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다양한 패턴
정인교
1. Puritan Plain Style
1) 일반적인 이해
국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주로 해안 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며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청교도들이 북미의 첫 번째 이주민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들이 도시를 형성한 곳에는 그 도시 중심에 회중 교회가 위치하였는데(Congregational Church) 그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봉화 혹은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천명하였다.
청교도주의는 주로 17세기에 일어난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의 특징은 보편성을 들 수 있다. 즉 모든 남녀는 전쟁터로 부름을 받았는데 우선은 자기와의 전쟁이며 나아가 미국인들의 야만성으로까지 퍼져나감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청교도라 함은 그 언어 상 "크리스천들의 미국"을 의미한다.
이들의 설교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들 설교의 길이는 대략 60-90분에 이르렀고 성도들은 그들의 생애동안 대략 7000편의 설교를 들었으며 15000시간 가량이 설교 듣는데 소용되었다. 이 시간은 오늘날 대학에서 10개의 학사학위를 받는데 소용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학력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설교를 통해 그들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공공의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설교는 경쟁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다양한 현대적인 매스미디어들이 정보의 홍수를 경쟁적으로 쏟아 놓는 것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회중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유일하게 진단을 내놓는 권위적 매체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심지어 선거일의 경우 다음 주일까지 가장 중요한 행사이지만 그럼에도 정치가들의 합동 연설보다는 지역 교회 목회자의 선거 설교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설교는 삶, 죽음, 영원 등과 같은 종교적인 주요 주제에 대한 답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특별한 날이나 절기(행사) 설교등에서는 현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청교도 설교는 당시로서는 예언자이자, 신문, 비디오, 광고, 회중대학, 개인적인 치료자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대개의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명과 요구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조용히 경청하였다.
이들의 설교방식은 주로 Text로부터 Doctrine, 적용으로 진행하였고 영국 교회 설교에서 유행하던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판에 박힌 상투적인 인용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명사들의 말이나 단순한 견해들도 피하였다. 대중적인 지지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주력하였다. 주일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공적인 예배의 날이었다. 설교자들은 특히 설득의 기법등 수사학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으며 영국의 대학들 그리고 후에는 하버드와 예일 등에서 주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이들의 훈련 커리큘럼은 프랑스인 Peter Ramus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는 모든 지식(성서를 포함하여)을 대중적 의사소통에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눈에 그리듯이 묘사하였으며 그리스도안에서의 개인적인 구원을 칼빈 신학적 입장에서 가르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번영에 대해서도 설교하였다.
2) 설교 스타일의 이해
Plain이라는 단어가 명시하는 대로 이들의 설교스타일은 단순 명료한 설교였다. 이 설교 스타일이 지향하는 것은 가능한 한 회중들로 복음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복음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 설교스타일의 목적이었다. 이 스타일의 구성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서론(Beginning) -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Exposition of the Biblical Text) - 본문에 대한 신학적 분석(Theological Analysis of the Text) - 회중들의 상황을 향한 해석된 본문에 대한 적용(Application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Text) - 결론(Ending)
이 스타일에서는 기독교 교리와 실천문제 그리고 다른 주제들도 다룰 수 있다. 즉 본문 해석 부분에 교리, 실천 혹은 주제의 해석을 대치할 수 있다. 또 신학적 분석에도 교리 실천 혹은 주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3) 스타일 구성 각 요소의 설명
a. Beginning - 이 부분은 회중들이 설교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조력한다. 이때 설교자는 설교의 방향을 간략히 언급할 수도 있다. 이러한 언급은 회중들에게 설교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한다.
b. Exposition of the Biblical Text, Doctrine, Practice, or Topic
이 부분에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간략하게 본문, 교리, 실천, 혹은 다루려는 주제에 대한 주석을 제공한다.
c. Theological Analysis
이 부분에서 설교는 본문이나 교리, 실천 혹은 다른 주제의 신학적 주장들을 복음의 관점으로부터 신학적으로 숙고한다. 즉 본문의 증언이 복음에 적합한가? 이해할 수 있는가? 도덕적인가? 설교 회중들이 설교의 주제에 대해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d. Applying
설교자는 이 부문에서 설교자가 전한 본문, 교리, 혹은 주제가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회중의 이해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e. Ending
설교자는 회중들이 설교에서 출발한 대화를 지속하도록 조력한다.
때로 몇몇 설교들은 이 스타일을 따르면서도 신학적 분석을 생략하기도 한다. 만일 본문이나, 교리 혹은 실천이 복음에 잇닿아 있고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면 곧바로 주석에서 적용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4) 스타일 평가
이 스타일의 설교는 회중들이 설교의 포인트를 잡는데 매우 유리하다. 이 설교는 준비하기에도 수월하다. 설교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야 하지만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 회중들이 복음의 함축적인 의미가 자신들의 일상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너무 사실적이고, 상상력부재 지루함을 더할 수 있다.
설교제목: 갈색과 녹색의 차이
설교본문: 렘 17: 5-8
설교자: Thomas Long
출 처: Ronald J. Allen(ed.), Patterns of Preaching(St. Louis, Missouri, Chalice Press, 1998), pp. 9-13.
(도입) 오늘 예레미아서에 나오는 예언의 지혜를 다룬 본문은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는 신앙의 삶과 우리 대부분이 쉽게 유혹 받게 되는 삶, 그 자신의 재주를 의지하고 세상의 방식에 기대는 삶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신앙의 사람은 그 뿌리를 강가에 깊이 내린 나무와 같도다. 불 신앙의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건조한 땅에 뿌리를 박고 건건한 땅 황무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도다."
여기 나오는 시적인 이미지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떨기나무 대 (물가에 심기운) 나무, 사막 대 오아시스, 바싹 마른 광야 대 비옥한 옥토! 그러나 예레미아의 관심이 시를 짓는데 있지는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영혼을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예언자로부터 나온 이 말씀이 참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이 시가 우리 경험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음으로서 입니다. 이 말씀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우리 손으로 그 시의 표피만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목구멍이 갈하여 확확 타오르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 갈함을 누그러뜨리려면 우리는 가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들 대부분은 가뭄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몇년 전 어느 여름에 37일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가뭄이라 불렀지요. 나는 이웃과 더불어 노란 반점을 긁으며 앞뜰을 거닐었고 야속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가뭄으로 인해) 우리는 일단의 백양목과 Zoysia의 토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빗물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간에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그럴 수 있었는데..." 그 이웃이 회상하며 말합니다. "우리 집 토마토가 다 말라죽었어요". 하지만 그런 다음 우리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집으로 피해 들어갔고 냉차를 잔 가득히 부어 마셨습니다. 가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미미합니다.
극장 매장 앞줄에 서 있던 한 소년이 팝콘 한 봉지와 소다를 주문했습니다. "어떤 크기의 소다를 원하지?" 점원은 알고 싶어합니다. "큰 것 주세요" 소년이 대답합니다. "목말라 죽겠어요". 목마름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설교의 방향에 대한 언급) 하지만 예레미아는 가뭄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레미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 팔레스틴에서 가뭄은 단지 뒤뜰의 토마토와 조이시아(Zoysia)의 잔디를 위협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작열하는 유대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분노를 대지에 쏟아 부으면 벌판은 금이 가고 말라비틀어집니다. 물탱크는 사포처럼 말라버리고 도시는 비탄에 잠기며 농부들은 부끄러워 그 머리를 가리우고 농작물은 말라죽고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고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폭염에 시랑 같이 헐떡입니다(렘 14: 2-6). 예레미아는 가문에 관해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단지 땅에 영향을 미치는 가뭄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또한 영혼을 괴롭히는 가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고합니다: 유다의 죄악이 철필로 기록되었도다. 그 죄는 바로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물론 우상숭배라 하면 성경 백과사전에서 일종의 표제어, 낯선 고대의 의식에 대한,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풍요를 나타내는 종교의식에 대한 그리고 돌과 나무로 만든 신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우상숭배는 우리와 매우 유사한 원천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충만하고 즐거운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갈구 말입니다. 유대백성들에게 그토록 매혹적이었던 고대 세계의 다산종교들은 풍요로운 삶 충만한 대지를 약속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어느 인생의 조그마한 즐거움마저도 놓치려 하지 않고 삶을 찬양하고 실존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려 하고 얼굴 가득 수분이 충만한 주스가 흘러내리길 갈망합니다. 매력 있게 보이는 값비싼 스포츠 카의 광고 카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당신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그 감탄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즐거움입니다".
물론 싫증나는 것을 타파하는 그 어떤 것, 감탄, 즐거움 흥분, 우리 얼굴을 스치는 바람, 이런 것들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바라는 것들입니다. 생명의 축배를 들고 온몸 가득 그것을 마시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습니다. 예술, 춤, 놀이, 웃음, 축제, 부드러운 접촉- 이 모든 것들은 풍성한 삶을 바라는 인간들의 열망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레미아는 준엄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 근본을 떠나 그릇된 길을 택하였도다. 우리에게 바로 그곳인 것처럼 보이는 것, 우리에게 즐거움의 장처럼 보이는 것, 우리에게 모든 삶의 만족을 충족시키는 분명한 길처럼 보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대가를 치러야 하고 심지어 생명을 위해서는 어리석은 길로 보이는 것 즉 희생적인 믿음의 삶은 진실로 곤고한 우리 여행자들이 갈구하는 윤택하고 즐거운 오아시스인 것입니다.
(신학적 분석) 수년 전 성서학자인 페더슨(Johannes Pedersen)이 팔레스틴의 지리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바로 이 버려진 조그마한 땅으로부터 세계 삼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나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페더슨은 이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곳의 주민들이 갈색과 녹색의 차이, 죽이는 사막과 살리는 오아시스의 차이 살갗을 태우는 건조한 바람과 그것을 치료하는 오일의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색과 녹색... 죽음과 삶 우리 스스로 의지함과 하나님을 신뢰함! 예레미아는 우리가 이 차이를 알기를 원합니다.
오래된 조크입니다: 랍비 한 분이 그의 임종을 앞두고 그의 곁으로 장남을 불렀습니다. "이삭아!" 숨을 헐떡이며 그가 속삭입니다. "내가 너에게 삶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구나". 이삭은 마지막 아버지의 지혜를 듣기 위해 자신의 귀를 떨리는 아버지 입술에 가까이 대었습니다. "이삭!" 연로한 아버지는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지난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영광의 곳으로 가는 다리 두 개를 내게 보여주었다. 다리 하나는 인간의 간계로 지어진 것이었어. 그것은 넓고 강하고 철과 돌로 만들었지. 두 번 째 다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토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좁고 무너질 것 같아서 건너기에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지. 그것은 모세의 수염을 꼬아 만든 것이었어. 내 아들 이삭아! 내 말을 명심하여라. 첫 번째 다리를 건너도록 하여라."
당연히 우리도 그리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안한 삶의 방식에 더 목말라 하고 배고파합니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국가적 자존심을 침해하는 사람을 징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마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무실에서 우리의 이익을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간계로 만든 다리를 선택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복음은 상식을 침해합니다. 사람의 눈에 생명처럼 보이는 것이 실로 죽이는 사막이라고 예레미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막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신앙의 길이야말로 참으로 초록으로 뒤덮인 즐거움의 초원입니다.
1931년 중서지역은 엄청난 밀 풍년을 경험했드랬습니다. 돈이 넘쳐났고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농부들은 땅과 기계들을 샀습니다. 바보 빼놓고는 대지의 풍요가 지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후에 그곳 농부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분위기는 가히 열광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분위기가 영원히 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해 그곳에는 비가 조금밖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해가 바뀌어도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비옥한 땅은 점차 황폐하게 변해 갔습니다. 그 유명한 1930년대의 미국 서부의 대평원지역 이야기입니다. "1936년의 여름은 지금까지 가장 더웠던 날씨를 기록했습니다"라고 오클라호마의 농부인 로렌스 스보비다(Lawrence Svobida)는 말했습니다. "수백 마일의 피폐한 들판에는 불가마속의 화염 같은 태양광선이 작열했습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거대한 용광로로부터 나오는 열기 같은 바람으로 인해 내 얼굴에는 수포가 생겼고 피부가 벗어졌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고난으로 연단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가느다란 끈이 끊어질 때 어떤 말로도 그 경험을 기술할 수 없습니다. 나의 젊음과 야망은 바로 그 먼지 자체 속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적용) 아마도 예레미아는 사람들의 젊음과 야망이 어떻게 먼지 속으로 곤두박질 쳤는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을 것이라." 그러나 예레미아는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 그들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을 것이라.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가뭄 가운데도 그 잎이 청정할 것이라." 갈색과 초록 사이의 차이입니다!
웨인(Wayne)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시의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시설에 살았습니다. 웨인은 심한 심리장애를 갖고 있어서 어떤 직장도 잡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무능력자를 위한 보조비를 받을 만큼 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서부 지역을 배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웨인은 (거기서) 녹색지대 일종의 오아시스를 발견하였습니다. 웨인은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예배와 성찬 그리고 모든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교회 밖에서 배회할 때 나는 집없는 부랑아였습니다. 내가 교인들과 함께 지낼 때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웨인에게 교회와 신앙생활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즉각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내 생명을 구했습니다". 웨인은 예레미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웨인은 복음의 아이러니를 압니다. 풍성하고 즐거운 삶을 만드는 진리는 삶을 세상 지혜의 유리한 점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부터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인 그리고 그를 귀하게 여기는 교회 성도들은 갈색과 녹색의 차이를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낮아지는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국에서 방황함 가운데 가정에서의 복락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깨달은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사막의 먼지를 맛보았다면,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꼈다면 그리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상실과 고통으로 인도하는 길을 걸어보았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 희망의 지평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민속 예술 뉴욕 박물관에서 1981년에 죽은 리졸리(A. G. Rizzoli)라는 한 이름 없는 샌프란시스코 출신 화가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한 탁월한 사촌이 아니었다면 그의 작품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었을 것입니다. 리졸리는 소심했고 내향적이었습니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는데 낮에는 제도공으로 일했고 밤에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는데 주로 어머니 하나님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히 대했던 몇몇 사람 등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리졸리는 자기 방에 자신의 작품들을 배열해 놓고 이웃들을 초청해 그것들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손수 만든 전시회 알림장을 이웃들에게 빠짐없이 돌렸습니다. 하지만 이웃들은 자기 생업에 바빴고 따라서 단지 몇 명만이 시간을 내어 방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서 자기 이웃에 사는 이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리졸리의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의 작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프랭크 리치(Frank Rich)는 New York Times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먼 훗날 그 그림과 더불어 숭고하게 간직될 것이다 - 비록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그 자체의 사적인 보상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고독은 없다'라고 그는 방명록에 기록하였다." 사랑은 고독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앙은 열정보다 더 오래 갑니다. 갈색과 녹색은 다릅니다.
(종결) 예레미아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복음을 다시금 듣기 원합니다. 한낮 더위에 기진 한 인생을 사는 분들에게 하나님은 회복과 휴식의 그늘이십니다. 무의미의 갈증에 목말라 죽어 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샘물이요, 사막을 생명의 초원으로 만드는 단비이십니다. Dust Bowl의 한 농부가 이렇게 외칩니다. "마침내 비가 내렸을 때, 그것은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당신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빗속으로 뛰쳐나가서 지금 당신의 얼굴에 빗물이 와 닿도록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비를 맞았을 때 그것이 너무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던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헛된 소망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색과 녹색의 차이입니다.
2. 절 따라 설교하기(Preaching Verse by Verse)
이 설교 방식이 처음 등장한 것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을 기록했던 공동체에서이다. 기독교가 생성될 즈음 이미 많은 유대교 랍비들이 이 방식을 채택했다. 오리겐(Origen 185-253 C. E.)은 기독교의 설교자 가운데 이 모델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후 이 방식은 기독교 설교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절 따라 설교하기"라는 명칭은 그리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설교자는 본문을 중요한 단위를 따라 취급한다. 때로 이 단위들은 영어의 운율을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단위에는 한 문장 혹은 심지어 둘 내지 그 이상의 절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장면(scene)까지도 빈번하게 포함되기도 한다. 때로 성경 본문이 구구절절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경우에는 구를 따라 혹은 심지어 단어 단위로 취급되어지기도 한다.
이 방식의 설교에서는 본문에 대한 역사적 문자적 혹은 신학적 정황을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함을 통해 회중들의 이해를 도우며 시작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 설교의 핵심은 해석학적인 석의를 곁들여 가며 본문을 주석하는 것이다. 설교의 도입부 다음에는 오늘의 세계와 성경 시대를 빈번히 오가며 설교가 진행된다. 설교자는 본문의 한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 부분과 회중의 세계를 해석학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런 다음 설교자는 본문의 다음 부분으로 이동하고 그 부분과 회중을 해석학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런 패턴은 설교가 본문의 전 부분을 다룰 때까지 지속된다.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교자는 회중들로 전체적인 주해와 해석학적인 숙고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도록 조력한다. 설교자는 너무 상세하게 본문을 다룸으로 회중들이 혼란스럽게 되는 것을 피하면서 본문의 큰 그림을 분명히 인지하도록 돕는다.
이하에 나오는 설교에서 설교자 크래독 교수는(Fred Craddock) 먼저 본문의 핵심 주제인 기도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설교의 실제
제목: 주님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소서
본문: 눅 11: 1-13
설교자: F. Craddock
(1절) 이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순간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할 때 때 그들은 - 그들 중의 13인은 -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그 자리를 떠나나요? 한쪽 눈을 감습니까? 여러분이 거기 없었으면 하고 바랍니까?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무시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하는 삶을(이것은 누가가 우리를 주목시키는 모티브입니다) 지속해 가야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는 기도를 제자들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하길 원치 않습니다. "주여 이 따르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로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는 복음적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한다든지 남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길 원해요, 그런데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질 않아요, 그럴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흔히 레스토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나는 식사하기 위해 외출할 때마다 기도하길 원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놓고 타협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위협 당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와 아내는 저녁 식사에 한 부부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알게 된지가 얼마 안되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들을 좀 더 알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라는 그들의 제의에 저는 "물론입니다" 라고 흔쾌히 응했습니다. 그는 찻잔에 설탕을 넣은 뒤 그것을 여러 번 저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계속해서 네프킨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기도 혹은 그 무엇인가를 하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피자 헛에 있었습니다. 내 뒤 테이블 뒤에 있던 한 노인이 매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주여 이 음식을 우리 몸에 축복하소서 그리고 우리로 당신께 봉사하게 하소서 아멘." 피자 헛에서 말입니다. 나는 토르티야(멕시코 요리)의 절반을 손수건에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기도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마는 그러나 글쎄요. 피자헛에서의 기도라...
바로 이런 당혹스러움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통상 예수는 자신의 어려움을 사막이나 혹은 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해결하셨습니다. 때로 그는 한밤중에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때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벳세다 가까이에 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나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은 다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무리를 대표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기도하는 그런 기도를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기도는 아주 특별한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2절 상반절).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경박하고 아무렇게나 말한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히 여김을 받고... 성스럽고... 영화롭고...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1세기의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유년 시절에 어머니는 저녁 불빛 아래에서 우리와 함께 단어놀이를 하곤 하시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음성 철자법(phonic spelling)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의 철자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oviparous, ovoviviparous, hypotenuse등의 어려운 단어들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언젠가 나는 asafetida(아위: 미나리과에 속하는 아위에서 채취한 천연 고무 수지)라는 단어의 발음 및 철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한 단어만큼은 결코 목록에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어머니는 이 단어를 결코 목록에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2절 후반절)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 마음에 있는 모든 비참하고 이기적인 요구들을 제하여 버릴 것입니다. 이 불타는 소망은 다른 모든 가치들을 여러분 삶으로 연결시킬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삶, 사람 사이, 국가 사이 그리고 그밖의 모든 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 그것은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 같은 가치들을 여러분과 연결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깨어있는 생각과 연결시킬 것이고 또 잠자고 있는 생각과도 연결시킬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것이 새로운 트렁크(new luggage)를 위해 혹은 니만-마르쿠스(Nieman-Marcus) 입구 가까이에 주차장이 생기길 위한 기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가 저절로 바람이 가득 차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카리브해 여행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3절) 예수님은 바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위임된 것이 소박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기아선상에 있는 세계를 향한 여러분의 첫 번째 선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 가운데 나의 먹을 것 이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하는 것 말입니다.
(4절 상반절)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운데 삽니다. 심지어 우리가 선을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충돌하고 다치게 하게 상하게 합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기도 하고 피차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용서가 필요합니다.
(4절 후반절)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 잘 압니다. 만일 여러분이 작은 일 조차 조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엄청난 종말론적 전투에서 마지막 유혹과 시험에서 우뚝 설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나는 내가 그리 할 수 있을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기에 심지어 목사님들 중에도 유혹에 굴복한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단 말이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이것은 매우 간결한 기도입니다 마는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5-8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분이 친구가 있어요. 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갔어요 왜냐하면 친구 하나가 여행 중에 들렀는데 줄 것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빵 좀 빌려주게 빵이 다 떨어졌네 손님으로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은 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자 집안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밤이 되어 이미 집 문을 닫았고 빗장을 내렸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막내는 세시간을 칭얼대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네. 문 두드리는 것을 삼가해 주게. 만일 자네가 아이를 깨우면 자네가 아이를 다시 잠들게 해야 할거야. 제발 부탁이니 떠나주게." "하지만 보라구 나는 빵을 얻어야 한다니까." 방방방! 집안에 있는 친구가 생각합니다. "이 친구 정말 곤란하게 하는구먼. 에라 빨리 빵을 좀 주어서 저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워야지."
(9절) 만일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문에서 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먹에 피가 흐르도록 잠긴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려 보기 전에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압니다. 아하: 구하라 ... 찾으라... 두드리라.
(10-13절) 그러나 기도가 여러분을 낙담시키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여러분의 신뢰 가운데 흠뻑 적셔질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아이가 와서 계란좀 주세요 하면 여러분이 전갈을 줍니까? 아이가 와서 아빠 빵 좀 주세요 그러면 그 아이에게 바위를 줍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주실 것을 믿는 겁니다.
(주석의 의미를 풀어내기)
왜 그들이 지금 예수께 와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여러분이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이 기도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야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언젠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성령께서 다가오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학교에 갔을 때 오스본 박사가(G. Edwin Osborn) - 그의 기억력을 축복하소서 - 우리에게 기도를 써보라고 시켰습니다. 기도를 쓴다구? 만일 여러분이 나처럼 테네시의 후미진 뒷골목 출신이라면 여러분은 기도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쓰게 되면 마음 깊이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쓰여진 기도는 진지하질 않습니다." (크래독은 강대상을 두드립니다) "오스본 박사님 제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기도를 기록하여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단지 방해가 될 뿐입니다. 내 생각에는 기도란 자연발생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으로 기도를 준비하게 하시진 않을까요? 성령께서 연구 중에 있는 당신과 함께 하신 않을까요?"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우리의 대화 끝나갈 무렵 나는 좀 머쓱해 지면서 내 생각이 변해갔습니다.
이제 나는 기도를 준비하는 것이 성령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는 자연발생적인 기도가 성령을 훼방한다고 믿습니다. 자연 발생적으로 나는 단지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행하도록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그리고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자연발생적인 것은 이러한 것들을 방해하는 방법을 나에게 제시합니다.
사도들은 한 작은 실수를 경험했는데 바로 즉석 기도가 그것이었습니다. 거기 한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가는 아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세 명과 함께 변화산에 계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요청합니다: "내 아이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그 아이를 도와 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로 기도로 전환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나는 필립 세미나리의 학장으로 봉직했었습니다. 그 기간은 대략 15개월 가량 됩니다. 그 기간은 15년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비서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학장님을 뵙고자 하는데요." 부인 하나가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요청을 했습니다. 나는 좀 귀찮기는 했지만 그 부인을 따라 주차장에 있는 그녀의 차로 갔습니다. 그녀가 차 뒷문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녀의 남동생이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오클라호마 대학 4학년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다 부서진 차에 있었습니다. 그는 8개월 동안 혼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교선생인 자기 직업을 그만 둔 채 그를 돌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가진 돈도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동생을 고쳐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과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병고치는 은사는 없습니다." 그녀는 핸들을 잡더니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차를 몰로 떠나버렸습니다. 내가 그 날 오후 한 일이란 내 서재로 들어가... 책을 뚫어져라 보면서 그녀가 한 말을 잊으려 애 쓴 것뿐입니다.
제자들은 또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성공은 보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을 내쫓았고 모든 이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달려가서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한 일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진정해라. 너희들이 성공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너희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성공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일이 있기 직전에 그들은 누가 큰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세상에나! 아마도 그들이 기도에 대해 배우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미구에 그들 무리에게 닥칠 죽음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매 맞는 존재가 되고 고난 당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질 않았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마도 그들은 예수로 인해 발견한 삶의 커다란 환희에 압도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삶이 정상적으로 가지 않고 만사가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에 압도당했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 아이 엄마가 간호원이 그녀에게 갓 나은 아이를 데려왔을 때 바로 이 방식을 이야기했는데 그 아기는 손가락에서 발가락까지 지극히 정상적인 아기였고 무척 건강했습니다. "아 참으로 멋진 아기군요" 의사가 말합니다. 후에 그 아이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내가 기도하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당신은 감사해야할 누군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이 사실을 잊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마치 독수리처럼 사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천장을 빙빙 돌고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돈 많은 사람이 파산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들은 건강한 사람이 병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성직자중 많은 이들은 건강하고 부자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잔뜩 겁을 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장을 선회하면서 말합니다: "지금은 많은 일들이 다 잘되고 있는 듯 합니다마는 그러나 이 좋은 날들 가운데 하루는..." 우리는 망각합니다. 단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만이 기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위해 시상대 중앙에 우뚝 선 젊은 여성 역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정원에서 더듬거리며 신문을 읽고 있는 노인만이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힘이 넘쳐나는 젊은이 역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체국 창구에서 몸을 구부린 채 "수표가 오늘 도착합니까?"라고 묻는 노인에게만 기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돈 많은 부자에게도 기도는 필요합니다. 추월선이든 주행선이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글을 모르는 분이든 지금 막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분이든 우리 모두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바로 이 불가사의한 삶의 기쁨에 압도되었던 듯 합니다. 그들이 고기나 잡고 있을 때에는 그런 삶을 향유하리라는 것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정확한 이유를 잘 알지 못합니다마는 어쨌든 그들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예수께 왔고 그리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의 사안들이 제자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잘 압니다. 그들은 선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을 안내하고 정돈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배에 태우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나아갔습니다. "좋아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 계신 그곳에 가만히 계신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집에 없으면 작은 쪽지를 칸막이 벽에 끼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선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압니다. 여러분들은 여러해 동안 교회에서 봉사해 왔습니다. 주일 저녁에는 젊은이들과 함께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여러분은 한 반을 맡아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분은 저녁 친교의 만찬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때때로 만찬이 무산된다든지, 젊은이들이 가버린다든지 아니면 모임이 끝나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야 할 다른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오직 한가지만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제단에 엎드리기를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길 원합니다... 좀더 깊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좀더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이것이 그들이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그들의 이런 요청이 그들의 첫 번째 기도였다는 사실을 - 아마도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3. 정-반-합 방식(Thesis-Antithesis-Synthesis)
1)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이해
이 방식은 철학자 헤겔(G.W.F. Hegel 1770-1831)의 변증법적 사고를 설교의 패턴에 적용한 것이다.
헤겔의 철학체계란 절대자로서의 이성이 여러 영역에서 그 자신을 전개하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절대자로서의 이성의 자기 실현과정에는 일정한 법칙이 적용되는데 그 법칙이란 상호부정과 그것의 부정 또는 상호소외와 그것의 지양이라고 집약할 수 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의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 즉 존재(Sein) 무(無 Nichts) 생성(Werden)에 대해 알아야 한다.
(1) 사물들에 대해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또한 존재는 어떤 특수한 사물에 논리적으로 우선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원래 특징들이 없는 것의 규정 혹은 형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라 부른다. 이것이 정립(定立)이다.
(2) 순수 존재는 추상개념이므로 그것은 절대로 부정적이다. 즉 존재의 개념은 전적으로 무규정적이므로 그것은 비존재의 개념으로 변한다. 이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와 비존재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요지는 무는 존재로부터 추론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의 개념으로부터 무의 개념을 추론해 냈다.
(3) 존재로부터 무로의 정신의 운동은 세 번째 범주 즉 생성을 생산한다. 존재가 이미 언급된 이유로 인해 무와 동일한 것임을 정신이 이해할 때 생성의 개념은 정신에 의해 형성된다. 생성은 존재와 무의 통일 또는 하나의 관념이라고 부른다.
헤겔에 있어 변증법이란 지각 경험을 따르지 않고 개념을 분석하여 사리를 연구하는 법(dialectics)이다. 헤겔은 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우주를 하나의 생성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 과정을 추진하는 원리가 곧 절대자로서의 이념이다. 이 이념이 발전할 때 3단계로 발전한다:
a. 제 1단계는 이념이 자기 자신의 상태에 있는 단계이다. 그 자신 속에 있는 발전의 요소, 모순의 요소를 내포하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 이 단계가 즉자(卽自)의 단계이다. 이를 정(正) 혹은 긍정이라고도 한다.
b. 제 2단계는 이념이 발현되어서 제 1단계에 대해 대립되는 상태가 된다. 이것이 대자(對自)의 단계이며 반(反) 또는 부정(否定)이라 한다.
c. 제 3단계는 제 1-2단계의 모순과 대립이 지양(止揚/aufheben)되어 종합되고 통일된 새로운 고차적 단계인데 이를 즉자대자(卽自對自)의 단계라 한다. 보통 합(合) 또는 부정의 부정이라 부른다. 이처럼 제 3단계 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합이 다시 정이 되어 반, 합의 순서로 또다시 발전해 나간다. 즉 정의 단계는 다시 그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반으로 지양되고 반이 다시 지양되는 과정을 거쳐 합에 이르면서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오른다는 생각이다.
2) 설교패턴으로의 전용
이 패턴은 명제-반명제-합명제라는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설교를 구성한다. 각 부분은 변증법적인 움직임을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이 움직임은 명제로부터 시작해 반명제 그리고 합명제의 순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뒤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설교의 흐름이 반명제로부터 시작하여 명제와 합명제의 순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가장 단순한 패턴은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명제란 다루려고 하는 하나님 성경 그리고 세계의 측면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반명제는 명제에 대해 대립하는 것으로 왜 명제가 옳지 않은가를 천명한다.
강한 대립의 경우 반명제는 명제에 대한 상응으로 명제에 대한 반대 주장을 제기한다. 그러나 좀 유순한 경우 반명제는 명제의 부적합성을 제기하든지 혹은 명제의 적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취한다.
합명제는 명제와 반명제 양자의 조화와 화해를 도모한다. 합명제는 명제가 옳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고 반 명제에 의해 제기된 의문에 대해 해답을 제공한다. 또 반명제가 명제를 새롭게 구형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 명제와 반명제를 초월하는 토론하에 모티브에 대한 해석을 분명하게 한다.
이 방식은 인간 경험과 기독교의 전통이 상호간 갈등을 빚는 경우에 특히 유용하다. 동시에 다루려는 주제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 유리하다. 회중의 입장에서는 설교자가 다루려는 논지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이 방식은 결국 귀납적 흐름을 탈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흐름은 회중들로 설교에 대해 흥미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3) 설교의 실제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
본문: 롬 1: 16-17
설교자: James Henry Harris
(반명제) 내가 볼 때 과거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 본문은 일관성 없이 중구난방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사실 로마서 전체는 일종의 미스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그리고 신학과 목회에 진력하는 내 동료들도 해석하기 힘든 그런 미스테리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15년 간 제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복음과 얼마만큼 씨름했는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더욱이 부끄러운 것은 이런 씨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사고와 행동에 있어 어떤 명확함이나 심원함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저는 이 본문과 관련하여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부끄럽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내가 복음을 확신합니다" 혹은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입니다. 본문은 각 개인의 삶 가운데 역사 하시는 주님의 능력과 일하심에 대한 공적인 증언입니다. 이것이 왜 지금 제가 유년시절에 있었던 부끄러움에 대한 나의 이해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었던 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959-60년 어간 성탄절이 막 지난 즈음에 발생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급우들 한사람씩 일어나서 성탄선물로 무엇을 받았는지에 대해 발표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나는 몹시 곤혹감에 휩싸인 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른 급우들과 나를 비교함에서 오는 자존심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버지니아 주립대학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같이 학교에 다녔던 급우들의 부모님들 중에는 교수, 물리학자 그리고 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지금까지 내가 들어 본적도 없는 선물들에 대해 끝없이 늘어놓는 아이들의 자랑을 들으면서 저는 제가 받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은 제가 받은 선물이 탄력 있는 수지 재질로 만든 공기가 채워진 단순한 환(環) - 일종의 펀칭 볼 - 이었고 게다가 그마저도 제 남녀 동생들과 함께 사용하여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제가 성탄절에 받은 것에 관해 전체 급우들에게 이야기하라고 요청하셨을 때 저는 말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제 침묵은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참으로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마는 선생님은 지혜롭지 못하게 저로 하여금 한쪽 구석에서 하루 종일 벽을 보고 서있게 끔 등을 떠미셨습니다. 그것은 제 생애 가운데 가장 긴 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살아오시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셨던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과거 제가 부끄럽게 느껴졌던 일들이 회상되곤 합니다. 이 기억들은 비록 그것이 잠재의식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저의 총체적인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다수도 부끄럽다고 느낄 만한 많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명제) 아마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성경속에 있는 가장 강력한 단어들을 열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로마서 전체가 저에게 매우 흥미를 돋우고 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겉으로 그리도 강하고 자극적인 단어 이면에 위로와 기쁨의 말씀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모질고 뒤엉킨 논쟁의 언어 이면에 단순한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단어, 제가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 저에게 말씀하시던 그 말씀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얻기 위해 애쓰는 그 이상(理想)을 나타냅니다. 거들먹거리는 지적 편중과 불 신앙의 배경에 대해 맹폭을 퍼붓는 이 단순한 말씀은 일종의 신앙의 대담한 단언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전파되는 상황을 이해할 때 우리는 바울이 말한 "너희 얼굴 보기를"이라는 바울적인 단언의 대담한 특질을 파악하게 됩니다. 로마는 일종의 닳고닳은 도시, 왜곡된 자만심과 부(富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는 수많은 신들과 지적 호기심 그리고 문화로 유명했습니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 도시에서는 자기의 신앙에 대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구원과 구속에 대해 예수의 이름에 대해 일절 말하지 말도록 하는 엄청난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유대인이 구원자라는 사실은 닳고 닳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세계의 수도인 이 도시에서, 자유주의의 피난처인 이 도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침묵하고 잠잠하도록 유혹하는 이곳에서 이미 교회를 출범시킨 이 소수의 용감한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고 매맞았으며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믿는 믿음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이러한 철학과 신학의 한 복판에서 바울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우리는 여기 버지니아의 리치몬드 시에 있습니다. 이전 남부 연합의 수도였고 지금은 버지니아 콤먼웰쓰(컨터키, 메사추세쓰, 펜실베니아 버지니아 4개 주의 연합체를 지칭)의 수도 말입니다. 영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모두가 열망할 당시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남부의 정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워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는 흑인 노예를 사유재산화 하는 제도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 자신의 독립을 확립하기 위해 자유와 정의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 도시는 54년경의 로마와 아주 비슷합니다: 문화의 공간이지요, 유명한 대학들의 산실이지요, 교육, 상업, 연구 그리고 정치의 중심지지요. 그러나 이 도시에는 동시에 압제, 빈곤, 범죄 폭력, 약물 남용, 그리고 무관심도 존재합니다.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 있는 그리고 이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분들 중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꼬임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믿음을 숨기거나 침묵하도록 유혹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도록 유혹 받을 때마다 우리는 바울처럼 말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연관된 질문)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합명제)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은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예수께서 영원한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42세대를 거쳐 영광의 본향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 밖의 어떤 것도 죄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 과학이론도 철학도 의약도, 이념도 사회학도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복음은 최고의 변혁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로 우리의 적을 사랑하게 하고 우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는 치료법입니다. 복음은 이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예수에 관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신뢰한다면 우리의 무거운 짐은 쉽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는 기뻐할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러움을 없애주며 여러분들로 머리를 곧게 세우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아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기쁨을 줍니다. 흑인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불리는 영가에는 이 기쁜 복음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이 기쁨을 세상은 내게 줄 수 없네, 세상은 그것을 내게 줄 수 없네 또한 그것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을 통한 이 구원의 사건은 제한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복음은 계층, 국적, 인종, 사회적 지위 그리고 소속교회에 따른 차별도 없습니다. 복음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 복음은 구원의 역사에서 단절이 없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안에 있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이 복음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유대인 혹은 이방인 도당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촉발되어진 편협한 개념이 아닙니다. 천만예요. 복음은 믿음을 가짐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자유케 하는 강력한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이 좋은 소식을 거절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 비록 일부의 사람들이 핍박하고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말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구원을 낳습니다. 복음은 최후의 구출, 구원 그리고 궁극적인 승리로 인도합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은 궁극적으로 최후 도래의 집합점인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복음은 일종의 영원한 "지금"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바로 이 점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부활이 오로지 마지막 날에 발생한다고 말합니다마는 그러나 예수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요 11: 25)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단순히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현재적인 실재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관해 가르쳐 줍니다. 이 신앙은 우리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생명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신앙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앙 없는 그리스도인은 일종의 모순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존재의 부정입니다.
바울은 그가 한 말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것은 그를 위해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삶은 복음과 일치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제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을 항상 말하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이 우리를 능력의 원천에게로 가까이 이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녀 무론하고 그 자신으로서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살고 기동하고 존재하는 능력이"(행 17: 28)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그녀가) 지난 밤 잠자리에 누웠다가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에 의한 것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인 거기에 이기주의나 자기자랑 우리 자신의 강함을 뽐낼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선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과 복된 소식에 대해 더 많이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 혹은 복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 극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잡아죽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부끄러워했었고 예수의 무리들을 박해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기독교인들을 송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강렬한 빛이 하늘로부터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땅에 엎어졌고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그러자 대답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1-5). 이 경험으로 바울은 눈이 멀게 되었고 삼일을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바울은 과거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과거 그가 미워하던 그것을 이제 사랑합니다. 그가 파괴하려 애쓰던 것을 이제는 선포합니다. 그가 신뢰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 그의 온 마음과 혼을 다해 신뢰합니다. 그가 공식적으로 부끄럽다고 느끼던 것이 이제는 자긍심의 원천이 됩니다.
저의 2학년 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지금 제가 깨닫는 것은 제가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를 위해 죽으시고 저를 위해 부활하시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정직하셨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기독교인 이셨습니다. 저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그러한 빈곤을 허용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저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저의 사회적 경제적 곤궁 저의 빈곤 그리고 학교에서 저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는 집에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1965년까지는 석유램프아래에서 책을 읽고 공부해야 했는데 세계 제일의 민주국가요 산업화된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용인되어졌다는 사실에 저는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지역과 못사는 지역이라는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부끄러워했어야 했을 때 저는 최소한의 생필품 마저 부족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못사는 지역에서 태어난 것과 버지니아의 시골 오지라는 문화 사각지대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고난과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께서 아무 흠 없이 사셨으면서도 우리의 죄를 위해 스스로 죄인 되셨음을 생각합니다. 저는 베들레헴에서 갈보리로의 여정을 생각합니다. 저는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그를 배반했는가 빌라도와 헤롯이 어떻게 그를 냉소와 무관심 그리고 증오로 대했는가를 생각합니다. 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것 그리고 그분이 저를 위해 하셨던 것을 생각할 때 어떻게 제가 그 분을 부끄러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제가 저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제가 영혼에서 용솟음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제가 느낀 기쁨의 눈물을 훔쳐낼 수 있겠습니까? 구원하는 메시지요 저를 위해 예수께서 스스로 짊어지셨던 고난과 수치의 행위인 복음에 관해 어떻게 제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떳떳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4. 양극 구조 설교(Bipolar Preaching)
1) 설교패턴의 이해
양극 구조의 설교 패턴의 창시자는 19세기 영국의 설교자였던 로버트슨(F. W. Robertson)이다. 그는 진리가 두 개의 상극 사이에서 변증적으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그는 두 개의 불일치 사이를 중재하는 방식인 중재의 방법(via media)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각기 다른 개념간의 차이를 조화시키려 시도하지 않았다. 로버트슨은 모든 본문과 교리 또는 상황이 각기 제 나름의 진리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또한 그는 어떤 본문이나 교리 혹은 상황도 진리 전체를 다 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진리를 보다 명확히 감지하는 것은 상이한 이해의 상호 작용가운데 드러난다.
로버트슨은 단일한 본문 혹은 각기 다른 본문들 사이에서 각기 다른 아이디어들을 비교 내지는 대조시킨다. 설교자는 회중의 이해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는 방식과 상황들에, 그리고 각각의 축이 그 극한을 갖게 되는 방식과 상황에 주목한다. 설교자는 본문 자체 속에서 혹은 설교자와 신학자에 의한 본문의 해석 안에서 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하에 실린 설교에서 제터(Joseph R. Jeter, Jr.)는 이 시도를 성경에 있는 두권의 책에 대한 관점에 대해 행한다. 동일한 방법을 우리는 기독교 교리 실천 그리고 상황에 대입할 수 있다.
로버트슨의 방법은 오늘날의 정념에도 잘 들어맞는다. 이 방법은 설교자로 성경과 기독교 신학과 실천 그리고 공동체와 제반 상황에 나오는 다양한 견해들과 다원주의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2) 패턴의 장단점
우선 이 패턴은 설교자로 한 구절, 한 교리 혹은 한 상황의 독특성 혹은 차이점을 존중하도록 격려한다. 동시에 이 패턴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서로 다투는 회중을 둔 설교자를 도울 수 있다.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가 중요한 이슈를 놓고 서로 쟁론을 벌릴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방식은 설교자로 비판적 사고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3) 작성시 주의할 점
설교자는 자기 편리한 대로 모든 주제를 두개의 관점으로 나눌 수 없다. 어떤 교리나 상황 본문 등은 오직 하나의 축만을 가진다. 반대로 두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축을 보증하는 경우도 있다.
4) 설교의 실제
제목: 에스더 세계의 룻의 사람들
본문: 룻 1: 6-18, 에 8: 3-8
몇년 전 저는 루이지에나의 러페이에트(Lafayette)에서 열린 지역 교회 회의에 연사로 참석했었습니다. 그런 행사에 객원 연사가 됨으로서 유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업무가 바쁘게 돌아갈 때 슬쩍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과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는 시내를 따라서 커준 음악 페스티발(Cajun music festival)에 당도했습니다. 나는 좀 멀찍이 서서 음악을 들었고 또 사람들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음악은 정말 굉장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진정 나에게 감동을 준 것은 사람들이 음악에만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해- 그들의 언어 그들의 음악 그들의 유산 그리고 그들의 순수 혈통의 자부심 - 열광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광경을 다른 기회 다른 장소에서도 역시 목도하였습니다. 부르클린(Broollyn)에 있는 옥스퍼드 유대인 구역에서 열린 부림절 축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시시피에서 있었던 미국 흑인들의 저항 행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구안나주아토(Guanajuato)의 처녀축제에 참가했던 멕시코인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일랜드의 선술집에서 바로 이와 동일한 일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와 동일한 제 내면으로부터의 경험을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저는 프랑스 후구에노트(Huguenot)출신으로 스코틀랜드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취향에 있어서는 멕시코인이었던 위대한 조모님과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가 누구인지에 관해 그리고 나의 혈통에 관해 충분하게 기억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도 저와 같은 입장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그룹들에서 만일 네가 그 그룹의 일부가 아니라면 너는 형벌을 받았다 라고 말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사도인 우리들은 "우리는 배타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라 오로지 보편적인 기독교인일 뿐이다"라는 것을 우리의 별명 가운데 하나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연합적이기를 추구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아멘"이라는 말을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조상 알렉산더 캠벨(A. Campbell)은 역사상 가장 냉혹한 이성주의자였습니다. 오 월터 스콧(Walter Scott)이 설교하는 동안 캠벨이 흥분해서 껑충 껑충 뛰면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 그러나 그는 재빨리 그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고 아주 조용히 자기 자리로 미끄러지듯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룻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이야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나는 이와 관련된 설교를 무수히 들었고 심지어 룻에 대해 경외감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 여성 연맹에서는 마치 룻이 감독 성인인 것처럼 특별히 이 이야기에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할 만 합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히브리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도 그녀의 남편을 잃었고 마침내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오미는 룻과 룻의 동서인 오르바를 위로하면서 그들의 족속인 모압 족속 중에 남아 있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오르바는 자신의 족속과 종교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는 그러나 룻은 독백하듯이 대답하였는데 그녀의 대답은 다른 많은 시들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킹 제임스 버전으로 읽는 것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 16-17)
이것은 매우 독특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랑스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개방성과 포용성에 대한 최상의 예증입니다. 룻은 그 자신의 혈족 그 자신의 유산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점이 매우 좋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모형입니다. 우리는 룻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방식을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 행동에 가장 중요한 문서가운데 하나인 "스프링필드 장로교인의 장전"(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이 천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죽으려 하고 최대한 교회의 연합을 도모합니다. 우리는 보다 나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 우리 정체성을 기꺼이 포기하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집니다. 단 한가지 문제는 - 룻의 백성인 우리가 에스더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서 왕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스더는 그녀의 동족들이 위험에 처하기까지 자신의 혈통을 숨겼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르 왕에게는 좋은 아내였고 온 나라의 국모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자기의 생명, 자기 소유 자기의 왕좌등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계획을 세웠고 결심을 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전부 자기 동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면...내 백성을 구하여 주소서... 내 백성이 고통 당하는 것을 어찌 제가 보고 있어야 합니까? 내 아이들이 도륙당하는 것을 어찌 참고 있어야 합니까?"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의 본질은 그녀와 왕과의 관계라든지 혹은 심지어 그녀 자신의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죽으면 죽으리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유대인이고 그녀의 백성이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 에스더는 이 도전을 물리쳤고 그녀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 이야기는 룻의 이야기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룻은 그녀의 동족을 거부했습니다. 에스더는 그녀의 동족을 그녀 생명의 첫 번째 기준점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에스더의 방식은 오늘날 전세계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족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텔레비전에서 중동 전에서 분괴하는 소련제국에서 그리고 남부 데코타의 살육(1890년 12월 29일 남부 데코타에서 있었던 200명의 현지 인디안에 대한 살육사건)에서 그리고 도시 안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진실은 이겁니다. 나는 나 자신을 정통 백인인 미국 남자를 일컫는 신조어인 스웸(SWAM)으로 규정할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정체성과 관련하여 가장 흥분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젊은이들의 활동에서 그리고 크리스천 형제 자매 됨이 우리 실존의 최고 기준점이 되는 모임가운데 수차에 걸쳐 기억합니다. 우리가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기했던 질문, 우리가 누구인가? 라는 문제를 누군가 제가 할 때마다 우리는 재빨리 대답합니다: 아니오, 정확한 질문은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가 맞소!.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디에 응시하거나 질의 사항에 답할 때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적어 넣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룻의 원리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특징은 이민, 혼혈, 포용(melting pot)이고 많은 것들이 하나로 되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특징의 다른 측면을 직시할 때입니다. 많은 것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는 다수를 근거로 '하나'로 규정하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연합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우리"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는 그런 요구에 대해 크고 정확하게 아니야! 라고 대답을 합니다. 미국 흑인 학생들은 자신들이 백인들에게 설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저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은 남성들에게 설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룻은 기꺼이 그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려 했는지 모릅니다마는 에스더는 그렇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 에스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 위대한 여인 중 그 어느 하나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지적하자면 이 두 목소리는 현실적인 것이고 우리 세계에 현존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룻의 음성을 선호하고 그쪽으로 규정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폭발적인 다원주의와 우리 세계의 민족주의의 재발견은 우리에게 에스더의 음성에 서도록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으로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골라잡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로 묶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스스로를 정의해온 그러한 비판적인 실재를 포기하도록 더 이상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혈통주의를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나 목적으로 승낙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들과 소그룹들의 요구와 정체성 그리고 전체의 요구와 정체성을 존중하는 방법을 발견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 무수한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자신을 발견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콘(James Cone)과 곽 푸이-랜(Kwok Pui-Lan)이 많은 이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흑인의 역사에 대해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더 자부심을 느낍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그 이유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곽 푸이-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중국인과 기독교인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제 경험으로부터 저는 저의 문화적 유산과 기독교의 전통을 용기와 희망가운데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중국인 선조들은 그들의 경험을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는데 사용하면서 교회의 확립되어 있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내가 중국 여성의 관점으로부터 신학 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적 비전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상징들과 개념 그리고 모델들을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중국인 여성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내 자신의 신학을 세우기 위한 해방시키는 요소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나의 이중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해야 합니다.
이 이중의 유산은 - 우리는 이것을 룻의 방식과 에스더의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병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했습니다(갈2:20)마는 그러나 적어도 누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른 어느 날에는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기도 하면서 "황제에게 호소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행 25: 11). 아마도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 세계에 삽니까? 혹자는 강하게 한 세계라고 강하게 외칠 것이고 혹자는 강하게 두 세계라고 외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해야할 대답은 이런 것일 겁니다: 우리는 한 세계를 지향하면서 두 세계에 살고 있다!
맹렬한 민족주의 그리고/혹은 파벌주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행하는 가장 좋은 길은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인 우리의 내력을 배우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세례의 물 은혜와 심판의 성만찬을 존귀하게 여기는 유산을 끈끈하게 고수하는 것... 그리고 우리 서로가 함께 설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 사이의 접맥점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경청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주목하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 회중은 사도들의 신앙의 입장에 대한 강력한 증언자가 될 것이며 그리고 주요 공동체(university)에 강하게 대항하는 그것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그리고 그것의 창조적 교우애로 인해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백성들을 특별히 수용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내가 캘리포니아의 클레몽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정 현경이라는 한 아름다운 한국인 여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매우 총명하고 똑 소리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마리아 장전이라 일컬어지는 눅 1: 46-55절을 설교하도록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설교할 시간이 되었을 때 그녀는 강단 앞으로 나아가 조용히 서서는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춤이 어색하고 정지되었는가 싶더니 강렬한 동작으로 이어질 때까지 서서히 우아하고 힘있게 변해갔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나와 클래스의 학생들은 그 광경에 놀라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신통치 않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는 본문을 할당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주석작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녀는 의기소침하고 실망한 채 자리를 떴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최근에 나는 현경양이 쓴 책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곱 살 때 나는 어머니와 나의 이모를 방문하기 위해 한국 남서부의 한 작은 오지 마을을 여행했습니다. 우리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나는 내리쬐는 태양 볕을 받으며 오랜 시간 흙먼지 길을 걷느라 기진 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어떻게 자신이 이모와 함께 어릴 적에 강에서 헤엄을 쳤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강에 도달했을 때 어머니는 강물로 뛰어들어가셨습니다. 나는 매우 놀랐습니다. 우리는 꽤 점잖은 사람들이었거든요. 어떻게 어머니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혹시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지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행동을 도무지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가 물 밖으로 나오셨습니다마는 상황은 더 악화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창피하고 혼란스러운 나머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제발 그만하세요! 그만!" 나는 고함을 질렀지만 어머니는 계속 춤을 추셨습니다. 그리고 내 고함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그때서야 비로소 춤을 멈추셨습니다.
현경양의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현경양은 그녀의 이야기를 처량한 편지로 끝맺고 있는데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오셔서 다시 한번 춤을 추세요. 내가 어머니와 함께 출게요. 소리지르지 않고 웃을게요. 그리고 마리아는 우리의 춤을 위해 송가를 부를 것입니다." "아뿔싸!"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재빨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펴서 그녀 어머니의 춤과 예수 어머니의 춤을 재생시키면서 이 둘을 함께 맺어준 그녀를 지켜보았던,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낮은 점수를 주었던 멍청한 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우아하고 더 현명했습니다. 친구들이여 도래하는 시대는 일종의 다원주의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많은 룻들이 있습니다 나는 매우 행복한 데 그것은 여러분 중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에스더와 현경이 우리 가운데서 생겨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네 개의 신학적 축으로 이루어진 설교 패턴 (Sermon as Theological Quadrilateral)
1) 설교패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웨슬리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로 4가지를 제시한다: 성서, 전통, 경험, 이성. 이 방식은 웨슬리안들의 설교 패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이 네 가지 축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이 네 개의 축은 직접적으로 설교의 구조로 이용될 수도 있으며 여기에 도입부를 붙여 사용할 수도 있다. 또는 설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문장을 덧붙일 수도 있다.
이 패턴은 강해설교나 주제 설교 양자에 공히 사용할 수 있다. 강해 설교의 경우에는 성경 본문 혹은 주제가 성경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가, 교회는 이 자료를 전통과 경험 이성 속에서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주제 설교의 경우 이 네 개의 축은 회중들이 주제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도움을 준다. 이 네 개의 요소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a. 성서: 성경적 관점, 핵심 단어, 주제 그리고 이미지가 주요 초점이다. 만일 성경이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설교자는 이러한 성경이 보여주는 다양한 견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관점들 가운데 어느 것이 현대의 회중들에게 더 권위를 가질 것인가의 여부를 가늠할 수는 있다.
b. 전통: 설교자는 교회 역사속에서 본문의 초점이 주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가장 대표적인 견해를 자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다양한 전통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며 오늘날 보다 더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관점과 회중들이 씨름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c. 이성: 이성은 매체이면서 동시에 원천이다. 이성은 성경 전통 그리고 경험이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동시에 논리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우리가 결론짓는데 도움을 준다.
d. 경험: 경험은 사고 느낌 그리고 행동의 총체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이성적 초이성적 요소를 포괄하는 설교의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성과 마찬가지로 경험은 매체이자 원천이다. 경험은 모호하다.
2) 설교의 실제
설교제목: 떡 떼기: 하나님이 주시는 매 주일의 확신
설교자: Ronald J. Allen
(도입부) 우리 교회는 매 주일 성찬을 받기 위해서 모입니다. 장로님들이 성찬대 뒤에 서시고 집사님들이 테이블 옆으로 정렬을 합니다. 장로님들이 성물을 놓고 기도를 합니다. 대개 이런 기도는 짧고 간단하기 마련입니다 마는 때로는 이 기도가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집사님들이 빵이 담긴 접시와 잔을 회중들에게 배찬 합니다.
이 빵은 작고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입 크기에 맞추어 빵 조각을 알맞게 떼어 냅니다. 우리는 골무크기의 금속 잔으로 적당하게 숙성된 포도 주스를 마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두 가지 조그마한 음식물을 주님의 최후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전 10시에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진짜 빵 대신 얇은 판자모양으로 압축한 전병을 사용합니다. 내 친구 중의 하나가 이것을 "물고기 음식"이라고 부르더군요. 진짜 식사는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이 식사는 예배의 핵심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운데 대다수에게 있어 이 행위는 한 주의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그리될 수 있나요?
(설교방향에 대한 언급)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떡을 뗌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의 성경 적인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 선조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성경) 성경에서 떡을 뗌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식사라는 게 어떻게 이해되었느냐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에게 있어 식사는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함께 먹는 다는 것은 상호간에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음식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신의 생명이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나 자신의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이 음식을 당신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동시에 일종의 계약을 보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을 맺거나 갱신하는 동안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상호간에 약속을 체결하는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상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특별한 만찬은 공동체로 하여금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의 약속을 기억하게 합니다. 성례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과거와 미래 사건의 힘을 현재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 식사는 유대인들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로서의 자신들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과 펼친 팔로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이끌어 내셨습니다." 식사는 동시에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게 합니다.
이러한 연관성은 두 번째 경전(신약)에서 이 식사에 대해서 언급하게 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 식사와 관련하여)다양한 저자들이 다양한 특성을 강조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최후의 만찬은 교회와 맺어진 계약을 지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현존을 강조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 35). 바울에게 있어서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재림을 예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니라"(고전 11: 26)
초대교회는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다양한 성물들을 사용하였습니다 빵과 잔은 표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물고기와 빵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4천명과 5천명을 먹이는 기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신 다음 그것을 나누어 주셨음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이 식사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기술적인 용어들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의 교회에서는 "빵을 나누어"라고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단지 빵만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기술하고 있는 누가의 오래된 몇몇 문서에서는 잔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우리가 떡과 잔에 참례하는 것은 그 근본 뿌리를 성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틀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그런 떡을 뗌이나 유대적 전통의 전 차원을 어느 한 구절에 담고 있는 본문은 없습니다.
(전통) 성경이 쓰여진 후 이 만찬에 대한 다양한 폭의 해석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마침내 로마 카톨릭 전통은 화체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루터란들은 공존설(Consubstitution)을 가르칩니다. 떡과 잔이 빵과 포도주가 되는 한, 그것들은 철로 만든 포커가 뜨거운 불에 넣었을 때 변하고 차고 검은 색에서 뜨겁고 빨간 색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을 주장합니다.
이와는 정 반대의 해석 입장을 취하는 몇몇 교회에서는 만찬을 단지 우리로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하는 사인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적지 않은 교회에서 이 성찬 예식을 준수하지 않습니다.
이 만찬의 해석에 대한 우리 교회의 입장은 중도적 위치에 해당하는 개혁 교회 전통을 따릅니다. 개혁교회의 선구자인 존 칼빈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빵과 잔을 사용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빵과 잔은 빵과 잔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와 교통하십니다. 빵과 잔은 내적 그리고 영적인 은혜의 외적 가시적 사인입니다.
우리 조상 캠벨(A. Campbell)은 칼빈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캠벨은 이 행위를 성례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례"(Sacram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sacramentum으로부터 온 것으로 로마군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맹세를 표방하기 때문입니다 성례를 주장하는 것은 자칫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되기 쉽고 하나님의 이니시아티브를 경홀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유카리스트"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최후의 만찬을 담고 있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만찬에서의 핵심적인 단어가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 내가 감사를 전합니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동임에 반해 이 용어는 우리의 역할(우리가 감사를 전합니다)을 강조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통"(communio)이라는 용어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통은 가령 찬송 등과 같이 많은 형태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캠벨은 주님의 만찬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고전 11: 20) 그 이유는 이 용어가 그리스도가 주인이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꼭 주님의 만찬이 아니어도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캠벨은 사도행전적인 표기인(행 2: 42) "떡을 뗌"이라는 칭호를 선호합니다. 캠벨은 떡을 뗌과 컵을 따름이라는 양자를 포함시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 덩이의 떡이 테이블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떡은 떼어져야 하는데 이리 함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정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을 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우리 안에 사랑을 퍼뜨리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우리로 인지할 수 있는 자각을 창출하기 위해 이 재료들을 사용하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몸에 작용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또한 신앙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슴을 활기차게 합니다."
나의 동료인 윌리암슨(Clark M. Williamson)은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이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침례와 성만찬(떡을 뗌)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비롭게 될 것임을 확증하고 선포하고 보증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수단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공표하고 보여주고 승인한다."
(이성) 떡과 잔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치에 닿는 것입니다. 빵은 빵이고 잔은 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과 같은 유비적 방식으로 우리와 교제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신앙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본체가 은혜이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깊이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이십니다."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동료들은 떡을 떼는 것이 확신을 주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아내와 함께 네브라스카(Nebraska)에 있는 교회에서 공동목회를 할 때 우리는 한 여인을 초청했는데 그 여인은 이런 말을 했드랬습니다: "우리가 성찬대로 나아갔을 때 나는 충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회중석에 앉았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제 곁에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매주일 정기적으로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는 다른 교단으로부터 우리 교회로 옮겨왔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그들은 성찬식을 매주 거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자주 하는 것이 그들에게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생각의 정 반대가 진리라는 것이 이제 깨달았습니다. 매주일 떡과 잔을 받는 것이 나의 감사를 더욱 깊게 합니다."
언젠가 나는 성찬이 없는 예배란 물로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샤워를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떡을 뗄 때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허물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소외되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맥빠지는 질문을 안은 채 예배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사도 교회에 다녔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느낌이 아닌 사실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목사님이 사도적 전통 위에서 확고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실"이란 우리 행위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느낌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느낌이란 일시적인 것입니다. 드러냄과 마찬가지로 느낌은 우리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만찬 테이블 앞에서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때 성찬은 하나님의 "사실들"을 나타냅니다.
떡과 잔을 받는 것이 문제를 마법 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때에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좋지 않은 때에는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시는 분인데 성찬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개구쟁이 아이를 가진 부모가 아이의 진로 선택으로 마음이 산란한 채로 성찬대 앞에 섭니다. 어느 기업주가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훌륭히 일했소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은 거의 다른 단어들로 기억이 됩니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들에 직면했을 때 성만찬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비록 네가 바로 그 순간 너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네 편이시다.
성찬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가운데 계시고 호흡마다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만찬은 하나님이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도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인지하게 도와주는 기준점입니다. 석양노을을 맞으며 해변 가를 거닐 때, 시 한 구절이 마치 전기처럼 당신에게 흐를 때 부정직한 대리인과 마주칠 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매주일 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경험) 이러한 이해는 성찬에서의 우리의 경험을 더욱 깊게 해 줍니다. 성찬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이해를 확고하게 해주고 또 확장시켜 줍니다.
나는 언젠가 갈등가운데 있는 한 교회의 초청 설교자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대성당 같은 교회 건물은 시내 중심 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간의 상호 친교는 매우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들의 갈등은 교회를 교외로 옮길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한된 재정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교회운영위원회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때 한 회원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뒈져라!"
한쪽 편의 리더는 기시(Lillian Gish)와 비슷한 나이가 지긋한 여자 장로였습니다. 다른 쪽의 리더는 얼굴 색이 붉은 집사였습니다. 내가 있었던 바로 그 날 이 두 사람이 배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석 집사였고 그 여 장로 곁에 섰습니다. 여러분은 성찬대의 한쪽 귀퉁이에 흐르던 긴장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기시를 닮은 장로가 기도를 합니다. 그녀는 빵이 담긴 쟁반을 듭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것을 그 집사에게 주기 전에 그녀는 그의 팔을 슬쩍 건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성찬 제정사를 낭독합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라." 그녀는 그 집사를 빵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녀가 다른 집사에게 배찬하기 위해 옮기려 할 때 그 수석 집사 역시 팔로 슬쩍 그 여장로를 건드렸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찬대 앞에서 일어난 것은 이러한 확신입니다: 비록 그들이 어려운 상황가운데 있지만 그들보다 강력한 그리고 그들의 차이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결) 성만찬은 당신을 향한 나를 향한 우리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만져주심(touch)입니다. 우리의 삶이 잘 풀리고 충만할 때 이 만찬은 우리로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가 갈등가운데 빠졌을 때 성찬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기 우리를 위해 계심을 매 주일마다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오십시오. 모든 준비가 다되어 있습니다.
6. 설교의 본문이 설교의 형태를 구형함
1) 설교패턴의 원리
최근 설교의 경향중 두드러진 것은 설교 본문으로 잡은 성경의 형식, 흐름 그리고 기능이 설교의 형식 흐름 그리고 기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문학적 장르와 의미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마치 사탕과 그것의 포장지처럼 내용물만 먹고 껍데기는 버리는 방식을 여기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의 문학적 장르와 그 특성 그리고 수사학적 장치들 및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설교자는 이것들이 설교의 형식과 그 성격 그리고 설교의 의도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이 패턴은 이야기식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의미 있는 부분을 몇 개의 단위로 나누어 진행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설교의 서두를 본문의 상황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 우리와의 유비적 맥락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장면 장면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첫 번째 장면을 이야기 한 뒤 이것과 우리의 연관성을 둘 째 장면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간다. 설교의 논리는 설교본문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다.
이 패턴은 이야기가 아닌 본문에도 적용할 수 있다.
2) 설교의 실제
설교제목: 순전한 마음, 사랑이 담긴 말
설교본문: 마 15: 1-20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라는 영화에서 배우인 잭 니콜슨은 멜빈 우달(Melvin Udal)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충동적인 작가 역을 연기했습니다. 그는 뉴욕 시의 고급 아파트에 홀로 살았고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그는 사랑과 로망스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뉴욕에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짧은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가 즐기는 또 다른 시간 보내기는 그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과 동성애자인 그의 이웃 및 그가 좋아하는 테이블을 감히 차지하곤 하는 그가 즐겨 찾는 레스토랑의 유대인 고객에 대한 편견으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와 대화하고자 하면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우달 씨의 또 다른 여가 시간은 매일처럼 손을 닦는 의식입니다. 그가 약품 상자를 열면 거기에는 한번도 건드리지 않은 방부처리된 비누가 셀로판에 둘린 채 빛나는 황갈색 바에 줄줄이 쌓여 있습니다. 그가 일상적인 세수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그는 여러 다양한 비누들을 사용합니다. 그는 단 한번 비누를 쓴 다음 그것을 버리고 아직 포장지가 벗겨지지 않은 새로운 비누를 씁니다.
예수님은 우달을 통해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함축적인 말씀이 진리임을 우달씨의 삶이 점층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경구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1세기의 회중들에게 주셨던 목적과 동일합니다. 그가 이 말씀을 그들에게 주신 것은 마치 그들의 어두움을 밝히는 작열하는 촛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우리의 문화 우리의 교회 공동체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지평을 바라보도록, 혹 거기에 함축적이면서도 강력한 도전을 주는 그 어떤 상황이 있는지를 보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나에게는 로렐(Laurel)이라는 유대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녀는 뉴저지 주의 트렌(Trenton) 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펜실베니아에 소재한 펜 국립 대학교(Penn State University in State College)에서 그녀의 대학생활 첫 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기숙사로 옮겼고 몇 명의 다른 여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새로운 친구는 데비(Debbie)라는 소녀로 펜실베니아의 시골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중 데비가 로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기숙사에 유대인 소녀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니?" 로렐은 짐짓 놀란 척 하며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래" 데비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을 룸메이트로 두지 않은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나는 지금까지 한 명도 보지 못했어. 그 애들이 어떻게 생겼을까?" 로렐이 대답합니다, "장담컨대 너는 분명 놀랄 거야."
십 년전 어머니 한 분이 따뜻한 기후가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여덞살 난 아들을 메인(Maine)에서 플로리다로 이사시켰습니다. 그는 감염된 피의 수혈로 인해 후천성 면역 결핍증(HIV/ AIDS)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웃 부모들은 플랭카드 편지 그리고 위협전화등을 동원해 가며 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등록하는 것에 항의했습니다. 그 부인은 메인으로 이사가기 위해 짐을 쌌습니다. "이 증오스런 플로리다의 더위에 사느니 차라리 메인의 차가운 겨울이 낫지!"
체중과 외모에 사로잡힌 한 엄마는 자신이 먹는 음식의 작은 조각 조각을 일일이 저울에 답니다. 그녀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의 10% 이하의 지방 섭취량을 체크하면서 말이지요. 그녀는 이제 겨우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의 딸이 자신이 원하는 날씬한 몸매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뚱보 베르타(Big Bertha)라는 별명을 불러가며 자기 딸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내가 형제들과 자랄 때 우리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싸움을 벌리곤 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는 카드놀이에서 우리를 속이기도 했고 물어 보지도 않은 채 죽마 장난감을 빌려가기도 했습니다. 또는 다른 형제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무례함 경연으로의 왜곡된 행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거짓말" "사기"같은 말은 다반사로 쓰였습니다. 어머니는 방을 걸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 안하니? 너희들이 스스로 너희 말을 들었으면 좋겠구나. 이 다음 번에는 너희들 말하는 것을 녹음할 거다. 그래서 이 담에 너희들을 위해 그것을 틀어줄 거다."
말로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그것에 역겨움을 갖는 사람들이지만 그것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시종 크고 명확하게 그것을 다시 속개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도 그 톤은 분명할 수 있고 그 어떤 분위기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위협을 하신다든지 우리가 잘못한 것을 녹음하시는 것에 선수가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는 고통스런 시간이면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했던 험악한 말들을 기억합니다. 그런 순간이면 우리는 어릴 적 말하곤 했던 것이 진리이기를 바라지요: "막대기와 돌멩이는 우리의 뼈를 부러뜨리지만 그러나 언어는 나를 해칠 수 없다." 우리는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그런 말들을 집어삼켰으면 하고 바랩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정에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말들이 있는데 개중에는 사랑스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대개는 상처를 주는 말들입니다. 그런 말들은 우리로 후회하게 하는 것들이지요. 만일 우리 교회의 벽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벽들은 사랑스런 말과 섞여 있는 상처 주는 말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성경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성경의 기억 속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주는 말들이(성경에 실려있는 사람들의 말속에서: 역자 주) 들어있을 것입니다.
"내가 동생이나 지키는 자이니이까?"라고 가인이 반문합니다(창4:9). "형의 장자 명분을 내게 팔라 그러면 팥죽을 먹을 수 있지"(창25:31)라고 야곱이 에서에게 말합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창37:19-20)라고 요셉의 형제들이 말합니다. 입다가 성급한 약속을 하나님께 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 앞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삿11:30-3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사탄이 부드러운 어조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씩 대제사장의 뜰에서 맹세를 합니다(마26:69-75).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남을 해치는 말은 남을 해치는 행동으로 귀결되는 사악한 의도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살인, 간음, 거짓 그리고 속이는 말 등으로 증명해 줍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몸을 거쳐 소화가 됩니다. 이것은 배수구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로 간과해서 그렇지 버려지는 과정이 더 복잡한 부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언어쓰레기들이 우리 거리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회중들이라 해서 그 심정(heart)이 마음(mind)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정은 감정 지성 의지 그리고 영적인 삶의 자리입니다.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머리는 마음을 향해 있습니다. 만일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것은 파괴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해치는 말과 행동은 목숨을 앗을 수도 있고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으며 희망을 꺽어버릴수도 있고 진리를 거짓으로 왜곡시킬 수도 있으며 삶을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전한 마음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예수께서 사탄의 말을 시정해 주셨습니다(마 4: 4). 우리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라는 생명의 떡을 먹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순전해 집니다. 그러면 순전한 마음으로부터 사랑스런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 8)라고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카타로스(katharos)는 깨끗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 27: 59에 나오는 '정한 세마포' 처럼 말이지요. 이 단어는 계 21: 21에 나오고 있는 순금처럼 합금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순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 24: 4에 의하면 성전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현존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였습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는 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손을 깨끗이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청결이라는 것은 신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부족한 대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함은 의식적 혹은 제의적인 청결보다는 영적으로 청결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사악한 저의를 갖지 않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례 정기 건강 체크가 시작되기 수세기 전에 모두 사람이 자신의 심령을 체크해야 한다고 제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마음의 청결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쑥덕거림 및 은근히 자기를 내세우는 습관을 타파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심령을 청결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이러한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시도록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자신들의 마음에 비추도록 허락합니다. 그들은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마 12: 33-37). 예수님은 마음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마 5: 8). 환원하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그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매일처럼 그들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우리 마음이 청결 할 때 우리는 애정 어린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청결할 때 그리고 우리의 언어가 사랑 가득한 것일 때 자연스레 우리의 애정 어린 행동이 뒤따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애정 어린 것일 때 우리의 삶은 치유하고 기쁨을 가져오는 엄청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용서하고 부정의에 대해 도전합니다.
성경으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 4-5)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하기 전 그리고 그 후에 한 말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해롭게 하는 언어에 대한 예수님의 역설적인 교훈 이면에는 청결케 하는 언어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깨끗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깨끗게 합니다. 이것이 말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 양자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Penn State의 내 유대인 친구를 기억하세요? 유대인임을 알지 못한 채 그녀에 대해 공격적인 말을 했던 새로운 친구를 가졌던 그 친구 말입니다. 로렐은 데비가 심술궂지는 않지만 계도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리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데비는 로렐에게 와서 몇 번이고 사과를 했습니다. "나는 너무 당황했어. 만일 네가 두 번 다시 나에게 말을 걸려하지 않았다면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았을 거야." 로렐이 대답합니다. "단지 내 짐작인데 이런 것들은 네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고 따라서 만일 네가 좀더 배운다면 우리 역시 너하고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야." 데비가 대답합니다. "고마워, 의심이 유익이 되었네, 우리는 여전히 친구 맞지?" 로렐이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이 다음에 네가 누군가로부터 반 유대적인 말을 듣게 되면 강력히 변호할거지? 그렇지?" 그녀의 새 친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잡화점 계산대 앞에서 한 젊은 아빠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한 아들에게 하는 말을 어깨 너머로 들었습니다. "사랑해, 네 아빠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가 아이의 머리를 힘차게 쓸어주자 아이가 미소를 지었을 때 내가 부모로서 했던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사소한 악담이 주는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고 어떤 작은 희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1993년 1월이었습니다. 신년 축제가 끝이 났습니다. 브랜아이스 대학(Brandeis University)의 사회학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슈바르츠(Morrie Schwartz)는 금년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해가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몇 달전 진단 결과 그는 루게릭 병을 앓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휠체어를 이용하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데 온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브랜디스 대학의 동료가 갑작스런 심장쇼크로 죽었을 때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풀이 죽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 부질없어, 그 수많은 멋진 것을 말하는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이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어."
모리에게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몇 통의 전화를 걸었고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추운 주일 오후 그는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만든 "살아있는 장례식"에 참여하였습니다. 모리는 언제나 따뜻하고 사랑 넘치고 정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리에 관해) 한 이야기들은 지난 몇 년 동안 그가 보여준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눈 녹듯 녹여 왔음을 반영해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했고 그들의 부모 배우자 친구 삼촌, 동기, 교수님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몇몇 사람은 울기도 했습니다. 한 부인이 시 한편을 읽습니다. "나의 친애하는 사촌, 시간이 흐르면서 네가 보여주었던 너의 영원한 마음은 더욱 더 부드러운 삼나무(sequoia)를 생각나게 하는 구나."
모리의 경험은 하나의 좋은 질문을 제기케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마음의 치유하는 청결을 공유함에 있어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 경험을 통해 많은 것 가운데 깨달은 것은 결코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말은 해서는 안되고 오직 칭찬하는 말만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청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청결케 하는 것입니다. 후렴이 아주 애처로운 컨추리 송이 있습니다: "지금 옳은 일을 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아." 우리는 어느 정도 말을 참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위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옳은 일을 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할당된 쓸데없는 말을 세상에 쏟아내느라 바쁘고 우리 발은 입으로 말한 수많은 것들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너무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화시켜버린 말들을 먹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해로운 행위를 취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입히는 말들로 도배한 영화가 몇 시간 상영된 후 오하라(Scarlett O'Hara)가 말했듯, "내일은 다른 날입니다." 두 번 째 기회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 노력 없이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등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고상한 길을 택할 수 있는 신선한 기회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청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청결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체크한 후 그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켜보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체크한 다음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켜보라고 제안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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