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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제사와 기독교

에반젤(복음) 2020. 9. 20. 05:43

 

전통제사와 기독교

 

 

 

-조상제사 문제를 중심으로-

 

현요한

(목사, 장신대 교수)

 

Ⅰ. 머리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그것은 진공 속에 들어 온 것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이미 여러 가지 종교들이 있었고, 그 영향 속에서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전파되고 성장하면서, 갈등과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 왔다. 그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는 바로 조상 제사에 관한 문제이다.

 

이로 인하여 초창기 천주교인들은 심함 핍박을 받았고, 순교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개신교의 경우도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여 왔다. 개신교 선교 초기 기독교는 대체로 조상 제사 중지를 입교 필수 조건으로 삼았다(백락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p. 231). 마펫 선교사는 원입교인에게 우상숭배와 조상제사 폐지, 성수주일, 부모공경, 축첩금지 등을 가르쳐 세례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삼았다( 류순하, [기독교 예배와 유교 제사] (서울: 숭실대학교출판부, 1996), p.98).

 

이로 인해 기독교는 신자가 부모와 문중으로부터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1920년 경북 영주에서는 남편이 예수를 믿고 부인에게 朝夕上食을 폐하라 하자 부인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동아일보에 보도되고(“애매무죄한 기독교의 희생자”, 동아일보, 1920. 9. p. 3, 류순하, ibid, p. 100에서 재인용)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절하는 자체를 우상숭배로 본 지나친 사례도 있었다. 즉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이 부친께 엎드려 절한 것이 우상숭배로 꾸짖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7), p. 96, 류순하, ibid, p. 102에서 재인용).

 

이렇듯이 조상 제사 문제는 우리나라 각 가정에서 수많은 갈등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며, 이는 기독교인들의 실제 생활과 선교에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위와 같은 사례들에는 지나친 면도 있으나, 그렇다고 요즈음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기독교도 조상 제사를 정당화하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조상 제사 문제는 1980년대에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조상 제사에서 교인이 절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이단 시비가 걸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상 제사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문화, 종교, 가정의 일상생활 등에서 부딪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먼저 이 문제에 대한 기존의 여러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살펴 본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추모예배를 보완하는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여러 가지 대안들

 

1. 천주교의 경우

 

초기 로마 천주교의 전래와 선교는 많은 박해를 야기하였는데, 그 중에 심각한 문제가 바로 조상제사의 문제였다. 로마 교황 클레멘트 2세(Clement Ⅱ)는 1715년 3월 19일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교서를 공포하였다(류홍열, [한국사회사상사논집] (서울: 일조각, 1980), p. 373). 우리나라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첫 순교 이후 신해교란을 거치며 천주교의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의 교시는 “拜孔 祖” 즉, 공자를 숭상하고 조상께 제사함은 시대의 변천과 풍속 정신이 바뀌어 진 현 세대에 와서는 한갓 선조에 효성을 표시함에 지나지 않는 민간 의식이라 하여 이를 허락하였다(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 (서울: 탐구당, 1980), p. 32).

 

그러나 천주교 측에서도 사진이나 위패의 설치, 분향, 제상 차림, 절하는 것 등 그 기본적인 제사 형식은 수용하였으나, 조상의 혼령이 와서 그 제사를 받으며, 음식을 먹는 것을 뜻하는 의식(飯哈, 皐復, 闔門)이나, 이교적인 축문 등 미신적인 것은 금지하였다(강연희, “조선 후기 사회에 있어서의 서학의 조상 제사 문제”, [사목](1975, 1), p. 101), 류순하, op. cit. pp. 199∼200).

 

참고로 천주교의 조상 제사 예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준비〉 1) 집 안팎 청소, 2) 목욕재계, 단정한 옷, 3) 고백성사로 마음 준비, 4) 차례상 준비, (형식에 구애 받지 말고), 5) 벽에는 십자가상을 걸고, 그 밑에 선조의 사분향도 무방. 〈순서〉가급적 온 가족이 교회에서 아침 미사를 참여한 후에 이 예식을 가지도록 함. 1) 성가, 2) 분향과 배례, 3) 시작 기도, 4) 성경 봉독, 5) 가장의 말씀, 6) 선조를 위한 기도, 7) 분향과 헌물(술, 과일, 음식 등), 8) 축문(선조의 위업 칭송, 불효에 대한 용서를 청원, 후손으로서의 결의), 9) 묵념, 10) 평화의 인사, 11) 영광송, 12) 작별 배례 등이다(김종수, “한국 천주교의 전통적 제례 의식”, [기독교사상] (1994. 9), p. 41.).

 

2. 진보적 개신교의 경우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제사가 우상 숭배가 아니요, 조상에 대한 효심의 발로요 추모의 방식이므로 기독교인이 조상 제사를 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YMCA 총무였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 이상재는 1920년 조상 제사 문제로 한 가정의 부인이 자살한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자 동아일보에 조상 제사는 우상 숭배가 아니며, 그것은 가정사이므로 제사를 지낸다고 교회에서 출교할 필요는 없다고 썼다(“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 동아일보, 1920. 9. 5, p. 1, 류순하, op. cit, p. 115.).

 

근래에 한국신학대학의 이장식 교수는 조상숭배 의식이 기독교 선교의 커다란 저해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제사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공경과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에 결코 우상이 아니라는 계몽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YMCA의 명예 총무 전택부는 신자들이 제사를 폐하다보니 부모의 기일조차 잊어버리게 된 것은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하였다(“기독교계에 제사 논쟁”, 한국일보, 1981. 12. 4, p. 6.). 서울대학교의 정진홍 교수는 “전통 의례의 제사와 장례를 우상 숭배나 조상의 신격화로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편견이 빚어 낸 독단” 이라고 지적하고, 기독교에 의해서 전통적인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정진홍, “한국 기독인의 생활문화”, 중앙일보, 1982. 7. 2.).

 

이와 같이 기독교도 조상 제사를 수용하자는 입장은 대개 조상 제사를 하나의 효행이요 문화적인 요소라고 보고, 복음의 토착화라는 차원에서 조상 제사를 수용하자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조상 제사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한국의 조상 제사에는 기독교가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유교에서도 그 윤리와 제례가 그 종교적 성격과 확연히 분리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이점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자.

 

류순하 교수는 교역자 및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조상 제사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보수적 기독교가 행하고 있는 조상에 대한 추도식은 “죽은 이를 기념하여 애도하고 추모하는 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은 미흡하다고 주장하였다(류순하, op. cit, pp. 158, 166.). 그는 추도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나(ibid, pp. 158∼164.), 그가 말하듯이 역대하 16:14이나, 역대하 21:19 등에 조상의 시신 앞에 분향한 일 등은 조상을 신으로 여겨, 그와 교통하려고 그에게 절하고 제사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추도식이 서구 문화 전통에는 부합하는 것이지만, 우리 한국인의 몸짓으로는 덜 맞는다고 보고, 추도식의 미흡함을 주장하였다(ibid, p. 166.). 그는 설문 조사에서 제사는 효의 표시로 본다고 응답한 53%의 사람들과, 추도식과 제사를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한 56%의 사람들의 입장을 내세우며, 현재 기독교의 추도식은 조상 제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음성을 들으며 교통할 수 있는 정도로 수용하자는 데까지 나아간다(ibid, p. 169.).

 

그가 말하는 대안은 조상의 제사의 현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빛 안에서 조상 제사를 통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공동체로서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조사이나 후손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합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ibid, pp. 190∼191.).

 

그러나 그가 시행한 설문 조사라는 방법이 이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형편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추도식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도, 결국 얼마나 거기에 적응하느냐 하는 문제이지, 절대적인 판단이 될 수는 없다. 대를 이어 그리스도인인 가정에서는 아무 무리 없이 추도식으로 이어 가고 있지 않은가?

 

불교나 유교도 사실은 외래의 종교이며, 처음에는 우리 민족에게 생소한 것이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적응하고 익숙해진 것일 뿐이다. 더구나 류순하 목사는 산 자가 죽은 자의 음성을 들으며 교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적 신앙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이 일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볼 뿐 아니라,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레 19:31, 20:27, 신 18:10-12, 눅 16:27-31).

 

물론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신자일 경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성경적 신앙에서 정당하다. 그러나 죽은 조상들과의 직접적인 영교는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무당을 통해 조상과 교통하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영적으로 판단하여 볼 때, 실제로 조상의 영이기보다는 악령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 영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조상을 핑계로 결국 악령과 교통하는 미신적이고 위험한 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류순하 목사는 계승하자고 주장하면서도, 다시금 조상과의 교통이라는 위험한 종교적 요소를 접합시키고 있어서 문제가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경우는 성령의 은사들과 초자연적 역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 조용기 목사의 견해이다. 그는 비록 나중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측과의 이단 시비에 걸려 한 걸음 물러서기는 했지만, 조상 제사에 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부모를 절해서 섬기고 경배해서 섬깁니다. 산 부모에게 절하고 죽은 부모도 부모니까 절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로 하였다(김명혁, “제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 이종윤,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8), p. 72에서 재인용.). 그러나 살아 있는 부모가 아니라, 죽은 부모에게 절한다고 할 때, 도대체 어디다 절을 하는 것인가? 절을 한다고 해서 정말 부모의 혼령이 와서 그 절을 받는가? 등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이는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3. 보수적인 개신교의 경우

 

이종윤 목사는 조상 제사는 일종의 예배 행위로서 기독교적 예배와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우상숭배라고 본다. 제사를 하는 이들은 옛 중국의 관습을 따라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거기에 절하는데, 이는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물질적인 것도 하나님을 상징하거나 대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에게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이종윤, “조상숭배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답”, 이종윤 편,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pp. 12∼13.). 우리는 조상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 14).

 

또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영혼은 사후에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잠자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마지막 부활을 위하여 데리고 오신다고 한다(ibid., p. 18). 그러므로 구천을 떠도는 혼령을 섬기는 것은 기독교적 예배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후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이 죽은 즉시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로 간다고 한다(눅 23:43, 전 2:7, 히 12:23, 행 3:21, 엡 4:10).

 

그러므로 사후에 영혼이 구천을 배회하다가 자손의 섬김을 받거나 또 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눅 16:23-24, 행 1:25, 벧전 3:19). 따라서 제사나 후손의 공적이 영혼의 존재 양태를 바꾸지 못한다(ibid., p. 22∼23). 또한 죽은 자와 산 자는 서로 대화하거나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눅 16:19-31, 거지나 나사로의 비유). 그러므로 그는 죽은 조상의 영혼에 제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손봉호 교수는 조상 숭배는 자연주의 세계관과 계급적 사회체제의 반영이며, 변화된 현대문화에 그대로 접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상 제사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적 요소로서 외래문화임을 지적하였다(손봉호, “제사와 현대문화”, 이종윤 편,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pp. 38∼39.).

 

그에 의하면 중국의 모든 종교 의식은 만물이 하늘로부터 왔으며, 인간은 조상에게서 왔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ibid., p. 46.). 그러한 종교들은 자연주의 종교로서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연 종교가 아니라, 계시의 종교로서(ibid., p. 47), 자연주의를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계시종교인 기독교는 유교와 같은 자연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자연주의적인 조상 숭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ibid., p. 48).

 

김명혁 교수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조상 제사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이해를 정리하면서, 복음과 문화의 연속 및 불연속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복음과 문화가 상충될 때, 복음의 능력으로 문화는 심판을 받고 복음의 영역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로마 카톨릭이 자연과의 연속성을 주장하였다고 본다. 반면 깔뱅과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과 문화는 타락된 것이며 그 속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복음과 인간을 포함한 전 문화는 불연속의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김명혁, “제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 이종윤 편,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p. 59.). 반면 유교에서는 조상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결국 조상이 복을 주는 신의 자리로 전이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본다(ibid., p. 63.). 그러므로 김명혁 교수는 조상 숭배를 반대한다.

 

맹용길 교수는 조상 제사는 효의 연장선에서 볼 것이 아니며, 그것은 신주 혹은 귀신을 모시는 것으로서 성경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하여 조상 제사를 반대하였다. 그는 조상을 기념하고 추모할 수는 있지만, 제사는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십계명의 제5계명(출 20:12, 신 5:16)과 에베소서 6:1~2를 근거로 효를 설명하고, 칼 바르트 등 서양 신학자들이 이해한 부모 공경의 개념을 소개하고, 효경에서 말하는 효의 내용을 정리하여 비교하였다.

 

그가 조상 제사를 명백한 우상 숭배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제사에서는 신주를 3년 모신 후에 묘로 옮기는데 이는 조상을 귀신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우상 숭배가 된다는 것이다(맹용길, “효도와 제사”, 이종윤 편, [한국교회와 제사문제], p. 112.). 또한 조상 제사는 조령이 재해나 재앙을 막아준다는 의식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효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 형태로서 액운을 막기 위해 제사 드리는 것이다.

 

효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세 가지 즉 숭배의 의식, 조상을 귀신으로 믿는 의식, 재앙을 면하는 개념을 포함한다(ibid., p. 112.). 따라서 조상 제사는 사후의 존재를 귀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비인격체이므로 죽은 자와 산 자는 서로 대화하거나 교통할 수 없기에 명백한 우상 숭배라고 하였다(ibid., p. 113.).

 

이들의 생각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나 정서를 따른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기독교적인 행위가 조상 제사를 실행하고 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마치 “기독교인들은 조상의 은덕을 무시하고, 효도도 하지 않는 무례하고 못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는 점이다. 이러한 오해는 선교에 장애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선교 초창기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오해와 핍박을 받았던 것은 우리가 다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정신을 지켜 나가면서, 전통적인 한국 문화를 이어가는 우리 동포들에게 기독교 역시 부모를 철저히 공경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잘 보여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정신을 지켜 나가면서도 우리 전통 문화의 효도에 대한 정서를 수용하려는 얼마간 개방적인 태도들도 엿볼 수 있다. 박봉배 교수는 조상제사는 부모 공경의 문제이므로 새로운 조상숭배 형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추모나 기념에서 그쳐야 하며, 예배나 제사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았다(박봉배, “그리스도교와 조상 숭배”, [기독교사상], 제64권 (1963. 4), pp.22∼68.).

 

한경직 목사는 중앙일보에 실린 대담에서 조상제사는 “조상을 존경하는 경의를 표하는 데까지는 교리적 문제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한경직, “목사를 믿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중앙일보, 1983. 1. 1.). 그러나 이들은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새로운 형식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지는 않았다.

 

Ⅲ. 조상 제사의 종교적 성격

 

기독교에서도 조상제사의 예식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조상 제사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단지 효의 실천일 뿐이며, 조상에 대한 단순한 추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있을까? 유교는 본래 종교적이기보다는 철학적, 윤리적인 사상이므로 조상제사를 해도 그것을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혹은 조상제사의 종교적 성격만 제외하면 조상제사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제사라는 인간의 행위가 그 종교적 차원을 배제한 채, 도덕적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까? 유교 자체가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 종교적 요소를 제외한 채 조상제사만을 수용할 수 있을까? 유교적 조상 제사에서 과연 종교적 요소만을 따로 떼어 내고 볼 수 있을까?

 

류순하 교수는 유교의 제사는 “예배”란 개념으로 정의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하면서, 유교의 제사는 하나의 추모행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보고, 유교적 제사를 통하여 조상을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한다(류순하, op. cit, pp.176∼7). 그러나 유교와 그 제사를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만 볼 수는 없다. 유교 자체가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신들과 그들에 대한 제사의 체계가 있다. 제사 자체는 단순히 윤리적이기만 할 수 없는 종교적 행위이며, 기독교 윤리가 신앙과 불가분리이듯이, 유교 윤리도 그 종교체계와 불가분리이다. 유교의 종교적 성격과 조상 제사 문제에 관하여 금장태 교수의 설명을 빌어 알아본다.

 

1. 예(禮)라는 말의 의미

 

유교의 종교적 측면을 고찰 할 때, 종교의 보편적 현상으로 의례(儀禮)를 말할 수 있다. 의례는 곧 예(禮)의 문제로서 유교의 실천적 성격을 나타낸다. 의례는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이다. 여기서 길례는 곧 제례(祭禮)를 뜻하며, 조상 제사는 많은 제례 가운데 하나이다(금장태, [유교사상과 종교문화]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p. 146).

 

그런데 본래 예(禮)란 말의 뜻은 ‘실천하는 것’, ‘신을 섬겨 복을 받는 것’을 뜻하였다고 한다. 禮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示와 豊으로 되어 있다. 示는 二와 小로 이루어져 있는데, 二는 古文에서 上에 해당하며 小는 하늘에서 인간 세계에 비추는 빛, 즉 日, 月, 星을 통하여 구상적인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 주며 길흉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천문의 관찰은 인간이 천의(天意)를 이해하는 방편이 되며, 따라서 示는 神의 일로서 신성한 일을 의미한다고 한다(許愼, [論文解字], 금장태, ibid., p.150∼151에서 재인용). 豊은 禮를 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며 제사에 사용되는 것이었다고 한다(周林根),[中國古代禮],1966, p.8, 금장태, ibid, p.151에서 재인용.). 종합하여 보면, 示자가 하늘이 인간에게 현시(顯示)하는 것이라면, 豊자는 인간이 하늘에 전제(奠祭)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금장태, ibid, pp. 150∼151.).

 

그러므로 禮의 문자적 의미를 볼 때 곧 제사(祭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유교의 역사에서 禮가 의미하는 내용은 제사만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Ibid., p. 152.). 禮의 내용 중에서 우리의 주제에 관련되는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살펴보기로 하자.

 

2. 禮와 사회적 계급적 질서

 

禮는 二分, 三禮, 五禮, 大禮, 八禮 등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중 三禮는 尙書에서 天, 地, 人의 삼례라 하였다. 天, 地, 人은 중국인의 사유 구조의 근본 개념으로 이를 三才라 하였으며, 우주와 물질과 인간으로써 세계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다(ibid., p. 152). 여기서 천신(天神), 지기(地祇)는 모두 제사의 대상이 되며, 人鬼도 선조에 대한 제사가 있어, 三禮는 매우 중요한 분류법이라 한다(ibid., p. 153).

 

五禮는 書痙에서 吉, 凶, 賓, 軍, 嘉로 분류되어 있다(ibid.). 이 五禮에 대하여 鄭玄은 天子, 諸侯, 卿大父, 士, 庶民,과 관련지었고, 王肅은 王, 公, 卿, 大夫, 士로 보았으며, 孔安國은 公, 候, 伯, 子, 男의 예로 해석하였는바, 이는 禮를 행하는 주체 곧 인간의 사회적 계급적 신분에 관련지어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계급과 신분에 따라 禮의 실천 방법도 세분화되었다고 한다(ibid., p. 154.).

 

이렇듯 유교에서는 사회 계급적 질서를 떠난 禮는 예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공자도 신분을 벗어난 禮를 통렬히 비판하였다([論語], 爲政편, 금장태, ibid., p. 222에서 재인용.). 祭禮에 있어서 사회 계급적 구조는 먼저 제사의 대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禮記]의 曲禮편에 보면 천자는 天地와 四方과 山川과 五祀에 제사를 드릴 수 있고, 제후는 사방과 산천과 오사에 제사할 수 있다. 대부는 오사에만 제사할 수 있고, 士는 조상에게만 제사할 수 있다고 한다(ibid., p. 222.). 조상 제사에 있어서도 조묘(祖廟)의 수를 계급에 따라 달리하였다. [禮記] 王制편에 의하면 천자는 七廟, 제후는 五廟, 대부는 三廟, 士는 一廟를 세워서 제사하며, 庶人은 廟가 없어서 寢에서 제사하도록 하였다(ibid.).

 

이와 같이 제사 형태에 나타나는 사회 계급적인 양상은 上帝나 신의 체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孝와 군왕에 대한 忠은 모두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근원에 있기에 유교에서 신앙과 사회윤리는 항상 연결되는 것으로 본다([禮記], 祭統, 금장태, ibid. p. 224에서 재인용.).

 

3. 제사와 관련된 중국 유교의 제신(諸神)

 

이러한 禮와 사회적 신분은 또한 유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유교의 신의 영역은 天, 日月, 星辰, 歲와 四時, 風雨, 士와 社, 稷, 山川, 方位 및 여러 群神, 동물, 祖廟등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하늘과 조상숭배에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기로 하자.

 

상제(上帝): 天은 중국인에게 자연적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지배자인 무한자의 존재로 의식되어 졌으며, 上帝라고 불러졌다. 상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한다. 하늘의 상제에 대한 제사는 天子만 할 수 있었다(금장태, ibid., p. 182). 상제에게 드리는 제사로서 天祭 중, 체제( 祭)가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하늘에 대한 제사 뿐 아니라, 天神, 地示, 人鬼의 모든 제사를 포함하는 의미가 있어, 전체를 포함하면서도 天에로 歸一되는 제사라 한다(周林根, [中國古代禮敎史], p.66, 금장태, ibid., p. 183에서 재인용.).

 

그런데 공자 이후 발달한 윤리 사상은 天命을 인간의 내면화한 德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상제의 관념은 후퇴하여 자연 질서로 혹은 道의 개념으로 추상화되기도 하였다(금장태, ibid., p. 184.). 그러나 신의 개념은 天에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 속에 불가사의한 일 어디에나 표현되는 실재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禮記], 祭法, 금장태, ibid., p. 184에서 재인용.).

 

조묘(祖廟), 문묘(文廟): 孝의 儀式的 표현이 禮이며 이 예는 죽은 자에 대한 제례로서 조상숭배로 나타난다. 삼례의 세 가지 범주인 天神, 地祇, 人鬼에서 인귀는 곧 조상신이다. 인간의 근원에는 천지와 선조가 君師가 있으므로 인간의 현존재가 가능하다고 한다. 조상숭배는 생명의 근원을 경건히 하여 자신의 생명을 성화하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禮記], 祭儀, 금장태, ibid., p. 196에서 재인용.). 근원에 대한 숭배는 天의 숭배에로 연결되며, 조상은 상제에로 가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孝經], 금장태, ibid., p. 196에서 재인용.).

 

조상의 신위를 모신 곳이 祖廟이며 왕가의 조묘가 곧 종묘(宗廟)이다. 조상은 하늘에 상제와 함께 있어 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에게 복과 재앙을 내려 주기도 하며 후손의 뜻을 상제에게 전하기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조상에게 제사함으로 간접적으로 상제에게 복을 청할 수 있기에 조상숭배는 상제의 중보자인 조상에게 제사한다는 의의를 가지게 된다(금장태, ibid., pp. 196∼197.).

 

귀신(鬼神), 혼백(魂魄): 조상 숭배는 죽은 자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공자는 인귀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긍정하지는 않지만, 결코 부정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제사를 행할 때 신의 존재는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하였다([論語], 八佾 “祭如在 祭新如新在”, 금장태, ibid., p. 199에서 재인용.). 인간의 죽음은 魂魄가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다. [禮記]에서 魂氣가 하늘에 올라가고 形魄이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魂과 魄의 두 요소를 말한다([禮記] 郊特牲, 금장태, ibid., p. 199.). 귀신이란 말은 혼백이란 용어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혼백에 대하여 三魂七魄의 복잡한 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유교 체계가 인간 사후에 영혼의 실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며 영혼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하여 조상에 대한 제사가 행하여졌다는 것이다(금장태, ibid., pp. 199∼200.).

 

4. 제사와 종교성과 孝의 개념

 

중국 유교의 제사는 상고시대에 주술적이고 물활론적이었던 다신관이 천과 상제에 대한 신앙으로 바뀌었고, 이 상제의 신앙과 더불어 조상숭배는 중국 민족의 중요한 신앙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서 조상숭배는 영혼숭배와 맥을 같이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사람이 제사할 수 있는 영역은 조상신들뿐이다. 따라서 조상숭배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과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다. 조상의 신은 중국인의 신앙 속에 상제와 결합된다.

 

이에 대하여 금장태 교수는 천과 상제는 인격적으로 신으로서의 성격이 약하기 때문에 조상신과의 결합을 통해 종교성이 구현된다고 보았다(ibid., pp. 225∼226.). 이러한 유교의 근본적 신관인 상제 혹은 하늘은 유교 사상의 다른 근본적인 德과 관련된다.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고 하였듯이 덕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論語], 述而 "天生德於予", 금장태, ibid., p. 226에서 재인용.).

 

유교 윤리에 있어서 孝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여 “효는 덕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며([孝經], “夫孝, 德之本也”, 금장태, ibid., p. 226∼117.), 禮를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실천은 덕목이다. 이 효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禮의 의례적인 절차가 중시된다. 이것은 부모의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의 예법대로 경건히 드리는 데서 효가 실현된다는 것이다([論語] 爲政, 금장태, ibid., p. 227.).

 

효의 지극함은 생시의 부모에 대한 순종에서보다 제사를 통하여 조상신에 대한 공경에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하였다([孝經], 금장태, ibid., p. 227.). 이러한 이 효의 개념은 바로 인간 내면적 도덕성을 넘어 초월적이며 종교적인 개념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금장태, ibid., p. 227.).

 

공자는 鬼나 神에 대하여 말하기를 삼갔으나, 제사에 직접 참여하여 신의 흠향을 체험하였을 때, 제사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論語] 八佾, 금장태, ibid., p. 227.). 유교에서는 이와 같이 효의 실현인 제사를 통해서만 조상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 사회를 지배한 윤리는 군왕에 대한 忠과 부모에 대한 孝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인성에 대한 근본 개념으로 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장태 교수는 그러한 유교의 사상과 윤리는 유교적 신앙 형태인 제사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금장태, ibid., p. 229.).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금장태 교수는 중국 유교에 분명한 종교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天의 내재화와 관련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天人合一로 해답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천인합일의 이념은 인본주의의 합리적인 철학체계가 아니라, 유교의 가장 특징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유교의 종교적 특성은 제사에 있어서 천과 조상신을 하나의 근원 속에 통일 시키고 있다. 그는 天이 인간 속에 내재화됨을 믿고 성실과 경건으로 인간의 완성, 즉 天의 체현(體現)을 이상하는 신앙은 유교의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이라고 주장한다(ibid., p. 231.).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는 유교 전통의 조상 제사가 단순히 孝라는 윤리적 규범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제사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교리적 사상적으로 유일하신 창조주요 구속 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우리는 유교적인 다신 체계의 일부인 조상 제사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유일하신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상제의 중보자로 여겨지는 조상신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앞서 이미 보았듯이 조상제사로 인한 신자들의 어려움을 덜어 보고자 요즈음 어떤 이들은 조상신에 대한 개념 없이 조상제사를 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서나 유교 전통에서 조상신에 대한 개념이 분명히 있으므로, 우리는 조상신의 개념이 단순히 무속적인 종교성이라고 보고, 그것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또한 실제로 조상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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