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의 영성연구
1. 서론 : 본회퍼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는 신학과 신앙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학문(學問)과 경건(敬虔)"의 훈련을 받는 이 모든 여정이 카톨릭의 수도원처럼 서원의 과정이고, 세속을 준비하는 훈련의 도장(道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행과 내적인 연단이 요청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도자(求道者)로서 이런 훈련과 체험을 통해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첨단(尖端)의 자리에 홀로 그리고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Before God)
이런 심정을 마음에 담고, 잠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어, 우리의 목적지와 같은 방향을 미리 걸어가셨던 선배들의 생애와 삶을 되돌아 보려 한다. 무엇보다 필자에게 연구과제로 주어졌던 본회퍼 목사의 생애와 삶,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을 조명하여 구도자들의 거울로 삼으려 한다. -김남중-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우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볼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자유에로의 도정 가운데 있는 훈련'이라고 하는 글에 나타나 있는 대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부단한 훈련과 삶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告白)은 동시에 시공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육신의 욕망이 그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노예적 삶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몸과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조국독일의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어용 기독교회의 편에 서지 않고,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설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비밀훈련과 내적인 고행에 기인한 결과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는 조국을 버렸지만, 새로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오늘의 현재에 심어 놓았다. 본회퍼라는 한 개인의 삶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든든하게 이어나가는 굳건한 가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그 자리에 세웠던 생활신앙으로서의 비밀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비밀훈련'이 필자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 그의 삶과 생애 그리고 영성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동일한 비중의 무게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오늘 필자가 본회퍼 연구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회퍼의 영성이다. 영성은 생애(生涯) 및 그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분리될 수 없기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와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통해 전개되었던 그의 고백, 논문, 저술들의 내용과 특징을 중심으로 그가 그 시대에 펼쳐 보였던 사상과 얼, 정신을 나름대로 그려 보고자 한다. 아마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요소들이 그의 영성과 깊이 닿아있으리라.
특히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인데, 첫째,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과의 관련성 속에 놓여있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위치이다. 그것은 곧 본회퍼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 새 시대 영성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라는 화두는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영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이상의 두 테마를 가지고 필자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정리하려 한다. 이 연구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바른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많은 도전과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3. 본회퍼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그의 활동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본회퍼가 8살 때)에서 참패한 독일의 상황은 절망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경제는 도탄에 빠져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세계 제일의 우수한 백성임을 자랑하던 독일 민족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패전국으로서 짊어져야 할 채무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국론은 사분 오열되어 국론통일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33년, 히틀러는 메시야 처럼 희망을 약속하며 권력을 손에 잡았다. 독일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게 그는 집권 2년만에 600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줌으로써 땅에 떨어진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들의 정서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급기야 제 2차 세계대전(1939-45)을 일으켰다. 그 결과 680만 명의 독일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가스실에서 혹은 총살과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허황된 망상은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이웃 나라들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2,000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했고, 전체 사망자수는 부상자를 제외하고 5,700만 명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교회는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정당의 이념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추앙하여 국가기독교라는 어용종교로 이용당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겼다. 루드비히 뮐러(Ludwig m lle) 감독을 주축으로 한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는 굴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 "독일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전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이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되어 세계 평화를 위한 본래적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독일교회 대다수가 히틀러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교회 내에 히틀러가 지향하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악(惡)의 요소를 감지하고 꿰뚫어 보고 있는 일군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을 탈퇴하며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을 일으켜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 Erkl rung)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히틀러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독일 그리스도교 연맹의 주장에 쐐기를 박고 그들이 주(主)로 고백하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다. 이 선언에 참가한 주역들에게는 곧 고난이 다가왔다. 이 신학 선언을 기초한 칼 바르트(K. Barth)교수는 본 대학의 교수직을 떠나야 했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세계인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몸소 보여주었던 본회퍼 목사의 삶과 신앙은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공감과 반향을 일으켜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동안 신앙을 지키고 유린된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와중에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본회퍼를 유니온 신학대학 교환 교수로 초청하였다. 그를 초청한 것은 본회퍼 목사의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를 고백교회 운동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빼내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1939년 그의 초청에 응하여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미국 각지를 도는 순회강연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를 창출해내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미국행이 잘못된 결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과 그리스도인들이 현 독재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때에, 그들의 고난에 참여함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년 7월에 귀국 길에 오른다. 당시의 심경을 나타낸 글은 그가 내린 결단의 참된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치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 조국의 패망을 위해 기도하느냐, 아니면 독일의 전쟁승리를 위해 기도하므로 그리스도교 문명을 파괴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가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쟁의 합리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는 순교자적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귀국 후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명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 결국에는 히틀러 총통의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암살음모는 교활한 비밀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체포된 후 1943년 4월 5일, 프로이센부르그의 포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삶이 처형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될 마지막 행동으로서의 순교자적인 결단(참여, 책임, 주체적인 신앙)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넘지 못할 경계선(기다림의 신앙)을 넘은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한국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제거하는 길만이 그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갔던 길을 따라 가는 제자직의 길이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참으로 시대의 상황적 요청에 성실히 몸으로 응답하였고, 책임적으로 행동했던 그리스도를 닮은 참인간이었다. 그는 참으로 참여의 신앙과 기다림의 신앙을 결코 양분하지 않고 조화롭게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필자는 그것을 확신한다.
4. 본회퍼가 쓴 저서의 일관된 사상. 얼. 영성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행한 강연, 설교, 편지, 일기, 메모, 옥중서간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글(각주 참고)들을 탐독하면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으며, 그의 영성 신학을 그려내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볼 때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이래로 계시는 이성의 영역으로 내재화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영역에로 세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낭만주의에서는 무한을 유한 안에, 초월을 세상 내에, 영원을 시간 안에로 합일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그리스도 왕국과 세상 나라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없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무신론과 신 죽음의 신학으로 이어져 갔다.
한편,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한계에 봉착하면서, 20세기초에는 계시와 이성의 위기적 관계를 말하면서,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철학을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임을 철저히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이 둘을 배타적 관계로 보면서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 관계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세상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다. 그리스도론은 본회퍼 신학에서 기본사상이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대리사상, 그리스도와 제자직, 그리스도와 현실, 그리스도와 세계,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 등이다. 이럴 때 그의 "영성의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 본회퍼의 영성신학
필자는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첫째, 성령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영성 둘째, 성육신적 영성 셋째, 순례자의 영성으로서 궁극적 희망의 영성 넷째, 말씀의 영성이며 기도의 영성 다섯째,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가는 과정적 영성, 몸의 영성 여섯째, 공동체적 영성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영성이라 한다면, 본회퍼의 삶과 고백 저술 등에 고여있는 그의 얼, 정신, 사상은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 바로 그 자체이며, 본회퍼는 직접 그 영성의 전통을 몸으로 살고 간 영성의 대가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라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에는 지금까지 필자가 점검해 왔던 본회퍼의 삶과 그가 체험한 믿음의 명상과 실천적 깨달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지며 이 화두야 말로 진정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그가 새롭게 재해석하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하나님 없이'는 종교적인 거짓된 하나님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종교적인 해결사 하나님 상은 이기적 자아의 투영과 확대이다. 이런 하나님의 부정은 이기적 자아의 부정과 자기중심성에서의 해방, 참회, 자기비움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이며 자아의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는 하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삶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십자가 안에서 이루는 화해와 일치의 영성이다. 모든 종교의 영성과 믿음은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나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는 인간의 아픔과 힘없음을 떠맡는 십자가의 영성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하나님 앞에-하나님과 더불어'의 차원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이 세 차원은 상호 교통하며, 본회퍼의 신학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즉, 이 화두에는 참회와 자기비움에 이르는 믿음의 신비, 사회 정치적인 공적 책임, 고난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삶의 세 차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전하며 동시에 신학과 신앙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본회퍼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君子가 그 시대에 살아야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이제부터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 등에서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그의 신학을 "영성 신학"이라 말하려 한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던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민중신학 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우선 신학내용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본회퍼 영성 신학의 역할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학의 관심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옮겨 놓았다. 둘째, 신앙의 바른 진술과 아울러 행동의 바른 성격과 방향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셋째, 역사의 질서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넷째, 개인주의적 경건에서 타자를 위한 삶, 참여, 연대책임에로의 지평이 열리도록 하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말씀의 전파(복음화)만이 아니라 악마성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영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본회퍼의 영성 신학이 주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혹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그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바른 이론과 바른 실천의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교리와 강단 중심의 서구전통신학을 넘어서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그의 삶에서 맺혀진 것이고, 또한 그의 삶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안목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위의 고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본회퍼는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어느덧 이론에 천착되어진 관념화된 신학의 그물을 박차고 신학과 영성의 본질을 꿰뚫은 신학자이자 실천가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의 순교의 삶은 이를 예증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곡해된 종말론적 이분법의 논리에 젖어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여전히 결핍되어 있는 반쪽자리 한국 개신교 영성 운동의 모습을 새롭게 성찰토록 한다.
둘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의 비종교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숙하고 책임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갈수록 자율성의 영역이 확대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의 과제들 다시 말해 지구화, 생명복제, 컴퓨터의 가상현실, 산업기술공학, 생태학적 생존의 과제들을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기형적인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서 성숙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직증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성숙을 의도하였지 하나님의 폐기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 없이 영성의 삶을 살다 간 듯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다 간 복음의 전사였다. 우리는 자아에 갇힌 하나님, 소유에 갖힌 존재의 고귀함, 기계로서의 하나님에 갖힌 모든 이들의 자유와 구원을 향한 하나님, 업적지향에 갖힌 인간의 자유 등등의 모든 질곡들의 본질을 저 성숙된 놀라운 영적 통찰인 '하나님 없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셋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덮고 있는 2천년 신학 전통의 무거운 짐을 벗겨내고 신앙의 핵심을 신학-실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구신학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무한한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서구 영성과 신학의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 개인과의 내밀한 영적인 관계를 쉽사리 폐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없이'의 영적 통찰이 동양의 무의 영성과 같은 무늬로 펼쳐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생과 비움의 영성과 삶은 진정 서구적인 한계를 한층 더 극복한 계기라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무(無)와 공(空)의 영성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점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권영호, {본회퍼의 제자직}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디트리히 본회퍼(문익환 역), {신도의 공동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0).
레나테 빈트(강우식 역), {침묵의 반역자} (바오로딸, 1994)
말틴 말티(배한국 역) {본회퍼의 사상} (컨콜디아사, 1966)
박봉랑,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과정과 본회퍼의 역할-오늘의 신학사조',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박봉랑, {교의학 방법론Ⅱ} (대한기독교서회, 1987)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서회, 1983)
박재순, {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2)
성선호, {본회퍼의 그리스도 현실의 신학에 대한 연구} (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현요한, "본회퍼에 있어서 성령과 인간의 마음의 문제" {말씀과 교회}(1998, 여름)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
디트리히 본회퍼의 영성연구
1. 서론 : 본회퍼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는 신학과 신앙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학문(學問)과 경건(敬虔)"의 훈련을 받는 이 모든 여정이 카톨릭의 수도원처럼 서원의 과정이고, 세속을 준비하는 훈련의 도장(道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행과 내적인 연단이 요청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도자(求道者)로서 이런 훈련과 체험을 통해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첨단(尖端)의 자리에 홀로 그리고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Before God)
이런 심정을 마음에 담고, 잠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어, 우리의 목적지와 같은 방향을 미리 걸어가셨던 선배들의 생애와 삶을 되돌아 보려 한다. 무엇보다 필자에게 연구과제로 주어졌던 본회퍼 목사의 생애와 삶,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을 조명하여 구도자들의 거울로 삼으려 한다. -김남중-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우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볼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자유에로의 도정 가운데 있는 훈련'이라고 하는 글에 나타나 있는 대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부단한 훈련과 삶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告白)은 동시에 시공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육신의 욕망이 그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노예적 삶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몸과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조국독일의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어용 기독교회의 편에 서지 않고,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설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비밀훈련과 내적인 고행에 기인한 결과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는 조국을 버렸지만, 새로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오늘의 현재에 심어 놓았다. 본회퍼라는 한 개인의 삶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든든하게 이어나가는 굳건한 가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그 자리에 세웠던 생활신앙으로서의 비밀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비밀훈련'이 필자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 그의 삶과 생애 그리고 영성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동일한 비중의 무게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오늘 필자가 본회퍼 연구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회퍼의 영성이다. 영성은 생애(生涯) 및 그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분리될 수 없기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와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통해 전개되었던 그의 고백, 논문, 저술들의 내용과 특징을 중심으로 그가 그 시대에 펼쳐 보였던 사상과 얼, 정신을 나름대로 그려 보고자 한다. 아마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요소들이 그의 영성과 깊이 닿아있으리라.
특히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인데, 첫째,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과의 관련성 속에 놓여있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위치이다. 그것은 곧 본회퍼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 새 시대 영성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라는 화두는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영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이상의 두 테마를 가지고 필자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정리하려 한다. 이 연구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바른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많은 도전과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3. 본회퍼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그의 활동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본회퍼가 8살 때)에서 참패한 독일의 상황은 절망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경제는 도탄에 빠져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세계 제일의 우수한 백성임을 자랑하던 독일 민족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패전국으로서 짊어져야 할 채무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국론은 사분 오열되어 국론통일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33년, 히틀러는 메시야 처럼 희망을 약속하며 권력을 손에 잡았다. 독일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게 그는 집권 2년만에 600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줌으로써 땅에 떨어진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들의 정서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급기야 제 2차 세계대전(1939-45)을 일으켰다. 그 결과 680만 명의 독일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가스실에서 혹은 총살과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허황된 망상은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이웃 나라들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2,000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했고, 전체 사망자수는 부상자를 제외하고 5,700만 명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교회는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정당의 이념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추앙하여 국가기독교라는 어용종교로 이용당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겼다. 루드비히 뮐러(Ludwig m lle) 감독을 주축으로 한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는 굴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 "독일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전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이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되어 세계 평화를 위한 본래적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독일교회 대다수가 히틀러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교회 내에 히틀러가 지향하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악(惡)의 요소를 감지하고 꿰뚫어 보고 있는 일군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을 탈퇴하며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을 일으켜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 Erkl rung)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히틀러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독일 그리스도교 연맹의 주장에 쐐기를 박고 그들이 주(主)로 고백하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다. 이 선언에 참가한 주역들에게는 곧 고난이 다가왔다. 이 신학 선언을 기초한 칼 바르트(K. Barth)교수는 본 대학의 교수직을 떠나야 했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세계인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몸소 보여주었던 본회퍼 목사의 삶과 신앙은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공감과 반향을 일으켜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동안 신앙을 지키고 유린된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와중에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본회퍼를 유니온 신학대학 교환 교수로 초청하였다. 그를 초청한 것은 본회퍼 목사의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를 고백교회 운동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빼내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1939년 그의 초청에 응하여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미국 각지를 도는 순회강연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를 창출해내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미국행이 잘못된 결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과 그리스도인들이 현 독재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때에, 그들의 고난에 참여함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년 7월에 귀국 길에 오른다. 당시의 심경을 나타낸 글은 그가 내린 결단의 참된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치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 조국의 패망을 위해 기도하느냐, 아니면 독일의 전쟁승리를 위해 기도하므로 그리스도교 문명을 파괴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가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쟁의 합리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는 순교자적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귀국 후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명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 결국에는 히틀러 총통의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암살음모는 교활한 비밀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체포된 후 1943년 4월 5일, 프로이센부르그의 포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삶이 처형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될 마지막 행동으로서의 순교자적인 결단(참여, 책임, 주체적인 신앙)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넘지 못할 경계선(기다림의 신앙)을 넘은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한국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제거하는 길만이 그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갔던 길을 따라 가는 제자직의 길이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참으로 시대의 상황적 요청에 성실히 몸으로 응답하였고, 책임적으로 행동했던 그리스도를 닮은 참인간이었다. 그는 참으로 참여의 신앙과 기다림의 신앙을 결코 양분하지 않고 조화롭게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필자는 그것을 확신한다.
4. 본회퍼가 쓴 저서의 일관된 사상. 얼. 영성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행한 강연, 설교, 편지, 일기, 메모, 옥중서간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글(각주 참고)들을 탐독하면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으며, 그의 영성 신학을 그려내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볼 때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이래로 계시는 이성의 영역으로 내재화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영역에로 세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낭만주의에서는 무한을 유한 안에, 초월을 세상 내에, 영원을 시간 안에로 합일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그리스도 왕국과 세상 나라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없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무신론과 신 죽음의 신학으로 이어져 갔다.
한편,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한계에 봉착하면서, 20세기초에는 계시와 이성의 위기적 관계를 말하면서,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철학을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임을 철저히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이 둘을 배타적 관계로 보면서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 관계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세상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다. 그리스도론은 본회퍼 신학에서 기본사상이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대리사상, 그리스도와 제자직, 그리스도와 현실, 그리스도와 세계,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 등이다. 이럴 때 그의 "영성의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 본회퍼의 영성신학
필자는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첫째, 성령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영성 둘째, 성육신적 영성 셋째, 순례자의 영성으로서 궁극적 희망의 영성 넷째, 말씀의 영성이며 기도의 영성 다섯째,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가는 과정적 영성, 몸의 영성 여섯째, 공동체적 영성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영성이라 한다면, 본회퍼의 삶과 고백 저술 등에 고여있는 그의 얼, 정신, 사상은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 바로 그 자체이며, 본회퍼는 직접 그 영성의 전통을 몸으로 살고 간 영성의 대가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라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에는 지금까지 필자가 점검해 왔던 본회퍼의 삶과 그가 체험한 믿음의 명상과 실천적 깨달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지며 이 화두야 말로 진정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그가 새롭게 재해석하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하나님 없이'는 종교적인 거짓된 하나님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종교적인 해결사 하나님 상은 이기적 자아의 투영과 확대이다. 이런 하나님의 부정은 이기적 자아의 부정과 자기중심성에서의 해방, 참회, 자기비움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이며 자아의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는 하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삶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십자가 안에서 이루는 화해와 일치의 영성이다. 모든 종교의 영성과 믿음은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나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는 인간의 아픔과 힘없음을 떠맡는 십자가의 영성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하나님 앞에-하나님과 더불어'의 차원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이 세 차원은 상호 교통하며, 본회퍼의 신학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즉, 이 화두에는 참회와 자기비움에 이르는 믿음의 신비, 사회 정치적인 공적 책임, 고난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삶의 세 차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전하며 동시에 신학과 신앙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본회퍼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君子가 그 시대에 살아야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이제부터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 등에서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그의 신학을 "영성 신학"이라 말하려 한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던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민중신학 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우선 신학내용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본회퍼 영성 신학의 역할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학의 관심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옮겨 놓았다. 둘째, 신앙의 바른 진술과 아울러 행동의 바른 성격과 방향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셋째, 역사의 질서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넷째, 개인주의적 경건에서 타자를 위한 삶, 참여, 연대책임에로의 지평이 열리도록 하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말씀의 전파(복음화)만이 아니라 악마성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영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본회퍼의 영성 신학이 주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혹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그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바른 이론과 바른 실천의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교리와 강단 중심의 서구전통신학을 넘어서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그의 삶에서 맺혀진 것이고, 또한 그의 삶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안목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위의 고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본회퍼는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어느덧 이론에 천착되어진 관념화된 신학의 그물을 박차고 신학과 영성의 본질을 꿰뚫은 신학자이자 실천가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의 순교의 삶은 이를 예증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곡해된 종말론적 이분법의 논리에 젖어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여전히 결핍되어 있는 반쪽자리 한국 개신교 영성 운동의 모습을 새롭게 성찰토록 한다.
둘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의 비종교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숙하고 책임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갈수록 자율성의 영역이 확대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의 과제들 다시 말해 지구화, 생명복제, 컴퓨터의 가상현실, 산업기술공학, 생태학적 생존의 과제들을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기형적인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서 성숙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직증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성숙을 의도하였지 하나님의 폐기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 없이 영성의 삶을 살다 간 듯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다 간 복음의 전사였다. 우리는 자아에 갇힌 하나님, 소유에 갖힌 존재의 고귀함, 기계로서의 하나님에 갖힌 모든 이들의 자유와 구원을 향한 하나님, 업적지향에 갖힌 인간의 자유 등등의 모든 질곡들의 본질을 저 성숙된 놀라운 영적 통찰인 '하나님 없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셋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덮고 있는 2천년 신학 전통의 무거운 짐을 벗겨내고 신앙의 핵심을 신학-실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구신학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무한한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서구 영성과 신학의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 개인과의 내밀한 영적인 관계를 쉽사리 폐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없이'의 영적 통찰이 동양의 무의 영성과 같은 무늬로 펼쳐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생과 비움의 영성과 삶은 진정 서구적인 한계를 한층 더 극복한 계기라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무(無)와 공(空)의 영성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점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권영호, {본회퍼의 제자직}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디트리히 본회퍼(문익환 역), {신도의 공동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0).
레나테 빈트(강우식 역), {침묵의 반역자} (바오로딸, 1994)
말틴 말티(배한국 역) {본회퍼의 사상} (컨콜디아사, 1966)
박봉랑,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과정과 본회퍼의 역할-오늘의 신학사조',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박봉랑, {교의학 방법론Ⅱ} (대한기독교서회, 1987)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서회, 1983)
박재순, {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2)
성선호, {본회퍼의 그리스도 현실의 신학에 대한 연구} (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현요한, "본회퍼에 있어서 성령과 인간의 마음의 문제" {말씀과 교회}(1998, 여름)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
디트리히 본회퍼의 영성연구
1. 서론 : 본회퍼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는 신학과 신앙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학문(學問)과 경건(敬虔)"의 훈련을 받는 이 모든 여정이 카톨릭의 수도원처럼 서원의 과정이고, 세속을 준비하는 훈련의 도장(道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행과 내적인 연단이 요청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도자(求道者)로서 이런 훈련과 체험을 통해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첨단(尖端)의 자리에 홀로 그리고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Before God)
이런 심정을 마음에 담고, 잠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어, 우리의 목적지와 같은 방향을 미리 걸어가셨던 선배들의 생애와 삶을 되돌아 보려 한다. 무엇보다 필자에게 연구과제로 주어졌던 본회퍼 목사의 생애와 삶,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을 조명하여 구도자들의 거울로 삼으려 한다. -김남중-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우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볼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자유에로의 도정 가운데 있는 훈련'이라고 하는 글에 나타나 있는 대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부단한 훈련과 삶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告白)은 동시에 시공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육신의 욕망이 그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노예적 삶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몸과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조국독일의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어용 기독교회의 편에 서지 않고,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설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비밀훈련과 내적인 고행에 기인한 결과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는 조국을 버렸지만, 새로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오늘의 현재에 심어 놓았다. 본회퍼라는 한 개인의 삶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든든하게 이어나가는 굳건한 가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그 자리에 세웠던 생활신앙으로서의 비밀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비밀훈련'이 필자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 그의 삶과 생애 그리고 영성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동일한 비중의 무게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오늘 필자가 본회퍼 연구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회퍼의 영성이다. 영성은 생애(生涯) 및 그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분리될 수 없기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와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통해 전개되었던 그의 고백, 논문, 저술들의 내용과 특징을 중심으로 그가 그 시대에 펼쳐 보였던 사상과 얼, 정신을 나름대로 그려 보고자 한다. 아마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요소들이 그의 영성과 깊이 닿아있으리라.
특히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인데, 첫째,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과의 관련성 속에 놓여있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위치이다. 그것은 곧 본회퍼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 새 시대 영성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라는 화두는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영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이상의 두 테마를 가지고 필자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정리하려 한다. 이 연구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바른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많은 도전과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3. 본회퍼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그의 활동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본회퍼가 8살 때)에서 참패한 독일의 상황은 절망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경제는 도탄에 빠져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세계 제일의 우수한 백성임을 자랑하던 독일 민족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패전국으로서 짊어져야 할 채무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국론은 사분 오열되어 국론통일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33년, 히틀러는 메시야 처럼 희망을 약속하며 권력을 손에 잡았다. 독일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게 그는 집권 2년만에 600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줌으로써 땅에 떨어진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들의 정서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급기야 제 2차 세계대전(1939-45)을 일으켰다. 그 결과 680만 명의 독일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가스실에서 혹은 총살과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허황된 망상은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이웃 나라들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2,000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했고, 전체 사망자수는 부상자를 제외하고 5,700만 명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교회는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정당의 이념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추앙하여 국가기독교라는 어용종교로 이용당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겼다. 루드비히 뮐러(Ludwig m lle) 감독을 주축으로 한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는 굴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 "독일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전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이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되어 세계 평화를 위한 본래적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독일교회 대다수가 히틀러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교회 내에 히틀러가 지향하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악(惡)의 요소를 감지하고 꿰뚫어 보고 있는 일군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을 탈퇴하며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을 일으켜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 Erkl rung)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히틀러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독일 그리스도교 연맹의 주장에 쐐기를 박고 그들이 주(主)로 고백하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다. 이 선언에 참가한 주역들에게는 곧 고난이 다가왔다. 이 신학 선언을 기초한 칼 바르트(K. Barth)교수는 본 대학의 교수직을 떠나야 했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세계인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몸소 보여주었던 본회퍼 목사의 삶과 신앙은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공감과 반향을 일으켜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동안 신앙을 지키고 유린된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와중에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본회퍼를 유니온 신학대학 교환 교수로 초청하였다. 그를 초청한 것은 본회퍼 목사의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를 고백교회 운동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빼내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1939년 그의 초청에 응하여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미국 각지를 도는 순회강연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를 창출해내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미국행이 잘못된 결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과 그리스도인들이 현 독재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때에, 그들의 고난에 참여함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년 7월에 귀국 길에 오른다. 당시의 심경을 나타낸 글은 그가 내린 결단의 참된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치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 조국의 패망을 위해 기도하느냐, 아니면 독일의 전쟁승리를 위해 기도하므로 그리스도교 문명을 파괴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가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쟁의 합리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는 순교자적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귀국 후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명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 결국에는 히틀러 총통의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암살음모는 교활한 비밀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체포된 후 1943년 4월 5일, 프로이센부르그의 포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삶이 처형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될 마지막 행동으로서의 순교자적인 결단(참여, 책임, 주체적인 신앙)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넘지 못할 경계선(기다림의 신앙)을 넘은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한국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제거하는 길만이 그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갔던 길을 따라 가는 제자직의 길이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참으로 시대의 상황적 요청에 성실히 몸으로 응답하였고, 책임적으로 행동했던 그리스도를 닮은 참인간이었다. 그는 참으로 참여의 신앙과 기다림의 신앙을 결코 양분하지 않고 조화롭게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필자는 그것을 확신한다.
4. 본회퍼가 쓴 저서의 일관된 사상. 얼. 영성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행한 강연, 설교, 편지, 일기, 메모, 옥중서간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글(각주 참고)들을 탐독하면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으며, 그의 영성 신학을 그려내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볼 때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이래로 계시는 이성의 영역으로 내재화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영역에로 세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낭만주의에서는 무한을 유한 안에, 초월을 세상 내에, 영원을 시간 안에로 합일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그리스도 왕국과 세상 나라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없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무신론과 신 죽음의 신학으로 이어져 갔다.
한편,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한계에 봉착하면서, 20세기초에는 계시와 이성의 위기적 관계를 말하면서,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철학을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임을 철저히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이 둘을 배타적 관계로 보면서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 관계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세상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다. 그리스도론은 본회퍼 신학에서 기본사상이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대리사상, 그리스도와 제자직, 그리스도와 현실, 그리스도와 세계,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 등이다. 이럴 때 그의 "영성의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 본회퍼의 영성신학
필자는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첫째, 성령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영성 둘째, 성육신적 영성 셋째, 순례자의 영성으로서 궁극적 희망의 영성 넷째, 말씀의 영성이며 기도의 영성 다섯째,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가는 과정적 영성, 몸의 영성 여섯째, 공동체적 영성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영성이라 한다면, 본회퍼의 삶과 고백 저술 등에 고여있는 그의 얼, 정신, 사상은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 바로 그 자체이며, 본회퍼는 직접 그 영성의 전통을 몸으로 살고 간 영성의 대가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라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에는 지금까지 필자가 점검해 왔던 본회퍼의 삶과 그가 체험한 믿음의 명상과 실천적 깨달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지며 이 화두야 말로 진정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그가 새롭게 재해석하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하나님 없이'는 종교적인 거짓된 하나님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종교적인 해결사 하나님 상은 이기적 자아의 투영과 확대이다. 이런 하나님의 부정은 이기적 자아의 부정과 자기중심성에서의 해방, 참회, 자기비움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이며 자아의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는 하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삶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십자가 안에서 이루는 화해와 일치의 영성이다. 모든 종교의 영성과 믿음은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나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는 인간의 아픔과 힘없음을 떠맡는 십자가의 영성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하나님 앞에-하나님과 더불어'의 차원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이 세 차원은 상호 교통하며, 본회퍼의 신학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즉, 이 화두에는 참회와 자기비움에 이르는 믿음의 신비, 사회 정치적인 공적 책임, 고난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삶의 세 차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전하며 동시에 신학과 신앙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본회퍼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君子가 그 시대에 살아야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이제부터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 등에서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그의 신학을 "영성 신학"이라 말하려 한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던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민중신학 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우선 신학내용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본회퍼 영성 신학의 역할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학의 관심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옮겨 놓았다. 둘째, 신앙의 바른 진술과 아울러 행동의 바른 성격과 방향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셋째, 역사의 질서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넷째, 개인주의적 경건에서 타자를 위한 삶, 참여, 연대책임에로의 지평이 열리도록 하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말씀의 전파(복음화)만이 아니라 악마성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영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본회퍼의 영성 신학이 주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혹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그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바른 이론과 바른 실천의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교리와 강단 중심의 서구전통신학을 넘어서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그의 삶에서 맺혀진 것이고, 또한 그의 삶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안목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위의 고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본회퍼는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어느덧 이론에 천착되어진 관념화된 신학의 그물을 박차고 신학과 영성의 본질을 꿰뚫은 신학자이자 실천가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의 순교의 삶은 이를 예증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곡해된 종말론적 이분법의 논리에 젖어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여전히 결핍되어 있는 반쪽자리 한국 개신교 영성 운동의 모습을 새롭게 성찰토록 한다.
둘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의 비종교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숙하고 책임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갈수록 자율성의 영역이 확대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의 과제들 다시 말해 지구화, 생명복제, 컴퓨터의 가상현실, 산업기술공학, 생태학적 생존의 과제들을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기형적인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서 성숙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직증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성숙을 의도하였지 하나님의 폐기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 없이 영성의 삶을 살다 간 듯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다 간 복음의 전사였다. 우리는 자아에 갇힌 하나님, 소유에 갖힌 존재의 고귀함, 기계로서의 하나님에 갖힌 모든 이들의 자유와 구원을 향한 하나님, 업적지향에 갖힌 인간의 자유 등등의 모든 질곡들의 본질을 저 성숙된 놀라운 영적 통찰인 '하나님 없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셋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덮고 있는 2천년 신학 전통의 무거운 짐을 벗겨내고 신앙의 핵심을 신학-실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구신학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무한한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서구 영성과 신학의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 개인과의 내밀한 영적인 관계를 쉽사리 폐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없이'의 영적 통찰이 동양의 무의 영성과 같은 무늬로 펼쳐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생과 비움의 영성과 삶은 진정 서구적인 한계를 한층 더 극복한 계기라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무(無)와 공(空)의 영성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점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권영호, {본회퍼의 제자직}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디트리히 본회퍼(문익환 역), {신도의 공동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0).
레나테 빈트(강우식 역), {침묵의 반역자} (바오로딸, 1994)
말틴 말티(배한국 역) {본회퍼의 사상} (컨콜디아사, 1966)
박봉랑,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과정과 본회퍼의 역할-오늘의 신학사조',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박봉랑, {교의학 방법론Ⅱ} (대한기독교서회, 1987)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서회, 1983)
박재순, {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2)
성선호, {본회퍼의 그리스도 현실의 신학에 대한 연구} (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현요한, "본회퍼에 있어서 성령과 인간의 마음의 문제" {말씀과 교회}(1998, 여름)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
디트리히 본회퍼의 영성연구
1. 서론 : 본회퍼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는 신학과 신앙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학문(學問)과 경건(敬虔)"의 훈련을 받는 이 모든 여정이 카톨릭의 수도원처럼 서원의 과정이고, 세속을 준비하는 훈련의 도장(道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찌 보면 한 인간이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행과 내적인 연단이 요청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도자(求道者)로서 이런 훈련과 체험을 통해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첨단(尖端)의 자리에 홀로 그리고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Before God)
이런 심정을 마음에 담고, 잠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어, 우리의 목적지와 같은 방향을 미리 걸어가셨던 선배들의 생애와 삶을 되돌아 보려 한다. 무엇보다 필자에게 연구과제로 주어졌던 본회퍼 목사의 생애와 삶, 사상, 그리고 그의 영성을 조명하여 구도자들의 거울로 삼으려 한다. -김남중-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우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볼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자유에로의 도정 가운데 있는 훈련'이라고 하는 글에 나타나 있는 대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부단한 훈련과 삶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백(告白)은 동시에 시공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진다. 육신의 욕망이 그를 이리저리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노예적 삶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몸과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조국독일의 악마와 같은 히틀러와 어용 기독교회의 편에 서지 않고,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설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비밀훈련과 내적인 고행에 기인한 결과였다는 사실에 필자는 추호의 의심이 없다. 그는 조국을 버렸지만, 새로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오늘의 현재에 심어 놓았다. 본회퍼라는 한 개인의 삶이, 2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든든하게 이어나가는 굳건한 가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그 자리에 세웠던 생활신앙으로서의 비밀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비밀훈련'이 필자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공감하면서, 그의 삶과 생애 그리고 영성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동일한 비중의 무게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오늘 필자가 본회퍼 연구를 통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회퍼의 영성이다. 영성은 생애(生涯) 및 그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분리될 수 없기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와 당시의 삶의 자리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통해 전개되었던 그의 고백, 논문, 저술들의 내용과 특징을 중심으로 그가 그 시대에 펼쳐 보였던 사상과 얼, 정신을 나름대로 그려 보고자 한다. 아마 정답은 아니겠지만 이런 요소들이 그의 영성과 깊이 닿아있으리라.
특히 필자가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인데, 첫째,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과의 관련성 속에 놓여있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위치이다. 그것은 곧 본회퍼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어떤 의미있는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 새 시대 영성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라는 화두는 오늘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영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이상의 두 테마를 가지고 필자는 본회퍼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정리하려 한다. 이 연구가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 안에서 바른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구도자들에게 많은 도전과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 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3. 본회퍼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그의 활동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본회퍼가 8살 때)에서 참패한 독일의 상황은 절망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경제는 도탄에 빠져 실업자 수는 급증하였다. 세계 제일의 우수한 백성임을 자랑하던 독일 민족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짐은 물론 설상가상으로 패전국으로서 짊어져야 할 채무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국론은 사분 오열되어 국론통일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33년, 히틀러는 메시야 처럼 희망을 약속하며 권력을 손에 잡았다. 독일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게 그는 집권 2년만에 600만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줌으로써 땅에 떨어진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국민들의 정서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등장한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급기야 제 2차 세계대전(1939-45)을 일으켰다. 그 결과 680만 명의 독일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가스실에서 혹은 총살과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히틀러의 허황된 망상은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이웃 나라들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은 2,000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했고, 전체 사망자수는 부상자를 제외하고 5,700만 명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교회는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정당의 이념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추앙하여 국가기독교라는 어용종교로 이용당하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겼다. 루드비히 뮐러(Ludwig m lle) 감독을 주축으로 한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하는 굴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 "독일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전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산이다. 그러나 독일교회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되어 세계 평화를 위한 본래적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독일교회 대다수가 히틀러 독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교회 내에 히틀러가 지향하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악(惡)의 요소를 감지하고 꿰뚫어 보고 있는 일군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을 탈퇴하며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을 일으켜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Theologische Erkl rung)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선언은 히틀러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독일 그리스도교 연맹의 주장에 쐐기를 박고 그들이 주(主)로 고백하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다. 이 선언에 참가한 주역들에게는 곧 고난이 다가왔다. 이 신학 선언을 기초한 칼 바르트(K. Barth)교수는 본 대학의 교수직을 떠나야 했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세계인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몸소 보여주었던 본회퍼 목사의 삶과 신앙은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커다란 공감과 반향을 일으켜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동안 신앙을 지키고 유린된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한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고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와중에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본회퍼를 유니온 신학대학 교환 교수로 초청하였다. 그를 초청한 것은 본회퍼 목사의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를 고백교회 운동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빼내어 학문 연구에 전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본회퍼는 1939년 그의 초청에 응하여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미국 각지를 도는 순회강연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 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를 창출해내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미국행이 잘못된 결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과 그리스도인들이 현 독재체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때에, 그들의 고난에 참여함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년 7월에 귀국 길에 오른다. 당시의 심경을 나타낸 글은 그가 내린 결단의 참된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치는 양자택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 조국의 패망을 위해 기도하느냐, 아니면 독일의 전쟁승리를 위해 기도하므로 그리스도교 문명을 파괴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가 따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쟁의 합리화와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복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는 순교자적 순종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귀국 후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순명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 결국에는 히틀러 총통의 암살음모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암살음모는 교활한 비밀경찰의 정보망에 포착되어 체포된 후 1943년 4월 5일, 프로이센부르그의 포로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삶이 처형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단에 참여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될 마지막 행동으로서의 순교자적인 결단(참여, 책임, 주체적인 신앙)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넘지 못할 경계선(기다림의 신앙)을 넘은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한국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제거하는 길만이 그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갔던 길을 따라 가는 제자직의 길이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참으로 시대의 상황적 요청에 성실히 몸으로 응답하였고, 책임적으로 행동했던 그리스도를 닮은 참인간이었다. 그는 참으로 참여의 신앙과 기다림의 신앙을 결코 양분하지 않고 조화롭게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처럼. 필자는 그것을 확신한다.
4. 본회퍼가 쓴 저서의 일관된 사상. 얼. 영성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행한 강연, 설교, 편지, 일기, 메모, 옥중서간이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그의 글(각주 참고)들을 탐독하면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으며, 그의 영성 신학을 그려내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측면에서 볼 때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이래로 계시는 이성의 영역으로 내재화되었고 교회는 세상의 영역에로 세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낭만주의에서는 무한을 유한 안에, 초월을 세상 내에, 영원을 시간 안에로 합일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고 그리스도 왕국과 세상 나라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없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무신론과 신 죽음의 신학으로 이어져 갔다.
한편,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한계에 봉착하면서, 20세기초에는 계시와 이성의 위기적 관계를 말하면서,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신학과 철학을 분명히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교회이고, 세상은 세상임을 철저히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분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이 둘을 배타적 관계로 보면서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자직을 말하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성화를 강조하였다.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윤리학>과 <옥중서신>에서는 교회와 세상의 적대 관계보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한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종교적 세속적인 세상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 사상"이다. 그리스도론은 본회퍼 신학에서 기본사상이며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의 모든 사상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와 무엇"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대리사상, 그리스도와 제자직, 그리스도와 현실, 그리스도와 세계,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 등이다. 이럴 때 그의 "영성의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 본회퍼의 영성신학
필자는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징을 첫째, 성령안에서 자유와 사랑의 영성 둘째, 성육신적 영성 셋째, 순례자의 영성으로서 궁극적 희망의 영성 넷째, 말씀의 영성이며 기도의 영성 다섯째,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가는 과정적 영성, 몸의 영성 여섯째, 공동체적 영성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하는 영성이라 한다면, 본회퍼의 삶과 고백 저술 등에 고여있는 그의 얼, 정신, 사상은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 바로 그 자체이며, 본회퍼는 직접 그 영성의 전통을 몸으로 살고 간 영성의 대가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특히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라는 본회퍼가 던진 현대신학의 화두에는 지금까지 필자가 점검해 왔던 본회퍼의 삶과 그가 체험한 믿음의 명상과 실천적 깨달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지며 이 화두야 말로 진정 2천년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을 그가 새롭게 재해석하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하나님 없이'는 종교적인 거짓된 하나님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종교적인 해결사 하나님 상은 이기적 자아의 투영과 확대이다. 이런 하나님의 부정은 이기적 자아의 부정과 자기중심성에서의 해방, 참회, 자기비움이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이며 자아의 개인적 영역에서 벗어나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는 하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삶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십자가 안에서 이루는 화해와 일치의 영성이다. 모든 종교의 영성과 믿음은 나의 자아와 타자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나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는 인간의 아픔과 힘없음을 떠맡는 십자가의 영성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하나님 앞에-하나님과 더불어'의 차원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이 세 차원은 상호 교통하며, 본회퍼의 신학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즉, 이 화두에는 참회와 자기비움에 이르는 믿음의 신비, 사회 정치적인 공적 책임, 고난에 참여하는 공동체적 삶의 세 차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전하며 동시에 신학과 신앙의 전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제 필자는 본회퍼가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는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왜 이런 君子가 그 시대에 살아야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이제부터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 등에서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그의 신학을 "영성 신학"이라 말하려 한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던 세속화 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에큐메니칼 신학, 희망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 신학, 민중신학 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우선 신학내용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본회퍼 영성 신학의 역할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학의 관심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옮겨 놓았다. 둘째, 신앙의 바른 진술과 아울러 행동의 바른 성격과 방향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셋째, 역사의 질서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변혁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넷째, 개인주의적 경건에서 타자를 위한 삶, 참여, 연대책임에로의 지평이 열리도록 하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선교의 목적을 단순히 말씀의 전파(복음화)만이 아니라 악마성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영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본회퍼의 영성 신학이 주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혹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필자는 다음 세 가지로 그의 영성 신학의 특징과 영향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바른 이론과 바른 실천의 통합을 추구함으로써 교리와 강단 중심의 서구전통신학을 넘어서 정치신학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그의 삶에서 맺혀진 것이고, 또한 그의 삶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안목 속에서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위의 고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본회퍼는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어느덧 이론에 천착되어진 관념화된 신학의 그물을 박차고 신학과 영성의 본질을 꿰뚫은 신학자이자 실천가였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의 순교의 삶은 이를 예증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영성신학은 곡해된 종말론적 이분법의 논리에 젖어있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여전히 결핍되어 있는 반쪽자리 한국 개신교 영성 운동의 모습을 새롭게 성찰토록 한다.
둘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의 비종교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숙하고 책임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갈수록 자율성의 영역이 확대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의 과제들 다시 말해 지구화, 생명복제, 컴퓨터의 가상현실, 산업기술공학, 생태학적 생존의 과제들을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기형적인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서 성숙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직증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성숙을 의도하였지 하나님의 폐기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 없이 영성의 삶을 살다 간 듯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다 간 복음의 전사였다. 우리는 자아에 갇힌 하나님, 소유에 갖힌 존재의 고귀함, 기계로서의 하나님에 갖힌 모든 이들의 자유와 구원을 향한 하나님, 업적지향에 갖힌 인간의 자유 등등의 모든 질곡들의 본질을 저 성숙된 놀라운 영적 통찰인 '하나님 없이'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셋째, 본회퍼의 영성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덮고 있는 2천년 신학 전통의 무거운 짐을 벗겨내고 신앙의 핵심을 신학-실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구신학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무한한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서구 영성과 신학의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 개인과의 내밀한 영적인 관계를 쉽사리 폐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없이'의 영적 통찰이 동양의 무의 영성과 같은 무늬로 펼쳐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생과 비움의 영성과 삶은 진정 서구적인 한계를 한층 더 극복한 계기라고 우리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익숙한 무(無)와 공(空)의 영성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점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권영호, {본회퍼의 제자직}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디트리히 본회퍼(문익환 역), {신도의 공동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0).
레나테 빈트(강우식 역), {침묵의 반역자} (바오로딸, 1994)
말틴 말티(배한국 역) {본회퍼의 사상} (컨콜디아사, 1966)
박봉랑,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과정과 본회퍼의 역할-오늘의 신학사조', (기독교사상 1981년 4월호).
박봉랑, {교의학 방법론Ⅱ} (대한기독교서회, 1987)
박봉랑, {신의 세속화} (대한기독교서회, 1983)
박재순, {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2)
성선호, {본회퍼의 그리스도 현실의 신학에 대한 연구} (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6)
현요한, "본회퍼에 있어서 성령과 인간의 마음의 문제" {말씀과 교회}(1998, 여름)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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