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요섭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중세시대의 개혁의 선구자였던 위클리프의 교회론에 대해 연구하여 제시한다. 위클리프의 교회론은 당시 로마 가톨릭과 달리 개혁적인 것이었다.
1 서론: 위클리프의 생애와 교회론의 의의
위클리프(John Wyclif, c.1328-1384)는 14세기 말 잉글랜드의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사상을 제시하고 그 실천을 시도한 중세의 대표적 개혁가이다. 그는 1320년대 후반 잉글랜드 요크셔 지방의 소영주(Minor Gentry) 가문에서 태어났고 13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문적 훈련을 쌓았다. 위클리프는 당시 옥스퍼드에서 유행하던 유명론에 맞서 실재론을 주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로마 가톨릭이 체계화시켜 놓은 스콜라 신학의 체제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특히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른 교회론에서 두드러졌다. 그의 교회론은 참된 교회의 기초를 교황을 위시한 사제들의 위계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라고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교회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그의 교회 개혁 사상은 이후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롤라드 운동과 이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의 개혁 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국외로는 15세기 초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Jan Hus, c.1372-1415)의 교회 개혁 사상뿐 아니라 더 나아가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위클리프의 교회 사상은 그의 여러 저술들에 산재해 있으며 그의 사상의 기원과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분석하기 쉽지 않은 이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위클리프 자신이 말한 교회 개념을 명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위클리프의 교회론이 나타나게 된 사상적 기원과 그의 교회론이 영향을 끼친 이후의 유산과 관련한 영향사를 다루지 않고 그의 개혁적 교회 사상 내용과 의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위클리프의 교회에 대한 이해가 잘 드러나 있는 1370년 대 후반의 저술들의 주요 내용과 그 역사적 배경을 주로 검토하여 분석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그 의의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려 한다. 이 연구는 위클리프의 교회 개념과 그 실천적 함의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했던 교회론과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평가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2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론의 배경
2.1 교회론 작품들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 사상을 보여주는 주요 저술들은 대부분 1377년 이후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작품은『성경의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Sacrae Scripturae)이다. 위클리프가 이 작품을 옥스퍼드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1370년대 초 자신의 강의 내용을 취합하여 1378년 완성한 후 출판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와 상대적이며 잠정적인 교회의 권위를 대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와 해석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더 나아가 세속 권세와 교회 권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구체적인 교회 개혁 방안까지 제안한다. 특히 교회 개혁과 관련해 성경의 진리를 잘 가르치는 것이 사제의 본래 직무이므로 이 직무에 실패한 자들은 고위 성직자라도 반드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 관하여』(De ecclesia)는『성경의 진리에 관하여』와 같은 시기 저술되었고 같은 해 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위클리프가 그의 교회론을 종합한 작품으로서 전체 23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논리가 다소 반복적이며 추론이 추상적이므로 체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저술된 역사적 상황과 후대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 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1377년 전후 잉글랜드 국내외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론이 어떻게 발전 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 이 작품은 보헤미아의 후스가 저술한 같은 제목의 저술인『교회에 관하여』(De ecclesia, 1413)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후스의『교황의 면죄부에 반대하여』(Adversus indulgencias papales, 1412)는 위클리프의『교회에 관하여』의 23장의 문장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1379년 가을에 발표한『교황의 권세에 관하여』(De potestate pape)는 앞선 두 작품들에서 다룬 개혁적 교회론을 교황의 권세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위클리프는 이 작품에서 참된 교황과 거짓 교황의 차이를 비교하며 거짓 교황이 출현하게 된 원인과 그 해결 방안을 주장한다.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과 관련한 저술 활동은 1382년 종교재판을 거쳐 옥스포드에 축출되어 레스터셔의 작은 마을 루터워스(Lutterworth)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성직 매매에 관하여』(De symonia, 1380 초),『배교에 관하여』(De apostasia, 1380 말),『신성모독에 관하여』(De blasphemia, 1381 중반) 등은 모두 자신을 이단일 뿐 아니라 1381년 농민폭동의 배후라며 정죄하려는 교권의 정죄에 맞서 발표한 작품들이다. 말년의 소품들인『교황들의 불일치에 관하여』(De dissensione paparum, 1382 말)과『십자군에 관하여』(De cruciata, 1382 말)과 같은 글들은 각각 교황청의 분열로 인한 문제들과 로마 교황청의 옹호 아래 대립 교황에 맞서 노르위치 주교가 일으킨 소위 “플란더스 십자군” 운동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클리프의 교회론은 1377년 이전 정리된 그의 철학 이론과 정치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위클리프의 교회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1360년대부터 1370년대 초까지 저술한 철학적 작품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지배권”(dominion)을 논의한『신적지배권에 관하여』(De dominio divino, 1374)와『세속적 지배권에 관하여』(De civili dominio, 1376), 그리고 1379년 발표한『왕의 직무에 관하여』(De officio regis) 등의 작품들에도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 사상이 담겨있다. 본 연구에서는 위클리프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교회에 관하여』를 주로 살펴보면서 관련 주제에 따라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2.2 역사적 배경
위클리프가 1378년부터 집중적으로 교회 개혁과 관련한 작품들을 저술한 배경에는 왕권과 교권의 대립이라는 잉글랜드의 국내적 상황과 교황청의 대분열(Great Schism)이라는 국외적 상황이 놓여 있었다. 첫째, 국내적으로 위클리프의 교회론은 잉글랜드 내에서 발생한 왕권과 교권 사이의 갈등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위클리프는 1372년 11월부터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을 도와 잉글랜드의 정치에 참여했다. 당시 곤트의 존은 어린 조카 리처드의 섭정으로서 교회의 권위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법과 신학에 능한 개혁적 인물을 찾고 있었다. 당시 왕실과 교회 사이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은 교회의 재산에 대한 처리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였다. 1365년 에드워드 3세가 교황청에 맞서 교회에 대한 재정의무 규정을 변경하자 볼던의 우트레드(Uhtred of Boldon)등 잉글랜드의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이 규정의 재론을 요구했다. 위클리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374년 7월 프랑스 브리쥬(Bruges)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잉글랜드 왕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때부터 위클리프를 신임하게 된 곤트의 존은 옥스포드에서 위클리프가 고위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들은 후 1376년 9월 그를 왕실 신학 자문위원으로 영입했다.
『교회에 관하여』는 이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발생한 홀리-샤킬(Haulay-Shakyl) 사건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다. 1378년 8월 11일 왕실과 대립하여 투옥되었다가 탈출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피신해 있던 로버트 홀리와 그의 동료 샤킬을 런던탑의 책임자였던 벅스힐이 미사 중에 진입하여 체포하던 중 홀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잉글랜드 왕실과 대립관계에 있던 런던의 주교 커트니(William Courtenay)는 비록 곤트의 존을 정죄하지는 못했지만 벅스힐을 신성모독 혐의로 파문했다. 이후 교회에 대한 세속 군주의 권한과 관련하여 글루스터 의회가 소집되었고 이 때 곤트의 존은 위클리프에게 신학적 지원을 요청했다. 위클리프가 이 요청에 응해 11월 글루스터 의회에서 교회의 권세와 세속 군주의 권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두 글을 발표했으며 이 글들은 『교회에 관하여』의 마지막 두 장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교회론은 정치적 논의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신학적 논의였다. 1377년 위클리프는 람베스에서 이단 사상과 관련한 재판을 받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교회론을 발표했다. 1377년 2월 19일 곤트의 존과 대립 중이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서드베리(Simon Sudbury)와 런던 대주교 커트니는 위클리프를 반교회적 사상 유포 혐의로 정죄해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소환했다. 곤트의 존은 교회 지도자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해 위클리프를 보호하려 했으나 런던 시민들이 자신을 반대해 폭동을 일으키자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위 성직자들과 타협하려 했다. 이에 위클리프는 왕실이 자신을 결국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임을 깨닫고 이제까지 자신이 주장했던 개혁적 주장이 무엇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임을 증명하려 했다. 이때부터 위클리프가 집중한 신학적인 주제들은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의 관계 문제,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 제도의 정당성 여부의 문제들이었다.
둘째, 위클리프의 교회론의 국외적 배경에는 1378년 발생한 교황청의 분열이 있었다. 1377년 1월 오랜 아비뇽 유수를 종결하고 로마로 복귀한 그레고리 11세가 사망한 후 로마의 새로운 교황 우르반 6세(Urban VI, 재위 1378-1389)를 인정하지 않는 아비뇽 측이 그레고리 7세(Clement VII, 재위 1378-1394)를 다시 선출했다. 그 결과 교황청은 대분열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미 그레고리는 11세 때부터 교황청은 위클리프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레고리는 1377년 5월부터 다섯 차례 잉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과 옥스포드 대학 관계자 및 왕실에 교서를 보내 위클리프의 사상을 판단하기 위한 재판을 명령했다.19 이 명령서에서 교황은 위클리프가 교회의 권한 남용, 교황 파문권, 교회의 재산 소유 그리고 세속 권세에 대한 교회의 인정 거부 등 19개 사항을 정죄의 이유로 제시했다. 위클리프의『교회에 관하여』는 그레고리 11세의 마지막 통치 기간에 주로 저술되었으며 그가 사망한 후 교황청의 대분열이 발생한 1378년 가을에 완성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을 정죄한 교황의 입장 뿐 아니라 대분열에 이른 교황청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개혁의 방안을 제안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이 필요에 따라 저술된 위클리프의 교회론적 작품들은 단순히 어느 한쪽 교황을 지지하는 정치평론이 아니라 교황의 직무와 그 신학적 기초를 다루는 신학적 논의였다.
위클리프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개혁적 교회론을 통해 사제직에 대한 목회적 이해, 교회 타락의 역사적 과정, 참된 교회와 대비되는 이단의 본질, 그리고 교회 개혁을 위한 성경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 논의를 전개했다.
2.3 사상적 배경
리프는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론이 그 구체적인 개혁 방안에 있어서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1275-1342)나 오캄(William Oackham, 1285-1347)의 견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위클리프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한 점에서도 이미 유사한 입장을 내세운 12세기 성 빅터 학파(the school of St. Victor)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도리어 위클리프의 교회론이 제공한 기여는 성경과 교회를 그의 고유한 역사 이해와 형이상학적 견해로부터 제시한 점에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위클리프의 사상은 14세기 말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교회 법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대립, 그리고 탁발수도회출신 사제들과 재속 사제들 사이의 대립이 치열했던 옥스퍼드의 사상적 배경 속에서 발전했다. 당대의 논쟁들 속에서 그는 1360년대부터 논리학을 비롯한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저술들을 출판했다. 그 가운데『존재대전』(Summa de Ente)은 위클리프가 자신의 철학적 저술들을 모아 종합한 작품으로서 그 1권은 피조 세계의 실재들을 다루는 일곱 논문들을 포함하며 2권은 신적인 실재들에 대한 여섯 논문들을 담고 있다. 위클리프는 특히 1권에서 오캄의 유명론에 맞서 신적 지식의 실재성을 기초로 삼는 명제적 실재론(propositional realism)을 주장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물리적 행위이든 정신적 행위이든 모든 행위들은 “행위”라는 공통의 유(類)로부터 정의될 수 있으며 이 공통의 유는 하나님의 존재라는 일차적인 필연의 진리에 의해 그 실재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므로 정신적 행위들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나님과 인간 정신의 엄청난 차이를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신적인 사고와 피조된 존재의 관계를 이해하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보편자들은 개별자들에 대해 존재론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으며 각 보편자들이 상응하는 개별자들과의 인과관계에 있어 지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대전』의 2권은 롬바르드의『명제집』(Libri Quatuor Sententiarum)의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면서 개별 인간의 판단을 강조하는 오캄의 소위 “현대주의운동”(Moderni movement)에 맞서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 c.1290-1349)과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 c.1300-1358)가 주장했던 어거스틴적 예정론과 아르마의 대주교 피츠랄프(Robert Fitzralph, c.1300-1360)가 부각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사상을 지지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삼위일체론과 같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도 “성육신”이나 “예정”등과 같은 신적인 개념(ideas)과 실재성을 가진 보편자(universals)들이 개별적 개념 및 개별적 속성과의 인과관계에 있어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실재론을 통해 위클리프는 피조된 세계의 모든 실재들과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지며 특히 인간의 구원은 일시적이며 개별적인 피조물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강조하려 했다. 위클리프가 그의 교회론에서 “선택자들의 총합”으로서의 교회 개념을 전개할 때에도 보편자의 실재성과 상응하는 개별자들에 대한 보편자의 인과적 우선성(causal primacy)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위클리프의 교회 개혁 사상의 또 다른 사상적 기초는 “지배권” 혹은 “소유권”으로 번역할 수 있는 “dominion”개념이었다. 위클리프는 피츠랄프가 제시한 “지배권”(dominium) 개념을 발전시켜 자신의 교회론과 정치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절대적인 지배권이 모든 피조세계의 존재들 사이에 있는 파생적이며 상대적인 관계들과 권한들을 규정짓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 결과로 나타난 피조물들에 대한 신적 주권(lordship)은 보편자가 개별자의 일차적 인과관계 상의 기초이듯이 모든 인간들의 주권과 종속 관계의 일차적인 인과 관계상의 기초이며 규범이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학적 논의에서 신적인 지배권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었던 피조 세계의 지배권이 타락과 구속의 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며 회복되는지에 대해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지배권 개념은 구속의 과정에 대한 진술을 넘어서 그의 정치사상과 관련해 당시의 교회의 구조와 사회 정치적 구조의 개혁 방향을 규정하는 규범적 차원을 포함했다.
위클리프는 1374년경 발표한『신적 소유권에 대하여』와 1376년 발표한 『세속적 소유권에 대하여』에서 교회의 본질과 세속 정부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이 작품들에서 교회의 재산 소유문제를 포함해 중요한 행정적 결정은 교황청이 아닌 세속군주의 권한에 있다고 주장했다.
3 위클리프의 개혁적 교회 개념과 개혁 실천 제안
3.1 신학적 의의
위클리프는『교회에 관하여』에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경 안에서 교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나는 우리가 교회를 더 잘 알려진 개념으로, 즉 선택된 모든 사람들의 회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 교회의 근거를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에 두는 것은 신학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각 개인들의 예정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므로 하나님께서만 누가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인지 아신다. “예정되고 적절한 때에 흠이나 주름 없이 성화된 자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 교회의 지체일 수 없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계시가 없이는 그 누구도 그가 예정되었거나 성화되었거나 흠과 주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정에 기초한 거룩한 교회는 특정한 제도를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교회와 구별된다.
둘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따른 선택은 불변하기 때문에 진정한 교회의 지체들은 구원과 관련한 교회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예정을 위한 공로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예정은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한 번 주어지면 잃을 수 없는데, 이는 이것이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영광이나 지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권리는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이 권리는 인간의 중죄(mortal sin)에 의해 취소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불변하는 예정의 은혜에 서 있는 한 진정한 교회의 지체들의 자격은 교회가 규정한 오류와 죄에 의해 취소되지 않는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출처 :자기부인 글쓴이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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