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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 (134호) - 어머니~

에반젤(복음) 2019. 6. 27. 20:48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 (134호) 카네이션에 꽃말은 사랑과 존경이라는군요. 옛날 로마에 '소크니스'라는 관을 만드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그녀의 솜씨가 어찌나 뛰어나든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때문에 '소크니스'는 늘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시기한 동업자들은 끝내 그녀를 암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폴로 신은 그의 신단을 항상 아름답게 꾸며 주던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작고 붉은 꽃으로 변하게 했는데 그 꽃이 바로 '카네이션'이다 카네이션의 유래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의 유래를 잠시 살펴 보면, 지금부터 약 100여년 전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란 소녀가 어머니와 단란하게 살았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느날 사랑하는 어머니 를 여의게 되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 그 산소 주위에 어머니가 평소 좋아 하시던 카네이션 꽃을 심었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 생전에 잘 모시지 못한 것 을 후회하였다. 소녀는 어느 모임에 참석하면서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나갔었다. 보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대답하기를 "어머님이 그리워 어머니 산소에 있는 카네이션과 똑같은 꽃을 달고 나왔다. "라고 말하였다. 안나는 그후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여 1904년에 시애틀에서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 개최되었다. 그리하여 이 날에는 어머님이 살아계신 분은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자기 가슴 에 흰 카네이션을 달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세계적으로 관습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으며, 그 뒤 1972년에 명칭을 어버이날로 바꾸어 국가적인 행사로 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어머니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던 한 어머니가 어느 날 밖에 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났습니다. 밖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집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망설임도 없이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두 아들을 이불에 싸서 나왔습니다. 이불에 싸인 아이들은 무사했지만 어머니는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다리를 다쳐 절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거지가 되어 구걸을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어머니의 이런 희생 덕분에 큰 아들은 동경대학에, 작은 아들은 와세다대학에 각각 수석으로 입학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식 날, 졸업하는 아들이 보고 싶은 어머니는 먼저 큰 아들이 있는 동경대학을 찾아 갔습니다. 수석 졸업을 하게 된 아들은 졸업과 동시에 큰 회사에 들어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의 눈에 수위실에서 아들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수 많은 귀빈들이 오는 자리에 거지 어머니가 오는 것이 부끄러웠던 아들은 수위실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라" 고 전했고 어머니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습니다. 아들에게 버림 받은 서러움에 자살을 결심한 어머니는 죽기 전에 둘째 아들 얼굴을 보고 싶어 둘째 아들이 졸업하는 와세다대학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교문 밖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때 마침 이러한 모습을 발견한 둘째 아들이 절뚝거리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어머니를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 나와 어머니를 업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라고 말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졸업식장의 귀빈석 한 가운데에 앉혔습니다. 값비싼 액세서리로 몸을 치장한 귀부인들이 수군거리자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수석으로 졸업하는 아들이 답사를 하면서 귀빈석에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는 어머니를 가리키며 자신을 불속에서 구해 내고 구걸을 해서 공부를 시킨 어머니의 희생을 설명했고 그제야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눈에 감동의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 소식은 곧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어 둘째 아들은 큰 회사 오너의 사위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큰 아들은 입사가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몸이 상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들을 불속에서 건져내고 구걸을 하면서까지 아들을 공부시킨, 자식을 위해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이가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어찌 그리 강하신지요? - 치매라는 지우개 어느 날 어머니가 저녁이 가까이 되는데도 집에 들어 오지 않았다는 다급한 목소리의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아버지 집으로 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매우 부지런한 분이다. 4남1녀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자판를 깔고 장사까지도 하셨다. 빌라 한 모퉁이에 고추를 심고, 상추와 여러가지 화초를 심어 키웠다. 어느 날부터는 용돈이나 버신다고 하면서 조그마한 행거 위에다 신문지나 박스등을 수집하기 위해서 온 동네 주위를 다니셨다. 돈이 되면 주머니 속에 간직했다가 손자, 손녀들에게 용돈으로 주셨다.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써 본적인 없는 분이셨다. 남편 식사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오후 5시가 되면 반드시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오후 5시가 넘어 6시가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7시가 넘어가자 , 큰 아들인 나에게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동네 경찰 지구대에 신고를 하고, 동네 주변을 온통 찾아 나셨지만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았다. 밤 8시가 훨씬 넘어서 지구대애서 연락이 왔다. 내 어머니 같은 분이 어느 초등학교 후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시 차를 몰아 그 초등학교로 가 보니 어머니가 경찰과 함께 계셨다. 길을 잃으신 것이었다(바로 옆 동네였는데...) 얼마나 집을 찾아 헤매셨는지, 어머니 얼굴이 초죽음 상태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순간 나도 몰래 눈물이 왈깍 쏟아졌다... 가끔 똑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시곤 했지만, 나이가 드시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대수럽지 않게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보니 치매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치매가 심해지는 것은 지연시키는 약을 계속 드시고 있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주위 사람을 거의 알아 보지도 못하시고, 오직 남편인 아버지만 겨우 아실 뿐이다.. 어머니가 소, 대변을 스스로 가리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가 고생하신다. 식사때마다 아버지가 도와 주셔야 드신다. 다행히 어머니는 몸은 건강하셔서 한시도 그냥 계시지 않고, 안방, 거실, 건너방을 쉬도 없이 왔다 갔다 하신다. 그나마 다행이다. 몸이라도 건강하시니까. 그런데 혼자 집밖으로 나가 길을 잃거나, 남편과 산책을 하다가 길을 잃으신 적이 여러번 있어서 가족을 당황하게 만든 경우가 많았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양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강남구,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지구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연락이 와서 그 즉시 지구대를 찾아가 집에 모시고 온것이 십여 차례.. 길을 잃었던 어머니를 모시고 오기 위해 지구대를 찾아 간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는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자주 아버지 집에 들려 어머니를 뵙지만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시는 것 같다. " 엄마, 내가 누구인지 알아? " 아저씨 ?? 아저씨가 아니고 큰 아들 창환이.. 큰 아들?? 창환이?? " (치매로 인해 모르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신다. (아들이라 친근한 느낌이 드시는 것 같았다). 한 평생 성질 고약한(?) 남편 뒷바라지로 수도 없이 마음 고생하시고. 없는 살림에 4남 1녀를 키우기 위해 고생,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 이제는 치매로 정신을 놓고 계신 어머니(79세)를 보니 가슴이 메어진다. 과거의 모든 삶의 기억을 치매라는 지우개(?)로 지워 버려져서 이제는 애기처럼 되어 버리신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우리 곁에 계신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하다. 언제든지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찾아 볼 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 ~ 우리 부모님, 오래 오래 사시도록 인도해 주세요.. 아멘. 어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아버지, 어머니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 문지기(김창환목사) - 저의 부모님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보육원에서 자란 남매가 장성해 아버지를 만났지만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에 질색하고 다시는 찾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남매는 마지못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남매는 장례식장에서 화장하지 말아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 들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남매는 화장한 다음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태우다가 우연히 한 권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그 일기장에는 아버지가 화재 때 남매를 구출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아버지는 소방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속으로 뛰어들어 어린 남매를 구하고 아내를 여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도 남겼습니다. “보고 싶은 내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내가 죽거든 절대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난 불이 싫단다. 불에 타는 무서운 꿈에 시달리며 30년을 넘게 살았구나.” 두 남매는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된 뒤였습니다. 매주 16,860 여명의 회원님들에게 한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