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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약에 나타난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에반젤(복음) 2020. 2. 21. 13:56



 

신약에 나타난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김 문 영


      1. 기독론

 마태복음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호칭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 시에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의 헬라식 명칭으로 “주가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이름 “메시아”(Messiah)의 헬라식 표현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다. 그 외 예수님의 호칭으로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인자, 주 등이 있는 가운데 “인자”(Son of Man)는 “하나님의 아들”에 필적할만한 호칭으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 호칭을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 가운데 “주”(Lord)는 그의 신성에 관한 면을 명확히 보여준다. 복음서의 영어 번역은 이러한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마태가 “주”라는 호칭을 신적인 특권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자로 제시하고 있는 본문들에서 잘 드러난다(마 7:22-23; 25:31-46). “주”는 예수님의 신적 특권에 대한 경험과 관련된 호칭으로서 그의 신성을 제시한다. 그밖에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선생이었으며 “종”(servant)이라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결코 “종”으로 불리신 적이 없지만 이사야 42:1-4(“내가 택한 나의 종”)은 그의 치유 사역과 관련하여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누가복음에서 “구주”라는 호칭은 약속된 구원, 승귀하심, 죄사함 및 성령을 부어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적 계획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라는 호칭은 통치자로서 예수님의 궁극적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누가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호칭이며 “이 땅에서부터”의 기독론을 형성하는 기본적 요소이다.

 사도행전에서 많은 일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일어난다. 세례, 구원, 치유, 화평, 성령 세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 몇 가지 일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된다. 부활, 고난, 인류를 위해 예정하심.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설교 주제이다. 그의 신분과 사역으로 인해 그는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행 24:24).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대부분 가르침과 기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소망에 관한 말씀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적 삶에 대한 촉구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가르침과 함께 그의 십자가에서의 사역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예수님의 유일한 사역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누가는 비록 바울과 달리 이 사역에 관해 자세하게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역 역시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는 예수님이 “누구보다 의로운 자로서 고난당하신 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23장에 인용된 시편 내용에 의해 암시된다. 본문에는 구약성경의 고난 받는 성자에 대한 애가가 예수님께 적용되었다. 그는 이러한 고난의 전형에 부합되며 그것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행전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다. 더구나 사도행전의 많은 설교들은 승천의 중요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언급하면서 부활의 의미에 대해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며, 따라서 성령을 부어주시며 권능으로 다스리시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사역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하늘에 계신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시면 땅을 다스리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미래적 역할은 주로 장차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때 심판자로서의 사역과 관련하여 제시된다.

 요한복음의 시작부터 예수님은 여러 차례의 표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1:34)과 메시아(41)로 제시되며 성육신 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생명과 빛을 주신다.

 제자들에 대한 고별 강화(13:31-17:26)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계시한다. 아들로서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성육신 이전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심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이심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본 강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함과 그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거듭 밝히신다. 예수님은 성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요한서신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이슈는 “생명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에 대한 강조와 함께 전면에 부상한다. 요한일서에는 아들에 관한 언급이 22번 나온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회복하신 승귀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날 사단의 권세에 대한 그의 승리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요한복음 10:30과 17:22에 언급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언급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며 요한계시록 1:4, 8; 4:8; 11:17; 16:5에 언급된 ? ?ν(“him who is")이라는 표현 역시 출애굽기 3:14을 암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진실하고 실제적으로 묘사하며 요한서신 역시 이것을 확인하며, 보다 확대한다. 요한일서의 첫 절은 그들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 듣고 보고 만지기까지 하였다고 분명히 언급한다(요일 1:1-4).

 사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만이 메시아(Messias)라는 히브리어 및 아람어 형태의 단어를 번역하여 제시하며, 동시에 그리스도(Χριστ??)라는 헬라어 단어도 사용한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본서에 17번 나오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어로는 두 번 나온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은 요한복음에서 거듭 반복된다.

 요한서신에서도 메시아라는 용어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적 표현은 요한일서 1:3; 2:1; 3:23; 4:2; 5:6, 20 및 요한이서 7절 등에서 발견된다.

 요한계시록에는 메시아라는 용어에 대한 언급이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계 1:1-2, 5). 이들은 모두 예수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있으며 요한서신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적 형태와 유사한 호칭으로 사용된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 가운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묘사한 내용과 가장 유사한 호칭이 “이스라엘의 왕”(King of Israel)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49 및 12:13에 언급된다. 1:49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외쳤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여러 번 제시된다.

 로고스는 그리스의 철학 용어로서 “세상의 영혼”(world-soul), 즉 우주의 영혼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우주의 보편적, 합리적 원리이며 창조적 동력이다. 한편으로 모든 만물은 그것으로부터 온다.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이러한 개념은 적어도 주전 6세기의 헬라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로고스가 “항상 존재하며 모든 만물은 이 로고스로 말미암았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요한은 이미 헬라 세계에서 널리 인식된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로고스라는 호칭은 요한일서 1:1에도 유사한 의미로 제시된다. 특히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로고스)으로 불린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문(요 1:4, 9)에서처럼 영생의 수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로고스라는 단어가 한번 언급되며 요한복음의 서문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한계시록 19:13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로 불린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 적용된 호칭 가운데 하나는 “어린양”이다. 이 호칭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건 및 공생애의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이미지는 구약성경 본문 두 곳과 연결된다. 하나는 이사야 53:7에 언급된 “고난의 종”(Suffering Servant)이며 또 하나의 구약성경적 암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다. 요한복음에는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월절의 상징이 분명히 제시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양”(the Lamb)으로 불리신 것은 모두 27번이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모두 ?ρν?ον(arnion)이라는 헬라어이다. 1세기 당시의 다른 유대 묵시 문학에는 세상의 악을 멸하실 승리의 양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구약 성경적 배경이다. 이사야 53:7에 나타난 고난의 종과 출애굽기 12:46 및 다른 여러 본문에 나타난 유월절 양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양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동일한 배경을 형성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및 승귀하심 전체와 관련된다.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수께서 성육신을 통한 낮아지심, 고난 및 죽으심에 이어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감이 포함된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것은 대부분 구원(구원론)과 교회의 본질(교회론) 및 미래적 사건(종말론)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theos)을 성부 하나님에 국한하였으나 로마서 9:5의 영광송에 언급된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라는 호칭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성경에서 주(kyrios)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호칭은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바울은 단 한번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이라고 언급하였다(고전 15:45). 그러나 그는 사실 그리스도와 아담을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번 대조하였다.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할 때 “마지막”이라는 형용사는 두 사람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아담에 대해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자로 보았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와 관련된 모든 자에게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가져왔다.

 바울의 옥중서신(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중보자요 능력주시는 자이며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은 25번 등장하며 이들 서신은 메시아로서 그의 역할을 강조한 승귀적 기독론을 제시한다. 그는 주(kyrios)이시다. 이 호칭은 승귀의 개념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 용어를 특별히 사용하였다. “주”는 신자들의 기도의 대상이시며 교회는 그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다가오는 재림과 심판 역시 이 호칭과 연결된다.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πιΦανε?α?)”이란 용어는 그리스도

의 성육신과 재림 그리고 개인적 구원의 시기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외에도 바울의 목회서신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의로운 고난의 모델,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등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면서 선재하신 영원한 아들로 제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신 지상의 아들로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승귀하신 아들로도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이며 신학적 핵심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주제의 배경은 구약성경 시편 110:1, 4로서 1절은 5번, 4절은 10번이나 인용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값비싼 순종의 길을 걸으셔서 인간의 연약을 충분히 체휼하심으로 대제사장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사장 사역은 히브리서 서두에 언급한 대로(1:3)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제사장 반열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칭하심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으로서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옛 제사장과는 대조적으로 이 새로운 반차는 영원성을 가지며, 예수님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 근거한 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무궁한 제사장으로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백성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6:25).

 베드로와 유다의 서신에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베드로의 기독론의 핵심을 이룬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하나님은 이러한 지상의 사건들을 통해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며 미쁘신 조물주께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성육신 교리는 베드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제시에 함축되어있다.

다. 신약성경신학에서 기독론(그리스도)은 신약성경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복음서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사도들의

서신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장차 도래(渡來)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약속하고 있다.

  ***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로고스”(λ?γο?)는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로고스=말씀’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 용어로서 로고스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인의 우주관과 철학을 이해해야 될지도 모른다. 로고스의 헬라적 배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사도 요한의 기록 의도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본다. 로고스는 우주적 존재(우주의 영혼)이며 힘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월절의 상징이 분명히 제시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 어린 양”은 레위기서에 나타난 속죄 제물로서의 어린 양의 이미지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요한도 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고 세례(침례)를 받았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세례 집례 때) 요한은 앞서 많은 사람들이 자백한 죄를 예수께(어린양 되신) 전가(轉嫁)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돌아와 요한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 어린 양”으로 불리었다.(아사셀 양) 세례 요한은 산 제물인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그 머리에 안수하여 백성들의 죄를 전가시킨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구원론

 누가-행전에는 복음이란 단어가 신약성경 어느 곳보다 동사 형태(euangelizo[복음을 전하다])로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이 단어는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 예수님의 메시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파하였다(행5:42). 다른 구절들 역시 사도들이 전한 설교의 초점이 예수님임을 보여준다.

 누가-행전의 가르침은 단순한 복음 제시 이상의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반면에 누가-행전의 전도는 구원의 메시지에 한정된 경향이 있다. 누가-행전이 진행되면서 누가의 복음 메시지는 점차 예수님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기 때문에 언제나 동일한 소망을 제시하나 이러한 약속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보다 분명하게 제시된다.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 누가는 예수님이 제공하신 것은 모든 백성에게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역은 누가복음의 서두에서부터 메시아와 그의 통치에 관한 구약성경의 약속으로 제시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비천한 자들과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주어진다.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진정한 권위가 있었으며 그의 사역과 메시지는 기적을 통해 입증되었다. 예수님의 인격과 메시지는 그와 그의 제자들이 수행한 기적을 통해 제시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묘사하는 의미였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택하신 종들을 통해 나타났다. 백성들을 위협하는 세력들은 예수님을 통해 패배했다. 그는 구원자이시다. 즉 육체적 구원은 영적 구원을 나타낸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 그들이 복음을 통해 제시한 소망에 관한 메시지는 참되다.

 구원의 주관적 국면에 있어서 누가의 핵심적 개념은 회개이다. 회개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본문은 누가복음 5:30-32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병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핵심적 용어는 ‘돌아감’(epistrophe)이다. 이 단어가 명사로는 단 한번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5:3에서 이 단어는 이방인의 개종적 행위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첫 장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누가-행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다른 두 가지 용어는 믿음(pistis)과 ‘믿다’(pisteuo)이다. 누가는 이 두 단어를 믿음의 행위와 구원을 위한 믿음 사이에서 다양하게 사용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 용어는 자신이 스스로 제공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 외에도 구원을 통해 오는 여러 은사들로서 죄사함, 생명, 평화, 은혜, 선물 등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의 사역의 핵심적 부분으로 보았으며 십자가에서의 희생적 죽음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핵심적 내용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및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고 미리 예정 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음’을 거듭남과 연결한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 출생이 믿음의 첫 단계임을 보여주며 요한일서에도 이와 동일한 새로운 영적 출생의 개념이 발견된다. 예수님을 따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이다(요일 2:29).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구절은 종종 죄가 없는 완전함으로 오해되기도 하나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요한일서 어디에서나 참 신자도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영생’을 소유하는 것과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다시 살리심을 동일한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요한에게 영생은 올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세로 이어지며 신자들에게 경험된다.

 요한 서신에 제시된 영생의 개념은 앞에서 다룬 요한복음의 영생 개념과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한일서에 제시된 영생의 원천이자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역할은 단순한 ‘말씀’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사도 요한은 ‘이기는 자’(overcomer)에게 주어질 내세의 축복으로서 영생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의 선교서신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개인적 및 민족적 차원에서 모두 성취되었다고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나 인간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선교서신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속죄, 화목, 구속의 관점을 가지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다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 본 것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보여준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장차 그리스도인이 경험할 하나의 전형으로 보았다(고전 15:20).

 바울은 구원을 성취해 가시는 대행자가 성령이며 성령의 내주하심은 구원의 전 과정이 성취되도록 보증하신다고 말한다.

 구원의 첫 번째 국면으로서 ‘칭의’는 무죄선언을 통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성화’는 하나님께 속하여 그의 뜻대로 사는 성별된 자의 경험을 묘사한다. 영화는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러한 소망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불멸의 영생체로 바뀐 사실이 포함된다.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셔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죄의 값을 치렀으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속함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궁극적 영생에 대한 약속과 함께 하나님과의 화목 된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것은 중요하다. 그는 본서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핵심적 사역으로 설명하였으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의 영적 구원을 제공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역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으로서 개인의 삶에 적용되는 것은 영적 출생인 ‘거듭남’과 성품과 깨달음에 있어서 보다 성숙되고 발전된 과정인 ‘성장’인 것이다. 이어서 미래적 절정은 궁극적 구원으로서 거듭남과 성장의 최종적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메시지로 복음을 주셨는데 이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서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회개하라고 촉구하였다.

 구원 받을 신자에게는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이 필요하며 믿음에는 믿음의 행위로서 회개에 따른 도덕적인 정결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요한복음에 첫 번으로 언급된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인치심이다. 신자가 지식적인 깨달음으로 획득되는 것은 아니기에 영적 출생이라고 한 것이다.

 요한일서 3:9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는 난해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영문성경인 N.I.V와 T.E.V는 sin 앞에 continue to를 넣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continue(계속하다)를 삽입하면 3:9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가 된다. 그런데 K.J.V에는 continue가 없이 그대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해서(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성령께서 신자를 도와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기 때문이며 영적인 성장은 성화를 이루고 최종적으로는 영화에 이르기 때문이다.





      3. 성령론

 마태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은 전체에서 열두 번밖에 언급되지 않으며 그 가운데 1/3이 12장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복음서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대로, 대부분의 언급은 성령의 사역을 예수님과 연계한다. 성령과 그의 사역의 관계에 대해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유일한 본문에서 그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성령의 힘을 입었다고 말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면서, 백성들에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라고 하였다. 불과 성령을 연계한 것은 죄를 씻고 정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의 첫 번째 선교 사역이 이스라엘 지역에만 국한되었으나(10:5), 성령의 도움에 대한 확신은 장차 이방 법정에서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그리고 선교 사역 및 사실상 죄사함의 경험에 대한 성령의 핵심적 역할은 성령 훼방과 관련된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마12:31-32)

 마태복음 22:43에는 성경의 영감과 성령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110:1의 다윗의 언급은 “성령에 감동하여”한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8:19)라는 명령은 성령의 위격이 성부 하나님 및 성자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례는 제자들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 증거이다.

 성령은 임재의 보이지 않는 주체로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함께 계시지 않지만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신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를 위한 사역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하신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능력 또는 대행자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성경의 영감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삶에서도 주도적으로 행하신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임하시고, 그를 시험하셨으며, 그의 사역에 능력으로 함께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성령께서 그의 위에 머무셨다고 두 번 언급한다. 이 표현은 그 속에 영원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과 예수님의 관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본문에 사용된  ?μεινεν (머물다)라는 헬라어 구절은 ‘내적이며 영속적인 인격적 연합’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7:38-39에는 성령에 대한 약속이 언급된다. 예수께서 38절에서 생수의 강에 대해 언급하신 후 복음서 기자는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39절)이라는 주석적 언급을 덧붙인다. 물과 성령의 밀접한 관계는 3:5의 언급과도 유사하다. 요한복음 7:39 역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까지 성령이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언급한다. 이것은 복음서 기자의 부활 후의 관점을 보여주는 회고적 주석이다. 7:38절의 ‘생수의 강’은 성령을 언급한다.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여 계속해서 계명을 지킬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에게 ‘다른 보혜사’(?λλον παρ?κλητον)를 보내 주실 것을 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보혜사가 이미 제자들과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보혜사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또 하나의 보혜사’란 그가 떠나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라는 호칭에 덧붙여 성령은 예수님의 고별 강화(14-17장)에서 직접적으로 한 번 언급되며 (요 14:26), ‘진리의 성령’(Spirit of truth)은 세 번 나온다. 고별강화에 언급된 성령은 증거 또는 증인의 영으로 묘사된다. 그의 주된 역할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통해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도 포함된다(16:14).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20:22이다. 본문은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고별강화를 통해 약속하신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말씀(16:7)의 성취, 즉 오순절에 관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예수님의 행동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로 성령을 주시는 장면이라기보다 성령을 부으심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요한일서 4:1-6에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날카로운 대조가 언급되며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4:6)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는 것은 성령이 계심을 시험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요한계시록의 성령은 예언의 영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6:13에 제시된다. 본문의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는 표현은 신자들의 ‘현재적 경험으로서 영생’에 관한 요한복음의 주장을 보충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언급이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각 편지의 끝에는 수신자에 대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호소가 제시된다. 이것은 성령의 계시적 역할에 대한 요한의 강조와 부합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옛 언약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이 모세 율법을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준행하는데 실패했다(렘 31:32). 새 언약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도 바라던 것으로서,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성령에 의해 수행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옛 언약과 모세 율법에 관한 조항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으로 대치되었다고 결론 내렸다(롬 10:4; 갈 3:25).

 바울 서신은 교회들에 대한 명령과 호소로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과 구원의 서정 전체를 연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바울은 프뉴마(πνε?μα)라는 단어를 성령 하나님(Holy Spirit)의 개념과 다른, 세상에서 활동하는 초자연적 존재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성령께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시는 은사와 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영들 분별함’(고전 12:10)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고후 2장에서 바울은 사단에 대해 ‘이 세상 신(spirit)'으로 언급한다.

 디모데전서 4:1은 성령의 계시적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성령은 후일에 교회가 배도로 인해 고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이 되었다. 바울은 성령이 예언적 메시지의 원천임을 말한다. 디모데후서 1:7은 성령의 역할에 대해 성령이 없는 자와 대조적으로 사역을 수행할 능력을 주시는 자로서 언급한다. 성령은 복음 메시지의 보존에도 필수적이다(딤후 1:14). 디모데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른 말”을 “지켜야”했다(딤후1:13). 그들에게 “주신”(딤후 1:7) 성령은 그들이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거하시며”(?νοικο?ντο?) 하나님의 “부탁한 아름다운 것”(καλ?ν παραθ?κην)을 지키게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철저하게 성령님과 함께 사역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에 한 분이며 셋 위는 일체인 가운데, 성령은 위로자(Comforter)이며, 조력자(helper), 중재자(intercessor), 변호인(pleader), 또는 증인(character wit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보호자(defender)는 이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살아야 된다.

 바울의 서신에서 성령은 종말론적인 성령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성령은 오는 세대에서 그 나라(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할 것이다.






      4. 종말론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세가 오기까지 남은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교훈과 경고를 주셨다(감람산 강화). 24: 4-14에 기록된 예수님의 충고와 교훈은 어느 정도는 당시 제자들과 후세의 독자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의 ‘산고’(birth pains)의 시기에 나타나는, 고통스럽고 혼란한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볼 수도 있다. 작금의 여러 신학자들은, 마태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에 관해 기록한 것이라면 마태는 이미 알려진 잔학행위에도 불구하고 당시 환란의 규모를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마태의 기록에서 다소 은유적 과장은 인정하더라도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가 마태가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오히려 미래적 파괴를 미리 내다본 내용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마지막에 인자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26-31절은 모든 인류를 구분하고 택자를 불러 모을 우주적 영역의 사건에 관해 다룬다. 이러한 구별의 실체나 그것이 함축하는 심판에 관한 주제는 본 강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양하게 제시된다.

 마가의 기록에 나타난 천국(하나님 나라) 메시지는 결과적으로 종말론적인 메시지라 할 수 있다. 10장에 기록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서 그의 좌우편에 앉는 특권을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영광스러운 나타남은 미래적 영역에 속한다. 지상의 예수님이 겪으신 비천은 영광의 왕이라는 승귀로 이어질 것이다.

 누가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약속과 성취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약속 시대의 한 부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함께 “성취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 성취의 시대는 전환기(transition)와 ’이미‘(교회시대)와 ’아직‘(그리스도의 재림)의 시대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종말론적 응답이 ‘속히’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제시하는 임박성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인자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순간적으로 임한다(17:24, 행 7:55-56).

 누가는 ‘개인적 종말’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사람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였다(23:42-43). 본문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사후 세계에 들어선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관복음이 현재와 미래의 수평적 영역을 둘러싼 구조라면 요한의 종말론은 하늘과 땅의 수직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도 분명 수평적 요소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현재적 실재로서 제시되지만 현세보다 내세에 초점을 맞춘 경우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미래적 재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재림보다 보혜사가 오심에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요한복음은 신자의 현재적 영적 중생과 함께 미래적 육체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며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미래적 심판을 면케 하며 영생을 받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반응은 미래적 영생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순간부터 신자가 현세에서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한 서신에도 그리스도의 미래적 재림(parousia)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믿는 신자가 예수님에 대한 사도적 교훈에 충실히 남아 있으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서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적 재림은 현재의 도덕적 정결에 대한 모티브(motive)로 제시된다.

 요한계시록의 관점은 미래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 및 그가 세우실 지상 왕국과 재림 직전에 있을 큰 환란(Great Tribulation)에 초점을 맞추며 천년왕국의 기간을 천년으로 구체화하며, 그것에 이어지는 영원한 상태와 구분한다(21:1-22:5). 요한계시록 신학의 핵심은 인과 나팔 및 대접 재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심판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계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인류에 대한 그의 목적 성취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예언을 완성한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적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통치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의 선교서신에는 개인적 종말론이 잘 나타나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구원의 절정은 영화이다. 영화에는 죄의 현현과 사망의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까지 여러 가지 국면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첫 국면은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시작되는 신자 개인의 영화는 신자가 변화된 몸으로 부활할 때 완성되며, 신자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의 전형을 따른다(고전 15:20). 바울은 부활한 신자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고 분명히 말한다(20, 45-49).

 바울의 선교서신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도 나타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은 각자의 생애에서 행한 선과 악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결정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주적으로 알려지며 그의 심판이 포괄적으로 적용될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와 유다 서신의 종말론은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응 때문이다.

 구속사를 돌이켜볼 때 현재는 예언의 결정적 성취의 시대이다. 말세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속을 위해 그를 세우시고 이 말세에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나타나셨다(벧전 1:20). 신자들은 현재적 소유로서 구원을 누리나, 동시에 미래적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기다린다. 따라서 아직 절정이 남아 있으며, 그 시기는 매우 임박하다. 한편 불신자들에게도 심판이 기다리며, 이 심판은 결코 취소되거나 피해갈 수 없으며 이 땅과 모든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내리실 심판과 멸망을 강조하였다.

 베드로와 유다 서신의 종말론적 가르침에는 도덕적 실제적 중요성이 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종말론적 절정을 기대하며 간절히 사모하라고 촉구한다. 유다도 죄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는 본문에서 위로를 제시하며 그의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을 타락하지 않게 보호하시고,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영광 가운데 서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24-25절).

 마태의 기록에 나타난 감람산 강화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경고와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임함으로 종말은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취임 설교에서 종말을 맞이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Μετανοε?τε, ?γγικεν γ?ρ ? βασιλε?α τ?ν ο?ραν?ν.).” 감람산 강화의 내용은 주후 70년에 첫 번째로 실현되었으며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이 땅에 다시 한 번 실현될 것이다.

 누가의 종말론에는 이미와 아직(already not yet)의 종말론적 긴장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요한의 기록에는 그리스도의 재림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심에 대해 강조한 듯한 가운데 보혜사는 종말론적인 성령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요한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적 재림은 현재의 도덕적 정결에 대한 모티브(motive-동기)로 제시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에서도 제기된 사항으로 신자의 종말론적 소망의 성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이는 베드로와 유다의 서신에서도 언급되는 것으로서,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재림 후에 종말론적 소망인 천국(하나님 나라)을 소유하려면 모세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강조했던 도덕적인 정결한 삶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적인 순종이 아닌 보혜사 성령 안에서 역동적이며 유기적 협력 가운데서 아름다운 열매로서의 결실이 되어야 한다.

 

 


   참고서적

 ROY B. ZUCK, BIBLICAL OF NEW TESTAMENT, 류근상 역, 크리스찬출판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