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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식목사 8복강해

에반젤(복음) 2021. 6. 13. 06:40

강재식목사 8복강해

출처 - http://deungdae.org/

 

본문: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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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일에도 곳곳에 있는 해돋이 명소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새해 첫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올 한해가 잘 되기를 기원을 하고자함이었습니다. 새해 첫날에 뜨는 해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그 해를 보고 기원하므로 잘 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저 태양처럼 금년에는 힘차게 살아야지 스스로 다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새해 첫날에 가족들과 함께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한 해의 시작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올 한해 건강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 돈 많이 벌고, 부자 되는 복 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복 받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6:25-26)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책임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복은 이미 보장을 받았으니, 좀 더 차원 높은 복을 기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차원 높은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2010년 년초에 이 복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누리는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 복은 아주 매력 있는 복입니다. 저는 새벽기도 시간에 이 팔복을 설교하면서 정말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 때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들을 보충하여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매력에 빠져 보시지 않으실래요!
첫 번째 복은,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는 복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맛보고 누린다면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확실히 알고 계시겠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종교는 사람이 어떤 신(神)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여 내가 누릴 복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내게 선택권이 있어,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내가 누릴 복을 요구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나를 선택하였습니다. 혹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계시면서, 지금이라도 나는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신(神)을 혹은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은 아주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지 않았거나, 선택을 받았는데 모르거나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이 없더라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요. 부르심인 줄 믿고 삶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발전시켜 나가므로 하나님나라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물론 인격을 소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끌고 가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열려 있는 분으로 우리가 다가가면 내치지 않고 받아드려서 관계를 깊이 발전시켜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시편53:2절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6:37) 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곧 하나님과 관계가 깊은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곧 삶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천국을 누리고 삽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 즉 종교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부부관계로 말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위장결혼을 한 경우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져 있지만, 깊은 관계를 이루지 못함입니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함입니다. 부부관계로 말하면,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결혼은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 상처. 이해관계등으로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는 부부와 같습니다.
천국을 이루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깊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라고 하셨으니 심령이 가난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 집니까?
먼저 "심령"이란 단어의 뜻을 알아봅시다. 원어에는 "사람의 영"을 말합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은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된 것으로 기록되는데, 그중에서 그 영혼을 영과 혼으로 나누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영혼이라는 단어는 거의 200회 가까이 나오지만, 사람의 영과 혼을 따로 기록된 것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중에 히브리서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기록합니다. 새번역은 좀 더 구체적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체를 꿰뚫고 들어가, 육체 속에 존재하는 영혼을 또 다시 영과 혼을 갈라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조를 정확하게 말하면, 육체와 혼과 영으로 결합이 되어 있으며, 그 위치와 역할은, 영이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면서 혼을 지배하고, 혼은 곧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는 영혼을 감싸고 있는 몸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혼과 육체로 쌓여 있는 곳으로 곧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려면, 영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떤이는 육체의 욕심에 가로막혀 아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어떤이는 육체의 욕심을 버리므로, 혼으로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못하여 깊은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어떤이는 혼과 분리된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룹니다 이때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소유하는 자 되어 누리고 즐기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육체만 가지고는 그 관계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여야 깊어집니다. 부부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면, 깊은 관계가 이루어져 너무 행복합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인물이 잘 생기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의 욕심에 가로막히면 관계가 멀어지고 깨어집니다. 먹는 문제, 잠자리 문제, 경제 문제등 육체적인 욕심이 앞서면, 마음이 멀어지게 되고 관계 또한 서먹하고 멀어지면서 행복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육체의 욕심에 가로 막히지 않도록 항상 마음을 열고,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은 마음을 흐려놓습니다. 그 마음이 곧 혼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습니다. 혼을 넘어 영으로 만나야 하는데, 영이 혼에 가로막히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희미한 관계가 됩니다. 마치 서리가 끼인 안경으로 가족을 보면서, 이 사람이 내 가족인지 아닌지 잘 몰라 쩔쩔 매는 것과 같습니다. 투명하지 않으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안 게신 것 같기도 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영은 아주 정결하므로 혼과 붙어 있을 때, 흐려집니다.
혼과 영이 분리된 상태를 바로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4:12은 혼과 영을 분리하는 아주 예리한 양날을 가진 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에베소서6:17에서 그 검을 사용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내게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에베소서6: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의 혼과 영을 쪼갤 수 있는 예리한 칼은 곧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대할 때, 혼과 영이 분리되어 내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나라 즉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고 맛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사랑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즐거워하여 묵상하고, 즐거워하여 듣고, 즐거워하여 읽고, 암송하고 행하십시오. 성령께서 내가 즐거워 대하는 그 말씀의 예리한 날로 사용하여 우리의 영을 혼으로부터 분리시켜, 영으로 하나님을 뚜렷하게 봄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소유하고, 맛보고 누리고 즐기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유하여 누리십시오.

 

본문: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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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불완전한 자로 두려움과 고통과 시련과 슬픔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가 위로는 절대 필요한 것중에 하나입니다. 위로가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위로를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위로받을 때가 없고 위로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의 삶은 매우 황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많이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너무 상심마세요"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도 있잖아요" 라는 말 한마디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손을 꼭 잡아 주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위로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됩디까! 이제 3월 달부터 열린 전도모임을 할 터인데, 그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많이 하십시오.
장영희씨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또는 상처 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위로가 필요하고, 위로는 삶의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여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그러므로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교우들 간에도 위로를 많이 하며 사십시오. 특히 부부간에 위로를 많이 하십시오.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나 사람의 위로가 적잖은 도움이 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후, 요셉에 옷에다 양의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고와서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고 속였습니다.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말에, 아버지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허리에 묶고 몇 날 몇일을 그 죽은 아들을 위해 애통을 합니다. 다른 아들들이 여러 가지로 위로하였지만, 야곱은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더욱 슬퍼하면서 나도 죽어 무덤으로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 앞에는 그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위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위로가 있습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모든 두려움, 슬픔 괴로움 시련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십니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를 때, 성부하나님을 부를 때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많이 부릅니다. 성자 하나님을 구원의 예수님으로, 그리고 성령님을 위로의 성령님으로 많이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로는 곧 능력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상처를 싸매는 정도라 하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직접 만지셔서 완전히 치료하십니다. 그 위로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지금 내안에 임재 해 계십니다. 위로의 성령님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위로받지 못하셨다고요? 마음에 상처 때문에 괴로우시다고요? 살기가 힘들다고요? 삶을 정리하고 싶으시다고요?
성도 여러분! 완전하신 하나님의 위로 곧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사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행복입니다. 위로의 복을 받지 못하여 재벌이, 학자가, 권력을 가진 자가 우울의 늪에 빠지고, 알콜에 빠지고, 주색에 빠지고,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야 말로 수억만큼의 재물 얻는 복보다 더 큰 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고 받을 복은 이런 차원 높은 복입니다. 어떻게 이 복을 누립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바로 애통하는 자가 이 복을 받습니다. 애통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애통 하라는 것일까요?
먼저 애통이란 말은 "슬퍼하며 울다."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하여 슬퍼하며 울어야 위로를 받을까요?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로는 팬테오라는 단어인데, 고린도전서5:2을 보면 이 단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즉 "왜 죄를 지어놓고 오히려 교만하여 그 잘못에 대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느냐?" 는 말씀인데, 이 "통한히" 가 역시 팬테오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애통이란 바로,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여겨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몹시 슬퍼함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야고보4:8-9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손으로 더러운 일을 행하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두 마음을 가진 것에 대하여, 즉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어라. 웃지 말고 애통하라. 즐거워하지 말고 근심하라.하십니다.
신학자 헨드릭슨(Hendricksen)은, 이 애통의 본질을 "사람 중심의 애통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애통"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애통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가끔, 그 정도야 뭐 어떨라구! 누구는 수억을 꿀꺽하고도 눈도 깜빡 안하는데, 그까짓 돈 몇 푼 떼먹은 것이 무엇이 그리 큰 죄라고! 사람이 살면서 그럴수도 있지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죄도 마음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되어 애통하며 그 죄를 토해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람 중에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역시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시편 중에 다윗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고백한 참회시가 모두 일곱편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먼저 죄를 품고 있을 때에 그 괴로움이 38편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38:2-8) 죄를 품고 있는 그의 삶에 평안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하여 다윗이 애통하며 회개하는 모습은 6편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6) 라고 고백했는데,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에 "띄우며"는 수영한다. 헤엄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요를 적시다"에 "적시다"는 "용해하다" "녹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흘린 눈물은 수영을 할 정도요. 그 눈물로 요가 썩을 정도였으니, 그의 애통이 얼마나 간절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간절한 애통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시편32편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1-5)
지은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회개하였을 때, 주님은 죄를 사하여 주실 뿐 아니라, 큰 위로가 임하였고 평강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하였습니다. 바로 위로의 복입니다.
여러분! 왜 위로의 성령님과 동거하면서 진정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삽니까?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우울의 늪에 빠져 불안해합니까? 죄에 대한 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불순종의 죄, 형제를 용서하지 않은 죄, 내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지도자를 원망하고, 교회정책에 반대한 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 기도하지 않은 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죄, 하나님께 약속을 어긴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우십시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는 완전합니다. 수준 높은 복입니다. 불신자들과 같이 세속적인 복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 이렇게 수준 높은 위로의 복을 위하여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죄악들을 품고서 그 죄를 위하여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통한히 여기지 않습니다. 울지 않습니다.
위로의 복을 받으세요. 수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이 복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입장에서 애통할 때 임합니다. 어떤 죄라도 품고 있지 말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토해 내셔서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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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2002년도에 우리 교회가 지금 이 땅, 총 2145.4㎡(649평)을 분양받았습니다. 2000년부터 이 구평 택지 지구를 분양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가 종교부지로 지정된 땅이었습니다. 당시 시가로는 이 단지 안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약10억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교회가 보유하고 있었던 재정은 제로였습니다. 그동안 선교사업으로 인하여 저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선교비로 6억 정도 지출하였습니다. 당시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1992년 2억에 분양을 받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100평짜리 상가였는데, 당시 시가가 1억5천만 정도였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교우님들이 10억짜리 땅을 매입하겠다는 목사의 말에 의아해했고, 어떤 사람들은 약간 이상한 목사로 보는 이도 있었고, 비난을 하는 교우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떠나간 교우들도 있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입으로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 그 입술의 고백은, 큰일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 입술의 고백은 온대간데 없고 무능한 하나님, 한없이 작은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나의 입술로 고백하던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내가 축복을 받는 좋은 기회인데, 결국 그 기회를 지나쳐 보냅니다. 그때는 교회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나니 앞에 서약을 하였던 항존 직분자들 마저도 부담을 안고 떠나가는 안타가운 일까지 있었습니다. 항존 직분자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해 냈습니다. 목사를 신뢰하고 믿고 따른 교우님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여 이 땅을 매입하였습니다. 여러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땅이 얼마나 위치적으로 좋습니까? 그때 우리가 결단하지 않았으면 이 땅은 종교부지였기에 절이 들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이렇게 땅이란 개인적인 축복을 제외하고라고, 선교사역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땅이 필요합니다. 수양관도 필요하고, 선교지에 교회를 지을 땅도 있어야 합니다. 또 여러분들이 살 집을 지을 땅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땅을 차지하는 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나 믿음이 없는 자는, 땅을 차지하는 비결을, 돈 있으면 되지 뭐! 하겠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100% 신뢰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무엇이 온유이고, 어떻게 사람이 온유할 수 있으며, 나도 과연 온유하여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온유라는 말의 뜻은 분노, 난폭, 매정, 잔인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온화한, 친절한, 온유한' '즐거운'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gentle"입니다. 그런데 같은 의미에 또 다른 영어로는 "meek"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짐승에게 사용하는 말로, 온화한 온순한 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사용하는 "gentle"은 사람이 가지는 성품으로 타고난 자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노력하여 온화하고 친절하고 온유한 경우를 말하지만, 짐승에게 사용하는 "meek"는 짐승 스스로 온순하고 온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길들여서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면 아주 유순하고 부드러운 말이 되어 사람들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합니다. 심지어는 호랑이도 잘 길들이면 아주 유순하고 온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온유한 자"는 "gentle" 이 아닌 "meek"입니다. 즉 누군가에 의하여 길들여져서 온유해 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대부분에서 "gentle" 보다 "meek"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자칫하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상은 이것이 우리가 땅을 차지할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내 스스로 온유하여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면 땅을 받을 자 별로 없습니다. 사람의 성품이 그리 쉽게 바꿔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하여 내가 길들여져서 온유해 질 수 있다면, 이것은 충분히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비록 온유하지 못할지라도 나를 온유하게 하실 분이 누구인지 알면, 여러분은 당장 군침이 돌 것입니다.
그 정답이 갈라디아서5:22-23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가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는 온유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자중에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가지게 되는 성품입니다.
사람의 성격과 성품은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맞아도 안 되고, 교도소에 갔다 와도 안 되고, 장가가고, 시집가도 안 되고, 나이가 들어도, 도를 닦아도 안 됩니다. 어느 드라마에 보면 절에 있는 중이 하도 성질이 나니까, 확 성질을 부리면서 온갖 십원짜리 문자를 쓰고는 다시 나무관세음보살 합니다.
사람의 성격과 성품은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바꾸어집니다. 바꾸어진다기보다 성령의 성품이 나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는 온유하여 땅을 상속받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령에 의지할 때, 충분히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믿는 자안에 계십니다.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합니다. 갈라디아서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께서 내 육체의 욕구를 제압하는 것을 성령충만이라 합니다. 성령충만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충만이 나를 온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충만 할 수 있습니까?
첫째 성령님을 환영하십시오.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사랑하십시오. 성령님은 추상적이거나, 상징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으로 내 안에 와 계십니다. 나와 말이 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둘째는 품고 있는 죄악을 토설하십시오. 성령님은 죄를 품고 있을 때 역사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죄에 대하여는 애통하십시오. 그리고 품고 있지말고 토설하여 내십시오.
셋째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마십시오. 즉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악한 생각, 악한 마음, 악한 말과 행동을 버리십시오. 에베소서5:3-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 땅을 받지 못합니다.
넷째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소멸은 소방수가 불을 진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마음을 감동시켜 행하게 하십니다. 말씀대로 살게 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아이티를 위한 구제헌금에 참여하라는 감동이 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지금 내 형편이 어렵잖아! 네가 안 해도 할 사람이 많아! 하면서 그 감동을 소멸시킵니다.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기뻐하라.는 감동이 옵니다. 그럴 때 내가 지금 기뻐할 처지인가! 말도 안 돼! 하면서 기쁨의 감동을 소멸합니다. 아무개 미워 못 견디겠는데,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자꾸 생각납니다. 아니 하필 이럴 때, 이 말씀이 생각나! 애써 그것을 지우려고 노력합니다. 성령의 소멸입니다. 현재의 정서나 내 감정을 따르지 말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십시오.
다섯째는 성령충만을 간구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간절한 소원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5:18) 하셨으니, 우리가 사모하며 간구하여야 합니다. 금요기도회 시간에 성령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금요기도회에 참여하고 있는 자 중에 땅을 차지하는 자가 많으리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사모하며 구하는 자와 구하지 않는 자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내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의 성품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Meek" 즉 온유해집니다. 성령님의 온유한 성품이 나를 통해 드러납니다. 모든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온유한자에게 땅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온유함이 드러나면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분가할 때, "네가 먼저 좋은 땅을 택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하였습니다. 다투지 아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으면, 오늘부터 성령충만을 위해 노력해서 온유함이 나타나게 하십시오. 그래서 땅을 받는 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땅은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아주 유용합니다. 온유하여 땅을 차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본문: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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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옛날 가난한 시절,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추위에 등을 붙이고 살 따뜻한 방 한 칸도 제대로 없었을 때, 그저 한끼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 등을 붙이면 최고로 행복했었습니다.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배가 부르고, 따뜻한 방에 누워 자지만 그것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 입을 것 풍요롭지만, 불평불만은 그때보다 더 많습니다. 그저 못 살겠다. 어렵다. 죽겠다는 말이 입에 발렸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시절보다 만족감은 떨어져, 정신적으로는 더 배고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지식도 더 많이 쌓고, 재물도 더 많이 쌓으려고 합니다. 또 권력도 가질 수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도 그것 때문에 만족하는 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흔히 하는 얘기로, 저런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할까? 무슨 불만이 있어! 나는 그 정도 가지면 정말 만족하면서 살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니 생각이고" 가져보면 마찬가지가 됩니다.
결국 삶의 만족이 소유에 넉넉하지 않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적당한 소유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잠언30:7-9에서 아굴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삶의 만족은 내 스스로 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만족할 수 있는 복을 주실 때 가능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소유가 많든 적든, 지식이 많든 적든, 힘이 강하든 약하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만족한 삶을 누리고 살게 하는 복 말입니다. 오늘은 만족한 삶의 복을 받는 것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 복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이고, 마땅히 누려야 할복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네 번째 말씀하신 복이 바로 그 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배부름의 복은 단순히 육신의 배만 아니라, 삶의 만족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그거 천국가면 누리지 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가기 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만족한 삶의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즉 "배가 부르려면 무엇이든 많이 먹어야 된다." 이것이 순리이고 정설입니다. 그런데 "주리고 목마르면 배 부른다."고 하면, 논리에 맞지 않고, 이론상으로는 배부를 수 없는 반대의 이론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역설(Paradox)의 진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진리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즉 살려고 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등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역설의 진리가 깨달아지면 성숙한 신앙이 됩니다.
예수께서 만족한 삶의 복을 누리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의"에 대하여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라는 단어의 뜻은 옳은 것, 바른 것입니다. 즉 정의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만든 것 중에 옳고 바른 것이 있을까요? 즉 정의가 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것 중에 세종시문제가 있습니다. 국회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데, 한 국회의원이 말하기를 세종시는 정부가 이미 행정도시로 세우겠다고 약속을 한 것인데, 약속을 어기는 것은 부도덕하고 불의한 것이므로 약속대로 행정도시를 세워는 것이 정의라고 합니다. 이에 국무총리의 답변은 물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의이지만, 나라의 미래가 잘못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 약속했다는 것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어겨서라고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번복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느것이 정의입니까? 어느것이 옳은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둘 다 옳은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둘 다 잘못된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곧 세상이 말하는 정의입니다. 내가 어느편에 서느냐? 에 따라 다르고, 누구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단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서의 의, 혹은 정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또 예수 그리스도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만이 만족한 삶의 복을 누립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고 원함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사람의 모든 신경은 먹고 마시는 것에 집중합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먹는 것으로 보입니다, 코로 맡는 냄새는 먹는 냄새만 들어옵니다. 몇일 굶으면 환장을 합니다. 뜨거운 태양빛만 내리쬐는 사막길을 여행하던 중에 가지고 있던 음식과 물이 떨어졌습니다. 몇일 지나면, 눈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기루 현상 즉 착시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래가 물로 보이고, 맛있는 셀러드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막에서 굶어 죽은 자들에 입속에는 모래가 가득 들어 있다고 합니다. 모래를 물로, 음식으로 착각하고 먹은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모든 신경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굶주린 자처럼 말씀을 섭취하고, 마치 목마른 자처럼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쫓아갈 때, 만족한 삶의 복이 임합니다.
다윗은 이를 잘 표현하였습니다. 시편42:1-3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다닐 때, 사람들이 놀립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면 어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면서 조롱을 할 때, 다윗은 얼마나 서럽고, 가슴 답답하였을까요? 그때 다윗은 마치 굶주린 사자처럼 하나님을 찾고 불렀습니다.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이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납니다. 결국 주님을 찾는 그 갈급함과 갈망함이 그 어려운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으며, 원망,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고, 위대한 성군 다윗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 아니! 하나님이 어디 외출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어디 출타중이신가? 주무시는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가! 함께 하시는데 왜 그리 애타게 찾아야 하는가?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잘 들어보세요. 또 말씀드립니다만 기독교 신앙은 종교가 아닌 관계입니다. 예수를 믿음은, 곧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회복된 관계를 계속 유지 발전시켜나가는 생활입니다. 살아계시며,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관계발전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결혼을 통하여 관계를 맺은 후에 관계발전을 이루지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삽니까? 이제 내 아내 되고, 내 남편 되었으니 한 집에 있기만 하면 관계발전이 됩니까? 밤낮으로 서로 찾고 찾아야 합니다. 밤에 자다가도 여보!하고 찾고, 낮에 직장에서도 전화해서, 여보 사랑해요! 하며 찾고 고백해야 관계가 발전하여 행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향한 의사전달입니다.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살기를 원하고, 이런 말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 보고 듣고,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진하게 감동을 시켜 주시므로 마치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것과 같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나의 구주요.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자다가도 부르고, 일하다가도 부르고, 여행 중에도 부르고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관계발전이 필요하니까요!
세상일에 취하여 말씀은 드문 드문 듣고, 주님은 가끔씩 찾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입에서 원망불평이 나오고, 한숨이 나오고, 마음은 자꾸 힘들어지고, 인생이 고달퍼 집니다. 돈은 번 것 같은데, 아파트도 평수가 늘어났는데, 뭔가 허전합니다.
성도여러분! 이제 만족함이 없는 종교생활에서 벗어나십시오. 예배시간에 늦게 와서 지루하게 시간 보내다가 부리나케 교회를 나가는 생활을 이제는 청산하십시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수 교회에 나와 주는 그런 생활, 만족함이 없는 신앙생활,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습니다. 안하면 벌 받을 것 같고, 해 봐도 별로 시원함이 없는 그런 생활, 크리스찬의 모습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십시오. 만족하는 삶의 복을 받으십시오.

 

 

본문: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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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이 씻을 수 없는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자기가 신임하는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야가 전쟁터에 가 있을 때, 그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였습니다. 그것을 은폐하려다 실패를 하자 우리야 장군을 전쟁이 치열한 최전선에 보내어 싸우게 하고, 다른 군사를 뒤로 빠지게 하여 결국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데리고 왔습니다. 다윗왕은 남의 아내도 빼앗고, 그의 남편도 죽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런 다윗 왕을 하나님께서 보시고만 계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 왕에게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에게 가서 말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이고,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그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를 자기의 자식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자며, 마치 딸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부자 집에 손님으로 왔는데, 그 부자는 그 행인을 위하여 자기 양과 소는 아까워 잡지 않고, 그 가난한 사람의 집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습니다.
다윗이 여기까지 말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내가 하나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서하는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지라.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하며 노발, 대발하였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는 정색을 하면서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요" 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죄의 댓가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 왕이 밧세바를 통하여 낳은 아기는 죽으리라고 합니다.
과연 아기가 태어났는데,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심히 앓았습니다. 생명이 몹시 위독하게 됩니다. 다윗왕은 금식을 하고, 궁전 안, 땅바닥에 밤새도록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께 아기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원로들이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지만 왕은 듣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먹지도 아니하며, 아기를 살려달라고 칠일동안을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습니다.
아기가 죽자, 신하들은 다윗 왕이 상심이 클까봐, 아기가 죽었다는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하여 고민하면서 작은 소리로 상의를 합니다. 다윗 왕은 그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기가 죽었구나! 알아차리고, 그의 신하들에게 "아이가 죽었느냐?" 신하는 "예 죽었습니다."
&nbsp;다윗 왕이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더니 그렇게 일으키려고 해도 일어나지 않더니, 벌떡 일어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려오라고 명령합니다.
&nbsp;그의 신하들은 황당스럽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간구함에도 응답되지 않아 더 크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신하들은 묻습니다. "아니!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 잡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때 다윗 왕이 대답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12:22)
다윗왕은 자기가 범죄 하여 하나님이 진노를 받아,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땅바닥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불쌍히 여김을 받기를 바랬습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자녀가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매를 들고 "네가 잘못하였으니, 매 열대를 때리겠다. 맞으면서 너의 잘못을 반성하거라"하고는 때립니다. 그런데 5대쯤 때렸는데, 종아리에 핏줄이 서고, 또 자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하면, 때리는 부모의 마음이 아립니다. 그러면서 맞는 자식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차마 다 때리지 못하고, 앞으로 잘해!하고는 중단을 합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살려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 진노를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동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은혜를 입고 동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는 것은 곧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또 "동정을 받는다"말씀입니다.
복음서에 시각장애자이며, 거지인 바디매오가, 구걸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예수가 지나가신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젖 먹는 힘까지 내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나를 고쳐 주십시오." "눈 뜨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에서 시끄럽다고 해도,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8)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요구대로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 또한 우리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도와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내가 요구한 바를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동정을 받는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불쌍한 시늉을 하면 될까요? 그 비결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삶"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며 사십시오.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남을 동정하면서 사십시오. 그러는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가족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형제간에도 동정심을 가지세요. 미운 행동도 하고,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불쌍하잖아요!
교우들 간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세요. 긍휼히 여기고 서로를 동정하세요. 밴질 밴질하게 굴고, 입만 벌리면 불평하고 비난하는 자들도, 자기만 알고 욕심을 부리는 자도 생각해보면 불쌍하잖아요.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 다 떨어지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도, 즐거움도 감사함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불쌍하잖아요.
베드로전서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한 자도, 욕하는 자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합니다. 또 그것이 복을 이러 받는 길이라고 합니다.
주변에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 또한 불쌍히 여기십시오. 잠언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 확실한 보장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떤 한 종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그 종은 엎드려 절을 하며, 제발 참아주시면, 열심히 벌어서 갚겠습니다. 사정을 합니다. 그때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빚을 탕감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자기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 준 것을, 갚지 않는다고, 멱살을 잡고, 참아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외면하고 신고해서 옥에 가둡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육천만분의 일밖에 안 됩니다. 즉 자기는 6천만개를 탕감 받았는데, 1개를 안 갚는다고 그 짓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불러서 하는 말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책망하고는 그에게 빚을 갚을 때까지 옥졸에게 넘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은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 진자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니,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모든 죄를 아무 조건없이 다 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긍휼히 여기시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이 여기시면, 내 삶은 대박납니다.
우리가 세상의 있는 것을 모아서 부요해지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채워주시는 것이 훨씬 더 부요해집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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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내용들이 나오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 혹은 사자를 보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나 영광의 어떤 형체를 본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하였지만, 그 앞에 내용을 보면 야곱이 대면한 것은 천사였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며, 대화를 하였습니다. 야곱은 천사가 떠나간 후에 그곳 이름을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지명을 지어 불렀습니다. 실제 야곱이 본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였습니다.
출애굽기19:17-19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5:4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불꽃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때 불꽃 중에 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따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애굽기19:21-22) 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24)라고 말씀하시므로 성결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어떤 현상 즉 불꽃이나 구름등의 형상을 보았고, 음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2천 년 전 유대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므로, 사람이 직접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은혜였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으므로 굴러온 복을 스스로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게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승천하신 후에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때도 강력한 빛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나, 현상이나, 소리를 통하여, 혹은 나의 영혼으로 교감되어지는 체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복 중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직접 경험되어짐을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있지만, 그것이 내게 직접 경험되어짐은 신비로운 일이요. 제대로 된 복을 누림입니다.
신학자 핸드릭슨은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의 영혼이 채워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교제라"고 했습니다. 또 신학자 메튜헨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라고 말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과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져 기분 좋아지는 것" 이라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서 "하나님을 보는 복" 이야말로 복 중에 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런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물질, 명예, 권력등의 복과는 질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이 차원 높고, 수준 높은 복! 어떻게 누립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의 청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실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원망, 온갖 욕심, 원한, 등등이 비좁을 만큼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가루비누를 한 바가지와 물 한 바가지 먹고 흔들었다가 화장실 가서 뒤로 배출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을 뒤집어 드럼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글렀어! 나는 글렀어! 나 어떻게!"
마음의 청결의 의미를 이해하면 복이 보입니다. 물론 이 청결은 깨끗하고 불순물이 없다는 뜻도 가지지만, "청결"은 혼합에 반대되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여기에 "청결"이란 의미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일편단심 하나님을 찾는 것, 즉 마음과 생각의 분열 없이 하나님께 성실한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말씀을 듣거나, 혹은 전도를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을 감당할 때에, 내 마음이 다른 어떤 것에도 쏠리지 않고, 일편단심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리게 하는 마음의 청결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수시로 경험하므로, 행복하게 사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가끔씩, 어떤 분은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이런 경험은 예배드릴 때에, 말씀에 대할 때, 기도나 사역등 하나님께 집중할 때, 주로 경험되어집니다.
어느날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개운해지면서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말 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가면, 어제와 똑 같은 태양이지만 그렇게 눈부시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길거리에 가로수를 비롯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습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경험입니다. 기분 좋습니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므로, 나의 생각과 마음에 다른 것과 전혀 혼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음이 청결한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배 중에, 기도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도 계속 마음에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분노가 뒤 섞여 있어 혼란스러울 때는 이런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일편단심이 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혼합이 되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합니다. 답답합니다. 불쾌합니다. 짜증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이 확실한데, 내가 보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경험되지 않은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가지로 혼합되어 청결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옛날 구 소련시대에 크리스찬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번에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까지 갔다 왔는데, 하나님은 보지 못하였단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단다."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때 한 어린이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그 우주선 을 타고 가신 분이 마음이 청결하였습니까?" 선생님은 "글세 아닐꺼야!" 아이는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어요. 저는 이 교실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집중되어져 있으므로 마음이 청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기분 좋습니까? 육신의 눈으로는 아니지만, 영혼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제일 먼저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이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복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합니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 보는 복"을 인식하고, 누리고자 하는 기대는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십시오. 내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혼합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고, 기도에 집중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임을 알고 집중하여 보십시오. 마음을 모아 내게 주신 은혜를 묵상하고, 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보십시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마음에 분노와 미움과 원한과 욕심들을 그대로 품은 채,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깜깜합니다. 답답합니다. 기도하시고 기도하실 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안 계신 곳이 없이 다 계십니다. 예레미야23:24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기도만 하면 복 달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복, 천석꾼 천 가지 걱정, 만석꾼 만 가지 걱정이 따라오는 그런 복 말고, 염려 걱정이 전혀 섞이지 않는 복, 하나님을 만나는 복, 기분 좋게 살고, 행복해지는 복,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리며 살지 않으시렵니까? 이제 집중하여 마음을 청결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자 : 등대 날짜 : 10-03-21 18:44 조회 : 34
 
*본문: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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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씨 착하고 성실하여 칭찬 듣는 디씨(김씨, 이씨, 강씨, 디씨) 부부가 있었습니다. 디씨 부부는 또한 부자였습니다. 그에게 남매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아낌없이 그들에게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 자녀들 또한 그 부모의 사랑을 먹고 서로 남매간에 화목하게 지냅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그렇게 의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 칭찬을 합니다. "조 녀석들 과여 디씨의 자녀들이야! 복 덩어리야! 디씨부부도 복이야!" 그들은 어딜 가도 디씨 부부의 자녀로 인정을 받습니다. 디씨 부부는 그 아이들이 자기들의 자녀로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니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그들은 복덩어리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요씨 부부가 있었는데, 역시 마음씨 착하고, 칭찬을 들으며, 또한 가진 것도 넉넉하였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도 남매가 있었고, 이 부부도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씨의 자녀들은 말썽을 부리며, 둘이 붙어만 있으면 싸우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다투는 일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조것들은 요씨 부부의 자식이 아닐거야!" "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거야!. 요씨 부부가 불쌍해!" 라며 혀를 찹니다. 복덩어리가 복덩어리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생각해 봅시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 혹은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녀의 권리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즉 당신 자신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어떤 자녀도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사랑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복 덩어리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 또한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저 사람 하나님의 자녀 맞아? 아닐꺼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행복하지 못하고 남에게 비난을 받으며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일곱째 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 덩어리로서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과 구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혹은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 되는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자녀는 영원한 자녀이기에 다시 무엇을 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에 예화를 든 디씨의 자녀들처럼 "조 녀석들 과연 디씨 부부의 자녀들이야. 조것들 복 덩어리야!"라고 인정을 받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누가 가장 부러워할까요? 하늘에 있는 천사들입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열심히 충성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권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삼아 주신 우리가, 천사들 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천사들은 구원받은 우리를 너무나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천사가 부러워할 만큼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소위 "저거 하나님의 아들 맞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 지기는 커녕, "저거, 저것들, 저 인간" 심지어는 "예수 믿는 싸가지 없는 것들"이라고 불려 집니다. 복덩어리가 애물단지 취급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복의 완성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음 즉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질 때, 입니다. 누군가가 "과연 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야!" 라고 불려 질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을 완전히 누립니다. 이런 복 누려야 합니다.
그 복은 누가 받고 누립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영어로는 peace-maker, 즉 평화를 만드는 자, 화해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저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웃기고 있네!"라는 말을 듣는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려 지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지식이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출석을 잘못해서입니까?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입니까? 불신자들은 우리가 교회 출석을 잘 하고, 못하고 관심 없습니다. 성경지식 알든지, 모르든지 관심 없습니다. 십일조 하든지, 안 하든지 전혀 관심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평화를 만들어 내지 못함에 있습니다. 분열과 다툼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 교단이 작년부터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보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그 내분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기사를 보면서, 예사로 볼 일이 아니구나! 우리 교단은 아니지만, 우리 한국기독교에 미칠 영향이 심각해지겠구나!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기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확 들었습니다.
분열과 분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화해가 이루어지고,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 즉 평화를 만들어내는 피이스메이커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명인데, 오히려 믿는 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분쟁과 분열이 그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배려하여, 화해와 화합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문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을 누리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엔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엔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엔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엔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엔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엔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여주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여주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아낌없이 줌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서&nbsp;용서를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게 됨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2:14)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예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53:5)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릴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받으시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누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예수님처럼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누려야 할 복입니다.
거창하게 세계평화를 논하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는 가정에 평화를 만듭시다.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내가 평화의 도구가 됩시다. 희생과 섬김과 사랑으로 가족을 섬기십시오. 우리 아빠 과연 하나님의 자녀야! 우리 엄마 과연 하나님의 자녀야! 가족들이 서로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게 될 정도이면 가정은 행복해집니다. 이 보다 좋은 복이 있습니까?
교회에 평화를 만듭시다. 내가 교회 안에 평화의 도구가 됩시다. 먼저 오고 나중 오고, 많이 알고 적게 알고, 그런 것 가지고 앞서려고 하지 말고, 희생과 섬김과 사랑으로 서로를 섬깁시다. 우리끼리 솔직히 말해서, 교회 안에만 평화가 이루어져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다툴 일이 뭐 있습니까?
이웃과의 평화를 만듭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양보하세요.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에도 다른 사람이 주차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합시다. 쓰레기 분리수거 더 잘합시다. 저층은 엘리베이터 이용하지 말고 걸어 다닙시다. 그러면 전기세 절약하여 나도 이웃도 그만큼 덕 봅니다. 무엇보다도 베스트가 많아집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 갈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 하게 하소서"
여러분! 희생과 섬김과 사랑으로 peace-maker 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을 받는 복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복 덩어리가 복 덩어리가 되게 하십시오.

 

 
설교자 : 등대 날짜 : 10-04-11 22:02 조회 : 27
 
본문: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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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승려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쓴 '무소유'란 책이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는 억대까지 올라가는 헤프닝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무소유로 말하면 예수님을 따라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계셨으니, 무소유를 강조한 승려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너희도 나와 같이 머리 둘 곳도 없이 무소유로 살아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허락하셨던 복, 즉 "땅에서 충만하고 번성하게 하신 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소유가 아니라, 소유한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다 버리고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은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것은 그 어떤 행위도, 대가도 치르지 않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부의 일부로 선한 행위를 하여 영생을 얻으려는 그 청년의 잘못된 생각을 깨드리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부요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 마다 부요하게 됩니다.
물론 청지기 정신과 무소유의 정신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정신은 소유하면서 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땅의 소산과 자원들을 사용하여 끊임없는 발전을 통한 부와 번성을 이루고, 그것으로 하나님나라와 뜻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려가 말하는 무소유는 말 그대로 소유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삼하나만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산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돌아가겠습니까!
물론 무소유가 행복일 수 있습니다. 혼자서 남과 경쟁할 것도 없고, 그저 자기 한 몸 누일 곳 있고,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자연과 벗 삼아 수양에 정진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교육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며,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주어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 무소유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을 소유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행복 유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한 가지를 소유하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예수 있으면 다 있고, 예수 없으면 다 없습니다. 예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시고 우주만물을 경영하시는 CEO.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나의 삶의 주인으로, 왕으로 믿는 자는 최고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해당된 줄 믿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좀 더 차원 높은 복을 추구하며 나아갑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곱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복,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 그리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도 있으며, 배부름 즉 만족한 삶의 복,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는 복, 또 하나님을 보는 복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이었습니다. 이 일곱 가지의 복은 모두가 다 현세에서 누리는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복의 종합 선물 셋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마지막 여덟째 복은 현세보다 내세에 누릴 복을 말씀하시므로 팔복은 현세와 내세까지 누릴 복의 완벽한 종합선물 셋트가 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상이 큼이라"
10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와 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 있다." 이것 역시 역설입니다. 박해 받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요. 괴로움입니다. 물론 박해 그 자체는 고난이요. 괴로움으로 결코 복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것은 충분한 보상이 보장되어 있기에 복이 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 는데, "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11절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나(예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의"는 곧 예수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위하여, 혹은 예수 때문에 박해받고 욕먹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라고 현재형이 아닌 "박해를 받은 자는"는 과거형을 씁니다. 이것은 곧 예수를 위해 박해를 받았던 경험을 가진 자는, 그 경험이 곧 천국의 소유권이 되고, 또 천국에서 상 받을 증명서가 됨을 말합니다.
혹 어떤이는 그럴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공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가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를 위해 박해를 받은 것이 소유권이 된다면 모순이 아닌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천국은 예수를 믿음으로 갑니다. 절대변할 수 없는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며, 내 삶의 주인과 왕이심을 믿고 고백함인데, 예수를 위해 박해를 받을 상황에서, 예수를 거부 또는 도망을 간다면, 그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한 것이 진실이겠습니까?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이라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예수를 믿다가 어려움과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예수님은 뒷전으로 밀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예수 믿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한 종교를 가진 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고백하였으면, 예수를 위해 박해 당하는 것을 겁내지 말고 당당히 그 박해를 받으며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곧 믿음의 확실한 증거이고, 그 증거를 가진 자는 천국소유에 전혀 문제가 없게 됩니다. 또 하늘나라에 서 그 박해 받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 즉 상을 받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붙잡혀 하룻밤을 감옥에서 고생한 후, 그 이튿날 법정에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원들이 "다시는 예수를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 만약 전하면 다시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경고와 함께 큰 위협을 하고 풀어줍니다. 그때 석방된 사도들이 교회로 돌아와서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너무 힘듭니다. 저들을 심판하시고 이 고통이 끝나게 하시옵소서. 박해가 지긋지긋합니다"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사도행전4:27-30) 라고 오히려 "그래도 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사도행전4:27-31)
그들이 박해를 피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이 예수를 구주와 주인과 왕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과연 천국갈 수 있을까? 라고 의구심을 가집니다. 예수를 위해 받는 박해를 피하지 않는다면, 천국이 내 것임이 확실합니다.
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거나 박해를 받습니까? 왜 내가 박해 받을 때에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원망하십니까? 그것이 나의 믿음을 증명하고 천국을 소유하며, 천국에서 상 받는 복의 증명서임을 기억하세요. 전도하다가 욕먹고, 박해를 당해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것이 복입니다. 어떤 분은 조용히 나 혼자만 믿겠다. 그러면 집안이 조용하고 평화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가짜 평화, 즉 위장된 평화입니다. 복음이 전해져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겁내지 마십시오. 그 분쟁은 사람을 살리는 분쟁이요. 참된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박해를 두려워 말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야 말로, 천국을 소유하고, 하늘나라의 상급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나의 믿음이 확실히 구원받는 믿음이고, 천국을 확실히 소유할 믿음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의 즉 예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마세요. 바로 그 박해가 믿음의 증거요. 천국의 소유권이고, 하늘에서 상 받을 증명서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즉 지금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은 선지자들도 다 박해를 받았었고, 사도바울 또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6:17) 즉 예수로 말미암아 받은 박해로 인한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받는 어떤 박해도, 손해도 나에게 해가 아닌 복이 됨을 명심하시고, 어떤 일을 만나도 당당하게 나아가, 이 땅에서도, 저 하늘나라에서도 풍성한 복을 누리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