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평신도
1장 문제와 도전 20세기 중반부터 시작하여 그 후 20-30년 동안은 한국 교회가 국제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폭발적인 성장 제일 큰 교회들 가장 열성적인 신자에 대한 찬사가 날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를 걱정하거나 비판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양적 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리들은 우려를 자초하고 말았다. 즉 허수 허세 허상 이라는 삼허 현상이라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허수는 한국 교회가 통탄할 정도로 외형 통계에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허세는 사회 각 분야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비해 그 영향력이 미미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허상은 대부분의 평신도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생명은 신앙이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곧 바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사회에 비쳐지고 있는 이미지는 그렇지 못하니 문제이다.
2장 귀중한 각성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에 새로운 빛을 던진 각성이 있었다면 그 것은 평신도 운동이다. 왜 갑자기 평신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크래머가 지적한 것으로 하나는 급속도로 팽창해가는 현대 사회 구조 안에서 평신도가 지닌 증인으로서의 큰 잠재력을 구체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강한 노력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3장 평신도는 누구인가? 평신도라고 하면 그 본래의 의미가 주님을 모신 선택 받은 자 혹은 성도 혹은 제자 혹은 믿는 자의 공동체인 전 교회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신도라는 말에는 교역자와 그 나머지 신자들을 갈라 놓는 의미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존 스토브가 지적한 것처럼 성경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다.
그럼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인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전도 국제대회에 참석한 메디슨이라는 평신도가 만장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평신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것은 정말 중요한 일에 우리를 참여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교역자들이 우리에게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며, 기도를 어떻게 하며, 사랑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도하는 방법,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즉 평신도는 이런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4장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 교역자 직분은 주님이 주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엄격히 구분한 것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설교하는데도 그렇고 안수에서도 그렇다. 반드시 교역자만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것은 질서의 문제지 교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교역자가 안수를 받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권위는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 교회에 종속된 권위이다. 교역자가 교회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역자는 그가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평신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Part 2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
5장 목회철학을 정립하라.
1. 목회 철학이란 무엇인가? 교회를 움직이는 추진력 이것이 목회 철학이다. 교회가 어디로 움직여야 하고 왜 움직여야 하는지를 잘 정립하는 것이 목회 철학이다. 2. 오랫동안 주목 받지 못한 주제 교회론이 그 동안 주목을 못 받아 온 것은 사실이다. 기독론이나 삼위일체론 같은 주제는 4-5세기 경 이단들의 등장으로 큰 위협을 받았기에 각별한 대상이 되었고 구원론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16세기 신학의 총아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른은 크게 중요시 되지 못했다. 3. 확실한 철학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제자훈련은 자신이 발견한 목회 철학이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받은 계시처럼 너무나 분명하고 확고해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내면의 강렬한 불길을 가진 자라야 할 수 있다. 평신도를 깨우고 싶은가? 당신은 미쳐야 한다. 예수님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다.
6장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의 정의 교회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흔히 사용되는 용어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lesia)이다. 이 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회중을 말한다. 더 나아가면 실제로 회중이 모이는 과정과 한 자리에 모여있는 공동체를 다 포함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2. 소명이 빠져 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지상 교회의 존재 이유는 독특한 소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명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천당을 가기 위해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교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신앙 생활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지상의 교회에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특권과 함께 소명을 가졌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3. 신약 성경의 교회는 지역 교회다. 지역 교회가 하나님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이며 그 실체의 확실한 표현이요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한다. 우리가 섬기는 작은 지역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지상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7장 도전받는 전통적인 교회론
1. 몇 가지 비판들 전통적인 교회가 선교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어 지상교회의 소명을 약화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경적인 교회론은 선교를 전제로 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종교 개혁자의 교회론은 사회의 주어진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준엄한 명령 즉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본부가 지상 과제이었던 반면 후대 목회자들은 자기가 맡은 교회를 잘 목양만 하면 목사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2. 교회의 순결이 그들의 관심사. 칼빈이나 루터 당시 교회의 순결이 큰 과제이었다. 그 결과 참 교회의 3대 표지가 교회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 것은 말씀 선포, 성례전의 집례, 권징의 집행에서 순결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점도 세상과 거리를 멀리 두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결과 수 백년을 내려오면서 모르는 사이 점점 자기 중심적인 편협함에 빠지고 예배와 경건만 중시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불 수있다. 그러나 우리가 칼빈이나 루터에게 물려 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중 하나는 개혁 정신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시대를 개혁하기 위해 성경을 가지고 모든 시험을 하고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그들의 문제에 답하는데 전심을 다하였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성경 말씀이 허용하는 한계 조건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시대의 요구에 대처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이 자유를 우리가 포기하고 눈을 감아 버린다면 현대 교회는 고립과 죽음을 자초하게 될지 모른다.
8장 교회의 사도적 본질
1. 사도성에 대한 오해 교회의 본질은 성성(聖性), 통일성, 보편성이라는 세 가지가 고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사도성을 넣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목사의 견해라고 의미를 반감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를 깨워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함을 공부했다. 교회의 사도성은 주후 325년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에서 교회의 속성 가운데 하나로 확정되었다. 그 후 장구한 세월을 거처 노골화된 교회의 타락과 함께 사도성은 로마교회가 그들의 거짓된 교리를 정통으로 위장하고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법적 계승자로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기 시작하였다. 2. 무엇이 사도성인가? 사도성은 예수님께서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몸된 교회를 세우셨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였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 위에 세워졌다. 한스 큉은 사도성을 교회의 본질 즉 통일성 보편성 성성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된다고 말했다. 3. 사도적 계승 부활 후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그에게서 직접 사도로 임명을 받았다는 특권 때문에 예수님이 승천하자 마자 바울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12 사도들과 똑 같은 영광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이런 사도 직을 지금은 어느 개인이 대표할 수가 없다. 사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도의 교훈과 사역이 남아 있은 뿐이다. 그러면 지금은 누가 이 사도들의 계승자가 될 수 있는가? 그 것은 교회라는 것이다. 수수의 개인이 아닌 전 교회가 그 계승자이다. 4. 사도의 교훈과 사역을 계승한다. 교회가 사도의 계승자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첫째는 사도들의 교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교회가 신약 성경을 통해 전수되어 내려온 사도들의 살아 있는 증거를 그대로 받아 들이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이는 사도들의 신앙과 고백을 받아 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전 교회가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 것은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그대로 이어받아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사도들의 예를 따름으로 참 복종과 봉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사도들이 순종하던 형태의 모든 봉사를 다 포함하여 세상을 향한 사도적 사명을 완수하는데 있다. 5. 하나님의 뜻 사도들의 사역을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과제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복수형은 거의 없고 단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자기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6. 성령과 사도성의 관계 성령은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은 자들을 불러 사도들의 증거를 받아 그대로 믿고 고백하게 하신다 그리고 구원 받아야 할 다른 양들을 위해 먼저 부른 그들을 소망에 응하게 하시고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신다. 이 세상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옷입고 생활하게 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들이 바로 교회의 평신도들이다. 성령이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선교사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말세 교회를 사도적 본질로 무장시켜 교회 본질을 다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9장 교회의 존재 이유
1.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교회의 첫째 의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기들을 성별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며 그들이 가장 먼저 초대받은 영광의 자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존전이다.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인격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 근거를 둔 예배라야 한다. 2.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의 둘째 의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 평신도가 부름 받은 가장 큰 봉사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 즉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왕 같은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영광스러운 특권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특권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을 찣어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가 직접 나갈 수 있다. 둘째는 영적 제사를 드리는 특권이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 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삶 전체를 다 포함하여 드리는 것이다. 셋째는 말씀을 증거하는 특권이다. 우리의 생활을 증거하여야 하는데 형통의 증거뿐 아니라 말씀을 입으로 전하는 구체적인 증거까지 전해야 한다. 넷째는 중보 하는 특권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 과 세상에 있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까지 발전해야 한다. 3. 양육하는 어머니 교회의 마지막 의무는 성도를 양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점이 칼빈의 교회론의 중심 사상이었다. 인간 속성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보았다.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그 신앙 목표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로서 배려를 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의 연약함 때문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4. 불가분의 관계 지금까지 교회의 존재 이유를 3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세가지가 따로 놀 수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닌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전도와 훈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다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Part 3. 제자도
10장 평신도 훈련의 전략적 가치
제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이는 예수님이다. 제자의 개념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할 수있어야 한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네비게이터 선교회의 개척자 도슨 트로트맨이 예수님의 대사명(마 28:18-20)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후에 제자화 운동이 강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제자도는 믿는자의 삶이묘 걸어가야 할 과정이요 끝까지 지향해야 할 목표요 동시에 교회의 사역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제자도는 사도성이라는 교회 본질에 일치하는 평신도의 자아상을 재건하는 성경적인 기본 전략이다. 예수님의 원리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먼저요, 일을 맡기는 것은 그 다음의 과제라고 보고 있다. 제자도의 기본 원리는 여기에 있다.
11장 예수님과 그의 제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는 그의 선교활동을 계속할 그의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미며 서로 다른 배경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꿰뚤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다.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제자들은 불신과 배신의 오점을 남겨 놓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해 건설될 위대한 왕국의 청사진을 그가 부활하신 후에 다시 한 번 그 실패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을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선언하시고 그리고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자기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대사명을 당부하셨다.(마 28:18-20)
12장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라는 개념
“제자 삼으라”(마 28:19) 고 하신 말씀은 제자라는 이름을 열두 사도뿐 아니라 앞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여 적용할 것을 내다 보고 있었다. 제자의 용어를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누가였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저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볼수 있다. 즉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모두 제자라고 이름 하였다.
그러면 서신서에서 갑자기 제자라는 말이 중단된 이유는 무엇일까? 서신서 저자들이 이 단어의 사용을 피한 것은 헬라문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기독교가 단지 철학적인 운동으로서 오해 받는 것을 원치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도 바을은 온전한자 혹은 완전한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바울이 사용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장성한 분량이라는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13장 믿는자는 다 제자인가?
예수님은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우리 가운데서 앞으로 나온 사람이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도행전으로 넘어가 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 사마리아인을 망라하여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제자라고 했으며 교회에서는 평범한 교인이라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사람이 다 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사명과도 일치한다. 여기서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가서 전도를 해야하고 세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말씀으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한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를 좇는 데 있어서 몇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믿기는 믿는데 건헐적으로 예수와 동행한 초기의 단계가 있었고(요 2:12, 3:22) 예수님과 깊은 교제을 나누기 위해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추종자로서 동거한 두번째 단계가 있었다. (마 4:18-22)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도로 지명되어 특별한 훈련을 받는 단계까지 갔다.
14장 인격적 위탁자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의 삶의 모범 중에 보여주신 몇가지 요소가 있다. 이 것이 인격적 위탁자, 증인 종 이라는 세가지 요소이다. 제자도라는 것이 이 기본 요소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삼 요소는 개별적으로 떼어놓고 이해할 수가 없다. 상호 연관된 복합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인격적인 위탁이 없이는 제자도가 존재할 수가 없고 증인의 요소가 없이는 그 궁극적인 비전을 상실하게 되며 종의 요소가 따르지 않으면 제자도의 맛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인격적 위탁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소명에서 시작된다.(마 4:19, 막 1:17,20) 그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려야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마 10: 38)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면 후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15장 복음의 증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한 궁극적인 일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누가는 이 용어를 두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그 것을 전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사도들의 증거를 듣고 믿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고백하거나 전하는 경우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경우는 예수님의 승천 직전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무든일에 증인이라”고 한 경우(이 때는 12제자와 다른 제자가 동석하고 있었음)와 나중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이 다 증인이 되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나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성령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증거는 전부 다 입으로 전하는 말의 전도였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의 증거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 선한 행동을 하여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들과 속사도들이 다 사라진 후에도 초대교회는 수백년 동안 핍박을 받아 가면서 입으로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이 떠난지 300년이 안되어 당시 문명 세계를 대표하던 로마제국이 형식적으로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 모두가 말로 전해진 복음의 증거이다.
16장 섬기는 종 종이라는 말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자가 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인으로 모신 제자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 석상에서 교만으로 목이 굳어 있던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었다. 그가 십자가에서 속죄양으로 자기 생명을 버린 것은 종으로서의 참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증하신 것이었다.
제자도에서 종직은 자원하는 것이다. 제자는 억지로 끌려온 노예가 아니다. 그는 기쁨으로 예수의 종이 되는 것이다. 구약을 보면 주인을 사랑하여 자원하여 평생 그를 섬기는 종들이 있었다. 그들은 송곳으로 자진하여 종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귀에 구멍을 뚫고 다녔다.
우리는 지금까지 제자의 세 가지 요소를 검토해 보았다. 누구든지 위탁자, 증인, 종으로서의 요소들을 그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온전하게 갖출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제자훈련의 절정은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반사되는 것이다. 즉 작은 예수로서 변화와 성숙을 세상이 보는데 있다.
17장 교회의 체질이 바뀐다. 평신도들을 제자화 하면 교회는 다음과 같이 교회 체질이 개선되고 변화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교회의 이미지를 갱신할 수 있다. 2) 평신도의 자아상을 바로 정립 할 수 있다. 3) 보호 목회에서 훈련 목회로 전환할 수 있다. 4) 전 교회가 상호 사역하는 유기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5) 교역자 중심 체제에서 평신도 중심 체제로 바꿀 수 있다. 6) 사역을 분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 7) 지속적인 교회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을 근거하면 첫째 강한 교회는 엄격하다. 엄할수록 강하다. 둘째 엄격함을 상실한 교회는 자신의 힘을 상실한다. 셋째 엄격함은 관대함으로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 것을 경계해야 한다.
Part 4. 제자훈련의 원리와 실제
18장 제자훈련의 목적 우리나라 교회에서 제자훈련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제자훈련은 성경공부라는 오해다. 한국에서 제자훈련이 교회 성자에 커다란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제자훈련이 한국교회를 여기서 정체시키고 있다는 말도 있다. 둘째로 제자훈련을 전도와 가르침에 유능한 평신도 기능인을 만들어 내는 코스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제자훈련은 수준 있는 중산층 이상의 평신도에게만 가능하다는 오해다.
이러한 오해를 씻기 위하여 제자훈련에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구체적인 훈련 방법을 설정해 두어야 하며 셋째는 훈련에 합당한 선택된 대상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훈련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실제적인 결과를 강하게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각자의 왕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따르며 배우며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19장 제자훈련은 누가 시킬 것인가? 제자훈련은 담임 목사가 시켜야 한다. 남에게 맡기면 안 된다. 마치 자식은 자기가 낳아야지 남의 배를 빌리면 자기 자식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은가와 같은 논리이다. 먼저 권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 자신이 제자로 만들어 지는 실제적인 훈련을 받아 보라는 것이다. 제자는 제자가 만드는 법이다. 자신이 먼저 제자가 되고자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남을 제자로 만들 수 없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칼 바르트는 “베드로야 너는 가서 너를 닮은 사람을 만들어라”라고 말을 했다.
목회자에게 가르치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가는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리에게는 설교를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가르치셨고 개인에게는 상담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칼빈은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목적이 바로 교육에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잠간이면 그 백성을 완성에 이르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만 교회의 교육 아래서만 그들을 길러내어 조금씩 성인이 되게 하기를 원하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다.”
20장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제자훈련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가진 목회자는 자기의 사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 사역이 성공함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선명한 비젼을 가지고 있다. 제자훈련의 비젼을 기도의 일 순위로 정하고 공적 모임에서 빼지 말고 기도하라. 그 기도가 목사의 눈물로 흠뻑 적게 하라. 그리고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이 기도를 부탁하라. 누구든지 쉬지 않고 구하는 기도 제목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며 그의 소원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될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제자훈련에 누구가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심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교회의 장로들과 권사들을 택하여야 한다. 그들의 나이와 학력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될 수가 없다. 먼저 목회자의 철학을 공유하고 꿈을 함께 나누어야 참 제자로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그룹의 규모가 5-12명 내외이면 좋다.
예수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집중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켜야 성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가 약 2년 반 정도 지나 갈 때 그의 주위의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따로 세우셨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하고 그의 교훈을 마음 판에 세길 작은 예수를 만들기 위해 이 열두 명을 스승 곁에 머물게 하면서 배우고 감동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21장 무엇으로 가르칠 것인가? 제자훈련을 무엇으로 시켜야 하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사용한 기본적인 훈련 내용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모범과 제자들의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신 훈련 내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교과서이었다. 4복음서에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최소한 66회의 구약을 인용하셨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에서도 90여 회나 구약을 암시적으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예수님이 사용한 두 번째 훈련 내용은 모범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이론으로만 던져 주는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가르치는 대로 사셨다. 그 자신이 완전한 모범이며 실물 교육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범을 가지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동거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상 생활을 하면서 제자들 자신이 예수님의 생생한 인격을 보고 확증할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님의 빼놓을 수 없는 훈련은 제자들에게 사역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다는 사실이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요 4:35) 그의 손가락은 항상 이 세상의 일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에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면서 유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생수를 갈망하는 수가성 여인이 있었고 다락에서 죽어가는 야리로의 딸이 있었다.
22장 훈련 교재는 이런 것이 좋다. 첫째는 복음이 살아 있어야 한다. 누구나 십자가 앞에 나와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영감을 주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교재의 전체 내용이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경건과 순종 헌신을 가르치면서 성숙한 신앙 인격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말씀의 적용이 강조된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래야 제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넷째는 교리적인 뼈대를 어느 정도 유지하여야 한다. 요사이 선교 기관에서는 예민한 교리를 다루지 안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시정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째는 지도자의 목회 철학이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는 귀납적인 접근 방법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전문 교육을 받은 교역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스스로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그 것을 다른 형제들과 나눌 수 있다면 평신도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평신도 신학이다.
23장 소그룹 환경 소그룹이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인격적인 상호 작용이 일어 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말한다. 예수님은 소그룹을 애용하신 선구자이다. 제자들과 보낸 3년 동안의 경험과 결과를 가지고 소그룹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잘 보여주시고 있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전례를 따라 많은 소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정에서 모이는 소수의 모임에서 성도의 교제와 새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린도 교회도 20-30개의 가정교회로 구성된 공동체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소그룹 운동은 일종의 유행병처럼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것은 교회 안에서 보다 일반 사회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에서 연구 활동을 하는데 소그룹 단위의 형식을 이용하는 일이 점점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소그룹 환경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자기 개방이 다른 형태의 모임에서보다 쉽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가 인격 상호간의 학습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를 더 정확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가 모방이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지도자의 모범이 제자훈련 중 중요한 요소라고 했듯이 지도자를 담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넷째가 그룹 애착심이라는 요소가 있다. 서로 애정을 담아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로 받아 들이는 일종의 충성심을 말한다. 다섯째가 소위 카타르시스라는 치료 요소를 갖고 소그룹 개인들의 문제를 치료할 수가 있다. 즉 소그룹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느끼는 바를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다.
24장 귀납적 방법을 바로 이해하라. 귀납적 방법에는 연역적 방법에 비해 여러 가지 유용한 몇 가지가 있다. 이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참가자 전원이 교사요 학생이 된다는 것이다. 들째는 증명의 논리를 따르는 연역적 방법과는 달리 귀납적 방법은 발견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셋째는 의사소통이 일방적이 아니라 복합적인 양상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지식 전달보다 인격의 변화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신 새생명이 자라고 성숙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말씀의 적용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놓고 다음과 같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관찰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해석하는 과정이다. 셋째는 반응하는 과정이다. 넷째는 적용하는 과정이다.
25장 제자훈련에 필요한 리더쉽 예수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주는 리더의 완전한 모델이 되셨다. 첫 번째 리더십의 특징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열린 귀를 상징으로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설교하기 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두 번째 리더십은 보고 그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다. 이의 상징은 열린 눈이다. 세 번째 특징은 진리를 스토리 속에 담아서 전달하는 능력이며 그 상징은 열린 입이다. 네 번째 특징은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 상징은 열린 손이다.
우리에게 열린 귀, 열린 눈, 열린 입, 열린 손이 있는지 물어 보아야 한다. 제자훈련은 먼저 듣고 먼저 보고 먼저 말하고 먼저 줄 수 있는 지도자로 준비되어 있을 때 비로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도자는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부모와 같은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26장 첫 시간은 이렇게 진행해 보자. 훈련 전 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는 훈련 대상자를 사전에 심방하는 일이다. 심방은 훈련 개강 전 2주일 이면 좋다. 개별적 면담을 하기 전 반드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개별 심방을 하면서 할 일은 제자훈련에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지침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잘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야 한다.
처음 모인다는 자체만으로 흥분이 되고 긴장이 되기도 한다. 그 자체가 은혜가 넘치게 된다. 교역자는 좋은 인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역자를 보좌할 총무와 회계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Part 5. 목회현장에서 본 가능성
27장 현장의 필요성 이 장은 사랑의 교회를 중심으로 제자훈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성과는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좋은 현장이 되기 위하여는 몇 가지 구비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먼저 목회자가 제자훈련 목회를 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적어도 7년 이상 제자훈련을 하여 그 것이 목회의 중추신경으로 자리를 잡은 현장이라야 한다. 셋째는 그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28장 한국 교회의 뿌리, 그 초창기의 정신 한국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정착한 것은 네비우스 방법에 힘입은 바가 크다. 1890년 한국에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존 네비우스 목사를 초빙하여 두 주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한국 선교의 지침을 배웠다. 첫째는 그 것이 교육 중심의 목회를 가능케 해 주었다. 그 때 사경회라는 것이 성행하였고 첫 성경 공부반은 1890년 서울에서 언더우드 박사가 자기 서재에서 7명의 학생들을 모아 시작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둘째는 가정 중심의 목회를 가능케 해 주었다. 교회의 초창기에는 형편 상 가정을 선교와 목회 사역의 근거지로 이용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셋째는 개인 전도 중심의 목회를 가능케 해 주었다. 당시에는 교회의 평신도가 전부 다 전도자들이었다.
29장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뿌리 내리기. 사랑의 교회가 처음 문을 열었던 78년 7월에 가진 것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제자훈련에 생명을 걸겠다는 담임목사의 철저한 각오였다. 10명이 안되는 교인들이 지도자의 뜻에 따라 모였다. 이들이 어려운 고난을 겪으면서 일구어 낸 결과 지금은 40명이 넘는 부교역자들이 실제적인 제자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사랑의 교회 현장에는 담임목사가 지난 20년 간 시종일관 지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다. 2. 힘을 분산 시키지 않는다. 3. 자기 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계속한다. 4. 훈련 받지 않으면 사역을 시키지 않는다. 5. 리듬과 균형을 유지한다.
30장 제자훈련에서 순장 교육까지. 사랑의 교회가 제자훈련을 일반 목회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경우 목사에게 필요한 것은 열린 자세였다. 실험 단계를 거치는 동안 신축성 있고 유연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자훈련이라는 기본 틀을 고수하면서 수정할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바꾸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최선의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랑의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가자 제자훈련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재를 만들면서 훈련 프로그램에 사역훈련(처음에는 고급 제자훈련이라고 칭함)이 추가되었다. 다음은 전도 폭발 훈련을 추가 시키고 또한 순장 교육을 통해 졸업이 없는 평생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31장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교회 역사가 수년이 넘어 가면 교회를 가이드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정신이 있기 마련이다. 제자훈련은 평신도에게 세상으로 보냄 받은 자로서의 강한 소명감을 심어 준다. 자기가 교회의 주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게 한다. 따라서 교회가 주는 직분은 명예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섬기는 사역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 생활과 사회 생활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거룩한 산 제사임을 늘 염두에 두고 생활하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사역의 장은 다락방이다. 다락방은 순장이 인도하는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전도와 양육과 사랑의 교제를 힘쓰는 소그룹 단위의 모임이다. 여기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며 참석자는 순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락방의 생명은 계속적인 성장과 번식에 있다. 다락방의 번식은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32장 남아 있는 문제들 평신도가 영적으로 깨어나면 지도자한테 바라는 기대치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믿음이 자라고 의욕적으로 헌신하기를 원하는 자 일수록 그들의 영적 체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자양분이 적정하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 것은 고스란히 지도자의 몫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교역자의 역할은 점점 더 확대되어 질 수 밖에 없다.
훈련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강성 이미지를 풍기게 된다. 이런 교회에 몸을 담으면 지도자가 좀 심하게 다루고 많은 것을 요구해도 잘 순종하게 된다. 무엇보다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강한 신앙인으로 양육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점들이 분명히 강성 이미지가 주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33장 21세기, 활짝 열려 있는 문 제자훈련은 미래 교회의 열쇠다. 많은 교회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21세기의 교회 생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열쇠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의 선교 무대를 옮기기 전에 잠간 드로아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그의 앞에는 복음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동역자 디도를 만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상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디도 없이 선교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역시 앞으로 평신도 사역자 없이 능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한 목회 철학을 정립할 때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에 입각하여 평신도를 온전한 자로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주여, 이 나라에 예수의 제자가 벌떼처럼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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