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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마5:4)

에반젤(복음) 2020. 10. 8. 01:44

애통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마5: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한 구절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8가지 복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은 그 중 하나의 복에 대한 말씀이다. 즉, "애통하는 자"의 복이다.

 

여기에서 “애통한다.”는 말인 “펜데오”는 앞 절에서 언급된 영적 가난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영적 상태와 죄의 회개와 관련된 슬픔과 고통을 가리킨다.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하는 애통이다. 이것은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슥12:10대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실 때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경건한 슬픔"으로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다. 고후7:10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통하는 자”는 회개의 생활을 하며, 자신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서 하나님께서 물러서신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그래서 고후7:11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은 회개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돌이켜 하나님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애통하는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중보자의 마음으로 애통하며, 겔9:4에서 하나님께서도 구별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 이는 자신은 마치 의로운 사람인양 교만하여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정죄하고 비난하며 책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체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가슴 아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애통하는 자”는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는 환란에 대하여 체휼하는 마음으로 동정하며 애통한다. 그들은 죄로 인하여 환란을 당하여 고통하고 있는 자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고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근심하며, 운다. 이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하며 애통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평강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길로 돌이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중보자의 마음으로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눈물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듯이,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의 눈물을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기를 내던지고 간구한 사랑으로 그 딸이 구원 받은 것을 기억하라. 4명의 친구들의 지붕까지 뜯고 침대를 달아 내린 필사적인 노력으로 중풍병자가 구원 받은 것을 기억하라. 내가 중보하는 마음으로 애통하며 흘린 눈물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나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애통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겔9:4대로 애통하는 자들을 심판 중에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 애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셈이다.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죄인들 때문에 종종 눈물을 흘리셨던 위대한 애통자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애통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죄악에 가득 차 있고,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노리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 또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나 자신과 똑같이 그렇게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넘어지고 쓰러지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이 교회에서도 죄와 허물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무릇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늘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84:6대로 우리가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는 은혜를 입혀 주신다. 그래서 시84:7대로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시 때때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혹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요한계시록에서 약속하신 대로 하늘나라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완전한 저 세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얼마나 위로를 받는가?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애통함이 없는 것만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오늘 본문 대로 애통함이 있는 것이 복이다. 애통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즐거움의 산, 천국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