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인위격으로 신인간의 중보자가 되시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사 피흘려 죄로 인해 부패의 덩어리(Massa corruptionis)가 된 인류 중에서 사람들을 사 내시고, 성령을 보내시사 새 인류를 만드셔서 교회가 되게 하시므로 하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셨다. 그의 피로 속량받은 백성들이 예수의 영으로 살고 그의 말씀을 순종해서 살므로,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순종되고 성취되며, 그의 덕과 은혜가 감사되고, 그의 모든 경륜과 섭리가 찬양되고, 영광을 찬송받으신다. 이 새 인류는 성령의 지도를 좇아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하고 산다. 이 진리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벤”(계 1:5-6)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사 사람에게서 죄과를 제거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속량하시사 성령을 보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 주 예수께서 피흘리시사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부활하시므로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 생겨나게 하셨다. 그의 부활은 인류에게 새 생명을 가져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인류를 만들어 내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인해 그를 항상 찬양하며 경배하고, 그의 법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립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요 근본이요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창출해 내셨다. 그가 죄과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오실 수 있게 하였고 따라서 친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시고 평강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성령을 획득하시므로 인류가 더 이상 육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지배받아 사는 존재인 영으로 살게 만드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의 영광에의 종참 소망으로 살게 되었다. 또 사람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는 생활 곧 제사장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알파와 오메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또 친히 그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오히려 초대 기독교 교부인 오리게네스(Origenes)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자체(αㅂτξβασθλεθα)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에게서 결코 소실되어 없어지지 않고, 자라고 확장하는 영존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모든 산들의 꼭대기 위에 뛰어나고 그 산들 곧 모든 나라와 족속들을 다 포용하는 크고 광활한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법칙과 생명력의 역사로 자라고 확장된다. 이 나라의 내적 법칙의 운동과 생명력이 가만 정체하게 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처음 세워진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 영역에로 확장되어 가고 파급된다. 그 나라의 넘치는 생명력이 역사하여 나라의 영토 확장을 위해 모든 힘을 다 동원한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자기의 백성을 감화하시고 동원하시사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확장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자기들만 그 나라에 속함을 만족하고 있게 하지 못하게 하신다. 다른 사람들과 백성들로 하나님 나라에 가입하도록 설득하고 강권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정체할 수 없고 시간과 함께 계속 확대되고 성장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사죄를 선포하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세워졌으므로 확장도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전하므로 이루어진다. 나라의 설립이나 확장이 다 같은 힘과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나라는 무궁하여 영존하는 나라이며, 한 두 나라에 국한될 수 없어서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포용하고, 역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여도 세상적 권세와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심과 부활, 그의 주 되심과 성령을 허락하심의 선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을 하나님의 구원의 깊로 선포하므로 확장된다. 그 외 다른 길은 다 하나님의 나라를 돕지 못하고 대적한다. 아무리 인간적 관점에서 유익을 많이 가져올 것 처럼 보이는 방법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돕고 유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부패케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세상 나라처럼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 전파와 그 세력으로 이루어진다. 히틀러(Adolf Hitler)처럼 무력과 폭력으로 구라파 제국들을 진압해서 확장하듯 하지 않고, 또 좀 더 선한 목적과 의도로 했던 로마 제국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 콘스탄틴 대제처럼 무력으로 서방에서 부터 밀고 와서 동방의 적수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서 니케야 공회의를 개최한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또 좀더 좋게 말하여, 로마 교황이 “내가 말하노라” 하면 구라파와 로마 교회 세계가 말을 듣게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확장하지 않으신다. 가장 권세 있으신 분이 자기 나라 확장에는 그런 권세의 방식을 호라용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세상의 눈에 가장 무력한 방식을 사용하신다.
본 필자는 크리스마스를 만날 때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찌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구속주로 오실 때 연약한 가운데서도 더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는가? 어찌하여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백마를 타고 승승장구하는 개선 장군처럼 오셔서 세상의 모든 군왕들의 목을 발로 짓밟고 누르듯이 오시지 않으시고, 왜 그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세상에 다시 없는 승승장구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더없는 권세자로 오시지 않으시고, 말구유 위에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고, 세상과 자기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방법도 무력에 의해서 하지 않으시고, 복음 전파와 그 나라의 세력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복음 전파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면, 그들의 영혼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입적된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예수 믿도록 교회로 인도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게로 그들의 죄가 용서되고 또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입적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사람들에게 자녀들이 출생하면 반드시 호적 신고하여 그 나라의 시민으로 등록케 한다. 부모가 무식하다고 하여, 10,20,30세가 되도록까지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고, 이장, 반장, 통장을 통해서라도 호적에 입적시킨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호적 등록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오므로 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 예수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등록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백성들에게서 죄를 제거하므로 이루어진다. 죄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은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를 힘써 하고 힘있게 하여 사람들로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이 때 죄가 용서되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예수 믿어 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출생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예수 믿어 죄용서 받고 새 사람으로 출생하게 하는 일을 쉬임없이 계속해야 한다. 이미 예수 믿는 자들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사방에 예수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야 한다. 동시적으로 만방에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신자들의 자녀들도 이방인으로 되돌아 가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녀들에게 복음의 전파와 교육을 근실히 해야 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의 신앙교육은 제 2세들이 신자들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신앙은 자연적이고 의당한 것처럼 알고 진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의 입적을 결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녀들에게도 주 예수를 그들 개인의 주님으로 모셔들이도록 촉구해야 한다. 부모들의 주님, 가정의 주님에서 자기들 개인의 혹은 자기들 인격의 주님으로 모셔드리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어린 자녀들이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구주로 모셔드리고 고백하게 해야 하고, 또 그것을 자신이 분명히 자기의 신앙 행위로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앙 가정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신앙이 자동적인 것으로 알고 신앙교육을 진행하면, 그들은 이방인으로 결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출입하는 제 2세들이다.
또 교회에 오는 불신 자녀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신앙행위로 모셔드리게 권고하고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복음서들의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이야기화 하여 이야기로만 전달하면, 그 애씀이 신앙 결정에로 귀결하지 못한다. 지금껏 우리 한국 교회 주일학교 교육이 그 많은 인적 재정적 투자에도 불구하고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대부분 실패로 연속되어온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서의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 특히 신약의 가르침들을 받는 어린이들이 성경 이야기, 예수 이야기로만 듣도록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단지 교육 대상으로 보고 신앙 지식의 전달과 증가에 주력하는 교육 방식을 지양하고,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신앙지식의 전달과 증가에 주력하는 교육 방식을 지양하고,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선교의 절박감에서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 이야기로는 신앙을 깨워 일으키지 못한다. 예수 행적이 복음으로 선포되고, 그리고 수납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촉구할 때만이 주일학교 종교교육이 소기의 목적과 성과를 거둘 것이다.
이미 신앙을 수납한 어린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복음으로, 구원으로 선포되고 촉구되면 그들의 신앙이 더욱 자라고 확고히 된다. 신앙에로의 결단 촉구와 복음으로서 예수의 행적 선포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바른 법도를 어린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도 복음의 도로 전해야지 율법의 방식으로 금지와 억제의 길로 가르치고 전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린이들이 소극적이 되고 마음에 제재를 많이 느끼게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해방과 자유 안에서 행동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종교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것이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힘있게 계명들을 지키는 인간을 산출해 내지 못하고, 소극적이어서 대개는 어떤 것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복음을 받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자들이다. 어린 생명에 심긴 것은 그들의 성장과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자라는 것은 결실하여 30배, 60배, 100배로 번창하고 확산된다. 어린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자라면 그들 속에 심겨진 복음의 씨로 자라, 그 복음에 합당한 인격이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자기들의 전문활동 분야에서 일하여 미친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이 크게 된다. 그 결실은 30배, 60배, 100배 이상일 것이다.
추수를 바라면 봄에 씨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씨뿌리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하여 결실기에 거둘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우리도 복음의 결실을 원하면 어린 심령들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가꾸어 그 복음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씨뿌리고 가꾸지 않고 거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복음으로 씨뿌리면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이다. 복음으로 씨뿌려 기르면 교회의 일꾼들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 활동 분야에서 일하여 큰 복음의 빛을 낼 일꾼들이 많아질 것이다. 학문,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등 모든 분야에서 크고 유능한 인재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성인으로 중간에 개종한 자들도 크고 유익한 일을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바른 결실을 많이 기대하기 어렵다. 복음의 씨로 자라고 인격이 갖추어진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되고, 확장되도록 하려면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그 복음에서 자라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점은, 그들은 복음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수납한다는 사실이다. 성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또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과 시간과 재정의 몇분의 일만 가지고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고 바르게만 가르치면 평생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언제 결실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통상 생각하지만 결실 주기는 생각보다 빠르다. 어린아이들이 곧 중고등학교 과정, 대학을 거쳐 성인이 되고 사회에 봉사한다. 유년주일학교 기간에서 대학을 마치는 기간이 약 10년 정도이고 15년 20년 기간에 유능한 인재들을 쉬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할 곳이 어린이들이고, 바른 종교 교육으로 쭉정이가 아니고 알곡을 거두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의 성공 여부는 어린이들의 교육의 성공 여부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만큼 중요한 것이 교육 사업이다. 교육에의 성공은 곧 목회의 성공에로 연결되어 교회를 바르고 튼튼하게 부흥케 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설교에만 전력하던 데서 교육에 주력하는 데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2대 직무는 설교와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 속담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교육은 반드시 헛되지 않아 교육한대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지금처럼 무종교적인 시대에도 신앙교육 받은대로 신앙인으로 자라고 활동한다.
세계적인 두뇌의학자로 1975년 생을 마친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 교수는 1921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의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인데, 그가 두뇌의학으로 전향한 후, 수천, 수만의 두뇌들을 검사하고서 결론하기를 영혼은 두뇌와 독립적 기관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의 전통을 따라 미국 의학계가 영혼을 단지 두뇌의 기능 뿐이라고 전통적으로 신봉되어온 바탕에서, 영혼의 독립적 존재와 사후 존재, 그리고 영혼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과학적 실험과 검사에도 기인하지만 그의 어렸을 적부터 받아온 신앙교육이 그로 하여금 혁명적 선언과 전환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바른 신앙 교육이 한 사람의 일생 경력과 그 종착역을 결정한다(참조, Wilder Penfield, The mystery of the mind). 펜필드 교수는 하나님 나라에 큰 기여를 한 훌륭한 학자이다.
한국 교회도 바른 신앙 교육을 시행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을 각계 각층에서 많이 생산해낼 것이다. 또 복음의 수요는 각계 각층의 만민을 포괄하는 보편적 수요이므로 어느 특정 계층을 전도의 대상으로 제한할 수 없다. 가령 전도의 대상은 가난한 자들만이 주력일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비교적 쉬운 자들이지만, 세상의 것들을 풍성히 가지므로 만족하는 자들도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많은 재물을 가진 자들, 많은 권세와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 많은 지식을 가진 자들도 복음을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다. 이들이 세상의 것으로 풍요하기 때문에 죄문제로 인한 고난과 고통이 더 큰 자들이다. 세상 것들을 풍성히 갖고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바른 생활의 법이 그들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부요한 자들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죄가 지배하므로 대개는 방종이 생활의 법이다. 육체적 포식과 성적 쾌락의 추구와 만족, 하고 싶은 것이면 막지 않고 하는 방임과 방종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 아니고는 돌이키고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이 너무 돈에 연연하지 말고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영혼이 얼마나 곤고한지를 바로 알고 복음의 권세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또 권력자들은 자고하고 교만해지기 쉬운 자들이다. 권력을 자기 손에 쥐고 큰 일들을 집행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도 없어서 자고하고 교만해지기가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큰 죄악들을 범하는 것을 예사일로 여긴다. 그리고 자기 권력에의 도적 세력을 박멸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들이야 복음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를 알기 전에는 그들은 방자와 방종을 생활의 방식으로 산다. 높은 지식을 가진 자들도 그들의 지식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해야 한다. 고대 희랍 철학에서는 자식은 구원의 길이었다. 참 이론적 지식으로 해탈에 이르고 유한을 넘어서서 신들의 세계에 이를 줄 믿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이론적 지식을 희랍인들은 높이 샀다.
현대인들은 지식이 주로 응용적 지식이다. 이 기술적 지식으로 자연의 압제와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줄 믿게 되었다. 이 목표와 이상 때문에 근세인들은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영역들에서 자연 위에 세력들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세력들의 행사가 현대 사회의 구조를 중앙 집중적(Collectivistic)이 되게 하여, 많은 생활 영역들을 중앙 통제식으로 만들었다.
이런 중앙 통제식은 대부분의 경우 인간을 자연 세력의 연장선에 두게 하여, 근세인의 염원인 개인적 자유와 해방을 박탈하여 인간을 인과율적 연쇄 작용하에 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내적 무능과 무력감에 종속되게 하였다. 지삭은 결과적으로 일면 해방과 자유를 가져왔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크게 억압하고 속박하게 하였다. 지식은 사람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많은 지식을 가지 자들의 눈에 유치하게 보이는 지식 체계라고도 할 기독교가 구원의 길이다. 지성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지식이다.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같은 지식 수준 혹은 논의 능력의 수준에서 접근해야 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갖는 학적 전제가 기독교의 참 지식 체계에 비추어서 어떻게 타당하지 못한지를 밝힘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회가 많은 크리스챤 지성인들을 양성 배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합리적 지식 체계인 기독교의 전제와 논의로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지식 체계인 기독교의 전제와 논의로 현금 진행되는 자연과학적 방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므로 기독교만이 지식의 구제책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고, 또 세상의 지식이 가능함도 그분 때문이다. 자연과 세상의 바른 이해와 해석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해석해 놓으신 해석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해석에 의해 재구성한 지식이 아니고는 참 지식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를 다 계획하시고 경륜하셨을 뿐 아니라, 그 경륜 따라 창조를 조성하시고, 그 창조를 다 해석해 놓으셨다. 해석되지 않은 창조의 부분은 아무데도 없다. 이제 비로소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재료들을 모아 해석해야 하는 어두운 세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바르고 합당한 해석으로 철저히 해석되어 모든 세계가 빛으로 가득하다. 단지 인간의 지성이 좁아서 그 해석을 포착하고 다 이해하지 못해서 방항과 미로를 거듭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해석을 담아 놓은 성경을 진리의 빛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해석을 재해석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재구성하는 유비적 성격을 지니므로 학문하는 노력이 허사가 안되고, 또 그러므로 창조의 한 국면을 절대화하는 주의(主義-ism)化를 막을 수 있다.
결국 학문은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 따라 창조된 창조를 연구하여 사물의 성질과 이치와 법칙을 규명하여 정리하고 해석하여 체계화하는 활동이므로, 하나님의 지식체계를 반복하는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석의 원리를 구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의 학문이 바른 지식의 체계와 전달을 성취하지 못하고 독단에 이르고 거짓 지식체계가 되고 지식의 파편밖에 안될 것이다. 학문이 구제되는 길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창조의 존속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해졌고, 또 실제로 그러하며, 학문이 그 대상으로 하는 창조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속량되고 존속되어 학문도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은 증거되고 고백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데 학문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아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성인에 대한 선교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다.
또 현대 사회는 대학과의 연관 관계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현대 산업 사회의 발전은 대학에서 학문의 전수와 연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대학 실험실과 연구실에서의 연구 결과는 곧 사회 생활에 파급되어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그러므로 대학인들은 그 사회의 엘리뜨들로 현대사회의 주력 세력을 이룬다.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가치관 형성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팜으로 크다. 이들이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학문 활동을 할 때 사회의 혼란을 축소할 수 있으며, 과학적 결과들의 이용으로 범죄에 주력하도록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지성인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가 있다. 학문의 세계도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자기 것으로 사셨고 그러므로 권리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학문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역사하시도록 해드려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의 왕권을 확립해 드리기 위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런 목적 실현을 위해 아브라함 카위퍼는 암스텔담에 자유대학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가 다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놓이게 하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가 각 계층에 예외없이 전파되게 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전파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면 죄가 제거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오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는 길도 죄의 제거와 죄 개입의 방지로만 가능하다. 죄는 아브라함 카위퍼의 말대로 분리하고 분열하는 역사를 하므로 죄가 개입되면 깨어지고 흩어지는 일이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죄가 개인과 교회와 단체와 어떤 사회에 들어오면, 그 개인의 영혼이 병들어 쇠잔하고, 인격의 분열을 심하게 경험하여 모든 기관들이 쇠잔하고, 육체가 병들어 빨리 죽게 된다. 죄짓기 전에는 한번만 해보면 다시 없을 좋을 것처럼 장미빛으로 황홀하게 보여도 한번 저지르고 나면 세상이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하며, 입맛이 쓰며 불안과 초조와 공포와 좌절과 실의가 숨가쁘게 반복한다. 결국 죽음에로 재촉한다.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교회가 당하는 수난과 충격과 그 파급 효과가 너무도 크다. 특히 목회자가 범죄했을 경우 그 교회가 당하는 상처는 너무도 크다. 죄는 인격적인 행동이고 윤리적인 성격이어서, 범죄 당사자들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에 큰 파괴적인 힘을 미친다. 교인들중 많은 수가 속임당한 것이 분하고 원통하여 그 교회를 떠나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방활하며, 또 다른 이들은 이제껏 흙탕물을 받아 생수로 마신 것이 분하고 더러워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크게 충격을 받아 주를 믿는 신앙이 약화되고 나태해져서 소망과 용기를 잃는다. 즉 많은 영혼을 실족케 하여 낭패케 한다.
이처럼 중생하여 죄를 벗어난 사람들이 모딘 단체인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교회가 파괴되고 바로 자라지 못해 없어지지는 안해도 앉은뱅이와 같은 교회가 되기도 하고, 마은 나무와 같은 교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밖의 사회에 대해 빛을 잃어 조소거리가 되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길에 버리워 밟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전도의 문이 막혀 구원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다. 따라서 주 예수의 이름이 욕을 먹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서지 못하게 한다. 죄가 이렇게 파괴적인 역사를 한다.
죄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교회에도 죄가 이런 무서운 파괴적 역사를 이룬다면, 처음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미친 아담의 타락이 미친 효과와 영향은 가히 어떠했는지 희미하게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고, 사망이 도입되고, 부패와 허무가 지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세상의 이전의 찬연한 빛을 상실하였다. 지성이 어둡고 혼미해지고, 도덕적 판단과 바른 양심이 방향을 상실하고 우매해져서 가증한 것들 만을 토해내며, 감정과 정서는 혼란하고 비천해져서 음탕한 것만을 좋아하게 되어 천사 같던 왕적 존재가 작은 동물의 동작과 울음 소리에도 두렵고 떨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좀 크다고 보이는 것은 다 자기의 보호자로 의지해야 설 수 있다고 생각하리만큼 미천해져서 피조물들을 신들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난과 결핍과 무의미와 목표 상실이 사람들의 생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육체에 병들어 당하는 고통이 크고, 자연이 미치는 해악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개미처럼 살게 되었다. 전쟁과 질병은 인류를 파리떼처럼 대량으로 지상에서 소제하여 갔다. 인생은 생의 목적도 없이 실낱같은 목숨을 몇년 존속받아 살았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이 오니 세상이 다시 빛을 발하고,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되어 교회가 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시작하시고, 그 통치의 영역을 복음의 선포와 그 세력과 함께 확장해 가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악을 극력 피하고 막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고 다시 죄악에 침잠하면, 멸망 뿐일 것이다. 죄의 역사는 과격하여 교회 뿐 아니라 사회와 인류와 지구의 존속까지도 위협한다. 이 죄악과 그 파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절되지 않고 존속되어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드시고 구속 경륜을 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파괴적 죄의 역사에서 구속받은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억제하고 배제하기 위해서 최대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작은 죄도 관용하고 묵과하면 안되고 척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화평이란 명목아해 죄를 덮고 묵과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과격하게 억제하는 처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의 파괴적 본성을 잘 알고 죄를 억제하고 배제하기 위해 권징을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권징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되기를 그치기 시작한 교회이고 마침내 교회되지 못할 것이다. 교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도록 하려면 교회는 권징하여 죄악을 억제하고 막하야 한다. 권징하지 못하는 현대 교회는 머지 않아 사람들의 단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예수 믿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함을 받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고백되므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신다. 주님이라는 말이 곧 왕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은 주 예수(κㄷρθξζ ⅩΘησξㅐζ)이다. 이 고백은 ‘예수는 주시다’, 혹은 ‘주 예수’라는 두 뜻을 갖는데 ‘예수는 주시다’가 신앙고백의 바른 내용이다. 초대교회가 부활하신 예수에게 주(κㄷρθξζ 퀴리오스)란 칭호를 적용할 때는 천지의 대권을 받으신 신적 통치자란 고백이었다. 이런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황제를 주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순교의 이슬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예수에게 주 예수 퀴리오스 예수스(κㄷρθξζ ⅩΘησξㅐζ)란 칭호를 붙임으로 뜻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고유 이름은 여호와, 야웨(Jehovah,Yahweh)이셨다. 구약 교회가 이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어서 여러가지 다른 칭호로 돌려 붙였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보편한 대리호칭은 주님, 아도나이였다. 이 전통을 존중하여 구약성경의 희랍어 번역판인 70인경은 여호와, 현대적인 모음 기호로는 ‘야웨’를 주님(κㄷρθξζ)로 번역하였다. 이 야웨의 희랍어 역어인 주,κㄷρθξζ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약교회가 정굑하였다. 이로써 신약 교회는 주 예수란 호칭으로써 구약의 야웨와 동등하신 분 또는 구약의 야웨와 동일하신 분임을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주 예수란 호칭은 예우적 호칭이 아니라 천지의 대권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주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위에 모든 주권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란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백자에게 왕으로 영접되고 또 왕이신 것이다.
죄문제의 해결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확장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유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으로 되어진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진행되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된다.
어떤 나라든지 백성들이 그 국법을 지키지 않고 산다면 그 나라에 통치권이 발휘되며, 주권자가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법은 지켜도 백성 일부만 지키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도 합법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무소에 가야 할 사람들과 형무소 밖에 있는 사람들간에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나라가 합법적인 나라로 영위되려면 대다수의 백성들이 국법을 충실하게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 때만이 그 국가가 주권 국가로서 서며, 자기를 합당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다수의 국밍이 국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췌약한 나라가 되어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그 나라가 얼마나 강성하느냐는 백성들이 얼마만큼 충실하게 국법을 지키며 사느냐에 달렸다.
하나님 나라의 경우도 동일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곧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살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믿는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대하여 별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인도하여 예수 믿게 하는 일에는 열심이고 또 예수 믿게만 하면 다 될 것으로 안다. 즉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까지는 한국 백성들이 열심히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사는 일에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은 출생과 같은 과정이고 자라서 단련받은 백성으로 사는 것은 중단 없는 교육과 훈련으로 된다. 한 나라의 시민들도 출생 후 2,30년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자기의 직임을 바로 수행하고 민주 시민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법 질서를 따라 살 수 있도록 부단히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회개와 신앙의 수준의 설교만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바른 덕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첫번째 요건은 죄를 피하고 옛사람을 죽이고 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유혹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이 유혹에 지면 범죄하여 옛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부단히 죄의 유혹과 욕망을 물리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죄를 이기며 사는 비법은 부단한 주의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죄를 무서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단히 적용하여, 죄의 욕망과 유혹이 무산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지은 죄를 용서받는 데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로 빠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죄의 유혹과 욕망이 일 때 주 예수의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한다고 고백하면 죄의 유혹과 욕망이 무산된다. 죄의 해결- 이미 지은 죄나 죄에로의 유혹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뢰하고 적용하는데 있다. 이 진리를 요한일서 1장 7절이 분명히 한다(하반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이 해주고 모든 죄에 들어가는 것에서 깨끗하게 해준다. 주 예수의 피가 죄를 해결하는 가장 탁월한 능력을 행사한다.
또 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게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늘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길이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죄의 유혹을 좇으며 죄지으며 살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염합되어 그의 살과 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의 거룩한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죄짓고 살 수 없다. 우리가 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기억하면 거룩한 몸에 죄짓는 것을 좋아하고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기억하면 죄의 유혹과 충동에 매이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죄를 피하고 옛사람을 죽임과 동시에 새 사람을 살리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늘 의의 사람으로 살고, 의의 병기로 행하도록 죄악과 불의는 피하고, 의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살아야 한다. 지금은 평온과 평화라는 명목아래 조용하기를 바라 불의를 보고도 입을 벌리지 않으며 타협하므로 인격자로 성자로 불리움 받는 세태이다. 이런 것은 유교적 전통의 체면주의에서 나온 것이요, 선악과 의와 불의의 구분을 철폐하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고 의와 불의를 분명히 나누어 선과 의를 취하고 따르며, 악을 멀리하고 불의를 박멸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사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부분 선악 의와 불의의 구분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고, 이익을 좇아 화평하는 것을 인격자로 선자로 여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불법을 더 좋아하고 불법이라도 거기 자기들의 이익이 들어있으면, 그것을 옹호하고 편든다.
이렇게 옛 사람의 방식과 사고를 벗어 버리지 못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새 실재가 되었으므로 변화된 새 실재로 살아야 할 것이다. 새 실재가 되었으면 그리스도의 새 법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꼭 지켜야 할 계명들을 갖는다. 그중에 참, 진실을 말함이 그리스도인의 제 1계명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거짓을 말하면 그는 옛 사람이거나, 제 1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제 1계명을 지키는 자가 그리스도인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허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을 말하며 사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생명이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하게 처리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는 공직에도 이르지 못하게 하고, 교회의 직분에도 이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송장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직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허는 자이므로 금치산 선고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과 공의를 기초로 하고 유지되고 통치디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세상 국가도 가령 예컨데 미국 같은 나라는 진실을 국기(國基)로 삼고 서 있는 나라이다. 닉슨이 탄핵되는 근본 죄목도 진실을 국민 앞에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는데 있다. 미국 200여년의 역사가 최고 득표로 재선된 대통령이 탄핵되므로 사면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을 기초석으로 하고 서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 참예하지 못하고 성밖에 있으며 또 불과 유황못에 참예할 것으로 그 나라의 법이 작정하였다(계 22:15; 21:8).
그러므로 교회에서 거짓말하는 자는 제거해야 하고, 참을 말함이 국가와 사회에서도 법이 되어 거짓을 말하는 자는 공직에서도 제거시켜야 한다. 거짓이 지배하는 교회나 국가는 바로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실이 국가와 교회가 서는 기초이고, 거짓은 그 기초를 허는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진실을 말하는 자가 참 인격자이고, 손해를 보면서도 참을 말하는 자가 진리의 사람이다.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사람들은 참을 말하게 작정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을 좋아하는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고, 종교적 탈을 쓴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종교성이 기독교라는 형식을 빌려 열심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아니하므로, 비록 그의 외양은 그 나라에 속한 것 같아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성장 유지되고, 또 국가와 사회도 되게 하려면 진실의 법을 높이 세우고 굳게 해야 한다.
처음 타락과 하나님의 일을 망친 것은 거짓이었다. 사탄이 거짓말로 아담을 유혹하고 속여 하나님의 창조로 타락케 하였다. 그러므로 사탄을 가리켜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셨다(요 8:44). 또 진리를 받지 않고 거짓을 신봉하고 따르는 자들도 다 마귀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받지 않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정죄하셨다(요 8:44a). 모든 인류를 이 큰 불행에로 집어넣어 거의 를 말살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망친 것은 인류 역사 초기에 행해진 거짓이었다. 거짓은 하나님의 창조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진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서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진실, 참을 말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굳게 서게 하며 또 거짓을 미워하여 한사코 이것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고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진행되게 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은 약속은 꼭 지키는 일이다. 한번 행한 약속은 해로와도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을 행함이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의 상대자가 그 약속 혹은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여, 그 언약을 완전히 무효되게 하였어도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실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의 무신실성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행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모든 언약을 다 범하고 폐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이시기 때문에 지키시사 그 백성에게 메시야를 허락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맺은 첫 약속 곧 언약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을 지으시고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특별한 조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사 하나님의 복사물이 되게 하셨다. 지성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들여다 보고 캐내게 하셨으며, 사물들의 본성을 알아 그것들을 이용하고 다스리게 하셨다. 또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따라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알고 인류와 창조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예언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게 하셨다.
또 모든 창조를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며, 모든 창조의 창조주 찬양을 화합하여 하나님께 바쳐드리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덕과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제사장으로 일하게 하셨다. 더욱이 하나님의 창조 왕관으로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창조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의 위엄과 영광을 허락하셨다.
이런 특별 조물에게 하나님은 더 큰 호의를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언약을 맺으사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셨다. 이 순종에 머무르면 아담으로 영생에 이르며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 선악을 아는 나무는 그 자체로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하시며, 금하신 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선이요,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 악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선악 결정을 절대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악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판단과 계명이 절대적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정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포기하고 또 스스로 합당하지 않는 자로 판정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였으니,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정죄와 저주, 사망과 고통이 그 벌로 인류에게 임하여 왔다. 마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시기로 하셨다. 비록 인간은 불신실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하신 약속을 지키셔야 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요구하신 순종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약속하신 영생을 주실 수 있기 위해 그 순종의 조건 이행을 자기가 하시기로 하셨다. 사람이 해야할 순종을 자기에게 의무 조항으로 부과하시사 자기가 이루시므로 영생을 자기 언약의 당사자에게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이고, 이 새 언약이 은혜 언약이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어히 이루신다. 언약의 당사자가 불신실하여 이룰 수 없는 모든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기의 신실성 때문에 자기의 언약을 성취해 내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미쁘신 분이다.
이 미쁘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도 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우고, 그의 성품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우리가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신실 때문에 인간사회가 성립되고 존속되며, 그리고 인간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실성이 무너지면 인륜 사회가 아니고 도적 사회가 될 뿐이다. 인륜 사회가 되어 축복된 사회가 되고, 문화가 창달되는 사회가 되려면, 그 사회는 신실성에 기초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한번 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신실성을 생활의 법으로 지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 딴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사회로 설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꼭 지켜야 할 법은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해에 관계된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이해와 유익을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 길은 개인과 사회를 부패하고 타락하며, 인륜 사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첩경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따르되 중생되고 진리로 새로워진 양심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훌륭해도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정죄되는 법이고 또 정죄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것은 혁명적 방법이고 기독교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 늘 중생한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하고, 이해 때문에 양심을 굽히면 안된다. 이해 때문에 양심을 굽히면 도적이 되고 범죄를 구성할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연약하고 가냘픈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열심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양심을 따르면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좀 더 신중할 것이고, 급하고 속결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욕망을 충족하고 유익의 열매를 거둘려고 애쓴 후 양심의 가책과 후회 속에 살지 안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 의해 당위를 희생할 때 반드시 양심의 가책과 후회가 오고 또 그것이 일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괴롭힐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자신과 용기있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것이 심해질수록 그 인격이 분열증을 경함하며 힘을 상실하여, 마침내 폐인이 되거나 낙오자가 되거나 아니면 완악해진 범죄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큰 손실이고, 사회로 퇴폐적이 되고 무기력하게 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은 양심을 따라 살므로 이루어진다. 양심수가 많아지는 사회도 안되지만 양심을 넘어서는 것에 인박이고 강해지는 사회도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양심대로 살아 편안한 사회를 만들고 살아야 한다. 각자가 다 자기 양심을 따라 살고, 그로써 가책이 없는 삶을 사는 사회이어야지, 항상 감시자가 있어야 양심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자가 자기 양심대로 살면서 평안한 삶을 사는 사회이다. 거기에 활력이 있고 화합과 신뢰가 있으며, 평화와 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법과 공권력으로 강제된 평화와 질서는 벌써 병든 사회이다.
양심을 따라 사는 사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는 사회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계시고 그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양심을 굴절시키지 않고 살 수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 부터서 하나님의 계심과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따라 살아도 물질적 손실을 별로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양심대로 살기 때문에 너무 결제적 손실을 보는 사회는 심히 부조리한 사회이다. 거기에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의 반감이 심하고, 질시와 반목이 심하다. 거기는 참된 평화와 바른 사회 질서와 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 계층간에 불평이 심하고 소요와 내분이 심하게 된다.
양심을 따라 살아야 거기 하나님의 법이 서고 그의 다스림이 펼쳐진다. 우리는 우리 욕망을 삶의 법으로 하고 사는데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생활의 법으로 하고 살아야 한다. 욕망과 당위가 서로 만나면 대개의 경우는 욕망이 당위를 이기에 되는데, 그것은 인격자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따라 사는 자연적인 삶의 방식에서 양심을 따라 당위를 지키는 단련된 인간들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인간들을 생산해내야 한다.
인간은 자연 출생적 존재가 아니라 교육 받아 형성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도 교육과 훈련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과정에 불과하나, 인간은 교육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인간으로 성립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이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 인격체로 발전한다. 욕망의 자연적 수준에서 선악과 진위를 식별하고 선택하여 행동하는 존재가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다. 교육에 자기 의식(意識)과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되어 하나의 인격이 되고 사회의 바른 구성원이 된다.
바른 교육에 의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형성되었을 때 인간은 양심을 좇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양심에 합하는 가치와 삶의 원칙과 원리를 제시하고 거기에 따라 살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 문제는 결국 가치관과 세계관과 연결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를 자연 발생적으로 출생에 의해서만 형성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계명들 특히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도록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양심도 어떻게 교육받았느냐에 따라 그 발하는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은 지불한 수고의 댓가의 법칙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일하는 존재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풍성한 식탁이 마련된 낙원에 두셨어도 그를 무위도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를 무위 도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의식주에 대해 아무런 염려가 없게 하셨어도, 그로 하여금 매일 힘써 일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크고 많은 일꺼리들을 수행하게 하셨다. 아담은 자기의 거소인 낙원을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잘지켜야 했고 모든 동식물들의 봉성을 살펴서 거기에 합당한 이름들을 지어야 했고 또 그것들을 다스리는 일을 해야 했다. 또 하나님을 섬겨, 그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경배하는 가장 크고 중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작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이미 주신 계시와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그 계시의 빛 아래서 그는 행동하며, 하나님의 현시된 뜻에 따라 역사와 세계를 해석하고 미래를 해석해야 했다.
이에서 나아가 아담은 창조를 계발하여 창조에 담긴 지혜와 권능을 현시하므로 하나님 창조주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했다. 아담은 창조를 계발하기 위해 매일 창조를 탐구하고, 열심히 자기의 지성을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풀어내므로 조물주의 지혜와 권능을 감탄하며, 또 그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그의 크신 덕을 기리어야 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생활과 활동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삶이어서, 종교적 생이 일상의 생과 전혀 구분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낙원에서의 삶의 형태는 종말 세계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종말에서 인류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명상하는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고,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이 전개될 것이지만, 그 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의 덕을 기리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이런 종교적, 문화적 사명들의 수행 외에 자기의 의식주를 위한 모든 노동까지 해야 했다. 자기의 생존과 모든 문화적 사명 수행을 위해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타락 후에는 수고하여 일하지 안해서는 생존할 수 없도록 되어 낙원에서 처럼 여유있는 삶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 사회의 모든 일은 노동으로 영위되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타락 후에 노동을 모든 인간 생활의 근본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b-19). 타락 후 부터는 인간은 땅을 수고하여 경작하여 그 소산을 먹게 조물주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힘써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냥 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땅을 경작하여 거기서 나는 것을 먹게 되는 수고는 일정 기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종신토록 수고해야 자기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를 쉬거나 중단하면 그는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뿐아니라 자기 가족도 유지되지 못하게 작정되었다.
이렇게 땀흘려 수고하여 자기의 생명과 가족을 유지 보존할 책임은 남자에게 지워졌다. 남자가 자기와 가족의 생존의 보장자로 조물주에 의해 지목되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힘써 일하여 자기 몫과 가족의 몫을 다 책임져야 한다. 그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고, 또 먹을 권리를 가지나,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는 법칙이 성립한다. 이 진리를 바울이 창세기 3장에서 바르게 이해하여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법칙과 계명을 정립하였다. 이처럼 먹고 살려면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나님의 법이 정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창조주의 정하신 법이면,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안해야 하고, 놀고 먹는 자가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법 질서에 거슬러서 그렇게 비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인류 사회가 노동에 의해 유지 존속하고 창달한다면, 일하지 않고 먹고 지내는 자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 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사회 유지의 기본법을 헐고 있기 때문이다.
또 땀흘려 일해야 밥을 벌 수 밖에 없는 창조주의 법질서가 있다. 저주를 받은 땅은 인간의 수고와 땀흘리는 노동을 제공해야 그에 상응하는 산물을 내게 되었다. 땅은 그냥 두면 저절로 사람이 먹고 살 식물을 생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지력을 소모해 버린다. 반면 땀흘려 수고해서 밭을 일굴 때만이 땅은 사람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를 내는 정직한 생산자가 되었다. 땅은 그냥 사용만 해서는 안되고 생산력이 급히 감소되므로 늘 보살핌과 배양이 필요하다. 즉 수고하고 땀흘린 만큼 그 댓가를 생산하게 작정되었다.
이 수확체감의 법칙이 근세 곧 18세기 말엽 내지 19세기 초엽에 말더스(Thomas Robet Malthus, 1766-1834)에 공식화 되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이 때에 처음으로 인류의 意識에 나타나고 알려진 것이 아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의 민족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이 우상 종교를 이스라엘 백성이 전적으로 수납한 후에 바알신을 섬기는 예식에서 이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다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주전 7,8세기 경에는 바알을 섬기는 의식이 극심하였다.
그들은 모든 생산의 근원인 땅이 계속 사용하면 지력을 소모하여 풍요가 계속되지 못하는 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써버린 지력을 회복받아 풍요한 생산의 축복을 계속 받기 위해서, 피를 바알신에게 바치면 풍요한 생산력이 회복될 것으로 믿어, 가증하고 끔찍한 죄악인 자녀를 불살라 바알신에게 바치는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라 풍요와 생산의 신인 바알에게 바치는 가증한 죄악을 계속하였다.
이 수확체감의 법칙은 땅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고 모든 생산 조직과 생산 활동에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품을 생산하는 생산업체들에 이 법칙이 타당할 뿐 아니라, 직접적인 물건 생산이 아닌 보험의 확장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땅만 아니라 모든 생산 업체들의 생산성도 무한정 계속적으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상승곡선을 그린 다음에는 하향곡선, 혹은 정체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생산성의 확대에는 새로운 요소와 활력의 주입 곧 땀흘려 수고해야 더욱 향상할 수 있고, 또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기본 문제인 의식주 문제는 반드시 땀흘려 수고해야만 해결될 수 있게 조물주께서 작정하셨다. 노동이 의식주 해결의 근본이어서 인간 사회의 존속과 보존의 기본법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의 일터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몫을 다할 때 그 사회는 법이 서고 윤리가 바로 시행되며,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또 사회가 윤택해질 뿐 아니라, 인간들에게 주어진 재능들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이 사회가 유지되고 존속하는 기본법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연구도 다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게 작정하셨다. 그것이 예술적 활동이든, 학문적 업적이든, 정치 경제의 활동이든 간에 다 땀흘려 수고함이 없이는 결과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조물주는 자기의 피조 세계가 땀흘려 수고해야 그 값을 내게 작정하셨다. 그리하여 세상에 무위 자연 혹은 공짜는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 출생하여 자기의 생을 살며 자기의 몫을 하려면 반드시 땀흘려 일해야 한다. 자기가 택한 직업에서 땀흘려 수고해야 자기의 밥을 먹을 수 있고, 자기 가족을 부양하며, 자녀들로 원하는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옛날에는 농사가 삶의 모든 원천이어서 땅에 수고를 지불하므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는 수고를 지불하고 그 댓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한다. 돈은 여러가지로 정의되지만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댓가라고 하는 것이 가장 바른 정의이다. 자기의 수고의 댓가로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자기의 노동을 지불하고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사회가 평안하고 바로 서며 분란이 없다.
각자는 자기의 삶을 영위할 수고와 노동을 지불하고 그 댓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회 정의이다. 자기의 몫을 하고, 그 몫의 댓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존과 생활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 정하신 합당한 삶이고, 그리고 이 생활의 법이 정의이고, 사회 정의이다. 혹은 말을 바꾸면 사회 정의는 각자가 자기의 생존을 보장받고 자기의 생을 사는 것이다. 이 각자의 정당한 생을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 사회의 부조리이고 사회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생을 자기가 감당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자기의 정당한 노력을 지불해야 한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의 밥을 벌어야 하고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생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서, 그것이 바로 부정이고 불의이다. 자기가 수고를 지불함 없이 돈을 가지려고 함은 도적이다. 왜냐하면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댓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선과 장학 등의 기부된 돈의 활용이 더러 있지만, 그 경우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행위로서 비정기적인 예외이고, 장학금도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학업이 우수한 경우의 보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수고해서 벌은 돈을 남에게 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불평이 있고, 가족들의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번 돈이 자기의 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아 여력이 많을 경우를 혹 제외하고는 형제간들이나 친족들을 돕는 경우도 순조롭지 안해서 가족들의 불평이나 반대가 따르는 것이 통상이다.
그러므로 친척이나 형제간의 경우도 무위도식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른 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허는 것이요, 또 그들의 존엄과 가치 의식을 그들에게서 박탈해가는 것이어서, 사회로 하여금 원만하고 윤택하여 조화있는 사회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들로 다 일해서 자기의 밥을 벌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친족들로 고기 잡는 기술을 배우게 해야지 잡아 놓은 고기를 먹고 즐기게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냥 공돈을 주어 버릇하여 그것을 의당한 것인 줄로 알게 하면 안되고 봉사와 돕는 일을 하게 하여 거기에 합당하게 돈을 주어 사용하게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사회 유지의 철칙을 배워서 그 법대로 살게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으로 훈련함으로 커서도 남에게 의타적이 안되고 자립하게 되고, 사회에 짐을 지우는 가해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돈은 내가 수고를 지불하고서 벌어야 하고 눈 앞에 보이는 돈을 욕심내거나 그냥 자기 것으로 삼을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도적 심리이고 도적 행위이다. 자기가 수고를 지불하지 않는 몫의 돈은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공돈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들이 참으로 많다. 자기가 벌지 않고 남이 벌어놓은 돈을 그것에 상응하는 수고를 지불함이 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심리와 또 그러는 것을 의당한 줄로 아는 행동과 작태가 가장 노골적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결혼시 과도한 지참금의 요구이다.
결혼은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또 자기 일생의 반려로 맞아들여 살기로 작정하는 인간 대사이다. 남자에게로 결혼하여 오는 여인은 일생 그 남자와 함께 생을 살 뿐 아니라, 또 그 남자를 위해서 자기의 생을 살기 위해서 그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 아내의 모든 생활을 책임질 자는 남자이고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아내를 맞아들여 생활하기에 필요한 생호라 도구들과 거소와 돈을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결혼을 빙자해서 여자측으로 부터 많은 재산을 받아내려고 크게 마음을 쓰고, 또 그러는 것을 의당한 것으로 안다. 딸의 부모측에서는 딸을 주는 것만도 마음이 아프고 쓰리며 괴로운데, 지참금조로 많은 돈과 재산을 요구하니 많은 경우에 큰 불행을 초래한다.
결혼초부터 부부가 단란하고 화기 애애하며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 할 터인데, 그 지참금의 부담 때문에 결혼 당사자들에게도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또 사돈들간에도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혼초부터 불행하거나 이혼의 비극에로 귀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 폐습이 기독교가 들어온지 백년이 넘어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다 동회되어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죄악된 관습을 계속하고 잇으며, 이것이 고쳐져야 할 죄악된 관습이라는데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돈은 남자가 수고해서 벌어야 하고, 결혼을 빙자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은 단호히 죄악으로 정죄되고 근절되어야 한다.
또 경제적 이해 계산으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결코 남자들이 취할 바른 삶의 법이 아니다. 아내와 자녀에 대한 양육과 보호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고 여자에게 있지 않다. 결혼은 사랑과 이해에 근거해야지 경제적인 이해 계산에 근거해서는 불행이 그 일생의 길이다. 돈은 남자가 벌어야 하는데 여자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것은 책임과 역할의 전도이어서 불행이 많다.
또 우리는 자기가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돈을 벌려는 몇몇 손쉬운 길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 특권시하며 살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 공직과 거기에 따른 특권을 치부의 길로 삼아 왔다. 국가 공직자들이 특권을 갖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들의 직책산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져 있으며 또 거기에 상응하게 높은 봉급을 지불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고는 그들이 받는 봉급으로 충분하여, 그들의 노고를 다 보상한다. 따라서 그외 다른 방법 곧 특권과 연관시켜 수입을 확대하는 것은 다 도적이고 부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5.16 군사 독재 정권의 등장 후 30여년간 국가 공직이 가장 빠른 치부의 길이 되었고, 또 재벌에 상응하는 돈을 단기간에 모으는 길이 되어 왔다. 어떤 자들은 공직에 이른지 몇년 어간에 몇십억 내지 몇백억씩을 긁어 모았다. 그 돈들이 지금 수십조억의 지하 자금으로, 부동자금으로 부동산 투기와 증권시장과 유흥업소들과 또 다른 곳에 몰려다니며 죄악을 조장하고 있다.
국가 공직은 국사를 처리하는 봉사자의 자리이지 국가의 돈을 긁어 모아도 좋도록 허락받은 도적의 자리가 아니다. 국가 공직에의 재임으로 국고를 축내어 자기 개인 재산을 증식하는 이 죄악은 엄히 정죄되고 단호히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액튼(Acton)경의 명언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저긍로 부패한다’는 진리대로 독재 정권들의 장기 집권이 이렇게도 큰 죄악을 정상적인 생활의 길로 정착시켰다. 이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패는 후진국의 발전에 유익하다는 천하의 억설과 궤변도 만들어냈다. 이 죄악은 기어이 척결해야 할 것이다.
또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함이 없이 돈을 벌려는 다른 유형의 사조가 우리 국민들에게 편만해 있다. 그것은 권력의 길에 접근해서 큰 돈을 벌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종교의 길 곧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부에 이르려는 사고방식이다. 이 뿌리 깊은 사고 방식과 욕망 때문에 한국의 종교들은 거의가 다 기복 종교이고 축복 종교들이 되었다. 불교나 무당 종교들이나 천주교회나 개신교회나 다 축복 종교, 기복 종교의 길을 걸어왔고 또 지금도 걷고 있다.
백성들의 이 수고 없는 큰 돈에의 욕망을 이용하여 절간들도 큰 축복을 약속해 주고 너무 많은 재산들을 모아 정부의 능력을 능가할 만큼 되었고, 무당들도 돈을 모아 그 자식들도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해오게 까지 되었다. 교회도 백성들의 이 허망한 욕구를 이용하여 축복을 많이 많이 선사하고 많은 헌금과 봉사를 강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기본 사회 유지법을 어기고 교회까지도 축복 선사에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크게 된 대형 교회들이 대부분은 축복 선사와 사회 생활에서의 성공 약속과 또 부자 되는 심리 설파로 그렇게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적극 심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완전히 대치하게 까지 되었다. 교회가 각성하여 이런 축복 선사와 헌금의 종용 내지 강요에서 깨어나, 경제적 민주화를 촉구하고, 제도적 비리를 개선하는데 앞장 서고, 또 선지자적 선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경제 제도적 비리의 개선과 또 지역간의 심한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교회와 정부와 사회 각 계층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계층간의 심한 불균형도 해소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 민주화 없이 진정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제도적 비리의 해소 없이 종교들, 또 교회의 축복 선사와 기복 신앙을 민족의 가슴에서 소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국민 각자로 하여금 자기의 빵을 벌어 살 수 있도록 노동 환경을 조성하고, 일자리들을 육성하며, 또 기업들을 지원하여 일자리들을 더욱 확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자리들을 마련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할 기본 과제이다. 정부는 많이 가진 자들과 부한 지역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과 연합해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면 의로운 정부가 되지 못하므로 제도적 비리를 갖는 경제 구조를 개선하고, 또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이루므로 나라가 평안하고, 조화 통일되도록 하고 권력으로 압제하여 강요된 조용함을 평화로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부는 국민 각자로 하여금 자기의 생을 살 수 있도록 그 환경을 마련하고, 또 그런 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수고로 자기의 삶을 살도록 사회 유지의 법을 세우셨으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또 일한 수고의 댓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또 자기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탄압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요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다.
이 사회가 바로 되고 또 죄악을 경감시키고 문화가 창달하는 길은 다 땀흘려 자기 일을 하고
그 수고의 댓가로 사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법은 없게 해야 한다. 우리는 힘써 일하
고 우리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로 정당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
님의 복을 입는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법이 크게 진전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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