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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인간론(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한 첫째 아담) / 안토니 A. 후크마

에반젤(복음) 2020. 2. 22. 14:34



원죄(죄책, 오염) / 안토니 A. 후크마

 


...신약 성경이 분명히 인간의 타락은 역사의 한 사건이요, 실제로 최초의 인간 부부가 있었으며 그들의 죄가 그후의 모든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가르치고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전통적인 원죄론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이야기와 관련해서 우리는 최근의 과학적인 연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어려움들을, 훗날 언젠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들을 전복시킬 정보가 아니라 오히려 적합한 해답이 발견되어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문제들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원죄론을 계속 설명해 나감에 따라, 바빙크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죄론은 교의학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이다."

이 교리가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양면적이다. 첫째로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우리가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즉, 하나님의 은혜를 고려치 않은) 이해할 때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가져온 거듭남과 완전갱생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죄론은 우리에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미친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준다.1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제 죄의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죄가 어떻게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전가되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본장의 뒤에 가서 다뤄질 것이다.

원죄는 죄책과 오염을 담고 있다. 죄책은 한 개인과 법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법적인 혹은 법률적인 개념으로 이 경우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죄책은 하나님의 법이 어겨졌기에, 저주를 받아 마땅한 상태요, 형벌을 받아야 할 상태인 것이다. 원죄가 죄책을 포함한다는 뜻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아담이 행한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들이 어떤 다른 사람이 행한 일에 대해서 직접적인 책임을 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죄론이 의미하는 바는 아담이 첫번째의 죄를 범했을 때 우리의 대표자로 행동했기에 우리가 아담의 죄에 관련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앞에서2 나는 비록 우리가 하나님이 타락 이전에 사람과 행위의 언약을 맺으셨다는 교리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을지라도 아담이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이었다는 진리는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 대비 속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유사점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우리가 아담과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연관 관계의 결과들이 다양하긴 하나, 여전히 아담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로서 기술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화와 복이 우리에게 임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고린도전서 15:45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도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 의미는 아담도,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로 우리를 향해 서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머리이신 것처럼, 또 다른 의미에서 아담도 우리의 머리이다.

 

아담이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였다는 사실이 로마서 5:14-18에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 14절에서 바울은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담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그가 그의 백성의 구원자로서 행동했다는(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또 하나의 표상인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의미에서가 아니다. 아담은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모범이었다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러하듯이 아담도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였다는 의미에서 즉 그가 행하는바가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그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에서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16절에서 "한 범죄를 뒤이어 심판이 저주를 가져 왔나니"(RSV)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카타크리마) 아래 놓여져 있기에,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로서 죄를 지었음이 더더욱 명확해진다. 1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RSV).3

 

이 구절에서 보건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가 모든 인간 위에 머무르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아담과의 관계로 인해 우리에게 일어난 일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우리에게 일어난 일 사이에 대비점을 그려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문자적으로는 "생명의 칭의", 디카오신 조에스) 얻게 된다. 다시 한번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행하셨다면 아담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면 아담 또한 우리의 머리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원래적 죄책(원죄에 포함된 죄책)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인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깨뜨렸기에 우리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원죄의 또다른 양상은 오염이다.

 

오염이 도덕적 개념이란 점에서 죄책과 구별되어진다. 그것은 법 앞에 놓여진 우리의 지위와 관계 되기보다는 도덕적 상태와 관련되어져 있다.

우리는 원오염(original pollution; 원죄에 관련된 오염)을 죄의 결과인 동시에 죄를 낳게되는 우리 본성의 타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4

 아담의 죄책에 우리가 관련되었음을 나타내주는 필요한 암시로서 모든 인간이 타락의 상태로 태어난다. 우리는 원오염의 두 측면 사이를 구별해야 된다:

 

 

철저한 부패(pervasive depravity)와 영적 무능력(spiritual inability).

 

내가 철저한 부패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종종 잘못 이해되어져 왔던 용어임-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에서 볼 때 이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1) 모든 인간은 그들이 될 수 있는한 가장 철저하게 타락되었다.

(2) 중생치 못한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양심을 갖지 못한다.

(3) 중생치 못한 사람들은 항상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죄에 빠져 있다.

(4) 중생치 못한 사람은 타인의 시각에 비추어 봤을 때 선하고 유익한 행동들을 수행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5

 

많은 사람들에게 "전적 타락"이 이러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나는 "철저한 부패"란 표현을 선호한다.

 

그런데 "철저한 부패"는 첫째로 원죄의 부패가 인간 본성의 모든 영역-사람의 욕망과 마음의 충동 뿐만 아니라 이성과 의지에까지-에까지 확산된다는 의미요, 둘째로 본성상 인간의 마음에는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원리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철저한 부패 교리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무엇인가? 실제로 이 교리가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기초가 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요 3:3) 말씀하신 의미는 자연적인 중생치 못한 상태의 인간들은 그대로 놔둔다면 심지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는 존재들이란 뜻이다.

신약의 모든 메시지는 본성상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성경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을 필요성이 있는 그런 죄인들에게 전해진 말씀이다.

 

그러나 특정한 몇 구절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점에 관하여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씀은 예레미야 17:9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또한 복음서의 두 구절이 여기에 적합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그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하시고 계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라"(막 7:21-23).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말씀하셨다.

 

바울 서신들에서도 수많은 구절들이 철저한 부패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로마서 7:18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비록 바울이 항상 나쁜 의미로 육신이란 말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종종 죄의 자발적인 도구를 나타내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글의 특징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다음에 인용될 구절에서 육신은 인간의 육체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죄의 지배 아래 있거나 죄의 노예가 되었을 때의 육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해서 이 육신의 개념은 내가 지금껏 철저한 부패라고 불러왔던 그것을 기술하는 성경적인 표현 방법이다.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은 로마서 8:7 상반절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 구절은 철저한 부패에 대한 두 가지의 정의 중 두번째, 즉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를 적대시한다는 정의를 확실히 해주는 것이다.

 

철저한 부패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또다른 구절은 에베소서 4:17-19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디도서 1:15-16의 바울의 말도 역시 그러하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러나 또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제는 신자인 자들도 한때는 이와 같은 이방인처럼 같은 타락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노의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심지어 신자들도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본질상 너무도 악하고 너무도 부패했기에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위에서 인용된 구절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신자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성상 중생치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오염의 두번째 양상은 영적 무능력이며 이것은 전통적으로 전적 무능력으로 불려졌다. 모든 사람

 

이 이 영적 무능력 상태로 태어난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아담의 죄의 결과이다.

이 무능력은 그러나 중생치 못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어떤 면에서든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7 우리가 뒤에서 보겠지만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인해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죄의 발전은 제지되어 왔다. 중생치 못한 사람도 여전히 여러 부류의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덕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들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 때문에 행해진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인간의 영적 무능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두 가지를 뜻하고 있다.
첫째로 중생치 못한 사람은 그의 행함이나 말이나 생각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고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의 법을 완수할 수 없다.

둘째로 그는 성령님의 특별한 사역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의 삶의 근본적 방향을 죄된 자기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바꿀 수 없다.

영적 무능력은 여기에서는 의지의 영적불능에 강조를 둔 것으로 사실상 "철저한 부패 교리"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두 개념은 의미상 중복된다.

 

영적 무능력 교리의 성경적 증거는 무엇인가?

 

이 교리 역시 신약의 모든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중생 영적 갱신, 그리고 성화에 대한 신약전서의 주장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특정한 몇몇 귀절들을 살펴보자.

우선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서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 5)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그의 내적으로 근본적인 변화, 즉 여기서 말하는 거듭나는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는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요한복음 6:44에서 예수님은 그와 변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인간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그리스도께로 향할 수 없음을 밝히 설명하시며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또한 예수님은 그를 떠나서는 영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인간 무능력을 다시 피력하고 계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바울 서신 가운데서 우리는 영적 무능력 교리에 대한 좀 더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로마서 7:18-19에서 바울은 인간의 본질상 무능력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면서 설령 그들이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길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8:7-8은 이 인간의 영적 무능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바울 서신은 다른 곳에서도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영적 거듭남이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자연인8이 하나님의 영이 가르치시는 것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사도들과 동료 크리스챤들의 선교활동에 대해 쓴 구절들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갖는 무능력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크리스챤 일꾼으로서 완수할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4-5).

아마 우리의 영적 무능력을 적절하게 표현하기엔 우리는 본질적으로 영이 죽어 있다라는 표현보다 알맞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에베소서 2:4-5에서 바울이 신자의 옛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지금까지 우리가 본바와 같이 성경은 원죄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신자된 우리도 이 가르침을 드러내기에 자주 실패한다. 원죄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원죄의 본질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죄의 실상이 단순한 범죄행위보다도 훨씬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악성의 근본되는 뿌리가 우리 안에 있어서 인간의 참된 본성을 부패시키고 죄의 행위를 솟구치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치 극약처럼 죄는 인간에게 침입하여 중심을 병들게 하였으며 그런 연유에서 인간은 중생의 온전한 경험이 필요하며 이 경험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참된 인성으로의 회복이 실현되는 것이다.9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에서 발췌(248-259p)

  1. 42) 비록 낙원에서 아담 뿐만 아니라 하와도 범죄하였건만 원죄는 특별히 아담의 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인류의 첫 머리였기 때문이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죄를 범한 것이다. 후에 가서 아담의 우두머리됨(headship)의 문제에 관해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본문으로]
  2. 43) 본서의 p. 209를 보라. [본문으로]
  3. 44)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처럼 한 범죄르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이르는...' ASV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심판이 왔다'는 문구를 덧붙이고 있다: '그처럼 한 범죄를 통해서 저주를 이르는 심판이 모든 자들에게 왔다.' [본문으로]
  4. 45) 어거스틴은 원죄에 포함되는 오염을 죄의 딸이며 죄의 어머니라고 불렀다(On Marriage and Concupisence, I, 27. [본문으로]
  5. 46) 이 땅에는 일반은총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중생치 못한 사람들에게 있는 죄를 어느 정도까지 억제하신다(10장을 보라). [본문으로]
  6. 47) 신자가 여전히 '전적 부패'라 불리워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나의 책 The Christian Looks at Himself, rev. ed., pp. 47-48을 보라. [본문으로]
  7. 48)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이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에게 그 본래적 의미와는 달리, 중생치 못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선도 행할 수없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나는 '영적 무능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8. 49) '자연인'이란 용어는 중생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으로]
  9. 50) 'Another Dogma Falls,' Christianity Today 13, no. 17: 13. 이러한 필요성은 다음의 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Thomas M. Gregory, 'The Presbyterian Doctrine of Total Depravity," in Soli Deo Gloria, A Festschrift for John H. Gerstner, R. C. Sproul 편집, pp. 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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