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시대에 정립된 구원론 요약 /정자영
종교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속사도 시대 이후로 왜 계속적으로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진리전쟁 즉,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하는 것이 신앙과 밀접하며, 그 핵심이 구원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여전하며, 교회의 소속된 회원으로서 신앙하는 측면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곧 하나님의 일이었고, 그 사역과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일이 곧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원론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이해로부터의 출발이 아니고서는 준비론의 과정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종교 개혁의 역사안에서 청교도들이 주장했던 그들의 신앙을 이해하고, 그들이 추구했던 신앙고백과 신조에 따라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본 요약은 구원론이 잘못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올바른 구원관을 정립하고자 애썼던 역사를 통해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다음과 같은 순서로 내용을 정리하였다.
1. 종교 개혁이 있기까지 종교계의 흐름 중세 말기에는 카톨릭 신학자들은 스콜라주의(스콜라주의, 중세 기독교 학파에 적용된 명칭으로 계시된 진리(성경)의 교리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조직화한 방법을 가리키는 말, ex: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플라톤주의, 변증법, 실재론과 유명론 등)에 빠져있었고, 신학은 그저 상아탑에서 학자들이 논하는 현실성없는 학문일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가운데 16세기 초반, 유럽 전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에라스무스가 등장한다. 그는 처음에는 종교 개혁에 동참했고, 학자들의 어리석음, 권위주의, 형식주의를 풍자적으로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철학을 강조했다. 개인으로 중세 로마 카톨릭의 권위에 맞서는 분위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신학과 삶의 불일치가 드러난 것에 대해 지적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의 지적을 덮으려는 싸움이 시작됐다. - 위클리프와 존 후스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중세 말기에 본격적으로 타락한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형식과 사치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점을 지적하고 바른 신앙을 추구했던 영국의 위클리프, 유럽 프라하 대학의 존 후스같은 분들이 있었지만, 개인으로서 맞서다 로마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화형을 당하고 만다. - 바티칸 선언과 루터의 등장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에서 발표된 이 선언은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결정하는 지상 명령이었다. 루터는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토론을 통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의 오류를 지적해 주기 위해 95개 조항을 작성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면죄부 판매에 큰 수익을 거두던 교황 레오 10세가 그 조항을 읽게 되고, 루터는 파문을 당한다. - 그럼 면죄부는 무엇인가? 면죄부는 연옥의 불길로부터 죄인을 석방하여 주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으로서, 일정 기간 동안의 죄책을 사해 준다는 교황청의 증서였다. - 종교 개혁자들이 확신한 기본적 교리 종교 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로마 교회의 잘못된 신앙을 거부하게 된다.
2. 루터의 역할 - 루터는 33세의 어거스틴 파의 수도사이자 신학교수였다.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는 어떤 것이었나?
수도사이자 신학교수로서 이러한 내용을 가르쳤던 루터의 깨달음에 사람들이 크게 공감하게 되면서 죄인의 '칭의' 에 관한 교리는 종교 개혁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어갔다. - 루터의 믿음과 주장 루터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를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로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오직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그리스도 안에서/믿음을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로 인해 사람들이 개혁을 위해 모이고, 루터 진영 사이에는 분열하는 위협에 직면한다. 그 때에 루터는 스말칼트 신앙고백 (Smalcald Articles, 1537) 을 작성한다. <스말칼트 신앙고백의 요약 내용> 『 구원이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율법이나 공로에 의해서 얻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믿어야만 한다.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포함해서 어떤 인간의 공로라 하더라도, 죄를 감소시켜 주거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만한 것은 없다. 이 신앙조항이야말로 '하늘과 땅 그리고 그밖의 것들이 멸망되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조항 위에서 교황과 사탄과 세상에 저항하는 우리의 모든 가르침이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실패할 것이요, 교황과 마귀와 우리의 모든 대적들이 다시 승리할 것이다' 』 또한 그의 95개 조항 가운데 특히 82항은 교황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다 "어찌하여 교황은 (가장 거룩한 일이라고 하는) 사랑에 기초하여, 또한 저들의 영혼에 최우선적인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옥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아니하는가? 이것이 모든 이유 가운데서도 도덕적인 최상의 일이다. 그는 돈을 위해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루터의 칭의론에 공식적으로 반대했고, 그를 출교시키고, 면죄부 판매 제도를 개선하긴 했지만, 시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 개혁자들이 비판했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톨릭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대처하기 위해서 트렌트 종교 회의를 소집하는데, 주로 칭의론에 관심을 집중하였고, 이 회의에서 단호하게 루터의 교리를 반대했다. 교황청은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내린다고 발표하였다. 자신들이 발표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영생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는 믿음에 대해서 서로 분명하게 다른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오랫동안 갈라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개혁자들이 추진 방법에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연합된 하나의 개신교 교회가 세워지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죄의 용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구원론'에 대해 가장 본질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하게 되었고, 신학을 재정립하게 된다. 3. 칭의와 의의 전가 - 로마 카톨릭의 구원론 1) 반펠라기우스주의 로마 카톨릭의 구원론의 핵심은 '공로' 이다. 인간의 '공로' 즉,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상이 반펠라기우스주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믿음의 행위와 선행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고, 충분히 긍휼히 여김받을 만한 업적을 쌓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로마 카톨릭은 이용했고, 이 사상을 통해서 면죄부를 판매하여 수익을 얻었다. 로마 카톨릭의 구원얻는 믿음이란?
사랑의 선행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왜 로마 가톨릭에서는 믿음과 사랑만을 연관 지으려 하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믿음은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교회의 가르침은 사랑의 선행이라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사랑의 선행으로 헌신적인 충성을 보이면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해주는 사제들에 의해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2) 로마 카톨릭의 7성례 중세 로마 교회는 7성례를 통하여 기독교를 인간 중심의 종교로 왜곡시켰다. 7성례는 다음과 같다. 1) 영세 baptism 2) 성체성사 – 미사는 제사를 의미함. 떡조각을 입에 넣어 영성체를 모신다는 뜻. 3) 견진성사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적 이론 – 세례의 재확인 – 성령을 받음 – 머리에 안수 그 이마에 성유로 십자가를 긋고 성령의 임하심을 기도. 4) 고해성사 –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자가 범한 죄를 사제의 권위있는 선언을 통해 사해주는 성사. 5) 결혼성사 – 사제 앞에서만 행해야한다.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자로써 공적 증인이 됨. 6) 신품성사 - 신품 성사는 거룩한 권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맡기는 사제에게 내리는 성사이다. 7) 종유성사 - 카톨릭은 임종 직전에 교회 이름으로 모든 죄를 사해줄 수 있으며 죽은 자에게는 성례가 치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7성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간단하게 사제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심판을 피할 수 있고, 아담 이후로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선언하였는데, 사제들이 의인이 되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준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려움을 통해 그리스도를 찾기보다 사제 앞에서 겸손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3) 트렌트 종교 회의 트렌트 종교 회의에서 발표된 항목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거부하고 인간에게 내재적으로 갖추어진 의로움을 강조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역시 같은 트렌트 종교 회의의 선언문 제7장에서는 “우리 안에 의로움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진정으로 의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에서는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것과 “의인이 되어가는 것” (being just)의 구분을 매우 싫어한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믿음을 “구비된 믿음”(formed faith)과 “미비된 믿음”(unformed faith)으로 구분하여 놓고, 믿음과 선행을 연관시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5)이 구비된 믿음이라고 선언하였다 - 개신교의 칭의론 구원론의 핵심은 칭의의 본질이며 칭의론을 세분화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근거와 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구성된다.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론의 핵심은 구원의 도리이며, 그 구원의 도리, 즉 복음을 요약한 본문은 로마서 3:19-4:5 인데, 그 내용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가장 기초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복음의 내용을 압축한 것이다. 즉, 부패하고 타락하여 썩어질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버린 인간의 내부에서는 어떤 선의 가능성도 없으며, 오직 인간의 밖으로부터 의로움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곧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것이 칭의의 근거요, 기초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 선포된 복음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업과 그의 교훈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구원의 대업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 누리게 되는가를 포함해서 전파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법정적인 칭의라는 말을 법적인 선포라고 규정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의롭다 선언하시고, 인간의 죄를 일일이 세지 아니하시고, 그 대신에 그의 은총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의 핵심을 단순히 법정적인 칭의라고 말할 때에 여기에 곡해할 함정이 있다. 하나님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 그저 신분상으로만 달라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너무 지나치게 칭의를 좁은 관점에서 따로 떨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중생과 회심과 성화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복합적인 모델로 이해해야 한다. 중생과 회심과 성화가 함께 연관되지 않은 칭의란 있을 수 없다. 칭의는 믿음이라는 도구적 수단(instrumental cause)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따라서 칭의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요소들과 함께 결부지어서 이해해야한다. 그래야만 변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했다는 도덕 폐기론자(antinomian)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 개신교의 의의 전가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이 의의 전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어거스틴의 칭의 해석 중세시대 사람들은 칭의 이후에 믿음이 온다고 말했다. 중세 신학은 인간 본성의 변화를 칭의의 근거로 간주하고, 본성의 변화가 곧 믿음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칭의 교리의 핵심적인 오해의 소지는 어거스틴에서 출발했다. 어거스틴은 의롭게 하신다는 라틴어 단어를 'to make righteous' 라고 생각하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행동이나 자신의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것을 로마 카톨릭은 의로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인간의 내부에도 들어있는 것이고, 존재의 일부이며 내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어거스틴이 칭의에 영향을 주는 인간의 의로움이란 물질 고유의 특성(inherent)으로 생각하였다. 근원을 따지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고 인간 존재의 일부가 되어지고 인격에 내재적인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 어떤 상태(원인)에서 다른 상태(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의 법칙성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영향을 받아 구원론에 적용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인과율(causality)에 대해서 주장하는 이 세상 만물의 진행 원리를 설명하는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이한 것은 칼빈도 이 인과율을 기초로 로마서 3:24-25을 풀이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칼빈의 인과율의 해석은 하나님의 자비가 효과적인 원인이요, 그리스도가 물질적인 원인이며, 믿음은 형식적인 원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최종적인 원인이라고 했다. 로마 카톨릭은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곧 행위가 동반된 믿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 교회에서는 칭의에서의 도구적인 수단으로써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는 세례의 성례이고, 둘째는 고해성사라는 성례이다. 로마 교회에 따르면 오직 교회에서 성직자의 주관하에 집행되는 성례에 의해서만 칭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해성사는 특히 인간의 행위에 의한 보상이나 속죄를 강조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지 성례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론을 제시하였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움을 인간에게 접목시켜 주며, 칭의의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3)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로마 가톨릭 신학은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Thomas Aquinas's Summa Theologica)에 기초하고 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구원론을 '신인 협동설'을 설정하고, 인간의 공로 사상을 칭의의 기초로 설정하는 반펠라기우스 신학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로움을 법정적인 선언이라고 하지 않고 의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오류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은 인간 본성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은혜를 단지 인간됨에서 어떤 다른 영적인 실체로 변화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은혜를 인간 내부에 들어오는 어떤 것으로만 축소시킨 것이다. -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칭의)의 근거에 대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중교 개혁자들이 말하는 인간이 의롭다고 불리는 것은 인간 내부에 어떤 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의의 전가”(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의로움이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infusion-주입),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인간의 것으로 간주되는(imputation) 것이요, 주님의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돌린다는 말이다.(전가) 의로움은 결코 범죄하고 넘어진 인간의 내적인 요소가 아니다. 최후적인 것이요, 외적인 것이며, 법정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에서는 거듭난 죄인의 내적으로 일어나는 의로움이 뒤따라야만 의인으로 선포된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초점은 칭의의 근거(ground)와 칭의를 얻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연해진다. 칼빈은 칭의는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전가라고 말하고 있고, 전가된 의로움이 실행되어지는 과정을 이제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의 주입(infusion)이라고 보았다. 4. 믿음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그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그는 중세 스콜라 신학이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큰 실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대한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지식들을 믿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3권 2장 전체에서 스콜라 신학의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의 개념을 반대한다. 칼빈에 따르면 교황주의자들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는 대체물로서의 교회와 그 권위에 대한 감정적인 동의일 뿐이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주장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들을 경험으로 자각하는 일이다. 믿음은 분명한 대상을 인식한다. 구원얻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 이후로 믿음의 내용은 세 가지 요소로 정립되었다. (믿음의 정의)
구원을 얻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5. 칼빈의 역할 종교 개혁 초기에 개신교 진영의 최대 쟁점은 성찬론이었다. 1529년 말부르그 회합 이후로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에는 성만찬 해석으로 인한 갈등이 있어왔다. 칼빈은 1546년에 작성한 성찬론을 가지고 1547년 초 쮜리히를 방문하여 불링거와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칼빈은 불링거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1548년 6월 24일 24개 항으로 된 자신의 견해를 불링거에게 다시 보냈다. 불링거는 이에 주석을 붙여서 다시 칼빈에게 반송했고 칼빈은 다시 수정을 거듭하여 성만찬에 관한 26개 항으로 된 합의문(1549)을 발표하게 된다. 이것은 칼빈의 신학이 쮜리히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칼빈이 불링거에게 역점을 두고 주장한 성찬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며 그의 인간적인 속성들을 그대로 보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강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천상으로 그분에게 올리어진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찬에서 우리는 영적이고 천상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실재로 임재하시지만 그 방식은 천상적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쮜리히 협약에서 성찬은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는 것이요, 동시에 상징물들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도구로서 구원의 유익을 전달하여 준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위스에서 칼빈의 신학은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루터파에 우호적인 바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들 개혁자들의 주장 가운데 핵심 사항을 살펴보면, 소중한 칼빈주의 유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칼빈 한 사람이 당대 교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답변을 제시하였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칼빈은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교황이 아니었다. 칼빈이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지만, 반면에 그들의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였던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종교 개혁시기를 거치며, 여러 개혁자들이 등장했지만,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그 추진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일치하지 못했다. 그것을 해낸 사람이 칼빈이었기에 칼빈의 역할이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6. 초기 개혁신학의 두 흐름 칼빈주의가 구체적으로 영향력있는 교회의 뚜렷한 체제와 조직을 갖추고 등장한 것은 16세기 유럽의 스위스 여러 자치 도시에서였다. 스위스 개혁신학은 크게 두 부류로 형성되었는데,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의 개혁신학이 그 한 축을 형성했고, 다음으로 칼빈과 그의 후계자 베자를 통해서 스위스 남서부, 독일 남부,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에 광범위한 영향이 미쳤다. 152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개신교 교회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로마에 본부를 둔 서방 가톨릭교회처럼 단일 체제를 갖추지 않았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독일 복음주의 교회에 이어서, 스위스에서는 개혁 교회가 탄생하여 자치 도시를 중심으로 각각 로마 가톨릭과 과감히 맞서서 싸워야 했다. 일부 유럽의 도시들과 농촌 지방에서는 재세례파라는 과격한 일파가 생겨나서 다시 개혁 신학자들과 대립하였다. 초기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의 신부나 수도사로 있다가 회심하였던 까닭에, 처음부터 완벽한 성경적 신학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론과 구원에 관한 진리를 회복시켰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세대가 살을 입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일부에서 다른 견해를 피력하면서, “복음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 스위스의 개혁신학자들 ▶ 울리히 쯔빙글리 (Ulrich Zwingli, 1483-1531)
▶ 하인리히 불링거 (Heinrict Bullinger, 1505-1575)
▶ 바디안 (1484-1551)
▶ 요한 케슬러 (Johan Kessler, 1502-74)
- 독일의 개혁신학자들 독일 남부 지역에서는 칼빈과 동시대에 많은 신학자들이 설교와 저술 활동을 통해 개혁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은 부써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독일의 개혁신학이요, 다른 하나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팔라틴 지방의 개혁신학이다. 독일 남부 일부 도시들(Strassburg, Cologne, Memmingen, Lindau, Ulm, Augsburg)은 개혁주의 사상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그들은 독일 북부의 루터파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와 버미글리,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 쮜리히의 불링거 등이 제시한 개혁의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였다. ▶ 마틴 부써 (Martin Bucer, 1491-1551)
▶ 피터 마터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 1500-1562)
▶ 외콜람파디우스 (John Oecolampadius, 1482-1531)
▶ 볼프강 무스쿨루스 (Wolfgang Musculus, 1497-1563)
7. 정리 구원론의 정립에 대해 요약하면서 잘못된 교리와의 싸움을 통해 신조와 교의에 대한 구체적인 정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교 개혁의 유산을 남겨주신 것이다. 바른 구원론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안에서 형성되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칭의론이 교부시대와 종교 개혁시대에도 순교를 불사할 만큼 교회가 서느냐 무너지느냐 하는 조항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 중 아퀴나스(온건한 실재론)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온건한 실재론의 핵심은 믿기 위해 아는 것이다. 뒤집어서 본다면, 결국 이성(아는 것=이해)이 믿음이 되는 것이고, 이해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사상을 로마 카톨릭이 받아들인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이성을 가지고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은 반펠라기우스사상과 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은 믿음과 사랑의 선행을 가르치고, 그것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안셀름과 같은 신앙중시 실재론자들을 이어온 것은 현대 개혁주의이다. 안셀름은 “나는 믿기 위하여 안 것이 아니고 알기 위하여 믿는다. 나는 믿는다. 내 믿음이 아니면 알기 불가능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처럼 교회가 가르치는 주장이 이해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 회복은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또한 구원얻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사모하여 열매맺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이 생명을 걸고 지킬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론이 잘못되면, 올바른 신앙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도 다시한번 재확인한다. |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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