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2. 28. 10:49



                       

예레미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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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만큼 난해한 선지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도 그렇지만 그의 예언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고 해석해야 하는 목회자에겐 참으로 난감한 선지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예레미야서가 예언만이 아니라

여러 문학적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연대기적 배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연대를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지서에 연대가 무슨 의미이냐고 말이지요.

언뜻 생각해 보면 타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선지서에 대한 제일의 해석은 여전히 “삶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지서를 언제나 미래적 관점에서만 파악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서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미래적 관점이나 적용은 그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정황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여전히 놓칠 수 없는 작업입니다.

이래저래 예레미야서는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삼십년 전쯤, 청년부를 처음 지도하면서 강론했던 성경이 예레미야서입니다.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지요.

이제 갓 신학수업을 시작한 왕초보 전도사가 청년부를 지도한답시고 택한 것이 선지서였습니다.

그 때는 철저하게 선지서를 미래적 관점에서 해석하던 근시안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은혜 받고 선지자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청년들이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본의 아니게 예레미야서는 제 손에서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겁 없는 전도사의 무식한 도전이었지요.

부임하면서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성경 본문을 갖고 성경공부 하겠느냐고 말이지요.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공연히 물었던 것이지요.

묻지 않았더라면 그냥 편하게(?) 신약을 해도 될 일이었지요.

그랬더니 고민 충만한 한 청년이 선지서를 했으면 좋겠다고,

기왕이면 예레미야서를 갖고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청년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신학대학교의 커리큘럼을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상황이 어떤지 아실 것입니다.

신학 초년병인 제가 배우기도 전에 예레미야서를 강론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학교의 커리큠럼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신학대학교에서는 선지서를 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개요적 설명이나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요.

아는 선배 전도사님을 통해 신학대학원의 강의,

그것도 고학년의 학과목에 선지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저는 선지서, 그것도 예레미야서를 강론해야만 했습니다.

 

학교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예레미야서를 공부합니다.

중요한 것은 학교 공부가 아니라 토요일마다 강론해야 하는 청년부의 시간이었습니다.

강론을 위해 준비했던 예레미야서,

제 삶에 적용은 뒷전이고 청년들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준비합니다.

아쉽게도 넉 달 만에 전도사에서 잘렸습니다.

전도사가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한 사건이지요.

잘린 이유가 너무도 처절했습니다.

담임목사보다 신학 깊이가 더 있다고 청년들이 대놓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담임목사가 쪽 팔려서 안 되겠다고, 그러니 그만 두라고 말이지요.

 

그 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선지서를 전공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구약신학을 좋아하면서 특히 예레미야와 호세아에 반하여 읽고 또 읽으며 매료되어 갔습니다.

언제부턴가 예레미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그 예언의 세계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로 선지서는 꼭꼭 숨겨둔 제 보물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으며 그 마지막 말씀이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찬찬히 살펴봅니다.

아뿔사, 예레미야의 마지막 내용이 열왕기에도 등장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예전에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공부를 하면서,

선지서를 독학하면서 여러 책들을 참고하는 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요.

예레미야 학파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그의 진술을 문자로 기록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대표적 인물이 “바룩”일 것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최측근 인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의 수족과도 같은 인물이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와 같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사람일 수 있는 인물이지요.

 

예레미야를 싫어하는 인물이 꽤나 많음을 봅니다.

그는 평생을 눈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겠습니까?

어쩌면 그의 예언은 눈물로 쓴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제사장으로 태어나 제사장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평범한 삶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선지자로 소명을 받으며 그는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을 잘 못합니다.”

 

예레미야의 변명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지 않습니까?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변명입니다.

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확정적으로 소명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곧 “복(腹)중에서 너를 불렀다”는 말씀이지요.

생명이 잉태되는 그 순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찜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외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 드립니다.

선지자의 삶이 어떠함을 잘 아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쉽게 순응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분명 선지자의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시대를 읽습니다.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그 시대의 통치자를 보십시오.

그는 유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요시야였습니다.

선지자의 삶이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때를 잘 만났지 않습니까?

요시야가 통치하던 때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선지자들이 그래도 기를 펼 수 있는 최소한은 보장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러니 선지자로 부름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대는 잘 만났다고 볼 수 있지요.

 

너저분하게 깔려있던 우상들을 타파하고 성전중심의 개혁을 일으킵니다.

요시야의 신앙회복운동은 집요했습니다.

이제는 남의 땅이 된 사마리아로 올라가 그곳의 우상들도 깨뜨려버립니다.

거짓 제사장들을 살육하는 피의 숙청을 통해 유다는 거듭납니다.

허물어진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깨끗하게 정리합니다.

성전청결 작업을 통해 잃어버렸던 율법서의 말씀도 되찾습니다.

발견된 말씀을 읽으며 옷을 찢는 경건한 요시야를 보십시오.

그런 왕이 통치하는 시대라면 선지자도 할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예레미야는 제사장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는 놉 땅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놉 땅은 사울 왕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 일가가 거주하던 곳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예레미야는 아비아달 대제사장 가문의 혈통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름으로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의 사역을 행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역시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장 중심의 예배를 강화하는

요시야를 심정적으로 지지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눈물의 노래인 “애가”의 주인공이 요시야가 아닙니까?

요시야의 비극적 슬픔을 안타까워하면서 유다의 희망이 사라졌음을 슬퍼하는 노래가 아닙니까?

그 만큼 제사장 출신 예레미야는 요시야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 주시는 예언의 말씀들은 성전청결운동의 허점을 찔러댑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래 보았자 소용없다”는 식입니다.

모두가 잘 하고 있다고 칭찬이 자자한데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헛기침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이 지닌 한계를 말합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언제나 막히고 만다는 역사의 교훈을 지적합니다.

백성들의 동의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압에 굴한 것입니다.

대세를 따르자고 침묵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요시야의 개혁을 평가해 보십시오.

그의 종교개혁은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반의 성공이란 알고 보면 절반의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개혁은 성공입니까, 아니면 실패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요시야의 종개교혁에서 절반의 성공에 손을 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반의 실패에 손을 들었습니다.

쓴 소리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모두가 찬성할 때에 과감하게 반대를 말할 수 있는 논리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반대는 논리가 아니라 예언입니다.

예언의 특성은 그 말의 성취여부에 달렸습니다.

그 예언의 말이 이루어지면 참된 예언이 됩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짓된 예언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필이면 요시야의 시대에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새롭게 정화되고 수리되던 시대에 예언을 외칩니다.

그것도 성전파괴를 말이지요.

무너진 제단을 새롭게 다듬고 수리하며 보강하던 시대에 성전의 파괴를 외쳐보십시오.

신명기의 말씀을 낭독하며 회개의 눈물을 모두가 흘립니다.

새롭게 언약의 의미를 되새기며 말씀대로 살겠노라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외칩니다.

새 언약의 시대가 온다고 말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말씀이 아니라 마음의 비에 새겨진 말씀의 시대가 온다고 외칩니다.

모두가 예레미야에게 정신 나간 소리 한다고들 말합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안타까움 속에서 그의 예언은 묵살되고 맙니다.

그래도 요시야의 시절엔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죽음 이후, 새롭게 등장한 왕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맘에 들지 않는 예언을 외쳐대는 예레미야의 꼴이 보기 싫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그의 예언은 패배주의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 바벨론의 촌으로 가서 살라는 예언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번번이 묵살됩니다.

아예 반역자로 죽이려고 하는 살해의 위협도 받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집은 찢겨지고 불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3차에 걸친 포로와 유배로 말미암아 유다의 백성들 대다수는 바벨론 땅으로 내몰립니다.

그렇게 되자 비로소 예레미야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반기를 듭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총공격이 이루어집니다.

안타깝게도 이집트로의 망명을 택한 소수의 사람들이 예레미야와 바룩을 끌고 갑니다.

그의 예언 능력을 잘 알기에 붙잡아 간 것입니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원하지 않던 이집트의 땅에서 그의 삶을 마감합니다.

 

요시야와 예레미야, 동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은 전혀 달랐습니다.

요시야는 성전을 정화합니다.

청결하게 하고 대대적인 수리 작업을 펼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성전파괴를 외칩니다.

두 개의 태양이 하늘에 동시에 떠 있는 형국입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두 분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시대에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일꾼이 가능할까요?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보십시오.

획일화된 교회와 종교 지도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과연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은 누구입니까?

성전청결을 외친 요시야입니까?

아니면 성전파괴를 외친 예레미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