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부의 방/장년부 설교

[스크랩] 어떻게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 요3장28절~30절

에반젤(복음) 2020. 12. 31. 20:13

여러분 지금 기쁘신가? “기쁜 일이 있어야지요?”라고 대답하실 분이 많을 것이다.

어떤 갈비탕 집에 갔더니 직원들 가슴에 스마일 뺏지를 다 달았더라. 갈비탕 한 그릇을 팔아도 얼굴에 기쁨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한 성도가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했다. 부득불 교회를 옮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 이사 온 동네라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를 알 길이 없어서 이 교회를 갈까 저 교회를 갈까 망설이다가 그만 주일을 맞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 성도는 ‘어떤 교회든지 발길이 이끌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가다가 거리에서 경찰관을 만나 근처에 갈만한 좋은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경찰관은 선뜻 조금 멀리 떨어진 듯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다. 그 성도는 경찰관이 가르쳐 준 교회를 향해 갔다. 그러다가 그 성도는 문득 왜 그 경찰관이 가까운 교회도 있는데 굳이 그 교회를 가르쳐 주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경찰관에게 왜 그 교회를 소개해 주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경찰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 저는 교회를 안 다녀 봐서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잘 모릅니다. 저는 단지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 차 보여서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교회를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사실 저도 언젠가 그 교회에 꼭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교회의 성도의 얼굴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우리의 얼굴은 움직이는 전도지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의 얼굴이 굳어 있는가? 하기야 기쁨은 내면적인 것이기에 억지로 얼굴이 웃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려면 우리의 마음 속이 기뻐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속이 기쁜 삶을 살 수 있는가?




1단계 기쁨: (질투)가 없어야 한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의 말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크게 기뻐한다. 그러나 환경적으로 보면 질투가 날만한 상황에 있었다. 나이도 자기가 많다. 또 예수님보다 사역을 먼저 시작했다. 예수님에게 세례까지 주었다. 그런데 뒤에 사역을 시작한 요한에게 안 좋은 소식이 들린다.




26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질투가 날만한 일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질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가 잘되고 자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로 가자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질투가 많은 사람은 기뻐할 수가 없다. 늘 마음에 질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의 잘 됨을 진정으로 기뻐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거지는 거지를 시기하고 시인은 시인을 시기한다란 옛말이 있다.

가제는 게편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게는 가제편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게가 게편은 안된다. 게를 담은 바구니에는 특별히 뚜껑이 필요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컨데 어떤 게 한 마리가 바구니 둘레를 기어 오르면 다른 게가 쫓아와서 반드시 끌어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게들은 결국 바구니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투기는 결국 자신은 물론이요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이다.




질투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못본다.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썩게 만든다. 자신을 파괴시킨다. 질투는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고 의인을 죽인다. 질투는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린다.




예)질투의 위력

오스카 와일드는 투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어느 날 마귀의 부하들이 리비안 사막을 지니다가 성자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 한 사람을 보았다.

마귀의 부하들은 이 성자 후보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성의 쾌락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는 일에 실패했다.

그 사정을 마귀에게 보고하자 마귀는 그 부하들에게 "잠자코 나를 따르라"고 하더니 길가던 그 순례자에게 접근하여 그 귀에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갑자기 순례자는 얼굴을 일글어뜨리며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이었다.

마귀의 부하들은 신기하여 마귀에게 도대체 어떻게 하여 돌이키게 했느냐고 묻자 마귀는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간단하지 너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대 주교가 되었다고 했지" 마귀는 계속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들은 투기하게 만들어 놓으면 손쉽게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있게 되지" 그래서 야고보서 3:14절에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뿌리가 깊기 때문에 기도로 뽑아내야 한다. 말씀으로 수술해야 한다. 성령으로 태워야 한다. 비젼 있는 인생은 늘 기쁜 인생이다. 지나친 경쟁심, 질투를 잘 다스리기를 바란다.




2단계 기쁨: (주) 안에 있어야 한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복음 찬송으로도 많이 불리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해 우리항상 기뻐해.. 기뻐하라 항상기뻐합시다. 기뻐하라 항상기뻐합시다.




찬송가에도 찾아보니 전체 찬송가 중에 기쁨이란 단어가 들어간 찬송이 무려 148곡이나 된다.

특히나 우리가 구원받은 구원의 기쁨을 많이 노래하고 있다.




208장

1.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예수 내맘에 오심

2.주예수 내맘에 들어와 계신후 망령된 행실은 끊고

머리털보다도 더많던 내죄가 눈보다 더희어졌네




(후렴)주 예수 내맘에 오심 주 예수 내맘에 오심

물밀 듯 내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예수 내맘에 오심




이런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넘치기를 바란다.


예)은혜받은 자의 기쁨

옛날 영국 황제 루이스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국내를 순시하는 도중에 어떤 동리 한 모퉁이에 있는 물방앗간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물방아간에서 기뻐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데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제는 노래 소리에 도취되어 듣다가 물방아간으로 들어가보니 물방아간 노인이 그렇게 기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물방아간 노인에게 다시 노래를 청하니 그 노인은 노래하기를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하고 불렀다. 황제는 말하기를 그러면 둘째절은 이렇게 부르라고 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부러워 하네.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하라 하였다.







무엇이든지 없는 것을 바라보면 기쁨이 사라진다. 있는 것을 볼 때 기쁨은 찾아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주로 없는 것을 바라보았다. 광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늘 없다고 불평했다.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파도 없고, 마늘도 없고, 수박도 없고...




민11:6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저들의 눈은 왜 하나님은 볼 수 없었는가?

만나도 있었지 않았는가? 그래서 저들은 “애굽에 있었을 때가 재미있었다.”(출11:18)고 했다.

저들은 재미를 찾다가 기쁨을 놓쳤다. 재미는 기쁨의 유사품이다. 유사품에 속아 기쁨을 잃는 사람 아무도 없기를 바란다.

이때 하나님은 저들에게 없어서 못주신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을 감사하는 훈련이 되어지기를 원하셨다. 재미보다는 기쁨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저들은 원치 않았다.




반대로 하박국 선지자는 있는 것을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박국 선지자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그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었다. 자기 안에 다른 것은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하나님을 통해 만족할 수 있었다. 기뻐할 수 있었다.




합3:17,18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있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라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감사하지 않는 자는 결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기쁨이 없으리라.




예) 거지의 기쁨이라고 아시는가?

어떤 부자집 노인이 말을 타고 행차하다가 앞길에서 한쪽 다리를 못쓰는 거지와 같이 보이는 사람이 기뻐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다 싶었다. 나는 이렇게 돈이 많아도 춤출 일이 없는데 거지는 도대체 무엇이 기뻐서 저렇게 즐겁게 춤을 추고 있는가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 거지는 대답하기를 "제가 기뻐서 춤을 추는 이유가 세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지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둘째, 나는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불구자이나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불구자가 많고요

세째, 세상에서는 날 부러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나 나는 죽으면 하나님 품안에 있을 것을 생각해서 너무 기뻐 춤을 춥니다" 하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주 안에 있는가? 아니면 주 밖에 있는가? 우리는 주 안에 있다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기뻐하게 된다.


3단계 기쁨: ( 주는 ) 자가 더 복이 있다.

행20:35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 교회의 어떤 성도님이 찾아 왔다. 교회에서 여러 기관에서 봉사를 하시는 분이다. “목사님, 봉사의 기쁨을 알겠네요.” 그렇다. 섬김을 받는 것도 기쁘지만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더 기쁜 일이다.




예)주를 위해 섬기는 기쁨

켐벨(Campbell)이라는 사람의 전기에 보면 타운센트(Townsend)라는 한 기독인의 성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교서적을 보급하는 안건을 위해 회의를 하기로 한 어느날 오전에 캠벨이 회의실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던 중 계단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는 타운센드라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그에게 다리를 부축했다. 타운센드씨는 오랫동안 그 회의에 참석하였던 사람인데 오늘도 회의 참석을 위해 오는 길이었다. 캠벨이 “몸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계속 참석하시겠습니까? 이제 그 일을 젊은이들에게 맡기셔도 되겠습니다.”라고 권했다. 그러자 타운센드씨는 “오! 하지만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그만 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우리는 혹시 반대가 아닌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결코 쉬운 아니라고 생각치는 않는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 무엇인지 아는가? 2개다.

“주께서 우시니라”와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것 같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주께서 우셨기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생명을 드리셨다. 주님이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셨기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우셨기에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슬퍼하셨기에 우리가 주님의 용서하심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베푸는 것 그 자체가 보상이다”는 옛말이 있다. 리처드 칼슨(Richard Carlson)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책을 아실 것이다. 미국에서 1년에 55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이다. 그 책에도 보면 “우리는 뭔가를 주는 동시에 받는다. 정말로, 우리가 받는 것은 주는 것과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이웃에게 주는 사람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기쁨이 생겨난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는 다섯 개의 유료다리가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얼마 전부터 새로운 친절운동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통행료를 내려고 하는데 “앞차에서 내셨습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 차도 역시 뒤차를 위해 내고... 같은 돈을 내는데도 기분 좋은 출근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잡지에 보니 이색적인 기부운동이 있었다. 자신의 가게에서 올리는 수익의 1%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기부한다는 운동이다. “누군가 필요로 하 때 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면 이런 일을 그만 둘 수 없을 거예요”하고 한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에 추수 때가 되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일부러 밭 모퉁이를 남겨 두었고 떨어진 볏단이나 이삭들은 줍지 않고 모두 남겨두었다.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다.

레19:9,10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퉁이운동을 하자. 모퉁이 헌금통을 만들어 매달 1회씩 첫주에 모퉁이헌금을 하도록 하자. 저금통도 제작하고 아니면 봉투를 사용해도 좋다. 모퉁이 헌금봉투도 제작한다.

예를 들어 세차를 집에서 하고 세차비 3천원을 넣기도 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1000원 싸게 사고 그 천원을 넣는 집사님, 교통신호 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렸는데 봐줘서 그 범칙금 4만원을 내신 장로님, 칼국수 대신 사발면으로 먹고 차액 5백원을 낸 고등학생, 이 돈은 어떤 물건을 사고 동전이 남으면 그것으로 하자. 얼마가 모이든지 그 중의 반은 북한 선교를 위해 돕기 기금으로 만들겠다. 나머지 반은 구제와 장학금으로 쓰겠다.


한달 수입 중 하루 몫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자. 집에서 개를 기를 때에도 갈비한 대 뜯다가도 다 뜯지 않고 귀퉁이를 조금 남겨둔다. 개를 먹이기 위해서도 조금 남겨두는데 이웃을 위해 남긴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얼마나 기쁨이 있겠는가?

진정 올 한 해 우리의 발걸음이 기쁨의 길로 늘 걸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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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Gid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