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구원론
구원론은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사항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어적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구원론은 이렇게 단순하게 표어적이거나 표피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신약의 구원론은 심층적이고 심원합니다. 이 신약의 구원론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은 기독인의 윤리가 상실되어 가는 한국 교회의 상황을 살펴볼 때 아주 절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번 기회에 로마서와 마태복음의 구원론을 강의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나온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구원론을 다루겠습니다.
1.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구원론.
로마서는 바울이 구원론을 전개한 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구원론이 로마서의 본론을 실마리처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론의 윤곽을 알기 위하여 먼저 로마서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1. 로마서의 구조를 통해 본 바울의 논지.
로마서는 신학적 논증(1-11장)과 윤리적 교훈(12-15장)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놓여져 있는 논증 부분은 다음처럼 짜여 있습니다:
서문(롬 1,1-15)
(신학적인 논증: 1-11장)
주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 1,16-17):
첫째 단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할 필요성(롬 1,18-3,20).
둘째 단원: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된 하나님의 의(롬 3,21-4,25).
셋째 단원: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사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롬 5,1-8,39).
넷째 단원: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운명(롬 9,1-11,36).
우리가 추적하는 구원론은 셋째 단원에서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단원을 살펴보면 이 단원은 다시 4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진다:
셋째 단원의 주제: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
첫째 문단: 사망의 권세에서의 자유(5장)
둘째 문단: 죄의 권세에서의 자유(6장)
셋째 문단: 율법에서의 자유(7장)
넷째 문단: 성령 안에서의 자유(8장)
이러한 구조적인 윤곽 속에서 논지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는 것, 이렇게 실현된 하나님의 의가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과 이 의가 성령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안에 사실로 이루어져야 기독인이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바울의 핵심 논지가 드러나 보입니다. 이 논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의: (복음을 통한 구원의 방법): 1 단계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라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고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의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의 후예인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게 되었고 죄를 범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삶의 척도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어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2,12). 그러나 사람들은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율법 이외의 딴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을 위한 화목 제물로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죄에게 내어 준 바 되어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는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죽음에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를 의로 여기십니다. 이렇게 화목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상에서 복음의 내용을 도표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ꠏꠏꠏꠏꠏꠏꠏꠏ 죄 <-------------------> 하나님의 의 ꠏꠏꠏꠏꠈ
ꠐ ↑ ↑ ꠐ
ꠐ 그리스도2 우리2 ꠐ
ꠐ ↖ ↗ ꠐ
ꠐ 십자가: 그리스도: 부활 ꠐ
ꠐ ↗ ↖ ꠐ
ꠐ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의 의를 위하여) ꠐ
ꠐ 우리1 그리스도1 ꠐ
ꠌꠏꠏꠏꠏꠏꠏ> 죽음 <---------------------> 생명 <ꠏꠏꠏꠏꠎ
그런데 바울의 구원론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내용이 사실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구원론은 사실적인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강조점은 바로 여기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제 구원의 내용이 어떻게 사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구원의 방법과 나중에 주신 구원의 방법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십시다.
3. 율법을 통한 구원의 방법과 복음을 통한 구원의 방법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복음을 통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율법을 통한 구원의 방법과 아주 독특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관계를 올바로 알아야 로마서의 구원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알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로마서 이해에 관한 마틴 루터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서 로마서를 이해하려면 여러 가지 중요한 용어들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율법에 대한 설명에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했습니다. 루터의 권고와 선례에 따라 바울의 율법관과 그것을 통한 두 구원의 방법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썼습니다(참조. 롬 7,1). 그러기 때문에 그는 율법관의 상당 부분을 전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율법관을 여러 군데 흩어서 자유 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로마서 내에 흩어져 있는 율법에 관한 말씀들을 정돈하여 통일성있는 체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직접 해보실 것을 과제로 내드립니다. 시간 관계 상 이 과제를 하신 것을 전제하고 먼저 주셨던 율법을 통한 구원의 방법과 나중에 주신 복음을 통한 구원의 방법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범죄하는 인간(롬 1,18-21)에게 생명에로 인도하는 율법(롬 7,10)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령한 것(롬 7,14), 즉 영적인 것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롬 7,12). 이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롬 2,13)을 받으며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율법은 인간이 죄에 의하여 기만되었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능력을 상실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롬 3,20)만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살아나는 대신에 죄가 살아났고(롬 7,9), 인간은 몸으로서 살아난 죄의 권세 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죄에 팔렸고(롬 7,14), 죄의 몸이 되었습니다(롬 6,6). 죄의 권세 하에서 죄의 몸인 인간에게 율법은 죄의 율법으로 만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 3,20).
생명으로 인도하는 계명이 죽음으로 바뀌었고(롬 7,10) 모든 사람이 죄 중에서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와 죽음을 죽이고 의와 생명을 살리는 사건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사건(롬 3,21)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인상적인 것은 복음을 통한 구원 방법이 율법을 통한 구원 방법을 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3,21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강변합니다. 분명히 바울은 나중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방법으로 앞서 주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은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롬 8,3-4).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몸과 율법을 새로운 현존영역에 세웁니다. 몸은 율법 아래 혹은 율법 안에 거하지 않고 은혜 아래 내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의 몸이 멸해서 신령한 몸이 됩니다. 율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장소를 갖습니다(롬 8,2). 그것은 더 이상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고 인간 곁에 서있습니다. 은혜를 통하여 죄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된 기독인에게는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해방된 바로 그곳에서 죄와 죽음의 율법은 의와 생명의 율법, 신령한 하나님의 율법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율법 하에서 죄와 사망의 율법이 은혜 하에서 생명과 의의 율법이 되며 그리스도의 법이 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으로 복음의 빛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동시에 율법 수행에로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신령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율법을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롬 7,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파송 목적에 따라서 율법의 요구를 행해야 하고 또 행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하여 죄의 열매를 맺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롬 7,4).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실현된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인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와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통하여 분명하게 강조됩니다.
4.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1: 죄로부터의 자유: 2 단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얻는다는 가르침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의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사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라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안에 사실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은 먼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음입니다(비교. 롬 6,3).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죽으심입니다(비교. 롬 6,10).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자입니다(비교. 롬 6,7).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은 그의 살으심, 부활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입니다(비교. 롬 6,5b). 그리스도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의에 대하여 살으심입니다(비교. 롬 6,10b).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우리 죄의 끝인 죽음에서 부활한 자로서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기독인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은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의에로의 자유입니다.
이와같이 세례를 통하여 죄의 지배로부터 의의 지배에로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죄인이 아니고, 또한 마틴 루터가 생각하는 것처럼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도 아니고, 의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종이었는데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비교. 롬 6,17-18).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실제로 자율적이 아니라 종속적이고, 인간을 지배하는 죄와 의의 두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이 두 영역에 대하여 인간은 사실적인 종의 관계에 서있습니다. 이러한 영역 하에 있는 인간은 구체적인 행동 안에서 죄나 의의 사실성을 갖게 됩니다. 죄의 종은 죄의 열매를 맺고, 의의 종은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비교. 롬 6,21-22). 의인이며 동시에 의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선사된 의가 아주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동 안에서 사실로 되고 사실로 머무는 것을 위해 책임적이고 책임을 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의의 실현은 하나님의 의 자체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의 선물이고 항상 하나님의 선물로 머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2: 성령 안에서의 자유: 3 단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1 에서 죄와 의의 대비 가운데 세례를 통한 죄로부터의 자유와 의에로의 자유를 다루었다면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2 에서 육과 영의 대비 가운데 성령 안에서 율법 수행에로의 자유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전개하기 위하여 먼저 7장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하심이기 때문에 단순히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수행에로의 자유, 곧 율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요구가 사실로 이루어져야 궁극적인 몸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방법은 다음과 같읍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는 육 혹은 영을 따르는 두 개의 실존영역 가운데 영을 따라야 합니다. 육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왜냐하면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법을 아직도 종처럼 섬김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들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일을 죽이면 살게 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을 때’에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있어서 성령의 능동적인 영향력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12절 참조)이기 때문에 인간의 능동성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인도하게 하는 자만이 율법의 요구를 수행할 수 있고 사랑 안에서 율법을 다 이루며 완성하는 것입니다(참조. 롬 13,8-10).
성령의 인도하에서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유산이 약속된다. 이 유산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종말의 사실성 안에 보존되고 그들에게 주어질 희망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몸의 구원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와 상속을 함께 받는 “공동상속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사실적인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현존하는 곳에서는 아무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미래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고난과 함께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만이 그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2.4. 요약: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구원론을 요약하겠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만 가짐; 믿음으로 의롭다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 구원의 사건을 이르키심;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궁극적인 구원인 몸의 구원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율법의 요구를 수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시어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복음의 핵심으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실존론적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인간의 실존에 이루어짐; 성령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 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광의 자유, 궁극적인 구원을 이뤃 수 있다.
영생: 몸의 구원; 하나님의 아들됨; 영광의 자유
∧ ∧ ∧
ꠐ ○ ○ ○
율법의 요구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ꠇꠏꠏꠇ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
× × × ꠐꠐ × × × ꠐ ꠐ ꠐ ꠐ
∧ ∧ ∧ ꠐꠐ ∧ ∧ ∧ ꠐ ꠐ ꠐ ꠐ
ꠐ ꠐ ꠐ 육 ꠐꠐ육ꠐ ꠐ ꠐ ꠐ ꠐ영ꠐ ꠐ
ꠏꠏꠏꠏꠏꠍꠏꠏꠏꠍ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ꠊꠊꠏꠏꠍꠏꠏꠍꠏꠏꠍꠏꠏꠏꠏꠊꠏꠏꠏꠍꠏꠏꠍ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
자연인 ꠐꠐ 기독인 ꠐ 기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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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도표에서 묘사한 바와 같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통하여 그와 결합한 사람들은 육을 따르지 말고 영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그것의 완성은 사랑인데, 몸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된다.
2. 마태복음의 구원론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구원론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의 구원론을 강의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구원론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가는지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구원론의 틀은 천국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심판의 사실성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2.1. 구원론의 틀: 천국 도래의 선포와 심판의 사실성 마태복음의 주제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모두 천국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장 먼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마 3,2), 그 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으며(마 4,17), 이어서 제자들이 선포했습니다(참조. 마 10,7). 이 천국의 도래에 관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합니다(마 24,14). 천국은 특히 예수님의 말씀 선포 사역에서 핵심을 이룹니다. 마태복음서의 예수님(앞으로는 마태적 예수로 사용함)은 주옥과 같은 말씀을 많이 가르치셨습니다만, 독특한 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5개의 큰 말씀 군(郡)으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첫번째 큰 가르침: 산상보훈: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 (5-7장) 두번째 큰 가르침: 사도교훈: 천국 복음 선포 (10장) 세번째 큰 가르침: 비유교훈: 천국 비유 (13,1-52) 네번째 큰 가르침: 제자교훈: 천국에서 큰 자 (18장) 다섯번째 큰 가르침: 종말교훈: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23-25장) 이러한 말씀 군에 의하면 분명히 천국은 마태적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핵심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 주제에 심판의 주제가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주제는 주 멜로디인 천국에 관한 말씀을 감싸면서 마태복음의 본론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여러 말씀들에 의하면, 심판은 있을 것이며(마 11,41; 13,36-43; 13,47-50; 19,28 등등),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자로 재림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음으로써 시작됩니다(마 19, 28; 25,31). 각 사람들은 행한 대로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되어 정죄(마 11,41)를 받습니다. 악인은 풀무불에 던지어 영벌에 처해지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됩니다(마 13,36-43; 13,47-50; 24,40; 25,31-46).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미 현재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천국은 인자의 재림과 더불어 도래하는데, 거기에는 행위에 따른 심판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주제, 즉 천국의 도래와 심판의 사실성이 마태복음의 구원론의 큰 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틀에 따라 마태복음의 구원론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심판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판의 기준인 행위(믿음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와 관련된 법조건, 즉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놓여진다는 것입니다. 2.2.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마태적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산상보훈에서만 두번(마 5,20; 7,21)이나 강력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조건은 다음처럼 언어적으로는 두 가지이나 내용적으로는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1. 첫번째 조건: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첫번째 말씀인 마 5,20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함입니다. 여기서 ‘의’는 율법의 계명을 행함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더 낫다’라는 말은 πολύς(많은)의 비교급 πλείον으로 원래 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 양적인 의미는, 이 말씀의 바로 앞에 있는 율법의 개별 계명의 수행을 언급하는 마 5, 17-19에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17절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메시지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광범위하게 실현하고, 또한 실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18절은 율법의 무제한적인 유효성을 언급합니다. 19절은, 가장 작은 계명을 폐기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자와 그것까지 행하며 또 그렇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극히 대조되는 입지를 차지한다는 점을 말함으로써, 가장 작은 것을 포함한 모든 계명을 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라는 말씀은 수사학적인이고 문맥적인 근거로 사실상 천국에서의 배제를 의미하고, “천국에서 크다”라는 말씀은 천국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주로서 율법의 무제한적인 유효성을 선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 실천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를 행하며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제자들의 더 나은 의는 우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많이 행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조건에 관한 첫번째 말씀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6개의 대립 명제(마 5,21-48)와의 문맥적인 관련성 안에서 질적으로 ‘더 나은’의 의미를 내포하게 됩니다. 이 6개의 대립 명제의 절정은 마지막에 나오는 원수 사랑의 명제입니다. 이 대립 명제들에 의하면 모든 개별적인 구약의 계명들이 유대적으로 철저하게 강화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사랑의 계명이 이 강화된 개별 계명들의 중심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첫번째 말씀의 앞 뒤 문맥에 의하면 독특한 종류의 율법 이해가 나타납니다. 율법에는 모든 개별 계명을 포함하는 울타리가 있고, 그 중심에는 사랑의 계명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 계명이 주위에 있는 모든 다른 계명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들의 의는 - 율법으로 재어서 - 율법 수행의 양적인 증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 사랑으로 재어서 - 하나님 앞에서 삶의 질적인 강화를 의미합니다. 2.2.2. 두번째 조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함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관한 두번째 말씀인 마 7,21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입니다. 이 조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산상보훈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어적인 테두름(Ringkomposition)을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A: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조건: 착한 행실) 5:16 B: 율법과 선지자 - (폐함이 아니라 성취하러 오심) 5:17 C: 더 나은 의 -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5:20 (D: 하늘에 계신 (너희/네) 아버지 앞에서의 은밀한 의 6:1f.) C': 먼저 구해야할 의 - (그의 나라와 그의 의) 6:33 B': 율법과 선지자 - (황금률) 7:12 A':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뜻을 행함) 7:21 이러한 구조에 따르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에 관한 두번째 말씀 중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A')란 말씀은 마 5,16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A)란 말씀에 맞서서 산상보훈의 외연적인 테두름을 형성합니다. 이 테두름에 의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함”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착한 행실을 하는 것”에 상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과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각각 중간의 테두름(B, B')인 율법과 선지자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수행과 동의어적으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천국에 들어가는 두 가지 조건은 그것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하나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 공통분모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들을 포함하는 율법의 울타리가 있고, 그 중심에 사랑과 자비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 중심 계명으로써 그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계명들을 해석하여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뜻을 파악해서 실행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조건에 따라 사랑과 자비의 계명으로써 모든 계명을 해석하고 실천하여 삶을 질적으로 승화시키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아무리 은사를 많이 받고 행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다루기 전에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3. 하나님의 가장 큰 뜻: 사랑과 자비 이미 6개의 대립 명제를 다룰 때 가장 중심적인 계명이 사랑이라고 간단히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큰 뜻은 자비, 긍휼(ἔλεος)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번(마 9,13; 12,7; 23,23) 나오는데 두번이나 호세아 6,6의 인용구(마 9,13과 12,7)에 등장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제사, 즉 예배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첫번째 호세아 인용구(마 9,13)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처럼 하신 말씀 가운데 사용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ἔλεος = 자비)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 마태적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세리와 죄인들에 대하여 무자비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자비는 그들이 지키는 제사법이나 성결법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뜻이므로 자비를 배워 실천해야 한다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인용구가 들어있는 이 말씀은 “건강한 자들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자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씀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인용구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의 파송 목적과 병자를 치료하시는 그의 사역을 밝혀줍니다. 즉 자신의 파송 목적에 따라 병자를 치유하시고 죄인을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께서 드러내신 바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인용구 사용에서 부각되는 것은,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행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도 이 사실을 배워 자비를 실천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인용구가 두번째 사용되는 안식일 논쟁 기사(마 12,1-8)에서 자비는 가장 큰 하나님의 뜻으로 밝혀집니다. 이 기사에서 7절의 호세아 인용구는 “성전보다 더 큰 것(개역 성경에는 ‘더 큰 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어로는 ‘더 큰 것’이 맞습니다)이 여기 있다”는 6절의 말씀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8절의 말씀 사이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배열에 의하면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신다는 호세아 인용구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태적 예수님은 이러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하여 예배보다 더 중요하고 성전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자비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 해석이 다음에 오는 인자의 말씀에 의해 권위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인자로서 그리고 안식일의 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적 예수님에 의해 궁극적으로 구속력 있게 해석된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큰 뜻은 자비가 됩니다. 자비는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서 제의 예식(예배)보다도, 안식일보다도, 성전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자비는, ἔλεος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마 23,23절을 보면, 의(κρίσις)와 믿음(πίστις)과 함께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βαρύτερα τού νόμου)에 속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자비가 κρίσις와 결합되었다는 점입니다. κρίσις는 원래 심판을 의미하고, 약한 자로 하여금 그의 권리를 찾도록 하는 의로운 판결을 의미하며, 심판자가 회복시키는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κρίσις는 ἔλεος와 동의어입니다. 이 자비와 권리의 결합은 구약에 나옵니다. 출 22,27에서 하나님은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은 자비한 분(신 4,31)으로서 인간과 피조물을 감찰하시며(창 16,13), 자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모든 권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기본권을 빼앗기거나 약탈당해서 가난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탄식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며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권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이러한 사상이 자비와 권리가 결합된 여기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어느 모양으로든지 권리를 짓밟힌 자들, 그래서 가난하고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갖고, 그들을 돕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율법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비는 인간이 행동으로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의 중심입니다. 자비는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서 제의 예식보다도, 안식일보다도, 하나님의 성전보다도 더 크고 더 중요하고 더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2.4.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행하지 않고 덜 중요한 것들, 성결법(식사 전에 손 씻는 것), 성전 제의, 안식일 성수, 사소한 채소의 십일조 등을 철저히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은 계명을 철저히 행하면서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큰 계명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가장 거역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말적인 화가 선언되었습니다. 지옥의 판결(마 23,33)이 떨어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떨어진 화선언과 지옥의 판결은 하나님의 작은 뜻을 철저히 행하고 더 큰 뜻을 행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 그들도 하나님의 작은 뜻을 철저히 행하고 더 큰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가장 거역하는 자들이 되어,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 하는 자에 대한 거부의 말씀(마 7,22-23)과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마 25,31-46)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 대한 거부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 다음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종말적인 관점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 마 7,13의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데 - 애타게 주를 부르며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다고, 즉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했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세계 심판자께서는 그들의 예언과 귀신 축출과 기적 행함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행함의 판단 범주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질책하십니다. 이 최후의 심판에서 결정적인 판단 범주는 불법(ἀνομία)입니다. 이 불법은 사랑과 자비의 계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 24,12에서 불법의 성함이 사랑의 식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계명을 실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목사)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권능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불법을 행한 자들로 드러나 그분의 종말 이후의 천국 공동체에서 배제됩니다. 다음으로 심판의 비유를 살펴보면, 최후의 심판 때에 주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십니다. 양처럼 오른편으로 분류된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 즉 가난한 자,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나그네, 갇힌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고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장 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천부께서 부여한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행위는 주님께 행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로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 반면에 염소처럼 왼편으로 분류된 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병든 자, 헐벗은 자, 나그네, 갇힌 자를 돌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큰 뜻을 행하지 않고 작은 뜻만을 행함으로써 짓밟힌 자들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시는 주님의 굶주림과 헐벗음과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고,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은 뜻을 - 그것이 십일조 철저, 안식일 성수, 성전제일주의이든지, 또 그것이 예언자(목사)직무 수행, 귀신 축출, 기적 행함이든지 - 행하면서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행하지 않을 때, 그들은 바리새인이나 거짓 선지자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뜻 모두를 행하는 자, 즉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계명들을 가장 중요한 사랑과 자비의 계명으로 해석하여 실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2.5. 요약 마태복음의 구원론은 천국도래와 심판의 사실성을 틀로 삼아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서 기자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포함하는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으로 된 울타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울타리 안에는 중요한 계명과 사소한 계명이 모두 들어 있고, 그 중심에는 사랑과 자비의 계명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계명들, 즉 하나님께서 적게 원하시는 뜻과 가장 많이 원하시는 뜻을 아울러 다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많고 더 나은 의를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작은 뜻만 행하면서 가장 큰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마귀를 위하여 예비된 곳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장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과 자비의 계명을 실행하고, 그 계명으로 모든 다른 계명들을 강화해서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마태복음의 구원론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마태복음의 구원론과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구원론은 서로 유사해서 통일성을 이룬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이제 통일적인 신약의 구원론에 따라 바르게 삶으로써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이번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샬롬 |
출처 :주님과 함께~" " 글쓴이 :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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