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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

에반젤(복음) 2020. 2. 23. 20:40



 18세기의 교회사적 특성.

  



B .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1. 계몽주의의 특색.


(1)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난 인간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자율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정립과 추구이다. 인간이 가치 측정의 표준을 자기에 두었다. 자율(自律 Autonomy)의 주장이 모든 사상과 활동의 특색이다.

(2) 르네상스 이후 “自我의 발견” 은 이런 방향으로 계속되였으나 종교계혁, 정통주의, 종교 전쟁 등으로 각광을 받지 못한 채 저류를 이루어 오다가. 신학적으로 암미니안 주의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나타나다가(제 17세기), 30년 종교 전쟁이 끝나고 상업경제의 발달과 함께 하나의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등장하여 제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3) 이 계몽주의 운동은 나라마다 그 특색이 다르다. 종교개혁과 같은 단일성을 이루지 못하였다. (a)영국의 경험론 (b)독일의 합리주의 -나중에 이상주의(ldealismus)
(c)불란서의 자연주의이다. 그러나 다같이 이성을 최고의 규범(Norm)으로 삼고,

모든 인문과학을 자연적 체계로 정비하여, 종교, 도덕, 헌법, 시민법, 경제질서의 근거를 이성 또는 자연법에 두려 하였다.

2. 네덜란드의 계몽주의


(1) 네덜란드에서 계몽주의는 시발되었다.
1630년 종교관용(Tolerance)정책과 상업경제 발달과 시민계급의 형성등으로 문화가 발 달하였다. 알미니안이었던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 성경주석, 자연신학적 경향은 벌 써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데까르뜨, 스피노자, 베일 등이 일찍 활 동하여 계몽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2) 데까르뜨(1596- 1650) : 데까르뜨 학파를 세웠다.
“의심” 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하였다. 최후로 남아서 의심할려해 야 할 수 없는 “의심하는 자기” (그의명제 :Cogito, ergo sum)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 다. 이것이 서양 철학과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자율(human autonomy)의 발견이다. 이성이 현실의 전부와 과학적 방법문제를 해결한다는 합리주의를 낳게 되었다.
데까르뜨의 신의 존재에대한 논의는 결국 인간의 인식의 확실성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으로 완전한 존재는 “존재” 까지 포함한다.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관념들이 타당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 완전한 신이 사람을 “속일” 리가 없기 때무에, 인간의 분명하고 똑똑한 제 관면들이 오류를 범하도록 허락하 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연역(logical deduction)은 타당할 수밖에 없다. 그 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아니하였으나 철저한 “세상” 中心의 사상가였다.

(3)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 :그는 스페인에서 피난은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으나 자유사상 때문에 출교 당하였다. 그의 철학은 합리주의적 범신론(rational pan-theism)이다.
그는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철학자이었으나 후세에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며 지금까지 그 영향은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자연신학의 아버지요, 자연주의의 사상적 원천이요, 계시종교의 파괴자이다.
그는 “신학적-정치적 논문” (Tractatus Theologico-politious 1670)과 윤리학(Ethica, 1677)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혁명적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 실체(Substance)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자신을 통하여 인식되어 진다” 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그 자체에 대한 관념의 구성은 그 자체의 (外)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는 “ 신 또는 자연” (deus sive natura)이며, 다만 신은 자기원인(causa sui / 생산하는자연 Natura naturans)이며, 자연은 그의 나타난 것(Natura naturata)이다. 이 실체는 무한하며 수많은 속성중에 생각(cogitatio)과 연장(extension)만 사람에게ㅡ 알려져 있는데, 모든 개체들은 이 두 속성의 양태(modes)들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란 필연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신의 지능(Intellect)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격의 영원성이나 영혼 불멸도 부정한다.
최고의 인간활동이란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의 필연성을 정관(靜觀 conremplation)하는 것인데, 이는 겸손과 참회를 통하여 인간의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영향 : 스피노자가 이와 같이 단일 영적 실재(a single speritual reality)라는 기본사상을 가지고 데까르뜨의 영과 육의 분리, 하나님과 세계의 분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므로, 후에 독일 이상주의(German Idealism)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쉘링(F . W . J Schelling), 헤겔(G . W . F Hegel)에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폴틸리히(Paul Tillich)같은 이가 하나님을 초월자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자연 개물의 창조적 근거” (the Creative ground of all natural objects)라 생각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4) 삐에르 베일(Pierre Bayle, 1647-1706) : 계뭉철학의 화약고라고 불리워 지는 “역사적 및 비평적 사전”(Dictionaire histirique et Critique, 1695-1697)을 저각하였다. 성경에 대한 합리적 연구를 주장하고 모든 이적을 부인하였다.

3. 영국 이신론(理神論 Deism)의 발달.

(1) 1688년 명예혁명, 1689년 관용령, 1694년 출판 자유등 일련의 자유화 기운이 일자, 네덜란드에서 알미니안 주의와 스피노자의 철학등에 영향을 입은 영국인들이 속속 귀국하여 계몽사상이 퍼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국 내에 이신론(Deism)이 득세하였다. 이신론은 독특한 영국적 계몽주의 종교 사상으로 벌써부터 허버트 경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1750년에는 벌써 세력을 잃게 되고 영국은 웨슬레의 대 부흥운동의 종교적 역기에 휩쓸리게 된다.

(2) 이신론의 내용은 허버트 경(Lord Herbert of Cherbury 1581-1648)이 저작한 “지리론”(De veritate, 1620)과 “만민의 종교" (De religione gentilium ...... 1645)에서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5개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
(a) 유일신 (b) 예배 (c) 도덕과 경건생활 (d) 인간의 의무는 회개와 악을 멀리함
(e) 현세와 내세의 보상이다. 기독교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념에서 출발하였으나 타락하여 비 합리적 제도와 교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존 록크(John Locke, 1632-1704)는 비록 자신은 이신론자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나 기독교는 가장 합리적 종교임을 “기독교의 합리성”(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75)이란 저술에서 변증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고 하였다. 그러나 항상 이성으로 미신과 신비주의를 가려내고, 이성으로 계시를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경험론적 인식론은 모든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고 다만 경험에 의하여 지식이 발생한다. 즉 감각과 회상을 통하여 이성작용으로 지식이 생겨난 뿐이며, 본래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rasa)와 같을 뿐이라 하였다. 이렇게 감각과 이성 작용으로 얻은 지식이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하였다. 이런 사상의 결과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시 종교가 자연 종교에게 밀려나게 된 것이다.

롤크 이후, 본격적인 이신론자들이 나타났다. 18세개 이신론자들은 대담하게
(a) 계시종교를 부정하고 기독교를 자연종교로 격하시키었고,
(b) 하나님, 영혼불멸, 윤리등 합리적 요소만 기독교신앙에서 수용하고, 비합리적이라 생각 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였다.
(c)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를 부정하고 우주의 기계적 운행과 진행을 믿었다. 그 대표자는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 클린스(Collins 1676-1729), 틴달(Tindal, 1656-1733)등 이다. 톨란드의 저서 “신비하지 않은 기독교” (Christiamity Not Mysterious, 1736)는 자연종교가 기독교의 원형이며 : 유대교, 희랍 밀교, 플라톤 철학의 악 영향으로 타락하 였다고 지적한다. 탄달의 저서 “창조만큼이나 오래된 기독교” (Christianity as old as the Creation, 1730)에서도 自然宗敎가 모든 종교의 근본이라 하고 있다.

(3) 1750년대에 오면 이신론은 그 세력을 별써 잃어 버리게된다. 대비드흄(David Hume, 1711-1776)에 의하여 이신론의 근거가 무너지고,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의 기독교 측 반격으로 영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불란서 자연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흄의 회의론(Scepticirm)이 기독교 사상에 미친 영향.

(1)록크(Locke)의 경험론은 아직도 이신론자들 가운데 합리적 초자연주의(rational Supernaturalism)를 가능하게 하였다. 계시와 이성을 조화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신론자들이 구약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증거 하려 하였다.

(2) 흄은 그의 회의론(Scepticism)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적론(Essays on Miracles, 1748)이란 저서에서,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이적을 부인하였다. 그의 논리는 이러하다 : 죽은 자의 부활을 회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경험상, ” 인간의 증언이 잘못되었을 경우가 많은 것은 경험에 배치되지 아니하나, 이적 이 참되다는 것은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경험의 한계를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 영혼불멸, 보편 타당한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흄에 이르러 합리적 기독교(이 신론)과 합리주의 자체까지도 파국에 빠져버렸다. 이성이란 경험의 소산일 뿐이며, 심 지어 자아도 지각의 묶음(다발)에 지나지 아니하며, 모든 지각은 경험이 얻은 인상들이 아니면 인상의 모조품인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관념관( 觀念間)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있으나, 실재의 사실들은 그러리라하는 개연성이상 더 증명할 수 없다.


인과율도 논리의 개념이 아니며, 인간의 구상력에 인상지어진 습관과 연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가능성도 부정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가견적 우주에 대한 신념도 부정하고, 도덕생활도 사실은 의지와 행동을 결정하는 결정에 따라 지배될 뿐이다.

(3) 이러한 철저한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흄이후 새로운 시대 곧 낭만주의, 자연주의, 유물주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였고 :독일의 라아다러스(Reimarus)에게 영향을 주고 그리도 칸트로 하여금 시천 이성의 비판을 낳게 하여 자유주의의 근거를 쌓게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철저한 인본주의에 빠져 기독교 신앙의 침체를 가져오게 허였고 그 기에 대항 반동(反動)으로 급선회하여 “대복음 운동”을 낳게 하였다.

5. 버틀러의 “종교 유추” (Analogy of Religion, 1752)에 관하여

(1)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장노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영국 국교회로 전향 하여 나중에 더함의 감독(Bishop of Durham)이 되었다.
“종교유추”는 그 원명이 “自然의 구조와 진행에 대비한 자연 종교 및 계시종교”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ion and Course of Nature, 1734)로 버틀러의 대 저작이며, 기독교 변증서로서 이신론자들에게 계시종ㅇ교 의 합리성을 변증하고 또 한편 회의주의자에게 계시종교와 그 개인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2) 첫 부분은 자연계시로서 영혼 불멸성, 상벌,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moral government of the world)를 변증하였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논한 다음에 이성으로서 계시의 의미와 도덕성과 그 증거를 판단해야 하며, 양심은 신의 선물로서 성경 말씀 중 어느 한 부분이 자기 양심에 거슬릴 수 없어야 된다.
예수님의 대속 교리를 설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Probability)이 인생의 인도자가 되니, 이렇게 개연성이 높은 계시도리야말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3) “종교유추” 는 이신론과 회의론에 대한 답으로서 널리 인정되었고, 이것으로 일단 기독교의 변증은, 적어도 영국시민들에게는, 성공적이었다고 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버틀러의 변증방법은 알미니안 적이며, 즉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기독교의 변증이었다. 그 근저에 있는 전네는 중생 되지 않은 自然人이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자연 진행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유추하여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되고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태도는 지금도 소위 “복음주의” (Evangelical)라고 하는 감리교의 변증방법이며 영국 국교회의 태도이다.

6. 프랑스 계몽운동과 기독교에 미친 영향.

(1)프랑스의 계몽사상은 영국에서 건너왔다. 볼테에르(Voltaire, 1694-1778)는 영국 이신론 을 받아드렸으며 계몽사상을 보편화시켰다. 그러나 불란서 계몽운동은 그 공격 목표가 교 회와 성부의 불관용 정책이었기 때문에 반 기독교적 색체가 농후하였다. 볼테에르도 나중 에는 신의 필요성을 실제적 생활면에서 찾았고 영혼불멸을 믿지 않고 점차 물질주의에 빠 졌다.
그러므로 불란서 계몽주의는 (a) 자연주의 (b) 물질주의 (c) 반기독교(무신론을 포함)를 낳았다.

(2) 룻소(Jean-Jacques Rousseau, 1712-78) : 흄이 룻소를 영국으로 데리고 간 일이 있다.
그는 흄과 교유를 통하여 벌써 이신론의 단계를 넘어서서 자연주의 또는 낭만주의에 넘어 가고 있다. 그는 감정과 자연을 찬양하는 열혈 선지자이었다.
자연상태가 행복과 평등의 상태이며 自然에 접근하여 국가생활(정치), 교육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하였다. 그의 종교는 “自然”이었다. 여기에서 사회계약론(1762), 에밀 (1760)등의 저작이 나왔다. 기독교에 대하여는 신 . 자유 . 영혼불멸을 믿었으나 이신론자 의 신앙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증명학 수 없고 종교는 다만 종교감정에 근거하며 순수한 마음의 자연스러운 느낌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3) 디드로(Diderot, 1713-84) : 백과사전 편찬자로서 계몽사상을 보편화 시켰다. 사전에는 룻 소, 볼테에르, 돌바크(D' Holbach)등이 기고하였으며 종교관용(자유)와 민주사상을 전개하 였기 때문에 1759년 판금되었으나 1772년까지 비밀히 전 28권이 출판되었다. 디드로는 개 인적으로 기계적 유물론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 향을 미쳐 1789년 불란서 대 혁명을 낳게 하였다.

7. 독일 합리주의 발생.

(1) 독일 합리주의는 라이쁘니츠(Leibuitz, 1646-1716)와 그의 사상을 대중학시킨 크리스찬 볼프(Christian Wolff, 179-1754)의 계몽사상이다.
라이쁘니츠는 만능의 천재로, 정치가, 외교가, 수학자(미적분 발견)기호 논리학을 연구한 사람이요, 발명가(계산기)이었으며, 프러시아 한림원 창설자이다.

(2) 영국 이신론자들처럼 기계적 우주론을 중심사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단자론” (簞子論 Monadology 1714-1720)으로 결실되었다. 우주는 무한한 단자(monad) 들 의 체계인데 이 단자들은 자체의 힘을 지닌 불멸의 본체(즉 쪼갤 수 없으며, 언제나 활성을 지님)로서 완전한 상승 연속법칙에 따라 하급 형태의 물질에서 영 . 천사 . 최고 로 신의 형태에까지 이르고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자체는 본체의 무한성을 가 질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라이쁘니츠는 신의 존재를 설명할 때에 최고의 단자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모든 단자를 창조하거나 유출하여 발생케 한 “원형적이며 단순한 본체 ”(the original simple substance)라 하기도 하였다. 영혼불멸은 영의 본체적 성격이라 하였다.
우주는 완전한 기계적 기능을 가지므로 죄는 자연질서와 사물의 기계적 구조자체의 성격에 따라 형벌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의로운 행위도 보상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낙관론자로서 이 세상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것” 이라 하였다.

(3) 라이쁘니츠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잉신론의 형태로서, 록크 처럼 자연 종교와 계시를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1730년대 독일대학을 매료시켰다.

8. 독일 신학에 있어서 신학문(Neology)의 발생.

(1) 독일 합리주의는 1740-1750에 극성기에 이르렀고 그 영향은 독일 신학계에 소위“신학문”
(新學問, Neology)과 합리주의신학(rational theology)를 낳게 하였다.

(2) 특히 교회사와 성경주석에 신학문이 발다라였으며 뷰르텔베르의 경건즈의 성경학자인 제 물러(J . S . Semler, 1725-91)는 그 대표자이다. 그는 획심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역사와 합리적 비판에 근거를 둔 성경연구를 하였다. 종교(하나님에 대한 믿음)와 신학을 구분하였으며, 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실제로 교회 사를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성경론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사용하였다(소위 historisch-Kritisch).
1771-1775년에 출간한 “정경의 자유비판 논문”에서 정통적인 영감설을 부정하고, 정경이 점 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가치도 동일하지 않다고 하였다. 도덕적 성격은 하나님에게서 근원하였기 때문이며, 실제로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당시 시대적 특수형편에 “적용” (accimodation)하여 썼을 뿐이며, (보편적 도덕적 가치 외에는)현재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없 는(역사적)문서라는 것이다.
그의 에르네스티(Ernesti), 미카일레스(Michaelis)등은 영감론은 유지하나, 문학적(문법)-역사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3) 라이마러스(Samuel Reimarus, 1694-1768)는 렛씽이 익명으로 출판한 라이나러스의 비밀 저작“볼멘빗텔러 단편” (die Wolfenbutteler Fragments, 1774-1778)에서, 독일서는 최초로 자연종교에 근거하여 계시종교를 부정하여 세상을 몰라게 하였다.

(4) 그 결과 : 1770년대에 독일 교회에서 설교가 도덕설교에 그치고 말았으며,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18세기말에 독일 교회는 (a) 칸트에 근거한 자유주의 (도덕주의)를 따라 기독교의 활로를 찾거나 (b)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의 자유주의(종교적 감정주의)를 따라서 활로를 개척해야만 되었다. 한편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고 특히 할레대학이 이 물결에 휩쓸렸으나, 일부는 그들이 “마음의 종교” (Herzensfrommigkeit)라는 원리를 붙들고 경건으로서 정통교리를 고수하려 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는 볼너 칙령을 내려(Wollnerscher Religionsedickt, 1788) 설교가 들이 정통교리에 위배되는 가르침을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 제물러는 순복하였으나 일반 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