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와 순종(사 53:7-9)
최낙재 목사(강변교회)
예수께서 유대땅과 갈릴리에 오신 때부터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오실 때까지, 그 기간 동안에 천국은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듯이 세상을 정복하고 채우리라. 그리고 그 정복의 모습과 방법은 칼이나 총, 무기와 군대, 물질과 사람의 수 같은 것에 의존하는 세상의 방법을 쓰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으로, 곧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무기로 하기 때문에 ‘언제 자라는지 모르게, 그러나 싹이 나고 이삭이 나오고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히게 자라나는 씨’와 같이 총소리나 혁명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또 그 힘은 강력하여 누룩이 곡식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듯이 세상을 속속들이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함을 생각하였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천국이 이런 진행 과정을 밟아 가는 것은 그 나라의 ‘주’께서 앞장서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그 나라의 성격을 결정지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걸어가시고 그 백성은 그 뒤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고난과 희생의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고생스럽고 괴롭다는 점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인 요소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총괄적으로 묘사하는 빌립보서 2:6 이하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여 복종이란 말로 표시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로마서 5:17 이하에서도 이 사실을 확증한다. 18절의 의의 한 행동, 19절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여 천국을 이루는 근원, 복의 근원이 된 것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는 한 사람의 범죄(17절), 한 범죄(18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19절)을 여기에 대조시켜서, 창세초의 아담의 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까지 전 역사를 한눈에 보이게 한다. 주목할 점은 첫째, 인류의 시조와 대표로서의 아담의 한 행동이 자기에게 딸린 모든 인류를 이끌고 파멸과 고생의 길로 떨어진 것 같이, 은혜로 세우시는 천국의 머리이신 예수의 한 행동이 그 모든 백성을 평안과 기쁨으로 이끌어 올리신다 함이요, 둘째, 아담의 한 행동을 범죄와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한 데 반하여, 예수의 한 행동을 순종이라고 묘사하였다. 곧, 순종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의 운명과 생사와 행불행, 또 천국의 성취에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대하여 공부할 때, 예수님이 순종하신 의의를 깊이 음미해야 한다. 동시에 역사의 시초에 있었던 일, 아담의 불순종을 그 곁에 견줄 때 그 의의는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리신 명령의 의미
하나님께서 빛과(첫째 날) 하늘과(둘째 날) 바다와 땅을 지으시고 땅 위에 풀과 채소와 나무를 나게 하시고(세째 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을 두시고(네째 날), 물에서는 고기와 여러 생물이 번성하고 공중에서는 새가 날게 하셨다(다섯째 날). 마지막 날에는 땅에 육축과 기는 동물과 짐승들을 만드시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두 사람을 하나님의 동산에 두셨다. 거기에는 나무가 있었고, 강이 흘렀고, 보석이 있었고, 짐승과 새들도 있었다. 아담은 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동산을 지키고 거기 있는 땅과 고기와 새와 생물들을 다스리며, 마음대로 여러 과실을 먹으며 살게 하였다.
아담에게는 큰 자유가 있었고 큰 권세가 주어졌다. 다만 한 가지 제약이 있었다. 창세기 2:16,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 명령은 사람의 위치를 결정하여 주는 말씀이었으며, 천지를 지으신 뜻과 인생을 내신 목적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사람은 만물의 으뜸으로 세움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말도 하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자유와 특권은 자기가 표준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아 그 자유와 특권은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귀하게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신 후에 그에게 선악을 분별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원하여 이 나무를 두시고 ‘거기서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쉽고 간단한 명령에 순종시킴으로써 선행을 연습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그 반대 개념으로 물리침으로써 자연히 배울 것이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율적인 존재로 전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순종하며 살도록 하심은 매우 자연스럽고 마땅한 교훈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바른 이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하여는 여러 오해들이 있는데, 바로 알아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그 나무가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성질, 그 자체를 구유한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이다. 이것은 맨 처음 뱀이 여자에게 가르친 거짓말이었다. 창세기 3:5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에는 두 가지 거짓이 숨겨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의 그 태어난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향상시키려는 사랑을 가진 하나님을 시기하는 하나님으로, 혹은 사람의 특권과 자유를 제한시키려 하는 하나님으로 인식시키려는 점이다. 그러나 시기심이란 피조물 간에는 있을 수 있겠지만, 창조주에게 시기심을 돌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람을 없는 데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 아니신가? 또 사람의 특권과 자유를 제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아예 목석으로, 혹은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짐승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유 의사를 발휘하는 존재로 만드셨을까? 모든 일을 마음의 원대로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사람들에게 선하심과 사랑을 베푸셔서 자유의지를 가진 고귀한 피조물로 지으셔서 만물 위에 으뜸으로 세우셨다면 시기심이나 권리를 억압하는 압제를 하나님께 돌릴 수 없을 것이다. 또 이 동산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하나님의 동산이다. 만일 시기심이나 권리를 제하려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다면 왜 처음부터 그 나무를 거기에 두셨을까? 왜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시지 않았을까?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을 먹어서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술에서나 생각할 수 있다. 선악은 개념의 성질상 그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 그것을 알게 된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이론이 창세기 3:22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처럼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나아간 것을 말하는 것이요, 그러한 자는 영생이 아니라 사망에 해당되므로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생각은 뱀이 교사하기 이전에 이미 하와에게 어느 정도 있었던 듯 하다. 창세기 3:3에서 하와는 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변하였다. ‘만지지도 말라’는 없는 말을 보탤만큼 조심한 것을 보면, 그 나무 자체가 매우 위험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알았던 듯 하다.
그러나, 그 나무는 아무런 위험한 요소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가서 만져도 괜찮고, 그들은 어린아이 시절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들이지만, 아이들의 심정이 되어서 타고 올라가 흔들었어도 나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으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그릇된 생각이 아직도 세상에, 교회에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은 이와 비슷한 생각인데, ‘사람이 이 과실을 먹음으로써 인지가 개발되어 동물 이상으로 되었고, 인류 문화를 창건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10여 년 전 라이프지에서 창세기 사실을 화보특집으로 내고 이렇게 선전했다. ‘최초의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판도라의 상자처럼 인간의 고뇌와 제악이 연달아 나왔지만, 그 대가로 얻은 소득은 인류의 문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을 할 수 있었고, 여러 짐승의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었다. 이름을 짓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 가만히 앉아서 그냥 이름만 부르면 되는 간단한 것이 아니냐고 하겠으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름을 지으려면 여러 짐승들의 특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 번 부른 이름은 반드시 기억하여 다음에도 꼭 그렇게 불러야 한다. 예컨대, 소면 소, 개면 개라고 한 번 이름을 불렀으면 그것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다가 처음과 같이 소, 개라고 불러야지, 처음에는 ‘소’, ‘개’라고 하고 나중에는 ‘망아지’, ‘노루’라고 하면 아니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고도의 기능이며, 저급한 단계에선 아니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 성질을 잘 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으며, 만물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다스릴 기능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문화 발달의 잠재력이 이미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
앞에서 생각한바 그 나무의 과실을 못 먹게 한 것은 인색한 것이 아닌가? 또 그것은 사람에게 무리한 짐을 지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마음대로 먹어라’고 하셨다. 즉, 그 한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과연 짐은 짐이다. 그러나 너무나 가벼운 짐이다. 사람은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아무 제약도 없이 살 수 있는 절대 자유자가 아니었다. 이 말씀으로 자기의 한계와 위치를 알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리하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지 않고, 매우 간단한 명령을 내리셨다. 간단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매우 지혜로우신 명령이요, 방법이었다. 그 나무가 다른 나무와 외견상, 또는 본질상 다른 아무 것이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말씀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먹는 것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담은 선하게 흠없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미 도덕적으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이미 구비된 도덕적 판단 기준만으로는 다른 나무에서는 따먹어도 이 나무에서는 따먹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그 명령 이전에는 내릴 수 없었다. 그가 그 나무에서 따먹지 않으려면 다른 아무 이유가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한 가지 이유로만 그러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이 언제나 이런 기본적인 행동 기준을 갖기를 하나님은 원래부터 바라셨다. 실은 아담을 통하여 이런 원칙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것이 창조시의 뜻하신 바였다. 아담이 자기도 그 명령은 지키고 자기 아내도 지키게 가르치며, 자녀간에 낳으면 그들에게도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그 원칙하에서 천하 만물을 다스렸더라면 하나님이 높임을 받고 온 천지에 하나님의 뜻이 가득하게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뜻을 아담은 져버렸고, 그래서 뒤따라 온 것은 수치와 고생과 파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하나님 나라
이러한 배경을 가진 역사의 무대 위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임명을 받고 나타나셨다.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인준의 말씀이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메시야임을 인정하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곧 이어서 적대국의 두목인 사탄이 나타나서 시험을 하였다. 한 번 겨루어 보자. 이제 그곳은 에덴 동산처럼 살기 좋은 분위기가 아니고 광야였다. 음식이 많은 가운데 한 가지 무엇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굶주린 가운데 소유한 메시야의 능력으로 간단히 먹을 것을 만들어 먹으라’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런 제의를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은 그 나라를 세우시는 메시야의 모든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며,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라고 계시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시고, 그 길로 나가셨다. 그는 자기의 생존 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대로 해결하고 처리하지 않고 오직 보내신 분이 정하여 주신 그 길로 가겠다는 태도를 천명하였다.
이렇게 순종으로 출발하신 그 길을 십자가에서 마치셨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뭇 사람이 요구하고 대들었으나 주님께서는 잠잠하셨다. 이사야 53:7-9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잠잠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비겁과 게으름의 잠잠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잠잠함이었고, 대항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잠잠함이었다. 이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탄생하고 세워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이 순종의 은혜를 힘입어 사죄를 받고 그 나라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그 분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원래 에덴 동산에서 계획하신 대로 순종의 성격을 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신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이 큰 은혜를 받는 길은 믿음이다. 그런데 이 말은 믿음만 있으면 굴레 벗은 말처럼 무제한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항상 순종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로마서 1:5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16:25,26에는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라고 하였다.
매우 복잡한 문장이다. 관계절이 많이 붙은 문장이라서 한참 들여다보아야 알 만한데 그 골자는, 복음은 비밀의 계시로 되었고, 이 비밀의 계시, 곧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난 계시는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려고 계시된 것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전서 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전할 때 듣고 믿은 사람인데, 여기서 진리를 순종했다고 표시했다. 믿음과 순종을 같은 의미로 알고 쓴 것이다. 베드로전서 1:14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으로서) 이전 알지 못하던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다. 여기서 ‘처럼’이란 말은 -아닌데도 -체하는 거짓 태도에 쓰이는 말로서, 불신자가 아닌 신자인데도 불신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할 수 있다. 또한, ‘무엇 무엇으로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이니까, ‘순종하는 자로서 이렇게 해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순종하는 자식’이라고 표시했다.
순종없는 믿음의 무익성과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
믿음이 순종을 수반하지 않을 때 믿음이라고는 하나 믿음이 나니 것, 즉 빌리비즘(Believism ; 기형적인 신앙주의)이나 반법주의(反法主義, Antinomianism)에 빠지고 만다. 도덕 전체를 폐기하여 버리는 도덕폐기론은 믿음이 아니다. 여기에 율법과 은혜의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율법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율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어겼을 때는 죄를 깨닫게 하고 책망하고 정리하며, 처벌하고 규제도 하며, 그래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가도록 하는 엄격한 선생 노릇을 하지만, 죄인을 용서하고 힘을 주고 붙들어 세워서 지키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미 타락한 죄인에게 구원을 주는 데는 무익하다. 로마서 8:3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율법을 연약하다, 무력하다고 하고 있는데, 문맥을 보면 죄인을 일으켜서 새롭게 하기에는 율법은 도무지 힘이 없다, 손을 쓸 수 없다는 뜻이다. 로마서 9:30-32에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5:4에 ‘율법 안에서(혹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하였다. 무익하고 무능한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알 때, 은혜의 길, 살 길을 놓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로마서 3:20에도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여, 율법에 의지하지 말 것을 바울 사도는 강력히 가르쳤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선지자들이 경고했고, 바울이 가르쳤으나 그들은 계속하여 율법을 의지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어떠한가?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시대에 개혁자들이 외쳤어도 카톨릭은 여전히 율법을 의지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신의 가능성, 자기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점, 그리고 자기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며, 무능한 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결부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몰이해,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과 결부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옛날 이야기, 바울 때의 이야기, 루터 때의 이야기 등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요, 따라서 우리도 수시로 이 점에 대하여, 즉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그 은혜를 의지하느냐? 아니면, 내가 아직도 율법을 의지하고 내 행위를 의지하느냐?하는 점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구원을 주는 데 무익하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 것이다. 일단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가 새 생활을 시작할 때, 순종의 생활을 하려 할 때는 율법이 꼭 필요하다. 율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가르쳐 준다. 시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율법의 제 3의 용도로 보겠다. 로마서 3:31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세운다는 이 큰 진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성신을 주시고 성신을 좇아 살아가라고 하신 사실과 함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의해야 할 진리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신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고, 또 바울 사도의 가르친 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신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는 사람은 다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되고 성신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위하여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신의 은혜를 비치하여 놓으셨다.
성신께서는 무지하고 연약하며, 하나님에게서 떠나 죽어 있는 죄인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롬 8:15, 갈 4:6),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고전 2:12), 진리를 깊이 깨달아 나아가게 하시고(요 16:13),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고 붙들어 주신다(롬 8:14). 이와 같이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성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게 되고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어 율법의 요구하는 바가 그 생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롬 8:4). 이와 같이 은혜와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는 믿음이 순종이 이르게 함을 더욱 확증한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그 백성인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과, 예수께서는 이미 이것을 충실히 하셨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가지 덧붙여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순종은 세상의 악에 대하여는 자기 스스로의 손을 들어 심판을 행사하지 않고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전서 2:22-24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수개 사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의 세력을 꺾고 모든 군대를 치실 법도 하셨으나, 잠잠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잠잠히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동시에 공의의 심판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스스로 행사하지 않으신 것이다.
결어
다윗의 순종과 그보다 더 순종해야 할 우리들
이미 여러 면에서 이 메시야를 표상했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26:8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라고 하였다. 애매하게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사울이 바로 눈 앞에 잠들어 있음과, 수하 장군들이 한 칼에 죽이자고 할 때, 만일 그렇게 하면 자기의 고생도 그치고 백성도 속히 평안을 누리리라고 실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나, 사무엘상 26:9-11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는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라고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었다.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사울이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고, 자기가 애매하게 고생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갔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공리적인 면에서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보더라도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시기심 때문에 자기를 쫓아다니므로 얼마나 억울하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른다. 모압으로 가기도 하며 전전긍긍했다. 실리만 생각하면 한칼에 처치하겠지만, 일단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 생각하여 처치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더 고생하는 길을 택하여 도망다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자기의 결백성과 의를 드러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다. 우리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었다. 다윗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빛이 찬란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천년 전에 산 사람이다. 그때에 받은 희미한 계시로써 이와 같이 앞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따라 살았다면, 이 충만한 빛을 받고 주께서 앞서 가시고 그대로 따라오라는 모범을 보는 우리로서는 다윗보다 열 배, 백 배 더 충실히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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