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주해, 설교"
왕대일 (감신대 교수, 구약학)
(이 글은 왕대일, <새로운 구약주석- 이론과 실제>, 서울: 성서연구사, 1996, pp. 57-154,
269-286에 실린 "본문 주석과 본문 설교의 이론"과 왕대일, <목회자의 실패, 목회자의 성공>,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pp. 256-286에 수록된 "구약의 말씀과 설교"에 기초한 글이다).
1. 주석이란 무엇인가?
주석이 무엇인지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그 여러 가지 설명을 하나로 정리할 때 주석이란 본문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이해한 내용을 "보도하는" 행위가 된다. 이 때 우리는 "이해
한다"는 말과 "보도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본문을 대하는 주석자의 자세를
가름한다. "보도한다"는 것은 주석 작업의 결과를 표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주석은 철두철미 "엑세게
오마이"(exegeomai)가 되어야 한다. 즉 본문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보도하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주석(註釋, exegesis)이 되어야지 사석(私釋, 사사로운 풀이, 즉 eisegesis)이 되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의 목소리를 보도해야지 주석자의 편견, 기분, 판단, 주장 등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서
는 안 된다.
주석은 본문에 대한 세심한 읽기이다. 본문을 "예민하고 세밀하게 읽어 가는 과정"(sensitive close
reading)이 바로 주석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주석을 본문의 구절(verses)에 대한 해설(commentary)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WBC(Word Biblical Commentary)나 Interpretation 시
리즈 같은 주석 책들을 보면 현대 주석학의 경향이 본문을 구성하는 구절이나 단어에 대한 풀이에서
구절들이 모여 이루어진 최종형태의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WBC 카멘타리의 경우, 본문의 구절에 대한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본문의 형태, 본문의 구조, 본문의
정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난 뒤 본문의 구절을 해석한 다음 본문의 가르침을 주해 형식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이것은 주석이란 단순히 본문의 구절 풀이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석은 구
절들이 모여 형성된 본문(텍스트)을 파악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주석은 본문의 소리를 듣는 노력이다. 주석의 대상은 본문(말씀)이다. 주석 하는 자는 누구나 이 본문
과 "뜨겁게" 만나야 한다. 주석자는 함부로 본문 속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본문을 상징
이나 암호로 보고 그런 암호가 뜻하는 바를 영감 있게, 은유적으로, 우화적으로, 교리적으로 풀이하려
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본문의 증언을--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든지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보도하려는 노력에 우선 충실해야 한다.
주석은 "해석의 과학"(science of interpretation)이다. 주석은 해석학의 인도를 받아 실천되는 "해석의
예술"(art of interpretation)이다. 주석 작업에 방법론이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해석해야할 본문이 "말
씀"이되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든, 성서 본문
을 주석하는 자는 누구나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옛 문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 있고 역동적인 "말씀"을 해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
님의 말씀이, 아니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총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영감어린 "말
씀"이 바로 우리가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본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석은 사람의 글과 말로 기
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성실하게 보도하는 해석학적인 몸짓이다.
2. 주석은 어떻게 하는가?
"주석하기"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기존에 출판된 여러 주석 책들을 읽고 연구하면서 배우
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 본문을 읽고 공부하면서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가는 과정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석하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물론 전
자도 "주석하기"의 일환인 것은 틀림없다. 성서본문을 주석 하려고 할 때 으레 무슨 좋은(또는 은혜로
운!) 주석 책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도 "주석하기"를 주석 책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노력으로 전제했던
데서 비롯된 습관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런 노력은 주석 작업이 아니다. 주석이란 주석 책을 살
피는 작업이 아니고 성서 본문을 탐색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주석 작업의 교재는 성경책이다. 성서본문
이다. 아무리 훌륭한 주석 책이라도 그것은 부교재에 불과하다. 부교재를 들여다보면서 말씀의 뜻을 파
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주석은 성서 본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노력이다. 성서 본문 속에 기록된 하나님
의 마음을 파악하는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주석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본문이다. 다른 어떤 참고서를 보
기 전에 주석자는 먼저 성서 본문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
가 얻은 수확의 폭을 넓히거나 깊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수정하거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러 다른
주석책들을 참고로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
과정을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는 본문을 읽는 과정이고, 둘째는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며, 셋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해
설하는 과정이다.
첫째로, 본문을 읽는 과정은 대략 다음 몇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주석자는 자기가 해석해야 할 텍
스트의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즉 본문을 결정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주석의 대상으로 삼아
야 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 개역 성경의 경우 겹동그라미 표시로 단락 구분을 제시하
고 있다. 본문 설정의 단계에서 우리는 이런 표기를 참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단락 결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문 이야기와 그 가르침의 통일성(integrity)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야기나 가르
침의 통일성이야말로 본문의 단락을 결정하는 중요 기준이다. 크든, 작든, 넓든, 좁든, 어떤 이야기나
가르침 속에 일관성 있는 한 흐름이 있다면, 주석자는 그것을 본문 설정에 필요한 단락의 기준으로 삼
을 수 있다.
본문을 설정한 후에 주석자는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본문을 "뜨겁게" 읽어야 한다. 외울 만큼 거듭해
서 읽어야 한다. 그러면서 본문에 등장하는 구절과 글자 등을 파악해야 한다. 이 때 가급적 하나의 본
문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말 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으로도 읽고, NIV, NRSV같은 영어 번역
으로도 읽어야 한다. 능력이 된다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된 원어 본문을 읽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
할 경우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본문을 해설하고 있는 책이라도 참조해야 한다.
이 때 본문의 맥락(본문의 문맥과 본문의 배경)을 파악하는 작업이 소중하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름하는 척도는 대개 본문의 맥락에서 결정된다. 맥락을 떠난 본문이란 없다. 본문의 맥락의
흐름을 무시한 특정 본문만의 해석이란 참으로 위험하다.
둘째로,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은 주석의 몸통에 해당된다. 이 과정에서 주
석자는 본문 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단어, 어구, 표현 등을 파악해야 된다. 그렇기 위해서 본문 전체
→ 문단→ 절→ 반절→ 음절→ 단어 등의 순서대로 본문을 파고 들어가면서 본문에서 중심 역할을 하
는 글의 형식, 형태, 문법, 구문, 관용어, 상투어, 문체, 도식 등을 갈무리해야 된다. 예를 들어 한 본문
속에 중심 역할을 하는 동사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노우트에 적어 보라. 이 과정에서 주석자
는 성서 낱말 사전, 성구 사전, 성서 신학 사전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치게 되면
본문 안에 개진되어 있는 "의미상의 층"이 대개 발견된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바쁘다. 일주일에도 열 편 이상의 설교를 해야 되는 목회자들이 바로 이 땅
의 목회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편의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한 본문만을 오랜 시간 붙들고 늘
어지는 주석 작업이란 때론 지루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언제까지나 하나
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성실한 자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
니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한 편의 설교를 그 열매로 얻게 되는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작
업에 크게 도움이 되는 과정이 곧 본문의 구성/구문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본문의 말씀은 그냥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틀, 짜임새, 디자인 속에 조직
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텍스트(text)는 텍스쳐(texture)인 것이다.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피
라는 말은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기 전에 본문의 구성 형식을 식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의 외형을
먼저 파악한 후에 그 외형 속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때 주석자는 본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의 문예적, 언어적, 문법적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
는 동사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주목해보자. 동사들의 쓰임새, 이를테면, 동사의 시제의 변화,
인칭의 변화 같은 것들은 본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수사학적으로 드러내는 통로이다.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본문이 가르침이라면, 본문의 중심 단어, 중심 모티브, 문체를 비롯한 말투, 소리, 심상
등도 검토해야 한다. 본문이 이야기 형식인 경우 이야기의 기승전결이나 줄거리(plot)의 전개 과정을 무
엇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왜라는 질문과 함께 추적한다. 또 등장인물이나 배경, 해설자의 관점 등에
도 관심을 기울인다.
왜 이런 작업이 주석 작업에서 소중할까? 왜, 무슨 이유로 본문의 형식을 살피는 일이 본문의 내용이
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보다 앞서야 할까? 그것은 본문의 뜻(concept)이 본문의 내용이나 줄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글, 어구, 문장 등을 표현상의 도구로 사
용하고 있다. 이 때 본문의 뜻은 글자나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와 글자 사이, 구절과 구절
사이에도 들어가 있다. 신문을 읽어갈 때 행간(行間)을 읽어야 된다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고기도 그
물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그물코 사이에 걸리지 않은가. 본문의 뜻이나 의미는 텍스트의 표면에만 아
니라, 텍스트를 구성하는 글자 사이에도 있고, "텍스트의 바닥에, 또는 텍스트의 심층에도"(underneath
the text) 존재하고 있다. 본문이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를 파악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로, 지금까지의 결과를 정리하면서 본문의 메시지(의도, 기능, 의미 등)를 규정하게 된다. 이 때 우
리는 지금까지 다룬 본문이 어떤 상황 속에서 선포(기록)된 말씀인지를 새삼 확인해야 한다. 본문은 단
순한 문학적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한 틀(표현)과 알맹이
(사상)를 갖춘 글이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주어졌다. 본문의 의도나 의미 등은 어떤 상
황 속에, 어떤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었는지를 확인할 때 비로소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석 작업이 성서 본문을 단순히 심미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머물러서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텍스트를 텍스트 되게 하였던 역사적, 사회적 정황은 본문이나 그 맥락에서 파악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주석자가 들춰보아야 하는 참고서들(개론서, 역사서, 성서지리 등)에서 파악될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밟든 언어의 사회(학)적 기능에 대한 이해는 본문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일에 중요하게 활용된다. 이런
작업의 결과를 정리하면서 본문과 본문의 내용, 본문과 본문의 말을 듣는 사람(청중) 사이에 형성되는
메시지를 확인하게 되면 우리가 주석이라고 부르는 대장정이 성공리에 그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3. 주해/강해란 무엇인가
주해/강해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주석과 주해/강해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언급하고 지나가야 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주석이나 주해/강해는 모두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이고, 이 둘
사이에는 다만 그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주석이 보다 구절풀이에 매달
리는 작업이라면, 주해/강해는 보다 문단해설에 초점을 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주석이란
본문의 단어, 구절, 어구, 표현 등을 풀이하는 작업이지만, 주해/강해는 문단을 해설하는 작업이라고 단
정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주석과 주해/강해의 차이는 주석을 나타내는 말인 "엑세제시스"(exegesis)와 주해/강해를 표시
하는 단어인 "엑스포지션"(exposition)의 차이에서 파악해야 한다. 주석은 "엑세제시스"란 말답게 본문
의 소리를 "끄집어내어" 읽는 노력이지만, 주해/강해는 "입장을 바꿔서" 해설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주해/강해(exposition)는 라틴어 엑스포지티오(expositio)가 말하듯이 어떤 한 본문을 다른 글/말로 제
시하는 설명이다. 이 때 주해가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면, 강해는 그것을 구두/설교로 해설할 뿐이다.
이런 차이를 존중한다면 주석의 결과는 주해(exposition)로, 주해의 열매는 "강해"(expository
preaching)로 정리되게 된다.
주석이 원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살피는 시각에서 본문을 풀이한다면, 주해/강해는 본문의
뜻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석이 본문의 세계 ("그 때 그 곳")
를 탐색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주해/강해는 그 본문의 세계를 "오늘 여기"에 있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본문을 풀이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석이 보다 저
자 중심적 이해에 치중할 때 주해/강해는 다분히 독자 지향적 해석이라는 면모를 지니게 된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주석은 목회자를 대상으로 쓴다. 주해/강해는 회중(교인)을 대상으로 쓴다. 여기에 목회자
들이 쓴 주해/강해가 성서해석사에 공헌하게 되는 자리가 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회중
의 말로 통역하는 능력이란 목회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에게는 성서학자들이나 주석학자들
에게 없는 목회자들만의 현장(회중, 교인)이 있지 않은가. 목회자들의 성서주해/강해가 성서해석에 기
여하게 될 공헌은 바로 이 현장성에 있다.
주해/강해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의 세계와 회중의 세계를 균형 있게 다루
려는 노력이다. 본문의 세계와 회중의 세계라는 두 기둥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 관계가 주해/강해에 자
리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곧 주해/강해의 결과가 곧바로 강해 설교로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
다. 설교자에게는 본문(텍스트) 외에도 회중(컨텍스트, 곧 인간, 사회, 역사, 창조세계 등)에 대한 깨달음
과 회중의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육신
을 입고 우리 가운데 계신 말씀"이다. 회중에 대한 깨달음과 회중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
소 성서 본문 중심적이면서도 회중에게 의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강해할 수 있다.
주석은 주해/강해로 옮겨가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주석이나 주해/강해의 대상은 성경 구절이 아
니다. 단어 풀이도 아니다. 주석이란 본문 전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살핀 후, 그것을 주
석자의 말로 설명해 주는 노력이다. 이 점은 주해/강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해/강해는 주석에
비해 다분히 회중 중심적이다. 본문의 가르침을 단순히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회중의 삶
속에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도록 애쓰게 된다. 주해/강해는 주석에 비해 다분히 실용적,
실제적, 역동적이다. 이런 까닭에 주해자/강해자에게는 주석의 결과 확인된 메시지를 "입장을 바꿔놓
고"(ex-position) 생각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 주석에서 얻은 본문의 메시지에 대한 풍부한 묵상과
기도, 끊임없는 명상과 성찰이 주해자/강해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여기에 성령의 도우심
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석의 결과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시키게 되는 통찰력이야말로 주해자/강해
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주석의 대상은 본문이지만, 주해/강해를 하면서 고려해야 할 대상은 회
중(교회, 사회, 역사)이다. 회중에 대한 고려 없이 전달되는 성서지식의 나열은 주해자/강해자의 유식함
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결코 생명을 낚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중을 만나고, 체험하며, 회중의 말과 마음을 주해자/강해자가 경험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눈 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걸음걸이의 폭을 같이하
는 것이다. 눈 높이를 맞추라는 것은 지적인 수준을 함께 하라는 것이고, 걸음걸이를 함께 하라는 것은
정서적인 폭을 같이 나누라는 것이다. 본문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주석)에서는 학자적인 성실함이 요구
된다. 하지만 회중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주해/강해)에 들어선 자에게는 구도자의 간절함이 요청된다.
주석의 단계에서는 학문이, 주해의 과정에서는 기도와 묵상이 전제된다. 그래야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성경 말씀이 오늘 우리 상황 속에 새롭게, 역동적으로 풀어질 수 있다. 이럴 때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적용이 동반되게 된다.
주해자/강해자는 성서본문을 가지고 세상을 읽어가야 한다. 세상을 통해서 성서 말씀을 읽기보다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서 본문은 우리 일상을 점검할 수 있는 거울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배달되는 신문이 세상을 새롭게 묘사하듯이 성서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 일상생활을
새롭게 가다듬는 노력이 주해자/강해자에게는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해/강해는 어떻게 하는가? 주석의 결과(열매)를 회중의 말, 회중의 감정, 회중의 상황 속
에 다시 풀이하려는 노력에서 주해/강해는 자리잡게 된다. 이 때 첫째, 본문의 문맥을 철저히 이해하
라. 둘째, 본문의 중심언어(중심소재와 중심주제를 구성하는)를 이해하라. 셋째, 본문의 언어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그 문법적인 특성을 이해하라. 예를 들어 단어의 배열 순서나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
라. 넷째, 본문의 말씀들의 배경을 이해하라. 원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한 후 그것이
오늘 이 시점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라. 다섯째, 구약 본문의 증언은 신약에서, 신
약 본문의 증언은 구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라. 이때 자의적이거나, 인위적이거나, 우
화적이거나, 지나치게 모형론적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지금까지 다룬 작업을 글로 써 가야 한다. 이
때 본문의 소리나 증언을 한 구절 씩 파악하기보다는 한 문단 씩 파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각 문
단을 다루면서 그 속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구절이나 단어를 풀이하는 형식을 밟아가라. 일곱째, 본문
의 문단을 다루어 갈 때에는 본문 전체의 "주제"(main theme)를 회중이 알아듣도록 분해해서 제시하거
나, 아니면 본문의 구조(논리적 순서)나 본문의 사상이 배열된 순서(내적 구조)를 따라서 본문의 증언을
회중의 말로 풀이해서 제시할 수도 있다.
4. 주해/강해에서 강해설교로
설교는 여러 갈래로 구분된다.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는 교리설교, 절기설교, 인물설교, 윤리설교 등이
있고, 설교의 형식 (또는 성서본문을 취급하는 방식)에 따라서는 제목설교, 본문설교, 강해설교 등이 있
다. 무슨 형식의 설교를 하든 설교자는 성서의 세계와 오늘날 회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
는 사람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서본문의 말씀을 설교자의 언어로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으로 전달해서는 안 된다. 성경말씀이 강단에
서 선포되도록 하는 것(Let the Bible Speak out in the Pulpit)-- 그것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의 설교자
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성경 말씀을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서 선포해야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
서 본문을 이용해서 전하고 마는 것은 설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또 하나의 "아이세제시
스"(eisegesis)이다. 이런 점에서 강해설교는 여러 설교 형식 중에서도 오늘날의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
씀을 적절히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흔히 설교자에게 절실한 것은 설교의 아이디어(또는 영감)라고 한다. 물론 틀리지 않는 말이다.
성서 본문을 연구하면서, 학문적인 주석이나 목회자의 강해나 설교집 등을 참고하는 것도 설교를 구성
할만한 창조적인 생각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설교의 아이디어는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석
→ 주해하는 과정에서도 얻을 수 있고,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일상 삶 한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도
있다. 아이디어야말로 설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설교가 아이디어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이디어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성서 본문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지, 설교자의 아이디어가 설교 형식으로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킬링거(J. Killinger)란 설교
학자가 "아이디어에도 맛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J. Killinger, Fundamentals of
Preaching, 47-89).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맛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가 더 큰 문제이다. 필자가 기대
하는 맛은 성경적인 맛이다. 성서적 설교의 아이디어는 성경본문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어디
서, 어떻게, 왜 전달하고 있는지를 조직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맛을 낼 수 있다.
주해/강해에서 강해 설교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 필요하다. 곧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 주해/강해를 철저하게 거치다 보면, 우리는 본문의 소리를 참으로 풍성하게 듣
게 된다. 이 때 설교자는 지금까지 파악된 말씀의 세계, 본문의 음성, 말씀의 이미지 등을 노우트 한
두페이지에 써 놓은 후,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을 간추려서 하나의 설교로 정리하는 방식이 요청
된다. 어떤 본문을 주해/강해하면서 깨닫게 된 아이디어를 한꺼번에 모두 한편의 설교 속에 쏟아 넣으
려고 애쓰지 말자.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콤팩트"(compact)한 언어로 구성된
설교가 훨씬 더 힘있고 효과적이다. 설교를 듣는 회중의 집중력이 3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커뮤니케이
션(communication) 이론도 이런 주장에 도움이 된다. 이런 노력을 돕는 효과적인 방식 중의 하나가 본
문의 증언들을 도표 형식으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즉 본문 연구에서 파악된 여러 주제, 소재 등을 하
나로, 체계적으로 묶어보는 것이다. 본문을 주석하고 주해하면서 얻은 모든 깨달음을 모조리 그냥 나열
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어떤 주제에 맞춰 정리하다 보면 여러 설교문의 대지와 소지를 선별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자 할 때 강해 설교에도 이른바 통일성, 예술성 등이 갖춰지게 된다.
성서 본문을 주해/강해할 때 우리는 여러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강해 설교를 전공한 사람들에
따라서는 무엇이 강해설교이고, 무엇이 강해설교가 아닌지에 대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필자
의 생각으로는 본문의 문단을 본문의 내적 구조에 따라서 풀이하는 방식이거나, 본문 전체의 주제를
설교자의 명제로 삼은 다음 그것을 분해해서 전달하는 형식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 강해 설교라는 범주
에 속한다. 이 두 방식 모두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다루는 과정을 설교의 형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running commentary preaching" (이른바 본문 구절 풀이식 설교)으로는
감동적인 강해 설교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강해 설교는 어디까지나 성서 본문에 대한 설교
이다. 강의와 설교는 엄밀히 말해서 다르다. 강의는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주목적이다. 설교는 지식이
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본문의 말씀을 전달해서 회중을 깨닫게 하고, 변화하게 하며,
결단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강해 설교에도 일정한 흐름과 짜임새,
통일성과 논리적 전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짧은 설교 시간에 어떻게 효율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를 고려할 때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식으로는 효과적인 강해 설교를 기대
할 수 없다.
강해 설교에는 반드시 적용이 있어야 한다. 적용을 빼드린 강해 설교로는 감동과 결단을 이루어낼 수
없다. "강해 설교의 혼은 적용에 있다"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본문의 적용을 위해서 설교자들이 가장
심혈을 쏟는 노력이 예화의 사용이다. 설교학자들에 따라서는 예화가 건물에 있어서 창문 역할을 한다
고 보기도 하고, 그 반대로 음식점을 비유 삼아 음식점에서 중요한 것은 주메뉴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
고 꼬집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예화가 설교 본문에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예화의 사용은 설
교를 듣는 회중의 관심을 본문에서 떠나게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또 본문의 의미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현재의 상황 속에 적용할 때 지나치게 그 의미를 "강요하는"(imposition) 문제를 낳아서도 안
된다.
설교의 윤곽을 만들고, 설교를 작성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방법이 어떠하든지, 모
든 설교는 그 눈 높이에서, 그 걸음마에서 회중의 삶과 신앙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의 말
씀이 회중의 지식과 정서 속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 속에 말씀의 깊이가 뿌리 내
리게 해야 한다. 설교학(homiletics)이란 단어가 "같은"(homo) 것을 "말한다"(lego)라는 단어로 이루어
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번역의 이론 중 하나인 "의미의 동등성"(dynamic equivalence)은 강해설
교 작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강단의 언어는 동시대인의 언어여야 한다.
5. 강해 설교의 준비
강해 설교를 준비하는 자는 다음 세 요소가 전제 된다. 즉 성서본문이라는 세계, 그것을 해석하는 설
교자의 자리,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 회중의 상황이라는 삼각관계가 그것이다. 이 삼각 관계에 대한 총
체적 이해에서 강해 설교의 서론, 본론, 결론은 그 구도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면, 강해 설교는 구체적
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첫째, 강해 설교는 우선 본문을 연구(주석과 주해)한 후 그것을 기도와 묵상으로 다듬는 단계에서 시
작된다. 이 때 성서 본문의 세계를 오늘, 여기에 있는 회중에게로 연결 짓는 접촉점이 무엇인지를 심사
숙고해야 된다.
둘째, 본문의 세계를 "브레인스토밍"(여기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해에서 강해설교로"를 참조하
라)을 통해서 정리하면서 설교의 명제와 설교의 목표를 확정하게 된다. 이 과정을 할 수만 있으면, 설
교준비 노우트에 기록해 두자. 좋은 설교의 목표란 구체적이어야 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야 하며,
측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설교의 명제와 목표가 설교 속에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교의 명제와 설교의 목표를 기록해 놓으면, 그 기록은 특정한 성경책을 연속으로 강해해 나갈 때 아
주 소중한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서 중 한 권을 강해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자. 구약의 예
언서에는 매 장마다 비슷한 내용, 비슷한 어조의 꾸짖음과 탄핵, 심판 선고가 반복되고 있다. 이 때 각
설교의 명제와 목표를 확실히 정해 놓고 구분하지 않으면, 늘 비슷한 내용을 설교 시간마다 반복하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니면 이사야서를 설교하면서 아모스서처럼 설교하게 되거나, 호세아서를
설교하면서 예레미야서처럼 설교하게 되는 실수에도 빠질 수 있다.
셋째, 설교의 명제, 목표를 정한 후에는 설교의 대지(뼈대)를 세우는 절차를 밟게 된다. 설교의 뼈대
(대지)는 본문의 내적 구조를 따라가면서 본문의 사상을 밝힐 수도 있고, 설교 전체의 주제를 설교자의
명제로 재구성한 다음 그것을 분해해서 세울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설교의 대지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청중이 기억하기 쉽도록 단순해야 한다. 설교의 전개과정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 전개과정은 논리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일 수도 있으며, 신학적일 수도 있고, 수사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뜨개질하듯"("뜨개질"이라는 용어는 존 킬링거의 것이다), 텍스트와 콘
텍스트를, 말씀과 상황을, 신학과 세계를, 설교자와 회중을 촘촘하게 연결짓고자 노력해야 한다.
넷째, 필요하다면 말씀의 적용을 위한 예화를 적절하게 설교의 대지 속에 적절히 배열한다. 사람을 변
화시키는 계기는 말씀의 적용에서 온다. 예화는 설교의 포인트와 적절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진부한 예
화를 사용하기보다는 신선한 예화를 사용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화 사
용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성과 다양성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한 작업에 서론과 결론을 첨부한다. 서론은 성서 본문과 그것을 듣는 회중 사이에
어떤 공감대를 갖게 하거나, 기대감을 갖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설교의 결론은 설교를 들은 회
중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할 수 있는 매듭이 되어야 한다. 이 때 설교의 결론에 본문의 구체적 적용을
위한 예화를 사용할 수도 있다.
여섯째, 설교의 제목을 정한다. 설교의 제목은 지금까지 준비한 작업을 회중에게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는 표제어이어야 한다. 좋은 설교 제목이란 회중에게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다. 성서 본문의 어떤 구절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해서 제시할 수도 있고, 회중이 당면한 문제와 본문 사
이에 존재하는 어떤 적절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일곱째, 지금까지 준비한 설교 작업을 원고로 정리한다. 강해 설교의 원고는 구어체이어야 한다. 설교
는 귀를 위한 것이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의 스타일과 형식은 다양하다.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에 따라서 설교의 관점들도 달라
질 수 있다. 강해 설교가 유행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강해 설교자일 필요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타일의 설교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교자들은 모두 "표현 방법이 곧 메시지"라는 말을 새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표현 방식이 메시지의 효율성을 결정짓는데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떻게 전해야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는 설교의 윤곽에 따라서 판정날 수 있다. 이른바 "귀납법적 강해 설교"라는 것
을 우리가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납법적 강해 설교라는 말은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에스베리 신학교의 랄프 루이스(Ralph L.
Lewis)가 제일 먼저 한 말이다. 성경 강해는 엄밀히 말해서 연역법적이다. 성경 강해라는 말 자체가 성
서 본문이 오늘 우리 상황 속에 어떻게 "풀어지는지를" 줄기차게 관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회중의 상황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바로 성서 강해이다. 성서 강해는 원칙적으로 회중의
상황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결되는 방식보다는 말씀 자체의 컨텍스트(즉 본문의 배경이나
문맥, 본문의 정황) 등을 소개하면서 성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밟는다. 성경 강해라는 말 자체가 성경 본문에서 시작하여 상황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귀납법적 강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설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연역법적 전개보다는 귀납법적 전개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서 강해가 엄밀히 말해 연역적이지만, 그것
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는 귀납법적 전개라는 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보자는 것이다. 이 때 특별히 신
경을 쓰는 영역이 강해 설교의 서론을 귀납법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즉 설교의 서론이 회중이나 설
교자의 상황에서 시작하여 본문으로 연결되는 전개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설교와 설교를 듣는 회중
사이에 성서 본문에 대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다. 결코 설교의 방법론이 아니다. 설교의 성패(?)에서 중요
한 변수 역할을 하는 것은 설교자에 대한 신뢰이다. 설교의 방법론보다는 설교자의 인격이 설교의 성
패를 좌우한다. 설교는 설교자가 한다. 그렇기에 설교자의 신학은 설교의 형성에 자못 소중하다. 신학
이 깊으면 설교가 무르익는다. 웨슬리의 정신과 감리교 신학은 우리의 성서 강해와 강해 설교에 녹아
있어야 할 자양분인 것이다.
강해 설교의 한 예
"세속 속의 크리스챤"(삿 16:1-22; 롬 8:1-10)
(이 설교는 필자[감신대 왕대일 교수]가 1999년 9월 중부연회 일산지방 신광교회[이상윤 목사 시무]
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선포한 말씀의 전문이다)
1. 사사기라는 성경은 애굽 땅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어떻게 살
았는지를 전해주는 본문입니다.
가나안이라는 환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새로운 환경입니다. 애굽 땅에 비해서 약속과 도전과 시련
과 유혹이 있는 환경입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은 노예신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자유시민으로 살게 됩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않으면 숨을 크게 쉬지 못하는 억압을 당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것을 만들고, 자기 것을 세우고, 자기 것을 가꿔 가는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그만큼 가나안은 애굽에 비해서 약속과 도전이 있는 신천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은 시련과 유혹이 있는 환경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광야생활
과는 달리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시련과 유혹을 안겨주었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에 해당
되는 이웃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립니다. 이웃 주민들의 박해에 고생합니다. 농사짓는 땅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하나님보다는 가나안의 풍요 신을 섬기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가나안이라는 환경이 약속의 땅인 것은 사실이지만, 가나안에 살면서 이스라엘은 이처럼 여러 가지 안팎의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살면서 사사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사사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사사는 "목자"(나기드)라고 불리웁니다. "재판관"(쇼펫)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용사"(깁보르)라고도 불리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혔을 때, 목자로 일하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해서 시시비비를 바로 가를줄 알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전쟁터에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된 자들입니다.
사사는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줄 전혀 알지 못하는 신 세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줄을 알게 하는 선교사요 전도자였습니다. 단지 입으로만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 몸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공의를 실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삿 15:20). 부정한 것에 접촉해서는 안되고, 술을 입에 대서는
안되며, 삭도를 그 머리에 대서는 안되었던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사사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으로 자기의 경건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몸으로, 외관으로,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사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사회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들어서 이스라
엘을 구원하시는 도구롤 사용하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서 전사가 되게 하며, 구원자가 되게 하며, 재판관이 되게 하며, 지도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평범한 인간을 비범한 지도자로 변신케 합니다.
사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크리스챤을 위한 범례(패러다임)일 수
있습니다. 목자처럼 선하게 살고, 판관처럼 바르게 살고, 용사처럼 용감하게 살아야 되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를 가르쳐주는 패러다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에 붙들려서 자기 경건을 세우고,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6:1-22은 우리에게 친숙한 삼손 이야기 중 한 대목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본문의 줄거리가 아주 친숙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되는 말씀입니다. 첫째 단락은 1-3절입니다. 이 단락은 삼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도성인 "가사"에 내려갔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고자 삼손이 머물고 있는 집을 밤새 에워쌓습니다. 성문에도 매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매고 헤브론 앞선 꼭대기로" 올라가는 바람에 수포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1-3절은 이처럼 삼손의 막강한 힘을 증언하는 구절입니다. 아무도 삼손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삼손의 힘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길래 블레셋 사람들은 놀라기만 했습니다. 그랬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는 세상입니다. 신앙인이 서 있는 자리는 두 곳입니
다. 하나는 하나님 앞이라는 곳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신앙을 배웁니다. 경건을 익힙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힘있는 신앙인인 것을 진정 드러내는 공간은 하나님 앞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있는 신앙인인 것을 드러내는 자리는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신앙인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속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살아가는 자리는 거룩한 성소가
아닙니다. 성소에서, 성전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의 크리스챤이 아니라 세속 속의 크리스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또 다른 단락은 4-22절입니다. 이 단락은 첫째 단락과는 달리 무력해져 가는 삼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당했던 위기와 시련을 전하고 있습니다. 힘이 하늘에 닿았던 삼손이 참으로 무기력하게 쓰러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은 삼손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4-22절은 삼손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다 같은 세상인데, 환경은 다들바 없는데, 1-3절에서 삼손은 세상을 이기고 있습니다. 4-22절에서 삼손은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우린 세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속 속의 크리스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 신앙 때문에 박해가 있는, 그런 현장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는 이런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그같은 순교와 박해는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현장에는 유혹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습니다. 도전이 있습니다. 거짓이 있습니다. 유혹과 도전, 시련과 거짓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용감하게 살고자 원하지만,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은 우리를 선하게 보다는 악하게 만듭니다. 바르게 살기 보다는 요령껏 살게 만듭니다. 용감하게 살게 만들기 보다는 비굴하게 살게 만듭니다.
본문의 둘째 단락 삿 16:4-22이 바로 그것을 웅변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당했던 시련이
무엇입니까? 삼손이 왜 몰락하고 말았습니까?
3. 삿 14:4-22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였습니다"(삿 16:4). 여기 "사랑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브," 곧 육체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들릴라라는 여인을 육체적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빠진 것을 누구보다 먼저 블레셋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이 들릴라를 블
레셋 사람들이 매수합니다(삿 16: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
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
아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삿 16:5)."
이제 들릴라는 하나님의 사람 삼손을 넘어뜨리는 위험한 세력입니다. 이 들릴라가 본문에서 어떤 사
람으로 묘사되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들릴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닥치는 도전과 시련
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들릴라는 지금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5절).
주전 11세기 말 당시 블레셋은 다섯 개의 도성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서 블레셋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찾아와서 삼손의 큰 힘의 비밀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려주면 "우
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라고 제안했을 때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매수하
는 대가로 제시하는 금액은 은 오천 오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방백이 일천 일백씩 내게 되니
까 다섯 방백이면 은 오천 오백이 아닙니까?
은 오천 오백은 대단히 큰 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문에 돈의 가치를 알려주는 이름이 없다는 점
입니다. 세겔인지, 데나리온인지, 달란트인지,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은 오천 오백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한 마디로 이 돈의 액수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암묵적으로만 들려줍니다. 들릴라가 블레셋 방백들의 제안을 두말없이 받아 들인 것이 바로 그런 점을 시사합니다. 큰 돈을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주의,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돈이면 다"(Will to Money)라는 가치가
온 세상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배금주의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느새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의 문턱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물질주의적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선하게, 바르게, 용감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돈에 대해서 바른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돈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존 웨슬리의 가르
침을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벌어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저축하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베풀어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돈을 정성껏 저축하여 자기 부를 불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부를 온 사회에 베풀며 사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들릴라는 지금 성(性)을 무기로 삼손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유혹하는 과정을 읽어봅시다. 들릴라의 말은 자못 단도직입적입니다.
"...청컨대 당신이 큰 힘이 무엇을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코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 16:6)."
이 구절은 우리 말에서 가정법입니다.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입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이 말이 "어
떻게 하면 네가 묶여져서 괴로움을 당하게 될지를 내게 말하라"입니다. 아주 적극적입니다. 아주 섬뜩 합니다.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이 결박되어(수동태!) 박해를 당할 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말은 아주 당돌합니다. 무조건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 때문에 생기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유혹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라리 도전입니다. 이것은 결코 시험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선전포고입니다. 들릴라가 왜 이렇게 당돌합니까? 삼손이 자기에게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지금 마음으로는 들릴라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 삼손을 들릴라가 아예 뮥체적으로도 묶어 놓으려고 합니다. "네가 결박될 수 있느냐"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사르"는 '포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포로로 사로잡은 것으로 멈추지 않고 육체적인 사슬로도 묶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삼손을 이런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까?
성(性)입니다. 삼손은 지금의 성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여자를 밝히는 삼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삿 14:2; 16:1,4). 세상 사람들의 화두는 온통 성 이야기입니다. '비아그라'라는 약이 지금 장안의 화제가 아닙니까? 이 세상은 지금 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Will to Sex)!
성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것이 은밀하게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사사롭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성 문제가 심각한 것은 한 개인이 성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소가 온통 더렵혀진다고 하나님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성적으로 성결치 못하면, 하나님 신앙 공동체 전체가 다 부정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온통 성적인 이야기, 성적인 가치관, 성적인 광고, 성적인 상술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바르게, 선하게, 용감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이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식하
는 신앙이 우리를 성적인 유혹에서 지켜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들릴라는 지금 자기가 삼손보다 더 강해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본문 이야기의 서두에서 우리는 삼손보다 더 강한 자가 되어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블
레셋 방백들을 만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삿 16:5)."
삼손을 이기어서! 세상의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we may
overpower him!)입니다. 남보다 내가 더 강한 힘을 소유하는 것! (Will to Power)- 그것이 온통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더 많은 권력을 쥐려고 합니다. 더 많은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높은 자리
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권력이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목사들이 감투를 너무 좋아합니다. 우리 장
로님들이 세상에서 일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려고 하기보다는 교회의 장로직을 통해서 종교적인 감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권력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선하게, 바르게, 용감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권력지향적인 세상 가치관에 대처해야 합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높아지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막 9:34-35).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삿 16:4-22은 돈과 성과 힘으로 무장하려는 들릴라가 삼손을 아주 세차게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삼손이 들릴라를 속이면 속일수록 삼손을 유혹하는 들릴라의 도전이 거세어지고 있음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하는 소리를 추적해 봅시다.
첫 번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들릴라는 재차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
다"라고 말하면서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10절). 세 번째에 가서는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네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13절)라고 삼손을 다그칩니다. 네 번째에 가서는 "당신의 마음이 네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을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15절)라고 대들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말은 "점점 세게"(크레센도!)입니다. 똑같은 말은 세 번, 네 번 바꾸지 않고 말합니다. "무엇
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라는 소리가 거듭해서 들립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을 더 강하게 전달하고자 기교를 부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들릴라는 삼손을 죽을 지경까지 몰아갑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삿16:16)."
4. 삼손은 들릴라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오늘 본문에 소개된 삼손 이야기가 안타까운 것
은 삼손이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하나님께 결코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삼손
이 힘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실 때입니다(삿 13:25).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삿 14:6; 15:14)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었습니다. 삼손도 기도하였습니다(삿 15:18; 비교, 16:28). 그런데 오늘 유독 오늘 본문에만,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빠지고 없습니다. 삼손은 지금 세속의 유혹 앞에 완전 무방비 상태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이 떠날 때 하나님의 사람은 완전히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유혹 속의 삼손! 이 유혹 앞에 삼손은 점점 더 자신의 본질을 노출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마르지 않
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고 대꾸하였습니다(7절). 그
다음에는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1절)고 대꾸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13b절)고 대꾸하게 됩니다.
삼손의 고백이 점점 핵심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점점 세게 대들자, 삼손이 점점 약하게 물러서는 형국입니다. 삼손의 고백이 굵은 줄에서 가는 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몸에서 머리로 이동해 가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끈질기게 삼손을 괴롭히자 마침내 자기 비밀을 말하고야 맙니다.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
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
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17)."
삼손이란 이름은 "태양"(쉐메쉬)에서 왔습니다. 말 그대로 "태양의 아들"이거나 "빛의 아들"입니다. 드
릴라라는 이름은 "약한, 힘없는, 허약한"(달)에서 왔습니다. 삼손에게서 우리는 빛의 아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삼손 이야기에서 빛의 아들인 하나님의 사람이 참으로 무기력하게 세속의 유혹 속에 빠져서 침몰하고 있는 것을 지켜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리 힘있는 자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힘없고, 허약한 것의 꾐에
빠져 비참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머리를 모두 민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16:19은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만을 밀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삼손이 힘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머리털 일곱 가닥!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만을 밀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자기 힘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첫째, 머리털 일곱 가닥이란 아주 작은 수치입니다. 아침 세수할 때 빠지는 머리가 이보다 훨씬 많습
니다. 실패는 지극히 작은 데서 출발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 답게 사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일곱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쉐바"입니다. 곱 가닥이란 삼손이 맹세한 것을 암시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삭도로 삼손의 맹세를 뭉개 버렸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눈알이 뽑혔습니다. 빛의 아들이 암흑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삼손의 실패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삼손은 자기 힘에 취해 있다가 이것을 잃어버렸습
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엡 4:22-24).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여러분의 세상살이에서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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