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4:44~5:6
십계명 서문
오늘부터 저희들은 십계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군대에 갔을 때 훈련병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물어보는 것이 3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십계명 전체를 암송하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라면 최소한 사도신경, 주기도문뿐 아니라 십계명까지 암송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율법 중 ‘하라’는 계명이 248개, ‘하지 말라’는 계명이 365개, 총 613개가 있습니다. 이런 결과치를 두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뼈의 수와 ‘하라’는 계명의 수는 모두 248개이다. 그러므로 ‘하라’는 계명은 온 몸을 드려서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1년은 365일, 하지 말라는 계명의 수도 365개이므로 ‘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1년 내내 기억하면서 순종해야 한다.” 즉, 온 맘과 몸을 드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총 613개 율법의 핵심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22:37~40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 특히 십계명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십계명은 안 지키면 벌 받게되니까 의무감을 가지고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까? 아닙니다.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는 십계명의 이미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두 사랑하는 남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기만 하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힘든 줄 모르고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예화) 등산가는 연인의 배낭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결코 다른 신을 섬기거나 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도 아니요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의 부모와 어른들을 공경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겨 살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육체적 순결을 소중히 여겨 간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탐내어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거나 탐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613가지 율법과 십계명의 내용을 더 짧게 한 단어로 표현한 성경본문을 찾으라고 한다면 저는 롬 13:10이라고 하겠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의 노예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사랑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부터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행복해지고, 우리 교회가 행복해지고, 우리나라가 모두 행복해 집니다.
지금부터 함께 십계명의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으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십계명 강해의 첫 시간이므로 전체적인 서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십계명은 성경 어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구약성경 두 곳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도달하였을 때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전한 것으로 그 내용이 출20:2~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가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고별설교를 하는 내용에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끝내게 하시고,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회상하면서 앞으로 들어가서 살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는 시내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할 것을 강해하는 내용으로 신5:7~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이 두 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초 십계명은 언제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을까요?
그 내용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셔서 애굽의 종살이를 그치게 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셔서 적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인도하여 들이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아니하였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시내산 기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19:3~6절을 함께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이 말씀을 백성의 장로들에게 고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8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백성의 서약을 받은 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자신을 성결케하며, 옷을 빨고 예비한 후 삼일동안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삼일이 지나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였고,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산으로 올라오시게 한 후 그에게 열 가지 계명을 말씀하시고, 친히 여호와께서 기록한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있어야 할 것을 명령하셨고, 둘째 부분은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첫째 부분은 하나님께 경배하는데 관한 종교적인 계명이요, 둘째 부분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1~4계명의 내용은;
첫째, 내 앞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
둘째,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셋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게 일컫지말라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다음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5~10계명의 내용은;
다섯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째, 살인하지 말라
일곱째, 간음하지 말라
여덟째, 도적질하지 말라
아홉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열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의 내용을 ‘하라’와 ‘하지 말라’로 구분하면, ‘하라’는 계명은 주일 성수와 부모 공경의 두 가지이며, 나머지 8가지는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1~10계명의 내용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부터 차례대로 자세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첫 부분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의 우상 숭배가 몸에 배였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우상과 미신으로부터 구별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모든 신들을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다 죽은 신이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덧붙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였지만, 이제 너는 내게 붙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하면 너희들을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저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종 되었던 집, 애굽 땅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종의 사슬에 묶여있었으나 이제는 자유를 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면 저들의 배은망덕함으로 인하여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애굽을 ‘종 되었던 집’이라고 부르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 애굽에서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철저하게 기억하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감격에 넘쳤으나,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면서 ‘이제 우리가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종되었던 애굽에서의 삶을 추억하고, 뒤를 돌아본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죄악된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과 같은 결과입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여호와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로 마땅히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백성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그 백성들을 친밀함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온당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여 함께 하시기 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43:1~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찾아 읽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오늘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이 말씀이 지니는 비중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크고 반짝이는 별이라도 태양이 떠오르면 그 빛이 무색해지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앞에 우리가 이전에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크게 보았던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이 없는 자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같이 세상의 죄악과 탐욕에 포로가 되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가지시고 종처럼 섬기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삶과 희생을 통하여 사랑의 본을 보이시고,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곧 모든 율법을 이루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눈에 보이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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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5:7
제목 :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
소품으로 손거울을 준비한다.
강대상에 올라갈 때 얼굴에 휴지조각을 붙인다.
사모가 손짓을 하면 그제서야 발견한 것처럼 거울을 보면서 떼어낸다.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는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우리의 심령 상태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롬7:7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심령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 중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계명이 각각 몇 개씩이라고 하였습니까? (248개, 365개, 총613개)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22:37~40) 이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롬13:10에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계명 중 첫 번째 되는 제1계명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계명은 다른 어떤 계명보다 소중하고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첫 번째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법으로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하지 않은 한 아무런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이므로 이를 잘 기억하고 준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싱가폴을 여행하고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나라에서는 껌을 씹기만해도 벌금을 내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껌을 아무 곳에나 뱉으면 벌금을 내지만 씹는 것만으로 벌금을 내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싱가폴에서 껌을 씹었다는 이유로 벌과금을 부과할 때 한국의 법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벌금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법을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또한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요, 세상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이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 첫 번째 계명은 우리가 누구를 경배해야 할 것인지 그 대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어떤 30대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하여 결혼도 늦추고 몸도 돌보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몸에 약간의 이상을 느꼈지만 자신의 인생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시하였습니다. 어느 날 너무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암이 온몸에 퍼져서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에게 앞으로 8시간 정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절망감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후 2시간 쯤 지났을 때 편지 한 통이 그에게 배달되어 왔습니다. 변호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한 분 계셨는데 큰 부자였습니다. 그 작은 아버지는 자식도 없이 한평생을 보내다가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재산을 상속을 받을 사람을 찾다보니 유일한 법정상속자가 바로 그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속 절차를 밟기 위하여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이제 그 청년은 수십억원의 재산을 물려받고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의사에게 물어봅니다. “이제 제 생명이 얼마 남았죠?” “앞으로 6시간 남았습니다.”
얼마 후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총장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청년이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이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되었으며, 앞으로 1주일 뒤에 있을 학위수여식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이었습니다.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이제 내 생명이 얼마 남았죠?” “앞으로 4시간 남았습니다.”
다시 세 번째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그 청년이 열렬히 사랑하였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당신의 청혼을 허락합니다. 만나서 결혼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이제 내 생명이 얼마나 남았죠?” “2시간”
죽음을 앞둔 이 청년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일까요? 그는 지식과 돈과 명예와 행복한 가정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만 이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돈, 지식, 권력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하나님보다 이것들이 더 소중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1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이요,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다른 신 즉 재물이나 지식, 권력이나 명예, 그 외 세상적인 쾌락을 네 앞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전8:5~6에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의 걸음걸음을 지켜 인도하시고 구원해 주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요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모두 그 앞에 절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그 명령을 어기면 뜨거운 풀무불에 던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신상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심문하는 왕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단3:16하~18의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말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왕은 풀무불의 온도를 7배나 뜨겁게하여 그 가운데로 던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타지 아니하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마6:24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경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말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절개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 있어서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자기만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폭언일 수가 없고, 여자가 한 남편만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를 섬기라는 것은 우리와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기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 편에서 볼 때에는 축복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이제 제1계명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1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은 유일한 참 신이 되심과 우리 하나님이 되심을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외의 대용품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것을 아무리 쫓아다녀도 목마름이 해갈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길 때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아멘)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해있든지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출34:7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회개할 자는 용서하시고 회개치 않으면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요? 우리는 그 분과 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능력과 성품을 알 뿐 아니라(知),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情),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意)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시53:1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여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롬1:21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 않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딤후3:2~5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찾아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제1계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다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1:1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1:1입니다. 중간에 그 어떤 다른 것도 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각관계는 갈등, 불행,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26:4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모든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시106:1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까?
질투와 진노를 격발하십니다. 신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는 사랑과 비례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자들은 유황불 못에 던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계21:8에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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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5:8~10
제목 :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
지난주일 저희들은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계명이었는데 그 내용은 무엇이었지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에 살고 계신 어떤 부모님께 뒤늦게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그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고, 마침내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영광도 안게 되었습니다. 판사로 임용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뒤늦게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부모님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기 때문에 피부는 검고, 옷차림새는 매우 촌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이 축하해 주기 위하여 그 아들 곁으로 다가서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 어르신들은 누구시지요?” 순간, 부모님의 촌스러운 모습을 부끄럽게 여긴 그 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서 우리 집 머슴을 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않고, 부끄럽게 여긴 이 아들이 출세하여 많은 용돈을 보내주고, 여행도 보내드리고, 좋은 옷을 사드린다고 합시다. 과연 부모님은 행복하실까요? 부모가 부모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다른 무엇으로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말라’는 제1계명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그 분을 바로 알고, 인정하며, 예배드리는 것이 다른 계명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계명 중 제2계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제2계명의 내용을 함께 읽겠습니다.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1계명이 예배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면, 제2계명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도록 예배 방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1계명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셨고, 제2계명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먼저 제2계명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요리문답 제50문에 의하면 “제2계명이 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말씀에 정하신 모든 예배를 받아 순종하며 깨끗하고 완전하게 지키라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정하신대로 순종하며 깨끗하고 완전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순서와 프로그램을 아무리 멋있게 구성하고 매끄럽게 진행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신12:32에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삼상15:22에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금하신 불로 분향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잘못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어떤 예배가 합당하고 깨끗한 예배일까요?
(1) 명하신 대로 성례를 행하고, (마28:19)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요4:24, 신6:5)
(3)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며, (롬12:1)
(4) 말씀을 연구하며, 주시하여 듣고 가르치며, (행15:21, 딤후4:2)
(5) 말씀을 지켜 파수하며, (엡4:11,22, 고전5:17~18)
(6) 금식, 금욕하며, (욜2:12, 고전7:5)
(7) 서약하여 지키며 (행17:16~17, 잠16:4)
(8) 거짓 예배와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행17:16~17)
다음으로 제2계명에서 우리에게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요리 문답 제51문에 의하면, “제2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다른 어떤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우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우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우상으로는 아세라 여신상(풍요의 신), 몰록 우상(형통케 해준다는 신으로 반은 동물, 반은 사람 모양임),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앞길을 인도하는 신), 애굽 사람이 섬기는 새와 곤충, 물고기 형상의 우상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부처 앞에 절하고 섬깁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상 뿐 아니라 각종 성인들의 성상(聖像)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이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44:13~17을 함께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우상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 아니라 일월성신(日月星辰; 해, 달,별)과 같은 자연을 숭배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다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우상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3:5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탐심으로 인하여 멸망당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탈취물을 어느 것이든 취하지 말고 여호와의 곡간에 들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금50세겔 하나를 훔쳐 자기의 장막 땅 속에 숨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간 자신 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자녀와 소유물들이 돌이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제2계명에서 금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 뿐 아니라 다음 2가지 내용이 포함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4:15~19에서도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지 만들지말고 그것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3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동안 내려오지 않고 있자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론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귀의 금고리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어떤 형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사람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람, 짐승 등의 모양으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탑을 하늘 끝까지 쌓아서 하나님과 맞서려는 것과 같이 타락한 증거입니다.
제2계명에서 금하신 둘째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는 것이요(출32:8, 사65:11), 그 무엇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요(신4:2, 계22:19), 영적 권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행8:18, 유10, 롬14:4)
타락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자기가 먼저 억지로 빼앗아가기도 하였고,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마침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패하였습니다. 그러자 홉니외 비느하스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여호와의 법궤만 있으면 승리할 줄로 알고 법궤를 불레셋과의 전쟁터에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섬기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에 해당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제2계명을 지켜야 할까요?
소요리문답 제52문에 의하면 “제2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재가 되시며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며 홀로 자기에게만 경배하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계명 제2계명 후반부에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진실이라는 살아있는 증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저들은 나라없이 2천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 민족만큼 수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다시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유대인들이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현재 미국을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반면 아랍 민족은 어떻습니까? 아랍 민족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이 셈족어를 쓰고, 골격도 같고, 풍속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차이는 그렇게 현저할까요? 저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지금도 살아계시고, 약속을 실천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수천대까지 네 자손을 축복하시겠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이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그 입술을 통하여 나온 말씀은 반드시 이루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시95:2~3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들은 우리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소유물은 주인의 의도대로 사용되어야 가치가 인정됩니다. 시계는 시간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하고, 마이크는 육성을 더 크고 깨끗하게 확장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계나 마이크를 만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찬송받기 원하시고 예배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거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노예시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노예시장에 흑인 가족 4명이 끌려 나왔습니다. 노예를 사기 위하여 온 백인이 적당한 값을 주고 각각 한 명씩 사갑니다. 그 흑인 가족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면서 서로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모습을 본 한 신사가 흑인을 사가는 사람들을 각각 불러다가 2배의 값을 주고 모두 샀습니다. 저들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한 뒤에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노예가 아니요.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행복하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흑인 가족은 평생토록 그 신사의 종이 되어 섬기며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시100:2~3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드립시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강한 팔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셔서 축복받는 삶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손에 붙들리면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붙잡고 사용하시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난 후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나같이 부족한 자를 불러내시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들판에서 양이나 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시편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기잡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니 하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누가 주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기 원하셔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을 섬기지말고 우리의 인생을 오직 주님 앞에 드립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면 살리시고, 낮아지면 높이십니다. 우리 모든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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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5:11
제목 :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지난 주일까지 저희들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2계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잠시 복습을 하겠습니다. 제1계명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우리에게 올바른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제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것은 예배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절하고 경배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제3계명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에 관한 계명입니다. 예배드리는 자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정해진 예배시간, 정해진 장소-교회 안에서 시작되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의 삶 전체가 예배이어야 합니다. 각자가 있는 처소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3계명은 예배자의 모든 언행과 생활이 항상 경건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불신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비록 저들은 정결하게 살지 못하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언가 자기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잘못한 것이 드러나면 크게 실망하면서 비난의 돌을 사정없이 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제3계명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배우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계명 제3계명에는 두 개의 핵심단어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단어와 “망령되이 일컫지말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이 두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모든 사람이나 물체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그 사람의 모든 인격 전체를 대변합니다. 예를 들어서 ‘윤성화’란 이름에는 그 사람의 외모, 성격, 습관, 인격, 하는 일과 직책 등 그 사람의 모든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만약 ‘윤성화’란 사람을 좋아하면 그 이름도 존중하지만, ‘윤성화’란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모욕을 당하거나 함부로 불려지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제3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의 바로왕에게 보내실 때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출3:14에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시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어느 누구에 의해 지음 받지 않았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가장 첫 번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웨)를 감히 함부로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도나이’- 즉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란 이름대신에 ‘주’란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주’라고 하는 말 속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 됨을 고백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8:1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이제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소위 범신론(汎神論)사상이 뿌리깊게 내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느 곳에나 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지요. 산에는 산신령이 있고, 바다에는 용왕이 있고, 큰 나무나 바위, 해와 달에도 신이 있고, 죽은 조상도 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아다닌다는 식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신들을 통틀어 “하늘님”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오늘날 “하느님”이란 명칭으로 변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란 살아있는 신이 아니며, 인격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격을 가지신 참되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명칭인 ‘하나님’은 ‘하나+님(존칭어)’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위대하시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고백적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입니다.
‘망령되이 일컫는다’란 무슨 뜻일까요? 그 말의 뜻은 ‘헛되다’ ‘거짓되다’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용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음을 받을 때 결단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36:21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겔20:29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
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그를 칠 것이니라“
알렉산더 대왕이 나쁜 죄를 범한 병사들을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한 병사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 알렉산더입니다.” 그 병사의 이름은 왕의 이름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왕이 크게 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이놈! 지금 당장부터 네 이름을 바꾸든지 그렇지 않으면 네 행동을 바꾸든지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하여 분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잘못된 언행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게된다면 하나님께서 ‘죄없다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죄를 물으시고 죄값을 치르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제3계명이 금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3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국가 원수인 대통령에 대하여 모독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국가원수모독죄에 저촉됩니다. 요즈음은 민주화가 많이 되어서 개그맨들이 대통령의 말을 흉내내어 우스개거리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전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기간 중 한나라당의 의원이 ‘등신외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비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교 정책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그만 두고라도 일국의 대통령의 외교활동에 대하여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면 그 의원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 대하여도 그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처사는 결단코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있는데 삼상17장에 보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군 진영 앞까지 나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사울왕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던 나이어린 다윗이 그 소리를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삼상17:26 하반절에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던 골리앗 장군은 어린 소년 다윗이 던진 돌이 이마에 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대하32장에는 앗수르왕의 군대장관 산헤립이 유대의 히스기야왕을 침공하러 온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수르의 군대장관인 산헤립은 “나의 열조가 진멸한 열국의 그 모든 신중에 누가 능히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대하32:14)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였습니다. 산헤립 뿐 아니라 그의 신복들도 더욱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왕을 비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모욕하고 비방하던 이들을 모두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성도들 중에서도 발견됩니다. 무심코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건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언행을 자세히 살펴 이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겔20:39 “다시는 너희 예물로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들 더럽히지 말찌니라”
잠30:9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제3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맹세를 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였을 때 진실을 말하기로 서약합니다. 결혼을 할 때 하나님과 하객들 앞에서 평생토록 사랑하며 살겠다고 서약합니다. 맹세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를 지키지 않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매우 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5년 전 소위 ‘옷 로비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믿음이 좋은 세 분의 권사님이 출두한 가운데 청문회가 열렸고, TV에서는 이 청문회 장면을 방영하였습니다. 저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저들의 주장과 진술이 엇갈렸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교회에는 참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국민들이 알지 못하던 것을 밝힌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복남’이라는 사실입니다.
레19:12 “너희가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제3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쓸데없이 너무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성에 손상을 끼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주여~ 주여~”라고 합니다.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주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이 매우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 밖에 버려져서 밟히거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마7:22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7:23에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구제하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참으로 헌신적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역과 봉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고 남용한 것은 바로 제3계명을 어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지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찌라도 그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실리를 추구한다면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딤전6:5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사람을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 세상의 법으로는 하등 문제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28:58~59에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치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죄악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릴 것이라”
말1:6에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서도 회개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따라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지 말라고 하신 것만 하지 않으면 됩니까?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의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그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뭔가 다르다.”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무서워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0~21)고 하였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저희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메시야’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즉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우리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요3:1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에게 앉아서 한 푼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그 앉은뱅이가 즉시 일어나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병마가 떠납니다. 귀신이 물러갑니다. 환경이 변화됩니다. 축복을 받게 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여러분들 중세서 몸이 아픈 부분이 있으면 믿음으로 그 자리에 손을 얹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면 머리에 손을 얹으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기 원하시면 가슴에 손을 얹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제가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시간 부족한 종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어 놀라운 응답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하고 더러운 귀신은 떠날지어다. 악한 병마는 떠날지어다. 어두움의 권세는 물러갈지어다. 악한 영의 권세는 묶여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더 이상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하리라고 하셨고, 믿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구한 기도에 응답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악한 영의 권세는 물러갔습니다. 병마는 떠나갔습니다. 이제 저희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넘치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시고 은혜와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십니다. 소망이 되십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는 위대한 능력이 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오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십니다.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겠네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구원의 기쁨일세 ♬
♬ 내 사랑하는 그 이름 예수 복된 예수 내 귀에 음악 같도다 예수 복된 예수
아 귀하다 그의 이름 갈보리 산에 어린 양 귀한 생명 버리셨네 예수 복된 예수 ♬
말씀을 맺습니다. 제3계명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예배드리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언행과 심사를 항상 조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일에 쓰임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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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5:12~15
제목 : 안식일을 지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라
십계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제1~4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요, 제5~10계명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저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중 1~3계명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하나님께 대한 계명 중 마지막인 제4계명 “안식일을 지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내용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요즈음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부담스러운 계명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살피고자 하는 제4계명일 것입니다. 더구나 대형교회에서 1, 2, 3, 4, 5부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날 자기가 편리한 때 한 번만 예배드리는 것으로 성도의 도리를 다하였다는 잘못된 풍조가 번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분명히 명령합니다. 명령은 반드시 순종해야 할 의무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안식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먼저 안식일의 유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의 유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일곱째되는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복을 주셔서 안식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창2:1~3)
한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할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5장입니다. 제4계명에 대하여 말씀한 후에 본문 5:15절에서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안식일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종합하건대 안식일은 창조주되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쉬신 날이요, 우리 인생들에게 복주시는 날입니다. 한편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구원하여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안식케 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출31:13절에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안식일은 ‘나(하나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31:16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단순하게 노는 날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보내어도 괜찮은 날이 아닌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 날은 앞으로 다가올 내세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는 날입니다. 심령에 평안을 얻는 날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힘을 공급받는 날이요, 즐거운 날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렇다면 안식일은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구약의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즉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으며, 안식교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그렇다면 토요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이 비성경적입니까? 성경 말씀을 어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토요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지켰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때는 안식 후 첫날 곧 오늘의 일요일에 해당합니다.
마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아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그 외에도 막16:2, 눅24:1, 요20:1에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도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지켰습니다. 행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연보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도 고전16:2에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만약 안식교의 주장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가 제4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이들이 제4계명을 범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골2:16~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 교회가 토요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식교에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12:8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십계명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등 한 두 가지의 금기사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무려 39가지의 금기사항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씨를 뿌리지 말라, 밭을 갈지 말라, 추수하지 말라, 단을 묶지 말라, 타작하지 말라, 곡식을 까불지 말라, 곡식을 씻지 말라 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이 계명을 사람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율법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2:27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들고 지키는 계명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과,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한쪽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안식일음 범하였다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무거운 짐으로 옭아매는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4계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결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배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흙으로 돌아갈 인생에게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도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라는 은혜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한 후에 이 계명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 이렇게 바쁜 날들 속에도 주일을 주셔서 하루를 편안히 쉬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지키지만,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으면 벌을 주실꺼야.”라고 하면서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되십니까?
어떤 중년을 넘긴 분이 한번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삶과 자기의 삶을 비교해보고 무언가 심각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로는 예수 믿는 자기 친구는 어릴 때부터 하루를 쉬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일주간이 얼마나 바쁜지 일주일 동안 공부하고 사업을 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50이 넘어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쉬지 않고 살아온 자기나, 7일 중 하루를 쉬면서 살아온 자기 친구나 사는 형편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친구는 어려워도 늘 감사하며 사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해서 이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이제야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일주일 다 일하고도 요 모양이고 자기 친구는 일주일에 하루를 꼭꼭 쉬고도 저 정도라면 결국 자기만 멍청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58:13을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오전예배만 드리고 곧장 등산이나 운동하러 가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도들이 토요일 늦게까지 직장 또는 사업을 하고 주일에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교회에서 보내게 되므로 개인적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자신도 때로는 너무 육신이 피곤하여 힘들어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성도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한평생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권사님이 중한 병을 얻어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병원을 찾아가서 위로하였습니다. 그 때 그 권사님이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교회 성가대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이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고전15:58의 말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큰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본문은 먼저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그 후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제4계명은 주일 하루에만 국한된 계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지켜야 할 계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엿새동안 빈둥빈둥 놀다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주일을 지킨다면 그것은 온전하게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하여 엿새동안 힘써 우리가 맡은 일을 해야 합니다. 미리 집안 청소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해 놓고, 밀린 일을 끝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을 주일날에 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시골에 유년주일학교에 열심히 나오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이 못마땅하여 교회에 가지 못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그 아버지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네가 교회에 가려면 뒷밭의 목화를 모두 다 뽑고 가거라.” 아버지는 그 시간에 아이 혼자서 그 일을 다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자기 아이가 교회에 다녀오겠다면 집을 나섰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가 호통을 칩니다. “네 이놈, 왜 목화를 다 뽑지도 않고 교회에 가려느냐?” 그러자 아이가 대답합니다. “목화를 다 뽑았어요.” “언제?” “어젯밤에 잠을 자지 않고 다 뽑았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기의 손을 펴서 아버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의 손은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였다고 회개하고 그 아이와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훌륭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하여 엿새동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남들이 7일 동안 하는 일을 6일 만에 해야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살후3:10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주일날이 되면 모든 공적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오전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일을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성경 본문을 함께 찾아 읽음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렘17:25~26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사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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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5:16
제목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지난 2000년 11월 현재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65세이상 고령인구가 5년전인 1995년보다 27.7% 급증하여 총인구 4598만명의 7.3%인 337만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총인구 증가율 3.2%와 비교할 때 고령인구의 증가가 매우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혼자 살고 있는 1인가구는 총222만4000가구로 95년 대비 35.4% 증가하였습니다. 1인 가구주를 성별로 보면 여자가 127만9000명으로 57.5%, 남자가 94만5000명으로 42.5%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1인 가구주의 결혼상태를 보면 미혼이 43.5%였으며, 결혼한 후 남편이나 아내가 죽은 경우가 35.1%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두 가지 통계자료를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가정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대가족 제도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는 노인이 되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1~2명을 낳아서 그 자녀들이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 과보호로 인하여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 빠진 나머지 노인이나 부모,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매우 희박해졌습니다.
자녀들이 장성하여도 부모들을 봉양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매우 우울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며, 때로는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인하여 형제간에 다툼이 발생하는 슬픈 장면을 목격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딤후3:1~5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가 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특히 2절에 ‘부모를 거역하며’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세상 말세가 되면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살필 십계명 제5계명의 내용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 계명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모든 계명에 우선하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엡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면서 창1:28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공동생활체는 바로 가정이며, 이 가정의 중심에 아담을 세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국가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영적 통치기관의 직임을 감당케 하셨고, 국가를 통하여 세상의 악과 무법을 저지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5계명은 가정의 부모 뿐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와 국가의 통치자에게 공히 해당될 수 있는 계명인 것입니다. 저들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과,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돌로 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우리에게 생명과 육체를 전달한 분입니다. 어려서 부모와 헤어진 자녀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만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면서 감탄하는 것은 “어쩜 저렇게 붕어빵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피와 외모와 골격과 성격까지 닮은 채 이 땅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온갖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잉태한 순간부터 얼마나 몸가짐을 조심하고, 태교를 하느라고 항상 좋은 생각을 품고, 감기가 들어도 약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등 대단한 정성을 들입니다. 드디어 10개월만에 아기가 태어날 때면 어머니는 많은 피를 쏟으며 해산의 고통을 감수합니다.
아기가 태어난 순간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아기를 돌보고, 희생적으로 아기를 위하여 뒷바라지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없이 인색하면서도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아니하고 주는 것이 부모님들입니다. 자녀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둘째,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사와 3년간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는 성장기의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눅2:51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최초로 기적을 베푸신 현장도 가나의 혼인잔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를 불신자들보다 더 잘 공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소위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막7:11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육신의 부모를 돌보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르반 제도에 대하여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육신의 부모에 대하여 등한시하는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5:8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성도 중에는 교회 일을 한다고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특히 가족, 부모형제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실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인가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자주 문안전화를 드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최선을 다하여 노후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형제자매와 다투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들이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비록 많은 용돈이나 선물을 받지 못하였더라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시133:1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아름답게 보시지만 부모님들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옛 시조에 이런 것이 있지요.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길랑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다시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
그렇습니다. 다른 계명은 내가 사는 날 동안 회개하고 고칠 기회가 있습니다만, 제5계명은 조금 다릅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고, 회복이 불가능한 계명이므로 그 계명을 지키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 될 것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자에게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복이 임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마다 잘되고, 복받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지금 하는 일들이 잘 안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에 자신을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축복받는 비결, 장수하는 비결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가 이 계명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우리의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기만하면 하는 일들이 다 잘될 것입니다.
그리고 갈6:7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모를 잘 공경하라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부모공경의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5계명은 자기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와 세상의 통치자에게도 해당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영적 아버지입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와 같은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지도해 주는 모든 분들을 이렇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섬겨야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여 권면합니다. 자신의 일에 바쁜 중에도 심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죄가운데 빠졌을 때 마치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금식하여 기도하며 함께 아파하고, 최선을 다하여 섬기려고 합니다.
물론 교회의 지도자 역시 사람이기에 부족한 부분도 있고, 실수도 있고, 연약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제5계명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방법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공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덮어주고 장점을 찾아서 인정해주며, 그의 연약한 부분을 위하여는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불신자들 앞에서 지도자들을 헐뜯거나 비방하는 말을 하여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목사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살전5:13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보람과 상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이제 저희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며, 그의 옛적 삶이 변화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선물이나 보상이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의 면류관이요 상급입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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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5:17
제목 : 살인하지 말라
얼마 전 TV를 통하여 매우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습니다. 생활고와 빚에 시달린 한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한 아이가 “엄마, 나 죽기 싫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그랬겠냐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자녀의 목숨까지 빼앗아간 그 어머니의 행동에 화가 납니다. 이제는 자식이 부모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언제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할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생명이 있는 동물과 물고기,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 즉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다른 생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마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입니다.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 신분이 비록 비천하며, 몸이 병들어 연약할찌라도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죽겠다’라고 불평하며 낙심하는 것은 결코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대학생이 쓴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300만부 이상 팔렸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오토다케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대학생이 되기까지 점차 성장하는 동안 팔과 다리는 겨우 10센티 정도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다케는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후,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 정경부 정치학과에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오토다케 청년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오늘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을 직접 죽이는 살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의 기원과 동기
먼저 성경에서는 살인이 어디로부터 기원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요8:44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중에서 특히 ‘마귀-욕심-살인한 자’라는 단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죄는 다름아닌 마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미혹하여 그 마음속에 욕심을 불어넣고, 이로 인하여 미움과 다툼이 생기게 하여 마침내 생명을 빼앗고 피를 흘리게하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이 처음에는 매우 작은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유익만을 먼저 추구하여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고 하다보니 다른 사람과 마찰과 충동이 생깁니다. 이 때 미움이 생기게되고, 미운 감정이 점점 발전하여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현장으로 가 봅시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에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께 제사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므로 어린 양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창4:5에 보면 그 때 아벨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안색이 변하였을까요? 먼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와 미움이 가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마침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무서운 살인의 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미움과 살인은 같은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10년 전부터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다면 그 사람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살인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놀라는 표정이 아니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살인죄를 범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 죄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살인죄에 대하여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미움도 분명히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미움의 감정은 미움의 대상자보다 먼저 내 심령이 죽고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속에 미움의 생각을 버립시다. 미움의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용서요 사랑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죄를 범한 결과
이제 살인죄를 범한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인의 죄를 범한 자에게는 세상의 법으로도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가장 중한 벌이 가해집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보겠습니다.
11절 :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동생을 죽인 가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저주받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12절 : “땅이 저주를 받아서 밭을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14절 : “다른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의 죄를 지은 자에게는 이토록 무서운 심판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의 종류
이제 6계명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살인의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살인’과 ‘간접 살인’입니다. 직접 살인이란 폭력을 이용하여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간접 살인도 있습니다. 간접 살인에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과하여 삶의 의욕을 잃게 하는 것, 무절제한 삶, 음주, 흡연, 마약을 하는 행위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요소들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은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문처럼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도모하며,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의 6계명
이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마22:36)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시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제6계명은 내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아프면 아무리 돈이 없고 어려워도 좋은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받고, 약을 사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무관심이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째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원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 아담을 지으신 후에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않아서 여자 하와를 ‘돕는 베필’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한 사랑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자마자 부부사이에 금이 생겼습니다. 선악과 잘못에 대하여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란 정말 믿지 못할 존재입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입게 되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찾아오시도록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약5:20에서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참 생명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속에 영접하도록 초청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이 일에 수종든 성도마다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살은 죄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맞습니다. 맞고요” 다른 계명은 비록 내가 연약하여 어겼을지라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회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은 다시 회개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살한 사람의 이름이 4명 등장합니다. 구약에 사울왕과 그의 신하 아히도벨, 단7일동안 이스라엘의 왕노릇한 시므리-이상 3명이며, 신약에는 가롯 유다 1명입니다. 이 이름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을 줄 압니다만 공통된 점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명이라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요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요,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하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족, 친지, 이웃 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줍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다하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낙태
요즈음 10대 미혼모의 임신과 낙태 수술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쾌락과 방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낙태는 분명히 살인행위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된 순간부터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비록 어머니 뱃속에 있지만 그 태아는 분명히 살아있기에, 생명이 있기에 개월(個月)수가 점점 지나면서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비록 출산되기 전의 아기라도 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낙태수술은 대체로 음성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지만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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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명기 15:8
제목 : 간음하지 말지니라
얼마 전까지 MBC TV 월화 드라마 “옥탑방의 고양이”가 방영되었습니다. 드라마의 내용은 두 명의 남녀가 한 옥탑방에 함께 동거하다가 마침내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발생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끝난 후 젊은이들 사이에 “일정기간 동거한 후에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풍속도가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청주대 학생생활연구소가 대학생 263명을 대상으로 동거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8.7%인 23명이 ‘실제 동거를 했거나 동거 중’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동거를 하는 이유 중 1위는 “성과 동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완화와 부모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요즈음 청년들은 결혼과 남녀간의 성관계 등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하루 평균 23통의 음란성 스팸메일을 수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6월5일자 조선일보 기사 내용에 의하면 이러한 음란 싸이트 운영자의 20%가 중.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경기경찰청이 지난 5월 음란성 인터넷을 운영한 혐의로 입건한 174명 중 36명이 중. 고등학생이었다고 하며, 어느 포르노 인터넷 싸이트에 가입한 회원의 인적사항을 확인한 결과 여중생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또 얼마 전 우리나라 10대 중. 고등학생 중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런 일들을 다른 집의 아이들 이야기로 생각하여 강건너 불보듯 할 사항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곳, 어쩌면 부모의 그늘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바로 우리 자녀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시켜야 하며, 또한 우리들이 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현대는 성적으로 크게 문란하고 혼란한 시기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죄가 아닌 듯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특히 간음죄가 처음에는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옵니다. 간음의 죄를 범하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야”라는 사탄의 달콤한 음성에 꾀임을 받아 마침내 가정이 파탄하고 불행을 경험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세상 충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결코 변치않고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간음하지 말찌니라”는 하나님의 단호하신 음성이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음성을 듣기를 거절한다면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7계명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제7계명은 마음의 정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행한 행위의 결과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범죄의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속에 그 죄를 초래할 수 있는 나쁜 생각을 품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이미 우리가 그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마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다른 여자와 건전하지 못한 관계를 맺거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음란한 생각을 품기만 하여도 이미 행동으로 간음한 죄를 지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간음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죄악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면 죄악된 행동으로 발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미움의 생각을 품으면 살인하게 되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싹은 처음부터 즉시 잘라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이성에 대하여 가족과 같이 사랑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만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그러해야 하지만,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상호간에 이러한 마음의 정조를 잘 지켜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는 남자와 여자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와 성도, 목사와 성도 상호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되, 세상적인 정욕으로 대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5:2)고 하였습니다.
다음, 우리가 마음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는 정결하지 못한 말을 삼가야 합니다. 저속한 유머나 음담패설, 다른 사람의 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희롱하는 말을 해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말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계속하여 부정적인 말, 원망의 말을 하면 우리의 삶도 부정적이고 원망스러운 일이 자꾸 생깁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비판하는 말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마치 자기는 잘못이 없는 의로운 재판관인 것처럼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항상 긍정적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말을 하게 되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기뻐지고 상대방에게 힘과 용기를 주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음란한 생각, 음란한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우리의 행동도 또한 그렇게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다음, 우리가 마음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는 보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하였을 때 하와가 사탄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열매가“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창3:6) 마침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행동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에 음란한 비디오, 음란 잡지 등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음란하고 폭력적인 TV 드라마나 음란한 인터넷 등을 보지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마음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는 나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환경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 시조에도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가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흰옷에는 검은 때가 쉽게 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나쁜 물은 금방 듭니다.
시1: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죄에 오염되기 쉬운 환경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도망쳐 나옴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있는 곳 주변에 이런 요소가 있다면 제거하시고, 제거하기 어렵다면 멀리 피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제7계명은 몸의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몸의 순결을 지켜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결혼 전에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거나, 결혼한 이후 부부 이외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합니다.
다른 죄는 모두 몸밖에 짓는 것이지만 간음죄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고전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고전6:16~17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죄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셋째, 제7계명의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영적 순결을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실 때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호1:2) 이것이 도대체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뇨?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는 영적 간음죄를 범하고 있으므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함께 살아가는 남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순결한 신부라는 것이지요.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순결함을 유지하고 모든 준비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은 모두 신랑되신 예수님의 좋은 신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영적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두아디라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인하여 칭찬을 받았으나, 음행하는 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2:20~21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만약 그런 모습이 있다면 즉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믿음의 기름을 준비하고 늘 단장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7계명은 결혼생활의 순결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최초의 제도는 바로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으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놀라운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두 부부가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며, 결혼생활의 순결함을 통하여 서로에게 신뢰와 사랑을 더욱 꽃피우게 하며, 아름답게 연합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만약 결혼생활의 순결이 파괴될 때 그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불행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창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후사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원하는 자식을 얻었으니 그 가정에 웃음꽃이 피고 행복해야 하겠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을 잉태한 이후부터 여종 하갈은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였고,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사라 두 부부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얼마 후 아내 사라도 이삭을 아들로 얻었지만, 그 갈등이 해소되지 않자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는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들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사람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가정은 반드시 행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가정을 이 땅의 천국과 같이 만들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히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순결함이 없다면 한 집에 살고, 법적으로 부부일지라도 무덤과도 같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계21:8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뜨릴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 그렇습니다. 모든 죄가 다 멸망에 이르게 될 죄이지만 이 본문 속에서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영적 가족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상호간에, 목사와 성도 상호간에 이 제7계명의 내용을 목걸이처럼 항상 마음속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계명을 망각하면 반드시 불행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다윗왕도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일에 승승장구하였으나, 간음죄를 범한 이후로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하였습니다. 밧세바에게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 죽었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자기를 죽이려 하자 맨발로 도망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제7계명을 지키지 않아 멸망당한 사례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6:2에 보면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성적으로 크게 문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홍수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도 이와 같은 원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간음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루사이에 23,000명을 죽이셨습니다. (민25:1~9)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와 같이 간음하지 말라”(고전10:8)고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삼아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지키고, 신랑되신 예수님이 오실 때 부끄럽지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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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명기 15:9
제목 :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최근 시대상을 말해주는 은어(隱語) 중에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직장인 나이 45세가 되면 정년이며, 만약 56세까지 퇴직하지 않고 있으면 도둑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렵다보니 젊은이들은 취직할 곳이 없어 아우성이고, 회사는 회사대로 인건비가 적게 드는 젊은이를 채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직장에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45세 정년’은 당사자에게는 매우 가혹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부모 나이 40세에 접어들기 시작할 즈음이면 자녀들이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에 해당되어 교육비와 결혼비용 등 지출이 가장 많을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또 얼마 전 신문을 보니 “학력 차등보다 연령 차등이 더 서럽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고졸 출신이 대졸 출신에 비하여 취업하기 어렵고, 월급도 상대적으로 적은 학력 차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대학교에 갈려고 혈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학력 차등보다는 연령 차등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마흔살만 넘어가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회사에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있고,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육신의 것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살펴 볼 내용은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경제활동과 타인의 재산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축복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열매가 풍성하여 수고하지않고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여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하셨으며, 아담에게 “네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얻게 될 것이다”(창3:17~18)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한대로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고한대로~’
그런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또는 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한대로 우리에게 소산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복권을 사서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목사님은 소유에는 다음 3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소유이며, 둘째 이웃의 소유, 세 번째로는 자신의 소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소유와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제8계명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것이란 하나님의 날, 즉 주일입니다. 우리가 이 날을 도적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이레되는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날은 세상의 일을 모두 쉬고 온전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드리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것이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물질입니다. 말3장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였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말3:8a) 그러나 저들의 반응은 마치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습니까?”(말3:8b) 그러자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3:8c)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 곧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과 같다는 것 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드릴 정도의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서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온전히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면 이런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0b~12)
모두가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십일조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물질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생각을 가지면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제8계명은 이웃의 소유에 대하여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웃의 것을 수고하지 않고 가져오는 것이나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수고함으로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도적이요 강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흥청망청 카드를 긁고 다니다가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도적질하고, 강도질하고, 어린 아이를 유괴하는 행동을 초래하여 마침내 그 불행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물건을 팔 때 잘못된 저울로 양을 속이거나, 품질을 속이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입 농수산물을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고가로 팔거나, 유통기한이 경과한 식료품을 팔거나,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과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품삯을 정하여 일을 시키고 주지 않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 불법 체류 중인 동포나 외국인들을 고용하여 인간 이하의 일을 시키고, 제때 돈을 주지 않는 악덕 기업주가 많다는 보도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과 중국 동포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저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면 저들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하고, 또한 복음이 그 곳에 전해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들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역을 하는 교회가 있으며, 앞으로 저희 교회에서도 저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는 행위도 도적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뇌물은 공평 정대한 판결을 하지 못하게 하고,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몰래 주고받은 뇌물이 그만 백일하에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소유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뉘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한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소유물에 대하여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종 은사와 물질을 잘 관리하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내용이 포함됩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요, 둘째는 지나치게 허비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지나치게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과 건강과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선용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리와 사해가 있습니다. 갈릴리바다는 상류에 있는 헐몬산 꼭대기에 쌓인 눈이 녹으면서 그 물이 흘러들어온 후, 다시 사해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갈릴리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는 맑고 생명이 넘치는 바다입니다. 반대로 사해는 흘러들어온 물을 받기만 하고, 내어 보내지 않아 염분이 높고 물고기가 도저히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또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나치게 허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 IMF 때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공원으로, 산으로, 노숙자로 쏟아져 나오는데 일부 돈 많은 사람들이 호화 사치품을 사들이고, 해외여행이다 골프다 하여 흥청망청 돈을 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웬 간섭인가?” 그러나 이러한 풍조는 분명 잘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을 아노라”(고전8:4)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3:13)고 말했습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형제로 실족치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제8계명을 지킬 수 있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의 마음에 불평이 생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에서 비롯됩니다. 평상시 15평 아파트에 살면서도 불편을 몰랐다가 친구가 살고 있는 45평 아파트에 다녀온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초라해 보이고 이로 인하여 “내 팔자는~” 하면서 불평이 생기고, 돈을 제대로 못 벌어 오는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한번도 자신을 위하여 돈을 모으시거나 집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9:5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우리 이웃들 중에는 정말 좁은 곳에 살면서도 불평함이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지하도로, 공원으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로 행복을 측정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자식의 생명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뛰고 흥분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비천하게 볼지 몰라도 우리는 대단한 존재임을 기억하시고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롬8:31 이하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으니라” 할렐루야!
이제 도적질하지 않기 위한 아더 핑크 목사의 권고내용을 소개함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첫째, 도적질하지 않기 위하여 정직한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하는 일이라도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죄를 짓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그 직업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은 우상숭배로 가득 찬 갈대아 우르지방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1:1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이 왔을 때 그 자리에서 도망침으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제가 섬겼던 교회에 어느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호텔 슬러트 머신에 게임 승부를 조작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업으로 한동안 많은 돈을 벌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셨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못할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어 그 이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않았을 때 어느 호텔로부터 3천만원을 줄테니 다시 와서 함께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삶이 궁핍하고, 교회생활도 초보단계였으므로 처음에는 무척 번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그 일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란 것을 깨닫고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은 지속되었지만 그 집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은 그 교회의 장로로 피택을 받았고, 목사님과 함께 교회의 행정과 사무, 심방 등을 담당하는 동역자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정직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데 타인의 행복을 먼저 추구함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대항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 속에 탐심이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도적질하지 않기 위하여는 궁핍한 자를 구제하고, 손으로 수고하여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엡4:28을 보면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에게 주면서 사는 축복, 타인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사는 인생, 이런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또한 부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늘 충만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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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명기 15:10
제목 : 거짓증거하지 말라
여러분들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세 명의 천사를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찾아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들이 지구에 내려와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열심히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 중에 한 천사가 예쁘게 활짝 피어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이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다른 천사는 티없이 해맑은 웃음을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이 아이의 웃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 천사는 갓 태어난 아기를 가슴에 품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젖을 먹이고 있는 젊고 아리따운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해진 기한이 되자 천사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한 가지씩을 보자기에 싸서 하나님 앞으로 모였습니다.
제일 먼저 꽃을 가지고 온 천사가 자신만만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보자기를 여는 순간 처음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웠던 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어 색이 시커멓게 변하였으며, 향기대신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두 번째로 어린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가지고 온 천사가 자신의 보자기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보자기를 푸는 순간 어린아이의 티없이 해맑은 모습 대신 음흉한 미소와 어두운 표정의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타락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그 때 마지막 천사가 자신의 보자기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보자기를 푸는 순간 젊고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쭈글쭈글한 노파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랫동안 지나면서 그 젊고 아리따운 모습은 늙은 노파의 모습으로 변했지만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며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평생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인생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바뀝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면 그 세상이 마지막 날 불타게 될 때 우리도 함께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0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는 아무리 힘든 일도 기쁨으로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지고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1계명 :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지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내 인생 최대 최후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 인생은 찬란하게 꽃이 핍니다. 사람은 나를 배반할 때가 있고, 어떤 사랑은 내게 짐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제2계명 : 내 앞에 우상을 만들지말고, 거기 절하지말며 섬기지 말라 입니다.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우상으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진리가 되시는 분이신데 우상은 거짓이요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3계명 :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게 일컫지말라 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입술로만 나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은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과 만나는 데이트 날짜(안식일, 주일)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날이요, 예배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제5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나 만나는 부모에 대한 태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짓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되, 그 공경을 사랑함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제6계명 :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이는 이웃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과 인격을 향하여 폭력을 행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리가 의지하거나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대상인 것입니다.
제7계명 : 간음하지 말라 입니다. 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가정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대상인 남편과 아내를 배반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8계명 : 도적질하지 말라 입니다. 이는 자신의 경제활동이 소중하듯이 다른 사람의 경제활동도 침해하면 안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희들은 각종 이권과 재산 문제로 인하여 이웃과 부모형제간의 사랑에 금이 가는 사례를 많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예) 현대그룹 정씨 일가의 왕자의 반란 사건
이제 이 시간에는 제9계명 : 네 이웃에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입술과 혀로 짓는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계명도 사랑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법정에서 말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모양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렇게 기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통하여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입술의 찬양을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그 입술로 남은 저주하고, 악독을 말하며, 거짓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을 때 아담은 너무 좋아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후 아담은 사랑을 고백하였던 입술로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저 여자가 내게 선악과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입으로 더운 바람과 찬 바람을 내뿜을 수 있는 것처럼 한 입술로 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마디로 낙심 중에 있는 사람이 힘을 얻기도하고, 우리의 말 한마디에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비수와 같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13:36~37에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이 너를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네가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농부가 부지불식간에 씨를 땅에 떨어뜨려도 싹이 나듯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한 말에 대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혀는 참으로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는 노련한 조련사가 길들이지만 사람의 혀는 어느 누구도 쉽게 길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사람의 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약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그런데 사람의 입의 구조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입속 상하에 이빨이 있고 그 가운데 혀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만약에 우리의 혀가 거짓말을 하면 위쪽과 아래쪽 이빨이 혀를 꼭 깨물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혀를 제어하고 입술의 말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속사람이 변하면 됩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이 트림을 하면 고약한 냄새가 풍겨나오듯이 우리의 속사람이 죄로 가득차 있고, 미움과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사람의 입술을 통하여 불평과 저주의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변하면 우리의 말이 변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이 감사와 찬송으로 변합니다. 거짓의 말이 변하여 진실한 말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속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요? 수양과 훈련으로 조금 개선되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령님께서 내 맘에 찾아오셔야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은 후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이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시고,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고 우리의 말이 변화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9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짓증거를 하면 안되나요?
첫째,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시31:5)이시며 거짓이 없으신 분(딛1:2)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8:44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우리의 입술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실하신 하나님처럼 진실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거짓은 눈덩이와 같아서 거짓을 감추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한 뒤 그 죄를 감추기 위하여 우리야를 죽이는 살인의 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거짓이 드러나면 이를 감추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남을 해하려고 거짓말하거나 험담하거나 중상 모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중상하는 것은 혀로 짓는 살인죄”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흉을 보고,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명예를 훼손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남의 실수를 고자질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이지만, 남을 거짓으로 중상하는 사람은 세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중상을 당하는 사람이요, 다음으로 이 말을 듣는 사람이요, 마지막으로 중상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어려움에 빠지면 혹 나 자신에게는 그런 연약한 부분이 없는지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족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고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15:1~4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말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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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명기 5:21
제목 :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오늘 십계명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하였습니다. 마지막 계명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10주 동안의 과정을 잠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첫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위대한 선지자들의 능력을 봅니다. 엘리야는 그가 기도한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제단위에 놓인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가 하늘이 문을 열어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다가 다시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행하신 기적과 같이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였더니 죽었던 시신이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문둥병자가 그 분 앞에 나올 때 깨끗함을 받습니다. 소경이 눈을 뜹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위대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분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않던 우리의 욕심이 그 말씀 앞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돌려서 십계명을 봅니다. 그 계명 하나하나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눈길과 섭리를 봅니다. 여러분들은 십계명을 볼 때마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십계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죄인이고 무력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신 말씀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여 계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구원받을 수 없는,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면서 ‘참으로 나는 죄인이다. 나의 능력으로는 노력으로는 이 계명의 어떤 것 하나도 바로 지킬 수 없다’라는 나의 무력감과 부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마련하신 놀라운 해결 방법, 즉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없는 삶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원리를 따라 십계명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로 생각해 보면,
제1계명은 유일한 사랑의 대상 하나님, 하나님 그분만이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십니다.
제2계명은 사랑의 올바른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만든 어떤 형상이나 이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찾아오시는 구원의 방법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니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3계명은 사랑의 올바른 태도를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찬양, 습관적인 예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의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오직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합니다.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날은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확인하는 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날, 우리가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위로와 은총으로 우리 앞에 임재하여 오시는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는 날로 창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제5계명은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는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처음으로 만나는 부모와의 인간관계가 우리의 신앙과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니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제6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함에 있어서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을 폭행하고 죽이는 것은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요 범죄인 것입니다.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네 이웃의 가정을 보호하라는 것과, 나아가서는 부부생활에 있어서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은 네 남편이요 네 아내라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거역하면 가정의 행복이 깨어지고 사랑의 배신감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터전인 다른 사람의 재산, 물질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도적질하지 말고 오히려 남을 구제할 수 있도록 힘써 일을 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9계명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입으로 하는 범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제 10계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세상의 법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어떤 구체적인 행위가 이루어졌을 때 그 행위에 대하여만 처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생기는 탐심을 금할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언제나 탐심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느니라”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왕상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나이다”
대상28:9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겉모습으로 마치 쇼(show)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경건한 겉모습은 갖추고 있으나 마음 중심에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을 향하여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기도하고, 은밀하게 구제한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의인들은 자기가 행한 의로운 일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주여 언제 우리가 그랬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우리가 돌아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찾아갔으며, 굶주렸을 때 먹게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혔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곧 내게 대하여 한 것이다.”
다른 한편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적도 행했고, 주의 이름으로 복음도 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십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아십니다.
한편, 이 계명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확인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세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연봉을 받는지 금액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판단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계명을 살펴봅시다. “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하였습니다. 온 천하보다, 온 우주보다 나의 생명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십시오. 이 분이 어떤 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내 옆에 앉아있는 바로 이 분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탐심입니다.
그 탐심 때문에 이웃 사람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도적질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고하게 거짓증거를 합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고통을 주는 범죄로 연결되어 집니다. 이웃을 향한 모든 범죄의 시초는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이 자라면 행동으로 옮겨지고, 또 끝장을 보는데 까지 계속 성장합니다.
아담의 탐심은 에덴동산의 모든 풍요를 일순간에 잃어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외투와 은을 몰래 감춘 아간의 탐심은 가나안 복지에 입성해서 첫 범죄자로 그 영광을 먹칠해 버렸습니다.
사울왕은 황소 몇 마리를 탐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롯 유다는 은30개와 자기의 선생이신 예수님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그러면 우리가 이 탐심의 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 믿음으로 이깁니다.
요일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인데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탐심에서 이기게 만듭니다.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중의 새보다, 들의 백합화보다 못합니까? 무가치한 존재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을 통하여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불경기를 맞이하고, 때로는 실직을 당하고, 건강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안심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돈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만족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코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며 돈을 지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옷을 다섯벌씩 껴 입지 못합니다. 하루에 10끼씩 먹는 것이 아닙니다. 가져도 가져도 늘 부족합니다.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처럼 만족함이 없습니다. 더 갈증만 생길 뿐입니다.
정주영 회장이 살아계실 때 어떤 목사님 일행이 그 분의 식사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고급 음식을 차려놓고 함께 식사를 할 때 정 회장이 잠시 안쪽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초대받은 그 목사님은 ‘아마 따로 좋은 음식을 준비해 놓고 혼자서만 먹을려고 하는가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죽을 먹고 있었답니다. “내 속이 안 좋아서 기름진 음식을 못 먹는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을 먹은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겨우 하루에 세 끼 죽만 먹는 재벌” 그 이후로 자신이 비록 재물이 많지않아도 하루 세 번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강 주심을 감사하였답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이니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영적인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니 영원히 살아갈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날마다 쌓아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주신 것에 대하여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6장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환경이나 소유나 여건에 의하여 우리의 행복이 지배받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진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지만 우리 성도는 우리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보십니까?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바로 우리의 것임을 믿으십니까? 더욱 감사한 것은 그 영광스러운 천국에 무가치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순간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영광의 하나님의 보좌에서 천국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탐심을 물리치십시오.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서 “주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옵소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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