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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식 이렇게 하라 (마 6:16-18)

에반젤(복음) 2020. 10. 8. 00:44

금식 이렇게 하라 (마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시간에 “금식 이렇게 하라”라는 제목입니다. 금식이란 음식 섭취를 중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금식하는지 알아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금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금식은 왜 하는 것입니까?

 

1. 간절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국가나 인류 등 큰일을 위해서나 어려운 일 당했을 때 합니다. 사람이 곡기를 끊는 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의 각오 만큼 간절한 마음의 표시가 또 있겠습니까?


2. 회개의 표현으로 합니다.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무릎을 꿇는다든지 금식한다든지 이렇게 육체가 합세해 주면 더 진실해집니다. 그래서 구약에 회개할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했습니다.


3. 자기 훈련입니다.

 

우리 자아의 방종과 방심 습관과 실수 등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는 일에는 금식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자아는 내가 제어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십자가에서 단 번에 이루신 일이 있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부분이 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 하는 부분이 자아부분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고도의 신앙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면 대단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식은 비단 음식 절제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을 헤프게 쓴다면 돈 금식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동안 돈을 쓰지 말고 살아보세요. 옷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옷 금식도 해보세요. 수수한 작업복만 일정 기간 입어보는 것입니다.


잠이 많아서 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 금식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아침잠이 많습니까? TV 드라마를 오래보아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TV 금식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말이 너무 많아서 말에 실수가 많다면 말 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갈 땐 마스크 쓰시고 대화는 글로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훈련하는 여러 금식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4. 참된 신앙 갈망입니다.

 

17절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하지 말라 하지 않으시고 금식할 때가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금식을 부정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우리가 금식할 때란 언제일까요?


마9:14∼1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여쭈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금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우리가 때로 세상 것에 팔려 사랑하애 할 신랑 예수님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그 때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금식하라는 말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혹시 세상 것에 마음이 팔려 신랑 예수님이 멀리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금식하며 자기 욕구를 쳐서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너무 육신의 일에 얽매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육적의 일에 얽매이다 보면 주님을 가까이하는 영적인 일에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이 금식입니다.


5. 낮은 자리의 체험입니다.

 

이것을 체휼이라고 합니다. 금식을 통해 가난한 자의 마음을 알고 배고프고 고통 받는 자의 수고를 알고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가진 것으로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그것이 금식의 정신입니다. 금식으로 이웃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58:3-7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하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금식하면서도 금식의 목적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경건훈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입니다. 항상 금식하면 안 되지만 필요할 때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이 주는 육체적 도움도 있습니다. 닭이 늙어 알을 낳지 못하면 금식으로 환우를 시키면 다시 새 닭이 되듯 금식은 육신의 질고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금식을 잘하면 영육 간에 아주 유익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하면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신앙과시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고 숭고한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육신의 교만과 명예심이 고개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금식하면서 또 다른 탐욕, 더 무서운 교만의 탐욕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미 수없이 언급한 대로 산상보훈 한 구절 한 구절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금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에 있어서도 잘못하였습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금식했습니다.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단체적 국가적으로도 금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하라고 율법에 명하셔서 한 것 아닙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에게 금식하라고 명한 것은 1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에만 온종일 금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강제는 아니지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는 금식함이 바른 모습입니다. 대속죄일에 금식했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그런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오실 예수를 위해 그랬다면 오신 예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은 좋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며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이유는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한 신앙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날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장날이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겠습니까? 그 날을 통해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방송국 기자들이 카메라 들이대면 잘하고 들이대지 않으면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옷도 헌 옷을 골라 입고 애통하며 기도하다 찢은 것처럼 일부러 찢은 옷을 입었습니다. 머리는 손질하지 않고 몸에는 더러운 먼지에다 얼굴은 금식한 티를 내려고 재를 발라서 초췌하고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커다란 오해였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보시도록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금식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영적 교만입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16절 하반부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세상에서 인정 다 받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바로 해야 합니다. 바른 금식은 17-18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을 숨길 수는 없겠지만 일부러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도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금식에는 엄청난 상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적 육신적 여러 부분에 유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귀한 금식을 하면서 육신의 욕망에 끌려 교만과 명예의 잘못을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부터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바른 금식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영의 문제 육신의 문제 기도하는 문제들이 다 해결되어 영광 돌리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