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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이란 무엇인가?

에반젤(복음) 2020. 2. 15. 01:24



십계명이란 무엇인가?



( 출처: 백금산목사 기초신앙시리즈02 십계명 편 )



나는 십계명 중에 몇 개나 기억하고 있는가?


얼마 전, 주일 오전예배 시간에 십계명을 연속적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십계명 설교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에 저는 임의로 회중들 중 몇 사람을 지명하여 “십계명을 순서대로 암기해보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지식은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미 분명하게 암기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명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5개 이상씩은 기억했지만 십계명을 순서대로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비록 무작위로 지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머지 회중들도 대동소이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1988년 미국 갤럽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15%만이 다섯 개 이상을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상황은 미국교회에서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지금 잠깐 독서를 멈추고 십계명을 순서대로 한번 암송해 보십시오. 몇 개나 암송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순서대로 알고 있습니까? 십계명을 순서대로 암송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십계명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십계명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십계명에 대해 무지하고, 교회가 십계명을 무시하고 있다면 이는 아주 불길한 징조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가 없거나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 기독교에 대한 기초 교육을 시킬 때, 주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의 내용들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사도 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요약이고, 주기도문은 기독교적 가치관의 정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 믿는 초신자에게 사도신경의 기본 교리와 십계명의 기본 윤리, 주기도문의 기본 사상을 철저히 가르쳤던 것입니다.







왜 현대 교회는 십계명을 무시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왜 대부분의 현대교회가 십계명을 무시하게 되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교회 밖의 문제 때문입니다. 즉 현대 교회가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의 시대풍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사상적, 문화적 풍조는 절대 진리, 절대 도덕을 원천적으로 거부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상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중의 하나는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진리의 영역에도, 도덕의 영역에도 모든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절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원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진리요, 상대적인 도덕일 뿐입니다. 교회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세상의 시대 풍조에 깊게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절대적, 객관적인 삶의 법칙인 십계명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현대 교인들은 내적치유, 은사, 축복 등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라는 객관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보다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본래 죄의 본성이 이기심이요, 자기중심성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며, 이타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나의 모습이 개인적인 문제,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문제에 치우쳐 있다면 이는 우리가 그만큼 죄의 지배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 안의 문제 때문입니다. 즉 현대의 많은 교회는 성경에 대한 무지, 특히 신학에 대한 무지가 아주 위험수위에 까지 도달해있습니다.

매주 교회마다 빠짐없이 설교가 행해지고, 매주 구역모임과 각종 모임에서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반적으로 성경지식과 신학지식이 황폐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십계명에 대한 전반적인 무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교회사, 특히 종교개혁 시대와 청교도 시대의 성도들은 십계명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요약으로서,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목적은 십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십계명을 구원을 수단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지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성도들의 행복한 삶, 성도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삶의 법칙이요, 삶의 원리요, 삶의 매뉴얼’이라는 것을 알고, 십계명의 내용을 충실하게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사의 그 어느 시대보다 거룩한 교회가 되었고, 사회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무시하는 오늘 우리 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역사적인 참교회의 전통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십계명이 우리 삶의 ‘법칙이요, 원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십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 해군 교재에 실려 있는 다음의 실화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 훈련함대에 배속된 두 대의 전함이 수일 동안 계속되는 폭풍우 속에서도 대대적인 해상 기동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시야는 불분명했고, 이 때문에 선장은 모든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계속 함교에 남아 있어야 했다. 완전히 어둠이 깔렸을 때, 함교의 앞쪽에 근무하던 감시병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른쪽에 불빛이 보입니다”

“불빛은 가만히 있는가? 아니면 배뒷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고 선장이 소리쳤다.

감시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장님”하고 대답했다.

이는 곧 배가 충돌할 수 있는 코스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장은 신호수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저쪽 배에 항로를 20도 바꾸라고 지시하라”

그랬더니 그쪽에서 이렇게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으니 당신들이 항로를 20도 바꾸도록 하시오”




선장은 다시 말했다.

“나는 선장이다. 너희가 20도를 움직여라”

다시 응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안됩니다. 선장님이 20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선장은 대단히 화가 났다.

“우리는 전투함이다. 당장 진로를 20도 변경하라.”

그러자 다시 응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등대입니다.”




그러자 선장은 즉시로 항로를 변경하였다.”







세계적인 리더십 연구가 스티븐 코비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것을 ‘등대원칙’이라고 부릅니다. 코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와 역사에는 ‘자연법칙’이 있으며, 이 자연법칙은 우리 삶의 원칙으로서, 우리가 원칙을 바꿀 수 없고, 반대로 우리가 원칙에 따라 살 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스티븐 코피의 책은 수많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서 자신이 발견한 이러한 7가지 삶의 원칙을 우리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등대 이야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의 항구를 떠나 천국의 항구에 도달하기까지 우리 인생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주신 ‘등대’와 같은 우리 삶의 ‘원칙’입니다. 십계명은 우리 인생을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10가지 원칙입니다.







십계명의 뿌리




십계명이란 무엇인가? 십계명은 오늘 우리 성도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십계명의 원천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언제 어디서 왜 생겨났는가? 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십계명이 교회사에서 미친 영향이나 십계명이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십계명의 성경적 위치, 성경적 근거, 성경적 중요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은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




십계명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만든 것일까요?

십계명의 기원은 지금부터 3500여 년 전, 주전 1500년 경 모세가 살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바로왕의 지배아래 약400년 간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전 2000년경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방, 당시 갈대아 우르라 부르던 지역에 살고 있던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불러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인 가나안땅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가나안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은 애굽으로 내려가 약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습니다(창15장).

하나님의 이 예고에 따라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 시대에 야곱의 후손 70여명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야곱의 식구 전부를 애굽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들은 요셉의 사후에 애굽의 종노릇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모세라는 인물을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태어나게 하시고, 모세를 통해 바로의 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한지 3개월째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언약식이 맺어진 것입니다. 모세를 중계자로 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언약을 맺는 언약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공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식이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맺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독특한 공적인 관계, 친밀한 관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이 언약식으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할 법률이 필요했습니다. 이 법률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법, 의무와 책임으로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요약과 핵심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즉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모든 율법의 모법이 되는 헌법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실 때, 십계명부터 주셨으며, 또한 다른 율법은 구두로 전해주셨으나, 이 십계명을 친히 돌 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십계명의 특별한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성경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31:18).

그런데 왜 십계명을 두 돌 판에 새겨 주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의 내용 중 한 돌 판에는 1-4계명까지, 다른 돌 판에는 5-10계명까지 새겨서 주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모세 당시 국제조약법의 관습을 고려해 볼 때, 오히려 이 두 돌 판은 주권국과 봉신국에 각기 계약서를 한 부씩 보관하던 관례에 따라 같은 십계명의 내용을 2개 작성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두 계약 당사자가 계약서 2부를 작성하여 각각 한 부씩 보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의 두 돌 판은 시내산 계약의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영원히 보관해야할 계약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율법은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전체 613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613개의 율법은 줄이면 10계명이 됩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내용상 2개로 구분됩니다.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 계명이며,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계명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되며, 5-10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증명이 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도 바울도 사랑이 십계명의 요약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즉 십계명의 내용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이라는 기본적인 윤리를 확대하면 십계명이라는 헌법이 되고, 십계명을 다시 확대하면 613개의 구체적인 법률조항이 됩니다. 그리고 이 613개의 율법은 더욱 더 구체적인 상황에서 수천, 수만 가지 하위 법률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613개의 율법조항은 기본적으로 도덕법, 종교법, 시민법으로 나누어집니다.

도덕법은 십계명을 말합니다. 종교법은 제사법을 말합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시민 생활법을 말합니다.

이러한 도덕법, 종교법, 시민법의 중심은 도덕법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법은 십계명의 1-4계명을 확대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바로 성막과 제사법이 포함됩니다. 또한 사회법은 십계명의 5-10계명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문화적 상황에 맞게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법과 시민법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종교법과 시민법의 정신과 목적은 바로 도덕법이며, 이 도덕법인 핵심이 십계명에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모든 내용은 사실 10계명으로 압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바로 율법 전체의 헌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왜 주어졌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 즉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십계명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을 얻으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라는 은유로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요,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로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결혼을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결혼배우자가 되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다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왕이 고아 소녀를 데리고 와서 왕비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신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이제 결혼을 지키기 위한 의무가 발생합니다. 결혼은 상호 동거와 정조 지킴과 상호 부양의 의무를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보호자요 인도자가 되어주셔야 할 의무가 있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하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정절의 의무를 져야 합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할 지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바로 얼마나 십계명을 지키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구원을 받는 조건(율법)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도답게 살아가는 조건(은혜의 선물)입니다.







십계명 이해의 기초인 율법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십계명은 넓은 의미의 율법의 요약이요, 핵심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역할과 기능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과 은혜(복음)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구약 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시대에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구약은 구원의 방법으로 율법을 강조하고, 신약은 구원의 방법으로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구약은 율법중심이고, 신약은 은혜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율법과 은혜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율법만 있고, 신약에는 은혜만 있다고 하는 것처럼 성경에 대한 무지는 없습니다. 구약에도 율법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신약에도 율법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구약은 율법을, 신약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성경의 일관된 강조점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은혜의 진리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란 무엇이며, 은혜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율법과 은혜는 모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율법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다른 인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에 비해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직접 행동해 주신 것을 은혜라 부릅니다. 은혜를 다른 말로 복음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이란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으로서 크게 2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고, 의의 값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100%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이런 면에서 율법은 바로 '의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의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율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율법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율법을 어기게 되면 ‘죄인이 되고 죄 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율법은 율법을 어긴 죄인에게는 반드시 그 죄 값을 요구합니다. 즉 죄의 형벌을 요구 합니다 . 이는 바로 율법의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100%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약속하지만, 율법의 저주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1가지만이라고 어기면 ‘죽음의 형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참으로 의로운 반면에 무서운 것입니다.

율법과 반대로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율법대신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2가지를 해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가 율법을 어긴 형벌을 대신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대신 율법을 100% 다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즉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도 다 해결해주셨고, 율법의 저주도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되고 해 주시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요, 율법에 대해 해방된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는다고 하는 율법의 체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자들은 이제 율법을 지키면 천국가고, 율법을 어기면 지옥가는 율법의 체계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나라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위해 죽으시고, 예수님이 우리위해 율법을 다 지켜주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으면 우리는 율법(율법을 지키면 구원받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는 시스템)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자가 됩니다. 신자는 이제 율법의 지배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를 받는자, 율법의 나라가 아니라 은혜의 나라 시민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가 율법을 세우는가?




그렇다면 은혜는 완전히 율법을 폐지하는가? 하는 질문은 던질 수 있습니다.

은혜아래 들어온 사람은 이제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의 어떤 조항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율법을 완벽하게 100%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지, 율법의 구체적인 사항 자체를 전혀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영원히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사항이요, 명령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율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세웁니다. 은혜가 율법을 세운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죄는 바로 반(反)하나님적, 반(反)율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가 우리의 왕으로 있었으니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은혜는 율법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게 해 줍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율법을 지킵니다. 이런 면에서 율법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매뉴얼, 삶의 지침이 됩니다.







21세기의 교회도 3500년 전의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그러나 율법과 십계명은 역사적으로 지금부터 35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아닌가? 십계명이 옛날 35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이라면 십계명이 오늘 우리 기독교인과는 무슨 관계에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단지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졌다면 오늘 신약시대는 모든 나라와 종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원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의 기독교인이나 동일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십계명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적 규범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사실상 십계명의 저자 직강 이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십계명의 완전한 해석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되 십계명의 본래의 정신과 목적에서 지킬 것을 재천명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잘못된 해석, 너무 좁은 해석,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십계명의 본래 정신에 따라 십계명을 해설한 것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입니다. 또한 바울서신에 나오는 모든 윤리적인 권면이 바로 십계명의 해석이요, 십계명의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답게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십계명의 정신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