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를 다시 낳으십시오.
창세기 22:1-19
아이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만일에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놓고도 반갑지 않게 생각한다든지, 괜히 태어나서 말썽이다, 실수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하면 아이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자신을 귀찮은 존재로 판단하고 탈선한다든지, 자살까지 쉽게 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탈선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으며, 자녀들이 사랑 결핍증에 걸리지 않도록 부모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왕 주시려면 결혼하자마자 주셨으면 좋을 텐데 75세에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100세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것도 아내인 사라가 난산한 다음 기다리다가 지쳤을 때에 주십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뒤에 가서 자식을 주십니까?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의미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이란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란 결혼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에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시 36:5-9)
사무엘상 2장 6-7절에서 한나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이것을 ‘생명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좋은 신자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낳았건 남이 낳았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내 마음대로 죽여서도 안 되고, 내 마음대로 죽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삭을 말할 때 약속의 자녀,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보냄 받은 자녀이기에 소중한 것이고 복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녀에 대해서 얼마만큼 신앙적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허약하여 비실비실 거리고, 별로 공부하는 것도 신통치 못하고, 말썽을 부리지만 이 아이가 약속된 자녀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녀로 믿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얻은 이삭은 분명 은혜 그것 자체였습니다.
나의 수고로, 나의 능력, 나의 실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100세에 얻었으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에생명의 신비성, 은혜성, 축복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기막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을 그렇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입장에서 생각하면 100세에 얻은 아들이기에 이삭을 키우면서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하나님 섬기는 것을 등한시했는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 내 아들 하면서 자식사랑에 푹 빠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태워 바치라니 아브라함은 깊은 고민과 시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신앙의 사람인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바치라고 하니 두말 할 것도 없이 바치러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배워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내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면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도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내 놓으라고 하시면 내놔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키워서 내 마음대로 무엇이 될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9-10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룬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도대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믿을 수 있지만 어쩌면 이삭까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제단 위에 결박된 채로 누워있는 아들 이삭!
아버지의 칼이 위로부터 내리쳐올 때 묵묵히 당하는 아들 이삭!
이런 아들이 또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삭 또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신뢰와 그 사랑이 이삭으로 하여금 죽음까지도 순종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아들이 공부 좀 잘한다. 심부름 잘하고, 착하다의 수준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며, 전인격적인 믿음이었으며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삭의 순종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믿음이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의 믿음은 부모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분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셔야 합니다. 그대로 배우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삭은 육체의 아들에서 신령한 아들로 번제 후에 약속된 축복의 이삭을 돌려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돌려받은 아들을 얼싸안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모리아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의 말이 자녀들에게 먹혀들지 않습니까?
그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저 신앙적인 관계, 순종과 헌신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 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본문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사십시오.
아이를 번제로 드릴 수는 없지만 주일 성수는 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키워야 올바른 자식이 됩니다.
모리아 산에서 약속의 자녀가 만들어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님 것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갈보리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하셨던 말씀을 결론으로 맺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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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빛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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