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핸드북에 있는 Anthony Lane이 정리한 부분
제4강 칼빈의 기독교 강요 - 칼빈의 인간론
1. 인간은 피조되었다.
- 가장 기본적인 원리원칙 중 하나 – 인간 본성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상태와 현재 타락한 상태는 구별된다, 다르다. 인간 본성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타락 때문에 비참한 상태에 있다.
2.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다. 영혼이 더 고귀한 부분이다.
-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다는 플라톤주의적인 얘기를 반복.
- 영혼 불멸을 변호하되, 그것이 플라톤주의에서처럼 내재적인 고유한 불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변호함.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됨. 칼빈은 이를 동의어로 여김. 히브리어의 parallelism으로 봄. 그 형상이 인간의 죄로 일그러짐. 그러나 전적9으로 상실된 것은 아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됨. 이를 통해서 형상이 무엇보다 의와 거룩함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해함.
3. 지성과 의지
- 칼빈은 영혼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봄. 지성과 의지(intellect and will). 지성의 역할은 선악을 구별하는 것. 의지의 역할은 선을 택하고 악을 배격하는 것.
- 그래서 지성이 영혼의 리더이며 지배자. 의지는 언제나 지성을 염두에 두고 지성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봄.
- 그러나 사실 의지는 지성의 지시를 항상 따르지는 않음.
- 타락 전 아담의 선택은 그의 의지의 통제 아래 있었고 그 의지는 이쪽 저쪽으로 굽어질 수 있었음. 그리고 실제로 자유롭게 선보다 악을 선택했다는 것.
- 타락한 인간의 경우, 의지는 이성의 다스림에 굴복하기 어려움.
4. 타락과 원죄
- 아담이 왜 죄를 지었는가? 그것은 아담 자신의 탓이다. 아담은 온전히 설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넘어졌다.
-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posse non peccare”).
- 선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그의 정신/지성은 건전했다. 의지는 선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담은 자유선택을 할 수 있게 지음 받았다고 주장.
- 따라서 타락/넘어짐은 아담이 자기의 자유 선택을 잘못 사용해서 발생했다.
- 사람은 순전하게 지음 받았으나 그 자신의 실수로 그가 받았던 은혜에서 넘어졌다.
- 그럼 아담이 받은 은혜는 뭐냐? - 만일 선택했었다면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주기에 충분했다.
- 그러나 최초의 아담은 (타락 이전) 항상 선 가운데서 지낼 수 있는 선물을 받지 못했었다.
- 칼빈은 넘어짐/타락에 대해 아담을 탓하지만, 때때로 그에게 은혜가 주어졌음에도 넘어짐을 불가피했음을 함축하고 있음.
- 아담이 그렇게 쉽게 넘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받지 못한 탓이다.
- 칼빈은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지 못하도록 예방할 수도 있었음을 인정함.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의무는 아니었다고 봄. 하나님의 필연적인 의무가 아니었음. 그러나 타락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고 가능성에 속했었다고 봄.
5. 무서운 작정 decretum horrible(awesome decree)
- 아담은 자신의 잘못으로 넘어지고 타락했지만, 아담이 넘어진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었다.
- 하나님이 단순히 타락을 허용했다고만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나님의 뜻하심은 필연적이며 따라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첫 사람의 타락은 그 일이 적절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일어났다.”
- 그럼 아담의 책임은 없느냐? - 칼빈은 타락은 아담의 잘못이었다고 강력히 주장.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해 놓으심에 따라서 넘어진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잘못 때문에 넘어진다.”
- 넘어짐의 원인은 아담 안에 있다. “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사람이 그러한 참혹한 일을 겪도록 창조되었지만, 여전히 그 일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람 자신으로부터 일어난다. 그 멸망의 유일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순전한 창조 상태로부터 사악하고 불순한 왜곡의 상태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 칼빈은 타락이 비록 예정과 관련이 있지만 자발적이며 아담이 그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죄를 졌다고 강조. “죄의 고유하고 순전한 원인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명백한 의지이다.” 즉 하나님이 타락을 미리 정하셨다 해도, 그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그 일은 아담이 그 자신의 잘못으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범죄하도록 하신 것이지, 아담이 자기 의지에 반해서 억지로 범죄하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 칼빈은 이 점을 지지하기 위해 섭리론에 호소. 만일 하나님이 타락을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자기의 비밀스런 계획에 따라 만물을 규율하신다.” 그의 섭리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타락을 작정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이 명백함. 기독교강요 최종판 이전까지 섭리와 예정을 함께 다룸. 그러나 1559년(최종판)에 신학적 전통을 깨고 그 두 주제를 분리시킴. 그러나 여전히 섭리와 ‘하나님이 타락을 작정하셨다’는 사상과 연결이 남아 있음.
-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은 부당하다고 일컬어짐. 그리고 칼빈은 왜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도록 작정하셔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음. 칼빈은 확고하게 대답. 계시된 것 이상으로 넘어가서 사변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아시면서 기꺼이 사람이 타락하도록 하신다. 그 이유는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6. 원죄
- 아담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원죄를 물려주었다. 원죄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퍼져 나간, 우리 본성의 유전적인 부패와 오염으로서 먼저 인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하며 그 다음으로 우리 안에서 성경이 ‘육체의 일’(works of the flesh)이라 부르는 것들을 산출시키는 것”이라 정의된다.
- 칼빈은 원죄를 원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신생아들도 하나님 앞에서 무죄하지 않다)의 의미와 원래적인 부패(original depravity)의 의미로 쓴다.
- 대체로 어거스틴을 따르나, 중요한 차이점 하나 있다 – 어거스틴에게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범죄했으며, 따라서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정욕은 이 죄에 대하여 인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처벌이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에게 있어서는, 오직 범죄한 자는 아담 홀로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죄의 결과들/영향들consequences을 지닌다. 신생아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유래된 부패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죄책을 지닌다.
7. 타락한 인류
- 어거스틴의 말을 인정 - “인간의 자연적인 은사들은 죄를 통해 오염되었으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빼앗겼다.” 자연적 은사들의 오염은 마음/지성의 건전함이 사라지고, 마음의 온전함이 사라진 것으로 이루어진다.
8. 의지의 굴레/속박
- 칼빈은 인간의 넘어짐/타락이 인간을 급격하게 나쁘게 변화시켰다고 믿음. 인간 본성 전체가 부패. 감각적인 부분만 아니라 지성과 의지가 부패하게 되었다고 봄. 단지 악인만 아니라 인간 본성에 어떤 부패가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관습의 영향이 아니다. 우리 본성이 부패했고, 그래서 그 가운데서 어떤 선을 찾는 것은 헛되다.
- 인간 본성은 너무나 타락해서 오직 악으로만/악에게로만 움직일 수 있다.
- 외적인 덕성과 존경할만한 점이 불경건한 자들 가운데서도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 마음을 정화시키지 않으시면서 마음을 유지시키신다.
- 내적인 동기가 잘못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도 없기 때문에 그같은 외적인 덕성은 하나님 앞에 공적이 전혀 되지 않는다.
- 주의: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이다.
- 이 부패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기 때문에 그럼 점에서 자연적/천성적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본성/천성의 일부는 아니다. 즉 우리의 실체의 일부는 아니고,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다.
- 이 부패 가운데만 지내면, 절망이나 하나님탓하기로 빠지게 된다.
- 그렇다고 해서 칼빈은 인간/인류를 깎아내리려고만 하는 인간혐오자로 봐선 안 됨. 현재의 부패를 깊이 생각하면서도 원래 아담 안에 있었던 원래의 고귀성을 기억해야 함. 그것이 의에 대한 열정을 자극할 것이라고 봄. 칼빈이 인간을 더러움에 밀어넣는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곳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깨닫고 그 필요를 채워주실 주님을 가리켜주고 찾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우리는 천성저으로 자화자찬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음.
- 의지의 속박이란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 “자유가 없는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에 끌리거나 악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죄악되지만 그래도 자유 선택은 있다고 주장하는 어거스틴 전통과 다른 것처럼 보임. 칼빈은 이 점에서 자신이 어거스틴을 반대하고 있다는 생각과 대항하느라 큰 수고를 함. 특히 피기우스가 이 점을 공박. 칼빈은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대답함.
- 칼빈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연과 강제 혹은 강요 사이의 구별. 죄를 짓는 필연성은 죄인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뜻. 이 필연성은 의지의 부패와 내적인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나온 필연성임. 즉 죄인들은 어떤 외부의 강압이나 충동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임. “타락/넘어짐으로 말미암아 부패한 사람은 마지못해서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의지를 발휘해서willingly 죄를 짓는다. 강제된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의 열성적인 성향 때문에 죄를 지으며,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욕이 재촉해서 죄를 짓는다. 그의 본성이 이처럼 부패해서 오직 악으로만 진행하고 악에게 나아갈 뿐이다.”
- 강제가 아닌 필연성과 의지의 고유성을 변호하기 위해서, 칼빈은 하나님과 마귀의 예를 인용.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하심.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에 대해 찬양받으실만하심. 마귀는 너무나 타락해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음.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임.
-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서 우리 자신에게 일종의 필연성을 부과할 수 있다고 봄. 그래서 이를테면 중독과 같은 경우가 생겨남. 칼빈은 이 점에 호소. 물론 태초에 아담의 자유로운 행위와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를 구분. 타락한 사람은 죄에게 노예가 됨. 그렇지만, 그 노예됨은 자발적인 것. 그래서 자발적인 예속상태에 빠져 있게 되었다는 것임.
- 아담의 타락은 자발적인 타락. 또한 죄도 우리의 악한 의지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남. 모든 죄가 자발적임. 그렇다면, 그 죄를 자발적으로 피할 수 있느냐? 그 점에 대해 칼빈은 반대함. 어떤 죄는 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다. 타락한 인류는 억지로 죄를 짓도록 강제 당하지 않는다 해도, 자발적인 예속에 굴복하게 된다. 그래서 죄는 동시에 자발적이면서 필연적이다.
- 그래서 은혜의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선도 가능하지 않다. 이 점에 계속 어거스틴에게 호소.
- 그러므로 구속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적 행위들만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이 동기가 되는 행위들을 보신다.
-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는데 있지 않고,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데 있다.
- 당위는 의무를 함축한다 (Ought implies can.) 라는 펠라기안주의의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원래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대해서는 맞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엔 다르다고 주장.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명령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셨다.
- 만일 지킬 수 없다면(순종할 힘이 우리 손에 없다면) 하나님의 명령이나 경고나 권고는 헛된 게 아니냐? 타락 이후 인간 본성 전체가 손상되고 부패했다면 인간 본성 전체를 정죄하는 게 아니냐? (피키우스)
- 칼빈 – 맞다. 인간 본성의 어느 부분도 부패에서 면제된 부분이 없다. 오직 육체만 부패에 굴복되었고, 영혼의 자유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펠라기안 사상을 배격. 인간 본성 전체가 아담의 죄 때문에 나빠졌다 (제2차 오렌지 공의회).
- 칼빈은 본성적인 감정들이 어떻게 부패했는지를 조심스럽게 설명. 부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상을 당했을 때의 슬픔, 위험에 대한 두려움 등등은 죄로부터 오지 않고 창조로부터 오지만, 그럼에도 부패하게 되었고 악하게 되었다. 원래 선했던 자연적 사랑들이 오염되고 더럽혀졌다. 영광스러운 것들에 대한 욕망도 지나침으로 얼룩져졌다.
9. 자유로운 선택?
- 타락한 사람은 자유 선택을 지닐 수 있는가? 타락이 의지를 파멸시켜 버리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예속화되었고 부패했다.
- 그러나 그 의지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가? 그 대답은 그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칼빈이 그 용어(선택의 자유)에 대해 날카롭지 못했음은 확실.
- 그의 설교에서는 항상 선택의(혹은 의지의) 자유라는 말을 교황주의자들의 오류로 묘사한다. 창세기 주석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의지의 자유의 기원을 아담이 독립하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진술.
- 그러나 강요에서는 그 입장이 더 미묘. 칼빈은 의지의 자유라는 말을 ‘악을 선택하지 않고 선을 행할 (의지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 한에서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음.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강요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의지로, 의지를 발휘해서, 악하게 행동한다고 인정함.
-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의 노예인 상황에서 그처럼 작은 것에게 대해 자유 선택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라고 생각함. 또한 그 용어가 너무 남용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마치 사람이 “자기 마음과 의지의 주인이어서 선으로든 악으로든 제 맘대로 방향을 바꿀 힘이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함.
- 그래서 그 용어의 진짜 뜻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한 가지 해결책. 그러나 인간의 성향은 거짓을 향하는 경향이 있어서, 한 단어에 잠복해 있는 그 오류가 명료화 작업을 하는 전체 언변에 있는 진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칼빈의 충고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 용어를 배제시키라는 것. 혹 그런 오류 없이 그 용어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함.
- 피기우스에 대한 답변에서, 칼빈은 거듭해서, 의지가 자유롭다는 말을 “어떤 외적 충동에 의해 강제되지도, 억지로 움직이도록 하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라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함.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이단설일 것이다.
- 그러나 피기우스 등등은 그 용어를 그 의지가 ‘그 의지의 힘 안에서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어서 자체적인 힘으로 그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음. 칼빈은 그 용어(의지의 자유)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 이런 식의 남용 때문에, 그 용어를 쓰지 말자고 얘기. 성경이 인간의 의지는 굴레에 씌워져 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이다 라고 주장함.
- 혼란을 피하기 위해 칼빈은 자기가 쓰는 용어를 주의깊게 세심하게 정의했음.
- 자유로운 의지라는 말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에 따르면, 그 의지의 힘 안에 선도, 악도 선택할 힘이 있다는 뜻이라는 것. 그리고 강압된 의지(coerced will)는 ‘자체적인 힘에 의해서나 내적인 결정 운동에 의해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기울지 않고, 외부의 힘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움직이게 된’ 의지라고 말한다.
- 그러나 그런 식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용어 상 모순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의 의지는 “그 자체로, 강제나 그 의지로는 원치 않지만 억지로 취해진 것이 아니라 끌리는 방향으로 그 자체의 방향을 택하게 된다면 그런 의지는 그 자체가 결정내린 것(self-determined, spontanea)이 된다.”
- 마지막으로, 그 의지는 그 의지의 부패 때문에 악한 소욕의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그 자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즐겁게, 어떠한 외적인 자극에 몰리지 않으면서도 오직 악을 선택하게 되도록“ 묶여 있다.
- 이 정의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선택(choice)이 존재. 이 선택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 우리는 우리의 자발적 선택으로 악을 저지르는 것임. 강제나 폭압은 의지의 본성과 불일치하는 것으로써 배제됨.
- 그러나 동시에 그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 아님. 인간 내면의 악함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려가기 때문임. 오직 악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 그 부패 때문에, 읮니는 죄의 멍에에 예속되어 있어서 필연적으로 악하게 뜻하게 되는 것임. 그러므로, 예속이 필연성을 가져옴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그 예속은 강제된 예속이 아니라 자발적인 예속임.
- 타락한 사람은 자유롭게 자기 의사로 죄를 범하며, 그의 죄는 그의 진짜 성격을 표현해 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음. 그러나 어떠한 도덕적 중립의 의미에서 선과 악 사이를 선택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는 식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님.
10. 지성(정신 Mind)의 어둠
- 넘어짐/타락은 의지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지성(정신)에도 영향을 줌. 타락한 인간 지성은 눈멀게 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 의지가 부패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순종하지도 못하는 것과 같음. 타락의 결과 단지 의지만 아니라 지성(정신)도 예속 가운데 들어갔음.
- 여기에서 칼빈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된 우리의 자연적인 은사를 과거에 있다가 상실해버린 초자연적인 은사와 구별함. 즉 지상의 것들과 천상의 것들에 대한 이해 사이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봄. 정부, 가정 생활, 모든 기계를 다루는 기술, 인문학과 같은 세속 분야에 대해서는 여전히 타락한 인간존재들이 탁월할 수 있고 그들이 이루는 업적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로 기탄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지식/앎인 신학과 참된 의로움의 성격과 하늘 왕국의 미스터리에 이르러서,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같은 대천재들이라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었다.
11. 그래서 회심이 필요
- 오직 은혜로.
- 묶여 있는 의지는 선을 향해 조금치도 전진할 수 없음.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옴. 우리의 돌마음이 쫄깃한 육질의 마음으로 변하는 새 창조가 포함됨.
- 우리 의지의 전반적인 변화와 갱신이 있음. 하나님이 단순히 연약한 의지를 도와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선을 의욕하도록 만드심.
- 사람의 마음/정신은 맹목이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조명을 받는다. 우리의 의지는 악에게 예속되어 있어서 전적으로 악으로 밀려가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고쳐주신다.
- 은혜가 앞선다/선행한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선행보다 앞선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는데, 우리 마음에 사랑과 의에 대한 소욕과 열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 마음을 의 쪽으로 굽히고 형성하고 방향을 정하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 선행하는 은혜(prevenient grace)는 사람의 의지에게 “반대되는 선택을 할 자유”를 제공하는 것 정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나중에 아르미니안주의 견해로 알려지게될 반론을 의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고 있음. 즉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지성/정신에게 빛을 제공하시는데, 사람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 빛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를 결정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운동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를 자신들의 힘으로 결정하는 식으로 그들의 의지를 움직이신다“라고 보는 그런 견해임.
-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은혜를 제공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우리에게 그 일을 남겨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인도해 주신다.
- 나중에 칼빈주의자들은 그것을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부름.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기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rape(강제추행) 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님.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 조직 신학 >>> > - 인 간 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웬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 (0) | 2020.02.22 |
---|---|
성서적 인간 이해. (0) | 2020.02.22 |
개혁주의 인간론(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한 첫째 아담) / 안토니 A. 후크마 (0) | 2020.02.22 |
성경연구 교리3 - 인간론 (0) | 2020.02.22 |
어거스틴(Augustin)의 인간론 (0) | 2020.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