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고난’의 설교자 본회퍼Ⅲ | ||||||||||||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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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설교에서는 대부분 시가 등장한다. 그는 시를 통해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다. 더불어 그의 설교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다. 본회퍼는 항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설교했고, 고난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강조하는 설교를 강단에서 거침없이 전한 설교자였다. 그 밖에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서론을 생략하거나 짧게 언급한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본문 중심의 설교 또한, 1938년 3월에 로마서 5:1-5절(『십자가의 부활의 명상』, pp.80-93)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도 구절에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3-5절까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본회퍼의 시편 설교에서는 성경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되, 그 구절에 집중하여 설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본회퍼는, 그가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설교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본회퍼는 그 누구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자였다.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설교 본회퍼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얼마 전인 1932년 6월, 골로새서 3:1-4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이 세상의 부정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저항은 말씀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들은 꿈꾸는 자도, 구름 너머에 있는 자도 아닌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대해 충분히 증언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결코 부정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마음 편안히 있게 하는 아편이 아니다. 우리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부정에 대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씀과 행동으로 하는 저항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처럼 혁명적인 기독교가, 어찌해서 오늘날에는 언제나 보수적인 입장에만 서야 되는 것인가?”(『기다리는 사람들』, pp.75-76). 그는 또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33년 2월 사사기 7:2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력하게 설교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 교회를 부르셔서 이 땅의 불의와 공포와 악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교회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7년을 전후로, 시편 58편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했다. 이 설교에는 시대적 상황과 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본회퍼의 시편명상』, pp.99-115). 그는 시편 58편은 ‘복수의 시편’으로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기도문임을 전제하면서, 그 본문을 통해 시대의 불의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압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대 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적용과 예화가 없는 설교 본회퍼가 설교관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일한 적용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적용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회퍼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본문을 중심으로 한 강해뿐이었다. 예화 역시 마찬가지다. 본회퍼에게 있어, 예화 또한 말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하는 위험 요소였다. 그는 예화를 설교에서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설교에서 적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기에, 설교는 적용을 통해 사람의 변화를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용이란 설교 끝에 덧붙여진 하나의 결론 같은 것이 아니다.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무방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거룩한 변화의 목적 없이 설교할 수 없듯이, 적용을 향한 촉구 없는 진정한 기독교적 설교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적 감흥이 있는 설교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의 기다림 속으로 걸어와 주옵소서. 그 밖에 시편 42편 설교를 보면, 각 구절에 대한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 구절에 맞는 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처럼 본회퍼의 설교에 본문을 잘 요약하는 시구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한편의 설교를 완성할 때 얼마나 많은 묵상과 연구를 거듭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지나친 낙관주의나 근거 없는 희망은 우리가 분명하게 경계해야 부분이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통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설교자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본회퍼 설교의 단점 그는 당시의 독일 기독교가 사변적 형이상학에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종교성이 배제된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를 주장했다. 그리고 비종교화를 통해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이론은 세속화 신학을 통한 급진적 제자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신학은 1960년대에 급진적 세속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문제점 중 하나는 그의 성경관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버하르트 베트게는 본회퍼가 개신교의 ‘하나님 말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축자영감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비판했다. 본회퍼는 말씀을 정치적 관점에서 깊이 이해했고, 그러한 말씀 이해는 오늘날까지 교회에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본회퍼에게는 그만큼 축자영감설이 불편했고 말씀의 정치적 이해가 절실했다. 본회퍼의 정치 편향적인 설교도 문제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실천적 신앙을 강조하며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정치 성향으로 크게 치우친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다. 본회퍼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본회퍼는 강단에서 행한 설교와 삶이 철저하게 일치되도록 살다간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선포했다. 나치 정권의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실천적인 믿음을 촉구했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한 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자 몸부림치다가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실천적 방법들이 옳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본회퍼는 신학자요 설교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했고,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요 설교자였다는 사실이다. 삶이 곧 거룩한 한 편의 설교가 되는 설교자, 그런 설교자가 차고 넘치는 한국교회 강단을 소망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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