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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에반젤(복음) 2020. 2. 9. 17:15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습3:9)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습3: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릴지라

(습3: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습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습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저는 설교자이기에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강의에 은사도 이제는 없다.

얼마 전에 50년만에 우리 나라에 찾아온 할머니가 있었다. 일제때 정신대에 끌려가 50여 년 간 타국에서 살면서 조국도 언어도 모든 것을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젊었을 때 정신대로 끌려가 간신히 부모 묘를 찾아 그 앞에 통곡하는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어떻게 이 할머니가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모두 다 한 시대의 희생물이라고 생각되기에 할머니의 돌아옴을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스바냐 3:10절은 하나님께서 흩어 버린 이스라엘 딸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더렵혀진 사람들이며,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릴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 혼혈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 스바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박국서와 더불어 말하고 있다. 이 멸망은 하나님의 개혁 운동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으로 개혁하지 않을 때 물리적으로 개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 말씀에 따라 개혁하지 않는 자들은 물리적으로 개혁하며 다른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9절의 그 때에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것은 유일한 지상의 예배와 성전이 없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열방의 입술을 깨끗이 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방인들을 불러 예배하도록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정규 로열 오케스트라를 해체한 왕이 거리의 악사를 오케스트라로 조직한 것은 감격과 눈물이 있는 음악을 원했던 것이다. 음악적으로 완벽한 연주라기 보다는 눈물과 감격이 있는 살아 있는 연주를 원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예배가 아니라 눈물과 감격이 있는 예배이다 .정통 신학으로 무장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쫓아내시고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즉 전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더럽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비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 주지 않는다면 깨끗해질 수 없고 하나님께로 올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제사장으로 세워 예배하겠다는 것은 예배를 망치는 것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기절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규 예배와 백성을 몰아내고 열방의 입술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감격과 눈물 있는 예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예배를 위선적으로 드리지 않는다.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되는 사람은 기분이 안좋은 사람인 교회 안나오거나 표가 난다. 그러나 오래 믿은 사람은 마음에 분노가 가득차도 겉으로 괜찮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에 하나님께서는 미움과 분노를 가지신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격 없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배를 담당하고 주관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배드리거나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예배하는가? 참으로 자격 없는 자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형식적으로 완벽한 예배를 드리는가?

찬송가의 가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찬송을 부를 때가 있다. 아멘 할 때 정신이 든다. 누가 대표 기도할 때 애를 써도 마음이 합해지지 않을 때 있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할 때 정신이 들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왜 이럴까요?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깊게 자리하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를 때 느리거나 악보와 무관하게 부를 때 화가 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정과 박자가 틀려도 감격과 눈물이 있는 예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본문은 말한다.

얼마전 한국계 미인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다. 중국계와 인디언계와 한국계의 혼합인 사람이다. 생긴 것도 한국 사람 같지도 않고 어디를 뜯어봐도 한국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마음속에 할아버지가 사탕수수를 일한 마음을 생각했기에 한국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 중 가장 불쌍한 사람이 외국에 노예로 팔려 간 사람이다. 그들은 유대의 언어를 잃었고 혈통을 잃어버렸고 전혀 유대인 같지 않은 자들이 되었다. 이 혼혈족들은 정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사생자나 혼혈아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저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이 모이는데 한국 사람 한 두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불가능한 예배가 될 것이다.

왜 노예 되었던 이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드실 때 이동시킬 수 있는 조립으로 만드셨다. 법궤는 하나님이 어깨에 메고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장소에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주신다. 이것이 다윗 때 와서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결합되면서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 성전이다. 그 전에는 성전이 돌아다녔다. 요즘 교회가 장소로 고착화되어 간다. 본당은 예배 시간외에 자물쇠로 잠가 놓는 것이 일반화되어 간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전은 움직이는 것이다.

교만한 자가 이 성전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11절은 말한다.

(습3: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음란한 죄에 빠진 그들이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하는 가? 그들 중에는 교만한 들이 없을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멸망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들, 남아 있는 자들을 옮겨 놓은 것이다. 말씀에 개혁되지 않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하나님의 개혁 행위였다. 왜 새로운 성전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는 가? 다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의 개혁 운동이다. 유대인들은 가난을 죄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다면 가난할 리가 없다. 그러나 온전히 순종할 자는 없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어도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비하면 내가 베푼 것이 너무나 적다.

전에 인도에 가서 강의하던 것을 재미있게 들었다. 어떤 인도의 거지가 돈을 주니 고맙다는 소리 안하고 가서 불러서 왜 고맙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내가 받았으니 당신이 선행을 하게 되었으니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만약 우리 주위에 병든 사람과 가난한 자가 교만하다고 한다면 기도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학벌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서 무식한 사람이 끼여 있을 수 없는 그런 교회라면 좋은 교회가 아니다.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큰 절을 해야 한다. 제발 있어 달라고 말이다. 그런 가난한 사람이 꼴 보기 싫을 정도로 교만한 교회라면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끝없이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제거 1호 대상이다.

결국 하나님의 곁에 남을 자들은 누구인가?

(습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다 똑같으니 긴장할 것이 없다. 물론 이것은 예루살렘의 교만을 멸망시키시고 가난한 자 중심으로 이들이 평안하게 살 것을 말씀하신다.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주님에게 맡길 때 얼마나 편안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신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추어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깨닫고 주님께 맡길 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눅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적게 용서함을 받은 바리새인은 적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자신의 죄를 많이 깨닫고 얼마나 자신이 무능한 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사람이 복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전도사때 내가 너무 똑똑해서 주님이 내 계획에 개입할 까 봐 걱정할 때가 있었다. 그 때 미쳤나 봅니다. 지금은 한 순간도 주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돈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정말 주님을 사랑한 것 같은데 요새는 풍족하니 교만해지는 것 같다. 신대원 들어올 때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은 비판으로 가득차 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져서 그런 것이다.

열방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눈물과 감격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을 생각하라. 정말 말씀만 붙들고 아무 것도 그 외에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한다.

작년 순복음 교회 목사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얼마나 짧은 시간에 많은 교인이 늘어날까에 대해서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때 나는 물었다. 여러분은 말씀의 종 되기 위해 안수 받았을 텐데 다른 것으로 인기를 끌려고 하는 것은 매춘부적인 행위가 아닌가? 라고 물었다.

말씀을 제일 모르는 사람으로 이상한 것을 가지고 성공했다고 떠드는 것은 정말 수치스럽고 잡부의 짓이 아닌가? 하나님의 종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그것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교만한 자들을 다 삶아 가지고 멸망시켜 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 시간 있을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참으로 자격 없는 자를 하나님이 부르셨구나. 교인들 떠나도 다 떠나도 좋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하나 붙들고 살겠다는 이것을 보시기 위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 아닌가?

발람은 오늘 우리를 보여준다. 돈이나 인기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발람의 뒤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뒤돌아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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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달 1학년 2학기 때 교회를 개척하였다. 1-2학년 때 교회를 개척하는 전도사들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신대원에 들어왔었다. 그 때가 35이었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인격적으로 말씀으로 잘 무장되었을 것이다. 장소만 생기면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교회에 명성 교회가 있었다. 인사하러 갔더니 그 목사님이 명성 교회 때문에 잘될까 하였다. 그 때 명성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역하면서 얼마나 내가 교인들을 죽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신대원 3년은 소중한 기억이다. 양지는 고향으로 남아 있다. 제 마음의 결심은 채플에 가서 돼지고기를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회 개척할 때 제일 고민한 것은 이렇게 많은 교회가 서울에 있는데 또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가? 였다. 교회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세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명일동 명성 교회 옆에 시장통에 교회를 세웠다. 시장통은 설교때 장사들의 소리가 더 컸다. 장소가 문제도 있고 우리 개척 멤버들이 청년 10명 정도였다. 중간에 건대와 한양대에서 성경 그룹을 인도한 적이 있었다. 한대생들은 다 떠나가고 건대생들은 시골 출신이었기에 갈 데가 없었다. 집에서 모이니 이것이 이단인지도 모르는 자들이었고 이들이 개척 멤버들이었다. 지금은 전도사, 강도사가 되었다. 어디서 어디까지 내 설교인지 그들 설교인지 구분이 안되고 굉장히 잘한다. 교회는 싸워서 쪼개지는 것이 개척하는 것이 제일 좋더라.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하니 굉장히 힘들었다.

저의 어려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개척 교회에 오는 사람은 기질이 있는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었고 자기 상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려웠다. 또 하나는 설교하는 것이 어려움이다. 제일 설교는 내용이 많은 제목 설교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설교를 할 능력이 없었다. 배움이 없어서 학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거듭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성경의 의도를 밝히면서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즈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내 머리로는 그런 설교를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흉내내지 않기로 했다. 상황적인 설교였다. 설교는 예언이고 오늘 시대에 처한 이시대에 사람들에게 생생한 설교를 하는 것이었는데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잘 알고 성경에 대해서 설교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셨다. 원래 나는 설교를 믿지 않았다. 설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고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변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내가 들은 설교는 삼대지 설교였기 때문이었다. 그 설교에서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은 로이드 존즈의 영향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부산에 교회에서 돈을 부쳐 주었는데 로마서 책을 구입했다. 설교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설교가 논증과 교리와 설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고 설교는 해 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40년 설교를 하고 목사와 설교의 번역판을 보았다. 거기서 설교의 영광을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보았다. 설교자는 이토록 영광스러운 것을 알게 되었다. 에베소서를 스몰 그룹에서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총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설교에 대한 패러다임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교회 안에서 목사가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다.

1. 설교

2. 심방

3. 행정

4. 교육(제자 훈련)

5. 상담

6. 연구

7. 기도

8. 운동

이 중에서 목사를 제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 설교다. 다른 것은 몸으로 때워도 되지만 이것은 안된다. 왜 이 설교가 그렇게 부담스러운가? 그렇게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준비해야 된다. 담임 목사의 1주일 설교는 11번 한다. 새벽기도까지 쳐서 그렇지만 보통 3번 정도 한다고 볼 수 있다. 52주를 계산하고 20년 목회를 한다고 하면 3000번의 설교를 해야 한다. 그것도 새롭고 감동 있게 할 학문이 없다. 대학원 학점은 30학점 정도 된다. 경영학 교수에게 3000번에 걸쳐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설교다.

처음에 목회자가 될 때 열정 때문에 나온다. 잘못 생각하는 것이 엄청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영혼의 열정만을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온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의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

6개월 못 넘겨 설교할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이 오늘 설교자들의 문제이다. 이것을 오늘 이야기하려는 중요한 부분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되어서 쏟은 것에 대한 열매를 얻지 못하고 있다. 패러다임 세 개 정도 고쳤으면 한다.

1. 기독교적 가르침의 우선 순위

설교, 상담, 간증, 권면, 교리 교육, …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의 무게가 같지 않다. 예언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교회 안의 모든 가르침은 예언이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사도 바울의 예언 개념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적용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 교회 안에서 혼동이 여기에 있다. 여러 가지 가르침이 많다. 제자 훈련, 요절 암송, 큐티, 등.

가장 무게 있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적용하는 설교가 가장 무게가 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간증을 해서는 안된다.

지난번에 다른 신학교에 갔을 때 채플 시간에 강의를 해 달라고 했는데 저는 설교를 했다. 강의를 하지 않고. 왜냐하면 교회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무게 있는 것이 설교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드라마나 간증으로 대치해서는 안된다. 가장 강력한 무게이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패러다임이다.

2. 교회의 역할이나 사명은 어떤 것인가?

영혼 구원, 구제, 예전, 치유.

교회의 사명은 방주로서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이 종래의 입장이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1636)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강해에서 1)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지고 2) 진리가 회복되고, 3)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기도할 때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옵소라는 기도를 할 때 이 세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총력전도 개념이 영혼 구원에 전력하는 것을 보고 있다.

지금 교회 안에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 설교이다. 안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다. 진리를 밝히는 것이 교회 안에서 제일 중요하다.

진리를 밝히면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어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의 7개 촛대로 나타난다. 그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랑의 교회 남서울 교회가 모델이 되었지만, 그런 교회를 우리는 모델로 해서는 안된다. 옥, 홍 목사님을 많이 존경하고 있다. 교리 싸움에서 인격적 토양으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모델로 잡아서는 안된다. 갑자기 부흥하는 교회는 이동한 교회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이삭을 줍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형 교회를 모델로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든 50-100명이든 진리를 밝히려는데 주목해야 한다. 개척 교회가 순수하게 성공하는 것은 정말 없다. 개척 교회가 비참할 정도로 안되어 있는 것은 옛날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노회에서 거론된 것이 목회자 수급 문제에서 총신의 졸업생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교육 전도사들이 설 땅이 없다.

목사의 역할이 진리를 밝혀 나가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설교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한다. 주해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언은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오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을 들으러 오는 것이다. 설교란 예언인가 기술(art)인가?

두 가지 다다. 설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말씀에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히 설교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art는 박사 학위가 없다. science에 대해서는 학위를 줄 수 있으나 art는 무한히 발전하기에 학위를 줄 수 없다. 강직한 전도사가 설교하면 유혈이 낭자하다. 처음에 내가 그랬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숙달된 조교처럼 지금은 조금만 찢고 반드시 꿰맨다. 그러니 옛날보다 art에서 차이가 난다. 설교는 성경 해석을 들으러 오는 것도 철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온다.

설교의 유형과 목회

깊은 관계가 있다. 설교는 수술과 같다. 목사는 설교로 수술을 한다. 그러기에 목사에게는 예언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설교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본문 접근 방식에 있어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제목 설교

구체적인 체계가 있다. 자기 안에 지식이 있다. 성경 한 구절을 발판으로 해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진리를 밝혀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화 등의 주제를 가지고 성경 전체를 꿰뚫는 것이다.

장점으로는 어떤 주제에 대해 성경 전체적인 깊이를 볼 수 있고, 포괄적으로 여러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점으로는 일반 목사들이 이런 지식 체계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개 교수님들의 설교가 제목 설교가 가능하나 일반 목사님들은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기가 어렵고 늘 연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설교가 고갈되기 싶다. 설교가 아니라 강의가 될 가능성도 많다. 설교 안에는 천둥과 번개가 들어 있어야 한다. 천둥소리가 나야 한다. 설교자의 취향에 따라 편중될 가능성도 많다. 기장측 교회가 침체되는 것은 너무 사회문제에 관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 설교는 침체될 가능성이 많다. 청교도 설교나 교수들의 설교가 이런 유형이다.

영국에는 청교도 설교가 없다. 청교도 설교가 교리 설교다. 원래 칼빈에게는 교리 설교가 없다. 퍼킨스부터 교리 설교가 되면서부터 그 뒤로부터 설교가 교리 설교가 되었다. 저는 차영배 교수에 대해 애정이 많다. 청교도에 대해 많이 연구한 분이다. 퍼킨스의 전집을 사신 분이다. 존 오웬, 존 번연이 전형적인 교리 설교자들이다. 오늘날은 이미 성경신학이 많이 발달했기에 예언적인 말씀을 듣는 것이 시급하다. 완전히 청교도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2. 본문 설교

대지 설교. 내용을 경건 서적이나 예화를 가지고 행한다. 우리 나라의 강해설교는 실제로 본문 설교다. 자기가 본 책이나 경건 서적 예화에서 실지로 설교를 행한다.

장점은 설교하기가 쉽고 성경적이고 은혜스럽다. 교회가 부흥하려고 하면 성장하는 교회는 대개 본문 설교를 한다.

치명적인 약점은 설교가 자라지 않는다. 일종의 짜깁기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 재료나 예화가 떨어지면 설교가 고갈되어 버린다. 처음에는 열정으로 설교를 했으나 그 이후로는 설교할 내용이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스타일을 바꾸기 어렵게 된다.

어렸을 때 겨울밤이 굉장히 길다. 지금 목회자들이 바로 이 문제에 빠져 있다. 이 긴긴밤을 어떻게 지새울지 모르고 있다. 30대 초반에는 여러 자료를 참고해서 설교를 만들어 냈는데 좀 지나고 나면 모든 설교의 내용이 같아져 버린다. 왜냐하면 Source가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3. 강해설교

대지만이 아니라 내용이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안에 논증과 설득이 있다. 어린 사람은 이야기만 하면 설교를 듣지만 어른들은 반드시 설득을 시켜 나가야 한다. 이야기하고 그것을 논증시켜서 설득시켜 가는 것이다. 로이드 존즈의 설교에 대해서 logic and fire라고 할 수 있다. 논증은 굉장히 중요하다. 성경 자체가 굉장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 논리를 알려면 주해 설교를 5년 정도 해야 한다.

주해 설교와 강해설교의 차이점

주해 설교는 한 자 한 자 설명한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주해 설교는 강해설교의 기초가 된다. 주해 설교를 5년 정도 하다보면 맥이 잡힌다. 맥이 저자의 의도이다. 한 자 한 자 설교하지 않는다. 논리가 바로 숲이다.

그래서 강해설교는 preaching with purpose다. 여기 의도는 저자의 의도이다.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필드에서 만들어진다. 유학을 갔다가 온다고 해서 설교가 되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저자의 의도가 안나오는데 추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단점으로 저자의 의도를 아는데 오래 걸린다. 주해 설교를 충실히 했을 때 5년 정도 지나면 맥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5년은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장점으로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는 확신이 있다. 그러므로 권위가 있다. 설교 고갈이 없다. 설교하면 할수록 예리해진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는지 모른다. 성령이 놀랍게 그 공동체 필요한 것을 드러내 주신다.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드러난다.

한국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굉장히 갈급해 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가 가장 강력하게 역사 하는 것은 설교다. 설교만으로 불같은 역사가 일어난다. 설교만으로 계속 불같은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 강해설교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이 있다. 조금 입장의 차이가 있어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1. 일단 강해설교라고 할 때 로이드 존즈를 생각하게 되는데 로이드 존즈의 강해설교는 교리적 강해설교이다. 로이드 존즈는 일단 본문에서 교리를 찾고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식으로 설교를 한다. 주로 청교도의 설교가 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1절로도 여러 번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가지고 14년을 설교했다. 영국 사람들은 논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 사람은 예화 설교를 좋아한다. 지금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워낙 생활이 다원화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적실하게 적용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2. 구속사적 강해설교가 있다. 구속사적 강해설교의 특징은 계시가 역사적으로 점진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행위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찾아야지 인간의 행위를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구속사적 강해설교의 관점이다. 그 이유는 화란이 재세례파 전통이 있고, 칼 바르트의 주관주의의 반발로 칼빈주의자들은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이루어 냈다. 30-40년대의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적 설교의 원리의 논쟁이 있었다. 시드니 크레이다누스는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지지하지 않는다. 구속사적 강해설교 원리는 구약을 해석하는 원리가 된다. 그러나 모든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역사적인 발전이 없는데도 역사적 발전을 찾고 하나님의 행위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행위를 찾는 것은 도식적인 것이 아닌가?

시드니 크레이다누스도 이 설교도 강의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다. 또 실제적으로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분들도 모범적 설교를 한다.

3. 귀납법적 강해설교 : 이동원 목사가 행하고 있다. 이동원 목사는 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에서 귀납법 성경 공부가 틀리다고 말한다. 귀납법적 강해설교라는 것은 상황에서 본문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방법론에 속한다고 나는 본다. 강해설교를 하게 되면 아주 상황에서부터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설교의 성숙에 따른 것이고 해석의 원리로 보기 어렵다. 이동원 목사는 어떻게 사람들의 상황을 아는가 하면 주로 베스트 셀러나 주간지를 본다고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케리그마적(교회론적)

성경은 구체적 공동체에 선포되는 말씀이다. 오늘 시대에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인가? 가 설교자의 과제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는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 20세기의 사람들에 주신 말씀이 아니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들은 이미 430년 이상 애굽에서 지내 온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신 개념은 완전히 범신론적 개념이다. 그래서 모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고 그 분을 섬기는 것이 그 분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라고 케리그마적 설교를 한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인가가? 케리그마적 교회론적 설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드니 크레이다누스와 존 스토트의 설교이다. 적용은 청중에게 맡기는 것이 스토트의 설교이다. 여기서 어려운 것은 그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배경에 대한 재료가 거의 없다. 본문을 가지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작업이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이것이 되어질 때 가장 유익이 많으며 어느 본문도 말씀할 수 있다.

이 방법이 가장 유익하고 안전하다고 말한다.

경건적 방법

큐티식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윌리엄 블랙 선교사다. 마산과 부산에서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저자의 의도를 찌르지 못한다.

설교 준비하는 과정

설교에 있어서 해석학, 설교 작성, 설교 전달을 들 수 있다.

해석적인 입장은 지금 이야기했고, 작성 부분에 있어서 기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 작성은 건축술이다. 설교할 때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설교 작성하는 작업은 철저한 공학적 작업이다. 열정만 가지고 준비하면 생각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집을 건축하려고 할 때 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구상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청사진인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재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뼈대 공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인테리어를 한다.

1. 설교에서 땅은 본문이다.

2. 구상은 무슨 의도로 설교하는가 하는 저자의 의도이며 이 의도는 설교자의 의도가 된다. 강해설교 준비하면서 나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점검하면서 준비해야 한다. 저자의 의도 없이 설교자의 의도만으로 설교하면 교인들은 상처를 받는다. 저자의 의도와 설교자의 의도를 대략적으로 종이에 적어야 한다.

3. 설계도에 대지, 서론, 결론이 나온다.

4. 재료는 본문 주해가 된다.

5. 뼈대 공사는 대지이다.

6. 인테리어는 설교 작성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 어려운 것이 주해이다. 그래서 실제로 설교를 준비할 때 이렇게 하지 않는다.

설교 할 때는

1. 본문 선택

2. 문단 나누기 : 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대지로 발전한다.

3. 주해한다(pre-note)

4. 저자의 의도를 추론한다. 설교의 목적을 작성한다.

5. 대지는 있는 것이 좋다. 바둑의 포석과 같다. 대지가 아주 안정적이고 본문에서 아주 안정적인 대지가 잡힐 때 설교가 발전한다.

6. 서론을 구상한다. 왜냐하면 교인은 내가 준비하는 본문에 대해서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설교 마치고 예화가 남는 것은 좋은 설교가 아니다. 서론은 계산해서 작성해야 한다.

7. 설교 본문을 작성할 때 주해에서 나온 것을 다 넣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

중요한 테마 4 개가 있을 때 이것을 연결시켜서 할 수 있다. 어린이 설교는 하나만 가지고 해야 한다. 두 가지 사상과 테마를 가지고 설교하면 애들은 떠들게 된다. 청소년 설교도 어른이나 청년하고 틀려서 가급적 테마를 줄이는 것이 좋다.

오랜 연습과 훈련 끝에 태어나는 것이다. 설교는 검법이다. 이 검법은 달빛에서 수십 번씩 연습을 해야 한다. 대단한 설교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하루 빨리 성공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대 설교자가 나오는 좋은 방법은 자기 필드가 있어야 한다. 청년부, 중고등부, 개척 교회에서 충실히 주해 설교를 계속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설교는 질이 많이 떨어진다. 설교보다 프로그램이나 반짝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다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성경 가지고 자기가 만들어 내야 한다. 신학은 밥짓는 방법이다. 교회는 밥을 떠 먹여 주어야 한다. 자기가 설교를 해보고 꾸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 가면서 준비해야 한다. 설교가 제대로 되면 교회를 개척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저희 교회도 오랫동안 부흥이 되지 않았다. 마치 5년 동안 모래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너무 교회가 커질 때 잃어버리는 것은 공동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이 케리그마였다. 이것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혜서가 어렵다. 지혜서는 모음집이기 때문에 케리그마적으로 좀 어렵다. 계시록을 케리그마적으로 설교 할 때 문제가 없었다. 설교는 막 준비해서가 안되고, 공학적인 준비이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성경 해석에서 있도록, 설교할 때 기름 부음이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질문 : 설교할 때 작성하는 데 얼마나

옛날에는 7시간 걸린다. 지금은 많이 짧아졌다. 본문에 뛰어들어가고 생각을 구체화하고 하는데 짧아졌다. 여러분은 10-11시간 걸려야 한다고 본다.

본문 선택의 문제에서 할 얘기가 많은 본문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며, 성경책을 선택하는 순서는? 어떤 계획으로 성경책들을 선택하십니까? 청중의 문제로 강해설교는 서울 부자에 맞는 설교라고 한다. 농촌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층이 문제가 되는데.

로이드 존즈 목사가 연속해서 본문 강해 한 것이 베드로후서다. 전도사 생활 20년 이후다. 본문 설교는 완전히 지뢰밭이다. 해석이 안돼는 부분이 엄청 많다. 특히 대사이나 노인이나 청소년일 때 연초에 설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본문, 제목들을 시리즈로 4개 이상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고문이다. 일종의 정신적 폭력이다. 노인들에게 있어 이사야, 아모스의 정의 구현을 말하는 것은 부정적이다. 예언된 나레이티브로 하는 것이 좋다. 좋은 강해설교를 접하면 좋겠다. 로이드 존즈는 너무나 교리적이다.

좋은 강해설교집으로는 정근두 목사, 이동원 목사 등을 접했으면 좋겠다. 청중들을 분석해야 한다. 청중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는 주일 오전에 복음을 설교하고 오후에는 교리적인 것을 하고 수요일에는 구약을 설교한다. 본문 선택은 청중들과 호흡하면 되겠다.

중고등부에 주해 설교를 했다. 침체된다고 할까 그랬는데?

침체되었다고 해도 은혜 받은 사람이 있다. art가 부족해서 그렇다. 나는 결혼식 설교도 강해설교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