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 신학 >>>/- 기 독 론

조직신학 기독론

에반젤(복음) 2020. 2. 22. 14:53



조직신학 기독론

 

기독론은 신론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to be and to do)에 대해서 다룬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또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대부분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독론은 치열한 논쟁, 도전과 응전이 이루어지는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가 여기서 그 복잡한 논쟁들을 다 다룰 수는 없고, 또 전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그 논쟁들을 다루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만 어떤 관점의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잠깐 살피면 될 것 같다.

 

1. 기독론의 방법론 논쟁

 

1) 역사적 예수 탐구

"예수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며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발견하려는 탐색"이 바로 "역사적 예수 탐구"이다. "이 탐구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것은, 실제 예수가 성서 안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과 또 다른 사람들의 사고의 산물인 그리스도와 다르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즉,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이 쓴 신약성경을 단지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서만 인정하고, 이들의 증언만을 통해서 예수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자료를 통해서, 또는 성경의 자료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방법으로, 즉 일반적인 역사학 방법론으로 예수를 탐구하려는 태도이다. David Strauss, Ernest Renan, Adolf von Harnack 등에 의해서, "지상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재하신 제2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 위대한 영적 진리의 교사로 묘사되었다." 이들의 논의를 다 살피자면 한이 없다. 여하튼,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서론에서 다룬 것과 같이, 성경적인 신학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2) 위로부터의 기독론-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예수에 대한 인식의 순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에 따라서,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구별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란 선재하신 하나님의 로고스(말씀)이신 분으로 예수에 대한 인식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정통주의 교회에서는 위로부터의 기독론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제2위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시도 십자가를 지시사 무덤에 내려가기까지 하셨으나 결국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지금도 이 땅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다.

이에 비해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사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영향력을 상당히 받은, 또는 그 자체인 입장이다. 나사렛의 인간 예수의 삶으로부터 기독론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살핌으로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파악하는데 이르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결국 이단 사상의 범주에 머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기독론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좀더 실제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방식을 기독론의 기틀로 삼기에는 전통적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곤란한 부분이 많다.

 

2. 그리스도의 명칭

 

신론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함으로써 그 존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받았듯이, 기독론에서도 그리스도의 명칭을 살핌으로써 그 인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얻으려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히브리 전통에서는 어떤 사람의 이름에 단순한 구별을 위한 것 외에 여러 의미가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작업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1) 예수

이는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의 헬라어 이름이다. 이 이름은 "구원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마 1:21). 구약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또는 예시로서 존재한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기름붓다"라는 의미의 "크리오" 동사의 수동태 남성명사형이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의미로, 이는 히브리어 "마사" 동사(기름붓다)의 수동태 명사형이다. 구약시대에는 왕과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다(출 29:7, 레 4:3, 삿 9:8, 삼상 9:16, 10:1, 삼하 19:10).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열왕기상 19:16에 한 번 기록되었으나, 시편 105:15, 이사야 61:1에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기록이 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로 인해 거룩한 존재로 구별되고,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게 된다.

 

3) 인자(그 사람의 아들)

"그 사람의 아들(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쓰셨던 용어이다. 반드시 정관사 "호"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용법으로, 당시에 어떤 사람도 이런 말로 일인칭 대명사를 대신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례적인 언어의 용법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신 것에는 아멘의 용법이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자신이 다니엘 7:13에 나타나는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로서 오셨음을 나타내셨고, 또한 그 인성과 함께 신성을 드러내셨다.

주로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에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그것을 일인칭 대명사를 대신하여 사용하셨고, 그것도 반드시 그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사용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효과적으로 은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효과적으로 계시하기까지 하셨다.

 

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고백된 것이다. 마귀들도 이를 고백하였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백부장도 이를 고백하였다고 복음서는 증언한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들이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상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시며, 또한 메시야이시며, 삼위일체 중 제2위이시지만, 이를 은닉하시고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다.

 

5) 주

이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에 내포된 의미는 결국 그 신성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그 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다.

 

3. 그리스도의 이성(二性)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는 충분히 계시되지 않은 사실로서, 성경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하나의 신비인 것이다.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문제는 많은 논쟁을 야기시켰으나, 아직 충분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고백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와 같이 다른 피조물을 통해서 비유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라고 고백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에 대한 오해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정통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사람의 존재를 영, 혼, 육으로 나누어서, 혼과 육은 사람의 것이었으되 영은 하나님의 제2위, 로고스로 대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아폴리나리우스). 이는 영혼은 하나님이요, 육체는 사람이었다는 식의 생각과도 그 틀이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인성은 영이나 영혼이 없는 불완전한 것이 되기에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고백을 거부하게 한다. 만약 이를 따른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이나 영혼에 대한 중보자는 되실 수가 없다. 예수님의 영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없으실 것이다.

둘째, 예수님 속에 인성과 신성이 독립되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네스토리우스). 즉, 그리스도은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몸 속에 두 위격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마치 머리 둘 달린 사람처럼, 그 가운데 인격과 신격이 서로 교제를 하거나 마찰이 있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온전하고 통일된 성품을 가지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성경구절은 전혀 없다.

셋째, 예수님의 성품은 인성과 신성이 연합하여 제3의 성품이 되었다는 입장이다(유티케스). 이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반대입장으로 나타난 것이었지만 역시 잘못된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한 육체 안에 두 인격이 있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 나머지, 이 두 가지가 연합하여 새로운 제3의 본질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인식하면, 결국 예수께서는 하나님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존재가 되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보다도 더 못한 것이 되고 만다.

 

4. 그리스도의 신분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서 다룰 때, 주로 비하와 승귀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다루게 된다. 이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1) 그리스도의 비하

 

가. 성육신과 탄생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몸 속에서 10개월을 보내시고 아기로 탄생하셨다는 것부터 그리스도의 비하는 시작된다.

 

나. 수난

십자가만이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었다. 그의 전 생애가 수난의 생애였다. 성경은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처음부터 사단의 공격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피조물이며 자기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의 비웃음과 불신, 박해를 통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 범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셨다.

 

다.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은 당시의 정치적 권력에 의한 죽음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세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또한 유대인 전체의 정죄를 받으심으로 민족(사회)적 세력에 의한 죽음이기도 하였다. 그 죽음의 참혹함도 커다란 비하의 요소이겠지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죽음임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죽음이기도 하였다(신 21:23, 갈 3:13).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민족)들로부터 버림받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서도 버림을 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결국 십자가는 그리스도 비하의 중심이 되었다.

 

라. 장사되심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첫 저주가 예수께 임하였다. 이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로부터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셨다. 거기에 주께서도 가셨으므로, 그를 믿는 제자들이 무덤에 내려갈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실 것임을 보여주셨다.

 

마. 지옥강하

영문 사도신경에는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카톨릭은 이 말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구약성도들이 갇혀 있는 선조림보(Limbus Patrum)에 내려가셔서 그들을 해방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에도 사본학의 문제가 있다. 실제로 이 구절은 "주후 390년 루피누스(Rufinus)의 수정본 중 하나에 나타나기 전의 초기 문서들 가운데에는(로마나 다른 이탈리아 지역과 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던 사본들 가운데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굳이 이 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음부, 즉 무덤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승귀

 

가.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가 되셔서, 이후에 그를 믿는 성도들이 취하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부활은 예수께서 받으셨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저주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저주마저 철회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나. 승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교회와 우주에 대한 통치권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에 합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신인(神人)으로서의 그의 공적인 임직식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동안, 교회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시며,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하여 우주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다. 재림

그리스도의 승귀는 재림으로 마쳐진다. 이 재림은 가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광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삼중직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 "직분들"(offices)-선지자, 제사장, 왕-로 분류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일부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직분들에 대해 말했지만, 이 개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칼빈(John Calvin)이었다. 그 이후로 직분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 데에 공통적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론에 대한 많은 최근의 연구들은 예수의 다양한 모습의 사역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일부 현대신학자들이 그렇게 분류된 사역의 유형 중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화해시키며, 인간을 포함하는 피조물 전체를 다스리며 앞으로도 다스릴 것이라는 진리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계셨다고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러한 직분을 주장하신 적도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록 이 세 직분에 대한 논의가 임의적인 것이라고는 해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상당히 뛰어난 분류임에는 틀림이 없다.

 

1) 선지자

이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자로서의 위치를 담당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본체(형상)로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계시하셨다. 또한 그 가르침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율법을 완성하셨다. 이 사역은 단지 과거에만 국한되어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아직도 교회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고 계신다.

 

2) 제사장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논할 때에는 그의 화해역할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전가하시며, 그들이 당신의 의로움으로 의롭다함(칭의)을 얻게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지금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계속되어지고 있다.

 

3) 왕

복음서들은 예수를 왕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묘사한다. 실제로 우리의 눈에 가시적으로 그의 통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통치는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재림하실 때 그 왕권은 완성될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속죄

 

1) 속죄의 원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성경은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고 인간을 사랑하셨으나, 그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시지 않으면 안되는 정의로운 분이셨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사용하여 이들을 위해 속죄하실 것을 계획하신 것이다.

 

2)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고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음을 명심해야 한다.(중략)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일단 인류 중 얼마를 구원하기로 하셨다면 그의 아들의 죽으심 말고는 하나님께서 달리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었음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들이 여럿 있다. 그러므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인류를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정의 결과로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입장을 속죄에 대한 '결과적인 절대적 필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속죄의 본질

가. 하나님께 만족을 드렸다.

"속죄란 주로 죄인을 감화하여 회개하도록 각성시켜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계획된 무엇으로 자주 표현되어 왔으며, 오늘날도 그렇게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개념이다. 사람이 만일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고 배상을 하여 준다면 이 배상은 필연적으로 피해자에게 영향을 주기로 계획된 것이요, 가해자에게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십자가의 속죄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 대리적 속죄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 죄를 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위해서 대신 그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죄의 형벌을 받지 않는다. 이미 그 값이 치뤄진 것이다.

 

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피동적 순종을 내포하였다.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 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법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써 수난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이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나, 이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곧 예수의 속죄는 십자가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속죄에 대한 다른 견해들

위에서 다룬 속죄의 본질은 너무 당연하게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정통교리와 다른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위의 주장이 왜 중요성을 갖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 사단 배상론

이는 오리겐(185-254)으로부터 시작된 개념으로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불하신 배상은 모든 죄인들의 왕국을 다스리는 사단에게 준 것이 된다. 즉, 사단에게서 우리를 "사신" 것이다. "이 이론은 죄를 위한 값을 요구하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라고 잘못 이해함으로써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 이론은 사단을 실제보다 더 큰 능력, 즉 하나님께 그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과대평가 하였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속죄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것이다.

 

나. 도덕적 감화론

"피터 에버랄드(Peter Aberald, 1079-1142)가 처음으로 주장한 도덕적 감화론은 하나님께서 죄 값을 요구하신 적은 없고 다만 죽기까지 우리의 고난을 다 당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지 감화를 주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죄값을 담당하신 것이 되는 것이다.

 

다. 모범론

파우스투스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604)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우리가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에라도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지 본을 보여줄 뿐"이라는 주장이다. 역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그 값을 치루셨다는 것을 부인한다.

 

라. 통치론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에 의한 이론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이 깨어졌으며, 도덕적 입법자이며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율법이 깨어지면 그 죄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속죄가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단지 죄에 대한 대가 지불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실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중요성이 평가절하됨과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지 않더라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5) 속죄의 범위

속죄의 범위란 제한속죄냐, 보편속죄냐의 논의를 다룬다. 카톨릭, 루터파, 알미니안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를 믿는다. 구약에 기록된 언약의 성질에 대해서 숙고해 본다면, 보편속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출애굽기 19장 이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택하신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보증하는 피를 뿌림으로 그 언약을 인증하신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피로 그 언약을 보증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이방민족들은 모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에 포함됨으로 그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의해 체결된 언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고 그 교회에 포함되어야 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다른 민족들을 위해서 그 언약의 피가 뿌려졌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 역시 마찬가지의 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속죄라는 생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 이성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확대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에 "제한 속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