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시82편1-4; 마11장3- 5)
성경본문: 시편82:1-4; 마태복음11:3-5
시편82:1-4;
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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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3-5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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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높아진다는 것은 사회문화가 발전한다는 의미로서 환영할 일입니다. 지난번 문제가 된 ‘인권조례’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해석됩니다. 작은 자나 소외계층의 차별이나 소외를 금지하는 것은 교회가 누구보다 원하는 일입니다.
성소수자나 육체적 경제적 소외계층에 대하여 관심을 덜 가진 것과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국가나 교회는 이들에 대하여 한 번도 차별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그들의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배척하거나 소외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동성결혼의 경우는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아직도 동성동본 금혼이 유효한데 하물며 동성결혼을 허락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까?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의 뜻은 이렇습니다. 우선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가난한 자가 낙원에 들어가고 부자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젊은 관원에게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셔서 가난한 자가 부자의 섬길 대상인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 예수님은 한 결 같이 작은 자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에 대하여 각별한 동정을 표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들을 도우라고 권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항상 있었고, 빈부의 격차가 없는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그 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다 같이 가난할 때는 몰랐지만 격차가 심해지면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 때문에 더 가난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만수르라는 44세인 아랍 에미레이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석유재벌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라고 하는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은 멕시코의 국영 통신회사를 인수하여 비싼 통신요금으로 부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세계 제2의 부자로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한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복지재단을 만들어 기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최고의 갑부인 리커싱은 최근 중국에 대항하여 홍콩에서 돈을 빼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이들의 재산은 가난한 자와 상상할 수 없는 격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과의 격차는 계산하기조차 힘듭니다. 지구상에는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금도 1억2천만 명이나 됩니다.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계수로서 0-1 사이의 값으로 표시합니다. 지니계수가 0.4 이상이면 상당히 불평등한 것이고, 0.6이상이면 매우 불평등한 것을 의미합니다.
지니계수 1위는 브라질로서 0.59입니다. 2위는 멕시코로서 0.55입니다. 3위는 미국으로서 0.41입니다. 4위는 중국으로서 0.40입니다. ‘지니계수’가 높다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인데 브라질이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보면 그런 나라의 부자들은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유엔미래포럼’(Millennium Project)에서는 지구촌의 15대 과제의 대안을 찾습니다. 기후변화, 물 부족, 환경오염, 과학기술발전, 민주주의 발전, 국제범죄, 국제질병, 빈부격차, 장기적 국가전략, 의사결정 역량강화, 신 윤리도덕 등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란 어느 개인이나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이런 빈부의 문제는 복음과 성경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4:18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심령이 가난한 자, 재물이 있지만 물질에 가난한 자가 되어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은 오실 메시야를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11:3에는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대망은 메시야의 도래입니다.
“언제입니까?”, “언제 오십니까?” 그들은 수없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랍비나 선지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메시야라고 기대했습니다. “오시는 ‘기쁜 소식’이 당신입니까?”, “복음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입니다. 구약성경 전반에 그의 오심이 예언되어 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이냐는 질문입니다. 복음은 오실 메시야를 지칭합니다. 메시야가 와야 진정한 기쁨과, 복음과,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메시야는 고난과 죄로 인해 고통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수가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 생수 이야기, 남편 이야기, 예배 이야기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 후에 25절은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내가 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심을 밝히십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29절에서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동네에 들어가서 외칩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까지도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방 여인에게도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어 주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입니다. 아담 이후에 인간에게 기쁨이 없는 까닭이 무엇 때문입니까? 용서 받을 길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사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한 해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구하고 사함을 받습니다. 율법은 아주 어려운 방법으로 죄를 사합니다. 더구나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더 알게 하고 결국 우리를 죽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짓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없애지 않고 용서의 길을 여셨습니까? 하나님의 완전성, 창조의 완벽성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사람을 새로 창조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이 쉽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굳이 어려운 방법을 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 방법을 택하셨습니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때문입니다.
용서는 관용이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보다 용서하시는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하십니다. 재창조란 창조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을 만드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용서는 은혜를 전제로 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forgive)라는 말은 ‘주다’(give)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메시야로 주는 것입니다. 주어야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아들을 메시야로 주신 것은 복음의 진수입니다.
여러해 전에 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살인범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살인범의 형은 주에서 큰 공헌을 하여 주지사에게 동생의 사면을 청했습니다. 주지사는 형의 공헌과 동생에게 미래가 있다는 생각에 사면을 허락하였습니다. 형은 사면장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감옥에 가서 동생을 면회하였습니다. 동생을 만난 형은 물었습니다.
“사면이 되면 뭘 할 거니?” 형의 질문을 받은 동생은 “나가서 먼저 내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를 죽이고, 그 다음에 내가 사형을 받도록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은 사면장을 가진 채로 동생을 뒤로 한 채 돌아 나왔습니다. 주지사는 동생이 아니라 형을 봐서 동생을 사면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용서받을만해서가 아니라 아들 그리스도를 봐서 인류를 사면하셨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메시야는 오셔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장애물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메시야의 오심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에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5에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합니다. 복음은 역동적인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야다, 아니다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듣고 본 것을 알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작은 자인 병든 자는 치유를 받게 될 것이며, 물질적으로 작은 자인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약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소외된 자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병든 자를 찾아갑니다. 죄인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모든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고,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17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의인이 사는 능력은 복음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라는 말은 고통과 가난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물질적인 빈곤자인지, 심령이 가난한 자인지,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아마 영육이 모두 가난한 자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아니면 복음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가 복음을 원할 것이고,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부자들은 복음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와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와 힘으로 미래를 살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부와 힘으로 천국 보다 더 좋은 세상을 얻을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고,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천국을 버리고,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은 물질이며, 건강이며, 명예며, 인간관계이며, 머리로 짜낸 꾀입니다.
‘스크루지 원리’가 있습니다. 돈은 영원히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원리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탐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복음과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82:4에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가장 듣기 좋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자가 가장 크고, 큰 자는 가장 작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소외계층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성전에 드린 과부가 가장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겨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므로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외계층의 편이셨습니다.
창녀와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더러운 죄인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믿지 아니 하였으나 세리와 창녀는 믿었다”고 하셨으며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편이셨습니다.
탈무드에는 “가난하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 좋다. 학문이 있는 사람이 많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라. 그들의 셔츠 속에는 영민한 지혜의 진주가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탈무드의 말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원리이며 복음입니다.
미국의 100대 기업 CEO의 평균 연봉은 일반인의 1,000배가 넘습니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악의 수준입니다. 미국 전체 가계 소득의 증가분 중 93%는 상위 1%의 부자가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빈부의 격차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집이 자산의 전부인 중산층 가운데 ‘하우스푸어’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입니다. 가난한 자를 양산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난한 자가 비로소 복음을 필요로 하고, 복음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결론
어떤 이가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에게 40년 죽마고우가 있었는데 함께 모든 얘기를 나누고, 같이 일하고, 정말 피를 나는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막대한 유산을 받은 다음에 그 친구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화도 뜸하고, 만나도 시큰둥하고, 대화도 형식적이고, 저를 피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가난하여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창밖을 내다보는 것과 같이 누구든지 필요로 하고, 모든 것을 보고, 잘 찾지만, 돈을 가지게 되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는 제게 형님이라고 하고, 뭐든 물어보던 어느 목사님은 좀 큰 교회에 가더니 형님이라는 말도 않고, 가르치려듭니다. 사람은 육으로나 영으로나 가난해야 복음을 필요로 하고, 겸손하고, 메시야를 원합니다.
복음서의 많은 말씀 가운데 6분의 1이 돈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에서 탐욕의 마력이 드러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며, 육체의 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자, 마음이 부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자에게는 복음도 없고, 긍휼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가난한 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가난한 자가 칭찬을 받습니다. 가난한 자는 언제나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기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난을 연습하는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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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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