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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론 / 신원균 목사

에반젤(복음) 2020. 2. 22. 15:03




칼빈의 기독론 연구

발표자: 신원균 목사

Ⅰ. 서론

Ⅱ. 본론

A. 기독교 강요 제Ⅱ권에 대한 바른 이해

1. ‘제Ⅱ권은 기독론이다’는 오해

2. 기독교 강요 제Ⅱ권 제목에 대한 이해

B.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

1. 동일 본질과 위격의 구별

C.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

1.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이중성과 통일성

2. 신성과 인성과의 상호 관계

3. 두 본성은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D. 그리스도의 계시의 방식

1.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

3.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4.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그리스도

E. 기독론과 관련된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

Ⅲ. 결론.



Ⅰ. 서 론


루이스 벌콮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으로,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일신을 특별히 강조했던 유대교의 잘못을 비롯해서, 에비온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었으며, 그가 메시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함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는 것이 그들의 큰 과업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수하던 자들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성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러하였고 후대 하르낙과 같은 신학자가 그러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고집하다 보니, 그리스도는 한 하나님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오리겐에게 이어져 결국 종속론에 빠지고 말았으며, 이는 결국 아리우스주의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성부와 동질이고 동일본체라는 입장을 강력하게 변호하였고, 이러한 입장이 321년 니케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 이후에 그리스도에 관한 첨예한 문제로 등장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병존하는 양성간의 관계였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진정성을 버리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로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강조했던 유티케스(Eutyches)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갔던 것이다. 451년 칼케돈 회의는 이러한 잘못들을 정죄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위)의 단일성과 양성을 함께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니케아 회의와 칼케돈 회의의 주장이 바르다는 것은 칼빈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 칼빈의 기독론은 루터주의와 카톨릭과의 큰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 칼빈의 이러한 독특한 내용은 17세기 개혁신학자들에게 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기본적으로 (A)기독교 강요 2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B)제2위이신 그리스도의 동일본질과 위격의 구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 나아가 세르베투스의 잘못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들이 후대에는 어떤 형태의 이단들이 형성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은 (C)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에 대하여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바른 내용을 찾아보고, (D)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이 성경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계시되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끝으로 (E)기독론과 관련된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으로 자리잡은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Ⅱ. 본 론


A. 기독교 강요 제Ⅱ권에 대한 바른 이해


1. ‘제Ⅱ권은 기독론이다’는 오해

칼빈의 기독론을 다룸에 있어서 먼저는 기독교 강요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대개 칼빈의 기독교 강요(1559)를 1권은 성부(혹은 신론), 2권은 성자(혹은 기독론), 3권은 성령론(혹은 성령의 내적 사역), 4권은 교회론(혹은 성령의 외적 사역)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 강요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칼빈의 기독론에 관해서 연구할 때 제2권만을 살피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이유는 2권의 제목에 알 수 있듯이 제2권의 하나님(Dei)은 제1권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인 것이다. 단,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o) 구속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Dei Redemptoris)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살펴보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 첫째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나타났고 프란시스에게 보내는 1535년 8월 23일의 편지가 서문에 포함되었으며, 율법과 신앙, 기도, 성례들, 로마 카톨릭 성례들, 자유에 관한 10주제들을 내포하였다. 그것은 1539, 1543, (1550), 1559년 등 3(4)번 개정판을 내었다. 마지막 판은 첫째판보다 대략 4배가 크고 증가와 확대를 거듭하였지만, 어떤 변경도 없었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점점 더 조직적인 형태를 얻었다. 1559년 판은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룬 네 책을 포함하고, 마지막 책은 외적인 은혜 수단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와 같이 헤르만 바빙크는 기독교 강요가 1536년도 판이나 1559년도 최종판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어떠한 변경도 없었다는 것과 1559년도 판의 각 권을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부, 성자(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하나님으로 나눈 방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한국 교회에 소개된 기독교 강요에 대한 오해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된 번역판(1988)에 실린 다음 글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이번(1559년도 최종판)에는 21장(1550년 판)에서 4배가 되는 80장으로 늘어났다. 전적으로 새로운 계획에 따라 완전히 개정하였으며, 또한 상당한 증보를 하였다. 다소나마 계속 보존되어 왔던 1536년 초판의 요리문답 형식은 이제는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저작을 개정하고 그 자료를 재배열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사도신경에 따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의 4부로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구조와 1559년 판 기독교 강요의 구조는 상대적인 대조를 이룰 뿐이다. 예를 들면 칼빈은 제4편에서 교회를 말하기 전에 제3편에서 벌써 부활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복윤 교수의 설명은 헤르만 바빙크가 말하는 내용과 상반됨을 알 수 있다. 바빙크는 1536년도 판과 1559년도 판의 형식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전혀 변경이 없었다고 한 반면, 신복윤 교수는 ‘전적으로 새로운 계획에 따라 완전히 개정’하였다고 평가한다. 또한 각 권에 대한 이해의 차이도 확연히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칼빈의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1권 13장에 나타난 칼빈의 삼위일체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김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 강요의 1권 13장의 제목(Unicam Dei essentiam ab ipsa creatione tradi in Scriptris, quae tres in se personas continet, 성경에서 창조 자체로부터 자체 안에 세 위격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 준다는 것)을 통해서 전체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소개하고 있다.


이 제목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아마 사도신경의 첫 부분의 주석 안에 종속적으로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논한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칼빈은 그런 구조에서 벗어나서 창조자 하나님, 구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구조로 바꾸면서, 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삼위일체의 내용(una Dei essentia, …… quae tres in se personas continet, ‘그 자체 안에서 세 위격들을 포함하는’)을 포함하는 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2권은 기독론이고 제 3권은 성령론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구주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제 3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구주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얻는) 양식(modus)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이해의 근거로서 상기 제목에서 ‘창조 자체로부터’(시작하여)하나님의 한 본체를 알려준다는 표현에 있는데, 그 표현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이 그의 모든 사역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제2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이해, 즉 ‘제Ⅱ권은 기독론이다’라는 오해를 갖게 만들 수 있는 요소와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다음 단락에서는 기독교 강요 제2권의 제목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독교 강요 제2권 제목에 대한 이해

제Ⅱ권의 제목은 ‘처음에는 율법 아래 조상들에게,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들에게 계시되었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De Cognitione Dei Redemptoris in Christo, quae patribus sub Lege primum, deinde & nobis in Evangelio patefacta est)’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속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 사역의 공덕과 효능과 혜택은 창세로부터 모든 세대에 살던 택함 받은 백성들이 계속 받아 누려 왔다”는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해를 갖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칼빈이 ‘성자는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는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말한 아리우스의 견해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 왜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즉 “선민을 그리스도에게서 떼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제Ⅱ권의 제목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자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주신 구속의 효력은 창세 이후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마르시온(Marcion)이 등장한 이후 줄곧 일부 신학자들은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는 것으로 파악한 나머지 양자가 서로를 배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 오늘날 철저한 세대주의자들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 개념으로 파악하여 이전 세대에는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 있었으나, 현세대의 교회는 복음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빈의 입장, 즉 개혁주의적 입장은 결코 율법과 복음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갖고 칼빈의 기독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B.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한 형태로 나간 아리우스의 견해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위격의 구별을 무시한 형태로 나간 사벨리우스와 그 뒤를 이었던 세르베투스의 견해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의 성경해석의 문제를 간략히 점검해 보고, 이러한 것들이 후대에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동일 본질과 위격의 구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먼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각 위격이 어떤 특성에 의해서 분리가 아닌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통적이고 바른 견해와는 달리 사벨리우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빈 껍질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차이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밖에도 매우 많이 있는 하나님의 여러 다양한 속성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벨리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한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단일성을 말할 때 우리는 사벨리우스가 말하는 양태론적인 이해에서의 단일성이 아니라 본질(essence)의 차원에서 단일성이 주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벨리우스의 말에 의하면 각 위격의 구별이 무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전혀 구별이 필요 없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말할 때, 칼빈은 위(person), 실재(subsistence), 실체(substance)적인 개념에서 구별된다고 하였다.


1) 칼빈의 요한복음 1장 1절 해석에 나타난 이단들

따라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그 분은 본질에 있어서 동(단)일하시다는 것과 위에 있어서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교리사적으로 아리우스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의 동일성을 부인하였고, 사벨리우스는 각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였던 것에 대해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 1:1 주석에서 밝히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세르베투스(Servetus)의 잘못도 지적하고 있다.


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선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영원한 말씀이 등장한 것을 창조할 때 나타남으로써 비롯됐다고 상상했다는 것이다. 마치 그의 능력이 그의 대외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알려지기 전에는 그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말씀’에 시간적인 시작을 부여하지 않고 그가 태초부터 계셨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요한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이다.


②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보다 높이 계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계시며 모든 시대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밝힐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표현은 그에게 아버지와 다른 실체(hypostasis)를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와 분명히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오류를 논박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③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칼빈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어떤 의심도 하지 못하도록, 그는 분명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만큼,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속한 분이시면서 어떤 면에서는 다른 데가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리우스(Arius)는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극히 사악한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고백하게 되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종의 피조물이라는 괴변을 떨었다고 칼빈은 표현했다. 그리고 칼빈은 동일본질을 설명할 때 요 10:30절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요1:1절 말씀에 대한 주석만을 가지고도 칼빈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오류들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리우스, 사벨리우스, 세르베투스와 같은 인물의 잘못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2) 아리안주의, 사벨리안주의의 다양한 형태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책 ‘개혁주의 신론’에서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그것을 주장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바빙크에 의하면 먼저, 아리안주의자들의 다양한 형태와 인물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종속론자들이다. 아들은 참으로 영원하며,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진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자는 정관사를 가지지 않은 하나님이고, 성부와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주장은 져스틴 마터,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 semi-Arians,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견해이기도 한데, 후기에는 항론파들(알미니안주의자들)과 많은 근대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옹호하였다고 바빙크는 가르친다.


둘째, 본래의 아리안주의(Arianism proper)가 있다. 이들은 세계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성자와 성령이 성부의 자유의지에 의해 존재케 되었고, 마치 구약에 사사들과 통치자들이 신들이라고 불리웠던 것과 같이 성자와 성령도 그 직무 때문에 하나님으로 불리웠다고 하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종교개혁 후기 신학자인 밀톤(Milton), 휘스톤(W.Whiston), 클라크(S.Clarke), 마티(P.Maty), 휘트비(Dan, Whitby), 하드우드(Hardwood), 화란의 많은 항론파들, 그리고 후기의 그로닝켄 신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셋째, 소시니안 주의자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이다. 성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이고, 초자연적 개념을 수단으로 해서 창조하신 거룩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창조 이전에는 그가 있지 않았다. 성령은 단지 신적 에너지나, 능력일 뿐이다. 이런 소시니안주의는 폴랜드로부터 독일, 화란, 영국,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죤 비들(John Biddle), 라르드너(Nathanael Lardner), 린세이(Theoph Lindsey), 그리고 유니테리안 협회의 창시자인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 등에 의해서 옹호되었다고 한다.


바빙크는 소시니안주의로부터 유니테리안주의로의 진전은 단지 한 발자국 더 나간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리츌(Ritschl)도 새로운 형태의 소시니안주의를 제공했던 자라고 평한다. 따라서 아리안주의나 이런 다양한 형태들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사벨리안주의의 선구자는 이미 AD 2, 3세기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우스(Praxeus), 에피고누스(Epigonus), 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nemes)가 있었다고 한다. 사벨리우안주의 역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들이 있다.


첫째, 성부수난설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성자의 수난은 성부의 수난으로 언급될 수 있다는 믿음, 즉 성부, 성자, 성령이 같은 존재의 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락세우스이다.

둘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설미움의 포티누스(Photinus of Sirmium)의 이론인데, 성자와 성령은 창조와 구속을 중심으로 잠시 동안 인격화되었던 하나님의 속성들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본래의 사벨리안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자들인데, 사벨리우스, 중세의 범신론자들, 재세례파, 세르베투스가 여기에 속한다.


넷째, 앞에서 제시한 자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다음의 형태들이다. 삼위일체는 어떤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뵈메, 삼위일체는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진젠도르프(Zinzendorf), 삼위일체는 영혼, 육체 그리고 둘 모두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유비된다고 한 스웨덴보르그(Swedenborg), 삼위는 입법자, 통치자, 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낸다고한 칸트외에도 쉘링과 헤겔이 여기에 속한다고 바빙크는 전한다.


C.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용 최종판 2권 14장에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구조를 좇아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이중성과 통일성

칼빈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발언을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육신과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말씀이 그 계실 성전으로서 처녀의 태중을 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는 본질의 혼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격(person)의 통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결합․통일되어 두 본성은 각각 그 특이성에 손상을 받지 않은 채 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루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의 상통”를 말하되 루터주의와는 다른 의미에서, 즉 교부들이 인정한 것을 따르고 있다. 성경에서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만 말해야 할 일을, 또 어떤 때에는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일을, 또 어떤 때에는 양성에 속하고 어느 한 쪽에만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양성의 통일을 열심히 주장해서 드디어 양성을 서로 교환하는 때도 있다고 말한다.


2. 신성과 인성과의 상호 관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종”이라고 하며(사42:1),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며(눅2:52),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8:50), “최후의 날을 모르며”(막13:32; 마24:36),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요14:10),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며”(요6:38),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졌다고 한다(눅24:39). 칼빈은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런 속성들을 자기의 인성에만 돌리지 않고, 중보자로서의 위격과 조화된 것으로 인정하며 자기의 속성이라고 하신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가르친다(요일3:16, 의역). 따라서 여기서 인성에 속한 성질을 신성과 나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면서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요3:13) 말씀하셨을 때에, 물론 육신으로 계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었으므로, 신인 양성의 통일을 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에 주신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는 루터주의와는 달리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둘이 혼합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방식인 것이다.


3. 두 본성은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두 본성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저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뒤섞어 버리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을 붙잡고 그의 신성을 제거하며, 반대로 신성의 속성을 붙잡고 인성을 제거하기도 하며, 또 양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해서 어느 한 쪽에만 적용되지 않는 속성들을 붙잡고 두 본성을 모두 제거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아니며, 또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며, 또 동시에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므로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도 아니라고 쟁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두 본성이 통일되었으나 혼합되지 않은 고로, 인성 때문이 아니라 인성에 의해서까지도 우리의 주이시며 하나님의 참아들이시다라고 하였다.


4.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칼빈은 그리스도가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고, 때로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가르친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 가지로, 곧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아들(인자)로 부르고 있다. 그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히브리어로는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인 만큼 이 이름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는) 싸움을 걸어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르는 사실을 그의 인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D. 그리스도의 계시의 방식

이 단락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1.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 ‘3.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4.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순서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오늘날 우리에게 잘 소개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겠는가 라는 질문의 대답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하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칼빈은 이단 세르베투스와 같은 자들이 이것을 다르게 주장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친절히 반론을 제기했다.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의 태중에서 났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 즉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 버리고서는 그리스도는 약간의 신적 요소와 인격적 요소의 혼합체이지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논리 전체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림자 같은 형상들만이 있었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아서, 아들이 되는 영예를 받도록 예정되었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했을 때에 처음으로 그 그림자 같은 형상들의 진상 또는 효력이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칼빈의 주장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처녀에게서 난 중보자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독생자며 또 그 이름을 가지는 존엄성을 받으시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거울이 아니실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내린 정의는 확고 부동하다. 즉 모든 시대 이전(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에 아버지에게서 난 말씀이 인성을 취하여 위격(hypostasis)의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은 위격의 통일을 정의해서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는 항상 모든 창조물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만물의 으뜸이 된다고(골1:15)한 바울의 발언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추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간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세르베투스가 생각했던 방식은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그리스도가 아들되심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부터라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임이 다시 한번 밝혀진 것이다.



2.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

칼빈의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가 교회 교사를 통해서 배워보지 못했고, 오늘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성경공부 교재에도 이러한 내용은 거의 전무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영규 교수는 기독론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통일적인 고백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라고 한다. “칼빈에 따라 여호와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현현(manifestatio)은 인정하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육체(substantiale corpus)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주장대로 하면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생각할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취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중재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구약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 이해’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밝히 제시하고 있다.


① 먼저, 칼빈은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를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입증하는 좋은 예로 제신한다. 즉, 사사기 13장에서 마노아의 부부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삿13:20)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표현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6:11, 12, 20, 21, 22, 7:5, 9). … 종으로서의 천사는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천사는 식물(食物)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13:16). 실로 이 사살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13: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13: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13: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13: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② 다음으로는, 호세아가 야곱과 씨름한 천사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여호와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호세아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12:5)고 하였다. …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32:30)라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그가 창조된 천사가 아니라, 그 안에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분(골2:9)이라는 것을 충분히 밝혀 주고 있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10:4).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비하의 때가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스가랴 2장을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고 한다(슥2:3, 9).


다음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살펴본 바를 더 잘 증명해 보기 위해서 칼빈의 창세기 32장 29절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여기서 ‘야곱과 씨름한 천사’와 ‘마노아의 부부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를 다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어떻게 설명하는지 주목해 보고자 한다.


야곱은 그(천사)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모호하고 얕게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야곱은 더 높이 올라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성자 야곱이 이런 소원을 발로했다 해서 이상히 여길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아주 많이 나타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휘장과 은폐물 속에 가려진 것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율법하의 모든 성도들도 이런 열망에 불타올랐던 것에 틀림없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마노아의 기도를 읽을 수 있다(삿13:8). 그 기도 뒤에는 여호와의 응답이 나오는데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기묘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마노아로 하여금 더 이상 묻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야곱의 소원이 비록 경건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아직 완전한 계시의 시기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다. 열조들은 처음에 아침의 여명 속에서 행하도록 요구받았고 여호와께서는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다가 마침내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올랐던 것이다. 완전한 광채는 그리스도로부터 비쳐 나왔다.


이 말은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가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였지만 마치 아침의 여명 속에서 비춰진 것과 같다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완전한 계시의 시기가 차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3.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바른 개혁주의적 이해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절을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삼위 일체의 제2위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오,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또한 동등하신 분이시며,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 모든 본질적인 성질들과 일반적인 연약함들을 아울러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시고, 그녀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두 개의 온전하고, 완전하고, 구별된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전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었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이시되 한 분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이처럼 칼빈의 신학을 따랐던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짧지만 아주 명료하게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며, 성육신 하신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과 그분의 이성 일인격에 대해서 표현했다.



4.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그리스도

1) 몸의 실재성

이 단락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승천하신 이후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원한다. 부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또한 세르베투스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삼켜졌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게 된다.


이 문제는 성만찬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 거행시 떡과 함께 혹은 밑에 숨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성찬식에서는 영적 생명의 담보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것이며 또 자연적인 것이었다’는 터툴리안의 견해를 바르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영화된 몸에 대해서 친히 만질수 있으며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심(눅24:39)으로써 그의 살의 실재성을 증명하셨기 때문인데, 만약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살은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그들의 근거 구절로 사용하는 본문이다. 이에 대해서 칼빈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① 사도행전 7장 55절에서 스데반에게 보이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에나 있는 것-마치 그리스도가 스데반에게 보일 수 있도록 그를 가까이 끌어 내리워졌다는 생각-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스데반에게 보이신 것은 그의 처소를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종의 눈에 여러 층의 하늘을 꿰뚫는 맑은 시력을 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사도행전 9장 4절에서 바울에게 보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②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닫힌 무덤에서 나오셨으며(마28:6) 닫힌 문으로 제자들에게 들어가셨다고(요20:19) 항의한다. 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사실도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위를 걸으셨을 때에 물이 포장 도로와 같은 길을 제공한 것같이(마14;25) 그가 가까이 오셨을 때에 단단한 돌이 길을 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명령에 돌이 옮겨졌다가 그가 통과한 다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가능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닫힌 문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딱딱한 물체를 통과하셨다기보다는 거룩한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셔서 비록 문은 잠겨 있었을지라도 놀라운 방법으로 돌연히 제자들 사이에 분명히 서 계셨다는 뜻이라고 한다.


③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신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눅24:31절 기사에 대해서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고 해석하지만, 칼빈은 오히려 주께서 알아볼 수 없는 새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다(눅24:16절처럼)고 보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이다.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한 영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에 여러 가지 전연 반대되는 성질을 부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이중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2) 몸의 편재성 배척

몸의 편재성을 배척했다는 것은 결국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과 공재설을 배척했다는 것과 같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떡 밑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다보니 몸의 편재성이라는 해괴한 생각을 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칼빈은 성경의 확고하고 분명한 증거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적인 몸의 한도에 따라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늘에 올라가심으로써 모든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전에 계시던 곳을 떠나신다는 것을 밝히셨다는 것이다.


몸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언급하는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28장 20절이다. 하지만 칼빈은 이 말씀을 몸에 적용할 것이 아니다고 한다. 문맥을 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의 살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고 다만 제자들을 보호하며 지탱하게 하시는데, 제자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저하거나 또는 사명을 수행하더라도 겁약하지 않도록 그가 함께 계시겠다고 확실히 약속함으로 힘을 죽고 계시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양성의 각각 그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며 아무 손상을 받음이 없도록 해야 바른 이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티케스는 그리스도 안에는 양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육신도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들은 양성의 결합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어떤 중간적 존재가 합성됐다고 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양성의 구별을 무시하고 위격의 단일성을 역설하는 자들은 요한복음 3장 3절을 근거 구절로 사용한다. 하지만 칼빈은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며, 고린도 전서 2장 8절에서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수난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육신으로 수난을 당한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시하는 뜻이라고 해석해야 옳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는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고한 견해를 적극 수용했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성만찬에 있어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처럼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올리우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몸의 실재성을 부인하거나 몸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성에 대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는 16, 17세기에 칼빈주의의 독특성으로 자리잡게 된다.


E. 기독론과 관련된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

이 단락에서는 칼빈의 기독론이 역사적으로 정통 개혁신학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웨슬레를 따르는 자들도 칼빈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며, 루터주의자나 심지어 카톨릭 신학자들까지도 칼빈을 그들의 신학노선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론에 있어서 정통개혁신학에서는 매우 엄밀한 이해가 요구되는데 김영규 교수의 「17세기 개혁신학」에 의존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김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의 요점에 대해서 6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② 언약의 통일성. ③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 ④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작자 개인에게(uni)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 ⑤ 세속정치와의 교회의 독립성. ⑥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이 가운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기독론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내용이 비개혁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말은 정통개혁주의 바른 노선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첫째, 16세기 후기에 개혁주의 신학의 쟁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도르트회의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라는 것이라고 한다. 개혁신학에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혁주의를 대표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아르미니우스와 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사상이다. 즉 선택의 대상에 대한 싸움이 중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안주의자들과 달리 그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내용은 칼빈의 요한1서 2:1-2절에 대한 해석에서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은 칼빈 이후 도르트 성직자들에게 잘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신학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예정론과 상관없이 사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신학의 예정론은 “예정의 대상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구원의 방식들에 대한 것도 예정론 안에 포함한다”는 것을 믿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개혁신학의 엄밀한 이해는 아르미니안주의자들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영생을 위해 택한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고 죽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았다”는 명제를 그들이 공히 부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아리미니안주의자들이 이처럼 주장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칼빈의 정통적인 예정론이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그 후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용은 이미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아르미니안주의 혹은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함으로 개혁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도 도르트회의의 타락후 선택설 정도만 허용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엄밀한 성격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알미니안주의자나 웨슬레를 따르는 자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카톨릭과도 다른데, 예정론에 따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은 인간론 중심의 구원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주의도 이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김영규 교수가 기독론과 관련하여 제시한 정통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은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는 내용이다.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와 칼케톤 신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독특성(Extra illud Calvinisticum) 사이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루터주의는 두 본성의 실제적 통일성을 주장하되 육체밖에 로고스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쯔빙글리 이래 개혁주의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안에 거하는 인격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신성은 인성밖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루터주의는 공재설을, 카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유한이 무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런 근본적인 사상적 뿌리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은 자유로울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의 내용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17세기까지 이어지는 개혁의 내용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러한 신학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던 역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규 교수에 의하면, 퓨리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1618년 8월 25일에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이 결국 목회자들에게 강요되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5개 조항은 성례를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할 것, 사적으로 병자에게 성례를 집행할 의무, 필요에 따라 사적으로 세례집례의 허용, 이미 세례 받은 어린애들은 주교에게 데리고 가 견신례와 주교의 축복을 받을 것,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을 지킬 것 등이다. 이 중에서도 ‘사적으로 성례를 집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기독론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성례를 예배 가운데서만 허용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성례를 사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권유하였던 것은 떡이 그리스도의 실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론에 관한 잘못은 니케아 회의, 칼케돈 회의 이후에도 교회사안에 계속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어거스틴이 제시한 삼위일체 구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독론에 관한 내용은 바르게 정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① 칼빈은 마태복음 26장 26절의 “이것이 내 몸이니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빵을 성별하시면서 그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증거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에 본질의 변화(subsutantiae mutatio)가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단지 용도의 변경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떡이 자기 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은 성례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성례든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상징이 있어서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것과 연관되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며 이것이 곧 그것에 대한 진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당시 화체설을 주장했던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모든 성례에 공통성을 성만찬에는 적용하려 하지 않고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고 있는냐는 것이다. 그들이 반석을 가리켜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는 한 그들이 우리들(종교개혁자들)에게 내던지는 중상모략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떡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몸의 상징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이미 어거스틴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이해였다고 한다.


칼빈이 지적하는 또 다른 부류는 공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떡은 실제로 몸이지만 그들은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떡이요, 포도주인가라고 물을 때 그들이 떡을 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몸이 성만찬 때 이 빵 아래, 그리고 그 빵과 함께(under and with it)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러한 견해 역시 잘못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실체와 상징의 성례적 연합이란 하나님께서 그가 약속하신 행동을 자신의 영의 숨은 능력을 통해 성취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상징이란 헛되고 효력이 없는 상징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과 피의 동참자라는 점을 덧붙여야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고 그 효과가 실제로 그 대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떡은 자기 몸이니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쓸 데 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칼빈은 설명한다.


Ⅲ. 결 론.


칼빈의 신학적 내용은 장로교를 태동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성경의 바른 내용이 무엇인가를 드러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장로교 신자들이야말로 복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개혁파 신조의 역사와 가치 연구」라는 주제로 초대 신조를 연구하면서 이단들의 잘못된 주장과 바른 신학자들의 주장을 살펴 본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독론을 다루면서 그들의 잘못을 다시 한 번 들추어 낼 수밖에 없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바른 성경적 가르침(우리는 이것을 교리라고 부른다)에 관한 논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인은 본 연구를 통해서 칼빈의 삼위일체에 관한 바른 내용이 한국 교회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우리가 연구할 때 오해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칼빈은 기독교 강요 각 권의 제목을 통해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에 따른 방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2권은 기독론이다’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에서 그리스도의 이성 일인격이 성경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계시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특히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형태고 계시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을 취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분의 중보자의 직무는 구약에서 발견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는 교사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것이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칼빈이 성경을 해석한 방식은 우리에게 칼케돈 회의를 통해서 드러난 것들이 결코 헛된 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칼빈의 이해는 우리에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성을 파괴하지도 않으면서 신성을 무시하지 않고, 양성이 혼합도 분리도 되지 않는 방식을 취하면서 두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임을 항상 전제한 해석 방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몸의 실재성을 인정하며, 몸의 편재성을 배척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첨예한 문제로 자리잡았던 내용이다. 칼빈과 그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매우 엄밀한 선에서 이러한 것들이 잘 고백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고백이 개혁주의 안에 분명히 고백되어졌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John Calvin, 기독교 강요(1559), 김종흡 外3인, 생명의말씀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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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B.그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조해설, 김남식 역, 성광문화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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