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이론과 작성법

[스크랩] 강해설교 작성법/서론, 결론 및 설교제목(장두만)

에반젤(복음) 2020. 2. 10. 09:40

강해설교 작성법/서론, 결론 및 설교제목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설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물론 본론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본론에 비하면 시간적으로는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본론 못지 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도 본론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은 서론과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우, 어떤 때는 본론을 다 만들어 놓고도 적절한 서론을 만들지 못해 장시간 고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I. 서론

실제로 설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서론은 맨 나중에 작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 하면 서론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서론에 맞추기 위해서 본문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서론을 맨 나중에 작성하면 설교 전체의 흐름과도 잘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이 없는 설교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강사를 아무 소개 없이 강단에 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강사도 물론 설교를 할 수는 있겠지만, 청중으로부터 엄청난 저항감 내지는 거부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책을 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머리말이 있고, 훌륭한 음악은 반드시 서곡(prelude)이 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설교에는 반드시 서론이 있다.
필자가 들어본 많은 설교 가운데 서론이 전혀 없는 설교가 너무 많이 있었다. 서론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효과적인 서론 시작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고 하고서 본문을 읽은 후(또는 교독한 후) 곧 바로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A. 서론의 목적

그러면 설교에서 서론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가? 서론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서론은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
라빈슨(Haddon Robinson)은 "만일 설교자가 처음 30초 내에 청중의 주의를 끌지 못하면 아예 주의를 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했다.2) 설교자가 처음부터 청중의 주의와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청중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을 것이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순간 청중은 자동적으로 설교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이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나라같이 비교적 예의 바른 사회에서는 청중이 처음부터 연설자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더 어려운 부분은 그 관심을 어떻게 하면 계속 붙잡아서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3) 낯선 청중에게 설교할 경우 청중은 처음 몇 분 동안에 받은 인상으로 설교자를 다 평가해 버린다. 스위지(George E.. Sweazy)는 이렇게 말한다 :

"그것(서론)은 설교자에게 굉장한 출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핸디캡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첫 몇 문장이 청중을 그에게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청중은 '설교자가 서론을 시작하는 동안에' 자기들이 좋아하고 신뢰하고 들을 만한 설교자인지 아닌지 결정해 버린다. 만일 그 설교자가 머뭇머뭇 거리고, 아무런 특색이 없고, 불쾌하고, 거칠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했다면, 청중은 그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는지 모른다." 4)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청중의 주의를 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낯익은 청중 같으면 설교자에 대해서 그들 나름으로 어떤 견해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의 몇 마디가 약간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일 서론에서 무엇인가 들을 만한 것을 전하겠다는 것을 청중에게 보여주지 못하면 청중은 곧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려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든 낯익은 청중에게든 좋은 서론으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서론은 청중이 왜 이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단 예배에 참석했으니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청중이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설교자가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교의 본론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청중의 필요 발견과 설교 목적의 결정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논의했다. 만일 이 단계를 제대로 잘 소화했다면, 설교자는 설교의 본론 작성이 끝남과 동시에 청중의 필요가 무엇이며,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설교가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이러한 필요에 대해서 청중이 눈을 뜨도록 만들어야 된다.
청중은 자신들의 필요를 늘 잘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그 필요가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잠재의식 속에 잠자고 있다. 훌륭한 설교는 의식적인 필요를 더 분명하고 구체화해 주고, 무의식적인 필요를 의식적인 필요로 바꾸어 준다. 이렇게 되면 청중은 설교를 꼭 들어야겠다는 긍정적 동기를 갖게 된다.
셋째, 서론은 설교자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청중으로 하여금 본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5)
서론은 그것 자체가 아무리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고 청중의 주의를 잘 끈다 할지라도, 설교의 본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런 서론은 서론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서론을 위한 서론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론은 설교 전체의 주제와 연관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첫째 대지와 관련될 수도 있다. 본론의 전개 방식이나 설교의 특성에 따라 위의 둘 중 어느 하나로 낙착이 되겠지만, 서론이 설교의 본론과 상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넷째, 서론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청중에게 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의 목적을 말한다고 해서, "오늘 설교의 목적은 .....입니다"라는 식으로 직접 표현하는 방식보다는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함께 상고하도록 합시다"는 방식이 더 좋을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가 가야 할 목적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함께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선포할 때 청중은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B. 좋은 서론의 특징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서론이 존재하는 목적을 잘 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서론은 청중의 관심을 끄는 서론이요, 청중이 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서론이요, 청중이 본론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기 위해 설교의 본론과 관계 있는 서론이어야 한다는 것은 부연(敷衍)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특징 외에 몇 가지를 더 구비해야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서론은 길이가 적절해야 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전파하고자 하는 것은 본론이지 서론은 아니다.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를 밝혀 주고, 설교의 본론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서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인 오웬(John Owen)에게 어떤 노파가 불평하기를, 그가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너무 긴 시간을 끌기 때문에 식욕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는 것이다.6) 하우(John Howe) 같은 설교자도 이런 불평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식탁보를 놓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나는 식욕을 다 잃어버렸고, 그래서 아예 음식은 나오지도 않으려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7) 서론을 너무 질질 끌다가는 본론에 대한 식욕이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이를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서론은 어느 정도로 길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이가 1∼2분이어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 전체 길이의 5∼15% 정도라야 된다고 한다.8) 서론은 서론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길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론의 길이는 3분 이내가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서론이 다소 길게 갈 수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계적으로 수학의 공식같이 그 길이를 정하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서론이 약간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3분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좋은 서론은 적절해야 한다.
좋은 서론은 마춤 양복같이 딱 하나의 설교에만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이렇게 갈파한다: "서론이 지금 이 설교 이외의 다른 설교에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설교에 들어맞는 좋은 서론은 아니다”9) 어떤 두 개의 설교도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두 개의 서론도 완전히 동일할 수 없고, 각 서론은 설교에 맞추어서 만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셋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어떤 좋지 못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가령 "오늘은 말씀 준비를 제대로 못했지만............”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서론에서 이런 변명을 하는 주된 이유는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한 자신의 양심을 달래거나 청중으로부터 어떤 동정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서론에서 이런 구차한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면, "쳇! 준비도 없이 왜 강단에 서? 도대체 우리를 무엇으로 알고 그러지?”라는 식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준비를 하지 않고 강단에 서는 것은 위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아래로는 성도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목사의 직무 태만이요 직무 유기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준비하지 못한 것을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행위이다. 이런 변명은 하지 않더라도 청중은 곧 알아채고 만다. 잘 준비된 설교와 준비되지 못한 설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청중은 우둔하지가 않다. 이런 변명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문은 완전히 닫히게 될 것이고, 그들은 "여기서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구나!”하는 허탈감 내지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설교자가 몸이 불편해서 - 게으르거나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가 아니라 - 마음에는 정말 충분히 준비하고 싶지만 육체적인 이유로 준비할 수 없었을 경우에는 "사실 지난 주에는 몸이 좋지 못해서 충분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느라고 했습니다”고 말하면 청중은 양해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설교자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더 큰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준비 없이는 강단에 서지 말 것이요, 부득이 그러한 경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10) 독자들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고액의 약속어음이 부도나 버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어떤 가까운 사람이 소중한 약속을 하고서는 이행하지 않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설교자도 약속 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강단에서 할 수 있다. 서론에서 많은 것을 약속해 놓고는 실제 설교의 본론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약속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4-1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면서, 이 설교 하나만 들으면 성령의 은사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같이 서론에서 약속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과대 약속을 할 때 성도들의 관심은 끌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성도들은 기만당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계속 반복될 때 설교자는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섯째, 좋은 서론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서론 시작의 방법 내지는 유형(類型)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함으로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청중에게 줄 필요가 있다.

C. 서론의 유형(類型)

서론을 시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생각하기로 하겠다.
첫째, 이야기(story or illustration)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서론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설교와 관련 있는 이야기(또는 예화)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주제와 일치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서론으로서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마태복음 5:10-12 을 본문으로 해서 "의를 위한 핍박”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어느 젊은이가 대학 2학년에 재학중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느 캠프에서 여름을 보내며 일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젊은이는 크리스천 가정의 출신으로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캠프에서 방탕하게 지내는 사람들과도 상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젊은이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겪을지도 모르는 반대와 핍박에 관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 부모는 방학 중에 자기 아들로부터 별로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그 부모는 그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더냐고 물으니, 아들은 그 질문에 저윽이 놀라는 듯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그 사람들이 여름 내내 조금도 저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던대요. 사실상 그들은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거든요'.”11)

의를 위한 핍박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공산 세계의 성도들과는 상관이 있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실(其實)은 그렇지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 같은 자유 국가에서도 무릇 의를 위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지만(딤후 3:12), 적당히 신앙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핍박이 없다는 것을 설교할 때 위에서 든 펜티코스트 박사의 예는 아주 적절하다고 하겠다.
둘째, 예기치 않은 언명(言明, startling statement)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어떤 말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말로 서론을 시작하면 금세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다.
필자가 마가복음 14: 3-9을 본문으로 해서 '옥합이 깨질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탕자(눅15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의 재산 가운데 아마도 약 1/3정도를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 가서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랑방탕하게 모든 돈을 다 허비해 버린 그 젊은이의 소행에 대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해야 될 책임은 있지만 허비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허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가끔 우리에게 허비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 주님조차도 그런 허비를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하고 계시는데 오늘은 이런 종류의 허비를 마가복음 14:3-9에서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허비를 조장하고 계신다는 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론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고, 도대체 설교자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면서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만일 설교자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설교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노라고 하는 우리들이 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모였지만, 사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할 뿐인 것입니다."12)
교회당에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을 향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너무나 깜짝 놀랄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서론이 청중의 주의를 모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셋째, 설교와 관계 있는 적절한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시작 할 수도 있다.
가령 고린도전서 3: 18-23을 본문으로 해서 '세상적 지혜의 어리석음'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지혜로는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신앙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웰즈(H. G. Wells)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도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기까지는 시작도 없이 시작해서 끝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다”
넷째, 질문(question)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설교의 본론과 관련 있는 예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잔잔하던 청중의 마음 속에 파문을 일으켜서 설교에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5: 22-27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할 때 필자는 서론을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원치 않는데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오라고도 안 하는데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라고도 하고 역경이라고도 합니다. 학생은 학생 나름으로, 청년은 청년 나름으로, 직장인은 직장인 나름으로,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으로, 가정 주부는 가정 주부 나름으로 우리 모두는 고난의 동참자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큰 고난을 겪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고난이라는 불청객을 언제 맞이할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제대로 풀려가지 않고,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조차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이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역경 가운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출애굽기 15: 22-27에서 고난을 대처하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론을 시작한 후 광야에서 3일 동안 물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고, 모세는 어떻게 했고, 하나님은 이 역경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는 내용으로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다섯째, 본문의 배경(background of the text)에 대한 설명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지리적인 배경이나 본문 자체의 큰 문맥을 설명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서론일 수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6: 1-8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서론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6장은 많은 성경학자들과 주석가들을 괴롭혀 온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이 불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신자를 가리킨다면 그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도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이 어려운 본문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지 이 아침에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섯째, 비교(comparison)나 비유(parable)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 7-11을 본문으로 해서 기도에 관해 설교한다면,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마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제대로 살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과 같은 기도,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기도, 이 기도는 그러면 어떠한 태도로 해야 되겠습니까?"
일곱째, 최근의 뉴스(news item)가운데 하나를 말함으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에베소서 6:4이나 잠언 22:6 등에 근거해서 자녀 양육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뉴욕에 사는 어느 부부가 아내의 불임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임신하게 되자 수술을 한 의사를 상대로 수십만 불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이 소송에 대한 판사의 판결을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은 부담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기쁨이며 특권이다.' 그래서 소송은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른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엄청난 책임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기르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를 에베소서 6장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문제 제기를 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수수께끼나 격언 같은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유모어로 시작할 수도 있고, 실물 교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역설(paradox)로 시작할 수도 있고, 어떤 저서를 언급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Ⅱ. 결 론

결론은 설교의 총결산이다. 서론에서 시작해 본론을 거쳐 나오는 긴 흐름을 그 최종 목적지에 잘 안착(安着)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결론이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결론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결론은 청중이 설교 전체를 한꺼번에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순간이다. 그것은 이슈(issue)를 가장 분명히 보고, 가장 예리하게 느끼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삶에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결론은 설교의 목적-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을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따라서 이 순간은 아마도 '설교' 전체의 연속성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설교는 결론을 맺어야지 그냥 중지해서는 안 되고,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냥 몰고 나서는 안 된다." 13)
시원치 않은 결론은 좋은 본론의 효과를 상당히 감소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훌륭한 결론을 본론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보충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14)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자는 결론을 절대로 경시하지 않는다. 청중이 그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갖고 돌아가게 하기 위해 설교자는 최후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할 것이다.
끝낼 듯 끝낼 듯 하면서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도 청중으로 하여금 짜증이 나게 하지만, 결론도 없이 갑자기 끝내 버리는 것도 문제이다. 아무런 결론도 없이 설교가 끝나면 청중은 설교가 끝난 것인지 아닌지 의아해 하거나 설교자가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궁금해 할 것이다. 15)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본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준비를 잘 해야만 될 것이다.
또 결론을 미리 말해 버리거나, 결론이 이르렀다고 암시를 주는 것이라든지,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든지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하는 식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그런 표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16)

A. 결론의 목적

설교에서 왜 결론이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첫째, 결론은 설교를 요약. 정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결론이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가 약 30여분 동안 전파한 것을 요약해서 정리함으로 청중이 교회를 떠날 때 설교 전체의 윤곽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간직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진리는 한 번 이상 들려 줄 만한 가치가 있다. 결론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중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들려줌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해줄 필요가 있다.
둘째, 결론은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 자연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그래서 설교에는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결단이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은 아니더라도 우선 마음 속의 결심으로 나타나고 나중에 행동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것은 청중 개개인과 주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설교자 편에서 볼 때에는 최소한 청중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어느 개인에게 계속적으로 임할 수도 있겠지만, 말씀을 들음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가는 그 역사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다. 설교자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설교가 마치 마지막 설교인 것같이 해야 될 것이요, 마지막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그 결론을 효과적으로 잘 준비해서 전할 것이다.

B. 좋은 결론의 특징

결론이 중요한만큼 좋은 결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좋은 결론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7)
첫째, 좋은 결론은 적절하다.
좋은 결론은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할 때 결론은 본론과 동떨어진 내용이 되지 않고 본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본론을 그 논리적 결말에 이르게 유도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결론이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끌어진다면 본론에서 취급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결론에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본론에-만일 본론의 어느 부분에 들어맞는 내용이라면-포함되어야지 결론에 포함됨으로 하나의 설교가 다 끝나가는 듯 하다가 또 하나의 새로운 설교를 시작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좋은 결론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결론을 길게 해서 본론인지 결론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이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결론은 너무 길지 않아야 된다. 그렇게 하자면 결론은 또한 단순해야 된다. 결론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며, 단순하고 분명해야 된다. 결론에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시켜서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면 그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결론이라 하겠다.
셋째, 좋은 결론은 개인적이다.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각 개인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대중을 상대하면서도 개인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좋은 적용을 통해서 설교를 청중 각 개인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결론에서 이를 다시 한 번 간단히 재현할 필요가 있다.
넷째, 좋은 결론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좋은 서론이 변명을 요구하지 않듯이 좋은 결론도 변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설교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며…."라든지 "바쁜 가운데도 만사를 제쳐놓고 오신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만큼 좋은 설교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식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청중이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C. 결론의 유형 (類型)

설교를 시작하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설교를 끝맺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떤 유형의 결론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성격 및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설교자는 몇 가지 형태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편의상 그 대표적인 몇 가지 형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약 반복(recapitulation)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설교 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몇 마디로 요약함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방법이다. 가령 누가복음 16:1-9을 본문으로 해서 '지혜 있는 종'이란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이 종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서는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종만큼 지혜롭습니까?"

둘째, 호소(appeal)의 형태가 있다.
호소의 형태는 설교의 본론에 입각해 청중이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형태이다. 그 결단이 헌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충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회개일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13-14을 본문으로 해서 '두 길'이란 제목으로(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길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집을 떠난 나그네와 같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넓은 길 아니면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의 선택이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셋째, 예화(illustration)로 끝내는 방법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서론을 좋은 예화로 시작할 수 있듯이 결론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설교의 주제와 관계 있는 좋은 예화가 있으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는 것도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가 고린도전서 1:26-31을 본문으로 해서 '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 다음과 같은 아즈윌드 스미드(Oswald J. Smith) 목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아즈윌드 스미드)를 어떻게 부셔뜨렸는지 내가 겸손하게 얘기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제 사역의 초기에 일어났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곧 바로 토론토에 있는 어느 큰 장로교회를 맡아 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3년 반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약 1,800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교회는 계속 꽉 찼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이만큼 큰 다른 교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는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교회도 저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미구(未久)에 그런 교회조차도 저를 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돈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충분한 음식을 얻기가 힘들게 되었고, 여러 가지 채무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아가 바로 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영단번(永單番)에 깨뜨려 버리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계속 밑바닥으로만 향해서 내려갔습니다. 그 해에 폴 레이더(Paul Rader)가 토론토에서 첫 집회를 가지려고 왔습니다.
그 집회는 그 도시에서 그 당시 가장 큰 메이시 회관(Massey Hall)에서 열렸습니다. 털끝만큼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저는 거기에 가서 안내 책임자를 찾아가서, '이번 집회 기간 동안 제가 안내로 여기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책임자는 좋다고 말하면서 옆 줄 하나를 맡으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책임자와 그의 조수가 뭐라고 얘기하면서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조수는 제가 맡은 줄로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그 줄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뒷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제가 했던 모든 준비는 헛것이고 어느 누구도 저를 원치 않습니다. 안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삼일 후에 다시 상담 책임자를 찾아가서 '제가 이 집회에서 구령 상담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그 책임자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흘 동안 기다렸지만 그는 저에게 구령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삼일 후에 저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강당 뒷편에 가서 앉았습니다. 다시 눈물이 눈에서 줄줄 흘렀고, 제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주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저는 아마 다시 설교를 못하게 되겠지요. 저는 이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군요'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또다시 삼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안 되면 저는 끝장이고, 하나님께서 제가 더 이상 사역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판매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안내원들이 통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찬송가를 팔고 있기에, 저도 가서 '통로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팔 수 있을까요?'라고 하니, 그 책임자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찬송가를 한아름 주었는데, 그것은 머키(Arthur W. McKee)가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을 인도하던 머키 씨가 강단 앞쪽에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찬송을 하나 부르겠는데, 그것은 바로 이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라는 제목의 찬송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찬송가를 팔고 있는 곳을 가리키더니, '저기서 찬송가를 팔고 있는 젊은이가 보입니까?'라고 말하자 모든 사람은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저 젊은이가 찬송을 작곡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루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찬송가 파는 일을 즉각 그만 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버렸습니다.
그 찬송은 정말 굉장한 찬송이었습니다. 약 500명의 성가대와 회중이 함께 그 찬송을 처음으로 부르는 것을 들으니 건물의 지붕이 떨어져져 나가는 것 같이 웅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선반 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저를 포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단지 저를 부셔뜨리고 계셨을 뿐입니다. 저는 너무 교만해서 당신은 저를 신뢰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후 정말 놀랍게도, 런던의 스펄전 목사님의 교회로부터 전보를 하나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몇 주 동안 강단을 좀 지켜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체할 틈도 없이 저는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런던에서의 몇 주가 끝난 후 토론토로 돌아오니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론토에서 좋은 사역이 열렸는데, 그 후에도 20여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원하면 다 갈 수 있는 그런 초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하게 일하셨습니다. 그는 미래의 계획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토론토에 회중교회(People's Church)가 세워질 것을 미리 아시고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가 범세계적인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구를 준비하셔야 했고, 그래서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부셔뜨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저는 내려가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18)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넷째, 적절한 성경 구절이나 남의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설교를 끝낼 수도 있다.
적절한 인용문을 발견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면 때때로 설교자 자신이 하려는 말을 훨씬 더 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19) 가령 다니엘 1: 1-21을 본문으로 해서 '신앙의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은 웨슬리(John Wesley)의 말을 인용함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에게 죄 이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 이외에는 사모하는 것이 없는 사람 열 사람만 주십시 오. 그러면 이 세계를 뒤흔들어 놓겠나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열 사람 중의 하나가 되겠습니까?"

다섯째, 적절한 질문(question)으로 설교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는 질문이 앞에서 언급한 요약 반복, 호소, 예화, 인용 등과 함께 쓰이고 있지만, 때로는 상당히 독자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라빈슨(Haddon Robinson)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낼 것을 제안한다.
"내가 시작했던 곳에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건 참 훌륭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20)
설교를 끝내는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찬송으로 끝낼 수도 있고, 기도로 끝낼 수도 있고, 적절한 시(詩)로 끝낼 수도 있고, 속담이나 격언으로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의 성격과 설교자의 역량 및 취향에 따라 결론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결론은 설교를 그 논리적 귀착점으로 잘 인도해 주면 그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III. 설교제목


A. 제목의 가치

설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시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멋진 제목이 강해 설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좋은 제목이 좋은 내용의 설교를 더 빛내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책이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appeal)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책의 제목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미 출판계의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한 때 실패했던 책이었지만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해 베스트 셀러가 된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적절한 제목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청중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설교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것은 좋은 안내자와 같이 청중을 제대로 안내해 주며, 설교의 범위를 한정해 설교자로 하여금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지 않게 도와준다. 21)

B. 좋은 제목의 특징

좋은 제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가 좋은 제목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해서 노력하면 비교적 좋은 제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좋은 제목은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가령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무슨 제목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구원받은 삭개오' '변화받은 삭개오' '삭개오의 회개' '삭개오의 구원'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목은 너무 석의적(釋義的)이고, 과거지향적이고 진부해서 청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렵다. 어떤 설교자는 '인간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상당히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위대한 만남' 같은 제목도 좋은 제목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25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대개의 경우 설교 제목을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 같은 석의적이고 독창성이 전혀 없는 제목을 잡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석의적 내용을 설교 제목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의적 제목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본문으로 '의인이 고난당 할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가령 다니엘서 1:1-2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필자는 어떤 분이 '히브리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독자의 생각에는 이 제목이 어떤가? 이 제목은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석의적이고 원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을 붙여 본 적이 있다.
둘째, 좋은 제목은 적합해야 한다.
아무리 기발하고 참신하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설교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제목이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설교의 주제나 강조점을 반영하는 제목이라야만 할 것이다.
가령 마태복음 5:10-12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복 받는 비결' 같은 제목으로 설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좋은 제목은 간결하다.
책 제목 가운데 긴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책의 제목으로는 긴 것도 괜찮을는지 모르겠지만, 설교의 제목으로는 가능하면 짧은 것이 좋다.
넷째, 좋은 제목은 범위가 좁다.
좋은 설교 제목은 그 설교에만 딱 들어맞는 것이라야 되기 때문에 범위에 있어서도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넓은 제목은 여러 가지 설교에 다 맞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다.
가령 로마서 7:1- 6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율법과 은혜' 같은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 다루어도 될 정도로 너무 광범위한 제목이기 때문이다.


주(註)
1) John R. W.Stott, Between Two Worlds, p.243.
2) Haddon W.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60; cf. Jerry Vines, A Practical Guide to Sermon Preparation, p.137.
3) A. Duane Litfin, Public Speaking, pp.236-37.
4) George E. Sweazy, Preaching the Good News, p.94.
5) Vines, p.138.
6)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137.
7)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106.
8) Baumann, p.137; H.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 p.189.
9) Davis, p.188.
10) Robinson, p.165.
11) J. Dwight Pentecost, Design for Living, p.69.
12) cf. Baumann, p.140.
13) Davis, p.192.
14) James Braga, How to Prepare Bible Messages, pp.229-30.
15) George W. Fluharty and Harold R. Ross, Public Speaking, p.137.
16) Reg Grant and John Reed, Power Sermon, p.105.
17) Litfin, pp.255-56; Baumann, pp.142-43; Braga, pp. 232-39; Broadus, pp.109-12; H. C. Brown, H. G. Clinard and J. J. Northcutt, Steps to the Sermon, pp.122-23; Woodrow M. Kroll, Prescription for Preaching, pp.181-82.
18) Carl G. Johnson, ed., My Favorite Illustration, pp.113-15.
19) Robinson, p.169.
20) Ibid.
21) cf.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p.95-96.
월간 교회와신앙
강해설교 작성법/서론, 결론 및 설교제목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설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물론 본론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본론에 비하면 시간적으로는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본론 못지 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도 본론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은 서론과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우, 어떤 때는 본론을 다 만들어 놓고도 적절한 서론을 만들지 못해 장시간 고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I. 서론

실제로 설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서론은 맨 나중에 작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 하면 서론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서론에 맞추기 위해서 본문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서론을 맨 나중에 작성하면 설교 전체의 흐름과도 잘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이 없는 설교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강사를 아무 소개 없이 강단에 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강사도 물론 설교를 할 수는 있겠지만, 청중으로부터 엄청난 저항감 내지는 거부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책을 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머리말이 있고, 훌륭한 음악은 반드시 서곡(prelude)이 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설교에는 반드시 서론이 있다.
필자가 들어본 많은 설교 가운데 서론이 전혀 없는 설교가 너무 많이 있었다. 서론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효과적인 서론 시작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고 하고서 본문을 읽은 후(또는 교독한 후) 곧 바로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A. 서론의 목적

그러면 설교에서 서론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가? 서론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서론은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
라빈슨(Haddon Robinson)은 "만일 설교자가 처음 30초 내에 청중의 주의를 끌지 못하면 아예 주의를 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했다.2) 설교자가 처음부터 청중의 주의와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청중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을 것이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순간 청중은 자동적으로 설교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이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나라같이 비교적 예의 바른 사회에서는 청중이 처음부터 연설자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더 어려운 부분은 그 관심을 어떻게 하면 계속 붙잡아서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3) 낯선 청중에게 설교할 경우 청중은 처음 몇 분 동안에 받은 인상으로 설교자를 다 평가해 버린다. 스위지(George E.. Sweazy)는 이렇게 말한다 :

"그것(서론)은 설교자에게 굉장한 출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핸디캡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첫 몇 문장이 청중을 그에게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청중은 '설교자가 서론을 시작하는 동안에' 자기들이 좋아하고 신뢰하고 들을 만한 설교자인지 아닌지 결정해 버린다. 만일 그 설교자가 머뭇머뭇 거리고, 아무런 특색이 없고, 불쾌하고, 거칠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했다면, 청중은 그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는지 모른다." 4)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청중의 주의를 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낯익은 청중 같으면 설교자에 대해서 그들 나름으로 어떤 견해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의 몇 마디가 약간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일 서론에서 무엇인가 들을 만한 것을 전하겠다는 것을 청중에게 보여주지 못하면 청중은 곧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려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든 낯익은 청중에게든 좋은 서론으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서론은 청중이 왜 이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단 예배에 참석했으니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청중이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설교자가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교의 본론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청중의 필요 발견과 설교 목적의 결정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논의했다. 만일 이 단계를 제대로 잘 소화했다면, 설교자는 설교의 본론 작성이 끝남과 동시에 청중의 필요가 무엇이며,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설교가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이러한 필요에 대해서 청중이 눈을 뜨도록 만들어야 된다.
청중은 자신들의 필요를 늘 잘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그 필요가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잠재의식 속에 잠자고 있다. 훌륭한 설교는 의식적인 필요를 더 분명하고 구체화해 주고, 무의식적인 필요를 의식적인 필요로 바꾸어 준다. 이렇게 되면 청중은 설교를 꼭 들어야겠다는 긍정적 동기를 갖게 된다.
셋째, 서론은 설교자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청중으로 하여금 본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5)
서론은 그것 자체가 아무리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고 청중의 주의를 잘 끈다 할지라도, 설교의 본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런 서론은 서론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서론을 위한 서론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론은 설교 전체의 주제와 연관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첫째 대지와 관련될 수도 있다. 본론의 전개 방식이나 설교의 특성에 따라 위의 둘 중 어느 하나로 낙착이 되겠지만, 서론이 설교의 본론과 상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넷째, 서론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청중에게 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의 목적을 말한다고 해서, "오늘 설교의 목적은 .....입니다"라는 식으로 직접 표현하는 방식보다는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함께 상고하도록 합시다"는 방식이 더 좋을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가 가야 할 목적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함께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선포할 때 청중은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B. 좋은 서론의 특징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서론이 존재하는 목적을 잘 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서론은 청중의 관심을 끄는 서론이요, 청중이 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서론이요, 청중이 본론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기 위해 설교의 본론과 관계 있는 서론이어야 한다는 것은 부연(敷衍)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특징 외에 몇 가지를 더 구비해야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서론은 길이가 적절해야 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전파하고자 하는 것은 본론이지 서론은 아니다.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를 밝혀 주고, 설교의 본론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서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인 오웬(John Owen)에게 어떤 노파가 불평하기를, 그가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너무 긴 시간을 끌기 때문에 식욕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는 것이다.6) 하우(John Howe) 같은 설교자도 이런 불평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식탁보를 놓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나는 식욕을 다 잃어버렸고, 그래서 아예 음식은 나오지도 않으려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7) 서론을 너무 질질 끌다가는 본론에 대한 식욕이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이를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서론은 어느 정도로 길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이가 1∼2분이어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 전체 길이의 5∼15% 정도라야 된다고 한다.8) 서론은 서론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길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론의 길이는 3분 이내가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서론이 다소 길게 갈 수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계적으로 수학의 공식같이 그 길이를 정하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서론이 약간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3분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좋은 서론은 적절해야 한다.
좋은 서론은 마춤 양복같이 딱 하나의 설교에만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이렇게 갈파한다: "서론이 지금 이 설교 이외의 다른 설교에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설교에 들어맞는 좋은 서론은 아니다”9) 어떤 두 개의 설교도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두 개의 서론도 완전히 동일할 수 없고, 각 서론은 설교에 맞추어서 만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셋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어떤 좋지 못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가령 "오늘은 말씀 준비를 제대로 못했지만............”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서론에서 이런 변명을 하는 주된 이유는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한 자신의 양심을 달래거나 청중으로부터 어떤 동정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서론에서 이런 구차한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면, "쳇! 준비도 없이 왜 강단에 서? 도대체 우리를 무엇으로 알고 그러지?”라는 식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준비를 하지 않고 강단에 서는 것은 위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아래로는 성도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목사의 직무 태만이요 직무 유기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준비하지 못한 것을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행위이다. 이런 변명은 하지 않더라도 청중은 곧 알아채고 만다. 잘 준비된 설교와 준비되지 못한 설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청중은 우둔하지가 않다. 이런 변명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문은 완전히 닫히게 될 것이고, 그들은 "여기서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구나!”하는 허탈감 내지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설교자가 몸이 불편해서 - 게으르거나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가 아니라 - 마음에는 정말 충분히 준비하고 싶지만 육체적인 이유로 준비할 수 없었을 경우에는 "사실 지난 주에는 몸이 좋지 못해서 충분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느라고 했습니다”고 말하면 청중은 양해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설교자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더 큰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준비 없이는 강단에 서지 말 것이요, 부득이 그러한 경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10) 독자들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고액의 약속어음이 부도나 버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어떤 가까운 사람이 소중한 약속을 하고서는 이행하지 않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설교자도 약속 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강단에서 할 수 있다. 서론에서 많은 것을 약속해 놓고는 실제 설교의 본론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약속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4-1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면서, 이 설교 하나만 들으면 성령의 은사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같이 서론에서 약속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과대 약속을 할 때 성도들의 관심은 끌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성도들은 기만당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계속 반복될 때 설교자는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섯째, 좋은 서론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서론 시작의 방법 내지는 유형(類型)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함으로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청중에게 줄 필요가 있다.

C. 서론의 유형(類型)

서론을 시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생각하기로 하겠다.
첫째, 이야기(story or illustration)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서론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설교와 관련 있는 이야기(또는 예화)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주제와 일치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서론으로서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마태복음 5:10-12 을 본문으로 해서 "의를 위한 핍박”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어느 젊은이가 대학 2학년에 재학중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느 캠프에서 여름을 보내며 일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젊은이는 크리스천 가정의 출신으로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캠프에서 방탕하게 지내는 사람들과도 상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젊은이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겪을지도 모르는 반대와 핍박에 관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 부모는 방학 중에 자기 아들로부터 별로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그 부모는 그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더냐고 물으니, 아들은 그 질문에 저윽이 놀라는 듯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그 사람들이 여름 내내 조금도 저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던대요. 사실상 그들은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거든요'.”11)

의를 위한 핍박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공산 세계의 성도들과는 상관이 있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실(其實)은 그렇지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 같은 자유 국가에서도 무릇 의를 위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지만(딤후 3:12), 적당히 신앙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핍박이 없다는 것을 설교할 때 위에서 든 펜티코스트 박사의 예는 아주 적절하다고 하겠다.
둘째, 예기치 않은 언명(言明, startling statement)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어떤 말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말로 서론을 시작하면 금세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다.
필자가 마가복음 14: 3-9을 본문으로 해서 '옥합이 깨질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탕자(눅15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의 재산 가운데 아마도 약 1/3정도를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 가서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랑방탕하게 모든 돈을 다 허비해 버린 그 젊은이의 소행에 대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해야 될 책임은 있지만 허비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허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가끔 우리에게 허비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 주님조차도 그런 허비를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하고 계시는데 오늘은 이런 종류의 허비를 마가복음 14:3-9에서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허비를 조장하고 계신다는 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론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고, 도대체 설교자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면서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만일 설교자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설교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노라고 하는 우리들이 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모였지만, 사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할 뿐인 것입니다."12)
교회당에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을 향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너무나 깜짝 놀랄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서론이 청중의 주의를 모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셋째, 설교와 관계 있는 적절한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시작 할 수도 있다.
가령 고린도전서 3: 18-23을 본문으로 해서 '세상적 지혜의 어리석음'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지혜로는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신앙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웰즈(H. G. Wells)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도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기까지는 시작도 없이 시작해서 끝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다”
넷째, 질문(question)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설교의 본론과 관련 있는 예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잔잔하던 청중의 마음 속에 파문을 일으켜서 설교에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5: 22-27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할 때 필자는 서론을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원치 않는데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오라고도 안 하는데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라고도 하고 역경이라고도 합니다. 학생은 학생 나름으로, 청년은 청년 나름으로, 직장인은 직장인 나름으로,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으로, 가정 주부는 가정 주부 나름으로 우리 모두는 고난의 동참자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큰 고난을 겪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고난이라는 불청객을 언제 맞이할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제대로 풀려가지 않고,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조차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이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역경 가운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출애굽기 15: 22-27에서 고난을 대처하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론을 시작한 후 광야에서 3일 동안 물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고, 모세는 어떻게 했고, 하나님은 이 역경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는 내용으로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다섯째, 본문의 배경(background of the text)에 대한 설명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지리적인 배경이나 본문 자체의 큰 문맥을 설명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서론일 수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6: 1-8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서론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6장은 많은 성경학자들과 주석가들을 괴롭혀 온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이 불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신자를 가리킨다면 그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도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이 어려운 본문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지 이 아침에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섯째, 비교(comparison)나 비유(parable)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 7-11을 본문으로 해서 기도에 관해 설교한다면,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마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제대로 살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과 같은 기도,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기도, 이 기도는 그러면 어떠한 태도로 해야 되겠습니까?"
일곱째, 최근의 뉴스(news item)가운데 하나를 말함으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에베소서 6:4이나 잠언 22:6 등에 근거해서 자녀 양육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뉴욕에 사는 어느 부부가 아내의 불임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임신하게 되자 수술을 한 의사를 상대로 수십만 불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이 소송에 대한 판사의 판결을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은 부담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기쁨이며 특권이다.' 그래서 소송은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른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엄청난 책임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기르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를 에베소서 6장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문제 제기를 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수수께끼나 격언 같은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유모어로 시작할 수도 있고, 실물 교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역설(paradox)로 시작할 수도 있고, 어떤 저서를 언급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Ⅱ. 결 론

결론은 설교의 총결산이다. 서론에서 시작해 본론을 거쳐 나오는 긴 흐름을 그 최종 목적지에 잘 안착(安着)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결론이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결론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결론은 청중이 설교 전체를 한꺼번에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순간이다. 그것은 이슈(issue)를 가장 분명히 보고, 가장 예리하게 느끼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삶에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결론은 설교의 목적-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을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따라서 이 순간은 아마도 '설교' 전체의 연속성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설교는 결론을 맺어야지 그냥 중지해서는 안 되고,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냥 몰고 나서는 안 된다." 13)
시원치 않은 결론은 좋은 본론의 효과를 상당히 감소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훌륭한 결론을 본론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보충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14)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자는 결론을 절대로 경시하지 않는다. 청중이 그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갖고 돌아가게 하기 위해 설교자는 최후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할 것이다.
끝낼 듯 끝낼 듯 하면서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도 청중으로 하여금 짜증이 나게 하지만, 결론도 없이 갑자기 끝내 버리는 것도 문제이다. 아무런 결론도 없이 설교가 끝나면 청중은 설교가 끝난 것인지 아닌지 의아해 하거나 설교자가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궁금해 할 것이다. 15)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본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준비를 잘 해야만 될 것이다.
또 결론을 미리 말해 버리거나, 결론이 이르렀다고 암시를 주는 것이라든지,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든지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하는 식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그런 표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16)

A. 결론의 목적

설교에서 왜 결론이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첫째, 결론은 설교를 요약. 정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결론이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가 약 30여분 동안 전파한 것을 요약해서 정리함으로 청중이 교회를 떠날 때 설교 전체의 윤곽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간직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진리는 한 번 이상 들려 줄 만한 가치가 있다. 결론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중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들려줌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해줄 필요가 있다.
둘째, 결론은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 자연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그래서 설교에는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결단이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은 아니더라도 우선 마음 속의 결심으로 나타나고 나중에 행동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것은 청중 개개인과 주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설교자 편에서 볼 때에는 최소한 청중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어느 개인에게 계속적으로 임할 수도 있겠지만, 말씀을 들음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가는 그 역사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다. 설교자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설교가 마치 마지막 설교인 것같이 해야 될 것이요, 마지막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그 결론을 효과적으로 잘 준비해서 전할 것이다.

B. 좋은 결론의 특징

결론이 중요한만큼 좋은 결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좋은 결론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7)
첫째, 좋은 결론은 적절하다.
좋은 결론은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할 때 결론은 본론과 동떨어진 내용이 되지 않고 본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본론을 그 논리적 결말에 이르게 유도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결론이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끌어진다면 본론에서 취급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결론에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본론에-만일 본론의 어느 부분에 들어맞는 내용이라면-포함되어야지 결론에 포함됨으로 하나의 설교가 다 끝나가는 듯 하다가 또 하나의 새로운 설교를 시작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좋은 결론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결론을 길게 해서 본론인지 결론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이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결론은 너무 길지 않아야 된다. 그렇게 하자면 결론은 또한 단순해야 된다. 결론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며, 단순하고 분명해야 된다. 결론에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시켜서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면 그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결론이라 하겠다.
셋째, 좋은 결론은 개인적이다.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각 개인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대중을 상대하면서도 개인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좋은 적용을 통해서 설교를 청중 각 개인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결론에서 이를 다시 한 번 간단히 재현할 필요가 있다.
넷째, 좋은 결론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좋은 서론이 변명을 요구하지 않듯이 좋은 결론도 변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설교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며…."라든지 "바쁜 가운데도 만사를 제쳐놓고 오신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만큼 좋은 설교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식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청중이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C. 결론의 유형 (類型)

설교를 시작하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설교를 끝맺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떤 유형의 결론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성격 및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설교자는 몇 가지 형태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편의상 그 대표적인 몇 가지 형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약 반복(recapitulation)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설교 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몇 마디로 요약함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방법이다. 가령 누가복음 16:1-9을 본문으로 해서 '지혜 있는 종'이란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이 종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서는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종만큼 지혜롭습니까?"

둘째, 호소(appeal)의 형태가 있다.
호소의 형태는 설교의 본론에 입각해 청중이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형태이다. 그 결단이 헌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충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회개일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13-14을 본문으로 해서 '두 길'이란 제목으로(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길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집을 떠난 나그네와 같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넓은 길 아니면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의 선택이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셋째, 예화(illustration)로 끝내는 방법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서론을 좋은 예화로 시작할 수 있듯이 결론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설교의 주제와 관계 있는 좋은 예화가 있으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는 것도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가 고린도전서 1:26-31을 본문으로 해서 '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 다음과 같은 아즈윌드 스미드(Oswald J. Smith) 목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아즈윌드 스미드)를 어떻게 부셔뜨렸는지 내가 겸손하게 얘기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제 사역의 초기에 일어났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곧 바로 토론토에 있는 어느 큰 장로교회를 맡아 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3년 반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약 1,800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교회는 계속 꽉 찼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이만큼 큰 다른 교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는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교회도 저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미구(未久)에 그런 교회조차도 저를 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돈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충분한 음식을 얻기가 힘들게 되었고, 여러 가지 채무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아가 바로 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영단번(永單番)에 깨뜨려 버리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계속 밑바닥으로만 향해서 내려갔습니다. 그 해에 폴 레이더(Paul Rader)가 토론토에서 첫 집회를 가지려고 왔습니다.
그 집회는 그 도시에서 그 당시 가장 큰 메이시 회관(Massey Hall)에서 열렸습니다. 털끝만큼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저는 거기에 가서 안내 책임자를 찾아가서, '이번 집회 기간 동안 제가 안내로 여기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책임자는 좋다고 말하면서 옆 줄 하나를 맡으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책임자와 그의 조수가 뭐라고 얘기하면서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조수는 제가 맡은 줄로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그 줄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뒷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제가 했던 모든 준비는 헛것이고 어느 누구도 저를 원치 않습니다. 안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삼일 후에 다시 상담 책임자를 찾아가서 '제가 이 집회에서 구령 상담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그 책임자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흘 동안 기다렸지만 그는 저에게 구령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삼일 후에 저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강당 뒷편에 가서 앉았습니다. 다시 눈물이 눈에서 줄줄 흘렀고, 제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주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저는 아마 다시 설교를 못하게 되겠지요. 저는 이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군요'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또다시 삼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안 되면 저는 끝장이고, 하나님께서 제가 더 이상 사역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판매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안내원들이 통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찬송가를 팔고 있기에, 저도 가서 '통로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팔 수 있을까요?'라고 하니, 그 책임자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찬송가를 한아름 주었는데, 그것은 머키(Arthur W. McKee)가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을 인도하던 머키 씨가 강단 앞쪽에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찬송을 하나 부르겠는데, 그것은 바로 이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라는 제목의 찬송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찬송가를 팔고 있는 곳을 가리키더니, '저기서 찬송가를 팔고 있는 젊은이가 보입니까?'라고 말하자 모든 사람은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저 젊은이가 찬송을 작곡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루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찬송가 파는 일을 즉각 그만 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버렸습니다.
그 찬송은 정말 굉장한 찬송이었습니다. 약 500명의 성가대와 회중이 함께 그 찬송을 처음으로 부르는 것을 들으니 건물의 지붕이 떨어져져 나가는 것 같이 웅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선반 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저를 포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단지 저를 부셔뜨리고 계셨을 뿐입니다. 저는 너무 교만해서 당신은 저를 신뢰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후 정말 놀랍게도, 런던의 스펄전 목사님의 교회로부터 전보를 하나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몇 주 동안 강단을 좀 지켜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체할 틈도 없이 저는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런던에서의 몇 주가 끝난 후 토론토로 돌아오니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론토에서 좋은 사역이 열렸는데, 그 후에도 20여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원하면 다 갈 수 있는 그런 초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하게 일하셨습니다. 그는 미래의 계획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토론토에 회중교회(People's Church)가 세워질 것을 미리 아시고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가 범세계적인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구를 준비하셔야 했고, 그래서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부셔뜨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저는 내려가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18)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넷째, 적절한 성경 구절이나 남의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설교를 끝낼 수도 있다.
적절한 인용문을 발견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면 때때로 설교자 자신이 하려는 말을 훨씬 더 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19) 가령 다니엘 1: 1-21을 본문으로 해서 '신앙의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은 웨슬리(John Wesley)의 말을 인용함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에게 죄 이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 이외에는 사모하는 것이 없는 사람 열 사람만 주십시 오. 그러면 이 세계를 뒤흔들어 놓겠나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열 사람 중의 하나가 되겠습니까?"

다섯째, 적절한 질문(question)으로 설교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는 질문이 앞에서 언급한 요약 반복, 호소, 예화, 인용 등과 함께 쓰이고 있지만, 때로는 상당히 독자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라빈슨(Haddon Robinson)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낼 것을 제안한다.
"내가 시작했던 곳에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건 참 훌륭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20)
설교를 끝내는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찬송으로 끝낼 수도 있고, 기도로 끝낼 수도 있고, 적절한 시(詩)로 끝낼 수도 있고, 속담이나 격언으로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의 성격과 설교자의 역량 및 취향에 따라 결론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결론은 설교를 그 논리적 귀착점으로 잘 인도해 주면 그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III. 설교제목


A. 제목의 가치

설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시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멋진 제목이 강해 설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좋은 제목이 좋은 내용의 설교를 더 빛내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책이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appeal)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책의 제목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미 출판계의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한 때 실패했던 책이었지만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해 베스트 셀러가 된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적절한 제목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청중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설교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것은 좋은 안내자와 같이 청중을 제대로 안내해 주며, 설교의 범위를 한정해 설교자로 하여금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지 않게 도와준다. 21)

B. 좋은 제목의 특징

좋은 제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가 좋은 제목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해서 노력하면 비교적 좋은 제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좋은 제목은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가령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무슨 제목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구원받은 삭개오' '변화받은 삭개오' '삭개오의 회개' '삭개오의 구원'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목은 너무 석의적(釋義的)이고, 과거지향적이고 진부해서 청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렵다. 어떤 설교자는 '인간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상당히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위대한 만남' 같은 제목도 좋은 제목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25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대개의 경우 설교 제목을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 같은 석의적이고 독창성이 전혀 없는 제목을 잡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석의적 내용을 설교 제목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의적 제목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본문으로 '의인이 고난당 할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가령 다니엘서 1:1-2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필자는 어떤 분이 '히브리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독자의 생각에는 이 제목이 어떤가? 이 제목은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석의적이고 원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을 붙여 본 적이 있다.
둘째, 좋은 제목은 적합해야 한다.
아무리 기발하고 참신하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설교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제목이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설교의 주제나 강조점을 반영하는 제목이라야만 할 것이다.
가령 마태복음 5:10-12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복 받는 비결' 같은 제목으로 설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좋은 제목은 간결하다.
책 제목 가운데 긴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책의 제목으로는 긴 것도 괜찮을는지 모르겠지만, 설교의 제목으로는 가능하면 짧은 것이 좋다.
넷째, 좋은 제목은 범위가 좁다.
좋은 설교 제목은 그 설교에만 딱 들어맞는 것이라야 되기 때문에 범위에 있어서도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넓은 제목은 여러 가지 설교에 다 맞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다.
가령 로마서 7:1- 6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율법과 은혜' 같은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 다루어도 될 정도로 너무 광범위한 제목이기 때문이다.


주(註)
1) John R. W.Stott, Between Two Worlds, p.243.
2) Haddon W.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60; cf. Jerry Vines, A Practical Guide to Sermon Preparation, p.137.
3) A. Duane Litfin, Public Speaking, pp.236-37.
4) George E. Sweazy, Preaching the Good News, p.94.
5) Vines, p.138.
6)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137.
7)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106.
8) Baumann, p.137; H.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 p.189.
9) Davis, p.188.
10) Robinson, p.165.
11) J. Dwight Pentecost, Design for Living, p.69.
12) cf. Baumann, p.140.
13) Davis, p.192.
14) James Braga, How to Prepare Bible Messages, pp.229-30.
15) George W. Fluharty and Harold R. Ross, Public Speaking, p.137.
16) Reg Grant and John Reed, Power Sermon, p.105.
17) Litfin, pp.255-56; Baumann, pp.142-43; Braga, pp. 232-39; Broadus, pp.109-12; H. C. Brown, H. G. Clinard and J. J. Northcutt, Steps to the Sermon, pp.122-23; Woodrow M. Kroll, Prescription for Preaching, pp.181-82.
18) Carl G. Johnson, ed., My Favorite Illustration, pp.113-15.
19) Robinson, p.169.
20) Ibid.
21) cf.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p.95-96.
월간 교회와신앙
강해설교 작성법/서론, 결론 및 설교제목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설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물론 본론을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본론에 비하면 시간적으로는 지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본론 못지 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도 본론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될 부분은 서론과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우, 어떤 때는 본론을 다 만들어 놓고도 적절한 서론을 만들지 못해 장시간 고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I. 서론

실제로 설교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서론은 맨 나중에 작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 하면 서론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서론에 맞추기 위해서 본문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서론을 맨 나중에 작성하면 설교 전체의 흐름과도 잘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이 없는 설교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강사를 아무 소개 없이 강단에 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강사도 물론 설교를 할 수는 있겠지만, 청중으로부터 엄청난 저항감 내지는 거부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책을 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머리말이 있고, 훌륭한 음악은 반드시 서곡(prelude)이 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설교에는 반드시 서론이 있다.
필자가 들어본 많은 설교 가운데 서론이 전혀 없는 설교가 너무 많이 있었다. 서론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효과적인 서론 시작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입니다”고 하고서 본문을 읽은 후(또는 교독한 후) 곧 바로 설교의 본론으로 들어간다.

A. 서론의 목적

그러면 설교에서 서론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가? 서론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서론은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
라빈슨(Haddon Robinson)은 "만일 설교자가 처음 30초 내에 청중의 주의를 끌지 못하면 아예 주의를 끌지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했다.2) 설교자가 처음부터 청중의 주의와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청중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을 것이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는 순간 청중은 자동적으로 설교자에게 시선을 모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이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나라같이 비교적 예의 바른 사회에서는 청중이 처음부터 연설자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더 어려운 부분은 그 관심을 어떻게 하면 계속 붙잡아서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3) 낯선 청중에게 설교할 경우 청중은 처음 몇 분 동안에 받은 인상으로 설교자를 다 평가해 버린다. 스위지(George E.. Sweazy)는 이렇게 말한다 :

"그것(서론)은 설교자에게 굉장한 출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핸디캡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첫 몇 문장이 청중을 그에게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청중은 '설교자가 서론을 시작하는 동안에' 자기들이 좋아하고 신뢰하고 들을 만한 설교자인지 아닌지 결정해 버린다. 만일 그 설교자가 머뭇머뭇 거리고, 아무런 특색이 없고, 불쾌하고, 거칠고,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했다면, 청중은 그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는지 모른다." 4)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청중의 주의를 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낯익은 청중 같으면 설교자에 대해서 그들 나름으로 어떤 견해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의 몇 마디가 약간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일 서론에서 무엇인가 들을 만한 것을 전하겠다는 것을 청중에게 보여주지 못하면 청중은 곧 다른 데로 관심을 돌려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청중에게든 낯익은 청중에게든 좋은 서론으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시선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서론은 청중이 왜 이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단 예배에 참석했으니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청중이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설교자가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교의 본론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청중의 필요 발견과 설교 목적의 결정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논의했다. 만일 이 단계를 제대로 잘 소화했다면, 설교자는 설교의 본론 작성이 끝남과 동시에 청중의 필요가 무엇이며, 지금 준비하고 있는 설교가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이러한 필요에 대해서 청중이 눈을 뜨도록 만들어야 된다.
청중은 자신들의 필요를 늘 잘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경우에는 그 필요가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잠재의식 속에 잠자고 있다. 훌륭한 설교는 의식적인 필요를 더 분명하고 구체화해 주고, 무의식적인 필요를 의식적인 필요로 바꾸어 준다. 이렇게 되면 청중은 설교를 꼭 들어야겠다는 긍정적 동기를 갖게 된다.
셋째, 서론은 설교자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청중으로 하여금 본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5)
서론은 그것 자체가 아무리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고 청중의 주의를 잘 끈다 할지라도, 설교의 본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런 서론은 서론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서론을 위한 서론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론은 설교 전체의 주제와 연관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첫째 대지와 관련될 수도 있다. 본론의 전개 방식이나 설교의 특성에 따라 위의 둘 중 어느 하나로 낙착이 되겠지만, 서론이 설교의 본론과 상관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넷째, 서론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청중에게 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의 목적을 말한다고 해서, "오늘 설교의 목적은 .....입니다"라는 식으로 직접 표현하는 방식보다는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함께 상고하도록 합시다"는 방식이 더 좋을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가 가야 할 목적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은 여행을 함께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선포할 때 청중은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B. 좋은 서론의 특징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서론이 존재하는 목적을 잘 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서론은 청중의 관심을 끄는 서론이요, 청중이 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는 서론이요, 청중이 본론으로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기 위해 설교의 본론과 관계 있는 서론이어야 한다는 것은 부연(敷衍)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좋은 서론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특징 외에 몇 가지를 더 구비해야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서론은 길이가 적절해야 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전파하고자 하는 것은 본론이지 서론은 아니다.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를 밝혀 주고, 설교의 본론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서론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인 오웬(John Owen)에게 어떤 노파가 불평하기를, 그가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너무 긴 시간을 끌기 때문에 식욕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는 것이다.6) 하우(John Howe) 같은 설교자도 이런 불평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식탁보를 놓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나는 식욕을 다 잃어버렸고, 그래서 아예 음식은 나오지도 않으려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7) 서론을 너무 질질 끌다가는 본론에 대한 식욕이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이를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서론은 어느 정도로 길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이가 1∼2분이어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 전체 길이의 5∼15% 정도라야 된다고 한다.8) 서론은 서론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길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서론의 길이는 3분 이내가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서론이 다소 길게 갈 수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계적으로 수학의 공식같이 그 길이를 정하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서론이 약간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3분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좋은 서론은 적절해야 한다.
좋은 서론은 마춤 양복같이 딱 하나의 설교에만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이렇게 갈파한다: "서론이 지금 이 설교 이외의 다른 설교에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설교에 들어맞는 좋은 서론은 아니다”9) 어떤 두 개의 설교도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두 개의 서론도 완전히 동일할 수 없고, 각 서론은 설교에 맞추어서 만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셋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어떤 좋지 못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가령 "오늘은 말씀 준비를 제대로 못했지만............”이라는 식으로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서론에서 이런 변명을 하는 주된 이유는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한 자신의 양심을 달래거나 청중으로부터 어떤 동정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자가 서론에서 이런 구차한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면, "쳇! 준비도 없이 왜 강단에 서? 도대체 우리를 무엇으로 알고 그러지?”라는 식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준비를 하지 않고 강단에 서는 것은 위로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아래로는 성도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목사의 직무 태만이요 직무 유기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준비하지 못한 것을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행위이다. 이런 변명은 하지 않더라도 청중은 곧 알아채고 만다. 잘 준비된 설교와 준비되지 못한 설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청중은 우둔하지가 않다. 이런 변명은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성도들의 마음 문은 완전히 닫히게 될 것이고, 그들은 "여기서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구나!”하는 허탈감 내지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설교자가 몸이 불편해서 - 게으르거나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가 아니라 - 마음에는 정말 충분히 준비하고 싶지만 육체적인 이유로 준비할 수 없었을 경우에는 "사실 지난 주에는 몸이 좋지 못해서 충분히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느라고 했습니다”고 말하면 청중은 양해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설교자가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더 큰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준비 없이는 강단에 서지 말 것이요, 부득이 그러한 경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좋은 서론은 서론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10) 독자들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고액의 약속어음이 부도나 버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어떤 가까운 사람이 소중한 약속을 하고서는 이행하지 않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설교자도 약속 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강단에서 할 수 있다. 서론에서 많은 것을 약속해 놓고는 실제 설교의 본론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약속어음을 부도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4-1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면서, 이 설교 하나만 들으면 성령의 은사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같이 서론에서 약속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과대 약속을 할 때 성도들의 관심은 끌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성도들은 기만당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계속 반복될 때 설교자는 성도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섯째, 좋은 서론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서론 시작의 방법 내지는 유형(類型)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함으로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청중에게 줄 필요가 있다.

C. 서론의 유형(類型)

서론을 시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 생각하기로 하겠다.
첫째, 이야기(story or illustration)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서론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설교와 관련 있는 이야기(또는 예화)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주제와 일치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서론으로서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마태복음 5:10-12 을 본문으로 해서 "의를 위한 핍박”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어느 젊은이가 대학 2학년에 재학중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느 캠프에서 여름을 보내며 일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젊은이는 크리스천 가정의 출신으로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캠프에서 방탕하게 지내는 사람들과도 상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젊은이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겪을지도 모르는 반대와 핍박에 관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 부모는 방학 중에 자기 아들로부터 별로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그 부모는 그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더냐고 물으니, 아들은 그 질문에 저윽이 놀라는 듯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그 사람들이 여름 내내 조금도 저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던대요. 사실상 그들은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거든요'.”11)

의를 위한 핍박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공산 세계의 성도들과는 상관이 있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기실(其實)은 그렇지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 같은 자유 국가에서도 무릇 의를 위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지만(딤후 3:12), 적당히 신앙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핍박이 없다는 것을 설교할 때 위에서 든 펜티코스트 박사의 예는 아주 적절하다고 하겠다.
둘째, 예기치 않은 언명(言明, startling statement)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어떤 말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말로 서론을 시작하면 금세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다.
필자가 마가복음 14: 3-9을 본문으로 해서 '옥합이 깨질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탕자(눅15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의 재산 가운데 아마도 약 1/3정도를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 가서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허랑방탕하게 모든 돈을 다 허비해 버린 그 젊은이의 소행에 대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해야 될 책임은 있지만 허비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허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가끔 우리에게 허비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 주님조차도 그런 허비를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하고 계시는데 오늘은 이런 종류의 허비를 마가복음 14:3-9에서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허비를 조장하고 계신다는 말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론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고, 도대체 설교자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면서 설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만일 설교자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설교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노라고 하는 우리들이 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모였지만, 사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할 뿐인 것입니다."12)
교회당에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을 향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너무나 깜짝 놀랄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서론이 청중의 주의를 모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셋째, 설교와 관계 있는 적절한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시작 할 수도 있다.
가령 고린도전서 3: 18-23을 본문으로 해서 '세상적 지혜의 어리석음'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지혜로는 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신앙의 필요성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웰즈(H. G. Wells)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종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고도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기까지는 시작도 없이 시작해서 끝도 없이 일하는 사람이다”
넷째, 질문(question)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설교의 본론과 관련 있는 예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잔잔하던 청중의 마음 속에 파문을 일으켜서 설교에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5: 22-27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할 때 필자는 서론을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원치 않는데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우리는 오라고도 안 하는데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라고도 하고 역경이라고도 합니다. 학생은 학생 나름으로, 청년은 청년 나름으로, 직장인은 직장인 나름으로, 사업가는 사업가 나름으로, 가정 주부는 가정 주부 나름으로 우리 모두는 고난의 동참자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큰 고난을 겪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고난이라는 불청객을 언제 맞이할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제대로 풀려가지 않고,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조차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이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역경 가운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출애굽기 15: 22-27에서 고난을 대처하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론을 시작한 후 광야에서 3일 동안 물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고, 모세는 어떻게 했고, 하나님은 이 역경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는 내용으로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다섯째, 본문의 배경(background of the text)에 대한 설명으로 서론을 시작할 수도 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지리적인 배경이나 본문 자체의 큰 문맥을 설명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서론일 수 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6: 1-8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서론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6장은 많은 성경학자들과 주석가들을 괴롭혀 온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이 불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 아니면 신자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신자를 가리킨다면 그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도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요? 이 어려운 본문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지 이 아침에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섯째, 비교(comparison)나 비유(parable)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 7-11을 본문으로 해서 기도에 관해 설교한다면, 서론을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마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제대로 살아 움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과 같은 기도,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기도, 이 기도는 그러면 어떠한 태도로 해야 되겠습니까?"
일곱째, 최근의 뉴스(news item)가운데 하나를 말함으로 설교를 시작할 수도 있다.
가령 우리가 에베소서 6:4이나 잠언 22:6 등에 근거해서 자녀 양육에 관해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이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뉴욕에 사는 어느 부부가 아내의 불임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임신하게 되자 수술을 한 의사를 상대로 수십만 불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이 소송에 대한 판사의 판결을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은 부담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기쁨이며 특권이다.' 그래서 소송은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른다는 것을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엄청난 책임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기르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를 에베소서 6장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문제 제기를 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수수께끼나 격언 같은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유모어로 시작할 수도 있고, 실물 교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역설(paradox)로 시작할 수도 있고, 어떤 저서를 언급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서론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가능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Ⅱ. 결 론

결론은 설교의 총결산이다. 서론에서 시작해 본론을 거쳐 나오는 긴 흐름을 그 최종 목적지에 잘 안착(安着)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결론이다.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결론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결론은 청중이 설교 전체를 한꺼번에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순간이다. 그것은 이슈(issue)를 가장 분명히 보고, 가장 예리하게 느끼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삶에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결론은 설교의 목적-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을 성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따라서 이 순간은 아마도 '설교' 전체의 연속성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설교는 결론을 맺어야지 그냥 중지해서는 안 되고,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냥 몰고 나서는 안 된다." 13)
시원치 않은 결론은 좋은 본론의 효과를 상당히 감소시켜 버린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훌륭한 결론을 본론에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보충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14)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자는 결론을 절대로 경시하지 않는다. 청중이 그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갖고 돌아가게 하기 위해 설교자는 최후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할 것이다.
끝낼 듯 끝낼 듯 하면서도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것도 청중으로 하여금 짜증이 나게 하지만, 결론도 없이 갑자기 끝내 버리는 것도 문제이다. 아무런 결론도 없이 설교가 끝나면 청중은 설교가 끝난 것인지 아닌지 의아해 하거나 설교자가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궁금해 할 것이다. 15)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본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준비를 잘 해야만 될 것이다.
또 결론을 미리 말해 버리거나, 결론이 이르렀다고 암시를 주는 것이라든지,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든지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하는 식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그런 표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16)

A. 결론의 목적

설교에서 왜 결론이 필요한가? 그것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첫째, 결론은 설교를 요약. 정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결론이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가 약 30여분 동안 전파한 것을 요약해서 정리함으로 청중이 교회를 떠날 때 설교 전체의 윤곽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간직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진리는 한 번 이상 들려 줄 만한 가치가 있다. 결론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중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들려줌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해줄 필요가 있다.
둘째, 결론은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설교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 자연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그래서 설교에는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결단이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인 행동은 아니더라도 우선 마음 속의 결심으로 나타나고 나중에 행동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것은 청중 개개인과 주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설교자 편에서 볼 때에는 최소한 청중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어느 개인에게 계속적으로 임할 수도 있겠지만, 말씀을 들음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가는 그 역사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다. 설교자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설교가 마치 마지막 설교인 것같이 해야 될 것이요, 마지막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그 결론을 효과적으로 잘 준비해서 전할 것이다.

B. 좋은 결론의 특징

결론이 중요한만큼 좋은 결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좋은 결론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7)
첫째, 좋은 결론은 적절하다.
좋은 결론은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할 때 결론은 본론과 동떨어진 내용이 되지 않고 본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본론을 그 논리적 결말에 이르게 유도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결론이 본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끌어진다면 본론에서 취급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결론에 도입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본론에-만일 본론의 어느 부분에 들어맞는 내용이라면-포함되어야지 결론에 포함됨으로 하나의 설교가 다 끝나가는 듯 하다가 또 하나의 새로운 설교를 시작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좋은 결론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결론을 길게 해서 본론인지 결론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이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결론은 너무 길지 않아야 된다. 그렇게 하자면 결론은 또한 단순해야 된다. 결론을 복잡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며, 단순하고 분명해야 된다. 결론에 여러 가지 내용을 포함시켜서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면 그 결론은 문제가 있는 결론이라 하겠다.
셋째, 좋은 결론은 개인적이다.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각 개인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대중을 상대하면서도 개인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좋은 적용을 통해서 설교를 청중 각 개인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결론에서 이를 다시 한 번 간단히 재현할 필요가 있다.
넷째, 좋은 결론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좋은 서론이 변명을 요구하지 않듯이 좋은 결론도 변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설교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하며…."라든지 "바쁜 가운데도 만사를 제쳐놓고 오신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만큼 좋은 설교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식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청중이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이다.

C. 결론의 유형 (類型)

설교를 시작하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설교를 끝맺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떤 유형의 결론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성격 및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설교자는 몇 가지 형태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편의상 그 대표적인 몇 가지 형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약 반복(recapitulation)의 형태가 있다.
이것은 설교 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몇 마디로 요약함으로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방법이다. 가령 누가복음 16:1-9을 본문으로 해서 '지혜 있는 종'이란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이 종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서는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종만큼 지혜롭습니까?"

둘째, 호소(appeal)의 형태가 있다.
호소의 형태는 설교의 본론에 입각해 청중이 어떤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는 형태이다. 그 결단이 헌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충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회개일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마태복음 7:13-14을 본문으로 해서 '두 길'이란 제목으로(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길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집을 떠난 나그네와 같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넓은 길 아니면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의 선택이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셋째, 예화(illustration)로 끝내는 방법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서론을 좋은 예화로 시작할 수 있듯이 결론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설교의 주제와 관계 있는 좋은 예화가 있으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는 것도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가 고린도전서 1:26-31을 본문으로 해서 '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 다음과 같은 아즈윌드 스미드(Oswald J. Smith) 목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은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아즈윌드 스미드)를 어떻게 부셔뜨렸는지 내가 겸손하게 얘기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제 사역의 초기에 일어났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곧 바로 토론토에 있는 어느 큰 장로교회를 맡아 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3년 반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약 1,800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교회는 계속 꽉 찼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이만큼 큰 다른 교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는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교회도 저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그마한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미구(未久)에 그런 교회조차도 저를 원치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돈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하나 있었지만 충분한 음식을 얻기가 힘들게 되었고, 여러 가지 채무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아가 바로 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영단번(永單番)에 깨뜨려 버리려고 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계속 밑바닥으로만 향해서 내려갔습니다. 그 해에 폴 레이더(Paul Rader)가 토론토에서 첫 집회를 가지려고 왔습니다.
그 집회는 그 도시에서 그 당시 가장 큰 메이시 회관(Massey Hall)에서 열렸습니다. 털끝만큼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저는 거기에 가서 안내 책임자를 찾아가서, '이번 집회 기간 동안 제가 안내로 여기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책임자는 좋다고 말하면서 옆 줄 하나를 맡으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그 책임자와 그의 조수가 뭐라고 얘기하면서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조수는 제가 맡은 줄로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그 줄을 맡겠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뒷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제가 했던 모든 준비는 헛것이고 어느 누구도 저를 원치 않습니다. 안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삼일 후에 다시 상담 책임자를 찾아가서 '제가 이 집회에서 구령 상담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그 책임자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흘 동안 기다렸지만 그는 저에게 구령 상담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삼일 후에 저는 집회가 열리고 있는 강당 뒷편에 가서 앉았습니다. 다시 눈물이 눈에서 줄줄 흘렀고, 제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주님,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저는 아마 다시 설교를 못하게 되겠지요. 저는 이제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군요'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또다시 삼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안 되면 저는 끝장이고, 하나님께서 제가 더 이상 사역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 판매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안내원들이 통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찬송가를 팔고 있기에, 저도 가서 '통로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팔 수 있을까요?'라고 하니, 그 책임자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찬송가를 한아름 주었는데, 그것은 머키(Arthur W. McKee)가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을 인도하던 머키 씨가 강단 앞쪽에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찬송을 하나 부르겠는데, 그것은 바로 이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라는 제목의 찬송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찬송가를 팔고 있는 곳을 가리키더니, '저기서 찬송가를 팔고 있는 젊은이가 보입니까?'라고 말하자 모든 사람은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저 젊은이가 찬송을 작곡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루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찬송가 파는 일을 즉각 그만 두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버렸습니다.
그 찬송은 정말 굉장한 찬송이었습니다. 약 500명의 성가대와 회중이 함께 그 찬송을 처음으로 부르는 것을 들으니 건물의 지붕이 떨어져져 나가는 것 같이 웅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선반 위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저를 포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단지 저를 부셔뜨리고 계셨을 뿐입니다. 저는 너무 교만해서 당신은 저를 신뢰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후 정말 놀랍게도, 런던의 스펄전 목사님의 교회로부터 전보를 하나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몇 주 동안 강단을 좀 지켜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체할 틈도 없이 저는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런던에서의 몇 주가 끝난 후 토론토로 돌아오니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론토에서 좋은 사역이 열렸는데, 그 후에도 20여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원하면 다 갈 수 있는 그런 초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하게 일하셨습니다. 그는 미래의 계획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토론토에 회중교회(People's Church)가 세워질 것을 미리 아시고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가 범세계적인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구를 준비하셔야 했고, 그래서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부셔뜨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저는 내려가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18)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넷째, 적절한 성경 구절이나 남의 말을 인용(quotation)함으로 설교를 끝낼 수도 있다.
적절한 인용문을 발견해 그것으로 설교를 끝내면 때때로 설교자 자신이 하려는 말을 훨씬 더 강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19) 가령 다니엘 1: 1-21을 본문으로 해서 '신앙의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다면, 다음과 같은 웨슬리(John Wesley)의 말을 인용함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에게 죄 이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 이외에는 사모하는 것이 없는 사람 열 사람만 주십시 오. 그러면 이 세계를 뒤흔들어 놓겠나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열 사람 중의 하나가 되겠습니까?"

다섯째, 적절한 질문(question)으로 설교를 마무리 지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는 질문이 앞에서 언급한 요약 반복, 호소, 예화, 인용 등과 함께 쓰이고 있지만, 때로는 상당히 독자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라빈슨(Haddon Robinson)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다음과 같이 끝낼 것을 제안한다.
"내가 시작했던 곳에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건 참 훌륭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합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20)
설교를 끝내는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찬송으로 끝낼 수도 있고, 기도로 끝낼 수도 있고, 적절한 시(詩)로 끝낼 수도 있고, 속담이나 격언으로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의 성격과 설교자의 역량 및 취향에 따라 결론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어느 방법을 택하든 결론은 설교를 그 논리적 귀착점으로 잘 인도해 주면 그 사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다.

III. 설교제목


A. 제목의 가치

설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경시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멋진 제목이 강해 설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좋은 제목이 좋은 내용의 설교를 더 빛내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책이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appeal)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책의 제목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미 출판계의 공공연한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한 때 실패했던 책이었지만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해 베스트 셀러가 된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적절한 제목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청중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설교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것은 좋은 안내자와 같이 청중을 제대로 안내해 주며, 설교의 범위를 한정해 설교자로 하여금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지 않게 도와준다. 21)

B. 좋은 제목의 특징

좋은 제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가 좋은 제목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해서 노력하면 비교적 좋은 제목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좋은 제목은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가령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무슨 제목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구원받은 삭개오' '변화받은 삭개오' '삭개오의 회개' '삭개오의 구원'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목은 너무 석의적(釋義的)이고, 과거지향적이고 진부해서 청중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렵다. 어떤 설교자는 '인간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상당히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위대한 만남' 같은 제목도 좋은 제목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25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대개의 경우 설교 제목을 '침례(세례) 요한의 탄생' 같은 석의적이고 독창성이 전혀 없는 제목을 잡을 것이다. 꼭 필요하다면 석의적 내용을 설교 제목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의적 제목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본문으로 '의인이 고난당 할 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가령 다니엘서 1:1-21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필자는 어떤 분이 '히브리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독자의 생각에는 이 제목이 어떤가? 이 제목은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석의적이고 원리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을 붙여 본 적이 있다.
둘째, 좋은 제목은 적합해야 한다.
아무리 기발하고 참신하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설교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제목이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설교의 주제나 강조점을 반영하는 제목이라야만 할 것이다.
가령 마태복음 5:10-12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복 받는 비결' 같은 제목으로 설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좋은 제목은 간결하다.
책 제목 가운데 긴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책의 제목으로는 긴 것도 괜찮을는지 모르겠지만, 설교의 제목으로는 가능하면 짧은 것이 좋다.
넷째, 좋은 제목은 범위가 좁다.
좋은 설교 제목은 그 설교에만 딱 들어맞는 것이라야 되기 때문에 범위에 있어서도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넓은 제목은 여러 가지 설교에 다 맞기 때문에 가능하면 피해야 할 것이다.
가령 로마서 7:1- 6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할 경우 '율법과 은혜' 같은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권의 책으로 다루어도 될 정도로 너무 광범위한 제목이기 때문이다.


주(註)
1) John R. W.Stott, Between Two Worlds, p.243.
2) Haddon W.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160; cf. Jerry Vines, A Practical Guide to Sermon Preparation, p.137.
3) A. Duane Litfin, Public Speaking, pp.236-37.
4) George E. Sweazy, Preaching the Good News, p.94.
5) Vines, p.138.
6)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137.
7)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106.
8) Baumann, p.137; H.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 p.189.
9) Davis, p.188.
10) Robinson, p.165.
11) J. Dwight Pentecost, Design for Living, p.69.
12) cf. Baumann, p.140.
13) Davis, p.192.
14) James Braga, How to Prepare Bible Messages, pp.229-30.
15) George W. Fluharty and Harold R. Ross, Public Speaking, p.137.
16) Reg Grant and John Reed, Power Sermon, p.105.
17) Litfin, pp.255-56; Baumann, pp.142-43; Braga, pp. 232-39; Broadus, pp.109-12; H. C. Brown, H. G. Clinard and J. J. Northcutt, Steps to the Sermon, pp.122-23; Woodrow M. Kroll, Prescription for Preaching, pp.181-82.
18) Carl G. Johnson, ed., My Favorite Illustration, pp.113-15.
19) Robinson, p.169.
20) Ibid.
21) cf. Brown, Clinard and Northcutt, pp.95-96.
월간 교회와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