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학과 진화/- 창조론

낙타와 사반, 토끼의 식용을 금지한 창조섭리

에반젤(복음) 2020. 10. 2. 12:38

낙타와 사반, 토끼의 식용을 금지한 창조섭리

1. 낙타

낙타는 어떤 동물인가

성경의 약대(Camal)는 낙타(駱駝)를 가리킨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완전히 갈라지지 않아 네 발의 발바닥으로 걸어 다니면서 중동 지방에서 주로 짐을 운반하거나 이동하는 데 사용되던 포유동물이다.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엄밀한 의미에서 해부학적으로 오늘날 분류학자들이 말하는 반추동물은 아니었다. 반추위와 유사한 위(胃)를 가지고 있어 미생물 발효는 일어나지만 구조상으로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낙타나 라마, 알파카 같은 동물들을 유사반추동물(pseudoruminant , 類似反芻動物)이라고 부른다.

 

낙타가 부정한 동물로 규정된 이유는

낙타(약대)가 부정한 동물로 규정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레 11:4) 성경은 낙타에 대해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레 11:4-8). 이것이 성경에서 낙타의 식용을 금지한 전부였다.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낙타는 당시 중동 지방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만일 낙타를 정결한 짐승으로 규정하였다면 소나 양보다 번식률도 극히 낮은 낙타는 손 쉽게 멸종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다. 고기와 젖도 별로 공급하지 못하나 광야의 운송 수단이었던 낙타를 정결한 짐승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다.

 

이 낙타는 성경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다. 특별히 구약에 많이 등장한다(창, 출, 레, 신, 삿,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 에스라, 욥기,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서 그리고 복음서에 등장). 실제로 낙타는 인류역사 초기부터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던 흔적이 보인다. 의인 욥은 양 7천 마리, 낙타 3천 마리를 보유한 부자였다. 역사적으로도 단봉 낙타는 이미 기원전 3천 년 전 이집트에서 나타나고 있다. 낙타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낙타를 선물한 내용부터였다(창 12:16). 고대부터 낙타가 얼마나 중동 지역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는 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낙타의 기원, 진화(?)

진화론자들은 이 낙타가 사막에 알맞게 적응되어 진화된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낙타가 사막에 알맞게 진화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낙타는 단지 그 어느 동물보다 사막에 잘 견뎌온 동물일 뿐이다. 그럼 낙타는 어떻게 사막 기후에도 견딜 수 있었을까?

 

첫째 낙타는 변온 동물이 아니지만 하루에 최대 6℃ 내외의 체온을 변화 시킬 수 있다. 34.5℃-40.7℃까지 체온이 변화한 기록이 있다. 낙타는 체온 조절이 미숙한 동물이란 그런 걸까? 그렇지 않다. 바깥의 온도에 맞추어 스스로 체온을 변화 시키는 낙타의 능력은 수분의 손실을 막아주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 더울 때는 체온을 올리고 추울 때는 체온을 내리는 방법으로 훌륭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둘째 낙타의 등에 있는 혹의 역할이다. 낙타의 체중은 대략 700kg 내외에달한다. 그 중 혹은 70kg 내외 이다. 혹은 지방으로 가득차 있다. 낙타 등의 혹은 (1) 첫째 영양분의 저장고 역할을 한다. 낙타는 안 먹고도 일주일을 견딜 수 있는 지방을 소유하고 있다. (2) 둘째 낙타의 혹은 사막의 격렬한 직사광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소형 열차단기인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낙타는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짐 운반책이었다. 만일 낙타가 없었다면 실크로드 교류 뿐 아니라 동서 간 교류뿐 아니라 여러 지역 간 교류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낙타의 콧구멍은 코의 아귀에 붙어 몰려오는 모래 제거에 유리하다. 눈은 주로 위에 붙은 눈썹과 수많은 속눈썹을 통해 모래 환경에서 보호 된다. 낙타는 사막과 초원의 어떠한 초목이든지 소화할 줄 아는 튼튼한 위장을 소유하고 있다. 200kg 내외의 짐을 견디며 하루 평균 44.8km를 달린다. 단봉낙타가 한 사람을 태우고 하루 160km를 간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특별한 동물, 낙타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섭리

낙타는 우연히 진화 된 것이 아닌 홍수 이후 생태 환경이 파괴되어 사막화가 시작할 무렵부터 인간이 이용하도록 남겨진 동물임이 분명하다. 즉 그 어느 동물보다도 사막에서 탁월하게 적응하고 견딜 줄 아는 독특한 이 동물을 하나님은 고대부터 사람들이 서로 오고가고 소통할 수 있도록 이 땅에 남겨 두고 배려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낙타는 광야와 사막지대에서 이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 동물의 고기를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였다.

 

2. 사반과 토끼

토끼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반은 조금 생소하다. 같은 포유류이지만 토끼목(─目 Lagomorpha) 토끼과(─科 Leporidae)에 속한 설치류(rodentia)인 토끼와 달리 사반은 소, 사슴, 돼지, 양처럼 발굽이 짝수(우수, 偶數)인 몸집이 작은 우제류(偶蹄類, artiodactyla)이다. KJV과 ASV는 사반을 “토끼”로 번역하고 RSV는 “오소리”로 번역하고 있고 NIV는 사반을 ‘coney’(레 11:5)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성경 본문이 사반과 토끼(rabbit)를 구분하는 것으로 보아 사반을 토끼로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사반에 대해 성경은 주로 사막 지역에 서식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사반을 토끼와 몸집이 비슷하여 바위 지역에 살고 있는 바위너구리(rock hyrax)가 타당하다고 추정한다. 잠 30:26에서 사반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다고 했고, 시 104:18은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라고 했으므로 필자도 사반은 바위너구리라는 견해가 맞다고 본다.

 

사반은 크기가 토끼만한 짐승인데 자기 보금자리를 지을 때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며 협곡과 아라비아의 바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동물로 토끼와 비슷하나 꼬리가 없고 발은 흙을 파기에 적합하지 않아 굴을 파서 살기보다는 바위 사이에 거주하며 집토끼만큼 크지만 굼뜬 체격의 초식 포유동물로 서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바위 많은 지역에 산다.

 

성경의 새김질과 분류학의 반추동물은 다르다

성경은 이 사반과 토끼를 새김질하는 동물로 소개하고 있다(레 11:5∼6). 되새김질하는 반추동물로는 기린·사슴류·낙타·라마·소·영양·양·염소 등이 있다. 이들은 위(胃)가 3∼5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사반이나 토끼는 여러 개의 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반과 토끼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학자들이 말하는 되새김질하는 동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왜 이들을 새김질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했을까? 사반과 토끼가 식물을 섭취하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오늘날 학자들이 말하는 반추동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새김질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토끼를 사육하거나 유심히 관찰한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오물오물거리는 이 동물의 모습을, 새김질하는 정결한 동물로 오해를 해서 사냥할 것에 대비해서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이 동물이 부정하다는 것을 정확히 규정해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신 14:7).

 

다음과 같은 또 다른 관찰 보고도 있다. 산토끼는 가끔 자신이 누운 똥을 다시 먹는 경향이 있다. 이때 산토끼는 새로운 식물을 입으로 먹지 않고도 무엇을 섭취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 습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 먹은 식물은 창자를 통과하면서 뱃속에 서식하는 박테리아에 의하여 처리된다. 그러나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많은 부분이 그대로 똥으로 배출된다. 이때 다시 섭취된 똥은 두 번째 뱃속을 통과할 때는 훨씬 더 잘 소화될 수 있다. 산토끼가 여러 개의 위(胃)를 가진 것은 아니나 되새김질과 원리는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생물분류학은 18세기 크리스천 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에 의해 시작됐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대한 분류는 바로 생물분류학이 시작된 이후 규정된 것이다. 즉 성경의 새김질은 오늘날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반추동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굳이 수천 년 전 쓰여진 성경의 언어를 오늘날 과학 용어에 적용 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되새김질이란 오늘날 생물분류학을 염두에 둔 표현이 전혀 아니다. 단순히 새김질하는 동물처럼 그 입을 놀리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학문적 반추 동물이란 18세기 크리스천 분류학자 린네 이후 시작된 것이므로 수천년 전에 기록된 되새김이란 말을 훗날 만든 학문적 반추 동물에 적용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토끼의 되새김이 음식을 삼키고 뱉든 그것은 분류학(taxonomy)이 말하는 반추 동물의 행동이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도 사반과 토끼를 되새김 동물이라고 억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적용 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왜 위가 하나뿐인 토끼를 위가 서너 개 있는 반추동물이라고 집착하는가? 그렇게 꿰어 맞추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추동물이란 그저 성경 이후 사람들이 분류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규정한 동물의 집단일 뿐이다. 후세의 학문적, 과학적 언어(반추동물)에다가 과거 하나님의 말씀(되새김)을 억지로 적용시키려는 문자적, 과학적 시도는 심각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집착은 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집착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경의 권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박쥐를 포유류가 아닌 새로 본 것도 같은 이치이다(레 11:19). 성경이 박쥐를 새라 했다고 억지로 새라고 집착하는 것은 토끼를 새김질했다고 했으므로 반추동물이라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집착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성경은 그런 인간적인 문자적 집착으로 보호되는 이상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이 아닌 그 자체로 신적 권위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구체적인 과학서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반과 토끼의 식용을 금지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

고대 앗수르 조각 등을 보면 토끼 등을 사냥하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가나안 주변의 이방인들은 토끼 고기를 비롯한 많은 야생동물들을 거리낌 없이 잡아먹었음을 알 수 있다. 가축이 아닌 야생에서 활동하는 이 같은 잡식성의 동물들은 다양한 특수기생충을 체내 보유하고 있으므로 섭취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요즘도 특수 기생충의 인체 감염 기사를 언론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바로 일부 우리 한국인들이 법으로 금지된 야생동물을 무분별하게 섭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야생동물들의 피를 생식하거나 날것을 육회로 먹는 행위 등은 위생상 자제할 필요가 있다.

 

뱀 쓸개나 잉어 쓸개의 독성이 급성신부전증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가물치회나 열대의 뱀 등을 생식할 때 몸에 들어오는 열대 기생충인 나토스토마에는 아직도 특효약이 없다. 일부 해양 물고기 등을 생식할 때에도 아나사키스 홉충과 같은 희귀한 기생충이 우리 몸에 침투할 수 있다. 뱀에는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만큼 기생충이 많다. 심지어 우리 국민이 유난히 즐기는(?) 곰의 웅담에도 박테리아나 그 이름도 기억이 쉽지 않은 트리스티세르코치스와 트리치넬라 속선 모충이라는 유해한 기생충이 존재한다. 과거 태국 최대 '두싯 동물원(Dosit Zoo)'의 원장이며 수의사였던 알롱콘 마하놉 박사는 이들 기생충이 인체에 들어갈 경우 간과 비장에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태국에 와서 온갖 야생 동물들을 보양식으로 마구 섭취하는 한국인들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또 곰에게서 호흡기를 통해 유입될 수 있는 탄저병의 병원체는 폐렴이나 균혈증(菌血症)을 유발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위험 요소들이 야생동물인 사반과 토끼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야생동물의 피는 온갖 잡균과 독소와 노폐물과 기생충의 통로이다. 동물이 도살될 때 받는 동물의 스트레스는 동물체 내(피)의 독소 내지는 노폐물 분비와 관련된다. 포화지방으로 되어 있고 노폐물들이 쌓여 있는 동물의 기름도 마찬가지이다. 혐오식품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식품 위생학적 상식이나 의학적 상식이 너무 무지한 편이다. 그에 비해 육식할 경우 날로 먹지말고 구어 먹으라는 말씀이나 피, 기름 등을 먹지 말라(신 12:23, 24, 레 3:17)는 성경의 말씀은 오늘날의 위생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이 역작용이 많은 야생의 사반과 토끼를 식용으로 쓴다는 것은 팔레스틴 땅의 생태계 교란을 차치하고라도 분명 소탐대실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보호를 위해 유대인들에게 이 같은 야생 토끼와 사반의 고기를 섭취하는 것을 당연히 금지하였던 것이다.

 

조덕영 박사 / 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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