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성령을 은사로서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 역시 하나님은 명백히 하셨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하나님은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가장 명확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은 곧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즉,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약속하셨고, 또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중요한 일이다.
믿음과 은혜의 성장(成長)은 이로 인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 생활을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은 그와 꼭 같이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과 유익한 생활의 원동력은 이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불가불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교회에서 무익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제 이하에 조목을 나누어서, 어찌하여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만 할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첫째로, 거짓된(僞善的) 생활을 하는 연고다.
따라서 그 기도는 열심이 없고 참되지 못하다.
열심있고 참된 기도를 떠난 생활이란 곧 성령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생활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는 것이다.
(2)둘째로, 경박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엄위하시고 존귀하신 신으로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버리는"(골3:1)신령한 생활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시지 않는다.
(3)셋째로, 교만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교만이란 곧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탐하는 일인데, 세상의 것으로 채워진 심령에
성령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4)넷째로, 죄를 완전히 자백하거나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
설혹 죄를 자복하고 떠난다해도, 막연한 태도로 고백을 하거나 죄의 일부분을 그대로
숨겨 두고 있다던가 하면, 여전히 충만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아직도 세상의 것에 미련을 품는 그 불신앙과 교만과 나약함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일부분만을 하나님께 바치려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징계를 받아 죽기까지 하였거든,
어찌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바랄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다 고백하고 그것을, 다 청산하였는지 안 했는지를 잘 아신다.
만약 우리의 심중 한 구석에 가리워 둔 곳이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28:13).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우리는 완전히 낮아져서, 모든 죄를 남김 없이 고백하고 이웃에게 입힌 해독을 보상한 연후라야만
성령의 충만함 받기를 기대할 수가 있다.
(5)다섯째로, 자기가 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
예컨대 기도를 간절히 드리던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곧 성령을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이 해서 성령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은 이제 곧 저버렸던
자기의 책임을 다시 이행함으로써 그 은혜를 회복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내가 등한히 하고 있는 책임은 없는가를 늘 살펴보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는 데 극히 중요한 일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직장에 있어서, 우리는 심령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당연히 헤야 할 의무를 다하였는가 ?
(6)여섯째로, 성령을 거스리는 행위를 함으로써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거부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경우에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심중에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그릇된 해석을 한다던가, 혹은 그와 같은 해석으로 이웃을 훼방하는
이론을 지어낸다던가 하는 일은 흔히 범하기 쉬운 일로서 크게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이다.
그밖에도 성내기를 잘 하는 성품,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일, 시기심, 등등은 모두 은혜를 물리치는
방해물이다.
(7)끝으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이유의 하나는,
애당초 성령 충만함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일이다.
또 원한다 해도, 단순히 일신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구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것도 은혜를
기다리는 태도는 아니다.그러면 먼저 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기를 원치 아니하는가?
아마 그 큰 원인은 성령의 충만을 받기까지의 겸손과 노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심령 상태는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요, 마귀는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성경을 구약 창세기부터 신약 계시록까지 더듬어 보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신 오직 하나의 뜻이 무엇이며, 마귀가 인간을 향하여 노리는 오직 하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버리고 그에게로 나오기만을 바라고 계시며, 마귀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좇아서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에게로 오기만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겠는가?
마귀에게로 가겠는가?
길은 오직 둘 뿐이다.
다음 순간의 일을 모르면서 이 시각에 받아야만 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에 가서는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인가?
보잘것없는 무력한 이생을 삶으로써 이 세상에서 마귀의 조롱거리와 그의 병기 노릇을 하다가
마침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시간에 잠자던 심령의 눈을 크게 뜨고, 내 영혼의 진상(眞相)과 세상의 실상과,
영계의 요구를 바로 보고, 합당한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하고자 하는 바는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가 하는 문제다.
첫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 있는 죄악의 크기는, 하나님의 권능의 크기만큼 크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저 때를 맞추어 교회에 참석하고 성찬에 참례하면 제법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된 줄로
자처한다.그러나 그들의 연부년 변함없는 무력한 생활은 하나님의 성령을 얼마나 탄식케
만들고 있는가! 그들의 나타난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가 땅에 임할 날은 지연되고 지연되어서,
오늘날 피조물의 탄식은 얼마나 극도에 달하고 있는가(롬8:22)?
둘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 있는 죄악의 크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의 크기만큼 크다.
왜냐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지금 행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큰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약속하시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것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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