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십계명 해석 논리
루터가 성경번역의 왕이라면 칼빈은 성경주석의 왕이라고 말한다(It has been said that if Luther was the king of translators, Calvin was the king of commentators). Calvin and Hermenutics, edited by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27. 그렇다. 칼빈은 조직신학자라기보다는 성경 신학자이다. Calvin and Hermenutics, 65. 칼빈은 성경 대부분을 주석했으며 또한 설교했다. 주석은 단순히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단어분해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제 구성하는 것(consarcinare/ to patch together)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데 중점(to communicate a "living exposition")을 둔다. Calvin and Hermenutics, 2. See also, Inst.I, xiii, iii.
칼빈학자들에 의하면 칼빈은 다양한 주석방법을 사용한다. 가령,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찾는 방법, 기독론적인 성경해석방법, 유형론적 해석 방법, 문맥중심의 해석방법,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방법을 주석의 원리로 사용한다. Calvin and Hermenutics, 2, 33,
칼빈의 십계명 해석 논리 칼빈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즈음하여 창세기 주석과 「모세 오경의 마지막 4권의 조화/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arranged in the Form of a Harmony」 에 대한 주석(1563)을 했다. 칼빈이 왜 모세 오경을 한데 묶어서 주석하지 않고 오경의 마지막 4권에 대한 주석을 했는가는 자신이 분명히 말하지 안했지만 내용면에서 볼 때 창세기와 오경의 마지막 4권의 내용 차이가 있다. 창세기는 율법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오경의 마지막 4권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칼빈은 오경의 마지막 4권을 하나로 묶어 주석했다고 생각되어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모세 오경의 마지막 4권의 요지는 율법이며 줄여서 말하자면 십계명에 대한 주석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모세 오경 마지막 4권의 조화」 주석했고, 「기독교 강요」에서 십계명에 대한 설명과 해석방법 그리고 「십계명설교」에서는 신자의 생활에 십계명의 적용에 대한 설교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계명의 이해에 대한 논문이 많이 나왔으나 십계명(설교, 강요, 주석)에 대한 해석학적인 논문은 적은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은 칼빈의 「모세오경 마지막 4권 주석」, 「기독교 강요」, 그리고 「칼빈의 십계명설교」에 나타난 십계명에 대한 해석논리를 명료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칼빈은 십계명을 설교에서(1555), 기독교 강요(1559),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 조화 주석」(1563)에서도 해설하고 해석한다. 연대기적인 순서로 보면 설교, 기독교 강요, 주석으로 나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십계명 해석논리는 저자의 의도를 들어내는 것이며 저자의 의도는 율법의 마지막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I.「십계명 설교」에서 해석논리
1. 십계명 설교와 시대상황
칼빈은 1555년 6월 7일에 십계명에 관한 연속설교를 시작했다. 이 설교들은 신명기에 관한 설교전집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는 이 설교를 같은 해 3월 30일 신명기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십계명에 관한 연속설교는 1555년 6월 7일에 시작하여 7월19일에 끝난 것으로 추정된다.「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빅희석 옮김(서울 :성광문화사, 1991), 19.
칼빈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십계명설교를 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명시되지 않했지먄 설교 곳곳에 그 상황이 반영되어있음을 엿볼 수 있다.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에 의하면 칼빈과 제네바 공화국의 개혁에 반기를 들었던 정치적 파당(political faction)이었던 방종파(Libertine Party)의 몰락과 칼빈에 반대하는 볼색이 주도하는 분파가 있었다. 베자는 이 분파를 이렇게 특성지우고 있다.
그 해 칼빈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칼빈에 반대하는 분파의 출현으로서, 이 집단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소수의 목사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반대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볼세크(Bolsec)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래 평판이 좋지 않았던 목사들로서, 그들 자신들이 칼빈과 같은 저명한 적수를 공격하게 되면 본인들에게 명성이 얻어질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칼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약속에서 제외된 것이 없다고 가르쳤으므로, 그는 하나님을 죄악의 조성자로 만들었다는 식으로 칼빈을 매도하였다. 칼빈도 처음에는 그들의 비방을 무시해 버렸으나, 마침내는 베른 공화국측에 그들의 악의적인 주장에 대한 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입국허가를 간청하였고, 베른시의 시민들 앞에서 진리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 그곳에서 보내온 사절단과 함께 베른으로 갔다. 칼빈이 그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 후로, 카스텔레오는 수치스럽게도 베른 시로부터 추방을 당했으며, 볼세크 역시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알았다. Beza, vita, CO 21.151-2; Life, 65.
이런 점에서 볼 때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배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마음 아픈 심정으로 십계명에 관한설교를 했음을 읽을 수 있다.
2. 십계명 설교의 요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시고 주신 “참되고 영원한 의의 규범”(the true and eternal rule of righteousness)이다. 여기서 율법을 순종해야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grace)와 감사(gratitude)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케 하는 것이다. 율법의 순종은 자발적이다. 이 자발적인 순종의 근원과 원천 그리고 그 뿌리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자발적인 순종을 하기 때문이다. 「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빅희석 옮김(서울 :성광문화사, 1991), 128-129.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며 경건한 삶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은혜와 경건이 결합된다. 은혜와 경건은 구분되지만 분리시킬 수 없다. 칼빈은 디도서 2:12을 인용하면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근신함과 의로움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숭배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그를 신뢰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마땅히 그 분께 드려야 할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빅희석 옮김(서울 :성광문화사, 1991), 298.)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빅희석 옮김(서울 :성광문화사, 1991), 213-214.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후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양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3. 십계명 설교와 해석논리
1) 조정이론 (God's accommodation)
조정이론이란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참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들의 왜소함(smallness)에 맞추셨을 뿐더러, 그의 몸을 우리의 키에 맞게 구부리셨다.”는 말이다「칼빈의 십계명설교」, 427.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을 고려하셔서 성경을 기록케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성경을 이해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에 맞게 조정하셔서 성경을 기록케 하셨다. 만약에 하나님만이 아시는 언어로 성경을 기록하셨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자신을 낮추시고 배려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성을 따라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언어로 말씀하시고자 하셨다면, 과연 이 땅의 피조물들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는 더듬으면서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아이들을 양육하는 보모에 비유한 바가 있는데, 그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님을 통하여 자기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모세와 그 밖의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모로서의 역할을 맡으셨으되, 그가 성인들에게 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이들의 능력이 얼마만한 것인지를 올바로 기억하고 계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적절히 낮추셨는데, 그것은 이처럼 그가 자신을 인간의 수준에 맞추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그의 하시는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이 성경 가운데서 만나 뵈는 하나님은 오히려 유모처럼 친밀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바, 그 이유인즉,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뿐더러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 분의 높고도 무한하신 존엄하심을 우리들이 거기에서는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놓으셨는데도, 만일 하나님께서 그처럼 먹기 쉽게 죽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이제는 그것을 삼키고 소화시키는 일만 남아 있는 그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우리들이 유익을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 우리의 머리 위에는 무서운 저주가 놓이게 될 것입니다. 「칼빈의 십계명설교」, 427-428.
2) 하나님의 의도
인간은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항상 반복해서 깨우쳐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율법을 시내 산에 주셨을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을 끝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가르쳤으며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반복해서 가르치셨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리와 법도를 배움으로서 유익을 얻도록 하셨다. 이것이 모세가 "의도"했던 것이다(Voila ce que Moyse a entendu en ce passage/ That is what Moses meant in this passage). 「칼빈의 십계명설교」, 56.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자녀가 자기를 이 세상에 낳아 주고 먹이고 입혀 주신 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괘심한 일이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라도 그 부모를 부인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기괴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혐오의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설사 이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씀도 없으셨고, 이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어떤 성경의 말씀이나 개인이 없다손 치더라도,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의무는 결단코 파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 이미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Nous voyons donc l'intention de nostre Dieu)를 엿볼 수 있는데, 즉 그는 우리 앞에 부모님이라는 상징을 두시면서, 우리들이 성미 고약한 자들이 되지 않고 그가 메어 주시는 멍에를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드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잘 설득하고 깨우쳐 자신에게로 이끄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는 모든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인 한, 그는 합법적이고 일반적인 대인간의 질서에 입각하여 이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239. CO, 26, 311. 참조; 「칼빈의 십계명설교」,390. (John Calvin's Sermons on the Ten Commandment, ed. and trans. Benjamin W. Farley(Michigan :Baker Book House Company, 1980), 221. (CO, 26). 373.
3) 유형론적 해석
칼빈은 안식일의 계명을 설교하면서 “안식일은 사람들이 만나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여러 희생 제물들과 영적 의식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위하여 모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하나의 의식으로” 존속해 왔음을 주지시키면서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율법 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하는 모든 일로부터 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그림자”(shadow)였는데 희미했던 그 모호성(obscurity)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제거되었다고 칼빈은 말한다.「칼빈의 십계명설교」, 170-171, 174. 따라서 안식일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주의 날이 되었고 그를 통해서 성취되게 된 것들을 상징(representing)하는 하나의 징표(a sign)라고 말한다.
율법에 있어서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역할 혹은 사용이 끝난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의 진리성(truth)과 본질(substance)은 영구히 존속한다.「칼빈의 십계명설교」, 442. “또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의 율법이 영구적으로 보존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두 돌 판에 쓰셨는데, 이것은 율법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존재하는 어떤 것처럼 단지 잠시 동안만 존속하도록 주어진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법 가운데 의식적인 요소들의 역할은 끝난 것이 사실이고, 또 그러한 까닭에 사람들이 율법을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효력을 가지도록 고대 백성들이 더 이상 당시에 그 기세를 떨친 바 있는 그림자들과 상징들의 지배하에 있지 않아도 되리만큼 완전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쨋든, 율법의 진리성과 본질은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영원히 존속할 항구적인 어떤 것을 형성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442). 참조; 137. 325-6. 예수님의 율법의 성취로 말미암아 한시적긴 것이 영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희미한 것이 분명하게 되었으며 결국 성경의 목표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율법을 이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4) 율법해석과 성령의 조명
칼빈은 율법의 올바른 이해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필수적이며 예수는 율법의 가장 충실한 해석자이다. 왜냐하면 모세와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의지하여 율법을 선포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칼빈의 십계명설교」, 388. 제 5계명 설교에서는 모세와 선자들과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보다 더 충실하고 더 훌륭한 해석자는 없다고 칼빈은 고백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240. 12번째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계시하기 전에는 사도 바울이 탐욕에 대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회심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통하여 바울을 조명하심으로 자신 얼마나 비천한 지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칼빈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소망이 있고 또한 그 안에서만 찾아야 하는 하나님의 긍휼을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삼게 하기 위하여 탐욕의 본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회심하고 성령을 통하여 조명을 받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칼빈의 십계명설교」, 392-3. "He confesses that he was ignorant of God's law until our Lord Jesus Christ illuminated him by his Holy Spirit,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word consupiscence entails." ( John Clavin's Sermons on the Ten Commandment, ed. and trans. Benjamin W. Farley(Michigan :Baker Book House Company, 1980), 221). 성령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신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한다. 둘째, 성령님은 내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자제시킨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동시적이거나 혹은 단독으로 당신의 의지에 따라서 사용한다. Calvin:: Commebtaries, ed. Joseph Haroutunian(Kentucky:Louisibile: John Knox Press, 1958), 397. 따라서 율법의 올바른 해석은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적이다. "but it is necessary fro God through his Holy Spirit to reveal to us the nature of this covetousness which he condemned in this passage."(John Calvin's Sermons on the Ten Commandment, ed. and trans. Benjamin W. Farley(Michigan :Baker Book House Company, 1980, 222).
5) 율법해석과 자연스러운 의미
칼빈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에서 자녀들은 부모를 반드시 공경해야한다는 계명에서“공경”(subjection)이라는 말의 의미는 복잡한 의미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의미(the natural sense of this passage)를 들어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는 것은 단순한 논리적인 분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삶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Furthermore, if we want to grasp the natural sense of this passage , let us understand that God commands us here to lead an honest and chaste life, that there may be turpitude or dissoluteness in us."(John Calvin's Sermons on the Ten Commandment, ed. and trans. Benjamin W. Farley(Michigan :Baker Book House Company, 1980,
요약하면, 율법을 해석하는 방법은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해석논리는 성경에 제시된 논리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의도이며 목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서 봐야한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II.「기독교 강요」와 십계명 해석논리
1.「기독교 강요」와 십계명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율법에 관하여”라는 제목 하에 상세하게 율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기독교 강요」의 골격을 이루는1539년은 최종판과 비교할 때 4개의 장만 추가하여 재구성했으나 칼빈의 율법에 관한 사상은 번하지 안했다. 그래서 초판(1536)에 최종판까지 23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숙고하여 나온 사상이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 학자들에 의하면 칼빈의 주석이나 설교를 지배하는 신학이나 해석논리는 「기독교 강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가 제시한 십계명해석논리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2. 율법 (의식법과 도덕법)에 제시된 해석논리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기독교 강요」 2권에서 칼빈은 율법과 복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율법을 통해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계시하셨고 우리에게는 복음을 통해서 계시하셨다. 여기서도 율법의 올바른 이해를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의식법은 물론이고 도덕법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예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강요」 2권 7장의 제목을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율법을 준 목적은 구약백성을 그것으로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오실 때까지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는 데 있다(The law was given, not to restrain the folk of the old covenant under itself, but to foster hope of salvation in Christ until his coming).”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편집부 번역(서울: 성문출판사, 1990), II.7.1. 223.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Christ is the end of law unto salvation to every believer/롬 10:4)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자체가 죽은 (고후 3:6) 의문(율법)을 살리는 영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중생의 영을 통해 의를 전해줄 때까지는 계명에 의해서 “의”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II,7.2. 229.
십계명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삶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은혜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짐이 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scopus), 약속의 성취이다. 따라서 율법은 율법의 목적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II,8.7. 273. 로마서 10:4 주석.
1. Scopus 의 정의
Scopus라는 말은 희랍어 명사 skope(σκοπη), 동사 skopeo(σκοπεω)는 보다(to have in view)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사 skope는 조망대(a looking out or watch tower on a hilltop)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유적으로는 목적(aim), 끝(end), 타겟(target), 목표(goal)라는 의미로 쓰인다. Boyale에 의하면 skope의 라틴어 사용은 터툴리안(Tertullian)의 빌립보서 3:14 주석에서 기인되며 에라스무스(Erasmus)가 이 사실을 명시했다(.Marjorie O' Rourke Boyle, Erasmus on Language and Method in Theology(Toronto and Buffalao: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7), 74-75).
3. 율법의 최고 해석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율법의 바른 이해를 회복시키셨다. 우리가 이것이 율법의 의미라고 할 때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해석자인 그리스도”를 따른다.
4. 저자의 의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위선에 의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을 깨우치며 회복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는 율법의 최고해석자(the best interpretor)이다.
칼빈에 의하면 대부분의 율법에는 대위/제위법적(synecdoches)인 표현이 있음으 칼빈에 의하면 대부분의 율법에는 대위/제위법적(synecdoches)인 표현이 있음으있음으로 율법의 이해는 문자적인 한계를 넘어서야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편지부 번역(서울: 성문출판사, 1990), II,8.8.275. 그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혹은 의도(finis/ratio)를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분명히 거의 대부분의 계명에는 명백한 제유(synecdoches) 있음으로 유럽에 대한 이해를 한정되어 있는 말의 범위 내에서 국한시키려 하는 것은 비웃음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기준을 정하지 않는 한 여전히 애매한 채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나는 계명이 주어진 이유(rationem)에로 관심이 돌려진다면 각 계명에 있어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유(rationem)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the best rule/modum optimum)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모든 교훈은 명령하거나 금한다. 그것이 명령이든 금지이든 간에 우리가 그 이유(rationem)나 목적(ceu finem)을 연구해보면 즉시 그 진의가 마음에 와 닿는다. 제 5계명의 목적(ut preaecepti quinti finis est)은 영광이 하나님께 정하신 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계명의 요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우월성을 부여한 자들을 공경하는 것이 의로우며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스리는 멸시와 강퍅함을 증오하신다는 것이다. 제1 계명의 의도(primi praecepti ratio)는 하나님만을 존경하는 경건, 곧 그분의 신성에 대한 경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불경건을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계명에서는 우리는 그것과 불쾌하게 하는 것을 그 계명에서 입증하심을 발견하실 때 까지는 그 목적(deinde quaerendus finis)을 추구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이와 동일한 것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측면에서 논거를 끌어내야한다. 즉, 만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와 반대되는 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만일 하나님이 이것을 명하시면 그 반대되는 것은 금하시고 이것을 금하시면 그 반대되는 것을 명하신다는 이것이다. 「기독교 강요」, II.8.8.
칼빈에 의하면, 첫째, 거의 모든 율법은 대위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이 제유법을 상용하신 이유는 율법을 강력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우리 스스로가 체험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죄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혐오감과 공포감을 주어서 우리가 각종 범죄 가운데서 계명을 들을 때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서 우리를 죄로부터 격리시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기독교 강요」, II.8.10.). 그래서 건전한 율법의 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을 넘어서 율법의 의도를 찾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저자의 의도를 찾는 방법이 가장 좋은 해석방법이라고 했다. 칼빈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를 찾는 방법은 장르이다(Osbome, Trinity Journal 4/2(1983), 24. J Barton도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 본문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본 문의 장르를 어느 정도나마 인식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Reading the OT, 16).
“어떤 본문에 대하여 해석자가 갖고 있는 총괄적인 인식은 그가 계속해서 이해할 모든 내용의 본질적 요소가 되는데, 이 사실은 이 총괄적인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한 그리고 변하다 하더라도 그때가지 계속 유효하다.”(E.D. Hirsch, Validity in Interpretation, 74, 76).
“언어의 의미에 대한 모든 이해는 필연적으로 그 장르와 연관 되어 있다. 물론 장르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특성은 해석학 학계의 한 흐름이다.”(Guknn, Storky of King David, 19). 가령 예를 들면 제 5계명의 의도는 영광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에게 돌아가야 함을 말해준다. 그래서 여기서 율법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려야 할 자에게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는 자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율법이 금하는 것의 반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금지는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금지 외에도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5. 율법해석과 그리스도
전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영원한 의의 규범이다. "the will of God is the origin and foundation of the law."(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of the law, pickwick publications, Allison park, Pennsylvania, 1992, 19).
The Moral Law
According to William Klempa, The moral law is expressed in the Decalogue:
"The moral law ... is contained under the two heads. one of which simply commands us to worship God with pure faith and piety; the other, to embrace men with sincere affection. Accordingly, it is the true and eternal rule of righteousness, prescribed for men of all nations and times, who wish to confirm their lives to God's will. For it is his eternal and unchangeable will that he h. For it is himself indeed be worshiped by us all, and that we love one another."(Inst. IV.20.14.)
The moral law has four points: i) it is eternal and law unchangeable; 2)it is universal, prescribed for "men of all nations and times"; 3) it teaches that God is to be worshiped by us all; 4)it teaches that we ought to love one another.(Calvin Studies IV, Editor, John H. Leith and W. Stacy Johnson, 1988, 6-7). 우리가 의의 규범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들어내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것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저체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웃사랑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하며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흘러나온다. (「기독교 강요」, II.8.5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 경건한 생활이요 거룩한 생활이다.
III.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 주석과 십계명 해석논리
1.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들의 조화와 해석학적 의도
칼빈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 주석에서 제 1-4 계명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 즉 신양의 요약이요, 제5 계명에서 제 10 계명은 상호간의 삶에 대한 법을 말해준다. 불어판에서는 첫째 돌판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신앙(la piete)을 다루며 둘째 돌판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빚지고 있는 정의(l'equite)를 다룬다고 말한다. “La piete que nous devons a Dieu, et l' equite que nous devons a nos prochains"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신앙과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빚지고 있는 형평(衡平)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3, 제 2계명 주석, 452, 출 20:12, 16)
칼빈은 자신이 시도한 책을 비판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변증법적인 서문에서 자신의 해석학적 의도를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배열해 놓음으로서 미숙한 독자들을 도와 그들이 보다 더 쉽게, 보다 더 넓게, 그리고 보다 더 유익하게, 모세의 작품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수고한 것에서 어떤 유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내가 그로 하여금 이 별개의 책을 연구하는 일에서 후회하도록 만들려 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이런 대요로서 분명한 목표점을 알려주려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흔히 일어나는 일로써, 그가 어떤 일정한 계획을 모름으로 말미암아 곁길로 가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이 네 권의 책들은 두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역사적 교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교회는 이것에 의해 참된 경건(믿음과 기도를 포함한)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숭배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의롭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 규례가 제시되어 있으며 각 사람마다 그들의 여러 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모세는 그의 책에서 이런 차이점을 관찰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연속적인 형태로 역사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고 교리를 연관성 있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행위에 관한 법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모두 십계명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밗의 다른 곳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풍조를 식별해나거나 다른 교훈을 그들의 계층에 알맞게 옮길 만한 총명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룩한 선지자 모세의 의도를 제시해 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의 글에서 더욱 더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그런 도움을 막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존 칼빈, 구약주석 3, vol.1, 머리말, 15-16.
Preface of John Calvin to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For I have no other intention than, by this arrangement, to assist unpracticed readers, so that they might more easily, more commodiously, and more profitably acquaint themselves with the writings of Moses; and whosoever would derive benefit from my labours should understand that I would by no means withdraw him from the study of each separate Book, but simply direct him by this compendium to a definite object; lest he should, as often happens, be led astray through ignorance of any regular plan."(CC Vol. II, Michigan: Grand Rapids, Baker Books House, Volume Frist, 1989, XIV-XV)
As we see above, Calvin arranged the last four books of Moses in form of harmony and illustrated by commentaries in order that unpracticed readers may understand writings of Moses more easily and profitably.
The Last Four Books of Moses are made up of two principal parts: the historical narratives and the doctrines by which the Church is instructed in true piety, in the fear of God and worship of God, and also teaches the rule of just and holy life, and the individuals are exhorted to the performance of their several duties.
칼빈에 의하면 평신도들이 쉽게 모세의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모세의 의도를 제시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세의 글로부터 더욱 더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오경의 마지막 4권을 한데 묵어서 주석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 사실은 「기독교 강요」의 저술의 목적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배열해 놓음으로서 미숙한 독자들을 도와 그들이 보다 더 쉽게, 보다 넓게, 그리고 보다 더 유익하게, 모세의 작품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목적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 칼빈, 「구약성경주해」 Vol. 2, 편역/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서울: 성서원, 1999), 15. 이것이 모세의 의도이다(santi prophetae mente et consilio). CO, Vol. xxiv, 2nd volume, 1.
모세 오경의 마지막 4 권에서 의롭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 규례가 제시되었으며 각자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도 모세는 이런 차이점을 묵과하고 있으며 그러한 교리를 연관성 있게 설명하고지 있지도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속적인 형태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도 않다. 행위에 관한 모든 법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십계명에 속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을 한 사람이 없음을 칼빈은 인정한다. 존 칼빈, 「구약성경 주석」, Vol.3, first volume, 16.
칼빈에 의하면 「모세 오경의 마지막 4권의 조화」라는 책에서 역사적인 이야기(narrative history)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죄악 된 이스라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misericordiae/ gratiae dei)를 기술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죄 지은 자를 벌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줌으로 우상숭배, 악한 생각과 탐욕에 벗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배우게 한다.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3, first volume, 16(서문).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의 책에는 교리가 있는데 교리는 네 가지 주요 제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모세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찬미로 율법의 권위를 가르치고 있으며 서문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둘째,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간략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을 위한 규례(the rule of a just and holy life/ pie iusteque vivendi regulam)의 요약이다. 다른 규례는 여기에 준하고 있다. 셋째, 세 번째 항목은 부록으로서 첫 번째 증거 판에는 예법들과 외적인 예배가 두 번째 증거 판에는 정치법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의 목적은 도덕률(the moral rule)을 준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선하고 올바른 생활의 규례로서는 십계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네 번째, 마지막 항목은 율법의 목적과 용도를 보여준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Christum esse finem legis)께로 달려 가도록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의 의도이다(huc spectant promissiones). CO, Vol.24, 2nd volume, 7-8.
이와 같이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주석은 이 책을 이해하는 해석적인 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의 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생활로 요약할 수 있으며 결국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요약 (summa legis) /목적과 의도
율법의 요약이란 십계명 하나하나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 율법의 내용에 대한 요약과 그 가르침의 목적과 의도(quorsum tendat eius doctrina)를 의미한다. 칼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율법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사랑으로 표현된 믿음”으로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 1:5).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5, 3rd. volume, 173. 모세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십계명을 두 항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한 문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의도(eius consilium) )를 분명하게 신약에서 설명하고 있다. C0, Vol.24, 2nd volume, 721/Matt.22:37. 율법은 의롭고 올바르게 사는 생활 규범(iuste vivendi regula, C0, Vol.24, 2nd volume, 725)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은 십계명의 요체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경건(pietatem)과 의로운(iustitiam) 생활이며, 의로운 생활, 자비를 베푸는 생활, 정직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원하시는 삶이다(마 23:23). 여기서 이웃이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칼빈에 의하면 율법의 세 가지 핵심은(praecipua legis capita) “의와 인과 신”(iudicium, misericordiam et fidelitatem) 이다. C0, Vol.24, 2nd volume,722.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한다면 하나님을 경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율법을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시지 않는다. 경외란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경외심(timore dei)이 싹트지 않기 때문이다. C0, Vol.24, 2nd volume, 722/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5, 3rd volume, 176.
3. 율법의 용법 (finis et usus legis)
칼빈에 의하면 선악에 대한 지식은 천성적으로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교육적인 용도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욱 더 중요한 율법의 용도는 신학적인 용도이다(legis usus theologicus).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부패되고 연약하게 되어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처를 구해야함을 알게 되며 자신의 연약성을 깨달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게 한다. 그래서 첫째로 그리스도롤 통해서 보여준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둘째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중생되어 의롭게 살므로 만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3, 185.
율법과 복음은 본질에서 다른 것은 아니지만 양자를 비교할 경우 양자의 특성에서는 다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문자이며 복음은 영이다(고후 3:6). 문자라는 말은 율법은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외형적인 것이며 영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에 효력을 발생하는 살아있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란 오직 귀로 만 아는 죽어있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영이란 효과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 깊이 스며들어 열매를 맺게 하는 가르침이다. 칼빈, 「구약 성경주석 」, Vol.3, 각주 4, 186.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더 자세한 설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기독교 강요 2권 7장을 참고하고 말하고 있다.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3, 186.
4. 저자의 의도 (the intention of the author)
칼빈에게서 저자의 의도는 단순히 기록한 사람의 의도라기보다는 성경을 기록케 하신 성령님의 의도를 말한다. The dual authorship of Scripture
1. the divine side of Scripture
The locus classicus for Calvin's view of the divine inspiration of Scripture is his exposition of 2nd Timothy 3:16.
To assert its authority he[Paul] teaches that it is inspired by God, for if that is so, it is beyond all question that men should receive it with reverance. This is the principle that distinguishes our religion from all others, that we know that God has spoken to us and are fully convinced that the prophets did not speak of themselves, but as organs of the Holy Spirit[spiritus sancti organa] uttered only that which they had been commissioned from heaven to declare. All those who wish to profit from the Scriptures must first accept this as a settled principle, that the law and prophets are not teachings handed on at the pleasure of men or produced by men's minds as their source, but are dictated by the Holy Spirit[spiritu sancto dictatam .... Moses and the prophets did not utter rashly and at random what we have received from them, but, speaking by God's impulse[Dei impulsu loquerentur], they boldly and fearlessly testified the truth that it was the mouth of th Lord that spoke through them.... We owe to the Scripture as we owe to God, since I has its only source in Him and has nothing of human origin mixed with it[nec quidquam humani habet admistum].(CC. 2 Tim. 3:16/C.0. 47.125)
Scripture is athorative because it is the Word of God, and not only it has the origin of God, but also it is dictated by the Holy Spirit. Calvin even says that the Apostle and prophets' lips are "the mouth of the one true God [illorumora os unius Dei esse]CC I Peter. 1:25/ CO 55.230). He calls th apostles "ure and genuine scribes of the Holy Spirit" [ certi et authentici spiritus sancti amanuenses]. (Inst. IV. viii.9/OS 5.141)
2.the human side of Scripture
Although Calvin never articulates precisely how he conceives of the process of inspirati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did not occur at the expense of the personality of human writers. The process of inspiration of Scripture is far from mechanical. He writes of the psalmists "laying open all their inmost thoughts and affections," clearly suggesting the involvement of the human mind.(Comm. Pss., Pref. C0.31.17). Calvin comments on the literary style of the biblical texts reflects his belief that human author's mind remained active in the production of Scripture. Calvin rejects Pauline authorship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because he finds stylistic differences between it and epistles he believes to be genuinely Pauline. "The manner of teaching and style sufficiently show that Paul was not the author."(Comm. Heb., theme(C0, 55.6) He doubts also that the apostle Peter wrote 2 Peter because he does not recognize in it "the genuine language of Peter."(Comm. 2 Peter, theme, CO. 55.441)
Calvin occasionally notes very significant stylistic differences among the prophets.
I admit that some of the prophets had an elegant and clear, even brilliant, manner of speaking, so that their eloquence yields nothing to secular writers; and by such examples the Holy Spirit wished to show that he did not lack eloquence while he elsewhere used a rude and unrefined style[voluit ostendere spiritus sanctus non sibi defuisse eloquentiam dum et crasso stylo alibi usus est]. But whether you read David, Isaiah, and the like, whose speech flows sweet and pleasing, or Amos the herdsman, Jeremaih, and Zechariah, whose harsher style savours of rusticity, that majesty of the Spirit of which I have spoken will be evident everywhere.(Inst. I. viii.2(0S.3.72-73).
Another aspects of the human side is noted in that Scripture is written in the human language: Old Testament in Hebrew and New Testament in Greek. Calvin mentions the human aspect of Scripture:
Therefore, let us keep in mind that our Lord has not spoken according to his nature. For if he had wished to speak his language, would mortal creatures have been able to hear it? Alas no. But how has he spoken to us in the Holy Scripture? he has stammered. Saint Paul says that when he preached the gospel[to the Corithians] he was like a nurse with children, and when he speaks of himself, there can be no doubt that he reveals the goodness of God, who has governed him by his Holy Spirit. And what we find in Saint Paul we equally find in Moses and all the prophets. let us carefully note, therefore, that God offers himself as a nurse, not speaking to a Child in the same way he would to a man, but rather keeping in mind the child's capacity. Consequently God has humbled himself, for we could not comprehend what he is saying unless he condescended to us. That is why in the holy Scripture we encounter him rather like a wet nurse, for we do not perceive his high and infinite majesty, to which we could not attain or even approach. Therefore, insofar as God has made himself accessible to us, so much the more will grievous condemnation rest on our heads if we do not take the effort to profit in this doctrine which has already been masticated for us, in a manner of speaking, so that the only thing that remains for us is to swallow and digest it.( John Calvin's Sermons on the Ten Commandments, ed. and trans., Benjamin W. Farley, Michigan: Baker Books House company, 1980, 241-242).
3.The relation of the divine intention and human intention
Calvin believes the intention of the Holy Spirit and that of human writer are very closely related. Calvin says that he knows of reason to seek "other meanings at variance with the mind and intention of the prophet (mente et consilio prophetae)" on his commentary on Zechariah. Yet, he insists in his comments on Leviticus 11:13 that the exegete must always consider the intention of God (Dei consilium).(Comm. Lev. 11:13, CO, 24.250) Nevertheless, Calvin he appears to equate the intention of the prophet with that of the Holy Spirit on his commentary of Jeremiah 17:12. "We must understand the intention of the prophet(prophetae consilium); for the Holy Spirit sometimes commemorates the blessings of God (Aliquando enim spiritus sanctus commemorat Dei beneneficia) to raise the minds of men to confidence, or to rouse them to make sacrifices of praise."( Comm. jer. 17:12, C0.38.274) one of the most significant examples of the intimate connection between the human and divine sides of Scripture is from Calvin's interpretation of Psalm 87. "We must consider the intention of the prophet, or rather the object of the spirit of God, speaking by the mouth of the prophet (spectandum est prophetae consilium, vel potius quo spechtet Dei spiritus per os prophetae ipsuis loquens)."(Comm. Ps. 87:3, CO, 31.801). This passage is very significant becasue here Calvin seems to suggest that the intention of the prophet and the Holy Spirit are so closely related as to be virtually interchangeable. Calvin uses almost identical phraseology in his comments on Ezekiel 18:1-4 : "We now understand the intention of the prophet, or rather of the Holy Spirit (nunc tenemus consilum prophetae, vel spiritus sancti potous)."(CO, 40.423) In Calvin's understanding on the matter of relation to the intention of the divine and that of the human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m.
Sermons were not intended for academic instruction but for the teaching and training of the Church in Geneva, and they were addressed to a very mixed congregations, ranging from lay men to scholars. The sermons has an introductory paragraph, but this is an exhortation to obey and the word which God speaks in Scripture and which is to be expounded.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경저자의 의도를 가르쳐준다. 저자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장르를 이해야한다. Osbome, Trinity Journal 4/2(1983), 24. J. Barton도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 본문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 본문의 장르를 어느 정도나마 인식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Reading the OT, 16). 그래서 어떤 본문에 대하여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총괄적인 인식은 그가 계속해서 이해해야할 내용의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E.D. Hirisch, Validity in interpretation, 74, 76. 뿐만 아니라 칼빈 자신도 시몬 그레네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석자의 주된 임무는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으며 Floor도 칼빈에 있어서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찾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According to L. Floor, we always have to start looking for the intention of the writer which calvin calls the mens scriptoris or consilium autoris.(Calvin and Hermenutics, edited by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70.) 이처럼 성경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칼빈은 1계명 주석(레위기 11:9)에서 저자의 의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도 경건한 신앙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사의 역할을 하셔서 건전한 식품을 불건전한 식품과 구별하고 계시다고 그럴듯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가 의료인들에게 의해 충분히 반박되고 설사 내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용납한다고 해도 그들의 논리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deo propositum/for the purpose of God)는 백성에게 건강을 제공해 주시려는 따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미개한 백성을 다루어야 하셨기 때문에 보통 있는 표적을 선택하셨다. 또 그들은 이런 가르침에 의해 보다 고차원원적인 것으로 점점 올라 갈 수 있었다. CO, Vol.24, 2nd volume, 349.
또한 레위기 11:13 주석에서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 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라는 구절 주석에서도 저자의 의도를 참작해야함을 강조한다.
부정한 동물을 죽일 경우 그들은 그 시체를 만짐으로써 자신을 더럽혀서도 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릇이 그런 시체와 닿게 되면 질그릇은 개뜨려야 했고 다른 것은 물로 씻어야 했다. 쥐가 물 그릇에 빠지면 그 그릇이 부정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런 동물이 포도주 그릇에 떨어져거니 빠져 죽으면 포도주를 쏟아 버려할 뿐만 아니라 그릇마져 개뜨려야 한다는 명령이 유대인이게 하달되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엄한 것 같다. 그리고 만약 그런 동물이 화덕이나 난로에서 타 죽더라도 그것을 다 깨뜨려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생명 없는 물건에도 영적 감염이 일어난다고 하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dei consilium)를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백성을 미신적인 일의 준수에 얽맬 정도로 가혹하지 않으시며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청결의 습득을 습관화시키기 위한 규율 행위였다. 청결은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널리 무시되고 간과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얼마나 부지런히 그들에게서 진정한 청결의 추구를 원하시는지를 항상 그들의 목전에서 제시하려고 하셨다. CO, Vol., 24, 2nd volume, 350. 「구약성경주석」, Vol.4, 2nd volume, 32-33, 1계명 주석. 참조: 신명기 13:16절 주석(dei consilium, CO, 24, 2nd volume, 364); 신명기 17:14 절 주석(dei consilium, CO, Vol.24, 2nd volume, 368).
1계명에서는 누가 참 하나님이신가를 가르쳐 주고 나서 자기만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셨듯이 2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가를 규정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일계명과 2계명은 다른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순서상 일 계명이 먼저이다.
신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어떻게 경배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영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예배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해내는 순간 거짓 예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존 칼빈, 출 20:4 주석, 「구약성경주석」, Vol. 3,(편역: 칼빈주석 출판위원회, 성서원, 1999), 75-76.
칼빈은 신명기 16: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주석에서 본문의 말씀은 2 계명의 의미와 의도(et quorsum tendat secundum praeceptum)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CO, Vol.24, 2nd volume, 389.
율법을 새긴 조상을 국경 지역에 세울 것을 명령하신 바 있다. 얼핏 보기에 이 금지는 모순 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상’이란 말을 인간들이 뻔뻔스럽게 물질적 형태로 하나님을 제시하려는 그에 대한 거짓 형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상을 가증스럽게 여긴다는 말씀이 덧붙여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이 더 명료하게 되도록 하는 뜻에서 관계사를 중성으로 번역하고 있다. 곧 ‘상을 세우는 것이 여호와께 가증스러운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몸으로 변형되거나 현세적인 것이 그의 영적인 성품과 뒤섞일 경우 그의 영광이 훼손을 받기 때문이다.「구약성경주석」, Vol. 4, 2nd volume, 96, 2계명주석 .
또한 출 29:28(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취한 거제물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라)의 주석에서 이 말씀의 의도는 ”요컨대 옛날 백성들의 연약성 때문에 이런 유치한 기본 단계가 필요했는데 이것은 신앙심 있는 자들의 마음이 위에 것들을 바라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의 의도(in eum finem omnia tendebant)는 하나님 예배를 더럽히거나 경명하게 하는 오점이 조금이라도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데 있었다. CO, Vol.24, 2nd volume, 439. 출애굽기 29:42(“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주석에서도 저자의 의도를 중요시하고 있다. “결국 모든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의도(ex toto contextu dei consilium)는 백성들을 레위인 들의 제사장직으로서 당신께 굳게 붙어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뿐 만 아니라 장소와 제물까지도 성별하시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여 해 주시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뽐내는 자들의 자랑은 어리석은 것이다.” CO, Vol.24, 2nd volume, 492.
5. 유형론적 해석 (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유형론적인 해석이란 두 사건이나 인물과 관계되는데 첫 번째 사건이나 인물은 그 자체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건이나 인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두 번째 사건이나 인물은 첫 번째 사건이나 인물의 연관성의 성취를 의미한다. 두 사건이나 인물은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밀접하게 하나로 연관되며 영적인 해석(spiritual act)에 의해서 이해되어진다. 다시 말하면 약속과 성취라는 관계에서 이해되어진다. 따라서 유형론적 성경해석이란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약의 성취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Erich Auerbach, Mimesis, trans. Willard R. Trask( New Jerse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3, 73(" Figural interpretation 'establishes a connection between two events or persons in such a way that the first signifies not only itself but also the second, while the second involves or fulfills the first. The two poles of a figure are seperated in time, but both, being real events or persons, are within temporality. They are both contained in the flowing stream which is historical life, and only the comprehension, the intellectus spiritualis, of their interdependence is a spiritual act.' In Practice we almost always find a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 whose episodes are interpreted as firures or phenomenal prophecies of the events of the New Testament."). 2계명 주석인 출애굽기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을 지니라‘) 을 칼빈은 유형론적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실체가 알려지기 전의 교회의 유아기는 지상적인 요소에 의해서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바로 이러 점에서, 물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그들의 종교적 의식의 외형에 관한 한 유사점이 많았지만, 그 목적은 완연히 달랐다. 뿐만 아니라 옛날 그림자의 실체나 본질과 상징의 실체를 찾으려할 경우 우리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후자는 어디서나 선지자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끄는 자들이다. 그러나 보다 더 명백한 설명은 복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거시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의 성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시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오심을 통해서 이 상징적인 의식의 용도를 철폐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의식에 돌아가야 할 마땅한 존경심을 확고히 해놓으셨다. 이것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서 그 모든 의식의 성취를 찾지 않을 경우 그것이 어 어떠한 근거로 존경이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구약성경주석」, Vol.4, 2nd volume, 118-119, 2계명주석.
출29:36 (“매일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 죄를 드리며 또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깨끗게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울하게 하라 ”)의 모형론적 주석에서
옛날 제단은 제사장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을 속죄하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에게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식의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할 점은, 앞에서도 내가 언급한 것 한 바 있지만 어떠한 모형도 실체와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그 당시 그 그림자의 본질과 실체가 완벽하게 묘사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피를 통한 속죄에 의해서만 인간에게 화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아주 적절한 모형이었다.「구약성경주석」, Vol.4, 2nd volume, 147, 2계명주석.
출 29:1(“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 그들로 거룩하게 할 일이 이러하니 곧 젊은 수소 하나와 흠 없는 수양 둘을 취하고”) 주석에서 본문 말씀을 모형론적으로 주석한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시대에 모형(sub lege umbratilis)으로만 드러나 있던 참 순결과 무죄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CO, Volume 24, 2nd volume, 438.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자로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라고 사도는 애기하고 있다(히:26).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모형으로 기록된 말씀에서 그 본질적인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용한 교훈을 배워야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지금도 당신의 독생자 안에서 우리에게 현현하고 계신다. 이 세례와 성찬이란 두 가지 성례들은 우리의 거룩함을 보증해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도구들인 이러한 세례와 성찬이란 성례들을 더럽히는 일을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에겐 구약 시대와 같이 희생제물을 잡아 드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울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세례와 성찬을 더럽히는 우리의 더러운 죄들을 정결케 씻어 도말해주시도록 겸손히 간구해야한다.「구약성경주석」, Vol.4, 2nd volume, 2계명, 레위기 16:16 주석. 286.
지금은 세례라는 성례를 통하여 죄를 씻듯이 비록 방법은 다르더라도 율법아래서도 희생 제사를 통하여 속죄했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을 때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임재하신 것처럼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희미하게 모형으로 나타나신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참으로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는 것은 다만 기호들로 변형되어 있다. 그 자체의 가지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이 의식들이 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또한 이 의식들은 이 은혜에 대한 모형(de gratia dei, cuius figurae)이라 것으로 만족히 여기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속된 상상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도록 하자. 즉 이 희생제사의 의식들은 다만 정치적인 의식일 뿐이고, 조책과 정죄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악문제를 해결하는 것 뿐, 참된 화목을 이루지 못한 다는 잘못된 상상이다. CO, Volume 24, 2nd volume, 519. 존 칼빈, 「구약성경주석」 Vol.2, 3rd volume, 312, 레위기, 4:22/ 2 계명주석).
IV. 십계명 해석논리 종합
연대기적으로 보면 「십계명 설교」, 「기독교 강요」, 「모세오경 마지막 책 주석조화」 순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권의 책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십계명 설교를 지배하는 신학적인 배경이나 해석 방법은 「기독교 강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강요」는 1536, 1539, 1543, 1550 그리고 1559의 다섯 차례에 걸친 수정을 가한 불후의 명저이다. 십계명설교는 「기독교 강요」의 네 번째의 수정 후에 십계명의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은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율법에 관하여"(on the law)라는 제목 하에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1539년 판은 1559년 최종판과 비교할 때 최종판에서는 4개의 장만 추가하고 재구성했으나 칼빈의 율법에 대한 사상은 변하지 안했다. 따라서 칼빈의 십계명 설교는 19년, 「기독교 강요」는 23년, 주석은 4년의 장고를 거처 이루어졌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4권 성경주석도 십계명설교 이전에 목사들의 모임(Congregations)에서 이미 강해되었으며 1563년에 출판했다. 따라서 십계명 설교의 해석논리는 「기독교 강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 마지막 책의 조화 주석」에서도 저자의 의도와 모형론적 해석을 하지만 결국은 성경을 기록케 하신 성령님의 내적조명 없이는 율법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셨다.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딤후 3:15). 따라서 넓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님의 내적 조명(가르침)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구속주)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란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따라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의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봐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율법을 주신 분이 아니라 율법의 새로운 해석자이다. 그는 율법에 본질에 하나도 더한 것이 없고 율법을 올바로 적용되고 해석하도록 율법의 의도를 회복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기초(fundamentum), 영혼(anima), 영(spiritus), 목표(scopus), 마침(finis) , 완성(perfectio)이다. Calvin's oft-repeated assertions that Christ is the fundamentum, anima, spiritus, scopus, finis and perfectio of the law. Calvin insists that Christ was not a new law-giver, but rather an interpreter of the law. Christ adds nothing essential to the law, since the gospel was already present in a sense in the law. His role is thus simply that of a "faithful interpreter."(Comm. Matt. 5:31) He did not add anything to the law; "he only restored it to its integrity."(Inst. II.8.7.)
그래서 십계명은 율법의 마지막이요 약속의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V. 정리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의 규범으로서 두 돌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돌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돌판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다. 비록 십계명은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해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다양하게 해석해야한다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잘 못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문맥(context)과 장르를 고려해한다. 하나님은 다양한 문맥과 장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신다. 따라서 십계명의 해석은 율법의 기초요, 영이요, 영혼이요, 목적이요, 마침이요, 성취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이것이 십계명의 해석논리이다. 이와 같은 해석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의 표현이라는 진리를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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