 절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거룩”은 하나님의 승귀(1-3절)와 하나님의 윤리적 성품(4,5절)과 하나님의 구속사업(6-9절)의 완전성을 묘사한다. 바꾸어 말해서 성결은 “신성”(deity)의 완성이다.
● 자연
시편의 시는 자연히 창조주에 대한 찬양으로부터 그의 자연 창조에 대한 감사로 옮겨진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들이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 저들은 모든 자연 속에서 저들에게 계시로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네 시편은 세상이 하나님에게 기대고 있는 이와 같은 의존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부분적으로 에집트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시편104편은 창조 찬미가이다. 야웨는 세상의 근원이다. 시편50편, 특히10-13절은 그가 소유자로 계시는 세상과 떨어진 채 자급자족하시는 야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가리트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시편29편은 “영원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는 여호와”(바알이 아님, 10절)를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는 자연을 통치하는 분이다. 9-11절에서 감사를 표명한 시편65편은 하나님이 자연계를 통하여 그의 축복을 어떻게 베풀고 계시는가를 설명하고 있다(참고. 33:5;147:8,9).
자연 시편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나타나므로 땅의 현상이 시편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비평을 제기했다. 때때로 그것은 부정확한 것 같으며 때때로 그것은 마치 명백하게 신화적인 것 같이 보인다. 전자를 위해 시의 비유적 표현이 축어적인 해석의 정경에 종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강”(65:9)은 단지 비에 불과하며, “땅의 기초”는 땅의 기존 질서(104:5)이거나 또는 때때로 인간사회가 의지하는(75:3) 원칙들이다. “하늘의 하늘”(148:4)은 가장 높은 하늘(고전12:2의 셋째 하늘과 비교하라)을 가리키는 최상급 관용어일 뿐이며, 시편24:2절이 이 땅을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건설하신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돌 천장이 씌워져 있는 지구에 대한 바벨로니아인의 어떤 잘못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해면위에 위치한 땅(참고. 출20:4; 벧후3:5;참고.R.L.Harris, The Biblical Expositor,Ⅱ,43참고)을 암시한다. 사실 하나님의 영감은 고대의 산문을 통해서보다도 시(참고. 시104:6)를 통하여 더 정확하고도 훌륭하게 묘사될 수 있었다.
후자인 신화 비평에 대해 시편은 사람이나 괴물의 말로 신화의 본질인 자연 현상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신중하게 회피한다. 가나안 바알신의 적대 괴물인 로탄(Lotan)과 비교되어 온 “거대한 해수”도 시편104:26절에서는 고래와 같은 큰 짐승에 불과하며, 그것은 시편87:4절과 89:9,10절(참고. 사51:9,10)에서 “라합”이 에집트를 상징하는 것과 같이 시편74:14절에서 이집트를 상징한다(13절의 “용”[탄닌]과 욥41장의 악어 또는 거대한 해수와 비교되어 사용됨). 신화는 그 영광을 더 높은 곳에 올려 놓음으로써 자연을 유린한다. 시편은 자연을 인간과 구별해 두지만 그것을 시로 의인화한다(98:8,9).
시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시편은 자연을 하나님의 수공품으로 간주한다(참고. 147:8-10,14-18). 이 안에는 야생(9절, 에집트의 “아톤 찬미”와 같은 괄목할 만한 이방 저술에 지적되어 있는 두려움과 대조해 보라;C.S.Lewis, Reflections on the Psalms,83-85)과, 매일의 기후 현상(133:3)과, 목축업과, 농업의 일년 주기(65:13)도 포함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자연의 위력(42:7,8)과 자연의 파토스(pathos, 102:7,8)와 자연의 기쁨(126:5)에 대하여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자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일이며(148), 인간을 하나님에게 향하게 하는 일이다(19:1;8:3,4). 이러한 기능은 특히 시편의 비교 대귀법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42:1 ASV, 참고. 103:5;128:3).
또는 그 암시된 대귀법에 의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84:3절 ASV).
그것은 불타는 제단이 새가 보금자리를 지을 장소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보금자리와 같은 자기의 참된 집을 찾는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에게 자연은 궁극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자연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102:26). 자연은 인류에게 이바지하고(104:10-23) 야웨를 찬양하기 위해(33절) 존재한다.
● 역사
물질계 내에서 시편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특히 인간의 역사이다. 더구나 성경은 타락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구속을 필요로 하는 인류에게 접근한다(요14:6;행4:12). 그것이 메시야 이전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든 메시야 이후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든간에(히9:15;11:40) 하나님과의 화해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피로(9:16,17) “언약”(디아데케)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계시(18-20절)와 새 계시로 인간들에게 구원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에덴 동산(창3:15;참고.호6:7 ASV)에서 시작되었고 저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고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화해의 약속(창17:7)을 중심으로 한 옛 “언약”(뻬리트)은 일련의 역사적인 규례를 통하여 진보한 반면에, 이 구속 수단은 시내 산에서(출19:5,6;참고.6:7) 언약으로 명확하게 표명되었으며 특히 이스라엘 민족과 관계가 있었다. 시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그리고 그 후 족장들에게 주신 언약에 대한 자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시105:8-10), 야웨의 시내 산 은혜 법칙에 집중하고 있다.
라벤(J.H.Raven)은 시편14;44;46-48;53;66;68;74;76;79;80;83;85;87;108;122;124-126장 및 129장 등 20여편의 민족 “시편”을 열거하고 있다. 이 시편들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OT Introduction, 263). 다른 네 시는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과거의 언약 관계를 모색하는 상세하게 기술된 역사적인 시편을 구성한다(78편;81편;105편 및 106편). 시편 105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물질적인 축복과 인도로 시작된다(6,9절). 그러나 보다 전반적으로 시편은 에집트 탈출로 시작된다(80:8). 시편에는 열 가지 재앙(78;105:23-36), 홍해를 건넌 일(66:6;74;13;78:1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일(78:14-29)이 전개된다. 시편은 약속의 땅 가나안(105:11)과 가나안 정복(44:2,3)과 사사들(판관들,83:9)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야웨의 언약 조건과 요구가 무시되었을 때(78:10,37), 실로에서처럼(60절;참고. 삼상4장;렘7:12) 재난이 발생하곤 했다. 이스라엘 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유다 지파에게 임했으며(66:1,2;78:68),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이스라엘의 충실한 목자 다윗(78:70-72)에게 임했다.
민족 시편은 그 당시 히브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49:7)의 하나님이요, 야곱(46:7)의 하나님이요, 열 두 지파의 하나님(108:7,8)이신 야웨께서 아직도 이스라엘의 왕(44:4)이요, 성 중에 계시며(46:5), “우리 편”(124:1,2)이시라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야웨를 찬양하고 야웨께 순종해야 할(44:17) 상응적 의무를 소유하고 있다(44:8;79:13). 하나님의 명령으로(44:9-14;80:4)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자는 고통을 받게 된다(14:4).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저들의 언약된 약속을 요구할 수 있으며(44:17), 주님의 “언약”(뻬리트,74:20)을 잊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 하나님께 “그의 백성의 운명을 회복시켜달라”(세보트 아모숩)고 기도함으로써(14:7), 하나님이 “채무의 속박을 종식시켜 주시거나 또는 불운을 행운으로 전환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됨으로서 회복이 모색된다. 죄가 제거될 때 그와 같은 회복이 가능케 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미래도 시편의 역사적인 상황 속으로 들어 간다. 가장 뒤늦게 쓰여진 시편 중 일부는 바벨론 유수 이후에 하나님이 백성들을 돌보아 주신 놀라운 보살핌(126:1-3)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48:14)하고 백성들은 야웨께서 저들을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주를 찬양한다. 하나님은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고 계신다(105:8-10;106:45). 이스라엘의 소망은 소위 “시온 노래”(시편48;84;87 및 122편)에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시온”은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의 옛 성도를 말한다. 시온은 하나님과의 인간의 영적인 화해상태를 상징한다(87:5-7). 시온은 요동치 아니하며 “선한 사람과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125:4)의 영원한 우주적인 도시이다. 이 시편들은 또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개선(44:5;47:3;68:23)으로 시작된 물질적인 왕국을 기대한다. 이 왕국은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회심하게 되고(80:8,7,19) 윤리적인 승리가 물질적인 풍요와 공존하는(85:11-13) 의인의 왕국(58:11)이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영원한(시48:8,11-13)저 새 예루살렘(참고.계21:22)에서 최고 절정에 이른다. 새 예루살렘에서 온 땅이 주께 경배하게 될 것이며(66:4,68:29-32), 이 곳에서 인류에 대한 이스라엘의 중재적 구속-구원-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83:18;106:8).
● 사회
역사적 시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사회적 시편이다. 이 시편은 인간의 기원, 본성, 신분, 윤리적 목적 및 궁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 시들은 결국 “감사”(토다)나 “기원”(타하나)으로 알려진 유형의 노래가 된다. 인류는 짐승(104:14)과 더불어 이따금 자연의 한 부분으로만 간주될지 모르지만 인류는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를 구성한다. 아담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통치권을 부여받았다(8:5,6). 그러나 그는 범죄하여 주권을 잃고 낙원에서 추방당했으며 그 후 “마지막 아담”(고전15:45)인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잠재력을 성취하셨다(히2:6-8). 더구나 인간은 각자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재하며 개인적으로는 모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139:13;참고.욥31:15). 모든 인생의 진로가 영원히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었으며(시139:16), 그래서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31:15)라고 확언할 수 있었다.
시편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이원적인 평가를 강화한다. 인간의 체질은 진토와 같으며(103:14)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과도 같다(78:39).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신기하고도 오묘하게 피조된 것을 찬양한다(139:1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8:5) 피조된 영적인 존재(영혼)이다. “심령”(루하)은 몇몇 구절에서 기껏 “태도”(78:8;142:3), 또는 동물처럼 “호흡”(104:29,30;146:4)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심령”은 흔히 인간의 “영혼”(31:5)이며, 인간의 육체 안에 거하는 한 지고한 부분(77:3,6;143:4,7)이지만 영혼은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기도 한다(41:12;102:26-28).
인간의 신분은 우주적인 시간(103:13,14)이나 공간(8:3,4)과 비교할 때 미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중요하다. 시편8편을 첫절부터 읽어보라. 하나님이 이 연약한 피조물들을 통하여 명령하시는 힘이 얼마나 탁월한가!(8:1,2,9).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편에 서는 한(롬5:17), 그는 시편8편을 자기 자신의 시편으로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영혼은 안정과 평강을 소유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4:8).
저희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25:13).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31:8).
구원받은 심령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도움을 발견한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그와 같은 경험으로부터 “신앙 고백”(토라) 또는 “감사”형의 시가 생긴다. 이와 동일한 히브리어 명사는 “감사 봉헌”형의 제사를 동일시하며, 이 두 명사는 흔히 단일 행동의 예배(66:13;116:17)에서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서문은 보통 시편 기자와 감사한 마음을 고백하거나(예, 116:1,“내가 야웨를 사랑하는도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유사한 언어 표현을 촉구한다(107:1-3). 시의 본문은 이어서 빈번히 저자가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에 대한 고백(참고. 116:3,4,10,11)과, 감사의 외침(참고. 5-8,12,15,16절)과 때때로 타인들로 하여금 동등한 양식의 경험을 갖게 하겠다는 결심(예,13,14,7-19절, 참고. 107:8,9,15,16,21,22등)등을 포함하여 저자의 환경을 서술한다. 이 시편116편은 차례차례로 좀 더 명확한 교훈형 시로 변하는 것 같다. 이어서 끝맺는 말은 때때로 머리말의 사상을 다시 반복한다(107:43절과 역시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헤쎄드)을 비교하라). 형식상, ”감사“는 부분적으로 찬양의 ”찬송가“와 중복되기 쉽다. 웨스터만(C.Westerman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내용은 구별된다(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찬송가는 하나님의 인칭에 대하여 2인칭이며 설명체이다(예, “오,…하시는 당신”). 한편 감사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1인칭이며 이야기체이다(예,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나는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나머지 피조물에 대해서도 인간의 목적(104:31)은 특히 예배로(95:6), 찬양으로(43:4,특히150),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함으로써(1:2;4:7;특히119),그리고 성소에서 주님의 임재를 기뻐함으로써(15:1;27:4;43:3,특히84)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일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 “거류자”란 문자 그대로 그의 주님과 동거하는 “재류 외인”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호와를 “경회”(야르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정결하고 성결한 생활(51:6,7)에 이르는 일이다. 따라서 사회적 시편은 종교에 기초를 둔 개인적인 윤리 표준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양들(95:7)이기 때문에 순종한다. 이 표준은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심으로써(16:8) 발전하며, 그것은 우리들을 하나님 자신의 윤리적인 성격에 일치시킴으로써 형성된다(24:3,4).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겸손한 태도(131:1,2)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직한 행동(특히 시15)을 요구한다. 여호와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겸손하고 정직한 자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11:6,7). 다윗은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하고 기도했으며,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를 따라 상 주셨다고 노래했다(18:20). 다윗은 시편을 통하여 자기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왕으로서 진실하게 헌신한 사실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참고. KD, Psalms, Ⅰ,97;P.Milton, The Psalms,148,149).
사회적 시편에 의해 가해지는 특별한 속성 중에는 정직(101:7)과 진실(15:2,24:4)이다. 속임은 저주(10:7)와 같은 큰 죄악이며 시편 전체(12,52,120)는 거짓과 아첨에 관한 글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혀로 참소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그 이웃을 훼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15:3). 사람은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9:14)하고 서원한 것을 실행해야 한다(15:4). 우정은 시편 133편의 기조를 이루는 “형제애”의 주제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랑은 시편 45편의 기조를 이루는 “결혼”의 주제이다. 왕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사모한다는 것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45:11).
사회 윤리에 관하여 시편의 사회적 역설은 정치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아마 시편의 세력 있는 당당한 저작권의 반사작용인 것 같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의(시82편)이다. 뇌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한다(15:5). 왕은 공정한 판단력을 간구한다(72:1-4). 이 마지막 시는 본문의 중반에서 동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12-14절, 메시야적 시편, 특히 시41을 보라). 상당수의 시편에 묘사된 명백한 전쟁열(예,18:34-42)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저들의 이상이었다(120:6,7).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민족의 목표이다(33:12). 용사 출신의 왕 다윗은 시편 20:7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노라.”
비록 시편에서보다는 잠언에서 더 크게 강조되고 있을지라도 사회 경제는 고리대금에 대한 다윗의 반대에, 그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그리고 부채 환불에 성실하자는 그의 주장에 나타나 있다(15:5;37:21).
시편의 기본적인 사회 원칙은 상을 보장받는 공의의 원칙이다(1:4-6;37:25). 욥이 바로 인생에서 경험한 불공정 때문에 영혼에 스며드는 심연 속으로 빠져 들었을 때, 시편은 네 편의 대표적인 시편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신정설”(하나님의 정의 대 죄악의 뭊제)을 위한 일련의 설명을 통하여 진보한다. (1)시편37편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곧 천벌이 내릴 것이다(1-3절). (2)시편73편에서는, “악인이 졸지에 멸망하고”(17-19절) 의인이 죽은후에 “영광 가운데” 영접받는(24절) “그들의 최후를 아삽이 깨달을 때까지” 관심이 더욱 깊어진다(12-14절). (3)시편49편에서는 사망 후에 생명에 대한 고라 자손들의 소망으로 염려가 소멸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14,15절). (4)시편17편에서는 다윗이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 시의 마지막 절에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끝맺는다(14,15절;A.B.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459-466).
● 저주
그러나 이따금 시편은 공의를 이룰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실패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저주 시편이나 또는 참회 시편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실패가 각기 다른 사람들의 실패든 또는 시편 기자 자신의 실패든 어느 한 편에 좌우되어 있다.
저주는 악한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거나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 달라고 비는 기도로 정의될 수 있다. 그와 같은 글은 다섯 권의 시편 전체에 나타나 있으며, 비록 저주에 관한 언급이 예를 들어, 시편5;7;28;54;55;58;59;79;83;101편 139편에도 나와 있지만 가장 철저한 저주 시편은 35;69;109편 및 137편이다. 비록 4세기후의 예레미야(렘15:15;17:18;18:21-23;20:12)와 바벨론 유수 이후 시대의 느헤미야(느6:14;13:39)가 강력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가장 잘 알려진 저주 시편은 다윗에 의해 쓰여진 시편이다. 이와 유사한 기도가 신약성경에도 나온다(갈5:12;딤후4:14;계6:10).
자유주의적 신학의 경향을 지닌 필자들은 일체가 되어 성경상의 저주를 비난했다. “저주는 구약성경의 율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저주는 엘리야에게 속해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주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마5:43)고 가르침을 받은 시대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구절에 대해서 마태복음5장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구약성경이 아니라 신구약 중간 시대에 존재했던 유대교의 반성서적 전통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후자는 적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만 전자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출23:4,5;레19:17,18). 또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이 긍정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첫째, 시편과 성경의 다른 저주문은 경솔하거나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중하게 쓰여진 문헌이라는 것, 둘째, 시편과 저주문은 선한 양심으로 쓰여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노래라는 것, 셋째, 시편과 저주문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저작품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저술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은 저주라는 말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제기된다.
(ⅰ)시적인 발언. 어떤 저주문은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시68:21,23)와 같이 다만 그 당시의 문채 또는 과장 어구를 나타낸다. 또한 하나님께서 멸망시킨다는 것은 때때로(잔인무도한) 인간들에 의한 파괴행위를 말하는 시적인 어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시편137:9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한 비평으로 야웨로부터 받은 유대인들을 견책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비교하라(렘13:14).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고.” 그러나 실제로 역사적인 완성에서 돌진하여 충돌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방 적군이었다.
(ⅱ)죄에 대한 혐오. 구약성경이 본질적으로 저주하는 것은 사단의 죄악이다(참고. 나3:19). 시편50:21절에서처럼 인간이 책망을 받을 때, 그것은 죄의 형벌이 불가피하게 개별적인 죄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101:8,139:21).
(ⅲ)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김(신32:35;롬12:19). 그와 같은 저주에 대한 역사적인 실례를 사무엘상 25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복수는 인간에 의해 계획되었지만(22절),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져(32-35절) 하나님의 권능으로 수행되었다(36-39절). 시편37:8,9절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수중에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친다(참고. 104:34,35;58:11).
(ⅳ)개인의 복수를 초월한 긍정적(Positive Goals Beyond Private Vindication?)인 목적. 다윗은 그가 흔히 사울을 용서했다는 점으로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시편 109:2-5절에서 그는 원수를 갚으려는 어떠한 인간적인 열망도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가장 무서운 한 가지 저주를 가지고 복수를 계속한다. 즉 하나님을 위하고 그의 공의를 옹호하기 위한 인간의 열망은 하나의 당연한 결과로 개인적인 자기 자신의 옹호를 포함할 수 있다.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92:11,15;참고. 54:7). 저주에 대한 그와 같은 변호는 특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경우에 꼭 들어 맞는다. 다윗은 “의인이 보고 두려워한다”라고 말했다(52:6). 또한 하나님의 옹호는 그의 민족의 옹호를 포함시킬 수 있었다. 시편83:3-5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적을 대적하기 위햇 저주의 기도를 한 이유를 비교하라.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고 간계를 꾀하며…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참고.137:8).
(ⅴ)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관한 예언. 저주 시편에 포함되어 있는 동일한 저주는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 어딘가에 반복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명령법(예, 125:5, 야올리캄) “야웨께서 그들로 멸망케 하옵소서”이지, 또는 미완료 시제 “야웨께서 그들을 멸망케 하리라”(참고. ASV)인지 히브리어 동사의 형식은 애매하다. 어떤 예언들은 저주처럼 나타난다(55:2,3;145:20;참고.마13:49,50;요5:29).
저주 시편은 하나님의 심판을 옹호하기 위한 적절한 인간적 평가의 참으로 규범적인 실례로 판단된다. 데이비슨(W.T.Davison)은 이렇게 말했다.
정력이 왕성하고 신앙심이 단순했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후세 사람들의 보다 용이하고 기력없는 도의심이 훌륭하게 보존해 돈 악에 대하여 의분을 품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실로 바람직하다. “오, 야웨를 사랑하는 그대여 악을 미워하라.” 이 말은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속해 있는 권고이다.
● 참회와 탄식
표면적인 악에 대한 저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시편기자 자신의 실패에 대한 회개의 시편이다. 이 양자는 야웨께 드리는 “탄원 기도”(테히나)를 포함하며,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애가”로 분류된다. 그와 같은 애가는 시편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하며, 중병과 법률적인 고발로부터 군사적인 패배와 자연적인 재난에 이르는 상황을 포함한다. 그러나 가장 현저한 것은 죄를 자백하거나 또는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7편의 참회 시편이다(6;32;38;51;102;130;143). 시편 6편과 102편은 저자의 죄를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참회 시편의 올바른 이해에 기본이 되는 것은 인간적 불의의 실재(참고. 시1편)와 그 보편성에 대한 시편의 강조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130:3;참고. 14:3;143:2).
비록 원죄의 원리에 대한 이론이 시편과 관계가 없는 것일지라도 인류의 죄는 뿌리박힌 것 또는 유전적인 것으로 언급된다(51:5;58:3). 그러나 시편은 죄의 신본적 본성의 명백한 한정을 제시한다(51:4). 사람들은 여호와의 뜻을 모독한다(78:17-19). 시편51편의 첫 절에서 죄의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의 선택은 그 성격을 본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계 중 하나로 지적한다. “죄”(파사,KJV)는 축어적으로 “반역”(1절)이다. “죄악”(운)은 축어적으로 “부정행위”(2절)이다. “죄”(하타앝)는 축어적으로 “빗나가는 것”(2절)이며, “악”(로아)은 “격렬한 소동 또는 소요”(4절)이다. 다윗은 무수한 재앙이 자기를 둘러 싸고 죄악이 자기에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마음이 사라졌다고 고백했다(19:12;40:12). 죄에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며(51:4), 이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던져져(102:10,11)멸망한다(73:27).
하지만 야웨의 객관적인 구속에는 소망이 있다(130:3). 비록 인간의 도움은 헛되지만(60:1;108:12), 하나님은 그의 계시된 “언약”(뻬리트,111:9)을 통하여 용서하신다(32:5;63:3). 인간의 회복에 대한 확신은 야웨의 헤쎄드, 즉 그의 언약된 말씀에 대한 충실에 의거한다(6:5;25:7;위의 1항을 보라). 이러한 객관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죄가 도말되고(51:1,9) 인간이 정죄를 받지 않는(32:2) 사법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책에 대한 시편의 언급을 비교하라(40:7).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기”(파다, 또는 꼬엘)로 작정하실 때(130:8;103:4), 죄를 덮으신다(85:2). 구약성경의 구속 수단은 생명의 길(16:10,11)이 있는 메시야의 저 궁극적인 대속의 죽음을 가리키는 피의 제물(51:19)이었다.
그러나 구원은 사법상의 정화(죄를 깨끗이 씻어 내는 것)는 물론 실제적인 정화를 포함한다(51:2,7).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143:10) 먼저 주관적인 귀속을 성취해야 한다(귀속=appropriation).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말게 하실 뿐 아니라(19:13), 죄를 뉘우치게 하시며(32:4), 주님 자신을 위해 인간을 선택하시고(65:4), 저들을 돌이키시며(80:3;85:4), 저들을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139:23,24). 인간의 반응은 다음에 회개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신앙고백(32:51)과 민족적인 신앙 고백(78:95;106)의 시편을 비교하라. 진실한 회개에는 죄에 대한 슬픔(38:18)과 죄에 대한 자백(51:3;32:5)과 특히 상한 심령을 통한(51:17;참고.78:37) 죄의 포기이다.
구약성경의 개심은 긍정적으로 신앙의 체험 속으로 옮겨 가며(참고. 히11장) 이 유일한 수단을 통하여 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130:1,2;143:1). 시편 기자의 신앙은 신뢰의 태도(32:10)로 되어 있으며, 탄원자들은 이 신뢰를 통하여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다(34:8). 신앙은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와 결합된(130:5,6;37:7) 긍휼을 탄원하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6:2). 비록 알려진 신앙의 내용은 미미할지라도 진실로 계시를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9:7). 비록 제사가 따라야 하지만(51:19)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는 제사보다 우선이다(40:6;51:16).
참회 시편은 대체로 “힘을 얻고 더 나아가는”(84:7) 진실로 완전한 구원의 체험인 헌신으로 끝난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내재하시는 인도와 권능(51:11)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생활은 순종의 생활의 된다(24:4). 내적 결과중에는 “구원의 즐거움”(51:12)과 “깊은 데서 구원받는 기쁨”(130편)과, “영원히 거한다”(145:1;참고. 23:6;103:3,12)는 보장이 있다.
참회 시편이 흔히 나아가는 보다 외적인 결과는 타인들에 대한 증거의 결과(32:8-11;51:13)인데, 이것은 이러한 “새 노래”(40:2,3)에 의해 나타나는 구속의 한도이다.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제한으로부터 진보적인 해방이 도래하며 다음에는 영광이 찾아온다(16:11;73:24).
● 메시야
히브리어 형용사이며 실명사인 “메시야”(Messiah)는 축어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anointed)이란 뜻이며, 구약성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아 왕위에 즉위한(삼상10:1;16:13등) 유대인 왕들(시89:38,51)에게 사용되었다. “메시야”는 보다 한정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의 왕이요 미래의 해방자이신(시2:2) 저 유대한 다윗의 자손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시편은 또한 선지자들을 “메시야”로 부르고 있으며(105:15;참고. 왕상19:16),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역시 여호와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인(사61:1) “이사야의 종”은 제사장의 속전과 왕의 통치권(49:7;53:12)을 결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은 “종과 왕”의 직분(눅22:37;요4:25,26)과 함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장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역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메시야 시편을 보다 광범위하게 규정짓는 것 같다. 회의적인 성서 비평가들은 시편의 그와 같은 범주의 타당성을 의문시해왔다. 델리취(Delitzsch)는 시편 중 단 하나의 시(110편)만을 직접적인 메시야 시편으로 보았으며, 체인(Cheyne)은 단 하나의 메시야 시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에 메시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셨다(눅24:44). 복음서들은 그와 같은 메시야 예언에 관한 수많은 실례들을 확인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에 대한 확정적인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유추에 따라 어느 시편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신약성경 유추를 기초로 하여 메시야 시편이라 부를 수 있는 시편이 적어도 네 종류가 있다.
(1)다윗에 의해 완수되었으며 신약의 진리에 유사한 사상으로 실현된 시편. 그러나 실제적인 균등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시18:43). 이것은 에베소서 2:11,12절과 비슷하지만 다윗의 이방 정복을 가리킨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시24:7).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개선 입성을 암시하지만 아마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언급하는 것 같다. 다른 구절은 시편21편(4저러) 또는 61편(7절;참고.히7:2)일 것이다.
(2)신약성경 유추에 의해 메시야적 성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구약성경 구절과 유사한 시편.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대하여 요한복음19:36절은 출애굽기12:46절의 잘 알려진 유월절 예표론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다른 예는 시편97편(7절)이지만 히브리1:6절은 오히려 신명기32:43(70인역)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3)하나님의 마지막 신권통치로 완성된 시편. 그러나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다. 예를 들면, “그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리로다”(시9:8). 이 말씀은 사도행전17:31절에 인용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일을 하실 것이라고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최초로 시편(참고. 시50;96;98편등)에서 가르쳐졌다는 주장은 없다.
(4)보편적인 응용 원칙을 지닌 시편. 따라서 신약에서는 실례로 인용되지만 그 자체에는 특별한 메시야적 의미가 있다. 때때로 단순한 어구가 원문맥과 상관없이 다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31:5;참고. 23:46). 신약의 상황이 시편 기자에 의해 의도되었다는 주장이 없다. 역시 시편에 의해 의도되었다는 주장이 없다. 역시 시편42편(5,11절;참고. 마26:38), 44편(22절;참고. 롬8:36), 38편(11절), 88편(8절;참고. 눅23:49) 및 116편(10절;참고. 요13:18)과 69편(4,21절;참고. 요15:25;19:28-30;78:2;참고. 마13:35)은 신약성경에 “이루어지리라”(히나 플레로데)라는 설명 어귀로 인용되어 있다. 또는 그와 대등한 어귀도 있지만 그와 같은 구절들은 최초의(비메시야적) 구약 의미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주는 일없이 기껏 “더 깊이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참고. 약2:23)는 뜻이다. 시편68:18절은 에베소서4: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이라는 서문과 함께 인용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만 아마 두 구절에 나오는 “그가 위로 올라 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라는 구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시편118:22절은 “너희가 성경에‥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21:42)라는 서문과 함께 인용되어 있다.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행4:11)라는 이 말씀은 동일하지 않은 유사 구절을 의미한다. 오래 전에 테리(Terry)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성서가 여러 가지 실제적인 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서는 교리와 교정과 올바른 교훈에 그처럼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의 의미는 직접적이고 간결하며 응용과 실례는 상당히 많다”(Biblical Hermeneutics,493,495). 이 시편과 그 밖의 시편이 제외될 때 아래 도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13편의 메시야 시편이 남는다.
이제 형식 또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분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 형식상의 차이점은 1인칭이든, 2인칭이든, 또는 3인칭이든간에 메시야데 대한 문어적 암시법과 일치할 수 있다.
(ⅰ)시편2편의 종결에서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ASV)라고 한 것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언급은 3인칭이다. 형식이 아주 불명료해진다. 예를 들면, 시편89:4절(KJV)에서 다윗의 “자손”이 영원히 견고해질 것이라고 했다.
(ⅱ)그리스도는 2인칭으로 불리워졌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도다”(45:7KJV). 여기에서 방법론적인 문제는 2인칭으로 불리워지는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시편45:6절이 실제로 메시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하여 해리스(R.L.Harris)는 그의 소견을 이렇게 피력했다. “다수의 비평가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하지만 만일 시편45편이 왕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언급된 왕은 솔로몬이 아니라 메시야왕일 것이다…우리는 이 시편 저자가 다윗왕이나 7절의 여호와에 대하여 쓴 것이 아니라 메시야왕에 대하여 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The Biblical Expositor,Ⅱ,56). 만일 2인칭 요소가 다른 인용절에 삽입된다면 그것은 시편의 주요한 추력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시편110:1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다윗의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참고. 4,5절) 또는 시편2:7-9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하신 것과 같이 그것은 단지 종속적인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가 오히려 1인칭으로 분류되어 있다.
(ⅲ)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그는 글 전체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유일한 시편은 22편이다. 샘피(J.R.Sampey)는 이렇게 논평했다. “모든 문장은 그 의미를 곡해함이 없이 예수님에게 적용될 수 있다. 만일 다윗이 자기 자신의 슬픔을 노래하기 위해 자기의 하아프를 손에 쥐었다는 하나님의 영은 그가 더 크신 이의 슬픔을 묘사할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하셨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은 다윗이 그가 여호와의 보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대상29:23;대하9:8)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가 올 자기 “집”(삼하23:5;참고. 왕상12:16)을 위해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실로 다윗의 이름은 메시야와 동의어가 되었다(겔34:24;37:24,25). 다른 세 편의 1인칭 시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다윗은 다른 부분에서 자기를 위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16편(ASV)에서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4절)란 말은 틀림없이 다윗의 말이지만 그 뒤의 10절인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는 다윗의 말이 아닐 것이다(행2:31;“이중 의미”의 양자택일은 그것을 해석 원칙으로 권할 필요가 거의 없다(참고. J.B.Payne, “So-called Dual Fulfillment in Messianic Psalms”

시편 주 제 메시야절 신약의 증거 그 밖의(문맥상의 증거)
그리스도가 3인칭으로 언급됨
8 수치와 영광 4하-8 히2:5-10 만물이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 는 그의 발 아래에 있다(8).
72 통 치 6-17 고전15:27 미래로의 변천(5). 그의 통치는 영원하 다(7). 영토(8).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경배하다(9-11).
89 다윗에 대하여 3-4,28-29,34-36 행2:30 자손은 영원하다(4,29,36-37).
109 유다가 저주받음 6-19 행1:16-20 4-5절의 적들(복수)이 6절에서 한 사 람의 탁월한 배신자로 변한다. 복수는 20절에서 다시 계속된다.
132 다윗에 관하여 11-12 행2:30 자손은 영원하다(12).
그리스도가 2인칭으로 언급됨
45 영원한 보좌 6-7 히1:8-9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7) 신이시다(6).
102 영원(영존) 25-27 히1:10-12 여호와께 드리는 간구(1-22)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변화(24).
110 승천과 제사장직 1-7 마22:43-45 그는 다윗의 주이시다(1).
행2:33-35 영원한 제사장(4).
히1:13;5:6-10;6:20;7:24
그리스도가 1인칭으로 언급됨
2 아들에게 입맞춤 1-11 행4:25-28,13:33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7). 히1:5,5:5
16 썩지 아니함 10 행2:24-31 그는 다윗보다 더 많은 것- 13:35-37모든 땅-을 소유하고 계신다(8).
13:35-37 썩지 않는 것이 다윗에게 적용될 수 없다.
22 수 난 1-31 마27:35-46 그의 찔린 수족-다윗에게 적용
요19:23-25 될 수 없다(16).
히2:12 제비를 뽑아 옷을 나누어 가졌다. 다윗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18).
40 성육신 6-8 히10:5-10 1-5절과 9절 이하의 찬양이 설명적 부분에 의해 중단된다(6-8).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반드시 즐겨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항상 즐겨하셨다(12).
69 유다가 저주받음 25 행1:16-20 특유한 “황폐한 거처”가 유다에게
국한된 24절과 26절의 개괄 사이에 있다.
ETS Paers[1953], 62-72). 샘피는 그의 논평을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합리적인 비평가들은 시편의 일부를 다윗에게 적용하고 또 다른 일부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혼란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는 시편 기자와 관계가 있으며 그만을 가리키며 우리 주님에 대한 몇몇 절의 적용은 다만 편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학설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사람들이 심리적 가능성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은 넌센스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동안 인간의 심리적인 경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들 중 누구일까? 영감을 받은 예언서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이다. 성령의 의미는 경건한 해석가가 가장 기꺼이 찾아 보고 싶어하는 의미이다. 형식으로 분류된 메시야 시편은 다음과 같이 확인될 수 있다.
내용을 기초로 한 메시야 시편은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이라는 주님의 세 가지 직분에 따라 접근될 수 있다.
(ⅰ)왕 시편. 모두 7편이다(2;8;45;72;89;110;132). 시편8편은 세 절의 네 소절에서 메시야을 통한 신권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하여 말하고(2절;행4:27) 있지만, 시온의 왕에 의한 여호와의 방해받지 않는 통치(4-6절)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 복종하라는 다윗의 권면(10-12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시편8편은 예수님을 주권자이신 “마지막 아담”으로 인정한다. 시편45편에서 노래하는 고라의 자손들은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6,7절)하고 노래했다.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8절에서 우리는 상아궁에서 들려 오는 현악이 왕을 즐겁게해 드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참고. 왕상22:39;암3:15). 시편72편은 하나님의 미래의 왕국(5절)이 솔로몬 자신의 영토가 경계를 지었던 유브라데스 강의 변경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8절;참고. 왕상4:21). 시편89편과 132편은 다윗 왕조의 영존에 대한 나단의 약속을 보여 주며(삼하7:12이하),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신 확증적인 맹세의 개념을 덧붙이고 있다(89:3,35;132:11). 시편110편은 왕 시편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110편의 1절은 신약성경에서 16번 인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으로 승천하시는 것과 주님의 지복천년 통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반면에 4절은 그를 왕 뿐만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ⅱ)수난 시편. 모두 6편이다(16;22;40;69;102;109). 마지막 두 시편은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구속 사업에 대한 언급보다는 그리스도의 수난기록이다. 시편40:6-8절은 히브리10:5-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참고.시2:8) 그의 아버지와 함께(참고. 요4:34;6:38;17:4) 기꺼이 “구속의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표현으로 인용되어 있다. 시편102편은 제한된 창조물과는 달리 메시야의 영원한 특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종들을 위한 구속의 의미에 대하여(28절) 말하고 있다. 시편69편과 109편은 다윗의 적들에 대한 일반적인 저주(예, 69:4,10-12,18-24,26-28;또는 109:2-5,20,25,28,29)와 함께 두 개의 특수한 예언(69:9-19와 109:25)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행1:16) 예언이었다. 시편16편은 “음부”(스올)에 대한 그리스도의 개선을 예기하고 있다. 사도행전2:27,31절의 “음부”는 KJV의 “지옥”이 아니라 그 본래의 의미는 “무덤”이다. 그리스도의 무덤은 영원하 멸망(파멸), 곧 사핱이 아니라 다윗의 영원한 희생이었던 승리의 과정이었다(시16:9,11).
시편22편의 전반부(21절까지)는 수난 시편 중 가장 상세한 것이며, 이 시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신음하는 것(1절;참고. 마27:46)과, 조롱을 받으신 일(7절;참고. 27:39)과, 하나님으로부터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8절;참고. 27:43)과, 갈증(15절;참고. 요19:28)과, 그의 속옷과 겉옷이 제비 뽑혀 분배된 것(18절;참고. 19:24)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ⅲ)예언 시편. 시편22편의 하반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후속적 영광(24절)과, 그의 종말론적인 잔치(26절)과, 또한 그의 구속받은 형제들과 교회(εκκλησια[에클레시아])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그의 선지자적 임무를 예언하고 있다(22,23,25절;히2:12). 시편은 이와 같이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의 주요 특징드에 초점을 맞춘다. 이 초점들은 B.C.1000년 다윗 시대에까기 천천히 드러나 점점 명백해졌다. 예언서들은 후에 세목을 공급했지만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는 해방자가 인간으로서 뿐 아니라 신으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계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위해 방식을 정했으며 시편이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인격과 직분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함으로써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도 방식을 정했다. 시편의 메시야 계시는 다음과 같이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시대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렇게 결합되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참고. 요1:25;12:34).
● 예배
시편의 주요 부분이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 의식에서 사용된 데 반하여, 보다 제한된 수만이 특별히 계획된 예배의식이나 적어도 의식 예배의 주제를 가진 실질적인 내용과 관계가 있다. 구약성경은 가르치기를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표준과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예시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의식 행위에 복종하는 일과 그 반응이 포함된다. 시편은 제물 드리는 행위(50:9)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회개(51:16,17)와 믿음(4:5)과 인격(40:9)과 기도(141:2)와 찬양이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게 해 드리는 것”(69:30,31)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의의 제사를 드리라”(4:5ASV)하고 명령할 때 그의 말은 “진정한 제사를 드리라”(모팟번역본)는 의미이다. 찬양이 “더 낫다”라는 사실은 황소 역시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신다(51:19). 여호와에게는 사실상 동물이 “필요없으며”(50:12,13), 용서는 주님의 긍휼에 근거를 두지만(79:9),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정확하게 이러한 긍휼이다(히10:4,12).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윤리가 먼저 옴, 15:1,2,24:3,4)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리이다”(26:6)하고 말함으로써 개념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시편 30편은 “집의 봉헌”을 위해 특별히 쓰여졌다. 다윗은 먼저 모리아산의 타작 마당을 성전 터로 봉헌했다(대상22:1). 다른 시편들은 아침(3,5,93편)이나 저녁(4,141편) 또는 밤(134편)에 드리는 예배용으로 적합하다. 아침과 저녁에 하루 두 번씩 제사-예배-드리는 관습은 모세율법에서 생긴 것 같다(출29:38,39). 이것은 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드리는 관습이 되었다(단6:10;참고. 행3:1).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예배에 관한 세목은 A.D.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계획적으로 금지된 것 같다. 시편92편은 안식일에 사용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며 다른 몇몇 시편은 전통적으로 평일과 관계가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예배는 기도와 성가 및 개인 또는 회중의 간증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역대상

태초 인간들에 의한 해방(창3:15).
셈 족들에 의한 해방(창9:26).
B.C.2000년 아브라함의 해방(창22:18).
이삭(26:4)과 야곱(28:14)의 해방.
B.C.1800년 유다(왕) 지파 출신의 개개의 인간(창49:10).
B.C.1400년
선지자 왕(민24:17) 제사장
(신18:15) 이름-“메시야” (레16:32)
(삼상2:10)
인간 하나님 인간 하나님 인간
시22:22-31 시2 시132 시110 시22:1-21
(참고.히12:2)(참고.행13:33)(참고.눅1:32)(참고.히5:6)(참고.요19:24)

B.C.1000년 대망(26) 대망(12) 대망(13-18) 대망(3) 대망(8)
인간(22) 하나님(7) 인간(11) 하나님(1) 인간(9)
선지자(23) 왕(2,6) 왕(12) 제사장(4) 제사장(11)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하나님
시89:27,29 시110:2
(삼하7:12,14)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이 결합됨
시22:22와 시110:2

예 수 그 리 스 도

16:36절은 “아멘”과 “할렐루야”라는 회중 응답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시편에서도 이러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편146-150편의 첫 절과 마지막 절에 히브리어 “할렐루야”(여호와 당신을 찬양하나이다)가 사용되어 있다. 시편146:6-9절이나 148:1-3절의 반복절은 번갈아 부르는 이리종의 응송임을 암시하지만 특히 시편136편에서는 26개의 절이 각각 “그 인자하심(헤쎄드)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약의 의식이 성전에 집중되었던 것과 같이 시편의 예배 주제(내용)는이러한 장소에서 행하여진 의식에 대체로 한정된다. 주요한 의식종목은 제사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구속적 “언약”(뻬리트,50:5)을 위한 기초를 구성한다.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다(66:13;96:8).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 서원을 갚는 일(50:14)과,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는 것”(43:4)은 기쁨과 즐거움을 의미했다. 기타의 의식 종목에는 몸을 정화하는 의식(예, 우슬초로 깨끗하게 하는 일, 시51:7;레14:4),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는 의식(29:2;96:2, “성결의 아름다움”KJV), 분향 의식(141:2)이 포함되었다. 분향을 상징하는 기도도 역시 성전에 한정되지 않았던 주요한 예배 요소였다.
종교적 잔치(예, 42:4;84:12)와 이에 수반하는 행렬(68:25)은 수많은 시편과 관계가 있다. 일년 중 세 주요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 및 장막절의 연례 순례 절기들(출23:14-17;레23장)은 “올라 가기”(마알롵,120-134편) 시편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시편122편을 보자.
여호와의 집에 올라 가자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지파들이 그리로 올라 가는도다(히, 알루, “올라 가다”, 1,2,4절 ASV)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중 몇몇 노래는 시온으로 가는 순례자들을 강하게 암시하지만(예,121편), 다른 시들은 진행형 또는 점진형 대귀법의 문학적 형식으로 균등하게 구별될 수 있다(예, 124:1-3). KJV의 표제 “등급의 노래”와 비교하라. “올라 가기”(마알롵)라는 말에는 바벨론 유수로부터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이 포함되어 있다는 암시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시편 중 셋은 다윗의 시이며 하나는 솔로몬의 시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공표되었을지도 모르는 특별한 성전 제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유월절은 유월절 예배에 “할렐”(Hallel)이라고 부르는 시편113-118편을 시의적절하게 포함하게 되었으며, 장막절은 시편의 가능한 예배 사용에 대한 정교한 학설의 계기가 되었다.

만족

모든 사람들은 ‘만족’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오면 그냥 지나쳐 버린다. 만족은 자리에 앉아 있는 운전자가 고속 도로를 운전해 갈 때 백미러에 비치는 지나쳐 버린 외로운 여행 동반자와 같다. 자신이 찾고 있다고 늘 말해 오던 바로 그것을 질주하듯 지나쳤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비록 흐려진 시야로 물체를 보았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속도를 늦추어 조사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그리고 차는 계속 속도를 낸다.
만족을 주제로 한 책들은 수많은 서점의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꾸준히 팔리고 있다. 당연히 와야 할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말 그렇지 않다. 당신이 경쟁해서 성취하고, 향상시키고, 싸우고, 소위 ‘성공의 사라리’라고 하는 것을 올라갈 것을 걱정하며 계획할 때는 그렇지 않다.
청소년 이래로 승진이라는 성지에서 경배를 드릴 때는 그렇지 않다. 여론이라는 배의 노젖는 노예로 당신의 모든 삶을 드릴 때는 그렇지 않다. 당신에게, 만족은 삶의 방정식에서 알지 못하는 ‘X’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이글루에서 사는 것처럼 기이하거나 혹은 뒤뜰에서 무소를 키우는 것처럼 생소하다.
그것과 정면으로 맞부딪쳐라. 당신과 나는 만일 만족의 문을 열면, 두 명의 호전적인 손님이 쳐들어와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어떠한 희생을 치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 자만심이 강한 미국인에게 있어 만족감이란 탄생과 유치원생 사이, 그리고 은퇴와 휴양처 사이에 즐기는 무엇이며, ‘야망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라. 예리한 공업 기술을 가졌으나 학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젊은이는 졸업 후 바로 장사에 정착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라는 충고를 종종 듣는다. 가르치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 교사가 교장이 되라는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야망은 무려 열 개나 되는 가게를 열고 부요해져서 잊혀진 꿈의 서랍 속에 만족을 남겨 놓을 때까지 그를 편안히 쉬게 하지 않을 것이다. 보조자로 일하는 사람이나, 사역지나 회사에서, 또는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는 사람은, 개인적인 능력에 관계 없이 최고 단계의 등급에 승진될 때까지 자주 불만족과 씨름하게 될 것이다.
이에 관한 예화는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어머니나 주부, 핵실험 과학자들, 배관공, 경찰관, 엔지니어, 신학교 학생, 수위, 환경 미화원, 예술가나 웨이트리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만족의 한겨울 속에서 동상에 걸려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더 잘 해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종종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고 세익스피어는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일반적으로 서로서로를 닮게 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우리가 급속도로 불만족스럽고, 무능하고, 변화없고, 독재적인 조종자에 의해 조작되는 꼭두각시가 되어 가는 것이 나는 몹시 두렵다.
세례 요한의 소리를 들으라.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을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4).

바울의 말을 들으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후12:10;딤전6:8).

그리고 다른 사도의 권고를 들으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이제 나는 당신에게 권고한다. 이것은 이행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수적으로 우세해야 하며 투표에서 이겨야 한다. 순응하고자 하는 충동과 싸워야 한다.
모든 사도 중에 가장 뛰어난 사도도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라고 고백했다. 그것은 배우는 과정이며, 종종 꽤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북 연주자의 북 치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때까지는 즐거운 행진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완전히 확신하게 될 때, 당신의 성품에는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이다. 그러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당신을 얽어 맨 줄이 끊어질 것이다.
둘째, 당신은 진정으로 해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남기고 떠난 외로운 여행의 동반자가 바로 당신 옆자리에 앉아 내내 미소짓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적용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말씀하실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바로 염려와 돈과 불만족이다(막4:19). 이 세 가지를 다시 읽어보라.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당신의 생활에 작용하고 있다면 진리가 ‘막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오직 그럴 때만이 당신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완전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마가복음4:1-20을 읽으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일곱 가지 주장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 즉 우리는 우리의 사고나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그 영향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훑어볼 것이다. 이것을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서신서이다. 이 자리는 “남부 갈라디아”와 “북부 갈라디아” 이론에 대해 찬반을 운운할 장소는 아니다. 내용이 로마서와 유사한 점으로 보아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갈라디아서에 전제되어 있는 상황을 사도행전의 연대기에 맞추어 보면 이른 시기에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낫고 그것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이 경우 그 서신서는 A.D. 48년경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15년 이내에 쓰여졌다. 둘째로, 바울의 갈라디아서(그가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변호하는)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그 서신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곱 개의 주목할 만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각 그 죽음의 서로 다른 국면을 비추어 준다. 그것들을 한데 묶어놓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편만한 영향력에 대해 놀라울 만큼 포괄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1. 십자가와 구원(1:3-5)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들은 바울의 서론적 인사말의 일부이다. 보통 그런 서간문의 인사말은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아니면 틀에 박힌 것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인사말을 사용해서 십자가에 대해 주의깊게 균형잡힌 신학적 진술을 하는데, 이는 이 서신서에서 앞으로 그의 관심사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나타낸다.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동시에 결정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유롭게 또 자발적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자신을 드린 것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른”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의 죽음을 결심하시고 정하셔서 그것을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목적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뜻으로 결정했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와 죽음은 성경 전체를 통해 원인과 결과로서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보통 죄를 짓는 사람과 죽는 사람은 동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죄는 우리가 지은 것인데 죽는 것은 그리스도시다: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대신 그 죄의 형벌을 담당하고 죽으셨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원은 너무나 절망적인 곤경에 빠져 있어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행해지는 구조 작전이다. 특별히 그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셨으므로, 지금은 두 시대가 중복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옛 시대에서부터 구조하여 새로운 시대로 옮기돌고 하기 위해, 그래서 이미 우리가 다가올 시대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다.
넷째로, 예수님의 죽음의 현재적인 결과는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는 값없이 공로없이 주시는 그의 은총이며, “평강”은 은혜가 이룩한 것으로 하나님과 또 각자와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다가올 시대의 삶은 은혜와 평강의 삶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그것을 언급한다. 거기서 그는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자를 그렇게 속히 떠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한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죽음의 영원한 결과는 하나님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3-5절에 동일한 문장의 일부로서 나오는 은혜와 영광에 대한 언급은 놀라운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반면에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기독교 신학 전체는 이 표현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의 함축된 문장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처음으로 말한 십자가에 대한 진술이다. 비록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영원히 결정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셨다. 그의 죽음의 본질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우리를 옛 시대에서 구조해서 우리가 현재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새 시대로 우리를 옮겨놓는 것이다.

2. 십자가와 체험(2:19-21)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미 20절을 잘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본문은 매우 이상한 것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당해 죽으셨다는 것은 확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바울이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물리적 사실로서 볼 때는 그것은 분명 맞는 말이 아니었으며 영적인 사실로 볼 때는 그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전후 문맥을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15-21절은 일반적으로 칭의에 관한 것, 즉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그 구절들은 죄인들이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16절에서 세 번이나 사도 바울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 하는 것(self-justification), 곧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진술할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율법은 유죄를 판정하고 그 형벌로 죽음을 선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의 기능은 의롭다 함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율법이 나를 율법을 어긴 자로 죽이라고 요구하는데 내가 어떻게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오직 율법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 그것이 요구하는 죽음을 죽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렇게 해야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종말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고 내가 그 분과 연합했기 때문에 그가 한 일의 축복은 나의 것이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19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가 지금 내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20절)
로마서 6장에서와 같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주장이 도덕률 초월론(antinomaianism)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 당연히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율법을 마음대로 어겨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계속 죄에 거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왜 그런가?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의 죄된 옛 생명은 응분의 정죄를 받았다. 따라서 나(악하고 죄된 옛날의 나)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시다. 아니면 분명 나는 여전히 살아 있으므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옛날의 “나”(죄되고, 반항적이며, 악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믿음으로 살아있는 것은 새로운 “나”(의롭다 함을 받고 정죄함으로부터 해방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와 연합함을 통한 우리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똑같은 진리를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한다. 우리 옛 삶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으며 동시에 “내가……죽었나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에 관해서는 그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또 동시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고(19절), 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으며 나는 그와 함께 죽어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죄의 적정한 형벌을 갚았다. 그리고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 현재 살아계시며 나는 그를 통해 살아서 그의 부활의 생명에 참예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21절). 또한 그것은(로마서6장에서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된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그의 은혜를 찬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지위를 율법을 준수함으로 획득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필요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십자가와 전파(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방금(2:11-14에서) 그가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공개적으로 대결한 것을 기술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사 교제를 나누다가 물러감으로 인해 사실상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을 값없이 받아들이신 것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사용했던 논증을 되풀이해서 말한다. 이제 그는 갑자기 놀랄 만한 분노를 표명한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한다. 두 번에 걸쳐 그는 “무분별한”(anoetos)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는 nous, 곧 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너무나 용납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는 누가 그들을 “꾀더냐”고 묻는다. 그는 비록 분명 거짓된 인간 교사들을 통해서긴 하지만 거짓말쟁이의 우두머리인 사단에 의해 그들이 마법에 씌웠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복음을 곡해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은 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행했던 설교를 상기시킨다. 그는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으면서 어떻게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 그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 본문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배울 것이 매우 많다.
첫째로,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부활이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사싱이다(1:1,2:19-20). 예수님이 한 여자에게 율법 아래 나신 것도 덧붙여져야 한다(4:4).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둘째로,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눈에 보이게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prographo라는 주목할 만한 단어를 사용한다. 보통 그것은 “미리 쓰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미……기록한 것과 같으니”(엡3:3)의 경우이다. 하지만 grapho는 때때로 쓰는 것보다는 펜이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뜻할 수도 있고, pro는 시간적으로(사전에)보다는 공간적으로(우리 눈 앞에서) “앞에”라는 뜻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복음 전파를 거대한 화폭에 그린 그림 또는 고지 사항이나 광고를 공개적으로 표시한 플랭카드로 비유한다. 그의 그리 또는 플랭카드의 주제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였다. 물론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림은 아니었다. 그 그림은 너무나 시각적이고 너무나 생생하게 말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상상력에 호소해서 바로 “너희 눈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복음 전파에 있어 가장 위대한 예술 또는 은사 중 하나는 사람들의 귀를 눈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로, 복음 전파는 십자가를 시각적으로 현재의 실재로서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적어도 바울이 그 글을 쓰기 15년 전에 그리고 우리보다는 약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바울이 전파할 때 한 일은(그리고 우리가 전파할 때 해야 하는 일은)그 사건을 과거로부터 현재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말과 성례전은 이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의 장벽을 극복하고 과거의 사건을 사람들이 그에 반응해야만 하도록 현재의 실재로 만든다. 거의 분명히 바울의 독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의 전파는 그것을 그들의 눈 앞에 가져와 그들이 그것을 보도록 했고, 그들의 실존적 체험에로 가져와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해야만 하도록 만들었다.
넷째로, 복음 전파는 시각적이고, 현재적이며, 영원한 실재를 선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바울처럼) 사람들의 눈 앞에 플랭카드를 붙여야 하는 것은 단지 Christos staurotheis(부정과거)가 아니라 Christos estauromenos(완료)이기 때문이다. 이 동사의 시제는 십자가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보다는 그것의 효력, 권능, 유익은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복음 전파는 또한 개인적인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단지 무심코 바라보고 응시하돌고 하기 위해 그들 눈 앞에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그들에게 와서 그들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인 그를 믿으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렇게 했다. 바울이 놀란 이유는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난 후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공로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 눈 앞에 보여 준 것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4. 십자가와 대속(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들은 십자가의 필요성, 그 의미, 그 결과에 대한 가장 명확한 해설 중 하나이다. 바울은 너무나 강한 용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became)고 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블런트는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썼다:“여기에 나온 말은 놀랄 만한 말로 거의 충격적이다. 우리는 감히 그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예레미아스역시 그것을 “충격적인 구절”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원래 갖고 있는 무엄함”에 대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사용했으며, 블런트가 “바울은 그 말을 정확하게 그 말이 원래 갖고 있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덧붙인 것은 분명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좀 약화시려는 시도가 몇 가지 있어 왔다. 첫째로, 바울은 “저주”를 “율법의 저주”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인격화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신명기21:23에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성경을 부인하고 있다고는 진정 생각할 수 없다. 둘째로, 그가 저주가 “되신”것은 그가 그들의 심판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하신다는 표현이라는 주장이다. 블런트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한다:“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신 것은 법정의 의제(forensic fiction)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료 의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마치 타락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그의 죄를 마치 자기가 지은 죄인 것처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은 교묘하게 둘러대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말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아스가 말했듯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저주 받았다는 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저주”는 “ ‘저주 받은 자’를 환유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구절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저주 받은 자로 만드셨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5:21)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또 우리는 그 두 구절을 받아들이고, 진정 그 구절들이 나타내는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그리스도를 죄와 저주로 만드신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화목하게”(고후5:19)하기시 때문이다.
루터는 바울이 의미하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파악했으며, 그것의 의미를 특유의 직설적인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 인해 억압받고 압도당하고, 그 아래 묶여 있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거기서 결코 해방될 수 없음을 보시고는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낸 모든 인간의 죄를 그에게 지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너는 부인하는 자 베드로가 되어라. 핍박자, 신성 모독자, 잔인한 압제자 바울이 되어라. 간음하는 자 다윗이 되어라. 낙원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이 되어라.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되어라. 그리고 간단히 말해 너는 모든 인간의 죄를 범한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네가 그 죄값들을 갚고 치르는 것을 보아라.”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이 갖고 있는 논리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첫째로, 율법에 의지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 10절 초두에서 바울은 그가 2:16에서 세 번 사용한 표현, 곧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한다. NIV에서는 그것을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보다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그런 자들을 “저주 아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신27:26 참고) 어떤 사람도 율법이 요구하는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는 못했다. 그런 지속적이고도 포괄적인 순종은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분명히”(11절)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은 또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고,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으로” 사는 것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상태라고(12절) 말하고 있다. 결론은 불가피한 것이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살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 중 아무도 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 아무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반대로, 율법으로 구원을 얻기는커녕 우리는 율법에 의해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저주, 하나님의 율법이 율법을 어기는 자에게 선포하고 있는 그 저주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 이것은 잃은 바 된 인류가 처한 무서운 곤경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다. 이것은 아마 신약에 나오는 대속에 대한 가장 분명한 진술일 것이다. 율법을 어긴 데 대한 저주가 우리에게 놓여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대신 저주를 받은 바 되심으로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는 그것을 떠맡으심으로, 우리가 거기에서 피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저주를 지셨다는 증거는 그가 나무에 달리신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21:23에서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13절)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안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14절) 이것을 행하셨다.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저주의 말에서 축복의 말로 옮겨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해 주기 위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은 수십 세기 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방 나라들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된 축복을 바울은 여기서 “의로 정하실 것”(8절)과 “성령”(14절)이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이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
요컨대,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대신 그 저주를 지심으로 그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 결과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그의 거룩하신 사랑으로 그렇게까지 하셨으며 또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축복은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겸손한 경배를 고무시킨다.

5. 십자가와 핍박(5:11,6: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이 두 구절 모두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언급되어 있는데 5:11에서 그것은 “거치는 것”(skandalon)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두 구절 모두에 또한 핍박에 대한 언급이 있다. 5:11에 따르면 바울은 그가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다. 6:12에 따르면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대신 할례를 전함으로써 핍박을 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들은 할례나 십자가 중 어느 한 가지만 전할 수 있을 뿐이다.
“할례를 전하는 것”은 율법, 즉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십자가의 걸리는 것, 즉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핍박을 면하게 해 준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3:1에서처럼)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는 거리끼는 것(고전1:23)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에 심하게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핍박을 받게 한다.
물론, 오늘날의 세상에는 할례의 필요성을 전하는 유대주의자들은 없다. 하지만 교회 내외에 n선행에 의한 구원이라는 거짓된 복음(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1:7)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은 매우 많다. 선행에 의한 구원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것이며 따라서 반대를 피하게 된다. 은혜에 의한 구원을 전하는 것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며 따라서 핍박을 초래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너무나 강하게 제기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은 이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항자이며 그의 의로운 심판하에 있고(만일 그들 자신에게 맡겨두면) 잃어 버려져 있으며, 그들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효력있는 구세주라는 것을 전하든가, 아니면 인간의 잠재력과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단지 그것을 부채질하기 위해서만 이야기하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그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신시리하게 되는 길이고, 후자는 인기있게 되는 것이다. 신실하면서 동시에 인기있게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다시 들어 보아야 한다:“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6:26) 이와는 대조적으로,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전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 때문에 끈질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논문 On Preaching에서 썼던 것처럼,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십자가가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설교자)는 명심해야 한다. 항상 헤롯이나 아나니아, 가야바,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은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6. 십자가와 거룩(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리라.

이 본문을(모든 본문과 마찬가지로)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도덕적 자유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그것이 방종이 아니라 절제이며, 우리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포한다(13절). 이 양자택일의 배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의식하고 있는 내적 갈등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그 주인공들을 “육체”(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우리의 타락한 본성)와 “성령”(우리가 중생했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이라고 부른다. 16-18절에서 그는 그들간의 다툼을 묘사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행위(19-21절)에는 성적 부도덕, 종교적 배교(우상 숭배와 술수), 사회적 파괴(증오, 불화, 시기, 분냄, 이기적 야심, 당짓는 것, 그리고 제어되지 않은 육체적 욕망(술취함, 방탕)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22-23절)는 성령께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 안에 성숙하도록 하는 은혜들-사랑, 희락, 화평(특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오래 참음, 자비, 양선(서로에 대해서), 충성, 온유, 절제(우리 자신에 관해서)를 포함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능가하도록 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것이 우리가 각각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대답한다.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25절에 따르면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이번 장에서 나의 관심사는 24절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 또는 죄된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주장 때문이다. 그것은 깜짝 놀랄 만한 비유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처형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 응석을 받아주거나 그것을 다정히 껴안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충분히 만족시키거나 우쭐거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격려하거나 심지어 묵인해서도 안 된다. 그대신에 우리는 그 욕심과 함께 그것을 냉혹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층 상세하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처형장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 일어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비록 육체가 아직 살아 있긴 하지만 양손과 발이 묶이고 십자가에 못박힌 채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그것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썼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렇게 단호하게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곧 그대신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배교의 본질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편에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의 편으로 변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2:20과 5:24에 나오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매우 다른 것을 언급한다. 첫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고 말하며(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의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행동을 취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참예함으로 우리가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와졌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두 번째는 육체가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함으로 우리가 육체의 관세에서 자유로와졌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두 가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수동적)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능동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7. 십자가와 자랑(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영어에는 Kauchaomai에 꼭 들어맞는 동의어는 없다. 그것은 자랑하다 영광을 구하다, 믿다, 기뻐하다, 즐기다, 위해서 살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자랑 또는 “자만”의 대상은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우리의 주의를 모조리 쏠리게 하며,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빼앗는다. 한 마디로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돈, 명예, 권력에 사로잡혀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그들이 회심시킨 자의 숫자에 사로잡혀 있는 승리주의자들이다(13절).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평범한 로마인들에게 수치와 불명예, 심지어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 바울에게는 그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이것을 바울의 개인적 성벽이라고 제쳐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중심되는 것이었으며 항상 교회의 신앙에 중심적인 것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첫째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잃은 바 되고 죄에 가득 찬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열정적인 격론 가운데 그의 갈라디아서를 단숨에 쓴 것은 바로 이 질문에 큰 소리로 분명하게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공로를 신뢰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자랑하는 것을 금하신다. 십자가는 모든 다른 종류의 자랑을 배제해 버린다.(롬3:27)
둘째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우리의 자기 부인의 모형으로 보는 것이다. 비록 바울이 단 하나의-심지어 세 개의-십자가에 못박힘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못박히신 그 똑같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리”한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힌(거부된) “세상”은 물론 세상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 그 무신론적 물질주의, 허영심과 위선을 뜻한다(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을 거부하라고 명령받기 때문이다). “육체”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5:24). 이제 “세상”이 십자가에서 그것과 함께 못박힌다. 우리는 6:14에 나와 있는 바 두 가지 주된 십자가에 못박힘-그리스도의 못박힘과 우리의 못박힘-을 계속 밀접하게 관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꺼이, 심지어는 열망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뿐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바울의 말을 따라 우리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한 십자가에 대한 일곱 가지 위대한 주장들을 숙고해 보았고, 그것들을 그 서신서에 배열된 순서대로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는 십자가가 중심이며 편만해 있다는 것을 보다 확고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을 순서대로보다는 신학적으로 재정리하여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현재의 악한 세대에서 건지셨고(1:4)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3:13). 그리고 그가 우리를 이 이중적 속박에서 해방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의 성령으로 의롭다고 선포되고 성령의 거하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그의 아들딸로서 담대하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성화되는 수단이다. 바로 이 면에서 세 개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각각 일익을 담당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20).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다(5:24).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6:14).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우리의 육체와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포함한다.
셋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증거할 주제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눈 앞에 밝히 보여서 그들이 보고 믿도록 해야 한다(3:1).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복음을 함부로 삭제 정정하여 인간의 자만심을 꺽는 것을 빼버려서는 안된다. 그렇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할례(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그리스도의 공로)를 전한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5:11;6:12)
넷째로, 십자가는 우리가 자랑할 대상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자랑하는 것을 금하신다(6:14). 바울의 세계는 온통 십자가 주변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고 그의 삶을 비추어 주었으며, 그의 영을 뜨겁게 했다. 그는 그 안에서 “자랑”했다. 그것은 그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우리의 시각도 그와 같아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있어 십자가가 이 네 영역에서 중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든 묘사 중 가장 무시무시한 진술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빌3:18)라는 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마땅하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은 그 목적에 대항하는 것이다. 자기의(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대신), 방종(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대신), 자기 선전(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대신), 자기 찬양(십자가를 자랑하는 대신)-이것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만드는 왜곡된 것들이다.
다른 한 편 바울은 십자가의 충실한 친구였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와 너무나 밀접하게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육체적 핍박을 받았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그는 그가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받았던 상처와 흉터들, 그를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으로 낙인찍은 흔적(stigmata)에 대해 썼다.
예수님의 흔적은, 육체 속이 아니라면 영 속에, 모든 그리스도인 제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 증인들에게 그들의 진정함을 입증해 주는 표지로 남아 있다.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런던의 파커(Parker) 박사는 도마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을 세상은 지금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은 모든 전파자들에게도 역시 말하고 있다:당신 손에서 못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그리스도와 함께 죽은……그런 사람이다.

반응을 얻어내라

사람들이 예배 중에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이 겁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고 참여를 더 격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염두해 둔다.

● 여러분의 목적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에 우리의 감정을 포함시키기를 원하신다고 믿는다. 단순한 심리적인 결과를 목표로 삼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확실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한, 예배 중에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손가락으로 찬송가의 수를 계산하는 데 대한 증거 구절을 필요로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성경적인 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 목적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도와 준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들이 찬양을 개인적인 말로 표현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사용할 방법을 사전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 내용을 한 자 한 자 그대로 적었다. 지금 나는 다만 주의깊게 그 내용을 생각한다.
나는 예배에 참석할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결혼한 커플들, 과부들, 십대들, 독신 어머니들, 그밖의 사람들-을 주목할 것이다. 나는 특히 표현적인 예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생각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예배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는 말을 준비할 것이다.

● 보편적이지 않은 것의 성경적인 배경을 설명하라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예배 체험이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일 경우에, 그 체험에 참여하고 싶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앞뒤로 걸음을 옮기는 경우라 할지라도 댄스를 고려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떨어져 나가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식으로 즐거움을 누리는 데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보게 될 경우에, 그들이 참여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따라서 나는 시편에서 한 두 구절을 인용하거나, 사람들에게 춤을 추며 찬양하기를 배우도록 초청하기 전에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던 사실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춤이라는 단어가 제게 문제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약간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적절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몰몬 경 같은 곳에 두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제가 그것을 믿지 않아도 될텐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웃을 것이다. 그리고 긴장이 풀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염려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 ‘춤을 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춤을 추지 않으십니까?” 나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춤을 추도록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건전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라. 하지만 사람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친절한 방법을 제시하라.
만일 여러분이 표현적인 예배를 인도할 작정이라면, 모든 사람이 참여하도록 초청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원치 않으신다면 참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표현적인 예배를 남들보다 더 생기에 가득 찬 사람에게만 국한시키게 된다. 그 대신에, 우리는 표현적인 예배를 모든 사람이 기질에 상관없이 참여하는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의 참여를 요청할 때, 모든 사람이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사람들이 느낄지도 모를 두려움과 어색함을 인식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참여를 초청하는 동시에,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섬김의 시간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작은 원을 이룰 것입니다. 전에 그렇게 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너무 부담이 되고 지나치게 성급한 일일 수도 있음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편안함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당황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당황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서클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이런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될까요?’라고 자유롭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구경만 하시는 경우라 하더라도 서클에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표현적인 예배를 체험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보폭을 유지할 수 있다.

● 그들의 두려움을 인정하라.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다. 특히 어떤 그룹 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정상적인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긴장을 풀어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에게 대화적인 차원에서 소리를 내어 찬양하도록 격려하는 동시적인 찬양 시간에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목소리를 높여 주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여러분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만일 여러분이 비명을 지르신다면, 헌금위원이나 장로님들이 즉시 그만 두라고 요청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 말을 듣고 재미 있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 중 일부가 염려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사실을 인정한 후에는, 사람들이 긴장을 풀게 된다. 글쎄, 어던 사람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고 참아낼 필요가 없다면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거야.

● 자의식을 완화시켜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일에 참여할 때 자신을 의식한다. 그 자의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예배 인도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람들이 그 새로운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결신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 올 때 전도자들(the evangelists)이 음악을 연주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을 회개할 분위기로 인도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음악 소리는 많은 사람들이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통로를 걸어나오지 않게 만들어 준다. 음악은 그 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불필요한 장애물을 제거해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음성만이 들리지 않는 분위기에서 더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서로 인사를 나누라고 요청하거나 섬김의 시간에 삶을 공유하라고 요청할 때, 우리 교회의 연주자들에게 배경 음악을 연주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사람들을 말을 통해 인도하라.
여러분이 사람들의 반응을 요청한 후에 이어지는 순간은 어색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침묵의 시간은 사람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먼저 인사하거나 손을 들거나 기도 그룹에 가담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이 먼저 시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 주위에 두 분 또는 세 분이 앉아 계십니다. 그 분들과 인사를 나누십시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행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밝은 어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루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십니다.” 나는 회중을 향해 움직이면서, 미소 띤 얼굴로 손으로 제스츄어를 취하면서, “인사하십시오.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방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계속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통해서 인도하는 것은 사람들을 체험으로 인도하는 다리를 제공한다.

● 새로운 것으로 사람들을 압도하지 말라.
우리는 대개 “주 에수 이름 높이어”나 “거룩, 거룩, 거룩” 같은 친숙한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예배를 시작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을 예배의 새로운 체험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손길을 뻗칠 때마다, 즉시 그들에게 친숙한 것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잡고 찬송하돌고 사람들을 인도한 후에 그들에게 손을 풀고 오래 된 권위 있는 찬송가를 부르도록 요청한다. 사람들은 예배가 그들에게 이미 친숙한 요소들을 포함할 경우에, 예배의 새로운 표현들을 더 즐기게 되는 것이다.

● 다양한 감정들을 접촉하라.
우리는 다양한 감정들을 겨냥할 때 사람들이 더 풍성한 예배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돕게 된다. 우리는 음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가사가 명료하고, 멜로디가 단순한 합창을 부를 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강화된다. 고전적인 찬송가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성경 구절, 교리적 내용, 그리고 음악의 존엄성을 통한 사고의 전개가 노래를 부르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찬송가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경배를 고무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특별한 감정들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어떤 감정에 접촉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감정이 하나님의 예배에 포함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

●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루라.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께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 사실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 사실을 반영하는 말을 한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성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대포를 겨누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그들이 예배에 참석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이 예배에 참석한 사실이 지적해 주는 믿음 위에 세운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사람들을 표현적인 예배로 인도하기를 원할 때 특히 중요하다.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그들을 더 주저하게 만들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예배의 새로운 측면으로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동시적이면서도 조용한 목소리로 찬양하는 시간에 참여하도록 요청할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전에 이런 일을 하신 적이 전혀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게서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시지는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놀랍고도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또한 그들이 어떤 새로운 것을 시도한 후에 그들을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일부에게 어리것은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인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노래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한 다음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친절하게 따라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들게 그것이 어색한 일인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사건이다.

1. 구원 사건의 역사성
기독교의 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구속사의 중심이라는 것은 일치된 확신이었다. 경건한 유대인은 구속사 가운데 중심적인 사건이 장차 있을 것으로 기다렸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 속에서, 특히 일정한 때와 장소에서 발생한 예수의 죽음 가운데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다. ‘교리’의 경우처럼 후대에 추인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바로 이 ‘사건’에서부터 기독교는 출발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며, 불신과 믿음이 구분된다. 그러나 이 믿음은 또한 그 자체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권능과 권세자 위에 높이신(빌2:9이하) 주, 곧 부활하신 자에 대한 경험만이 심히 환멸감을 느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죽음은 많은 죽음 중에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며, 논란은 곧 끝날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참된 숙고의 출발점은 바로 부활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 관련성을 기독교 사상의 전제로 보아야만 한다.

2. 해석과 역사로서의 자료들
이것은 이미 예수의 죽음을 알려주는 자료에 관련시켜 볼 때 사실이 되었다. 공관복음서(막14-15장;마26-27장;눅22-23장)와 요한복음(18-19장)의 상세한 설명은 부활신앙이 그 전승의 형성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가들처럼 과거의 상황을 기술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을 몸소 체험한 전도자들처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들의 보도를 근거로 하여 이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시키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입증할 수 있는 역사의 영역 안에 있는 하나의 사건으므로, 역사가들의 고찰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3. 예수의 처형에 관한 사실
에수는 당시의 교수대, 곧 십자가상에서 한 죄인으로서 처형을 당했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자료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주로 유대 귀족 계급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유대인들의 이 잘못을 강력하게 역설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바울서신(살전2:14-15),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2:23,3:14,4:10), 바나바서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공관복음서, 특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중세기 유대인의 박해 시대로 내려오면서도 계속되었지만, 재판상의 책임은 로마의 점령군에게 있었다. 재판, 사형선고와 집행은 로마의 적법절차에 따르고 있다.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인 선동자, 곧 셀롯 당원(Zealot, 열심당원)으로 선고받았다. 물론 총독 본디오 빌라도(A.D.26-36년) 앞에서의 탄핵은 예수의 ‘기사와 이적’으로 인해 자신들이 도전받고 있다고 생각한 유대의 최고 권력자들에 의해 행해졌다(막11:15 이하와 병행귀절;요11:47이하). 예수가 로마인의 법정에 넘겨지기 전에 법적인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혐의를 찾기 위해 그를 ‘위험한 인물’, 또 ‘사기꾼’으로 심문한 것은 바로 이 무리들이었다(수난설화를 위해 좋은 자료들을 특별히 임의로 채용한 누가복음,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 사실이 잘 지적됨).
눅23:2에 의하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세금회피를 충동질했다는 이유로,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가 고소했다(비교:마12:13-17과 병행귀절). 이 혐의만으로 로마 법정에의 고소가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인들이 셀롯 운동의 특성으로 간주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꼭대기에 붙여진 이름, 곧 공식적인 설명(막15:26과 병행귀절;요19:19이하)은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이 이를 전후로 하여 처형된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정치범, 열심당원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비교:눅13:1). 예수는 셀롯 당원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전생애를 통해 선동적인 정치 운동에 관여하도록 강요당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셀롯 당원들은 그 이름들에서 추론될 수 있는 바,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도 있었다. ‘가나안 사람’ 시몬은 ‘셀롯’ 시몬을 말한다(비교:막3:18;눅6:15). 가룟(Iscariot)유다란 이름은, 셀롯을 뜻하는 시카리우스(sicarius)에서 유래하고 있다(비교:행21:38). ‘바 요나(Bar-Jona)' 시몬 베드로는 ‘폭력 혁명주의자’ 시몬 베드로를 의미하는 것 같으며, 세배대의 두 아들 역시 셀롯 당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셀롯당의 계획에 대한 예수의 거절은 아주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다(막12:17과 병행귀절, 마11:12;요10:8이하). 셀롯당의 메시야적인 이상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거듭 거절했던 바로 그분이 셀롯당원으로 판결받아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다(마4:9-10,26:53;막8:33).
사형집행 날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확실히 입증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유월절 어느 금요일에 행해졌다는 사실뿐이다. 요한복음(19:14)에 의하면, 그 날은 바로 유월절 주간의 가장 중요한 축일(유월제)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전날, 곧 니산월(Nisna月)제14일이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더 낫다. 예수의 죽음의 연대는 A.D.33년 경인데, 그것은 그해 유월절 첫날이 안식일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다른 견해들에 관해서는 →신약의 연대기(Chronology of the New Testament).

4. 예수 자신에 대한 죽음의 의미
예수는 의도적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실패로 끝나는 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기하고 있던 죽음은 그의 사명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례시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그의 사명이 사52-53장의 ‘야웨의 종(Ebed Jahwe)'의 직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게 된 순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고난의 종처럼(→주의 종[Servant of the Lord]),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속량해야만 했다. 이로부터 그는 자기 앞에 놓여진 자신의 길을 바라보게 되었다. 친히 인자(人子, Son of Man)라고 부르며, 가장 존귀한 유대인의 칭호들 가운데 하나를 자신에게 적용시킨 그는 ‘고난을 다해야만’ 했다. 따라서 예수가 그의 세례를 말할 때, 고난에 대한 생각은 항상 배후에 잠재해 있었다(막10:38;눅12:50). 비록 그가 제자들에게조차 이해를 얻지 못했지만(막8:33;눅24:31),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막8:31과 병행귀절,9:31,10:33-34,45).
외견상 이 결정을 분명하게 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막10:32)이었다. 그것은 결단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에게 분명해진 죽음이란 전혀 고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예수는 실제로 그 죽음을 힘들여 싸워야만 하는(막14:32 이하와 병행귀절, 15:34;마27:46;히5:7) ‘마지막 원수’로 보았다(고전15:26). 그러나 죽음은 예수가 순종하기로 선택한 자신의 사명의 결과로서 나타났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해 인도되었으며, 이로써 그는 자신이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행위가 인도된 정점이었다. 이것은 요한이 기술한 대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5. 유대교측의 해석
예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의 최후는 사실상 모든 희망의 실제적 붕괴였다. 그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인식할수록 더욱 더 예수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유대인들인 그들에게 하나의 ‘치욕(scandalon)’으로 보였다(참조:고전1:18). 왜냐하면 고난받는 메시야의 개념은 유대 사상에서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흔히 멸시와 죽임을 다하는 예언자의 운명을 유추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마13:57,23:37;살전2:15). 이러한 해석의 흔적은 눅24:19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특히 이교적인 유대 기독교에도, 이런 흔적이 있는데, 이교적인 유대 기독교에서 예수는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 간주되었다. 또한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를, 모든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에 의해 굴욕의 길로 인도되고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고난의 의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보았다(참조:마카베오사서6:29).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이 초대교회에 있었다. 고대 전승에서 예수는 그의 고난의 길로 인해 ‘의로운 자’(행3:14,7:52,22:14;벧전3:18)로 불리었으며, 의로운 자의 고난당함을 묘사하고 있는 구약성서 시편과, 수난설화가 보여주는 강한 연관성은 이와 같은 것을 설명한다. 결국 책임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제3의 가능성을 두려워한 것같이 보인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근거로 하여, 그가 국가적인 순교자, 곧 자기 피로 증거삼은 셀롯당원으로서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숭상될 수 있었던 점이다(마27: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막14:50;마26:56;막14:66이하와 병행귀절), 제자 중 몇 사람이 갈릴리로 내려간 사실(막14:28,16:7)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예수의 죽음의 사건에 직면하여 무력해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분쟁사이에서의 예수의 위치가 그의 추종자들 집단에서(하물며 그의 반대자들과 로마인들 가운데서야) 정치적인 반란자들의 거짓 메시야적인 개념을 제거한다는 것이 그의 생애 동안에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거듭 확증시켜 준다.

6.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해석
① 구속사의 중심
오직 부활한 주의 현현만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해석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현현과 더불어 이 해석이 발전되어갔다는 점, 즉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실제의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며 높이 올리우시고 교회 공동체를 인도하시는 주로서, 예수의 죽음을 돌이켜 볼 때 새롭게 해석되었다. 하나님은 공공연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의 편을 취하셨던 것이다(비교:행2:24,3:15,4:10,5:31). 결국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일어난 한 행위로 평가되어야 했다. 물론 부활의 기쁨은 초대교회의 사상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같은 진술은 다소 일방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인들의 사상 가운데 부활신앙은 주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이 지니는 구원의 의미에 대한 모든 신학적인 사상에 대해 처음으로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십자가의 도’(고전1:18)는 기독교 설교를 총괄하는 전문적 용어이다. 그와 같은 경향은 일찍이 초기 공관복음서 전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난설화는 그 전승의 가장 오래된 공식적 부분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모든 구성은 이 수난설화를 향하고 있다. 아주 초기부터 십자가는 목표요 정점이었다(비교:막3:6;마1:21). 그리고 요한이 항상 말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가 향하고 있는 ‘때’(요2:4,7:6,8:20,12:23,13:1,17:1)란 십자가에 못박힐 때를 의미한다.
② 구약의 성취
눅24:25,44절 이하에 따르면, 부활하신 자는 그의 제자들의 눈을 열어놓으사, 구약에 지시되어 있는 그의 수난에 대한 의미를 볼 수 있게 했다. 어쨌든 옛 언약에 관한 성서가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예언적인 역사로서 이해되었던 구약 역사(비교:롬15:4;고전10:6,11)는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예전의 약속들이 종말론적인 성취를 가져야 한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비교:마26:31;눅22:37,24:7,26-27,44-45;요3:14). 확실히 이와 같은 ‘초기 공동체의 신학’은 근거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예수는 항상 구약의 입장에서 자기의 죽음을 설명했으며, 부활 후의 공동체는 이 점에서 예수의 사상과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회고’의 말로써 이 관련성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의 이 ‘회고’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깨닫게 했으며(요12:16), 이것은 그들 가운데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요14:26,15:25-26).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음에 대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취한 해석의 이중적인 근거를 고려해야 한다. 즉 구약, 그리고 그 자신을 구약에 연관시킨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실상 전형적인 형태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최초의 그리스도론적 설명 중의 하나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고난받은 종(Suffering Servant)'이라는 말로 베드로 집단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것이다(행3:13,26,4:25,30,8:26이하). 우리가 확실히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만일 초대교회가 사5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이 가져오는 구원 행위의 성취를 예수의 죽음 가운데서 보았다면, 그 공동체는 동시에 예수 자신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③ 속죄
공동체는 또한 이 죽음의 결정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예수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직분을 수행하고자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인자, 그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량’하셨다(막10:45). 오직 그는 전적으로 구속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예수는 죄를 속량하셨다. 마치 고전15:3에 인용된 공동체의 초기 케리그마(kerygma)에서 나타난 대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를 원시 기독교의 신학적 사고에 도입시킨 것은 바울이 처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행10;43). 그러나 바로 이 간결한 신조에서 원시 기독교 사상의 다른 근거는 거듭 맹백하게 되었다. 즉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신앙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실상 예수의 죽음을 구약과 연관시킴으로써, 해석상의 가장 중요한 면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53자의 ‘…을 위하여’라는 말을 아주 강하게 회상시키는 고전15:3의 ‘…을 위하여’라는 말은, 모든 원시 기독교 설교에 널리 사용되었던 핵심적 문귀로서,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고난으로 보는 해석의 열쇠가 된다. 그것은 일찍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토대로 한 원시 그리스도인의 성만찬 예식에서 나타난다(고전11:24;눅22:19, ‘너희를 위하여’, 막14:24;마26:28, ‘많은 사람을 위하여’). 그후에 그것은 특히 바울서신(롬4:25,5:8,8:34;고후5:14-15,21;갈1:4,2:20,3:13;엡5:2;살전5:10 등), 목회서신(딤전2:6;딛2:14), 공동서신(벧전2:21,3:18), 그리고 요한의 증언에(요10:11,11:50이하, 15:13;요일2:2,3:16,4:10)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구약과 유대의 수많은 용어, 개념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거듭 새롭게 밝히기 위해 제시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에 관해 보다 엄격한 의미의 사법적 용어로 말하면, 그 죽음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피조물의 상태를 원상태로 회복시킨 법률적 행위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여기에 ‘몸값’으로 지불된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과(롬3:24-25;고전6:20,7:23;딤전2:6;벧전1:18;계1:5, 참조:막10:45), 그리고 바울의 의인의 교리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복합적인 개념(롬3:24-25,4:24-25,5:9-10;고후5:21)이 속해 있는데, 이는 십자가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의 희생 개념 속에 속죄의 법률적 행위를 기술하는 제의적인 용어는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은 속죄 제물로서(롬3:25), 곧 유월절 어린양(고전5:7), 또는 일반적으로 죄를 위한 ‘제물’(엡5:2)로서 나타나 있다. 특히 히브리서는 완전한 제물 사상을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 전개하고 있다. 예수는 여기서 희생자인 동시에 제물이다. 그의 희생은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해 유효한 것이 되었다(히7:27,9:12,25,10:10이하).
죄를 속량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에 대한 사상은, 사53:7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는 어린양의 모습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참조:행8:32;벧전1:19). 그것은 특히 요한의 문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유월절 어린양들이 성전에서 희생되는 그 순간에 죽으셨다(요19:14). 그는 친히 세상의 죄를 짊어진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다(요1:29,19:36). 또한 계시록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는 어린양으로 거듭거듭 언급되어 있다.
죄를 용서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피를 쏟으신 것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처럼, 구약적 희생관에서 비롯되었다(행20:29;롬3:25,5:9;엡1:7,2:13;골1:20;벧전1:2,19;요일1:7;계1:5). 이것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서 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생생한 표현인데, 특히 여러 형태로 나타난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런 연합에서 이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용법은 전승에 따라 예수께서 친히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들어 그의 죽음을 해석하는 자리에서, 바로 이와 똑같이 표현하신 사실에 근거를 둘 수 있다(막14:24;출24:8에 근거한 ‘계약의 피’). 그러므로 바울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성만찬이 너무 지나치고 광적인 의식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입각한 예수 자신의 이해로 관철시킨 것은 옳은 처사였으며(고전10:16,11:23이하), 이것은 마치 자신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그리스도의 세례에 참여했던 것으로(롬6:4이하) 이해한 것이다.
④ 우주적인 사건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높이 되신 주께 기도를 드린 부활 후의 공동체에서 더욱 크게 확대되었다(고전16:22;계22:20, 참조:고후12:8). 이 죽음은 역시 우주적인 사건의 결정적인 행위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들을 굴복시킨 승리를 뜻한다. 예수는 일찍이 그들과의 투쟁을 시작하셨다(비교:막1:12과 병행귀절, 1:34 등). 그리고 비록 영지주의의 헬라적인 사변에 따르면, 권세자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능하신 행위들’(귀신을 내쫓음, 병 고침,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심)은 예상된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승리의 표적들이라고 원시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권세자들을 굴복시킨 그 승리에 관한 진술은 사실상 고백서 가운데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빌2:10;벧전3:22;막16:19). 특히 그 진술은 시110편의 수많은 인용을 통해 흔적을 남겨놓고 잇다(고전15:25;히10:13;행2:34;막12:36;마22:44;눅20:42). 빌2:6이하에서 인용된 시편과 같은 고백에서 예수의 승리는, 그의 죽음과의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놓여져 있다. ‘이러므로(그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예수의 죽음은 또한 전우주 진행과정의 전환점이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수난설화는 온 세상이 예속의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끝마침으로써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막15:33과 병행귀절;마27:51). 그리고 골1:20에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우주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원하는 효험으로부터 아무것도 제외되어 있지 않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구속사가 ‘한 사람’에서 ‘많은 사람’으로, 제한된 적용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 옮겨지도록 그 길을 열어놓은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공로라고 믿었다(막10:45,14:24과 병행귀절;마20:28). 바울은 십자가의 보편성을 위해 가장 면밀하게 합리적인 논거를 제공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타락했다는 죄의 보편성의 견지에서 바울에게 계시되었다(롬3:6,19;고전6:2,11:32).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롬8:32;고후5:14). 그전에는 타당했던 제한들이 이제는 모두 철폐되어야 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구속에 참여한다(롬11:32;갈3:27, 참조:눅24:47).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편에 속해 있는 율법의 끝이다(롬7:5-6,10:4). 롬5:12 이하에 나타난 훌륭한 설명은 특히 이 점에서 완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져 있는 것처럼, 둘째 아담, 곧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 포함되어 있다(롬5:15).
⑤ 사망을 이기심
정복된 권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특별히 사망이라 할 수 있다(참조:롬8:38).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셨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중심적인 증언이다. 예수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의인화된 마귀의 사망권세(참조:행2:24;고전15:45-46;계6:8), 그러나 이미 그 힘이 꺽인(딤후1:10) ‘마지막 원수’(고전15:26;계20:14)에 대한 승리의 싸움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신약성서는 죽음을 육체의 굴레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친구’라는 식의 낙천적인 견해를 알지 못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사망을 죄의 무서운 결과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낙천적 견해는 있을 수 없다(롬1:32,6:7이하, 16;약1:15;요8:24). 초기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의하면, 여기에 예수이 대속적 죽음과 사망을 넘어선 그의 승리가 관련되어 있다. 만일 사망이 죄의 결과라면, 죄에 대한 속죄는 철저하게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야 한다. 예수께서 죄의 저주의 영역에로 들어섬(고후5:21;갈3:13-14;롬8:3)은 그의 승리의 전제였다. 단번에 죄는 극복되고 사망은 그 세력의 근거를 잃었다(롬6:7이하). 인자는 이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1:18).
모든 신자들은 사망을 이기신 예수의 승리로 이끌려 간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의 승리로 인해 사망은 그 쏘는 것을 상실했다(고전15:55).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지상의 신자들에게 이미 확실시되어 있는 ‘영생’(요3:36,5:24,6:47)이라는 말을 강력하게 할 수 있었다. 바울은 중심적인 구원의 사건 속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을 기술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모습을 세례의 표현으로 즐겨 사용했다(롬6:3;갈6:14;골2:20;딤후2:11). 그리고 이 문맥에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사상은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망에 대한 해석을 옛 언약과 그것의 성취라는 구원의 사건 속에 고착시키기 위해 이 사상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5:45이하).
⑥ 고난 가운데 제자들을 부르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 안에서 예수를 ‘따라가도록’ 끊임없이 부름받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제자로 부름받는 것은 고난 속에서의 제자직을 의미한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박해와 시편의 운명을 같이 하도록 준비시켰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눅14:26-27)라는 잘 알려진 말의 뜻은, 제자도 선생처럼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막10:38-39;눅14:26-27;요15:20). 때때로 초대 교회는 이것으로부터 일방적인 원칙만을 주장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순교자’만이(참조:막13:13;행15:26,21:13) 실제로 예수의 제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자기 피를 흘림으로써만 ‘증인’될 수 있다는 개념은 이미 신약성서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행22:20;계2:13,12:11). 예수의 죽음은 그의 제자들의 죽음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원형이며 모범인 것이다. 행6:7의 스데반의 순교는 수난설화의 영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제자들의 고난을 주의 수난형태와 동일화시킨 흔적도 다른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눅23:26;막15:21;마10:17이하;요15:18이하, 21:18-19;행21:13;고후12:7-8).
확실히 바울처럼 자기 몸안에서의 그리스도 고난을 말함으로 인해(고전15:31;고후4:10;갈6:17),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훨씬 폭넓은 뜻을 지니게 된다. 즉 그의 모든 생활은 고난 가운데의 제자직인 것이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눅9:23)고 한 누가복음은 이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참조:행9:16;벧전4:13, 바울서신으로는 살전1:6).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완성(parenesis)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 목적을 위해 간구하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위대한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즉 목적이란 겸손(빌2:5이하), 사양심(롬15:3), 인내(히12:1이하), 참음(벧전2:20이하), 사랑(요15:13)등을 의미한다. 후대의 금욕주의에 큰 역할을 한, 사도 바울의 ‘수난 신비주의적(mysticism of suffering)'인 권고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생각, 즉 몸의 행실을 죽이고(롬8:13),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요구(롬6:6;갈5:24;골3:5)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어려운 때에 주의 죽음을 거듭 생각하는 것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안의 원천이 되었다. 왜냐하면 ’제자가 선생보다, 또는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기‘(마10:24) 때문이다(참조:눅6:40;요13:16).

의(구약)

구약에 나타난 의는 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으로서 서양의 정신에는 낯설며, 그 용어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다르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 구약 종교의 관점이 ‘율법주의적’이며 신약의 ‘인자’와는 매우 다른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100년 동안 주로 독일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성서적 신앙의 이 주요한 주제가 해명되어 왔다.
먼저 이 개념을 부정적으로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의는 윤리적.법적.심리적.종교적, 혹은 영적 규범에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성이나 신성에 의해 지시받는 행위(그것이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절한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사람들에 대한 공정한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그의 정당한 몫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는 구약에서 관계(그 관계가 인간과의 관계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이든)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많은 관계 속에 있다. 왕과 백성.판관과 고소인.제사장과 예배자.일반인과 가정.부족민과 공동체.공동체와 나그네 및 불쌍한 자, 그리고 모든 사람과 하나님 등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각각의 관계에는 특정한 요구들이 있는데, 이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 의이다. 그 요구들은 관계마다 다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의가 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불의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서 관계 자체밖에 별도로 규범이 없다. 하나님 혹은 인간이 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부과된 조건을 성취할 때, 구약의 용어로 의로운 것이다.

1. 의의 용어법
① 구약에서:의에 대한 용어들은 일관성 있게 체덱(sedeq, 남성)과 츠다카(s-daqa, 여성)이며 남성과 여성 명사의 사용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동사는 차닥(sadaq)으로 ‘의롭다’, ‘올바르다’, ‘도리에 맞다’는 뜻이며, 히필(hiphil)형태인 히츠딕은 ‘의롭다고 인정하다’. ‘의롭다고 선포하다’라는 뜻이다. 차딕은 형용사로 ‘올바른’, ‘의로운’이라는 뜻이다.
② 70인역에서:70인역은 매우 빈번히 차딕을 디카이오스(dikaios)로(시편에는 예외가 없음), 차닥을 디카이운(dikaioun)으로, 체덱을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간혹 디카이오스로 번역함)로, 츠다카도 디카이오쉬네로 번역한다. 그래서 체덱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는 70인역의 용법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외들이 있다. 차닥을 아멤프토스(amemptos:나무랄 데 없는, 잘못이 없는, 욥22:3)와 카타로스 에이나이(katharos einai:깨끗하다, 순결하다, 욥4:17)로 번역하며, 차딕을 알레테스(aleths:참된, 사41:26)와 피스토스(pistos:신실한, 진실한, 욥17:9)와 유세베스(eusebes:숭고한, 경건한, 종교적인, 잠12:12;사24:16,26:7)로 번역하며, 체덱을 엘레에모쉬네(eleemosyne:연민, 동정, 시35:24)과 크리시스(krisis:판단, 결정, 사11:4,51:7)로 번역하며, 츠다카를 엘레에모쉬네(신24:25;사1:27 등)와 엘레오스(eleos:연민, 자비, 동정, 사56:1;겔18:19,21)와 유프로쉬네(euphrosyne:기쁨, 즐거움, 사61:10)와 크리마(krima:판단, 선고, 소송, 사9:6)로 번역한 경우들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70인역의 용법을 본다 해도 체덱의 기본적 의미에 대해 거의 알 수 없다.
③ 체덱의 어원:또한 체덱의 의미를 밝히는 데 체덱의 어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어 사전들과 주석가들은 아라비아어를 참고하여 어근 체덱의 기본적 의미를 ‘똑바름’, ‘단단함’, ‘확고함’으로 정의해 왔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어떤 의미가 더 나으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보통 ‘똑바름’을 택한다. 그렇지만 이 의미들 중 아무 것도 그 어간의 사용된 다양한 방법들을 설명할 수 없음이 인정되어 왔다. 예를 들면 RSV는 체덱(혹은 츠다카)을 때때로 ‘vindication'(변호, 시103:6;렘51:10)이나 ’deliverance'(구출, 사46:12;미7:9), 혹은 ‘saving deeds'(구원의 행위들, 삼상12:7), ’saving help'(의로운 도움, 시71:24), ‘salvation'(구원, 욥33:26)으로 번역하며, 때때로 ’equity'(공평, 삼하8:15)나 ‘right'(공정, 사5:23)로 번역하며, 때때로 ’uprightness'(정직, 렘4:2), ‘truth'(진실, 시52:3)로, 때때로 ’triumph'(승리, 삿5:11)나 ‘victory'(승리, 시48:10;사41:2)로, 심지어 ’prosperity'(번영, 잠8:18)로 번역한다. 어떻게 ‘똑바름’(straightness)이라는 기본적 의미가 이러한 다양한 용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단 하나의 과정은 체덱의 용법을 그 문맥에 따라 검토하며, 그것의 동의어와 반의어들을 주목하며, 그 용법을 지배하는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어떤 작업을 해 보면, 체덱은 관계의 개념이며, 의로운 자란 자기가 처해 있는 관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부과된 그 요구들을 성취하는 자를 가리킴이 분명하게 된다.

2.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의 의
이스라엘에는 가족관계에 의해 부과되는 요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창녀 행세를 한 다말(Tamar)은 이 요구를 성취했으나 유다는 이 요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은 유다보다 이 요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은 유다보다 더 의로왔다(창38:26). 또한 다윗은 자기와 계약관계에 있는 사울을 죽이기를 거절했으며(삼상24:17,26:23),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Ishbosheth)을 살해한 자들을 정죄했기(삼하4:11) 때문에 의로왔다. 그러나 사울의 집이 몰락한 후에 므비보셋(Mephibosheth)은 새 왕으로부터 친절을 기대할 권리가 없었다(삼하19:28). 의의 요구는 관계와 함께 변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의로운 사람은 공동체의 평화와 온전성을 보존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공공생활의 요구를 성취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욥처럼 자기 당대인들에게 축복이었다. 그래서 체덱은 때때로 ‘자비’와 관계된다(호2:19). 의로운 사람은 가난한 자, 아버지가 없는자, 과부들을 돌보았으며(욥29:12-15,31:16-19, 참조:신24:13;잠29:7), 심지어 법정에서 그들의 소송을 변호했다(욥29:16,331:21, 참조: 잠31:9). 그는 후하게 주었으며(시37:21,25-26;잠21:26), 또한 나그네와 객을 부양했으며(욥31:31-32), 의를 어떤 재물보다 더 낫게 여겼다(욥31:24-25;시37:16;잠16:8). 그는 자기 땅(욥31:38-40)과 일하는 동물들(잠12:10)의 선한 청지기였으며, 그의 종들은 인간답게 대접을 받았다(욥31:13). 그는 자기의 이웃들과 화목하게 살았으며(욥31:29-30, 참조:29:24). 그가 권세를 잡고 있었을 때 그의 백성은 즐거워했으며(잠29:20), 그는 그 민족을 영화롭게 했다(잠14:34). 그는 자기 가정에 기쁨이었고(잠23:24), 그의 길은 새벽과 같았으며(잠4:18), 그의 기억 자체가 축복이었다(잠10:7). 그가 형통하면 온 성읍이 그의 번영을 즐거워했다(잠11:10). 그는 선에 대해 움직일 수 없는 요소였으며(잠10:25,30,12:3,12), 축복(잠10:6;사3:10)과 장수(시92:12;잠10:16,11:19,12:28), 자손(시37:37-38)과 번영(잠13:21-22,25,15:6), 그의 욕구의 성취(잠10:24,28,11:23), 고통에서의 구출(잠11:8,12:21,24:16)을 체험했다. 그는 평화와 번영 속에 살았다. 왜냐하면 그는 공공관계와 계약관계의 요구를 성취함으로써 그의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요컨대 물리적, 정신적 온전성)을 지탱했기 때문이었다(참조:시15:2-5;사33:15). 이 때문에 체덱은 때때로 샬롬(salom:평화)과 병행된다(사48:18,60:17, 참조:시72:3,7,85:10), 이 때문에 체덱은 ‘번영’으로 번역될 수 있다(잠8:18). 그리고 또한 이 때문에 체덱의 의미는 ‘진실’일 수 있다(시52:3, 참조: 잠12:17). 왜냐하면 올바른 말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계약관계들을 지탱하기 때문이다(시15:2-4;잠8:8,10:11,20,31,16:13;사59:4, 참조: 45:19). 즉 올바른 말은 의이다.
그래서 구약은 위에 열거한 대부분의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 대부분에서 의로운(차딕[sadiq])자와 사악한(라샤[rasa])자를 대립되게 두는데 이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는 후자가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윤리적 행위의 규범을 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공동체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지 못함으로써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악한 자는 폭력과 거짓을 실행하는 자이며 친족관계와 계약에 의해 자기에게 부과되는 의무를 등한히 하며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발 아래 짓밟는 자이다. 그의 죄는 살해나 도적질이나 거짓 등의 악 자체가 아니라 그가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범하는 악이다. 계약 밖에 있는 자를 살해하는 것은 의로운 거승로 고려될 수도 있으나(삿5:11;왕하10:9, 참조:삿5:26), 계약 당사자를 살해하는 것은 항상 불의이다.

3. 법적 개념으로서의 의
이런 사실들은 체덱의 법적 용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용어는 종종 샤팟(sapat:재판하다) 혹은 미스팟(mispat:재판)과 상관되어 사용되며(신25:1;왕상8:32;시9:4,33:5,143:2;잠1:3;사1:21;렘11:20;암5:7등), 동사는 거의 법적 문맥안에서만 나타난다(예: 욥33:32;사43:9,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법적인 용법으로만 사용된다고 주장함). 그래서 의는 법적 개념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의로운 사람은 옳다고 판결을 받은 자이다(출23:7;신25:1). 그러나 또한 공공관계의 요구가 결정적인 것이다. 법적 의미에 있어서 옳은 것은 공동체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며, 판관의 유일한 기능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삼하15:4;시82:3). 그래서 법적 개념으로서의 의는 서양법에서 알려진 것처럼 법적 규범에 근거하여 두 편 사이를 공정하게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보호하고 회복하고 도와주는 것, 즉 공공관계에서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 권리를 다시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의는 공공적인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며 의로운 재판은 공동체를 회복하는 재판이다(출23:7-8;신1:16,16:18,20;시82:3;잠17:15,26,18:5,24:24). 그래서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성문 안에서 의를 행할 것, 즉 공공생활의 기본적인 것들을 회복할 것을 호소한다(사5:23,29:21,59:4,14;렘22:3,15;암5:12,합1:4, 참조:시72:2;잠31:9). 이러한 맥락들에서 윤리적 기준과 법적 기준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것들은 하나이며, 그 둘은 공동체의 요구들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에서 공동체를 지탱하는 것이 판관의 기능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왕의 주요 임무들 중 하나였다. 또한 왕은 권리를 보호해 주고 회복하는 책임이 있었다(참조:호13:10). 이것은 그의 계약의 의무로서 의를 보존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이 의로왔다(삼하8:15=대상18:14;왕상10:9=대하9:8;시45:6-7;잠16:12, 참조:삼하23:3-4;사16:5). 그래서 시72편에는 의롭게 재판하는 왕에 의해 실행되는 평화와 번영이 묘사되어 있으며, 예레미야는 독재적인 여호와김에 대해 정의와 의를 호소했다(렘22:3,15). 더욱이 메시야가 올 때 그의 왕국은 모든 악에 대해 백성을 방어하는(사32:1-8) 의로운 재판을 통해 번성할 것이다(사9:7,11:3-5;렘23:5-6,33:14-16, 참조:사16:5).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의로운 자는 자기가 처해 있는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한 자였다. 그래서 체덱은 종종 자카(zaka:깨끗하다, 욥15:14)나 탐(tam:순전한, 욥9:20), 나키(naqi:무죄한, 출23:7)와 병행된다. 옳은 것이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면, 의로운 자는 옳은 것을 행하는 자였다.

4. 계약 개념으로서의 의
이스라엘은 야웨와 계약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의는 종교적 개념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의롭게 되기 위해 야웨와의 관계에서 오는 요구들을 성취해야 했으며, 이 속에는 주의 율법에 대한 복종이 들어 있었다(시1편).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한다.
첫째 모든 의가 종교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창38:26에서는 사실상 야웨와의 종교적 관계에 대한 아무런 사상이 없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행위는 그것이 동시에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의로운 것은 아니다(하지만 물론 이런 경우도 종종 있었음). 그것이 의로운 것은 그것이 사회적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항상 결정적인 요소이다.
둘째 우리는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의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의는 이스라엘과 야웨의 관계에서 나오는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의롭든지 불의하든지 관계 없이 여전히 야웨와의 관계 속에 있다. 계약관계는 모든 율법과 모든 요구에 선행되었다. 야웨는 이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이것에 부수된다.
나아가서 계약관계 내에서 야웨의 지위는 주로서의 지위였다. 야웨는 계약의주, 즉 계약의 창시자․계약의 수호자․계약의 보존자였다. 야웨께서만 계약을 지탱하셧다. 야웨께서만 계약을 파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살지언정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관계는 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끈 진노의 관계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관계였다. 하나님은 계약을 맺으셨다. 하나님만이 계약을 파기하실 수 있었다(참조: 시89:28-37).
따라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주의적인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윤혜에 근거한 관계로서, 애굽(Egypt)에서 압박받던 몇몇 셈족 지파들을 자기의 백성, 즉 자기의 고유한 보화가 되도록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에 근거한 관계이다(출19:4-5).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로 기쁨과 감사로 받은 관계이다. 시편이 증거하는 것처럼 축하․기쁨․찬양, 이것들이 히브리 신앙의 주조음이다.
율법은 이 은혜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계약 백성에 대한 인도자로 주신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야웨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레19장).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야웨께서 땅의 모든 백성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사랑한다(시40:8). 율법은 이스라엘의 주야의 묵상이며,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보다 더 단 것이다(시19:10).
그러나 율법은 관계 밖에서, 즉 계약 밖에서는 의미가 없다. 신앙 안에서 야웨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자, 야웨의 주권 아래 자기의 삶을 두는 자는 또한 율법을 따른다. 왜냐하면 율법은 계약관계 내에 있는 하나님의 인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이 없는 자, 계약 밖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이 무가치하다. 율법의 맥락은 야웨의 거룩함, 야웨의 주권이다. 율법은 이 주권을 보호한다. 율법은 야웨만을 예배할 것을 규정한다(출20:3-7;레20:8;신6:13-15). 율법은 죄를 금지한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기 때문이다(레18:1-5,19:2,22:2,32;신7:6 등). 신앙 안에서 율법의 맥락, 즉 야웨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율법의 다른 모든 계율을 지킨다하더라도 야웨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신앙은 율법의 전제이며, 그런 신앙 없는 행위는 소용이 없다. 율법에 대한 복종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야웨와의 관계, 즉 신앙의 관계가 일차적인 것이다.
이것은 율법 자체 안에서 입증된다. 의가 전적으로 율법의 준수에 따라 좌우된다면, 어떤 죄이든 그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차단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 자체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속죄일을 규정하고 있으며(레16장), 그리고 하나님 및 공동체와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부단한 규정이 있다. 그렇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짐짓’ 하나님의 율법을 배격하는 것(민15:30), 그의 주권에 대해 반항하는 것, 회개하지 않는 것, 요컨대 무신앙성이다.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야웨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야웨와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야웨의 규정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야웨께서 그의 율법 속에서 그의 백성을 은혜롭게 인도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이것들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신약의 성령을 거스리는 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신앙 없이 야웨의 은혜를 배격하는 것이며, 그리고 신앙없는 율법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율법을 준수하는데, 이는 그가 신앙으로 율법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의를 이루는 것은 행위나 혹은 신앙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만인데, 그것은 행위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신앙은 야웨에 대한 관계를 성취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신앙은 의이다(창15:6:합2:4).

5. 의로운 분이신 야웨
구약 전체를 통해 야웨가 의롭다고 선포되며(대하12:6;느9:8;시7:9,103:17,111:3,116:5;렘9:24,단9:14;습3:5;슥8:8 등), 그리고 단 한번도, 용기에 있어서도 야웨가 불의하다고 주장되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행동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증언하는 데 있어서 주요 주제들 중 하나가 의이다. 그러나 야웨의 의는 그의 내적 본성에 일치하는 행동이 아니며, 분명히 야웨 밖이나 야웨 위에 있는 올바름에 대한 어떤 규범이나 기준에 일치하는 행위들이 아니다. 또한 야웨의 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율법에 규정된 선과 악에 따라 선한 자에게 포상하고 악한 자를 벌하는 배분적 정의가 아니다. 야웨의 의는 야웨께서 자기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 즉 야웨께서 자기가 선택한 민족과 맺은 계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약 속에 있는 사람만이 야웨를 의롭다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야웨의 의는 매우 빈번하게 법적 용어로 묘사되며, 그리고 그것은 보통 그가 의로운 분으로 묘사되는 땅의 판관으로서의 그이 기능 속에 나타난다(시9:4,8,50:6,96:13,99:4;사5:16,58:2;렘11:20). 그래서 야웨는 인간 판관의 경우처럼 정의를 지탱하신다. 그는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 권리를 다시 찾도록 도우신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이 일을 행하신다. 그는 이스라엘의 권리를 보호하고 회복하신다. 이것이 야웨의 의이다. 이것이 야웨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성취하시는 것이다. 그의 판단의 목적은 공동체를 보존하는 것, 즉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보존하는 것이다(시89,94편).
그래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고통에서(31:3,88[참조:12절],143:11), 적들에게서(5:8,143:1), 악한 자들에게서(36편, 71:2) 구출해 달라고, 이스라엘의 원수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을 옹호해 달라고(35:24), 야웨의 의에 호소한다. 야웨께서 이 탄원들을 경청하시는 한 의로우시다. 야웨의 의는 야웨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것, 시온을 구출하시는 것(48편, 여기서는 체덱이 ‘victory'[10절]로 번역되어 있음).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의 적들에 대한 야웨의 의로운 복수를 확신 있게 기대한다(렘11:20, 참조:71:24). 그래서 포로가 된 이스라엘은 압제자들에 대한 승리의 약속을 듣는다(사54:14-1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환난 날에 그들의 하나님을 불러야 했다(시50:15). 왜냐하면 야웨께서는 고통받는 자와 궁핍한 자의 입장을 지지하시기 때문이다(시140:12). 야웨께서는 세계의 모든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 자기 백성을 위해 결정하신다(사43:1-7,54:11-17).
요컨대 야웨의 의로운 판단들은 ‘구원하는’ 판단이며(시36:6), 그러므로 제2이사야는 야웨를 ‘의로운 하나님과 구주’라고 말한다(45:21).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의이며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체덱이 종종 ‘구원의 행위들’(삼상12:7)이나 ‘구출’(시22:31,51:14,65:5;사46:12-13,51:1,5-6,8)․‘변호’(사62:1-2)로 번역되며, 종종 ‘구원’(시40:10,51:14;사61:10)과 병행된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 야웨는 땅의 판관처럼 자기의 백성을 위해 판정하며 그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신다. 이것의 그의 의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승리’(삿5:11;사45:25), 하나님의 ‘승리’(시48:10)이다.

6. 의로운 자로서 고통받은 자들
하나님은 그의 계약 백성을 위해 구원의 판단을 하시는데, 여기서 구약의 ‘의로운 자’에 대한 두 번 째 정의에 이르게 된다.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자뿐만 아니라 그런 관계 속에 있으면서 권리를 박탈당한 자도 역시 의롭다. 이 관점은 본항 5.의 배경의 일부이며, 물론 그 사고는 또한 대체로 법적인 것이다. 판관은 권리를 박탈당한 자에게 권리를 회복해 주기 위해 개입한다. 판관은 박탈당한 사람, 궁핍한 사람 편에서 판정한다. 판관은 압박받은 자나 고통받는자를 차딕(sadiq), 즉 옳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부터 그의 적들에 대해 옳았으며(시103: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옹호자로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진압하신다(시68편). 이스라엘은 그의 적들에 대해 항상 의롭다. 이스라엘이 의로운 것은 이스라엘이 압박을 받고 권리를 박탈당한 사실 때문이다(참조:사54:14).
이스라엘의 공동체 자체에 있어서도 이것이 사실이다. 의로운 자들은 압제하는 자들(시14:5)․적들(69:28)․악한 통치자들(94:21)․난폭한 사람들(140:13)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은 주이다. 왜냐하면 주는 그들의 권리를 회복해 주고, 굴복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116:6,146:8). 그의 판단 항상 압제받는 자와 굶주린 자․갇힌 자와 맹인․과부와 아버지가 없는 자․나그네와 가난한 자(암2:6)들을 편드는 판단이다(시146:7-9).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가리키는 말들인 엡욘(ebyon:가난한)․아니(ani:고통받는)․라쉬(ras:가난한)․달(dal:비천한) 등이 차딕과 병행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야웨는 그들의 권리를 회복하신다. 그래서 역시 야웨의 의로운 판단은 구원의 판단인 것이다.

7. 의와 죄
그렇지만 우리가 구약에서 종종 의로운 자라 불리우는 사람이 동시에 유죄함을 고려해 볼 때 이 사실은 이상한 것 같다. 참으로 구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지은 완고한 죄를 주저하지 않고 묘사하고 있으며, 시편 기자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 시인은 적들로부터 구출해 달라고(3,9,12절) 야웨의 의, 즉 야웨의 구원의 판단에 호소한다(1,11절). 이 시인만이 이 호소를 하는 것이 아니며(참조:시51:14), 다른 시편 기자들도 자기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신다고 증언한다(시40:10[참조:12절],65:5[참조:3절],103:17[참조.3,10-12절]).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자기 자신들을 의로운 자 중에 넣는다(시32:11[참조:1-5절], 69:28[참조. 5절]). 사실상 때때로 야웨의 의가 용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시51:14,103:11-12,17).
이런 사실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구약 전체를 통해 야웨가 악을 정죄하고 있음을 너무 길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의 의로운 판단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시키지만 또한 악한 자들을 꺽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을 가져오는 그 판단들이 동시에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멸망을 가져다 준다(시58:10-11,사11:4,61:1-2;합3:12-13;말4장, 참조:학2:22-23;습2:8 이하:슥14장). 주는 그의 백성을 위해 복수의 날을 설정했으며(사34:8), 주의 의와 복수는 병행된다(사59:16-19, 참조:시7:11-13,129:4;사45:25;렘11:20). 야웨는 권리를 회복하는 역사 가운데 죄인을 처벌하신다(출23:7;왕상8:32=대하6:23;시51:4;애1:18). 그의 의에는 두 가지 면, 즉 구원과 정죄․구출과 처벌이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점은 야웨의 의는 결코 단순히 정죄나 처벌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에서는 야웨의 의가 죄인에 대한 복수와 동등시되는 구절은 없다. 사5:16이나 10:22도 그런 방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의는 권리를 박탈당한 자에게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에는 동시에 악행자에 대한 처벌이 포함된다. 그러나 처벌은 회복의 일부이다. 야웨는 구원하기 위해서만 정죄하신다. 그의 의는 무엇보다 구원적인 것이다. 그는 ‘의로운 하나님이며 구주’이다.
그렇지만 압제받는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야웨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은 그들의 무죄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것 같다. 그의 의는 윤리적 무죄성이나 도덕적 무죄성이 아니다. 그는 종종 공개적으로 자기의 범죄를 고백한다. 나아가서 그는 자기의 적에 대해서는 의롭지만, 그러나 단순히 이 사실 때문에 그가 의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를 구약의 의로운 자들과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악한 자를 처벌하는 야웨는 고통받는 자가 학대받는다고 해서 그의 죄를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와 압제받는 자도 야웨 앞에서 가장 중요한,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의는 그들의 신앙, 즉 그들이 야웨와의 관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8. 의와 신앙
구약에서 야웨의 의나 구원․구출에 대한 호소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신앙의 태도가 발견된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나 주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이라는 특징이 있다. 신실한 자들은 그를 기다리는 자(사33:2;미7:7-9)․그에게 희망을 두는 자(시69:6,71:5,14,146:5)․그를 찾는 자(69:6,32)․그를 신뢰하는 자(71:5,143:8, 참조:33편)이다. 그들은 야웨을 아는 자(36:10)․그를 두려워하는 자(103:11,13,17)․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69:36). 야웨는 그들의 요새이다. 주는 그들이 압제받고 궁핍한 이 세계에서 그들의 유일한 피난처이다(5:7-12,14:6,31,36:7,52:6-7,71:1-3,94:22,118:8-9,143:9). 그래서 그들을 발 아래 밟는 자들에 반해서, 재물에 의뢰하는 자들에 반해서(52:7), 그들은 야웨를 의지하며 고통 중에 그에게 부르짖으며(35,88,116,140편), 그의 판단 앞에 부복하며(94:12,118:18),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32,51편), 그에게 상한 영과 통회하는 마음을 드린다(51:17). 야웨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며 확실한 구원이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야웨에게 돌아선다.
이런 신앙이 고통받는 자들의 의이며 이스라엘이 야웨와의 관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압제를 받기 때문에 야웨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이 곤궁하기 때문에 죄 많은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야웨의 자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 반해서 의로운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사1:27-28). 여기서 의는 회개하는 자를 위해 개입하시는 야웨의 구원의 판단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시편 기자의 사상과 비스한 사상이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시37:39-40).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이다. 즉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그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의뢰하고 신실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의이다. 이스라엘이 야웨와의 관계를 성취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부르는데(37:39), 이는 이스라엘이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무죄하기 때문이거나(32:11,69:28) 이스라엘이 자기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공적을 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믿으며,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5:12,14:5,31:18,33:1,36:10,52:6,94:15,21,118:15,20). 이스라엘은 자기의 신앙이 자기의 확고한 기초임을 알고 있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31:23-24).

9. 의인과 계약
그렇지만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그들의 확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다는 더 큰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야웨의 의는 그의 선택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야웨는 그의 백성을 보호함으로써 계약관계의 요구를 성취하신다. 그리고 계약관계가 이스라엘의 의에 선행된다. 이스라엘은 의롭든지 불의하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간에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속에 있으며 그 관계는 야웨께서만 파기할 수 있는 관계이다. 야웨가 이스라엘을 버리기까지(참조:호세아), 이스라엘은 야웨의 구원의 팔의 그늘 아래 서 있다(사40:10-11,52:10).
이것은 주로 제2이사야의 메시지이며, 여기에 의에 대한 구약의 셋째 의미가 나타난다. 자기가 처해 있는 계약의 요구들을 성취하는 자만이 의롭거나 그런 관계내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자만이 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에게 돌려지는 의를 가진 자 역시 의롭다. 이런 의미에서 의는 하나님에 의한 의인, 즉 계약의 주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참조:사60:21).
그러한 의의 선물은 제2이사야의 위대한 종말론적 증언에서 선포된다. 이스라엘은 죄 많은 민족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으며(사44:9-20,50:11), 범죄가 가득하며(53:5-6,8,11), 하나님을 올바로 고백하지 못하며(48:1), 그들의 악의 짐을 하나님께 지웠으며(43:24), 그들의 구주를 부르기를 거부했다(43:22). 이 때문에 야웨는 이스라엘을 사로잡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어(42:24-25,47:6) 죄에 대한 이중적 처벌을 받게 하며(40:1), 주의 진노의 가득한 잔을 마시게 하며(51:17-20), 고통의 용광로에서 단련받게 하시며(48:9-11), 상하고(53:10) 버림받게 하신다(54:7-8). 이스라엘은 포로 가운데서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그의 길이 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40:27) 그 백성은 영원히 배척받았다고 생각한다(49:14,50:1). 요컨대 이스라엘은 계약을 잊었다. 이스라엘은 야웨에 대한 관계를 잊었다. 왜냐하면 야웨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제2이사야의 기쁜 메시지는 그 계약이 여전히 존속해 있다는 것이다. 야웨는 그의 자식을 잊을 수 없다(49:15). 혹은 다른 비유로 말한다면 야웨는 그의 아내인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50:1, 참조:54:5-6).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지속된다. 그의 말씀․그의 약속․그의 승낙은 영원히 존속해 있다(40:8,55:11). 그 계약이 여전히 온전하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의 희망이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구한다면 자기가 갈라져 나오 바위, 즉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과 조상들에 대한 계약을 바라보아야 한다(51:1-8). 이스라엘의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은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말씀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아무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자신으로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있으며(48:18-19), 그리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벌을 받았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자기를 사로잡은 자들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롭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도 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야웨를 부르지 않는다(43:22). 왜냐하면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마음이 완악하고(46:12) 목이 곧고(48:4), 날 때부터 하나님께 반역했다(48:8).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뢰하거나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는다(50:10).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50:2). 이스라엘은 신앙이 없으며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 자신으로는 의가 없다.
그런 백성에 대한 제2이사야의 권고는 주를 믿고 주께 의탁하라는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40:28),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40:31)라고 제2이사야는 외친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제2이사야의 전체 증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구원의 도움을 의뢰하도록 고취하려는 것이다(예:40:12-31). 야웨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야웨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41:8-10,43:1-7,44:1-5,22,46:3-4, 참조:49:8-13). 그의 계약은 이스라엘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존속해 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백성들 앞에서 고통받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 개입하신다(51:22). 그는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인도하실 것이다(43:14).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43:25,44:22,참조:54:9). 그는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이다(40:11).
요컨대 야웨께서는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를 유지하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의롭다고 하심으로써, 즉 의가 없는 이스라엘에 의를 부여함으로써, 구원받을 권리가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써(46:12-13) 자신의 의를 유지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는 것이 온 세계 앞에서 이스라엘의 의가 될 것이다(50:9, 참조:52:13-53:1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 속에 세워질 것이다(54: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 속에서 의롭다고 선포될 것이다(45:24-25). 이스라엘이 정의를 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온 땅의 창조자이며 왕이며 판관이신 야웨는 이스라엘 편에서 판정할 것이다. 제2이사야의 호소는 이스라엘이 다만 신실하게 그러한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제2이사야의 음조가 기쁨과 축하의 음조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참조:52:7-10).
그래서 구약에서 의는(인간에 대한 관계이든 하나님에 대한 관계이든)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지속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개입하시어 그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며 자기 자신과 온 세계 앞에서 그들이 정의롭다고 선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에 대한 신약의 메시지와 이것과의 관계는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롬5:8).

계시록

계시록은 흔히 요한계시록(The Apocalypse of John)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책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계시록은 신약성서의 유일한 묵시 기록이다. 문학적인 장르에서 볼 때 구약의 에스겔서, 다니엘서 및 스가랴서와 매우 유사하다. 위의 예언서처럼 핍박으로 위협을 받고 있거나 또는 실제도 고난을 받고 있던 소수 집단에 속했던 작자의 기록이다. 계시록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탈회하고 로마정부로부터 최초로 하나의 독립된 운동으로 인정 받던 기독교 제1세기 말 경에 속한다.

1. 배경
① 역사적 배경
계시록의 배경은 대체로 로마의 아시아 지방 식민지 이오니온(Ionion)의 해변 도시들인 것 같다. 그 지방에서 수많은 이교가 번창했는데 그 모두가 기독교의 신학과 윤리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를 비난하고 일신론을 주장했으며, 엄격한 도덕적 규범을 고수했다. 이러한 사실 모두가 이교들의 적개심을 즉시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회의 급성장은 이교도의 경제적 번영을 위태롭게 했다. 이는 교회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에 신봉자들이 줄어 들었고, 우상을 만드는 사람과 제물 짐승을 파는 사람들이 생활근거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역시 황제들까지 특히 네로(A.D.54-68)와 도미티아누스(A.D.81-96)황제는 백성에게 예배 못지않게 황제 찬양을 강요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황제들에게 그러한 종류의 경의를 드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죽임을 당하거나 비 애국적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② 사회적 배경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차이가 기독교회에 가한 압력으로 결정적 반항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동일성(identity)을 고수하기 위해 저항치 않을 수 없었다. 계시록의 저자 자신도 이 믿음 때문에 망명간 것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의 기록이 로마 나라의 만연된 부패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부패상을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계17:6) 주홍색 진홍색 옷을 입은 창녀로 묘사했다. 계시록의 예언들을 당시의 사건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예언들은 그 당시의 사건을 말하고 있으며, 당시 교회 상황을 상상케 해준다.
③ 종교적 배경
교회와 유대주의와의 결별은 A.D.70년 예루살렘 함락 후 완전히 이루어진 것 같다. 그 당시 교회와 회당은 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율법행위와는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는 정통 유대주의 옹호자들과 기독교 신자들 사회와의 사이에 못을 박고 말았다. 성전 함락은 교회와 유대인의 신앙 중심에 있었던 미미한 관계마저 끊어지게 하고 말았다. 교회에 대한 유대주의 적대 감정은 결국 유대주의자를 “사단의 회”라 정죄하기에 이르렀고 양편 사이의 완전 결별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회 자체내에서도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타난대로 신앙 퇴보의 징조가 있었다. 처음 열성은 식어지고 음행과 이교사상이 교사와 일반성도 사이에까지 침투하게되고 타락된 생활이 만연하게 되었다. 계시록은 당시의 절박한 상태를 묘사하고 독자로 하여금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 할 준비를 하도록 경고함으로 그들의 열성을 일깨워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2. 계시록의 통일성
챨즈(R.H.Charles)는 여러권으로 된 성경주석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주석에서 계시록의 구성 문제에 관하여 세밀히 다루었다. 그는 주석에서 계시록 저자는 계시록 20:3까지를 기록한 후 죽었다고 하며 그 다음 종결부분의 기사 재료들은 주로 일련의 독립된 문서로 준비해둔 것인데 요한의 제자 중 충실하나 지력이 좀 부족한 자가 자기 판단에 옳게 여겨지는대로 편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계시록은 문체나 어법이나 극적인 과정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말할 수 있는 보편적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저자가 사용한 재료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시록의 구조를 보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은 작품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만든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챨즈가 재료를 인용하며 증거를 세워 본문의 명백한 부조화성을 말했으나 계시록을 기록할 때의 환경을 생각할 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환상의 특성과 저자의 망명은 어느 정도의 지엽적인 말과 반복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의 추거(推敲) 부족의 이유가 된다. 모든 작가들은 대작을 만들어낼 때 자기 추억이나 대인 접촉에서나 또는 어떤 기록문에서 어느 정도의 재료를 뽑아 사용한다. 계시록의 통일성은 저자가 사용한 재료 해석과 그의 원 자료의 완전성안에 있다. 만일 그가 그 재료를 새로운 생각의 구조 안에 짜 넣으면 그것은 참된 일치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재료의 이전 관계는 둘째 문제가 된다.
계시록에 계속해서 나오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뜻한다면 이는 한 뜻에서 흘러나오는 중심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에 자주 나오는 괄호와 구문상 불규칙성은 저자가 유배된 사실과 또 그가 기록한 환상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의 내적 구조는 통일성을 뒷받침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각 편지의 서문에 먼저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암시가 있고 이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성의 도래를 기대케하는 최후 약속이 있다. 4장부터 시작되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 보좌의 구심성이 나타나 있고 그리하여 그 보좌가 모든 환상의 핵심(focus)이 되어 있다. 특별한 과정은 계속되는 심판의 전개 속에 나타난다. 이로써 5장에서 인을 뗄 때부터 20장에서 심판이 끝날 때까지가 하나의 연속된 이리로 간주 되어 있다. 중간에 원 줄거리를 벗어난 말과 삽화가 있긴 하나 그것이 이 책의 근본적인 통일성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3. 저자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그는 에수 그리스도의 종된 자요, 서신을 받아볼 자의 형제요, 그들의 환란과 영적 축복에 동참자라고 고백하고 있다(계1:1-9). 계시록에 기록된 환상은 저자가 밧모섬에 있을 때 받은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기독교신앙 때문에 밧모섬으로 망명간 것 같다. 그는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요, 또 선지자로 뽑힌 자요(22:6,9,19), 계시적 환상을 받았던 자이다.
외적 전설에 따르면 이 사람은 복음서와 서신에서 말한 세베데의 아들 요한과 동일하다고 한다. 순교자 져스틴(Justin 약 A.D.150년)은, 계시록은 “우리 중 한분 그리스도 사도 중 한분이며 요한이라 이름하는 이가 기록했다고 한다. 리욘(Lyons)의 감독 이레니우스(Irenaeus)도 그 당시 남아있던 여러 계시록 사본과 요한을 직접 대면해 본 이들의 증거에 의하여 묵시록은 요한의 저작이라고 말했다. 터툴리안(Tertullian A.D.200년)은 계시록을 요한의 저작으로 말했으며, 특히 이 요한은 사도요한이라고 했다. 오리겐(Origen.A.D.225)도 계시록을 요한의 저작으로 말했다. 2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까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해서 서방교회가 인정했다.
계시록이 요한의 저서라는 것을 제일 먼저 반대한 것은 알렉산들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였는데, 그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전통적 견해를 반대했다. (1)계시록은 요한을 저자로 주장하는데 반해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신은 모두 익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2)계시록에 사용한 어휘는 사도 요한의 저서로 입증된 책에 사용한 어휘와 다른 점; (3)사도 요한의 기록은 비교적 좋은 헬라어 문체를 썼으나 계시록은 문법이 맞지 않은 곳이 많은 점.
디오니시우스의 주장은 후에 유세비우스(Eusebius)가 재창했는데 유세비우스는 디오니시우스를 따라 계시록의 권위 문제까지 그의 입장을 따르게 되었다. 그들은 계시록이 사도 요한의 저서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전의 사람들과 질적으로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결정적이라 할 수는 없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는 저자가 익명으로 되어있는 반면에 계시록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은 엄밀히 따져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에는 저자가 익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때 저자는 독자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고, 또한 열두 사도 중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증인이라고 분명히 주장했다. 그런데 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다 증거하였느니라”(1:2)고 주장했는데, 문체로 보아 복음서의 문체와 연결이 된다(요1:14,21:24). 이러한 근거로도 계시록을 사도요한이 기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해도 그 입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먼저 쓴 복음서에는 익명으로 되어있고 후에 쓴 글에는 이름이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복음서의 저자가 계시록을 쓰지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휘의 차이는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생애에대해 정숙하고도 사색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여러해 동안의 기억에서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온 것이다. 계시록은 망명 중 어려움속에서 받은 환상을 대필자가 없이 기록한 책이다. 요한복음은 팔레스틴의 정상적인 사람의 생활과 연관된 눈에 익은 장면과 귀에 익은 음성을 수록했고, 계시록은 상징적 환상으로 채워져있고 괴이한 존재들을 등장시켜 전적 초자연적인 장면을 묘사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 두 글이 상반된 양상의 입장에서 쓰여졌지만 약간의 유사점들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요1:1;계19:13)이라 했고 또 “어린 양”(요1:29;계5:6)이라고 했으며 “목자”(요10:11;계7:17)라고 했고 두 곳 모두 사탄의 활동이 출현하며(요8:44,13:2,27,14:30;계2:10,12:19,20:2,7,10), 그리스도의 죽음의 독특성을 강조한 점(요12:32;계1:5;5:6)등이다. 이 비교가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알려진 요한의 기록들과 계시록 사이에 주목할 만한 용어상의 일치가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소위 문법적인 변칙 문제는 이 책이 묵시적 성경이란 근거와 또 셈 족 계통의 관용어를 구조상 이질적인 헬라어로 표현하려는 저작자의 노력에 근거된거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용구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란 어구등, 유사 동사의 명사적 용법과 전치사를 주격과 함께 사용하는 것(계1:4)등은 셈계 언어에서 문자상으로만 번역될 수 있는 표제등을 헬라어로 표현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요한복음과 계시록에 쓰여진 헬라어에는 아람어와 히브리어의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다. 요한복음은 아마 마지막에 주를 붙인 대필자나 서기가 어느정도 정리를 했을 것이다(요21:25).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증거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도 저작자에 대한 부정적 증거는 어느면으로나 결정적이라 할 수 없다. 초기의 증거는 주로 계시록을 세베데의 아들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데 사도요한이 기록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절대적 증거는 없다. 뚜렷한 것은 계시록의 저자는 아시아의 교회로부터 높이 존경을 받던 사람이고 그의 기록이 성경의 법규와 동일시된 권위있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4. 저작 시기
계시록의 저작 시기를 3가지로 말하고 있다.
제3세기에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는 계시록은 밧모섬에서 돌아온 요한이, 즉 글라우디우스(Claudius A.D.41-54)때에 기록했다고 했다. 그때는 계시록의 기록 시기라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 이유는 그때 아직 아시아의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간의 긴장이 계시록에 말한 상태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가 말한 글라우디우스는 네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네로도 글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계시록의 저작 년도가 네로 통치기간(A.D.54-68)일 것이라는 주장은 짐승의 숫자가 666이라는 계시록의 문구에서 기인되었다. 히브리문자로 기록된 네로 황제(NERON KESAR)란 명칭의 글자들의 숫적 표현을 합산할 때 666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에는 두 가지의 큰 이견이 제기되었다. 이 666이란 숫자를 얻을 수 있는 글자 배열이 위의 방법 뿐 아니라 다른 방법도 많이 있다는 것이며 그 위에 또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시아의 헬라 지역에서 기호를 히브리어로 계산했다는 것이다.
계시록17장의 여인을 뒷받침하는 “산들”에 관한 말씀은 본서가 네로의 때에 기록된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인용되기도 했다.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을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 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계17:9-11). 만일 이 말이 로마나라의 왕들의 순서라면 그들은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와 갈리굴라(Caligula)와 글라우디우스등일 것이다. 이와 같이 계산한다면 “다섯은 망하였고”가로 한 그 다섯은 이미 죽은 그 다섯 왕을 뜻하는 것이요, “하나는 있고”라고 한 그 하나는 지금 있는 네로이다. 그래서 계시록의 저작 년도도 네로의 때라고 한다.
그러나 이 추정도 최종적 단정을 짓기에는 너무 불확실하다. 망했다는 다섯 머리가 율리우스 가이사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다섯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계산했다면 네로가 다섯 번째가 되고 베스파시안(Vespasian)이 여섯 번째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네로 다음에 재위에 올랐던 3명은 중요한 인물로 인정될 수 있는 동안 위에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투스(Titus)가 일곱째이고 도미티안(Domitian)은 여덟째가 될 것이다. 여덟째를 “일곱째”로 말했다면 이 말은 도미티안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 이유는 도미티아누스를 잔인한 성격의 폭군적인 네로의 재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네로시대에는 아시아의 교회가 완전한 발전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때였다.
전통적 의견은 이레니우스의 증거에 의하여 계시록의 저작 시기를 도미티아누스 재위 때로 본다. 이 사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가 의견을 같이했고, 빅토리니어스(Victorinius)도 자기 저서 계시록 주석(Commentary on the Apocalypse)에서 그 사실을 확정했다.
전통적인 추정시기가 제일 적합한 저작 시기인 것 같다. 이때로 보면 아시아 교회가 자라나서 처음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까지 될 수 있다. 도미티아누스가 자기를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경배하라고 명한 사실은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고, 전 인류적 차원에서 경배를 강요한 “짐승”의 묘사와 일치한다(계13:15).
스타우퍼(Stauffer)는 666이란 신비스런 부호는 도미티아누스의 황제적 칭호의 기본 약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의 숫자적 가치를 합산할 때 666이 된다(E. Stauffer, Christ and the Caesars,p.179). 이 부호의 적합성과 부적합성이 도미티아누스에게만 해당된다고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 부호는 그의 이름에도 맞고 네로의 이름에도 맞다.

5. 계시받은 장소
밧모섬이 바로 그 환상을 받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이 책을 기록했든지 아니면 후에 에베소에서 이 책을 기록했을 것이다. 밧모는 돌로 된 작은 섬인데 소아시아 해면에 있는 일명 다도 해라고도 불리우는 에게 해에 있는 섬이다. 이 섬에 유배지 하나가 있었다. 정치점들이 주로 거기에 유배되고 거기서 광산의 강제노동에 징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높은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는 섬에 있게 되었다. 요한이 환상을 받고 얼마있지 않아 이 책을 기록하긴 했어도 거기서 기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환상은 저자의 출신지인 아시아 지방 로마영지의 언어와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스타우퍼(Stauffer)는 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 통치 마지막 해에 아시아교회 가운데 현저했던 문제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때 도미티아누스는 반란과 동부로부터 침공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의심의 화살을 기독교회로 돌렸다.

6. 수신처
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 교회들은 에베소에서 서머나를 통하여 버가모까지 해변을 따라 북편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버가모에서 또 다른 길 하나가 남으로 뻗어있는데 이 길은 내륙 방향으로 뻗어 두아디라(Thyatira), 사데(Sardi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라오디게아(Laodicea)를 지나 다시 돌아서 에베소로 향해 있다. 이 계시록을 가진 사람은 한 바퀴 돌며 이 모든 도시를 방문했을 것이다. 에베소는 웅장한 아데미 신전이 위치한 곳이며 서머나는 아시아의 중요 항구이며, 버가모는 거대한 제우스 신당, 곧 의사신(Aesculapius)신전과 지방행정 관청의 소재지였다. 두아디라는 농업과 면직공업의 중심지였고, 사데는 기울어지는 도시로써 가장 고도이며 루디아(Lydia)의 수도였다. 빌라델비아는 중앙의 비옥한 고원평야로 가는 길목이고, 라오디게아는 번창한 은행 중심지였으며, 또한 양털 재배지였고, 안약 제조지였다. 바울은 에베소와 라오디게아에 편지한 적이 있고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그 일곱 도시 중 몇 도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일곱 도시는 아시아 지방의 주요한 핵심지였고 아마 저자가 잘 알고 있는 큰 교회중에 대표적 교회일 것이다.

7. 기록 원인
도미티아누스의 통치는 어려운 때에 시작되었다. A.D.79년의 베수비우스(Vesuvius)화산 폭발로 일어난 폼페이(Pompeii)와 헤르큘레니움(Herculaneum)의 파멸과 그 이후에 로마를 폐허화시킨 재앙적 화재가 있었고 도미티아누스의 즉위 년도인 A.D.81년까지 전 시가지를 폐허화시킨 질병의 재앙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전 로마시민에게 자기를 경배하도록 강요한 병적일만큼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주와 신”(Dominus et Deus)이란 칭호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황제들 중에 처음으로 자신을 신의 지위에 올려 놓은 사람이었다. 황제들 중에는 타의에 의해 생전에 찬양받은 이도 있고 사후에 원로원에 의해 신같이 추앙을 받기도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A.D.83년 자기의 작은 아들이 죽자 그를 신이라, 그의 어머니를 여신이라 칭하게 했다. 그 아들을 기념하여 만든 동전에는 그가 주위에 달과 위성들을 두르고 천체 위에 앉아있는 모양을 나타내었다. 모자를 신성시하고 황제를 신격화하고 자기에게 엄청난 칭호와 불가능한 권력을 돌리게한 것 등은 모독적인 도미티아누스의 주장은 계시록에 나타난 절대 주권자시며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앞에 꺾이고 말았다.
로마의 역사들은 도미티아누스 때 기독교에 가해졌던 전국적인 박해를 기록해두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 대한 불신앙과 유대인의 습관을 따르는 것과 반역등의 구실의 씌워 자기의 사촌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를 처형하고 그의 아내 도마틸라(Domatilla)를 쫓아내고 말았다. 이러한 처형은 클레멘즈가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눈에 보이는 신에게 경배치 않았을 것이고 유대인의 성경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황제 예배를 거절했을 것이다. 도미티안은 “하나님께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자기는 네로의 후계자라고 스스로 자처했으며 우리에게 핍박을 가한 제2의 인물이다”라고 유세비우스는 말했다. 또 유세비우스는 헤게시푸스(Hegesippus)의 증거를 인용하여 요한은 네르바(Nerva)가 즉위한(A.D.96)후 유배에서 풀리어 에베소로 돌아왔다고 했다.

8. 저술 목적
계시록은 황제의 핍박의 그늘아래 있는 교회에 보낸 글이다. 국가의 공적진압은 교회에 닥친 큰 위협이었고 이는 교회 존립에 대한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불안 때문에 그들은 권면과 경고가 동시에 필요했다. 권면은 그들로 하여금 실망과 그로인해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요, 경고는 외적 공경과 내적인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가지 요소와 그 당시 로마제국내에 임한 일반적 상황이 계시록에 나타나 있다.
교회에 보낸 권면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두었는데 그리스도는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 교회를 위험에서 건지시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각 교회에 보낸 편지마다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말이 나타나며(2:5,16,25,3:3,11,20), “내가 속히 임하리라”(3:11)는 말은 편지 끝에 세 번 반복하여 나타났다(22:7,12,20). 계시록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이다.

9. 정경성
① 초기인정
권위있는 교부서에 의하면 계시록은 초기 교회로부터 정경의 권위를 지닌 책으로 일반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A.D.140)에 계시록에 관한 언급은 있어도 범위를 넓힌 인용구는 없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사데 교회의 감독 멜리토(Melito of Sardis:약A.D.135)은 정언적으로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사도 중 하나인 요한이 썼다고 했으며, 리욘의 감독 이레니우스(Iranaeus)도 계시록의 사도적 기원에 관해 동일하게 강조했다. 위에 나타난 것과 같이 소아시아의 초기 증거는 모두 갈리아 여러 교회의 지지를 받은 듯 하다. 그 이유는 아마 에베소에서 갈리아로 온 이레니우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리욘과 비엔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그 편지를 쓴 사람은 계시록을 알고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② 서방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도 계시록을 알고 있었다. 클레멘트는 계시록을 정경으로 생각했고, 그의 제자 오리겐도 계시록을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가 계시록을 사도요한의 저서로 인정치 아니했으나 교회가 계시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라토리 단편(약 A.D.170)에 나타난 것을 보면 로마교회의 정경에 계시록이 포함되어 있고 히폴리투스(Hippolytus:A.D.190-235)는 이를 종종 인용했다. 로마에서 파생된 칼타고(Carthage)교회도 계시록을 인정했으니, 이유는 터툴리안(A.D.190-220)이 계시록 22장 중 18장을 인용했다.
서방교회는 2세기말경 모두가 다 계시록을 인정했다. 인정치 않은 사람이 꼭 두 사람이 있었는데 말시온(Marcion)과 알로기(Alogi)이다. 말시온은 어떠한 문헌이라도 유대적이라면 모두 거부하는 태도를 가졌고, 알로기는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이레니우스(Irenaeus)가 말한대로 예언의 은사를 영속시키는 관념을 지지하는 문헌은 무엇이나 다 거부하였다. 3세기 경 계시록은 서방교회의 정경가운데 완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③ 동방교회
동방교회는 거의 하나같이 계시록을 부정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는 계시록의 정경적 권위를 부정했다. 유세비우스(Eusebius:A.D.260-340)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유세비우스는 정경을 구분할 때 계시록을 고려해 볼 수 있는 책(αντικεγομενα)으로 여겨야 할지 외경(νοθα)으로 여겨야 할지 불분명한 태도였다. 그는 파피아스(Papias)의 천년 왕국에 대한 해석에서 계시록을 부인한 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유세비우스의 영향은 지대했다. 예루살렘의 씨릴(Cyril of Jerusalem A.D.315-386)은 후에 교인이 계시록을 강단에서 공식적으로 읽는 것을 금하고 개인적 사용도 반대했다.
소아시아의 후기 교회들이 계시록을 사용치 않았다. 그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회(A.D.360년경)에서 결정한 정경 주에도, 사도의 율령(Apostolic Constitutions)에도 그레고리 나치안츄스(Gregory Nazianzus:p.389)의 목록에도 계시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몹수에스티아의 데도돌(Theodore of Mopsuesstia,A.D.340-428)은 계시록을 공동서신과 함께 부정했다. 그의 주장을 따른 자는 네스토리아교회(Nestorian Church)와 4세기의 안디옥 학파(Antiochian School)등이다. 그러나 6세기 경에 가서 동방교회가 계시록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갑바도기아에 있는 가이사랴의 안드레는 계시록의 주석을 썼고, 예루살렘 학자 레온티우스(Leontius)는 계시록이 신약의 최종 정경이라고 했다.
④ 완전인정
계시록을 정경으로 완전 인정한 것은 37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축제 서한(Festal Letter)에서 였다. 382년의 다마신 회의(Damasine Council)와 서방교회를 위해 공인된 신약성경의 목록을 인정한 칼타고회의(A.D.397)에서 계시록을 인정했다. 서방교회에서는 2세기부터 계시록이 정경으로서의 위치를 굳혔으나 동방교회에서는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오랜 후에 인정케 되었다.

10. 본문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여러 언셜체(uncial) 필사본에 기옥되어 있다. 예를 들면 (Sinai ticus.Ⅳ C.), A(Alexandrinus,V.C.), C(Ephraemi Rescriptus,VC.), P(Wolfenbuttel.Ⅸ C.), 046(X C.), 051(X C.), 052(X C.), 0207(Ⅳ C.), 0229(Ⅷ C)등이다. 그리고 두 개의 파피루스 사본에서도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또 알렌드(Aland)는 1966년판 헬라어 신약에서 아래 기록한 초서체 사본 중에 공인된 본문과 다른 중요한 이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서체의 사본은 모두 11세기 이후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 가운데는 단편적인 이문체에 관해 값진 증거를 제공하지만 인정된 본문으로써의 비중은 언셜 필사체의 사필과 파피루스 사본에 있다. 예상대로 알랜드가 제시한 초서체 사본을 포함한 대부분의 초서체 사본은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을 포함하고 있다. 파리루스 사본 P18과 P47은, A.C.P,0207들의 사본과 일치하는 반면046과 Ⅰ과 다른 몇몇 초서체 사본은 제3의 그룹을 이루고 있다.
몇가지 중요한 이문이 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5에 공인된 본문에는 루우산티(λουσαντι 해방)으로 되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루우산티(λυσαντι 해방됐다)로 되어있고 5:9은 대부분의 초서체 사본에는 헤마스(우리들)로 되어있는 반면에 A에서는 이 말을 생략하고 있고, 15:3은 여러 초서체 사본에는 호바실루스 톤에드논(만국의 왕)으로 되어 있고, 다른 초서체 사본에는 호 바실루스 톤 아이오논(만대의 왕)으로 되어 있고, 19:3은 A외 비잔틴 본문에는 베밤메논(담근)으로 되어있고, p,2329에는 “엘란티스메논”(뿌린)으로 되어있다.
사본간에 서로 다른 글체가 위와 같이 나타나지만, 그러한 것은 아주 미미한 것인 동시에 그리 중요치 않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비교적 어려운 표현을 번역하기 위해서나, 문법적 난맥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가한 작은 수정일 줄 안다. 그러나 본문상으로는 큰 생략이나 결함은 찾아볼 수 없다.

11. 내용
계시록은 비록 기이한 상징을 수집해 놓은 책같이 보이지만 아주 조직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계시록은,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란 표현을 여러번 썼는데 그 표현을 기준하여 6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표현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전개되는데 장면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적 표현이 나타난다. 계시록의 열쇠는 기독론이지 연대론이 아니다. 비록 계시록이 시종일관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연대론으로는 말할 수 없다. 계시록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서언: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심(1:1-8).
㉠표제
㉡대리인
㉢축복
㉣수신처
㉤인사
㉥표어
㉦인정
②환상Ⅰ : 그리스도의 여러교회(1:9-3:22).
㉠그리스도의 모양(1:9-20)
㉡서신(2:1-3:22)
ⓐ에베소 교회에(2:1-7)
ⓑ서머나 교회에(2:8-11)
ⓒ버가모 교회에(2:12-17)
ⓓ두아디라 교회에(2:18-29)
ⓔ사데 교회에(3:1-6)
ⓕ빌라델비아 교회에(3:7-13)
ⓖ라오디게아 교회에(3:14-22)
③환상Ⅱ : 그리스도와 우주(4:1-16:21)
㉠하늘의 장면(4:1-11:19)
ⓐ보좌앞의 경배(4:1-11)
ⓑ어린양의 사명(5:1-14)
ⓒ인을 떼심(6:1-8:5)
첫째인:정복(6:1-2)
둘째인:전쟁(6:3-4)
셋째인:기근(6:5-6)
넷째인:사망(6:7-8)
다섯째인:순교(6:9-11)
여섯째인:우주적 재앙(6:12-17)
일곱째인:고요함(8:1-5)
ⓓ일곱 나팔(8:6-11:19)
땅에 내린 재앙(8:6-7)
바다에 내린 재앙(8:8-9)
강위에 내린 재앙(8:10-11)
하늘에 내린 재앙(8:12) 화의 선포(8:13)
사람위에 내린 재앙(9:1-11) 화의 선포(9:12)
마귀의 마병대(9:13-21)
삽화:천사와 선견자(10:1-11:14)
(작은 책:10:1-11)
(성전 측량:11:1-13)
(화의 선포:11:14)
일곱째 나팔(11:15-19)
㉡징조(12:1-16:21)
ⓐ여인과 아들과 용(12:1-17)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10)
ⓒ땅에서 나온 짐승(13:11-18)
ⓓ시온 산의 어린 양(14:1-5)
ⓔ천사의 소식(14:6-13)
복음의 선포
바벨론의 멸망
징벌의 선포
주안에서 죽은 자에 대한 축복의 선포
ⓕ구름 위의 추수인(14:14-16)
ⓖ땅의 포도주(14:17-20)
㉢대접 들(15:1-16:21)
ⓐ승리의 노래(15:1-4)
ⓑ준비(15:5-16:1)
ⓒ첫째 대접:독한 헌대(16:2)
ⓓ둘째 대접:바다가 피가 됨(16:3)
ⓔ셋째 대접:강이 피가 됨(16:4-7)
ⓕ넷째 대접: 해가 태움(16:8-9)
ⓖ다섯째 대접:흑암(16:10,11)
ⓗ여섯째 대접:아마겟돈(16:12-16)
ⓘ일곱째 대접:지진(16:17-21)
④환상Ⅲ : 승리의 그리스도(17:1-21:8).
①바벨론의 심판(17:1-18:24)
ⓐ문화의 심판(17:1-18)
ⓑ도시의 심판(18:1-24)
②하늘의 응답(19:1-10)
③악을 정복함(19:11-20:24)
ⓐ정복하는 그리스도(19:11-20:24)
ⓑ적 그리스도의 멸망(19:17-21)
ⓒ사탄의 결박(20:1-3)
ⓓ천년 통치(20:4-6)
ⓔ사탄의 멸망(20:7-10)
ⓕ최후 심판(20:11-14)
④새 예루살렘(21:1-8)
⑤환상Ⅳ : 하나님의 성안에서 그리스도(21:9-22:5)
①성의 출현(21:9-21)
②성의 광채(21:22,23)
③성의 거주자(21:24-27)
④성의 기쁨(22:1-5)
⑥결론:그리스도의 경고(22:6-21)
①순종(22:6-9)
②일(22:10-15)
③경계(22:16-21)

12. 해석
계시록의 해석은 어렵고 불확실하다. 두 주석가가 세부내용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언어의 상징적 특성과 그 뜻의 불확실성은 이러한 성취불가한 교의상의 종국성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네가지의 해석방법이 있다.
첫째 해석방법은 프리테리스트(preterist)의 방법인데, 곧 계시록의 예언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는 해석방법인데, 그들에 의하면, 1세기말 경의 아시아 교회들의 역사적 상태를 서술한 것이며, 고로 모든 상징적 표현은 책을 기록한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한 특유한 말로 해석할 것인지 장래의 것을 예견하는 것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과 짐승들은 로마제국을 말하고 12장의 여인은 핍박받은 교회를 상징하며 여러 가지 심판은 계시록 기자가 살아있는동안 일어난 여러 가지 자연적 재앙에 대한 각양의 표현이다. 현대 주석가들 중에도 이러한 해석방법은 채택하는 이가 많다. 그리고 이 해석방법은 계시록이 기록되던 때에 비추어 계시록을 연구할 수 있는 잇점과 또 이 계시록을 읽는 자로 하여금 그 상황을 되새겨 하나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잇점이 있지만 이러한 해석방법은 계시록이 갖고 있는 예언적 요소에 공정을 기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 방법은 역사주의자의 해석인데 이 방법은 계시록은 그 저작자가 계시록을 기록할 때로부터 세대의 종말까지의 전 기독교 역사의 과정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인과 나팔과 대접은 기독교 교회, 특히 서방교회 발전 과정의 연대적 순차의 표현으로 작자의 시대에 있던 아시아 교회들의 상황으로부터 시작하여 악과의 최후의 대결을 거쳐 장래에 있을 하나님의 성의 출현의 기사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이 시작과 끝의 두 점사이에 있는 기사들은 그 두 점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적 과정으로 봄이 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을 따르려 할 때의 제일 큰 난점은 그 두점의 중간 기간이 너무 막연한 기간이라는 사시리과 또 계시록에 나오는 어느 하나의 상징적 사실도 어느 뚜렷한 역사적 기사와 관련시키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어떠한 상징을 이미 알려진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을 시켜 생각해 볼 수은 있으나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기간이 곧 그러한 관련이 잘못임을 보여준다. 더구나 역사주의 해석자들은 주로 계시록 기록 이후 9세기간의 교회발전 사항을 가지고 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유럽 밖의 교회는 거의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며 그들은 주로 중세기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다루고 A.D.1500년 이후의 교회발전에 관해서는 거의 침묵을 지킨다. 만일 정말로 계시록이 1세기 말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의 교회 발전 상황을 하나의 상징적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했다면, 그 모든 기간을 완전히 잘 나타내는 상징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미래주의자의 견해로써 이 방법은 3장 이후의 전 계시록을 교회시대의 끝에 있을 사실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의 전 기간동안 계속되는 교회들의 일곱가지의 뚜렷한 형태를 나타내든지, 그 기간동안 교회역사의 일곱 단계적 기간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방법에 의하면 4장에서 22장 사이에 나타나는 사실 중 하나도 현재에 적용할 수 없고, 다만 최후에 되어질 것을 예언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니고, 나팔고, 대접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땅에 거하는 모든 악인에게 내릴 최후 환란에 대한 면밀한 표현이며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환상은 영원한 의인의 나라를 말한다.
넷째 해석방법은 관념론자의 견해인데, 이에 의하면 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실제적 가치는 전혀없다고 한다. 다만 그 모든 환상은 1세기 경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묵시적 상징으로 선악간의 일반적 대결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계시록은 꼭 어느 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상 모든 세대에 꼭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방법들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어느 정도의 장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프리테리스트의 관점은 계시록의 내용은 계시록을 기록 할 때 있었던 사실들과 반드시 관련이 있어야한다고 한 것은 옳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교훈도 모두 부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계시록 13장과 17장에 나타난 짐승이나 음녀의 상징에서 로마제국의 핍박 유혹적인 이교도의 활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1세기 경에 하나님의 성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교도가 땅에서 멸절되지도 않았다.
역사주의자들도 과연 그 주장이 그럴듯하다. 만일 계시록 1장이 계시록 저자의 생존 당시의 일 곧 “이제 있은 일”(계1:19)에서 시작하여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일로 끝을 맺는다면 그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상징들로 반드시 두점 중간에 일어나는 역사적 발전과정을 말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러한 모든 상징들이 사건들을 말한 것이냐 원리들을 말한 것이냐가 된다. 만일 전자라면 무슨 기준을 가지고 어느 상징은 어느 사건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어떠한 방법으로 그 모든 사건들을 연결시킬 수가 있는가? 역사주의자들은 단 두 사람도 어느 상징을 어느 역사적 사건에 관련시키는데 합당치 않으며 그 중 어떤 해석은 너무 억지인 해석이 되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미래주의자들의 입장은 계시록의 주요한 사건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관련시킬 수 있는 논리적 조화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의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계시록에 기록된 기사 중 아시아의 일곱 교회 존재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기사들의 성취 문제에 있어서는 이론이 별로 있을 수 없다.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하늘로부터 선견자에게 나타난 말씀 중,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4:1)는 말씀을 보아도 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장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이 일 후에”란 말은 이중적 뜻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1,2,3장을 교회의 때로 해석한다면 “이(This)…”란 말은 교회의 때를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을 뜻할 것이다. “장래(future)"란 용어도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다. 그 장래란 말은 선견자의 입장에서 그때 이후도 될 수 있는데 그 당시의 “현재”도 포함되는 말이요, 또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종말론적 사건들을 뜻할 수 잇다.
관념주의자들의 해석방법은 계시록에 나타난 영적 전쟁을 강조하고 계시록은 기독교 교회의 모든 시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으로 표현한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계시록이란 단순히 미리 앞서서 그려놓은 역사궤도가 아니요 오히려 천국의 관점에서 기록한 역사철학이라 함이 가하다. 그러나 관념주의자들의 해석방법은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계시록이란 하늘에서나 땅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어떤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단순한 실화들을 모아 영적 교훈을 도색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계시록은 독자의 환경과 정함없는 생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징조를 갖고 있다.
문제 해결의 최선의 올바른 방법은 최후에 가장 완전한 주석이 나와야 할 것이고 그리하면 이 모든 요소들은 서로 상충점없이 하나로 정리될 것이다. 분명코 계시록 가운데 나타난 사상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상징적 용어와 1세기 말 경에 통용되는 상징적 용어 가운데서 은연중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계시록의 취지는 어떤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예언하자는 것보다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을 보강하고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록 가운데는 하나님의 대속의 계획이 점점 절정해 달하고 끝에 가까워짐에 따라 역사적인 경향도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계시록의 예언적 입장은 그 내용의 참 뜻을 해결치 않고는 부정할 수 없다.

12. 해석사
사데의 주교 멜리토(Melito of Sardis:약 170)와 이레니우스(Irenaeus 약 180)와 히폴리투스(Hippolytus. 약 220)등이 계시록에 관하여 기록했다고 생각하지만 현존하는 최초 주석은 빅토리누스(Victorinus A.D. -303)가 작성한 주석이다. 이 주석은 학술적이라기 보다 설교적이며 해석상 어느 정도 공상적이다. 빅토리누스의 주석은 조직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주석은 3세기경 서방교회에서 계시록을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빅토리누스의 저작으로 생각되는 이 주석이 어거스틴의 제자 중 어느 하나가 자기 스승의 견해를 따라 크게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주석은 빅토리누스의 실제 교훈이라고 신빙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못한다. 그 내용은 니케아회의의 이전 시대의 교부들과 같이 어거스틴의 방법대로 상징적 무 천년적 이론을 갖고 있으나 제롬(De Viribus Illustris 19)과 터툴리안 그리고 락탄티우스(Lactantius)와 같이 빅토리누스를 천년설 주창자로 구분했다. 아프리카 교회의 지도자 티코니우스(Tyconius:약 390년)도 계시록 주석을 썼는데 그 주석은 전설을 “신령화”하는 면을 취했다. 그의 주석은 다른 사람이 인용한 몇 구절 외에는 구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의 어거스틴과 스페인의 프리마시우스(Primasius)와 영국 베데(Bede) 등 많은 작가들이 인용한 말을 보면 그의 주석은 영향력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티코니우스의 주석 방법은 후에 많은 주석가들이 따르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어거스틴이다. 그의 논문,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도성을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묵시록의 풍유적 해석을 좋아했다. 서방교회에서는 어거스틴의 교훈이 교황제도의 성장에 많은 힘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지배해야된다는 이유를 세워 정치적 절대권도 취하게 되었다.
프리마시우스는 티코니우스의 은유적 방법을 채택했다. 또 그의 뒤를 따른 사람이 남불란서의 베네딕트 수도사 오트퍼투스(Autpertus:약775년)이었는데, 그는 빅토리누스와 티코니우스와 프리마시우스등의 주석에 대한 개요서를 작성한 사람이다. 영국태생으로 찰즈대제 궁중의 대 스승이었던 알퀸(Alciun:A.D.735-800)은 선배들의 은유적 주석방법을 정착시켰다.
알퀸의 제자,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A.D.775-836)와 또 그의 제자 왈라프리드 스트라보(Walafrid Strabo:A.D.807-849)도 동일한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왈라프리드는 처음으로 글로사 오디나리아(Glossa Ordinaria)를 창안했는데 이는 일군의 방주 혹은 행간 주를 말하는데 이것은 중세기의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
중세기에는 티코니우스와 그의 제자들의 방법과 그 내용에 큰 변화는 없었다. 하벨 버어그의 안셀므(Anselm of Havenberg,A.D.1129-1155) 저서 중에는 좀 일반적인 은유적 해석에서 보다 구체적인 역사주의적 해석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도위치의 루프어트(Rupert, fl.1111-1129)는 계시록을 성경 역사의 기초 위에서 해석하려했다. 대부분의 그의 설명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는 어는 모양이든 계시록의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언과 세상 역사와의 연결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방법은 후에 플로리스의 요아킴(Joachim of Floris)이 유용하게 사용했다.
플로리스의 요아킴(A.D.1130-1201)은 계시록 해석에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는데 주로 신비적 은유적 해석 대신 연대순적 구분을 강조했으며 일곱이니과 기독교 시대의 7시대와 병행시켰고 그 끝을 자기 때의 바로 뒤에 따라오는 종국의 때가 된다고 했다. 그는 티코니우스의 방법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해석에 있어서 기수가 되었으며 그는 주로 역사는 세 시대로 구분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성부 시대로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때까지를 말하며, 둘째는 성자의 시대로 예수로부터 자기의 시대까지라고 말하며, 셋째는 성령의 시대로 그 기간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심판의 날이 그 끝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보상론을 소개했는데, 이는 중세교회가 번창했던 성자의 때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관념은 종교 개혁의 발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되살아난 묵시록에 대한 관심은 종교개혁 때의 논쟁적인 분위기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적그리스도인 짐승(13:)과 짐승 위에 앉은 음녀(계17:18)는 교황제도와 로마제국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이 계시록에 관한 주석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논쟁 문헌은 교황권과의 싸움에 있어서 계시록의 방법을 쓰므로 악을 반박했다. 그렇게함으로 그들은 적그리스도 혹은 짐승은 교황권이라는 사시리과 교황권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로마교회는 또 계시록을 이와는 반대로 해석하여 대응했다. 살라만카(Salamanca)의 제수잇 학자 프란시스코 리베라(Frnacisco Ribera 1537-1591)는 1591년에 500페이지에 달하는 계시록 주석을 출판했는데 후에 그 책은 여러 번 수정을 가하여 재 출판되었다. 그는 그 책에서 적그리스도은 교황권이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한 개인의 통치자라고 했다.
종교개혁(1542-1621) 당시 가장 박식한 카톨릭 변증학자 벨라민(Bellamin)도 다른 여러 변증학자와 같이 리베라의 기본 주장을 고수했다. 세빌(Seville)의 스페인계 제수잇학자인 루이스 데알카잘(Luis de Alcazar,1554-1613)은 프리테리스트(Preterist계시록의 예언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고 계시록은 주로 A.D.476년 로마 멸망 이전의 사건들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의 논쟁은 이 세가지 주류의 계시록 해석 방식을 체계화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에 일어나는 신교 신학에서 미래파적 방식을 17세기 제5왕국파(The Fifth Monarchy men;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 온다고 믿고 폭력을 써서라도 제5왕국을 빨리 세워야한다고 주장한 17세기 중엽 크롬웰 시대의 영국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청교도, 광신자의 한파)가 널리 전개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지나친 행위로 인하여 그 학설이 악평을 받게되었지만 19세기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초기주장과 19-20세기의 성경 연구회(Bible Conference) 활동으로 그 학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로마교회는 어거스틴의 학설을 따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고 천년 왕국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의 그 중간 기간이라고 주장했다.
19-20세기에 신교에서 나온 계시록 주석은 19세기의 모세 스튜아트(Moses Stuart)와 20세기의 제임스 스노우든(James Snowden)등 소수의 프리테리스트와 엘리오트(E.B.Elliott)와 고든(A.J.Gordon)등을 대표자로 한 역사주의 해석파와 사이스(J.A.Seiss)와 같은 미래주의적 해석파등이 있다. 그런데 J.A. 사이스가 쓴 “묵시록 강해”(Lectures on the Apocalypse)는 이 학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13. 신학
계시록은 신학논문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교리의 명확한 윤곽이 암시되어 있다. 가장 강조된 것은 종말론이다. 선견자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세상과,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위협앞에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교회의 장래를 말해주고 있다.
그가 제일 먼저 기술한 것이 하나님의 인격과 절대성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보좌의 구심성은 모든 환경,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의 우월성을 알려주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로마제국의 위협보다 더 크며 그의 능력은 핍박하는 로마제국의 능력보다 더 크다. 언제 어떻게 심판을 내리느냐는 하나님의 뜻에 결정될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악과 반항에 관계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 그를 “전능하신 자(4:8,11:17,15:3,16:7,14,19:6,15,21:22)로 만물의 창조자(4:11,14:7)로 만인의 심판자(20:11-15)로 부른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1:4에 암시되고 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보좌 앞의 일곱 영과…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예수 그리스도”(1:4-5). 이 삼위일체론은 비록 한 구절안에서 다 언급된 것은 아닐지라도 계시록 전체에 나타나 있으며 계시록 전 책이 이에 대한 것이다(1:1).
계시록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론적이다. 예수의 역사성이 명백하게 강조되어 있다. 예수는 유대인 중의 하나요(5:5), 12사도를 거느렸고(21:14),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며(11:8),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1:5,18). 그리스도의 높임은(3:21) 1장에 미리 예언되어 있다.
역사의 진행에 대한 예수의 권력(5:6-12)은 전 계시록의 움직임에 관한 열쇠가 된다. 예수께서는 희생의 제물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5:6), 다윗의 왕통의 후계자 유다지파의 사자로(5:5), 땅의 추수를 완성키 위해 구름타고 나타나는 심판의 인자로(14:15) 묘사되었다.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렀는데(19:13), 이 명칭은 요한복음에서만이 나타나 있다. 예수는 교회의 수호자시오, 또 책망자시요(1:12-20), 땅의 최후의 심판자시다(22:12). 계시록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나라의 설립(11:15)이며 예수님은 최후 하나님 도성의 빛이 되신다(21:23).
성령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으나 개인의 영적 체험에 있어서의 성령의 위치는 강조하지 않았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영”(1:4)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는 계시록 기자가 환상을 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셨다(1:10,4:2,17:3;21:10). 그러나 “성령에 감동하여”(in the spirit, εν τω πνευματι)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삼위 중 성령의 위를 나타내기 위함보다,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부와 함께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는 말을 했다(22:17).
하나님앞에서의 인간의 상태는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6:16-17), 마귀의 세력에 쉽게 희생물이 되며(9:4,13:3,14,17:8), 자기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기고 되어있는 존재이다(20:12-13). 구원은 믿는 자에게 보장되어 있다(7:3). 신자와 불신자의 가는 곳은 명시되어 있고 반역하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은 불못에 들어갈 것으로 되어있다(21:8).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거하게 된다(22:14).
개인의 영적체험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주로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논한 3장까지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께로 향한 개인의 사랑과 핍박 중의 충성과 신앙의 인내 등이 계시록에서 강조한 중요한 요소들이다.
사탄의 주관 아래있는 마귀적 악의 세계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9:4-11). 계시록이 말하는 모든 싸움은 영적 싸움이요, 지상의 전쟁은 하늘의 전쟁을 뒤따라 일어난다. 하늘의 전쟁에서 사탄은 수많은 의의 천사에게 쫓기여난다(12:7).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는 결국엔 정복을 당하고(12:9) 어느 기간동안 결박되어 있다가(20:1-3) 최후에 가서는 불못에 던짐받는다(20:10). 계시록13장에서 짐승으로 표현된 존재와 압제와 핍박을 일삼는 정치종교의 권력의 존재도 동일한 멸망을 받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유사한 방법으로 천사론(Angelology)도 신약 어느 성경에서보다 계시록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도 교회천사(사자)에게 보낸다고 되어있다. 계시록의 전체에 걸쳐 천사는 소식을 전하는 자로, 혹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 나타난다(5:2,7:2,3,8:2,10:1,12:7,14:6,8,9,17,15:1,17:1,18:1,21,19:17,20:1,21:9,22:9). 계시록4:6-8과 그 이하에 나타나는 “생물”은 이사야6장의 스랍과 같은 존재인데 천사에 속한 영물들일 것이다. 천사와 마귀는 모두 지각있는 영적 존재들인데 선과 악으로 분리되어 있다(12:7).
뚜렷한 것은 종말론이 계시록의 강조점이라는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교리적 성격은 역사에 관한 신적계획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는 모두 미래에 초점을 두었는데 각 교회에 준 최후의 약속의 말씀은 “하리라”란 말로 시작되었고 앞으로 받을 상벌을 암시한다(2:7,10,17,28,3:5,12,20).
이 책의 주요 부분은 “반드시 속히 될 일”(The things which must come to pass here after)을 취급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장래의 새로운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중에 나타나 있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현재의 구원론적 기능보다 심판면에 더 나타난다. 종말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목표로 삼는 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와 하나님 도성의 건설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한 상태등이다(19:-22:).

속죄의 성서적 근거

속죄에 관한 기독교인적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야할 것은 곧 성서이다. 여기서는 구약성서에 표시된 발전의 준비적인 단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으심에 계시되어 있는 희생에 관한 신약적 개념을 볼 수가 있다.

1.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속죄의 예표
속죄의 교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 점차적으로 계시 되어졌는데 그것은 다음 3가지 주요한 단계로 구분된다.
① 원초적인 희생
구약성서는 원초적 희생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을 준바가 없으나 처음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성업에 의해서 희생이 폐기될 때까지 희생에 의한 예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족장들의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감을 언제나 계속해서 생생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에게 어떤 방법으로 나아가든지간에 제단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간주 되어졌다. 가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희생에 의한 예배의 기록은 피에 의한 희생이 곧 속죄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고려되는 것을 결론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② 율법의 희생
모세의 시대에 있어서의 일정한 희생의 제정은 속죄의 개념이 발전하는데 있어 진일보의 진전을 초래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지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면서 그것은 따라서 도덕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속죄가 종교적 집단에 부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개인의 죄가 발생하는 원천의 공통적인 타락성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그 때문에 속죄는 필요한 것이었다. 피를 드리는 일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죄인이 가져야할 깨끗한 생활을 표시하는 일면 속죄는 사망에 의해서만 보상될 수가 있다는 것을 표시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물에 의한 희생은 위대한 실체이신 그리스도-그의 피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③ 선지자의 예언
이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율법의 희생을 보충한 것이며, 메시야적 개념과 그것에 수반하는 메시야의 희생적인 고난과 죽으심에 관한 개념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킨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 분 안에서 진리의 생생한 총체를 보았다.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신-인으로서 그는 진리의 전역을 의식하고 계셨으며 이 불가분의 전체성으로부터 말씀하실 수가 있었다. 참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질적 관계를 가지시며 또 그런고로 그들을 위해서 대상적인 화목제물을 드리실 수가 있었다. 구약성서에서 이 영적 진리의 최고봉은 여호와의 고난의 종에 관해 이사야의 놀랄만한 예언중에서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2. 희생에 관한 신약성서적 개념
신약성서에 보는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개념은 구약에서 예표된 것이 성취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서 말씀대로 돌아가셨다고 말씀되어진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이 사람들을 위한 속전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셨는데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빼앗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형벌을 상황에 의해서 발생했던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대 목적이라고도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진리를 위한 순교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돌아가심은 희생적이며, 또한 화목케 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즉각 우리에게 속죄를 강조하는 동기와 그 대상적 성질을 고려하도록 해 준다.

3. 속죄의 동기와 기인
속죄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중에서 발견된다. 때때로 이것은 속죄의 동인 혹은 기인으로서 알려진다. 이것에 관련하는 가장 현저한 성구는 복음의 축도인 요3:16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요3:17). 또 다른 성구들도 동일한 진리를 명시하는 곳이 많다. 속죄는 그 동기에서나 목적, 또는 범위에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한 사랑에 관한 준비와 표현이라고 이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망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지 그 사랑을 낳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4. 속죄의 대상적 성질
“대상적(代償的 Vicarious”이란 용어는 일반적 의미에 있어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대신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상적 속죄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망이 보상적이었음을 의미한다. Watson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즉 우리를 위한 적절한 대신자로서 고난을 받으셨다.” 그가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즉 그의 죽으심이 우리의 범죄로 인한 형벌과 관련된다고 말해주는 다음 성구들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성서중에 “for(위하여, 대신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것은 후페르(υπερ)인데 다음 성구들 중에 나타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유익하도다(요11:5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5:6,8)…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않게 하려 함이라…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려 하심이니라“(고후5:14,15,21)(갈1:4,3:13;엡5:2,25;살전5:5,9,10 참조).
제2의 헬라어 전치사는 안티(αντι)이며 마20:28이나 막10:45에서 발견된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분으로 말씀 되어진다. 이들 헬라어 전치사는 언제나 “대신”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 가끔 “…를 위하여, …때문에”를 의미한다는 반대론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물론 “…대신”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 전치사들이 주로 “대신”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5. 성서의 용어
성서는 그리스도의 사망을 화목제(물)(Propitiation), 구속(Redemption), 화목(Reconciliation)이라고 간주한다. 율법의 저주밑에 있을 때에 죄인은 죄책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밑에 노출되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의 죄책은 보상되며 하나님의 진노는 화해된다. 죄인은 마귀와 죄의 속박밑에 있으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속량의 댓가를 통하여 그 속박으로부터 구출되며 자유해방되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일로 화해된 것이다. 이 일들에 관한 성구는 특별히 풍부하며 만족할 만하다.

화목제(물)(Propitation)은 구약성서에 있는 Kapporeth나 시은소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화목케 한다는 일은 분노한 사람의 분을 달래는 일 혹은 범죄를 위해서 보상하는 일이다. 힐라스모스란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3가지의 다른 의미로 쓰여진다.
(1)그리스도는 힐라스모스이시다. 즉 화목케 하시는 분인 동시에 화목케하는 효력이시기도 하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느니라”(요일4:10).
(2)그리스도는 힐라스테이리온 혹은 시은소이시다. 이 어휘는 70인역 성서중에 쓰여졌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
(3)형용사가 사용되어 지는 곳에서는 히브리서2:17에서와 같이 수마(θυμα희생)란 뜻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여기서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말씀된다. 여기서 힐라스케스다이란 어휘가 쓰여졌는데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백성의 죄를 위해서 화목케 한다 혹은 속량한다”는 뜻이다.

구속(救贖-Redemption)은 문자적으로, “되사다-to buy back”를 의미하는 말로부터 유래한다. 구속하는 일과 속죄를 의미하는 루트로우, 아폴루트로우시스는 각각 고대 헬라인들과 신약 성서 기자들이 사용한 것인데, 루트론(λυτρον-속전) 즉 구속의 댓가를 지불함으로 수인을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휘는 타인이 대불해준 댓사에 의해서 되어지는 모든 종류의 악으로부터의 행방이라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여러 성구의 진정한 영적 의미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랄”(고전6:2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엡1:7,벧전1:18,19,계5:9참조). 그리스도의 사망은 속죄의 댓가였다.-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λυτρον)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6:2). 여기서는 대신의 개념이 매우 현저하다-타자를 위해 한 가지 것이 지불되는 일 즉 “그리스도의 보혈”은 포로된 자와 저주받은 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불된 것이다.

화목(Reconciliation)은 카탈라소우나 아포카탈라소우란 동사로부터 취해진 것인데 두 동사는 모두 “화해하다”로 번역된다. 이 말들은 본래 하나의 상태로부터 또 다른 하나의 상태로 단순히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쓰여지는 경우는 원수된 상태로부터 화해와 우호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그 용어를 자유롭게 쓰고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혹은 화해 즉 카탈라게인)을 얻게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롬5:10-1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1-22). 이 성구와 및 유사한 여러 성구를 볼 때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됐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하지만 화해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적대심이 다만 폐지되었다는 일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는 사법상의 것인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법적 변화 그것이 화해의 개념에 언급되어진다. 또 이 화해는 우리가 가진 적대심을 버림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은 이리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2,000년전의 화목(Previous Reconciliation)은 죄있는 자들에게 지금 선파되어야 할 “화목하게 하는 말씀”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즉 이 말씀에 의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되도록 간청되어지는 것이다.

점진적 계시

점진적 계시라고 해서 성경의 계시가 문화적 종교적 영역에서의 진화의 과정이란 의미는 아니다. 성경에 있어서의 이런 종교진화의 관념은 단지 성경의 진정한 계시적 내용과 성경적 계시의 독특성을 부인하는 방편일 따름이다. 그것은 포스디크의 “성경의 현대적 용법”(The Modern Use of the Bible) 안에 있는 분명한 고전적 진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점진적 계시로 의미하는 내용은 성경은 하나님의 운동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운동의 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운동 안에서 구약의 신학적 유아상태에서 신약의 성숙상태를 통해 사람을 교육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구약에는 성숙된 관념이 없다거나 신약에는 단순한 요소가 없다거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점진적 계시는 계시의 일반적 형태이다. 이것이 신약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여러 문제점에서 논의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율법을 파괴하거나 완화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오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완전케 하시러 오신 때문이다. 「브로더스」(Broadus)는 그의 “마태복음 강해”에서 이 본문(마5:17-20)을 놀랍게 주석하고 있다(The American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그리스도는 폭넓고 광대하며 차원높은 율법의 의미를 나타내시고자 오셨다. 율법은 어디까지나 온당하다. 다만 그것은 만족할만큼 나아가지를 못했을 뿐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기본적인 도덕을 가르치고 있으나 우리 주님은 율법을 보다 고차원의 동기와 영적인 것으로 향상시키신다. 살인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사실 사람은 사랑의 고차원적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저주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약속의 신성한 의무를 보아야 한다. 십계명의 도덕은 인간의 윤리적 영적 신학적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시발점이지만, 산상수훈은 하나님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을 보다 높은 고차원적 윤리의 행동 수준에 이를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라는 두 개의 시기로 양분했다. 그리스도이전 시기는 어린이 시절, 후견시기, 미성숙시기, “기초학교의 교육”시기로 명명되었다. 때가 차매 그리스도가 오시고 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리와 도덕의 성숙한 완전 계시가 오게 된 것이다. 구약은 신학적 기초를 배우는 시기며, 육신의 규례와 기본교육의 시기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계시가 왔으며,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숙한 후사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특이하게도 아주 명백하게 들어나는 사실은 히브리서1:1-2절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두 개의 위대한 계시를 갖고 계신다. 그 하나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아들을 통해서 교회에게 준 것이다. 3개의 부사가 히브리서를 시작하고 있다(희랍어 본문에 보면). 그 부사 각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방법의 일부를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구약은 시대를 통한 그 진행에 있어서 일정하지 아니했다. 즉 계시는 이따금씩 오곤했다. 그리고 계시의 방법이 아주 다양하다. 하나님의 손으로 기록된 율법처럼 우리는 다양성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발람은 자기가 소유한 짐승의 목소리로 경책을 받기도 했다. 이 계시의 기간이 고대(palai)이다. 즉 말하자면, 인간의 신학적 유아와 소년시절이다. 1절과 대조적으로 2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최종적인 말씀을 하고 계심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의 최대의 유능한 기관인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서 명백히, 직접적으로,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다. 마침내 하나님은 완전한 계시인 신약을 낳게 하셨다.
히브리서의 특별한 가르침은 구약계시는 물질적 계시(a material revelation)로서, 지상적이고 문화적인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영적 진리이며, 모형(types)과 그림자(shadow)와 비유로 나타난 진리인데 비해서, 신약은 영적 계시(a spiritual revelation)로서 옛 언약 형태의 실제며 실질이며 성취이다.
이와같은 점진적 계시의 전망은 해석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해석자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를 기대해야 한다. 해석자는 신약의 의미를 무리하게 구약속으로 넣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해석자는 구약을 보다 더 만족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해석자가 신약속에 구약의 반영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구약계시 기간에 주어진 어떤 상태에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당시의 관습과 예절과 도덕을 투시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석자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하리라. 그것은 “시대를 분별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성경을 조화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다(Distingue tempora et concordabis scriptura). 이 말은 신약적 표준의 도덕이나 교리를 구약성경 구절에 무리하게 적용해서 성경의 모순을 일으키는 일을 없게 만드는 하나의 지침문이기도 하다. 일부일처제도는 신약에서 명백히 이행할 것을 강조하는 제도이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계시도 받은 바 없는 족장들의 일부다체제도와 모순되지는 않는다.
점진적 계시는 영감의 교리에는 하등의 영향력을 끼치지도 않으며, 또 그것은 구약이 신약보다 더 저급하게 영감되었다고 의미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점진적 계시가 단순히 말하고 있는 내용은 계시의 충만이 신약에 있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는 분명한 가르침이 없다거나 또는 구약의 예언은 무효화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한편, 기독교 신학의 심장은 보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를 지닌 신약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독교 신학과 윤리는 신약 계시 안에서 기본적으로 뿌리를 박아야 한다.
의(신약)

신약에서 ‘의’라는 개념의 용법은 계약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 계약관계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약 당사자들의 적극적 참여를 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약관계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이 계약관계에 참여하는 자는 ‘의롭다’고 불리어진다. 그리고 구약에서처럼, 계약관계(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이든)를 유지하는 행위는 의롭지만 이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는 불의하다.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행위가 윤리-도덕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행위가 어떤 윤리적 규범(신적규범이든 인간적규범이든)에 부합되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계약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계약 당사자에게 요구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신약의 일반적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활동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났다고 한다. 그 구속활동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많은 인간과 계약관계를 유지하시며, 그래서 그 관계를 회복하신다. 반면에 인간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활동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그 믿고 받아들임에 의존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계약관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1. 용어법
명사인 헬라어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대체로 ‘의’로 번역된다(마3:15등, AV에서는 그 대본에 이 말이 나올 경우 사실상 예외 없이 ‘righteousness'로 번역함). 그렇지만 문맥에 따라 ‘디카이오쉬네’는 ‘경건함‘(마6:1)․‘공의’(행24:25)․‘의인’(갈2:21)․‘옳은’(요일2:29), 혹은 ‘옳은 것’(엡5:9)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eis dikaiosynen)이라는 구절도 ‘의롭다고 인정되기 위해’(롬10:4)나 ‘의롭다고 인정되다’(롬10:10)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도 문맥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형용사인 ‘디카이오스’(dikaios)는 대체로 ‘의로운’(마9:13)이나 ‘공의로운’(마5:45)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역시 문맥에 따라 ‘올바른’(눅12:57)․‘무죄한’(마27:4)․‘성실한’(눅20:20)․‘정직한’(딛1:8)으로 번역되며, 한 번은 ‘공의롭게’(골4:1)로 번역된다. 동사인 ‘디카이오오’(dikaioo)는 ‘의로움을 보이다’(마11:19), 혹은 ‘의롭다고 선포하다’, 혹은 ‘선언하다’(눅7:29)라는 의미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영어번역은 ‘to justify'(의롭다고 인정하다)이다(롬3:30). 이 개념적 범주에 속하는 다른 신약의 단어들은 위에 열거한 단어들보다 훨씬 적게 나타난다. 명사인 ’디카이오마‘(dikaioma)는 행위나 명령 속에 나타난 의의 구체적 표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것은 ’공의로운 요구사항‘(롬8:4, 참조:1:32)이나 ’의로운 행위‘(계19:8)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문맥에 따라 단순히 ’의‘로 번역될 수 있으며(롬5:18, AV는 여기서 ’righteousness'로 번역하며 다른 곳에서도 대체로 ‘righteousness'로 변역함), 어떤 곳에서는 문맥을 보아 그것이 의로운 계율을 뜻하는 것이 분명할 경우에는 단순히 ’계율‘(롬2:26)로 번역된다. 의롭다고 선포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디카이오시스‘(dikaiosis)는 신약에 두 번 나타나는데, '의인’(롬4:25), 혹은 ‘사면’(롬5:18)으로 번역된다. 부사인 디카이오스(dikaios)는 ‘의롭게’(벧전2:23), 혹은 ‘공의롭게’(눅23:41)로 번역되며 문맥에 따라 ‘정직한’(딛2:12), 혹은 ‘정신을 차리다’(고전15:34)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의의 용어에 속하는 다른 두 명사는 히1:8에 나오는 ‘유튀테스’(euthytes:의로운)와 롬2:5에 나오는 ‘디카이오크리시아’(dikaiokrisia의로운 판단)인데, 이것들은 신약에서 한번씩만 나온다.
의의 긍정적인 면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보아 배울 수 있는 것과 함께 의의 부정적인 면(즉 불의)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보아 배울 수 잇는 것도 많다. 그런 말로는 명사로는 ‘아디키아’(adikia)가 있는데 ‘불의’(요일1:9)․‘부정의’(롬9:14)․‘부정’(딤후2:19)․‘사악’(롬1:18)으로 번역되며 형용사로는 ‘아디코스’(adikos)가 있는데 ‘불의한’(눅16:11, 참조:마5:45,여기서는 디카이오스[dikaios]에 대한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됨)이나 ‘불공정한’(롬3:5)으로 번역된다. 이런 말들은 종종 ‘의’라는 말의 긍정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신약의 ‘의’라는 개념의 전체적 의미를 검토하려면 이 두 단어와 함께 동사인 ‘아디케오’(adikeo:해치다․불공정하게 행동하다, 참조:행25:11)와 명사인 ‘아디케마’(adikema:'불의한[혹은 불공정한] 행위‘, 참조:계18:5)와 부사인 ’아디코스‘(adikos:'불공정하게’, 벧전2:19)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관계적 개념으로서의 의
신약에는 ‘의’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수많은 실례들이 있는데, 그 개념이 발견되는 여러 문맥들을 설명하려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사상 유형을 알아야 한다. 그 사상 유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은총 속에서 인간들과 교제하시고자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으셨다(출24장;신7:7이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약속하셨으며(그러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음),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기로 약속했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약속했음). 그런데 인간의 반역과 죄로 인해 그 계약이 파기되었으며, 무구한 편(이 경우에는 하나님)만이 파기된 계약을 다시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과 계약적 교제를 회복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요구들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계약관계가 죄로 인해 일단 파기되면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에 무력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들을 실행하는 것(‘율법에 근거한 의’)은 인간이 보기에는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기 때문에 의롭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계약관계가 인간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에 의롭게 여겨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약관계를 재정립하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이 회복된 관계는 인간에게 두 가지 요구를 부과한다. 즉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유지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회개), 그 회복된 계약관계를 자기들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신앙)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이 교제를 받아들임과 함께 하나님의 계약행위에 의해 창조되는 공동체 내의 교제를 받아들여야 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신약은 두 차원에서 의를 본다. 즉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받아들이는 것(회개와 신앙과 순종에 의해)과 계약공동체와의 계약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타적으로 행함)이다. 그렇지만 이 두 경우에서 의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죄 많은 인간들과의 계약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의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의해 죄를 용서해 주시고 관계를 재정립하실 때에만, 인간은 그 교제 안에 있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신약의 여러 구절을 보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부장 고넬로(Cornelius)는 ‘의로운’ 사람이라 불리우는데, 이는 그가 어떤 도의적 규범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행10:22, 참조:35절). 박수 엘루마(Elymas)는 ‘모든 의의 원수’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마귀의 자식’으로서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요구들을 흐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행13:10). 시몬(Simon)은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 밖에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행8:20,23). 예수께서는 어떤 재판관을 ‘불의하다’고 하는데(눅18:6), 이는 그 재판관이 그 여인의 청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았거나(그는 그 여인을 변호하려고 결심함) 그의 재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불의하다고 불리우는 것은 그가 분명히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이었다(눅18:2). 즉 그 재판관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요구들과 인간에 대한 관계의 요구들을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사단의 종들은 이용하기 위해 ‘의의 종’인 체한다. 즉 그 관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려고 하는 자들인 체한다(고후11:15). 예수께서는 자기의 희생행위에 의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때문에 ‘의롭다’고 불리운다(벧전3:18). 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의뢰하는 자들은, 의가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솔직한 죄인들보다 덜 의롭다고 한다(눅18:9 이하).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이 갈망이 충족될 것을 보장받는다(마5:6, 수동태 ‘코르타스테손타이[chortasthesontai: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셈어의 한 어법으로 이해될 수 있음).
회개를 전파하며 오고 있는 하나님과의 새 관계를 전파한 세례 요한은(마3:2) 그를 처형한 자에 의해서까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막6:20). 바울(Paul)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친근한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을 의인이라고 한다.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 안에 있으며, 그 관계 밖에 있는 불의한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고후6:14).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켜서 신인관계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바칠 수 있다(롬6:13, 참조:19절).
예수께 세례 기사에 나오는 ‘의’라는 말은(마3:15) 이해하기가 곤란하지만 관계적으로 이해하면 쉽게 이해된다. 요한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그의 세례는 그 외침의 일부였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가 꼭 필요함을 회개와 세례에 의해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요한의 세례에 순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때 가져오실 이 새로운 계약관계가 꼭 필요함을 인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순복하심으로 ‘모든 의를 이루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인간이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요한의 선언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세례에 참여함으로써 세례를 인정하는 것은 세례가 선포하는 새로운 관계를 환영하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와 불가분하게 관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나라에서 죄 많은 인간들이 깨뜨린 계약관계를 재정립하시고 유지하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의 메시지 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마6:33,13:43, 참조:마5:10;롬14:17;고전6:9), 그 나라의 완성은 ‘의가 거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즉 거기서 신-인 관계는 영속할 것이다(벧후3:13, 참조:히12:23, 여기서 하늘에 있는 자들은 ‘온전케 된 의인’이라고 불리움).
② 인간 사이의 관계
‘의로운’이라는 말과 ‘불의한’이라는 말은 종종 인간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깨뜨리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채운 청지기에 대한 이야기에서(눅16:1이하) 신실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 사이를 대립시킨다. 즉 자기 주인과의 관계에 신실한 청지기와 그렇지 못한 청지기 사이를 대립시킨다(10절). 이 이야기에 언급된 청지기는 ‘불의’한데(8절, RSV에는 ‘dishonest'), 이는 바로 그가 자기 주인에 대한 신뢰의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이다(2절). 이와 비슷하게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노동시간이 서로 다른 품꾼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불하지만 불의하지 않다. 주인은 모든 품꾼에게 한 데나리온(denarius)씩을 지불함으로써 품꾼들과의 관계의 요구들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다. 그 관계를 맺을 때 쌍방이 한 데나리온에 동의했다(마20;2). 그러므로 그 행위는 ’불의하다‘고 불리울 수 없다(13절). 예수께서는 ’의로운‘ 사람에게 꼭 필요한 행위의 유형을 말씀하실 때(5:20) 동정에 의해 유발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깨뜨리게 될 몇 가지 행위들을 실례로 말씀하신다. 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만큼 동정의 관계를 분명히 깨뜨리는 것이다(21절 이하). 한 여인에 대해 음욕을 품는 것은 그 행위를 하는 것만큼 동정의 관계를 분명히 깨뜨리는 것이다(27절 이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와 궁극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43절 이하). 그러한 행위들은 동정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불의하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정죄할 근거를 찾을 정보를 얻으려고 예수의 주위에 있는 내적 집단에 침투해야 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즉 소기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의로운’ 체하는 스파이들, 즉 예수와 친근한 관계에 있는 체하는 스파이들을 보낸다(눅20:20, RSV는 ‘sincere'). 유다(Judas)에게 지불된 돈은 ’불의의 삯‘이라 불리운다(행1:18, RSV에는 ’wickedness'). 왜냐하면 그는 그 배신행위로 자기 자신과 예수 사이의 신뢰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베드로 후서의 기자는 자기의 독자들에게 그들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즉 이 행위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부합된다(벧후1:13). 또한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엡6:1).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자기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생각은 바울과 빌립보인들 사이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빌1:7). 바울은 반어적인 표현으로 고린도인들에게 자기의 ‘불의’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데(고후12:13, RSV에는 ‘wrong'), 이는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 볼 때 고린도인들에게 자기를 후원하는 데 있어서 ’적게 참여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인들이 바울을 후원할 수 없었던 것만큼, 그래서 다른 교회들처럼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만큼 바울은 그들에 대해 ’불의‘했던 것이다.
③ 관계의 요구를 실행함
계약관계가 이루어지면 계약 당사자들은 그 계약을 유지할 일정한 책임이 있다. 이 책임들을 실행하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행위들은 ‘의롭다’고 불리운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완전히 순종하고, 그러므로 그들의 순종의 행위에 의해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기 때문이다(눅1:6). 이 요구들은 개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노아는 ‘의의 상속자’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에라도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부과되는 요구들을 실행했기 때문이다(히11:7, 참조:벧후2: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실하게 복종하여 자기의 아들 이삭을 제다넹 기꺼이 드림으로써 그 시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약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부과된 요구를 실행했을 때 ‘의롭다고 선포되었다’(헬라어로는 에디카이오테[edikaiothe], 약2:21 이하). 그래서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의 뜻에대한 순종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과 믿음이 다 필요하지만(23절)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하고 말한다(24절). 이에 비추어 보면 바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바울은 죄와 의는 상호배타적이며, 죄는 계약관계의 부재요 의는 계약관계의 실재라고 본다(롬6:20).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 관계의 요구들(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함)을 실행하지 못해서 죄에 빠져 있거나(즉 불의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종해서 그 요구들을 실행하여 의롭거나 둘 중 하나이다(18-19절).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계약관계의 요구들이 ‘순종’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말을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다(참조:특히16절). 즉 ‘순종에 굴복하다’, 혹은 ‘순종을 순종하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순종에 예속’된다는 것은 신-인 관계를 유지하는 맥락 안에서 모든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이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그의 윤리적 훈계 안에서 분명히 나타낸다. 즉 이것들은 계약관계 내에 있으며 그 계약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행위들이다(그 안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순수한 선물이 됨). 야고보는 이 동일한 요구들을 ‘행함’이라 부른다(2:21이하). 두 사람이 다 신-인 계약관계의 요구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순종에 한해 달성되는 것으로 본다.

3.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
인간은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거부했으며, 그래서 그 관계를 깨뜨렸다. 그 계약관계가 인간에 의해 깨뜨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자신의 계약적 약속에서 벗어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그 계약관계는 인간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것이며,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의롭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 때문에’ 그 계약관계가 깨어진 것을 그대로 두신다면 인간은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래서 계약관계가 지속되느냐 지속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행위에 의해 그 관계의 요구들에 응하심으로써(즉 인간구원) 그 관계를 지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의의 근원이시다.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그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의롭지 않다(롬3:10). 이방인들은(1:18이하) 하나님과의 관계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았다(21절). 유대인들도 계약관계에 의해 자기들에게 부과된 요구들을 거부했다(2:17이하).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깨뜨렸으며, 죄인이 되었으며(3:9), 의가 없다(10-18절). 또한 유대인들이 율법의 요구들을 지켰다고 변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의롭다고, 즉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율법은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에 대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20절).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에 의해 깨뜨려지지 않았더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실행하는 것일 것이며, 그래서 그 행위들은 의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을 행하는 것은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는 것이긴 하지만, 율법이 말하는 계약의 요구들의 근거가 되는 계약이 깨뜨려졌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않다. 회복된 관계에 참여하는 자들 안에서만 율법의 의가 성취될 수 있다(헬라어로는 토 디카이오마투 노무[to dikaioma tou nomou:율법의 의], 롬8:4). 그리고 ‘무구한 쪽’인 하나님께서만 인간과의 관계를 지속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결정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만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만 계약관계의 운명을 결정하시며, 하나님께서만 의의 근원이시다.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외 다른 이가 없다(33절).
세례 요한의 활동에는 이 사실에 대한 승인이 전제되어 있다.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행위에 의해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선포했다. 즉 그들은 요한의 회개의 세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만 그들과의 관계의 근원임을 인정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만 의의 근원임을 인정한다(눅7:29).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례를 거부했으며, 그래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30절). 즉 그들도 하나님께는 의만 있음을 인정한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거부함으로써 하나니미과 그들의 관계가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분명히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의를 원하며, 그래서 스스로 모든 의를 부인한다(참조:눅16: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과 계약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죄인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신약의 증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의에 대해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저희 죄를 기억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히8:12, 참조:렘31:3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성실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계약관계를 지속하시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의를 입증하신다. 이 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특징이었다. 이스라엘이 계약협정을 파괴함으로써 계속 불성실하고 불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의 요구사항들을 성실히 지키셨다. 이 성실성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3:2-3, 이 문맥에서는 3절의 ‘미쁘심’과 5절의 ‘의’[RSV에는 ‘justice']가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계약관계를 지속하심).
이 동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이중적 면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은 이 희생에 의해 인간을 구원하시며, 그래서 그 관계 안에 맺어진 그의 약속(즉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심으로써 인간과의 계약관계를 지속하신다. 이렇게 그 요구를 성취하시고 그 관계를 지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움을 입증하신다(롬3:26). 반면에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고의 순종행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것에 의해 인간에 대한 계약관계의 요구(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를 성취하신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그 관계가 회복되며, 인간은 이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26절). 그러나 인간의 의가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의의 근원이시다(참조: 요17:25, 여기서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그래서 이 행위에 의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불리운다고 함). 그러나 나아가서 이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의 증거가 되었으며 인간의 의의 희망이 되었다(25-26절). 그러므로 신약에 있어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집중된다.
인간은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깨뜨렸지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순종행위에 의해 그 불순종이 상쇄되었다. 이 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 계약관계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요구(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가 성취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순종행위에 의해 계약관계가 회복되며 인간은 그것에 참여함으로써 의롭게 될 것이다(롬5:19). 이것이 인간이 의롭게 될(즉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참여할)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통한 의’의 문제가 있을 수 없다(9:31, 참조:10:3). 만일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요구(율법)을 실행함으로써 그 관계를 보존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리스도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고 인간을 위해 그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고 그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의가 가능하며, 그리스도에 의해 그 관계가 회복되고 지속된다(갈2:21, 참조:벧전2:24). 그리스도께서만 그 관계를 지속시킨다. 계약관계를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는 인간이 모든 인간을 위한 이 관계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의’가 된다(롬5:18, RSV에는 ‘acquittal and life').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그래서 그 관계의 요구를 실행하지 않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인해 그 관계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의로울 수 있다(참조:8:10).
이것이 매우 중심적인 점이기 때문에 신약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의의 근원이라거나(특히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가 의와 동일시되거나 특히 ‘의인’이라 불리운다는 진술을 거듭 되풀이한다.
그리스도께서만 계약관계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순종의 요구를 실행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우리의 의’로 삼았다고 말하기도 하며(고전1:30), 십자가상의 순종의 행위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지금 ‘그의 피로’ 의롭다고 선포된다고 말하기도 한다(롬5:9). 인간의 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 온다(고전6:11). 그리고 이 의는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하신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은혜의 선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롬3:24, 참조:딛3:5). 그리스도의 순종행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관계의 요구를 성취했기 때문에 의로운 분인 그리스도는 불의한 자인 인간을 위해 죽었고, 인간을 위해 신인 관계를 회복하심으로써 인간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셨다(벧전3:18). 그리스도의 희생적 순종행위로 말미암아 반역의 죄는 그리스도께 옮겨지고 그리스도에 의해 극복되며,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게 된다(고후5:21).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과들(‘의의 열매들’)은 그리스도와 불가분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관계가 회복된다(빌1:11).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저 주는 의의 선물’을 받는다. 즉 그들이 회복된 계약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거저 주는 선물이지 그들의 공적에 근거한 보상이 아니다(롬5:17).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보존하기로 결정하셨으며, 그래서 인간에게 그 관계에 참여하는 기회를 회복해 주기로 결정하셨는데, 그것을 입증해 주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이 결정을 나타냈는데, 그리스도의 이 행위 안에서 인간이 의롭게 된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친근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 관계가 인간의 의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이 관계를 맺을 때에만 의롭다. 그래서 신약이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고 간주한다’거나 ‘인간을 의롭다고 선포한다’고 말할 때(RSV는 이 동사 디카이오오[dikaioo]를 항상 ‘justify’[의롭다고 인정하다]로 번역함),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그 관계를 지속하셨으며 인간을 위해 그 관계를 회복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제로 의로운가, 아니면 단순히 하나님에 의해 ‘마치’ 의로운 것처럼 취급되는가 하는 문제는 의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것이다. 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문제이지 윤리적 상태가 아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에 있을 때, 그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에 다시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로 ‘의롭다’.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의로운 것처럼 취급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약관계를 회복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에 의해 이 관계에 참여하는 인간은 사실상 ‘의롭다’(참조:롬8:33).
그리스도의 순종행위는 계약의 요구를 성취하고 그러므로 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신약은 그리스도에게 ‘의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그리스도와 의를 동일시한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배척했다고 비판한다(행3:14).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변호할 때 유대인들이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예언자들을 죽였다고 비판한다(7:52).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바울이 ‘의인’을 봄으로써 개종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22:14, RSV에는 ‘Just One'). 요한일서의 기자는 그리스도가 의로우며, 그러므로 인간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에 연결된다고 하는 분명히 인정된 사실에 근거를 두고 권면한다(요일2:29, 참조:2:1,3:7).

4. 의를 위해(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하나님만 의존함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의 유일한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의를 위하여(신앙에 의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의존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의가 불가능하다는 것, 즉 계약관계를 회복하거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들에게 의,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시도록 하는 것이다(요일1:9). 세례 요한도 그 동일한 요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의의 도’로 왔다고 한다. 즉 요한의 엄격성과 그의 회개의 메시지를 보면 신-인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기 위해 그가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이 그러한 관계에 대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란 회개, 즉 그 관계의 요구들을 실행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마21:32). 바리새인들은 회개를 거부함으로써, 계약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실패를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불의에 대한 대표적 실례로 간주된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행위는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눅16:15, 참조:18:9). 그들은 이 행위에 의해 자기들의 의를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거부한다. 이 때문에 자비를 호소할 수밖에 없어서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한 불쌍한 죄인(눅18:13)은 그 관계에 참여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의를 자랑한 바리새인(11-12절)은 이 참여가 거부되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지’ 않았다(14절).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의 세목들을 지킴으로 그 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한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 행위들이 그 관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가 되었다(마23:28). 그러므로 한 인간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크지 않으면 그는 계약관계의 완성, 즉 하늘나라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마5:20). 하나님만이 지속하시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즉 자기 자신의 ‘의’에 의존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이 관계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이 의로운 까닭은 그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찾음으로써 하나님만이 파괴된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시므온은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의를 인정했기 때문에, 참조:눅2:27 이하) ‘의롭다’(25절).
인간이 계약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며, 그래서 자기의 의를 위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의존을 믿음이라 불렀다. 이것만이 의에 대한 근거, 즉 계약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근거 위에서만, 그리고 ‘때가 찬’ 후로는(갈4:4, 참조: 롬5:6, 여기서 헬라어 카타 카이론[kata kairon]은 분명히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근거 위에서만(롬3:26) 인간을 자기 자신에 대한 친근한 관계 속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롬5:1).
바울은 의가 믿음에 의존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를 대조시킨다. 바울은 율법의 요구들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 즉 ‘율법 아래 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사실상 그는 그것을 성취했다(빌3:6).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율법의 ‘의’가 있었으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없었다(롬9:31). 바울은 개종 후 이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의’, 즉 율법의 행위에 의해 계약관계를 지속하려는 그 자신의 노력에 근거한 의를 포기했다(빌3:9). 참된 의는 율법에서 나오지 않는다. 참된 의는 하나님께만 의존할 때 생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약관계를 회복하셨고 지속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갈2: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 의존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의해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들, 즉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함으로써 계약관계를 지속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은 조금도 의를 가지지 못한다(롬10: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의는 하나님에게서만 오며 하나님께 의존할 때에 온다(롬3:30). 참된 의는 전적으로 믿음에 근거한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28절).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만약 율법의 의로 이끌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즉 율법의 요구를 실행함으로써 신인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을 인간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율법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율법과 신앙에 의한 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관계의 역사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본래적 계약은 인간에게 순종의 요구를 부과한다고 말한다. 이 계약은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다(롬5:19, 참조:창3:3이하). 그러므로 율법도 본래적 계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계약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회복되었으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된다. 그래서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 즉 계약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도 그 관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즉 그의 계약적 약속에 대한 신실성)에 의해서 지속된 상태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소유할 때라도, 이 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속에 머무를 수 있으며 그래서 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오해했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성취하며, 그래서 그 관계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가질 수 있다(즉 그들이 그 요구를 성취함으로써 계약관계에 머무를 수 있음)고 생각했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은 하나님(신앙)께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행위)에 의존하여 계약관계의 요구들을 실행함으로써 계약관계를 지속하려고 했다. 유대인들은 이 오해 때문에 율법의 의가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존하는 것처럼 율법의 의를 추구했다(롬9:32). 그러나 율법이 지적하는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순종의 행위 속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났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과 완성(헬라어로는 텔로스[telos])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것이 인간을 의롭게 만든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것이 인간을 계약관계에 참여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롬10:4).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처음부터 신앙만이 의로(즉 계약관계를 지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논의에서 이것이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롬4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시겠다고 약속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후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했다(18-19절, 참조:창15:1이하).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시리라 믿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시리라 신뢰했다(롬4:20-21). 아브라함의 이 신뢰의 행위는 그 계약관계의 상황들을 받아들였다(참조:창15:18). 즉 이 신뢰의 행위는 그 계약관계를 맺고 지속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롬4:18).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 신뢰의 행위는 의로운 행위인데(22절), 이는 그 신뢰의 행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존하지 인간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율법과 할례는 계약관계를 믿고 받아들인 이 행위가 있은 ‘후’에 왔기 때문에(11절;갈3:17)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관계의 근거일 수 없다(롬4:13).
그러므로 이 신뢰의 행위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유일한 방편이다. 즉 그 관계를 지속하기 이해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행위는 ‘의롭다고 간주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계약관계를 맺었다. 그러므로 이 신뢰(신앙)는 의로 간주된다. 즉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롬4:23-24). 인간이 그 계약관계를 파괴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그 계약관계를 지속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 즉 계약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그리스도 안에서)의존하고 자기 자신에(행위에 의해) 의존하지 않는 것은 그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래서 의롭다(빌3:7-9). 그러므로 인간은 이 받아들이는 행위(신앙)에 의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행하신 것(그리스도 안에서 계약관계를 회복하신 것)을 인정하는데, 이 행위는 의로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런 인정에 의해서만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그리스도 안에서) 계약관계를 회복하신 것을 의뢰하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그 요구들(율법의 행위들)을 실행함으로써 스스로 그 관계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친근한 관계 밖에 있다(갈5:4).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약관계를 회복하신 것을 의뢰하는 것만이 인간이 이 관계 안에 살 수 있고 의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롬1:17, 참조:갈3:11;히10:38). 그러므로 신앙은 또다른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관계를 지속하는데 있어서 행위가 소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 것도 공헌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만이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공헌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정(신앙)만이 의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의롭게 간주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인간이 의롭게 되며(즉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참여하게 되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은총으로 이 관계를 지속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롬5:1)․‘은혜로 의롭다’(롬3:24)․‘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롬5:9, RSV는 이 모두를 ‘justified'[의롭다고 인정되다]로 번역함)는 용어들은 모두 바울에게 있어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순종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만 지속하시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구원‘과 마찬가지로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둘은 종종 밀접하게 연결된다(롬3:24,10:10,고전1:30, 참조:마13:49,25:46;딛3:7,부정적 면에 대해서는 살후2:10,12). 참으로 계약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이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에 참여하는 것(구원, 혹은 영생)이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그 둘을 위해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5. 의와 개인적 유익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행위에 의해 회복하시고 지속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관계는, 모든 관계들처럼, 인간에게 하나의 요구를 부과한다. 이 요구는 신앙이다. 즉 인간이 이 계약관계의 결성과 지속에 대해 아무 것도 공헌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실 수 있으며 또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회복된(새로운) 관계 속에는 사람들 가운데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인 관계에 참여하는 자들은 또한 새 공동체에 참여하며, 그래서 그 계약관계는 인간에게 이웃에 대해 행할 요구를 부과한다. 이 요구의 본질은 그 계약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이 다시 계약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많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순종함으로 자기희생이 행위를 하셨기 때문이므로, 그 계약관계에 참여하는 자들도 자신들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자기 자신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해야 하며(롬4:2;고전1:30-31;갈6:14),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섬겨야 한다(마22:36이하). 그래서 새 계약이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이다.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해야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그 관계의 요구를 실행함으로써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의롭다. 똑같은 이유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불의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셨기 때문에 의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러므로 그의 ‘심판’은 의롭다. 또한 그 심판은 자기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요5:30). 예수 안에는 불의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자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다(7:18).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이 활동은 십자가 위의 순종적인 자기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는 여전히 죄인을 위한 ‘아버지 앞에서…대언자(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프로스 톤 파테라[parakletos…pros ton patera])'이며, 그러므로 ’의로운 분‘이라 불리운다(요일2:1).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행위는 자비의 행위로서 받는 자의 가치에 좌우되지 않는 행위이다(참조:마5:45-48). 인간의 행위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의로운’ 자란 계약관계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들에게 부과되는 이웃에 대한 요구들을 실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그 외 사람들에게 자비의 행위를 행했다(마25:34이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다(마25:37이하, 특히 40절). 또한 잔치에 가난한 자와 불구자를 초대한 자들은 최후심판 때에 의롭다고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들은 다만 받는 자들의 유익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손님들은 그 의인에게 ‘갚을’ 수 없다(눅14:14). 바울은 자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불의한 아무 일도 행하지 않았다(헬라어로는 우데나 에디케사멘[oudena edikesamen])고 하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고후7:2). 같은 의미에서 신약에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면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자들은 특별히 의롭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를 위해 고난받는다’고 말한다(벧전3:14).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대항함으로써 그 관계를 깨뜨리기 보다는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당한다(마5:10-11;고전6:7, 참조: 약5:6, 여기서는 의인은 죽더라도 대항하지 않는다고 함). 예수께서 대항하지 말라고 하신 교훈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희생이 되더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피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어떤 강력한 행위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라도 그런 모든 강력한 행위를 피하라는 요구는 아니다(마5:38이하, 참조:21:12이하, 요2:15).
반면에 개인적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자들은 신약에서 ‘불의하다’고 불리운다. 그들은 계약관계가 자기들에게 부과하는 이웃에 대한 요구를 실행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의(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SV에는 ‘piety')의 행위를 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마6:1). 그런 행위들은 계약관계를 지속시키지 않는다. 같은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냉정하게 정죄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운 표시를 나타냈으나 이기적 동기에서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한다(23:13,25,28등). 그들은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했다(’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5절 이하). 하나님께서 사랑안에서 행하시어 인간과의 관계를 성취하시며 유지하시는 것처럼, 인간은 이웃에 대해 사랑 안에서 행함으로써 계약관계가 부과하는 이웃에 대한 요구들을 성취해야 한다(요일3:10).
또한 한 집단 내에서 일치가 결여될 경우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려는 당파적인 정신에 근거할 때는 ‘불의하다’고 말해진다(롬2:8, 참조:약3:16이하).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불화가 드러난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한다(고전1:10이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함으로써 계약관계의 요구가 실행된다면 당연히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일치와 의는 병행된다.

6. 의의 개념에 대한 다른 용법들
신약에서 ‘의’의 용어가 사용된 대다수의 경우에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관계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덜 분명한 문맥에서도 사용된다.
① 법정용어
‘의’의 용어 중 적어도 일부는 법정의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의인[Justification]),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신약에서 많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에 부합되는 것은 ‘옳다’(참조:눅12:57;행4:19). 만약 어떤 고소가 사실을 왜곡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허위고소를 당하면 사실이 그의 편에 서서 그 고소를 논박하기 때문에 옳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확실히 ‘옳았음’이 틀림없다고 외친다(눅23:47, RSV에는 ‘innocent', 참조:마27:4, 어떤 사본에는 헬라어 아토온[athoon:무구한]으로 나오며 어떤 사본에는 디카이온[dikaion:옳은]으로 나온다. 이는 초기에 그 의미가 혼돈되어 사용되었음을 암시함).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의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 자연현상들이 예수를 고소하는 진술들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눅23:44이하). 같은 의미에서 빌라도의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저 의로운 사람‘에게 관계하지 말라고 경계한다. 그 재판의 상황을 보면 그녀가 예수에 대한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마27:19). 예수께서는 ’폭식가요 폭주가‘라는 자기에 대한 비난에 대해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암시하시면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하고 논박하신다(마11:19). 예수께 율법의 핵심에 대해 물은 율법학자는 자기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음으로써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고‘한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함축된 예수의 말씀에 대해 자신을 변명하기를 원한다(눅10:29).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시는데(눅12:57), 그 앞의 문맥을 보면 사실에 대한 바른 해석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눅12:54이하, 참조:요7:24, 여기서 ’옳은‘ 판단은 외형에만 근거한 판단과 대조됨).
또한 ‘의’라는 말이 법적 절차를 서술하는 데 사용된 경우를 보면 ‘의’라는 말의 법정적인 성격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나는데, 거기서 이 어휘는 로마의 사법절차에 대한 바울의 체험을 묘사하는 데 계속 사용된다. 갈리오(Gallio)는 바울은 심한 불법(헬라어로는 아디케다[adikema], 행18:14)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바울 자신도 벨릭스(Felix) 앞에서 같은 말을 한다(행24:20, 참조:24:25,25:10-11). 이 용어들의 이런 용법은 신약에서 최후심판을 묘사하는 곳에서도 나타난다. 즉 최후심판을 재판에 비유하여, 마지막 날의 하나님의(혹은 예수의) 행위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법정적 용어를 사용한다(행17:31;딤후4:8 등).
② 보복적 공의
또한 신약에는 ‘의’라는 말이 보복적 의미에서 ‘공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실례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린 자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시기’ 때문에 ‘공의롭다’고 불리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셨기 때문에 공의롭다(계16:5-6,7절도 아마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임). 또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킴으로 자기 종들의 죽음을 보복하셨기 때문에 그의 심판들은 공의롭다. 그 심판들은 바벨론이 행한 것만큼 바벨론에게 갚아 준다(계19:2, 참조:15:4, 19:11).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힘으로 갚아 주는 것을 ‘공의롭다’고 보신다(살후1:6). 여기에서도 보복적 진술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불의하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이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의 행위를 갚아 주실 것을 보장받는다(히6:10). 이상의 실례들과 다른 몇몇 실례들을 보면 ‘의’라는 어휘 안에 보복의 요소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용법은 관계적 의미의 용법과 상반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계약 백성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보복적 처벌이 있는 반면 (참조:살후1:6;계16:5이하, 19:2), 이웃을 위해 행동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자들에게는 공의로운 보상이 주어진다(히6:10). 그러므로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의’의 보복적 의미 밑에는 관계적 이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7. 의와 규범준수
전술한 바와 같이 의가 기본적으로 관계적 용어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규범준수’를 의미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도덕과 의가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라, 의는 인간의 도덕적 결함이나 윤리적 이상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와 더 관련이 있으며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파괴된 관계나 회복된 관계와 더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의가 도덕적 규범에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면, 하나님도 ‘의롭다’고 불리우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도덕적 규범에 순응한다는 뜻일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약의 견해와 모순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이해를 따른다면 ‘의’라는 용어가 어떻게 매우 불리하고 도덕적으로 타락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그렇게 자주 적용될 수 있는지(롬5:8등)를 설명하기 어렵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로 여겨졌다’는 것은(갈3:6) 어떤 윤리적 규범에 일치하는 행위가 의로 간주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 경우에 의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적 관계를 나타낸다(갈3:8;히10:38). 만약 의가 도덕적 상태라면 도덕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자들을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은 사실에 어둡거나 아니면 단순히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들이 미래에 (아마) 의롭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지금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약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다. 신약에서 그런 예상적 의인을 주장한 근거는 없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행위에 의해 의롭게 간주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진술하는데, 이 진술을 보면 의에서 도덕적 준수를 배제시키는 것이 충분하다(갈3:11등). 아무도 의롭지 않다는 주장(롬3:10이하)은 아무도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지(롬1:18-3:9) 도덕적 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 중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불의한’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한 사실은(고전6:1) 그 용어가 거의 도덕적 상태를 가리키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울 자신이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의 도덕적 상태가 교회 밖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도덕적 상태보다 더 못함을 인정한다(고전5:1-2). 예수께서는 의를 단순히 규범에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한 자들(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시고, 당시 가장 낮은 도덕의 유형을 가진(창기․세리․‘죄인’)과 사귀신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도덕적 순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신뢰의 관계에 주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참조:눅18:9이하). 그리고 예수 자신이 ‘의롭다’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의 행위가 도덕적 규범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정반대임, 참조:눅7:34) 그의 순종적인 희생적 죽음에 의해 인간을 하나님과의 새 관계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눅19:10;벧전3:18). 그래서 예수께서 인간의 ‘의’이시지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인간의 의가 아니다(고전1:30).

성서해석사

해석이란 어떤 작가나 또는 화자의 사상을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적용할 경우의 해석은 17세기에 단하워(J.C.Dannhaur)가 그의 저서에서 최초로 사용한 용어인 “해석학”(hermeneutic)으로 보통 불리웠다(이 용어는 “표현하다”[to express], “설명하다”[to explain], “번역하다”[to translate], “해석하다”[to interpret]라는 뜻의 “헬메뉴에인”[hermeneuein]이란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1. 성경의 해석
성경해석은 사상적 추이와 작가(또는 작가들) 및 성경의 각 책들의 의도하는 바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가진다. 그 궁극적인 의도는 당시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의미를 옮기는 것이다. 2000년 전과 3500년 전 사이에 쓰여진 성경 자료는 현대의 해석자에게 있어서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이는 그 자료가 제반 환경이나 언어들에 있어서 현대 세계에서 유행하는 그것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공식화되어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① 성격
성경 해석은 두 가지의 성격을 갖는다. 곧 (1)언어의 문제와 (2)성경 자료의 신학적 중요성이다. 어떤 성경 구절에 나타나는 제반 단어들과 용어들의 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해석이 시작되는 경우에서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언어의 해석이다. 성경 해석은 단어들의 정의와 본문상의 분석과 문학적인 유형 및 형태와 역사적 유추와 그리고 구문론적인 특수성과 같은 그러한 고찰들을 그 성격으로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성경의 자료는 특별한 고찰을 요구하는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성경의 영감적인 교리는 성경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성서)의 근본적인 특성에 대하여 진지한 고려를 갖게 한다. 그것은 또한 다른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계시 위에 바탕한 성경(성서)의 신학적 중요성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의 특이한 특성은 다른 비성경적 자료들에 대한 평범한 보통의 분석을 뛰어넘는 특이한 성격을 띠고 있다.
② 방법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며 또한 그 해석의 원칙이나 법칙들도 성경 이외의 다른 저서나 또는 어떤 책에 대한 해석의 그것들(법칙)과 동일하다. 만일에 성경의 언어가 인간이 보통 의사소통을 하는데 사용하는 그러한 규칙과 관계된 참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라면 인간들이 그 의미에 대한 어떤 신뢰할 만한 지식에 의거하여 해석하거나 또는 가져올 아무런 근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각 책들이 인간의 언어로 된 기록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반드시 다른 일반의 책이나 저서의 경우와 같이 문학적 구조와 문학적 형태와 및 문학적 관계의 견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1860년에 벤쟈민 죠웰(Benjamin Jowett)은 “에세이와 평론”(Essays and Reviews)에서 성경 해석에 대한 그의 유명한 방법(원리)을 소개하였는데, 곧 “성경을 다른 책들과 같이 해석하라”(Interpret the Bible like any other book)였다. 죠웰은 이 경우에서 단어들의 의미와 본문에 대한 올바른 독법등을 가리켜서 말하였던 것인데 불행히도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에는 특별한 만한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까 다른 책의 경우와 똑같이 해석하라”라는 의미로 전하여져 버렸다. 하여간에 성경의 경우에 있어선 그 해석상 다른 일반의 책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합법적인 전제 조건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결국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상의 내용은 그 사실에 대한 진실하고도 신뢰할 만한 관계를 갖게 되리라는 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곧 성경의 영감적인 특성에 비추어서 볼 때에) 성경자체가 최상의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해석자로서 성경에 어떤 전제 조건을 붙이는 게 불법적이라는 것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사물의 성격상 어떤 전제 조건에 찬동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것이니 곧 “어떤 전제 조건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인간의 말인가? 성경 해석의 신학적 문제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의 교리에 대하여 학자들의 변화하는 태도에 관한 현대의 학문적 연구의 결과로서 대단한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③ 방편
복음주의적 성경 해석자들은 어떤 성경 본문의 참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때 그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선 어떤 부분에서의 역사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로 역사에 대한 지시기에 의하여 역사의 하나님을 궁극적인 성경의 저자로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적 해석자들의 손은 담대함을 얻게 된다. 성경 해석상의 모든 역사적 비평 방법의 방편들은 해석자의 주의를 요구하게 되는데, 곧 본문비평이나 문학적 비평이나 비교종교의 비평 및 역사적 비평 등등에 대한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성령님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무오의 해석자이시다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성경 해석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해석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여호와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경이 특별한 책이듯이 그것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도 반드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2. 성경의 해석사
성경 해석 중 기독교적인 것으로 볼 만한 전례로는 거의 400년간에 걸친 유대인의 구약에 대한 해석이다. B.C.450년 경의 에스라는 율법을 일정하게 체계적으로 해석한 가장 초기 때의 사람이었다. 에스라는 율법의 뜻을 탐구하는데 헌식적으로 종사하였던 자, 곧 나중에 서기관으로 알려진 유대교 내의 그러한 계층의 시조였다.
① 기독교 이전의 해석
에스라의 율법의 준수에 대한 강조에서 구전율법의 형식이 자라났고 모세율법에 대한 해석이 나왔는데 이 모세율법에 대한 해석은 극히 직역주의적이고 기상천외적으로 별난 것이어서 본래의 율법에 산울타리를 쳐놓은 격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신약시대의 서기관들이 구약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었다.
㉠ 유대인의 직해주의
유대의 서기관들은 구약을 별개의 낱말(단어)들과 구절들로 세세히 분리하여 비평 해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해석된 의미(뜻)들은 전체적으로 해석된 자료의 본문이나 또는 역사 및 참 뜻을 무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신약 이전 시대에서 탁월한 해석자들로는 세 사람의 랍비 지도자들이 있었다. 당시와 그 이후의 여러 세대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는 힐렐(Hillel)이었는데, 그는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나중 청년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었다. 힐렐은 탈무드에 체계를 세우는 중책을 맡았는데 구전 율법의 여러 혼동된 규례들을 조직화하는 데 힘을 썼다. 그는 여러 세대 동안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해석의 원칙 일곱 가지를 만들어 냈다.
그 첫 번째의 것은 “경중의 원칙”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논의되는 바 “보다 덜 중요한 것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까지”(“from the lesser to the greate”)의 그런 부분에 적용되는 해석의 원칙이었다(예, 민12:14). 두 번째의 원칙은 성경상의 동일한 언급의 표현에 나타난 두 가지 주제에 각기 내포된 추론적인 관계를 다룰 때 적용되었다. 그 예로는 안식일과 유월절 희생을 반드시 정한 시기(때)에 드려야만 되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만일 매일의 희생은 반드시 어느 안식일에 드려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월절 희생 역시 어느 안식일에 드려져야 마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힐렐의 세 번째 원칙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까지의 확대”(extension from the special to the general) 적용의 원칙인데 이 경우의 예로서 안식일에 필요불가결한 일은 어떤 거룩한 날의 일로 공인되어 시행된 경우를 들 수 있다. 네 번째 해석의 원칙은 두 개의 성경 구절들을 세 번째 원칙에 의하여 해석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 원칙은 일반적 상태에서 특별한 상태를 지배하는 성경상의 언급을 의도적으로 끌어 내는 것이었다. 여섯 번째 원칙은 다른 성경귀절들을 유추함으로써 어떤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었는데 다윗과 진설병과의 유추에 대한 마태복음12:5절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힐렐의 일곱 가지 성경 해석의 원칙은 자체증거가 확실한 성경 구절의 언급들에 대해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원칙들이 서기관들의 손에서 해석의 기본이 되었으나 그 해석들 중 부당한 것들이 아주 많았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랍비는 힐렐의 경쟁자인 삼매(Shammai)였는데 그는 유대 율법주의의 극단적인 학파에 속하는 형식주의자(formalist)였다. 삼매와 그의 제자들은 율법의 참 뜻을 완전히 무시해 버림으로 해서 율법의 문자에 맹목적인 노예가 되어 버렸다. 삼매의 형식주의적 율법 해석으로 인하여 그가 한 번은 자기의 어린 손자를 속죄일 절기 때 금식하도록 강요한 결과 그 아이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한다. 삼매는 장막절 절기 때에 분만의 고통 중에 있는 자기 딸의 침상 위에 지어진 오두막 집이 적당한 시기를 요구한다라고도 주장하기도 하였다.
힐렐의 손자이자 세 명의 위대한 랍비 중 마지막 사람인 가말리엘(Gemaliel)은 그가 한 때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다는 점에서 흥미 있는 인물이다. 가말리엘의 율법 해석의 태도는 그가 직접 헬라의 문헌을 배우고 가르쳤으며 또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권리와 특권들을 옹호주장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관대하였던 듯 하다.
신약 시대 훨씬 이후 때까지 랍비들은 그들의 모든 교훈과 가르침들을 구전으로 전달하였는데 구전적 전통에서도 A.D. 3세기(기독교 서력)경의 문자 법전의 시대까지 보존되어 왔던 해석상의 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유대인의 미쉬나(Mishna)는 저서화된 구전율법을 최초로 모은 하나의 전집물이었다. 미쉬나는 할라카(Halachah)와 학가다(Haggadah)로 이루어져 있는데, 할라카는 모세율법을 구전적으로 다루어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해석하여 만든 것이며 학가다는 할라카에 있는 성경적 자료를 다룬 것으로서 권고적이자 설명적인 하나의 주석이었다. 학가다에서 미드라쉼(Midrashim)이 생겨났는데 이 미드라쉼은 일부 정선된 출애굽기의 주석(메킬타[Mekilta])와 레위기 주석(시프라[Siphra])와 민수기의 일부 선택부분 및 신명기 전체의 주석(시프리[Siphri])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가다와 결합된 할라카는 탈무드에서 미쉬나의 해석물로서 나타났다. 게므라(Gemara)는 미쉬나에 대한 랍비들의 일반적인 비평 용어였다.
㉡ 유대인의 비의적 해석
알렉산드리아와 에집트는 고대의 유대인들의 비의적 성경 해석의 중심지였다. 학가다로 알려진 팔레스틴의 주석(해석)이나 또는 미드라쉬적 해석에는 어느 정도의 이러한 비의(우화)가 나타났기는 하지만 그 성숙한 발전의 원인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적인 분위기(환경)였다. 유대의 랍비들이 구약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준비상태에 들어 가게 한 것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구약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가장 오래된 유명한 유대인학자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교 선생으로 유명했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였다. 그는 최초로 헬라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그들의 사상적 개념들을 모세율법의 번역(해석)에서 끌어와 헬라어화 할 것을 주도한 자로서 이 때문에 그는 그것이 70인역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믿었다. 이 학파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자는 필로(Philo)였는데 그는 유대교의 법령들과 사상적 개념들을 헬라문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데에 지대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필로는 성경 전체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인간의 영육이 상응관계를 이룸과 같다고 가르쳤는데, 곧 문자적 의미와 비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영혼이 그 몸보다 더욱 중요시됨과 같이 성경의 비의적 의미도 그 명백히 나타난 문자적 의미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한 예로서 창세기2:10-14절의 주석에서 필로는 에덴에서 발원하여 갈라진 네 개의 강들은 네 가지의 덕들을 비의적으로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네 강들의 발원지는 선(goodness)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도 일반적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그러한 덕이라고 하였다. 필로는 구약성경 중 모세오경에 특히 심취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② 해석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구약을 결코 비평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한 성서를 높이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동시대인과 꼭같은 입장을 취했다.
㉠ 랍비에 대한 관계
예수는 구약 해석에 관한 한 유대 전통상의 한 랍비가 아니었다. 그가 랍비들의 해석 방법과 그 내용에 친숙하였다는 것은 신약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랍비들의 해석 방법을 따랐다기보다는 그것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는 랍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지만, 랍비들이 중심 계명으로 단언한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마22:37-39). 예수는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랍비 학교보다 훨씬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우리들은 랍비들의 입장을 랍비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시편110:1절에서 랍비들이 그 뜻을 탐지해 내지 못했고 또한 설명할 수 없었던 한 문제를 찾아 내었다(마22:41-45). 또 다른 경우 예수는 시돈의 과부에 대한 엘리야의 사역과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 대한 엘리사의 사역을 인용하면서 구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를 계명하였다고 동리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적도 있다(눅4:25-27). 이것은 랍비에게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불평하자 예수는 “진설병”을 먹어 치운 다윗의 행위를 인용하였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의 처지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는 말로 종종 묘사하였다.
㉡ 구약에 대한 견해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정식화된 성서영감론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구약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마5:18;눅16:17). 최소한 한 번 정도 예수는 다윗의 말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된 것임을 직접 말씀하신 적도 있다(막12:36). 예수가 구약을 사용한 방법은 구약에 대한 예수의 평가를 뚜렷이 입증한다. 그는 구약의 무서가 신뢰할 만한 역사기록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유대교 성서의 역사적 타당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구약에 나오는 사건이 과연 역사적 실재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결코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는 구약에 나오는 언급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가 구약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은 구약성서의 영적 가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성서비평가로 볼 수는 없고 오히려 성서 안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본 자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 구약에 대한 지식
구약에 대한 예수의 직접 인용 중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36개뿐이다. 그러나 그는 구약의 용서들을 그 자신의 가르침 속에 종종 채용하였다. 그가 구약에 호소할 경우 그것은 실제 예화를 통하여 그의 가르침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구약에 대한 예수의 지식은 포괄적이며 세밀하였다. 이 점에 미루어 보아 분명히 예수는 나사렛의 어린 소년으로서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경건한 부모와 유대인 회당 학교에서의 6년 교육을 통해 성경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또한 나사렛에서 목수로 보낸 18년 동안,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연구했고 이들의 예언과 그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구약에 대한 해석
예수의 가르침은 주로 그 자신의 권위 있는 인격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해 본 적이 없다. 마가복음1:22절에 보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더라”고 하였다. 예수는 구약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답변을 제시하였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다”고 했다(눅24:27). 예수의 독창적인 구약해석은 새로운 지적 통찰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의 발단이었다. 하나님이 그 자신을 통해 인간의 세계 속에 개입하심과 더불어 예수의 관심은 구약의 상징과 형상으로부터 신약에 기록된 실제 현실로 이행되었다.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 도입된 근본적으로 새로운 원리는 텍스트와 그 의미를 더 이상 서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 대신 텍스트의 의미와 역사적 사실인 예수의 삶과 사역을 서로 관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텍스트를 그 자신에게 전유시켰기 때문이다.
③ 사도들의 해석
신약 기자들의 성서해석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많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서영감론을 의심하면서 이 주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해 왔다. 한편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서영감론을 옹호하면서 신약의 구약 사용법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부인하거나 무시해 왔었다. 예수의 구약해석과 신약 기자들의 구약해석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당대의 의례적인 해석 방법을 크게 뛰어 넘었다. 그는 랍비들의 성서 접근방법과 무관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랍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해석 방법이 당대의 그것과 꼭같은 것이었다할지라도 그들은 구약의 메시지를 잘못 파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언제나 구약의 메시지를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통찰하였다. 이는 통상적인 성서해석 방법에 의한 구약의 재해석이었다. 여기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그들 자신의 삶 속에서 중심가치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 랍비에 대한 관계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신약 기자들의 성서해석 방법은 랍비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물론 극단적인 랍비주의는 신약에 채용되지 않았다. 신약의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구약으로부터 유리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메시지를 옹호하게 되었다. 신약의 기자 중 공식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자는 바울 밖에 없었지만 사실 신약의 기자들은 대부분 유대인 회당에서 발전된 랍비적 성서해석 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예외적인 존재는 누가이며, 그는 이방인이었던 것 같다. 신약 기자들의 종교생활은 랍비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런 점에서 이들의 해석 방법이 랍비적이라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는 간혹 합비들의 지나친 자유주의가 나타낼 때도 있다(갈3:16;히2:11ff). 랍비들은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신약에도 나타난다(롬9:25).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물론 바울이 윗귀절(롬9:25)에서 호세아의 근본 의도를 무시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의 기본 정신을 잘못 다룬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성귀에 새로운 조명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랍비들이 사용한 유비적 해석 방법의 전형적인 예는 갈라디아서4:21-31절에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이 하갈과 사라의 설화를 문자 그대로 역사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설화에서 유대교 결의론과 정반대되는 기독교적 자유에 대하여 그 자신과 유대교주의자의 입장이 전혀 조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울의 유비 속에는 구약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의 해석가(주석가)들은 신약의 기자들이 사용한 해석 방법에서 현대적인 해석 원칙을 찾을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은 오늘날 1세기 랍비들의 무비판적인 해석 방법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 구약에 대한 언급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이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사실과 구약성경의 권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 들였다. 신약의 기자들이 그러했다는 것은 구약을 액면그대로 전거로 삼아 그들의 주장을 편 데서 입증할 수 있다. 현대의 비판적 주석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입증을 통하여 아무 것도 증명되지 않는 셈이겠지만,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의 말씀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롬3:10-19;9:14-18;히1:5-13절 등).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없이 신약 기자들의 견해였다.
신약의 기자들은 특히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 몰두하였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그들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 같다(요12:37-41).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암시적 언급을 예의 검토하였다. 물론 그들은 시대적 사정을 이러한 검토과정에 반영하였었다. 또한 신약에 수록되지 않은 초대 교인들의 작품도 메시야에 관한 여타의 성귀들을 사용하였다. 마태가 “내가…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다”는 호세아11장1절에서 영아 예수의 애굽 피신에 관한 언급을 통찰하였던 사실도 이러한 해석의 전형적인 예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귀에 새로운 조명을 가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본질적인 기본진리는 메시야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진리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였다.
④ 초대 기독교 교부들의 해석
교부들은 신약의 기자들과 꼭같이 구약이 영감에 의한 것이며 권위를 지닌 책으로 생각하였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신약의 문서들을 계시로 본 사실이다. 이러한 교부들의 입장은 신약의 문서들이 수집되어 권위 있는 정경이 되고 구약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질 때까지 계속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교부들은 처음에는 구약에 사로잡혀 있었지만(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구약에서 149번이나 인용하였지만, 신약에서는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마침내 신약을 주로 강조하게 되었다(아그나티우스[Ignatius]는 신약을 자주 이용하였지만, 구약은 소홀하게 다루었다).
㉠ 베드로후서의 증거
베드로후서는 성서해석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뒤늦게 신약 정경이 된 자료 해석의 문제와 마주친 최초의 책이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바울서신을 의곡한 자들을 알고 있었다(벧후3:15f.). 또한 그는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3:4)라고 문제를 제기한 비평가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베드로후서1:20절에 보면, 성서의 예언은 사람들이 제나름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말이 있다(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교회의 권위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온전한 자는 각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와 판이한 의견을 갖고 있는 자들은 이 구절의 참 뜻이 예언 구절들을 다른 예언 구절들과 유리시킨 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의 진의가 해석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 구절은 예언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그 다음 구절인 1:21절에서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였다. 베드로는 분명히 성서영감론은 성서가 쉽게 이해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 셈이다. 사실 베드로는 예언자들 자신이 그들이 쓰고 있는 바에 크게 당황했다고 지적했으며(벧전1:10ff.), 바울도 해석하기 어려운 말을 기록한 적이 있음(벧후3:16)을 언급했었다. 베드로후서는 종말론적 희망이 도전을 받고 있으며 바울은 성서의 저자라고 생각한 시대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베드로후서3:16절에 나오는 “다른 성경”이라는 표현은 바울서신이 성서로 간주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구약은 그 당시 성서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없으며, 복음서와 바울서신들도 성서로 간주되었다.
㉡ 바나바서신
바나바서신 속에는 119개에 달하는 구약 인용과 5개의 외경 인용이 들어 있다. 또한 바나바서신은 신약을 21번 언급한다(이 언급 중 대부분은 바울과 공관복음서에 관한 것이다). 바나바서신의 주요 논점은 복음서의 견지에서 이해될 때에만 구약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바나바서신의 저자는 극단적인 유형론적 해석 방법을 견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무의미했으며, 하나님의 계약은 언제나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구약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영지주의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만물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유형론이 성서해석의 기본 원칙이었다. 아브라함이 소유하고 있었던 318명의 종을 바나바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은 그의 성서해석 방법론을 밝혀주는 유명한 일례이다. 그는 두 개의 서로 독립된 구절을 결합시킴으로써 아브라함이 소유한 종의 수가 318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TIH라는 문자의 수가에 의해서 표시된다. 그런데 바나바에 의하면, “T”라는 문자는 십자가를 상징하며, “IH”라는 문자는 예수를 상징한다고 한다(이 두 문자는 예수의 헬라식 명칭의 머리 글자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종의 숫자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였던 신비다. 또한 바나바는 하이에나를 언급함으로써 유대교 정결 식물 규례를 설명하고자 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의 시도를 받아들였다. 하이에나는 식물로서는 금지되었는데, 그 까닭은 하이에나가 성을 변경시키므로 해서 인간이 변절자일 수 없음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또한 바나바는 세계의 연수를 6000년이라고 계수한 초대 크리스찬 저술가이기도 했다. 이러한 계수의 근거는 “여호와에게 있어서는 하루가 천년과 같다”는 시편 기자의 말을 창조의 6일과 결합한 데 있었다. 바나바서신은 초대 교회에서는 높이 평가되었으며, 정경으로 인정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 이단자 말시온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 대부분(편집된 누가 사본과 유대적 요소를 삭제한 10개의 바울서신 제외)을 거부하였다. 성서에 대한 말시온의 부정적 견해는 교회로 하여금 정경을 결정하도록 압박하였다. 구약에 대한 말시온의 입장은 철저한 이원론이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등 두 개의 신을 상정하였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와 율법의 하나님으로, 신약의 하나님은 선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구약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였는데 그것은 문자주의로써 구약의 미숙성을 지적하고 또한 구약의 미숙성을 은폐하기 위해 유형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약을 성서로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가 예언과 율법을 폐했다고 믿었다. 신약에 관한 한, 말시온은 그의 입장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에 새 어귀를 “삽입”함으로써 신약을 자신의 언어로 변경시켜 버렸다. 그는 신약의 자료에 대해 문자적 해석을 가했다. 말시온이 기독교의 특이성이 망각되어 가는 시대에 기독교의 급진적 새로움을 강조한 점에서는 공로를 인정할 수 있지만, 기독교적 메시지와 유대교의 역사적 유산과의 연속성을 깨뜨려 버린 점에서는 완전히 오류를 범한 셈이다.
㉣ 이레니우스
교부 시대에 있어서 골 지방 룩두눔의 주교(A.D. 177-197년 경) 이레니우스 만큼 수 세기에 걸쳐 기독교 사상을 지배한 자는 없었다. 그는 철학적으로 기독교 메시지에 접근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서 석의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성서를 매우 포괄적으로 활용한 탁월한 성서 신학자였다. 그는 신약의 전부를 거의 속속들이 인용한 최초의 교부 신학자였다. 물론 그는 구약도 폭넓게 인용하였다. 성서해석에 관한 한, 그는 가장 훌륭한 과거의 해석 방법과 오리겐과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과 그 후 완성하게 된 해석 방법을 맹아 형태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레니우스의 해석 원리는 무엇보다도 성서영감론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겠다. 그는 성서가 “완전하며”, “하나님과 성령의 말씀에 의해 된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성서해석의 기초는 그리스도가 성서의 핵심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성서의 주제는 구주이며, 성서는 모두 구속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오직 구주의 강림이라는 빛 안에서 구약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신구약의 통일이 바로 이 구주다. 성서의 조화 및 성서가 그 자신의 해석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성서의 통일성에 대한 확신에서 유래하는 두 개의 서로 상관된 원리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서의 각 책은 그에 알맞은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도 우연히 포함되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성서가 그 자체의 최고 해석자라는 원리는 성서의 통일성에 대한 그의 확신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는 애매모호한 구절은 이미 이해된 구절에 호소하거나 비교함으로써 그 뜻이 분명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비적 해석 방법을 성서에 적용하였으며, 성서 속에 감추어진 보다 심오한 의미를 찾았다. 혹자는 이레니우스가 전통에 힘입어 성경에 관해 판단하려 했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상 그는 기독교 유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앙의 준칙을 강조하려 했던 것 뿐이다. 그가 전통을 성서해석의 최종 법정으로 만듦으로써 전통을 성서보다 우위에 놓았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다.
㉤ 오리겐
어떤 의미에서 오리겐은 성경 전체를 자기 교훈(가르침)의 기본으로 삼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였으며, 또한 그는 성경의 본문비평에 주도면밀한 주의를 기울인 최초의 기독교 학자이기도 하였으니 그에게 이 명칭을 붙임도 전혀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리겐의 성경 해석(주석)에 대한 관심은 그의 성경 본문에 대한 관심에서 자라났다. 16세기 때의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오리겐 만큼 성경의 해석(주석)에 몸바쳐 많이 연구했던 학자는 없었다고 한다. 오리겐의 해석상의 문제는 그의 철학적 성향이었는데 이러한 그의 철학적 관심으로 인하여 그는 성경에서 자기가 정통 기독교 교훈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을 극단적인 비의적 표현으로 자주 반복하여 나타냈었다. 오리겐은 그의 전임자들로부터 내려 오는 바 그러한 믿음의 법칙에 완전한 의지는 하지 않았으나 그는 그의 개인적인 학식과 지식을 의존하여 연구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문답식 학파의 클레멘트(Clement)의 제자이자 그의 계승자였다. 오리겐은 클레멘크로부터 성경의 삼의 이론을 사사하여 습득하였다. 그것은 오리겐이 인간의 인격을 몸과 혼과 영의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하였던 것과 비교되었다. 또한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몸에 해당되고 성경의 도덕적 의미와 영적 의미는 각각 인간의 혼과 영에 상응관계적으로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도덕적 의미와 영적 의미 사이의 차이라는 것은 전혀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어서 이러한 오리겐의 삼의적 해석을 이의적인 것으로 분리할 수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가치평가적으로 볼 때에 인간의 영은 그 몸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이며 이와 같이 성경의 영적 의미도 문자적 의미보다 그 가치가 월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중재적 섭리의 표현보다는 지적인 진리의 계시의 표현에 나타난다고 오리겐은 보았었다.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성경의 비유와 비의와 은유 사이의 차이점들과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는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사람들과 또한 제한적인 이해력 및 무식함을 가진 사람들과 동일시하여 완전히 무시하고 반대하였다. 오리겐은 성경의 영적 의미를 해석상의 비의적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하였다. 그의 해석상의 영향력은 다음 세대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간에 지대한 것이었다. 오리겐은 안디옥의 주석학파와 제롬 및 어거스틴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하여 나갔다. 헬라 교회에서는 나치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와 바실(Basil) 대주교가 오리겐의 사상적 견해들을 발간해 냈었다. 이로 인해 간접적으로 오리겐은 여러 세기 이후의 중세 성경 비유 해석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셈이다.
㉥ 어거스틴
천년 동안 어거스틴은 서방 기독교의 신학을 주도하였다. 오리겐은 해석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에 반하여, 영향을 입은 점에서 그의 후계자인 어거스틴은 무엇보다도 신학자였고 이레니우스에 견줄만한 성서 신학자였다. 어거스틴은 서슴치 않고 성경의 영감을 받아 들였으며, 그는 성경이 “과거에 대한 진술이요 미래에 대한 예언이며 현재에 대한 묘사”라는 그의 언급으로 유명해졌다. 성서해석에 기여한 어거스틴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성서 이해의 필수적 요소로서 신앙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성서 이해는 신앙의 삯이며 해석자의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몫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해석에 있어서 인간 이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믿지 않는 자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믿고자 할 경우에 특별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신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성경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은 신앙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성서해석의 두 가지 권위를 포함하였다:첫째로 성경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교회의 전통이 이러한 신앙의 정확성을 측정해 주고 확증해 준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전통은 최종적 권위였고 성경의 주요한 기능은 교회 신조를 위한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⑤ 중세의 해석
중세기(어거스틴부터 종교개혁까지의 기간)중에는 성경 연구가 제한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수도원에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연구 업적은 주로 성경 본문의 암송과 성경 사본의 복사 작업이었다. 중세의 성서해석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무식한 문맹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데 당시에는 사실상 공공 교육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중에 성경의 의미를 선포하는 권한이 로마 교회 안에서 고정되어 가고 있었다. 과거에 발전하였던 성경 해석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이 있었다. 즉 로마 교회의 교리 체계를 널리 펴고 지지하는 것이 그 유일한 목적이었다.
㉠ 초대 기독교 교부 작가들의 속박
중세기에 있어서 전통은 성서해석의 열쇠였다. 모든 해석은 전통과 일치해야 하였고 그 전통은 교부 시대의 유산이었다. 특히 그 전통은 라틴계의 전통이었는데 로마 교회의 조명을 받으며 이 전통은 그 시대를 종교적 전제정치 시대로 만들었다. 성서해석의 노력은 교부적 저자들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로마 교회의 교리 체계 아래 그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해석의 목적이었다. 이 시기의 주석서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부들의 논평을 모아 놓은 것이었는데, 신약 시대에 랍비들이 했던 작업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소홀히 다루어졌다.
㉡ 스콜라 철학
A.D. 1000년 경 즈음에 후기 르네상스를 예고한 지적 각성이 종교계에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통적 독단주의의 엄격한 경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헬라 철학의 원리에 어느 정도 의존하면서 연역적 종교 철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으로 알려지게 된 운동이다. 실제에 있어서 이 운동은 교부적 가르침에 일치하는 가운데 전통과 해석을 재형성시켰다. 스콜라 철학은 거의 배타적으로 풍유적 해석법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이 철학은 변증법적 논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진리를 곡해하기까지 이르렀다. 성경 본문의 원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해석자의 전 사상은 로마 교회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셀므(캔터베리의 대주교)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노겐트(Nogent)의 길베르트(Guilbert)는 이 운동의 주요한 지도자였다.
㉢ 신비주의
중세의 신비주의는 그 당시의 전통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교제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혹은 감각적 갈망에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영적교제는 당시의 제도화된 교회의 엄격한 형태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비주의는 극단적 견해를 내 놓았다. 즉 모든 개인이 하나님께 대해 필요로 하는 것은 역사적 계시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직접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해석에 있어서-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의 경건한 연구를 강조하였고 그 방법에 있어서 풍유적 해석을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지도자들은 성 빅토르의 유고(Hugo of St. Victor)와 클레오보(Clairvaux)의 버나드(Bernard)였다.
⑥ 종교개혁
우선적으로 종교개혁은 과거의 전통주의에 대한 반란이었는데 과거의 입장과 달리 이 운동은 기독교의 사상과 생활에 있어서 성경의 절대적 우위를 추구하였다. 이것은 현대까지 계속되어 온 혁명의 시작이었다. 세 사람의 업적이 이 시기의 성서해석의 핵심적 문제들의 윤곽을 보여 주는데, 그들은 루터와 멜랑톤과 칼빈이다.
㉠ 루터
비록 루터는 로마 교회의 전통주의를 깨뜨렸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 있어서 교부적 시대에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어거스틴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루터는 그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신학적 숙고에 의해 움직였는데 이러한 신학적 숙고는 거듭해서 그의 로마 교회와의 갈등을 반영해 주었다. 루터는 결국 그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 확정적 입장이 되었다(예를 들면,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한 해석). 루터는 성서해석을 위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의 중요성을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있어서 약간의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구약의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한 그의 기사에 반영되어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였다. 그는 문맥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많은 점에 있어서 그는 해석자에게 항상 존재하는 위협- 즉 풍유적 해석을 피하였다.
㉡ 멜랑톤
멜랑톤은 루터의 제자이다. 그는 그의 스승의 신학적 관심을 반영해 주었으며 따라서 그의 해석은 이러한 관심에 의해 좌우되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는 구약의 교리적 구별점들을 신약성서에서 구별시키지 못했으며 기독교적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구약의 자료를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멜랑톤은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즉 신약은 구약을 능가하며, 신약은 완전하고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계시라는 견해이다. 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신학 연구에 있어서 계시와 나란히 이성의 위치를 높이었다.
㉢ 칼빈
요한 칼빈은 어떤 다른 종교 개혁자보다 더 많이 신교 교회에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과거의 풍유적 해석법을 완전히 몰아 내고 극단적인 문자주의(literalism)를 사용하였다. 그는 구약보다 신약의 해석에 있어서 더 큰 공헌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 배경의 중요성은 그의 모든 저서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비록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제한을 받았지만 칼빈은 시종일관 본문의 역사적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는 문헌비평에 있어서 그 당시에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교리적 독단주의와 다른 해석자들에 대한 경멸은 칼빈을 크게 제한시켰다. 그는 사도적 기독교에 있어서 완전한 신학 체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고 심지어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는 전진적 계시에 관한 교리가 위치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⑦ 연대적 해석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교 교회는 어떤 형태의 전통주의에 따랐다. 그들은 성경의 축자 영감의 원리에 기초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신앙 고백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접근에 대해 강조하는 경향이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 역사적 비평
역사적 비평은 성경영감을 도전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역사적 비평이 주장하는 바는 성경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된 과학적 접근은 다른 고대 문서에 적용하는 접근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며 합리적인 접근이었다. 현대의 비평적 접근 방법은 18세기 경에 자연신교와 더불어 영국에서 시작되고 계몽운동과 더불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함부르그(Hamburg)의 동양어 교수였던 라이마루스(Reimarus)는 주장하기를 복음서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아주 희미하게 보여 주는데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변형시켜 놓았다고 했다. 가블러(J.P. Gabler)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을 도입하였다. 그는 계시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고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벳스타인(J.J.Wettstein)은 유대의 문헌과 이방의 문헌 자료와 신약성서 사이의 병행되는 점에 대해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헤겔(G.W.F. Hegel)은 기독교가 영적인 조상들로부터 진화한 것이며 인간사에 있어서 절대 정신의 표현으로서 “해석된 역사”라는 사상을 그 중심에 제시하였다. 바우어(F.C.Baur)는 독일에서 튜빙겐(Tubingen)학파를 창시하였고 기독교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바울과 유대적 영향간의 역사적 갈등으로부터 진화하였다고 가르쳤으며, 2세기의 기독교는 이 두 개의 모든 견해에 있어서 성서신학은 완전히 종교사에 종속되었다. 알버트 슈바이쩌(Albert Schweizer)는 여러 면에서 그 운동을 정점에 달하게 했는데 그는 예수가 1세기의 묵시적 교시라고 믿었고 역사적 예수는 현대인에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가하였다.
㉡ 칼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는 성서에 대해 순전히 과학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역사적 비평에 도전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로마서 주석은 현대적 해석의 시작을 표시해 주었다. 이 서문에서 바르트는 역사적 비평이 공헌한 바를 받아 들였으나 성서에 대해 최종적 설명을 가한 역사적-비평적 방법의 사용은 거절하였다. 바르트는 성경은 성경을 해석애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의지하였다. 성경의 해석자는 그가 그 내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경의 영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계속적인 실재에 대해 적절한 인정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의 견해에 있어서 역사적 비평은 해석자를 위한 첫 마디를 가지고 있으나 계시는 마지막 말을 가지고 있었다.
㉢ 루돌프 불트만(Rudolph Bultmann)
비록 불트만은 바르트의 업적을 찬양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불트만의 중요성은 바르트에 대해 그가 제기한 반론에 있다. 불트만은 종교사적 접근과 실존 철학을 결합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가로서 역사 가운데 직접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선포한 성경의 세계관을 거절하였다. 역사에는 아무런 목표가 없으며,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선포한 모든 개념들을 불트만은 신화라고 칭하였다. 그는 역사와 합리론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 단지 그의 차이점은 그가 신화(mythology)라고 칭한 것에 대한 재해석에 있었다. 하나님의 행동은 역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의 의미는 지나간 세기의 역사적 예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 존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요소는 기각되었다. 그는 실존 철학을 사용하여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기독교적 체험 안에서 성경의 모든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쿨만은 “성역사적 해석 방법의 대표자로 생각할 수 있다. 이 해석 방법은 쿰멜(Kummell)과 곱펠트(Goppelt)가 역사적-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고무되었다. 쿨만은 계시와 구약이 모두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사건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해석이 동반되었으며 결코 행동만이 홀로 서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해석은 결코 그 사역(행동) 자체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 해석은 역사 그 자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해석이며 따라서 신약성서는 오직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만 정확하고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성서해석의 제원칙
“주석”은 성서해석을 실제로 행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① 용어의 기원
어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면 해석자는 반드시 그 단어의 어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 단어들이 그 의미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해석을 위해서 특정 저자의 용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성구사전은 이러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최상의 자료이다. 그 단어의 의미는 성경 언어의 발전에 있어서 다른 시대의 배경을 고려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동일한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서로 다른 저자간의 비교도 이루어져야 한다.
② 구문론
구문론적으로 해석하려면 해석자는 그 본문이 기록되어진 그 언어의 문법적 원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언어의 문법은 이러한 지식의 자료가 된다.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실은 문법의 기능이 언어 법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사상 표현의 도구로서 발전하였다. 문법은 후에 그것이 “표현된 개념”들 가운데 작용할 때 그 언어의 법칙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해석자 자신의 언어에 있어서 이 문법적 구성의 의미는 다소 잠재 의식적으로 즉시 파악된다. 그러나 외국어의 경우에 있어서 그 언어의 독특한 생각이나 관용어를 표현하는 법을 분리시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해석자는 반드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저자의 입장에 서야 하며 그 저자가 사용한 관용적 표현에 아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③ 본문(문맥)
문맥상의 전후관계로 해석하려면 해석하고자 하는 본문의 전체 구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구성의 본질은 해석자에게 극히 중요한 것인데 그것이 통일성 있는 진술이거나 혹은 어떤 다른 형식의 기술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구절을 바로 둘러 싸고 있는 논의의 배경 가운데 그 주제는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종종 미묘한 의미가 그 본문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논의의 성격에 의해 단어에 주어진다. 장과 절로 나뉘어진 성경 본문의 구분은 이따금 중요한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왜냐하면 문맥의 중요성이 약해지고 마치 각각의 구절이 홀로 서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 구분은 사상의 정확한 구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좋은 실례를 골로새서 2:21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종종 금주에 대한 설교 본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이 구절은 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금욕주의를 비난하는 말씀이다.
④ 역사적 자료들
해석자는 그가 해석하는 문서를 둘러 싼 배경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러한 자료는 어떤 좋은 주석이나 혹은 신약이나 구약의 입문서에서 언급한 서론적 진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해석하고자 하는 책과 관련된 사람의 생활 양식과 풍습과 심리 상태는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연구는 그 역사기록 방법과 언어 묘사의 특징과 문학적 양식과 시대나 연대기에 대한 그들의 개념을 포함하곤 한다. 일반 역사나 특정한 역사의 저서들은 해석자의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다.
⑤ 성경의 유추
해석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안전책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유추를 고려하면서 해석하는 것이다. 즉 해석자는 성경 이해의 안내자로서 성경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전체적 경향과 모순되는 색다른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성경은 성경 자체를 확증해 준다. 성경적 견해에 대한 철저하고도 정확한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다. 해석자는 가능한 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며 저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읽으려고 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⑥ 올바른 순서
이상에서 언급한 제원칙에서 성서해석의 정확한 순서가 분명히 드러난다. 첫 번째의 중요한 질문은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두 번째는 “그는 그가 말하는 바로써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어떤 전문적인 해석 작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이 두 질문을 기억하고 그 구절을 읽어야 한다. 분명히 본문(가능하면 원문으로)을 읽고서 이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 있은 후에 해석자는 낯선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성구사전(렉시콘)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성구사전을 사용한 후에는 구문의 구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좋은 문법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음에 이 구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역사적 자료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주석서를 참고하여야 한다. 그 구절이 기독교 신학와 기독교 윤리에 관련된 면을 깨닫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주석서나 성구사전의 출판연대를 고려하는 것도 언제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장 최근의 발견과 자료를 해석자의 재량에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그가 해석하려는 본문에 대해 가능한 한 충분한 통찰력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대한 의무

개인적 윤리는 개인이 도덕적 집행자로서의 자기자신에 관련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행동규칙에 도덕율을 적용하는 것을 다루는 바 실천적 윤리의 분야이다. 자기에 대한 이들 의무는 품성의 형성을 위하여서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1. 육체를 거룩히 보존하는 일
인간의 육체의 존재는 현세에 있어서 그 사명 달성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다. 자기존재의 모든 힘을 보존하며 개발하는 일은 첫째되는 의무이다. 기독교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그것을 성령의 전으로 보고 있다. 이일은 육체의 신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이 신성을 보존하는 일은 육체의 축복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육체에 관해서 특별한 의무는 다음과 같다.
① 육체적 힘은 보존되어져야 하며 개발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숭고하고도 신성한 의무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는 이 육체라고 하는 유기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체적 존재를 경시하는 자는 자기의 전체사명을 위험지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육체를 파괴하는 자는 자기의 사명을 종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엄중하게 금단되어져야 한다. 도덕적으로 계발된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지 자살은 생애의 주어진 목적에 위반된다고 하는 것에 동의해 왔다. 그러므로 자해행위도 금단되어진다. 이것은 몸을 흉하게 하는 일 혹은 육체적 기관의 완전한 활동을 방해하는 것과 같은 모든 육체적 상해(손상) 또는 절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중세기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혹은 현대 여러 이교도나라에서 행해진 것과 같은 금욕적인 습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명하는 금식이나 자기부정은 인간의 육체를 약화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장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② 운동, 휴식, 수면과 레크리에이션에 의해서 육체를 보양해야 한다. 노동과 휴식은 한가지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불가결하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결은 노동-손발에 의한 것이나 두뇌 혹은 마음에 의한 것이나 간에-을 귀중한 것으로 삼으며 안식일은 영적인 ‘신앙의 안식’의 상징으로 삼는다. 현대 공업사회생활의 속도와 복잡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마음과 육체의 긴장감은 안식과 레크리에이션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육체 보존상 필수적인 요소이다.
③ 육체의 욕구
육체의 욕구와 정감은 인간의 보다 높은 지적, 영적 관심에 종속되어져야만 한다. 어떤이들은 성결이 육체의 욕구나 즐거운 감정을 파괴하던가 혹은 거의 파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성결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인간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중의 하나라도 파괴하지 아니한다. 욕구와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그것들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되어 지는 것이다. 사실상 성결은 인간이 모든 정당한 기쁨과 만족을 충분히 향수하도록 인간에게 자격을 준다. 초시대의 제자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2:46). 사도 중 한 사람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하면서 미혹의 영에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고를 주고 있다(딤전4:1,3).
성결은 반드시 즉각적으로 욕구와 정감의 정상적인 상태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특별한 일에 관해서 아직도 빛이 주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얼마동안은 왜곡된 욕구가 존재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왜곡된 욕구와 타고난 욕망은 하나님의 능력에 복종되어지며 신앙에 의해서 교정되고 규제되어지게된다. 욕구라고 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지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 자체에는 조금도 선악의 관념은 없으나 욕구는 단순히 탐낙을 열망하고 있다. 욕구는 그 자신을 결코 제어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제어에는 복종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④ 육체를 배려할 때에는 반드시 적당한 의복이 요청된다. 그것은 보호와 즐거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예의와 단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의복의 문제는 육체의 행복을 위해서만은 아니고 그 사람의 성격과 심미적 성질을 표현하는 문제로도 되어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사도들이 명령을 주게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딤전2:9-10, 벧전3:3-4 참조). 단장에 관한 성서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이 지시되어진다. 즉, 이 일에 관해서는 우선 취향에 따를 것이며, 복장은 착용하는 자의 연령과 장소와 생활에도 알맞아야 할 일, 적당한 장식을 택할 시에는 겸손과 건전한 사고 방식으로 해야할 일, 또 모든 의복은 착용하는 자의 겸손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할 일 등등이다. 사도는 금이나 진주로 장식하며 기타 값비싼 의상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색인 온유와 절제의 정신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시사하고 있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이 괴벽하게 검소한 의복이나 화려하고 값비싼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부당하게 이목을 끄는 일이 없도록 의복착용에 대해서 예의를 지키도록 권고받고 있다. 단장은 언제나 완전 헌신하고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사회적, 영적효과(Effectiveness)에 이바지해야만 한다.
⑤ 육체는 거룩히 보존되어져야 한다. 육체를 거룩치 못한 용도에 드려서 그것을 불순한 것으로 삼는 일은 곧 죄악이다. 육체를 자연적이거나 비자연적이거나 자기욕망에 따라 스스로 타락하는데 넘겨주는 일은 한가지로 죄가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4:3-4). 이 세상 사는 동안 육체는 거룩히 돌보아야할 대상이 되어야만 하며 참된 성결은 언제나 육체를 잘 돌보는 일과 양립한다. 육체가 거룩하다고 하는 최고의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 육체는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육체를 상케하든가 성령의 전으로서의 그 신성함을 파괴하는 경향은 그리스도교의 교훈과 실천에 의해서 금지되어진다.

2. 사념(思念)의 함양
여기서 쓰여지는 사념(Mind)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내적생명을 가르킨다. 즉 신체가 가지는 육체적 생명에 대조되는 영혼의 생명이다.
우리 주님은 그 훈계중에서 사념에 모든 힘을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시사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곧 첫째 계명이라”(막12:30). 여기서 말하는 ‘마음(Heart)'은 정애(情愛, Affections)의 소재지이며, 인간의 가장 심오한 존재를 가리킨다. ‘목숨(Soul)'의 사랑은 거기에 부수하는 감정의 고양을 가르킨다. ‘뜻(Mind)'은 사랑을 이해하며 해석하는 지적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힘’은 이와같이 성장한 인격의 모든 힘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Heart)의 사랑은 정결하게 하며, 목숨(Soul)의 사랑은 풍요하게 하며, 뜻(Mind)의 사랑은 이해하는 일이다. 제1의 것은 가장 높으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대상으로 하며 제2의 것은 질서와 조화중에 나타나신 가장 아름다우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며 제2의 것은 가장 높은 진리 혹은 진실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① 지성의 발달은 유용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불가결한 것이다. 알고자 하는 의욕은 인간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바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서 이 의욕은 비상하게 증대된다. 무지는 성결과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신 분이시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제자”즉 배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과학, 철학 등의 진리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거의 평가할 수가 없다. 영적진리에 대해서 불타는 의욕을 가지지 않은 자는 진리의 영이시라고 밝히 진술되어지는 바 약속의 보혜사의 은사에 대한 어떤 주장에 관해서도 심각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성과 이해력은 사람의 영혼에 시력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범위와 진리를 향한 영적 통찰력을 넓힘으로서만 감정의 성질은 부요하게 되며 영적생활이 보다 깊어질 수가 있다. 폭넓은 이해력은 또한 확고한 인격을 구축할 수 있다. 우유부단이나 불안정은 때때로 근시안적인 생각의 결과이다. 넓은 지적인 시야와 통찰력은 목적하는 일의 지속을 위해서 불가결하다.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라고 기록할 때에 이 진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② 인간의 내면 생활의 감정 또는 그 정서적 측면은 지성과 의지와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다. 종교경험에 있어서 새로운 진리를 인식하는 일 또는 잘 아는 진리를 새로운 국면에서 통찰하게 되면 감정적인 경험을 낳게 된다. 이들 감정적인 경험은 통상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혼합된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보여지는, 또 실현되어진 진리는 감정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 진리가 익숙해지게 되면 불타던 감정은 가라앉게 되며 의식으로부터 사라지는 듯하다. 감정적 경험의 간만의 결과로서 어린신자와 미경험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한 경우를 당하는 수가 자주 있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게도 그와 같은 종교적 감정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감정적 생활을 발전시킬 때의 본질적인 요인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할 일, 혹은 이미 알려진 진리에 관해서 보다 깊은 면에 도달하려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일이다. 진리를 떠난 감정은 위험한 열광주의로 인도된다. 그러나 강한 감정을 일으키는 진리는 성결생애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타인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진리에 의해서 감동되어진 사람이다. 원칙에 의해서 행동하는 일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불타는 원칙에 의해서 행동하는 일은 신약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하는 위대한 특권이다.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서 정당하고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대한 신앙은 중심적이며 기본적이라고 하는 일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은 감정적 경험이 간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불변의 확신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도덕적 성질은 성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본적 제일의적으로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는 의지의 성장에 관해서 언급한다. 도덕적 품성이 형성되는 것은 오직 적절한 선택에 의한 것뿐이다. 또 행위는 전적으로 도덕적인 품성에 의존하게 된다. 영혼(Soul)의 충동은 의지의 제어밑에 놓여지며 또한 최고선에 종속되어져야만 한다. 올바른 도덕적 기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슴으로부터 유래하게 된다. 그것들은 교사들에 의해서 또는 성경연구에 의해서 혹은 이 제목에 관한 역작품에 의해서 또는 정확한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또는 선량한 사람들의 모범에 의해서 습득되어진다. 하여간 도덕적 기준은 습득되어야만 하며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서는 얻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생활의 최고표준을 개척하며 또 도덕적인 의무의 모든 법칙을 양심적으로 준수하는 일이 각사람의 의무이다. 이 의지의 훈련은 선택을 제어함으로써만 달성되어진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마땅히 할 일을 배우게 되며 그 행동이 일정불변할 때에만 그것에 숙달하게 된다. 의무는 우선 많은 자기부정이라고 하는 상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력적인 노려과 영속적인 경계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의 의무가 수행될 때마다 습관의 법칙에 의해서 새로운 힘이 획득되어진다. 따라서 의무의 길은 점차 용의하게 되며 또한 가벼운 것으로 된다. 훈련은 자진해서 하는 것이나 타인에 의해서 받는 것이나 매우 중요한 것이다. 훈련없이는 참된 십자가의 정병에 알맞은 강력한 목적과 강건한 성격을 성장시킬 수가 없다.
④ 인간은 함양을 필요로 하는 미적 성질을 갖고 있다. 크리스챤은 품성은 지성, 감정, 의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균형잡히고 조화를 이루고 통일된 인격을 이루도록 비율적으로 발달하는 일이 또한 요청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열심히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 하나님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하도록”(시96:6,9) 우리는 명령받고 있다. 자연계에 있어서나 예술의 세계에서나 아름다운 것 또는 숭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며 고상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의도되어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무감각은 불완전한 성장상태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움을 속히 깨닫는 취미를 함양해야 하며 어디서나 아름다운 것이 발견되어지면 그것을 정확히 판단하며 인정하며 감상하는데 있어서 폭넓은 감각을 함양해야만 한다.

3. 영적 생명의 성장
성서는 영적생명의 성장에 관해서 명령, 교훈, 권고, 장려하는 일로 가득차 있다. “오직 우리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5-8) 바울은 우리들에게 대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6)라고 권면하고 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은총의 수단을 올바르게 또한 근면하게 지킴으로써 영혼은 성결한 중에 보존될 뿐만 아니라 은총과 진리에 관해서 보다 깊은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성서중에 혹은 성서밖에 있는 영적 문헌은 영적생명의 장성에 측량할 수 없는 도움을 주고 있다. 가장 깊은 감정과 인생의 최고의 흠앙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취급하고 계시는 이일에 관한 기록을 우리는 시편과 같은 영감된 문헌중에 갖고 있다. 성서에 관한 현저한 영적문헌에다 옛 선지자들의 영적고양, 우리 주님의 입으로부터 떨어진 은혜로운 말씀 그리고 주의 사도들의 영감된 말이 가산되어지는 것이 좋겠다. 이 모든 것에 의해서 인간의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주님과 더불어 보다 깊은 영적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이외의 폭넓은 분야의 유익한 영적 문헌에 관해서 논하기에는 지면상 제한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는 인물들의 폭넓고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독자들의 영적 생애를 성장시키는데 유익했던 저작들중에 다음과 같은 소수의 고전을 소개하겠다.
Thomas Akampis 「그리스도를 본받아」, Frances de Sales 「경건한 생활의 개론」, Madame Guyon, 「기도의 방법」, Bunyan 「넘치는 은총과 천로역정」, Bishop Jeremy Taylor 「거룩히 사는 일과 거룩히 죽는 일」, John Wesley 「영적회상과 그리스도인 완전에 관한 평이한 설명」, T.C.Upham박사 「내적생활의 원리들」.

성육신

하나님의 인간되심, 특히 기독교적 용법으로는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이 용어의 기독교적 용법은 요1:14의 라틴어 번역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4세기 이후 라틴의 기독교 저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했다.

1. 근본적 의미
① 개관
성육신은 신적인 존재가 인간적이거나 동물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나 회교의 이맘들(imams, 신에 의해 임명된 지도자들로 종교적 우두머리의 칭호)의 경우과 같은 단순히 신적인 영향력(그것이 아무리 계속적인 것일지라도) 이상의 것이다. 인간적인 존재가 신적인 존귀한 자로 승격되는 것은(적절하게 말하자면 신격화) 성육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육신개념은 많은 종교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용법상 가장 철저한 표현은 기독교신학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힌두교에서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의 영웅인 라마(Rama)는 신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훗날에는 비슈누(Vishnu)신이 성육신한 자로 간주된 것 같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비슈누의 성육신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도 신들은 인간이나 동물들로 성육신한 것으로 생각했고, 죽은 자들도 다시 성육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것은 영혼의 재생이나 윤회에 대한 신앙과 비슷함). 특별히 이집트 왕은 신들 중의 하나가 성육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의 아버지가 자식을 보려는 행위의 순간에 실제로 아버지의 몸을 취하고 있던 자는 라(Ra)신이었다는 것이다. 회교의 한 종파인 시아파(Shiites)는 알라(Allah)가 그 예언자의 사위인 알리(Ali)로 성육신되었다고 믿는다.
하위 신들의 성육신이나, 동일한 신의 성육의 반복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힌두교에서와 같이, 한 신의 성육신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독특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사상을 통해 그 최종성이 강조된 점이다. 성육신은 힌두교에서보다도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힌두교는 범신론적인 전제, 즉 신(神, Brahma)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힌두교는 인격성과 개체성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다.
② 기독교에서
요1:14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확증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는 하나의 특별한 삶에서 인격적이었다. 나사렛의 목수인 요셉의 아들 예수(B.C.6년-A.D.30년)는 단순한 갈릴리인이나 유대인, 혹은 A.D.1세기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 그의 실제적․유대적 생활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이 함께 했다(요10:30, 14:10). 그는 목수․교사․예언자로서의 인간적 잠재력의 계시일 뿐만 아니라, 신적인 진리와 능력의 계시였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신자들 사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단순히 화신이거나 신이 잠시 현현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양자설이라고 알려진 이론도 아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컨대 예수는 유혹을 뿌리쳤고 도덕적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생애의 어떤 시점에서 신적 지위로 채택되고 승격되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설교의 몇 가지 특징들로 보아 이 이론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찍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신적이었다. 그는 기독교적 확증에 있어서 불가피한 모순에 의해 그의 인간성이 완전히 실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
그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로고스(즉 마음)가 드러내졌다. 그는 히브리 예언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주고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바와 같이 그는 로고스와 동일화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 삶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사람들 앞에 인격적으로 드러내고 실재하도록 만들었다. 히브리서의 첫머리도 똑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로고스 개념에 의해 해명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전달에 대해 최선의 인간적 사상으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질 수 있었고, 또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원한 우주적 화해원칙은 철학적인 용어에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전승이 그것에 대해 증언하고 있듯이, 예수의 삶 속에서 우주의 운행양식이 인식될 수 있다. 우주의 의미와 하나님의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가 로고스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주는 그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의 의미보다 성육신의 의미가 얼마나 더 깊은 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로고스 교리는 계시를 충분히 적절하게 설명한다. 로고스는 계시된 하나님을 의미한다. 즉 그의 초월적 존재나 내적 본성이 아니라, 세상에 투사될 수 있고 내재하게 되는 하나님의 본성을 말한다. 구약성서나 헬라적 유대교에서 이것은 ‘지혜’로 표현되었다.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로고스가 인간생명에 내재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역사상 한 시점에서 일어난 계시, 혹은 계시의 절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은 계시의 궁극적 형태이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는 요한이 다른 계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만큼 다른 계시를 능가한 것이다(요1:18,10:8,14;6). 그리고 초기의 복음서 전승에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인식이 이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마11:27)에게 유익하다고 말한 것이 나온다. 우리가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참조:고전13:12;갈4:9;골1:9-10) 인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성육신 교리는 어느 정도 ‘대속’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계시는 그의 고난과 부활에 가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신적인 관심의 계시자로서 그리고 인간의 문제의 해결자로서 그에게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의 전생애와 업적 때문이다. 그는 죄를 속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롬8:3). 또한 그는 선을 가능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자와 좋은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5-8장), 그리고 사람이 진정으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바, 하나님의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요10:10, 20:31) 세상에 왔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업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증언에서 볼 때 확실하며,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속성에 관한 후기의 교리가 보존되도록 공식화되었던 것은 그의 위격의 이중적 측면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갖는 역설은 우리의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육신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궁극적으로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2. 복음서에서
① 마가복음
마가복음에는 탄생설화나 족보가 없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강조한다. 예수는 세례받을 때와 변용 때에 하늘의 음성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환호를 받는다(마1:11,9:7). 이런 것들이 예수의 사사로운 경험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 그의 직분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나타낸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 세례와 변모는 아무리 상세하게 해석된다 하더라도 예수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다. 귀신들과(3:11,5:7등) 십자가상에서의 백부장(15:39)이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은 마가의 설화에서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기독교적 비유(12:1-11)의 의도는 원래 이스라엘인의 완고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사자(使者, 그의 아들)가 순교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있다. 예수의 아들 신분에 대해 두 가지 새로운 관계와 구별된다. 즉 그것은 특별한 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기까지 자기희생을 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이 비유는 십자가와 연관시켜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수 자신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13:32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기사에서 성부에 대한 예수의 독특한 관계를 본다. 거기에서 아람어 ‘아바’(Abba, 14:36)라는 말을 씀으로써(겟세마네와 그밖의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가 기도할 때 실제로 기억한 것) 그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에 의해 강조되었는데, 예수는 ‘나의 아버지’를 반복한다(마26:39-44). 이 ‘아바’는 유대 기도서에 있는 아비누(Abinu:우리 아버지)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으며, 주기도문에 있는 ‘우리 아버지’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의 시련기사의 역사적 정확성은 더욱 의심스럽다. 막14:61-62에서 예수는 대제사장의 문책에 대해 자신이 ‘찬송받을 자의 아들’(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메시야’와 동의어로 의도되었다. 누가의 기록에서는 메시야직에서의 주장과 아들 신분으로서의 주장이 구별되고 있다(눅22:67-70).
②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마가의 기본적 기독론은 마태와 누가의 기독론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마태와 누가의 특색들은 예수의 왕권(마태)에 대한 강조나 그의 인간성(누가)에 대한 강조와 같이, 그의 성육신과 아들 신분과는 크게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자로서의 예수의 주제도 마가에서보다 마태와 누가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그 중심역할을 하는 바, 신적이고 구속적인 활동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왕국에 대한 구절에서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왕국의 서임자로서의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는 왕국의 전달자로 정당하게 불리어질 수 있는 자를,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나 이들 중의 절정으로서의 세례 요한과도 구별되었다. 메시야로서의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마2:1-11에서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참조:막15:1-32;요18:33-19:22).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마태와 누가에 의해 추가된 가장 의미 있는 자료들은 예수의 탄생과 초기의 어록인 Q자료에서 유래된 유명한 로기온(Logion)의 기사들이다(마11:25-27;눅10:21-22).
마태와 누가복음의 탄생설화는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에 따르는 인성이 실제적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부성은 인간적이라기보다 신적이었다. 두 복음서 기자의 의도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마리아의 처녀성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이었다.
누가에 따르면(1:26-38), 마리아의 아들은 인간적인 성행위 없이, 하나님의 은혜(헬라어로는 카리스[charis], 30절)․성령․능력(프뉴마[pneuma]와 뒤나미스[dynamis],35절)의 활동에 의해 수태되었다. 그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메시야였다(1:32-33,2:11).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눅1:46-55)는 이것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 중의 하나로 해석하며, 송가(Benedictus, 눅1:68-79, 참조:2:25-32,38)도 이와 비슷하다. 마리아는 이런 신적 행위의 도구가 되는 독특한 영광을 얻는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에는 처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특별한 영광은 의도되어 있지 않다(참조:11:27-28).
마태는 누가와 같이 예수의 탄생을 성령의 활동에(마1:20), 그리고 메시야직에(2:1-6) 연결시킨다. 그도 역시 예수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다(1:21, 참조:눅1:31). 마태에 특수한 것은 사7:14에 대한 언급이다(1:23). 거기에서 히브리인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처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강조점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가져다 줄 아들의 탄생에 있다. 누가보다 마태는 이방세계를 위한 예수 탄생의 의미를 더욱 강조한다(참조:눅2:32;마2:1-11).
인간적인 부성이 없다는 것은 누가에 의한 만큼 마태에 있어서도 강조된다(1:18-20). 성육신의 사실과 그 업적의 이런 특별한 방법은 이 두 기사에서 불가분의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에 대한 현대비평학은 그것들을 전설로 분류하고, 처녀탄생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며, 그것에 대한 다른 신약성서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신앙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제 조건들 속에 유입해 들어왔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건이 시작되는 ‘방법’에 있어서의 전대미문의 상황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탄생설화들에서 육체적인 기적에 추가하여 두 가지 특색이 기억되어야 하는데, 첫째로 마태의 이사야서 인용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이든 기적적이든간에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의 하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로 두 기자는 부모들의 영적 준비에 대해 언급했다(마1:20-21;눅1:26-38). 신적인 행위에 대한 그들의 감수성이 없었다면 육체적인 사건은 그들의 집에서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리스도 탄생의 실재는 이러한 탄생설화들에서 확인된다. 그는 진정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육체는 이단자들이 생각했던 가현설이 제시했던 것처럼 단순한 외형이 아니었다(골2:8-9;요일4:1-3). 성육신사상을 진지하게 다룰 수 없는 이러한 형태의 영화는 불교사상에서도 이와 상응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불교는 부처가 순수한 영적 육체를 가지는 것으로, 즉 입신의 불결함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특별한 방법으로 수태되었다고 생각한다.
마11:25-27(눅10:21-22, 이 말씀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음)은 예수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선교의식을 반영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호친교와 인정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는 그 자신의 계시를 땅위의 천민들에게 허락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시며, 이런 계시를 위해서는 그 아들이 유일한 중재자였다. 그의 지상적 존재는 그러한 신적 섭리의 결과이다(이하에서 검토될 요한의 병행귀절을 유의해야 함. 참조:요1:14,18). ‘주셨다’(마11:27)라는 동사형은 성육신 자체보다 예수의 하늘의, 혹은 초시간적 준비(성육신을 위한 준비)를 의미함에 틀림없다. 예수가 가지고 있고, 그의 지상적 선교가 끝났을 때 그의 대리자들에게 인도할 수 있는 이런 신적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마28:18과 비교가 된다. 마11:27에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그의 세상에 대한 실제적 선교사상에 대해서는 눅4:43에 드러나 있다. 거기에서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즉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는 말은 그의 성육신을 나타내기 위해 한 말로서, 이것은 막1:38이 약간 개조된 것이다.
마11:25-27은 확실히 예수의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이 말씀을 아들 신분, 즉 예수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모든 사람과 함께 가지는 아들 신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막12:1-11에 있는 바와 같이, 이 구절에는 예수 자신의 확신과 통찰력이 담겨 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느꼈던 특별한 친밀감에 대해서는 마가(10:32-33,15:13,16:17,18:10-14,35, 대부분 마태에게만 독특한 자료임)와 누가에게만 독특한 네 구절(22:29,23:34,46,24:49)을 신뢰해도 좋다.
예수의 독특한 아들 신분은 하나님을 믿고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진 일반적인 아들 신분과 대조되어 눈에 띄인다. 예를 들어 눅6:35-36(참조:마5:48), 12:30-32,15:11-32,16:24;마5:9,16,6:9,21:28-31,23:9,25:34들이다. 눅8:19-21(막3:31-35),11:27-28을 보면,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지 말도록 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격적 위엄이나 탄생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복종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심지어는 성육신까지도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축하받기 위한 영광은 아니다.
③ 요한복음
성육신은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아들 신분은 비록 그 독특성이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메시야직과 동의적인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의 영원한 측면이 더욱 강조되었고, 예수의 아들 신분과 메시야직은(비록 예수의 인간적 생활의 현실과 역사적인 전체적 상황은 요한에 의해서 분명하게 전제되었지만) 단순히 어떤 특별한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한 그의 사역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라기보다는 존재론적으로 그들의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려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서두부분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1:1-18). 요한은 마가가 했던 것처럼 예수의 세례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또한 마태와 누가가 했던 것처럼 그의 탄생과 그와 연관된 족보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요한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의 복음을 창조와 관련하여, 창조 전에는 영구적인 하나님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그 벽두어 ‘태초에’는 구약성서의 벽두어와 같다. 그리고 이것은 창1장의 창조설화 및 모든 것이 의존되어 있는 창조의 말씀을 환기시키도록 의도되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의 사역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일부분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한 본성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의 활동에 나타난 것은 완전히 말씀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말씀’이란 요어는 요한이 그의 복음을 쓰기 전에도 종교와 철학에서 매우 유행되었었다. 헬라어 로고스(logos)는 이성과 말해진 말씀, 즉 내적인 사상과 외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용어를 선택해서 예수에게 적용했다. 왜냐하면 그의 지상적 생활과 사역은 실제로 인간에 대한 신적 섭리를 계시하는 것이었고,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신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시키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분여하셨다. 그의 말씀은 ‘영과 생명’이었다(6:63, 참조:4: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나타내는 ‘표적’이었다.(2:11 등).
예수의 활동은 로고스의 작용으로 묘사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요한은 로고스가 실제로 인간이 ‘된다’는 뜻에서 인간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강조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요한은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이전의 모든 선생들을 넘어선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1:14). 단순히 ‘인간’이란 말보다 ‘육신’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은 심사숙고해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그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인간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육신과 동물과의 유사점과, 육신과 하나님과의 차이점은 매우 분명하다. 동사 ‘되었다’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마도 그것을 너무 정확하게 정의내리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리라. 결국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중심적 역할을 말한 것이다. 이는 1절에 사용된 동사 ‘계시다’와는 다른 것으로서, 그것은 3절(‘지어졌다’)․ 10절(‘지어졌다’)․17절(‘왔다’)에서와 같이 실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말씀의 육적인 실존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생활로 시작되었다. 한편 이것은 육신과 영원한 말씀의 완전한 동일시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여전히 ‘육신’을 통해서 은총과 진리와 영광을 나누어주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점에서 그것은 ‘아들’이라는 용어에로 넘어간다. 예수의 지상적 생활뿐만 아니라 ‘아버지 안에서’ 그의 계속적인 실존은 복음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다. 13절에서 사용된 혈통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14절에서는 사라졌다. 그러나 하나의 동사로 신이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의 몸으로 실제로 임재한다는 의미를 적절히 표현했다고 생각해서은 안 된다. 신의 로고스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인간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육신에도 들어갔다.
이와 같이 영원한 존재가 역사 속에 들어와, 즉 한 인간생활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결하기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성육신의 이런 측면은 키텔(G. Kittel)의 유명한 말 ‘특수성의 스캔들’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나 요한은 이것이 기독교적 경험으로서의 예수의 역사적 생애의 의미가 그것을 평가하게 되었을 때 확인되었음에 틀림없으며, 이것은 궁극적인 실재의 표명으로 판명되었다고 느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이것을 로고스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로 결정한 후 요한은 자기가 이전에 이해하던 로고스 교리의 속박들을 깨뜨려야 하며,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결정적인 주장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는 이 복음서에서 ‘된다’는 것이 초점, 즉 인간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에 이르는 바, 지상적 예수가 행한 사역의 계속적인 체험과 업적들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은 성육신이라고 불리어지는 기독교 신학형태의 근원이 된다.
다른 신약문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이런 강조점의 차이는 완전히 대비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의 의미(1:29;요일3:5,4:10)도 역시 이 복음서에서 강조되었다. 더욱이 성육신의 결과는 빛(요1:5,9)․중생(重生, 1:12-13), 그리고 영생(3:15-17,5:26,17:2-3,20:31;요일4:9)으로 선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보다는 계시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인간의 문제에관여하시는 그리스도보다 인간의 무대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것(이들은 그의 가르침․병고침․희생적 죽음 등을 통해 이루어짐)은 새로운 것이고 의미심장하다.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인자라고 기술한 중요한 몇 구절이 있다(요3:13-15,6:33-39,62,8:14,12:32-34,13:3). 아마도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오고, 다시 올라감으로써 인간을 자유되게 한다는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는 이 구절에서 요한에게 다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는 예수에게 있어서 승천은 그가 적대자와 어둠의 세력을 만난 후에야,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들리움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2:32, 전체 맥락은 31-39절 참조). 영광 중에 높여지심은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높여지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사역을 위해서 내려오심이 1:14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가 육을 입으심이라고는 결코 일컬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속세의 영역에 들어옴을 인간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로 만들며, 희생적인 고난보다는 구원자의 생애의 개시에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요한의 개념으로 볼 때, 성육신은 대속을 포함하지만 대속은 성육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1:14에서 성육신은 신적인 영광의 계시와 사람들 사이에 거하심(문자적으로는 잠정적인 거함[tabernacling]을 의미한다. 출29:42-43,33:7-9에 암시된 바는 예수의 오심은 하나님이 지상에 임재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요4:21-24).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지고 예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온 그에 대한 인간사회의 적대는 이 복음서에서 종종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1:4-5,9-11,3:19-21,6:60-71,8:37-59,12:37-43,15:18-23,17:14). 계시자의 현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단의 계곡에 서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으로 응답하거나 어둠에 남아 있어야 한다.
1:14에서는 성육신을 밝힌 후에는 ‘로고스’라는 용어는 쓰이지 않으며, 그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며 예수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사람의 아들’도 빈번히 쓰이는 칭호이나 지배적인 것은 아님). 그러므로 성육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라는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3:16-18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위에 아들의 사명의 근거를 두었다. 이것은 요한이 로고스와 계시라는 형이상학적인 어휘로부터 다른 신약 기자들의 경우처럼 윤리적 용어로 바꾸었음을 말하며, 또한 주께서 쓰신 특징적인 기독교적 용어이다. 그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성육신의 동기를 위해서 사용된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의 중요성은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는 데서 볼 수 있다. 성육신을 촉진했고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의해 보충된 하나님의 내어주심은 복음의 핵심이고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는 그밖의 요한복음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3:35,10:17,15:9-10,17:23-26)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14:31,15:10), 그리고 아들의 자기 사람들에 대한 사랑(13:1,34,14:21,15:9-13)을 본다. 사실상 요한은 하나님의 본성․계시와 구속의 과정․구원된 공동체 안에 있는 도덕적 관계와 교회를 해석하기 위해 사랑의 개념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요한일서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요일3:11-24,4:7-5:5).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에 대해서는 요5:18-23,10:29-30,37-38,14:8-11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물론 그의 선재는 암시되었다(참조:5:17,8:57-58). 아들의 사명에 대해서는 4:34,5:37,6:38-39,9:33,12:44-46을 참조.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14:10, 참조:요일2:23)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은 교회에서의 권위나 인간성의 의의에 대한 그의 유일한 주장이며, 성육신 교회는 이것을 보장한다. 이것을 빌2:6-8에서 유래된 자기비하(케노시스[kenosis])의 교리와 화해시키기는 어렵다.

3. 사도행전과 서신에서
① 사도행전
사도행전의 기독론은 성육신으로보다는 양자설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그를 증거하셨느니라’(2:22)고 묘사된다.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자’(3:13-14,4:27,참조:8:32-34)로, 하나님께서 세우시기로 약속했던 선지자(3:22)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은’ 자(10:38)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메시야(9:22,17:3,18:5,28)와 인류의 최후심판(10:42,17:31)을 의미한다. 메시야로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어질 수 있다(9:20).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신성의 기원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는 것 같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시2:7에서 인용한 이 구절(행13:33)은 그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사상은 그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이며, 모세의 율법보다 더 큰 은혜인 그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39절)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주장되며(2:36), 특히 바울의 연설에서(16:31,20:24,35,22:8-10,23:11,26:15) 분명히 나타난다.
②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에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보다 그의 고난과 재림(1:13에는 ‘계시’를, 5:4에는 ‘나타나심’의 뜻으로 쓰임. 한글개역에는 ‘나타나실’)이 더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1:20에서의 첫 번째 오심은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이 정할 때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참조:딤후1:9-10). 이와 같은 때의 실현은 종말에 대한 전주곡이다. 이 확신은 대부분의 초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초대교회의 선포에 근거를 두었다(행2:16-17;히1:1-2). 임박한 종말은 베드로 전서의 사상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나타나심을 첫 번째 나타나심보다 더 두드러진 것으로 만든다(똑같은 헬라어 동사 파네로오[phaneroo]는 벧전1:20과 5:4에서 사용됨. 이와 비슷하게 요한의 저술들에서 그것은 성육신[요일1:2,3:5,8]과 재림[요일2:28,3:2]을 의미함).
베드로 후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적 생애의 실재성과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었다(1:16). 똑같은 명사가 3:4에 그의 최후의 오심에 쓰인 것처럼 그의 첫 번째 오심에도 쓰인다(파루시아[parousia], 베드로 전서에 있는 ‘나타나실’의 이중적 의미와 병행귀절 참조).
③ 바울
바울의 성육신에 대한 이해는 다른 기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관한 모든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구절과는 보다 중요하게 연관된다.
㉠ 갈4:4-5:이 서신의 3장과 4장에서 논의되는 주제의 배경인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 이전시대에는, 특히 유대인, 그리고 모든 인류는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과 혹은 다른 도덕적인 법전의 인도에 종속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인간이 이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할 필요가 있는 일종의 노예상태였다. 참된 의는 이러한 노예상태하에서는 얻어질 수 없었으며(3:11,21), 율법은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불과했다(3:24). 하나님의 의도는 선이 성취되는 것이었고(3:24,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되는 것이었는데(3:26-29), 그리스도가 오심은 이 모든 것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때가 찼을 때’(4:4)이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노예상태에서 자유로와지게 되었으며(4:5,5:1), 사실상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지위를 획득했으며, 옛 이스라엘의 열망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아들이 되는 특권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4:5-7,3:26).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의 아들로서, 그리고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권위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자로서 오셨다(참조:4:8-9).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그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4:4).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은 그가 실제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며, 단지 하나의 형체이거나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동정녀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하는 바가 없다. 기적은 그의 육체적인 조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4:4)에서 암시해 주는 바대로 하나님의 지배와 목적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 다른 두 곳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바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는 유대인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롬1:3,9:5).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어떤 특권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롬8:3-4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성육신의 목적이 ‘죄’ 때문에, 즉 인간의 죄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해서라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육으로 남아 있는 인간은 도덕법(율법)에 따라 살더라도 선에 이르지는 못한다. 선한 생활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죄된 육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이 필요하다. 어쨌든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구속되던 요소를 제거하셨고, 인류를 자유롭게 하셨으며(갈8:2), 새로운 도덕법을 주셨다(2절, 5-11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써 인간들과 대면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 유용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인간의 문제는 바뀌었다(고전1:24,30;고후5:21;빌3:9). 이러한 구절들에서는 성육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고후5:19).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배양상을 어떠한 은유의 형태로 표현하든지간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대리인이시며, 그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천되는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 빌2:6-8:두번째의 주요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의 지상생활의 시작과 끝을 그의 낮아지시미과 자기를 비우심이라는 각도에서 취급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선재가 전제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셨다고 다소 허술하게 묘사한다. 하나님과 동등됨은 본래의 그의 부대적인 권리이며, 노력에 의해 획득된 지위가 아니었다. 인간이 되신 것은 하늘의 지위를 버리시고 철저하게 인간으로서 종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7절). 그러나 그는 이러한 희생을 위해 주닙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을 때까지 복종하셨다(8절). 바울은 여기에서 아들의 개념을 이용하지 않는다. 성육신이란 신성을 일시적으로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 결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했다(9-11절).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이 불가피했다. 빌2장과 롬8장에서 ‘사람의 모양’이란 말을 쓴 것은(7절) 예수가 실제로 충분히 인간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현설을 주장하지는 않았다(참조:요일4:2;요이1:7). 여기서 사용된 ‘비움’의 은유는 고후8:9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자발적인 자기비하의 사상과 좋은 병행귀절을 이루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는 모두 성육신의 역설적인 면에 강조를 둔다. 이것은 유대인의 메시야 기대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헬레니즘적인 영향을 인정한다. 즉 구속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땅에 갇혀 있는 인간과 만나서 그들 속에 잠재해 있는 신성을 일깨워주고, 그들을 그와 더불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준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개념이 요한의 인자의 개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빌2:5-11이 바울 이전의 표현이라는 주장은 우리들의 해석에 별로 상관이 없다(유사한 견해가 골1:15-20에 대해서도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음). 그 말에는 확실히 ‘형체’․‘비우심’과 같은 단어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너무 엄격하게 규정하려는 것을 경고하는 시적이고 예배의식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하여 논하는 가운데, 그는 죄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가정했을 것이다(참조: 고후5:21). 후기 신학의 표현 속에서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육을 입으신 것뿐이지 인간성에 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명백히 주장했다(참조:히4:15).
두 곳의 중요한 구절에서는(롬5:12-21;고전15:45-47)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묘사하며, 첫째 아담(즉 인류 전체)이 얻는 데 실패한 이상을 실현한 자로 언급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생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성취하신 바는 교회에서 신앙으로 그를 좇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후대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현재의 우리를 그와 동일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 골1:15-20: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해서 정확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선재와 신적인 지위에 대한 바울의 가장 완숙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대인들의 지혜개념이 이곳에 나타난 바울의 그리스도론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골1:15;고후4:4). 이 용어는 창조설화에 나타난 인간에 대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창1:26), 로고스 개념에서(Philon)와 지혜서 7:26에서도 쓰였다. 이러한 신적인 의도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었으나, 인간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되었다. 이 구절이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의 선재와 창조의 대리자로서 그의 활동에 대한 언급을 계속하고 있기는 해도,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대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1:15-16). 우주는 그의 대리행위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이 사상은 확실히 잠8장과 지혜서7장에 나오는 지혜의 개념과 일치함), 바울이 별도로 다른 곳에서 취급하는 사상인 ‘그리스도는 주가 되셔서 마지막 종말을 주재하신다’는 그의 목적(그를 통해,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는)을 이루기 위하여 우주도 창조되었다(참조:엡1:10,4:13-15). 그리스도는 우주의 결함과 안정의 근본원리가 되신다(골1:17). 일반적으로 우주만물과 인류의 머리되심은 구속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되심과 평행을 이룬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써 확고해졌으며, 즉 인간으로서의 그의 사역의 최종결론에서 얻어진 것이다(18절).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주만물의 화해라는 것으로서 묘사되었다(20절). 즉 그는 방해물들을 제거하시고 조화를 이룩하셨는데, 이것은 단지 인간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에서까지도 이룩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지지와 신뢰를 가지고 계셨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19절). 이것을 성육신이나 그리스도의 성육 이전의 지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마도 20절부터는 확실히 수난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참조:2:9의 ‘육체로’).
세상과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이제까지 엄격히 감추어져 오던 하나님의 목적의 신비가 드러난 것이었다(골1:26-27,2:2-3;고전2:7).
④ 목회서신
목회서신들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언급은 다소 고립적이다. 저자는 신학적인 주장보다는 인상적인 구절을 더 많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 여기에서 사상은 재빨리 성육신의 사상으로부터 속죄의 사상으로 전환되며, 그것의 주된 목적도 딛2:11,3:4-5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바뀌고 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다’(3:16). 이것은 초보적인 신조로부터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딤후1:10에서 성육신을 표현하기 위해 어원이 같은 명사와 더불어 사용된 ‘나타나다’라는 동사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같은 어원의 명사는 마지막 오심을 의미한다(딤전6:14;딤후4:1,8;딛2:13). 그리고 다시 성육신이 죽음을 멸하시고 참된 생명의 빛을 보이시며, 썩지 않는 것을 심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조로 나타난다.
두 곳의 기억할 만한 구절들(딛2:11,3:4)에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과 선, 혹은 자비하심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⑤ 히브리서
이 서신에서는 성육신이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닌 인간의 최고 욕구의 근거인 죄를 다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조로서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는 자기희생의 피가 요구되었으며(9:22),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실제로 제공하신 희생적 죽음이 그의 인간적인 탄생을 전제한 것이라고 저자는 논술하고 있다.
초기에 계시를 전하던 예언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다(1:6, 참조:골1:15-18). 이 점이 함축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위엄성과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대해서는 좀 간결하긴 해도1:2-4에서 명확하게 진술되고 있다. 여기서는 적절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 표현은 지혜서의 표현에서 영향을 받앗으며, 요1:1-5;고후4:4;골1:15에서도 병행귀절들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선재하셨으며, 창조의 대리자요 세상의 보존자이시며, 인간의 구속자이시다(‘죄의 정화’[1:3,5:9]․‘영원한 속죄물’[참조:9:12]).
그의 실제적인 출생에 관해서는 마1-2;눅1-2, 혹은 요1:14에서 언급하는 방식처럼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우월성은 그 정도에 있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언자들이나 천사들보다 뛰어났으며(히1:5-2:8), 모세(3:1-6)․여호수아(4:1-8)․유대대제사장들(5-10장)보다 위대하신 분이셨다. 그의 지상생활은 인간과 일치하셨다(2:9-18).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2:14). 즉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이러한 자기비하는 죽음과 악마의 승리(2:14), 즉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여진(5:4-5,10:5-9) 고난(5:8)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가 실제로 받으신 유혹뿐 아니라(2:18,4:15), 또한 그의 무죄성에도 강조를 둔다(4:15,7:26, 참조:2:10,5:9). 그의 무죄성은 일반적으로 신약에서 주장된 바를 함축하고 있다(참조:요7:18,8:46;고후5:21;벧전2:22).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에 대해 명시하면서도,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과에로 집중하고 있다. 이 점은(다소 플라톤적인 용어로 히8:1-7에 논술되어 있음) 과거․현재․미래에 있어서 영원히 완전한 것이었다(8:13,7:25,13:8). 이러한 사상에 따르자면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죄와 죽음과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악을 극복한 그의 효과 있는 사역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성취는 단 한번, 그리고 영원히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7:28,9:26). 그것은 최종적이고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시간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과 신성을 포함하고 있는 요한적인 의미에서 질적으로 영원하다(7:15-28). 그의 성육신의 목적은 단순히 삶과 가르침과 모범을 남겨 주기 위함이 아니라 속죄를 성취하는 데에 있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것을 막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4.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거룩성이 구약사상 안에서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육신은 그 내재적인 개념으로 인해 그렇게 쉽게 조화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교리를 부분적으로 예측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과 친밀하시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신다(예:창41:32).
둘째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성(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1:26).
셋째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위하여 특별한 일을 수행해 갈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자들과 대제사장들과 메시야였으며, 또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왕에게도 그러한 영을 부어주셨다. 주의 종(Servant of Lord), →중보, 중보자(Mediation, Mediator)
넷째 사7:14에서는 성육신에 대해서 신약적인 감각으로는 말하고 있지 않으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히 나타나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 이외의 존재에 의한 임신’을 한 어머니에 대한 개념(필론[Philon]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에 관해 이렇게 말했음)은 후기의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자기표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천사․음성․지혜로 나타난다. →중보, 중보자(Mediation, Mediator)
여섯째 히브리인들에 있어서의 선재는 철학적 문제에서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존재의 기능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것임을 의미할 뿐이었다. 메시야뿐만 아니라 율법과 성전까지도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있었다고 어떤 랍비들은 주장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나 플라톤적인 개념에서의 선재가 아니며, 또한 요1장과 골1장에서 암시되어 있는 것과도 다르다.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도 메시야가 그의 실제적인 출현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러한 진술을 담고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구절들조차도(시72:5,110:3;에녹일서48:3,6;모세의 승천기1:14) 다르게 이해되어졌다.
예수 안에 되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한에 있어서 드러난 메시야를 로고스와 동일시하는 것과, 로고스가 성육신의 확증과 동일시되는 요한적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전에 이해되었던 선재성과 메시야직에 대한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성육신은 예수 이전에는 어떠한 전례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준 충격은 새 술이 낡은 푸대를 찢어 버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출처: 꿈돌이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어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