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파노라마/- 신약의 파노라마

지도로 보는 바울의 1차,2차,3차 전도여행

에반젤(복음) 2019. 5. 11. 23:47



 지도로 보는 바울의 1차,2차,3차 전도여행




 


바울의 1차 전도여행(13:2~14:28)

안디옥(출발지)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됨

실루기아

 

구브로섬의 살라미

 

구브로섬의 바보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 엘루마를 만남.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

박수 엘루마(바예수)는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다가 바울의 저주로 소경이 됨.

이를 본 총독이 믿음.

밤빌리아의 버가

마가 요한은 배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감.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게 됨을 설교함.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하라함.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음.

다음 안식일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임.

유대인이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을 변박하고 비방함.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며 믿음.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를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쫓아냄.

이고니온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음.

순종치 아니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함.

이방인, 유대인과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나 두 사도가 알고 도망함.

루스드라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고침.

이를 본 사람들이 바나바는 쓰스(제우스), 바울은 허메(헤르메스)라 하여 소와 화관을 가지고 제사하고자 하나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고 말려 제사를 못하게 함.

유대인들이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와서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침.

더베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음.

루스드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고

금식하며 저희를 주께 부탁함.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

 

안디옥

 


바울의 2차 전도여행(15:36~18:22)

안디옥

바나바는 요한을 택하여 구브로를 향하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출발함.

더베

 

루스드라

디모데를 만남.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

밤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봄.

사모드라게 섬 경유

 

네압볼리 항구

 

빌립보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함.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바울의 말을 청종함.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게 함.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축사함.

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들에게 끌고 감.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게 하고 옥에 가둠.

밤 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함.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짐.

간수가 자다가 깨어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나 바울이 소리를 질러 막음.

간수가 바울 앞에 부복하고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말하매 바울이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함.

바울이 간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주고 감옥에서 풀려남.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함.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고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가이사가 아닌 다른 임금 예수를 전한다고 고소함.

베뢰아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함.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함.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함.

아덴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을 저자(시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함.

에비구레오(에피쿠로스 학파)와 스도이고(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함.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함.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믿음.

고린도

이달리야에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함.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나 유대인들이 대적함.

거처를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세례 받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성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하심. 16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송사하나 갈리오가 상관치 않음.

겐그레아

머리를 깎음.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함.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않음.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바울의 3차 전도여행(18:23~21:15)

안디옥

 

갈라디아

 

브루기아

 

에베소

바울이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열 두 명의 제자를 만나 예수님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함.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함.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심.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악귀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니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함.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은 오만이나 되는 책을 모아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름.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아데미(아르테미스)여신의 은감실을 만드는 직공들과 소동을 일으켜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외치나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흩어지게 함.

드로아

 

마게도냐

 

드로아

안식 후 첫날 밤중까지 강론함.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삼층 누에서 ᄄᅠᆯ어져 죽으나 바울이 살림.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 함.

고스

 

로도

 

바다라

 

두로

제자들을 찾아 이레를 머뭄. 바닷가에서 무릎꿇어 기도하고 작별.

돌레마이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하루를 묵음.

가이사랴

전도자 빌립집사의 집에 유하는 중 아가보라하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주리라고 예언함.

예루살렘

 


 

1. 제1차 전도여행: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사울을 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②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③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④ 바울의 메세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여 때를 얻든지못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세지의 내용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2. 예루살렘 회의:

상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대 성공적이었으나, 유대주의적 신자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여행의 결과 보고를 하고, 일동이 하나님의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유대주의적인 어떤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주장하여 바울의 예수를믿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정면 도전했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분규와 논쟁이일어났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바울˙바나바,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이회집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며, 사도행전도 이 회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회의 결과는 기독교의 장래를 결정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의 중심적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여 유대주의적 입장을 부결함으로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라는 연설을 했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의문을 각 교회에 보내자는 야곱의 제의가 채택되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원칙이 승인되었으므로 야곱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 결의문을 이방인 교회에 주지시키는 역을 바나바˙바사바˙실라와 더불어 맡았다. 이것은 바울측의 승리였다. 원래 위의 네 가지 금지령(행 15:20=15:29)은 유대적 관습에서의 양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주장이 인정된 이상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위해 관대히 양보했다. 이렇게 그들은 상호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네 가지 금지령 중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계 2:14,고전 10:16-22에,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은 신약에 많이 있으니 논할 필요도 없고, 피를 먹지 말라는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기도하다. 피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XCodex Bezae〉에는 `목매어 죽인 것'이 없다).

 

3. 제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깊은 전도가 펼쳐진다.사도행전 16:1- 18:22에는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①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 이 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④ 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 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중추적인 연대이다.1905년 에밀 부르게XEmile Bourguet〉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XDelphi 碑文, 글라우디오 황제가 델피 시민에게 보낸 서신〉에 바울의 고린도 전도시 아가야 총독으로 있는 갈리오<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X滯在〉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제3차 전도여행:

제3차 전도는 제2차 전도여행의 연속이었다. 제2차 때 성령으로 금지되었던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 전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바울은 일찍부터 중심적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그 전도를 꾀하였으나, 이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년 간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바울은 약 3년동안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에서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은 곳은 없었다. 그는 이 동안 부근의 각 도시에까지 전도를 시도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골 4:13). 다른 여러 도시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를 보내 전도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아시아에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라고 기록했다.그러나 바울 자신은 줄곧 에베소에 머물러 전도에 전념했다고 여겨진다.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는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려" 있었다.한편, 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아" 실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사도행전 19:1 4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험악하게 되어 바울은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고린도에 가서 화해에힘쓴 일조차 있었다. 실로 "날마다…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개무량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건너갔을 때"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고린도에 보냈던 디도의 기쁜 보고를 받고 그는 비로소환희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고후 7:5-16). 아마 이때 일루리곤 지방에서의 전도를시도했을 것이다(롬 15:19,20,행 20:1-3). 이렇게 그는 완전히 화해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평화로운 3개월을 보냈다.

 

이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롬 15:1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되었다(롬 15:23). 전도에 지칠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더 서쪽인 로마와, 로마 이서(以西)의 나라에로 돌려졌다. 사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롬 15:18-29). 그리하여 이제 여러 해 전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라에 우선 로마 교회에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동시에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을 밝혔던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로마서이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일단 예루살렘에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서신이 보이듯이(고전 16장,고후8장,9장,롬15:25-28),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준비하여 이것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지참시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이와 같은 헌금으로 모교회와 이방인의 여러 교회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갖게 하여 굳은 결합을 유지시키려 했던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 대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4).빌립보에서는 누가가 일행에 참가한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행 20:5).

 

오랜 격심한 전도생활 때문에 지칠줄 모르는 바울도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육체에 가시'가 들은 병약한 몸이었다. 여하튼 이때 의사 누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에 이를 때까지누가는 항상 바울의 반려자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의 여행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비아 도로로사'(슬픔의 길)였다. 그도, 사람들도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말했다. 그가 도중에 들린 드로아˙밀레도˙두로˙가이사랴 등의 각지에서 형제들과의 작별은 모두 눈물이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에베소의 장로들과의 작별장면을 이를 데 없이 애절하였다. 신약성경 중 이 기사만큼 페이쏘스(pathos)에 풍부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행 20:17-38)

 

5.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오순절 전날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도는 이 명절 때문에 각처에서 모여들은 유대인으로 붐볐다.

 

그 중에는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고 그에게 적의를 품은 극단적인 반바울주의자들도 섞여 있었다. 팔레스틴 이외의 곳에서 로마 관헌의 제지로 바울 살해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의 천부장이 달려와서 바울을붙잡아 안토니아의 영문으로 끌어갔으므로 간신히 무사하게 되었다.누가는 당시의 사정과 그에 뒤따른 그에 대한 신문과 그의 변명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행 21:27-23:10).

 

유대인들 사이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까지 맹세한 일단의 혈맹단(血盟團)까지 조직되어 바울의 신변에위험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어로마의 총독 벨렉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벨렉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그의 후임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두 사람이 다 신속한 처리를하지 않고 바울을 2년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두었으므로 그는 분연히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리하여 그는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하에 로마로 가게 되었다.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에의 항해에는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도 동행했는데, 이 항해에대해서는 사도행전 27장에 매우 자세하게, 또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항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하고 또 흥미진진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다한 곤란을 겪은 다음 바울 일행은 AD 60년 초봄 보디올에 도착, 거기서 주 안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이렇게 다년 간의 숙원을 이룰 수있었다고는 하나, 결박된 몸으로서 로마 입성이란 그도 감개무량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허락"되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재판의 날을 기다렸다. 로마에서는 많은사건이 산적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성소가 심의될 차례가 오기까지는 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다. 많은 동역자가 그에게 출입한 것은, 그때 집필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인명을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이때 있었던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빌립보서 1:12- 18에 의하면, 그 당시 바울은 더 적극적인 전도를 하여 비상한 성공을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바울이…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말을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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