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눅 2:25-39)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달이 12월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 속에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습니다.
라파엘의 '모나리자'라는 그림은 유명한 그림입니다. 라파엘이 저녁 노을질 때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밖에 나와 퇴근하는 남편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늘 걸어오는 먼 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눈을 본 미술가의 감각이 발동했습니다. 그는 제자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화선지! 화선지!' 그러나 그곳에 화선지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 옆에 있던 방앗간 벽 옆에 술통 뚜껑이 팽개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술통 뚜껑을 갖다 주었습니다.
물론 물감도 없었습니다. 라파엘은 옆에 있는 숯 덩어리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술통 뚜껑 위에 남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정신 없이 그려 나갔습니다.
이 그림이 역사상 그 유명한 모나리자입니다.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행복한 사람은 기다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입니까?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새해 달력과 새해 다이어리를 꼭 챙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꼭 챙겨야 할 달력이 있습니다.
교회력입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달력입니다.
예수님도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에 오르실 정도로 하나님의 달력을 기억하고 지키셨습니다.
교회력을 지키면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을 지키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며, 신앙생활이 치우침 없이 균형을 이룹니다.
둘째로, 정체성이 명확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유월절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 선민의식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교회력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정체성이 굳건해집니다.
셋째로, 신이 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환경에 따라 울고 웃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절기를 지키면 환경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말씀에 따라 신바람이 납니다.
①지금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도 불립니다.
대강절이란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지금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세상이 먼저 성탄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먼저 성탄절을 준비합니다. 아기 예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 결과 성탄절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아니라 흥청망청 시끄러운 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아기 예수의 오심을 사모하는 행복한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아멘!
㉠대강절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사순절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절기라면, 대강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이란 '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전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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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의 기원은 주후 4세기 때 스페인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당시 스페인교회는 1월 6일에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 받는 사람들은 금식하면서 매일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 기간은 12월 17일부터 1월 6일까지 3주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대강절의 기원이 되었답니다.
이 신앙관습이 프랑스와 로마로 전해졌고, 이후 교회는 사순절처럼 대강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507년 투르공의회에서 대강절이 지정되었습니다. 이때는 성탄 전 40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9세기부터 4주간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주님의 오심과 기다림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작게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찻집에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지금 고3 학생들은 부모님과 합격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할 분은, 평화의 왕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천 년 전 약속하신 대로 오셨습니다. 오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오십니다.
우리 삶에 성령으로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필요마다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장차 마지막 때 재림 주로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대강절은 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한마디로 대강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강절을 맞이해야 할까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은 성탄절 분위기가 잘 나지 않습니다. 트리 마저 없다면 성탄절을 기억도 못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먹고사는 일에 바쁩니다. 어지간한 뉴스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뭔가 기대감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성도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휴가나 보너스에는 귀가 솔깃해도 성탄절에는 무 덤덤합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일상은 오늘 우리처럼 힘겨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그 때 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고 말합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크게 요동쳤습니다(마2:3). 이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대강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 그 누구도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나실 지도 알았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마2:4-5). 그런데 정작 메시아가 탄생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직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성경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를 경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강절을 준비된 자세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준비된 마음으로 대강절을 맞이해야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아기 예수께 합당한 예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대강절은 어떻습니까? 아기 예수는 간데 없고, 그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머리로만 성탄절을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아기 예수를 만나겠다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께 합당한 예물도 준비해야 합니다.
자녀의 친구가 찾아와도 우리는 맞을 준비를 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 대강절입니다. 마음에 준비가 꼭 있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대강절에는 초를 밝힙니다. 4주에 걸쳐서 초를 밝힙니다. 각 초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주는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밝힙니다. 둘째 주는 회개의 촛불, 셋째 주는 사랑과 나눔의 촛불, 넷째 주는 화해의 촛불을 밝힙니다.
마지막 성탄절 당일에도 초를 밝힙니다. 그 촛불은 감사와 기쁨의 촛불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촛불을 밝힙시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촛불을 밝힙시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촛불을 밝힙시다. 아기 예수의 사랑을 나누는 촛불도 밝힙시다.
②본문의 시므온은 평생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 사람입니다(눅2:25-35).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라는 어느 노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어느 주석자는 여기 나오는 이 시므온이 AD 13년에 산헤드린의회 의장을 지낸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므온은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년 후 말라기가 예언자로 활동을 마치고 주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400년 간을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시므온은 그런 400년 동안 영적 암흑시대를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면서 기다렸던 그 시대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이 확실하게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보고 죽으리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태어나신 예수께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왔을 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례는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만에, 여자아이는 80일 만에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모가 해산하면 몸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산모와 아이가 깨끗해졌다는 확정을 받는 예식이 정결 예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시므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위로자이십니다(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은 민족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바로 예수님을 기다림과 같은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지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농산물을 모두 가지고 갑니다. 사람 죽이기를 파리 목숨보다 더 쉽게 죽였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배국의 종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위로가 정말 필요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시므온은 늘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을 위로할 분을 보내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위로자가 오기까지 너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힘이 났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위로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⑴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가 되십니다(눅7:36-50).
예수님이 바리세인의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막 바리새인의 집에 도착하여 식탁에 앉는 순간,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예수님 뒤로 들어와 선 채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초청 받지 않은 사람이 집에 온 것도 놀라운 일이고 식탁에 마주앉는 즐거운 시간에 우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순간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 여자가 주님께 무슨 할 말이 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조금 울다 말겠지 했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울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더니 또 웁니다. 위에서 떨어진 눈물이 예수님 발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를 풀더니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 중에 누군가가 '죄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왜 죄인이란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죄인'은 보통 남자는 세리, 여자는 창녀를 말합니다. 세리가 죄인인 것은 다 압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상을 걷어서 개인적으로 착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녀가 죄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여기는 두 죄가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죄입니다. 이 두 죄를 지으면 무조건 돌로 쳐죽입니다.
후에 형벌이 더 강화되어 간음죄의 경우는 먼저 인분 통에 집어넣고 굴린 후에 돌로 칩니다.
그러니까 간음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바로 그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왜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을까요? 한이 많은 사람은 웁니다. 가슴속에 첩첩이 한이 쌓인 사람은 웁니다. 자기를 창녀로 내몬 인생살이가 서럽고 힘들고 외로워서 운 것입니다.
또 상처가 많은 사람은 웁니다. '상처'를 히브리어로 '쉐벨'이라고 부르는데, 그 '쉐벨'은 '깨지다, 망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샤발'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말의 '사발'과 같습니다. 사발처럼 깨지고 부서진 것이 상처입니다. 부서지고 깨어져 삶이 망가진 사람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또 죄가 많은 사람도 웁니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속이 상해서 웁니다. 그렇게 하면 안될 것을 알면서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자신이 미워서 웁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내가 원치 않은 악을 행하는 내가 싫어서 웁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 그 죄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며 탄식하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죄로 상처 진 마음을 간직한 여인에게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땅에 오실 위로자를 예언하셨습니다(사40:1-5).
사40:1절에 보면 그 당시 바벨론 포로로 지쳐있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사야선지자를 통하여 위로에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그 당시 포로 된 현장에서 그립던 고향 땅으로 이끌어 동행하겠다는 임마누엘의 말씀을 하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위로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위로하는 방법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동행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투에서 희생된 병사를 생각하며 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종종 부상당한 병사들이 있는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 군의관이 심한 부상을 입고 죽기 직전에 있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링컨을 안내했습니다.
링컨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소?' 그랬더니 병사는 그가 대통령인 줄도 모르고 신음하면서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께 편지 한 통만 써주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젊은 병사 옆에 앉아 불러보라고 말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저는 제 의무를 다하던 중에 그만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회복되지는 못할 것 같군요. 제가 먼저 떠나더라도 저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존과 메리에게도 저 대신 입 맞춰 주시고요.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해 주시길 빌겠습니다.'
링컨은 편지 말미에 다음과 같이 서명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 편지를 대필했습니다.'
병사는 편지를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다가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대통령인가요?' 링컨이 '그렇습니다. 내가 대통령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소?'
그러자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을 잡아 주시오. 그러면 평안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병사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맺혔고, 링컨의 눈에도 안타까움과 비통함의 눈물이 보였습니다.
대통령이 고통 받는 병사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위해 찾아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감사이고 기쁨을 줍니다.
▶성탄절은 평화의 소식이면서 위로의 소식입니다.
▶성탄절은 기쁨의 소식이면서 감사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늘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축복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이사야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있을 것도 예고했습니다.
사40:3절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의미하지만 본래 뜻은 70년이 아닌 700년 후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길을 예비한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누가는 본문을 인용하여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였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 사역을 예고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기의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포로생활 역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700년이 지난 후 메시야 탄생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고통이요, 슬픔이요, 눈물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그런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자세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40:4절에 보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돋으라'고 합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어두워집니다. 마음에 어두운 곳이 있으면, 주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는 까닭에,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골짜기가 생기면 균열이 생깁니다. 두 마음이 생깁니다. 골짜기가 생긴 두 마음으로는 성탄의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없어지며 여유가 없어집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부족한 골짜기마다 돋우어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부족하면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헌신이 부족하면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노력이 부족하면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더 사랑해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더 잘 믿어야 합니다.
이렇듯 부족한 부분이 돋우어질 때 비로소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이 대강절에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의 골짜기마다 매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또 4절에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배척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산 때문이었습니다. 우월감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명예, 자기 존중, 자기 우월에 빠지면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낮추어 겸손의 평지로 만들 때 비로소 주님도 보이고 진리도 보이고 은혜도 얻게 됩니다. 모쪼록 높은 교만의 산을 낮추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4절에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험한 곳이라도 평지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의 '험한 곳'은 거친 상태에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분노하는 마음, 화를 내는 마음, 시기, 질투, 원망으로 독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구주가 오실 리 없습니다.
여기의 '평탄케 된다'는 것은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즉 구부러진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펴서 곧은 마음의 대로를 만들 때 비로소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은 편견과 왜곡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예수를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했습니다.
우리들도 거칠고 구부러진 마음을 펴서 평탄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⑵예수님은 없는 자의 풍성이십니다(요5:1-13).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계시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으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이곳은 음식을 구하기도 힘들고 인가조차 없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주님은 그 고장의 출신 빌립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정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안드레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한 소년이 가져다준 도시락이었습니다. 실로 초라한 음식이었지만 주님이 축사를 하셨습니다.
요6: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셨다'고 기록했으며,
오천 명이 먹고 남긴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채워진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날 벳세다 광야에서 그들은 떡과 물고기로 주님과 더불어 풍성한 애찬식을 거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없는 자의 풍성이십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⑶예수님은 천한 자의 높음이 되십니다(눅19:1-10).
여리고성의 세리장인 삭개오는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로마정부에 빌붙어 녹을 먹고사는 부자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공허하고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여리고에 오신 예수님을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뵙고 주님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눅19:5절에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기쁘게 주님과 그 제자들을 모시고 자신의 집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아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눅19: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의 진실한 회심을 기뻐하시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시고, 삭개오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높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도 주님 앞에 나와 자복하고 회개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갈3:7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⑷예수님은 잡힌 자의 놓임이 되십니다(행16:19-34).
바울이 선교 제2차 여행 중에 빌립보성에 도착하여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루디아의 집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중에 귀신 들린 여인이 자꾸 와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면서 여러 날을 괴롭게 하므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행16:18절에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바울 일행이 적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여종을 사로잡은 귀신의 능력을 힘입어 점을 치던 주인들이 자기들의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모함하여 고소함으로써 두 사람은 큰 곤욕을 치른 후에 지하 감옥까지 수감되고 만 것입니다.
행16:24절에 보면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다'고 했습니다. 그전에 그들이 엄청 맞았습니다. '
옷을 찢어 벗기고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뒀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행16:25절에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 결과는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잡힌 자의 놓임이 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려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⑸예수님은 눈먼 자의 빛이십니다(요:1-7).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 되었느냐'고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과 같은 무서운 병은 반드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이 소경이 되었으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혹시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소경 된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 그 사람이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소경 된 자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을 때 그의 눈은 뜨여지고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해 빛을 보게 하심으로써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소경의 육신의 눈을 보게 하심으로써 영적인 흑암 속에 있는 죄인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은 눈 먼 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⑹예수님은 병든 자의 고침이 되십니다(요5:1-9).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곳에 있는 이유는 천사가 못에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에 물이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 병 낫기를 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시자 그 병자는 '곧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물이 동할 때 물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병든 자의 고침이 되십니다. 출15:26절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고, 렘30:17절에서도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4:2절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⑺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 되십니다(요11:17-44).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그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오시지 안으셨습니다.
나사로의 형제들을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가족이기에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면 금방 달려오실 것으로 마리아와 마르다는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이나 있던 곳에 더 유하셨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오히려 병으로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증거'하시려고 했습니다.
이틀을 지체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의 집에 이르렀을 때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 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주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밝히셨습니다. 즉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의 핵심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의 이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자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이 고백을 받으시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시체는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게 하시고는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죽었던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대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으며,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사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십니다.
㉡본문의 시므온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님을 보면서 구원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12월 대강절에 기다리는 예수님은 구원자, 구세주이십니다.
죤 맥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기차 길 위에 술 마시고 취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모두가 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빨리 가서 기차 길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때 맥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기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빨리 가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앞에서는 눈먼자의 빛으로 치료하시는 주님을 말씀했습니다.
여기서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8:3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가 자신을 표현할 때 '나는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밝은 것입니다. 어두움의 반대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두움은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은 악한 세력들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만선의 축복을 받고 그물을 손질하다가 엉뚱하게 주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임재 하시면 안 보이던 죄가 보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빛이십니다.
③여선지자 안나도 오랜 기다림속에 아기 예수를 만나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38).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 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아셀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드보라, 훌다와 같이 훌륭한 여성 예언자였습니다. 이 여인이 과부 된지 84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굳이 안나의 나이를 말씀하는 이유는 그 여인이 예수의 오심을 위해서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장기간 기다렸다는 말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모든 백성들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약속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여인이 84년 동안 수절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이 있으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안나는 84년 간 과부로 불행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하나님은 때로 그 불운한 삶의 조건들을 활용하여 그 여인에게 큰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환경을 만들어 활용하시고 우리를 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시므온처럼, 안나처럼 주님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모함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축복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나타납니다. 성령의 은혜도, 은사도, 천국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나는 84년 동안 주어진 약속을 믿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사모하는 동안 드디어 응답이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도들이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때로 시끄럽기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구체적 만남이 없으니까 기준이 주님 기준이 아니고 내 기준이 앞서서 그렇습니다. 내 기준대로 하자고 강조하니까 충돌하고 불화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내 기준이 앞서면 갈등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모든 길의 기준은 주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길이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의 길과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주님의 기준을 내 기준에 맞추게 됩니다. 그때부터 내 상식이 기준이 되고 신앙의 중심이 되니까 신앙의 삶이 꼬이고 소리만 요란합니다.
오늘 교회들이 갈등이 많고 분파가 많고 불화가 많은 이유는 모두 내 기준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 나타나는 한계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시므온 보세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기다림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무슨 말씀인가? 이제는 '만족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한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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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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