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재 목사의 하나님 나라2 (하나님의 나라와 고난) | |2008.12.10 13:45 | ▷ 성경 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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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고난(눅 9:18-27)
최낙재 목사(강변교회)
앞에서 천국의 기본적인 개념과 천국이 이미 왔고 또 오리라는 그 성취에 있어서 이중성이 있음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천국이 세상 끝 날까지 ‘어떤 모양으로 진행하는가?’를 생각해 보며, 따라서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다.
아직은 고난 가운데 놓여진 하나님의 나라
‘구약에서 예언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도래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새 질서가 들어서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함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의롭고 복된 그 영원한 나라가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그 나라 백성들은 사탄과 죄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아픔과 괴로움과 슬픈 현실을 날마다 눈으로 보아야 한다’하는 것인데, 이것은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포착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않을수록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로서, 이것이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어 놓으신 현실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드러나게 한다. 아무도 어느 누구든지 그것을 들을 때, 그것이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에 누가 일부러 그렇게 고안해 낼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지 않는 그런 일을 이루어 놓으시고, 그런 현실을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가운데서 그것을 받고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구약에서 예언했던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세상에는 없던 독특한 역사 철학이었으며 특이한 종말론이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관은 이 세상이 춘하추동의 반복의 모습을 따라 끝없이 돌고 돌아 목적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했고, 과거의 황금 시대를 동경하는 역사관인데 비하여, 구약은 앞을 내다보았고, 역사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비교컨대 원과 선으로 표시가 되겠다.
여기에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역사관과 종말론이 보다 더 강도를 띠게 되었다. 이제 ‘때가 찼고 고대했던 그 나라와 그 시대가 왔다’고 할 때, 그 모든 소망과 기대가 곧 모두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 말씀에서 우리는 시대 감각을 얻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시점에 이르렀는지 깨닫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천기는 분별해도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신다(마 16:1-4). 이미 현저한 표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에서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읽을 줄 모르고 교만한 마음으로 더욱 큰 이적을 신임장으로 내놓으라고 했을 때, 더 줄 것이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이미 베푼 동질의 이적과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표적을 보고도 이 세상의 역사가 어느 시점을 달리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불신이며 악이라고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했고, 또 오게 하려 하였을 때 사람은 마땅히 그 큰 사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고 합당치 못한 것을 회개하고 그 나라를 환영하며 믿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충만히 성취되지는 않은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생각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왔는가? 예수님의 활동, 곧 그 말씀으로 가르치신 일과 행동으로 이적을 베푸신 일을 통하여 왔다. 이 두 가지 모두 사람이 이를 이룰 수 없고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권세의 능력이었다. 구약에서 대대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하던 진리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순전히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은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고 성취의 전부가 아니며, 더 이룰 것이 없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었다. 이적을 놓고 생각해 보더라도 예수께서 많은 병자, 불구자들을 고치셨으나 세상의 모든 병자를 다 고친 것이 아니요, 천국 백성 모두를 고친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그들이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신 것도 아니었다. 죽은 자를 살리셨으나 몇 사람만 표본으로 살리셨고, 그들은 때가 되면 다시 죽어 땅에 묻혔다. 그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픈 것과 죽음이 없다는 것을 맛보게 해 준 것이요, 또 미리 나타낸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나 다 건강하게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 날을 미리 조금 보여 준 것일 뿐이었다. 이 큰 날이 이르기까지 이적은 항상 표적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이적이 일어났다 하면 그것이 천국 사상과 어떤 관련을 가졌는지, 단순히 놀라게 하여 인기를 모으려는 것인지 분별해야 하며(막 1:38 참고), 또 그리고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우선권을 두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여 그것의 참과 거짓 기적 여부를 분간해야 할 것이다.
강력하게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처럼 왔고, 또 오리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성격들을 알아야 그 백성으로서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천국을 이모저모로 가르치셨다.
첫째, 겨자씨의 비유를 보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천국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 규모가 작으나 장차 클 것이라 함을 가르친다. 즉 성장해 나아갈 것이다. 다니엘 2:34에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라고 한 그 돌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팔레스타인 한 구석에서 규모가 매우 작은 존재로 천국이 출발했으나 마침내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시편 2:7-9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둘째, 마가복음 4:26-29에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어떻게 자라는 줄 모르고 자라는 씨의 비유라 할 수 있겠다.
시편 2편은 구약의 용어로 썼다. 당시에는 국가가 교회였기 때문이다. 칼을 썼던 시대였다. 그러나 천국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칼을 쓰지는 않는다. 전쟁, 쿠데타, 소란스럽게 사회 세력을 이용하여 정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미해서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무시할 만한 것이다. 현실적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여 나아가셨다. 로마의 학정을 모르셔서 그랬는가? 헤롯의 불의를 묵인하셔서 그랬는가? 예수께서는 그 따르는 민중을 선동하여 데모 한 번 안 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의 세력은 무섭고 강력했으며 헤롯과 로마는 무력하였다. 잠잠한 듯한 하나님의 나라는 커 갔으며 세상을 채워 갔다.
하나님의 나라가 헤롯 왕국을 복음화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고, 또 로마를 교화하여 지상 천국을 실현시키지는 않았다. 이 세상의 악을 다 퇴치한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빛으로서 어두움을 몰아냈으며, 그 영역을 자꾸 넓혀 갔고, 두 세력이 나란히 가다가 마침내 추수 때가 되면 낫을 댈 때가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별다른 하나님의 행동이 가해질 때 종국적으로 그 악의 세력이 궤멸될 것을 가르친다.
그러기까지는 칼과 총, 정치 세력, 사회 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기를 삼아 계속 정복하여 나아갈 것이다. 다음으로 누룩의 비유는(마 13:13) 하나님의 나라가 영향력을 발휘할 때, 그 영향력의 강도가 매우 강력할 것을 보여 준다. 천국 복음이 세상을 복음화하지 못하고 결국 그 날에 심판으로만 악을 궤멸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냐? 아니라! 매우 강력하여 생활의 구석구석을 변화시킨다. 속속들이 변화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그 성격이 세상 나라의 것과는 다르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사회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데모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비굴해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너무 약하고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부정 부패 물러가라’하고 외친다 해서 물러갈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렇게 외치는 내 속의 부정 부패를 물러가게 하는 근본적인 일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어떤 청년을 경찰이 잡아서 ‘너 왜 젊은 녀석이 도둑질하느냐?’하니까, 그의 대답이 ‘요새 도둑질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했다는 것이다. 넥타이 찬 도둑을 흔히 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정신차리게 하는 길은 교회가 빛을 비추는 것이다. 교회의 성결, 교회의 정화가 사회 정화보다 훨씬 급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돌아다 볼 때 다들 간교하게 큰 도적질을 하니까 자기 역시 그런 정도의 도적질을 하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그런 사람 앞에 사회는 어떠할지라도 교회가 밝게 빛을 비추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혹, 그 사람이 회개하여 믿는 사람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런 뻔뻔스러운 말은 하지 않고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은 알 것이다.
그런 일은 누가 할 수 있느냐? 교회가 강력하게 빛을 비추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노예 제도 철폐를 세상에 외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오직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게 바울이 감옥에서 낳은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으라고 하였다. 오네시모에게는 주인에게 돌아가서 충성하고 처분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바울은 먼저 교회 내에서 세상적 생각을 천국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였다. 빌레몬서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간절함과 은근함으로 인간의 고귀함과 천국에서의 만민 평등함을 깨우쳐 줌으로써 노예 제도가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예컨대, 미국 남북 전쟁 후 해방된 노예가 북부에서 냉대받고 굶어 죽게 되어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와 온정을 받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복음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지만 철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인류 문화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희랍의 문화는 노예 제도 위에서 건설되었으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 제도는 철폐되었다. 우리의 정복의 무기는 순전히 하나님에게서 받은 무기이다. 고린도후서 10:4,5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 하였다. 대포보다도 핵무기보다도 강력한 사상을 정복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 높아진 마음을 낮추는 그런 강력한 무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업에는 고난과 희생이 뒤따름
이러한 방식의 성장 과정을 취하는 천국은 고난과 희생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과 희생의 현상은 항상 천국에 따라오게 마련이다. 가장 강력한 천국이 고난을 당하는 현상은 때때로 일어나며, 따라서 설명을 요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원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책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비웃었으며, 군인들도 놀리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 개념과 메시야관에 서서 이 모순된 현상을 설명하라고 한다. 세상의 지혜는 자기 한계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항상 하나님 나라의 현상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주 예수께 대하여 이렇게 요구할 뿐 아니라, 주의 교회에 대하여는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악인의 득의와 자랑이 숨겨 있다. ‘죄악된 생활을 밀고 나갈지라도 그 죄의 세력이 꺾이지도 않고 심판을 받지도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잘되고 번영한다’라는 속생각이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가 핍박과 고난을 받는 현상이 일어난다. ‘사람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옛 성도는 탄식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영광을 드러내신 이래로, 세상의 지혜와 악의 세력도 거기에 맞서서 ‘그러면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하라’(사 5:19)고 하면서 현실적으로 자기의 위치가 더욱 공고함을 자랑하고 있다.
세상이 불신의 입을 벌려 교회를 향하여 현실적인 우위성을 보이라고 도전해 올 뿐 아니라, 믿는 자들도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서 탄식하며 ‘어서 이 현실을 벗어났으면!’하는 기다림과 바람이 있다. 로마서 8:22,21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3절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신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주 예수께서 병을 낫게 하시고, 불구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바다도 평온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매,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도 없고,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씻기시는데, 믿는 자라도 때로는 평생토록 병상에 누워 지내야 하고 가장을 잃어 땅에 묻고 슬픔을 겪어야 하며, 환경의 오염을 먹고 마시는 것과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직은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우리들과 함께 고대한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을 입은, 자타가 공인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기까지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있으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요 18:36에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다는 것으로 질문에 대답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고난을 겪으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먼저 주께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결정지어 놓으셨다.
주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심
제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나타날 때,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주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할 일들을 말씀하셨다.
첫째,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영광의 메시야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함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면, 인자가 고난의 종으로서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께서는 고난의 종의 길을 즐거이 걸어가셨다.
둘째, 또 한 가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을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씨로 인하여 복을 얻도록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그렇게 하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를 부활 후에 종합하여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4:46,47에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그러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어떤 기간인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복음 전파가 이 시대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대, 은혜 받을 때를 마련하셨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함은 바로 이 때를 가리킨다.
교회가 받은 사명을 완수함에는 고난이 따르나 그 결과에는 영광이 기다림
하나님의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다. 복음 전파는 교회가 땅 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의 손발이 되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으나 세상의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거스르는 죄악의 세대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복음을 전하려면 불신과 몰이해와 조소와 핍박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다. 주께서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따르는 자들의 고난을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9:23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한 번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셨으나, 땅에 있는 그의 지체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지고 아직도 견디어야 할 고난이 있다. 그리하여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하고 있다.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다. 죄인들의 속죄를 위한 고난을 그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다. 또다시 우리의 속죄를 위해 치를 어떤 고난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주의 고난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속죄의 의미를 떠나서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신 것과 같이, 그의 지체가 땅에 핍박을 받을 때 하늘의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겪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지만, 남은 고난이 있다.
신자와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만큼 떨어졌으나, 또한 신비한 연합으로 연합되었으므로 신자가 신자로서 받는 고난은 개인적인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광에도 참예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결어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고난에 참예하자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과정에서 이 시대를 이렇게 정하셨다.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로, 구원의 날이다. 이 시기는 천국이 겨자씨처럼 성장하는 시기이다.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고 자라는 씨와 같이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정복하여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시기이다. 참으로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이 세상을 정복하여가고, 이 세상을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그러한 시기로, 천국이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시기로 정하셨다. 또한 누룩과 같이 영향력을 속속들이 인간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그런 기간으로 정하셨다. 그러기에 이 시대는 또한 고난의 시대이다. 주께서 말구유에 오신 때와 영광의 주로 오시는 때, 그 사이를 고난의 기간으로 정하셨다. 그러기에 이 시대는 고난의 시대이다.
이제 잠깐 후면 고난이 지나가고 영광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이 끝나서 다시는 그 고난에 참예할 기회도 없고, 따라서 영광이 나타날 때에 함께 거기서 참예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도 없을 것이다. 로마서 8:17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고난을 받도록 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이 기간에 온 땅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요, 구원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널리 진실되게 전파되도록 힘쓰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해야 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면서 큰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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