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자를 시험해 보라 (마 7:15-20)
(1) 겉치레의 가능성 (마 7:15)
(2) 인내할 자리 (마 7:16)
(3) 행함의 원칙 (마 7:17-18)
(4)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의 힘 (마 7:19-20)
가르치는 자를 시험해 보라 (마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교자와 교사들을 그들의 열매로 시험하라고 말씀합니다. 두 가지로 그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설교자의 삶의 열매를 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교리의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의 삶의 열매가 완벽하게 아름다우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면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속게 되어서 사탄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사로 잡히기에 그가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옳다는 잘못된 논리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우면 그의 가르침도 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 보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또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인데, 설교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진리를 가르치며 엄청난 교리를 가르치는 반면 그의 삶에서 열매가 썩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사람들은 말하길 그의 가르침이 옳은 것이니 그의 삶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 본성이 자유할 때만이 바른 설교자와 교사가 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당신은 성령으로부터 보복심을 받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경질적인 마음을 받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자기 도취에 빠진다던가 육체의 정욕에 빠지는 그러한 마음을 받는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단코 이러한 행동들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집중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강권하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령의 표준은 주의 자녀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겉치레의 가능성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서 우리 주님은 가장 위험한 교사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사탄의 영이 있는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합니다.
겉치레를 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쉽습니다. 우리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경건의 겉치레가 바로 따라옵니다. 요한일서 1:7절은 성도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조건을 말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 뜻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려야만 하거나 숨겨진 부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한, 경건의 겉치레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물론 겉치레는 자신의 목적과 성공을 위하여 두가지 이상의 삶을 살아내는 위선과는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겉치레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말하고 설교하는 것은 쉽습니다. 잘못된 삶을 지옥으로 보내는 설교도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나 잘 아는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말의 표현이 화려할수록 그 진리가 삶 가운데 나타날 확률은 적어집니다. 여기에 설교자에게는 청중에게 없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 위험은 무엇을 설교한 후에 본인이 그렇게 살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설교 내용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제(금식)가 필요합니다. 화려한 말을 하려는 자세나 멋진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들, 세상 문화에서 귀히 여기는 것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들을 삼가(금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절뚝거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신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은 가장 기본 개념인 음식을 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도취에 빠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면서 기뻐하는 경향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솔직하게 말할 뿐이지 바르게 행동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기 도취에 빠졌을 뿐이지 조금도 변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솔직하다고 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옳은 것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변화된 바른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인내할 자리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 경고는 너무 쉽게 과격한 열심을 가지고 이단시비를 가르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9:53-55절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육에 속한 의심을 성령의 분변이라고 오해하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열매만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삶의 열매가 가시나무의 열매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는 나쁜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뿌리가 아닌 것에서 가시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겨울에는 당신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장미 나무와 가시 나무를 구별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 속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열매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별한 확신을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삼고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깜짝 놀라는 가운데 그들을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확신이 우리 안의 하나님 자리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무섭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경책은 우리에게 확신의 빛 가운데 걸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을 거절하는 것과 복음 자체를 거절하는 것의 차이점을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당신이 진리를 제시하는 당신의 방법을 거절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반드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인내의 자리를 만드십시오. 당신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기다리십시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옳은 가르침은 옳은 열매를 맺을 것이요 잘못된 가르침은 잘못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3) 행함의 원칙 (마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당신의 개인적인 삶을 보고 정말로 그러한가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한 권리가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그러한가를 자세히 검토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삶의 행함이 꾸준하게 거룩하려면 우리의 삶의 원칙이 거룩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좋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비행기가 새를 모방하는 것은 가능하듯이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모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각각에 있어서 같은 것인데 그 뒤에 생명의 원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행기는 일관적으로 날아다닐 수 없습니다. 간헐적으로 나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방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도록 자신을 차단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꽤 잘 비슷하게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내면의 원칙이 올바르게 서야 합니다. 곧, 위로부터 거듭나야 하며 성화되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는 서신서에서 선명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증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을 드러내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 15:1-5).
(4)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의 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예수 그리스도는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사람을 시험합니다. 주님도 그의 대부분의 삶을 공적으로 사셨습니다 (요 18:20). 우리 주님의 원수들을 분노하게 한 것들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행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주의 능력을 공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적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 그렇지. 나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지. 그러나 아무에게도 내가 성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겠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분명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공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는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무엇이던 그 뿌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밖으로 나와서 공적으로 드러나길 원합니다. 분명하게 외부로 나타나야 하며 공적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공적으로 나타나기를 격려하셨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던 밖으로 나와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마 10:26). 사람들이 그들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숨길 수 없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국 공식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나타나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식적으로 증거할 때 어떤 일들이 발생할 지를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두려워서 네 빛을 발 아래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역행함으로 당신의 영혼과 몸이 지옥에서 파멸될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우리 주님은 주님의 제자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원수로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보좌 위에 계신 것이 분명하심 같이 불가피한 원칙은 반드시 그대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실제로 누구인가가 다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급 그리스도인의 삶”의 운동의 위험성은 “하나님과 비밀스러운 시간”을 갖는다는 명목하에 많은 사람들을 은거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밝은 해 아래로 끄집어 내십니다. 바울은 성화와 음란을 짝지어 말합니다. 이 뜻은 모든 종류의 고상한 영적 감정이 정상적으로 삶을 통하여 표현되지 않으면 잘못된 차원에서 반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사람이 건강하기 위하여는 외부와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 공적이며 또한 열린 외부적인 부분은 성경입니다. 성령은 계시된 사건들의 세계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세계에서 살면 우리의 뿌리는 건강하고 우리의 삶은 올바르게 됩니다. “나는 전에 한번 경험이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점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원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 속의 어떤 의식적인 경험에 사로 잡히더니 결국은 전혀 소용이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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