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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계명강해설교

에반젤(복음) 2020. 2. 14. 11:29



십계명강해설교

 

십계명을 자세히 탐구해 보자

 

 

목 차

 

1. 서론: 십계명의 현대적 의미

 

2. 제 1 계명/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3. 제 2 계명/ 절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4. 제 3 계명/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5. 제 4 계명/ 철저히 주일을 지키라

6. 제 5 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7. 제 6 계명/ 살인하지 말라

8.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9. 제 8 계명/ 도적질 하지 말라

10. 제 9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11. 제 10 계명/ 탐내지 말라

 

12. 결론: 오늘 십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십계명강해설교]1 강/

 

십계명의 현대적 의미

 

 

I. 십계명에 관한 오늘의 이미지

 

‘과연 현대에도 십계명이 유효한가?’ 수많은 신학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성도들은 심정적으로 이런 문제제기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문제제기가 일어나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 판단된다.

 

 

첫째, 오늘의 시대 상황과 3500년 전의 시대 상황이 너무 달라서 동일한 윤리 도덕적 법규가 적절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 메시지가 ‘복음’, ‘은혜’, ‘사랑’, ‘용서’와 같은 분위기인데 십계명은 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여서 어울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또한 일방적으로 ‘하라’, ‘하지 말라’는 독단적인 교훈 방식은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가부장제도적 형식이어서 현대인에게 거슬려 보이기 때문이다.

 

넷째,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십계명을 이미 재해석하신 바 있어서 그대로 따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십계명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세례 입교 교육 때나 특별 훈련 때 공부하면서 마음을 다짐해 보지만 이내 흐려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십계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II. 십계명의 본래적 의미

 

과연 현대에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한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십계명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즉 십계명의 본래적인 의미부터 찾아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십계명의 유래

 

# 시기/ 출 19:1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3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고 했고, 3절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밤 낮 40일을 지냈다”고 했다. 그러니까 출애굽 후 약 5개월 10 정도 지났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그러니까 대개 주전 1450년 5월 10일 정도에 십계명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장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산 앞에 장막을 쳤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산 위에 불러올리셨다. 19:11에 그 산의 이름을 시내산이라 했다. 그런데 이 산은 출 3장에 나오는 호렙산과 동일한 산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과정/ 출 31:18을 보면 하나님께서 손수 두개의 돌 판을 준비하셨고, 그 위에 직접 글을 새겨 십계명을 만들어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는 진노하여 그 돌판을 그들을 향하여 집어던져셔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판을 준비해서 다시 산으로 오르라 명하셨다. 그 돌판에 하나님께서 다시 직접 글을 새겨 십계명을 만들어주셨다. 그래서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후에 지성소에 보관되게 되었다.

 

# 이름/ 원래 성경에는 십계명이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성경에는 증거판(출 32, 신 4, 고후 3), 증거 법판(출 31), 두 돌비(신 5) 같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대교회에서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주로 통용된다. 이 명칭은 제17세기(A.D)에 웃서(Ussher) 대감독이 스코트랜드의 서남쪽에 있는 안원(Anwoth)에 있는 사무엘 루덜포드(Samuel Rutherford)집에 찾아 갔을 때 이것을 지적했다. 그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목사의 부인이 그에게 이것을 물었다고 하며, 그 후에 요리 문답에 "십계명"이라고 했다고 전하여 내려온다.

 

 

2. 십계명의 내용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칼빈의 해석을 따라 첫 번째 돌비에는 1-4계명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돌비에는 5-10계명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누셨기 때문에 그렇고 또한 문법적으로 히브리어 와우라는 접속사를 따르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정확하게 그 내용이 돌비에 어떻게 구분되었는지는 설명되어있지 않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하나님에 대한 명령(1-4계명)

 

1-3 계명/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한 명령이다. 하나님 자신, 상, 이름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다.

 

4 계명/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에 들어오라는 명령이다.

 

# 인간에 대한 명령(5-10계명)

 

5 계명/ 인간 사회의 권위에 대한 명령이다.

 

6-9계명/ 인간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한 명령이다. 생명 자체로서 살인 문제, 생명의 시작과 질서로서 간음 문제, 소유문제로서 도둑질, 사회 규범 세우기로서 거짓 증거의 문제이다.

 

10계명/ 인간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에 대한 명령이다.

 

 

3. 십계명의 신학적 배경

 

십계명은 이 땅의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인 인간 생활의 법 규정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의 언약의 자녀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일이다. 출 19:3-8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으로 부르셔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 말을 내려가 백성들에게 전하라 명하셨다. 그 때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씀드렸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방적인 은혜의 수혜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트너가 된 것이다.

 

십계명은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삶의 원리이다.

 

 

4. 십계명의 의미

 

십계명의 시작을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즉 이 말은 십계명을 주시는 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구원해 내신 분이시라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십계명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바로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이미 구원 받은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것은 십계명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타락한 인류 누구라도 이 십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든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요 지침인 것이다.

 

여기서 시내산을 주목해 보자. 시내산은 출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이미 만났던 곳이다. 모세는 이 산에서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부르심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변화의 동력 그 자체였다. 이제 두 번째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만나신다.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신 이후 그 다음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다.

 

결국 십계명은 일차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어가도록 이끌어가는 노정기라 할 수 있다.

 

 

III. 십계명의 현대적 의미

 

그러면 오늘 이 현대에서 십계명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십계명은 홍해 건너편에서 주어졌다. 이미 홍해를 건넌 감격과 뜨거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이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바로가 통치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자신들은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을 누린 사람들이다. 마치 탕자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 품에서 용서받고 다시 새롭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십계명은 바로 이런 시각, 이런 관점에서 받게 되는 계명이다.

 

이런 십계명의 본질적인 정신은 오늘 현대에서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 탕자가 잔치를 치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집에 돌아온 그 날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십계명은 이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간단하게 정리하셨다. 마 22:37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 계명이다. 요 21:15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너는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앞으로 목회할 때 기본 정신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을 기본 정신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이런 계명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 계명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들은 정말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 계명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강해설교]2 강/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1-3)

 

 

I. 1 계명의 의미

 

십계명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고, 5-10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초가 되는 계명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할 때 이 관계는 철저하게도 배타적이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든지, 한 여자 외에도 여러 여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라 할 수 없다. 서로 연애할 수도 더더욱 결혼 할 수도 없다. 내게는 당신뿐이라는 피차의 고백이 진실하게 주고 받아들여질 때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특별히 택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특별히 사랑하겠다는 선언이시다. 이제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너희도 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약속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더 이상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only you!”를 고백해야 한다.

 

 

II. 본문 연구

 

1.“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단수인 “너”라고 부르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전체를 하나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신약의 교회관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엡 4:3-5을 보면 교인들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고, 고백하는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라는 것이다. 즉 믿음의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라는 것이다. 4:12을 보면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 안에 모인 무리들 전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각자 저마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 안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고백이 굳건해야 하고, 또한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 가운데 혹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도록 살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2.“나 외에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은 ynIP l[' (알 파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파니’라는 말은 ‘나의 얼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용례로 쓰이는 말이다. ‘... 위에’, ‘... 앞에’, ‘ ... 대항해서’, ‘... 외에’ 이 말을 종합해 보면 다음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 면전에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금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보는 앞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다고 할 때 우리 마음이 어떻겠는가?

 

2) ‘하나님을 대항해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것을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여기신다는 것이다.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행위 자체는 나를 배반하는 것이요 내게 등을 돌리는 행위를 말하며 이 때 내가 겪는 마음 고통은 어떠할 것인가?

 

3) ‘하나님 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할 때 질투를 느끼신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견디기 힘든 질투를 느끼게 된다.

 

결국 ‘나 외에는’ 이 알 파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뜨거운 사랑의 표현임과 동시에 배타적인 사랑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3.“다른 신들을”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인간이 존재하는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종족, 그 어떤 지역에서도 신이 없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시시대는 물론이고 최첨단 현대 문명이 구가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신은 여전히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신들이 변해왔다는 것이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토테미즘 형태로 신이 두려운 자연의 어떤 형상들의 형태로 존재했다. 고대시대로 오면서 이것이 샤마니즘 형태로 더 나아가 하나의 나름대로의 종교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 현대에 와서 종교 외에 문화 현상 속에서도 신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단언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능력이라고 부를 현상들이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인간이 이기기 힘든 동물들 그들을 신이라고 섬겼다. 번개나 태양과 같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가진 것들을 신이라고 섬겼다.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초월적 현상들을 일으키는 영계의 잡귀들 무당들이 이들을 신으로 섬겼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식하고 초월적 어떤 존재들을 상정해 놓고 이를 신이라 개념화해서 여러 종교들이 섬기고 있다. 오늘 현대에 와서는 이념이나 과학 나아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최고의 가치들이 신으로 추앙 받고 있기도 하다.

 

삼하 7:22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4.“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명령은 미혹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여길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탄의 미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보다도 더 하나님 같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조화가 생화보다 더 생화처럼 헷갈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닌 것들이 더 하나님처럼 믿고 따르게 미혹한다. 탁닛한 스님이 왔다 해서 호들갑이다. 한 동안은 달라이라마가 어떻다고 시끄러웠다. 글께나 읽었다는 사람들도 거기에 뭐 대단한 것이 있는 양 떠들어댄다.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 있다. 하나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대구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유대인 600만 학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시험이다.

 

이 명령은 선택의 결단을 촉구한다. 수 24:14-5장에서 여호수아가 촉구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미혹당하지 말고 시험 들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는 것이다.

 

 

III. 제 1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자

 

어떻게 보면 1계명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저들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외에 자기들을 도울 자가 그 누구도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명령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고는 불러다가 너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해라! 라고 엎드려 절 받는 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어서 미혹당하고 시험에 빠져서 자기를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쉽게 저버릴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을 그런 멸망의 수렁에 빠지도록 버려둘 수 없기 때문에 또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 올바른 신관을 갖자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라고 인정하라고 강요받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옹졸할 사람이요 배타적인 사람이라 해서 소외되기 일쑤이다.

 

분명한 것은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신들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일뿐이다. 우선 우리가 분명한 신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참 신이신 하나님을 전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장소의 장승을 밴다든지 타종교의 신상을 훼손한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행동은 곤란하다. 그 신상을 무너뜨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크게 세우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심령 속의 우상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3. 사랑고백을 드리자

 

1 계명의 핵심은 이 질문으로 대할 수 있다. “네가 나만 사랑하느냐?”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 “이처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가 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만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존재 의미임을 고백 드려야 한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

 

[십계명강해설교]3 강/

 

절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6)

 

 

I. 2 계명의 의미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에서 살핀대로 1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초에 관한 계명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 2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를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와는 다르다. 먼저 영이신 하나님을 영 아닌 어떤 우상으로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근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사랑하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는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결국 2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기본 원리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II. 본문 연구

 

1. 우상을 만들지 말라

 

1) 우상이란 무엇인가?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가징 상징적 사건은 레닌의 동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일어나면서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모택동의 동상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 전역에는 김일성 동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정권이 통치자의 동상을 나라 전역에 세우고 나아가 집집마다 그 사진을 붙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뱃지를 만들어 달고 다니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민들이 늘 자기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자기는 누구의 덕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지 잊지 말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민들의 마음까지 지배하고자 하려는 의도이다.

 

우상은 결국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진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힘 있게 떠오르고 지금 나와 실제로 연관된 어떤 영향력을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사진을 보고 눈물짓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상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나아가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현대에 오면 사람들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우상의 자리에 오른 것들이 있다. 예컨대 돈, 재물, 인기,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휘둘린다. 나아가 현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우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들도 참 많다. 예컨대 이념, 주의 주장이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념들, n 세대니 비n세대니 하는 세대간의 주장들 이런 것들이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사람들의 마음에 전파되어 지배하고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들이 현대적인 우상들이라 할 것이다.

 

 

2)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우상이란 실제로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이미지화한 것들이다. 부처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부처가 지금 여기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김일성 동상을 만들어 놓고 지금 김일성이 여기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자꾸 돈을 떠올리면서 마음에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실제로 돈이 그만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만한 힘이 있지 않는데 큰 힘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힘이 없는 것을 힘이 있는 것처럼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을 형상화해 놓으면 사람들이 잊지 않고 늘 눈에 보이니까 기억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 수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닌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어디나 계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해 놓는다면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대신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자신도 형상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형상화하면 그 자체가 바로 우상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그 우상에로 제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우상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1) 왜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은 예배 문제이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기 때문에 제사 또는 예배를 드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고 절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에게나 오늘 현대 사람들에게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안해 낸 손쉬운 방법이 바로 우상이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 다 우상이 있고, 그 우상에 절하고 그 우상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우상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상에 절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아닌 것에게 절하고 예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택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 선언인 것이다. 5절 보면 하나님께서 질투를 느끼신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 그것도 인간보다도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처럼 받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견디시기 힘든 모욕과 수치를 느끼시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우상에 절하거나 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2)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그 답을 알려주셨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하라! 여기서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영으로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구약 여러 곳에서 이런 표현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라” 예를 들어 시 63을 보면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자기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느끼고 더욱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고 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은 일절 보여주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으로만 역사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변화되고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고 복종하고 섬기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그 모습 앞에 절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나 몸만 절하지 마음이 변화되어 온전히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비록 더디고 힘들지만 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시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뿐 만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시면 우리가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기억나게 되고 그래서 말씀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II. 제 2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아직도 내게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지 돌아보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우상을 만들고 있다. 즉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힌다든지,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을 마음으로 깊이 의지한다든지,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든지...우리 안에 하나님 아닌 것으로 내 마음을 지배하고, 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사업이든, 심지어 나 자신이든... 그런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우상인 줄 알고 무너뜨려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다 버리고 주를 따랐던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자.

 

 

2. 올바른 예배를 드리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입술만 예배를 드려서는 안된다. 우리의 영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영이 주를 갈망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주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서 예배 안에서 우리의 영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 말씀으로 새롭게 결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배부르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3. 경고가 있음을 잊지 말자

 

다른 계명과 달리 이 계명에는 덧붙여진 경고가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삼사대에까지 그 죄를 물으시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마치 중요한 일에 상이 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우상숭배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십계명강해설교]4 강/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라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I. 3 계명의 의미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1-4계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계명은 그 관계의 기초로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2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에 관한 명령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고 영적인 예배로 섬기라는 명령이다.

 

이제 3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기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 3계명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이름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이름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바로 아담에게 명하신 것은 이름을 붙이라는 것이다. 이름이 주어질 때 그 존재가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이름부터 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아담에게 지으라 말씀하지 않으셨다. 직접 그 이름을 말씀해 주셨다. 출 3:13-4에 보면 “나는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이름을 알려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려주신다는 뜻이고, 그 이름을 매개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귀하게 인정해 드리는 것이며,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의 특권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II. 본문 연구

 

1.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망령되이”

 

망령 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shaw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없다는 어근에서 왔다. 그래서 말 뜻 그대로 번역을 해 보면 “헛되이”라고 할 수 있다.

 

# “일컫지 말라”

 

일컫다는 말은 히브리어 “nas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들어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 뜻을 살려서 번역해 보면 ”거명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컫지 말라는 말은 거명하지 말라는 뜻이다.

 

#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말을 다시 번역해 보면 “헛되이 거명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1) 함부로 그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물 지칭하듯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예배 때라든지 주님의 이름을 오용한다든지 또는 남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주기도문을 몇 번 외웠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초혼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칭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듯이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2) 헛된 약속이나 서원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하면 신빙성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더 높은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사람들이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그 문제에 대해 왕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 재판을 받거나 왕의 판단을 받아야 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유대인의 고소로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을 때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이름으로 호소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조상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다. 조상들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라 해서 그 맹세를 믿어준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도 그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해서 그 맹세를 믿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지키지도 못할 맹세나 자기가 지킬 생각이 없는 서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하거나 서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레 19:12, 마 5:34)

 

 

3) 나쁜 일과 연관되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렘 7:9-11에 도둑질할 의도로 성전에 들어와서는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경우를 말씀한다. 악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는 안된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또한 서양에서는 욕이나 한탄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God Demn, Jesus, Oh! my God... 이런 표현을 장난 삼아라도 사용해서는 안된다.

 

막 13:6을 보면 사람들을 미혹할 때 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가 말세인 것이다.

 

 

2.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 “죄 없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나가쉬(nagash)라는 말인데 그 뜻은 법정 용어로 “무죄!”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그 원래의 뜻은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자격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 마 12:37을 주목하자.

 

우리가 헛되이 내 뱉은 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자들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III. 제 3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함으로 간직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그분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존귀한 분의 이름을 부를 때 “함 자 *자 *자를 쓰십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 분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대인들처럼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대체해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그 이름을 주셨다. 단 그 이름이 훼손된다든지 그 이름의 존엄이 상실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부터 하나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 성령이라는 이름을 내게 가장 귀한 이름으로 마음 속에 간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2. 하나님의 이름에 책임을 지자.

 

시편을 보면 시인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직접 하나님께 호소하는 예가 참 많다. 세상 법정에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심판석상에서 들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자들 특히 고아나 과부들의 이런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이 때 자기가 그 일에 책임을 져야한다. 당장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소해서는 안된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는 모든 심판의 판결이 자기에게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활용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적절하게 활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실제로 성경에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력있게 활용하고 있다.

 

먼저, 삼상 17:45을 보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앞에 나아갔다. 오늘도 우리가 대적 앞에 나아갈 대 우리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적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막 16:17을 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는 약속이다. 오늘도 우리가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행 3:6을 보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특권인 것이다. 이 특권을 누리자.

 

[십계명강해설교]5 강/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

 

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

 

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출 20:8-11)

 

 

I. 4 계명의 의미

 

1-4계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1계명은 이 관계의 기초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2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첫째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라는 것이다. 즉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며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3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 둘째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 번째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30년 동안 애급의 노예로 그야말로 죽도록 일만했던 사람들이다. 잠시라도 쉬면 채찍이 날아왔다. 저들은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일의 노예로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뒤에 쉼을 주신 것이다. 일로부터 해방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일은 저들을 숙명처럼 억압해 왔다. 어떤 경우에도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쉴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은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일하다가 쉴 수 있는 노예가 아니라 일의 창조자로의 변신하게 된 것이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령하신 것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다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분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허락해 주셨다. 이것은 공간을 거룩하게 구분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과 달리 거룩하게 하나님과 영적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구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시간을 구분한 것이다. 일주일 다른 날과 구분해서 하나님과 영적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시간을 구분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구분된 장소에서 구분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긴 세월 하나님을 떠나있던 세상의 노예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바꿈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더 확장되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에서도 말로... 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소의 구분과 제한을 극복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안식일 대신 주일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언제나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과 열린 장소 열린 시간에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 예배의 장소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배하느냐 신령과 진정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해 준다. 신약에 오면 마 2:28에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말씀했다. 이것은 안식일의 사용을 인간 마음대로 함부로 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때 왜 하나님께서 이 날을 특별한 날로 정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내 편이에 따라 이 날을 함부로 변경한다든지 이 날을 자신의 뜻대로 활용하거나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이다. 내 날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 써야 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날 만큼은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이 날 만큼은 주님의 뜻대로 보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날을 놀고 쉬라고 주셨다고 자의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거룩하게 구분된 날이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구분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날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구분해야 할 것인가?

 

엿새는 세상일에 몰두하며 살았다면 이 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보내는 날이다. 성전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구별된 장소라면 이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구별된 시간이다.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땀을 흘렸다면 이 날만큼은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예배에 전념하고, 하나님 말씀 묵상하는 일에 몰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고 할 때 그저 주일 예배를 성수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은 직장에 출근하지만 이 날은 출근하지 않고 레저와 오락을 위해 허락된 날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주신 날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세상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히 행하라 주신 날이다.

 

 

3. 쉬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다. 이 안식 참된 쉼이 구분의 핵심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노동을 하도록 하셨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루만은 이 일로부터 해방되게 하신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 안식이란 에덴동산의 삶의 회복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안에서의 쉼을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 이 세상 염려 근심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에덴동산의 아담의 믿음으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단지 이 안식은 육체적인 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지키고 곤고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자아가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온전한 회복을 맛보는 것을 말한다.

 

 

4. 주님의 안식일 해석

 

예수님은 기존의 유대인들과 다른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계셨다. 우선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2:28)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정해서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도록 해서 이 또한 하나님의 큰 짐이 되었다. 마치 안식일이 복된 날이고 사람들은 이 날을 복되게 지켜야 하는 또 하나의 안식일의 종노릇하는 일이 생길 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날은 사람들에게 복주시기 위해 만들어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억지로 지킬 것이 아니라 자유함과 기쁨으로 이 날을 축복된 날로 누리라는 말씀이다.

 

다음으로 주일은 오히려 일하는 날이라 말씀하신다.(요 5:17) 실제로 주님께서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금하는 일을 하셨다.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다른 일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모든 일을 다 쉬라는 뜻이 아니라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즉 선을 행하는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해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한 안식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의 의식주를 위한 일이나 생명을 죽이는 일 그리고 악을 행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안식을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다.

 

 

III. 제 3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안식일의 축복을 누리라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짐으로부터 이 날만이라도 자유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 5:15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애굽에서 출애굽된 것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한다. 그러니까 이 날은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됨을 기억하고 우리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날이고, 죄의 삯으로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날인 것이다.

 

우리가 이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날만이라도 꿈꾸고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부분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복된 날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성도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면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금 체험하고 그 삶을 누리는 것이다.

 

 

2.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자.

 

안식일은 단지 세상일을 쉬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다. 엿새 동안 소홀히 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보다 깊이 하고, 주 안에서 내 영혼이 참된 안식을 누리고, 그 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이다. 보다 깊이 기도하고, 보다 철저하게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예배드리는 날로만 규정하고 이것만을 지키는 것은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3. 안식일의 철저히 지키자

 

주 5일 근무제가 확산 일로에 있다. 주일을 껴서 연휴로 해외여행이나 여러 가지 레저 프로그램들이 확대되고 있다. 삶의 질을 부르짖으면서 여가를 갖고자 하는 사회 분위기가 점차 팽배해 가고 있다. 또한 주일에 각종 시험이나, 각종 집회나, 각종 대회가 열리는 추세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구별된 날을 구별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우선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십계명강해설교]6 강/

 

효도 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I. 5 계명의 의미

 

5-10 계명은 전체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특히 5계명은 첫 번째 부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1-4 계명과 두 번째 부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5-10 계명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부모 사랑이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부모 효도가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이 5 계명은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 5 계명을 다룰 때 특히 두 가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연 이 5 계명과 유교 문화권의 효 사상은 같은 것인가? 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구지 개입하셔서 일일이 챙기시고 간섭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5 계명을 살펴보자.

 

 

II. 본문 연구

 

1.‘네 부모를’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단어로 되어있다. 즉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모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부모는 육신의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하나됨의 열매를 이 땅에 존재하게 된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여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모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 바로 그런 존재이다.

 

우리가 인간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인간인 부모를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2) 부모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의 근본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의 권위 아래 존재한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고, 그분들의 돌보심을 받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출세를 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부모 앞에서는 여전히 자식일 뿐이다. 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 밑에 겸손히 설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이 바로 세워질 것이다.

 

부모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다른 권위들도 존중하여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사회의 웃어른(딤전 5:1)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부모(갈 4:19)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리고 국가 지도자들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권위를 세우시고 그 권위가 존중받게 하셨다. 이 권위가 존중받지 못할 때 가정이 깨지고,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사회가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3)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훈련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아버지가 되심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훈련시켜주셨다. 즉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영으로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부여받았다. 마찬가지로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의 생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주님의 가르침은 확실하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처럼 영의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영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한 훈련이 되는 것이다.

 

 

2.‘공경하라’

 

히브리어로 ‘공경하다’라는 말은 db'K;(kabad)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의 본래적인 뜻은 무겁다, 또는 무겁게 한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소중하게 여긴다 가장 귀하게 받든다 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honour로 번역을 했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명예를 높이다는 뜻이다.

 

1)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대단한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적어도 자식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 생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서 우선은 부모가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한다. 부모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할 때 부모 입장에서는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에서 부모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다. 자식이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그 부모는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2) 순종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친 내용을 자식이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식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여 문제를 일으킬 때 부모는 큰 수치를 느끼게 된다.

 

 

3.‘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에게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약속하셨다.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길게도 하실 수 있고 짧게도 하실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생명의 길고 짧음이 이 부모 공경과 직접 연관되어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듯이 하나님을 잘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장수할 뿐 아니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III. 제 5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나간 과거 세대가 그 권위를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모 세대가 발 빠르게 변하는 정보화 시대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새로운 세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를 가르쳤지만 이제는 부모 세대가 점점 자녀 세대에게 묻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무시당하기 쉽다.

 

둘째, 부모의 생각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절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살아온 시대와 현 시대는 너무도 다른 것이 많다. 그 결과 부모들처럼 생각하며 살다가는 뒤처지고 왕따를 당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부모의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무시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셋째, 자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 사회로 이미 접어들었다. 점차 고령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은 은퇴 후에 20년 이상 살아가야 하는데 이 기간이 자식들에게 점차 짐이 되게 된다. 그래서 자식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라 말씀한다.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감사하며 그분들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부모의 자랑이 되라

 

자식들이 많아도 부모가 자랑할 만한 자식은 따로 있다. 부모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잘한다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이 자기에게 잘한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믿음 때문에 세상 살이 때문에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행여라도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자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자식 교육 잘못시켜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3.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 공경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아버지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기 쉽다. 이 때 육신의 부모를 공경한 것이 지침이 되어 영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아담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공경치 못하여 창조질서를 파괴한 것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지키고 바로 세워감으로써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과의 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간 사랑의 궁극적인 방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강해설교]7 강/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찌니라.” (출20:13)

 

 

I. 6 계명의 의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5-10 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다시 말해서 더불어 사는 인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5계명은 그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할 수 있는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이웃 사랑의 기초를 놓아라는 명령이다. 이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으로써 이웃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최소한의 행동으로 이웃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면서 이 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탐구해 보자.

 

 

II. 본문 연구

 

1. 살인의 의미

 

살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나 외의 이웃의 생명을 해치지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허락해 주신 생명을 내 뜻대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살인이다. 더 넓은 의미로 이 살인은 인간 생명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생명공간의 모든 생명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살인의 형태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직접적인 살인/

 

의도적으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폭력으로 생명을 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자살도 포함된다. 자기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간접적인 살인/

 

우리가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이 상함을 입는 것을 말한다.

 

우선 우리의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통사고나 우리의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행동으로 다른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직무유기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마땅해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이 땅에 존재한다. 생명치고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생명치고 이 생명공간에서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것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안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저들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더더욱 생명이 풍성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명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누려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찬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대 자연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까지 노래했다.

 

살인이란 바로 이런 생명 존재를 해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 자체로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2.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뜻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뜻은 한 마디로 이런 살인으로 다른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명령 안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생명 창조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있으라” 말씀하셔서 생명들이 존재한다. 특히 인간은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존재하게 되었다. 살인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케 하신 것을 존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니 반창조적 행동인 것이다.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의 창조행위를 거역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2)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존재한다. 그뿐 아니고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비전이 그려져있다. 때문에 생명은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한 없이 존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 슈바이처처럼 “생명에의 경외”를 느끼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찬양을 부른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3) 생명을 구하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계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분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떤 곤경 속에서도 이웃을 도우며 격려해 주어야 한다.” 즉 그는 이 계명을 적극적인 의미로 바꾸었다. 살인을 금하는 금령을 생명을 구해주는 계명으로 바꾼 것이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보듯이 생명이 죽어가는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하고 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살인의 예외 규정도 있다.

 

하나님께서 몇 가지 경우에는 생명을 해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첫째, 제사를 위해서 제물의 생명을 해하도록 허락하셨다.

 

둘째, 식용으로 사용할 생명을 해하도록 허락하셨다.

 

셋째, 자기 방어를 위해 생명을 해하도록 허락하셨다. 전쟁 중에 정당방위로 살인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

 

넷째, 처벌을 위해 생명을 해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형을 집행하는 것, 죄를 청산키 위해 죄인들을 처벌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III. 제 6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생명을 사랑하라

 

마 5:21-2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주님께서는 살인보다 살인하게 되는 동기조차도 금하고 계신다. 생명을 죽이고 싶고, 생명을 해하고 싶고, 생명을 무시하고 싶고, 생명을 욕하고 싶은 욕망 그 자체까지도 없애라는 것이다.

 

창 4장에 최초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질투가 생겼다. 창 4:5을 보면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몹시도 미워하게 되었고 질투하게 되었다. 자기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우선 자기 제사 자체로 돌아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 왜 자신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았는지 묻거나 항의하더라도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그 원인은 질투요 미움이다.

 

결국 미움은 잠재적 살인이다. 아직 행동으로 그 생명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그 생명을 해친 것이다. 그래서 살인하지 않으려면 미움을 없애야 한다. 상대방의 내게 대한 죄도 용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그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을 아름답게 보고, 나아가 그 생명을 사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다.

 

 

2. 생명을 구하라

 

오늘 우리 시대에 생명이 신음하고 있다. 이 신음하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우리가 앞 장을 서야 할 것이다.

 

구약 시대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계명이 통용되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생명을 구하는 한 방편이 되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무절제하고 감정적이며 불법적인 보복이 성행했다. 예를 들어 창 34을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디나의 오라비 시무온과 레위가 세겜 성 안에 있는 모든 남자를 할례를 받게 유인한 뒤에 몰살을 시켰다. 이런 잔인한 보복에서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눈을 다쳤으면 눈만 보복하라는 하나의 고대적인 정의의 표현인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수많은 생명이 여러 가지 형태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는데 우리가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갖가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불의한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다치고 있다. 피치 못할 전쟁은 최소화시켜야 하겠지만 이런 불의한 전쟁은 막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가야 한다.

 

낙태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질병치료를 위한 불가피한 낙태도 있을 수 있겠으나 불의한 낙태는 막아야 한다. 향락과 음난한 환경 가운데 저질러지는 낙태는 막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결 운동을 지켜가야 할 것이며 낙태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안락사 문제 또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뇌사라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면서 고통으로부터 생명체를 구원하겠다는 명분으로 안락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고, 또한 생명은 하나님께서만 거두실 수 있다. 안락사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그 외에 사형제도 문제, 생태계 파괴 문제 등 생명 살리기 운동과 직결된 문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적극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 생명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도록 도와주는 일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십계명강해설교]8 강/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20:14)

 

 

I. 7 계명의 의미

 

10계명의 두 번째 부분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이다. 이미 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함으로써 가장 가까운 이웃에 대한 가장 실천하기 쉽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사랑을 다루었다. 그리고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이웃 사랑의 최소한의 한계를 다루었다.

 

이제 7계명에서는 성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내 아내나 남편이 아닌 이성인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성의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성적인 관계라는 함정이 있는데 이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남의 아내나 남편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 이웃의 가정에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적인 문제는 이성의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하는데 이 문제를 잘 극복하라는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간음이란 무엇인가?

 

간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아프( #a'n:)라는 말이다. 이 말은 결혼한 남녀가 성적인 순결을 침해 당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결혼한 남녀가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적인 순결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첫째, 이 간음은 부부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창2:24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말씀했다. 부부는 한 몸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한 몸이라는 것은 부부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이제 서로에 대해 반쪽임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미국인들이 자기 배우자를 소개할 때 "my half"라고 소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이 반쪽은 다른 반쪽과 더불어 살 때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부부는 반쪽으로서 서로 함께 할 때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간음한다는 것은 다른 여자와 반쪽인 남자와 또 다른 남자와 반쪽인 여자가 육체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반쪽이 함께 붙어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온전히 하나를 이룰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반쪽이 자기와 상관이 없는 다른 반쪽과 만나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미 성적인 순결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적 순결을 잃게 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하나됨은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죄요, 그 죄의 대가로 큰 고통을 겪게 된다. 결국 간음은 부부의 하나됨을 깨뜨림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아내와 또 다른 부부인 이웃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행위인 것이다.

 

둘째, 이 간음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이 7 계명은 레 18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해설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금해야 할 성 행위가 명시되어있다.

 

하나, 골육지친과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6) 근친상간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와 부부관계가 아닌 다른 가족이나 친지들과는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 타인의 아내와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20) 이는 앞에서 다룬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셋, 동성애를 금하라는 것이다.(22) 호모 섹스는 성경이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동성간에 성적인 사랑을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넷, 동물과 성적관계를 금하라는 것이다.(23) 사람이 동물과 성적 행각을 벌위는 추잡한 행위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거론한 네 가지 행위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셋째, 이 간음은 마음의 순결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 마 5: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간음을 확대해서 해석해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육체적인 간음도 문제이지만 마음으로 저지르는 간음도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즉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고, 내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그 자체를 문제로 보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아내나 남편이 아닌 이성과 성관계를 바라거나 상상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 배우자 아닌 이성인 이웃을 성적 관계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될 때 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성인 이웃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돕기 보다는 성적인 욕망을 충족할 대상으로 보게 되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간음하지 말아야 하는 보다 깊은 의미

 

출애굽기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보다 폭넓게 해석되고 있다.

 

1) 레위기의 해석

 

레위기 18장을 보면 2-4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나라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거룩성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 거룩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간음이라는 것이다. 바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레위기 20장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 앞뒤에 “너희는 깨끗케 하여 거룩할찌어다”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20:26에 “너희는 내게 거룩할찌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말씀했다.

 

결국 우리가 간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성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백성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간음을 거룩성을 잃는 행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2) 신명기의 해석

 

신 22:21을 보면 처녀에게 처녀 표적이 없거든 그를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말씀하고 있다. 아직 처녀가 성적인 순결을 잃었을 경우 이것은 이미 악한 일이고,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에 이 악이 마치 전염병처럼 전파되어 공동체 전체의 순결에 치명적인 해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죽이면서까지라도 제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간음의 전염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생겨나면 겉잡을 수 없이 파급되고 나중에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생기게 된다. 요즘 사스가 세계적으로 야단이다. 그 전염성이 무섭기 때문이다. 중국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고 있다. 이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간음이라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III. 제 7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다. 동물들과 달리 따로 발정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누구나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성적 충동과 욕구를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마음으로 간음을 지저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 뿐 아니라 실제로 간음을 저지를 유혹을 얼마든지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요셉처럼 간음을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깨닫고 우리 마음을 철저하게 지켜갈 수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성을 잃게 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것이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심각한 죄인 줄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해야 하겠다. 내 힘으로 이것을 제어할 수 없다. 성령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환경을 지켜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한 마디로 음난한 시대이다. 우리의 문화가 이 음난을 조장하고 이 간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고 있다.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음악, 소설 이 모든 장르의 작품들 안에 간음이 중심 테마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죄라는 관점이 아니라 성적인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성 상품화 환경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미 향락산업이 거대한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도처에 널려있는 러브호텔, 룸살롱, 각종 향락 업소들은 한 마디로 간음 산업인 것이다. 돈으로 성을 팔고 사고... 이제 쉽게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간음을 저지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더 이상 간음이 죄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고,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상황은 인터넷을 통해 이 간음이 on-line을 통해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음난 사이트는 성인은 물론이고 이제 청소년들도 공공연하게 마음으로 간음을 즐기게 하고, 나아가 실제로 성범죄에 빠져들게 충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의 거룩성을 지키고, 우리 자녀들의 거룩성을 지키기가 너무 힘이 드는 상황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음난을 방불한다. 여기서

 

우리를 지켜가야 할 것이다.

 

[십계명강해설교]9 강/

 

도둑질 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출20:15)

 

 

I. 8 계명의 의미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은 8계명에도 계속 이어진다. 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신 후 6계명에서부터는 금령으로 소극적인 말씀이 이어진다. 즉 이웃을 사랑하려면 적어도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 즉 남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고, 7계명에서는 간음하지 말라 즉 성적인 차원에서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8계명에서는 소유권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하나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이 되는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도둑질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소유권을 가진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난 인간에게는 청지기로서 소유물을 나누어 주신다. 그들은 그 소유권을 행사하면서 자기의 삶을 누리게 된다. 이 소유권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 가운데 하나이다.

 

도둑질이란 바로 이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남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남의 소유물에 대해 자기가 소유권을 행사하려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런 도둑질은 한 사람의 생존권 자체를 공격하는 일로 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고통을 가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기 소유권을 행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 도둑질이란 무엇인가?

 

도둑질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인간 자체에 대한 도둑질이 있다.

 

도둑질 가운데 사람 자체를 훔치는 것이 있다. 유괴요, 인신 매매 같은 것을 말한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워서 그를 학대하는 한 방법으로 요셉을 팔았다. 물론 돈을 받았다. 이 이야기 안에서 두 가지 문제를 보게 된다. 하나는 사람을 팔아서 이들을 보려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 팔수 있는 존재로 물건 같은 존재로 보아 그 사람을 팔아 자신의 소유를 늘려보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팔리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움의 표시로 요셉을 팔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셨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치 자기의 소유처럼 취급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권을 침해했고, 마치 자기 소유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되찾게 해 주신 것을 말한다.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께 받은 바 한 개인의 인권을 존중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소유물에 대한 도둑질이 있다.

 

남의 소유물에 대한 도둑질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도둑질이다. 남의 소유물을 도둑질 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 힘으로 남의 소유물을 빼앗은 것을 말한다. 강탈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이 알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억지로 빼앗는 것이다. 크게는 국가 간에 작게는 개인 간에 오늘도 이런 강탈이 자행되고 있다.

 

둘, 남의 소유물을 훔치는 것을 말한다. 절도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 몰래 그 사람의 소유물을 도둑질하는 것을 말한다. 직접적은 개인 소유를 절도하는 경우도 있고, 공동의 소유물 즉 공공의 물건을 절도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공중 화장실에서 비치된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행위를 들 수 있다.

 

셋, 남을 속여서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한다. 바로 사기를 말한다. 상대방을 속여서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직접 사기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고, 또한 간접적으로 사기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간접적이란 예를 들어 저울추를 엉터리로 만든다든지 되를 잘못 만든다든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셋째, 우회적인 도둑질이 있다.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우회적으로 침해하는 경우들도 넓은 의미로 도둑질이 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의 소유권에 침해를 주는 경우이다. 우선 빚을 갚지 않음으로써 채권자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분명한 도둑질이다. 다음으로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공동체 모두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대신 누군가가 세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둘, 게으름 때문에 상대방의 소유권에 침해를 주는 경우이다. 근로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게 될 때 사용자의 소유권을 침해하게 된다. 동업자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다른 동업자의 소유권을 침하하게 된다.

 

셋, 불로 소득을 얻음으로써 상대방의 소유권에 침해를 주는 경우이다. 투기를 함으로써 다른 불특정 다수의 소유권에 침해를 주는 경우가 있다. 도박도 마찬가지인데 도박은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도둑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복권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넷, 부정을 저지름으로써 상대방의 소유권에 침해를 주는 경우이다. 뇌물을 주고 이익을 취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 피해가 가게 된다. 공직자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취하게 되면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게 된다. 부정부패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넷째, 사회 제도적인 도둑질있다.

 

법과 제도의 문제 때문에 특정인들이 소유권에 침해를 받게 될 때 이 또한 넓은 의미로 도둑질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물연대의 파업 문제 그 한 복판에는 지입제라는 것이 있다. 지입 차주들이 회사 명의로 차를 구입하게 되고 자기 소유면서도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는 부당한 상황을 맞게 된다. 이 또한 사회 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에 소유권에 침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지적 소유권, 특허 문제, 무역협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 여러 가지 법 제도의 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 때문에 소유권 침해 상황이 갈수록 복잡하고 지능화되어간다.

 

 

III. 제 8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청지기 의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모두가 빈손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빈손으로 이 땅을 떠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소유하고 있다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잠시 빌린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이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될 때 도둑질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나 뿐 아니라 너도 청지기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도 하나님께 소유물을 얻었고, 너도 그 소유물을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내게 소유물을 주신 것처럼 너도 네 생명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네게 소유물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도둑질은 하나님의 나누어주심에 대한 도전이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정면 부정이다.

 

이 청지기 의식을 바로 갖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바로 십일조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도둑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도둑질 중의 도둑질은 바로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십일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우선 재물에 대한 청지기 의식은 철저히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도둑질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이기적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소유를 늘이고, 자기 필요를 채우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도둑질함으로써 상대방이 입게 될 피해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지 못한다.

 

내 것이 귀하면 네 것도 귀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게 필요하면 네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쓴다.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한다.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 이전에 이웃에 대한 역지사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3. 정직해야 한다.

 

우리가 도둑질을 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재물 앞에 정직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도둑질을 하게 된다. 공금을 횡령한다든지, 공사를 혼동해서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쓴다든지, 남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그 모든 과정에 간사한 마음, 정직하지 못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면 도둑질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우리가 양심을 지키면 도둑질 할 수 없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면 도둑질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십계명강해설교]10강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출20:16)

 

 

I. 9 계명의 의미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은 9계명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웃을 사랑하기위해 구체적으로 금해야 할 것을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이웃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7계명에서는 간음하지 말라 말씀하셨다. 이웃의 행복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웃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9계명에서는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말로써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이 되는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거짓 증거란 무엇인가?

 

거짓 증거란 법적인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법적 판단에서 증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신 17:6을 보면 두 세 사람의 증언으로 사람을 사형시킬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신 19:16-9를 보면 만일 증언에 문제가 있으면 그 증언에 따른 책임을 지도록 명시되어있기도 하다.

 

여기서 거짓 증거란 일차적으로 이런 법적인 상황 가운데서 잘못된 증언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거짓 증거로 잘못된 심판을 받게 되어 때로는 생명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상의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네 이웃에게”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면 꼭 재판 상황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짓말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전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없이 던지는 말 때문에 때로는 의도적인 말 때문에 이웃이 심각한 고통을 받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것을 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약 3:5-6을 보면 혀에서 나오는 작은 불이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 고 경고하고 있다. 혀를 통해 나오는 잘못된 말 한 마디가 이웃의 삶 자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요 8:44를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거짓 증거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사탄의 역사요, 거짓 증거하는 이들은 바로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거짓 증거의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해 보자.

 

첫째, 적극적으로 진실을 왜곡해서 말하는 것이다. 없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사실을 의도적으로 변조해서 말해서 이웃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경우를 말한다.

 

둘째, 거짓된 침묵이다. 진실이 왜곡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분명히 자기는 진실을 알고 있는데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이 침묵은 소극적인 거짓 증거가 되는 것이다. 비겁하게 말해야 할 때 입을 다물어서 이웃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셋째, 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창 3장에서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호하게 하여 그 말씀을 훼손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모호하게 물 타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그럴 리가 있느냐고 진실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넷째, 농담이나 험담이다. 이웃을 화제 거리로 삼아서 농을 한다든지,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결국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2. 거짓 증거의 결과는 무엇인가?

 

거짓 증거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이웃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힌다. 거짓 증거로 그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당한 배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그 마음에 치유하기 힘든 큰 상처를 입히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다. 이 9계명 뒤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바탕에 깔려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진실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거짓을 말함으로 그 진실함을 버리게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게 된 것이다.

 

특히 행 5:3-4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을 말했을 때 베드로는 그들이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 거짓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믿음의 공동체 내의 신뢰 분위기를 깨뜨린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대 사회는 신용사회를 추구한다. 서로가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의 선진 여부는 바로 신용도에 두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믿음의 공동체는 더 말이 필요 없다. 공동체 구성원 서로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오고 가는 말들이 진실이어야 한다.

 

그런데 거짓 증거가 나타나면 그 신뢰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늘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를 경계하게 된다. 천국이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III. 제 9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말에 대한 책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만은 말을 통한 의사소통으로 인간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니까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의 문화를 창조해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바로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의 특별한 기능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또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특징은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말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 말에 대한 책임이 준엄하게 부여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거짓이 파고들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거짓이 너무도 쉽게 파고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9계명은 이 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명령이라 할 수 있다. 눅 19:22를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의 책임에서 우선 진실성을 확보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말에 진실만이 깃들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신중하게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함부로 말하거나 잘 모르면서 말부터 내 뱉는 경박함을 피해야 한다.

 

다음으로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앞에서 하는 말이 다르고 또 뒤에서 하는 말이 달라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

 

 

2. 변화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려면 우리가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거짓을 말하는 이유는 거짓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동기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악함이다. 원래 그 마음이 악할 때 거짓을 말하게 된다. 둘은 두려움이다. 그 말이 자기에게 큰 해로 돌아올 것 때문에 두려워 할 때 거짓을 말하게 된다. 셋은 부주의이다. 생각 없이 농 삼아 때론 분위기에 휩쓸려서 거짓을 말하게 될 때가 있다. 넷은 자기 자랑이다. 자기를 자랑을 하려다 보니 부풀리게 되고, 남을 깎아내리게 되고, 진실을 왜곡하게 된다. 그리고 다섯은 욕심이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도록 상황을 조작하고 진실을 왜곡하게 되면서 거짓을 말하게 된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려면 이런 거짓을 말하게 되는 동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동기를 부여받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3. 진실에 대해 헌신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짓이 횡행한다. 패역한 세상이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을 지키고, 진실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 거짓을 말하고, 적당히 거짓을 해야만 손해 보지 않는 세상에서 나만 진실을 말하게 될 때 그 자체가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에 대해 헌신할 때만 우리가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로 복음을 전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거짓이 나온다면 복음 전파는 이미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짓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거짓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천국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한 공동체여야 하고 믿을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십계명강해설교]11 강/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출20:17)

 

 

 

I. 10 계명의 의미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은 10계명에 와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 10계명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의 근원인 탐심을 제거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 즉 6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7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8계명의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모두가 탐심에서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 탐심은 바로 십계명 두 번째 돌비에 해당하는 부분을 범하게 되는 뿌리이다. 즉 이 탐심이 죄의 뿌리요 어머니 죄(Mother Sin)인 것이다. 내게 소유권이 없는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기 시작할 때 십계명 두 번째 부분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골 3:5을 보면 이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십계명의 첫 번째 부분의 핵심인 우상숭배와 이 탐심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우상을 만드는 이유가 이 우상들을 통해서 자기들의 탐심을 표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탐심 문제는 이웃 사랑을 어기는 구체적인 범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어기는 범죄의 간접적인 동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탐심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탐내다라는 말은 하마드(dm'j;)이다. 이 말은 남의 것을 사랑하고, 가지고 싶어 하고, 열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탐심이란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갖고 싶어 그것이 마음에 소원이 된 상태를 말한다.

 

1) 약 1:15을 보면 “욕심이 죄를 낳는다”고 했다. 이 탐심이 구체적인 죄를 만들어내는 동기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예를 살펴보자.

 

삼하 11장을 보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냈다. 그를 왕궁으로 불러 동침함으로 간음죄를 저질렀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이 죄를 덮기 위해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동침케 했으나 우리아의 거절로 불발로 그쳤다. 이는 거짓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마물지 않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하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탐심 하나가 간음죄, 거짓죄, 살인죄까지 이어서 저지르게 만드는 모든 죄의 출발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삼하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책망하시는데 그 내용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것을 탐내서 힘으로 그것을 빼앗았다고 말씀한다. 바로 탐심이 그것이다. 남의 것을 가지고 싶어서 부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게 되는 동이 그 자체이다.

 

2) 눅 12:15을 보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탐심은 우선 우리의 관심을 온통 세상 소유물에 쏟도록 한다. 이것은 하나님 보다 소유물을 더 사랑하게 하여 그 영적 상태를 황폐화시킨다. 눅 12:21은 그 결과를 탐심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탐심은 늘 근심하게 한다. 소유욕에 마음이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하게 된다. 그래서 참된 평안을 맛보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 탐심을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다.

 

3) 엡 5:5을 보면 “너희도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게 못하리니”라고 했다. 즉 탐심을 갖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베풀고, 나누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탐심은 세상나라 사람들의 삶의 태도이지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탐심의 대상은 무엇인가?

 

첫째, 이웃의 아내/ 원문을 보면 이웃의 아내가 먼저 나온다. 고대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지금도 회교권이나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이런 풍조가 남아있다. 이런 문화권 속에서는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아내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채무자의 아내를 탐내는 채권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해서 채무자의 아내를 빼앗은 사례가 흔했다. 이것을 금하는 것이다.

 

둘째, 이웃의 소유/ 이웃의 부동산(집과 토지), 이웃의 노예(남종과 여종), 그리고 가축(소나 나귀) 등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왕상 21을 보면 아합의 탐심을 볼 수 있다. 아합은 자기 궁 근처의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다. 21:4을 보면 그 포도원이 나무 탐이 나고 돈으로도 살 수 없게 되자 근심하고 답답해서 침상에 누워 밥도 먹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남의 것이 탐이 나서 병이 들 정도다. 그러자 이세벨이 나섰다. 거짓 증인을 내 세워 나봇을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기에 이른다.

 

셋째, 기타 무형의 것들/ 이웃이 누리고 있는 명예, 이웃의 앉아있는 자리 즉 기위나 권력, 이웃이 공부해서 얻은 지식, 이웃이 즐기는 쾌락... 이런 것들이 질투를 낳고, 나아가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 해를 끼치게 된다.

 

 

III. 제 10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탐심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탐심은 그 자체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는 심령의 태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다. 결코 탐심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탐심을 키우면 남의 소유에 대한 사랑이 커져서 그 자체가 우상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다. 우상숭배가 죄이듯 탐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2.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빌 4:11-2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이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한다. 한 마디로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속에는 탐심이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족할 줄 알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족이 없으면 늘 원망과 불평이 생긴다. 이 원망과 불평 속에 탐심이 싹트는 것이다. 게다가 자족할 줄 모르면 욕구가 생기게 되고, 그 욕구가 탐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웃을 축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도 사랑하시지만 너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도 복을 주시지만 네게도 복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웃이 받은 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안에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픈 마음”을 빨리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웃의 소유를 진정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다면 그것을 탐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의 복을 나누며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웃이 하나님께 더 많은 복을 받기를 기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가야 한다.

 

정말 내게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뒤에 만나로 먹이셨다. 그런데 만나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루가 지나면 바로 썩는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게 하는 소유 훈련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저들이 하나님만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다윗도 일찍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했다. 우리의 많은 소유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시고 또한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다면 그는 탐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5.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말에 견물생심이라는 것이 있다. 자꾸 좋은 것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인다.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탐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금 투기의 열풍이 불고 있다. 건전한 투자는 노후 생활보장이나 경제생활의 수단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투기로 발전하게 되면 탐심의 노예가 되고 만다.

 

소비문화도 문제이다. 홈쇼핑, 세일, 경매, 아울렛 매장, 인터넷 쇼핑 등 상품 구매의 방법도 너무 다양해 졌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싸고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빠져들면 살 필요가 없는 물건도 사게 되고 소비 중독에 이르기까지 한다.

 

사향심을 조장하는 풍조도 문제이다. 도박이나 복권 열풍도 탐심을 조장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지나친 광고도 문제이다. 사람들을 현혹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자극한다. 이것 역시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십계명강해설교]12 강/

 

오늘 지켜야 할 십계명

 

 

I. 십계명의 의미

 

출 3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첫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에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실 뜻을 밝히셨다. 특히 3:12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목적이 단순히 저들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이 되게 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뒤에 바로 가나안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가나안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출애굽 3개월만에 저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시내산 앞 광야였다. 저들이 본격적인 예배하는 백성이 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밝히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신 일차적인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출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신 보다 근원적인 목적을 밝히신다. 특히 19:5-6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은총의 일방적인 수혜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두 번째 만남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방적인 은총의 수혜자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대자가 된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만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을 밝히셨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말씀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 언약의 백성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인 것이다.

 

십계명은 홍해 이편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애굽에서 해방을 맛보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도 건넜다. 이제 자신들의 삶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자리에로 나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죽음 권세를 이긴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뿐 만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듯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은 바로 이들에게 주신 계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출애굽 이후 일방적은 은총을 베푸시던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도록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셔서 “너는 이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십계명이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지켜가야 할 계명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십계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계명을 두 개의 위대한 사랑 계명으로 요약해 주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 22:37-40) 그러니까 십계명은 구원 받은 약속의 백성으로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지침이 되는 것이다.

 

 

II. 십계명의 내용

 

십계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측면으로 1-4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적 측면으로 5-10계명이다.

 

 

1. 하나님 사랑(1-4)

 

* 1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기초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신은 한 분뿐이어야 한다.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인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신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셔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고 병행해서 섬긴다면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관계는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 2 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상은 섬기는 자들의 마음속에 통치자로 자리 잡는다. 우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좌우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통치자로 섬기고 그분만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귀하게 여기며 경외하며 살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구체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이름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또한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4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이 말씀은 세상의 노예로 일에 억눌려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일의 노예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창조적으로 일을 주장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다.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2. 이웃 사랑(5-10)

 

*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웃 사랑을 위해 첫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본래 타락한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를 사랑하라 하심으로써 이웃사랑의 기본을 가르쳐주시고 훈련시키시려 하셨다. 자기를 낳아주고 자기를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 준 부모라는 이웃부터 사랑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 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명령이다. 이웃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존재할 가치가 있고 그 안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생명을 해치 말라는 것이다. 내 생명이 소중하듯이 이웃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지켜주려는 자세는 이웃 사랑의 기본인 것이다.

 

* 7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이웃의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그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이처럼 한 몸이 된 후에 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간음은 이 한 몸 됨을 깨뜨리는 것이다. 사탄의 충동으로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 스스로 인간의 격을 포기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과 이웃 모두 하나됨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 8계명/ “도적질 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이웃의 소유권을 인정하라는 명령이다. 이웃이 땀 흘려 얻은 소유를 빼앗거나 훔침으로써 그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자신도 땀 흘리지 않고 불로소득을 얻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웃의 땀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지켜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 9계명/ “거짓 증거 말찌니라” 거짓 증거란 말로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법적 증언을 거짓으로 함으로써 이웃에게 법적인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이웃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좋지 않게 말함으로써 인격적으로나 실제적인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웃에 대해 칭찬하고 긍정적으로 대변해 줌으로써 이웃을 사랑해 가라는 명령이다.

 

* 10계명/ “탐내지 말찌니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즉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의 소유에 욕심을 품는다는 것은 이미 이웃과의 관계가 금이 가고 있다 것을 말한다. 이웃이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웃이야 어찌 됐건 나만 잘되야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의 소유를 탐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축복하고 그가 잘 됨을 더불어 기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II. 오늘에 십계명을 대하는 자세

 

우선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법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국민다운 국민이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이 십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법이나 계명이라고 하니까 의무요 억지로라도 지켜야 하는 법조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십계명은 사랑의 동기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동기에서 지켜갈 때 십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가 있다.

 

그리고 십계명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십계명은 이 세상 풍조와 다른 삶을 요구한다. 힘들고 지키기 쉽지 않지만 철저하게 지켜갈 때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채워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성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지켜가는 믿음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