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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계명강해

에반젤(복음) 2020. 2. 14. 11:33


십계명강해


I. 십계명 강해


서론

 기독교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대상을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예배하며, 또한 모든 생활의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한 까닭에 기독교 내에도 많은 교파가 있고 심지어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이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원리의 보편적인 기초가 되는 십계명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다소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인간 생활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인정하는 점에서는 쉽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전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담백한 일면을 지니고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전에 주어진 규범이므로 다소간의 해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어떤 한 부분을 해석할 때 보다 폭 넓게 성경의 다른 부분과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며 해석해야 한다. 십계명 역시 구약 다른 부분의 기록과 신약의 언급 및 특히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하여 해석할 때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한편 성경 가운데 십계명은 단순한 형태로는 출 20:1-17과 신 5:6-21에 중복되어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 계명들은 성경 여러곳에 산재되어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는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을 기준으로 하여 해설하고자 한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이 십계명은 흔히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전반부 1-4계명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지켜야 할 규례를 담고 있고, 후반부 5-10계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상호간에 지켜야 할 규례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무엇보다도 우선하여야 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성실하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사람이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 윤리의 세부 지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한 시대를 위한 법이 아니라 영구불변적인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이러한 사실은 십계명이 상세한 법규나 세부적인 규칙이 아니다 일련의 원리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즉 십계명은 어떤 상황을 전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주어진 규칙이 아니다. 십계명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따라서 아무리 환경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져도 이 태도는 달라질 수 없으며 단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이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은 다소 변경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십계명의 근본적인 원리와 더불어 현재의 상황 속에서 십계명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의 문제까지 다루고자 한다.

 애굽에서 400년간이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3개월후에 주어진 이 십계명으로 인하여 그들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죄에 종노릇하던 자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권능으로 인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사명이다. 이러난 사명감을 가진 자에게 십계명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훌륭한 이정표가 될 것이고 이러한 이정표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제1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 3)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 가운데 처음 네 계명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중 첫째 계명은 예배의 절대 유일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명시하고 있다. 마치 성경의 맨 처음이 '태초에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맨 처음도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즉 다신론적인 당시 시대 상황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신임을 천명함으로써 바른 신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십계명의 제정자이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규정하면서 시작함으로써 이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의 정당함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

 십계명의 제일 계명에는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신 참신의 이름을 두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다.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일컬어 선언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깊은 의미에 대해 알아 보자. 이 여호와(Jehovah) 라는 말은 세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져 있다. 이 세 단어는 다음과 같다. Yehi(그는 존재할 것이다), Hove(존재하도 있다), Hahyah(그는 존재했다). 이 세 단어에서, 첫 단어의 첫 음절인 YEH-(i)와 두번째 단어의 두번째 음절인(h)-OV-(e), 세번째 단어의 마지막 음절인 (hy)-(ha)-AH가 합성 되어 여호와(YEHOVAH)라는 단어가 합성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세 단어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장차 계실 분이며 지금 계시는 분이고 이미 계셨던 분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시고 영원하시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호와란 이름에서 암시되어지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영구히 풀 수 없는 커다란 신비요, 인간이 아무리 분석해도 거의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마음 속으로 미래 세대로 끝없이 뻗어나간다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은 "나는 장차 있을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사람들이 생명과 질서와 신비와 계시의 모든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현재 순간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은 "나는 지금 있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마음 속으로 가능한 한 무한히 먼 과거를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는 전에도 있었던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나, 현재 상태, 혹은 자신의 미래의 운명 그 어느 것에 대해서 생각하든지,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는 JEHOVAH" 라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벗어날 수 없다.

 첫째 계명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나아가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나님'(God)이란 말은 '엘로힘'(Elohim)으로 예배의 최고 대상을 뜻하는 '엘로아'(Eloah)의 복수형이다. 이는 '강하다', '능력 있다'란 뜻을 지닌 어원을 갖는 말로써 하나님께서는 강한 권능과 위엄을 지니신 세상의 주관자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곧 앞으로도 있고 지금도 있으며 전에도 있던 예배의 최고 대상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계시는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첫째 계명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전제 없이 이 계명을 생각하는 것은 그 계명의 중요한 의의를 쓸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첫째 계명의 이해

 만일 하나님이, 친히 주장하시듯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지금도 있으며 전에도 있었던 존재라면 그는 예배의 최고 대상이심에 틀림없다. 만일 그가 여호와 곧 사람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이 계명은 합당한 것이며 따라서 그 외에 다른 어떤 신을 둔다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일임에 틀림없다. 만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 여호와 이외에 그러한 묘사에 적합한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신을 들어 보라. 그것은 분명 제한된 존재이다.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며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먼저 자신과 자신의 영광을 선언하시고 그 다음에 이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라는 중요한 첫번째 명령을 하신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으며 절대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신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든지 생활이든지 혹은 자신이 가장 중히 여기는 곳이든지 그 어딘가에 자기가 예배하는 신이 자리잡고 있는 성소를 갖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공기가 없으면 새가 날아다닐 수 없듯이 사람은 예배하는 대상을 두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인간 생명의 기질 자체와 인간 존재의 신비가 예배의 중심 인물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활 전체가 예배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제가 성립할 때 존재의 모든 행위와 생명의 모든 활동력, 어떤 대상에 대한 능력의 헌신적인 사용, 이런 것들이다 예배 행위이다. 문제는 사람의 생명과 능력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바쳐지느냐 아니면 거짓 신에게 바쳐지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내면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을 예배하게 되거나 또다른 거짓 신을 섬기게 된다. 오늘날은 마음의 힘과 뜻을 다하여 자신을 예배하고 오직 자신만을 섬긴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언제나 신이나 왕이나 입법자 즉 자신의 계획표를 조정하며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자를 원한다. 그것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거짓 신이나 죄악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첫 계명에서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리라"라고 명하신다.


우상 숭배의 기원

 인간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잘못된 예배 대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은 우상 숭배의 기원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어 "나는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말씀하시는 자를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 곧바로 그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을 대치시킨다. 성경에 언급된 이방인의 신들 즉 몰록이나 바알, 그리고 맘몬과 같은 신들을 생각해 보라. 몰록을 예배함으로써 사람들은 몹시 잔인해졌고, 바알을 예배하려면 사람들은 짐승 같은 아주 추잡한 성적 행위들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맘몬의 추종자들은 재물에 숨어 있는 막강한 힘을 맹렬하게 추구하며 이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몰록이나 바알, 맘몬은 거짓 신들이다. 그런데 이 거짓 신들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예배하고 있는 것들이다. 비록 이 신들이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하고 계몽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지라도 세상은 그 신들을 예배하는 우상 숭배자들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실례를 보기 위매 구태여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리카나 중국 혹은 인도에 갈 필요조차 없다. 그 예는 이 나라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대도시에는 자신들의 잔인한 욕망이라는 몰록에게 인간이라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그들의 비열한 욕망이 만족을 얻는 한, 싸움에서 얼마가 많은 사람들이 죽든지 상관 하지 않는다.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바알 곧 짐승 같은 행위를 숭배한다. 이 말이 참으로 틀림없다는 것은 매일 밤 런던 거리에 팔 만에 달하는 타락한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누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가? 바알 숭배자들이다. 끔찍하고 가증한 이 정욕의 소용돌이에서 젊은 남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두려운 모든 행위가 실상은 우상 숭배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실 그렇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비너스의 전당에서 예배드리는 남자들이 바치는 충성의 맹세이다.

 맘몬 숭배도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또 다른 악한 형태의 신앙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에 때한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오늘날이야말로 첫째 계명이 새롭게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이 시대는 재물의 신에 대한 열렬한 숭배로 말미암아 저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 그래서 더러는 자기들이 앞에서 언급한 신들 중 하나를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예배가 있다. 하나는 구약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신약에 나오는데 둘 다 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 신약의 언급은 뒤로 미루고 먼저 구약의 언급을 검토해 보자.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합 1:15, 16).

 사람이 자기에게 많은 소득과 음식물을 마련해 주는 것들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맘몬의 위력을 보여 주는 슬픈 증거이다. 오늘날 하나님 대신에 자기의 사업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의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가장 빠르게 전해 줄 것이다.


 한 아이가 빵 한 덩어리를 들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너 들고 있는 게 뭐냐?"

"빵이 예요."

"어디서 났니?"

"빵 굽는 아저씨한테서 샀어요."

"그 사람은 그 빵을 어디서 구했지?"

"그 아저씨가 만들었지요."

"그러면 그 아저씨는 무얼 가치고 빵을 만들었니?"

"밀가루 로요."

"밀가루는 어디서 났지?"

"방앗간 아저씨 한테서요."

"방앗간 아저씨는 밀가루를 어디서 구했니?"

"농부한테서요."

"그러면 농부는 어디서 그것을 얻었니?"

그 순간 아이는 진리를 깨닫고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한테서요."

"그래, 그러면 너는 그 빵을 어디서 구한 것이지?"

"아. 맞아요. 하나님에게서 얻었어요. "


 결국에 가서 아이는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현명함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물질주의적인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일해서 나와 내 가족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먹여 살리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하나님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천국에 슬며시 들어갈 수 있기를 늘 바란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향하여 큰 소리로 이렇게 호통치신다. "너희는 나를 첫번째로 삼고 사업을 두번 째로 삼아라." 사람들은 그물에 제사를 해서는 안되며 초망에 분향을 해서도 안된다.


첫째 계명에 대한 신약의 교훈

 우상 숭배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빌 3:18, 19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이것은 사람들이 아주 흔히 행하는 일이나, 또한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 중의 하나이다. 즉 우리 주위에는 배를 자신들의 동물적인 욕망을 채우는 한 신으로 삼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육신의 욕망을 채울까? 이런 것들이 모두 그들의 신이다. 이런 류의 사람은 오히려 초망이나 그물에 분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위해 살며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고 또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갖다 바치는 대상이 고작 먹고 마시는 일과 그 외에 다른 형태로 단지 감정적인 만족감을 주는 일일 때 그 사람은 훨씬 초라하게 더 타락한 것이다.

 이런 일들은 만연된 우상 숭배의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적인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구히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즉 "나는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만일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헌신과 힘을 요구 하는 자리에 몰록이나 바알, 맘몬, 그물, 초망, 식욕 혹은 그밖의 다른 어떤 것을 둔다면 그들은 비록 일생 동안 매 주일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으며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우상 숭배자들이다. 사람은, 자신의 피조물로 하여금 자기 앞에 어떤 다른 신도 두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되시고 또한 각 사람의 중심이 되신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본성 자체로 볼 때도 합리적인 것이다.

 신약은 이 모든 계명을 환히 밝혀 준다. 신약은 이 계명들을 전혀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고 반복하며 새로운 뜻을 부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이 율법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 율법을 지킬 수 있을 때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나라의 법률을 지키며 사는 도덕적인 사람이 체포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성쉬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으셨다. 오늘날 기독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라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 하시고 사람들이다른 신을 섬겨도 좋다고 말씀하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점을 밝히는 신약의 빛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를 사랑하라"(마 22:37)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이 딱 한 가지 있는데 즉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당화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건히 계시하셨고 따라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계시를 알 수 있는 그러한 곳에서 살고 있다면 우상 숭배에 대한 마지막 그 변명도 결코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이 계명을 생각해 보자. 그 옛날엔 우상 숭배에 대해 구실을 댈 수 있었던 점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께서 오신 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난 백년 동안 과학이 밝혀낸 위대한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서도 우상 숭배의 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미신적인 사람들이 폭풍마다 귀신이 있다고 공상하고 번개와 천등은 설명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신비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불이나 혹은 귀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핑계거리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요즈음, 즉 사람들이 자연의 여러 가지 현상과 소리의 진상을 캐냈고 그것들은 결국 설명 할 수 없는 것도 신비 한 것도 아니며 다만 정밀한 법칙 체계의 진행 과정이며 표출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이 때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은 사라졌다. 사람이 입법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법칙의 영역 안에서 자연 현상이 설명되고, 지난 오십년 동안에 과학이 밝혀낸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찾으며 그를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마음속으로 더욱 실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신비한 것들과 마술처럼 느껴지던 것들을 과학이 일일이 다 설명해냄으로 인해, 어떤 것이든 그것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죄는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하나님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우상 숭배의 죄는 더욱 더 어두우며 그 형벌은 크다.

 사람들로 오분만 시간을 내어 다른 모든 사실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흘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생각해 보게 하라.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도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만일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하려고 한다면 그들에게 첫째 계명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고 하라. "나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만일 하나님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된다면 천국을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삶을 위해서 그들로 "모든 우상을 부숴 버리고 모든 적을 쫓아내며" 앞으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전에도 계신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라고 하라.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어떤 이들이 이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의 반복이 아니냐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반복한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의 초점이 첫째 계명처럼 다른 신들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이 금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습관적 잘못들에 대해서이다.

 첫째 계명은, 우리에게 "나는 예배의 최고 대상인 여호와 주 너의 하나님이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그 한 분 외에는 어떤 신도 두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한 분 참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서, 사람들의 예배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을 만드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둘째 계명의 이해

 과거 초창기의 일부 청교도들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만드는 것 자체가 금지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미술을 우상 숭배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적이 있다. 필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둘째 계명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집안에 그림을 걸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리가 만무하다. 왜냐하면 이 계명을 주신 후에 즉시 하나님은 성막에 속한 물건들 중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를 두 그룹의 형상으로 가리우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러 성소에 들어갈 때 입은 옷의 가장자리에도 방울과 석류가 달려 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무슨 모양이든지 만드는 것을 금지받은 것이 아니다 단지 예배를 돕는 보조물로서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받은 것이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가보면 한때는 형상들이 서 있었으나 이제는 텅 비어 있는 벽감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그 형상들이 제거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무슨 모양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앞에 불이 켜있고 예배자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이 계명의 강조점은 마지막 말씀에 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자신을 도울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은, 자기들은 형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공언한다. 또 자기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말할지라도 이것은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킴에 틀림없다.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이란, 사람이 실제로 형상이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예배를 돕는 형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 것을 돕지 못한다.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 이유

 둘째 계명을 내리신 이유를 보다 주의깊게 살펴보기 위해서, 왜 사람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그 것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 답은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매일 하나님과 교제한며 살아가는 사람치고 기도하도록 자신을 돕는 그림이나 형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주일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며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배할 때 자기들 앞에 놓인 형상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회복된 영적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는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하는데 있어서 돕는 수단을 갈망한다면, 바로 그 점에 의해서 그에게 영적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또한 이 영적 의식의 결핍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는 것을 전혀 만들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 보려고 한 시도는 지금까지 결국 다 하나님을 잘못 묘사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지라도 하나님을 잘못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게다가 그들이 예배하려고 할 때는 더구나 잘못된 그 형상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더욱 그릇된 개념을 가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깨닫도록 돕는 어떤 종류의 형상을 세우는 순간 바로 그는 하나님에게 있는 본질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 형상이 조각이나 그림 혹은 어떤 예배 제도라고 생각해 보자. 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이것은 내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돕는 보조물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무슨 짓을 했는가 그 결과를 살펴 보라, 조각이나 그림 혹은 예배 제도는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그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그의 존재는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성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는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단지 형상 자체가 거짓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 형상이 거짓되고 제한된 것이라면, 그것을 예배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하나님을 잘못 표현하고 있는 형상에 의해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사고는 그릇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우상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저희 우상은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시 115:6, 7). 이어서 우상 숭배에 대한 철학이 나온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그와 같으리로다." 사람은 다 자기가 섬기는 신과 같아진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은 것을 닮아간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우상이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는다면, 그는 자신의 신과 같이 그릇되어진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내리신 두려운 이유이다. 이것은 그저 일시적인 계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른 모든 명령처럼 영원한 원칙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무엇에든지 견주려고 하지 말라. 그러한 노력은 하나같이다 실패하게 마련이고 오히려 사람에게 끊임없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둘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현대인들에게도 과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 둘째 계명을 깨뜨릴 위험이 있는가? 물론이다. 둘째 계명을 위반하는 몇 가지 예로는 사제 제도의 부활, 종교 의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 기독교의 종교적인 의식들을 부당하게 높이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 공공연한 자연 숭배, 예배와 종교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인간 숭배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자신들을 위하여 만든,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다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실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제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마음에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일을 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영혼을 사제에메 맡길 때는 언제나 사제가 그 사람에게 형상이 되고 우상이 된다. 따라서 이런 일이 행해졌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은 왜곡되었고, 그 결과 예배하는 자들이 타락하였다.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성직자가 횡포를 부려 왔던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보라.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스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스페인의 쇠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직이, 스페인 국민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지녀 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를 않고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제 제도는 허다히 많은 악을 일으키는 여러 근원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특히 사제 제도는 지금까지 둘째 계명을 깨뜨려 왔다. 하나님은 첫째 계명에서 "나는 네 하나님이니 나를 경배하라"고 말씀하시며, 둘째 계명에서는 "내게 직접 오너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너와 나 사이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교통 외에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종교적인 의식에서도 똑같은 위험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화려한 예배, 아름답고 예술적인 환경이 진정한 예배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영적 본성에 미치는 결과는 무엇인가? 과연 어떤 형태의 의식주의에 몰입다는 사람들은 더욱더 영적으로 되어가고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생활이 성령의 열매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님의 생명력을 나타내 보이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의식주의가 진정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항시 감각으로 시작해서 감각으로 끝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순전히 미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참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거짓 미적인 것으로 포장된 신에게 가까이 간 것이다.

 같은 원리가 개신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개신교회는 많은 회중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모든 남녀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드린다. 이처럼 각 개인이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할 때, 화려한 예배 의식에 현혹된다면 과거 사람들이 새긴 우상이나 그림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우상 숭배자들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의 만찬에 있어서도 이를 단순한 기념 의식 이상의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 그러한 시도에는 아주 큰 위험이 따른다. 최근에,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주의 만찬은 참석자들의 신앙을 돕는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발설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명령하신 것처럼 주의 만찬에 참석하여 그리스도를 기억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의식이 그 이상의 어떤 신비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때 거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주의 만찬에 특별한 어떤 감화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 의식은 그리스도의 위치로 올라가서 우상 숭배의 잘못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그 의식이 행해지자마자, 그 의식 이면에 있는 모든 영적 진리는 손상을 입는다.

 좀더 높은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도는가를 기억하라. 아무도 자연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꽃, 골짜기, 언덕, 햇빛, 새, 이런 것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지는 못한다. 사람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통해서 자연에 이를 수는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모든 자연을 열어 보여 주는 신비한 열쇠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자연을 통해서 창조주인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이 꽃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 예배에 사용할 때는 언젠가 거짓 신을 모실 수밖에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에 대한 지나친 숭배 역시 사실 인간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란 미명하에 인간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 것은 하나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자리를 인간의 것으로 대체하는 참으로 딱한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 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려고 한다면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해서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둘째 계명에 내재된 경고와 약속

 둘째 계명과 연결된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와 은혜로운 약속을 특별히 주의하여 보자. 이 구절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이해하는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명의 앞 부분을 읽은 다음 뒷 부분으로 넘어가서, 만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그의 자식을 벌하실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명백히 다음 세대에서 나타나는 죄의 결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 결론 부분의 말이 지니고 있는 단순하 면서도 명백한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바로 그 죄악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후손 삼 사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무엇인가를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혹은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놓으려고 하는 예배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때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다 그들의 후손들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필시 예배에 대한 그들의 잘 못된 개념을 그들의 자식에게 전달될 것이고, 그들 자식의 왜곡된 예배에 대한 의식은 또 그들의 후손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대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는 가운데서 스스로 범하는 잘못을 마찬가지로 그들의 후손에게도 저지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자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 중 가장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보다 낮은 차원의 문제를 들어서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력과 습성을 물려주는 것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물며 구원과 관계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으로도 그와 같은 행위가 지닌 두려움을 경감시킬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면 그는 바로 그 습관을 자기 후손에게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끔찍한 유산을 이렇게 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어서, 이 끔찍한 경고와 함께 나란히 붙어 있는 은혜로운 약속인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은 말씀을 주의하여 보자. 이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우상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면, 그 결과 그의 자식의 자식도 그와 꼭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현저한 대조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즉 하나님께서 죄악은 삼 사대까지 갚으시지만 은혜는 천대까지 베푸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후손에게 참되고 확고하며 전심을 기울이는 순수한 예배를 물려주려고 한다면 그는, 잘 못된 예배를 물려주는 사람이 그의 후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감화를 그의 뒤를 잇는 천대 후손들에게까지 끼칠 것이다.

 사람에게는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라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라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가 사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면 혹은 의식이나 자신이 만든 어떤 물건을 통하여 예배하고 있다면 그는, 바른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얻는 본질적인 축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앞으로 오라고 즉 직접 예배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을 때나, 음악의 형태와 양식에 신경을 쓸 때, 또는 그리스도 고난의 표상들인 떡과 포도주가 차려진 식탁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설교를 뚫고 나아가고, 표상들을 넘어서며, 하나님을 마주 볼 때에야 비로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예배에 이르지 못할 때 언제나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감사하게도 오늘날은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휘장이 갈라졌고 제사장이 사라졌으며 의식도 보이지 않게 치워졌으니 이제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로 곧장 통하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은 제사장이나 선지자 혹은 설교가 없이도 곧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새롭고 바른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 행위를 그의 고대 백성들 즉 이스라엘의 시대에도 싫어하셨고 오늘날도 여전히 싫어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천대의 후손까지 축복받는 영광을 누려야 한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나 그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계시적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신 모든 호칭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 가운데 있는 어떤 속성을 계시하셨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부모의 희망에 따라서 기도 문구나 예언의 의미로 지어졌었다. 이 원칙과 비슷한 어떤 점이 하나님의 이름에도 해당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리신 새로운 이름이나 명칭을 통해서 그래 그때마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섭리 방법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 따라서 우리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이 셋째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성호를 통하여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 성호를 통하여 하나님을 이해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셋째 계명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마땅히 그 이름의 의미와 의도에 맞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이름 속에 내재된 의미와 의도를 무시하고 그 이름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셋째 계명을 깨뜨리는 범죄 행위이다.

 사 48:1을 보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느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나 성실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나 의로움이 없는 이런 태도야말로 아주 명백하게 이 계명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이름에 담겨 있는 계시의 내용은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셋째 계명을 어겼던 것이다.

 마 7:22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데 주의 이름을 사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주님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 계명이 경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오히려 신성 모독의 교묘한 형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본래 정하신 합당한 방법대로 사용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지 아니할 때 실재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 원문에는 죄 없다란 표현이 아니라 깨끗하다는 말이 이 구절에 들어 있다. 따라서 그 본래의 의미는 이렇다.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를 깨끗하다고 판결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실로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깨끗한가를 알아보려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된다. 즉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되이 사용하느냐 망령되이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깨끗하거나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 즉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태도를 취하느라고 하나님의 이름은 빼고 얘기하는 사람이, 항시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생활에서는 늘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깨끗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것은 사실 매우 엄격하고 두려운 테스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지를 즉 깨끗한지 부정한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기도는 이 주제를 아주 잘 밝혀 준다. 물론 주님은 몸소 드리신 그 기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기도-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를 보여 주려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우리 또한 드려야 하는 이 기도를 깊이 음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단순한 암송으로는 이 기도가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 6:9, 10에 나오는 이 기도를 시작하는 간구를 주의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한글 개역은 이 전체 문장 증간에 마침표가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필시 이것은 구두점이 잘못 찍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행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원이 있은 뒤에, 세폭의 병풍처럼 이어진 세 마디의 간구가 있고, 이어서 바로 뒤에 있는 한 가지 간구만 꾸미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간구 전부를 꾸며 주는 한 문장이 세 가지 간구 앞에 선행되어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문장을 분해하여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즉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구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만 꾸미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과 "나라가 임하옵시며"을 다같이 꾸미고 있는 것이다. 주기도에 나타난 이런 서술들 즉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과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 그리고 뜻을 행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사실이 각기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한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들 중의 하나는 왕이라는 칭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권에 복종할 때에야만이 왕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은 아버지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에야만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칭호를 부를 때는 그 이름에 합당한 행위가 뒷받침 되어야만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지 않게 일컫는 것이 된다.


셋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오늘날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 즉 신성을 더럽히는 언행과 경솔함 그리고 위선으로서 셋째 계명을 위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불경스럽게 맹세하는 죄가 만연해 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조심해야 할 습관으로서 흔히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짓는 죄이다. 악은 정서의 불안정 뿐 아니라 지성의 결핍 때문에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때 맹세할 수 있는지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 들은 도덕적으로 아주 부패한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자주 해왔다.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청결한 환경 가운데서 자라났으면서도 그와 같은 습관에 빠진 사람들보다는 훨씬 죄가 적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에 관계된 모독적인 욕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욕설 가운데 "천벌을 받을 녀석"(God damn you)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누가 자꾸 자기를 애먹이면 즉시 이런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 욕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정말 그처럼 되기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욕을 하면서 정말로 그 욕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을 하나님 보고 하라고 비는 모순된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가장 충격적인 양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 하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하시지 않는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저주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저주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이교적인 두려운 견해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구원의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영적 자살 행위로 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능동적으로 사람을 버려서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영원히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일을 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빛되신 하나님 없이 지냄으로 길을 잃어버린 자가 완전한 어두움 가운데 들어가는 끔찍스러운 일은 순전히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제 발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강제로 어둠에 들어 가는 사람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강제로 사람을 어두움에 들여보내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신다는 그릇된 생각은 사람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씀으로써 그들 마음 속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탁월한 모든 성품을 모독하는 죄악된 발상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신성 모독적인 말에 들어 있는 그릇된 견해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신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상을 타락시키고 혼란시킨다. 신성을 모독하는 욕을 하는 습관에 빠진 사람마다 거의 자신도 모르게 그 욕설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데, 그들은 오늘날 우리 귀에 천등 소리처럼 울리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은 시내산에서의 말씀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또 다른 형태가 사회 여러 곳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경박스럽게 사용하는 일로서 다름 아닌 하나님에 관해 농담을 하는 행위이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농담들이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진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은 사람들이 지옥 불을 피하듯이 피해야 한다.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기지 않고 경솔하게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마음과 의식에 악한 영향을 되받는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존경심과 경외 의식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거룩한 의식이 없이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불가능하며, 받으시기에 합당한 봉사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철저하게 부정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떨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예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을 행하지도 않는다.

 세번째 계명을 깨뜨리는 여러 유형 가운데 아주 교묘한 마지막 형태는 "주여 주여"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른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불경한 짓이다.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찬양은 셋째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사욕을 품은 채 헌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생각들을 다르게 말해 보자. 교회내에서 행해지는 신성 모독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신성 모독보다 한없이 더 악하다. 성당에서의 신성 모독은 빈민굴의 신성 모독보다 훨씬 더 악하다. 그러면 교회와 성당에서 신성 모독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실천이 따르지 않는 외식적인 기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그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미가 상실되는 찬양, 이러한 기도는 신성 모독이며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 행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웅변적 말솜씨와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경건한 태도로,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설교하고 기도하며 찬송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만약 이 계명들 중 하나라도 깨뜨린다면 그 사람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였던 것이다. 설사 그가 세상은 속일지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면,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진실함이 없다면 차라리 그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셋째 계명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아주 두렵고 끔찍하게 깨뜨리는 형태는, 바로 자기가 한 신앙 고백대로 전혀 생활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을 모독한 자들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생활하면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입을 다물겠다는 맹세를 해본 적도 없고, 신성을 모독하거나 저속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히려 이런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사람들이 아주 노골적인 신성 모독자보다 오히려 더 자주, 더 무섭게 이 셋째 계명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공공연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일로서 아주 교묘하고 두려운 형태로 셋째 계명을 깨뜨리는 행위는 바로 이와 같은 위선이다.

 가장 간단한 음절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과 사랑을 가장 많이 압축시켜 넣은 최상의 이름은 무엇인가? 옛부터 전해진 메시지로 다시 돌아가서 그 음성을 들어보자.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바로 그 이름은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자의 이름 예수이다.

 여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에 관해 노래하면서도 자기 죄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도 예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이며 이 셋째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구속주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그의 가르침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의 행동을 비판도 하지만 그의 모든 언행을 장려한다. 그러나 그는 죄에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인 것이다.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최상의 이름 즉 인성과 신성을 담고 있는 예수라는 이름을 신앙의 대상으로, 그리고 악에서 구원하는 표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차라리 그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모든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며, 구원을 위해 부르는 의미로 쓰이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들이 그 이름에 대해 이렇게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는 죄수들의 족쇄를 깨뜨리시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힘 없는 자들에게는 능력을

죽은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신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니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시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이 넷째 계명까지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룬 십계명의 앞 부분에 해당된다. 즉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실이 진술되고 그 다음 5-10계명은 인간에 대한 사실이 진술된다. 그 가운데서도 4계명은 성격상 전반부와 후반부의 경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미 나온 세계명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주장된 다음, 사람들 상호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다룬 뒷 부분의 계명들로 넘어가기 전에 이 넷째 계명이 주어졌다. 그런데 이 넷째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영원히 상징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속적인 일에서 떠나 영적인 일로 완전히 돌아서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계획되고 평가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일주일에 단 하루동안이라도 자신의 영적인 본성이 영적 진리들을 붙잡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육체적인 활동에서 돌아섬으로써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의 행복은 하나님의 통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있어 육체와 영혼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일상 생활의 매 순간마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적절한 상호 관계 속에서 상대의 힘을 돋우는데 이바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 일은 이같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법칙을 보여 주는 영구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현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 숨쉬는 기간 동안에 안식일의 가치는 평일 때문에 생겨난다. 일곱째 날 즉 안식일은 평일의 진정한 의미와 최종적인 취지를 부단히 암시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안식일과 평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넷째 계명의 진정한 의미와 준수 방법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우선, 넷째 계명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명령을 고찰한 후 그것을 오늘날에 적용시켜 보자.


넷째 계명에 대한 이해

 이 계명은 오직 안식일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계명 중 일곱째 날을 언급한 부분의 중요성은, 그 나머지 부분이 안식일을 제외한 엿새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비로소 충분하게 평가된다. 우선 넷째 계명에서 설명적인 부분을 제거해 보면, 그것이 간단한 두 가기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둘째,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면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여지는 엿새 동안의 일이라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가장 고상하게 드려지는 실제적인 예배이다. 또한 숙고와 명상과 경배의 시간을 갖는 일곱째 날의 예배는 가장 고귀한 영역에 속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명령은 각각 서로를 보완한다. 따라서 전혀 일하지 않는 자는 예배드릴 자격이 없다. 또한 쉬지 않고 예배만 드리는 자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은 안식일의 의무에 대해서만 다루겠다. 하지만 십계명의 앞 부분에 있는 최종적인 진술 곧 이 넷째 계명이 말하고 있는 바는, 사람이 일하고 예배 드릴 때에만이 비로소 처음 세계명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이상적인 관계를 성취한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시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본성의 모든 면은 하나님의 사고와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의 사고와 행동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였다. 따라서 결국 한 인격 안에서 합일을 이루는 사람의 본성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만 그 최고의 가능성들을 성취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육일간 천지 창조를 하신 후 칠일때 쉬신 것처럼 인간에게 먼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현대 문명의 복잡한 체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도 살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상을 떠나버린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사람은 그의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유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곡식을 흙에서 얻는다. 그러나 사람은 먼저 흙을 일구고 엎드려 노동을 해야만이 비로소 그가 필요한 것들을 흙에서 얻어낼 수 있다. 수확은 일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흙을 일구지만 사람의 노동에 풍성한 수확이라는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한편 노동을 해야 한다는 이 사실 자체는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창조시부터 본래 의도하신 것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하기 이전 에덴 동산에 거처하면서부터 "그것을 다스리며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로 자연이라는 보고에 깊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모든 비밀들을 바르게 알고 적절히 활용하면 인류의 필요를 채우는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보다 증대될 것이다. 거대한 인류 집단은 넷째 계명의 이러한 면에 복종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자발적이 아니라 많은 경우 필요성에 의해 복종한다.

 아무튼 피조물의 필요를 완전히 아시는,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엿새동안은 힘써 일하다가 일곱째 날에는 이 세상에서의 일을 그만 두고 자신의 영혼의 활력을 도모키 위해 보다 상위 영역으로 들어가도록 규정하신다. 안식일에 대한 히브리 사람의 본래 개념은 우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쁜 것이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안식일은 기쁜 날이며 육체와 영혼의 피로를 풀게 하는 휴일이었다. 즉 이 날은 사람이 고된 일을 그치고 즐거움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신의 본래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었다. 여호와를 생각하는 즉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끼면서 무한자와 친교를 나누는 사람은, 현재는 비록 영광된 미래의 수습 기간에 불과한 이 지상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보다 넓은 삶 곧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에 올 한 주간의 일에 새롭게 헌신하며 그 일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식일에는 종교적인 면과 더불어 현실적인 의미가 있었다. 사람은, 안식일에 평온히 휴식을 취하며 남은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해야 할 일에 열심히 임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하는 엿새 동안 내내, 안식일에 묵상하였던 것들의 고결함과 공의로부터 힘을 공급받으며 의미있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라"은 이 두 가지 명령은 서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결코 분리시킬 수가 없으므로 사실상 하나이다. 따라서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다른 명령도 복종할 수 없다. 반면에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할 때 다른 명령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일을 해야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일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넷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이상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안식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정 시대, 특정 민족에게만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해당되도록 정하신 것이며, 인간이 탄생하기 전부터 이미 예정된 시간의 경륜의 일부였다.

 한편 기독교 시대에 와서 일곱째 날 즉 안식일이 첫째 날 즉 주일로 바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비록 날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기독교의 영적 사실들에 의해서 안식일은 주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안식일을 바라보고 일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는 주일로부터 한주일이 시작된다. 요컨대 구약에서는 안식일이 일에 의존해 있었고 신약에서는 일이 주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일과 안식일 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안식일 개념이 타락한 인류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가장 바쁜 시대가며 투쟁적인 생활과 신속한 활동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미 효력을 상실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다만 아직까지 효력이 있는 동안만 당분간 그것을 존중하는 그런 시대이다. 무력해진 것들은 제거되며 오직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것들만이 보존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양상은 넷째 계명에 대해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현대 생활의 여러 조건은, 거대한 인류 집단 속에서 점점 더 많고 강도 높은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부드럽고 인정 많은 하나님의 법 뿐만 아니라 가혹하고 잔인한 인간 사회의 법도 사람에게 "너는 일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이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유감스러운 사회 문제로 취급된다. 돈 많은 사람이든 상류 계급의 사람이든 번화가에 사는 사람이든 서민층의 사람이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가 속한 일터에 자기 몫의 수고를 지불함으로써 양식을 얻지 않는 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가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는 시대라는 앞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하나님을 소홀히 한 것이 결국은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반대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무서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동정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시간인 안식일을 완전히 무시할 것이다. 안식일을 끊어버리면 필연적으로 이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국민 생활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없애버릴 때마다 반드시 따라오는 인간의 모든 타락 현상은 무신론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바울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atheists)라는 말로 무신론자들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대한 가장 교활하고도 위험한 공격은, 공격하는 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식일을 세속화하려는 자들의 공격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에 의해 자기들에게 주어진 안식일을 악용하여 어리석은 쾌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광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에게 참된 가치를 바라볼 눈이 있고 소리 없이 진행하는 영원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환락의 도시 파리에서 한번 지내 보라. 여기서 안식일의 신성함과, 인간 본성이 신성을 모독하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인간 본성의 영광스런 모든 것들이 타락되었으며, 타락되어 가고 있음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넷째 계명에 대해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안식일에 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그의 말씀과 행동에서 자주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언행을 통하여 안식일 준수에 대한 옛 계명의 속박하는 성격을 완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가르침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먼저 기억해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메시야로서 자신의 사명을 이행하시는 중에 안식일에 관해 여러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을 명백하게 해석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시대에 와서, 안식일의 본래 개념은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릇되게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서로 구별하여야 할 다른 일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처사이다. 주님의 여러 말씀은 유대적인 질서 하에서 지켜졌던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계시하고 있다. 그 말씀은, 안식일 제정의 본래의 개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또 멀리 세상 끝날까지 밝혀 주는, 훨씬 적용 범위가 넓은 말씀이다. 주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람을 위해 주어진 이 큰 선물을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대로 사용해야 한다. 더욱이 주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예수의 다른 이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인자"라고 하신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은 여기서 확실히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다만 안식일 제정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의도를 완전히 성취하는 대표자로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안식일의 파괴자가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임을 주장하신 것이다.

 이처럼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께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시대에는 모든 활동이 안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의 십자가와 장사되신 무덤에서 벗어나신 부활의 아침의 영광에서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새로운 영역에 들어온 자들은 언제나 무한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 따라 주일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데 있어서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어 왔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두 돌판에 기록해주셨다. 그런데 처음 네 계명은 첫번째 돌판에 기록되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두번째 돌판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두 돌판에 각각 다섯 계명씩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첫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앞 부분에서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에 뒷 부분에서는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섯번째 계명도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파라(Farrar)는, 처음 다섯 계명은 첫번째 돌판에 새겨졌는데 이는 피조물된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아는 '피에타스'(Pietas:의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두번째 돌판에 새겨진 다섯 계명은 성숙한 인간이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프로비타스'(Probitas:성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섯번째 계명을 어느 쪽에 두느냐는 것이 어려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채드윅(Chadwick)은, 다섯번째 계명은 십계명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다섯번째 계명이 전반부에 나오는 네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인데 반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는 계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계명을, 인간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십계명의 후반부의 첫번째 계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계명은 이미 앞에 나온 네 계명들의 사상과 의도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부모가 자녀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는 부모들이 보여 주는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자녀는 성장하는 동안 전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입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본성에서 일치하며 가장 명백하고 뚜렷하게 드러 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며 또 깊은 애정을 품는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태도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그것은 곧 입법자와 사랑하는 자가 취하는 태도요 부양자와 통제자가 취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더 높은 대상들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아이들의 태도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에 의해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가 공경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며 이러한 자녀들은 복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와 같이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맡아서 돌보아야 할 자기 자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끄는 부모 역시 복된 사람들이다.

 다섯째 계명의 이러한 이중적 개념은 이 계명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째, 이 계명은 자녀들이 아주 엄중하게 지켜야 하는 법이긴 하지만, 이 계명에 부모들이 실천해야 할 이상적인 생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부분에 나오는 이 계명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계명에 복종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뒤에 제시되는, 인간 관계에 관한 나머지 율법들을 순종하는 것이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이 예명이 의미하는 바 그 자체를 고찰하고 이어서 신약의 사상과 교훈으로써 이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밝힌 다음 마지막으로 이 명령을 현대 생활의 여러 상황에 실제적으로 적용시켜 보자,


다섯째 계명의 이해

 흔히 사람들은 이 계명이 오직 어린 아이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계명에 내재된 더이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계명이 맨 먼저 어린 아이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이 계명이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이 계명이 지닌 깊은 의미의 절반은 잘못 생각하는 처사이다. "공경하라"은 말에는 순종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이 계명에는 필연적으로 순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어린아이는 성인이 되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이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해서 자신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복종해온 어린 시절의 훈련은 그 이후 인생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보호와 통제를 받는 시기가 지나면 그 때부터는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며 그것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의 사실을 생각할 때, 이 계명이 단지 어린 시절에 순종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생 동안에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모두 다 자기 부모에게는 언제까지나 자식이며 부모에게 마땅히 복종해야만 하는 때가 지나갔을지라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시절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두 시기에 걸쳐 즉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편 "공경한다"은 말의 의미는 "중히 여기다", "높은 위치에 두다", "높이 평가하다", "가장 좋은 의미로 존경하다"는 것이다. 아직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의지를 발휘할 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부모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다 그렇듯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법 역시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보호받는 자비로운 요구이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필요한 요구이다.

 이 법이 자비롭다는 것은 인격이 형성되고 지성이 훈련을 받아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기까지는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이다.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는 언제나 아이들은 놀면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어리고 젊은 시절은 희망과 활동과 유머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은, 혈연 관계에 의하여 아이에 대해 가장 좋은 배려를 하며 아이에게 가장 좋은 프로그램을 계획할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발랄한 면이 방해받지 않으면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로 하여금 그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어린 아이들이 아직 겪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걱정거리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자라며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어린 시절의 미숙한 상태는 성숙한 사고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와 같은 것들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아이들이 자기에게 내려진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가장 자상한 보호자인 부모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며, 실로 생의 파멸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행위이다. 또한 이는 인생의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모든 가능성을 이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명령의 강제적인 성격은 또한 이 명령의 자비로운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이 계명의 아주 훌륭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단순히 부모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에서 또한 볼 수 있다. 즉 가정 교사나 학교 선생이 부모의 입장을 대신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에게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에 대한 복종의 원리는 거의가 권위에 대한 두려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복종의 원리는 보다 차원이 높은 사랑의 원리이다. 물론 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견해에서 볼 때 나의 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학교 선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내 아이들이 일년 중 육개월 이상을 아이들 어머니의 생활과 아버지의 관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채 지나도록 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며 어린 시절의 인격 성장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자녀가 온전한 인격 성장을 위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때가 오는데 그 때에도 여전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 때는 새로운 형태로 공경을 하게 된다. 즉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행동을 통해서 또한 부모님께 만년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림으로써 공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복종을 잘 한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공경을 잘 할 것이다.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기를 지가서 자 신의 의지로 혼자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자식은 어렸을 적에 부모가 대신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명령을 하는 가운데서 받았던 사랑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말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존경과 사랑을 표할 것이다. 혹독한 삶의 투쟁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어린 시절에 참으로 많은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릴 때에는 놀기만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부모의 염려와 끊임없는 수고와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성숙할수록 더 깊이 부모를 공경하게 되며 과거에 부모가 자기에게 쏟았던,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바랄지도 모를 자식의 사랑을 부모가 쏟은만큼 부모에게 부어주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1) 장수에 대한 약속

 부모에 대한 공경의 명령과 결부된 장수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거의 모든 약속처럼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민족 전체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약속은 개인적인 보상을 공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결과로 얻게 되는 공동체의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주어진 장수의 약속에 개인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체로 부모를 공경하는 가운데서 결국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습관과 올바른 성품을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부모를 공경하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평온함이 있다. 반면에 자기를 낳아주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에게조차 복종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향이 있는 무모함과 흥분하는 기질이 있다. 이처럼 이 약속이 개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이 약속이 진정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은 민족 전체이다. 사람들이 가정에 대한 신성한 개념을 유지하고 자녀들이 어릴 동안에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더욱이 성숙한 후에도 언제까지나 부모를 공경하는 백성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지 아니하며 자기 땅에서 영구히 거하는 강한 민족이 될 것이다.

 2) 부모에 대한 적용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이 자식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계명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나 동시에 부모에게 적용되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 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적용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너무나 명백하다. 부모들이 자식으로부터 공경을 받으려면 그들이 반드시 공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자녀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게 하려면 반드시 사랑에 의해 결정되는 부모의 통제가 따라야 한다. 그 사랑은 선견지명이 있으며 포용력이 커야 하며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앞날의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는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을 지닌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한 성숙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부모가 되는 선행 조건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히 행하는 올바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며 모든 생활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한,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들에 대해 바른 사고를 하거나 자식들을 위해 진정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없다. 사실 부모가 자녀로 하여금 장차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여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맡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녀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줄 수 있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끊임없이 가져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이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신약의 교훈에 의한 다섯째 계명의 조명

 이 계명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고 또한 구약 성경에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계명들 중의 하나이지만 아무도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철폐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계명과 함께 이 계명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신성한 관계를 더욱더 명백하게 보여 주는 성경 다른 부분에 기록된 계시와, 하나님의 목적과 사상을 더욱더 뚜렷하게 진술하는 성경의 다른 기록 가운데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또 거듭 강조된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은 대단히 아름다우며 암시하는 바가 많다. 하나님의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첫째 사람 아담처럼 청숙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영광스러운 점을 다 갖추고 세상에 오시질 않고 유년 시절을 겪어야 하는 아기로서 세상에 왔다는 사실은 다섯째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빛을 비춰준다는점에서 무한한 가치가 있다. 어린 시절 동안 아이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통제를 받았다. 아이 예수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감독과 통제를 받으면서 지혜와 키가 자라갔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이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 부모가 그를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성전에 데려갔을 때 예수께서 모친을 대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도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다. 주의 모친이 근심하며 그를 찾았다는 사실은 분명 예수께서 그 이전에는 모친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아이를 잃어버리고서 즉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마리아로서는 처음 당하는 이상한 일이었다. 근심에 싸여 남편과 함께 아이를 찾아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사렛 집에서 가졌던 그들 사이의 사랑과 복종의 원만한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마침내 모친 마리아가 아이 예수를 찾았을 때 아이가 모친에게 한 질문을 잘 읽어 보면 바로 그 사실 즉 주께서 모친을 공경하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을 글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 말의 아름다운 소리가 상실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생각은 확실히 이 기사의 전체적인 장면과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 여기서 주님이 어떤 의미로든지 자기 모친을 책망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을 중심적으로 생각해 보라. 그러면 즉시 그것이 모친에 대한 사랑과 신뢰에서 나온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마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 외에는 내가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만큼 나를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보가 예수께서는 부모의 통제를 뿌리치고 나간 일이 전혀 없으셨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성경 구절에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분명하게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소 모친을 무시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주님의 말씀의 뜻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 그 말씀에도 모친을 무시한 흔적이 전혀 없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모친과 형제와 자매의 친밀함은 그대로 두신 채 제자들을 아주 명예롭게 높이신 것 뿐이다.

 주님에게서도 역시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시기는 지나갔지만 공경해야 하는 때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두려운 시간에 갈보리 언덕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저주스러운 어둠 속에서도 그 동안 깊이 사랑해온 모친을 여전히 생각하고 계셨다. 더욱이 모친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 방법을 가장 깊이 깨닫고 있던 제자에게 모친을 맡기고 사랑으로써 돌보아 드리도록 부탁하셨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인품과 모범을 통해서 다섯째 계명을 가장 영광스럽게 지키셨다.

 또한 주님은 가르치시는 중에 그 당시 성행하던 한 가지 악습에 다섯째 계명을 적용시킴으로써 이 계명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셨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데 쓸 수도 있는 재물이 "고르반"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즉 제단을 봉사하는 데 드려졌다고 말함으로써 부모를 보살펴 드리는 의무를 기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모를 봉양하는데 써야 할 것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늙은 부모님을 돌보고 위로하는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고 부모님은 소홀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룩한 일임을 가르치심으로 부모 공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모범과 가르침이 곧 신약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교훈인데 이것을 사도들은 그들의 글에서 거듭 거듭 밝히고 강조한다.


다섯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아마도 오늘날,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성장해서는 부모에 대해 불손한 행동을 하거나 존경심을 갖지 않는 태도가 만연해 있는 이 현상만큼 슬픈 징조는 없을 것이다. 이 현상은 여러 면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슬프게도 이것이 불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나는 과거 십 육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함께 지낸 경험이 있다. 그들 중 몇몇 가정이 보여 준 신앙적 행동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내게 끊임없이 피어나는 향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다른 몇몇 가정은 아주 고통스러운 인상을 내게 남겨 주었다. 제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항시 실수하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아이들은 그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미래가 불행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남자 아이들은 경박하고 무례한 별명을 대신 사용해왔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양식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부모를 경박한 말로 조롱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들의 부모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 형편없는 아이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 아이 들은 흔히 자기 어머니를, 엄청나게 많은 집안의 하찮은 일에 자기들이 전혀 손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가정부 정도로 보는 것 같다. 가정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므로 부모의 금지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될 날을 고대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보이는데, 그것은 아주 슬픈 현상이다.

 이러한 불행한 현상이 만연하는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부모보다는 책임을 덜 지게 된다.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이와 같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부모에 대한 개념이 무너 데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자신을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로 혹은 도덕 수호자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서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자녀들과의 참된 관계를 유지케 하며 자녀들에게 지워져 있는 무거운 책임을 깨닫도록 교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들이 자녀를 훈련시키는 문제에서 지은 죄는 그들이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살렘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 왔을 때"라고 시작하는 찬송이 성경의 이야기를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 19:14에서 사용된 헬라어의 대명사는 남성이며, 또한 당시 아버지가 자녀를 훈련시키는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의도하시는 것보다 자녀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면, 자녀들이 자기들을 더이상 공경하지 않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오늘날 어머니들도 흔히 자발적으로 자식의 노예가 되어서 육체적으로 자식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일일이 간섭하면서도 자신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사람 이라는 중요한 사실은 잊고 있다.

 다섯째 계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는 명령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계명이 그와 같이 명령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보여줌으로써 아이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시키는 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자신의 거룩한 위치에 대한 높은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한편 자녀들은 그들이 십계명 중 이 다섯째 계명에 복종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른 모든 계명들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처음 네가지 계명을 잘 지키느냐는 것은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불신앙, 신성 모독, 반역, 이 모든 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섯째 계명 이하의 모든 계명도 다섯째 계명에 포함되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비방, 탐욕의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남녀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야릇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경건한 부모를 기억함으로써 거듭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수세기 동안의 많은 이야기들이 집증하고 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대중이 무어라고 비판하든지간에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다스리는 가운데서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로서 거룩한 존재인 부모의 그 신성한 역할이 공격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다"(출 20:13)


 십계명의 두번째 돌판에서 두번째로 기록되어 있는 이 계명은 순전히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서는 첫번째 계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상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이 첫째 계명은 후자의 관계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해 있다.

 한편 여섯번째 계명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간 사회 구조의 맨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 개개인의 생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깔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사회 복지의 세부적 법규를 규정하기에 앞서, 순전히 인간의 의지로써만 다룰 수 없는 영역이 뚜렷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로 생명은 신성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그 기원과 지속성과 역동성에 있어서는 신비하고 장엄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어떠한 인간의 통제나 이해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충분한 의지를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마음대로 제거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모양과는 전혀 다른, 각 개인과 인류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과 따라서 단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없애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의 지혜를 창조주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죽음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에 생명을 없애는 것만큼 심각하게 비인도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는 없다. 그러므로 이 간단한 계명에는 아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만큼 분명하고 지극히 중요한, 인간 생명에 대한 중요한 원칙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우선 그 명령 자체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그 명령에 담긴 원칙을 오늘날에 적용시켜 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보자.


여섯째 계명의 이해

 피조물인 사람은 그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지 혹은 망각하고 있든지 실제로는 제일 처음에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 의미에저 사람은 하나님께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존재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지닌다. 이밖의 다른 모든 관계는 이 첫번째 관계로부터 생겨나고 따라서 이 관계를 보조한다. 혈연 관계, 사회 관계, 시민 관계를 다루는 이하의 모든 계명은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데, 그 이유는 그 계명들이 생명에 대한 첫째 되고 가장 상위 개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신성함, 소유권, 평판의 중요성, 인격의 우위, 이 모든 것은 비로소 생명이 있을 때에만이 그 효력과 가치를 얻는다. 사실 이런 모든 것이 삶에 있어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 팽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시한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지닐 가능성을 주는 것이며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다.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능력은 다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지니고 있는 모든 가능성도 역시 똑같은 근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 그 자체에는 아주 놀라운 관계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 다섯번째 계명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아주 간단한 말이면서도 엄한 어조로 인간의 생명을 처음에 그 생명을 주신 분에게 그것을 끝낼 수 있는 권리를 귀속시키고 있다.

 영어 성경이 보여온 번역상의 변화는 의미 심장하고 중요하다. 영어 개역 성경(R. V.)은 "사람을 죽이지 말지니다"(Thou shalt not kill)는 말은 "고살하지 말지니다"(Thou shalt do not murder)로 바꾸어 번역 하였는데, 여기에는 암시되고 있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죽이되 살인을 범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인의 실제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에는 도피성이 마련되어 있어서, 사람을 죽인 자가 거기 들어가면 피의 보수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민 35:9-34에 나오는 이 도피성 설정에 대한 기사를 잘 읽어보면 죽이는 것과 살인 사이의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살인일지라도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반드시 다 살인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구절에서 "뜻하지 않게"(unwillingly;R.V.), "그릇"(unawares:A.V.)이라는 말이 그 차이를 보여 준다. 실수로 우연히 동료 인간의 생명을 없앤 사람은 이 도피성들 중의 하나로 들어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고의적인 것이라면 도피성이라도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고살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killing)은 부지중에 우연히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지만, 고살은 순전히 책임 있는 인간 의지에 의해서 사람의 생명을 고의로 빼앗는 것이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부지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벼운 죄로 간주되지는 않았다는 사실들 명백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부지중에 사람의 생명을 없앤 자는 불확정한 기간 동안 자유를 잃고 지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지내야만 안전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피성의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면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인자 곧 악의를 품고서 사람의 생명을 해한 자에 대 대서는 세상 천지 어디에서도 그를 보호해 줄 은신처는 없었다.

 이 계명이 간단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든지간에 하나님의 법은 그 살인 행위 자체를 반대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모든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 계명은 절대로 어떤 특정 계급에만 적용되는 법령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사람이 상류 사회의 생활을 누리고 있든지 인생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든지간에 그것이 사람의 생명인 까닭에 고귀한 가치가 있다. 사람이 동료 인간의 손에 죽지 않도록 자신의 안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아 누리고 있는 생명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거의가 사람이 조정한 인위적인 결과로 생긴 일시적인 환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자는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지간에 살인자이다. 사람의 생명을 없애는 일은 권력상의 특권이나 가난을 구실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 곧 생각하고 활동하는 생명은, 사람이 마음대로 그것을 지속시키거나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신다.

 곧 이 사실은, 개인이 하든 사회가 하든 혹은 국가가 하든지간에 고의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일을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따라 행해지는 사형이나 사람을 죽이는 일 그리고 전쟁을 제외한 그와 같은 일은 모두 다 이 계명을 어기는 일로서 낙인찍는다.

 구약 히브리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의에 기초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도록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셨다. 사형은 정해진 몇 가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따라 집행되었다.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하에서 사람이 동료 인간의 생명을 취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것은 살인이 아니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돌에 맞아 죽은 아간은 동료 인간의 결의에 의해서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람들의 손을 빌려 생명을 잃은 것이었다. 아간을 돌로 친 자들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사사든지 왕이든지 혹은 선지자이든지간에 구약의 어떤 지도자도 국가의 이익을 위하는 일에서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사람의 생명을 취할 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대리자로 삼으셨을 때는 문제가 매우 달랐었다. 사형 판결이 사람의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내려진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은 모세 율법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모세 율법에는 사형에 처할 만한 죄들과 그 죄들을 조사하고 판결하는 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구약 시대의 전쟁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정당화할 수 있는 전쟁들은 오직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복종해서 즉시 그리고 직접 치른 전쟁들뿐이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의 대리자로서 역병이나 기근을 택하시지 않고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구약 백성의 역사는, 이런 조건 하에서 전쟁이 치러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치게 하신 편만 전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종종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전쟁을 벌였을 때는 많은 수가 죽고 패주하였다. 히브리 백성의 전체 역사는 여섯째 계명이 변함없이 중요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경륜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은 자의적으로 나서서 살인을 시도하는 사람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여섯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인간 사회에서는 생명의 보호에 대한 이같은 신성한 기본법이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기독교 시대와 히브리 시대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 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완전해졌다는 사실뿐이다. 구약 시대로부터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 권한이 인간의 어떤 재판소나 법정에 위임된 적은 없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아들의 말씀은 특별히 이 점에서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 순전히 우연한 사고가 아니면 죽이는 것은 모두 다 살인으로 간주하였다. 오늘날에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해 살인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저희에게 내리게 하시기를 원했을 때, 그들이 공적인 목적을 위해 생명을 멸하려는 일을 꾸짖으셨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베드로가 검을 사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시며 "검을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웠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행동과 교훈을 통해서 전쟁을 완전히 정죄하셨다.

 약하고 억압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종종 주장되었다. 확실히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표준을 아주 세련되고 교양 있는 이교 타상에서 취하질 않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취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제시 한 인용문들에서 주님이 전쟁을 공공연히 비난하셨던 바로 그 때가 일찍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사악한 연합 세력이 횡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세력에 대해 주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자신의 경우에 행악자를 처벌하거나 압제자에 대항하여 싸우심으로써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승리를 얻으셨다. 어떤 상황하에서라도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지혜로운 태도를 의심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는 사형 제도에도 역시 적용된다. 사람들에게는 각각 나름대로의 통치 방식이 있고, 세상은 정치와 철학을 통해서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는 단지 한 왕 곧 그의 기름 부으신 아들밖에 없으며 한 가지 윤리 법전 즉 그 아들의 말씀밖에 없다. 그리고 한 가지 통치 원칙 즉 그 아들의 은혜뿐이며, 하나님 나라의 경륜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처벌은 모두 궁극적으로 치료와 구 조를 위해서 행해지는 것뿐이다. 해를 입은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해를 가하는 자를 교화하기 위해서도 십자가가 세워졌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은 교정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 시대에서는 전쟁이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사형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전쟁이나 사형 외에도 여러 형태의 살인이 있는데, 특별히 이 시대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와 같은 살인은 거의가 살인이라고 전혀 불려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때때로 인간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진범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 이 부를 추구하는 데서 타인에 대해 가하는 압계는 곧 살인이다. 비록 우리 인간의 실정법은 완전하지 못하여 범죄자들을 일일이 다 색출하여 처벌할 수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날카롭고 신속한 말씀은 살인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안 구석 구석까지 추적해 간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가한 모든 자를 불러 그 이유를 밝히도록 하실 것이다. 도기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납중독 희생자들과 성냥 공장에서 일하는 파스퍼러스 네크로시스(phosphourus necrosis:옛날 성냥 제조공에게 많던 위턱뼈에 생기는 병) 희생자들은, 자기는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부정한 재물로 헌금을 하여 하나님의 장막을 더럽히는 돈만을 추구하는 기업가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지옥 같은 초만원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죽는 아이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엄청난 집세를 부과하여 그로부터 재물을 모으는 집주인이 저지르는 살인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한 가인의 파렴치한 항변은 오늘날에 와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인조차도 그러한 감정을 갖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기독교 시대에 와서 완전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일찍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한을 어떤 국가나 단체나 개인에 위임하신 적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를 얻기 위해 검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신 이래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명령하셨다고 증거하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여섯째 계명의 적용

 지금까지는 여섯째 계명이 인간 역사의 전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고찰해 왔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의 절대적인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이 계명이 어떤 의미에서 구속력이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주님은 갈릴리 해변의 팔복산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는 살인의 범위를 보다 확대하여 그것이 숨어 있는 자리 곧 화(anger)에까지 추적해 간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중 누군가가 노여움을 품은 채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고, 그 노여움을 터뜨려 경멸하여 "라가"라고 욕하면 그 사람은 "공회에 잡힐" 위험, 즉 징계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단언하신다. 또 그 사람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뜻인 "미련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위험이 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예 생각해 볼 여지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기 형제에게 노여움조차 품지 말아야 한다. 영어 개역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은 본문에서 "까닭 없이"라는 말을 생략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많은 문헌은 그 말을 삽입하고 있지만 유력한 견해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쓰시지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화를 품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공의로움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는 화를 품올 수 있고 또한 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에 대하여 품는 화는 죄인에 대해 품는 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모든 공격력은 죄를 향해야 하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의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전투를 수행하려고 시도했을 때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거역해 온 것이다. 생명의 주의 이름으로 생명을 없앴을 때 주님은 모욕을 받으셨고 여섯째 계명은 깨뜨려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밝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하에서는 사람이 살의를 품으면 그것은 살인으로 간주된다. 주께서는 언제든지 다른 모든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을 일으키셔서 사람의 생명을 통해서 영적 승리를 거두신다.

 국가나 사회나 개인을 막론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생명을 취할 경우 그것은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 시대의 여러 가지 궤변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행하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많은 운동들을 무서워하거나 속아서 그 일에 가담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훌륭하고 논리 정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많은 이교 사상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맹세코 이 이교 사상과 기독교 사이를 아주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살인하지 말지니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서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자이신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어조는 부드럽지만 훨씬 더 엄중하고 구속력이 있는 그 명령은 기독교 시대 내내 살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전장에서 살해되거나 사회의 이름으로 매장되며 혹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당할 때마다 주님은 다시 고난을 당하고 주님의 교훈은 짓밟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단순한 사실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취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특권이다. 따라서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백한 명령에 의해 그 일을 하도록 직접 위임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은 그 권리를 사람에게 위임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전쟁을 반대하여야 하며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이익이나 쾌락을 얻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형태의 악에 대해서는 화를 품지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화는 마음속에서 스러질 것이다.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다"(출 20:14)


 사람의 생명의 신성함을 밝힌 제6계명 다음에 즉시 세상에서의 가장 고귀한 부부 관계를 고호하고, 생명 출산이라고 하는 거룩한 직무에 필요한 조건을 도의심과 순결이라고 규정하는 계명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신 사회는 가정이며 하나님이 목적하신 이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신성한 결합으로 시작된다. 피조물인 인간 생활의 첫번째 원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두번째 원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간의 상호 관계이다. 이 두번째 영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의 전형과 기원은 가정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후속적인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가 되는 부부 관계만큼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데 근본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부부 관계는 인간 관계의 기초를 허물려는 어떠한 형태의 공격으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지켜야 한다. 실로 인류의 화합은 하나님의 죄하시는 것으로 이는 남편과 아내의 화합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시대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관계되여 결코 변질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기"(창 1:27)때문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의 화합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화합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다 같이 협력하여 반드시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야 한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 (duality)은 거룩한 출산 능력의 이중적인 표현일 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데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고찰은 이 일곱째 계명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를 보여 주며, 이 계명이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있는 인류에게 구속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계명이 실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부관계의 신성한 권리를 더럽히는 부정의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명의 정신은 명백하게 모든 형태의 부정을 금지한다. 그 이유는, 결혼에서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화합이라는 본질적인 의미의 결합을 승인한다면 그리고 생활의 연합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즉시, 남자든 여자든 결혼 전의 부정 행위는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 전의 부정은 결혼 후의 부정과 마찬가지로 간음이다. 아마도 이 주제만큼 충실하게 다루기 어려운 주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이 주제만큼 정직하고 대담한 취급을 요하는 주제도 없다.

 그러면 우선 이 명령 자체를 생각해 보고 다음에는 이 계명이 현대 생활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주의해 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주제를 다루는 아주 엄격한 기독교 윤리를 살펴보자.


일곱째 계명의 이해

 일곱째 계명 가운데 내포된 명령은 간단하고 무조건적이며 변경할 수 없는 금지를 나타낸다. "하지 말지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논증이나 이유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간음 죄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이고 저주적인 성격 자체만으로도 이 죄를 엄격하게 금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 계명이 금하고 있는 죄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정 행위라는 이 죄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와 우주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든 일곱 겹의 악이다.

 먼저 이 죄는 개인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이 사실은 증명이 전혀 필요 없다. 이 죄를 범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아주 무거운 여러 가지 형벌을 천벌로 받는다. 순전히 육체적인 면에서도 부정한 생활의 끔찍한 여러 결과는 여기서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결과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이다. 과학자마다 자연은 순결을 굉장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려고 하며, 자연은 부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또한 정신 이상에 대한 세계 각국의 통계 자료를 보면 부정한 생활이 사람의 정신적인 면에 얼마나 두려운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아주 고도의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를 향유하던 나라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성행위의 죄 때문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결국 소멸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슬픈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들이 있다. 영과 혼과 육체의 완전한 통일과 조화가 이 간음의 범죄에 의해 파괴된다. 그래서 부정한 생활과 습관에 빠져 행하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또한 이 죄는 가정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어머니의 숭고한 역할과 어린 시절의 신성함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모든 보호와 사랑스러운 관심은 결혼이라는 신성한 하나님의 제도를 통해 확보되고 충족된다. 따라서 결혼 관계의 여러 가지 권리가 침해당하고 무시될 때는 언제든지 부부와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멀어지고 가정이라는 축복받은 집단은 붕괴라는 비참한 결과가 발생한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집단 속에서 훈련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는 부모의 근본적인 사랑에 의한 지 배에서 시작된다. 다섯째 계명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듯이 어린 아이를 양육시키는 데에는 부모 양편의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가정이 부정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면 자녀들에게 이루 다 셀 수 없는 많은 해가 돌아간다. 이혼 판결에 뒤따르는 결정으로서 자녀들의 양육 책임을 부모 중 한 사람이 맡았다고 밝히는 기사만큼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만들어진 가정이 파괴되어 가족들의 결속이 깨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실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정의 파괴를 가져오는 이 죄가 무서운 것이다.

 또한 이 죄는 사회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이 사실은 앞의 고찰로부터도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이란 공동 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의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들의 연합체이다. 그리고 사회는 이런 가정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외의 다른 어떤 기초 위에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시도는 다 악하며 큰 불행으로 끝난다. 수도원 사회의 역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사업에 대한 공동 관심사가 공동의 지적 추구라는 기초 위에 가정을 배제하고 사회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조만간에 다 무너지고 만다. 사회는 많은 가정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단이다. 따라서 재산이나 명성, 사람에 대한 모든 인간 상호 관계는 가정의 파괴와 함께 붕괴한다. 부부 관계를 방해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는 진정한 모든 사회의 적이다. 성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이념으로 세워진 공산주의적 발상이 가장 저주스런 죄라는 사실을 알 때에만이 비로소 다른 것을 진정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죄는 국가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이 사실 또한 앞의 고찰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논리적인 귀결이다. 간음하는 자는 국가의 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먼저 이혼 판결을 통해 이혼시킨 후 형사 판결을 내려 투옥시켜야 한다. 어떤 교파의 목사에게도 이 죄 때문에 부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재혼시킬 권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마음대로 재혼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국가에 반역하는 행위이다. 이들은 투옥시켜서 죽을 때까지 이성(the other sex)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들은 부정 행위로써 가정에 타격을 줌으로써 국가에 끼친 잘못을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다. 한 국민의 위대함은 그 국민의 순결과 도의심에 달려 있다. 따라서 부부 관계가 더럽혀져도 처벌하지 않는 나라는 모두 그 속에 사회와 국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병원체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점은 앗시리아, 그리이스, 로마 그리고 우리 시대에서는 프랑스의 쇠망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무서운 사실들에 의해 너무나 명화하게 입증된다. 이 점에서,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는 말씀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류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인류의 발전이나 파멸이 그 구성원의 하나인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의 연대 책임은 공상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깊다. 이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각 사람의 생활은 인류의 발전을 돕거나 방해하는 세력에 그 나름대로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인류의 그 이상적인 날이 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거나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에게 고통과 슬픔을 연장시키는 죄는 부도덕한 모든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다. 타락한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악은 과거 세대의 부정 때문에 내려지는 저주이다. 따라서 음란하여 짐승 같이 무절제하며 비도덕적인 모든 남녀는 지금 현 세대에 뿐만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도 새로운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라"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역시 끊임없이 큰 소리로 외치고 마음에 새겨야 하는 절대적인 도덕율이다.

 또한 이 죄는 만물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만물의 생명력은 사랑에서 나온다. 만물의 기원 역시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만물의 증식 원리도 사랑이다. 결혼 관계와 같은 가장 고귀한 형태의 화합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다 낮은 차원의 모든 일상 행동 영역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성장의 법칙이다. 야수들은 신성하게 여기는 자기의 잠자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지킨다. 새들이 둥우리를 짓는 행위는 모든 피조물 속에서 고동 치고 있는 성생활(love-life)에 대한 충동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를 날라다 주는 벌 역시 같은 본능을 지닌 심부름꾼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만물의 도처에 있다. 음탕한 부정 행위의 죄는 이러한 사랑의 위대한 법칙을 위반하는 것으로서 점차 사랑을 메마르게 하고 파괴시킨다. 간음을 행한 모든 남녀는, 그들의 부정 행위가 만물의 모든 천성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들으려고만 한다면, 남녀의 순결하고 거룩한 모든 사랑, 짐승들의 자기 짝에 대한 헌신, 새들의 짝을 찾는 노래 소리, 여름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모든 피조물을 거스리는 간음한 자들의 죄의 가증함을 선언하고 있음을 들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죄는 하나님에 대하여 짓는 죄이다. 이 점은 사실상 앞에서 계속해온 모든 논의를 통해서 이미 언급한 셈이다.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모든 가정의 참된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회의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국가를 다스리는 왕이시다. 인류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하나님의 소유이다. 만물의 사랑의 법칙은 만물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부정 행위와 부정한 사람은 모두 다 바로 하마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구히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성결케 하시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행음자들을"(계 21:8) 쫓아내시고 그들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케 하실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이와 같이 일곱째 계명이 구속력이 있고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계에까지 이르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기 때문이다. 부정 행위를 금지하는 이 법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가치를 부인하는 태도이다.


일곱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오늘날에는 일곱째 계명을 재 진술하며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성을 보이는 시대적인 징조들이 있다. 이 징조들 중 첫번째의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아주 명백하게 보이는 현상으로서 부부 관계의 결합을 느슨하게 하려는 경향이다. 결혼 관계란 문명 사회에 있어서는 다양한 관계들 가운데 단지 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점차로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결혼 관계란 다른 어떤 관계와도 나란히 놓을 수 없는 전적으로 신성한 것이며 독특한 관계이다. 결혼 상태의 합법성은 성(sex)이라는 지극히 중요한 매개체를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결혼 제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이렇게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연합의 법칙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결혼은 다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거의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결혼 관계를 시작하는데, 그 결과로서 끔찍한 불행이 자주 발생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신성한 문제를 함부로 다룰 때는 반드시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일단 그 결합이 이루어지면 결혼 관계는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일생 동안에 결혼 관계를 취소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죽음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실로서 간음이라는 것이다. 성격의 차이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왕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인간 복지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결혼 생활의 순결을 위해서는 성격 차이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등의 결혼을 다른 인위적인 관계처럼 취급하려는 그릇된 생각과 어떠한 형태로든지 이러한 사고를 은근히 장려할 때 이를 완강히 거절해야 한다.

 결혼 생활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시대적인 또 하나의 징조는 최근에 문학계를 더럽혀 온 추잡한 소설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그 소설들은 결혼 관계를 유감스러운 것으로 다루며, 호색한과 간통하는 남자들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동정하며 변명해 주고 있다. 그런 문학은 출판의 자유를 악용하여 생겨난 아주 유해한 퇴폐 행위인데, 어떤 나라든지 출판의 자유를 허락하면 이러한 상처를 입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절대적인 순결의 필요성을 경시하는 책이나 논문을 출판하는 작가는 그 행동이 두고 두고 많은 사람들을 퇴폐하게 만들게 되므로 이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문화계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다. 국민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부정하며 인간의 죄악된 심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책은 계속 나오고 또 읽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자라면 누구나 다 반드시 이 일곱째 계명에 나타난 변경할 수 없는 사랑의 법을 충실히 지켜야 하되 자신들의 개인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 끼치는 자신들의 영향력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그런 비윤리적인 저자나 퇴폐적인 책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장려하는 빛을 비쳐서는 안된다.

 다음에는, 적은 임금을 주고서 남자들 틈에 끼어 일하도록 시키는 모든 방면의 여성 직업에는 부정 행위를 유발시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아주 심각한 저주거리들 중의 하나는 젊은 여자들을 호텔이나 담배 가게에 고용하는 일이다. 이점에서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전한 정신이 점차 힘을 잃어 가고 재물 숭배가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이 시대에 우리의 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은 집을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바에야, 적어도 우리 딸들이 함께 뒤섞여 일하면서 날마다 접촉하게 되는 남자들에 대해 신앙적으로 주의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부정은 흔히, 정직하고 아주 순수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서부터 시작되나 그 감정이 비뚤게 발산되어 잘못된 결과에 이르는 일이 많으므로 신앙을 가진 젊은이로 하여금 감정의 폭풍우에 휩쓸리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다음에, 나는 이 나라의 여자들에게 복장에 관해서 몇 마디 말을 하고자 한다. 사교계 여성들이 즐겨 입는, 몸을 많이 노출시키는 복장은 확실히 의상 유형에 대한 돌연변이의 징조이다. 또한 그러한 의상에는 과거 오랫동안 부부 관계에 있어 저주거리였던 소욕주의(animalism:기성의 도덕 윤리를 배척하고 관능에 따라 동물적 욕망만을 채우려는 주의)에 영합하려는 저의가 깃들어 있다. 게다가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상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여성 복장은 진정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모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구세군 전도자들의 제복을 입으라거나 오순절파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를 쓰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잘 어울리고 아름다우며 정숙하게 보이는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그런 옷들은 남자들이 늘 여성에게 표시해야 하는 경의에 어긋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딸들은 혼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면 내가 마저 다 얘기하지 못한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직도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부정 행위라는 이 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죄책을 구별하는 데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변칙적인 것이 있다. 부드(Booth)는 "암울한 영국"(Darkest England) 이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펴내면서 자신이 "간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설명하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

 "왜 매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매음이란 그 악을 행하는 한 쪽 편에게만 즉 몸을 파는 불우한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간음이란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이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적인 죄를 짓는 남자가 여자가 받는 만큼 치욕적인 오명을 뒤집어 쓰기 전까지 그 남자를 두둔하는 대중의 견해는 실제적으로는 치명적이고 저주스러운 이 악을 공모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일곱째 계명과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윤리

 지금까지 해 온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아주 호된 말씀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말씀은 성육신하신 순결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그가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에게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성명서 가운데 들어 있다. 이제 그분이 선언하신 말씀을 읽어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쩨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28-32).

 만일 이 법이 지켜진다면 부정 행위는 영원히 방지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윤리 규범은 구체적인 행위를 지나 마음속에 품은 생각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대로 하자면, 마음의 소원은 행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마음의 소원도 행위와 꼭같이 정죄되어야 한다. 부정한 생각과 욕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손발을 끊어 비록 병신이 될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이다. 눈과 손이 귀중하나 마음의 순결만큼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볼 때 아무리 혹독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랑의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주님은, 부정한 생각과 행위가 영적인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옛 계명을 되풀이하시되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 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진술한 그 어떠한 다른 모든 말보다 더욱 엄격하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고서는 그 말씀에 온전히 복종할 수가 없다. 주께서 순결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시고, 그렇게 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더이상 부정한 행위로 사악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은혜가 나타난다.

 주님의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 각자의 의무와 교회의 의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첫째, 완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부정의 문제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부정한 자에 대해서 징계를 실시해야 한다. 사람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잘못을 징계하지 않고 계속 행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진정 의로우신 주님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순결을 증거해야 하는 교회의 능력을 스스로 잃는 처사이다. 또한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신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정의 높은 이상은 남편과 아내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가운데서 부부 관계가 굳어지고 칭찬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교회가 이 시대에 평화와 능력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되려면, 조금이라도 말이나 행동이 부정한 사람들하고는 교제를 갖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이 교훈은 특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신성한 사역을 맡은 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지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은 말씀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순결의 법을 교훈과 생활로써 전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복음 전파자가 먼저 순결함을 갖고 순결의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가 선포하는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다"(출 20:15)


 여덟째 계명에서부터 십계명은 인간 생활의 본질적인 여러 사실에 대한 논의를 그치고 인간 상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보다 덜 중요한"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그 문제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기다. 다만 "생명이 음식보다 중하다"은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계명들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의 생명 자체에 해를 끼치는 죄들을 금하였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 하에서는 앞의 일곱 계명 중 어느 하나라도 위반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마지막 세계명을 어기는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처음 일곱 계명이 상대 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예배와, 하나님 자신과 예배자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시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의 반역적인 속성은, 인간이 제정한 법이 죄의 중요성의 순서를 뒤바꾸어 왔다는 사실에 의해 뚜렷하게 입증된다. 오늘날 모든 나라의 법령집을 보면 재산을 보호하는 법이 생명을 보호하는 법보다 훨씬 더 많다.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거나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하거나 혹은 참 하나님을 예배하더라도 그릇된 방법으로 했다고 해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확실히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럴지라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훼손 행위가 공적인 입장에서 전혀 죄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설교자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에 대해서는 몹시 분개하는 어조로 비난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경우 대체로 청중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불경건의 죄를 그와 같은 어조로 비난한다면 필시 대부분의 회중은 불쾌해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는 다른 모든 죄가 생겨나는 근원이다. 그러나 성숙한 사고력을 갖춘 사람들은 깊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노인들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다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계명의 상대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인간의 소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덟째 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도적질하지 말지니다." 이 계명은 카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면밀하게 살펴볼 절박한 필요가 있다. 즉 훔친다는 실제적인 행위가 점점 더 저속한 일로 간주되고 있는 반면에 도적질의 방법은 더욱 늘어나는 것이 현대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은 도적질을 권리 이상의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까지 왜곡시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의 재능"(business acumen), "거래 관행"(the habit of the trade), "제국주의" (imperialism)라는 말은 모두가 다 훨씬 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단어인 "도적질"이란 말을 쓸 수 있는 상황하에서 대신 쓰여진 표현들이다. 심지어 실제적 도적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도적질하는 사람이 사회 적으로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그의 병적인 도벽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관습을 도덕질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통념에 가리워진 진실을 찾아내어 "도적질하지 말지니다"은 명령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를 직시해 보아야 한다. 먼저는 이 명령 자체를 생각해 보고 다음에는 이 명령에 대한 신약의 해석을 살펴보며 마지막으로는 이 명령을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자.


여덟째 계명의 이해

 이 명령은 우선 첫째로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명령은 무정부주의의 창시자인 프루동(Proudhon)의 "소유물은 도적질한 물건이다"라는 말이 거짓임을 입증한다. 소유물은 도적질한 물건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본래 소유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므로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소유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 할 때는 누구나 자신의 소유물 중에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 여덟째 계명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유권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 계명은 이 권리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금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유하여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일이 당연한 사실로 인정될 때 그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즉 누군가가 무료로 거져 주든가 아니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수로서 얻든가 혹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도적질하여 얻는 방법이다.

 이 여덟째 계명은, 처음 두 가지 방법은 인정하지만 세번째 방법은 금하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 방법을 검토해 보면 밝혀질 것이다. 처음 두 방법은 인간 상호 관계의 근본적인 법칙 즉 사랑과 수고라는 법에 기초해 있다. 이 두 법칙 중 첫번째 방법은 사랑의 법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들 상호간에 주고 받는 선물은 일종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그것을 받은 사람의 소유가 된다. 이 사회에는 아직 노동력이 없는 어린 아이나 노동력이 상실된 불구자나 노인이 있는데, 이들은 사랑의 법에 의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이 장려하고 있는 구제와 같은 그러한 행동은 실로 그리스도인이 힘써 행하여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수고해서 얻는 것 즉 노동을 합법적인 대가로 지불하여 소유하게 된 것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정당한 재산이다. 그러나 도적질은 이 두 법칙을 모두 위반한 것이다. 도둑은 자기가 물건을 훔친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며 도적질을 당한 사람이 도둑을 사랑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도둑은 수고하지 않은 채 소유하려고 하거나 혹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빼앗으려고 함으로써 수고의 법을 위반한다. 이와 같이 이 여덟째 계명은 진정한 소유권 즉 사랑과 수고의 권리는 인정하지만 이 두 가지 법칙에 복종하는 조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소유하는 것을 긍한다.


여덟째 계명에 대한 신약의 해석

 이 계명에 대한 신약의 해석은 다음의 유명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우리가 앞 단락에서 논의했던 바가 이 구절에서 한군데 모아지고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대조법을 주의해 보라. 한편에는 그릇된 소유 방법인 도적질이 다른 한편에는 참된 소유 방법인 수고하여 얻는 일과 그 소유물로써 구제하는 일이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정당한 소유와 부정한 도적질 양자가 아주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 구분에 따르면 수고하거나 구제에 의해 얻지 않은 재산은 모두 다 도적질한 물건인 것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소유한 것은 모두 다 선물로 받은 것이거나 수고한 대가로 얻은 것이거나 아니면 도적질한 것이다. 이 원리를 우리 시대의 사회 생활과 상거래와 국민 생활의 많은 부분에 적용시켜 보라. 그러면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허다한 일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엄청 나게 부도덕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이 개념을 더욱 확대 해석하여 재산은 소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 잉여 재산을 무능력하게 된 형제 곧 일할 능력도 없고 도적질은 더욱이 할 수 없는 형제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거룩한 나라"의 새로운 경제 법칙 하에서는 단순히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만 일하고, 공동 생활에서 약한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일 즉 구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도적질하는 사람이다. 방금 한 말은 오직 현재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생활의 특성은 바로 자격 없고 무가치한 자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면류관을 그리스도의 머리에 씌워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궁핍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서는 자신의 왕에게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덟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여덟째 계명은 개인의 소유권을 부인하는 모든 공산주의적 형태를 금하는 명령이다. 물론 소유물이라은 말은 이 단원 전체를 통해서 아주 넓은 의미로 뿐 아니라 아주 단순한 의미로도 쓰였다.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은 크든 작든간에 무엇이든지 소유물이다. 또한 이 사실은 선물이나 노동에 의한 소유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소유권도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선물을 받거나 정당하게 수고하여 소유하는 것은 모두 다 여덟째 계명에 의해서 틀림없는 자신의 것이 된다. 따라서 현 소유자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경우나, 자신의 수고의 보답으로서 얻는 경우 외에 어떤 재물이라도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도둑으로 낙인찍히고 그 행위에 상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무상 제공이나 자인의 수고의 보답으로서 얻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산을 획득하는 사람은 모두 다 도둑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밖에 이 계명은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다른 많은 형태의 도적질도 공격한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단순한 절도 행위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평범한 경절도죄가 지방 형사 재판소의 재판을 통해 엄하게 처벌될 수도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실제로는 부정 행위(dishonesty)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범법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처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도덕적인 사회에서조차도 몇 가지 평범한 도적질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감스런 실책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그 집에 있는 모든 책의 소유자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실시해 보는 것은 재미있기는 하나 매우 씁쓸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빌려 온 책을 돌려주는 것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로 인하여 서가에 꽂혀 있는 많은 책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책을 빌려 오고서 돌려주지 않는 것도 도적질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소유에 대한 부당 취득은 전적으로 도적질의 죄로서 다루어 져야 할 것이다.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이 지닌 소유물의 정도에 의해 평가되는 이 시대에는 소유를 늘리려는 과도한 소유욕으로 말미암아 다른 문제에서는 매우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평상시의 정직이라는 행동 원리를 저버리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속임수나 부정직, 거짓말과 같은 것들을 일종의 사업 수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오늘날 상거래 활동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이 아닌 "들키지 말라"이 되어 버렸다. 무게나 치수를 속이거나, 허위 광고(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도적질이다)를 하는 행위는 모두 여덟째 계명을 어기고 도적질하는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업체의 정당성 여부를 면밀하게 조사해 보지 않고 사업하는 자들에 대해 모두 여덟째 계명을 범한 죄인들이라고 판단하실 것이다. 하물며 유령 회사를 세워 사기 행각을 벌리며 소비자를 유인하여 피해를 주는 흔해 빠진 엉터리 회사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다음에, 모든 종류의 도박 습관 역시 본질상 도적질에 속한 것이다. 일종의 재산 획득 방법이라는 점에서 도박은 재산을 정당하게 벌 수 있는 두 법칙, 즉 사랑과 수고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장난으로든지 내기로든지 도박을 하는 사람은 정당한 수고의 대가 없이 돈을 얻는다. 따라서 그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서 자기가 돈을 따온 사람에게 강도질을 하는 것이며 사랑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뻔뻔스럽게 얘기해 온 어리석은 말들 가운데 노름판에서는 아비도 자식도 없다는 얘기가 있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한 가지 사실은 대부분의 경절도죄와 대대적인 사기 행각이 바로 이 노름병으로 말미암아 자행된다는 점이다. 모든 도박 행위의 원인이 되는, 땀 흘리지 않고 소유하려는 이 사악한 욕망만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성실과 정직을 약화시키는 교활한 악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단호히 그리고 어떠한 변명도 용납함이 없이 모든 도박꾼들-그들의 도박 행위가 화려한 왕실에서 행해지건 더러운 빈민굴에서 행해지건간에-의 귀에다 대고 이 여덟째 계명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도박꾼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명백히 도둑인 것이다. 따라서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박꾼을 타인의 재물을 노략하는 도둑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빼앗아 수단화함으로써 재산을 모으는 행위도 모두 이 여덟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모은 재산은 부당하게 번 소득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명백히 도둑으로 낙인찍혀야 한다.

 이 계명은 거대한 노사 조직 내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깨어진다. 오늘날은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이 너무나 자주 아전인수격으로 인용되곤 한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많은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임금에 해당하는 정당한 몫의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주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행위는 슬픈 일이지난 실제로 많이 발생하고 있는 사실이다. 여덟째 계명에는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주는 이중의 메시지가 있다. 첫째는 정당한 하루 노동에 대해서는 정당한 몫의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정당한 하루 임금에 대해서는 정당한 몫의 하루 노동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또한 이 원칙들은 개인과 국가에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 여덟째 계명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점차로 뚜렷이 나타나는 그릇된 제국주의적 성향을 맹렬히 비난한다. 강한 민족들은 까닭 없이 약한 민족의 땅을 약탈해 왔다. 약소국들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는 새로운 강국들에게 통제를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이 중대한 말씀에 비추어 검토해 보면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통치로 말미암아 공의로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선물로 받은 것과 수고해서 번 것에 대해 갖는 권리를 인정 함으로써 일상 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이 계명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형태이든지간에 이 도덕의 원칙을 깨뜨리는 일에는 조금도 가담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라는 단체는 사랑의 단체이지 도적질의 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적질하지 말 라"은 이 명령은 언제까지나 구속력이 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다"(출 20:16)


 아흡째 계명이 주어진 것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선량한 사람의 평판을 보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거짓 증거를 하려고 애쓰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범죄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평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를 받으며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물의 본래 성격을 알고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수치란 죄의 수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자들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이 실패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가난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거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 되거나 가난해지면 두려워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거룩한 사상을 품고서 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단계에 있는 것이 늘 영광스런 정점을 향해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분일 수도 있으며, 가난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부요해지기 위한 한 가씨 조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일은 죄이며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악한 행실로 더럽혀지지 않은 평판이다.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올바르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그 자신의 인격에 달렸으며 크 인격은 세평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은 사람이라는 존재에 또한 그 자신에 관한 참된 사실들 위에 새겨지는 조각이다. 평판이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매기는 평가이다. 평판은 늘 인격에 의해 좌우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 들은 사람들이 성공과 위대함에 대한 가치 기준의 혼단으로 여러 가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천박한 평가와 세상 사람들의 올바름에 대한 잘못된 경멸 때문이다. 비록 세상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흠이 없다는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완전하신 자 곧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에 대반 최상의 본보기라고 겸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주님의 일생을 보면 그는 바로 아홉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죄 곧 거짓 증거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목숨을 잃으셨다. 타인에게 무고하게 비방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다"은 말씀을 늘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라. 또한 주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평판을 결코 소홀히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결국에 가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변호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은 아주 엄격한 요구, 바로 아홉째 계명에 의해서 백성들의 평판을 보호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누구에게 의해서든 그 사람의 평판을 빼앗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이 아홉째 계명을 주신데에는 또한 다른 취지도 있다. 그 취지란 악한 사람의 거짓 증거를 믿고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인정해 줌으로써 발생하는 악으로부터 의인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불량배를 인품이 훌륭하다고 속여 어떤 지위에 오르게 하는 사람은 그 불량배와 함께 못된 일을 도모하는 악한 자이며 그 불량배에게 속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생각을 말로 표현했을 때 그 말이 미치는 교묘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일일이 고찰해 볼 필요는 없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야고보의 말이 떠오른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6). 거짓 증거로 말미암아 인간사회에 발생해 온 해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러므로 이 아홉째 계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명령의 단순한 의도를 알아보고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인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으로 이 명령을 오늘날의 여러 가지 문제에 적용시켜 볼 것이다. 이제 아홉번째 계명을 검토함으로 나 자신이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아흡째 계명의 이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다"은 이 말씀은 직접 간접으로 사람이 타인에 대해 말할 때 진실만을 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십계명 가운데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금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실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아홉째 계명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도 바로 셋째 계명과 동일한 원칙에 의해 진실하게 행동하고 그 노선을 따라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 인간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에 의거하여 사람을 다루신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나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사람들의 외모나 이웃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다. 시편 기자가 시 139:1에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기술한 것만큼 바르고 설득력 있는 말은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나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이 깊고 절대적인 지식에 의거해서 사람들을 다루신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의도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지식은 당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한된 지식이라도 그 지식이 미치는 범위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그 지식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만큼은 믿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형제인 사람에 대해서 말하거나 대할 때 진실해야 한다고 하신다. 사람 상호 간의 교제는 그 사람의 인격과 행위와 역량에 대한 실제적인 사실들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 구조는 한 사람이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증언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사회 구조가 진실과 의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증언이 진실되어야 한다. 허위 진술에 의해서 도움을 받거나 해를 입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허위 증거를 해서는 안되며 정당한 것과 그른 것을 판결하는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는 판결을 바꿀지도 모르는 사실들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의 특징인 정직의 법에 가까와지려면 다른 사람에게 제 삼 자에 대해 하는 말이 순전하며 정확하고 진실해야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충실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충실함이 증거 된다.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범하게 되는가?

 아홉째 계명을 가장 간단하게 먼저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가리는 법정에서 제시되는 증거이다.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은 법정 본래의 직무를 바로 행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다. 법정은 정의를 실행하기 뛰해 재판을 시행하는 곳이다. 정의는 진실에 기초한다. 따라서 거짓 증거는 어떤 것이든지 진실을 위반하는 것이며 잘못된 재판을 낳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위증이 심각한 범죄가 되는데, 위증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처벌되어야 할 죄들이 처벌되지 않을 수 있고 무고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논의를 그친다면 그것은 아홉째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거의 잃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번도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가 있지만 그럴지라도 매일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거짓 증거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들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 첫번째로 이러한 것에 해당하는 아주 노골적이며 뻔뻔스런 형태의 죄는 타인에 대한 무고한 비방이다. 즉 악의를 가지고 꾸며내어 퍼뜨리는 거짓말이다. 아마도 사람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 가운데서 이것만큼 야비한 형태의 죄는 없을 것이다. 악의를 가지고 비방을 하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노상 강도는 신사에 속하고 암살자는 친절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노상 강도는 가졌다가도 되돌려 줄 수 있는 물건을 빼앗는다. 암살자는 재빠르게 혹은 갑작스럽게 공격 하여 거의 고통을 주지 않고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거짓말을 꾸며내어 퍼뜨리는 비방자는 상대로 하여금 평판을 잃게 해서 도저히 그것을 되찾을 수 없게 만드는 무기를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부 분의 경우 비방자 자신은 들키지 않고 처벌되지도 않은 채 지내는 반면에 종종 죄 없는 사람은 그 무기로 인한 치명적인 공격 때문에 오래도록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둘째, 어떤 소문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과정에서 거짓 증거가 생겨난다. 정당성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명예 훼손에 관한 법이, 비록 사실일지라도 누구에겐가 해를 입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퍼뜨려서는 안된다고까지 규정하고 있다. 여하튼 어떤 얘기가 누군가의 명예나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면 철저하게 조사도 해보지 않고 그 얘기를 퍼뜨리는 것은 이 계명을 위반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세히 조사해 보지 않고 소문을 퍼뜨린다. 그래서 항상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본래 속이려는 뜻이 없었으며 다만 그 소문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다. 그러나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말한 내용이 확인된 바 사실 그대로의 진술이지 않는 한, 해를 끼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이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일이다. 자기가 퍼뜨린 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엄청난 파괴적인 결과를 보고 좋아하면서 이런 무법한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웃을 아프게 하는 범죄자로 정죄되어야 한다.

 셋째, 암시나 시사 혹은 교묘한 질문에 의해서 상대방에게 타인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심어줄 때 이것 역시 일종의 거짓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모씨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식의 질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의 훌륭한 명성이 실추되는 일들이 있어 왔다. 대답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하면, 질문한 사람은 "자, 말은 적을수록 좋지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아도 이미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풍자하는 그 사람의 말은 결과적으로 거짓 증거의 속이는 효과를 십분 발휘한 셈이다.

 넷째, 거짓 증거는 부당한 침묵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할 때 듣고 있던 옆의 사람이 그 진술이 비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개인적인 어떤 이유나 말하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말했다가는 말썽이 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잠자코 있으면 그 사람은 부당하게 비방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흡째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다.

 다섯째, 동기에 대한 비방도 많은 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행위나 구제를 의심하는데, 이것은 그 일들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일을 하는 데에는 표면적인 이유 말고 다른 어떤 이유 즉 이기적이고 치사스러운 동기가 이면에 있었다는 암시를 받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선량한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그사람의 선행은 오히려 파렴치한 행동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아, 그래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그까짓 선물은 한 밑천 잡으려는 미끼에 불과해." "그는 제 잇속은 반드시 챙기는 사람이야." 따라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얘기할 때 그것이 직접적인 인격 침해는 아니다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라도 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여섯째, 아첨도 거짓 증거의 한 형태이다.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 순전히 그를 기쁘게 하며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얘기들을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거짓 증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결코 유익을 줄 수 없다. 또한 그 사람이 자격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전히 그와의 친분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부당한 칭찬을 한다거나 그 사람에 대한 증명서를 써준다거나 혹은 그를 추천하는 일 역시 그를 추천받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 증거의 한 유형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식의 거짓 증거가 지닌 위험은 아주 교묘하며, 이런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된 인상은 매우 쉽게 그리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십계명 중 이 아홉째 계명만큼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범 하게 되는 계명은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시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아홉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거짓 증거하는 이 죄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오후 다과회나 도르카스회(Dorcas meetings:빈민에게 줄 옷을 만드는 모임) 또는 여자들이 모이는 모든 단체에서 나누는 대화를 전부 기록해서 볼 수 있다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남자들도 역시 이런 식의 잘못을 많이 저지르나 특히 여자들이 이런 일을 더 자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의 일을 얘기하면서 그 일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에 관한 얘기하는 버릇은 얘기하는 사람 자신이나 화제에 오른 사람 모두에게 아주 유해한 일이다. 이런 일은 대개가 전념할 수 있는 건전한 일이 없고 정신적인 교양이 부족한 이유 때문에 생기게 되는데, 말을 많이 한다고 할 때는 거의가 이런 일이 부수적으로 따른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무해한 악습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오직 악습은 악습인데 결코 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귓속말이 공중에 퍼지네.

부드럽고 경쾌하며 나즈막하지만

수치와 고통의 가시가 돋힌 말이,

그 말이 공중에서 사라지기만 한다면

더 멀리 퍼지지는 않으련만.

불행하게도 재빠른 귀가

그 하찮은 소리를 들었고,

또 다른 입이 그것을 퍼뜨려

귀에서 입으로 입에서 귀로

그 소리가 두루 두루 돌아다니네

온순한 마음에 이르러

그 마음을 깨뜨리기까지.


 또한 오늘날에는 결과적으로 언제나 해를 더 많이 끼치는 그릇된 자선 행위가 성행하고 있다. 무능력한 사람이 당장 겪고 있는 딱한 사정을 보고 동정해서 그를 추천하여 그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앉혀 놓으면 결국 그가 실패할 것은 틀림없고, 그가 맡은 일조차도 망치게 된다. 이런 일은 경제, 문화, 정치, 종교 활동에서 다 일어난다.

 개인 뿐 아니다 국가나 사회도 거짓 증거의 죄를 범할 수 있다. 오늘날의 거짓 증거는, 부정적인 일을 야기시키는 동기를 다른 나라에 뒤집어 씌우는 보도 기관을 소유한 어떤 단체나 자기 정적에게 욕지거리와 모욕적인 언동을 마구 퍼붓는 정치인들이 늘상 범하는 악한 습성인 것 같다. 유럽에 만연해 있는 불안의 절반은 보도 기관을 통한 국가간의 거짓 증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삼십 분간만이라도 비판의 눈초리를 버리고 편견 없이 '자유 기고가'(The Free Lance)라는 책에 수록된 마리에 꼬렐리(Marie Corelli)의 "예절과 신사"라는 글을 읽어 본다면 좋을 것이다.

 세상은 온통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투옥과 고문에 의한 옛날의 박해 방법은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거짓 증거라는 방법에 의해 여전히 희생자는 생겨나고 있다. 이러는 동안에도 내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은 하나님의 호통 소리는 울려 퍼지고 있으며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에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진리를 위반하는 것은 모두 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사실과 다른 인상을 심어 주는 것만큼 비열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다. 이 계명을 깨뜨리는 자는 곧 도둑이요 비겁자요 거짓말장이다. 거짓말장이라 함은 거짓 증거가 진리와 반대되기 때문이고, 비겁자라 함은 일단 거짓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거짓말을 밀고 나가며, 한번도 상대방에게 사실을 바르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둑이라고 함은 세익스피어가 말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내 돈지갑을 훔치는 자는 쓰레기를 흠치는 자일세.

.............

그러나 내 명성을 훔치는 자는

자신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면서 다만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훔치는 자라네.


 아홉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개선책이란 진리와 사랑의 구현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모두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에서는 사랑이 모든 행동의 동기이며 사랑은 언제나 진리 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다"(출 20:17)


 십계명 중 마지막에 있는 이 열번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계명이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십계명의 두번째 부분의 마지막 요구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란 특징을 지닌다. 앞의 계명들은 모두가 다 공공연히 보여질 수 있는 행위들을 금하였다. 즉 그 계명들은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조만간에 그것이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명은 마음으로 짓는 숨겨진 죄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 계명은 아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범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죄는 조만간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이 계명의 중성이 있으며 이와 같이 아직 행해지지 않은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엄중한 책임이 있다. 영국법에서 구체적인 반역 행위는 실행되지 않은 반역 모의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반역 모의가 없다면 반역 행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독특한 특성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넘어서 마음 속으로 은밀하게 행하는 일들까지 포함하여 인간 생활의 기이하고 은밀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세운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 관계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관계 안에서 정하고 있다.

 이 계명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명령 자체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신약의 교훈에 비추어 그 명령을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오늘날의 여러 가지 조건에 적용해 보겠다.


열째 계명의 이해

 열번째 계명 자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계명 가운데서 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좋다. 본래 "탐내다" 라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뻐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탐내다"라는 말은 욕망을 자극하는 기쁨보다는 소유하며는 욕망 자체를 나타내는 데 더 많이 쓰였다. 신명기에 그 계명을 다시 쓸 때는 출 20:17에서 두번 사용된 "탐내다"란 말이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되었다(신 5:21). 영어 개역 성경에서 "탐내다"(covet)라고 번역된 첫번째 단어는 이미 출애굽기에서 언급된 것과 똑같은 단어이다. 그 다음에 영어 개역 성경에서 "바라다"(desire) 라고 번역된 두번째 단어는 단순히 원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사도 바울은 롬 7:7에서 이 계명을 인용하면서 헬라 말을 쓰는데, 그 말은 신약에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갈망하다"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이 단어는 종종 "바라다"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탐내다"로 어떤 때는 "육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탐내다"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갈망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나타내는 죄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려는 욕망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의미를 주의해야 한다. 사람의 눈은 항상 아주 감탄할 만한 대상을 향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갖고 싶게 만드는 것에 쏠린다. 그런 대상물을 갖고 싶어하는 그것이 바로 탐내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 가운데에는 미지수의 상황이 있다. 즉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로 말미암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상대적인 빈곤 즉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합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얻을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러한 욕망이 곧 탐내는 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구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그것이 갖고 싶어서 그와 같은 것을 구입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 욕망은 탐내는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감탄하는 자가 어떠한 이유로든지 그 대상물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감탄하던 마음이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바뀔 때 이 열번째 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이 열째 계명은 앞의 다른 어떤 계명들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도덕심을 요구한다. 즉 이 계명은 하나님의 권리를 인간의 욕망보다 위에 둔다.

 이 계명의 전체 뜻은 이 계명에서 뽑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네 이웃의...네 이웃의...그의...그의...그의...그의...네 이웃의..." 이와 같은 반복이 일곱번이나 계속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 자체를 조사해 본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감탄에 뒤따라 일어나는 강력 한 욕망을 저지 할 수 없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 사실은 타락한 인간성의 상태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논증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가르치려고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생활의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바로 이 욕망을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다. 욕망의 죄는 이 열번째 계명에 의해서 비추어질 때에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두움을 밝히는 탐조등과 같은 이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아무도 조사하지 못 하는 사람의 마음속을 홀로 다루실 수 있는 분에게로 이끌어 그들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 선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또한 이 계명의 가치와 중요성은 그것의 광범위한 적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계명은 개인 생활에 적용된다. 탐심은 매우 고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저해하고 마침내는 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여러 가지 고상한 생활들이 나타난다. "사랑과 회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나 탐심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는 꽃을 꺾으며 모든 꽃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킬 것이다. 탐심이 있으면, 사랑 대신에 의심과 미움이 있을 것이고, 희락 대신에 슬픔과 번민이, 화평 대신에 심한 불안이, 오래 참음 대신에 성급함이, 자비 대신에 잔인함이, 양선 대신에 인색함이, 충성 대신에 불성실함이, 온유 대신에 오만함이, 그리고 절제 대신에 자만심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란 말은 그가 어쩌다가 정반대 되는 말을 한데 묶어서 든 것이 아니다. 십계명 중 열번째 말씀이 지닌 엄위는 하나님의 인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의 엄위가 불처럼 엄중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불의 역할을 넘어서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나도록"이라는 말과 같이 낙원의 푸르름과 결실을 가져오기 위만 것이다.

 두번째로 이 계명은 모든 사회 생활에 적용된다. 이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십계명의 두번째 돌판에 기록된 모든 법을 깨뜨리는 시발점이 된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데 사용해야 할 재물을 보고 "고르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다. 범죄 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살인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부정한 욕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간음을 행하기에 앞서 언제나 육욕이 가득한 얼굴 표정이 먼저 나타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종류의 도적질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거짓 증거를 하게 되는 악한 마음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탐욕스러운 야망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상호 관계는 이 열째 계명을 어김으로써 혼란해지고 파손된다.

 세번째로,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 조건이 되는 명령이다. 탐욕의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사이가 틀어져 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죄는 결국 십계명의 첫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네 계명들을 범하는 결과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 다른 신들을 만들어 온 것은 비뚤어진 인간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양심을 위로할 목적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형상을 만든다. 모든 종류의 불경과 신성 모독은 이렇게 해서 세운 거짓 신들에게서도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에서 생겨난다. 피처럼 모든 신성 모독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정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마땅히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안식일을 어기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부정한 욕망에서 생겨난 들떠 있는 마음 상태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검토해 볼 때 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결론 짓는 열번째 계명의 말씀이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며 대단히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첫번째 계명과 마지막 계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계명은 두 계명 안에서 결정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있다면 그는 그의 하나님이 두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탐낸다면 그것은 탐욕 그 자체에서 나온 갈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갈망 즉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갈망의 결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약의 교훈

 이제는 신약으로 눈을 돌려 보자. 신약만큼 이 마지막 열번째 계명의 중요 원칙들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반복하며 강조한 곳은 없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백하여 오해할 여지가 전혀 없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주님께 자기 형에게 유산을 자기와 함께 나누도록 명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이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강조하셨다.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였으나 결국 이 세상에서 참 안식을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함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재물"로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계승한 초대 교회에서도 동일한 교훈들이 선포되었다. 바울도 역시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로 간주하며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같이 취급하여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엡 5:4, 5).

 야고보는 부자들은 재물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만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오로지 돈 벌려는 욕심만을 따라 행동해 온 사람들을 풍자하는 가운데 이 죄의 가증함과 더불어 결국은 이 죄가 어떻게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약 5:1-6).

 베드로 사도는 그의 불 같은 다음의 말씀 속에서 간음의 원인 역시 탐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벧후 2:14).

 요한은 포괄적인 뜻을 지닌 문장에서 탐욕으로 얼룩진 죄악된 생활의 일시적인 성격과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을 거룩한 생활의 영속성과 그 이유에 직접 대조시킨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결론 부분에 가서 자기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탐욕의 죄에 대해 경고한다. 즉 그는 탐욕과 만족을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교제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탐욕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족만이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 6).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에 이 원칙에 대한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이 들어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경고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에게 먹거나 마시거나 혹은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오히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했다. 이 말씀 자체는 사람들이 섬기는 두 영역 즉 하나님과 재물을 대비시키는 것으로써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봉사를 하게 하는 힘과 동기는 안식과 만족에서 나오며 재물의 영역에서든 욕망과 탐욕이라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과 동기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라는 조용한 힘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갖고자 하는 욕망의 끊임없는 에너지에 의해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탐욕의 무서운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눈이 음흉한 빛으로 번뜩이며, 뺨이 붉게 상기되고 몸이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또한 신경이 끊임없는 욕망으로 고동치는 것은 바로 이 탐욕이라는 열병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사망을 삯으로 받는 악한 행위이다. 사람이, 크든 작든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이건 도중에 그치지 않는 한 결국 그를 파멸시키고 말 열병에 그만큼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현대적 적용

 일찍이 오늘날만큼 인간의 탐욕을 규제하는 이 중대한 원칙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던 시대는 없었다. 세상을 특히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나라들을 어둡게 만드는 모든 악의 근원이 바로 탐욕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약소국들에 대한 압박, 한 국가의 명예를 높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의에 대한 무관심, 국민의 미덕을 약화시키는 거대한 악들에 대한 묵인, 이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해 보면, 이미 소유했을지라도 또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의 들뜬 마음과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중요한 말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신 곧 탐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있다. 재물(Mammon)에 대해 묘사한 와츠(Watts)의 유명한 그림(그것은 무서운 고발장이다)에서 와츠는 그 괴물을 더러운 욕심을 한껏 뽐내면서 즐기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였다. 그 그림의 의미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만일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괴물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는, 엎드려서 한 팔은 많은 국가들을 끌어 안고 있으며 다른 한 팔은 앞으로 내뻗고 있는데 더 이상 움켜 쥘 것이 없어서 화를 내고 있는 깡마르고 눈이 퀭한 모습과 굶주리고 사나운 모습을 한 형상을 그릴 것이다.

 이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탐욕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도 불만족이라는 똑같은 탐욕의 벌레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음이 발견된다. 자본가의 탐욕, 대기업의 야만적 행위, 사람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온갖 잔인한 행위 이 모든 것이 소유하려는 정욕에서 생겨난다. 젊은 남녀를 유린하고 있는 개인적인 모든 악행들 즉 음주, 섹스, 도박 등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갈망 즉 탐욕으로부터 생겨난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엘리바스의 맨 마지막 말, 그것을 욥에게 적용한 것은 비록 잘못이 지만 원칙 자체로는 틀린 것이 없는 그의 말이 보다 널리 퍼져서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데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만일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욥 22:21-28)


 확실히, 십계명의 이 마지막 말씀은 정직하게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앞의 모든 계명을 자신의 행위와 대조해 보고서도 자신들이 크게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지닌 채 남아 있는 이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엄중하며 강력한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 감히 죄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삼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난 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옛 생활을 평가할 때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탐내지 말라"는 이 마지막 말씀을 대하고서는 죄가 그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룬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는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그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외형적인 생활을 규제하는 앞의 아흡 가지 계명에 비추어 볼 때에라도 "흠이 없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나 마지막 열번째 계명에 기록된 것에 대하여 자기는 금지된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연구를 마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기에 너무나 무능력한 자기 자신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십계명에서 생명의 법은 발견할 수 있으나 생명은 발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끝났다. 사람들이 살면서 인간의 눈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은밀하고 조용하게 "탐내지 말라"은 양심을 구속하는 말씀을 하실 때 또한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은 해석을 덧붙이실 때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리를 땅에 파묻고 "우리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의 빛을 비춰 주어 스스로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들고 따라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만든다. 즉 구원의 십자가 없는 십계명은 죽음을 선고할 뿐이다.


새 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사인 줄 알리라"(요 13:34, 35)


 십계명을 고찰하는 가운데, 모세를 통해 받은 구약 율법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더 그 의미가 확대되었는가를 보아 왔다.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있는 어떤 것도, 십계명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그 표준을 낮추지 않았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사실임을 명백히 선언하셨다. 주님은 생활과 가르침 모두에서 율법을 완수하셨다. 즉 주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성취하셨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실에서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 율법의 근본 목적까지 이루신 것이다.

 그리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직전에 이 새 계명을 말씀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다"(요 13:1). 이 말씀은 주님의 생활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밝힌다. 그것은 곧 사랑의 권리였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충동에 사로잡혀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신 최고의 진리 즉 사랑으로써 생활하는 곳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봉사가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렇게 하고 나서 주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시작하셨는데, 가르치시는 중에 모든 율법의 근본이요 원동력이자 최종 목적이 사랑임을 밝히는 이 새 계명을 선언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 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 8). 실로 이 계명은 옛적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명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미 있어 왔던 율법을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또한 대한 이러한 요약은 주께서 인용하신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미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신 6:5레 19:18).

 그렇다면 이와 같이 옛 계명을 반복하는 데 불과한 새 계명에 있어서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가? 그 답변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요한이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그 계명에 비춘 빛이라는 점이다. 요한이 새계명이 기록된 요 13:34, 35를 기록한 것도 역시 당시 주님의 제자들의 사랑의 원리에 따른 생활을 통해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요한은 "새 계명은 저에게와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옛 계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확연해진 새로운 빛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 먼저는 옛 계명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새 계명을 주의해 보고,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새 계명을 살펴보자.


옛 계명을 담고 있는 새 계명

 십계명을 어기는 것마다 모두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으로써 생활을 통제하고 지도한다면 십계명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간의 관계에 관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간단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사랑의 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을 통해 십계명이 성취되는가를 주의해 보면서 열 가지 계명 전부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만일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이 나타내며 마음의 활달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발휘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른 신을 모실 여지가 전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십계명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은 완전하게 지켜진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것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강한 애정의 힘 때문에, 이미 새긴 우상이 있을지라도 이는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진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신성 모독의 샘을 마르게 하고 위선자의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일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생겨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써 예배에 임할 수 있고 사랑으로 예배 행위들을 취할 수 있을 때는 안식일을 몹시 반기고 안식일의 모든 특권을 진심으로 기쁘게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십계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인간 상호간에 관계된 계명으로 넘어가 다른 계명들에 대해 작용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그러면, 부모님께 복종과 공경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충분한 능력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제단에서 사랑의 불꽃이 꺼지는 두려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살인할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을 것이다. 아주 비열하게 사랑을 사칭하는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정 행위는 확실히 사랑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부정 행위는 그것이 사칭하는 바로 그 사랑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더욱더 추잡 해져 간다. 이웃에 대해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이웃에게 재산의 피해를 주는 도적질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말을 조심하고,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가 될 수 있는 소문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퍼뜨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려서 소문을 내려는 생각조차 없앨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마음의 갈망을 채우고 모든 탐심을 방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오직 사랑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는 새 율법의 보다 풍성한 의미를 진술하기에 부족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실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얻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상의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 가지가 담장 너머로까지 뻗어 나가는,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글자에 얽매이는 단순한 사람들의 좁은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사랑은 종종 사치스러우며 방탕하고 분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 같이 단순한 감각적이며 퇴폐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귀한 치료제가 있는데. 사랑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그 치료제를 아낌 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는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사랑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랑을 다른 충동들과 대조시켜 보아야 한다. 의무는 기계적이고 정확하며 규칙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서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무는 율법만을 지키는 반면에 사랑은 그 이상으로 행하여 율법이 지니는 참 뜻을 영광스럽게 한다. 따라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 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 "(롬 5:7) 여기서 의로움과 선함의 차이는 의무와 사랑의 차이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을 체면 때문에 하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타인이 지켜 보는 일은 조그만 일까지도 다 신경을 써서 아주 규칙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필시 보는 사람에게서 불리한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은 외형적인 평가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외로운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도울 수 있거나 절망뿐인 토굴 감옥에 희망의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비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태도는 종종, 무심코 그 행동을 보게 되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실을 아주 엄격하게 자제한다.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많은 일을 감내 하려고 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러한 사람은 흔히 바로 이런 충동 때문에 외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행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곤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써 행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명성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일에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선한 행동을 이루는 원동력인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온 율법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계명

 온전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이띠루는 것이라는 진술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털끝만치도 사욕이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그리스도 한 분이 보이신 사랑의 생활을 제시하며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그 그리스도의 생활을 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성육신하신 사랑이셨다. 주님의 전 존재와 생활은 세계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활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의 증거까지도 주님의 완전하심을 선포한다. 주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알리느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의 침묵을 깨뜨렸다. 빌라도는 모든 증거를 조사한 후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겠노라"고 바른 판결을 내렸다. 주께서 암흑의 지하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을지라도 마귀가 주님을 보고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암시하는 바가 많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에 이르기까지 삼중적으로 중명된 이 순전함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결과였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충성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친구들과 적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까타났다. 즉 이따금 폭군과 압제자들에 대해 쏟으신 맹렬한 분노와 압제 받는 자들을 항시 부드럽게 대하시는 주님의 행동에서 사랑이신 주님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관해 무슨 질문을 하든지 그 답변은 여하튼 사랑 안에서 결정된다. 주님의 인격에 관해 질문을 하면, 그 인격의 특성들 하나 하나가 다 사랑에서 나오므로 그 특성 전체는 결국 사랑으로 귀착된다. 주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 보면, 주께서 사랑의 힘에 사로잡혀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소년 시절부터 성인시절까지, 고향 나사렛에서의 생활에서부터 선생으로서의 공적 사역을 하시고 그 이후 줄곧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걸어 나가신 길을 조사해 보면 그것은 깊은 사랑의 길이다. 일생 동안의 주님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사랑으로 말미암는 행위 외에는 그 어떠한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께서 오가신 때를 살펴보고 지체하거나 서두르시는 일, 물러나셨다가 돌아와 활동하신 그 모든 일을 살펴보면 주님의 전 생애는 사랑 그 자체를, 그것도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을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사랑 없는 자들의 죄를 속하였다. "죄는 불법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에게는 속죄가 필요하였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속 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죄의 행동 원리를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이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사랑을 보여 주는 최상의 증거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의 책임을 떠맡는다는 사실에 있다. 인류의 죄를 속량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완전 하신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성육신 하신 사랑인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흠이 없으셨다. 그러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모든 사람의 잘못과 죄를 떠맡으셨다. 이것이 속죄의 신비인데, 그 사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죽음의 신비는 한없으신 신적 사랑이 원동력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만이 지닌 탁월성이다. "나는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다시 얻을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냉명을 다시 얻으신 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그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사도의 말대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생활의 자극제인 사랑은 또다른 사랑의 행위들을 유발시킨다. 사랑이 최상의 이유이기 때문에 모든 추론도 역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바울이 지은 사랑의 시만큼 사랑의 생활을 잘 묘사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놀라운 묘사 가운데서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이 아주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다음에 이 묘사에는, 자기에게 사랑이 있다고 하는 자를 철저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들어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율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은 모두 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없거나 주님의 사랑의 충동에 고의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시내산을 벗어나서 지낼 수 있는 곳은 갈보리 뿐이다. 왜냐 하면 시내산의 법전에 나타난 모든 취지를 이를 수 있는 곳은 사랑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홀리신 갈보리 언덕밖에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성취하는 때란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거하며 마음을 지배하는 때뿐이다. 생활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하시게 하라. 그러면 생각파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행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율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마음을 살피고 시험하는 일은 옛 계명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새 계명으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 날에 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살펴보고 고든 말의 원인을 추적해 보며 모든 사상의 개념을 조사해 보라.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한 결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대해 만족하여 안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랑없음을 확인케 되고 깊은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어한 절망감 때문에 오히려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 곧 영원하신 사랑의 주님을 의지하는 새 생활로 나아갈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 계명의 표준이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 시며,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지킴을 통해 얻는 결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로 귀결된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므로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도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