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D. L. 무디 Dwight Lyman Moody

에반젤(복음) 2020. 11. 19. 10:16

◈D. L.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

 

 

◑관련글

 

무디의 일생

 

드와이트 무디의 생애 D. L. Moody

 

하나님께서는 왜 무디를 쓰셨는가? (1)

 

하나님께서는 왜 무디를 쓰셨는가? (2)

 

크게 쓰인 작은 그릇, 무디

 

혹평 신문기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무디 ...

 

 

◑조각글 모음 여러 설교에서 인용되어진 부분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신다. - D. L. 무디

 

▲1. 먼저 전하면.. 은혜는 따라온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전도를 강조하는 설교를 하니까

한 청년이 찾아와서 말했다.

“목사님! 전도가 중요한 줄 알지만, 먼저 제게 은혜가 있어야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요. 저는 지금 은혜가 떨어졌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말했다.

“그건 핑계야! 불평과 핑계는 영혼을 죽이는 독이네.

은혜가 있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핑계하는 삶에는 은혜가 없어!

전도는 사명이고 명령이야!

먼저 전하면... 은혜는 생기는 법이네.”

 

▲2. 그의 거듭남

무디의 저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디가 1855.04.25.에 킴볼 선생과 요1:12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때에 그는 “내가 죽을 때까지 영혼을 구원하겠습니다.” 라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그의 생의 목표는 전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진실로 영접하게 되면,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게 됩니다.

 

▲3. 시대별 부흥운동의 특징

 

①16세기 중엽 종교개혁: 설교, 믿음 중심

②17세기 중엽 청교도 운동 : 성경중심 신학과 신앙의 확립

③18세기 중엽 : 영적 대각성 운동, ‘내면적 기독교’라는 본질 확립

 

④19세기 중후반 : 신앙부흥을 통한 해외선교운동

19세기의 미국 부흥운동의 주역은 찰스 피니 와 무디였다.

이들에 의한 미국의 부흥 운동의 특징은

개신교의 세계선교의 열기를 가속화시킨 일이다.

 

이들의 신앙부흥운동이, 19세기를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 라 불리는

해외선교부흥운동을 가져왔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 비해 늘 열세였던 개신교 해외선교가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미국과 영국에서 부흥을 주도했던 무디는

외국선교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디의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

많은 해외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이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 되었다.

특히 이것은 19세기 말의 학생자발운동(SVM)의 기폭제가 되어,

대학생 젊은 선교사들 수 만 명이 해외로 나갔다.

 

무디는 1889년 무디성경학교 설립, 많은 전도자를 배출했으며

에드워즈, 피니에 이어 미국의 3차부흥운동(1857~1915)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서회를 설립, 성경과 찬송가, 경건서적의 출판과 배포에도 힘썼다.

 

⑤20세기 초의 특징 : 성령운동

 

▲4. 무디의 부흥운동을 있게 한 찬양운동

미국 (무디의 3차) 대각성의 시대에는 찬양을 통해 부흥이 일어났다.

19세기말에 위대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디의 부흥집회에

찬양가수 생키가 항상 동행해서, 찬양을 인도했다.

 

생키가 이런 말을 했다.

‘무디의 부흥집회의 성공은, 전적으로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시 덕분이었다.’

 

이것은 무디의 설교보다 아마 더 중요했다고 (일면) 말할 수 있는,

무디의 성공적 부흥집회의 매우 큰 원동력이었다.

 

그러니까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시들이,

다시 말해서 당시에 영감어린 찬송가들이

회중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헌신시켰다.

그것이 어느 날은, 설교보다 더 파급효과가 컸다는 뜻이다.

 

(언뜻 들으면 과장처럼 보이는 이 말이 사실일수도 있다.

1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는 여전히 즐겨 부르지만,

무디의 설교를 기억하고 즐겨 낭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5. 학생선교운동을 일으킨 무디

미국이 오늘날의 선교 대국이 된 것은, 19세기 말에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해 점화된 ‘학생자발운동’ 때문이다.

 

이 운동은 매 4년마다 미국 전역의 대학생들이

미국대륙의 중심에 있는 일리노이 주 어바나에 모여(동서에서 오기 쉽게)

선교대회를 이끌었고, (이것을 본받아 한국은 선교한국을 매 2년마다 모인다.)

여기서 약 10만 명의 청년 선교사가 헌신되고, 그 중 2만명이 파송되었다.

 

이 학생자발운동(19세기말~20세기 초)은,

무디의 부흥운동과 같은 기간에, 동시대에 일어났다.

 

사실 무디의 산상집회에 (무디는 여름마다 산상집회/수련회를 열었다)

미국의 학생자발운동의 선구자들이 참석하여,

그 집회에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들에게

‘학생자발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그들에게 즉석에서 ‘자원서 싸인’을 받아냈다.

 

▲6.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찬양의 탄생 배경

미국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무디가, 패니 크로스비 여사에게

개인적인 간증을 해 달라고, 즉석에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좀 주저하다가, 조용히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작사한 찬송가들 중에 아직 발표하지 않은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저 스스로 부르는 찬송이지요. 저는 그 찬송을 제 ‘영혼의 찬송시’라고 부릅니다.

이제 제 ‘영혼의 찬송시’를 여러분들에게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1.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성부의 집에 깰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2. 후일에 장막 같은 몸 무너질 때는 모르나

정녕히 내가 알기는 주 예비하신 집 있네.

 

3. 후일에 석양 가까워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실 때 영원한 안식 얻겠네.

 

4. 그 날을 늘 기다리고 내 등불 밝게 켰다가

주께서 문을 여실 때 이 영혼 들어가겠네. (찬295장)

 

패니 크로스비가 자기 ‘영혼의 찬송시’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내려갈 때마다

무디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청중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에도 무디는, 개인 경건시간에

혼자 오르간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 ‘후일에 생명 그칠 때’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합니다.

 

▲7. 미친 무디

일생에 백만 명을 전도했다는 무디는, 어디에 가든지 전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도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뛰어다녔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미친 무디’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그의 숙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조카 무디는 봄날의 토끼처럼 미쳤다.”

아마 이 말에서 유래(광인 무디)가 생긴듯 합니다.

 

한번은 무디를 찬양으로 동역했던 가수 생키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디 목사님을 (제발 좀) 지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우리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세요!”

 

▲8. 성경말씀을 실천한 무디

위대한 전도자 D. L. 무디의 성경책 곳곳에는

"T & P"라는 표시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Tested and proved의 약자입니다.

즉 말씀대로 자기가 직접 살아 보았더니.. 말씀 그대로 되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자기 삶에 철저히 살아내고자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자세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왜 그동안에 말씀을 많이 듣는데도 말씀의 은혜가 내 속에 없을까요?

실제로 내가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 말씀이 증명proved 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찬송이 지어진 계기

무디 선생이 스코틀랜드 집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한 소녀가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어요.

하나님 앞에, 저 자신을 마음껏 드리며 살고 싶어요."

 

"그렇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리려무나."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말합니다.

"저는 글을 배우지 못해 성경을 읽을 수 없어요. 몸이 약해요.

이런 몸도 받아 주실까요? 가난해서 가진 것이 없는데 받아 주실까요?"

 

그때 무디 전도단은 함께 무릎을 꿇고 소녀와 함께, 소녀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소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세요!"

 

이를 지켜보던 엘리자 헤밀턴(Eliza H. Hamilton) 여사가 시를 써 내려갑니다.

 

"주의 크신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연약한 우리를 받으시옵소서.

약한 대로 모자란 대로, 못난 모습 그대로 주여 받아 주시옵소서"

 

곁에 있던 생키(Ira David Sankey)의 가슴에도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시 피아노를 두드리며, 곡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찬349)

 

이 찬송이 불려지는 곳마다.. 연약했던 사람들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수한 젊은이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는 곡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 때.. 하나님의 쓰임 받게 될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39:4

 

▲10. 무디의 동역자

세계적인 부흥사 D. L. 무디도 혼자 뛴 것이 아닙니다.

찬양인도자였던 쌩키가 있었고

또 그 다음에 신학적으로 무디는 무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당시에 석학이었던 R. A. 토레이, 대천덕 신부의 할아버지 되는 분이지요.

토레이 박사를 모시고 같이 다니면서, 신앙을 세우고 같이 협력했습니다.

 

▲11. 위대한 사람은?

무디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 난다.”고 말합니다.

 

섬기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크게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오히려 으뜸이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2. 그의 겸손

D. L. 무디는 성경을 읽다가

모세의 일생을 세 국면stages으로 나누었어요.

아주 흥미 있게 나누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처음 40년간 모세는 ‘I am somebody’로 살았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줄 착각 하면서 살던 시대였습니다.

 

②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배운 렛슨은 하나입니다.

그걸 무디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I am nobody,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간단한 교훈을 배우는데, 무려 4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40년이 끝난 후에 하나님이 모세보고

‘너 이제 됐어. 이제 겸손해졌구나. 내가 너를 붙들어서 쓰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너무 겸손해진 나머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 이제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정말 못해요.’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의기소침이요, 패배주의죠.

 

③무디는, 모세의 마지막 40년을 가리켜서, 그때 정말 자기의 부족을 알기에

이제는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든 모세,

그걸 무디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I am God's body,’

 

이제 somebody가 아니에요, nobody도 아니에요.

‘I am Gods body,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13. 종의 삶을 실천한 무디

D. L. 무디에 관해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목회자들이, 단체로 미국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열리는 무디의 성경세미나에 대거 참석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 유럽에서는 방 바깥에 구두를 벗어놓으면

홀의 하인들이 밤새 구두를 닦아놓는 그런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손님들이 그들의 방 바깥에 각자 자신들의 구두를 벗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물론 여기에는 미국이고, 홀의 하인들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무디 선생이, 기숙사 복도를 지나가면서

그들의 구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신학생)을 당혹하게 만들지 않아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건물 안에는 목회자수업을 받는 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구두들을 다 모아가지고 그의 방으로 가지고가서는

혼자, 그 유명한 부흥사인 D. L. 무디가

참석자들의 구두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윤을 내어놓았습니다.

 

무디가 한창 구두를 닦는 일에 열중을 하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한 친구가 찾아와서는, 그의 방문을 열고서는

그 광경을 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 그의 그 은밀한 일이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외국방문객들이 자기 방문을 열었을 때에

그들의 구두가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무디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목격했던 그 친구가, 몇몇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봉사자들이 자원해서

은밀히 세미나 기간 내내 그 구두를 다 닦아내었습니다.

 

그 목격자는, 글에서 이 무디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아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디엘 무디를 쓰신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종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위대성의 근간이었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 무디라고 서명하고, 결코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이름 앞에 Rev. 등의 호칭을 쓰지 않았다.)

 

▲14. 성령을 체험한 무디의 고백 (1871년, 34세)

무디 목사님은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큰 사랑과, 능력이 부어지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만큼 사모했든지, 더 큰 능력이 없이는,

살고 싶은 의욕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뉴욕에 갔다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불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는, 전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으며,

초등학교 교육도 마치지 못한 그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교수들이 단에 나와서 무릎 꿇고 헌신한 역사가 일어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날의 경험을, 후에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 날 뉴욕에서, 얼마나 놀라운 날이었든지.. 나는 그 날을 묘사할 수 없다.

나는 그 날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경험은 너무 성스러워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나는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나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으며,

내가 그 분께 그 역사하시는 손길을 멈춰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설교를 계속 했으나, 그 내용은 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역사가 일어나곤 했다.

 

나는 만약 온 세계를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체험을 하기 전에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온 세상 모든 것도, 그 체험에 비하면, 작은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15. 그가 존경하던 신앙 선배는

1867년, 무디는 전도자로서의 명성을 영국에서부터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 순회전도의 발단은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설교자 스펄전(1834-1892)과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1805-1898)를

만나고자 하는 바램이 있어서 영국을 여행하게 된 때부터다.

 

▲16.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헨리 무어하우스 Henry Moorhouse 이다.

"당신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충고를

무디는 기쁘게 받아 들였다. 또한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무디는 하나님이 죄인을 미워하신다고 설교해 오고 있었다.

심판의 복음, 징계의 하나님을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디는, 무어하우스의 조언으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전파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때문이라고,

자신의 인생 여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17. 그가 사망하던 해에 뉴욕시 집회에서 한 말이다. ↓

 

"언젠가는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837년에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1855년 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영접)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겠지만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무디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굴복과,

그에 따른 전도의 열정..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도의 열정.. 이것이 바로 무디의 특징이다.

 

드와이트 무디, 그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그의 설교와 글들 속에서 ‘성공한 부흥사’로서보다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군사’로서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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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미국 부흥 운동의 뿌리가 된 작은 기도회

19세기에 미국에 큰 부흥 운동이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그 부흥 운동의 뿌리를 추적해 보았다.

 

찾고 거슬러 올라가 보았더니

예레미야 램피에르 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뉴욕의 월스트릿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처음에 6명 정도가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서 이 숫자는 20명으로 늘어났다.

또 조금 지나서 4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 기도회가 굉장히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도 모임이 커지자, 챔버스 스트릿버튼 극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거기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다.

 

그런 와중에 미국에 경제공황이 찾아왔다.

그 때 이 극장 정오기도회는 무려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다.

작은 30~40명이 모여서 기도했는데, 그 모임이 자라서 나중에 3천명이 모였다.

 

여기 뉴욕에서 뜨겁게 기도했던 사람들이 북쪽 보스톤으로 가서 기도운동을 벌였다.

남쪽 필라델피아 워싱턴D.C.로 흩어져서 거기서도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서쪽으로는 시카고로 뻗어나갔다. (동쪽은 대서양)

시카고에서도 뉴욕과 똑같이 (메트로폴리탄) 극장을 빌려서 기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거기 시카고 기도운동에 참석했던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드와이트 무디였다.

그 기도의 불길이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무디 에게까지 번져,

그의 구령의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 곳에서 은혜 받고 변화 받은 무디는, 한 시대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그를 통해 19세기 미국 전역에 부흥 운동이 계속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런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출발이 어디인가?

뉴욕의 월스트릿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영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작은 기도회에 소망을 건다.

작은 기도회가 자라서, 나중에 큰 나무가 되고, 큰 성령의 불길로 타오를 것을 내다본다.

 

▲2. 명언 만들기 대회의 당선작

D. L. 무디는, 노스필드(MA) 신학생들에게 언젠가 재미있는 게임을 한번 했습니다.

5백 불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격언 곧 명언 만들기 대회를 했습니다.

거기서 1등을 하고 5백 불을 탄 명언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하나님께 장미를 가시에 넣었다고 불평하지 말고,

가시에 장미를 넣었다고 감사해야 한다.”

 

장미(축복)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어서 불평할 것인가요?

아니면 가시(고난) 속에 장미꽃을 주셔서 감사할 것인가요?

 

▲3. 시카고 화재 일화

1871년 미국 시카고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소가 외양간에서 난로를 건드려 쓰러뜨린 것이 화재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무디 목사님이 선풍적으로 시카고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잿더미로 변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도시 성도가 무디 목사님을 위로차 찾아 와서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으셨군요.”

 

그 때 무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한 분만은 남아 있지요. 그 분이 다 하실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불타지 아니한 오직 예수님을 모시고

전보다 더 큰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환경적으로 망해도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한 같은 해 1871년에

(그 전인지, 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디는 뉴욕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성령세례'를 체험합니다...

 

▲4. 자전거 일화

제(어느 목회자)가 무디 목사님 설교를 읽다가 너무나 재미있는 내용을 읽었는데,

그 당시에 자전거가 처음 나왔나 본데,

그 자전거 타는 재미가 신앙생활을 방해하니까,

절대로 자전거를 사서도 안 되고,

즐겨도 안 된다고 권유하시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5. 3차대각성운동의 주역, 무디

 

1차대각성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 중심이고, (18세기 중반)

 

2차대각성운동(1795~1835) - 찰스 피니, 남북전쟁, 노예해방

19세기 초반은

미국 전역에 복음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이후에 미국의 남북통일이 결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 : 1861~1865

이 시기는 찰스 피니(1792~1875)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무디는 20대 중반, 아직 젊은 청년 시절이었습니다.

 

3차대각성운동 - 디엘 무디,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 부상

그 다음에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부흥운동은

디엘 무디나 빌리 선데이 같은 분들이 일으켜서

미국이 오늘날 세계 앞에 엄청난 이런 능력 있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세계선교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양되면서

세계 정치적 주도권 역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차츰 이양됩니다.

 

그런데 무디의 부흥운동의 특징을 가만히 보면,

이때부터 <대규모 대형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대형집회는, 무디가 그 기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연구할 제목은,

청교도시대부터~ 찰스 피니까지는 <회개, 회심conversion>에 의한 부흥이었다면,

 

그 후로 무디 때부터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여들었으나,

과거처럼 <회개, 회심>에 의한 부흥이기 보다는

(그런 역사도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만, 더 확연히 드러나는 현상적 특징은)

 

-찬양/헌신에 의한 부흥(이것도 중요합니다만)

-종말사상에 의한 부흥(19세기말에 종말사상이 대유행했음, 이것도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의한 부흥(무디는 한 마디로 ‘전도자’였습니다.)

 

거기에 좀 약화되었던 부분을 꼭 지적하자면 <회개, 회심>에 의한 부흥입니다.

 

그런데 무디 이후로, 20세기, 21세기 오늘날까지

이런 (무디식) 부흥운동의 흐름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대형집회로, 사람들은 많이 모이지만.. <회개, 회심>의 역사는.. 약화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