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예식에 대하여/예식

성찬에 관한 연구, 비교 성찬론[출처] 성찬에 관한 연구, 비교 성찬론

에반젤(복음) 2020. 12. 8. 02:16

비교 성찬론

 

 

Ⅰ. 서 론

 

Ⅱ. 본 론

 

A. 예비적 고찰

 

1. 어 의

 

2. 성서에서의 성찬

 

B. 성찬론의 발전

 

1. 초기 교회에서의 성찬

 

2. 서방 교회

 

3. 동방 교회

 

4. 중세 교회

 

C.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

 

1. 화체설

 

2. 라테란 공회의(1215)

 

3. 트렌트 회의(1551)

 

4. Vatican II

 

D. 루터의 ‘공재설’

 

E. 쯔빙글리의 ‘기념설’

 

F. 칼빈의 ‘영적 임재설’

 

G. WCC의 BEM Text

 

Ⅲ. 평가와 결론

 

 

 

BIBLIOGRAPHY

 

 

 

 

 

 

 

I. 서 론

 

 

 

모든 종교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름의 신비 체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초자연적 대상이 있고 그 대상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되고 그 관계를 가능케 한 통로가 그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종교는 결국 하나의 종교 철학, 사상체계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과 초월자, 영원자와 유한자, 완전자와 불완전한 자, 절대 주체자와 상대적 존재와의 관계정립에 대한 교의야말로 종교와 철학의 가장 큰 차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나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는 믿음의 문제요 자연과 초자연이, 시간과 영원이, 합리와 비합리가 만나는 접촉점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에서 찾아진다. 그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 vere Deus vere homo이시다.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로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하여偏在, omnipresence 하면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는 화해자요 중보자로(엡 2:16, 고후 5:18,19) 그 안에서 영원과 시간이 만난다. 그는 절대자에 대한 계시자인 동시에 절대자 자신이다. 그가 이룩한 십자가에서의 구원 사역으로 오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분여받게 된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수단’이 성찬이다. 이 성찬론이야말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논제이다.

 

Vatican II의 Lumen Gentium에서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례전적이다. 즉,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뿐 아니라 온 인류의 통일을 위한 표지요 도구이다.”라고 말한다. 칼 라너는 이를 原聖禮典이라고 말하는데 그 의미에서 타종교에 비하여 우리 기독교의 신학과 예전에서 가장 크게 다른 것은 성찬론일 것이다. 우선 그 구원론이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창시자의 犧牲的인 죽음에 기초한다는 것이고 그 죽음을 모일 때마다 기념하면서 회상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고 이 말씀을 따라 처음 교회는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행 2:42)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 회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구원이 바로 그의 犧牲的인 죽음에 터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성례는 고대 교회에서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을 그리스도교적 내용과 결합시키는 모든 행위들, 표지들과 의식들”이라고 칭해지면서 성찬은 사죄를 선사하고(마 26:28), 떡과 포도주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주어(고후 11:24-25, 막 14:22)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제정된 계약을 확고히 하고(고후 11:25) 종말을 선취하며(고전 11:26, 막 14:25) 이미 ‘지금 여기에서, hic et nunc’ 영생을 주게 된다(요 6:54)고 믿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7가지의 성례가 있으나 그 성례도 계층질서가 있어서 성찬은 으뜸가는 것이다. “성만은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제정”하셨기 때문이며 “주의 만찬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적은 수의 소종파를 제외하고는 비록 이단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기독교라는 범주에 드는 어느 교파도 성찬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역설적이긴 하지만 성찬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예가 된다.

 

그러나 이 구원의 수단, 은총의 통로로서의 예전은 너무 중요시된 나머지,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化體說로 그 전통의 권위로 삼고 있고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이 전통과 권위에 대하여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개혁자들 사이에서 가장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개혁자들간의 차이가 확연하게 구별되었던 것도 바로 성찬론이다. 오늘 보게 되는 교회의 분열과 다양한 교파도 그 근원은 이 성찬의 해석의 차이에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주장인가.

 

이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전통과 권위로 삼는 화체설의 내용과 그 교설이 어떠한 경로로 발전되고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 과정을 따라 연구하고 또 우리 개혁자들의 성찬에 대한 여러 주장을 살펴보면서 이 가르침들이 어떤 점에서 포로되어 있는 교회를 해방시켰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개혁자들의 주장들이 어떤 점에서 같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대별해보면서 이러한 주장들이 1982년의 Lima Text에서 어떻게 종합되고 있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II. 본 론

 

 

 

A. 예비적 고찰

 

 

 

1. 어의

 

성찬의 제정은 물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새롭게 만들어낸 종교 예식이 아니라 유대교에서 오랫동안 계속하여온 유월절 식사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제정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저녁 식사 때 양고기, 누룩을 넣지 않는 떡과 포도주, 쓴 나물 가운데서 예수는 새 요소를 첨가하는데 이 떡과 포도주를 “나의 피, 나의 살”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성찬을 의미하는 eucharist는 감사thanksgiving, ratitude를 의미하는 헬라어 Ευχαριστια에서 온 것으로 히브리어로는 축복, blessing, the sacrifice of thanksgiving을 뜻하는 berakah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한 식사에서 떡과 포도주에 대하여 이 축복을 선포하셨는데 “만찬 상으로 祭壇을 대신하여” “자신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음식과 포도주에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이다(전 11:23-25, 눅 22:14-20, 막 14:22-25, 마 26:26-29).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주의 만찬과 유대교의 유월절 식사와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곧, 유대교의 식사가 과거의 구원의 사건을 회상하는데 비해, 기독교의 성찬식은 미래의 구원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만찬 식사는 유대인들의 명절 식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의 유사성, proximity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서 그들 가운데 있음을 믿으면서(고전 11:20) 떡을 떼기를 계속한다(행 2:46).

 

 

 

2. 성서에서의 성찬

 

대개의 신학적인 주제가 그러하듯 주의 만찬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고 신학적으로 확립된 것은 바울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고전 5:7) 주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와 함께 광야의 만나가 모델이 되고 있으며(고전 10:2 ff) 이 식사를 나누는 사람은 모두가 한 지체를 구성하며(10:16 ff) 이 성찬은 “자격이 없고 경건치 못한 자들의 식사”, manducatio indignorum et imporum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불경건하게 그리고 무가치하게 먹어서는 아니 된다, manducatio indigna et impa.” 부적당하게 먹음으로서, manducatio indigna 그는 육체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범죄하게 된다(고전 11:27).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떡과 포도주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고전 10:21, 11:20).

 

이렇게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와 영적인 현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울이 말한 것을 요한은 새롭게 해석하여 완성한다.

 

우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유월절의 어린 양을 잡는 것은 시간적으로 매우 가깝게 일어난다. 곧 출 12:46, 민 9:12이 요한 19:39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월절 식사라는 예전적 특징은 생명의 떡에 관한 교설로 변하여(요 6장) 주의 만찬의 떡은 장차 있을 종말적 메시아 잔치를 가리키게 된다. 주 만찬의 떡은 예수의 몸이요 살이다(요 6:49 ff).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시는 동안 이 예전은 시행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그의 살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서는 주의 再 성육신 사건과 로고스의 내적인 임재가 일어난다.(요 6:35, 63, 68) 이 예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세계에 오시는 틀이다.

 

따라서 바울과 요한이 말하는 이 예전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새로운 형태로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실 때에만 생명을 넣어 주신다. 그리고 이 일은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요 6:56 ff, 1:12). 요한은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 현존의 실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B. 성찬론의 발전

 

 

 

1. 초기 교회의 성찬

 

사실, 성찬에 대한 개념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나 죄와 은총에 관한 교리처럼 교부들이 뒤를 이어가면서 일정한 교의를 만들어 내려고 일관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또 그만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성찬, Ευχαριστια라는 말은 Didache IX 5 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처음 교회는 저녁 때에 성찬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본래 제정된 시각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신도의 수효가 적었던 처음에는 愛餐, agape라고 불려지는 친교적인 모임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교회가 확장되어감에 따라 성찬과 애찬을 분리하게 되었고 성찬은 예전으로서 아침에, 애찬은 친교로 저녁에 행하게 되었다. 애찬은 4세기 말쯤에 이르러 교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처음, 박해 하의 교회는 예배 장소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예배의 형식도 단순하였다. 집례자가 떡과 포도주에 관하여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ευχαριτιαν 회중은 “아멘 !”으로 화답하면 예배가 시작되고 떡과 잔이 배분되었다.

 

3세기 이후에는 그러한 예식이 더욱 발전되어 세례받은 사람들Missa fidelum이 모인 곳에서만 행하여졌으며 신입 교인Missa catechumenorum들은 제외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마가의 예배 의식이, 콘스탄티노플에는 바실의 예배 의식이 있었는데 이 바실의 예배 의식이 후에는 크리소스톰의 예배 의식으로 발전되어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서방 교회에서는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의 예식이 통용되고 있다.

 

 

 

2. 서방 교회

 

사도 후의 교부들과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제외한 고대의 모든 교부들에게서 자연적이며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실재론을 보게 된다. 성찬을 본질적으로 희생의 제물로 보는 개념은 교회의 초기부터 나타난 것으로 이는 化體의 개념을 예비하는 유력한 요인이 되어 왔다.

 

성찬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여겨지기는 하였지만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에 이르러서야 이론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키프리안은 “감독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본받아 교회에서 참되고 온전한 희생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한다.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디다케에서 성찬을 가리켜 ‘영생을 위한 영적인 양식’이라고 말한 이래 이그나시우스 역시 요한복음 6:54를 가리켜 영원불멸의 약, 죽음의 ‘해독제, anidote’라고 하였고, 져스틴은 우리가 받는 것은 보통의 떡과 보통의 음료가 아니라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말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성찬을 떡과 포도주로 드리는 희생 제물이라고 강조한다. 이레니우스는 성찬에 대한 실재론적 개념의 대표자로서 역사적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말하는 천적인 요소materia coelestis와 지상적 요소materia terrestris의 개념은 이레니우스에게로 소급된다. 그는 천적인 요소와 지상적인 요소επιγειου τε και ουρανιου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는 노스틱 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육체는 성찬을 통하여 우리 주의 몸과 피로 양육되며 따라서 우리의 몸은 죽음과 부패의 희생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즉 교회의 기도επικησιs를 통하여 성령은 로고스를 떡과 포도주에 결합시켜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化體와는 다른 것으로 떡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살이 되게 하는 것은 로고스가 결합되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에 관해서는 그가 실재론적 견해를 가졌느냐, 상징주의적인 개념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 그리고 그 이전의 시대에 있어서는 성찬에 대한 상징주의적 개념과 실재론적 개념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교부들은 주로 노스틱 주의의 가현설을 반박하는 논쟁이 주관심이었고 이 논쟁에서 실재론이 주장된다. 터툴리안은 떡을 몸의 표상, figura corporis 라고 보았으며 몸을 나타내는 것representat이라고 말한다. 이는 상징주의적 개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암브로스(d.397)는 성찬을 희생의 제물로 보았다. 그에게서 성찬의 제물은 진리의 형상, imago veritastis이었다. 이러한 상징주의적 개념에 이레니우스의 실재론적 개념을 결합시켰는데 이는 제단에 그리스도의 몸이 현실적으로 임재한다는 생각을 전제한 것이다.26)

 

아우구스티누스(d.430)의 성찬론은 그의 독특한 이원론을 나타내고 있는데 즉, 그에게서 성찬은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표시’이다.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그 몸의 상징, figura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비한 몸으로 교회, 곧 성도들의 단체라고 생각하였다. 성찬에서 상징되는 것은 교회이며 성찬의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 즉,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사랑의 영을 받는 것이다. 이는 그의 상징주의적 개념으로 성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켜 주며 그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도록 촉구해 주는 것이다.27)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말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corpus et sanguis Christi로서 떡은 그리스도의 축복의 기도를 통해서 그의 몸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성찬이 희생의 제물이라고 본 당시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본래의 희생 제물을 상기시켜 주며 하나님께 바쳐진 그리스도의 제물이 구속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물이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다는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떡과 포도주가 봉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교리는 결국 大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에 의하여 선포된 미사 전문Canon of the Mass에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성찬의 예전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속 반복되는 희생quotidinum immolationis sacrificum’이라고 되어 있다.29)

 

 

 

3. 동방 교회

 

동방 교회는 일찍부터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의 입장을 유지한다. 물론 디다케와 이그나티우스, 져스틴, 이레니우스 등에서 실재론적 입장을 보여주었으나 아직 화체의 개념은 나타나 있지 않는다.

 

성찬에 대하여 순리주의적인 상징주의적 견해를 가르친 교부는 오리겐이었다. 즉, “성찬에 있어서의 몸σωμα는 전형적,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산 떡이신 로고스를 참으로 먹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말씀만이 영혼에 은혜를 가져다주며 순전한 마음과 양심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을 읽음으로서 우리는 그의 피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찬 밖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성찬에서는 말씀에 상징이 첨가된다.

 

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 바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등도 오리겐의 영향을 받았다. 아다나시우스 역시 오리겐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으나 후에는 이레니우스의 실재론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성질의 통일성을 강조한 독특한 기독론으로 인하여 성찬에서도 상징주의적 개념이 강하였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렛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키릴(d.386)은 밀의를 강조, 떡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였다. 예배의 대상은 희생의 제물이 된 그리스도로서 성찬 예전의 의미는 “이것은 나의 몸”이라 하는 선언으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께 부르짖음으로 이루어진 변화이다.

 

닛사의 그레고리(d.394)는 우리를 죽음의 독소로부터 우리의 몸을 해방시키는 것은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음식의 형태로 우리 몸의 소화 기관에 의해 섭취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떡은 성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聖體가 되며 우리의 몸에 효과를 준다. 이는 져스틴의 개념의 발전으로 생리학적인 변화가 덧입혀진 것이다. 크리소스톰(d.407) 역시 성찬에서의 떡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d.444)은 기독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양성의 완전한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비록 제단 위에 바쳐진 것이 떡과 포도주의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진정한 로고스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성찬의 효력은 로고스의 영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로고스의 영의 활동은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과 동일시한다. 다멕섹의 요한(d.750)은 동방 교회에서 화체의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754년 성상 숭배를 배격한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人性의 유일한 상징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성상 숭배자인 요한은 이러한 결정을 무시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μεταποιουνται ειs το σωμα και αιμα του Χριστου. 그는 化體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변질된다, μεταβαλλονται라는 말을 쓰는데 이 주장은 787년 회의에서 채택된다.

 

 

 

4. 중세 교회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오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은 성찬에 관한 교리가 확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성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주제가 교리 논쟁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코르비Corbie의 수도사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 저술한 성찬에 관한 논문, ?주의 살과 피에 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를 통해서이다. 이로 인해 성찬은 신학적 토론을 위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라드베르투스는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성의 기적은 성찬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늘과 지상에서 행하신다. 그리고 그가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의 모습figura 속에 존재하신다. 그리고 봉헌 후에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살과 피만이 완전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베푸시는 기적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찬에 참여함으로 생기는 효과에 대해서는 매일 매일의 과오와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며 가시적인 성례의 참여를 통하여 신앙을 검증하고 확신하게 되며 그리스도와 육체적으로 연합하게 된다고 말한다. 성찬의 유익은 인간의 육체도 영생과 청결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가 비록 실재론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아직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영역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찬을 영적인 것으로 말한다. 즉,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만이 그 몸과 피를 받는다. 불신자들에게는 그 떡과 포도주가 외형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성찬에는 신앙에 의한 영적인 참여, 곧 어떤 신비와 관계를 갖게 되며 상징figura과 진리veritas가 함께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며 성찬을 집전할 때마다 구세주는 고난 당하시고 또다시 희생 당하셔서 죽는다고 말한다. 즉, 반복적인 희생제사라는 중세 가톨릭의 성찬 개념을 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라드베르투스의 견해에 대해 그와 같은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라트람누스는 반대의 견해를 말한다. 그 반대 역시 라드베르투스와 동일한 제목의 논문 <주의 살과 피에 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인데 먼저, 그리스도는 사실적으로in truth가 아니라 상징적으로figuratively 임재하신다고 말한다. 즉, 이 변화는 육적인 의미corporeal sense 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임재는 상징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가 성찬에 실제적으로 임재하심을 부인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 아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피가 존재한다. 이것은 몸과 영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물질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떡과 포도주의 모양을, 모양을 갖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그의 몸과 피인 것이다. 이는 후일 개혁자들의 주장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한편, 뚜르Torus의 감독 베렝가리우스 역시 라드베르투스를 거부한다. 그의 <거룩한 만찬에 대하여, on the Holy Supper>에서 먼저 요소는 봉헌 이후에 모양뿐 아니라 본질, substance에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과 포도주는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이다. 이 요소는 봉헌 후에 그 본질을 잃지 않으나 공허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사람에게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에서 물은 물 자체로 남아 있지만 물이 중생의 도구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신앙을 통해 영적으로 받게 된다. 즉, 신앙없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으며 그의 유익도 공유할 수 없다. 베렝가리우스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리고 이 몸과 피에 대한 성례적 표지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경건한 자는 가시적으로는 성례전의 표지를, 비가시적으로는 성례의 본질 모두를 받게 된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심판으로써 성례의 징표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논의를 거쳐 라드베르투스의 변화설은 더욱 발전되어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C.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

 

 

 

1. 화체설Trnasubstatiation

 

化體transubstantiation 이라는 용어는 처음 12세기 초 뚜르의 힐데베르트, Hildebert of Tours가 자신의 설교에서 우연히 사용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떡과 포도주가 그 外樣, appearances 속성, properties, 그리고 偶有性, accidents 는 그대로 있으나 봉헌 직후, 떡과 포도주라고 하는 감각적 물체 안에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예수의 살과 피의 본질을 포함한다는 것으로 떡과 포도주를 구성한 실체, substantia가 완전히 예수의 실체, substantia로 변하였다는 뜻이다. 즉, “떡의 전 본질이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살의 본질로 변하고 포도주의 전 본질이 그의 피의 본질로 변화한다.”

 

본질의 변화, μετουσιωσιs, change of essence 라는 표현은 일찍이 동방으로부터 사용되었다. 즉, 1059년, Nicholas II의 回勅 文書, encyclical은 “봉헌된 후의 제단 위의 떡과 포도주는 제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살과 피이다.”라고 말한다.

 

서방에서 이 말이 처음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1215년의 Lateran 공회의에서 였고 1551년의 Trent회의에서는 명사형으로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는 말로 확정된다. 이는 곧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 physical entities 뿐만 아니라 좀더 깊은 실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변화까지도 암시한다. 즉, 그 떡과 포도주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또 식탁의 교제를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자신의 몸과 피로 인하여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새 언약의 사람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로마 가톨릭 신학의 대표적인 용어와 개념이 된다.

 

현대의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 이러한 본질의 변화는 의미의 변화Transsignifikation, 또는 목표의 변화, Transfinalisation으로 새로이 해석하기도 하는데 교황 Paul VI은 성찬에서의 변화에 대한 본성ontological nature를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반복적인 희생 제사설이 주장되었다. 즉, 성찬은 사제에 의해 드려질 때에만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 성찬의 주된 의미는 반복적인 희생제사라는 것이다. 즉,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단회 유일적인 희생제사로 만족할 수 없고 사제가 봉헌된 떡과 포도주로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트렌트 회의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2. 라테란 공회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 성찬의 입장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중세 후반기이다. 그때가지만 하여도 성례의 수에 대하여도 의견이 다양하였다. 페트루스 다미아니는 12 성례를 말하기도 하였다. 롬바르드는 처음으로 7성례를 말하였는데 이는 1438년에서 1445년 사이의 플로렌스 공회의는 성찬(미사)을 포함 7성례전을 확정하면서 성례가 성례되기 위해서여는 세 가지의 요소, 곧 질료materia 형상forma 의도intentio 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44)

 

위에서 살펴 본대로 중세기의 성찬 신학에는 크게 두 흐름이 있었다. 즉, Berengar of Tours, Ratrammus, Rabanusmarus 계통의 성찬 이해로서 이는 오리겐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유래하여 떡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표지, 상징으로 이해하는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고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과 신학자들, Radbertus계통의 성찬 이해로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피터 롬바르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강화되었고 1215년 라테란 공회의에서 확정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의 입장이다.) 이공의회에서는 키프리안의 명제, 곧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a salus.”를 “성찬을 통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라고 못박는다.46)

 

“... 하나의 보편적인 믿는 자들의 교회가 있을 뿐이다.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사장이요 제물인 바, 그의 살과 피는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 위에 놓여있는 성례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떡은 그의 몸으로 변화되고 포도주는 그의 피로 변화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비적 연합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바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사도들과 그 승계자들에게 물려주신 교회의 열쇠의 권한을 받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성직 수여를 받은 사제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성례를 효과있게 할 수 없다.”47)

 

 

 

3. 트렌트 회의

 

트렌트 회의에서 성찬론에 대한 것은 1551년, 10월 11일의 제 13차 회의에서 8장으로 된 decree와 11항목으로 된 canon을 결의하게 된다.

 

먼저 1장에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헌된 떡과 포도주 속에 참으로,truly 실제로,really 본질적으로substantially 만질 수 있는 것 아래 있게 된다고 단언한다. 그는 물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분으로서 그의 편재하시는 능력으로 우리가 말로 할 수 없는 방법, 그러나 신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임재하신다. 이는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 바울에 의해 말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곧 全 그리스도totum Christum이 봉헌된 떡과 포도주 속에 참으로truly 실제로really 본질적으로substantially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 속에 계시는 것이 다만 標識sign뿐이라거나 모양figure, 효능virtue뿐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저주한다(canon. 1). 또 이 성찬 예식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며 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divine love를 부어 주시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으로 우리는 “나를 기념하라”하신 주님의 위탁을 따라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2장).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로서의(3장) 성찬 예식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분명한 어조로 “化體說Transubstantiation이라고 불리우는, 떡과 포도주가 봉헌되면서 떡의 whole substance와 포도주의whole substance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말한다.(4장)

 

그리고 누구든지 이 성찬에서 ‘全 그리스도totum Christum’이 each species 아래 모두 담겨져 있지 않다고 말하는 자(canon. 3)와 봉헌된 후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함께 있다고 말하는 자를 저주한다.(canon. 4)

 

 

 

4. Vatican II

 

바티칸 II의 문서에서는 교회론 다음의 제2장에서 성찬의 거룩한 비밀The Most Sacred Mystery of the Eucharist를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잡히시던 마지막 밤에 자신의 몸과 피를 드리는 이 성찬 희생Eucharist Sacrifice를 제정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십자가의 희생을 전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도록 그의 신부인 교회에 위탁하신다. 이것은 사랑의 성례전sacrament of love, 일체됨의 표지sign of unity, 사랑의 연대bond of charity가 된다(art 47장).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위탁에 따라 이 신앙의 비밀을 전수하면서 이를 기념하는데 이 일로 주님의 몸을 계속적으로 새롭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함께 무흠한 희생제물immaculate victim이 드려진다. 우리는 성찬 예식으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합일되기까지 가까와지게 된다(art 48).

 

이 신앙의 秘儀에서 설교homily의 수단은 매우 중요하다(art 52). 특별히 복음 설교 다음의 공동기도, 신실한 기도는 강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이 중보의 기도로 교회는 거룩해지고 특히 civil authorities와 가난한 자들, 인류, 그리고 특별히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다(art 53). 그리고 이 미사에 참여하는 진실한 사람들은 사제가 배분하는 성체를 받음으로 봉헌된 요소elements 아래서 주님의 몸을 받게된다는 트렌트회의에서의 결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art 55).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성찬 예전eucharistic liturgy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56)고 말한 점이다. 이는 추측컨데, 루터와 칼빈 이래 종교 개혁 전통이 성찬에서의 말씀을 강조한 것에 대한 반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화체설에 대하여도 그렇게 강한 어조가 보여지지 않고 트렌트 회의에서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 것 역시 큰 변화이다. 더욱이 고대 이래로 “...아니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로다” 하는 anathema는 볼 수 없다.

 

 

 

D. 루터의 ‘공재설’

 

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철폐하고 성서적 유카리스트의 개념을 회복시켰는데 무엇보다 미사에 있는 잘못된 犧牲의 개념을 반대한다. 즉, 성찬의 떡과 포도주의 요소들이 사제의 봉헌 기도를 통하여 그 본질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성찬의 교리는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의 육체의 수난의 실제적인 再演으로서 사제는 떡과 포도주가 변하여 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희생의 제물로 자신을 바친 것과 꼭 같은 모양과 효과를 가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찬론은 세 가지의 포로, 곧 잘못이 있는데 첫째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화체설이고 셋째는 그릇된 희생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하여 공재설consubstatiation을 공식화한다. 즉,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떡과 포도주 안에in, 함께mit, 밑에, unter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의 만찬에 참여한 사람은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으로 주어진다. 그 떡은 몸 떡,body-bread, 살 떡flesh-bread으로 그것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에 대하여 약속한 것을 받게 된다.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죄의 용서의 확실성이다. 이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인 몸이 아니라 ‘자연적인 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연적인 몸’을 받아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 곧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몸이 되시는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성찬의 요소와 그리스도의 몸이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루터의 이러한 주장은 특히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쯔빙글리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는데 그는 이에 대하여 “떡과 포도주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을까를 묻지 말고 단순히 믿으면 된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우리는 모른다, 자연과 이성을 넘어 그리스도는 편재하여 계신다”라고 말한다.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가 물질적 요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의 존재방법으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두 본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을 주장하는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불가분리의 혼동 불가한 것으로 보고 그의 신성만이 편재하시고 그의 인성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다고 하는 쯔빙글리의 주장을 반대한다. 즉, “신성과 인성은 하나의 인격을 구축하기 때문에 이 인격의 어느 한 본성에 해당되는 것은 전 인격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 인성은 도처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그의 지상 생애에서처럼 공간적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의 인격을 이루고 있고 또 ‘본성의 교류’로서 모든 장소에서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떡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의 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화체될 필요가 없이 이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임재하므로 “이 떡은 주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주의 피이다.”

 

루터는 성찬의 세 가지 요소로서 첫째는 표지sign이요, 둘째는 이 표지의 의미요, 셋째는 첫째 것과 둘째 것을 위해서 요구되는 신앙이다. 즉 표지로서의 성례인 떡과 즙 밑에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에게서 성찬의 핵심은 ‘영적 사귐’의 ‘표지’요 이 영적 사귐은 참여하는 신앙에 의해 일어난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에 의하여 집례되는 성찬을 통하여 은혜가 저절로 온다고 보는데 opus operatum 루터는 성찬을 받는 사람의 신앙opus operantis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58) 무엇보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찬에 대하여 개혁한 것은 말씀 설교와 성찬의 관계이다. 즉, “복음 설교 없이는 성찬은 그 생명을 상실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복음의 재발견이다. 말씀만이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성례전(세례와 성찬)이 말씀과 긴밀히 관계되는 한, 은혜의 수단이 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가 성례전 중심인 것에 비하여 루터에게서 예전의 중심은 말씀의 설교이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례전이란 집행하는 사람의 질적인 상태나 받는 사람의 신앙에 관계없이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만으로 객관적인 능력과 은혜가 역사한다는 기계주의적 성찬론 이른 바, 사효론ex opere oprato를 거부, 받는 사람의 신앙적 참여를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 여기에서 루터는 성찬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과 신앙으로 파악되는 성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의 사귐에 있고 믿는 자들 상호간의 성도의 교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에로 합체되며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1523년의 <성찬의 예배>에서 기독론적 근거를 강화시키는 것은 루터에게서 성찬은 사제의 반복적인 제사 행위sanctificium이 아니라 단 유일회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회생 제사가 말씀 설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beneficium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말씀 설교와 성례전(세례와 성찬)이 교회의 필수불가결한 標識notae marks가 된다.

 

 

 

E. 쯔빙글리의 ‘기념설’

 

쯔빙글리는 1524년의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논문>과 1526년의 <주의 성찬>에서 그의 성찬 신학을 밝히고 있다. 쯔빙글리는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의 공동식사, Gemeinschatsmahl로 생각하였다.

 

그에게서 성례는 ‘한 거룩한 내용을 나타내는 표지the sign of a holy thing’ 또 ‘한 계약의 표지요 보증a covenantal sign or pledge’이다. 즉,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이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단 유일회적 희생제사를 가리킨다. 그는 1)먼저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가톨릭의 입장, 2)또 이 떡과 포도주가 봉헌 후에도 그대로 있으나 편재하시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인성이 봉헌된 떡과 포도주에 공재한다는 루터의 입장, 3)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에도 있고 저 하늘에도 있으면서 봉헌된 떡과 포도주가 이 부활체가 된다고 하는 인문주의자들의 주장, 그리고 4)성찬을 전혀 무시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의 견해를 논박한다.

 

그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 제정의 말씀, 곧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이것은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마 26:26f, 요 6:)의 해석에 있다. 즉, “This is my body”에서 is 가 등식을 나타내는 연결어가 아니라 무엇을 가리킨다signifies, 의미한다means, 상징한다 symbolizes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요 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밭은 세상이니...”(눅 8)에서 is는 모두 signifies, menas, symbolizes의 의미라는 것이다.

 

is를 signifies, menas, symbolizes로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보다 그의 기독론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활, 승천, 승귀하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in uno loco에 계신다. 그러나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성이다. 이것이 그가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성찬의 실재론 the real presence of Jesus Christ을 거부하는 기독론적 근거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눅 22:19)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떡을 받을 때 과거, 갈보리 언덕에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실을 기억anmnesis 하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당하신 죽음과 수난은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다.” 성찬의 의미를 구약의 유월절의 기독론적 성취에서 찾는 쯔빙글리에게서 성찬이란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기념인데 믿는 사람들은 떡과 포도주라고 하는 標識를 통하여 이미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눈 앞에 계신 것으로 보고 맛 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찬을 받는 사람의 신앙을 강조한다. 우리가 봉헌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자연적이고 문자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먹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사 사죄를 베푸셨고 영생의 기쁨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성찬의 종속 개념은 칼빈과도 다른 것으로 성찬의 능력은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특히 성경 말씀과 복음 설교의 능력과 함께 일어난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성례전 중심의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기록된 말씀의 능력이 믿는 자에게 신앙을 일으키는 말씀의 신학이다.

 

 

 

F. 칼빈의 ‘영적 임재설’

 

칼빈의 성찬론에서 중심사는 그리스도이시다.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만져지듯, 보여지듯 제시된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회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 떡과 포도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믿는 자는 양육받고 생기를 얻으며 강건해지며 기쁨이 충만해진다. 즉, 성찬은 ‘영적인 잔치’로서 이 잔치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떡”(요 6:51)은 우리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중생의 삶을 확증한다면 성찬은 이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유비 관계analogia이다.

 

칼빈의 성찬론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같은 물질적인 실재론realism도 아니요, 쯔빙글리와 같은 상징주의, 기념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와 영적인 연합이 일어난다는 영적 임재설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형태로 주의 성찬에 임재하시는가. 그것은 너무 신비스러운 일로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칼빈은 우리가 이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일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온갖 구원의 은사, 義認, 성화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 그리스도와 합일 없이는 구원이 없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성찬의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지, 또는 의의 significatio는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둘째는 실체substantia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수난, 죽음과 부활이다. 셋째는 효력efficatio 곧,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축복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체 없이는 효능이 없다.

 

그에 의하면 성찬의 신비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의 연약성 때문에 불가시적인 것을 우리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표현하는 물질적인 표지들이요 둘째로는 이 상징들 자체에 의해서 표현하는 영적인 진리이다. 결코 물질적인 실재론이나 단순한 기억으로 그치는 기념이 아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교류와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으로 성장해가며 영생을 상속하며, 그리스도의 우리의 짐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주시는 행복한 교환, fröhlicher Wechsel이 일어나는 것이다.

 

칼빈은 또 무엇보다도 성찬에서의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으로서 성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복음, 말씀 설교이다. 올바른 성찬은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 유일회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을 확증시키는 것이다.

 

칼빈의 성찬론에서 특이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성찬에서의 성령의 역할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는 것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그 썩어질 떡과 포도주 밑으로 끌어 내려질 수 없는 동시에 그것이 편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찬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것은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따라서 그의 살과 피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승귀하신 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신비스러운 영광의 성체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연결의 줄이다. 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 성령이 통로가 되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살이 진정한 음식이요 그 피가 진정한 음료로 믿는 자들을 양육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물질적인 실재론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로서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또는 기념설과는 달리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성찬을 이해한다. 이들이 삼위일체의 간여를 고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성찬론은 영적이기 보다는 주술적인 면이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물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상징물이 그리스도의 본체와 연결되고 이를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먹음으로 그리스도와 합일되고 그가 하신 모든 은사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집례자는 사제나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물체 안에 임재하시고 참여자와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공허한 상징이 아니다. 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는 진실로 그의 몸을 제시하고 보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은 상징을 통하여 진정으로, 실재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상상력이나 이해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영생의 영양소로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에서 영적인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만나며 장차 일어날 부활을 확약받는다. 성찬에서 만나게 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광의 주님”으로서 두 본성은 교류, communicatio idiomatum한다(CYH-루터는 두 본성의 교류를 인성과 신성의 편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찬에서 성령의 역사를 말씀 사역으로 ‘全 그리스도, totus Christus’와 연합하게 되는데 여기에 신앙과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가 성찬에 앞서 자기를 살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CYH-쯔빙글리는 성령의 조명에 의한 신앙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칼빈은 신앙에 앞서 성령의 주권적 임재를 더욱더 강조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찬에서 성화의 측면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강요 제 4권의 교회론에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서 비롯되고 동시에 이것을 돕는 외적 보조 수단이라고 말한 칼빈은 교회가 복음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듯이 성례전 역시 복음 설교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없어도 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생긴 신앙을 강화시키는 보조 수단으로서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을 지탱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신 주님 자신의 선의의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에 印 치시는 외적 표시이다. 실로 “주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의 자비와 그의 은혜의 ‘보증’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없어서는 아니될 영적 잔치요 영의 양식이다.

 

 

 

G. WCC의 BEM Text

 

WCC 창설 이래 신학적인 일치를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특별히 교회의 가시적 일치는 바로 세례 성찬, 직제에 대한 신학적 일치요 나아가서 실천적 일치가 된다. WCC 산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27년 로잔회의로부터 세례 성찬, 직제에 관한 신학적인 일치를 시도해 오다가 1979년 떼제 공동체의 뚜리안Trer Max Thurian의 지도 하에 BEM,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의 초안을 마련,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최종 작성되기에 이른다. 리마 텍스트로도 불리우는 이 문서는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일치, 나아가서 직제의 일치에 관한 신학을 제시함으로서 “교회가 정의, 평화, 화해를 증진시키므로 인류를 새롭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즉 BEM Text는 Missio Dei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성찬의 제정과 함께 성찬의 의미를 말하는데 그 성찬의 신학은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1. 성찬의 제정

 

본 문서에 의하면 성찬 제정의 말씀은 고린도 전서 11:23-25(cf,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0)에 두고 있다.

 

성찬 예전의 역사적 기원은 명시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최후의 만찬에 있으나 암시적으로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과 부활 직후의 식사들에까지 소급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원한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標識'로서 이 성찬의 구속론적 의미를 구약의 유월절 사건의 신약 성경적 이해에서 찾는다. 이 성찬의 축하야 말로 교회 예배의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2. 성찬의 의미

 

 

 

1)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찬

 

성찬은 주님의 선물이면서 이 선물에 대한 감사이다. 즉, “성찬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 구속, 성화를 통하여 성취하신 모든 것, 또 인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 안과 세상 속에서 성취하고 계시는 모든 것,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성취하실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 기억으로서의 성찬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성취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고 기념하는 것, anamnesis이다. 즉, 성찬이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희생 제사가 사제에 의하여 반복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회적인 것으로 보는 점이요 이 하나님의 일(십자가)이 성찬 예전을 통하여 지금도 효과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우리들과 모든 창조의 세계를 위해서 성취하신 모든 것, 그의 성육신, 종되심, 교역, 가르침, 고난, 희생제사, 부활, 승천, 성령의 파송을 기억하게 하는 바,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다. 그리고 이 기념은 설교된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성찬 예배는 말씀의 선포를 포함하고 “말씀 설교와 성찬은 상호보충적이다.”

 

 

 

3)성령 초대로서의 성찬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모든 사역이 성찬 예전에 임재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즉, “성령께서 성찬 예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실제로really 우리에게 임재하신다.” 이 그리스도의 임재야말로 성찬 예식의 핵심인데 성령께서 집례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제정의 말씀에 포함된 약속을 성취시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임재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말씀으로 봉헌된 떡과 포도주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표지가 되며 이 성례전에 참여함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全 그리스도totus Christus’와 현재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교회는 “성화되고 갱신되며 정의와 진리와 일치에로 인도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선교를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아” 우리는 “새로 창조된 생명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게 되는 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본다.”

 

 

 

4)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찬

 

성찬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살아계신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뿐 아니라 믿는 자들 사이의 수평적인 사귐의 관계가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와의 성찬의 사귐은 동시에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사귐이다.”

 

이 성찬 예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게 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그리하여 성찬 예전은 믿는 자들을 세계 역사의 중심 사건에 개입시킨다.

 

 

 

5)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찬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표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의 의미를 갖는다. 즉, 성찬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면서 이 땅 위에 이룩될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역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종말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함을 뜻한다. 즉, 성찬 예전에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화해했고 믿는 성도들 사이에 화해한 교회는 이 세계를 향하여 화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Ⅲ. 평가와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성찬의 어의와 함께 그 성서적 근거로 시작하여 성찬론의 발달 과정을 개괄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화체설과 루터의 성찬 이해, 쯔빙글리가 결코 루터와 화해할 수 없었던 점, 그리고 칼빈의 성찬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고 또 특별히 이 종성 교수의 평가대로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음도 알았다.

 

칼빈이 notae ecclesiae로서 세례와 성찬을 말하였을 때 이 성례전은 본질적으로 교회에 속하는가, 아니면 교회가 유지되고 있는 전통인가 또 교회에서 집행되고 있는 성례전과 교회의 본질 사이에서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성찬의 신학적 바탕은 구약적인 유월절 식사에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성찬을 제정하시고 또 이를 기념하라고 명하신 것으로서 유월절 식사와 성찬 사이의 유비 관계를 통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제의적으로 또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기독교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화체설에 대하여도 중세 전통에서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화체설이 몇몇 신학자들의 책상머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길고 지루한 기독론 논쟁의 부산물로 그 개념의 등장으로부터 용어와 교의로 확정까지 천여년이 걸려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와 구원의 은총과 함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찬은 구원의 수단, 통로로서 반드시 사제에 의하여 집례될 때에만 효력을 가지며 그 신학적 의미는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 사건의 반복적인 희생제사였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바로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성찬 이해와 그 행습에 반대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성례전은 복음 설교에 ‘덧붙여진,’ 신앙의 수단으로 신앙을 강화시키는 외적인 보조수단이다. 여기에서 말씀 설교와 성령의 역사가 강조된다.

 

 

 

본문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Vatican II의 성찬론은 상당히 순화되었고 개혁적인 입장이 가미된 온건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루터, 킬빈, 심지어 쯔빙글리도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그 자체는 인정되고 있지만 그 임재의 방법이 문제인 만큼 이는 대화의 가능성은 있다고 해야겠다. 그것은 오늘의 종교개혁적 관점으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그의 몸과 피를 그리스도의 산 인격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관념을 가진다. 즉,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지 그의 살, 피에서 분리된 죽은 몇 조각이 아닌 것이다. 예전에서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신 인간”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실제적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는 방식은 量적인 방법이 아니고 본질의 방법으로 임재하여 하늘에 계시는 그가 성찬식에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임재함으로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므로 성찬은 하나님의 顯現이 된다.

 

나아가 개혁자들은 성례전을 가시적 말씀verbum visible로 이해하였다. 우리는 이 가시성을 말씀 선포를 보충하는 정도로 알아서는 아니된다.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이라는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 있는 것으로 오히려 교회는 활동적인 표지, signum efficax로서 성례전적이다. 나아가 1982년의 리마에서 작성된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BEM 문서에 나타난 성찬론을 보면서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正으로, 개혁자들을 反으로 하고 BEM text를 합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리마 텍스트가 갖는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성찬 이해를 본 것이다.

 

Vatican II에서 교회를 성례전적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와 같은 성례전적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즉, 교회는 하나의 현실을 지시하고 있는데 그 현실은 인간을 위한 표지로서 활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하여 계시는 은혜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事物Sache로서 활동적인 것이다. 이는 결코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표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사실로서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사귐 속에 있는 의식적인 신앙은 그리스도 자신과 더불어 누리는 실재적이고도 특별한 사귐이므로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영속적인 현재를 의미(포함)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귐”도 우리가 사귀고 있는 그 분의 현재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성례전 안에 계심으로 그는 현재적이다. 그리스도께서 현재하시는 방법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물질 속에 계시지 아니한다. 다시 말하면 물이나 떡 속에 어떤 마술적인 방법으로 현재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기다. 성례전을 기념하는 교회의 예전과 믿음 속에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현재 Realpräsenz라고 말하는 대신에 인격적 현재Personalpräsenz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事物 res, Sache로서 현재적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현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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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찬에 관한 연구, 비교 성찬론      작성자 엔젝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