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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천국)

에반젤(복음) 2020. 10. 18. 17:35

‘하늘’(천국)

의인의 장래 상태를 가리키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하늘’이다. 하늘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Shamayim and ouranos)는 성경에서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그 첫째는 우주론적이다. 하늘과 땅의 표현은 전 우주를 가리키는데 쓰였다. 창조의 설명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창 1:1)고 하였다.
둘째, 하늘은 하나님에 대한 사실상의 동의어이다. 그 중에는 아버지에게 한 탕자 아들의 고백이 있는데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한다(눅 15:18, 21).
하늘이란 말의 세 번째 의미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의 처소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그는 자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마 5:16, 45; 6:1; 7:11; 18:4)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7:21; 10:32, 33; 12:50; 16:17; 18:10, 19).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다고 하였다(요 3:13, 31; 6:42, 51). 천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고(마 28:2; 눅 22:43) 하늘로 올라갔다(눅 2:15). 그들은 하늘에서 산다(막 13:32).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뵙는다(마 18:10).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수행한다(마 6:10). 그들은 심지어 하늘의 천군으로 묘사된다(눅 2:13).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은 하늘에서부터이다(살전 1:10; 4:16; 살후 1:7). 그는 신자들을 위한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하늘로 가셨다(요 14:2-3).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늘은 분명하게 신자들을 위해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하늘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천국의 본질
흔히 천국에 대한 인기있는 견해는 육체적 쾌락의 장소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바랐던 모든 것이 최고의 정도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지상생활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하늘에 대한 조망은 하나님의 임재로 하늘의 기본적 본질을 보는 것이다. 그의 임재로부터 하늘의 모든 축복이 따라온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 임재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고 하였다.
처음으로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뵙고 알게 될 것이다(요일 3:2). 천국은 역시 모든 악의 제거로 특성지어 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하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이런 고난만 아니라 바로 악의 원천, 우리를 시험하여 죄를 짓게 하는 자까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계 20:10).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흠이 없으신 어린양의 임재는 하늘에는 죄나 혹은 어떤 종류의 악도 없게 될 것을 의미한다.
영광이 하나님의 바로 본성이기 때문에 하늘은 큰 영광의 장소일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선포에는 이 말씀으로 수반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리스도의 재림은 큰 기쁨이 될 것이며(민 24:30)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마 25:31). 하늘의 찬란한 빛에 대한 이메이지는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한 위대함, 탁월함, 그리고 아름다움의 장소일 것을 묘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새예루살렘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값진 보석으로 장식되었다고 기록하였다(계 21:18-21).
천국에는 새예루살렘을 밝힐 해나 달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천국의 빛이며 천국의 등이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계 21:33; 참고, 22:5).

천국에서 우리의 삶 : 쉼, 예배 그리고 섬김
천국에 간 신자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한 성경이 없다. 그러나 장래의 삶에 대해서 몇몇 구절들이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일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의 천국에서의 삶은 안식이 될 것이다. 히브리어로 사용된 이 말 안식은 단지 활동을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중요한 지위의 목표에 도달한 경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약속된 땅의 안식으로 가는 노정으로 광야를 통한 순례자에 대한 잦은 언급이 있다(히 3:11, 18). 비슷한 안식이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마 4:9-11). 그러므로 천국은 신자의 순례의 완성이 될 것이며 육신, 세상 그리고 마귀를 대적한 투쟁의 종말이 될 것이다.
천국에서 할 일이 있을 것이나 그것은 반대하는 세력을 대항하는 싸움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국에서의 생활의 다른 면은 예배이며 그 생생한 표현은 계시록 19장에서 발견된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계 19:1-4).
역시 천국에서는 분명히 섬김의 요인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요단강을 건너 유대지방에 계셨을때 그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와 함께 심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참고, 눅 22:28-30). 우리는 마태복음 25:14-30에서 청지기 비유를 기억한다. 거기서 성실하게 일한 자를 위한 상급은 일을 위한 위대한 기회이다. 그 비유가 종말론적 장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기 지상에서 성실하게 일한 자를 위한 상급은 천국에서 일이 있을 것을 가리킬 것이다. 역시 계시록 22:3은 우리에게 어린양이 그의 종들에게 경배받게 되실 것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천국에는 신자들 가운데 교제의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또 의인의 영들이 완전해 진다는 언급은 천국이 완전한 영적인 장소임을 의미한다.

천국에 관한 문제들
천국이 하나의 장소이냐 그렇지 않으면 상태이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한 편으로 천국의 주된 특징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이 공간을 점유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우주의 특징이다. 이는 천국이 장소이기 보다 하나의 상태 영적인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 편 우리는 어떤 형태의 몸을 지닐 것이다(비록 그것들이 영적인 몸일지라도) 그리고 예수님은 아마도 지속적으로 장소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요인과 마찬가지로 영화된 몸을 지니실 것이다. 여기 더해서 하늘과 땅에 대한 병열의 언급들은 지구와 같이 하늘도 반드시 장소적일 것이다. 이런 언급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며’(마 6:9-10)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천국은 다른 영역이며 다른 실재의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천국을 가장 안전하게 말한다면 그 곳은 장소이며 상태 모두일 것이며 주로 상태일 것이다. 천국의 구별된 표지는 하나의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축복, 죄없음, 기쁨 그리고 평화의 상태이다. 따라서 천국에서의 삶은 우리의 현재 존재보다 더 진정한 것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육체적 즐거움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부활체의 천국에서의 삶은 결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마 22:30; 막 12:25; 눅 20:35). 성은 이 세상의 삶에서 결혼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고전 7:8-11) 천국에는 성이 없을 것이다. 바울이 높은 가치를 독신에 두는 것은(고전 7:25-35) 같은 결론을 암시할 수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떤가? 계시록 19:9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언급한다. 그 사실의 견지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신랑과 신부의 언급은 상징적이며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마찬가지로 상징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의 부활체로 잡수셨지만(눅 24:43; 참고, 요 21:9-14) 그것은 그가 부활하셨으나 아직 승천하시지 않으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몸의 변화는 아마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천국에는 먹지도 않고 성생활도 없다면 천국에 어떤 즐거움이 있단 말인가? 천국의 경험은 여기서 경험하는 어떤 것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전 2:9-10). 천국의 경험은 예컨대 사람과 특별한 개인적 성적 연합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세 번째 문제는 완전에 관한 질문이다.
이생안에서 우리는 성장, 진보 그리고 발전에서 만족을 얻는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의 완전한 상태가 안 된다면 차라리 지루하고 불만족한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가 성장함이 없이는 만족할 수 없다는 논점을 여기서 마음에 두는 것은 이제 경험하게 될 천국의 삶에서는 하나의 추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좌절과 지루함이 제한된 점에서 발전의 때와 완전에 대한 중단이 언제이든 이생에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완전하게 성취했다면 만일 거기에 불충분함이나 불완전함의 느낌이 없다면 거기에는 아마도 좌절이 없을 것이다. 이제 천국은 사람의 목적이 모자라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거기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는 저편의 완전한 상태가 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성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완전한 특성을 지속적으로 행사할 것이다.
천국에는 얼마나 많은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지 알거나 기억할 수 있을까? 천국에서도 이생에서 우리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천국에서의 큰 관심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연합의 기대에 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후회와 슬픔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답하신 말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 형제들이었던 일곱 명의 남편을 둔 여인이 천국에 가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이었다(눅 20:27-40). 천국에도 그와 같은 가족단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분명하게 모세와 엘리야를 인식할 수 있었다(마 17:1-8; 막 9:2-8; 눅 9:28-36). 이 사건은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징후들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과거의 실패나 죄들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는 말씀과 상반되는 슬픔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문제는 천국에서 다양한 상급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천국에는 상급의 정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달란트의 비유가 그것이다(눅 19:11-27). 열명의 종들이 그들의 주인에 의해 각각 한 파운드씩 주어졌다. 결국에 그들은 그에게 각각 다른 양의 돈을 가져왔으며 그들의 성실성에 비례하여 보상을 받았다. 이 구절은 다니엘 12:3과 고린도전서 3:14-15이 지지하는 성경 구절이다.
천국에서 상급의 다름이나 만족의 다름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상황의 용어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면 아주 신실한 신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큰 방이 주어질 것이고 덜 신실한 자는 작은 방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 경우라면 천국의 기쁨은 그 차이에 대한 인식때문에 감소될 것이며 더욱 더 성실하게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할 것이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천국의 삶에서 가지게 될 것에 대한 몇몇 언급들은 실제로 차이가 없음을 증명한다. 모두가 예배하며 심판하며 섬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이 없다. 아마도 그 상급에서 다름은 외적이나 객관적 환경에 있지 않고 주관적 깨달음이나 그런 환경에 대한 감사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모두가 같은 활동 예컨대 예배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쁠 것이다. 아마도 이생에서 보다 더 많이 예배를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한 것 이상으로 그 생애에서 그것 안에서 더 큰 만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 유비는 음악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끌어내는 즐거움의 정도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같은 파도소리가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려지지만 그 반응은 지루함에서 황홀함까지 다양할 것이다. 유사한 환경이 비록 반응의 범위는 좁을 것이겠지만 천국에서 기쁨에 관해서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즐거움의 범위에 차이를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천국의 완전은 낭비된 기회를 후회함으로 축소되지 않을 것이다.

악자의 마지막 상태
악한 사람들의 장래에 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다.
영원한 심판의 교리가 어떤 이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 되었거나 하위 크리스챤의 견해로 보인다. 문제의 시발의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죄의 심판 사이에 긴장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교리이다. 성경은 불의한 자에 대한 장래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몇 개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예수님은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말씀하셨다. 또 그들의 상태를 밖의 어두움으로 묘사하셨다(마 8:12). 악한 자의 마지막 상태는 역시 영원한 심판(마 25:46)과 고통(계 14:10-11), 무저갱(계 9:1-2, 11) 하나님의 진노(롬 2:5), 둘째 죽음(계 21:8), 영원한 멸망과 주의 얼굴에서 외면당하는 것으로 말씀했다.
만일 지옥에 대한 하나의 기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나 그의 임재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거나 혹은 심적인 비탄 또는 그 모두를 포함한 격통의 경험이다. 다른 양상은 그가 모든 것의 주이심이 실현된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보는데서 단절된 존재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 분리의 실제가 영구하다. 따라서 사람의 도덕적이며 영적 자아의 상태는 영구하다. 사람의 생의 마지막의 무엇이든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거기에는 더 나은 기대되는 변화가 없다. 따라서 절망이 그 개인을 엄습할 것이다.

장래 심판의 최종성
그 평결이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일때 악인은 그들의 마지막 상태로 지정된다. 약간 이것은 이성에 반대되며 심지어 성경에서도 두개의 사상이 대조적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보편구원론자의 개념에 부딪친다. 즉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구원받게 된다는 견해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생에서 구원의 제의를 배척한 자가 사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후에 그들의 상황으로 냉정을 되찾아 그리스도께 화해케 된다는 사상을 만족해 한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성경의 본문들도 서로 모순인 것처럼 나타난다. 어떤 구절들은 구원이 보편적일 것을 포함한다. 즉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안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고 하였다. 이에 더해 보편구원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로는 로마서 5:16; 11:32, 그리고 고린도전서 15:22이 있다.
그러나 많은 다른 구절들은 보편구원설에 모순된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라 하시니라‘(마 25:46). 역시 마태복음 8:12; 요한복음 3:16; 5:28-29; 로마서 2:5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1:9이다.
이런 모순들이 해소될 수 있을까?
유익한 해소 노력은 이런 보편적인 구원을 말씀하는 구절을 제한된 구원의 구절에 맞추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2:10-11과 골로새서 1:19-20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며 하나님과 교제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주의 와해된 질서를 옳게 만듦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질서한 군중을 강압하므로 마지막에 복종케 하는 승리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교제에 돌아오는 것을 필연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들은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보편적 효과 사이에 병행을 끌어내는 것으로 거기에는 그 효과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므로 보편적 차원을 적격하게 해 준다. 로마서 5:18의 경우(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7절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 더욱이 그 용어 ‘모두’ 보다 ‘많은’이 15절과 19절에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유사하게 모두의 의미를 고린도전서 15:22에서 제한시키고 있다(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리라). 왜냐하면 다음 구절에서 그는 덧붙이기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때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요. 사실 그는 앞에서 그가 신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18절).
하나의 보편구원의 구절이 남아 있다. 로마서 11:32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하심이로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자비는 그의 아들을 속죄와 구원의 제의를 만인에게 확장시키는 것으로서 그의 아들을 예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인류에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만 경험하고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구원이 보편적으로 유효할지라도 그것은 보편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두 번째 기회를 지시하는 곳이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만일 확실히 심판후에는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진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대신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반대로 명확한 언급이다. 그 심판에서 표현된 선고의 성경적 묘사에 대한 최종적인 첨부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는 그것이 최종 상태이기보다 중간상태에 관계된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상태에 대한 절대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 다른 상태 사이에 여행하는 것까지도 가능하지 않았다(26절). 그러므로 제2의 기회를 주장하는 회복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장래 심판의 최종성
불신자의 장래심판은 피할 수 없을 뿐아니라 그들의 심판은 영원하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보편구원설은 배격해야 하지만 또 다른 견해도 배격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무도 영원히 심판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멸절로 알려진 이 학파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래의 존재에는 한 계급만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중단없는 생을 살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제거되거나 멸절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영속하는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지만 이 입장은 아무도 끝없는 고통을 받을 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멸절에는 몇 가지 다른 형태가 있다.
멸절을 주장하는 이들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죽음에서 악인의 사멸을 본다. 인간은 본성으로 불멸하며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죄의 효과 때문에 악인은 멸절한다는 것이다. 멸절설에는 두 종류의 특수한 유형이 있다. 그 첫째는 멸절을 죄의 자연적 결과로 본다. 죄는 자멸이다. 어떤 시간의 경과 후에 아마도 그 개인의 죄에 비례해서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말하자면 다 사멸하게 된다. 순수한 멸절설의 다른 유형은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죄인을 허용하실 수도 없고 하시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사상이다. 심판은 무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견디고 난 후에 단순히 그 개인 자체가 멸망할 것이다. 위의 두 유형의 멸절설은 영혼 혹은 자아가 불멸할 것이지만 죄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멸절설의 문제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끝이 없는 혹은 꺼지지 않는 불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사야 66:24의 비유를 빌어 지옥에서 죄인들의 심판을 묘사하셨다.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막 9:49). 그런 구절은 심판이 끝이 없을 것을 분명히 한다. 지옥불은 심판받은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을 주거나 단지 끝이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영속하는, 영원, 그리고 영원히와 같은 말들의 몇몇 실례가 있다. 악한 자의 장래 상태를 가리키는 명사들에 적용되는 불 혹은 불에 탐(사 33:14; 렘 17:4; 마 18:8; 25:41; 유 7), 치욕(단 12:2), 파괴(살후 1:9), 착고(유 6), 고통(계 14:11; 20:10) 그리고 심판(마 25:46)이다. 병행구절이 마태복음 25:46에서 발견되는데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만일 사람(생명)이 끝이 없는 기간이라면 다른 사람(심판)도 역시 끝이 없어야 한다.
성경이 단지 영원히 죽음(악자는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는)이니라 영원한 불, 영원한 심판, 그리고 영원한 고통도 함께 말씀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정된 심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간은 영원토록 고통받게 하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심판은 죄에 대한 모든 비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모든 죄들은 하나님을 대적한 한정된 행위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영원한 심판 때문에 선하고 공정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주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언제나 하나의 무한한 사실이 항상 포함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대적한 위반이다. 유한한 자의 의지가 일어나 무한하신 분의 의지를 대적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응당 돌려드려야 하는 그 분에게 의무를 수행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죄는 단지 유한한 심판을 받아야 할 유한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면 그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끝이 없는 심판을 하실 자유가 없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그가 모든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을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네 모퉁이로 삼각형을 만드실 수 없으시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조물주를 떠나 살기를 선택한다면 하나님이 그와 교제하며 영원토록 살도록 의도하신 것을 떠나 영원한 고뇌를 경험하는 그런 길에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도록 계획되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 운명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그 행동의 결과를 영원토록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시 하나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벧후 3:9). 지옥의 고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에 대한 그들의 배척이 그들의 도피를 막는다.
C.S Lewis는 죄는 사람이 하나님께 전 생애를 걸쳐서 말하고 있다. 도망가서 나 혼자 있게 하라. 지옥은 그 개인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 지옥은 지옥에 가는 자의 선택이다.

심판의 정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지옥에서 심판의 정도가 있을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의 기적에 증인이 된 도시들이 회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꾸짖으셨다.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전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1-24).
성실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도 유사한 암시가 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그 원리는 여기서 우리 지식이 크면 클수록 우리 책임은 크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책임에서 실패하면 우리의 심판도 클 것처럼 보인다. 지옥에서 심판의 다른 정도는 하나님에게서 분리의 고통에 대한 주관적인 깨달음으로 객관적 환경의 문제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천국에서 상급의 다양한 정도에 대한 개념에 병행할 것이다.
지옥의 사실을 반영하는 심판의 다른 정도는 그들이 이생에서 자신을 위해 형성한 특성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탁하신 것이다. 그들은 악한 자아로 살아감으로 그들이 경험할 비참함은 그들이 악을 선택했을 때 그들이 행한 것을 자세히 깨달은 그들의 정도에 비례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상태의 교회에 함축된 것
1. 이생에서 우리가 한 결정은 단지 한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장래 상태를 관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외적인 관심과 근면을 그것들을 만들어야 한다.
2. 바울이 그것을 기록하였듯이 이생의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영원한 것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시든다.
3. 마지막 상태의 성질은 이생에서 알려진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것이다. 그것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의지들은 앞에 놓여진 것을 완전히 나타내기에 아주 부적합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천국은 우리가 여기서 알고 있는 어떤 기쁨보다 아주 초월적인 것이다.
4. 천국의 축복은 이생의 즐거움에 대한 하나의 강화가 아니다. 천국의 주된 차원은 신자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5. 지옥은 완전히 두려운 고립과 하나님께로부터 최종적인 분리처럼 육체적 고통이 그렇게 많은 곳이 아니다.
6. 지옥은 주로 하나님의 재판으로 불신자에게 임하는 형벌로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에 의해 선택된 죄된 삶의 자연스런 결과로 생각해야 한다.
7. 비록 모든 인류가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위탁되지만 거기에는 상급과 심판의 정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리는 우리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자세, 생에 대한 조망, 우리가 사람을 대우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방식에 여향을 준다. 우리의 교리에 대한 믿음에서 남을 생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게 할 것이다. 교리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거룩하시며 계속 죄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나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을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최고의 존재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리는 성경의 과거 사건들과 교훈들 그리고 우리의 현재 상황 사이에 연계점이다.
교리는 우리의 지속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의 성숙의 부분이기 때문이며(신 6:5) 마음을 포함한 우리의 전 인격으로 그를 사랑하도록 예수님에 의해 해석되었기 때문이다(마 22:37; 막 12:30; 눅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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