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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안의 성결 이해

에반젤(복음) 2020. 2. 23. 20:32



- 웨슬리안의 성결 이해 -

 

▶ 요약․발제자

한선현, 정해은, 홍미영, 장금현, 신광수, 허명섭, 박성호

장소 : 사랑의 교회 수양관 (안성)

일시 : 2002년 7월 7일-9일(일-화)

일 정 표

▶ 7일/ 도착과 휴식

▶ 8일/ 집중세미나 및 기도회

08:00-09:00 아침식사

09:00-10:00개회예배 및 Orientation

[사회: 노재양 목사, 기도: 홍미영 전도사, 설교: 박명수 목사]

10:00-12:00발제 1. 한선현/ 존 웨슬리의 ?기독자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

발제 2. 정해은/ 토마스 쿡의 ?신약의 성결?

12:00-13:30점심식사

13:30-15:30발제 3. 홍미영/ 조지 왓슨의 ?성결?

발제 4. 장금현/ E. A. 길보른의 ?성결지침?

15:40-17:40발제 5. 신광수/ 이명직의 ?성결에 대하여?

발제 6. 허명섭/ 로이 S. 니콜슨의 ?성결?

17:40-19:40저녁식사

20:00-21:30발제 7. 박성호/ 데일 M. 요컴의 ?성결신학?

21:30-22:30기도 [인도: 배본철 목사]

▶ 9일/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또는 에버랜드 관람

※ 세미나 진행을 도우시는 분

세미나 진행/ 장금현 목사

기도회 인도/ 배본철 목사

번역․발제/ 한선현, 정해은, 홍미영, 장금현, 신광수, 허명섭, 박성호

회계 및 간식담당/ 홍미영, 박성호, 연구소 조교 등.

John Wesley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

한 선 현 목사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연구위원)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as believed and taught By the Reverend Mr. John Wesley, from the year 1725, to the year 1777.

1. 내가 이 논문에서 목적하는 바는 지난 수년간의 과정을 통하여 내가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관한 교리를 파악하게 된 여러 관계에 대하여 명백하고도 확실한 설명을 주려는데 있다. 나는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모두를 알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이 일을 수행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2. 나는 나의 나이가 23세 되던 1725년에 테일러 감독의 저서인 ?거룩한 삶과 죽음의 법칙과 훈련?(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 저서의 여러 부분을 읽는 동안 특히 동기의 순수성(purity of intention)에 관한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즉시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곧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중간적인 입장이란 없으므로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일부만이 아니라)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지 않으면 결국 마귀에게 바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3. 나는 1726년에 켐피스(역주-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귀감?(Christian's Pattern)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 내적 종교(inward religion) 곧 마음의 종교(religion of the heart)의 본질과 범위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밝히 나에게 나타났다. 비록 내가 하나님에게 나의 삶 전체를 바친다고 할지라도(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상정할 때) 나의 마음 전체를 드리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 1-2년 후에 나는 로우씨의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심오한 소명?(Serious Call)을 입수하였다. 이것들은 반(半) 그리스도인(half a Christian)이 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과거보다 더욱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은총(내가 깊이 감지하는 절대적 필연성)을 통하여 나의 모든 영혼과 육체와 정신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5. 나는 1729년에 성서를 진리의 유일한 표준과 순수한 종교의 유일한 귀감으로 삼고 탐독할 뿐만 아니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것처럼 걷는 것”이 절대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것이 빛이었고 그 당시 나는 그 빛 아래서 종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의 형식 곧 우리 주님에게 철두철미하게 내외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6. 나는 1733년 1월 1일 세인트 매리교회에서 대학을 상대로 “마음의 할례”에 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영혼의 일상적 성품(habitual disposition)으로서 성서에는 성결(Holiness)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죄 곧 ‘육신과 정신의 모든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덕을 부여받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의 형상이 새로워지는 것’을 직접적으로 의미한다.

나는 같은 설교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 곧 계명의 목적이다.’ 그것은 ‘크고 첫째 되는’ 명령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계명들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의로운 것이든지, 순수한 것이든지, 어떤 덕이나 칭찬이 있다면’ 그것도 모두 사랑이란 이 한 낱말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 안에 완전과 영광과 행복이 있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율법은 이것이다.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완전한 선만이 당신들의 유일한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 당신들은 한 가지 사실 곧 만유의 주이신 그분의 기쁨만을 추구해야 한다....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하나님 안의 행복을 당신들의 존재의 유일한 근원과 목적으로 삼아라.”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즉 “여기에 완전한 율법의 종합 곧 마음의 할례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한 사랑으로 그것을 창조한신 하나님에게 돌리라. ...‘마음의 순수한 동기 곧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의 영광을 우선으로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 설교는 나의 모든 저서 중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이 그 당시 내가 지녔던 종교관이며 나는 그 때 이것을 주저하지 아니하고 완전(perfection)이라고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견해이고 아무런 자료도 가감하지 아니하였다. 여기에 성서를 믿는 지성인치고 반대할 것이 있는가?

7. 나의 동생과 나는 1735년 말엽에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이와 같은 정취에 젖어 있었다. … 1738년 초엽에 내가 거기서 돌아 올 때 …

8. 그 해 8월에 나는 독일에 있는 아르비드 그라딘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자기의 경험을 나에게 설명한 끝에 나는 그에게 “신앙의 충만한 확신”(the full assurance of faith)에 대한 정의를 기술해 주도록 요청하였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의 피로 평정(repose);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뢰; 모든 육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및 모든 죄 곧 내적 죄의 중단과 함께 지고한 마음의 정숙, 평온 및 평화.”

이것은 내가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웠고(나의 동ㄹ들과 함께) 수년간 간구하고 기대하던 사실에 대하여 생존한 사람으로부터 처음 들은 설명이었다.

9. 1739년 나의 동생과 나는 “찬송과 성시” 한권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강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자연의 물줄기 만조되게 하시고, / 우리의 모든 행위를 우리의 근원되신 / 당신을 향하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이 인도자가 되시고 / 당신의 영광이 목적되게 하소서.

10. 내가 이 주제에 관하여 명백하게 기술한 처음 논문이 그 해 말엽에 출간되었다(1739년 말 37세). 나는 그것에 “감리교인의 성격”(The Character of a Methodist)이란 색다른 제목을 붙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읽기 전에는 편견을 갖지 않기 바란다. 나는 여기서 서두에 “나는 이미 얻었다는 것이 아니오”란 말을 제시하면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나는 아무런 수정없이 그 일부를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감리교인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자기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의 기쁨이요 자기 영혼의 소원이다. ……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나 자기의 영혼처럼 사랑한다. 그는 자기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한다. … 이것은 그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질투, 악의, 분노 및 모든 불친절한 성품에서 그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것은 말다툼의 근원인 교만에서 그를 깨끗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제 그는 “자비, 친절, 겸손, 온유, 사랑으로 옷입었다.” … 그의 유일한 소원 곧 그의 생의 유일한 희망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 영혼 속에는 “여호와에 대한 성결”로 충만한다. 그의 마음에는 동요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름이다. …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킨다. 그러나 그것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를,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까지 지킨다. 그는 율법 전체를 지키면서 한 점도 훼손하지 아니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허물없는 양심”을 지닌다. 그는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행한다. … 그는 자기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한다. … 그가 무엇을 하던지 그것은 모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 그의 유일한 불변의 법칙은 곧 “네가 무엇을 하던지 말과 행동에 있어서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를 돌리라”는 바로 그것이다. ……

위에 언급한 것이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느낌을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1725년부터 특히 내가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어 성서 밖에는 어떤 책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한 1730년부터 내가 계속 추구하던 바로 그 점이라는 사실을 찾아보기 수월하지 않은가? (2)이것은 내가 지금도 믿고 가르치는 교리로서 38년 전에 내가 주장하던 내적 성결이나 외적 성결에 일점도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찾아보기 수월하지 않은가? 따라서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동일한 교리이며 따라서 공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래에 첨가한 인용구를 통하여 확연히 알게 될 것이다.

11. 나는 오늘날까지 이 논문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한 필자가 없는 것으로 안다. … 그러나 얼마 후에 이론이 제기 되었는데 나를 약간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내가 완전을 잘못 서술한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는 완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반대의 입장으로 인하여 나의 동생과 나에게 위협을 가해 왔다. 우리가 신앙에 의한 의인에 대하여 분명하고 구원 전체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귀속시키려는 마당에 그토록 극심한 공격을 퍼부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구원하신다”는 것과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만 통치하시고 모든 사물을 자기 자신에게 종속시키리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12. 내가 당시 런던의 감독이었던 깁슨 박사와 만나 하잍홀에서 대화를 나눈 것이 1740년 말엽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는 내가 말하는 완전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내가 말을 끝냈을 때 그는 말하기를 “웨슬리씨, 만일 이것이 당신이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온 세계에 공포하시오 그 때 만일 어느 누가 당신의 진술을 반박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나도 좋소”라고 하였다. …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설교를 기술하여 출판하였다.

여기서 내가 보이고자 시도한 것은 (1)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와 (2)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가에 관한 것이다.

(1)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지 않은가? 그들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다. 그들은 무지와 과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 위에는 절대적 완전이 없다. 계속적인 증진을 허용하지 않는 완전이란 없다.

(2)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완전한가?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애가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애마저도 범죄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다. 성 요한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사례들도 이것을 반증할 수 없다. … 그러나 솔로문은 “범죄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다. 솔로몬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범죄하지 않은 인간은 없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경우는 어떠하였든지 간에 우리가 성 요한과 함께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전파된 이후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유대교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 관하여 기록한 구약성서에 의하여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시간은 완성되었고 성령은 임하였으며 하나님의 큰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인간에게 부여되었다. 이제 천국은 땅 위에 이룩되었으니 … 그러나 사도들 자신도 범죄하였다. 베드로는 은폐하고 바울은 바나바와 심한 논쟁을 하였다. … 만일 사도중의 한 사람이 한 때 죄를 범하였다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밖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생존하는 한 범죄하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금하신다. 죄가 그들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충족한 것이 확실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족한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성 요한의 교리와 신약성서 전체의 기초에 일치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 곧 외적 죄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옳다. 그러나 죽기 전이나 이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즉 “이것으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전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심판 날에 자신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모든 모순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과 함께 생존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은 죽음의 전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수긍한다. …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하여 말함이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죽는 시간이나 심판 날에) 깨끗하게 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금 생존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모든 죄와 모든 불의에서 구원받는다는 것과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악한 생각과 성품에서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는 것이 된다.

13. 1741년 봄. 우리는 찬송가 제2권을 출간하였다. … 아래와 같이 찬송가 서문에 첨가하였다.

이렇듯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우리 영혼의 구원은 우리 마음에 새롭게 인쳐진 하나님의 형상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믿는 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으시고 신앙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또한 그의 성령의 영감으로 그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을 깨끗하게 하신다. …

그러므로 누구나 사랑으로 새로워지기까지는 악마의 자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공적을 통하여 자기의 죄는 용서되었다는 확신”을 가지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신앙이 나약하거나 “불로 연단”받으므로 자기의 “영혼이 수많은 유혹으로 억눌림”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어떤 모양으로 자기의 확신을 포기하거나 신앙을 부정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이 모든 구원이 일회적으로(at once) 부여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 가운데서 순간적인 동시에 점진적인(instantaneous, as well as a gradual)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순간에(in one moment) 분명한 사죄의식이나 성령의 내적 증거를 받은 구름과 같은 증인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의 용서, 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고 새롭고 깨끗한 마음을 한 순간에 동시에 받은 단 하나의 사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양상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하였음을 보고 지옥의 자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느낀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는 저들에게 죄를 거두어 가시고 그들의 마음 속에 천국을 개진하시며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보여 주신다.… 회의(먹구름) … 하나님의 위로 … 성령 … “그리스도와 함께 계승자이다”는 증거를 그들 자신 속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14. 그 책 마지막에 있는 찬송가의 일부를 소개

다음의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즉 (1) 여기에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해 온 완전하고 고차적인 구원(full and high a salvation)이 있다는 것. (2) 이것은 신앙으로만(by mere faith) 받을 수 있고 불신앙에 의해서만 저해된다는 것. (3) 이 신앙과 그것이 결과적으로 초래하는 구원은 순간적으로(in an instant) 주어진다는 것. (4) 그 순간이 지금(now)이라고 상정하는 것. 즉 우리가 다른 계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지금”, 바로 “지금이 용납된 시간이며 지금이” 이 완전한 “구원의 날”이라는 것. 따라서 어는 누가 말을 달리하면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자라는 것 등 말이다.

15. 약 1년 후 즉 1742년에 우리는 또 한권의 찬송가를 발간하였다. 서문 …

(1) 그리스도인의 완전 … 우리가 쾌히 승낙하고 계속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현세에는 선행과 하나님의 모든 의식에의 참여에서 면제되거나, 혈육에 필연적으로 연관된 무지, 과오, 유혹 및 무수한 결함에서 자유를 시사하는 따위의 완전은 없다는 것이다.

(2) 첫째로 …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에서 어떻게 면죄되는 따위의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기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새롭게 구속을 체험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한” 자들까지도 기회가 있는 대로 자주 그를 기억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성서를 탐구하고 금식과 절제로서 그들의 몸을 억제하고 복종시키며 더욱이 은밀하게 또는 회중 가운데서 기도할 때 그들의 영혼을 쏟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3) 둘째로 우리가 믿는 것은, 현세에서는 구원에 본질적이 아닌 사실들에 대한 무지나 과오 또는 다양한 유혹 또는 무수한 결함 등(부패할 육체는 이전 것으로 영혼을 억압한다)으로부터 철저한 해방을 뜻하는 그러한 완전은 없다는 것이다.

(4) 그러면 당신은 “완전한 자”(one that is perfect)라고 할 때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걸어가는” 자,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지닌” 자 또는 “육신과 영혼의 모든 부정에서 깨끗하여진” 자, “걸려 넘어진 사례가 없고” 따라서 “범죄하지 않는 자”이다.

이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우리가 성서의 표현인 “완전한 자”(a perfect man)란 말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진실한 말씀 곧 “나는 너의 모든 부정과 우상에서 너를 깨끗하게 하겠다. 나는 또한 너의 모든 불결에서 너를 구원하겠다”는 말씀으로 채워 준 자이다.

우리가 이 말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과 마음을 온통 성화하신(sanctified throughout) 자, 그리스도처럼 빛 가운데 걸으므로 어두움이 전혀 없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여 주신 자인 것이다.

(5) 이 사람은 이제 모든 인류에게 증거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그는 마음과 말에 있어서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거룩하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주 자기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의 힘을 다하여” 그를 섬긴다. 그는 “자기의 이웃”, 곧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거처럼 사랑하고 특히 아들도 아버지도 모르는 까닭에 자기를 모욕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실로 그의 영혼도 온통 사랑으로 넘치며 “자비, 친절, 온유, 겸손 및 인내”로 가득 찬다. 따라서 그의 생활은 “신앙의 노력과 희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로 충만하다.

(6)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철저하게 성화되는” 것,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 “모든 생각과 언행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적 제물로 계속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또한 주 예수를 진실하게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하나같이 완전하게 될 수 있다!”

16. 찬송가 책에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찬송 …

… 나의 목을 축이고 나를 깨끗하게 씻도록 / 성화하는 성령을 부으소서. / 구주여, 이제 은총의 단비를 내리시고 / 나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소서. /……

… 말씀으로 모든 질병, / 모든 악한 질병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 완전한 건강으로, / 완전한 성결(perfect holiness)로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

17. 우리의 제1차 연회가 1744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는데 6명의 목사와 모든 설교자들이 참석하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성화론 또는 완전론(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or perfection)에 관하여 심각하게 상고하였다. 그것에 관한 질문과 대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성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What is it to be sanctified?

답: 하나님의 형상으로, “의와 참된 성결”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To be renewed in the image of God, 'in 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

문: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뜻은 무엇인가? What is implied in being a perfect Christian?

답: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신6:5) The loving God with all our heart, and mind, and soul. (Deut.ⅵ. 5)

문: 이것은 내적인 모든 죄가 제거되었다는 뜻인가? Does this imply, that all inward sin is taken away.

답: 의심할 여지가 없다(Undoubtedly). 그렇지 않다면 “더러운 짓을 하다가 망할 수 밖에 없이 된 너희를 나는 건져 내겠다.”(겔36:29)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제2차 연회는 1745년 8월 1일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에 성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문: 내적 성화는 언제 시작되는가? When does inward sanctification begin?

답: 사람이 의인되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성화될 때까지 그에게는 죄 곧 모든 죄의 씨가 남아 있다.) 그 시간부터 신자는 서서히 죄에는 죽고 은총으로 성장한다. In the moment a man is justified. (Yet sin remains in him, yea, the seed of all sin, till he is sanctified throughout.) From that time a believer gradually dies to sin, and grows in grace.

문: 이것은 일반적으로 죽기 조금 전에 주어지는가? Is this ordinarily given till a little before death?

답: 당장에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It is not, to those who expect it no sooner.

문: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당장에 기대할 수 있는가? But may we expect it sooner?

답: 안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why not?) 비록 (1)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신자의 대부분이 죽음에 가까이 이르기 전에는 성화되지 않았다는 것. (2) 성 바울이 자기의 편지들을 보낸 사람들이 그 당시에 그랬었다는 것. 그리고 (3) 그가 전반의 편지를 쓸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다.

문: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성화를 설교해야 할까? In what manner should we preach sanctification?

답: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할 필요가 없고 항시 약속의 길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설교할 것이다.

제3차 연회가 1746년 5월 13일 화요일. … 우리는 예전에 합의한 사실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변경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제4차 연회가 1747년 6월 16일 화요일 시작되었다. 완전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이 여러 명 참석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도록 합의하였다.

문: 우리는 입장을 달리하는 형제들은 전적인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어느 정도 수긍하는가?

답: 그들은 다음과 같이 수긍한다. (1) 누구나 죽는 순간에는 전적으로 성화되어야 한다는 것. (2) 그 때까지 신자는 날마다 은총으로 성장하고 완전으로 접근한다는 것. (3) 우리는 계속적으로 그것을 지향해야 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답: 우리는 다음과 같이 수긍한다. (1) 신앙으로 죽은 자들의 다수가-우리가 대부분 아는 사람들인데-그들이 죽기 얼마 전까지도 사랑으로 완전하지 못하였다는 것. (2) 사도 바울이 “성화"(sanctified)란 말을 의인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적용하였다는 것. (3) 그의 이 말만으로는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뜻이 희박하다는 것. (4) 결과적으로 ”전적으로“(wholly, entirely)나 또는 그와 같은 말을 첨가하지 아니한다면 그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적당하다는 것. (5) 영감 받은 성서 저자들은 의인받은 자들에게나 또는 그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언급한 것이고, 전적으로 성화된 자들에게나 또는 그들에게 대하여 언급한 일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 (6) 의인의 상태(the state of justification)에 대하여 계속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관하여 최소한 분명한 어휘로 말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문: 그렇다면 우리의 상이점은 무엇인가?

답: 그것은 곧 우리는 죽음의 순간 이전에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을 기대를 하여야 하는가? 이다.

문: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이 사실에 대하여 성서에는 어떤 명백한 약속이 잇는가?

답: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시130:8)는 말씀이 있다. … 에스겔 36:25,29; 고전 7:1; 신30:6

문: 그러나 이에 상응할 만한 주장이 신약성서에 있는가?

답: 거기에는 분명한 어조로 표현되어 있다. 요1서 3장 8절에 “악마의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엡 5:25-27

롬 8:3-4.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문: 신약성서는 모든 죄에서 구원 받을 기대에 대한 이 이상의 어떤 근거를 제시하는가?

답: 확실히 기도와 명령에 그렇게 나타나 있으며 그것은 가장 강력한 주장과 대등한 것이다.

문: 당신들은 어떤 기도를 말하는가?

답: 전적인 성화를 위한 기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 성화가 없다면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조롱에 불과할 것이다. 특히 그러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이 이루어질 때 곧 우리가 모든 악에서 구원 될 때 죄는 잔존할 수 없다. (2) “나는 이 사람들만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17:20-23). (3) 엡 3:14-15, 17-19. (4) 살전 5:23

문: 같은 취지의 명령은 어떤 것이 있는가?

답: (1)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 5:48).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충만하면 거기에는 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이런 사실이 죽는 순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답: (1) 명령 그 자체가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산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 뜻을 내가 죽을 때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 그렇게 행하라는 것이다.

(2) 성서에 명백하게 나타난 본문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바치셔서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건져내시고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딛 2:11-14), 눅 1:69, 73-75)

문: 성서에 이것을 성취한 사람의 본보기가 있는가?

답: 그렇다. 사도 요한과 그가 가르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요1서 4:17)

문: 지금 그러한 본보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그처럼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답: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내가 그런 본보기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의 물음이 사랑에서 솟아난 것이 아닌 까닭이다. 당신은 헤롯과 흡사하다. 당신은 어린애를 살해하려고 찾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본보기가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의 상징적 존재로 등장하는 인물 자체는 그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

문: 우리는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남모르게 혐오를 느끼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답: 그것은 몇 가지 근거에서 배우 가능하다. 즉 만일 사실과 다를 때 상처받을 영혼의 선에 대한 관심,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고차적인 것을 성취한 것에 대한 일종의 질투, 그리고 우리의 자연적 지완성(slowness)과 이해 부족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으려는 마음 등에서 비롯될 수 있다.

문: 우리는 왜 사랑 안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신앙의 희열(the joy of faith) 가운데 있을 수 없는가?

답: 거룩한 이 희열을 소멸하지 아니함으로 우리가 십자가 밑에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참여하는 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향유할 수 있다.

이상의 인용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나 자신과 나의 동생의 판단뿐만 아니라 우리와 관련된 모든 설교자들의 판단도 포함된 것으로 1744년에서 1947년까지 4년에 걸친 것이었다.

18. 1749년 나의 동생은 두 권의 “찬송과 성시”를 출판하였다. … 거기에는 내가 인정하지 않은 것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찬송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다음의 몇 구절을 소개하기로 한다. ……

… 당신의 갇힌 자를 해방하시고 /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내리소서 / 우리의 슬픔과 죄가 / 한 순간에 그치게 하소서 / 지금이 그 순간되게 하소서! / 우리의 간구를 들으소서 /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위로자시여/ ……

날마다 죽으시는 우리의 생명, 예수여, / 우리에게 나타나소서./ 당신의 완성된 모습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소생시키시는 성령을 받게 하소서! /

감추인 신비를 드러내시고/ 두 번째 은사(the second gift)를 내리소서/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나와 함께 고대하는 모든 마음에 비추소서 / ……

내가 위에 인용한 찬송가에 대하여 보다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나의 동생과 내가 오늘까지 주장하고 있는 다음에 사실들이 거기에 나타나 있는 까닭이다. (1)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죄로부터 구원을 뜻하는 것. (2) 이것은 신앙으로만(merely by faith) 받는다는 것. (3) 그것은 순간적으로, 한 순간에 주어진다는 것.(instantaneously, in one moment). (4)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는 시간은 임종시가 아니라, 매 순간이며(every moment) 지금이(now) 허락된 시간이고 지금이(now) 구원의 날이라는 것이다.

19. 1759년 연회에서 …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하여 크게 재고하기에 이르렀고, 곧 이어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소고”를 출간하였는데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 이것은 내가 지난 20년간 애용한 것이다.

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답: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성품과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 영혼 속에 잔재하지 아니하고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are governed by pure love)

문: 당신은 이 완전이 모든 결함과 무지와 과오를 제거한다고 주장하는가?

답: 나는 전혀 그 반대의 사실을 계속 주장하며 항상 그랬었다.

문: 그러나 어떻게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한 사랑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그 사람이 무지와 과오에 여전히 종속될 수 있는가?

답: 나는 여기에 모순이 있다고 생가하지 않는다. 즉 “사람이 순수한 사랑으로 충만하면서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썩지 아나할 것을 입을 때까지 간혹 잘못된 생각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 그러나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솟아나는 곳에는 그러한 과오가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도 하나님의 엄격한 정의의 대상이 될 수는 없고 다만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문: 1758년 8월 브리스톨에 모였던 우리의 형제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어떻게 판단하였는가?

답: (1) 누구나 살아있는 한 과오(mistake)를 범할 수 있다. (2) 의견의 과오는 실제의 과오를 범할 수 있다. (3) 그러한 모든 과오는 완전한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4) 그러한 모든 과오는 비록 그것이 속죄의 피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 된다. (5) 따라서 가장 완전한 자라도 그들은 실제적인 범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적을 계속 요청하게 되며 자신들과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실제적으로나 또는 판단으로 과오를 저지를 수 있음을 주지하나 만일 사랑이 행동의 유일한 원리라면 이것은 죄가 아님을 주지하거나 관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문: 우리는 어떻게 하면 완전을 지나치게 높게 또는 지나치게 낮게 설정하는 일을 피할 것인가?

답: 성서에 집착하여 그것을 설정하는 정도로 높이 설정하면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곧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

문: 가령 어느 누가 이것에 도발하였다고 자처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하도록 권고하겠는가?

답: 모름지기 그는 우선 거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할 의욕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나 어떤 특별한 이유와 전망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에 대하여 말하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각별히 주의를 요한다.

문: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좋겠는가?

답: … 이것은 맑은 양심을 가지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 따라서 구원을 받은 자가 침묵을 지킨다면 그런 혜택은 전적으로 상실될 것이다.

문: 무엇이 합리적인 증거인가? 어떤 사람이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별하는 영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은 자도(의인 받은 자도) 인지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들이 어떤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되며 행위의 진상이나 깊이를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즉 (1) 만일 그가 변화하기 전 얼마간의 모범적 행위에 관하여 확실한 증거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2) 만일 그가 변화의 시간과 양상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건실하게 표현한다면 말이다. (3) 만일 결과적으로 그의 모든 언행이 거룩하고 결백하게 나타난다면 말이다.

다음의 사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1) 나는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기를 “나는 죄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며 쉬지 않고 감사를 돌립니다. 또한 나는 의인과 함께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내적 증거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범한 여러 가지 과오를 알고 있다”고 해도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육신을 입은 인간은 모두 과오를 범하기 쉬우며 때때로 판단의 과오는 실천의 과오를 유발할 수 있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사랑으로 완전하게 된 자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문: 그러나 만일 완전한 두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를 갖는다면 부모에게는 죄가 없는데 자녀들이 어떻게 죄 가운데 출생할 수 있겠는가?

답: 그것은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있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쳐놓고 나의 대답은 죄가 나에게 상속된 것은 직접적인 혈육이 아니라 인간의 시초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not by immediate generation, but by my first parent.).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고 한사람의 불복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죄인이 되었다.

문: 완전한 자가 일반 신자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답: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 최소한 외적으로는 별로 다른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기”를 그치고 “의롭게 판단하도록” 배우라!

문: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반대하는 증명인가? 나는 그의 말이나 기도에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답: 그렇지 않다. … 성서적 완전은 순수한 사랑이 마음에 충만하고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것이다.우리는 단순하고 성서적인 이해를 계속적으로 견지하기 위하여 보다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순수한 사랑-이것이 성서적 완전의 전체이다.

문: 인간은 언제 이것을 성취하였다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가?

답: 인간이 의인 이전에 경험한 것보다 심오하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타고난 죄를 확인하고, 그것의 점진적인 억제를 경험하고 나서, 죄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으로 온전히 새롭게 됨으로써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때이다. “사랑만을 느끼고 죄를 감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만족스런 증거는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영이 완전히 새로워지기 전에 일시적으로(for a time) 이런 사실을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이 의인처럼 명백하게 전적인 성화(entire sanctifica tion)를 증거하기 전에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믿어서는 아니된다.

문: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성화되지도 않았으면서도 그렇다고 상상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답: 그것은 그들이 전조(全兆) 전반에 따라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 일부나 또는 애매한 다른 징조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만일 인간이 의인 이후 타고난 죄에 대하여 확신하고 죄의 점진적인 억제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의 전적인 중생(entire renewal)을 경험하며 의인이 가져온 것보다 더 큰 이 변화 위에 중생의 직접적인 증거가 첨가된다면 나의 판단으로는 이 사람이 마치 하나님의 속임수로 기만당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문: 이렇듯 죄에 대한 죽음과 사랑 안의 중생은 점진적인가 또는 순간적인가? Is this death to sin, and renewal in love, gradual or instantaneous?

답: … 마찬가지로 그는 얼마 동안 죄에 대하여 죽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죄가 그의 영혼에서 떠나기 전에는 죄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죄가 떠나는 순간에 그는 완전한 사랑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은총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 안에서 계속 성장하며(stills grows) 그것이 죽을 때까지 만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문: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대망할 것인가?

답: … 자기 부장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대망하는 동시에 진지한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에 참여함으로 할 것이다. … 사실상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신앙 때문에[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신앙을 주시지 않으며 또한 주시지 않을 것이다. … 특히 기도가 요청된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리하여 “너희가 갖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은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당신은 죽기 전에 새로워 질 수 있다. 죽기 전에! 이 말이 당신을 만족시켜 주는가? 그러나 그것이 지금 이루어지도록 구하라 오늘 말이다. … 그러므로 서둘러라!

문: 그러나 우리는 사랑으로 완전하게 되기까지 평화와 기쁨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답: 물론 그럴 수 있다. … 신자들은 “항상 주님 안에 기뻐하는” 일에 대하여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잔존하는 죄의 본질에 대하여 민감하게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응시하며 그것에서 해방되려는 강렬한 의욕을 지니는 것이 좋다.…

문: 우리는 스스로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답: 그들을 기탄없이 검토한 다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도록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고하라.……

문: 그러나 완전을 성취하지 못하고도 성취하였다고 망상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옳지 않은가?

답: 온유와 사랑으로 검토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들을 패배시키는 일은 좋지 않다. ……

문: 그러나 만일 아무도 그것을 지금까지 성취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는가? 만일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모두 기만당하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답: 그 사실에 대하여는 나를 설득시키라 그러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 이 이상 설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지금까지 완전하게 된 자가 없다면 하나님은 완전에 대하여 설교하라고 나를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20. 1762년 런던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대폭 증가하였다. … 나는 사람이 밀 속에 가라지를 심으려고 안간힘을 쓰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특히 교만과 열광주의에 관련된 위험성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려 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21. … 사실상 내가 수년간 주장해 온 의견은 인간들이 거룩한 생활에 별로 발전을 보지 못하는 하나의 큰 이유는 그들의 냉담과 태만과 불신앙에 있다는 것이다. …

22. 같은 시기에 5-6명의 정직한 열광주의자들이 2월 28일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였다. 나는 사적으로 또한 공적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즉각 그들에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

24.그해 말엽 하나님은 제인 쿠퍼에게 불타고 빛나는 서광을 비추셨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산 증인이었으므로 … 그녀의 편지 하나를 소개.

1761년 5월 2일〔편지내용 일부〕… 주님은 나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in a moment)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순수한 신앙으로 구원을 찾았습니다. 그분은 주님 곧 왕이 내 안에 임재하신 것과 나는 앞으로 악을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찾아오시고 구속하시며 나의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원”이 되시는 그분을 찬양하였습니다. 나는 온통 사랑으로 뒤덮인 예수를 보았고 그분은 모든 직능에 있어서 나와 관계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영광이 있으라. 이제 그분은 아무런 경쟁자도 없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십니다.…

25. 그 다음해〔1762년〕 나는 계속 격증하는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는 자들이 사용하도록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추가적 소고? (Farther Thoughts on Christian Perfection)를 출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문 1: 어떻게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의 의를 위하여 율법의 끝”이 되시는가?(롬10:4)

답: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여기서 언급하는 율법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1) 모세의 율법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정치, 도덕, 의식 등 세부분을 내포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계속 하나로 본 것이다. (2)아담의 율법으로서 무죄할 때 아담에게 부여된 것이며 “공적의 율법”(the law of works)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천사의 율법과 동일한 것으로서 천사와 인간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 결과적으로 아담의 율법이 요청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수행할 책임이 없고 하나님도 그것을 어떤 이간에게 요청하시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아담의 율법과 함께 모세의 율법의 끝을 뜻하는 까닭이다. 그의 죽음은 이 두 율법에 종말을 고했다. … 생존하는 인간은 누구나 아담이 율법도 모세의 율법도 준수하도록 매여 있지 않다.

이것 대신에 그리스도는 다른 율법 곧 신앙의 율법을 확립하셨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이다. 즉 그는 의인되고 성화되며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문 2: 그러면 우리는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났는가?

답: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났다”(롬7:4) … 그 법은 그와 함께 시한이 지나갔다.

문 2: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고전9:21)

답: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모든 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대신 또 하나의 율법 곧 신앙의 율법을 창설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문 4: 사랑은 이 율법을 성취하는 것인가?

답: 확실히 그렇다.(롬13:9-10)...

문 5: 어떻게 “사랑이 계명의 목적이 되는가?”(딤전1:5)

답: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이다....

문 6: 이것은 어떤 사랑인가?

답: 주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 곧 모든 사람을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영혼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문 7: 이 사랑의 열매 또는 특징은 무엇인가?

답: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한다....

문 8: 그러나 우리는 선의 절정에 이른 자라도 이 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가?

답: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기질과 생각과 말과 행위가 사랑에서 솟아나는 한 우리는 범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우리가 육신으로 잔존하는 다소간 범죄하고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피한 이해의 결함으로 많은 일에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문 9: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 때문이라도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신성한 것들을 속죄하기 위해 그들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비록 완전한 성결이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문 11: 그러나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일관된다고 해도 그 완전이 모든 죄에서 자유한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무죄한 완전(Sinless Perfection)이란 말은 적당한가?

답: 그것은 논의의 가치도 없이 당연하다. … 실로 완전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는 영국에서 5명을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 중 2명에게서는 나는 완전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주장하는 완전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랑”이다.

문 14: 그러나 죄엣 구원받은 자도 유혹을 받을 수 있는가?

답: 그렇다. 그리스도는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문 16: 그러나 당신은 생의 타락에서 구원받고 성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답: … 우리는 성령의 증거와 열매로 그것을 안다. 첫째로 증거이다. 우리가 의인받을 때 성령은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우리 영혼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화될 때 성령은 우리의 죄가 제거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실상 성화에 대한 증거는 (의인에 대한 증거도) 처음뿐만 아니라 나중에도 항시 선명한 것이 아니다. 의인에 대한 증거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뚜렷하고 때로는 희미한 것이다.…

문 19: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언급하거나 또는 그것을 기대할 이유를 제시하는가?

답: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고전 2:12).

확실히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 중의 하나이다. …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란 요한1서 5장 19절을 상고하라.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가 우리 안에 계심을 안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다.” 우리가 어린애든지 젊은이든지 또는 어른이든지 간에 같은 방법으로 아는 것이다.

나는 모든 젊은이들이나 어른들이 순간마다 이 증거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직접적인 증거에는 간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할 때 그 간격은 좁아진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전혀 간격 없이 그들의 의인과 성화에 대한 증거를 한다. 그들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가까이 걸어 갈 때 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증거하리라고 상정한다.

문 20: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증거를 성령으로부터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답: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문: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범죄하지 않으리라는 증거를 성령이 주셨는가?

답: … 우리는 인간이 죄로 타락할 수 없는 어떤 일반적 상태가 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 어떤 사람들도 타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성화된 자들도 타락하고 파멸하는 것이다(히 10:29).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도 그러한 경고가 필요하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요1 2:15) …

문 23: 그러나 여기에 특별한 사실이 있는가? 우리가 의인 받을 때 이 모든 것(성령의 열매)을 지니는 것이 아닌가?

답: … 의인 받은 자는 그것을 지닌다고 말하지 말라.

문 24: 그러나 새로이 의인받은 어떤 자들을 그것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답: 그들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의인받은 사람들은 다소간 교만, 분노, 자기 의지, 타락에 기우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런 것들을 점차적으로(gradually) 극복하기 전에는 사랑으로 완전히 새로워지지는 않는 것이다.

문 25: 그러나 이것은 의인받은 모든 사람들의 경우가 아닌가? 그들은 점진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은총 안에서 성장하여 임종시나 또는 임종 직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들을 안전하게 하시지 않는가?

답: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경우는 되지만 모두가 그렇다고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의인되거나 성화되기 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시어 그들이 빛을 받고 은총 속에서 성장하며 그의 뜻을 수행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만 집착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간혹 “자기의 역사를 단축하신다!” 그는 수년 걸릴 일을 불과 수주간에 이룩하시고 1주간에 할 수 있는 일은 한 시간에 하신다. 그는 어떤 공적도 없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빛이나 은총 속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할 시간도 없었던 자들을 의인화하시고 성화하신다. “그는 자기의 뜻대로 하실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선하기 때문에 나의 눈이 악한가?

그러므로 대부분의 인간이 마지막에는 사랑으로 완전해진다든가,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서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든가 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죄가 파멸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 곧 수년이 걸린다든가 하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40여개의 성구를 들어 증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모든 사실을 알고 잇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은 자의에 따라 “자기의 역사를 단축하시고” 정상적으로는 수년 걸릴 일을 한 순간에 처리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경우에 그렇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순간 전후에 점진적인 역사가 있는 것이다(there is a gradual work, both before and after that moment).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그 역사가 점진적(gradual)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순간적(instantaneous)이라고 하지만 결코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문 29: 완전한 자들은 은총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답: 물론 그렇다. 그들은 육체를 쓰고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히 은총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문 30: 그들은 그것에서 타락할 수 있는가?

답: 그들은 타락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그런 것은 논의의 여지도 되지 않는다. 형식상 죄에서 구원받은 자는 타락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와는 반대임을 우리는 주지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에 내가 뜻하는 바 완전을 경험한 자들의 사례를 무수하게 본다. 그들은 성령의 열매와 그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잃었다.…

문: 이 상태에서 타락한 자들은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가?

답: 왜 안되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많이 본다. 사람들이 그 상태에 정착하기 전에 한번 이상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극히 평범한 사실이다....나는 최근의 역사가 아마 지상에서는 최대의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역시 인간의 나약성과 혼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약성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미소하여 의를 사랑하고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감수해야만 한다.…

문 33: 당신이 그들에게 하고 싶은 첫 번째 충고는 무엇인가?

답: 교만에 대하여 경계하고 계속 기도하라는 것이다.…

문 34: 당신이 그들에게 하고 싶은 두 번째 충고는 무엇인가?

답: 교만과 열광주의의 딸을 경계하라. 그것을 멀리하라! … 꿈, 음성, 인상, 환상 또는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쉽게 추측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하나님에게서도 올 수 있고, 자연에서도 올 수 있으며, 심지어는 악마에게서 올 수도 있다.…

무수한 과오를 범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겸손, 온유, 인내를 포함해서 사랑이 하나님의 지고한 선물이라는 것, 모든 환상, 계시, 현현 등이 사랑에 비할 때 보잘 것 없다는 것 그리고 위에 언급한 모든 선물(하나님 사랑,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죽음과 고통 또는 번민과 유혹에 초연하는 것 등 14가지)은 사랑과 동일하거나 또는 그것보다 훨씬 열등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문 34: 세 번째는 무엇인가? 답: 반(反)율법주의(Antinomianism)를 경계하라. …“나는 사랑이 넘치는 까닭에 성결이 필요없다 나는 항상 기도하는 까닭에 개인 기도시간을 정해 놓을 필요가 없다. 나는 항상 살피기 때문에 특히 반성을 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경계하라.… 신앙절대주의(solifidianism)에 대하여 경계하라. 그것은 “믿으라, 믿으라!”라는 것밖에는 부르짖는 것이 없으며 보다 성서적으로 말하는 자들을 무지하거나 율법적이라고 저주한다. 사실상 어떤 경우에는 참회나 신앙 또는 성결만을 취급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나 보편적으로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선포하고 신앙의 유비에 따라 예언하는 것이다(but, in general, our call is to declare the whole counsel of God, an to prophesy according to the analogy of faith.) ……

문 35: 네 번째는 무엇인가?

답: 누락하는 죄를 경계하라(Beware of sins of omission). 어떤 종류의 선행이라도 기회를 잃지 말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라.… 아무도 1시간이 넘도록 유익하게 대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건한 잡담이나 종교적 농담을 멀리 하라.

문 36: 다섯째는 무엇인가?

답: 하나님 이외에 무엇을 기대한 일을 경계하라.…

문 37: 여섯째는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의 교회를 갈라놓는 분열(schism)을 경계하라.… 뿐만 아니라 완전, 성화, 제2의 축복 및 성취라고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조항에 대하여 언급하라.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때 나는 표현 할 수 없는 변화를 느꼈다. 따라서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과 모든 인류에 대한 완전한 사랑 이외에 교만이나 자기 의지와 분노나 불신앙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묻는 명백한 질문에 대답하라.…

문 38: 당신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충고는 무엇인가?

답: 모든 것에 모범이 되라. 특히 외모(의복과 같은), 작은 일에, 돈을 투자하는 것에(불필요한 소비를 피하고), 신중한 것에, 그리고 대화에 있어서 견실하게 모범이 되라. 그리하여 당신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빛이 되라.” …

26. 나는 1764년에 주제 전체를 평갈 때 내가 관찰한 것 전체를 다음과 같이 짧은 명제로 기록하였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완전을 설교의 초점으로 삼고 계속적으로 강력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선포해야 하겠고 모든 신자들은 이 한 가지 사실에만 유의하여 그것을 계속 염원해야 하겠다.

27. 마치 기독교가 온통 파멸에 직면하고 모든 종교가 근원적으로 파탄에 이른 것처럼 이러한 외침이 지난 20년 이상 영국에 널리 퍼진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완전이란 말 자체가 마치 가장 유독한 이단을 내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추방되고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어찌하여 완전을 설교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및 심지어는 복음으로 태어난 우리 자녀들에게 마저 미친개처럼 조소거리가 되어야 했는가? … 즉 “이것은 웨슬리씨의 교리이다! 그는 완전을 설교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 설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교리도 당신의 교리도 또는 어느 누구의 교리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의미에서 그분의 교리인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최소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까지 금지(ye shall not)의 명령을 내리는 자가 누구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 사도 야고보,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의 교리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교리도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교리도 아니다.

내가 그것을 언제 어디서 발견했는지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그것을 신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였다. 나는 그 때 나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이외의 어떤 관점이나 욕망도 없이 그것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의 교리든지 간에 거기에 어떤 해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여러모로 검토해 보라. 첫째 견해는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으로서 하나님에게 삶을 헌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 전체를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기질을 통제하려는 의욕이다. 그것은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 육체, 재산 전체를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그가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를 걷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부정과 내적 및 외적 공해와 결별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즉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완전한 유사성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셋째 견해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나 취하라(본질적인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1725년부터 1765년까지 40년간을 믿고 가르친 유일하고 전체적인 완전이다.

28. 이제 이 완전을 본래적인 형태로 드러내 보자! 누가 이에 반대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감히 우리 마음을 다하고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에 반대할 것인가? 육적 및 정신적 공해로부터 정결해지는 것이나 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가는 것에 반대하여 입을 열 자가 누구인가? 어떻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의 영과 몸과 재물 전체를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에 반대하는 완악함을 지닐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서 그분의 성령의 영감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높이 찬양하게 하실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다.

Thomas Cook의 ?신약의 성결?

정 해 은 전도사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조교)

 

저자 소개

토마스 쿡은 1859년 8월 20일 영국 Teeside의 Middlesbough에서 태어났으며 1912년 10월 21일 런던에서 죽었다. 그는 7세에 회심을 경험했으며, 10대에 젊은이로 구성된 악단을 데리고, 집 근처의 거리에서 설교를 했다. 그가 평신도였을 때 Newcastle에서 인도했던 집회에서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드는 것을 목격했다. 1878년 그는 후에 장인이 되는 평신도 복음전도자인 요수아 다우손(Joshua Dawson) 밑에서,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의 경험을 했다. 지역 평신도 복음전도자로 활동하던 그는 1882년에 정식사역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 뉴질랜드, 실론, 노르웨이, 호주에서 성공적인 순회집회를 갖기도 했다. 스케빙톤 우드(A. Skevington Wood)는 “토마스 쿡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사역의 활동력은 개인적인 성화 경험에서 나왔다”라고 말한다. 거룩의 대로를 지속적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메시지는 요한 웨슬리의 계통에서 선 성서적이고 깨끗함에 집중되어 있고 능력보다 성숙으로 자라나는 것에 중점이 있다. 그는 1903년에 Cliff College의 총장이 되었으며, 그의 가장 주목할만한 저서는 ?신약의 성결? (1902년)이다.

제1장 허물이 없다고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스펄젼은 이런 말을 하였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도덕적으로 볼 때에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리보다 더 높은 은혜스러운 자리가 있다.” 그는 말을 이어 “크리스천은 높이 떠있는 매와 같이 높은데 있다. 저들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생활하며 열심을 품고 무슨 일에든지 주님을 위하여 힘쓰는 주의 힘을 빌어서 가는 곳마다 이기는 생활을 한다.” 스펄젼이 말하는 크리스천의 생활이 곧 온전히 성결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기독자의 완전, 혹은 완전한 사랑, 신앙의 안식, 기타 여러 가지로 부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성결’이란 말은 크리스천의 생활과 성격 기타 일체를 두고 말함이다. 성결은 우리의 영혼에서부터 죄의 요소를 물리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거듭난 자의 영혼이 거룩해지도록 마음의 더러운 것들을 씻는 요소 즉 회개한 자에게 뒤따르는 마음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성결’이란 사람이 깨끗해지며 죄의 경향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사람의 근본 속에 있는 원죄에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은총으로 사람이 과실을 전연 저지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들어간들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고전 15:54)까지는 누가 죄를 다시 범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룩할 수 있는 완전이란 다만 사랑으로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자리를 그리스도께 두는 것을 말함이다. 우리의 부족함이 있는 상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공로보다는 행하려는 동기와 마음을 보신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을 보시고 우리가 행한 결과는 보려고 아니하신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보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일을 무슨 동기로 하는 가를 주목하신다. 모든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중심에 진실함”(시 51:6)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서도 용납되는 바를 알게 되는 마음이 된다.

제2장 성결과 유혹

우리의 일생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려는 적과의 싸움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우리의 중심에 들어오려고 한다. 유혹은 우리에게 가장 약한 곳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나 유혹을 묵인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한 곳을 강하게 만들 수 길은 유혹뿐이기 때문이며 그 유혹을 이겨내면 약한 곳이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혹에도 악한 생각과 악에 대한 사상과는 구별하여야 한다. 악념(惡念)이란 마음속에 도사리고 앉은 악에서부터 일어나겠으나 악에 관한 사상은 우리가 세상에 귀를 돌렸을 때든지 이것들과 사귀었을 때 영혼을 거스리며 잠시 마음을 흐려놓는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 성결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악을 품지 않았으므로 악념이란 없을 것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사상과 악한 귓소리는 틈틈이 들어오므로 그 때마다 이를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 온전히 정결함을 받은 영혼이라도 사탄의 말에 귀를 돌리는 동안은 옛 순결한 마음이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죄가 다시 그 마음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이전과 같이 쉽게 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안에 있는 마음이 성 밖에서 꾀이고 적에게 쉽사리 항복하고 문을 열어 주려고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 죄는 없어도 산다.

크리스천에 있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는 범할 수 있으되 짓지 않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특성이기도 하다. 거듭난 영혼에게는 그때부터 끊임없이 승리를 향하여 달려가므로, 죄에 빠지지 않을 넘치는 은혜가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죄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은 많은 사람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큰 사명은 이 밖에 또 무엇으로 성취할 수 있으랴, 주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오셨다. 신약에서 본다면 분명히 예수께서 예비하신 구원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울 선생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는가. 요한 1서 3장을 정독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가운데서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살므로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기록하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여 예측하지 않던 일이 일어나서 짓는 죄와, 고의적으로 짓는 죄와는 구별할 수 있다. 성경에서 크리스천이 범죄하지 않는 자임에는 틀림없겠으나 또한 범죄하지는 않아도 죄를 지을 가능성마저 없는 자라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죄는 절대적인 의미로 의로운 율법에서 무의식적으로 떠나는 것까지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던 하나님의 율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저지르는 경우의 죄를 말한다. 신약에서도 “죄란 일반적으로 이미 알고있는 율법을 범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웨슬레는 무의식적 방법에 대해서 “그대가 만일 이같은 잘못으로 지은 허물을 죄로 돌릴 테면 돌리라 나는 그리 않겠노라 죄는 무엇인가. 죄는 율법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하나 모든 법을 어김으로 죄가 될까? 라고 말하였다. 피할 수 없이 무지함에서 악을 범한 자에게 돌리는 경우에 확실히 죄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될지언정 죄로 돌릴 수 없다. 과실이나 연약함, 고의적인 죄가 아닌 잘못은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동안 불가피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의 평생에 있어서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도우시는 힘으로 죄를 피할 수 있다.

제4장 죄사함과 정결함(THE DOUBLE NEED AND THE DOUBLE CURE)

대부분의 신자들은 죄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격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죄를 지을 때 그 행위는 용서받지만 죄를 지으려는 마음은 죄의 상태로서 용서받지 않는다. 범죄에 있어서 부패는 원인이며 죄는 결과이며 부패는 죄악보다 더 깊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를 결과가 되는 죄에서만 구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 원인이 되는 죄에서까지도 구원하시려고 오셨음이 성경에 전체에 나타나 있다. 죄의 원인이란 바울이 ‘죄의 몸’(롬 6:6)이라는 부르는 것이며 “이 다음부터 죄에 매이지 않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멸망”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곧 수많은 가지들을 쫓아다니며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니고 직접 그 뿌리에 도끼를 내리시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말한바와 같이 믿음이 강한 세력이던 죄악을 묶어 놓았기는 했으나 아지 완전히 나아가지는 않기에 내적으로 싸우고 있는 바를 말한다. 죄에 있어 행위로 짓는 죄와 마음의 상태로 지은 죄가 따로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향도 두 갈래가 있다. 즉 범죄에서는 구속으로, 부패는 정결함으로 이루어 놓는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죄(범죄와 더러움)와 부패를 씻는 샘이 … 열리리라”(스 13:1)고 말하면서 이중의 속죄를 예언했다. 성경에선 이중으로 나타난 죄에 대하여 구원도 이중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속죄함과 정결함을 동시에 받는 바를 은혜를 부인할 수 없으나 경험적으로 보아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습만은 아님을 말해둔다. 웨슬레나 클라크 박사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또한 동시에 부패에서 정결케 하셨다는 실례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온전한 속죄가 이루러지며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었지만 그러나 이때에는 죄만 용서받았으며 아직 자기의 속에 있는 부패는 알지 못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먼저 의로운 훈련을 받아 굳세게 서서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는 성령이 가리워 ‘선천적으로 얻은 죄의 뿌리’를 보지 못하게 하신다. 부패에 깊은 자각이 오므로 시편 기자처럼“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제5장 신생과 완전한 성화 (THE NEW BIRTH AND ENTIRE SANCTIFICATION)

성경에서 신생을 ‘거듭남’(벧전 1:23), ‘성령으로 낳음’(요 3:8),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요일 3:14)이란 말들로 이 경험을 말하고 있다. 거듭남으로 인해 크리스천들은 어느 정도 성결이 이루어진다. 그는 이미 “자기를 위하여 사는”(롬 14:7)자가 아니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는 세상과 죄를 멀리하고 승리하였으며 마음에 평안을 얻고 새 생명으로 하나님께 걸어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켜가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생은 성결의 시작일 뿐 아직 사람 속에 있는 더러움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내부에서 마음을 사주하여 범죄하게 하던 부패를 막는 힘을 기를 뿐이다. 신생에서는 죄가 억제되고 정복당한 것이지 완전히 그 죄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서 내적충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성결이란 신생된 자에게 남아있는 성결의 적을 영혼 밖으로 몰아낸 다음 오는 상태이다. 불로서 금을 연단하듯 성결은 제거이다. 죄의 몸이 죽음에 넣어서 십자가에 못박힘이다. 죄가 더 이상 거하지 않는 마음이 완전한 소생이며 전쟁의 요새가 없이 경쟁자가 없이 하나님만이 다스리는 상태이다. 끝으로 거듭남과 온전한 성결의 사이에 확실한 차이가 무엇인가? 거듭남에는 더러움이 남아있다는 것이고 완전한 성결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 둘 것은 완전한 성결은 죄로부터 완전한 깨끗하여질 뿐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온전한 사랑의 은혜가 넘쳐 있으며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미국의 버민 바례에 석탄광이 있어서 두 줄기의 탄맥이 있다. 상층의 탄맥에는 탄층이 두텁기는 한데 아깝게도 석반맥이 몇 줄기 있어서 탄질이 좋지 못하지만 아래의 탄맥에는 상층보다 더욱 두텁고 순순한 탄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처음 거듭난 자와 온전히 거룩함을 받은 자를 설명하는데 좋은 예화인줄 안다. 거듭난 자는 상층의 탄맥과 같이 은혜에는 넘쳐서 풍부하지만 육에 붙여있는 허물과 죄가 머물러 있음을 본다. 그러나 온전히 거룩함을 받은 신자의 마음에는 아래층의 맥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이 마음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아무것도 더럽히지 않고 순수한 것을 넘치도록 받는다. 이제 그 마음도 마치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이 쫓겨나고 이방 사람도 남아 있지 않는 깨끗한 상태이다.

제6장 순결함과 성숙 (PURITY AND MATURITY)

신약에서 순결이란 단어는 거의 일흔 번이나 나타나고 있다. 그 뜻은 곧 무엇을 바랐거나 칠해서 더렵혀지지 아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순결한 마음이고 거기엔 무엇이던 섞여 있으면 순결하다고 할 수 없다. 마음이 깨끗함이란 하나님이 계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 하나님과 사귀는데 방해가 되는 온갖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며 죄 그 자체를 물리치는 것이다. 순결과 성숙(결실)을 다르게 보는데 전자는 성질과 종류(kind)를 말하고 후자는 분량과 정도를 나타낸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보면, 즉시로 깨끗함을 입은 성결과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성결이 교리적으로 상충되어 보인다. 이 말씀에서 보아 알듯이 성결은 선물이며 과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인 면과 점차적인 면이 성경에서 인정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여기서 “깨끗케 하자”의 동사는 부정과거시제이고 이것은 즉각적인 역사를 나타낸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하여짐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남은 정결케 하는 능력이 믿음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끗함에는 결실하는 바가 없겠으나 이 바탕에서 사랑의 열매와 다른 모든 영적인 결실이 영원히 맺어지게 된다. 깨끗하여 짐은 영혼에서 죄를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말하며 결실은 그때부터 힘과 아름다움으로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깨끗함은 밭에서 풀을 매둔 것과 같으며, 결실은 거두는 밭과 같다. 깨끗함은 우리 크리스천의 도착지점이 아니고 보다 높은 계단에 오르기 위한 출발점이다.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은 은혜를 더하려고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은혜를 막아오던 원죄를 뿌리부터 뽑아버리듯 없애 버리는 것이다. 깨끗함은 신앙으로만 받아지는 것이므로 그때 즉시 얻는 경험인데 반하여 성숙(결실)은 시련과 싸워 점점 발달한 결과 얻어진 것이라고 보겠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대낮과 같다”(잠 4:18)

제7장 성결은 현재에 (THE PRESENT TENSE OF CLEANSING)

성결이란 곧 죄에서의 구원을 말해왔음으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질문이 여러 모임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1.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더러움은 거듭난 자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

2. 만일 남아 있다면 영원에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3. 몰아낼 수 있다면 그 때는 언제일까?

크리스천이 대부분은 1과 2는 일치를 하지만 3의 시기에 관한 한 의견을 달리한다. 우리는 믿기를 현재 즉시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경험을 믿는다. “사람에게 죽음이 가까울 때 여러 것을 경험하는 일이 있으나 죽음은 사실상 한 초(秒)동안에 끝난다.” 성결해지는 경험도 이와 같다.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속죄함을 받았으니 허물에서 깨끗케 될 때에도 단순한 신앙으로 얻는다. 물론 자기의 공로로 속죄함이 없었으니 허물도 자기의 수고로 깨끗할 수 없다. 성결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성령에 의해서 영혼에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성결은 믿음의 필사적인 모험에 의해 얻어진 불변의 상태이고 끊임없이 그 상태를 영혼의 조건에 유지하는 것이다. 성결은 위기(crisis)와 과정(process)이다. 모울(Moule) 감독의 말을 빌리면 “It is a crisis with a view to a process.” 위기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온전히 복종시킬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나의 죄를 씻으셨다. 나 같은 자라도”라는 그 약속에 자신을 목숨을 내맡길 때 도달된다. 우리가 이제 알아야 할 것은 깨끗한 상태 그것보다 깨끗함을 갖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다”(요일 1:7). all the time by cleansing us every now. “깨끗케 하실 것이다”의 단어는 현재 진행형 시제이다. 그것은 깨끗해 간다라는 말이다. 이 말을 하버갈 여사는 “계속하는 현재 즉 끊임없는 현재이며, 지금 끊임없는 현재이며, 지금 현재가 다음 순간에는 과거가 됨이 아니다. 깨끗케 하기 위하여 우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우물 속에 머물러 있다”라고 하였다. 항상 현재의 중요성을 말함이다. 우리는 처음 깨끗함을 받은 바와 같이 정결케 하시는 피를 믿는 믿음이 계속함으로 우리는 깨끗함을 보전하고 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면 우리에게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때이다. 육체의 건강이 건강법칙에 유지되듯 영적인 건강도 매순간 신뢰하고 복종함으로 된다.

제8장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혼 (A GOD-POSSESSED SOUL)

의롭게 됨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들어감이요. 거룩하게 됨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심이다. 완전한 거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사로잡히는 것 즉 죄와 사탄이 쫓겨나가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차차 마음이 정결하여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주께서 계시도록 더욱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어느 정도 하여나가겠느냐 하는 대답은 주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고 어느 정도의 복종과 신앙으로 사느냐에 달려있다. 그리스께서 우리의 뜻에 전부를 주관하신다면 우리가 행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곧 주님이 하시는 일인즉 못할 바는 없을 것이다. 주님 자신이 우리 몸 안에서 다시 사시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며, 또한 믿는 이들의 거룩한 생애의 비결이다. 주님은 거룩하시며 그분이 우리의 중심이 되시고 그 크신 능력으로 우리의 영과 육을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고전 1:30) 그리스도시다. 아버지께서 주안에 계시고 주관하시듯,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될 수 있는 한 예수님의 생애를 실현하도록 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같이 된즉 우리에게 어떠한 경우에 시련을 만날지라도 그 시련에서 이겨나갈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행동을 당신의 뜻에 맞도록 하려고 하시므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로서 무슨 일이던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못합니다” 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못할지라도 주님은 능치 못할 바가 없으시니 그가 안에 계셔서 모든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가 무한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혹은 기쁨을 얻다가 그치는 일이 많은데 그 원인은 자기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의탁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저들이 다만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면 풍선 안으로 자연히 공기가 들어가서 둥글게 되듯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 점령할 것이다. 마음 안에 진공을 만드는 진공을 만드는 일은 마음속의 우상을 치우는 일과 같다. 모든 염려, 고난, 위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그의 도우심을 빌지 않는데서 일어난다. 바울이 고백했듯(갈2:20) ‘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라고 할 수 없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리스도가 왕으로 계실 때이다. 루터는 이와 같은 경험담을 말하였다. “만일 누가 와서 루터를 찾으면 나는 이같이 대답하겠다. 마틴 루터는 여기 살지 않습니다. 그는 벌써 죽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 뜻이 마지막으로 주께 항복할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부활이 온다. 이제부터 “나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아니하리니 나는 나의 전부를 영원히 주께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곳마다 따르기로 했다”고 결심할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주관하신다.

제9장 완전한 사랑

신약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인간의 애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필로스(philos)이고 다른 의미로선 성령에 의해서 영혼에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agape)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롬 5:5). 하나님 사랑이 우리에게 내리셔서 우리의 사랑이 되며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한다함은 어찌 놀라지 않으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은 우리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엔 선물이지만 우리에게 내리면 또한 우리의 것으로 되어진다. 이 놀라운 진리를 우가 능히 깨칠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하는 일은 잃어버린 자의 구원을 주님의 우세한 열정으로 항상 동정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자기는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애쓰면서도 자기 둘레에 멸망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가슴에 용솟음치는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영혼에는 어딘지 큰 고장이 생긴 줄 알아야 한다. 한 폭의 그림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성으로 떠나려는 찰라 아이봐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목적을 물은 즉 부인이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하더라는 말이었다. 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인 줄 안다. 사랑은 힘쓰므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기의 영혼 안에서 수고함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배를 민다고 그 배가 갈 수 있겠는가” 사랑은 한 원인에서 일어나는 결과이다. 이 원인을 알아야만 사랑할 수가 있다. 그 원인은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실 때에 사랑은 받아진다. 사랑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곧 하나님이시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종일 모시는 사람이며 또한 마음의 구석구석까지 그를 위해서 다 바치고 그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이것이 곧 온전한 사랑의 원인이다. 어느 책에 “천사가 사랑이 없으면 악마가 되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제하면 짐승으로 되지만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제하여 보아라. 거기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은 사랑뿐이다.

제10장 복음적인 완전

성경에서 ‘성결’ ‘완전’ ‘완전한 사랑’이란 말은 같은 은혜아래 나타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말과 같이 신자들 사이에 논쟁과 토의를 자아내게 한 말은 없었다. 또한 성경에서 ‘완전’이란 말처럼 크리스천의 경험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말도 없다. ‘완전’은 내부의 적이 정복당하고 흩뜨려진 힘이 그리스도의 강한 사랑으로 조화가 되면 그 본성의 갈라진 틈이 사랑으로 채워지고 모든 힘으로 주님을 즐거움으로 섬기는 것으로 영혼에 들어오는 영적인 완전함과 온전함이다. 성경에는 ‘완전’이란 말이 138번이나 쓰였으며 그 가운데서 50회 이상이 은혜를 받은 신자의 성격을 기록하는데 쓰였다. 여기서 인간의 ‘완전’과 하나님의 ‘완전’에는 항상 유한성과 무한성의 성질이 따라 다닌다. 우리는 복음적인 완전, 즉 이 땅에서 이루하리라고 믿는 완전과 절대적인 의미의 완전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어에선 ‘완전’은 두 가지의 의미로 번역되는데, 하나는 완전히 준비가 되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완성됨이거나 끝마침이다. 먼저는 자신의 목적에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을 때에 적용되고, 두 번째는 성장과 경험의 결과로서 완전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적인 완전이란 첫 번째의 단어의 사용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완전함이란 하나님과 교회에 자기가 받은 바 은사를 통하여 봉사하도록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음을 말한다(딤후 3:17, 엡 4:11,12, 히13:20,21). 존 플렛쳐(John Fletcher)의 크리스천 완전의 정의는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널리 미치고 우리를 깨끗케 하고 영혼이 모든 불결함으로부터 깨끗함을 유지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재능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을 달성하도록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복음적인 완전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사랑의 완전은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능력에 할당된 사랑의 완전 2) 우리의 형편과 증가되는 재능과 능력에 조화되는 사랑 안에서의 꾸준한 진보.

누구는 크리스천의 완전을 가리켜 말하기는 언제나 앞에 있는 목표점이며 일생을 두고 부질없이 달려가야 한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문법학자는 희랍어의 명령형은 모두 현재 동사로 되었다한다. 이와 같이 ‘너희는 거룩할찌어다’(레 20:7)하심은 지금의 거룩을 말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지금의 불완전한 우리에게 있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힘까지 주실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이 지금 요구하는 바는 우리가 지금 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제11장 성령충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며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며 저와 우리사이에는 간격을 두지 않으셨다”(행 11:17)하셨다. 이 말씀 안에는 두 가지 사실이 들어있음을 말해준다.

1. 오순절 때에 사도들에게 내리신 성령이 고넬료의 가정에도 내린 일

2. 그 때 성령의 능력은 믿음으로 저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일

이로 보아 성령의 세례는 죄에서 깨끗케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심은 곧 성화됨과 같은 뜻이다. 성령은 우리가 죄의 사하심을 믿을 때에 거듭나는 능력을 가지고 들어오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으로 들어감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악을 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신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성령은 일제히 모든 믿는 자에게 오시며 성령 없이 크리스천일 수는 없다. 다만 성령 충만하심은 별문제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엇바꾸어서 쓰는 예가 많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지는 않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받은 일은 단 한번이지만 성령의 충만하심은 몇 번씩 되풀이 하였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느 제자들’을 만나자 첫 마디로 “그대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1~)고 물었다. 아나니아는 방금 거듭난 사물을 보고 “주 나를 … 보내사 너에게 …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1:17)라고 했다. 만일 우리가 사도시대와 같이 되돌아가 처음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권했다면 오늘과 같은 타락자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약속은 우리에게 극히 요구되며 특히 우리가 거듭난 다음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는 특권이며 생득권(生得權)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것을 받을 권리가 요구할 권리가 있고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기다릴 특권이 있다. 우리가 말할 때 항상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은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 자녀에게 주시려고 예비하고 계시는 은혜 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함 보다 더욱 절실히 여기는 것이 없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제12장 산제물

구약시대에 드린 희생의 제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속죄를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표로서 드리는 제사이다. 신약시대의 속죄제는 갈보리에서 어린양의 보혈로 온전히 이루어 놓으셨으나 헌신하는 제사는 아직도 교회에서 계속된다. ‘산제사’는 과거 율법아래 묻혔던 희생의 제물과 좋은 대조가 되는 말이며, 이것은 불에 사르는 희생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몸 바쳐서 일생 봉사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시는 뜻에 따라 살 때에 우리는 산 제물임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셈이 된다. 옛날 유대인은 하나님께 바칠 짐승을 세심한 주의로 조사한 다음에야 바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 영육을 바쳐 그의 절대적 명령에 순종하고 먹으나 굶으나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같이 해야 할 것이며 무슨 뜻을 두는데나 사랑을 품는데나 행동하는 무엇이고 그에게 순종하는 때에 비로소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결된 몸이 시작하기는 행위에서 부터가 아니라 그 마음씨에서부터 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결은 속마음이 운동함으로 겉으로 비쳐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표증이다.

파리의 미술관에는 아름다운 조각품 하나에 깊은 얘기가 숨어 있다.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조각가가 남의 골방에서 살면서 조각 하나를 만들기에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실패와 절망과 싸우며 종래에는 거의 만족할 정도로 성공했다. 어느 날 작품을 진열해 두고 잠이 들었다. 밤중에 눈을 떠 본즉 된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평생을 두고 만든 조각품이 추위에 손상될까 두려워서 단벌밖에 없는 자기의 옷을 벗어서 조각에 둘러주고 자기는 벗은 채 잠들었으나 영영 잠든 채 다시는 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이웃 사람들이 그가 평소와 같이 깨지 않음을 의미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이 일이 있었음을 보고 울었다 한다. 저들은 그 사람을 장사하였으나 그 작품은 지금도 살아 있다. 아마 장래도 그 작품은 살 것이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힘을 주면서 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의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이와 흡사할 것이다.

제13장 하나님과의 동행

성결이란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고 길이다. 또한 길만이 아니고 속죄함 받은 자가 걸어갈 큰 길이다. 우리가 이 길을 걸을 때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은 1) 길동무 2) 사귐(communication) 3) 진보 이 셋을 들 수 있다.

1) 길동무 우리가 길을 걸어갈 때에 길동무가 계시다는 바를 현실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이상으로 현실에 임재하시고 이 땅에서 누구보다 더욱 친절하시며 유쾌하고 오래갈 수 있는 길동무가 되셔서 우리의 어는 친구나, 부모보다도, 더욱 가까운 길동무가 되셨다.

2) 사귐 크리스천이 사귐이라 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내가 영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무슨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다른 한 사람은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위로하고 그 해결책을 열어준다 이것이 사귐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요일 1:3)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 말하며 듣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드리는 것도 귀를 돌려서 그 말씀을 듣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밀접하고 친근한 사귐을 가지는 자에게는 매일 하나님에게서 축복된 계기가 내리지 않으리오. 이 점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의 어느 부자의 얘기가 있다. 그 부자가 친구와 둘이 시장을 걸어가는데 친구가 갑자기 길 위에 멈춰 서면서 “친구 자넬랑 먼저 가게 주님이 지금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네”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복잡한 시장 안에서도 성령의 말씀을 듣고 있었으며 주님을 마주 대하였던 것이다. 그 친구가 주님을 뵙고 성령의 말씀을 들으려고 뒤에 서 있을 때 부자는 앞에 가다가 보니 그의 모습은 하늘의 영광된 모습으로 쌓여있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부자는 엉겁결에 모자를 벗고 주님을 대하는 그 친구의 영혼을 지켜보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가지기에는 너무도 번잡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깊이 명상하는 습관을 두어 하나님과 통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3) 진보(進步) 하나님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면 우리도 후퇴할 까닭이 없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생각하기를 전쟁에 더욱 이겨야만 자기의 나라가 유지할 수 있으며 그 영토를 확장하여야만 지금 있는 영토도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이와 같아야 할 줄 안다. 전진하는 길만이 퇴보를 막을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길은 더욱 중요하다. 이 거듭난 경험과 충만함을 받고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14장 비욜라의 땅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죽음의 강을 건너기전에 비욜라 땅에 가는데 그 땅은 의심의 성이 사라지고 천성문이 보이고 태양이 밤낮으로 비친다. 이 비욜라 땅을 저들이 다녀보고는 “가장 안락한 들과 숲이며 포도원이 있으니 모든 아름다움은 여기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이 땅을 알포드는 “우리는 육으로 살아 있기는 하여도 영적으론 하늘에 사는 자이다. 다만 완전히 그곳에 있기 위하여 우리의 몸이 구원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엡1:3)라고 말한다. 바울은 크리스챤의 숭고한 경험을 몸소 체험하고 기록한 것이다. 이 경험에서 하늘의 상태란 우리의 속에 있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에 사는 자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는 상태이다. 우리가 지금은 죄와 슬픔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마음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다. 크리스챤에 있어서 죽어보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이 세상일지라도 예수께서 계시면 그곳이 하늘나라가 되겠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몸 바친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마음 안에 살아계시기까지 온전히 우리를 점령하실 때에는 우리는 비욜라의 안식을 얻게 된다.

제15장 영혼의 안식처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이 일치될 때 영혼은 혼란하여 짐없이 안식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는 안식이야말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자에게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의 하나이다. 히브리서 4장 4절에 나타난 안식은 곧 1) 우리의 수고를 쉬게 하는 안식 2) 번뇌와 공포에서 벗어나는 안식 3)속 싸움을 그치고 쉬는 안식 즉 마음 속에 뿌리박은 죄에서 구원받는 안식을 말한다.

1. 이 안식은 우리의 수고를 끝맺는 안식이다.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 우리가 무슨 수고를 쉴 것인가? 그것은 영혼이 구원함을 받도록 수고하는 바를 말한다. 그러나 수고하는 최고 목적이 자기의 영혼을 구원받도록 애쓰는 동안은 곧 “우리의 자신의 수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행한 바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움직이게 되면 이는 그리스도의 수고가 된 것이며 우리의 수고가 끝난 것이다.

2. 이 안식은 장래의 불행과 재난의 심령에서 떠나는 안식이다. 염려는 행복의 원수이며 염려가 생길 때 행복이 반드시 떠난다. 죄를 따라서 들어오는 해독이 곧 염려이다. 염려가 생길 때 기도가 막히고 그릇은 잘 쓰일 것인데도 깨어져 버리고 만다. 모든 염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안정성의 비결은 의뢰함이다. “그를 믿는 자는 구걸하지 아니하리이다”(사 28:16)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상을 잘 다스리고 계셨으므로 지금 우리가 염려할 정도로 실수하신 적은 한번도 없으셨다. 우리가 무슨 염려를 이제 하겠는가. 하나님은 내 아버지신데 내가 왜 염려하랴 그는 밤과 낮을 지키시며 내 귀에 속삭이는 말씀 “내 것이 네 것 아니냐”

3. 속마음의 안식 안식이란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곧 안식을 얻는 자는 육과의 싸움을 그치는 자이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은 무엇이든 영혼 밖으로 내몰아 영혼에는 그리스도만이 마음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신자의 대부분이 로마서 제6장과 제8장의 생애를 보내는 대신에 제7장의 생애를 보내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5)

그러나 천문학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지구와 달 사이에는 원심력의 분기점이 있다 한다. 만일 탄환이 발사되어 이 지점까지 왔다면 탄환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돌다가 만일 달의 인력에 끌리면 가속도로 달에게 접근해 간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때의 경험과 같다.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사로잡혔을 때 이 “생명적인 성령의 법”은 우리가 죄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 즉 죄와 죽음의 법을 소멸하고 났음으로 성령의 법이 더욱 강하여 종래에는 성령의 법으로 영혼은 불붙게 마련이다.

제16장 교회에 남긴 그리스도의 유산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그 유물들을 아래와 같이 분배하였다. 그 영혼은 천부에 맡기시고, 그 몸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의탁하셨으며, 옷은 군병들에게, 그 어머니는 요한에게 부탁하셨지만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은이나 금이 아니고 평안이다”라고 헨리씨가 말하였다. 주께서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하셨다. 이 평안이야 말로 주께서 제자에게 내리신 가장 귀한 유산이었다. 이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살 때에 일어나는 불안과 염려와는 반대로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함에서 얻어진 평안 곧 주 예수께서 “나의 평안”이라 부르신 평안이다. 기쁨은 바다와 같이 늘 요동하거니와 평안은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과 같은 것이다. 후렛챠씨의 말씀에 “우리는 어떠한 악한 소식도 두려워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믿고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토록 나를 부르시기를 원한다.… 때로는 환란과 시험이 적지 않게 가까이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음은 도리어 그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불안 속에서도 영혼이 위로를 받음이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유산이다. 만일 마음에 어떤 불안과 번민이 남아있다면 이는 마음의 어는 방 하나의 열쇠라도 주님께 아직 맡기지 않은데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전 생애의 스승이며 구주로서 받들어 섬기게 될 때에 비로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16).

제17장 성령의 기쁨

“우리가 거듭난 다음에도 애굽에서 먹던 전골 찌개와 마늘, 파, 생강을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은 때때로 받고 있지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저들이 먹은 고기보다 더욱 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마라고 약속하신 바가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기쁨이 없는 신자는 세상 사람에게도 거리낌이 되고 형제에게나 하나님에게 근심거리가 된다. 초대 크리스천들이 전도에 성공한 비결은 저들이 어디를 가나 만족할 수 있었던 기쁨을 가진데서 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크리스천의 대부분은 세상 사람보다 더 많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지낸다. 찰스 웨슬레의 찬송가에 나타난 기쁨과 승리가 오늘날의 신자에게서 사라져버린 이유는 그리스도의 참된 구원을 각자가 실지로 맛보지 못한데서 왔다고 봄은 너무나 뚜렷한 증거이다. 신자들이 왜 기쁨으로 차있지 않을까. 그 까닭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성령의 충만하심은 타락한 인류가 외부에서 무엇을 찾고 만족해 보려는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면 피가 솟고 근육이 고무되며 생활의 노고와 강퍅한 마음을 다 풀어주신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노래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이는 확실히 성령이 임하신 증거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심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제18장 봉사의 힘

영적으로 일하는 자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영적인 힘이다. 사람들이 거듭남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그를 움직여 그 능력으로 구원해내는 것이다. 교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위하여 준비하는 자료는 비싼 값으로도 아낌없이 구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능력의 핵심체가 되는 성령의 강림하심에는 의례히 내리겠거니 하고 갈급하게 구하지 않음은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리요. 사도들을 일하게 만드신 분은 오순절의 성령이었다. 초대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열쇠는 오로지 성령의 능력만을 저들이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연약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붙잡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무디 선생이 스스로 경험한 바를 말하면 아래와 같은 얘기가 있다. “나는 시카고의 화웰 대강당에서 설교하였으나 이때 같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고통을 받은 적이 없었다. 몇 차례 설교를 하여도 허공을 치는 듯이 헛수고였었다. 그때 친절한 자매 한 분이 ‘선생 당신이 하는 설교에는 힘이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자매들 몇 분과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에 함께 모여 기도하기로 하였다. ‘이 빈그릇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지이다’라고. 시카고에 큰 불이 난 다음은 나는 뉴욕에 있었다. 때마침 월 거리의 은행으로 가는 도중 나도 알 수 없는 큰 힘이 내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호텔로 돌아갔다. 내 방으로 들어가 울면서 ‘나의 하나님 당신의 손을 떼시옵소서!’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한 은사를 내리셨기 때문이다. 만일 교만된 말이라면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그러나 그다음 설교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내게 주신지도 모른다. 나는 온 세상과 바꾸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4년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여러분 가운데 나를 이상하다고 볼지 모르겠으나 나 스스로가 더욱 이상하다고 본다. 지금 내 설교가 시카고에서 하던 그 한말과 다름이 없다. 새로운 설교는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는 것밖에는 이는 새 복음이 아니도 성령의 힘이 함께 하시는 묵음 복음이다.” 능력으로 일하면 자기 힘으로 백년을 일한 것보다 많은 성과를 올릴 것이다.

제19장 귀하게 쓰이는 그릇

오래된 책에 이같은 말이 있다. “크리스천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첫째는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는데 저들은 남을 해롭게도 않고 선한 사업을 힘쓰며 대체로 악과 멀리하며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저들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과 싸우자는 열심은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분투하는 노력이 희미하다. 또 다른 신자들은 악과는 물론 멀리할 뿐만 아니라 모두 착한 일에 적극적이다. 저들은 모든 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대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자들이다. 하루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이다. 저들은 시내산에 내려온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얼굴로 나가서 죄악에 매여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다닌다. 이런 자야말로 귀하게 쓰일 그릇이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귀한 인물이다. 디모데 후서 2:20-21에 바울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1. 거룩해진 것 ‘거룩’ 혹은 ‘성결’이란 뜻은 순결과 분리(分離)를 의미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하여서도 거룩함을 붙여왔다. 그들은 제사장이 되기 전에 수양을 잡아서 그 피를 몸에 끝에 발랐다. 이는 그 온 몸이 순결해야 되겠기 때문이다. 기름을 그 몸과 옷에 붓는 의식이 일주간이었다. 바울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의 첫째 되는 자격으로 ‘거룩된 것’이라 하였음은 성전에서 행하여 오던 이런 의식을 마음에 두고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성화(聖火)의 근본적인 사상은 떼어두는 것이다. 악한 것에서 멀리하여 그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토록 만들어 바칠 때에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헌신은 거룩해 가는 한 요소이다. 거룩해지려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다른 한 면이 남아있다. 헌신은 우리가 할 일이고 정결하게 함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헌신하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바울의 편지 가운데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너희의 영과 마음과 몸을 온전히 지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에 책망 받을 바가 없기를 빈다”(살전 5:23).

2. 주께 쓰이는 그릇 ‘쓰임’은 주인에게 알맞은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결’과 ‘쓰임’과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다. 누구든지 주께 먼저 순결과 헌신함이 없이 주께서 쓰시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들어간 자라면 하나님께서 쓰실 그릇이 되었다고 보겠으나 보다 더 하나님이원하시는 바는 정결하게 씻긴 그릇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랄 참된 야심은 무엇이겠느냐.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였다가 하나님께 쓰일 그릇이 되어 우리라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를 행하려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3.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되는 것 이 말은 곧 모든 봉사에 응하도록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결이란 모든 선한 일에 그 능력을 모조리 기울인다는 말이다. 우리의 손과 발, 머리, 성품 모두를 거룩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는 마음은 복된 일이다. 초대 기독교 교부 크리소스톰은 준비란 말에 “준비되었다는 말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연한 일이라 하여도 또 필요하다면 죽기까지라도 할 수 있는 준비”를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이사야는 스랍이 그의 입술에 타오르는 숯불을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죄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고 한 다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 그때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였다.

제20장 헌신(獻身)

온전한 순종은 곧 헌신에서 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 살고 그 뜻대로 고생까지 견디어 가는 자이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일도 죄가 될만한 모든 더러움을 아낌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따르겠다고 일어서기까지는 믿음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전부를 주께 바쳐서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며 신실한 종으로 살려는 결심이 서야 할 것이다. 헌신은 자기를 아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시킨다고 해서 의지까지 죽인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죽는 것은 인간 자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성격의 완전이란 그 의지를 잃음으로 되는 바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버갈 여사는 그 경험담 속에서 “내가 처음으로 참된 헌신을 하게 된 것은 1873년의 크리스마스 주일이었습니다. 내 눈앞에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은 충만한 축복이 있기 전에 온전한 복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한 가지를 이루는 것을 보시고 또 하나를 허락하신다”라고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짧은 말일지라고 그대는 완전히 지켜라, 즉 전체를 버려라. 그러면 전체를 얻으리라” 하였다. “생명을 얻으려는 자는 잃겠고 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은 말이다.

제21장 거룩한 믿음

헌신과 온전한 거룩과는 서로 다르다. 즉 헌신이란 각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어 자기가 이룩한 일이며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안에 오셔서 이루시는 바를 말한다. 이 둘이 서로 다르다. 온전한 헌신이 없이 성결함을 바랄 수는 없다. 온전히 헌신한 다음에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가 단번에 죄의 몸에서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다. 거룩하게 될 믿음은 속죄함 받는 믿음과 같은 노력이지만 한가지 다른 점은 주어진 약속에 있어서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적 부면이다. 영혼은 믿음으로 단번에 “깨끗이 씻기움”(왕하 5:10)을 받는다. 웨슬레가 1766년에 동생 챨스 웨슬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다만 믿음으로 지금 받는 온전한 구속이 온다고 권하여라 단번에 은혜 받는다고”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섭리(구속)가 점차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의롭다하심이 점차로 된다고 하는 말과 부조리(不條理)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하여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을 때같이 거룩함에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믿음으로 용납하여야 한다.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다음 자기의 것으로 꿈꾸는데서 실패가 온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므로 우리가 받는다”는 말씀이 없이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거룩해진 믿음으로는 이같이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은혜를 주시므로 우리는 받는 것뿐이다”라고. 또한 “우리는 가라앉거나 떠 있거나 간에 무한한 사랑과 진리의 바다로 나를 던질 뿐이다.” 거룩해질 믿음은 “약속하심을 거저 믿는 어린 믿음이다.” 이 믿음은 감정과는 반대로 하나님께 전부를 의탁하는 것이다. 응답은 우리가 받은 줄 믿는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다. 고린스씨가 특별집회 때에 “그대는 언제 정결함을 받으려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는 지금 이 때라고 하시는데 그대들은 언제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침묵하다가 세 번째 질문에 “지금이요”라고 대답하였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이라 믿고 뒤로 미루어 본 일이 없었다.

제22장 구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구하여야 한다. 온전한 성결에 대한 골자는 1) 성결과 의로움은 은혜 받는 바가 다르다. 2) 이는 영혼이 온전히 순결하며 죄의 습성에서 자유를 받을 정도로 원죄에서 영혼이 온전함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3) 이는 성령의 모든 은총과 그 열매로 충만하여졌음을 의미한다. 사랑으로 충만하여졌으며 지금의 그릇에 넘쳐흐르고 그릇이 커갈수록 흐르는 바가 더욱 많아져 감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거룩하여질 것을 분부하셨다. 이 거룩함을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조차도 안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다음에 이를 체험하는 데까지 나가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결하라”하시는 말씀을 듣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겠노라고 단단히 결심하여 보라. 굳게 서서 물러나지 말고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만 하면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지금은 이 은혜를 받을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성결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서 바루마 여사는 교역자 한 사람을 바로 일깨워 준 일이 있었다. 그 교역자는 내 말을 듣고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무릎을 꿇고 내가 죄에서 정결함을 받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날부터 그는 산 힘을 받고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문에 ‘지금’ 넣지 않고는 그 기도가 헛것이 될 줄로 알라.

단번에 어떻게 우리가 속죄함을 받고 속에 있는 악이 뽑히고 영혼은 빛과 사랑으로 채워진단 말인가? 이것은 너무나 과장된 말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대답은 다만 “여호와께 능치 못하심이 있겠느냐”(창 18:14)이것 뿐이다.

제23장 은혜를 간직하는 길

크리스천의 생활은 하나님과 떠나서는 한 걸음도 걸어갈 수 없다. 은혜를 간직하려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것이다. 은총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은총의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여야 은총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1.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한다. 양심이 빛 가운데 가노라면 점점 깊게 진리도 깨닫게 되고 무슨 일에든지 자기의 동기와, 선정, 그리고 언행까지도 깊이 살펴가며 행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자가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 볼 때에 “지혜를 연마하여 선악을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잘못된 것을 행하여, 의심스러운 일들이 많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빛이 비추이게 되며 곧 이어서 빛은 따라가므로 이것들을 버리게 된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을 순종하지 않을 때, 어두운 그림자가 그에게 덮이고 진보, 능력, 기쁨이 없어진다. 그는 순종하던 끈을 떨어뜨린 그곳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 애걸하고 그 일을 다시 하기까지 다시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

2. 단순한 믿음으로 따라가라. 우리가 육체 안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정결하게 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산다. 우리는 시련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주장하며 단순한 믿음으로 이 자리를 막아야 한다. 우리는 의심의 구름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함으로써 그것도 달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믿음은 “영원한 진리를 현재의 사실로 확인해 주는 행위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영적인 진리를 읽고 이를 유의하기 위하여 또한 이를 소화하기 위하여 시간을 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때는 요나단이 꿀을 먹고 난 다음 같이 눈이 밝아지는 법이다. 영혼에게나 육체에게나 식욕이 감퇴할 때는 건강하지 못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인 양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영적인 쇠퇴의 길에 서 있는 자이다. 성경을 난독(亂讀)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반드시 이 말씀이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갈 때에만 힘을 얻을 수 있다.

4.기독교 사업에 열심히 나서야 한다. 은혜는 일하는 동기를 보시고 내리신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또한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에게 줄 것마저 없어지고 만다. “크리스천은 숯불과 같으므로 남을 태우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마저 꺼져버리고 만다.”는 말고 일리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던지 “써라”가 아니면 “잃는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에는 다만 잃어버린 자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시는 것뿐만 아니고, 보내는 우리의 도움도 생각하고 계신다. 사회 복지와 구령운동에 힘쓰는 것은 가장 고귀한 생활이 될 것이다. 여기 아름다운 예화 한 토막이 있다.

옛날 천지 창조시대에 새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날개가 없었고 노래만을 불렀다. 다음에 하나님이 새에게 날개를 만들어 주셔서 날도록 하셨다. 새는 날개가 붙으니 무겁고 도리어 귀찮은 것이 붙었다고 불만이 생겼으나 그 불만이 얼마 후에 창공으로 날기 위해서는 도리어 감사한 마음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는 우리에게 붙여진 날개이다. 의무가 처음 붙게 될 때는 자기를 괴롭히는 물건인 듯 생각할지 모르나 기뻐서 의무를 지게 되면 무게는 가시고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갈 날개로 변하는 것이다.

5. 결코 현재 서있는 자리에만 만족치 말아야 한다. 신약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예증을 들어 크리스천은 자라가야 한다고 나타난다. 작은 누룩 한 덩이가 온 가루를 발효하게 하듯 또한 처음엔 싹, 다음엔 이삭, 이삭에서 열매가 맺어진 같이 크리스천의 생애에도 영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러 크리스천의 인격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은혜안에 자라려면 언제나 우리 보다 앞에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바울도 ‘푯대’라고 불렀으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라고 하며 “이것을 얻으려고 나를 쳐서 복종”시킨 그 이상을 아직 이르지 못했다. 더욱이 그는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까지는 앞으로 달려가기를 그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제24장 심령의 주관자

선한 양심을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이다. 양심은 우리가 빛으로 따라 가기를 요구할뿐더러 모든 빛을 순종하고 힘써 빛 가운데서 일할 것을 원한다. 성경에는 양심이 불에 딘 양심과, 우둔해진 양심, 검어진 양심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크리스천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다른 주관자들을 예비해 두셨다. 이 주관자는 바울이 말한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하신 이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을 말하며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신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대양(大洋)같은 평안 즉 우리의 마름이 일생에 주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며 마음의 임금으로 모시게 될 때 받아지는 정신적인 깊은 평안을 말한다. 오랫동안 버려둔 우물 속을 검사하여 할 때에는 사람이 들어가기 전에 촛불을 내려 보내 본다. 불이 꺼지지 않으면 사람이 들어가도 안전하다. 불이 꺼지면 안전치 못한 것을 알게 되듯 하나님의 평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촛불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던 그것이 극히 작은 일이라곤 하나 하나님의 평안을 어지럽게 하면 곧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못할 일은 안전한 것이 못된다. 독이 들어가면 저절로 떤다는 잔이 있어서 마시지 못할 음식물을 미리 알아냈다는 옛 얘기와 같이 우리의 생활에도 평안을 흔드는 경향이 있으면 독이 있다고 생각하고 곧 돌이켜야 할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마음의 주장자로 모시고 사는 자가 복이 있을 찌어다.

제25장 증거(證據)

웨슬레도 전도의 초기에는 마음이 순결해졌음을 고백하는데 매우 신중하게 하라고 권하였으나 그의 교리와 체험이 널리 알려진 다음부터는 교역자나 신자에게까지 오히려 신앙 간증하는 것을 의무로 삼도록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겸손하고도 진실한 증언은 아무 힘없는 듯 하나 사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음이 명백해졌다.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더욱 힘을 얻어 함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남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오늘날 가장 긴요한 것은 증거하는 교회, 산 증거의 척도인 줄 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사43:10)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일을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셨는지 나타내면 이로 말미암아 믿음이 약한 영혼에게 힘주고 우리와 같이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열심을 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의 내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성결하게 하시기까지는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체험담을 듣기도 하고 읽는 동안에 성결되는 길을 거저 기쁨으로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성결해지는 길가에는 겟세마네도 있고 골고다의 십자가도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체험담을 듣고 함께 그 은혜를 받도록 기도하기로 하였다. 엎드려 나의 소원이 이루기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때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리라”(요Ⅰ, 1:7)하신 말씀이 내 속에 떠오르며 지금까지 내가 느끼지 못하였던 힘이 솟아났다. 친구들과 찬송-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 -를 부르는 동안 정결케 하는 불이 내려와 나의 마음을 씻고 죄를 태우고 난 다음 빛으로 채우시고 하나님 앞에서 성별된 몸으로 해주셨다. 이 글을 읽는 형제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함께 이 거룩한 횃불을 맞잡아 올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George Watson의 ?성결?

홍 미 영 전도사 (성결교회역사연구회 협동총무)

 

George D. Watson,「성결」, 박명수·배덕만 역,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 1998.

조지 더글라스 왓슨(George D. Watson)은 1845년 3월 23일 미국 동부 해안지방인 버지니아주 아코맥 카운티(Accomac county)에서 태어났다. 초창기에 동양선교회에 의해서 한국에 초청된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왓슨은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의 지도자로서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특히 왓슨의 「성결」은 웨슬레안 성결론을 평이하게 설명한 것으로, 저자는 성결론의 중요 핵심을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능한 한 신학적인 설명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성결론을 설명하고 있다.

1. 중생

중생은 죄의 삶에 있던 영혼이 의롭게 초자연적으로 변하는 것으로서, 혈통이나 선행, 교양과 같은 육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전이나 의식, 그외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생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영혼 속에 불어넣는, 성령에 의한 신적 권능의 행위이다.(요 1:12-13, 3:5-8)

예수에 대한 믿음이 칭의의 조건인데, 이 믿음에 의해서 유전된 부패성까지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게 된다.(롬 3:24-28) 이것은 실제적인 죄(all actual sins)에 대한 완전한 용서이지만, 영혼 속에 있는 본질적인 악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정죄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회심한 자들은 양자의 영을 얻게 되며, 마음에 남아있는 악을 억제하는 권능의 성령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갈 4:5-7)

2. 유전죄

"유전된"이라는 용어는 선천적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죄를 짓는 것은 유전된 부패성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유전죄는 쓴 맛, 씁쓸함, 쓰라림의 숨겨진 원천으로 묘사되고 있다.(신 29:18, 히 12:15)

유전죄는 영혼 속에 너무나 깊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빛과 진리의 탐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촛불을 들고 마음의 밑바닥을 살펴보아야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부패성을 타인은 볼 수 없을 지라도 자신은 느낄 수 있다.

유전죄는 사악함이나 선의 결핍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혼에 해악을 끼치는 독, 즉 사기와 죄의 핵심이다. 실제적 죄들은 우리가 태어난 후에 생기지만, 유전죄는 최초의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생긴 것이다. 모든 죄가 회심할 때 제거되는 것은 아니며(고전 3:1-3), 하나님의 사람일지라도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정결이 필요하다.

유전죄 또는 부패성에 대한 해설

1. 부패성은 실제적인 죄가 아니라 그 실적 죄가 발생토록 하며, 그것을 촉진시키는 내적인 원천이다.

2. 부패성은 용서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 용서가 완전한 용서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용서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용서가 선천적인 죄를 건드리지 못한다. 또한 부패성은 용서의 영역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생한 자의 가슴 속에도 이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3. 감추어진 부패성은 스스로는 발견할 수 없고, 오직 회심한 마음 속에서 환히 비추시는 성령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4. 부패성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의 개체로서, 육체와 정신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성경에서는 단수(singular)의 형태로 "죄", "불의","부패" 등으로 말해지고 있으며, 제거되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 악의 뿌리로서 당당히 남아있게 된다.

5. 부패성은 외적인 삶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신자의 고통스러운 의식 속에는 나타난다. 타인은 알 수 없지만, 자신과 하나님은 볼 수 있다.

6. 부패성은 영혼 속에 숨어 있으므로, 어린 회심자는 자신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육적인 생각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몇 주, 몇 달을 보낼 수도 있다.

7. 부패성의 동요를 감지하기 시작할 때, 그것의 속죄를 간구해야 하며, 성결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칭의를 상실할 것이다.

8. 부패성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마음의 정결, 곧 성화이다.

3. 성결은 명령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면, 하나님은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총도 함께 주실 것이다. "성결"이란 말은 "온전함", 영혼의 건강을 말하며, 영혼의 질병이 치유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성결을 명하셨으며,우리가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동기에서 거룩을 추구해야만 한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레 20:7-8).

위의 구절은 성화의 이중적 본질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헌신이요, 하나님의 편에서는 온전한 정화이다. 또한 성결은 우리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생활, 교회, 사업과 같은 일에서도 거룩해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4. 헌신

"헌신"이란 말은 성화에 대한 동의어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 헌신은 우리 안에서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완전히 헌신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우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나 사역에 헌신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 그분에 대한 완전한 헌신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면, 이어서 그 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며, 그 후에 그런경험이 있게 된다. 성경은 헌신을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적용하고 있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신자들은 헌신한다. 바울은 죄인들에게는 회심하도록 강권하였고, 신자들에게는 온전한 성화를 이루라고 설득하였다.

헌신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완벽한 소유주이심을,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시간과 영원을 위해 모든 것을 취하시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은 우리의 몫이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5. 믿음을 통한 성결

믿음은 경건 생활의 모든 단계에서 조건이 된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2-3)

위의 문둥병은 유전죄의 모형인데, 그는 와서, 기도했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셨고, 주님은 원하셨으며, 즉시로 깨끗해졌다. 이것이 바로 빠르고 유일한 성화의 방법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축복의 잣대로 삼으신다.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단순한 믿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믿음은 순종의 핵심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명하신다. 성장이나 선행, 혹은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니며, 유전죄를 조금씩 제거함으로써 성결케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에 의해 순간적으로 성결케 되는 것이다.

6. 은총의 두 역사

성경은 은총의 두드러진 구원의 두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첫째는 자범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범죄들은 복수로 취급하고, 원죄 혹은 마음의 죄는 단수로 취급한다. 모든 자범죄들에 대한용서가 성령의 은사나 성결세례보더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위의 구절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는 의롭게 하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온전케 세우는 은총에 관한 것이다. 둘 다 구별되고 분명한 믿음의 두 행위들로 이해된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 4:8-9)

"벗어버리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범죄를 벗어버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옛 죄, 혹은유전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먼저는 불법으로부터의 구속이며, 둘째가 마음의 정결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중생 이후에 성령의 완벽한 갱신(renewing)이 뒤따른다.

용서와 정결은 복음적 종교의 두 축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모든 죄책을 제거한다면, 정결은하나님의 형상을 범한 죄책을 제거해준다. 용서는 모든 죄악된 행동과 언행, 그리고 의도된 목적들의 죄책을 제거하는 반면, 정결은 흔히 행동이나 목적들로 형성되지 않는 죄악된 기질과 욕망의 불결함을 제거한다. 용서는 내가 차곡차곡 쌓아놓은 도덕적 악을 씻어내고, 정결은 내가 물려받은 도덕적 악을 씻어낸다. 용서는 영혼의 선택과 결정을 다루고, 정결은 영혼의 타고난 기질을 다룬다.

용서와 정결은 수용적 믿음의 독립적이고 명확한 행위에 의해서 일어나고, 하나님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며, 성령에 의하여 입증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복종과 흔들림없는 믿음, 그리고 영적인 빛에 우리를 철저히 복종시킴으로써 유지된다.

7. 제2의 축복의 실례들

이 장에서는 성경의 인물들이 칭의 이후에 성결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장에서 인용한 사람들로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이드로, 한나, 솔로몬, 이사야, 사가랴, 제자들, 사마리아 사람들, 고넬료, 아볼로, 에베소 사람들이다.

8. 정결케 하는 보혈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정화를 위한 귀중한 원인이다. 즉 우리의 정결을 위한 힘이며 요소인 것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제의적 성화를위해 효험이 있었으나, 예수의 보혈은 능동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 양심을 거룩케 한다. 예수의 보혈이 모든 죄를 제거하고 온전히 정결케 만든다. 심령으로부터 자범죄와 원죄를 제거하는 것이 "그 고귀한 보혈"의 임무이다. 정결케 하는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바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신다. 정결케 하는 보혈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그 경험에 대한 분명하고도 구두적인 증언만큼 사탄을 당황케 하고, 그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 없다.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 보혈의 역할은 놋대야나 샘, 혹은 비누의 역할과 같다. 그것은 정결의 성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자범죄에서 구원을 받고,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바로 이 보혈인 것이다.

9. 성결의 말씀

그리스도의 보혈이 정결케 하는 요소라면,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은 그 도구이다. 즉 말씀은 우리가 정결의 권능을 받게 되는 채널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술되거나 기록된 말씀은 그분의 정화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기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록된 말씀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말씀이 주장하는 것, 즉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깨끗하다는 것을 담대히 주장해야만 한다. 진리의 말씀은 마음을 분별하며, 우리에게 내적인 성결의 절대적 필요를 보여주는 빛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라는 매개물이나 도구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창조나 구원의 때에 역사하지 않으신다. 진리는 오직 이해되고 복종될 때에만 우리의 회심과 온전한 정결의 도구가 된다.

10. 성결의 영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임무는 실제로 그 과정을 진행해 나가고, 마음의 정결이라는 의식적 사실을 가능케 하는, 인격적이고도 실행적인 인물의 직무와 같다. 진리의 말씀은 모든 영적 축복을 영혼에게 전달해 주는 도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 영혼에 적용된 공로의 향유요, 만병 통치약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말씀을 다루고 보혈을 적용하여 그 사역을 수행하시는 인격적이고 지능적인 행위자이시다.

"성령의 권능"은 그 언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전제 위에, "기사(wonder)와 기쁨, 평안, 그리고 성화"를 이루신다. 진리의 촛불을 들고 우리를 찾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우리의 심령에 계시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중생케 하고 정결케 하시는 그분의 사역에 대한 증거를 품도록 하는 분이 성령이시다. 칭의와 성화의 변화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인격적인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령은 그 조건이 충족되자마자 은총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주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이런 본문들은 성령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동인(agency)임을 증명해준다.

진리는 우리의 정화를 위해 유일하게 지정된 도구이고,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정화를 위해 유일하게 안수된 요소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정화를 위한 유일한 실행자이시다.

11. 증언보다 믿음이 먼저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결의 증거나 느낌을 그것에 대한 믿음보다 먼저 원한다. 성경은 믿음이 느낌보다는 먼저 와야한다고 가르친다. 믿기 전이나 후가 아니라, 바로 믿는 그 순간에 정결케 된다. 그래서 성령이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오직 그 일이 이루러진 후에야 증거할 수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그는 알지도 못한 채, 믿고 복종하여 나아갔다. 믿음이 먼저요, 그 다음에 느낌, 그리고 열매다. 믿는 것은 나의 일이며, 느낌은 하나님의 것이다. 완전한 정결은 당신이 완전하게 믿는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며, 그것에 대한 즐거운 느낌은 그 결과인 것이다.

12. 성화에 대한 증언

우리의 심령을 충만하게 채울 때, 우리는 내적으로 정결함을 느끼게 되며, 의식적으로 실제적이고 선천적인 모든 죄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완전한 평화, 완전한 복종, 완전한 희망, 완전한 사랑, 그리고 지속적인 평안을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8-9)

성령께서 그들이 믿음에 의하여 자신들의 심령을 깨끗케 하였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들의 심령의 정결은 믿음을 통한 것이며, 그 후에는 그 정결이 이루어졌다고 성령께서 증거하신다. 성령은 "모든 것"에 대해서, 즉 용서와 성결,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증거하신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보혈이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함으로써, 영혼이 자신의 정결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신다.

13. 성령세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인격적인 영이시고,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실 뿐만 아니라, 같은 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심령에 적용함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신적인 동인(Agent)이시다. 그분은 회심케 하시고, 중생케 하시며, 성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영으로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후임자이시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개성이나 선천적 특성들을 파괴하지 않으며, 성령의 세례는 성결케 하며, 행동을 위한 힘을 부여한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에 의해서이다. 성령을 바라봄으로써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그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 서 있게 된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우리의 부활과 영화에 대한 보증이다.

14. 거룩한 증언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죄에서의 구원 역사는 성경을 통하여 고백과 열매라는 이중의 혹은 한 쌍의 결과를 갖는 것으로 제시된다. 넓은 의미에서 고백이라는 단어는 언행이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마음의 내용물들을 포함한다. 열매라는 말도 기품, 기질, 말투, 예절 그리고행동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내용물들을 포함한다. 은총의 이런 이중적 결과, 즉 고백과 열매 모두는 성령의 성결세례에 의해서 강화된다.

성결의 아름다움을 삶으로 살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찬양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43:12)

단순한 증거가 아니라, 바로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말한다. 성결케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계시하시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증거해야만 한다. 성화된 영혼으로 하여금 증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적으로 정결케 하시는 성령에 대한 구두적 증거가 열매 맺는 것에 선행해야만 하는데, 정결의 보혈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 거룩의 경험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신 것을 말하는 바로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을 각성시켰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마음의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동일해야만 하는데, 시암(Siames)의 쌍둥이처럼, 믿음과 고백도 함께 살고, 함께 죽어야 한다. 증언은 성령께서 영혼의 구원에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예언이다. 믿음은 그것이 중생이든 성화든, 혹은 신유든 모든 선한 것을 고백함으로써 효과적이게 된다.하나님의 역사는 그 어느 것이든지 결코 감추지 말라.

15. 거룩한 조명

모든 두려움들을 제거해 주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조명해 주는 것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상태에 따라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체험의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 눈을 열어 성경 속의 놀라운 기사들을 보게 만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오직 성령만이 성경을 열어 보이실 수 있다.

예수님은 진리를 공급해 주신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것을 적용하고 조명해 주신다. 성령도어떤 거룩한 천재(genius)와 더불어 자연을 조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특별히 지정된 일은 영광에 이르는 길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의 특별한 사역은 성경의 진리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어떤 새로운 말을 덧붙이지 않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여 그것을 명료하게 하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성을 부여해준다.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으로 새로운 진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성령께서는 정결한 마음속에 예수님의 인격, 아름다움 그리고 영광을 보여주신다.

영혼에는 육체에 상응하는 오감이 있다. 그래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일들을 알 수 있도록 이런 감각들이 열려져 있다.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성령은 육신과 정신을 관통하여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다.

16. 사랑의 완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마음이 모든 죄에서 할례 받고 정결케 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온전한 뜻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이요, 기쁘고 유순하며 온순한 뜻이다.

기독자 완전의 참된 범위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성경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그것이 오직 도덕적·종교적 본성의 완전임을 발견하게 된다. 육체적, 정신적 완전이 아니라 마음의 완전이며, 마음과 양심, 그리고 의지를 포함한 영적 존재의 완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한 사람에게 완전이 예견되거나 요구될 때, 그것은 항상 그의 마음이나 의지와의 관계에서의 완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도덕적 본성, 도덕적·영적 관계의 영역을 포함하는 그런 종류의 완전인 것이다.

17. 성결 안에서 성장

성경은 성결에로의 성장은 가르치지 않지만, 우리가 거룩하게 된 후 성결 안에서의 성장은 가르치고 있다.

1. 마음의 정결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은총 안에서의 성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2. 성화는 내적인 죄를 제거하는 것이고, 성결의 성장은 성령의 열매를 덧붙이는 것이다.

3. 마음의 정결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며, 성장은 믿음과 행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4. 마음의 정결은 정결케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지만, 성장은 다양하다. 즉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사랑에 있어서 더 앞서가는 것이다.

5. 마음의 정결이 천국가는 데 핵심적인 반면, 성장은 천국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6. 마음의 정결은 죽음 이후가 아닌, 바로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빛, 사랑, 그리고권능에서의 성장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도래할 세상에서도 지속될 수 있다.

18. 거룩한 보존

하나님의 보존 능력은 그분의 구원 은총과 같다. 거룩한 자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물들이며,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눈보다 주의깊게 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현존하시며,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이다. 우리가 성화된 후에도, 가나안의 사악한 짐승들에 상응하는 정신과 예절의 많은 조잡함들이 있다. 이것들은 성령에 의해 정제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성화된 상태에서도 축복의 단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가 그에게 위탁한 그 영혼을 지키신다.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하면, 그분은 자신의 손을 우리 위에 고정시키신다.

19. 유혹

우리는 시험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상태는 우리가 죽거나,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야 비로소 끝이 난다. 우리는 시험(유혹)과 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외부 세계에 있는 것들, 오감을 통해 유혹하는 것들, 정신을 유혹하는 것들은 모두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반면 다른 종류의 위험들이 내부에 숨어 있다. 중심의 불건전함, 거룩치 못한 것들에 대한 내적 경향성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영혼 속에 있는 죄의 씨앗은 벽장 속에 감추어진 화약과 같으며,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 화약을 발사하는 악마와 같다.

1. 사탄은 육체의 긴박한 필요를통해서, 혹은 정신의 그릇된 생각을 통해서 순수한 마음과 접촉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2. 속에 있는 불결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그 마음을 타락시킬 것이다.

3. 악마는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그 정신 속에 불어넣고는, 정결케 하는 보혈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고 그 성도를 괴롭힌다.

4. 성화된 자들도 거룩한 이브처럼 시험에 져서 죄를 지을 수 있다.

5. 만약 누군가 뜻하지 않게 악에 굴복하고 말았다면, 속히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도록 하라. 우리는 정결케 하는 시냇물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20.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즉 말씀, 섭리,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순종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판단, 그리고 마음의 충동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그의 방식대로 인도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4-25).

1. 나를 인도하시고 -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결단해야 한다.

2. 교훈 - 이것은 우리의 지혜와 욕망을 철저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나의 사모할 주 -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뜻만을 원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면, 주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첫째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뢰요, 둘째는 자아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다. 자아에 대한 불신은 우리의 의견이나 지혜를 의지하지도 그것들에 치우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만사에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주님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심에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 주시고 우리의 판단을 일깨워주시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분명한 지각을 주시고, 마음에 확신과 도전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세상, 육신과 사탄, 그리고 육적인 지혜와 계략에 대항하여 거룩한 영혼을 인도하실 것이지만,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백한 섭리에 대항하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께 마음을 둘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신다.

21. 거룩한 일꾼들

오직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해져야만 우리가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어느 곳이든 가고, 무슨 일이든지 행하게 된다. 거룩히 구별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군단"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다. 신자들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에 적합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화(완전)임을 보게 된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참된 일꾼이 될 수 없다. 모든 은혜는 항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결과로 우리 편에서는 모든 착한 일을 위해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라. 성령으로 충만해지기까지는 움추림, 소심함, 인간에 대한 두려움, 영적 속박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오직 완전한 청결과 성령 충만만이 영혼의 감춰진 능력을 불러 일으켜서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22.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은 천국에 가기 위한 자격은 믿음에 의해 얻어지고 또 현재적 경험이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거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결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재림에 적합하게 하는 그런 "죽음의 은혜"인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죽음이 임박할 때가지 천국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믿음에 달린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에 따라 성결을 추구하는 자들을 죽기 전에 깨끗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적 성화의 빛을 거부하는 자들은 도로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23. 성결을 거절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성령의 빛을 거부함으로써, 그후에 영혼의 칠흑같은 암흑과 영적 죽음이 뒤따랐던 사실을 땅이 증언하도록 요구하신다.회심한 이후에도 우리가 완전한 사랑의 땅에 들어가길 거절함으로써 마치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실족하고 멸망할 수도 있음을 성경은 증명해 주고 있다.

24. 신유의 약속

출 15:26에서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다스리는 자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순종과 믿음에 근거하여 개인과 민족을 치유할 것이다. 물론 모든 병자들이 치유받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병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 모두가 낫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은 모두 치유된다. 어떤 이들은 믿음의 치유를 위한 믿음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거룩한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런 믿음의 은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기도가 신유의 역사를 이루지만, 모든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가 그런 역사를 이룰 것이다.

E. A. 길보른의 ?성결지침?

장 금 현 목사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연구위원)

 

이명직의 ?성결에 대하여?

신 광 수 목사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연구위원)

 

Roy S. Nicholson의 ?성결?

허 명 섭 목사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저자 및 저서소개

본서의 저자인 로이 스데반 니콜슨(Roy Stephen Nicholson)은 1903년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바할라(Walhalla)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소년기에 회심했으며, Central Wesleyan College에 재학 중이던 1925년에 온전한 성결(entire sanctification)을 체험했다.

1923년에 웨슬리안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에서 목사(elder) 안수를 받았으며,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사역하였다(1923-1934). 이후 웨슬리안 감리교회의 청소년부 부장, 주일학교 부장, 국내선교위원회 총무, Wesleyan Methodist의 편집인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웨슬리안 감독교회 총감독에 선출되어 1959년까지 교단을 이끌었다. 그리고 1959년부터는 1968년 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Central Wesleyan College의 교수로 사역하였다.

Wesleyan Theological Society의 창립 멤버였던 그는 Wesleyan Methodism in the South(1934), Studies in Christian Doctrine(1947), The Arminian Emphasis(1963) 등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이 발제물은 니콜슨 박사가 1951년 성결 강조 주간에 미국 켄터키주에 소재한 애즈베리신학교와 1954년 10월 동양선교회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려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4일간 강연한 것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본서의 내용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1부는 니콜슨 박사의 애즈베리 강연인 “진정한 성결관”의 전반을 번역한 것이고, 제2부는 서울신학교에서 행한 성결에 관한 강연을 모은 것이다.

제1부 에즈베리신학교 강연

진정한 성결 (True Holiness)

성결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유포되면서 성결에 대한 반감이 초래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결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성결의 도리를 왜곡하는 제 요소들을 제거하고 본연의 위치에 자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진정한 성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높은 체험이다. 즉 중생 이후에 가질 수 있는 더 큰 특권 내지는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도덕적 성품 (a moral quality)이다.

신학적 정의

첫째, 성결이란 죄에 대한 신적인 해독제이다. 신적인 속성으로서 성결은 순수(Purity)이다. 그리고 이 순결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고, 인간에게 적용될 때 성결은 도덕적 순결을 의미한다(Chapman).

둘째, 성결이란 인간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원상회복 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전부요 본질이다(Adam Clark).

- 성결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와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현상,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어떻게 되어질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 성결의 도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 성결의 도리는 인간의 이성과 합치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악적 행위는 죄책을 수반하며, 타락한 심정은 깨끗케 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 성결의 도리는 인간관계의 요청에도 부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학적으로 마음의 성결은 사회를 깨끗케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며, 또한 온전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 인간의 마음 속에 진정한 성결이 이루어지는 데는 聖三位가 모두 관여하신다.

가. 성결은 성부의 요청이다(살 4:3).

나. 성결은 성자의 죽음을 통하여 지향되었다(엡 5:25-27).

다. 성결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마 3:11).

* 성부의 뜻과 구주의 사업이라는 이중의 근거 위에서 성령은 신뢰하는 심령 안에 이 체험을 실제의 것으로 만들게된다.

여러 가지 학설

가. 카톨릭의 연옥설 : 死後聖潔說 - 연옥의 정화로 말미암아 영혼이 精練되어진다는 주장

나. 회심설 (The Conversion Theory) : 同時說 - 회심과 동시에 성결을 완전히 얻게 된다는 것으로 진젠도르프(Zinzendorf)의 학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다. Calvin적 학설 - 육체의 죽음으로 성결에 이른다는 주장으로 죄와 사람의 육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1) 轉嫁說(Imputation Theory) :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결설

2) 抑壓說(Suppression Theory) : 죄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 버릴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죄의 실체를 억압함으로써 극복해 갈 수 있다는 주장.

3) 對抗說(Counteraction Theory) : 죄성에 대한 반항 내지 무효화(Nulli- fication) 주장

라. 평범설(The Common Theory) : 성장을 통해 결국은 거룩하게 되어진다는 주장

마. 급변설(The Crisis Theory) : 중생에 뒤따르는 것으로 성령에 의해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 이것이 진정한 성결론이다.

성서적인 근거

성결은 개인적인 체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개인적인 의견(opinion)으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권위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간이 최고의 권위로서 신적인 권위를 거부할 때, 인간은 일치되지 않는 분열된 권위를 내세우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최고 법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 안의 성결에 대하여 여러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고찰되어진 거룩하심(Holiness)은 그의 완전무결하신 도덕적 성결을 의미한다.

2. 완전한 성결이란 모든 도덕상의 죄악을 제거한 온전한 도덕적 선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성향(Disposition) 또는 성정(Sentiment)으로써의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가) 죄에 대한 무한하신 증오와 반대(시 45:7, 합 1:12-13), 나)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과 관심 등을 포함한다.

3. 성결이란 하나님의 도덕성이 영광스러운 충만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자신의 행동원리로 삼고,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일관성이며, 하나님의 요구이다.

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시는 목적을 규정한다.

나. 선과 거룩한 것에 대하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여야 한다.

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 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또한 끝까지 반대한다.

라.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거룩하심의 형상(Form)이라고 할 수 있다.

4. 율법서에는 거룩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인간의 의무라고 말한다.

5. 신약성서에서는 성결에 대한 구약의 개념을 한층 발전시키고 있는데, 죄로부터의 분리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결코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성결

1. 인간의 성결은 하나의 도덕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화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떠나서는 인간의 성결이란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이 인간의 성결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며, 또한 인간의 성결의 의무(또는 이유)가 된다.

2. 진정한 성결의 기반은 이중적이다. 첫째로 성결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동일한 은사인 신앙과 내적 복종이 그 조건이다. 둘째로 사람은 그 심정에 올바른 정화(淨化)로 말미암아 비로소 내부적으로 성결 되어짐을 얻는다. 즉 내부적 정화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의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며, 내부적 성결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이다.

3. 성결은 중생할 때에 시작된다. 성결과 영적 생명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서로 결합되어 있다.

* 인간의 성결의 한계

① 절대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이 절대적이다.

② 타락 전에 아담이 가졌던 성결도 아니다.

③ 천사적인 성결도 아니다.

④ 피안적인 것 - 부활 후에 성결해 진다는 것이 아니다.

⑤ 완숙한 것(Maturity)이 아니다. 성결은 성장하는 것이다.

⑥ 인간의 모든 연약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함도 아니다(고후 4:7).

⑦ 생리적 능력, 식욕, 정서, 감수력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규율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것은 개성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肉情을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존재를 윤택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救贖의 계획

1. 구속은 온전한 것이어야만 한다. 인간이 그 본래의 완전을 회복하고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적응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구원은 온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안에 役事하는 그리스도 사역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2. 속죄의 직접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부응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인간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가장 신기하고 예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곧 주의 고난과 복종, 그리고 십자가상의 처형이었다(딛 2:14).

3. 진정한 성결에 이르게 하는 이 방법은 결코 윤리적 법칙을 파괴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희석시키거나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우주의 이익을 손상케 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도리어 이 방법은 영원하신 공의와 사랑을 영광되게 한다.

4. 구속의 방향은 인간의 성결을 목적하는 것이고, 그 제일목적은 마귀의 역사를 멸하려는데 있다(요일 3:8).

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에게 있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한 자극이 된다 (레 19:2, 마 5:48,사 6:1-7).

② 하나님의 최초의 목적은 인간의 성결에 있었다(엡 1:4, 벧전 1:2).

③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진정한 성결의 가능성에 대한 보장이다(히 7:25).

④ 하나님의 미쁘심은 진정한 성결의 실현을 보장하신다.

표현의 다양성

더 깊은 생활(The deeper life), 더 높은 생활(The higher life), 최고수준의 생활(Life on the highest plane), 승리하는 생활(The victorious life), 복종하는 생활(The surrendered life), 성별된 생활(The consecrated life), 성령충만한 생활(The spirited filled life), 열매맺는 생활(The fruitful life), 거룩한 생활(The holy life), 정결한 생활(The life of purity), 축복의 충만(The fullness of faith), 이중의 치료(The double cure), 신앙의 충만(The fullness of faith), 못박는 생활(The crucified life), 가나안 체험(The cannan experience),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ideal christian life), 오순절 충만(The perfect life), 온전한 성결(Entire Sanctification), 성령세례(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죄에 대하여 죽음(Death to sin), 죄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sin)

요 약

1. 진정한 성결은 거듭날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발단된다(고전 1:2, 고전 6:11).

2. 이것은 중생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헤 안에서 더 깊은 체험을 구해야 한다(요 15:2, 요 17:17, 엡 4:22-24, 살전 5:23).

3. 성결의 체험은 이 생애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성서의 중심제목이요, 기독교의 중심사상이요, 구속의 중심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승리하며 가치 있는 생의 비결인 동시에 외부적 義에 대한 내부적 조건이다.

4. 이것은 영원 전부터 목적되어져 있음으로 결코 새로운 학설이 아니다(엡 1:4). 이것은 웨슬리 또는 메소디스트 운동에 그 기원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성서에 기원한 것으로 하나님의 경륜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이나 불필요한 것이나 불합리한 것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의하여 요청되는 것이다.

5.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으로 사람에게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히 10:1-10, 엡 5:25-27).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준비되어져 있는 것으로 확실히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하나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6. 이 도리는 충분히 계시되어져 있으며, 혼돈이나 모호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만약에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무지와 편견,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fp 11:44, 벧전 1:15, 히 12:14, 마 5:48).

7. 이 성결은 성령에 의하여 중생 후에 순간적(Instantaneously)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고 시간적인 여유나 성장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헌신과 신앙이 그 조건이 된다(행 2:1-4, 행 19:1-6, 행 15:8-9, 롬 8:32, 롬 15:16, 벧전 1:2, 삼하 2:13, 롬 12:12).

8. 이것은 특수한 사람들이나 소수의 특권계급, 또는 특정한 교파에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제공되는 것이다(행 2:38-39), 요엘 2:28-29, 요 17:20).

9. 이것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간의 육체(World consciousness-자연성), 혼(Self consciousness-자의식), 영(God consciousness-神의식)을 모두 포함한다(살전 5:23, 골 3:1-7, 빌 4:8).

10. 이것은 그 요구에 있어서 무리한 것이 아니므로 이것에 대한 무관심 또는 적대시는 허용될 수 없다. 즉 이것은 헌신(롬 12:1-2), 절대적 복종(삼상 15:22), 개인의 상응하는 신앙(히 11:6) 등을 요구한다.

11. 진정한 성결은 실제적이며 동시에 우아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더러운 것이나 불결한 것이 없다.

12. 이것은 의식되는 개인적인 체험이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성령의 간접적인 열매로 말미암아 충분히 설명되어진다. 그러므로 실제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롬 8:16, 히 10:14-15, 갈 5:22-23, 마태 7:20, 요일 2:3, 요일 5:10).

13. 이것은 하늘에 들어가기 위한 보편적인 조건이므로 이애 대한 개인의 태도는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마 5:8, 마 5:48, 히 12:14).

14. 이것은 영속적인 성질의 것이고 결코 이 세상에서만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다(고전 13:13, 계 22:11). 이것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 안에서 시작되지만 영원한 것이어서 그 끝이 없다.

제2부 (서울신대 강연)

성결한 생활(눅 1:67-75)

1. 성결을 말씀하고 있는 성서구절은 대단히 많다. 성도(롬 4:7),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살전 1:4), 온전한 자(엡 4:12-13, 골 1:28), 육적 몸을 벗는다(골 2:11), 죄의 몸이 멸함(롬 6:6), 마귀의 일을 멸하심(요일 3:8),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됨(요일 1:7),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롬 8:29),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 은혜의 충만함을 받는다(엡 3:19, 골 2:3,골 2:10, 요 1:6), 거룩한 성도(살전 3:10-13, 살전 5:23-24),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히 9:28, 빌 1:10, 딛 2:13-14) 등이다.

2. 죄란 믿는 신자가 죽을 때까지 남아있다는 성서구절은 없다. 하지만 죄 없이 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요한복음 1:29절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는 말씀과 요한일서 1장 8절의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는 말씀을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이용한다. 하지만 이 말씀들은 죄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요한일서 1장 7절에 관련시켜 생각하면 알 수 있다.

3.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성삼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은 우리 죄인이 구속받는 일에 대하여 능력있는 성삼위의 무조건한 보장을 받고 있음을 알려준다. 성부께서는 성결을 시작하시는 분이시며(벧전 1:2), 성자 예수께서는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요일 3:8), 성령은 이를 위하여 증거하고 이루게 하신다(행 15:8-9). 그러므로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즉 완전한 성결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으로, 믿음 안에서 그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할 때 우리는 죄악에서 구속받아 완전한데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요일 1:1-10)

하나님과 교제가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법칙에 의해 제되어야 하며 또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면 죄 赦함을 얻는다.

둘째,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죄에서 깨끗해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빛 가운데 걸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과 옳은 태도가 요청된다. 그와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거짓이고 진리 가운데 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탈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유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빛 가운데 걸어가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자녀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구원받지 않은 자녀도 사랑해야 한다(요일 2:9). 둘째, 기도에 대해 옳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도는 교제의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도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어떤 조정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도로써 잘 조정하여야 한다. 형제간에도 조절하여 불친절을 버려야 한다. 또 불의한 교제로 거룩한 교제가 상실될까 우려하여야 한다. 가족 간에도, 교우 간에도 피차 조정해야 한다.

바울의 증언(빌 3:7-15)

어떤 사람들은 성결 체험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단지 객관적으로만 승인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결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성결을 가르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취한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이 한 가지 일만 하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3)라는 구절을 그 근거로 사용한다. 즉 내가 완전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바울이 성결이 없다고 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성결 체험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내적인 십자가형에 대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자기 안에 있는 무엇이 십자가에 죽었으며, 자기 안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기 안의 변화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변화이며, 이제 자신은 새로운 통제 아래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죄를 肉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 육을 좋은 목적 하에 만드셨다. 그런데 이 육체에 죄가 들어감으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적인 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내적인 죄, 즉 罪性은 물질적인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習性 또는 意慾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지불하여야 할 대가이다. 성결의 체험을 얻는 자는 세상의 정욕을 버린 자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하나님께 칭찬 받으면 그것이 제일이다.

세상은 이성, 재물, 명예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때 성결이 체험이 없으면 그런 유혹을 이길 수 없고 실패한다. 하지만 성결한 사람은 담대히 승리할 수 있다. 승리자만이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성결의 필요성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말씀은 성결의 근본 토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거룩하게 만드셨다. 창조 시에 이미 사람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엡 1:24, 창 1:27).

인간은 거룩한 존재, 그리고 지성과 사고력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다. 더욱이 인간은 자유의지를 소유했다. 곧 선택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부여되었던 특권을 사탄에게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이후 인간은 출생 시부터 유전죄가 있게 되었다(욥 25:4, 시 51:5, 시 58:3, 요일 1:9). 이러한 내적인 죄는 외적인 죄를 산출한다(막 7:21-23, 롬 7:23, 갈 5:17, 눅 6:45).

하지만 참 신이요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업을 주셨다. 거룩한 성도에게만 허용된 하늘의 기업이다. 성결의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열려져 있다(갈 6:14).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집행관으로서 인간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행 15:8-9).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엡 2:22).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면 그 결과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한다. 이같은 영광스러운 일을 원치 않으면 결국은 심령적으로 죽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성을 쫓는 생활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롬 8:6-8).

성령의 능력(행 1:1-8)

우리는 성령의 힘을 구하여야 한다. 이 힘을 우리교회가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확실히 우리의 책임이다. 무력한 교회는 세상에 도리어 실망을 주게 되는 것이다.

1. 능력의 약속 :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오랜 세대를 두고 여러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고(요엘 2:29, 겔 36:25),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같은 약속을 하셨다(요 14:15-1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통해 그 약속의 보편성을 확증해 주셨다.

2. 능력의 목적 : 성령의 능력은 첫째로 사람으로 하여금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하려는데 있다. 둘째로 열매를 맺는 봉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어 생활할 수 있게 되며, 큰일을 당하여서는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게 처리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정성껏 충실히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인격에 합치할 수 있게 된다.

3. 능력에 대한 대가 : 성령을 받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로 우리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교역자에게 시험이 닥쳐오기도 한다. 하지만 어려운 중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주가 동행하는 곳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배척을 당해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도록 하여야 될 것이다. 예수를 슬프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되며 성령을 거절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행 2:1-4)

성령세례는 성결을 뜻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으며, 또 여러 가지 說을 말하여 폐단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성결은 성서가 말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보아도 건전한 교리이다. 또한 이성과 지식에 배치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체험적인 일이며, 중심 깊은 곳에서 인간이 갈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이며 정서적인 은혜이다. 이것은 성서의 도리일 뿐 아니라 실생활에서 체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교리는 無識과 無知覺 그리고 偏見 때문에 배척 당한다. 성결을 말하면서도 비평을 받는 자가 없지 않다. 그것은 그 생활이 그 말하는 것과 모순이 있는 까닭이다.

성결의 체험은 우리가 절박한 순간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체험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이 확대발전 되어야 한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일시적인 황홀감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이다(롬 15:16, 살후 2:13). 믿는 자라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성결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을 영적문제에 결부시켜서 말한 것이다. 시간적으로 여유를 오래 두면 성결이 이루어진다고 하나 이것은 모순되는 말이다. 과일나무는 년수가 지나면 나무는 굵어지나 열매는 고정되어 있는 법이다. 성질이 다른 것을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거지가 죽어 갑자기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죄지은 자가 성장하여 성자가 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만이 변화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어떤 특권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행 2:38). 그리고 성서가 “거룩하라”고 명한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용서함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불합리, 불필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요구하시지 아니하신다.

성결한 생활의 성장(벧전 2:17-25)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성결의 생활이 점점 성장하면 깊은 은총 중에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벧전 3:18에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굳건히 서는 것이 필요하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굳건히 서면 성장이 있다.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흠모하여야 한다. 사람은 약속을 어기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성결의 생활은 고난, 시련, 시험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롭고 성결케 하기 위하여 때로 여러 문제와 짐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친구를 잃는 일도 있고, 오해를 받는 때도 있다. 하지만 성결한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 성결생활이 성장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대하며 하나님께 모든 일을 일임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도 있다. 성결한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긴다. 원수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그에게 맡겨야 한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부족을 알고 고쳐야 한다.

Dale M. Yocum의 ?성결신학?

박 성 호 전도사 (성결교회역사연구회 총무)


 

저자소개

데일 M. 요컴은 1919년 10월 19일 Missouri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5월 10일 Kansas의 Overland Park에서 묻혔다. 그는 성결파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Holiness)의 목사, 교육가, 선교사. 복음전도자였으며, Kansas City College and Bible School (KCCBS), Northeast Missouri State Teachers Colleg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 the University of Kansas(교육학 박사, 1957)에서 수학(修學)했다. 그는 KCCBS의 교수와 학장(1940년대-1969), 총장(1969-1971)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1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한국과 자메이카의 선교사, 한국의 성결신학교의 교수로, 선교 동역자(Friends of Mission)의 총재로서 사역을 했다. 그는 얼마간 MIT(미국의 우수한 공대(工大))에서 훈련을 받았기에 과학에 매료되어 성결파 하나님의 교회(CG)의 주일학교 커리큘럼에 수년간 정기적으로 과학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Inter-Church Holiness Convention(IHC)CG(H) 사이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IHC와 관련된 존경받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그는 The Holy Way (1976), Creeds in Contrast: A Study of Calvinism and Arminianism(1986) 등을 포함하여 IHC 견지에서 쓴 가장 중요한 저서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론

인간이 성결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이 성결이라는 점에 근거한다. 한편 인간은 죄성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성결은 그것을 깨끗케 하는 작업이며 인간에게서 성부, 성자, 성령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인간의 죄는 두 가지 성서적인 국면으로 존재한다. 첫째, 인간 속에 있는(in) 악의 오염으로써의 죄며, 둘째, 인간에 의하여 행해지는(by) 악으로써의 죄이다. 이 죄된 상태와(a sinful state) 죄된 행동(a sinful practice) 사이에는 특정한 차이가 있다.

행동으로써의 죄와 내적 상태로써의 죄 사이의 연결은 처음 사람 아담에게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한 변론에 있어서, 아담의 죄를 인용함으로써 전 인류의 죄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the sin-원칙(본원)적 죄)가 들어오고, 이 죄(원칙적 죄)로 말미암아 사망(the death)이 들어온 거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여기 세 가지 사실이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원칙으로써의 죄와 행동으로써의 죄와, 결과로써의 죽음이 논리적으로 연관된다. 이 셋은 아담의 죄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처음 사람 아담의 죄를 자세히 살펴보아야한다. 아담의 죄는 그 밖의 사람들의 죄와는 다르다. 디모데전서 2:14에서?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완전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의 죄는 내적인 죄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이담의 범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금지된 사실과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도 알면서 지은 죄였다. 최종적으로 범죄했을 때에는, 그는 인류의 두령으로써 취한 행동이었다. 그의 행동은 자기 자신만 관련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온 인류를 연루시키는 공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담의 죄가 어떤 내적인 거룩하지 못한데서 발생하지 않은 이상, 그의 죄된 행동은 죄된 상태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고, 또 그런 죄된 상태로부터 자극 없이도 발생할 수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서도 치명적이다. 아담의 불순종의 행동은 그의 도덕적 체질을 혼란시켜버렸다. 하나님, 율법, 양심, 이성은 그 본래적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대신 자아, 유혹에 굴복하는 것, 이성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욕망만 만족시키려는 경향이 우세하게 되었다. 영혼의 이같은 변질된 상태는 성령을 떠나게 하고 ?사망의 권세?를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떠난 아담은 자연히 죄인으로 정해졌고, 생명나무로부터 차단되고 죽음을 면치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혈통을 잇는 법칙에 따라 그의 자손들도 당연히 죄인이 되었고, 자연적으로나 벌칙상으로나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담은 그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의 대부분을 잃어 버렸고, 본래부터 그에게 심기어졌던 거룩한 성품도 상실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의 체질 기능도 아주 변하여, 그 자손들에게도 자기의 부패하고 퇴보된 상태를 그냥 전해주게 된 것이다.

죄의 본성을 그 본질에 있어서 인식한다는 것은, 내적인 부패의 특색을 뼈아프게 의식하는 일이다. 바울은 이를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구원해 주실 이를 찾게 되었다. 죄된 본성의 총괄적 윤곽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다. 육적인 것은 반(反)하나님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 복종하지 않는 것, 순종치 않는 것, 하나님과 그의 계획, 목적, 표준에 반대하는 것, 하나님과 공의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그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사랑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그 경향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그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둘째, 자기중심이다. 자의(스스로 의롭다하는 것), 자기연민, 자기과신, 자기만족, 자화자찬, 이기적 사랑 등등.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생각, 내가 높임을 받고자 하는 생각, 쉽사리 감정을 상하는 민감성, 다른 사람의 과실을 확대하려는 경향성, 자신이 거부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지나치게 풀이 죽거나, 아니면 맹렬히 반발하거나, 또는 부르통하여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남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몹시 탐내기도 하고 무서운 분노, 뚱하게 되는 것, 까다로운 것, 세속적 공명심, 물질에 대한 집착, 뜨뜻미지근한 미온적인 것, 보복적 감정, 앙갚음하려는 충동, 차분하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또 반항적이고 매정스러운 것들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자존심과 자기중심적 사랑의 기형화된 표현이다.

셋째, 세속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다. 자기 행한 것을 세상이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성공에 관하여 세상적 표준에 따라 살려는 욕망, 돈과 지위와 공적 인기를 얻는 것으로 성공의 표준을 삼는 일, 경건한 자에게 반드시 따르는 구별됨을 피하는 일, 육적인 마음을 뒤흔드는 깊은 영적인 실천을 회피하는 일 등이다. 이런 세속적 애착에 사로잡힌 생애야말로 시간과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하여, 수직면이 없는 수평면에서만 사는 생애인 것이다.

죄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이다. 죄는 노예의 신분을 가져오고 그리스도는 자유를 가져다주신다. 구속의 전체 방향은 개인적인 성결을 겨누고 있다. 모든 구속의 원칙이 이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며 거기서 발산하는 빛과 축복의 흘러내림도 그 한 점에 집중되어있다. 교회, 성경, 제사장 직분, 예언적 명령, 모세의 율법적 의식도 이 목적을 위한 방법일 뿐이다. 크리스챤 시대에 이 점은 명백하다.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것, 복음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 성령의 내리심, 그리스도인의 직분과 성례전 등은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재생산시키려는 숨은 목적을 이루시고저 설계하신 방편적인 힘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인간의 마음과 생애와 성품까지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건져내주시는 일이다.

성결은 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의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다. 예수님은 성결된 생애에 대하여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바로 그러한 생애를 이 지상에서, 인간들과 마귀들의 가장 극심한 공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셨던 것이다. 그는 시험과 미움과 핍박을 받으시고, 배척당하시고, 중상모략과 오해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근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주실 수 있는 같은 근원이다. 그 근원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신의 충만이다. 인간의 최종적 구원의 미완성 부분은 육체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죄의 본성을 없이하는 것과는 상관없으며 우리 인간의 연약성을 최후적으로 제거하는 일이다.

▷ 성결에 대한 용어

성결한 사람들이 이 경험을 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은 황홀한 기쁨에 충만하여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충만하심?이라 하였고, 요한 웨슬레는 사도 요한을 따라서 ?온전한 사랑?이라 하였고, 에드워드 부인은 의심은 영원히 사라지고 확고부동한 주시로써 이를 ?믿음의 전적 확증?이라 하였으며, A. B. Earle 은 성결을 사모하여 고통스러우리만큼 몸부림친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깊고 감미로운 안식을 의식함으로써, 이를 ?믿음의 안식?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한(Mahan) 목사는 풀무불로 정케 하고, 죄를 죽이는 영으로 충만하여지고 감격에 사무쳐, 오순절적 표현을 따라 ?성령 세례?라 하였으며, 휘니 목사는 그의 영혼에 넘치는 밀물 같이 밀려오는 기쁨에 충만하여 이를 ?온전한 성결?이라 불렀다. 어떠한 모양으로 표현하였던 지간에, 이 역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성결의 역사로 알려진 용어는 여러 가지로써, 성서적 용어,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을 포함한다. 각 용어에는 적절한 성서적 용어의 뜻과의 관련성이 존재한다.

① 성결과 관련된 용어들 “거룩”(holy)이라는 용어와 거기 관련된 말들이 성경 가운데 적어도 120번 나타나 있다. 이말이 그만큼 기초적이며 그에 대한 명백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약에 있어서와 어느 정도 신약에 있어서도 이 용어들은 성전, 성전의 기명들, 제사장들의 옷과 같은 것들에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기 28:2에서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라고 하였다. 이 경우에 ‘거룩’이란 말은 그 일차적 의미가 특별하고 신성한 용도를 위하여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별”이란 말은 물건의 거룩함에 관련된 말이다. 거룩한 물건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평범하게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유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출 30:25,33). 이 말은 신약에서는 현저하게, 그리고 구약에서는 점증적으로 사람들에게 관련되어서, 죄에서 정결케 되는 의미를 띠고 있다. 물건에 대하여 사용된 뜻을 의식적이라고 한다면, 사람에 대하여 사용된 의미는 윤리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 윤리적 의미가 성서에서 사용되는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사실, 성결이 있는 곳에 성별은 있기 마련이다. 물질적이 물건이 어떤 이의 행위에 쓰이도록 구별되어졌다면, 사람은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22절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하였다. 이 구절 가운데 ?죄에서 해방되고?는 윤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종이 되어?는 의식적인 관념의 성별을 의미한다. 이 결합된 두 가지 요소로부터 성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드(J. A. Wood)에 의하면 “성결”이란 말은 죄로부터 구원과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도덕적 의미에 있어서 건강한 것(to be whole), 온전한 것(to be entire), 또는 완전한 것(to be perfect)이며, 보통 용법에 있어서는 순결(purity)과 경건(godliness)과 동의어이다. 칼빈주의자로 자칭하는 반즈는 골로새서 1:22에 있는 ?거룩?이란 말을 ?죄로부터 거룩하게 되고 자유하게 되는 것?으로 주석하였다.

이상과 같이, 모든 성결은 그 도덕적 윤리적 의미에서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다. 구약성서적 관례로는 부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특별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의식적 의미에서 거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윤리적 의미로써 사람이 거룩하여졌다는 것은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히브리 12:10과 베드로후서 1:4의 비교가 이 사실을 설명해준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셨나니, 이는 우리로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려 하심이라.”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확실히 의식적 성결 이상의 것으로써,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것이다.

② 성화(Sanctification)와 관련된 용어들 이 말은 거룩과 성결(holiness)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말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있어서 다같이 같은 어원으로부터 온 말이다. ?성화?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죄에서 마음이 깨끗게 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가리키며 성결은 성결케 된 그 결과적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sanctify them through thy truth)하심으로써, 그 거룩케 하심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임을 보여 주셨다.(요17:17). 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holy) 자가 되라”(벧전1:15)고 함으로써, 거룩함(holiness)이 하나의 실재하는 것의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원이 비슷하기 때문에, “성화”도 “성결”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뜻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그 기본적 의미는 신성한 용도를 위하여 구별되게 하는 것인데 대하여, 신약성경에서는 죄에서 깨끗케 한다는 뜻에 더욱 더 강조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용어는 윤리적 의미의 테두리 안에서 적용되는 또 다른 이중적 뜻이 있다. 그것은 중생에서 발생하는 초보적 정결(initiate cleaning)이며, 다음은 온전한 성화로 알려진 완전한 정결(couplet cleaning)이다. 예를 들면, 이 말이 전자의 뜻으로 쓰여진 경우는 고린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이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전서 3:1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와 신자들 가운데 아직도 육신에 속한 것이 남아 있는 표본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고린도시에 꽉 차있던 육체의 더러움에서도 씻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과거의 공통적 죄목들을 열거한 뒤에 바울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6:11”고 하였다. 그들의 거룩함이란 죄악된 행동의 더러움에서 씻음 받은 ?중생의 씻음?이었음이 명백하다. 완전한 뜻으로의 성화(santification)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 “평강이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scactify)”에 있다. 스틸(Dr. Daniel Steele)은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을 부정과거법 헬라어 시제를 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결케 하시는 역사가 인간의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짐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하니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고전3:17). 그런데 같은 3장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3)하였으니, 그들의 거룩이란 초보적 성결(initial holiness)로써, 죄된 행동을 그친 결과로부터 오는, 외부적 행동에 있어서의 거룩, 즉 초보적 성결인 것이다. 조금 후에 그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하였다.(고후7:1). 깨끗케 하는 일은 순간적 역사이며, 영과 육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외부적 행동에 있어서는 물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성결(holiness)이다.

③ 성령으로 받는 세례(성령세례) 성령으로 말미암는 세례에 관한 기록이 신약성경 중에 여섯 번 나타나 있다. (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그 성령 세례에 언급된 경우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를 시사하고 있다.

성령세례에 관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첫째, 성령세례는 순간적인 역사라는 점이다. 물세례도 며칠이 걸린다든가 몇분이 걸리지 않는 지극히 신속한 사건이다. 세례라는 비유적 표현으로써 성령의 역사의 간결함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오직 신자들에게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다같이 물세례를 이미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 받을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셋째, 성령으로 받는 세례는 섬기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주신다는 점이다. 불은 능력의 상징이다.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급하고 강한 바람은 능력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넷째, 성령으로 말미암는 세례는 깨끗케 한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고, 바로 계속해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다.

④ 성령충만 성령으로써의 세례(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 사이에는 확실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례를 통하여 예기되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속을 채우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오순절 후에는 단 한번 세례에 대하여 성경에 언급되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것을 회상하면서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하였다(행 11:16). 또 오순절 날에 생긴 일에 관하여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로 기록되어 있다(행 2:4). 즉 세례라는 말로 예언된 일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으로 성취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순절에 성령강림과 관련하여 깨끗케 하는데 대한 강조이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하신 말씀이다(행 15:8,9). 이 중요한 사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내적 충만이나 온전한 성결의 역사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두 가지가 다 순간적 사건이요, 성령의 대행적 활동으로 말미암는 일이요, 모든죄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토마스 쿡(Thomas Cook)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자주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세례는 단 한 번 받는 것이요,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은 거듭거듭 반복된 일이었다. 요컨대, 성령의 세례는 그 부여하심과 정결케 하심으로써 성령의 최초의 충만을 가리키고, 성령의 충만이란 말은 계속적인 새롭게 하심과 능력주심이 따르는 계속되는 생애를 가리킨다(행4:8, 행 13:9).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임하는 유익한 것들을 다 기술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5:18에서 오직 성신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 말에 바로 계속해서 자기의 경험을 말하되, 마음으로 노래하고, 기도로써 항상 감사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다. 킨 박사(Dr.Keene)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음과 두뇌와 신경과 인격을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지향시켜주는 영적 추진력이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세로 계속 밀고 나아가는 것이, 때때로 생각난 것처럼 발작적으로 성신을 받으려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것이다. 이 거룩한 압력 아래 우리는 달음박질하여도 피곤치 않고, 걸어가도 고단치 않으며, 독수리와 같이 날개치며 오르는 것이다. 그 멍에는 쉬워지고, 그 짐은 가벼워지며,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즐거운 길이 되고, 그 인생길은 평화의 길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성령이 그 충만하심으로 탄생된 이상에는, 오늘날의 교회도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치 못하면, 그 교회는 교회가 마땅히 서야할 신약적 표본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언명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성령의 충만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이 거듭나면 영적 생애가 시작된다. 성령이 그의 속에 거하셔서, 그런 생애를 낳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내적 생애의 모든 기능을 완전 소유하고 계신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영적 생애와 옛 육적 생애 사이에 내적 갈등이 있게 된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되면, 그의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에 역행하는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확립되는 것이다.

⑤ 그리스도인의 완전 성결교리를 비평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요약하는 말로써, 또 과소평가하는 방편으로 완전주의(perf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인간의 완전이란 불가능하다”든가 또는 “완전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란 말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의 표준을 가르치되, 이 현세 생애에 있어서 인간으로써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높은 표준을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 완전에 대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완전에 관한 성서적 용법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뜻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다.(창 17:1) 이 말씀은 모세에게도 주어졌으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고 하셨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면려하여,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하였다(왕상 8:61).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또 바울은 권면하기를 “형제들아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하였다(고후 13:11). 이 외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했던 사람들의 성서기록이 있다. “노아는 의인이여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37:37).

⑥ 성결의 성서적 의미 구약성서에서 두 개의 히브리말과 신약성서에서 두 개의 헬라말이 완전의 개념을 전달하며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살렘(ם??)?은 완전한, 가득한, 준비를 갖춘, 건강한 등의 뜻이다. 이 말은 중량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 아닌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씌어진다. ‘탐(ם?)’과 ‘탐밈?은 완전한, 전체의, 흠이 없는, 진실한, 경건한, 더럽지 않은, 똑바른, 건전한 것을 의미하며,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다 사용되어진다.

신약성경에서 아르티오스(ἅρτιος)와 파생어 카타르티소(ϰαταρτἰζω)가 의미하는 것은, 신선한, 완전한, 수리된, 조절된, 준비된, 회복된 등의 뜻으로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하나님께는 적용되지 않는다. 텔레이오스(ΤἐλειοϚ)와 그 파생어들은 완전한, 완성된, 장성한, 사람의 성품에 있어서 완성된 것을 의미하고 그 어근 텔로스는 마음에 품고 있는 계획이든 또는 암암리에 확정된 목적이든 지간에 하나의 목적을 뜻하며, 이 말들은 하나님께와 경건한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된다. 사람에게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숙한 것이라든가 또는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개념은 그 어떤 무엇이 마땅한 상태에 있어야 할 그런 상태에 있게 될 때에, 비로서 그것이 완전하다는 뜻이다.

맥도날드는 “우리는 어떤 물건이 계획된 대로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될 때, 그 물건을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런 물건이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씌어지지 않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 물건을 고안한 사람이 목적한대로의 일을 하게 된다면, 그런 의미에서 그 물건은 완전한 것이다”고 하였다. 신명기 25:15을 살펴보자.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하셨다. 여기에 샬렘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구약성서 중에서 사람의 마음에 자주 적용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표준에 대한 필요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키느냐 못하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되는 것은 그 되가 정확한 분량을 달게 될 때에 완전한 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완전의 표준을 세우신 것이 분명하고, 또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서 평가하시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브라함에 대하여 가진 기대라든가, 그랄 왕 아비멜렉의 표준에 의하여 판단되어질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그 표준에 의해서 판단되어질 것이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였으니(창6:9)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다 갖추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첫째, 성부 하나님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절대적 완전이 아니다. 아무도 지식, 능력, 실존, 성결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둘째,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다. 거룩한 천사는 비록 피조물이지만 현재는 시련 밖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질병이나 죽음이나 박약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아담과 같은 완전이 아니다. 아담은 그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놀라운 직관력과 아울러 완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가 살았던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둘러싸서 지상의 일보다 천상의 일들이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우리 속에 있는 성결케 하는 은총은 우리를 죄에서 깨끗게 하지만, 우리의 육체를 포함한 물질적 세계에 임한 저주의 결과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 이전의 아담이 가졌던 그런 완전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죄과가 불가능한 완전?이 아니다. 웨슬레는 “인간들이 그 최선을 다한다 하여도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린다든지, 그들의 미비한 점이라든지, 판단과 실천에 있어서 잘못되는 일이라든지, 또는 그밖에 여러 가지 종류의 결함을 보상키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 완전한 율법에서 벗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속함이 필요하다. 내가 믿기에는 현세에서는 이 같은 본의 아닌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범과도 없는 그러한 완전은 없으며, 이같은 죄과라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로써는 면할 수 없는 무지와 과오로부터 발생하는 자연적 결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자가당착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죄과가 없는 완전?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현세 생애에서는 전혀 죄과없는 완전에 도달할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부활체의 완전이 아니다. 사람이 온전히 성결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판단과 행동에 있어서 본의아닌 결함을 자아내는 심신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이다. 이 현세 생애 동안에 그러한 인간적 제한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은 없다. 오직 영화된 후에야, 부활 또는 휴거를 통하여 이 같은 심신의 모든 질고와 결함에서 최종적으로 구출될 것이다.

⑦ 완전의 표준 어떠한 것이 완전에 포함되어 있는가? 첫째, 사랑의 완전이다. 그리스도인의 성결과 완전에 대한 전체 개념이 여기에 달려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의 성취는 마음의 사랑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믿음의 완전이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하였다(살전3:10). 믿음이란, 죄의 뿌리가 신자의 중심에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에 대한 의심과 저항을 자아내게 하는 동안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온전한 믿음이란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내포하며, 지속적 승리의 충만한 가운데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의 완전이다. 히브리사람들에 대한 기자의 놀라운 축도를 보자.“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1,21). 하나님은 전적으로 성결케 된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행코저 하는 지고한 욕망을 자아내시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자 하는 것보다 높은 동기는 없다. 이 말은 성결한 사람의 모든 동기와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지향된다는 말이다.

성서적 뒷받침에 의한 몇 가지 완전의 국면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완전한 마음: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8:61)

완전한 걸음걸이: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 하오리니. …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101:2,6)

완전한 평강: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완전한 능력: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완전한 거룩함: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온전한 인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⑧ 전적 구원(Full Salvation) 이 용어는 엄밀히 말해서 성서적 용어는 아닐지라도, 히브리 7:25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셨다. 이 말의 표현은 속에 거하는 죄로부터의 완전히 구출되는 진리를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된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구원”이란 말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구원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초기 구원(initial salvation), 전적 구원(full salvation), 그리고 최종적 구원(final salvation)으로 말할 수 있다. 초기 구원이란 거듭나는 것, 즉 중생이니, 죄사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분여를 말함이다. 그 실례를 사도행전 16:31에서 볼 수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 이는 초기 구원을 말한 것이다. 전적 구원에 대한 것은 히브리 7:25에서와 같이,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다. “온전히”란 말은 시간적으로 최대의 지속기간만이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도 최대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종적 구원도 성경에 언급된다. 예를 들어, 마 10:22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 하나님의 은총의 두 가지 역사

영혼으로부터의 죄(sin-죄된 원칙)와 죄들(sins-행동으로 범하는 여러 가지 죄를 말함)을 제거하는 양식은 다르다. 즉 전자는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지만, 후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다. 두 가지가 다같이 필요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우리 속에 깃들인 결함으로써의 죄는 우리 각 사람의 의지작용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같은 내적병을 가지게 된데 대하여 조금이라도 개인적 책임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죄책이 부착되지 않은 내적인 죄는 용서 받을 것이 아니다. 이같은 내적인 불결은 용서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케 하는 일이 필요하다.

개개인이 범한 외적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으로써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죄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된다. 이러한 유죄에 대한 부담감과 아울러서 용서와 사면을 받고자하는 소원이 발생한다. 유죄는 사법적 문제이며, 이것은 오직 용서나 형벌을 치룸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죽임이 되는 이 벌칙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죄인은, 그 형벌에 견디어 내려는 것보다는 용서 받기를 간청하게 된다. 그런데 내적 죄에 대한 감각은 아주 다른 것이다. 이 내적 죄라는 것은 그 충동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이 또다시 죄된 행위를 범하지 않는 한은, 유죄가 부착되지 않는다. 그리므로 유죄를 가져오는 것은 죄된 상태가 아니라, 죄된 행위이다. 본성에 있어서의 죄의 깊은 근원을 인지함으로써 일어나는 느낌은 일반적으로 깨끗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또한 그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기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가질 수 있다. 그 질병 자체는 불결한 것이지, 유죄한 것은 아니다.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 유전된 부패를 조금이라도 인식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다. 그 대신에 그의 관심은 자기가 범한 유죄 위에 집중되는데, 이는 그가 의식적, 고의적 행동으로써 그러한 유죄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자극시켜서 죄된 행동을 취하게 만든 내적 불결의 근원을 아직도 분별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자기 속에 죄성이 남아 있어서, 여전히 그의 화평을 교란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반항하게 된다는 사실을 죄사함과 거듭나는 경험을 한 후에야 비로서 발견하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부터 구출을 진지하게 추구하기에 앞서서 죄를 발견해야만 한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의 끔찍한 죄 가운데 타락한 연후에, 자기가 죄악의 근원을 가지고 태어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범죄에서 사함받기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적인 불결에서 깨끗함 받기를 간구하였다. 다윗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 속의 악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는 어떤 반역적 행동으로 야기된, 죄에 대한 놀랄만한 발견을 계속 가져온 것이다. 그들이 전에는 구하지 않았으나, 이제 발견하고 거기서 구출되기를 구함으로써 구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과 같다.(렘 29:13)

? 중생과 온전한 성결의 차이점

중생에 들어 있는 것

온전한 성결에 들어 있는 것

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② 음에 깃들이는 하나님의 사랑

③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

④ 범한 유죄에서 용서받음.

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짐

⑥ 죄된 행동으로부터의 구원

⑦ 내적 죄가 억압됨.

⑧ 내적 갈등이 남아 있음

⑨ 새로운 본성의 시작

⑩ 성령으로 출생

⑪ 세속적 행동에서 분리됨.

⑫ 성령의 내주

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

② 마음을 채우는 온전한 사랑

③ 하나님의 평강

④ 죄의 본성에서 깨끗게 됨

⑤ 왕들과 제사장들로써 기름부음을 받음

⑥ 죄된 욕망으로부터의 구원

⑦ 내적 죄로부터 깨끗게 됨.

⑧ 죄된 정욕과의 내적 싸움이 종식됨.

⑨ 옛 본성이 끝이 남

⑩ 성령의 세례

⑪ 세속적 욕망에서 깨끗게 됨

⑫ 성령의 내주

 

▷ 성결의 은혜를 받는 조건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수아가 그들을 인도하기까지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오늘날 만일, 그 길이 밝히 보여진다면 거룩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서 그들의 신령한 기업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성결은 체험이요 또한 생애이다. 성결의 은혜를 받는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거듭난 사실(중생)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결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제2차적인 분명한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것을 받기 위하여는 첫 번째 것을 경험해야 된다는 말이다. 여전히 죄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기까지 마음의 깨끗함과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 아직 중생 못한 사람으로써 온전한 성결이 필요하다고 믿고, 그 은총을 구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의 지나간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현재 날마다 죄를 이기며 나아가는 일에 대하여 확신이 없다면, 온전한 성결을 구하여도 승리는 고사하고 혼란과 실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둘째, 내적 죄성을 인식해야한다. 성령으로 나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머지않아서 그의 심중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내적 반항은 사랑의 결핍, 자기중심적인 것, 타인에 대한 잘못된 태도, 시련 앞에 무력한 것 등이다. 중생의 확실한 특성의 하나는 내적 죄를 발견하게 될 때는 그러한 상태에서 구출 받아야겠다는 강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한 인간의 소원에 응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같은 욕망을 더욱 더 북돋아주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금식과 기도, 성결의 길을 알리기 위하여 출판된 좋은 책 일기, 성결의 생애에 들어간 성숙한 성도들과 담화하는 일. 우리의 애착이 계속 신령한 일들에 쏠리도록 함으로써 거룩한 욕망은 자극을 받아 촉진될 것이다. “이 은혜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치고, 이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토레이(R. A. Torrey)박사는 말하였다.

셋째, 필요한 것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한다. 다윗이 그의 내적 죄성에 대한 날카롭고도 통렬한 고백과 깨끗케 되기 위한 뜨거운 기도로써 시편51편을 기록했을 때는, 그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는 왕이었던 것이다. 죄의 고백과 함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다리는 자리에 나아간다면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 완전히 성별하여 바쳐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살리심을 받은 자는?이제부터 그를 위하여?살도록 성별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고자 한 알의 밀알이 되셨다. 성별이라는 것은 대중적인 이론이나 관능적 욕망의 추구가 아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뜻은 이런 것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이론전개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속되는 열매 맺는 생애를 소유하게 된다. 성별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매는 줄을 내어맡기는 것, 모든 지상의 소유물을 포기하는 일, 하나님께 자아를 복종시키는 일,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시는 역사를 믿는 것이다. 이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을 성결케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 편에서 일을 이루시는데 실패하지 않으실 것을 ale고,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 성결을 반대하는데 대한 해답

그리스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원죄에서 구원받는 성결에 관한 교훈을 반대하며 또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신국약 전 권은 문맥이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하여 성결에 관하여 그 필요성이나 약속이나 은혜받는 일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성결 교리에 대한 논리적 반대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이 있다.

첫째, 성결의 표준은 너무 높기 때문에 그 체험을 사람이 표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반대이다. 그 표준을 인간이 위반할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 교리에 불명예를 가져올 것이 분명할 것이다.

적절치 아니한 죄의 정의와 거기에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그릇된 개념에서 일반적으로 이 변론이 오게 된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행동 표준에서 어긋나는 것을 죄라고 정의지어야 한다면 분명히 사람은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성서에 부합한 죄의 정의는 하나님의 알려진 법을 고의로 불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중생된 사람은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성결의 은혜는 죄로 돌아가지 않도록 함과 안전성을 더해준다. 행위에 관해서 말하자면 성결의 표준은 중생된 생활의 표준보다 더 높다. 죄로부터 내적 정결과 성령의 내적 충만은 성결 생활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없어서는 아니 될 자산이다.

둘째로 기독교의 완전을 표명하는데 있어서 교만감을 내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러한 위치에 도달했노라고 표명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죄악성을 자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겸손으로부터 오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완전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힘으로 된 완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간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완전 성결은 우리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내재하시는 성령만이 우리를 보호하사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시며 하나님을 잘 순종하게 해 주신다.

셋째로 성결을 표명하는 많은 사람들이 비성결 교인과 마찬가지로 죄악된 행동과 태도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사실임을 자인해야 할 것이다. 성신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인 겸손, 정숙, 핍박 중에서도 침착, 그리스도를 닮은 일반적인 행위의 표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도 성결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자인이 성결의 경험을 반박하는 이론이 되진 못한다. 이것은 도리어 진정으로 성결되지 못한 사람이나 또는 마음에 타락한 자에 의한 가짜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의 경우를 빗대어 본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 됨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사실은 중생 교리를 반박할 이유는 못된다. 그보다도 중생의 은혜 없이 말로만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에 관한 실패를 증명해 준다.

넷째로 성결을 표명치 않는 선량한 교인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으므로 그러한 표명은 실제적으로 필요할 리가 없다고 말한다. 교리 여하를 막론하고 진실로 중생된 사람은 외면적인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외적 생활이 의로써 표식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는 불순한 것이 있음을 예리하게 자각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결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것을 표명하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성결해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섯째로 유전된 죄가 마음에서 일단 정결함을 받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다시 원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원죄나 유전죄에서 깨끗해진 사람이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써 아담이 부패한 본성을 유전받지 않았으나 그가 타락하여 그 부패성을 소유하게 된 것을 말할 수 있다. 고의적으로 범죄하게 될 때에 다시 타락할 수 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에 그에게 찾아 왔던 것과 같은 내적 부패성이 고의적인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찾아 간다고 하는 사실이다.

여섯째, 양부모가 모든 죄에서 깨끗해졌다면 어떻게 유전죄를 가진 아이가 그들에게 태어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죄악에 관한 개인적 도덕적인 상태와 죄악에 관한 인종적인 결과 사이의 대조점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의 첫 시조가 범한 죄로부터 오는 어떤 종류의 결과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롬5:12), 그 결과들 중에는 죽게 도는 일, 연약성, 죄성의 유전 등이 있다. 사죄와 성결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는 일은 위에 기록한 인종적인 조건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성결교리에 대한 성서적 반대가 역시 일어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본 절은 가끔 ?두 가지 성품?의 교리 즉 아무리 신앙이 좋더라도 그 속에 육과 영 사이에 끊임없이 싸움이 계속된다고 가르치는 교리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 두 가지 중대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이 영적 상태에 관하여 올바르지 못한 중대한 과실을 범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떨어지는 위험성을 가진 육적인 신자라고 하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 바울이 그 편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실상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결코 신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상태를 보여 주는 이상적 크리스천들이라고 생각되어질 수가 없었다. 바울은 그가 흔히 인용했던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하지 못하고”라고 말하지 않았다. “너희의 원하는 것을 너희가 하지 못하고”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상태에 자신이 내포되지 않음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승리에 관한 그의 개인적인 간증은 매우 차이가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두 번째, 오류는 흔히 구절을 번역할 때 일어나는 오류이다. 스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감된 일이지만 성결의 은혜를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엄청난 오역을 베개 삼고 사망의 잠을 잔 것이다. 헬라어 원어나 요한 웨슬레가 125년 전에 번역한 (R.V)에는 “할 수 없다(can not)”란 말이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너희가 행치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가르친 교훈은 중생했으나 성결치 못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거스리는 하나의 대적 투쟁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교훈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육신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성령은 너희를 막아 싸울 것이요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고 할 때는 육체가 반대한다’.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24절)와 “죄의 몸이 멸할” 때에 이 내적 투쟁은 끝나게 된다. 성결의 진리를 불신하기 위하여 자주 오용되는 다른 구절들이 있다. 그러한 귀절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성결의 진리는 약화되기보다 오히려 강화되어 진다.

완전히 성결된 상태에서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가 말해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성결된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어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그가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성결된 사람들이었음이 그 편지 내용에 서 밝혀져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그들의 영혼과 마음과 생각은 순결했고, 믿음 안에 굳세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열심을 내어 경성하고 은혜 중에 성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탄의 간계 때문에 그처럼 확고한 신앙으로부터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상태에 있었으나 사탄은 용이하게 그들로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타락하도록 했다. 비록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이며 죄를 향한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시험에 굴복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한편 하나님은 그 사건의 발생을 허락하시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발생이 하나님의 소원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하도록 함이 하나님의 목적하심이다. 이 첫 사람은 연약성도 없었고 주위에 유혹하는 세상도 없었지만 시험 앞에 넘어지고 말았다. 하물며 두 가지 약점을 다 갖고 있는 우리가 타락할 위험성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인격이란 인간의 자유의지가 행사되는 시험에 직면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까닭에 때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에 관해서도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성결이란 인격적 선택력이 없이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기의 순결성과 사랑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인간은 타락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요컨데, 신약성경에는 세 가지 양상의 구원이 고려되어있다. 초기적 구원, 완전한 구원, 종국적 구원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는 중생이며, 둘째는 완전 성결이며, 셋째는 앞으로 있을 영화이다. 셋째 구원에 관해서는 행 15:11, 롬 5:9, 벧전 4:18 등에 기록되어 있다. 완전한 구원이란 전기적인 체험에 관해서 뚜렷한 강조가 있는 반면에, 종국적 구원을 위한 준비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을 계속 해야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약 교회에 보내어진 서간문들이 말해주는 교훈은 3/4이상의 내용이 신자들의 지상생활이 성결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성결을 말하면서도 전진하는 생활에 관해서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면, 그 귀한 진리를 등한히 여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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